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빛마당 2010. 7. 5. 13:06

 

* 이 원고는 '오늘의 동시문학' (2009년겨울호 )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이 원고 내용에 2010년 봄호에는 신지영 님이 반론을 재기 했고 다시 2010년 여름호에 이 반론에 다시 반론을 재기하여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토론의 장을 열었던 원고임을 밝혀 둡니다.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김재수

1. 들어가면서


 흔히 요즘을 정보화 시대라 한다. 이는 컴퓨터의 출현과 인터넷이 서로 연결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쓸모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지식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 이와 발맞추어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계된 새로운 용어들도 매일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말로 바꾸는 걸림 작용을 거치지 않고 외래어나 신조어 그대로 사용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보화 사회에서 왕따가 될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상에 활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언어들 가운데 컴퓨터를 활용하기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와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들이 나타나 우리를 황당하게 하고 있는데 흔히 이를 컴퓨터․채팅언어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에 비해 아직은 언어(言語)라기보다 은어(隱語)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어들이 컴퓨터나 채팅에서는 이미 언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관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은어 가운데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생산되고 있는데 인터넷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는 통신회사(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하이텔 등)에서 제공하는 채팅방을 통해 리얼타임으로의 나타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에서부터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음성채팅, 한걸음 나아가 영상채팅까지 가능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채팅을 위해서는 워딩 작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워딩 작업은 채팅자의 능력에 따라 속도의 차이가 현저하고, 지금처럼 인터넷 전용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화선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전송속도가 한계가 있어, 장시간의 채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시간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점차 채팅을 즐기는 동호인들은 자신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긴 단어를 함축하여 생략하거나 특수한 기호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채팅자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던 채팅용어는 어느 사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고,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사회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도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언어의 역사성이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언어는 사용하는 시대의 문화에 따라 살아남기도 하고 죽어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 옳고 그럼을 떠나 한번 쯤 관심을 가지는 일도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터넷상의 대화 언어 중, 시로서 차용이 가능한 기호 언어를 살펴봄으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 우리 시단이나 해외에서는 실험정신이 강한 이들이 숫자나 기호를 이용해 시를 쓴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아동문학에서는 ‘아동문학’이라는 특성과 한계가 바른 언어사용에 대해 효용성이나 교육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환영받지 못했거니와 ‘채팅’이란 용어가 주는 어감이 아직은 부정적인  까닭에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예는 드물었다고 본다. 다만 낱말의 크기, 형태, 배치의 방법, 글자의 방향을 변경 등 문자가 자리할 지면이라는 평면 환경에 변화를 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 하려는 경우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해 왔음은 사실이다.

 “그 누가 새 붓을 잡아 강물 위에 저렇게 새을(乙)자를 썼나??”

 이 시는 고려시대 문장가인 정지상이 어린 시절에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강물에 헤엄을 치는 물오리들을 보면서 한자의 ‘乙’자를 연상했으니 가히 동심의 눈으로 포착한 기막힌 발상이 아닌가?

이 외에도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3’이라는 아라비아 숫자와 같다”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르나르라는 시인의 관찰력도 그리고 개미와 ‘3’이라는 숫자와 관계 지음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천재시인 이상도 일찍이 이러한 시도를 했지 않았던가?

 시는 감동의 형상화를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적 감동을 이미지 화 해야 시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총 동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결국은 시각적인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문자보다 형상화 된 기호를 사용함으로서 이미지의 포착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2. 인터넷 채팅 언어들의 종류

 우리가 일반적으로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에 대해 채팅언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채팅언어에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포함되어 있다. 즉, 채팅언어와 채팅문자를 하나로 묶어 채팅용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채팅용어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조아(좋아)' '만타(많다)' '어뜨케(어떻게)' '추카추카(축하축하)' 등 소리 나는 대로 쓰기이다.

 

 둘째,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의 단순 줄임이나 음절 축약의 경우이다.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 방장:대화방의 대장, 안냐세요: 안녕하세요

 비번:비밀번호, 낼:내일, 몰팅:몰래하는 채팅, 야녀:야한여자, 번개off-line:깜짝 만남

 

 셋째, 현재 컴퓨터상에 사용되는 각종 이모티콘(emoticon)이나 기호를 하나의 언어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컴퓨터의 자판에 나와 있는 기호들을 조합함으로 새로운 느낌의 기호를 만든 경우이다.

 ^^ = 미소, *^^*, ^_^, ^.^ = 스마일, 웃음,  :-), :-(  :<,  :( = 심술, 토라짐,  ^.~ = 윙크,  ^^; = 멋쩍은 웃음),  :-( = 찌푸린 얼굴 {^ = ⃔웃는 옆모습, ﹀-﹀= 심각함

T_T, !_! = 우는 모습, \./ = 성남, 화남, @.@, #.# = 놀람,  8-) = 안경잡이

-"-, --+ = 노려봄, --; = 땀흘림,  :( = 오른쪽에서 보면 찡그린 얼굴

:)= 오른쪽에서 보면 웃는 얼굴, ㄱ-- = 절망,  ^^q = 머리 긁기, ^________^ 입 크게 벌린 것

 

 넷째, 숫자나 문자를 통한 약어이다.

 20000 = 이만 안녕, 2929 = 에구에구, 1919 =아이구아이구 ㄳ = 감사,  ㄴㄴ = 노노, 아니에요, ㅂㅂ =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ㅅㄱ = 수고 하세요, ㅇㄷ? = 어디?, ㅋㅋ, ㅎㅎ = 웃을 때 등

 

 다섯째, 컴퓨터에 내장된 자료에 의한 문자표나 아이소타이프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전화, ✉=편지, ☜=이쪽으로, ☆=별, ☾=달, ☼=해 # =기분이 오르다, ⁂=눈 내림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법하다. 왜냐하면 필자가 발견하지 못한 내용도 많을 것 같고 앞으로 더 새로운 내용들이 만들어지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내용들만 살펴 동시에서 사용가능한 언어로 살펴보고자 한다.

