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1권(금요시민강좌)

조선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과 상주

빛마당 2014. 2. 24. 17:09

조선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과 상주

김 철 수

전) 국립상주대학교 제2대 총장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주문화원장

조선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과 상주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目 次>

Ⅰ. 머릿말

Ⅱ. 이문건李文楗과 「묵재일기默齋日記

Ⅲ. 저자 채수蔡壽

Ⅳ. 설공찬전薛公瓚傳의 문학적 가치

Ⅴ. 설공찬전薛公瓚傳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Ⅵ.『설공찬전薛公瓚傳』의 산실 쾌재정快哉亭

Ⅰ. 머릿말

『설공찬전薛公瓚傳』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자, 최초의 금서禁書다. 또한 작가 채수蔡壽선생이 상주사람이며, 이 소설을 쓴 곳이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에 있는 ‘쾌재정快哉亭’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쓴 사람이 상주사람이고 그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산실이 상주라는 사실은 우리 문학사文學史에 길이 남을 자랑거리이다.

지은이 채수蔡壽선생은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관료였는데, 폐비 윤씨를 옹호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경상도 상주에 은거하는 동안에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1996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에서는 이복규 교수에게『묵재일기默齋日記』(1535~1567년)의 탈초脫草작업과 함께 그 뒷장에 간간이 적힌 국문 기록이 무슨 내용인지 검토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묵재일기默齋日記』를 검토하던 중, 제3책의 뒷장에서 조선 중종 때 왕명王命으로 모두 수거되어 불태워진 줄 알았던『설공찬전薛公瓚傳』의 국문본을 발견했으나 후반부가 낙질되어 13쪽까지만 남아 있었다.

『묵재일기默齋日記』제3책의 뒷면에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외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의 국문본이 함께 적혀 있었다.

Ⅱ. 이문건李文楗과「묵재일기默齋日記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은 1494년(성종 25) 출생하였고, 19세 되던 해인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때 형 충건忠楗이 유배流配 중에 죽었기 때문에 9년간 과거응시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러다가 34세 때인 1528년(중종 2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승정원承政院, 시강원侍講院 등의 주요 관직 역임하였다.

41세 때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양주 노원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탈상 후 복직하여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충청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50세 때인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죽자, 홍문관 응교로서 빈전도감 집례관이 되었고, 이듬해인 1545년(인종 1)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다가 을사사화를 당하여 조카 휘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이문건은 성주에 유배되어 2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63세때인 1567년(명종 22)에 유배지인 성주에서 돌아가셨다.

이문건李文楗은 기록벽이라고 할 정도로 꼼꼼하게 일기를 기록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남겼다.

이문건李文楗은 전반의 반생은 청요직을 역임하는 중앙 관료로서의 생활을 했고, 후반의 반생은 성주에 유배된 이후의 생활이었다. 이 후반부의 일기를 통해서는 유배자의 생활상과 성주 관아의 모습과 향촌사회 지배층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묵재일기默齋日記」,「미암일기眉巖日記」,「쇄미록瑣尾錄」등은 당시 양반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재구성할 수가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Ⅲ. 저자 채수蔡壽

1449(세종 31)~ 1515(중종 10)사이의 사람이며,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성종대부터 중종대까지 청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경북 상주 함창 출신으로 머리가 비상하고 문장에 특출했다고 한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이며. 아버지는 신보申保이다. 1469년(예종 1) 약관 20세에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에 모두 장원함으로써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해 부수찬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세조실록ㆍ예종실록의 편찬에 참가했다.

1475년(성종 6) 이조정랑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했으며, 147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78년 응교로 있을 때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외직으로 좌천되게 했다. 1479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파직되었으나 1481년 직첩이 환급되었다.

그 후 제학ㆍ충청도관찰사ㆍ한성부좌윤ㆍ대사성ㆍ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연산군 등극 후 주로 외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게 되었다. 1506년(중종 1)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저서에 〈난재집〉이 있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채수 선생은 소설〈설공찬전〉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1511년 사헌부에서는 "〈설공찬전〉의 내용이 아주 요망하므로, 문자로 베끼거나 언문으로 번역해서 읽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임금인 중종이 동조하여 이 책을 모두 거두어 불태웠다.

또한 이 필화사건으로 인해 강경파들은 채수 선생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채수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상주 함창에 은거하게 되었다.

채수蔡壽선생은 훈구파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채수 선생이 중종반정(l506)에 '불가피하게' 가담한 공로로 인천군仁川君으로 봉군되는 과정은 소설처럼 흥미롭다. 거사 주도 인물들이 채수를 동참시키기 위해 군인을 보내 모셔 오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르지 않을 때는 목을 베어 오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응할 리 없었던 채수 선생을 그의 사위가 술을 먹여 만취한 상태로 부축해 궐기 장소인 대궐문 앞으로 인도했고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그는 "어찌 이게 감히 할 짓이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줄곳 부끄럽게 생각한 그는 은거하면서 '설공찬전'을 썼다고 한다.

