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鄕約 |
금 중 현 전) 상주시청 근무(사무관) 현) 녹색경북21추진협의회 추진위원 현) 상주문화원 부원장 |
상주의 鄕約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目 次> | ||
Ⅰ. 緖 Ⅱ. 향약의 기원과유래 1.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 2. 향약의 내용 Ⅲ. 조선시대의 향약 1. 향규鄕規와 향안鄕案 2. 향중공론 형성과 유향소留鄕所 3. 향약의 실시 경위 4. 향약의 종류 5. 향약의 조직과 기능 6. 퇴계退溪의 예안향약 7. 율곡의 서원향약西原鄕約 Ⅳ. 상주의 향약 1. 남촌향약南村鄕約 2. 노동향약魯東鄕約 3. 낙사계洛社契 4. 상주향약尙州鄕約 5. 김명수金命洙군수의 향약 동심계同心契 6. 기타향약계契 Ⅴ. 향약의 폐단 Ⅵ. 결結 |
Ⅰ. 緖
사람이 사는 사회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말론하고 규범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원시사회에서 외부의 적들이 침범해 왔을 때 공통으로 힘을 합하여 대처하는데 따른 자연발생적 규약이 있었고 사회가 발전 되므로 하여 농경시대 농사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연 마을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자치 조직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른바 두래라는 것으로 능률과 질서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두래 모임을 조직하고 운영하여 목적하는 것을 원만히 이루기 위하여는 참여자 상호간에 의견을 규합학고 공동체 전체를 원만하고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 하여는 정해진 규범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두래 형 공동체 양식을 대표하는 것이 신라시대 화백和白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과정에 서로 화합하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은 관계에도 서로 뜻을 같이 하도록 이해를 구하고 성실성에 바탕을 두어 순리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 자치 질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사회가 발전되어 촌락에서 행정촌적 지방자치 조직이 형성 되므로 하여 중앙왕권을 기반으로 한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에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정체로 하여 교화敎化 행정을 통치의 수단으로 하여 이른바 양반 중심의 신분제 질서의 토대위에서 지배체제의 영속화를 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교화행정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치행정의 지도이념을 구현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개국과 함께 제정되어 15세기후반인 성종대에 편제를 마친 경국대전에 따라 국가통치 기본골격은 유지 되었으나 16세기에 연산군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동안 임꺽정의 반란 등 천민 계층의 반발과 도적들의 봉기 그리고 불교 승려들이 도적들에 가담하는 경우가 있었고 사림 계열에서도 정여립의 모반으로 사회질서가 대단히 해이해 지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향촌사회를 교화하는 시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촌락 단위별로 스스로 깨우쳐 질서를 확립하는 방편으로서 향약을 실시 하게된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김안국金安國 경상도 관찰사가 도내 향교를 순회하면서 소학을 읽게 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나누어 주며 향리에서 적극 힘쓰도록 하는 사업을 실시하였던 것이 바로 국민교화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향약은 향촌의 질서유지와 상부상조 그리고 향풍 진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지방통치에 밑바탕이 되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향약의 기원과 유래와 함께 향약과 향안鄕案의 관계와 내용 그리고 지방수령과의 관계 등을 규명하고 조선시대의 향약의 실시경위와 선진된 지방 향약의 사례를 검토하고 우리 상주의 향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Ⅱ. 향약의 기원과 유래
1.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
중국 송나라 말엽 협서성 남전현에 도학자로 이름 높은 여대조呂大釣 등 4형제가 그들의 일가친척을 비롯하여 살고 있는 향리 전체를 교화 선도할 목적으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등 4강령을 토대로 하여 1076조에 이르는 공동체 운영을 위한 생활규약을 제정 하였는데 이것이 여씨 향약 또는 여씨 남전藍田 향약이라고 한다. 4강령의 근본정신은 멀리 삼황오제三皇五帝 때의 전설적 고사故事와 주례의 6덕 6행 8형을 기본으로 하여 도유道儒학자들이 이에 대한 학설을 주장한 것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여씨 4형제 중에는 정호程顥나 정이程伊 장횡거張橫渠 등 당대의 도유道儒 학자와 직접적으로 글을 배우거나 교유하면서 그들의 학설을 접하면서 향리 교화에 대한 구체적인 덕목을 정하였던 것이다. 이 여씨 향약은 같은 송나라 사람인 주자朱子에 의하여 더 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어 더욱 완벽한 규범으로 갖추게 되었으니 이를 두고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라 이름 한 것이다.
2. 향약의 내용
주자가 증손한 여씨향약도 남전여씨 향약의 근본강령을 주간主幹으로 한 것인데 여씨 향약전문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증손의 내용을 알 수 없으나 4대 덕목의 대체적 규범은 다음과 같다.
1) 덕업상권德業相勸
덕은 착한 일을 볼 때 반드시 행하며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반드시 고치며 자신의 몸을 바르게 다스리고 자기가정을 바르게 이끌며 효孝와 형제간 우애 그리고 바른 자녀교육과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게 하며 어른을 섬기고 친척과는 화목이요, 벗을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지니며 임무를 맡기면 거절하지 말며 다른 사람의 착한 일은 앞장서서 인도하고 여러 사람을 위하여 봉사 하여야 한다. 이로운 것은 더 일으키게 하고 해로운 것은 버려야 하며 처첩을 잘 대우해야 한다. 이밖에도 농사를 짓는 일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내는 일 등등의 항목이 있다. 이상 덕업의 내용을 잘 지키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에 서로 천거하여 선적부善籍溥에 기록하고 규정 데로 힘쓰지 않은 자는 경계하여 분발 하도록 한다.
2) 과실상규過失相規
과실의 유형은 의리를 범하는 일이 6개 조목이요 향약의 조약을 어기는 일이 4개 조목이며 의무를 위반 하는 것이 5개 조목이다.
(1) 의리를 위반하는 행위
∙술주정, 도박, 시비, 송사, 사기 등으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
∙법과 예를 지키지 않은 행위
∙행실이 공손하지 않은 사람
∙거짓말과 신의가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을 헐뜯고 무고 하는 자
∙지나친 과욕
(2) 향약조약을 어기는 행위
∙덕행과 사업을 서로 권하지 않는 일
∙과실이 있어도 서로 규제하지 않는 일
∙예속이 서로 원만히 교류되지 않는 일
∙어려움을 당하여도 서로 도와주지 않는 일
(3)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일
∙사람다운 행실을 하지 않는 사람과는 교유하지 않는다.
∙게으르고 태만한 행위
∙행동에 법도가 없는 일
∙일을 처리함에 정성껏 노력하지 않는 자
∙물건을 쓰는데 절도가 없는 일
위 5개 조목을 위반 하였을 시는 먼저 남이 모르게 충고하고 반성 하도록 한다. 이에 대하여 끝내 고치지 않으면 공회석상에 보고하고 제명 처분한다.
3) 예속상교禮俗相交
예속을 교류하는 일은
(1) 존유배행尊幼輩行
노소가 동행하는 경우 나이가 적은 사람이 노인을 잘 섬기며 노인 또한 젊은 사람을 잘 가르쳐야 한다.
(2) 조청배읍造請拜揖
젊은 사람들이 정초나 동지 등 명절에 문안을 드리고 인사를 하며
(3) 청소영송請召迎送 : 초청을 받고 왔을때 환영하고 갈때는 전송한다.
(4) 경조증유慶吊贈遺 : 경사스러운 일이나 궂은일에 예물과 부조를 드린다.
4) 환난상휼患難相恤
회원이 수재나 화재 또는 도적을 맞았거나 질병에 걸려 고생을 하며 가족 중에 상사喪事를 당하였거나 고아가 되었을 때 또는 분수를 지키며 살면 서도 집이 지극히 가난한 경우에는 회원 모두가 서로 도와준다.
Ⅲ. 조선시대의 향약
중국 송나라에서 시작된 향약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주자학이 전래되던 고려말 이나 조선 초에 주자대전과 함께 전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고 주자학을 근본으로 한 유교를 치국의 이념으로 한 조선왕조로서는 주자향약을 시행하는 것이 당연 하다고 할 수 있다.
1. 향규鄕規와 향안鄕案
향규라고 함은 향원조직의 규약이며 향계鄕契라고도 한다. 향촌의 전통씨족들이 계를 모아 계원의 명단을 기록하는데 그 기록부를 향안이라 하고 향안 명단에 기록된 사람을 향원 이라고 한다. 향원이 된다는 것은 그 씨족의 계통에 있어서나 본인의 자격에 있어서 명예스러운 일이고 향촌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일종의 절차적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향규와 향안은 조선 개국초부터 있어왔고 헌목憲目 이래의 오랜 전통을 지닌 우리 고유의 향촌질서의 관행이었다. 향규는 향원만을 대상으로 하고 향임鄕任의 선출절차 향청임원의 직무 향안 입록入錄 절차 자격 등을 규제하는 규약이다. 향규는 주로 향반을 대상으로 규제하고 향촌고유의 향권鄕權에 관하여도 규정하고 있어 무고한 향원이 형륙刑戮을 당하게 될 경우는 중대한 민원이 되고 때로는 수령守令과 향당이 대립 할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 향원의 향당이 결속하여 향권을 지킨다는 규정이 있다.
