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3
요르단 편
이곳에서 요르단 가이드 이수진 집사를 만났고 현지인 가이드 아벳과 운전기사 알리와 만났다. 우리가 통과한 국경이 배샨 국경이다. 이곳을 지나 오늘의 숙소인 암만으로 간다. 암만은 요르단의 수도이다.
요르단 [Jordan] 공식명칭 : 요르단하심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
인구 : 5,505,000, 면적 : 89,342, 수도 : 암만,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국왕/ 국왕
공식 언어 : 아랍어, 독립년월일 : 1946. 5. 25,
요르단 강 동쪽에 있으며 수도는 암만이다. 남북으로 약 460km, 동서로 약 355km 뻗어 있고 북쪽은 시리아, 북동쪽은 이라크, 남동쪽과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을 경계로 한다. 아카바 만에 19km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웨스트뱅크로 알려진 요르단 강 서쪽 지역도 1949년부터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당한 1967년까지는 요르단의 영토였다. 면적 89,342㎢, 인구 5,395,000(2003 추계, 팔레스타인 난민 약 172만 5천 명 포함)
성경의 암몬, 모압, 애돔 지역.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접해있는 지리적 위치로 이스라엘과는 땔 래야 땔 수 없는 곳이다.
어두운 밤길을 지나 우리는 암만으로 들어 왔다.
6시 50분에 숫곳을 지나고 7시에 얍복강을 건넜다. 얍복강이라지만 겨우 10m 내외의 다리를 지났다. 그리고 얍복강을 지나면서 길르앗을 통과 했단다.
수도 암만은 해발 800m 고지에 위치해 있단다. 8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Cham Palaces and Hotels에 도착했다. 방 배정만 먼저 받고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711호 김현숙, 김일순, 김명자 812호 구의숙, 최금자 814호 김영래, 박경숙 815호 김신향, 차순이 819호 김재수, 김성자 였다. 그리고 가이드 이규래 주임은 821호.
내일은 5시에 모닝콜, 6시에 식사를 하고 6시 50분까지 로비에 모인다. 스리프와 선크림, 우산을 지참하란다. 하루의 일정이 고된지 모두 옆방 돌아볼 틈도 없이 꿈나라로 갔다.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아침에 식사하러 나가려는데 오른쪽 엘리베이트가 고장이 났다. 우리 신봉팀은 아니지만 함께 온 순례단 중 도영숙 장원봉 윤현숙 씨 세명이 엘리베이트에 갇혔다. 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고 난리를 쳤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듯 호텔 측에선 아주 대수롭잖게 여기는 듯 했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들이 막 도착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7시 10분에 조인석 장로의 기도로 요르단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요르단의 순례는 주로 왕의 대로(Kings Highway)와 근접해있어 우리 일정이 잘 파악할 수 있다. 암만에서 페트라까지 움직이는 동선은 거의 일직선에 해당된다. 왕의 대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따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모리왕 시혼에게 지나가기를 요청했던 바로 그 길이다. (민 21:22) 서편 산악지대를 따라 요르단 남북을 연결하는 왕의 대로는 에돔과 모압을 관통하는 길로 성서시대부터 널리 이용되던 길이다.
이곳에서 약 2시간 정도 가면 아르논계곡이 나오고 그 안에 카락성이 있다고 한다. 카락성은 열왕기 하 3장(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에 나오는 길하레셋(사15:1, 길로, 길 모압, 렘 48:31,36에는 길헤레스로, 사 16:7,11에는 길하렛셋으로 나온다)
모압왕 메사가 장남을 번제물로 바친 곳이다.
이곳 요르단은 600만 인구 중 40%는 학생이며 공무원을 선호한다. 공무원은 9시 출근 오후 1시에 퇴근을 하며 의료보험, 연금제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수도 암만은 창세기에 암몬지역으로 소알 동굴로 도망간 롯과 그의 두 딸이 상관하여 나은 자손들이다.
해발 900m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별장지역이기도 하단다.
다윗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 우리아를 최 일선에 배치하여 전사하게 된 곳도 암몬의 랏바성 전투라고 한다. 그리고 솔로몬이 암몬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아들이 르호보암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 백성들이 유다 성과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때 방해를 했던 민족이 암몬 족속들이었다. 이 지역은 연평균 강우량이 1,000mm, 3-5월에 모래바람이 50일 동안 강하게 분다. 이 바람을 ‘함시디아’라고 부르며 길과 언덕에 방풍림으로 선 소나무나 가로수들이 비스듬이 누워 있는 것은 바로 강한 바람 때문이란다.
