딱지 뜯기 난 아직 어린앤가 봐 상처가 아물 때 더 조심하라지만 거의 다 아문 딱지를 또 뜯는다 다시 피가 흐르는 상처 흔적조차 없는 것처럼 아물어 버리는 일은 차라리 상처보다 더 아플 것 같아 흐르는 피를 보며 아직 곱게 피고 있는 장미를 생각한다 근접할 수 없는 거리를 위해 늘 긴장하고 있는 가시도 보인다 그래서 더 진해지는 향기인가 난 아직 어린앤가 봐 거의 다 아문 딱지를 오늘도 뜯는다 2008. 5.29
엄마의 앞치마 아침부터 엄마가 바쁘면 앞치마도 힘들다 엄마의 손에 묻은 물기만큼 함께 젖는다 앞치마에 그려진 선명하던 ‘참 소주’ 파란 병 종일 흔들리다보면 취하나 보다 어지럽게 구겨지는 걸 보면 분주한 종종걸음으로 하루 일을 마쳐야 앞치마를 벗어 건다 벽에 걸린 피곤이 뚝뚝 떨어져 내릴 무렵 참 소주병 아래 반듯하게 드러나는 글씨 “깨끗한 아침!” * 엄마도 앞치마도 비로소 꿈속으로 떠난다 그런 내일을 향하여 2008. 3. 11. * “깨끗한 아침!”은 참소주의 선전 문안
축산 항에서 동해의 거친 파도가 방파제에서 숨을 고른다 둘러앉은 아낙들 그을린 얼굴 재빠르게 손놀림하는 그물코에서 촘촘하게 걸린 햇살이 눈부시게 떨어지고 있다 바다를 싸안고 산으로 오르는 바람 비릿한 동해 냄새가 해송 거친 솔잎에 푸른색으로 물이 드는데 뿌-ㅇ 뿌-ㅇ 연신 출항을 알리는 어선들의 힘찬 숨소리 푸른 파도를 가르며 떠나가는 뱃전에 만선의 꿈들 오색 깃발로 휘날리고 있다. 2008. 6. 18. 영덕 풍력발전소 여기는 영덕읍 창포리 산 70번지 80m 거대한 철탑에 앉아 바람을 부르는 24개의 바람개비들 눈앞에 동해를 돌아온 바닷바람이 아이들처럼 마냥 신나게 바람개비를 타고 저 멀리 백두대간을 타고 내린 산바람이 솔향기 먹음은 채 바람개비를 탄다 바람개비 돌면 하늘도 어지러워 돌고 땅도 어지러워 돌아 여기는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곳 바람개비 돌때마다 뜨거운 사랑 일어나는지 년 간 9만 6680MWH의 불씨를 밤마다 영덕 사람 방문을 열고 들어와 환한 빛을 골고루 보내 주는 걸까 바람개비 밑에 서서 82m의 날개가 하늘을, 바다를, 땅을 돌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나도 모두를 돌리는 바람개비가 된다. 2008. 6. 18. 주문진에서 주문진 항이 비에 젖는다 만선을 알리던 뱃고동도 펄럭이던 오색 깃발도 먼 수평선으로 자욱한 물안개 파도도 잔잔하게 숨을 고른다 처마 끝으로 뜯는 비가 물가마를 띄워도 충남상회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커피 잔에 따끈하게 피어오르는 느릿한 웃음 마른 어물들은 예쁘게 포장되어 길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횟집 활어 통엔 동해바다처럼 살아 퍼덕이는 비늘들 추질추질 주문진에 비는 내려도 늘어 선 가게 안에는 안단테, 때로는 비바체 피아니시모, 때로는 포르테 살아가는 이들의 부르는 끝없는 합창이 어울려 넘치고 있다. 2008. 8. 26 낙엽 나무가 손을 놓고 있다 잎 떨어진 자리 하늘이 채워도 채우지 못하는지 바르르- 온몸으로 떨고 있다 낙엽 한 장으로 땅마저 저리 무거워 하는 건 만남보다 헤어진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까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했을까? 잿빛 하늘을 이고 나무가 마지막 손을 놓고 있다 가슴이 무너지고 있다 2008. 12. 3 낙엽 나무가 잡은 손을 놓쳤습니다. 나무 잎 하나 떨어지고 있습니다.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을 했는데 그 빈자리 하늘이 채워도 채우지 못하는지 바르르- 온몸으로 떨고 있습니다 언젠가 떨어져야 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리 감당 못하는 건 헤어진다는 건 아픔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요 헤어진다는 건 또 다른 만남이라지만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언제부터 준비했을까 무어라 말해 주었을까 나무가 마지막 손을 놓고 있습니다 하늘도 낙엽 따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2008. 12. 3 신발 길섶에 홀로 누운 신발 한 짝 어디 있을까 한 짝은 늘 같이 다녔잖아 짝 맞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잘 알면서 싸웠니? 삐졌니? 아니면 심술궂은 주인이 버렸니? 오래 오래 같이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헤어진다는 건 가슴 찡하면서 비는 일인데 밤 새 찾았을까 둘이는 서로를 잊은 채 모른 척 했을까 뽀얗게 서리 맞아 더 추워 보이는 길섶에 홀로 누운 신발 한 짝 2008. 12. 8 경주국립박물관 -성덕대왕 신종 앞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한 낱 종각 안에 눈요기로 앉아 경주시 인왕동 열린 벌 위로 기계가 들려주는 네 목소리 듣는 너는 얼마나 그리울까? 울창한 숲 그 사이를 지나 맑은 물소리 따라 계곡을 내려 새벽마다 서라벌을 깨우면 닫힌 귀 네 소리에 열리고 굳은 가슴 네 소리에 풀어져 동해를 보듬어 안고 돋아 온 햇살처럼 번지는 서라벌 사람들의 미소 신라인의 지혜와 정성과 희생이 녹아있기에 제 몸 부서져라 스스로를 매질하며 천년을 견디며 울려 온 네 목소리 너는 돌아가고 싶겠지 ‘국보 제29호’ 거창한 이름표를 떼어내고 박제된 이 자리 박차고 일어나 첫 자리 잡았던 봉덕사일까 물길에 떠내려 간 영묘사(靈妙寺)일까 하늘과 땅을 흔들며 포효하던 그 자리로 경주시 인왕동 경주국립박물관 한 쪽에서 제소리 내지 못하고 매달린 슬픈 네 눈빛을 만난다. 2008. 12. 10 가지치기 아버지가 전지가위로 과일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다 겨우내 함께 견뎌온 가지 쭉쭉 벋어 올라 꽃이 많으면 주렁주렁 열매도 많이 달릴 터인데 나무는 속절없이 그렇게 서 있고 땅에 떨어져 내린 가지는 햇살아래 어지럽게 누워 있다 땀을 흘리며 부지런한 손놀림 아버지는 하나도 아깝지 않은가 보다 흘낏 나를 돌아보시며 웃는 아버지 2009. 3. 24 손톱을 깎으며 손톱을 깎는다 톡 톡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는 손톱 이상하다 손에 가시래기* 만 일어도 몹시 아픈데 내 몸의 일부를 잘라내도 아프지 않다니 떨어져 나가려면 차라리 아프기라도 하지 그렇지 않으려면 자라지나 말지 잊을 만하면 알 듯 모르는 듯 그렇게 다가와 두 눈 바짝 뜨고 깎아야 하는, 손톱은 깎아도 깎아도 남는다 뿌리 안에 도사리고 앉은 낮달 같은 미소 떨어져 나가는 기억들을 일일이 주워 모으며 손톱을 깎는다. 2009. 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