2. 향중공론 형성과 유향소留鄕所
조선시대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으로 유향소(일명 鄕廳)가 있었는데 수령 다음가는 관청이라 하여 이아貳衙라고도 한다. 그 임무는 신분의 구별 부역의 공평, 풍속의 교정 등으로 백성들을 안정시키는데 있다. 이와 아울러 향촌의 향원들을 회유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며 중앙 왕권의 집행기관인 수령이 하는 일들을 때로는 심의하고 합리적인 행정으로 유도 하고저 하는 현대의 지방의회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유향소에는 향임鄕任 혹은 감관監官 향정鄕正이라는 임원을 두게 되었는데 주州·부府에는 4 ~5인 군에는 3인 현에는 2인을 두었으나 조선후기 에는 점차 그 인원이 늘어났다. 이들은 향원 중에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중의 추천에 의하여 수령이 좌수 또는 별감으로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 이었으나 수령이 바뀌면 다시 뽑을 수도 있다. 맡은 임무는 수령의 밑에 있는 행정조직인 6방房중에 좌수座首는 이吏·호戶방을 좌별감이 예禮방을 우별 감이 형刑공工방을 맡아 분담 관장 하였다.
3. 향약의 실시 경위
중종12년(1517) 함양에 사는 김인범金仁範이라는 사람이 여씨 향약을 실시하자고 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대하여 조정이 대체적인 공감을 얻어 각도 감사로 하여금 널리 권장하게 하였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김안국金安國이 기존의 순 한문 으로 된 향약조문을 언해諺解하여 향촌에 까지 보급시키므로 하여 그 전파에 획기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김안국은 1517년(중종12년) 경상감사로 재직하면서 향약을 실시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19(중종14)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향약보급 추진 주동 인물들이 참화를 당하므로 하여 유교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방편으로 국민교화 추진운동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선조 때 와서 다시 향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비롯한 조정대신들 대부분이 향약의 실시를 주장 하였으나 왕은 대신 전원이 찬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자 자신도 시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는 것을 들어 비답을 늦추다가 향약 조약문 자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데 동의하여 잠정적으로 조약문을 널리 발표하게 되었고 계속적인 조신들의 청에 의하여 향약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이름 높은 선비들이나 지방의 유력한 인사들에 의하여 추진된 지방적 향약이 활발하게 시행하였다.
4. 향약의 종류
향약의 종류는 다양하여 주도세력 혹은 참여 층에 따라 사족향약士族鄕約 수령守令 향약 상하동약上下洞約으로 나누기도 한다. 다른 한편 단순히 지켜야 할 도덕적 기준에 관한 선언적 성격을 갖는 이념형과 실천을 전제로 하는 조직 형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조선 사회의 기본 질서인 성리학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조직이기도 하였다. 곧 명분론에 입각한 상하차별의 신분제적 질서와 소농小農을 기본 생산 층으로 하는 경제 체재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시행주체의 교화의 의지가 관철되는 것인 한편 향촌 사회에서의 주도권의 장악을 의미하였으며 때로는 혈연적 유대 조직으로써의 기능도 함께 갖기도 하였다. 처음 향약을 조직 할 때에는 향약 주도층에 따라 조직 구성의 의견을 모아가는 방법이 달랐다. 사족 향약과 상하동약은 향중 부로 등으로 표현되는 사족들 2~3인 혹은 몇 사람이 의견을 내어 향중의 동의를 얻어 결성하였다. 상하 동약의 경우 향민에게 뿐만 아니라 지방 향원 사족들에게 까지 상하가 함께 하는 동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는 조직 이었다. 수령守令향약은 수령이나 판관이 나서서 향촌내의 사족들의 동의를 얻어서 결성하였는데 율곡이이가 청주 수령으로 부임 하였을 때 실시한 서원향약西原鄕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향촌 조직을 결성하려는 데는 평소 주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곧 주도 집단은 향촌내의 지배세력이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이미 의사소통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마을이나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혼사를 맺고 친인척간이거나 향교나 서원에 적을 두고 있어 혈연적 지연적 학연적 관계로서의 인적관계망人的關係網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종 길흉사에 서로 부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소 교류하며 시회詩會 계회契會 등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의 문집 간행에도 글을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다. 향약은 시행하는 주도 세력에 따라 성격이 다르듯이 소통 하고자 하는 내용과 목적이 각각 차이가 있다. 사족이나 수령이 주도하는 경우는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마는 그 시행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의사소통의 상대를 두고 말하자면 사족향약은 사족 상호간에 의사 소통이고 수령향약은 수령과 군 · 현의 향민간 그리고 군 · 현민 상호간의 의사소통이며 상하 동약은 향촌의 상 · 하민간의 의사소통이다.
5. 향약의 조직과 기능
우리나라 향약의 기본정신은 화민化民성속에 있거니와 향약을 실시하고자 하는 모든 통치자들과 학자들의 공통적인 이상이요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 이황 · 이이 · 안정복같은 선각자들에 의하여 연구 창안 되었으며 실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는 덕망이 높은 학자나 중앙관직에 있다가 낙향한 전직 고관들의 주선에 의하여 향약이 제정 실시 되거나 이들과 수령 간에 적극적 협력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과 이념을 가졌다 할지라도 조직과 운영이 그 성패를 좌우 한다고 할 수 있다.
1) 조직과 역할
향약은 지방 자치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 운영 구조가 향약의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다라서 임원의 종류와 명칭도 여러 가지이다. 군 · 현단위의 수령향약 또는 사족향약은 도약정都約正 또는 도약장都約長 1명을 두고 부약정副約正 1~2명 직월直月 또는 유사有司 1~2명을 두었다. 향鄕 또는 면단위의 상하동약은 약정約正 1명과 직월直月 1명을 두었고 리里에는 리정里正 도는 장무掌務 1명과 색장色掌이나 사령使令 1명을 두었다. 도약정 또는 도약장은 향약의 중심인물로서 약원을 통솔하는 사람으로 향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선출하는데 관직에 구애 받지 않고 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복종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했다. 부약장 또한 배움이 있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아 도약장을 보좌 하는 직임이다. 도약장과 부약장은 원칙적으로 바꾸지 않는 종신직이나 부모의 상을 당하였거나 신병이 위중 한 것등 특별한 경우에는 교체하는 경우도 있다.
직월直月은 향약의 일반사무를 맡아 보는 간사 역으로 약원 중에서 1년간 교대로 선출한다.
리정里正 또는 장무掌務는 마을마다 평민 중에서 나이가 많고 마음이 곧은 사람으로 하고 직월이 지시하는 일을 수행하며 마을의 선행, 악행, 질병, 화복을 살펴 보고한다.
색장色掌 또는 사령使令은 리정 밑에서 사무를 맡아보며 매년 돌아가면서 선임한다. 이밖에 오장五長이라고 하여 다섯 집안의 선행, 악행, 질병, 환란을 살펴 위에 보고 한다. 그리고 문자를 모르는 평민이나 천민을 훈도 교육시키는 교훈敎訓이 있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향약의 구조는 그 기본정신과 실천 강령을 시행하는데 필요한 직임을 고루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자는 관직이나 신분 보다는 덕행과 학식이 있는 인격자로 하였다는 점은 민주적이고 자치적인 성격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
2) 운영방법
우리나라 향약의 운영 방법은 규약 내용 중에 여러 가지 표현방법으로 기술 되었는데 향회독약법鄕會讀約法 입약범례立約凡例 등에 수록 하였다.
향鄕에서는 매년도 1, 4 , 7, 10월의 사맹삭四孟朔 초순에 향교나 서원등 교회당에 모여 향약을 읽고 내용을 설명하는 독약회讀約會를 개최한다. 그리고 봄가을에는 향교의 석전제釋典祭나 사직제社稷祭를 기하여 대회를 여는데 이춘추 대회에는 약원들 모두는 물론 약원이 아닌 평민도 참가한다.
이 대회에서도 향약을 읽는 독약회를 갖고 주연酒宴을 배푸는데 술에 취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다투는 사람이 없도록 단속한다. 그리고 약원의 덕행과 과실을 이 모임에서 의논하고 협의하여 표창 하거나 처벌 한다 춘추대회 주연에 필요한 경비는 모임 전에 안내장을 돌려 약원 각 호당 쌀을 모아서 충당 한다 향약의 운영에 있어 주요한 것은 지방 수령의 적극적인 협조였다. 그리고 수령은 공론 형성의 주도세력으로써 재지 사족을 회유하여 향촌 질서를 확립하는 책무의 일환으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수령의 권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선정善政에 협조를 구하는 행정 홍보의 효과를 거양하기도 하였다.