 

3. 여러 가지 기호언어들


 :-), :-(  :<,  :( = 심술, 토라짐

 ^.~ : 윙크

 ^^ : 미소

-"-, --+ : 노려봄

# =기분이 오르다

*^^*, ^_^, ^.^ : 스마일, 웃음

:( : 오른쪽에서 보면 찡그린 얼굴

:)= 오른쪽에서 보면 웃는 얼굴

--; : 땀흘림

@.@, #.#, #_# ,@_@ : 놀람 

\./ = 성남, 화남,

^^ : 미소

^^q : 머리 긁기

^________^ : 입 크게 벌린 것

-_- : 시큰둥한 표정

+_+, =_+ : 귀여워

=_= :괴롭다

>*< : 에그머니나

1919 : 아이구아이구

20000 : 이만

2929 : 에구에구

50쇼 : 어서 오십시오

8-) : 안경잡이

-ㅅ- : 황당하다

BF : Best Friend. 좋은 친구

DB : 담배

GG : 좋은 게임. good game 의 약자

IBM : 이미 버린 몸

KIN : 즐(세워서 보면 한글 ‘즐’)

OTL : 좌절.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모습의 상형자.

P방 : 피시방

RG : 알지?

T_T, !_! : 우는 모습,

☜=이쪽으로

⁂=눈 내림

☆=별

☎=전화

☼=해

☾=달

✉=편지

ㄱ- : 절망

ㄱ-- : 절망

ㄱㅅ : 감사

감4 : 감사

근D : 그런데

ㄳ : 감사 

ㄴㄴ : 노노.,아니에요

ㅂㅂ :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ㅂㅂ,ㅂ2-잘가, 빠이빠이

ㅂㅅ : 병신

밥5 : 바보

ㅅㄱ = 수고 하세요,

ㅆㅂ : 씨발 (또는 ㅅㅂ)

ㅇ,ㅇ : 긍정적

ㅇㄷ? : 어디 위치를 뭇는 거

ㅗ : 엿 이라는 뜻 ㅋ 욕할 때

ㅜㅜ ,ㅠㅠ : 그냥 우는 거, 슬플 때

ㅜㅜ : 절망

ㅜㅡㅜ : 왠지 귀엽게 우는 표정

ㅉㅉ : 쯧쯧

ㅊㅋ : 축하

ㅋㅋ, ㅎㅎ : 웃을 때

ㅎ2 : 안녕

ㅎ2 : 하이 의 숫자와 한글 조합한 거

ㅎㄷㄷ : 후덜덜 무서울 때..

ㅎㅎ : 호호, 후후, 허허, 히히


4. 기호 언어로 쓴 동시


 필자는 동시를 쓰면서 이미지의 선명함을 위해 문자나 기호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다음 두 편의 시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다.


             목련

                   

        새들이 수다를 떨어

        아침을 열고 간

        담장


        무슨 소릴 하고 갔기에

        그랬을까?


        밤새 

        퉁퉁 부은 눈망울로

        입 다물던 꽃가지마다


        참다 참다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하,하,하,하,하,

        하, 하,

        하,하,하,

        

        하,하, 하,하, 하,하,하


목련꽃의 모습을 ‘하’라는 웃음과 ‘하얗다’라는 꽃이 주는 색의 이미지와 점점 많이 피어나는 꽃송이를 ‘하’라는 문자로 이미지화 한 경우이다.


        눈 오는 날

         

이메일을 열었다

깜박이는 커서가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창밖을 보며

키보드를 친다

톡톡

톡톡톡

자판으로

네 마음을 두드린다

.       .

.. ...

...

.... ....

......  .... 

까만 역상의 화면에

하얀 글씨가

소복소복 쌓인다.


 위의 경우는 까만 하늘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형상화 해 본 것인데 컴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해서 그 효과는 좀 그렇다.

 위 두 편을 쓴 이후 보다 효과적으로 시각화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상주의 방언’을 연구하면서 ‘사회적 방언’에 눈길이 갔고 이 사회적 방언에서 요즘 유행하는 은어(隱語)를 정리하던 중 컴퓨터 대화 언어를 발견하였다.


 다음 작품은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 의도적으로 쓴 시이다.

호박꽃

                     

“너도 꽃이니?”

빨간 홍초가 놀려도


“ ^^ ”


“색깔도 촌스러워라”

장미가 빈정거려도


“ ^^~ "


“ 이 정도는 돼야지 ”

다알리아가 뽐내도


“ ^*^ ”

환하게 웃으며 꽃등만 달더니


“ ^^, ^^~, ^*^ ”


웃음만큼 조롱조롱 번지는

토담 위 호박꽃.




도토리(1)


떼구르르-

내 앞에 와서 멈춘다.


허리를 굽혀 주우려는데

누가 보는 것 같다


데록데록

오물오물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 ^*^  ”

“ ~^@^~ ”


못 본채 돌아서서

걸었다.


“ ~^@^~


안 봐도 보인다.

오물오물

좋아 하는 거.




도토리(2)


“톡-”

도토리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쉿!

나무도 풀도 갑자기 숨을 멈춘다.

바람도 잠시 멈춰 섰다.

땅이 천천히 팔을 벌리고

앉아 쉬기 편하도록

자리를 펴고 있었다.