㎢
7시 45분에 왕의 대로에 진입을 했다. 이 길은 주전 3,000년 경부터 이용했단다.
출애굽 당시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이곳은 이미 길이 나 있고, 전쟁의 피해를 줄일 수 있으며 전 지역이 물과 농경지로 인류정착의 최적지였고 더구나 이곳이 가나안을 들어가는 가장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사는 유목민들은 역시 이스라엘처럼 베드윈이라는 유목민들이 천막을 치고 목축을 하면서 산다. 현재 유목민들은 국유지에 무상으로 목축을 하고 있으며 유목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동차는 면세란다.
8시 15분에 디본성을 통과 했다. 그리고 8시 20분에 아르논 계곡에 진입을 했다. 이곳은 요르단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부르는 계곡이란다. 아르논 계곡에 흐르는 건천인 아르논 강을 중심으로 암몬과 모압 땅으로 구분한다. 이곳은 해발 850m의 계곡이다. 이곳에서 베드윈의 천막과 아르논 계곡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황량한 사막 가운데 베드윈의 천막이 보이고 트럭과 승용차도 보인다.>
<베드윈의 붉은 천막과 아르논 계곡을 배경으로>
<아르논 계곡 >
9시 15분에 우리는 카락성에 도착했다.
카락성은 암만에서 남쪽으로 140km 떨어진 곳이다. 카락은 왕의대로 위에 있으며 3면이 깊은 계곡에 둘러 쌓여 천연 요세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시대에 걸쳐 전략적 요충지였다. 십자군 시대에는 볼드윈 1세가 이곳을 점령하여 카락성을 쌓았고 이슬람 세력을 막기 위한 근거지로 삼았다. 1142년 1,050m의 고지에 지하 7층 지상 2층 규모의 성을 세웠으나 현재는 당시 규모의 10/1 정도만 남아있다.
이 성은 1187년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 장군의 침략을 받게 되고 1년이 넘도록 점령하지 못했는데 성주의 결혼식 날 허술한 경비를 틈타 무너뜨렸다는 전설과 살라딘 장군이 미인계를 사용하여 지하 비밀 통로를 알아내어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1189년 이슬람에 의해 무너졌다. 현재는 십자군 당시 쌓았던 성벽이 복원되고 있으며 2004년에는 카락 고고학 박물관이 설립되어 디본에 세워졌던 메사왕(열왕기 하 3장)의 석비 사본 등이 전시되고 있단다. 카락성에서 1시 방향에 V형 계곡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라 하지만 눈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고 다시 12시 방향에 소알성이 위치해 있다고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장원봉 목사님 내외가 우리를 위해 과일을 제공해 주셨다.
<카락성의 위용과 지하 1층의 아치형 방, 그리고 각 방마다 밖은 넓게 안은 좁게 만든 채광창이 특이했다>
<소알성과 멀리 소돔과 고모라가 위치했던 곳이 V형 계곡 사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10시 20분에 카락성을 출발하여 페트라 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약 한 시간가량 달려 세렛강을 통과 했는데 이곳이 모압과 에돔의 경계지역이라고 했다. 이 모압 땅은 룻기에 나오는 모압의 땅을 말한다.
12시 50분에 므리바 샘에 도착했다. 이 샘의 이름은 모세의 샘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1,200m가 넘는 고지대에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물이 흘러 이 지역의 나무와 곡식에게 가뭄을 해결해 주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모두 손을 담구었다.
쉽 없이 흐르는 맑은 물이 이렇게 높은 고지에서 흐른다는 게 참 신기했다.
우리는 므리바에서 나와 페트라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므리바 샘에서 바라본 페트라의 웅장한 바위산>
전망대에 서자 갑자기 눈앞에 전개되는 어마어마한 바위산의 위용에 모두들 환호를 질렀다. 여기서 한 참 멀리 펼쳐진 페트라의 거대한 모습을 바라본 후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 오늘 마지막 순례지인 페트라를 보기 위해 점심을 단단히 먹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는 카메라를 식탁위에 올려 둔채 나왔다가 뛰어갔더니 다행이 그 자리에 있었다.