6. 퇴계退溪의 예안향약
퇴계 이황이 관직에 있으면서 지방교화敎化제도의 미진함을 절감하여 1556년(명종11)에 그의 고향인 예안에 내려와 제정한 향약이다. 그가 만든 향약의 “향입약조서鄕立約條序”에 기록하기를
“지금 유향소는 곧 예 경대부京大夫의 뜻이 담긴 것이다. 인재를 얻으면 한나라가 숙연하게 안정되고 인재를 잃으면 한나라가 흐트러지는 것인데 하물며 한 시골의 풍속은 말 할 것도 없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가 혹 끊어져 실행하지 아니 한다면 예의는 버려지고 염치가 허물어져 날로 패풍이 유행하게 되어 오랑케의 풍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이것은 참으로 나라의 큰 우환이 아닐 수 없다............중약..................근년 이래로 운수가 불길 하여 우리나라의 도학군자들이 세상을 떠났으나 아직 옛 규범이 남아 있고 문의文義가 흥성한지라 이제 서로 앞장서면 나라가 어찌 잘못 될 것이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인심을 두려워 아니하고 풍습이 차차 그릇되어 맑고 향기 나는 소문은 드물게 들리고 좋지 않는 풍습이 자라서 통용되고 있으니 폐습을 막을 방비책이 없다. 이렇게 가다가 보면 악습이 방방곡곡에 침범하여 전체 향풍이 흐트러질 것이다. 농암 이현보는 이것을 근심하여 항상 향약을 실시 하여 좋은 풍습을 정중히 장려 하고자 하셨는데 지금하지 실현되지 못하였다. 농암의 여러 아들이 지금 상중喪中에 있고 자신은 고향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는데 고을 어른들이 다 우리 몇 사람에게 향약 제정의 일을 맡으라 하므로 농암의 뜻을 받들고 서로 의논하여 약조를 만들어 향민에게 널리 알리니 살핀 뒤에 옳고 그름을 지적하여 주면 뒤에 곧 완성시켜 영구히 시행토록 하여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하여 향약을 세우게 된 것이 자신의 창의 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고 선배 이현보의 유지遺志를 받고 그의 여러 아들들과 함께 상의하였음을 밝히고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김안국이 여씨 향약을 힘써 행한 일도 참고 하였던 것이었다. 퇴계가 향약을 실시하던 당시 까지는 유향소(향청)가 지방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유향소가 그 기능을 다하지 못 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향약을 세워 향민을 교화 하고저 한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예안 향약은 그가 살았을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그의 문집 연보에 전하고 있다. 이후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널리 영남 각 지역에 전파되었으니 우리 상주에도 예안 향약이 많은 영향을 주었던 만큼 약조의 전문을 여기에 적는다.
<예안 향약禮安鄕約>
◦부모 불순자父母不順者 : 부모에게 온순하지 못한 자(불효는 나라, 법에 따라 중형으로 다스리므로 그 다음가는 불 순자를 말한다.)
◦형제상투자兄弟相鬪者 : 형제간에 서로 불화한 자(형의 잘못이면 형제를 함께 벌하고, 동생의 잘못이면 동생만 벌한다. 형제 옳고 그름이 상반되면 형은 가볍게 벌하고, 동생은 무겁게 벌한다.)
◦가도 패란자家道悖亂者 :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부부가 서로 싸워 남녀의 분별이 없고, 본처를 쫓고 첩으로 본처를 삼거나, 서얼로 적자를 삼는 경우를 말한다.
◦사섭관부유관향풍자事涉官府有關鄕風者 : 단체를 구성하여 관을 비방하고 사욕을 자행하는 자
◦향장능욕자鄕長陵辱者 : 고향의 연장자를 모욕하는 자
◦수신 상부 유협 오자守身孀婦誘脅汚者 : 젊은 과부를 유인하여 간통하는 자
이상은 극한 형벌(무거운 죄로 다스림)인데 죄과의 경중에 따라 상 · 중 · 하로 구분한다. 상은 관청에 고발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고 친교를 끊는다. 중은 향리 단체에서 제명하여 사람 축에 들지 못하게 한다. 하는 공중 회합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그 지방에 살지 못하게 한다.
◦친척 간에 화목하지 못한 자
◦본처를 박대하는 자
◦이웃 마을 사람과 화목하지 못한 자
◦무리를 만들어 남을 때리고 욕하는 자
◦염치 불구하고 선비 기풍을 더럽힌 자
◦권세를 빙자하여 약자를 능멸하고 시비를 일으켜 침노하여 빼앗는 자
◦무뢰한들이 작당하여 행패를 부리는 자
◦공석이나 사석의 모임에 관에서 하는 일에 비방하는 자
◦거짓말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연좌시키는 자
◦관권을 빙자하여 사리를 도모 하는 자
o 목적 없이 향중의 공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
◦사리를 목적으로 향회에 참석하는 자
◦과세 의무는 이행하지 아니하고 부역만 모면하려고 하는 자
◦타인의 환란을 보고도 구하지 아니하는 자
◦관 · 혼 · 상 · 제에 이유 없이 시기를 잃은 자
◦향중 공의에 불복하면서 도리어 반감을 가지는 자
◦많은 사람과 접합하여 관역들 기피하는 자
이상은 중벌인데 경중에 따라 상 · 중 · 하로 다스린다. (상벌은 관에 고발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고, 중 · 하 벌은 경주에 따라 벌을 준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행동에 예절이 없는 자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시비하는 자
◦공회중公會中에서 사석으로 물러 앉아 자기 편리를 취하는 자
◦공적 모임에 지각하는 자
◦아전으로서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자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자
◦서민이 양반을 모욕한 자
이상은 보는 대로 적발하여 관에 고발하고 법에 따라 처벌 받게 한다.
이 황이 세운 약조約條는 이상과 같이 극벌極藅, 중벌, 하벌의 3대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을 통하여 과실에 대한 징벌 조목을 열거하고, 각 항목을 상 · 중 · 하로 구분하여 이에 대한 벌칙을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끝으로 악질 향리 등 네 가지 조목을 부쳐서 위반자는 모두 관에 고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퇴계의 약조는 여씨 향약 네 덕목 중 특히 과실상규過失相規만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의 가족제도를 중심삼아 지방 실정에 맞게 함으로써 가풍내지 향풍을 아름답게 해보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므로 예안 향약은 조선왕조초기에 왕권으로 제정한 향헌조목鄕憲條目과 비슷하여 주자의 여씨 증손 향약에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되 향중에 적합한 조약으로 하여 순수한 조선적 향약의 전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7. 율곡의 서원향약西原鄕約
율곡이 1571년(선조4) 청주목사로 재임하여 제정한 향약이다. 율곡의 향약은 수령 향약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향약은 주자 향약을 기초로 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수정 보완하여 조선적 향약으로 제정한 것이 특징이다. 서원향약은 청주 향약이라고도 한다.
그 구성 체계는 서문에 해당하는 입의立議와 조목條目 그리고 향회독약법鄕會讀約法으로 구성되었다. 조목의 내용은 먼저 임원의 명칭과 인원수를 적은다음 선행과 악행에 해당하는 모든 항목을 규정하고 끝으로 조목을 열거하였다. 선행과 악행에 관한 규정은 주자 향약에서의 덕업상권德業相勸의 내용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다만 첫 대목에 ‘능효부모能孝父母’를 기록하여 효행孝行을 선행의 출발점으로 강조하고 있다.
스물한 개 조목에 걸친 기록은 주자 향약에서 보는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당히 혼합하여 늘어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 향약에서 보는 4강령 가운데에 예속상교의 항목이 빠진 3강령으로 성립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어 있다.
과실상규過失相規에 해당하는 조항에 벌을 가하고 규제하는 내용은 상례喪禮때에 모인 사람들이 상을 차려놓고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위반한 사람은 예법을 무시한 규정으로 처리하였다. 또 까닭 없이 소를 잡는 것을 금지하였을 뿐 아니라, 30세 이하의 젊은 사람이 글도 모르고 무예도 닦지 않는 자가 있으면 소학小學, 효경孝經, 동자습童子習 등의 책을 읽게 하고 이에 위반한 사람은 벌로 다스렸다. 이상과 같이 상사喪事나 장사葬事에 있어서의 지나친 허례허식 및 형식화를 금하였을 뿐 아니라, 독서를 통한 사회 교화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향민들이 서로 다투고 송사를 일으킨 사건은 계장과 유사가 그 옳고 그름을 가리어 처리하되 그들만으로는 시비를 가리기가 불가능할 때에는 약원約員 중의 선비들과 회의하여 결정하였다. 그리고 잘잘못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도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송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처리하여 다스리되 그 정도가 무거우면 즉시 그 죄를 다스리고, 가벼운 것이면 악적惡籍에 기록하고 향중에서 결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관에 고발하였다.
환란상휼患亂相恤에 해당할 구휼救恤조항을 보면 상장喪葬, 병환病患, 무왕誣枉(죄가 없는 사람을 굳이 모함함)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동리에 상사가 있으면 색장色掌, 별검別檢이 즉시 유사에게 보고하여 약원 각자가 백미 한 되, 빈섬 한 장씩을 부조로 내게 하되, 가난하여 물품으로 부조하기 어려운 사람은 신역身役(몸으로 치르는 노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밖에 안장安葬때에는 각각 장정 1명씩을 내어 일을 돕고 장정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쌀1되씩을 내게 하였다. 혼인에 대해서는, 가난으로 혼기婚期를 놓친 노처녀가 있으면 관청에 보고하여 자장(시집갈 채비)을 지급하도록 주선하는 한편 약중約中에서도 필요한 부조를 베풀도록 규정하였다. 다음으로 병이 나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사람이 있으면 동리에서 각각 출력出力하여 농사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무고되어 형벌을 받게 된 사람이 있으면 연명(두 사람 이상이 차례로 서명함)으로 관청에 진정하여 억울한 사정을 해명해 주었다. 이상의 노처녀를 위한 일련의 조치와 죄업이 무왕誣枉에 처한 사람을 위한 연명신리連明申理의 두 가지 처사는 주자 향약에서보다 독특하거나 적극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약원의 조직에서 임원의 종류는 도계장都契長, 계장契長, 동몽훈회童蒙訓誨, 색장色長, 별검別檢, 유사有司가 있다. 그 인원수는 서원 향약자체가 어디까지나 청주 전체에 적용된 향약으로 전체 군에서 도계장이 4명이고, 청주를 다시 25개의 장내掌內(면)로 구분하여 매 장내마다 계장 1명으로 계장이 모두 25명이며, 유사, 동몽훈회, 색장을 각각 1명씩 두었다. 그리고 동리마다 별검 1명씩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향약 조직이 지방 행정 조직에 맞게 조정한 것이라든지 임원의 명칭을 계의 임원 호칭으로 대치한 것은 어디까지나 현지의 실정과 전통적인 습속을 존중하여 만든 한국적 향약으로서의 일면을 나타낸 것이다.