☞ ◉ ☜

편안해 보였다.




온 몸이 자꾸

간지러웠다.


어디 뾰루지라도 나려나


† ‡

@*@, #*# ...

여린 싹이 흙을 뚫고 나왔네


땅이 갈라지느라고

그랬나 보구나


풀과 나무 잎에도

총총

이슬이 맺혔다

--;


1919

힘들었나보구나.




전화 


~~~

~~~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 목소리가 달려간다.


금방

네 목소리도 달려온다.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보인다.


^*^ ?

>*< ?

=_= ?


내 얼굴도 보일까봐

^*^

ㅋ ㅋ ㅋ



가을걷이


손바닥 만 한

텃밭에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

타작을 하신다.

“나 여기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요.”

들깨도 콩도

깍지에서 튀어 나온다.

...˚․˚.

. ... .

.. .. ..

깨알은 쓸어 모아

✉,

○○○  ○

○○ ○○○

까만 콩도 쓸어 모아

✉✉✉

봉지는 달라도

두 분은 마주보며

~^*^, ^*^~



맺는 말

 시도한다는 건 조금은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은어들이 현실 생활에서 이미 생활언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호로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말은 이 언어들이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역사를 볼 때 생명력을 가진 언어는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죽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향유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 사회적으로 확산 될 때 생명을 가지는 것처럼.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이러한 은어들이 새로운 언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써 온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 이 글은 신지영 동시인이 '오늘의 동시문학' 2010년 봄호에 위 글에 대한 '반론 토론'으로 제시한 글입니다.

 

토론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에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

-김재수 시인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를 읽고

신지영(동시인)


들어가며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에 실린 김재수 시인(이하 경칭 생략)의 기고문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에서 제기된, 문자 기호 이외의 기호를 사용하는 문제는, 동시 표현 방법의 외연 확대에 관한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화두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동시 쓰기의 방법 모색은,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는 시인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 모색에 앞서 염두해야 할 점은 외연을 넓히는 실험에 있어서 그것이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숙고라 할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에 도태되지 않는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그 장르의 내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 이상 그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된다.

 김재수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기로 언어’라고 표현한 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다섯 가지 분류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로 제시된 ‘조아(좋아)’, ‘만타(많다)’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연철(連綴)이나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두 번째 제시된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과 같은 줄임의 말의 경우는 특정 언어 사용 집단의 은어(隱語)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는 그 본질이 언어적 문자기호로서, 비언어적 기호와는 그 차이를 달리하는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활용 여부 역시 시적 허용 범주 하에 기성 시단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어, 어떤 새로운 양식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특별히 논의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으며, 김재수 역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제시한 아이소타이프(Isotype)는 그 본질상 이모티콘과 동일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비언어적 시각기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동일하게 평가하면 될 것이다.

 이하 본 글에서는 첫 번째로, 문맥상,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혼돈을 줄 수 있는 ‘기호’라는 개념에 대해 우선적으로 통일 된 정의를 내린 다음 음성 기호의 시각적 변환인 언어적 문자 기호와 비언어적 감성 기호로서의 이모티콘을 구분하기로 하며, 그 후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한글 자음으로만 구성된 초성조합이 허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나아가 동시가 아닌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 단계에서 그러한 비언어적 기호들의 사용 여부와, 보론(補論)으로 아동문학과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것들이, 동시에 있어 허용 가능하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를 펼쳐나갈 것이다.


1.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

  (1) 기호의 정의와 용어의 통일

 기호는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음성, 표정, 몸짓, 문자, 그림, 음악, 이모티콘 등 지식, 의지,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일체가 기호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모든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기호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적 기호, 비언어적 기호를 모두 포함하지만, 김재수의 기고문에서 세 번째로 제시된‘기호언어’의 의미는 문맥상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의 논의에서 필요한, ‘기호 언어’라고 제시된 것 중 세 번째 위치하는 이모티콘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정의하는 대로 비언어적 시각 및 감성 기호로 표기하기로 한다.


 (2) 이모티콘의 정의

 이모티콘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대중문화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접목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모티콘(Emoticon:emotion과 icon의 합성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 합성어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 기호인 동시에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는 발신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감성 기호로서 인터넷 채팅이나 휴대전화 문자 발신 시에 그 의미 작용과 역할을 수행한다.1)


2.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여부

 아동문학이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부착하고 있는 이상, 그것 역시 국문학의 하위 범주에 포함된다. 국문학이라 함은‘한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여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예술 작품’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문학의 정의를 기호학적으로 접근할 때 의미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여’라는 부분이다. 한국어란, 음성 기호이자 언어기호로서 우리 겨레가 쓰고 있는 구체적인 말을 의미하며, 음성 기호를 기록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세종이 창제하여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문자 기호이자 언어 기로호서의 한글을 포함한다.(단 국문학의 범주에는 한글이 범용되기 이전의 향찰, 이두, 한문도 포함하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구비 전승되는 시가(詩歌), 전설(傳說)이 아닌 이상에야 국문학은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하며, 마찬가지로 아동문학 역시 한글로 된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한다(단 전체적으로 한국어로 씌어졌다고 볼 만한 분량의 작품에서 음성으로 전환될 될 수 있는 소량의 외국어, 아라비아 숫자 등은 사용되어도 국문학으로 본다.) 이제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와 비언어 기로호서의 이모티콘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한글의 음소문자로서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동시에 있어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 여부