페트라. 암만에서 남쪽을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 깎아지른 암벽에 숨겨진 도시이다. 성경에서 페트라는 ‘셀리’라 부르는데 이는 ‘바위’라는 의미이다. 현지어로는 ‘와디무사(모세의 골짜기)’라고 부른다. 창세기 35장에 에서가 정착한 곳이 세일산이라고 하는데 페트라에서 북으로 60km지점이라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 수메르 문명이 일어난 곳이에서 족속 에돔 자손의 땅이었는데 에돔땅도 다윗 왕때 점령을 했으나 르호보암 왕 때 에돔이 독립을 하여 이곳에 BC 7-6세기 경에 정착했다. 이곳에 살던 에돔인들이 BC 6세기경 페트라를 비우고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흩어진 유대 땅으로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빈 자리를 사우디 북서쪽에서 온 나바테아인이 정착하며 이 도시를 건설했다고 하기도 하며 이곳에 살고 있던 에돔 족속을 나바테아인이 몰아내고 이 도시를 건설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BC 8년에서 AD 40년 사이 가장 번영했는데 이들은 붉은 사암의 암벽을 깎아 사막 한가운데 도시를 건설하고 신전, 극장, 목욕탕, 상수도 시설을 갖춘 현대적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은 수력기술을 활용하여 물을 모았는데 절벽을 깎아 수로를 만들고 둑과 물탱크를 만들어 농경지에 물을 대었다. 이들은 아라비아와 지중해 항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주요 무역 경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극동과 서쪽지역을 연결하는 무역경로에 포함했던 덕분으로 많은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후 106년 로마의 침공으로 마지막 황제 라벨 2세가 죽음으로 나바테아 왕국의 시대는 끝나고 그 후 363년과 551년의 두차례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주후 7세기 경 비쟌틴 시대에 와서 이곳에 7개의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는데 636년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면서 차츰 모래에 묻힌 도시가 되고 말았다.
1812년 8월 21일 스위스의 탐험가 J.L.Burckhardt 가 페트라를 발견하였고 1817년 그의 사망으로 잊혀 질 뻔 하다가 그의 여행일지가 출간되면서 1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곳이다. 이곳을 순례하는 길은 도보와 마차를 이용하는 것과 말을 타는 것이 있으나 우리는 모두 도보로 왕복 다녀왔다. 특히 이곳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최후의 성배’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군데군데 뚫어져 있는 구멍은 원래 에돔 인의 생활터전(집)이었는데 나바테인의 점령이후 그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페트라 아래쪽에는 바위 하나를 깎아 만든 원형 극장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2시에 페트라를 향해 출발, 3시에 원형극장 도착, 다시 4시까지 출발지점 버스 주차장까지 왔으니 모두 왕복 2시간이 걸린 셈이다.
<김명자 권사의 명찰 뒤에는 늘 1달러가 들어 있다. 용도는 상상(?)>
<계곡에서 바라본 입맞춤 바위>
<페트라 계곡을 들어가고 있다>
<협곡 사이로 드러난 나바타인의 묘지, 인디아나 존슨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나바타인의 무덤이라고 하는 동굴
<한 개의 바위를 깎아 만든 원형 경기장>
오색 찬란한 자연석 바위 동굴 돌무더기 속에 자란 무화과 나무 앞에서
이곳에도 피마자 나무가 있다. 여긴 다년생이라고 한다.
<황량한 돌 틈에 자란 풀들과 꼭 짐승을 닮은 바위 모습>
4시에 주차장에 모인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올랐다. 김영수 목사님 내외가 우리 일행에게 생수를 두 병씩 사 주셨다. 4시 45분에 페트라를 출발 했다.
모두들 피곤했는지 차에 오르자마자 쉬고 싶었나 보다.
호텔에 도착하니 8시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일은 6시 모닝콜, 7시 식사, 8시 15분 로비 집합, 그리고 8시 30분 출발이라는 광고를 듣고 모두 꿈나라로 갔다.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호텔에서 내려다 본 요르단의 수도 암만>
아침식사를 하면서 도두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래야 얼굴이라도 잊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장원봉 목사님이 이번 순례자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메일을 조사했다. 오늘 출발 기도는 내가 했다. 요르단의 이수진 가이드, 이집트의 강은영 가이드,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철규 가이드, 그리고 늘 뒤에서 보살펴 주시는 이규래 주임에 대한 감사와 오늘의 순례도 지켜 주심을 위해 기도했다. 마다바를 향해 8시 30분에 출발했다. 이곳은 세계 최초의 성지를 나타낸 모자이크가 있는 곳이다. 8시 50분에 아벨그라임을 통과 했는데 이곳은 암몬과 전쟁을 했던 사사 입다의 기록이 있는 곳이란다. 입다가 암몬의 20개 성읍을 점령한 후 전승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자기가 서원한 일로 인해 자기 딸을 제물로 드려야 했던 아픔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8시 55분 경에 텔히스반(헤스본 성)을 통과 했다. 이곳은 암몬족의 성이며 아모리왕 시혼의 궁궐터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헤스본 성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시혼에게 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아르논부터 얍복까지 그들의 성을 차지한 곳이다. 이곳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루우벤 지파에게 분배하였으나(민32:37) 후에는 갓지파에게 돌아간 땅이다.(수21:38-39, 신명기 2:26-37) 루우벤 지파와 갓지파의 경계였던 헤스본은 주전 853년에 오압 왕 메사의 대원정에서 모압에게 점령당하였으나 후에 다시 암몬에게 멸망당하고 만 땅이다. 역대상 18:1-19, 상하 10:1-19에는 다윗이 암만과 아람을 친 기사가 나온다.