율곡의 향약을 대표적인 한국 향약으로 보는 까닭은 주자 향약이 조선 향약의 바탕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율곡 향약 또한 조선향약의 기본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주자향약의 형식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서도 임원의 명칭이나 소임 · 자격요건 선임방법 및 집회의 회수 · 규약위반자에 대한 벌칙의 내용과 방법이 주자 향약에서의 명목적 형식적인 것에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으로 적합하게 제정된 것 또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Ⅳ. 상주의 향약
위에서 잠시 서술한바와 같이 상주 향약은 퇴계의 예안향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퇴계의 적전敵傳 제자였던 서애 류성룡이 1580년 상주 목사로 재임함에 따라 월간 이전을 비롯한 월간의 동생 창석과 서애의 셋째아들 수암 류진柳袗 그리고 우복 정경세鄭經世 등 여러 선비들이 서애문하로 집지 하게 되므로 하여 퇴계학통과 함께 자연으로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월간 이전李㙉은 퇴계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우려 완성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서애를 통하여 전수받은 퇴계학맥의 핵심적 재전再傳학자로서 그가 살던 고장에 향약을 먼저 실시하게 되었으니 이르는바 상주 남촌향약이라고 하였다.
1. 남촌향약南村鄕約
남촌이라고 함은 대게 상주 남쪽에 지금의 청리면인 청남과 청동 그리고 지금의 외남면과 상주시 가장동 양촌동인 외남과 내남 4개 면을 이른다.
주자증손 여씨향약을 이 퇴계가 절충하여 예안 향약을 만들었고 지금의 현풍지방인 포산苞山에 김동명金東冥 군수가 다시 증손하여 포산 향약을 만들었다. 1634년(인조12)에 김상복金尙宓이 상주목사로 부임 하였을 때 월간 이전李㙉과 수암 류진柳袗 등이 주동이 되어 관의 협력을 얻어 향약을 처음실시 하였다.
향약의 주창자인 월간 이전은 이때 76세의 고령이었지만 사서沙西 전신全湜에게 글을 보내서 향약을 행 할 것을 적극 주장 하였다. 사서전식은 이때 관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을 때였는데 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우복이 서거 하였으니 우리들이 매우 외롭게 되었으며 고향풍속이 따라가지 못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앞장서서 후생들을 거느리며 연만하여 이를 성취케 하는 책임을 맡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향약을 행하는 것이 착한 풍속을 만회하고 새롭게 하는 우리 유림의 큰 모임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원 하건데 모인 많은 선비들은 자질에 따라 학문을 가르쳐 심신을 수습하고 .............운운
라고 하였다. 이때의 향약 내용은 퇴계의 예안향약을 그대로하고 포산 향약과 주자향약을 종합하여 제정하였는데 이와 함께 월간입규月澗立規 조목을 부차적으로 상세한 조항으로 하여 첨부하였다. 그 다음해인 1635년(인조13) 9월에는 향약을 실시 하기위하여 주성州城에 회합을 가졌는데 월간선생의 년보에 의하면
“9월에 향약을 시행하기 위하여 주성州城에 모였다. 선생이 손수 남전향약을 쓰고 또 퇴계선생이 정한 절목과 김동명 포산 군수가 찬술한 조례를 붙여서 설행設行할 계획으로 하여 모인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강론을 하였다. 이때에 김상복金相宓이 조정의 명을 받아 여씨향약 시행에 대하여 향대부에게 물으니 대중이 선생을 추대하여 향정鄕正으로 삼고 류수암을 부정副正으로 정하였다. 이후 매달 초하루에 조례에 따라 집회를 하여 향약을 읽고 또 소학을 읽기를 권하면서 수년 동안 시행하니 습속이 크게 변하였다.......중략.......선생께서는 사람의 배움이 오륜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오륜의 도리를 밝히는 데에는 소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하여 약중에 글로 깨우쳐 읽기를 권장하였다. 12월에는 서당에서도 향약회를 하였다.
고 기술하였다. 그 뒤 세월이 한 참 지나 월간의 5세손인 이광李壙이 자기 집에서 지난날 월간의 향약을 다시 정리하여 실시하게 되었으니 이를 일러 남촌4면향약南村四面鄕約이라 하고 그 발문을 이제성李齊聖이 지어 첨부 하였다.
남촌사면향약은 주자 증손향약을 근본으로 하고 그 각 덕목 말미에 예안 향약과 포산 향약을 첨부 기록하여 세부 조항을 종합적인 내용으로 정비하였고 끝부분에 매월 회의시의 절차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운영 방법을 상세하게 살 필 수 있는 것이다. 약원의 회의는 매달 초하루로 하고 먼 거리 거주자는 1년 4분기 중에 하루를 특별히 참석하는 날로 정하거나 년1~2회 정도만 회합에 참가하는 것도 허용 하였다.
회의가 있는 날에는 일찍 일어나 약정約正 부약정副約正 직월直月이 모두 의관을 갖추고 향교 또는 모임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에 회합장소 북쪽 벽에 옛 성인이나 유학자의 초상을 걸어놓고 동편으로부터 나이 순서에 따라 자리를 정한 다음 서로 인사한다. 이어서 직월直月이 회칙을 낭독하고 부약정은 뜻을 새겨 설명한다. 아울러 약원가운데 선행자와 불선행자를 서로 추천하거나 캐내어 선양하고 탄핵한다. 뒤이어 학문과 도의의 뜻을 강론하고 무예를 닦기도 한다. 강론을 할 때에는 비록 유익한 것이라도 편벽되고 어지러운 말은 삼가토록하고 조정이나 지방 행정의 잘못이나 다른 사람의 과실을 부풀려 과장 하는 자는 직월이 따져서 공박한다.
남촌사면향약의 약조는 전술 한바와 같이 예안 향약과 포산향약 그리고 월간 입규를 그대로 하였고 새로운 신증규약은 다음과 같다.
◦공무에 관한 책임을 맡는 사람이 염치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행실이 방정 맞고 엽관 운동을 일삼는 자
◦여러 관청에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출입하는 자
◦유생의 의관을 하고 시전의 장사꾼과 같은 방자한 행동을 하는 자
◦체면 없이 몰상식한 사람과 한패가 되어 명분을 문란케 하는 자
◦성질이 부박하고 가벼워 학문을 계승하여 숭상하기를 폐기한자
등에 대하여 상 · 중 ·하로 나누어 상벌은 관에 고발하고 중 · 하는 그 정도에 따라 다스린다. 살펴 보건데 남촌향약은 향안鄕案에 따라 결성된 사족향약 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고 있는 남촌향약의 고기록 끝의 남촌사면향약지南村四面鄕約識라는 후지後識를 찬술한 이제성李齊聖은 영조연간의 인물로서 존애원存愛院 창설에 참가한 전주이씨 가문 출신인데 후지의 끝에 임신년에 존애원에서 기록하였음을 밝혀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는 향교보다는 주로 존애원을 거점으로 하여 향약의 실행이 활성적이었던 것을 일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700년대 중기에는 존애원이 서당역할을 겸하였기 때문에 1749년 간행된 청대본상산지에 존애원을 서당 조목에 포함하였으며 존애원 회록에 의하면 1725~1757년까지 白場會라는 시회를 매년 개최하였는데 매회 100여명이 넘게 참석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이모임을 통하여 향약을 동시에 개최한 것인 듯하다.
2. 노동향약魯東鄕約
조선후기 상주를 대표할만한 선비였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노곡魯谷마을을 중심으로 상주 동쪽일원에 실시하던 향약으로 양반과 양민 모두가 참여한 상하동약上下東約이다. 이 향약의 부책인 향약제명록鄕約題名錄에 의하면
이향약이 제정 된 것은 백여년전(1600년경)으로 서노곡 · 동노곡 · 병성의 서로 인접한 사람들이다. 전해오는 제명록이 두 권인데 그중에 오래된 책에는 양반의 인원(약상)은 몇 사람에 불과하나 약하(평민)는 백수십명이 기록되어있고 또한 권은 종이가 많이 낡아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데 약상은 약간 명이고 약하는 수백명에 이른다. 당시의 동장洞長 조덕윤趙德胤이 옛 기록에 의하여 새 책으로 정비하였다......중략......이때 까지 서문이 작성되지 않았다가 식산이 이곳에와 10여 년간 살면서 약원으로 활동하므로 하여 제명록을 남기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예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걷는 걸음과 같아서 사람이 밟는 곳에 예가 아닌 것이 없다.....중략..... 여러 사람이 모여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멀리 있어도 서로 우의가 돈독하니 이것은 향약의 기여가 컸기 때문이다.
라고 1708년(숙종34)에 식산이 썼다. 이 마을 사람들 상하간은 향약에 종사 한 것이 이미 3~4대에 이르는 자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 상주에는 이미 임진왜란 전후에 향약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고 양반층보다 평민의 수가 많은 것은 지방민 대부분이 동고동락을 이루고자 하는 양속良俗이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동향약의 내용 중에 동계洞契 약조의 대강을 열거 하면 다음과 같다.