그 당시. 지방에서 쓴 이 소설이 서울까지 전파되었고, 사헌부에서 수거 소각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등 4개월이나 논란을 벌였던 사실로 미뤄 볼 때, 정치적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소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 30살에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까지 지낸 채수 선생이 “왜 이런「설공찬전薛公瓚傳」이란 소설을 지어서 본인은 물론이고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자신의 정치생명도 단축하는 일을 벌렸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채수 선생의 정치적 이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채수 선생은 강직하고 주어진 직무에 충실했다.

성종실록을 보면, 1472년(성종 3) 채수 선생이 검토관을 지낼 때의 일화가 눈에 띈다. 왕과 신하가 야대夜對에 나가「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다가 수나라 양제煬帝의 무도함을 말하기에 이르렀다. 막 관직에 나아온 젊은 채수 선생이 앞으로 나와,

“임금이 직언 듣기를 싫어하더라도 신하로서는 마땅히 끓는 기름 가마라도 피하지 않고 감히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중何曾처럼 물러나 집에서 말하는 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인군人君이 그의 잘못을 듣기 좋아하지 않으면 사람마다 다투어 아첨하게 되어 강력하게 간하거나 옷깃에 매달려 간하는 자는 드물 것입니다.”

라고 아뢰기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문치주의를 펼쳤던 성종은 1478년(성종 9)에 예문관을 없애고 홍문관을 세웠다. 그리고 문한文翰의 일을 아우르면서 왕의 자문 역할도 했던 이 기관의 응교應敎 자리에 채수 선생을 임명했는데 채수 선생이 앞장서서 간신 임사홍을 탄핵하는 사건이 터졌다. 채수 선생만이 아니라 삼사三司의 관원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성종은 “나는 임사홍이 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간신배라면 왜 진작 고하지 않고 이제야 이러느냐.”, “그대들의 말이 사실임을 내가 어찌 믿겠는가.”하면서 무려 10번이나 벌주기를 거절했다.

그러자 혈기왕성한 채수 선생이 앞으로 나와 철퍼덕 무릎을 꿇고 “차라리 신들을 파직시키소서.”하며 외치자, 왕은 임사홍을 잡아들여 국문하되, 그의 간신 됨을 미리 알리지 않은 관원들 몇몇도 함께 벌 줄 것을 명했다.

채수 선생을 총애한 성종이 그렇게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일은 채수선생의 성격이 편협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왕의 국정 수행을 도우면서 동시에 감시도 해야 하는 간관諫官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임금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1479년(성종 10) 연산군 폭정의 발단이 된 폐비 윤씨의 문제가 불거졌다. 성종은 왕비가 자신을 독살하려 하고 특정인을 모함하는 요서妖書를 써서 뿌렸다고 개탄하며 삼정승과 승지들을 불러놓고 폐비의 과정을 밟으려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왕비가 성종을 쳐다보며 “당신의 그림자까지 없애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기 때문에 윤씨를 폐비시키고 민가로 쫓아내려 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비록 폐비는 할지언정 “세자까지 낳은 분인데 어찌 일반 백성들과 말을 섞고 얼굴을 맞대게 하십니까”하면서 선례가 없고 아니 될 일이라고 통촉했다. 하지만 결국 윤씨는 폐비되고 민가로 쫓겨났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지 3년 뒤에 채수 선생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올해 흉년이 들었는데 윤씨가 가 있는 집에 쌀이나 제대로 들어갈지 걱정입니다”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자고 상언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성종은 자꾸 조정에 분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폐비에게 사약을 내렸고, 채수 선생은 이 일로 성종에게 미운털이 박힌 듯 했다. 이런 과정을 세자인 연산군은 지켜보고 있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되던 해인 1504년에 연산군의 생모가 폐비된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줄줄이 붙들려갔다. 당시 승지였던 채수 선생도 붙들려가서 장 70대를 맞았다.

채수선생은 무슨 죄로 장 70대를 맞아야 했을까? 채수선생은 폐출에 반대하는 간언을 많이 올렸으나 연산군은 “그러면 뭐하는가. 결국 말리지 못했지 않은가”라며 이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모 폐위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자, 연산군은 특히 채수 선생에게 약을 주고 위로하며 다시 관직을 제수했다.

그런데 1506년(연산군 12) 왕과 승지 권균權鈞․강혼姜渾 등이 명정전明政殿 안뜰에서 주연을 열었고, 김감金勘․김수동金壽童․채수 등도 참가했는데 즐겁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연산군이 당나라 왕건王建의 시를 외웠다.