 국문학상의 시의 정의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을 의미한다. 또한 국문학상에서 동시의 정의는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를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볼 수 있듯 동시 역시 어니이의 정서를 읊음과 동시에 ‘시’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시의 조건을 그대로 충족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시 역시 시가 가져야 될 핵심 징표인 ‘gkaa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라 무엇이가? 운율이란 ‘시문(詩文)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고 정의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 유음의 반복 등 운율을 의미하는 것의 필수적인 선행조건은 바로 문자 기호의 소리 기호로의 전환, 즉 한국어의 음성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동시 또는 시에서 독음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운율을 가질 수 없는 기호로서,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함축적 언어’라는 부차적 시의 징표에서도, ‘언어’라는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는 시의 구성 요소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시의 본령이라고 볼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 그러므로 이코티콘은 감정 전달이나, 이미지 전달에 있어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보다 어느 측면에선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라는 장르의 한계 밖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운율을 가질 수 없는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근거를 우리는 가질 수가 없다. 이는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실험이, 오히려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


  (2)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동시 역시 국문학이고 입말문학(口碑文學)이 아닌 기록된 형태의 문학이기 때문에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기호로 기술된다. 또한 동시는 대체적으로 아동이 시초부터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시는 예술적 완성도와 함께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특수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는 표음문자이고,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이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 체계에서 음소들은 자음과 모음으로 나뉜다. 문자의 발전사를 살펴 볼 대, 초기의 음소문자 체계는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자음만으로 이뤄졌고 그 사용에 있어 매우 불편하였다. 예컨대 ‘ㅂ ㅂ’이라는 표기를 접했을 때, 김재수는 ‘ㅂ ㅂ’을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를 ‘바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듯이, 불안전하고 그 발음에 혼란을 가져오는 기호 체계였다. 그런 후에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고, 문자가 발전함에 따라 모음문자가 나타나게 되며, 각 문화권의 음소에 적절히 추가되었고, 그러한 추가가 완성된 후 페니키아 문자를 비롯한 각종 알파벳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글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음소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규칙적으로 조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알파벳이 처음부터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창제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지금의 문자 구성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church'같은 모음 하나에 자음이 다섯 개인 1음절의 소리는 알파벳의 성질로부터 어떠한 발음 규칙을 추측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알파벳 사용자들은 모음과 결합하지 않은 새로운 신조어가 나왔을 경우, 그 발음은 누군가가 정의해 주기 전까지 통일된 발음을 이끌어 낼 수 없는 원시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창제한 한글만큼은 이런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서 어떤 자음이든지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듯이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규정한 최초의 문자 체계이다. 세종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발음은 중성 모음 단독, 초성 자음, 중성모음, 종성 모음의 4가지 조합으로 가능하며, 그 조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조합의 배열에 숙련된 경우, 한글 사용자는 한글로 구성된 어떠한 배열이 나와도 그것을 동일하게 읽고, 발음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글이 매우 진보된 문자 체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글에서는 ‘church'를’ ‘ㅊ ㅓ ㄹ ㅊ’라고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한글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자는 ‘처치’라고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다. 이러한 탁월한 언어학적 성취는 한글이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선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글 제자 원리로 자음과 모음의 조형을 접하고, 그 조형에 따른 음성 기로호서 한국어 발음으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동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시에서는 그 내용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목표로서, 어린이의 국어 능력 소양의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이 필요한 바, 국어사용 능력이 완전하지 못한 어린이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의 의미 전달 기호는 올바른 의미의 한글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일정 정도의 국어 능력을 갖추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올바른 국어 생활을 위해서는 한글의 적확(的確)한 사용과 그 사용례를 가르치는 것이 아동문학의 목표 중 하나인 것이다.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이다’ 라는 유종호의 선언처럼, 동시인 역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은 모국어의 정련일 것이다.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시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는 음소의 단독 사용은 장려받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3. 컴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어린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범주는 매우 다양하다. 언어 기호로서 음성 기호와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문학뿐 아니라 몸짓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극과 무용, 문자 기호와 회화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 그림책, 음악 기호와 소리 기호의 결합인 동요 등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사용될 수 있는 기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범주 안에서는 모든 종류의 기호가사용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모티콘이라는 시각 감성 기호 역시 아동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의사 전달 수다으로 사용될 수 잇다. 예를 들어 한글을 모르는 외국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바디랭귀지와 같은 몸짓 기호나,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지만, 그 외의 커뮤니케이션의영역에서는 김재수의 제언처럼 의사 전달의 측면에서 강력하게 활용될 소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연구하는 것 역시 아동문학인으로서 역할 중 하나라 할 것이고, 그러한 새로운 양식의 개척이 곧 아동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모티콘은 다른 문자 기호나 시각 기호에 비하여 감성 표현의 측면에서 강하지만,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기호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감정표현의 명확성, 메시지 이해의 편자, 메시지 내용 전달의 효용성 등 보완점이 필요하다.2)