ⓛ 사상상휼死喪相恤 : 죽은 상례 때 서로 돕는 일
∙대상은 부모 · 자기 · 아내이다.
∙부모가 없으면 조부모 · 처부모 · 자녀로 대상을 정할 수 있으나, 결혼하지 않은 자녀는 제외한다.
∙조부모 · 처부모가 없는 경우 백숙부모 · 동생 · 형으로 정할 수 있다.(옮겨서 해당되게 하는 것은 초상에 주로 하는데 본인이 죽은 경우 해당이 없다.)
② 상원(양반)이 초상이 났을 때
∙일꾼은 현재 있는 데로 파악하여 모두 동원한다. (각자가 이엉 1마람, 새끼 15발, 석가래1개씩을 내어 놓고 하룻동안 부역한다. (식사는 각자 부담)
∙송진 한 말을 부의로 보탠다. (봄가을로 講信 : 향약 때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며 약법約法이나 계契를 맺음)할 때에 한 사람이 한 홉씩 가져와 창고에 수합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쓴다)
∙참깨 두 말을 부조 한다(상 · 하 모든 가정에서 수합하여 본전은 항상 그대로 두고 그 이자로 상 · 하 양원 모든 집에 지급한다)
∙빈섬 4장을 모아서 보탠다.
③ 영장永葬(안장)
∙상여꾼은 그때그때 있는 대로 다 모은다. 각각 탁주1말과 소나무 횃불한 그루씩을 전날 저녁에 가지고 모인다. 일꾼의 저녁밥은 쌀 한 사람당 1되씩 각 동리의 색장(총무격임)이 모아서 상가에 보낸다
∙초상 : 모두 모여 초상을 치룸
∙영장 : 모두 모여 치전(사람이 죽었을 때 슬픈 뜻을 표시하는 제식祭式과 호상을 한다.
∙대소상 제회齊會때 치전致奠한다. 내상인 경우 생시에 상면하지 않던 사람은 사당에 올라가지 않는다. 다만 치상과 호상인 경우는 예외이다. 부득이한 연고가 있어서 문상하지 못할 때에는 그 사유를 유사에게 알려야 한다. 아무런 사유 없이 초상 때 불참하면 면책面責한다.
④ 하인(평민)의 장례시
∙쌀8말 · 콩4말 · 참깨1말을 부조한다.
∙담지꾼(상여꾼)은 다만 한 패 동원한다. 30명 이하의 인원이 각자 탁주1말 · 관솔 한 그루씩을 가지고 하루 전날 저녁에 가져오게 하여 모아 둔다
∙상 · 하 계원이 입계한지 15년이 지난 사람이 살았을 때 한 번도 초상을 치른 일이 없이 죽는다면 그와 부모 · 부인 세 사람 중 한사람이 3년 안에 죽는 장례에는 본인의 생시와 같은 혜택을 받도록 한다. 죽은 지 3년이 지나면 효력이 없어진다.
∙부역꾼은 초상 때만 쓰고 만약 초상을 핑계로 다른 일을 시켰을 때에는 상원은 탈퇴시키고 하인은 매40대를 때렸다.
∙하인으로서 입계한 지가 15년 이상이 된 사람이 늙어서 부역하기 어려우면 부역꾼에서 면제시키고, 그 대신 매년 가을에 초석 한입씩을 납부하게 하여 계의 비품으로 사용했다. 65세 이상이면 노인으로 취급한다. 입계한지 15년이 지나지 않으면 비록 늙어도 허용하지 못했다.(혜택을 받지 못했다.)
⑤ 혼가 상부 : 혼례 때 서로 도운다.상원이 자부나 사위를 볼 때 보조는 말린 어물 1마리·청주 5주발·산 닭 1마리·땔나무 1짐이다. 실행하지 못하면 계원과 함께 꾸짖는다.
⑥질병이 있을 때 서로 두우는 일 : 유행성 질환으로 1개월이 지나거나 중병으로 조석으로 식사도 하기 어려운 환자에게는 백미4말 · 벼10말을 거두어 부조한다. 혹은 병으로 인하여 실농하거나 할 일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한패 분의 식량을 지급하여 하루 동안 역군들이 농사를 돕는다. 만약 실행하지 않으면 20대의 태형笞刑을 가한다.
⑦ 환란을 당했을 때 서로 구제한다.
∙실화失火되어 집이 타면 상하원이 각각 석가래 1개 · 새끼15발 · 이엉1마람을 가지고 또 자기 식량을 가지고 가서 하루 동안 부역한다. 가산家財을 다 태워 버리거나 도적을 만나 밥을 굶게 되었을 때에는 계금으로 벼 10말을 지급한다.
⑧ 권선징악 :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징계한다.
∙선행이 드러나면 계에서 벼1섬을 상금으로 주고 특히 뛰어난 선행은 관청에 보고해서 표창하도록 한다.
∙불효不孝 · 부제不悌 · 불목不睦한 자는 나라의 일반적인 법률에 따른다. 젊은이가 어른을 욕보이고 싸움질을 하여 거칠게 행동하거나 계원을 모함하는 일을 한 자는 관청에 보고하여 죄를 다스리고 계에서 제명시킨다. 죄가 가벼운 자라도 그 지방에서 쫓아 버린다. 하인은 내어 쫓거나 혹은 죄로 다스리되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계의 재산에 손실이 생기면 그 관리를 맡은 사람이 삼가지 못한 탓이다. 약조를 위반했을 때에는 그 정도가 무거우면 상종相從하지 아니하고, 가벼운 자는 강신講信 때에 그 하인을 20번 때리고 면책面責(마주 대하여 꾸짖음)한다.
∙계의 모임이 있을 때 상인上人이 무단히 불참하면 제마수濟馬首(벌의 일종, 꾸짖는 일)에 처분하고 하인下人이면 패牌안에 보고하여 꾸짖고 유사에게 고한다.
∙강신 때에 떠드는 자 · 예의가 없는 자 · 의관이 바르지 못한 자 · 행동이 무례한 자 · 까닭 없이 늦은 자는 면책한다.
∙계상契上(전체 계의 재산인)에 상여와 차일 · 반사기盤沙器(소반과 그릇)기타 집기 등은 계원 외에는 빌려 주지 않는다. 계원이 빌어 쓸 때에는 일일이 숫자를 확인하여 주고받는다. 만약 파손이 있을 때에는 유사가 즉시 보충 시킨다. 사기그릇을 파손 하였을 때에는 그릇으로 대치시키고 대치가 불가능할 때에는 유사에게 책임을 묻고 관리 책임의 하인에게 30번의 매를 때려 벌한다.
∙상하의 계원에게 벌을 줄 때에는 강신 때 유사가 하나하나 빠짐없이 시행하여 용서를 해주든지 하여 숨기는 습성이 없도록 한다.
∙전곡錢穀(돈과 곡식은 항상 200석을 비축하여 두었다가 풍년이 들더라도 식량이 없는 계원에게 분배하고, 흉년일 때에는 고루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이자 없이 돌려받는다.
∙계의 돈과 곡식은 되와 말 정도의 적은 양이라고 계원 이외에는 분배 하지 않는다. 만약 규정에 위반이 되면 유사의 하인과 고지기庫直(창고 관리자)에게 30대의 매를 때린다.
∙매년 계의 재산을 분배해 주는 시기는 4월로 하되 고루 나누어 주고, 수납하는 시기는 10월 보름 이전으로 하되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받아들인다. 만약 기일 내에 납부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먼저 20대의 매를 때리고 또 받아들인다.
∙매년 봄과 가을에 강신講信을 하는데 상하원 중에서 가려 시킨다. 무고히 강신례를 행하지 않는 자는 유사가 두 차례 강신을 겪은 뒤에 바꾸어 할 것을 허락하고, 돈과 곡식의 미수가 있으면 허락하지 아니한다.
∙이상의 약조는 봄가을 강신 때에 글을 잘 읽는 사람을 시켜서 큰소리로 읽게 하고 하인들을 일일이 깨우쳐 일을 처리하는데 규정을 위반하는 사례가 없도록 지도한다.
∙담지 꾼(상여 메고 산역하는 사람)은 50리 밖에 출타를 못하게 하고 묘지 가 50리 박에 있는 자는 한 사람에 대하여 초상 때 담지 꾼 에게 쌀 한말씩을 값으로 준다.
∙무릇 계에 한 집안에 4명(부·자·형·제)이 계에 들어 있어, 상을 당한 경우 초상시의 혜택을 한꺼번에 받으려고 하면 죽은 뒤부터 영장 때까지 2인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다음 해 선묘先墓에 일이 있을 때 옮겨 쓰는 것이니 본인의 원에 따라 지급한다.
∙상하 계원과 일부 감독 임원은 벌칙미罰米가 완비되었으나 심상히 생각하여 윗사람의 잘못이 심하니 한심하다. 이제부터 다시 두 번 상고 당한 자는 마땅히 탈퇴시킨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동향약의 참여구역은 상주 동편의 현재 외답 · 헌신 · 화개 · 병성 · 도남 마을 사람들 62명의 향약으로 약조의 내용이 대단히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시의에 적절하여 일부조항을 근간으로 한 규약이 현대에 이르기 까지 적용되어 마을마다 동계가 조직 유지되었던 사례가 많이 있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환란상조” 조목에 전곡 200석을 비축하여 식량이 없는 계원에게 무이자로 대여 하였다는 것은 전통 농경시대로서는 대단히 전향적이고 획기적인 대책이고 그 재정의 규모 또한 방대하여 특기할 일이라고 사료된다.