옥루는 옆으로 기울어지고 분장은 텅 비니

겹겹이 싸인 푸른 산만 고궁을 둘렀구나

무제가 간 후 미인은 다 없어지고

들꽃에 노란 나비만 봄바람을 차지하누나

이렇게 외우고는 갑자기 채수蔡壽 선생에게 “이 시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좌중이 일제히 긴장하며 채수 선생의 입을 쳐다봤다. 대답을 잘 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비 문제로 피비린내 나는 옥사가 일어난 후 점점 황폐해져가는 왕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 채수蔡壽 선생은 “매우 아름답다.”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연산군은 대노했다. 이 시는 연산군이 매우 싫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치와 욕심이 극에 달한 무제가 죽은 후 미인이 모두 흩어졌다는 고사는 황음荒淫을 일삼던 연산군이 자리를 보좌할 수 있을까 불안해하며 노심초사하던 마음속 깊은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는데, 채수 선생이 미처 읽어내지 못하고 ‘매우 아름답다’고 했으니 노할 만도 했다.

1000여 수는 앉은 자리에서 외울 수 있었던 채수 선생으로서는 한 번의 실수로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연산군은 채수선생을 좋아했다. 술이 깨자 곧 사람을 보내 채수蔡壽선생을 위로했으며 그에게 속사정을 자주 내보이기도 했고, 채수 선생이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한 후 인사人事가 적절치 못하다는 사간원의 성화를 물리치기도 했다.

조정 주변에 적은 갈수록 많아지고 연산군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체면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야 했던 채수蔡壽 선생은 좌불안석이었다. 약관 20세에 조정에 등장에 30세에 장관급 자리에 오르며 총기를 드러냈던 채수선생이 나이 오십 줄에 폭군을 만나서 자꾸 엇박자를 내었기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러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연산군은 폐위 되었고 채수蔡壽선생은 다행히 살아남게 되었다. 그런데 반정이 일어났을 때,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여러 사람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말에 얼결에 사인을 했을 뿐인데 중종이 왕위에 오르고 채수선생은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채수 선생에게는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나이를 이유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것이 그의 공직생활의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로는,「설공찬전薛公瓚傳」이 채수 선생의 말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만약 채수蔡壽 선생의 인생이 여기서 그쳤으면 역사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1511년(중종 6) 또다시 실록에 이름을 올렸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었던「설공찬전薛公瓚傳」의 저자 자격으로였다.

채수蔡壽 선생이 한글소설「설공찬전」을 쓴 것은 사건이 있기 3년 전인 1508년 근방인 것으로 보인다.

중종의 등장 이후 다시 국풍을 바로잡으려는 기묘사림이 기세를 올리는 마당에 전직 장관 채수蔡壽 선생이 고향에서 한가롭게 불온한 소설을 썼다는 것은 그리 환영할 일은 아니었다.

우선 소설의 내용이 문제였다. 불교의 윤회화복 사상과 왕을 능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은 즉시 압수되고 불살라졌으며 채수蔡壽에게는 교수형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이 사건이 일으킨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책을 얻어 읽어본 왕까지 대노해서 만약 숨기고 내놓지 않는 자가 있다면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해서, 다투어 갖다 바친 책이 조정의 뜰을 가득 채웠다고 했다.

당시「설공찬전」널리 읽혔다. 조정의 관리들도 이미 돌려서 읽어보고 한가할 때 모이면 이 책을 안주삼아 세평世評을 주고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전부 압수되고 소각되었는데「설공찬전」의 국문 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묵재일기黙齋日記』뒷면에 다른 4편의 소설과 함께 필사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 한글소설이 한문일기 이면에 적혀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문건의 후손 중 누군가가 몰래 국문으로 베껴 적고 독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 책의 내용이 어떠했기에 왕과 신하들이 그렇게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그 줄거리는 대략 아래와 같다.

전라도 순창에 설충란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남매가 있었다. 그런데 딸은 혼인하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이도 장가들기 전에 병으로 죽는다.

설충란에게는 설충수라는 동생이 있었고 그에게는 공침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이에게 들어갔다. 설충수의 식구들이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설충수의 아들 공침이 숟가락을 왼손에 쥐고 밥을 게걸스럽게 먹기 때문에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침은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5년 전에 죽은 조카 공찬을 기억하느냐? 저승에서는 다 이렇게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말하였다. 죽은 설공찬의 혼령이 공침의 육신을 차지한 것이다.

그 후에도 조카 공찬의 혼령이 아들 공침에게 들어와서 날로 피골이 상접해지자 아버지 설충수는 귀신을 쫓기 위해 김석산을 부른다. 그러자 오히려 조카인 설공찬이 아들 공침을 괴롭히는 정도가 더욱 심해지자 설충수가 조카인 공찬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빌자 조카인 설공찬은 아들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준다.