본론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김재수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아동문학에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는 이미 이러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해체(Deconstruction)란 프랑스의 쟈크 데리다가 주도한 비평 방법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적이며 로고스적인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와 실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시도했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뮈토스와 로고스를 엄격히 구별하는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이 문학적인 것에 집요하게 반대 해온 투쟁의 종말이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이 작업을 통해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특정한 분야의 전문적인 텍스트마저도 시적이며 창조적으로 변형시킴으로서 무한한 자유놀이를 하는 텍스트로 번안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3)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김준오가 1992년 펴낸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작품으로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시의 어느 날’ 같은 것이 있다. 이 시(?)는 작품의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 만평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았다. 언어 기호가 아닌 시각 기호로서 회화 기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시의 개념 징표로서 필요한 ‘운율을 가진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시라 불러야 할지에 대해 논의가 있으나 필자는 이 작품을 시라고 부르기 보다는 행위 예술적 측면에서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작품의 행위자 황지우 본인의 표현대로, 황지우의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4)는 것처럼. ‘말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음성 기호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말을 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것은 곧 시의 조재 증명인 운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황지우의 행위 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고, 그것이 시가 아닌 해체시라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황지우의 이 행위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떠나, 이 행위는 이미 시의 범주를 넘어선 새로운 양식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전통적인 시를 읽는 독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해체시 역시 시의 한 갈래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바, 이러한 견해를 다를 때, 과연 동시에서도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사용하여, 해체 동시(?) 라는 양식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가상적 논의 역시 한번쯤은 필요할 것이다. Deconstruction, 즉 해체라는 것은 Construction, 즉 건축한 것을 제거하는(De-)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체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시에 있어 해체 동시가 필요하다면,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동시의 개념 징표에서와 같이, 동시는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한 시이다. 그러므로 시인 자체는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인 어린이는 아직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시의 역할은 시에 대한 이해태도를 갖추기 위한 구축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문학에서의 해체 동시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나오며

 급속도로 변화되는 현대에서 모든 예술은 시대의 정보와 유연성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며 동시대를 비평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융합된다. 예술은 고유한 가치인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켜내며 지나간 시대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천성 때문일 것이다. 고루해지지 않으려는 본능, 상투적인 인습과 제도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자유로움, 결코 시대를 변명하지 않는 자존감 등은 예술이 자신을 지켜내는 독자적인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발현할 때 한 가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장르의 틀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을 버리고 다른 대상의 이름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새로움에 목말라 자칫 잊기 쉬운 이 기본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 아래 글은 동시인 신지영씨의 토론에 다시 반론으로 쓴 글입니다.

 

 

동시에서 기호언어 사용과 해체시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를 읽고

김재수

들어가면서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28호 p110~p123)에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바 있다. 이 글을 기고하면서 ‘채팅용어’가 사회적으로 아직은 긍정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상태이고 이런 용어들로부터 만들어진 기호언어들이 아직 은어(隱語) 수준이며 더구나 아동문학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어들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어른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동문학에서 이러한 기호언어의 사용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냐에 대해서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이러함에도 이 글을 편집자와 의논하여 기고하게 된 까닭은 이를 계기로 그동안 우리 아동문학계에 뜸했던 토론의 장이 열릴 것 같고 동시가 보다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 글이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도 등재되면서 온라인상에서 몇몇 분들이 격려와 우려의 댓글을 달아 관심을 가졌는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봄호(29호 p168~178)에 신지영 동시인이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가 토론의 주제로 게제 되어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러웠다.

  신지영 동시인(이하 경칭생략)은 매우 논리정연하게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를 시작으로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 여부’, 특히 ‘동시에 있어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여부’,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해 해박한 시론과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에 다소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기의 주장을 제시 하였다.

 하여, 필자의 의도와 다른 견해는 다시 설명하고 간혹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할  부분은 지적하여 오해를 바로 잡고자하며 편의상 신지영이 제시한 논의의 순서를 따라 이 글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1.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대하여

 신지영은 이 글의 서두에서 기호언어 사용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의 모색이라 해도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 여부를 고려해야 하고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면 그 작품은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됨을 우려하였다.

 우리나라 동시의 출발을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은 1908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으로 잡고, 2008년을 ‘한국동시100주년’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이로 보면 우리 동시의 역사는 이제 100년에 불과하다. 동시라는 이름표를 달고 본격 동시가 씌어 지기 전엔 전래동요가 유일했고, 1923년 소파가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여기에 ‘형제별’, ‘늙은 잠자리’를 발표하면서 동요가 창작되기 시작하였는데 1925년 이전까지는 주로 창가 형식의 동요가 대부분이었다가 1933년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가 나온 후 비로소 동시의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동시의 장르 문제는 전래동요 이후 요적(謠的) 동요, 시적(詩的) 동요라는 과도기적 형식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창작동요, 동요 시, 동시의 형태를 거쳐 오늘의 동시문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래동요, 창작동요, 동요시, 동시, 아동시가 장르적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왔다. 그러다가 이원수로부터 ‘동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시 된 1969년(이원수 아동문학전집 29권 동시작법 1969)을 전후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여러 아동문학가들-예컨대 이오덕, 이재철, 신현득, 김종상과 평론가 최지훈 등에 의해 정리되면서 최근에는 동요와 동시와 아동시를 각각의 장르로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동요는 최지훈에 의해 동요시와 동요가사로 나누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지영이 서두에서 동시의 장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마도 ‘기호언어를 사용한 동시쓰기’와 이를 바탕으로 쓴 6편의 동시가 자신의 동시라는 장르의 기준에 미흡했거나 모호했기에 서두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함에도 필자는 예의 5편 동시가 동시라는 장르적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탈 장르의 의미는 내 작품이 구체적으로 동시가 제시하는 장르적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신지영의 말대로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벗어났다면 내 작품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 이거나 동요라는 말이 된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생아적 작품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 기존의 언어와 다른 생소한 기호언어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시의 장르까지 벗어났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 아닐까 한다.


2.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모티콘)활용 여부

  신지영은 아동문학도 문학임에 국문학의 하위 범주이어야 하고 국문학의 정의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동시도 한국어 사용과 또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 즉 음성으로 전환 될 수 있어야 함에 역점을 두었다. 이 역점은 곧 동시가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야 함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비언어적 시각기호인 이모티콘이 사용될 수 있는지와 언어 기호의 성질은 갖고 있으나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폈다.

  

가. 비언어적 기호는 운율을 표현할 수 없는가?