3. 낙사계洛社契
낙사계는 1566년(명종21)에 상주남촌을 중심으로 한 송량등 15명의 사족들이 결성한 병인계丙寅契와 1578년(선조11)에 이전李㙉 등 21인의 사족들이 결성한 무인계를 1599년(선조32)임진 왜란이 끝나는 해에 합하여 하나로 합계한 일종의 사족향약이다 전대미문의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고 난 뒤 민심을 수습하고 미풍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계는 존애원 설립의 기반이 되었고 조선후기에 까지 대계大稧로 발전되었으며 오늘에 까지도 그때 참여한 13개 문중이 매년 취회를 열어 옛 선조들의 덕행을 기리고 있는 자랑스러운 상주만의 아름다운 고사故事라고 할 수 있다.
낙사계에 대한 내용은 우곡집愚谷集에 낙사계조약서洛社契條約序 11조가 기록되어 있고 우복 정경세의 낙사계서문序文이 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향리는 일찍부터 좋은 풍속이 있어 사족 상호간에 교류와 노소간에 서로 대하는 예절이 있어 고을에는 향약이 실시되고 당마다 계가 있어 규약을 정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통하여 예절을 연구하고, 도리를 밝히니 한결같이 풍속이 순화되고 문풍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화목하니 군자의 고을이란 칭찬을 받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계가 크게 발전 하였는데 병인년에 조직한계에는 향부로와 존장이 모두 참여하여 그들의 자제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 무인계가 있어 매년 봄가을로 날을 정하여 한자리에서 회음會飮하되 예와 악樂이 있었다. 서로들 공경하고 화목한 태도가 차례가 있고 훈훈한 기쁨이 있어 덕업을 서로 권하고 과실을 살피며 모여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거친 말이나 지나친 행동이 없었다. 내가 젊을 때 하석에 참석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한없이 즐거웠는데 만년에 신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병난을 겪고 난 뒤인지라 만사가 전과 같지 아니하니 감회가 착잡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때 부로와 친구들이 서로 말하기를 난리를 겪고 다행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옛날 하던 일들을 다시 닦고 좋은 모임을 다시 열어야 하겠는데 전란 중에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고 벗들은 겨우 몇 사람만 남았으니 슬픔을 이길 수 없으나 전에부터 내려오던 두 계를 하나로 합하자고 하였다. 이에 서로 약조를 정하여 나이에 구애 받음이 없이 원전(原典)을 쫓아 그의 자제나 자제가 없으면 사위를 입적시켜 옛 정의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계적을 완성하고 나에게 서문을 쓰기를 부탁하여...........쓰게 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이 서문에 이어서 새로 만든 모임의 뜻을 효봉孝奉하고 선속善俗이 흐트러질까 걱정하며 예양禮讓에 성심을 다하고 노소가 서로 도리를 다하여 옛 풍습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낙사계에서 정한 약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진덕준행進德遵行 : 갖가지 효제와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돈독하게 하고, 모임에 향음례鄕飮禮를 행할 때 주자의 백록동 규약을 강講한다.
② 과실상규過失相規 : 착한 행실을 하도록 서로 충고하고, 인정 없는 말과 표정을 하지 않도록 하며, 다정하고 친절하게 타일러 깨우치도록 하며, 성현이 전하는 학문을 서로 힘쓰게 하며, 유생儒生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게 하며,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지 말며, 체모體貌(체면)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중社中(회원중)의 여러 사람이 함께 경계한다.
③ 성애상접誠愛相接 : 모든 회원 중에 길흉사吉凶事가 생기면 가서 축하나 조문을 해야 한다.
④ 환난상구患難相救 : 수재水災 · 화재火災 · 도적 · 질병을 당한 경우 그 정도의 경중輕重(가벼움과 무거움)이 있기 때문에 임시 회의를 열어서 정도에 맞게 의논하여 처리한다.
⑤ 유경상하有慶相賀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사람이 있으면 듣는 즉시 그날로 찾아가 축하한다. 만약 유고하여 직접 가지 못할 경우에는 아들이나 조카를 보내어 서찰書札(편지)로 축하한다.
⑥ 유상상조有喪相助 : 회원 중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듣는 즉시 가서 조문하고 초상부터 상을 마칠 때까지의 예를 헤아려 장례 중 예절의 도를 신중히 하여 상제를 위로한다.
⑦ 부의賻儀 : 계의 이름으로 상중喪中에 상포喪布 3필 초석草席(짚자리 또는 돗자리) 5엽葉, 종이5권, 큰 창호지 2권을 부조하고, 장례 때는 쌀20말斗 들깨 · 보리쌀 각 5두, 콩10말을 부조한다.
⑧ 전의奠儀 : (죽은 사람의 영전에 바치는 물건, 장례 전 술 · 과일 등을 차려 놓는 일) : 죽은 사람과의 친분에 따라 장례전과 소상 때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제를 올린다.
⑨ 선영개장先塋改裝 및 비갈碑碣 : 선영을 이장하거나 비갈(비석과 갈 - 머리 쪽을 둥글게 만든 작은 비석)을 세울 때 하는 역사(토목 · 건축 따위의 일) : 부조로 쌀 20말을 한다.
⑩ 회일會日 : 봄은 2월 보름, 가을은 8월 보름날로 정하되 만약 회일에 비가 오면 날을 다시 정하여 모인다.
⑪ 유사有司 : 계의 조약에 따라 1년마다 교체한다.
이상 계의 조약 11조의 대 원칙은 효제를 돈후敦厚(인정이 두터움)하게 하고 덕행을 쌓아 행하는 것인데, 만약 사사로이 규약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재삼 훈계하여 고치도록 하고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계에서 내 쫓는다.
위와 같이 조문을 밝혀 적고 있어서 이 계가 바로 향약과 같은 덕목 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향약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고 그 당시 사회 실정에 비추어 실현 가능한 내용으로 짜여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상부상조의 정신이 크게 부각되어 있어 우리 민족의 전통 속에 내려오는 계의 정신을 바탕으로 향약 정신이 합쳐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향토에는 임란 전부터 향약이 크게 성하여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진 곳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임란과 같은 큰 전란을 당하면서도 선조가 말한 바와 같이 상주의 사족士族은 한 사람도 왜놈에게 부역한 사람이 없었다는 칭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전란으로 해이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흐트러진 도의를 바로 잡으며 민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뜻있는 몇 분들이 모여 계를 조직하고 계를 통하여 자치적으로 미풍 육성에 힘썼던 것이 바로 이 낙사계의 조직이라고 생각된다.
4. 상주향약尙州鄕約
이 향약은 1885년(헌종1) 전 승지 조덕 외 12명의 전직관료와 지방유생들의 연명으로 상주목사에게 올린 글이다. 그 내용은 전편에 여씨향약과 주자향약 및 퇴계향약을 종합하여 기록한 뒤 여러 가지 사회적 폐단을 항목별로 상세히 기록하여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도록 향약소에서 조문을 추가 실시 할 것을 허락해 달라는 소장疏狀이다. 이것을 “시폐증보時弊增補”라고 하여 그 사유를 다음과 같은 조항으로 열거 하였다.
① 고을의 풍속이 극도로 해이해졌다.
② 이대로 가다가는 장차 수습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이만 할 때 관민이 힘을 합하여 막아 보자는 것이며
③ 향중에 덕망을 갖춘 부로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였음을 강조하고
④ 공자나 맹자 장횡거와 같이 정전井田이론이 모두 당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만약 그 당시 실현되었다면 그 세대에 밝은 정신을 심어줄 수 있었을 것임을 강조하여 이 요구가 정당함을 밝혔다. 이어서 폐단의 사례들을 열거 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 유궁儒宮(유림들이 모이는 장소)의 폐단유궁은 선비들이 모여 학업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학문을 강론하며 풍류를 즐기는 일이 본분인데, 근래에 와서는 학업은 전폐하고, 행동이 크게 허물어져 유궁의 임원은 흐리고 어지러워 실수가 많고, 선비는 단정한 행동이 없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병폐다. 이제부터 만약 백성을 못살게 하며 염치없이 행동하여 방정하지 못한 사람은 향약소로부터 무겁게 처벌한다.
㉯ 지방 호족(세도가)의 폐단상주는 원래 세도가나 무단武斷의 폐단은 없었으나 다만 사람 된 행실이 문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사족士族 스스로에서 일어난 것이다.선비가 청렴한 태도로 아랫사람을 부리고, 예절 있는 행동을 하면 사람다운 행실이 문란할 까닭이 없다. 이제부터 만약에 남을 위협하여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취하여 이익을 도모하거나 스스로 염치와 예절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향약소로부터 먼저 무거운 벌을 준다.
㉰ 창고의 폐단상주 고을에서 실시하는 빈농 구제책으로 고을 사창社倉(각 고을에서 백성에게 꾸어주는 쌀을 간직하던 곳집)에 저장한 곡식을 봄에 농민들에게 꾸어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던 제도인 환곡還穀에 있어서 폐단이 심하여 민생고가 더욱 심하게 되었다. 원래 환곡 제도는 창고에 있는 곡식을 절반만 나누어 주고 나머지 절반은 간직해 두어야 하는데, 그 규정대로 시행한다면 눈앞의 근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 의한 조치는 최고 관청인 중앙 정부의 결정에 그치고 만다. 창고의 관리를 맡아보는 아전이 없는 곡식을 있는 것처럼 상사에 보고하고, 창고에 있는 곡식을 모두 억지로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합하여 받아 착복하는 일과 쭉정이를 섞어서 한 섬을 두 섬으로 만드는 등 실로 그 폐단이 대단하여 백성들의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짓을 하는 것이 관리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만약 이 뒤로도 이러한 행위를 하는 아전이 있으면 향약소에서 관 처에 보고 하여 죄를 다스리게 한다.