조카인 설공찬은 주변 사람들에게 저승 소식을 종종 전해주었다. 저승은 바닷가로 순천에서 40리 떨어져 있었고 이름은 단월국檀月國이며,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고 했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펴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고 했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지만,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과거 중국과 여타 나라의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어 셀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단월국의 임금은 비사문천왕인데 중국의 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설공찬은 저승에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왕에게 충언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지만 생전에 충언을 했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승에서는 평범한 여인이였지만 글을 잘한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여성도 나온다.

또 중국 당나라의 신하였다가 국왕을 배반하고 후량을 세운 주전충도 있었는데 그에 대해 설공찬은 “비록 이승에서 임금을 했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설공찬은 염라대왕의 지위가 매우 높음을 강조했다.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설공찬전」의 줄거리는 여기까지다.

셋째로, 채수 선생은 사림파 이념 재건의 희생양이었다.

사실「설공찬전」이 불교의 윤회설을 담고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정작 사건의 핵심을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옮겨가던 정권 변동의 과도기에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희생양으로「설공찬전」과 채수를 일종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데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5년 전, 중종이 즉위하기 이전인 1506년에 연산군은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들에게 「전등신화剪燈新話」와「교홍기嬌紅記」등 전기류 소설을 구입해올 것을 명한 바 있다. 또한 구해온 책들 중 일부를 인출印出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연산군이「전등신화」를 신하들에게 내려주며 “어찌 성색聲色이나 가무歌舞로 인해 나라가 꼭 망하겠는가?”라고 두둔할 만큼 소설 향유를 묵인하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왕이 소설 독서를 금기시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보니 소설 향유는 허락된 자유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설공찬전」이 등장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었는지 모른다. 상층 사대부는 물론이고 언문으로 번역되어 여항인들까지 널리 읽데 되었다는 것은 서울 장안이나 주변 지역에 한정된 것이겠지만, 이미 소설 독자들이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연산군 시절이 끝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국의 주도권이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넘어갔다. 그러다보니 상하층에서 향유되던 소설에 대한 일대 정비와 이념 강화를 위해「설공찬전」사건에 사림파가 적극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채수의 교수형을 주장하던 강경한 분위기 속에 그는 과연 살아남았을까. 중종은 “채수가 진실로 죄는 있으나 교수함은 과하다”라고 결론짓고,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 이때 채수의 나이는 62세였다.

Ⅳ. 설공찬전薛公瓚傳의 문학적 가치

설공찬전薛公瓚傳의 내용은,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이 당시의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갈등의 구조나 짜임새 등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실존인물과 가공인물을 적절히 배치해 소설의 사실성을 높이는 등 작품성은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문소설의 효시로 알려진『홍길동전』의 원작이 국문본國文本이었다는 증거가 없어 아직도 논란 중임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지니는 비중은 대단했다. 비록 ‘번역체 국문소설’이지만 이 작품이 1511년 당대에 이미 국문으로 번역되어 유통되었다는 사실이 공식기록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설공찬전'은 중종 때 전국적으로 수거해 불태워졌을 뿐 아니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될 경우 엄하게 처벌하는 등 조선조 필화 사건을 촉발한 유일한 소설로 기록되고 있다.

작가인 채수 자신은 중종의 배려로 참수형만은 면했다. 이 소설이 남의 일기의 접은 뒷면에 은밀히 실려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당시 상황 때문이라고 관련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최초의 한글 소설 '설공찬전'의 발견을 두고 학계에서는 '해방 이후 최대의 문학사적 사건'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홍길동전'이 1618년에 지어진 것도 추정일 뿐이며, 현재 전해 오는 한글본은 I8세기 후반 구전 소설을 상업적으로 판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설공찬전'은 저자ㆍ저작 연대ㆍ저작배경ㆍ저작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학자들은 이 소설이 한문본의 번역이라 하더라도 한글 소설로 분류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홍길동전' 뿐 아니라 초기의 한글 소설이 대부분 번역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많은 서민에게 읽히기 위해서 한문본과 동시에 한글본이 나왔다는 점에서 그 어떤 한글 소설보다 돋보이는 지위에 있다는 평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소설 구성과 작품성이다. 이 소설은 초기의 한글 소설로 '홍길동전' 이나 '사씨남정기'보다 갈등의 구조나 짜임새 등 소설적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실존 인물과 가공인물을 적절히 배치해 소설의 사실성을 높이는 등 작품성은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대 박희병 교수(국문학)는 이 작품을 조선 초기 소설 형식인 전기傳奇 소설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귀신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기소설은 이후 '홍길동전' 같은 영웅소설 형태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공찬전'의 등장으로 16세기 초에 이미 한글 소설이 존재했다는 학계 일각의 막연했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저승'을 설정해 현실 정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사회적 기증과 위상'을 파악하는 출발점이 되는 자료로 평가한 홍익대 박일용 교수(국문학)는 중종 전후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 사회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 또한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4천여자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다. 그 시기의 소설은 대개가 짧았으며, '홍길동전'은 구전되면서 점차 살을 붙여 분량이 늘어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은 당시 민중들 사이에 중종 반정을 주도한 신흥사림파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이 조성돼 있음을 의미한다. 한글본이 유행한 것은 이같은 민중들의 정서에 적합한 글의 형식을 취한 의도로 보인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중종 때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李文建 일기의 낱장마다 접혀진 속면에 필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한지 편책에 따라 접혀진 안쪽에 기록된 이 소설은 뜯지 않고는 제대로 읽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는 당시 필화 사건 등으로 조성된 살벌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몰래 기록해 읽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소설은 전국 각지에 여러 개의 필사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번에 발견된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이 이복규 교수의 추정이다.