 그는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란 무엇인가 묻고 ‘운율이란 시문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정의를 덧붙이면서 운율을 나타내려면 필수적 선행조건이 바로 문자 기호를 소리 기호로의 전환해야 함으로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는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에는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지영은 운율에서 음성언어만을 강조한 나머지 운율을 가져오게 하는 또 다른 요인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첫째, 과연 소리를 낼 수 없는 기호는 운율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인가?

 대부분의 문학작품(시와 산문을 포함해서)은 필수적으로 음성 언어 외에도 여러 가지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문장부호’이다. 문장부호는 분명히 음성으로 표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다. 그러나 비언어적 기호인 문장부호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시의 운율은 현저히 달라진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쉼표(,), 또는 느낌표(!), 줄임표(.....)가 시의 운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시인이라면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

 둘째, 시에서 운율을 이루는 요인에는 음성 언어 이외에도 또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행과 연이다. 행과 연은 시각기호도 언어기호도 아닌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운율의 공간이다. 마치 한국화의 여백이 감상자로 하여금 무한한 회화적 상상을 하게 하는 것처럼. 흔한 말로 자유시가 이용할 수 있는 운율의 원천은 기호소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성 방식, 소리와 낱말 및 어구, 행과 연의 체계적인 반복, 중간휴지(행의 중간에서 말의 흐름이 잠시 뚜렷하게 끊어지는 것), 행의 길이, 그 밖에 속도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지 단순히 음성 언어만으로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과 연도 없고(물론 산문시는 없을 수도 있다) 아무런 문장부호도 없는 동시를 마주한다면 갑자기 낯 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나. 동시의 동요로 전환 불가능에 대해

 그리고 그는 비언어적 기호는 동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모든 동시는 동요로 전환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동시가 동요로 전환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동시가 초기 동요로부터 파생된 것은 사실이나 동요가 반드시 동시의 본령으로 전환해야 된다고 말 할 수 없다. 더구나 오늘 날 동요와 동시는 성격이 분명히 다른 장르의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동시와 동요는 그 발상부터 다르며 운율 표현 형식도 같지 않다. 따라서 동시를 일부러 동요로 전환해야할 이유나 필요가 없고 본다. 물론 동시도 동요처럼 노래로 작곡이 되어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래로 불리는 동시가 반드시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노래로 불리지 않는 동요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다. 비언어적 기호와 회화기호에 대한 오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의 구성요소로 인정하게 된다면 회화기호로서 그림을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할 수 없어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가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자. 화가는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보편화 되었다. 그러나 시인, 특히 동시인이 한 장의 그림을 그려놓는다거나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로만 늘어놓고 이것이 동시라고 발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고 행여 있다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필자가 예를 들어 쓴 작품 속에 나타난 몇 개의 기호로 인해 이것은 시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오해 할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오늘의 동시문학’ 봄호(29호 p192~p193)에 권영상 동시인은 이 계절의 동시 평 ‘익숙한 방식의 틀을 버린 시들’에서 ‘어린이들이 당당한 네티즌이 되었고 네티즌들이 즐겨 쓰는 온라인 부호나 기호를 동시 속에 접목해 본 이런 시도들은 분명 동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권영상 동시인이 내 작품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서가 아니라 신지영이 불안해하는 내  시를 그는 한 장의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여전히 한편의 동시로 봐 주고 있다는  반가움 때문이다. 우리 지역의 예술인(문인, 화가)들에게 예의 시들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게 웬 그림이냐?’라고 질문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신지영의 견해는 기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3.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배치 허용 여부

 

  가. 동시는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장르인가

 신지영은 동시를 아동이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라 했다. 아울러 동시를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지영은 세대 차이로 보면 나보다 어린이들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은데 오히려 요즘의 어린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듯하다. 동시를 읽는 수준의 아이들에게 한글을 익힐 수단으로 동시를 읽힌다는 건 어딘가 맞지 않을 성 싶다. 요즘 어린이들은 대부분 조기교육 덕분(?)에 유아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늦은 경우라도 유치원에서는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셈하기까지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초등학교에서 기성 작가들이 쓴 동시를 읽고 낭송해야 할 정도이면 동시를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수준에도 걸맞지 않는다. 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살펴봐도 동시는 어린이의 정서와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표현 된 시를 자신의 정서에 맞게 느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한다고 했지 동시를 통해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이 되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나. 교육적 기능수행으로서의 동시

 그리고 동시를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 예를 들어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의 사용은 교육적 기능 수행에 역기능이라는 우려를 나타내었다.

 맞는 말이다.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다’라고 할 만큼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도 시를 쓸 때 외래어나 한자어를 삼가고 되도록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우리의 말을 찾는데 고심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 시와 달리 어린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야 하는 소재와 주제의 제약과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써야 하는 표현 언어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 어려운 말이나 이미지의 비약은 동시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는 교육적 기능 수행의 한 부분일 뿐 전부는 아니다. 자칫 지나친 동시의 효용성 강조는 도덕 교과서처럼 일상적인 언어만을 고집하게 되어 시는 경직되고 재미가 없게 된다.


다. 동시의 재미

 그래서 동시도 문학 작품인 만큼 재미를 관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효용성과 서로 맞물려 경중에 관한 균형의 문제가 된다면 나는 효용성 보다는 재미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재미를 찾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인 전병호는 ‘동시에서 재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어린이들이 느끼는 재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면 동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반성을 하게 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동시의 효용성을 강조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하는 말일수도 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라 부른다. 그 까닭은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지시적 기능에 국한되지만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아동의 세계(관념적인 동심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아동의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는 물론 아동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어린이는 보다 친근하게 시적 정서에 와 닿을 수 있다.