㉱장차將差(고을원이나 감사가 심부름으로 보내는 사람)의 폐단 사자使者가 관의 명령을 받아 면面에 나가는 것은 환곡과 세금을 독려하기 위한 본래의 직분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이런 무리들이 본래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사욕을 채우기에 바쁘다. 만약 욕심을 채우지 못할 경우엔 양반에 대해 비방하고 욕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또한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 이 뒤에 만약 전과 같은 행동을 하는 사자가 있으면 향소로부터 관청에 보고하여 엄하게 다스린다.
㉲상놈이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폐단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지고 명분名分이 무너져서 상놈이 양반 욕하기를 밥 먹는 것을 보는 듯하다. 먼저 뒤로는 만약 양반을 업신여기고 욕보이는 행동이 있으면 향약소에서 먼저 매를 때리는 형벌로 처리하고, 그래도 계소하여 행동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관 처에 보고하여 징계한다.
㉳ 세금을 두 번 받는 폐단세금은 본래 양반과 상민에게 모두 징수하는데, 근래에 와서는 호적을 개편할 때 그 정리를 맡은 아전이 호수를 터무니없이 늘리어 호세를 받아쓰고 관에는 전혀 바치지 아니하고 사취한다. 또 전 가족이 도망가고 없어 세금을 바치지 아니하면 이웃집으로 부터 보충하기 위하여 두번씩이나 받아 간다. 군포軍布는 현역에 종사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포목 두 필씩을 받는 법인데 소임所任을 맡은 사람이 사사로이 받아먹고, 도주하고 없으면 관청의 사자가 여럿이 나와서 이웃과 친족에게서 강제로 징수 하게 하여 받아간다. 이 두 가지 일은 참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지극히 심한 폐단이다. 이 뒤로는 호수를 새로 늘리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군포를 받아들이는 소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쓴다. 만약 전과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향약소로부터 관에 보고하여 엄중하게 다스린다.
㉴ 묵은 세금을 되려 일으키는 폐단고을에 토지 조사를 맡은 서원書員(아전의 하나) 숨겨서 토지 대장에 누락시킨 논밭을 은결隱結이라고 하는데 토지 대장을 정비하는 서원이 좋은 땅을 은결로 만들어 놓고 사사로이 세금을 받아 사복을 취하며, 모래밭으로 백여 년을 묵은 땅을 대장에 올려 세금을 강제로 징수한 폐단이 있어 백성들의 살을 깎는 원한이 되고 있다. 그러니 토지 조사를 사실대로 하여 땅이 없는 곳이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는 특별히 사정을 보아 세금을 면제하여 강제로 징수하는 일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 군포 징수에 사고를 보충하는 은혜 병적兵籍은 정치에 있어 가장 먼저 바르게 정비 되어야 할 사무이다. 군적에 돌린 사람은 영조 때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로 베(布木) 한 필씩을 바치게 되어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병적을 정리하지 아니하고 그 처妻나 친족으로부터 대신 받아가는 폐단이 많다. 죽은 사람을 빼고 대신 보충하여 세를 충당 하여야 하는데 사무를 맡은 아전들이 양역良役을 담당해야 될 사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숨겨 두므로 대치 할 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가령 역졸로 허위 기록하여 모면해 주기도 하고 인연 있는 양반의 집에 소속시켜 빼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로 뼈를 깎는 폐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행히 관청에서 엄하게 널리 사실을 조사하고 있다. 만약 여전히 면역免役시켜 주는 폐단이 있으면 향약소에서도 철저히 가려낼 것이니 이를 고르게 해주길 바란다.
㉶ 도결都結(고을 아전이 축낸 세금을 메우려고 결세結稅(田稅)를 정액 이상으로 받는 것) 의 연유도결은 토지에 대한 세금을 정액 이상으로 일정하게 높여 받는 것이다. 지금 관청의 집들이 허술하여 중수重修(낡은 것을 다시 손대어 고침) 하기가 급한데 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다. 객사客舍(왕명을 받들고 오는 벼슬아치를 접대하고 묵게 하던 집)가 넘어질 지경이나 세금이 고되어 백성들에게 호별로 거두어 보수할 형편이 못되니 도결로 받은 세금의 일부로 향교와 국가의 관사(관공서)를 보수한다면 사대부 집과 일반 서민들도 다 혜택을 입을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사대부와 서민들의 지극한 소원이다. 만약 전결田結(土地)에 부과하는 잡부금을 백성들에게 정액正額이상으로 받은 곡식인 도결로 변통한다면 백성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향소가 관계할 일이 아닌 것 같으나 일이 백성의 이해에 관계되므로 품신하니 잘 다스려 주길 바란다. 라고 하였다.
위 청원서를 제출한데 대한 목사의 답변은 제출한 내용이 향약제조항에 따라 모두 합당한 것이라고 하고 관민이 서로 힘써 이를 없애도록 노력하고 사무를 담당하는 유사를 잘 선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위와 같은 절절한 시폐절목의 청원을 감행한다는 것은 지방 관리의 폐정을 바로 잡기 위한 뜻있는 향민이 규합하였다는 그자체가 왕권 전제시대에서 대단한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가운데 관과 민간에 언로言路가 열려 있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김명수金命洙군수의 향약 동심계同心契
1) 시대배경과 주관자
이 향약은 조선말기 당시의 상주군수 김명수가 입안하여 실시한 수령 향약이다. 당시는 1894년 갑오경장과 동학 농민혁명 그리고 청일전쟁 등이 일어난 직후로서 나라는 외세의 란무장亂舞場이 되었으며 조정은 혼미하여 통제력을 상실하고 백성은 갈 바를 모르며 윤리강상은 타락하여 혼란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김군수가 작성한 향약의 서문을 살펴보면 자기 나름 데로 생각한 향약의 필요성과 그 당시의 시대상을 더 소상히 엿 볼 수 있어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향약은 천주교 계통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그 표지에 “향약동심계鄕約同心契”라는 표재가 있고 표재와 다른 글씨로 차책옥신부此冊玉神父 추심어상주채약장처推尋於尙州蔡約長處라는 글이 쓰여 졌는데 향약 책본 입수 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에 향삼물로 가르치고 향8형形으로 규계하니 위로는 교화가 밝아지고 아래로는 풍속이 아름다워졌는데 남전의 여씨 향약은 곧 규모와 조약이 더욱 상세하여졌다라고 하였으니 향약은 비록 송대 여대조가 창시하고 주자가 증손한 제도라고는 하나 그것은 주례의 유제遺制로 그 만큼 염원이 깊음을 말해주고 있다.
◦향약을 일방一方에서 행하면 일방의 백성을 교화 할 수 있고 일향에서 행하면 일향의 풍속을 바꿀 수 있으니 천하를 위하여 국가는 모두 당연히 제도로 이것을 명시 한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향약은 완전한 민간 운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의 지도와 지원 하에 시행되었음을 알수 있으며 그 시행 지역도 동 · 면 · 혹은 군 등 크고 작은 지역단위로 이루어 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근래에 와서 날로 차서次序가 희미해지고 고장에 아름다운 풍속이 없어진지 오래다. 이설異說을 자행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따위의 일들이 점점 성행하여 무부무군지역無父無君之域에 이르렀으니 통탄할 일이다. 내가 1900년 12월에 이 고을 군수로 와 보니 관원은 고달프고 촌민은 어리석어 비록 배가 부르더라도 정도를 지키기 어려운데 하물며 갑오경장 후로는 문호를 개방한다, 어쩐다 하니 민심은 흩어지고 풍속은 퇴패하여 서민은 거리낌 없이 분수를 어기고 사부士夫는 스스로 목독하고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이론異論이 시끄러워 윤리강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데 이는 모두 교화가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이런 때에는 이향약이 급선무이므로 나는 이 고을에서 이를 시행코자 고을의 백성과 선비를 모았더니 즐겨듣고 잘 따르니 일이 매우 성황을 이루었으며 사교邪敎를 끼고 민심을 어지럽히면 이미 8형의 죄로 다스리고 있었으니 이 향약으로 하여 모두가 눈을 밝히고 두려움 없이 곳곳에서 살피고 바로 잡으니 처벌하기도 전에 민속이 스스로 정도로 돌아갔다.