Ⅴ. 설공찬전薛公瓚傳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1511) 9월 2일(기유)에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한 것인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한문)로 옮기거나 언어諺語(한글)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에서 마땅히 행이行移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9월 2일(기유) 1번째기사>

◦己酉/臺諫啓前事。 憲府啓: “蔡壽作《薛公瓚傳》, 其事皆輪回、禍福之說, 甚爲妖妄。 中外惑信, 或飜以文字, 或譯以諺語, 傳播惑衆。 府當行移收取, 然恐或有不收入者, 如有後見者治罪。” 答曰: “《薛公瓚傳》, 事涉妖誕, 禁戢可也。 然不必立法。 餘不允。”<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30면>

◦중종 6년(1511) 9월 5일(임자)에 채수의 《설공찬전薛公瓚傳》을 불살랐다. 그리고 숨기고 내어 놓지 않는 자는, 요서 은장률妖書隱藏律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9월 5일(임자) 7번째기사>

◦命燒《薛公瓚傳》, 其隱匿不出者, 依妖書隱藏之律, 治罪。<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31면>

◦중종 6년(1511) 9월 18일(을축)에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의 파직을 명했다. 그가 지은 《설공찬전薛公瓚傳》이 괴이하고 허탄한 말을 꾸며서 문자로 나타낸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혹하게 하기 때문에 ‘부정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히고 인민을 선동하여 미혹케 한 율’에 의해 사헌부가 교수絞首로써 조율했는데, 파직만을 명한 것이다.<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9월 18일(을축) 2번째기사>

◦命罷仁川君蔡壽職, 以其撰《薛公瓚傳》, 造怪誕之說, 形諸文字, 使人信惑。 依左道亂正扇惑人民律, 憲府照以當絞, 只命罷職。<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31면>

◦중종 6년(1511) 9월 20일(정묘)에 중종은 영사 김수동 등과 채수의 일을 의논하였다. 즉,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 남곤·헌납 정충량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사 김수동이 아뢰기를,

“들으니, 채수의 죄를 교수絞首로써 단죄하였다 하는데,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설邪說을 막아야 하는 대간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함이 마땅하나, 채수蔡壽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선동시켰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가하지만, 다만 기양技癢(재능을 발휘하고픈 의욕을 참을 수 없는 것.)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망녕되이 지었으니, 이는 해서는 안 될 것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벌과 상은 중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어야 된다면, 《태평광기太平廣記》·《전등신화剪燈新話》 같은 유를 지은 자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공찬전》은, 윤회화복輪廻禍福의 설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였으니, 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수함은 과하므로 참작해서 파직한 것이다.”

하자, 남곤이 아뢰기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라면 진실로 이와 같이 단죄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김수동은 아뢰기를,

“채수의 죄가 과연 이 율에 합당하다면,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지어내는 자는 어떤 율로 단죄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엔 실정과 법이 어긋난 듯합니다.”

하고, 검토관 황여헌黃汝獻은 아뢰기를,

“채수의 《설공찬전》은 지극한 잘못입니다. 채공찬은 채수의 일가 사람이니, 수가 반드시 믿어 혹하여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세교世敎에 관계되고 치도治道에 해로우니, 파직은 실로 너그러운 법이요 과중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채수가 진실로 죄는 있으나, 조율照律은 지나치다.”