 여기에서 어린이들이 현실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지영이 우려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들인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은 국어교육이라는 효용성으로 보면 문제가 있지만 요즘 어린이들이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에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 용어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네들끼리는 소리 낼 수 있고 이해하는 것들이다. 그러하여 오히려 동시에 접근하는데 거부감보다는 친밀감을 더 할 수 있는 용어들이라고 생각한다.


  라. 자음만의 음소는 소리 낼 수 없거나 이해 불가능한가?

 신지영은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임을 강조하면서 자음만으로 이루어 진 ‘ㅂ ㅂ’가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가 ‘바보’의 소리를 가진 것으로 표기하여 그 발음이나 이해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신지영이 잘 못 본 내용이다. 실제 필자의 원고에는 ‘ㅂ ㅂ’가 두 번 사용되지 않았다.(p113 위에서 18줄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p115 위에서 22째 줄부터 ‘ㅂ ㅂ’,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23째 줄 ‘ㅂ ㅂ’, 또는 ‘ㅂ2’, ‘잘 가, 빠이빠이’, 24째 줄, ‘ㅂ ㅅ’, ‘병신’, 25째 줄, ‘밥5’, ‘바보’였다) 아마 ‘ㅂ ㅂ’와 ‘ㅂ ㅅ’을 혼돈 했거나 ‘밥5’, ‘바보’를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지영의 표현대로 이것들이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거나 하나의 독립된 표현으로 떼어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자음들이 문장 안이나 시의 행 안에 들어 있을 때는 단어나 행, 연, 문장의 상호작용을 통해 분명히 이해된다.

예를 들어 보자.


아무리 눈짓을 해도

눈만 껌벅이는 너는

아이 참

ㅂ ㅂ


라는 시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이들은 ‘ㅂ ㅂ’를 모음이 없다고 해서 소리 낼 수 없을까? 아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바이바이’라고 말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글의 문맥으로 ‘바보’로 소리 내고 이해한다.

또 하나 더 보자.


헤어지기 싫어

얼굴은 돌리지만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 않아

무거운 손

빈 하늘에 들어 본다

ㅂ ㅂ


라는 글에서 마찬가지로 ‘ㅂ ㅂ’를 ‘바이바이’라고 소리 내고 이해하지 ‘바보’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종은 참 우리글을 우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자음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드시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영어의 ‘church’를 ‘ㅊ ㅓ ㄹ ㅊ’라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처치’라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게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자모를 조합하지 않아도  자음만 단순히 나열 된 것마저 어려움 없이 모음을 불러와 소리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마. 동시의 역할이 어린이 국어 능력 소양 발달인가

 동시 뿐 아니라 모든 문학 작품이 국어와 관련되고 또 국어 학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신지영은 동시가 한국어 발음으로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고, 동시가 중요한 목표로서 국어 능력 소양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고,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의 필요와 또한 한글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국어 교육과정상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문법, 문학 영역 중 문법 영역에 관한 목표는 될 지언 정 문학 즉 동시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아니라고 본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올라있는 진선희의 ‘시 텍스트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학년별 인식 및 선호 양상 연구’ 중 ‘ 1. 시 교육에서의 텍스트’ 첫머리에 “시교육의 목표를 범박하게 말하면 ‘시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시’라는 개념 혹은 문화적 관례, 가설들이 존재함과 독자가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교육적임을 전제로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별책 2)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에 따른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Ⅲ)(교육과학기술부.2008. 4.1)가운데 문학부분, 그 중에서도 시와 관련된 내용을 학년별 작품의 수준과 범위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신지영이 제시한 동시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면관계로 구체적인 수준과 범위, 성취기준, 내용요소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국 신지영의 주장은 동시의 역할에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바. 자음만의 음소와 이모티콘이 과연 불필요한 시도인가

 신지영은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자음들로 이루어 진 몇 가지 용어들이나 필자가 차용하여 동시에 사용한 것들은 대부분 글 전체에서 극히 제한적이고 보조적 이미지로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시나 산문에서 모든 단어나 문장이 모음을 무시한 자음만으로 글을 썼다면 이미 작품이 될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이다.

 신지영이 밝힌 바처럼 우리글이 우수한 자모관계를 가진 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늘 날 어린이들이 ‘ㅂ ㅂ’, ‘ㅋ ㅋ’, ‘ㅎ ㅎ’를 모음이 뒤에 붙어 있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 내어 읽지 못하지 않는다. 글을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크크’, ‘쿡쿡’, ‘킥킥’, ‘호호’, ‘하하’, ‘호호’ 등으로 오히려 자모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크크’, ‘하하’라는 글자보다 더한 다양하게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시라는 장르에서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고 확대 해석하거나 매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신지영이 말하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체계인 훈민정음도 맨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다. 그러나 이 문자 체계도 시대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사라진 것이 네 글자나 있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각각 시대마다 사용한 문자와 말들이 오늘날 엄청나게 소멸, 생성하며 변화해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의도구로서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즉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 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필수만 존재하지 않는다. 필수가 존재하는 곳에는 당연이 선택도 있기 마련이고 필수를 보조하는 또 다른 역할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시가 언어기호 사용이 필수라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의 표현에 필요하다면 동시에도 선택적 보조 자류가 필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있어서 컴뮤니케이션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서로가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동시의 문제는 작가와 독자의 눈높이 문제, 생각의 차이, 문화와 경험의 차이로 인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대 있다. 신지영이 긍정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이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단순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라 하더라도 동시가 독자와 가까워지고 소통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5. 기호 언어와 낭송 동시에 대하여