9시 15분 마다바에 도착했다.
마다바(성경에서는 메드바). 암만에서 남쪽으로 30km 이동하면 모자이크의 도시 마다바를 만난다. 비쟌틴 시대 기독교 최대의 도시였던 마다바는 모자이크 예술로 유명하다. 현재도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 주변 국가들의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 지도가 남아있다. 가로 5.6m, 세로가 15.7m에 이르나 지금은 3/2가량이 훼손된 모습이다. 다행이 19세기 말 동방정교회 소속 성조지교회가 이 모자이크 지도위에 세워져 유적을 보호하고 있다. 마다바는 현재도 요르단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란다.
<성죠지 교회 내부와 바닥에 깔려있는 모자이크 지도의 모양>
<마다바에 위치한 성조지 >
<시장 구경과 대추야자와 말린 무화과를 사느라 정신이 없다>
<모자이크 그림을 제작하는 소녀>
10시 30분에 마다바 교회를 출발하여 이곳 거리에서 잠시 시장 구경을 하고 기념품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느보산을 향해 출발 했다. 11시 10분에 느보산에 도착했다.
느보산(비스가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곳 느보산에 도착한다. 당시 120세였던 모세는 정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어 장사지내고 만다.
성경에는 모세가 올라갔다고 하는 비스가 봉우리는 현재 느보산의 시야가(Siyagha) 봉우리로 여겨지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통설이란다. 해발 800m의 정상은 실제로 이 일대에서 가나안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사해와 여리고는 물론 맑은 날에는 예루살렘 성벽까지도 보인단다.
1933년 시야기 봉우리 정상에서 교회와 수도원 유적을 발견했다. 이 교회는 4세기 중후반에 모세가 이곳에서 죽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첨 지었고 5세기 후반과 597년 증축했는데 이교회의 바닥에서 다양한 모자이크가 발견됨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모세기념교회가 재건축 중이고 교회 마당에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가 만든 구리 놋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느보산에서 바라본 가나안 땅>
<느보산의 놋뱀 조각>
<모세 기념교회 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
<이번 순례에서 만난 장로님들과 모세 기념비 앞에서>
<모세 기념교회 입구에 세워진 현대적인 조형물 앞에서>
느보산과 모세기념교회를 순례한 후 우리는 다시 11시 15분에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마지막 현지 식사를 하는 곳이다. 식사를 하는 도중 식당 밖 한적한 곳에서 어느 아랍인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행을 하다가 아마도 기도시간이 된 것 같다. 차를 세우고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참 이곳 답다고 생각이 든다.
<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이곳 식당 지배인과 기념 촬영을 했다.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들 이었다>
<느보산에서 내려와 들린 식당 이곳에서 마지막 현지식을 먹었다>
12시 5분 식당을 출발했다.
우리의 여정이 다 한 셈이다. 여기서 암만국제공항으로 나아가 출국 수속을 했다. 이수진 가이드와 작별하면서 또 지긋지긋한 출국 수속을 했다. 하긴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전운항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겠지 하고...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암만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출발이 늦어 아부다비에서는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에 무척 바빴다.
<암만 공항에서 만난 귀여운 산타 어린이와 9박 10일을 내 대신 해 준 이름표>
2011년 12월 15일 목요일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새날을 맞았다. 그리고 긴 비행의 끝, 햇살 찬란한 인천공항에 내림으로 우리의 9박 10일 여정은 끝이 났다.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우리는 서로 아쉬움을 달래며 신성우 목사님의 마지막 기도로 모든 순례 여정을 마무리 하였다.
우리의 여정을 처음부터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이랜드 이규래 주임에게도.
<화물 태그와 입장권 그리고 고속버스티켓 피라미드 호텔의 성냥갑>
<9박 10일 동안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이름표>
<항공권과 각종 짐표 그리고 관람권과 상주 서울 고속버스 티켓들>
* 순례를 다녀와 쫒기는 일정때문에 좋은 순례기를 올리지 못했다. 그때 그때의 진한 감동을 다 기록하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두고 두고 수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