하매, 시독관 김정金淨이 아뢰기를,

“근래로 야대夜對에 나아가지 않으시는데,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적에 ‘야분夜分(한밤)에야 파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제왕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9월 20일(정묘) 1번째기사>

◦丁卯/御朝講。 大司憲南袞、獻納鄭忠樑啓前事, 不納。 領事金壽童曰: “聞蔡壽之罪, 斷律以絞。 臺諫扶正道闢邪說之意, 固當如是, 壽若自造爲妖言, 皷動人心, 則可斷以死。 但爲技癢所使, 聞見而妄作, 是所不當爲而爲之也。 刑賞務要得中, 若此人可死, 則如《大平廣記〔太平廣記〕》、《剪燈新話》之類, 其可盡誅乎?” 上曰: “《薛公瓚傳》, 爲輪回禍福之說, 以惑愚民, 壽非無罪。 然絞則過矣, 故酌宜罷之。” 南袞曰: “左道亂正之律, 執法之吏, 則固當斷之如此矣。” 壽童曰: “壽罪果合此律, 則今若自造爲妖言者, 當以何律斷之? 臣恐情與法似乖矣。” 檢討官黃汝獻曰: “蔡壽《薛公瓚傳》, 至爲非矣。 公瓚, 壽之族人也, 壽必信惑而著之矣。 此關係世敎, 有妨治道, 今之罷職, 實是寬典, 非過重也。” 上曰: “壽固有罪, 照律則過矣。” 侍讀官金淨曰: “近來不御夜對, 臣未知所以。 古有夜分乃罷之說, 此帝王之所當法也。”<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32면>

◦중종 6년(1511) 12월 11일(정해)에 채수의 아들 홍문관 수찬 채소권이 아비 채수를 신원하니 다시 조율하라 명하였다.

즉, 중종이 석강에 나아갔다. 홍문관 수찬 채소권蔡紹權이 상소하여 그의 아버지 채수蔡壽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헌부에 명하여 다시 조율照律하여 아뢰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12월 11일(정해) 3번째기사>

◦御夕講。 弘文館修撰蔡紹權上疏, 爲其父壽訟冤。 命憲府。 更照律以啓。<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45면>

◦중종 6년(1511) 12월 13일(기축)에 대사간 박팽수가 겨울 천둥과 얼음이 없는 것으로 형벌과 정치의 해이함을 논하였다.

즉,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안팽수安彭壽ㆍ장령 김유金鏐가 전의 일을 논계했다. 팽수가 아뢰기를,

“전일에 상께서 겨울철 천둥으로 인하여 구언하셨는데, 성탕成湯의 육책六責(은나라 시조 성탕이 자책한 여섯 가지. 《순자荀子》에 “큰 가물이 들자 탕이 비를 빌면서 ‘정사가 절도가 없는 것인가, 백성의 생활이 고통스러운가, 궁실이 너무 화려한가, 후궁後宮들이 성한가, 뇌물이 성행하는가, 참소하는 자들이 일어나는가, 어찌 비가 이렇게도 오지 않는가?’ 하였다.” 하였다.)과 같은 뜻입니다. 《춘추전春秋傳》에 ‘얼음이 없는 것은, 정치가 해이해져(縱弛) 밝지 못한 상이다.’라고 하였는데, 해이해진다는 것은 형벌이 맞지 않는 것을 이릅니다. 전자에 이지방李之芳은 최질衰絰 중에 반인伴人을 장살杖殺하였는데, 가장家長이 품팔잇군(雇工)을 죽인 법으로 논했으니, 매우 잘못입니다. 중국中國은 종이 없는 자는 품팔잇군으로 종을 삼지만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인을 주는 것은 곧 국가가 재상을 중히 여긴 것이니, 노복이나 품팔잇군과는 매우 다릅니다. 태종조太宗祖 때 어느 종친이 비의 지아비를 죽였는데, 유사有司가 포박하여 왔습니다. 태종께서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종친을 포박하여 왔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 종친이 전하의 살려 주기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을 해쳤으므로, 도망 할까 염려해서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종친은 죄가 중해도 상께 고하지 않고는 포박할 수 없는 것인데 포박해 온 것은 살인한 죄가 중하기 때문입니다. 김윤문金胤文은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면하려고 꾀한 때문에 도 3년으로 논죄하였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평탄하든 험난하든 마땅히 한결같아야 할 것인데, 김윤문이 이러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크지마는, 이지방李之芳의 일과 비교하여 볼 때 차이가 있습니다.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은 것은 진실로 잘못이나, 옛날에도 또한 《전등신화剪燈新話》·《태평한화太平閑話》가 있었는데, 이는 실없는 장난 거리로 만든 것뿐으로 이지방의 일과는 다릅니다. 이미 정한 죄이지만 이제 상께서 조심하고 반성하시는 때를 맞아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12월 13일(기축) 1번째기사>