 신지영의 지적과 궤를 달리하지만 결과적으로 같이 논의해야할 ‘낭송’의 문제도 이 기회에 그 견해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다음과 같은 눈둥그리님의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새로운 시도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는 낭송할 때 그 느낌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시의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데 기호언어들은 어떻게 낭송해야 할지 좀 고민이 됩니다. 09.12.16 11:45

 

 눈둥그리님의 우려는 ‘동시가 낭송될 때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좋은 지적이다. 특히 시낭송은 동시가 낭송자를 통해 청중과 완벽한 컴뮤니케이션을 이루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 낭송자는 청중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서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에 대한 우려는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낭송자는 최선의 낭송을 위해 배경음악, 음성의 고저장단, 강약의 조절 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 이때는 주로 음성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낭송자는 음성기호가 아닌 것에도 유의한다. 다시 말해 표정, 몸짓, 그리고 행과 연의 휴지부문,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문장부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미 위에서 밝힌 대로 센스가 있는 낭송자라면 자음 만 있거나 자음에 아라비아 숫자가 곁들여 있는 정도라면 낭송자가 자기의 개성이나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낭송이 가능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 -_-, 등과 같은 표정 기호까지도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표정으로도, 음성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회화적 기호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좋은 동시가 좋은 낭송시로서의 조건을 갖춘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꼭 낭송하기 좋은 동시가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작품을 쓰는 일에 자유로워야 한다. 작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적 감흥이 일어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직관으로 쓰는 것이지 첨부터 무엇을 목적에 두고 시를 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많은 동시 가운데 기호 언어로 쓰여 진 시가 아니어도 낭송에 적합하지 않는 시는 이외로 많이 있음을 본다.


6.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대 시론과 무관하게 창작해 온 나에게 갑자기 얼굴을 드려 민 ‘해체시’라는 용어 는 나를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창주문학상과 소년지 동시 추천으로(1974년) 등단한 필자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논리적 접근을 하지 않은 채 작품을 써왔다. 물론 시론에 관계되는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변명 같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시론에 내 감성과 직관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와 같이 시론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평론과는 생태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미술 작품의 창작을 위해서는 회화나 디자인에 통일, 변화, 비례, 균형, 대비, 대조 등과 같은 원리들이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첨부터 이 원리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나타난 직관을 통해 창작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작품을 창작하면서 이곳은 비례이고, 저곳은 통일이라는 등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면 작품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원리와 요소들이 잘 어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작가의 예리한 직관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될 것이고 이는 또한 수정보완이 이루어지게 된다. 마치 시인이 퇴고를 하듯. 다시 말하면 내가 시를 씀에 있어 첨부터 시론이나 원리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신지영은 내 작품 속에 표현된 몇 가지 비언어적 시각기호에 대해 ‘해체시’라는 틀을 갖다 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체시가 필요한가? 묻고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내 작품을 일단의 행위예술적인 퍼포먼스로 취급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신지영을 통해 첨으로 해체시와 아주 낯선 대면을 할 수 있었다.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 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도, 김준오가 1992년에 펴낸 ‘도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는 것도, 황지우의 행위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라는 것도, 또한 데리다로 부터 출발한 해체시에 대해 그 생성과 성격, 즉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목표와 방향성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해체시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신지영이 깨우쳐 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동시가 해체동시가 되려면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기존의 동시들에 대한 부정이다.

 둘째, 기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파괴이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작품이 기존의 동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 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동시가 갖는 이미지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기호언어를 사용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기존 동시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둘째, 내 작품이 기존의 표현 양식을 파괴할 만큼 위험했다는 것인가? 자세히 살펴보면 문장부호는 세종이 한글 창제 때 함께 창제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때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고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해 비해 최근에 생산된 이모티콘이 기성세대와 일반인에게 생경하다고 해서 과연 표현양식을 파괴하는 요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가끔 어린이 사생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적어도 중학생이 되어야 사용하던 수채물감을 요즘은 초등학교 저학년도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수성 싸인 펜으로 그린 후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채색하여 싸인 펜이 번지는 효과를 잘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때 우리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싸인 펜으로 그렸다고 해서 수채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가? 

 셋째, 필자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라는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없어 그의 작품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만평이 어떤 의도로 들어 있는지 모른다. 추측하건데 분명히 그 만화는 시의 내용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기존의 운율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였거나 말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으로 삽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시도는 시라는 양식이 생태적으로 다양한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가능하지만 동시는 그 특성상 어렵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의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는 기존 동시를 부정하거나 파괴하기 위한 사상적, 이론적 근거조차도 마련되지 않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동시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표현 방법이지 동시 표현의 방식을 파괴하려는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하며 신지영의 ‘해체동시’ 운운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오면서

 신지영의 토론 주제를 읽고 답글을 다는 일을 조금은 망설였다. 그 이유는 문학 이론에 대해 지극히 일천한 내가 과연 논리적인 해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명료하지 못한 해명으로 신지영의 글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이루어 진 토론의 장에 한 번쯤 답변하는 것이 예의가 될 성도 싶어 용기를 냈다. 내 견해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덧붙였지만 충분한 설명이나 명쾌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며, 경우에 따라 의도와는 다른 곁길로 가 버린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점은 너그럽게 이해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묘한 감정 하나를 지울 수 없다. 사실 맨 첨 이 글을 시도를 하면서 원로 아동문학가들로부터 질책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그것은 회갑을 넘긴 사람이 주책에 가까운 객기를 부린 건 아닌가 했는데 이외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틀로 인해 퓨전(fusion)시대에 걸 맞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도한다는 건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분명 모험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분간 여기에 더 머물러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호 언어들과 함께 소통하며 내 작품의 영역을 넓혀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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