◦己丑/御朝講。 大司諫安彭壽、掌令金鏐論啓前事, 彭壽曰: “前日上因冬雷求言, 與成湯六責同意。 《春秋傳》曰: ‘無氷者, 政治縱弛不明之象也。’ 所云縱弛者, 刑罰不中之謂也。 前者李之芳, 在衰絰之中, 杖殺伴人, 以家長殺雇工之法論之, 甚非矣。 中國無奴者, 以雇工爲奴, 我國則不然。 伴人之賜, 乃國家所以重宰相者, 與奴僕、雇工甚異。 太宗朝, 有一宗親, 殺其婢夫, 有司縛致之。 太宗曰: ‘何以縛致宗親?’ 對曰: ‘此宗親, 傷殿下好生之德, 恐逃故也。’宗親雖有罪重者, 不得不告於上, 而縛致者, 以殺人罪重也。 金胤文規免鏡城判官, 而論以徒三年。 人臣當夷險一節, 而胤文如此, 罪固大矣。 然與之芳之事觀之, 有間矣。 蔡壽作《薛公瓚傳》, 固非矣。 然古亦有《剪燈新話》、《太平閑話》, 乃戲玩之爲耳, 亦與之芳之事, 有異矣。 此雖已定之罪, 今當恐懼修省之時, 敢啓。”<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46면>

◦중종 6년(1511) 12월 15일(신묘)에 장령 이성언 등이 채수의 일을 아뢰니 답하였다.

즉, 조강에 나아갔다. 장령 이성언李誠彦ㆍ헌납 박수문朴守紋이 전의 일을 논계論啓(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따져 아뢰는 것)하였다.

이성언이 아뢰기를,

“채수의 일은, 전에 헌부가 잘못 헤아려 사죄死罪로 조율照律하였으나, 이를 어찌 다시 조율하여 판부判付를 고칠 수 있으리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채수의 일은 당초의 조율이 잘못되었다. 내가 짐작하여 파직하였지만, 이제 그 아들의 상소를 보건대, 당초에 부당한 율문으로 조율하였으니, 뒤에 반드시 이것을 원용援用하여 전례로 삼게 될 것이다. 다시 조율함이 마땅하다.”

하자, 영사 성희안이 아뢰기를,

“채수의 조율은 진실로 실정에 지나쳤으며 신도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사서史書에도 괴이한 일들이 씌어 있거니와, 지금의 채수蔡壽도 우연히 한 것이요, 세상에 전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중종실록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12월 15일(신묘) 1번째기사>

◦辛卯/御朝講。 掌令李誠彦、獻納朴守紋, 論啓前事, 誠彦曰: “蔡壽事, 前憲府錯料, 照以死罪。 然此豈可以更照律改判付乎?” 上曰: “蔡壽事, 當初照律錯矣, 而予斟酌罷之。 今觀其子上疏, 初以不當之律照之。 後必援以爲例, 改照爲當。” 領事成希顔曰: “蔡壽照律, 實過其情, 臣亦欲啓矣。 歷代之史, 亦書怪異之事。 今壽偶爾爲之, 非欲傳世惑衆也。”<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47면>

◦중종 6년(1511) 12월 25일(신축)에 채수ㆍ김세준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채수蔡壽를 인천군仁川君으로, 김세준金世準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중종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12월 25일(신축) 2번째기사>

◦以蔡壽爲仁川君, 金世準爲司諫院正言。<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549면>

◦중종 9년(1514) 2월 5일(기해)에 금송과 연로하여 사퇴한 자의 우대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즉,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 이자견李自堅ㆍ사간 한효원韓效元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자견이 아뢰기를,

“사산四山(서울의 사방. 곧 둘레에 있는 산. 관리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에 말라 죽은 소나무가 많아서 흔히 사람들이 베어 가니, 청컨대 한성부로 하여금 순찰케 하여 좋은 재목이면 영선營繕에 사용하고, 재목이 못되는 것이면 기와가마에 쓰게 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자견은 대사헌의 지위地位에 있으니 마땅히 옳은 일은 권하고 나쁜 일은 막아서, 임금을 이끌어 도에 당하게 하고 백관百官을 바로잡으면 모든 직무가 수행될 것이어니와, 소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것은 유사有司의 할 일이니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할 것이 아닌데도 말하였으므로, 식자識者는 그 대체大體 모름을 기롱譏弄하였다.

영사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사산의 소나무 베어 가는 일을 대간臺諫이 아뢰었으나, 마땅히 한성부로 하여금 때로 낭관郞官을 보내어 순찰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광필은 이 때에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으니 마땅히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하며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사시四時를 순하게 하여, 만물로 하여금 모두 그 적절함을 얻게 한다면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이 다 같이 번성하고,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각각 그 직을 얻게 될 것이다. 옛날 자산子産이 정나라를 다스릴 적에 거리로 늘어진 복숭아와 오얏을 꺾지 않았다 하였다. 소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일은 낭리郞吏의 작은 일이니, 광필은 치도의 대체를 모르는 자라 하겠다.

지사知事 장순손張順孫이 아뢰기를,

“이석번李碩蕃 등이 스스로 늙음을 알고 물러나는 것은 가하거니와, 이제 연로年老하다 하여 체임遞任을 명한 것으로 말하면, 성종조成宗朝에서는 위로한 사람도 또한 위장衛將을 삼았습니다. 이번에 채수蔡壽는 병으로 면하고, 이굉李浤·양지손梁芝孫은 연로로 물러났는데, 성종조에서는 김종직金宗直·이약동李約東이 사직辭職하매, 그 때 그 사직을 가상히 여겨 그를 우대하였으니, 성종조의 구례舊例에 의하여 항상 우대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유생儒生들이 취학就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데, 학교를 일으키는 일은 위에 있는 사람이 격려하여 분기시키는 데 달렸습니다. 또 대사례大射禮(나라에 제사할 일이 있을 때에, 임금이 군신群臣을 모아 사예射藝(활 쏘는 기예. 사예는 육예六藝의 하나)를 시험하여 제사에 참여할 자를 뽑는 의례는 선왕조先王朝의 성대한 의식이며, 또한 학교를 일으키는 한 방법이니 지금도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학교를 일으키는 일은, 현명한 사장師長을 택하여 맡기는 것이 가하다. 대사례는 과연 성사盛事이니 4월 중에 시행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중종실록 20권,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2월 5일(기해) 1번째기사>

◦己亥/御朝講。 大司憲李自堅、司諫韓效元啓前事, 不允。 自堅曰: “ 四山多有枯松, 故人多伐之。 請令漢城府巡撿, 良材則用於營繕, 不材則用於瓦窰, 何如?”

【史臣曰: “自堅爲風憲之任, 當獻可替否, 引君當道, 糾正百官, 則庶職修矣。 松木斫伐之禁, 是, 有司之事, 不足以煩天聽而亦言之, 識者譏其不知大體也。”】

領事鄭光弼曰: “四山松木斫伐事, 臺諫啓之, 宜令漢城府, 時遣郞官撿察。”

【史臣曰: “光弼, 時爲三公, 當論道經邦, 理陰陽, 順四時, 使萬物咸得其宜, 則鳥獸草木咸若, 而公卿大夫各得其職矣。 昔, 子産爲政於鄭, 桃李垂於街者莫折。 禁伐松木, 郞吏之小事, 光弼可謂不知治體者也。”】

知事張順孫曰: “李碩蕃等自知其老, 而退休則可也。 今者至以年老, 命遞, 成宗朝, 年老之人亦爲衛將。 今者蔡壽以病免, 李浤、梁芝孫以老退休。 成宗朝, 金宗直、李約東退休, 其時嘉其退而優其老。 依成宗朝舊例, 常加優厚, 何如?” 又曰: “近來儒生不樂就學。 興學之事, 在上之人, 皷舞振作之耳。 且大射禮, 先王朝盛禮, 亦興學之一端也, 今可爲之。” 上曰: “興學校事, 擇賢師長而任之, 可也。 大射禮, 果是盛事, 四月間爲之, 何如?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5책 2면>

◦중종 10년(1515) 11월 8일(경인)에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가 졸(대부大夫 또 대접할 만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하였다.

채수蔡壽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成宗朝에서는 폐비廢妃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諫諍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시와 술)와 음률音律(음악)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반정反正 뒤에는 직사職事를 맡지 않고, 늙었다 하여 고향에 물러가기를 청해서, 5년 동안 한가하게 휴양하다가 졸하였는데, 뒤에 양정襄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중종실록 23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11월 8일(경인) 4번째기사>

◦仁川君蔡壽卒。 壽爲人聰穎, 博覽强記, 少以文藝顯名。 在成宗朝, 極諫廢妃之失, 有諍臣風。 然性輕躁、誕妄, 擧措粗率, 常以詩酒、音律自娛。 嘗作《薛公瓚傳》, 辭多不經, 士林短之。 反正之後, 不任以事, 以年老乞退鄕曲, 閑養五年而卒。 後賜諡襄靖。<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5책 120면>

Ⅵ.『설공찬전薛公瓚傳』의 산실 쾌재정快哉亭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산실인 쾌재정快哉亭은 2011년 1월 3일 지방문화재 제581호로 지정되었다. 이 쾌재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장가이면서, 중종반정공신으로 인천군仁川君에 책봉되었던 난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중종반정 이후 이조참판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지은 것이다.

채수蔡壽선생이 쾌재정에서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은 당시 훈구대신과 신진사류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 온 주인공 설공찬이 당시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18세기 후반에 중창된 산정형山頂形 정자로서 쾌재정이 보여주는 익공형식과 화반장식, 처마 앙곡 등의 수법은 건축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 이곳에서 지어졌다는 역사적 가치 역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