2) 향약의 절목과 조직
위와 같은 김군수의 서문에 이어 절목節目을 나열 하였는데 향약의 기본4개 덕목과 이에 따른 세목細目이 32개목으로 서문에 밝힌 것들을 자기가 생각하는 실정에 맞게 고치고저 하는 것들이다. 향약의 조직은 도약정都約正, 부약정副約正, 약유사約有司 각 1인을 두어 군 전역의 약무를 관장하고 각 면에 약정1인 마을에는 직월直月 색장色掌 별검別檢 1인씩을 두어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3) 향약의 시행
김군수의 재임 기간은 체 반년도 되지 않고 앞의 향약서문이 작성된 것은 이임 1개월 전에 있었던 것이므로 향약을 문서화 하기이전 부터이미 군 전역에 향약이 실시되어 목적 하는바 성과를 얻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화 관련하여 앞에 거명한 옥신부가 우리 상주지역을 돌아보고 1901년 11월에 명동성당의 Mutel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당시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주지역에 도착하니 온통 박해 이야기입니다.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부터 신자들이 저를 찾아와서는 자기들이 겪는 고난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중략.....제가 그 신자들 구역에 도착해 보니 그들이 겪는 고충의 진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신자들에게 약탈을 자행하는가 하면 신자들을 마을에서 추방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문재의 회람(향약)때문입니다. 고산골 공소에서는 이웃 마을에 사는 10여명의 예비자들이 저를 찾아와서는 작들이 겪은 일과 두려움을 털어 놓았습니다......중략.....회람(향약)건에 대하여는 회람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을 소환시켰습니다. 그는(혹은 다른 어떤 사람)다른 마을에 사는 주민이면서도 신자들 이사는 마을 주민들의 명부를 작성하는 일에 관여 하였습니다. 마을 주민 명부에는 외교인의 경우에는 이름과 나이가 기록되어 있으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름이 이록 된 곳을 지워 놓았습니다. 죄인들을 색출 하려면 이것이 필요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는 당연히 상주 목사의 회람과 마을 주민 명부를 가져왔습니다..........후락............
라고 하였으니 옥신부가 고산 골에서 상주목사의 회람과 마을 주민명부를 입수한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회람이란 곧 향약동심계鄕約同心契 약안約案이며 주민명부란 산동면 과상리 향약 계안성책契案成冊을 뜻한다. 회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마을에 사는 주민이면서도 신자들이 사는 마을 주민들의 명부를 작성하는데 관여 하였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그 사람의 신분은 면약정面約正임이 분명하고 향약 동심계 표지에 쓰인 채약장蔡約長과 동일 인 임이 틀림없다. 현재 산양면 현리가 과상리와 인접하였으며 당시 행정체제 였던 산동면에 속한 지역 이었고 현리가 채씨 집성촌인 점을 감안하면 채약정은 현리 사람임이 틀림없다.
4) 이향약의 특징
대체로 향약은 단수 혹은 복수의 학덕인學德人에 의하여 성안되고 관의 지원 하에 실시되는 것이 상례이나 이 향약은 수령향약의 전형으로서 철저한 관재 향약이라고 할 수 있다. 약 안 어디에도 치덕자齒德者와 상의 하거나 자문의 흔적이 없는 점이 그러하고 향약 절목 중에 관급전액을 정하여 명문화 한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그리고 그 실시의 신속함이다. 김군수가 재임한 5개월여의 짧은 재임기간 중에 정무를 파악하고 약 안을 성안하여 31개면 전역에 이를 실시해서 성과를 보았다니 가위 전격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극도로 혼란한 사회 배경을 업고 부임한 김군수가 침체한 행정의 돌파구를 향약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이 향약은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 수령의 적극적 의지의 일면이었다. 근세에까지 우리나라는 유교 일존 주의 사회였던 만큼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관제 향약을 이용하여 가위 소탕하기 위한 시책을 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도 하겠다.
6. 기타향약계契
계의 기원은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인간사회에서 이해득실을 같이 하는 관계를 형성 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공통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상부상조하고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계契이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에도 동갑계이니 동종계 또는 문무계 등으로 이름한 계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고 관리들이 부패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일이 많아짐에 따라 평민의 생활이 곤란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가 활성화 되었고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 여러 종류의 계가 조직되었다. 계의 조직은 계장을 중심으로 유사와 색장, 집사 등의 임원을 두고 계의 재산관리 업무 등을 담당하게 하고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취회를 열고 계돈의 납부 또는 이익금의 처분과 바람직한 계 운영에 관한 협의를 한다. 계의 종류는 그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다.
첫째 동계洞契, 자치계自治契, 리중계里中契 등 지역단체로서 도로, 교량, 위생, 교육 등 공동적 부락생활 향상을 위한 현안에 협조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가 조선중기 이후에는 군포계軍布契, 또는 호포계戶布契 등 납세를 위한 공동적 책임으로 운영된 경우도 있다.
둘째 동갑계다 과거에 함께 등과하였다는 방목榜目계 또는 상인 단체들의 공계貢契 등 특권단체 로서의 계가 있다.
셋째 선계船契, 양우계養牛契, 송계松契, 수리계, 산림계 등 산업 양성을 위한 계가 있으며
넷째 상호부조를 목적으로한 상복계喪服契, 반지계, 위친계, 상여계, 그릇계 화전계, 등등 매우 다양하다.
이상과 같은 계는 그 목적에 따라 각각 성격을 달리 한다고 하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서로 돕고 권선 징악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한 것인 만큼 이 또한 향약의 정신과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들은 사회가 다양해진 현대에 까지 이어져 등산계, 여행계, 학술계, 동창계, 종중계, 퇴직계 등등으로 발전 하였고 특히 우리 상주가 다른 지역 보다 많다고 한다.
Ⅴ. 향약의 폐단
전술한 상주 향약 조에 시폐증보時幣增補 절목節木과 같이 향약에서 정한 바를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 규약을 이용하여 향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후기 갈수록 심화되어 마침내는 삼정三政이 문란하여 조선 말기에는 전국의 곳곳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으니 왜에 나라가 먹힌 근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가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서문에 이르기를
목민관들은 이익을 얻기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 그렇게 되니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궁하며 병에 걸려 서로 줄을 서서 쓰러져서 구렁을 메우는데 목관이라 자는 좋은 옷과 맛 좋은 음식으로 제 자신만 살찌우고 있다............. 중략...........
전답에 대한 조세의 부담과 징수에 있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의 행위로 인하여 일어난다.
고 하였으며 목민심서 제7권 예전禮典 교민조敎民條에
욕심 많고 무능한 수령 일수록 향약을 시행하니 향약의 피해가 도적보다 심하다. 토호향족土豪鄕族이 집강執綱이 되어 약장約長 헌장憲長을 자칭하고 그 아래에 공원公員 직월直月 등 명목자를 두어 향권을 전단하니 소민小民을 위갈하며 토구하며 부정하게 제물을 뺏고 이르는 곳에 주지육림이 묻히고 재가在家에서는 소송訴訟이 끝이 없으며 제가 할 일을 어리석은 백성에게 지워 맡게 하였다
고 하였다. 중종시대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던 정치가 조광조趙光祖가 양민良民이 천민賤民으로 전락하는 것을 시정하는 방법으로 향약시행을 주장 하였는데 향약시행은 향약 임원들의 비행으로 인하여 천민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 우리 상주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1862년(철종13) 삼정문란으로 상주 민란이 발생한 뒤 향내의 뜻있는 인사 68인이 3정의 폐단을 구제할 9개 절목을 상주 목사와 경상도 관찰사에게 건의한 상주목환결구폐절목尙州牧還結捄獘節目이 있다고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가 쓴 임술삼정교구송덕비명壬戌三政矯捄頌德碑銘이 있는데 비명에서 3정의 폐단을 요약해 보면
첫째는 환곡이니 배성에게 대여 할 때는 겨와 쭉정이가 많은 곡식으로 하고 받아들일 때는 정선된 알곡으로 하였으며 본 조세를 감당 하는데도 다시 이무移貿를 더하여........
.....중략.......백성들은 한해지은 곡식을 다 주어도 모자란다..............
둘째 군정이니 첩지帖紙(고지서)가 날라와 실제가 아닌 허액虛額이 항상 있어 황구黃口(어린아이)와 백골白骨(죽은 시체)이 원한을 품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며 곤궁한 홀아비와 외로운 과부가 길 위에 울부짖고 있다...............운운..........
셋째 전정이니 지나치게 함부로 징수하여 남용하는 것이 예규로 되어있어 세력 있는 가문과 교활한 아전들이 백성들을 거물 질하고 양호養戶함에 한 고을 지세의 절반이 농단하는 수중에 들어가 ...............운운 이라고 하였으니 당시의 적폐를 그대로 알 수 있다.
Ⅵ. 결結
이상과 같이 향약의 기원과 유래를 살펴보고 조선시대 향약실시에 따라 향중공론 형성과정에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유향소와 향중에 지배세력들의 향안鄕案 작성과 향규 제정에 대한 것을 먼저 고찰하였고, 중종 년간에 와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안국金安國 감사가 순 한문으로 된 향약조문을 언해諺解하여 보급한 것이 그 전파 시행에 큰 계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향약의 종류는 주도세력 혹은 참여 층에 따라 목 · 부 · 군 · 현의 수령이 향촌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수령향약이 있고 향촌 사대부 가문간에 형성된 사족향약 그리고 향촌내 상上 · 하下 모든 향민들이 함께 공감하는 동약洞約을 제정制定 운영하는 상하 동약으로 대별하여 그 조직과 기능을 살펴 보았다. 조선시대 향약실시에 대표적인예로 퇴계의 예안향약과 율곡의 서원 향약의 실시 과정과 약조의 내용을 상고 하였다. 퇴계의 예안 향약은 관직에 있으면서 고장의 교화제도가 미진함을 절감하여 그의 고향에 내려와 향약 입조를 제정 실시 한 것으로 여씨향약 덕목 중에 과실상규만을 중심삼아 지방 실정에 맞게 하므로써 가풍내지 향풍을 아름답게 해 보자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고 율곡의 서원향약은 율곡 자신이 청주 목사로 재임 할 때 제정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습속을 기본으로 하여 한국적 향약으로 적합하게 만든 것으로 조선향약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문헌으로 남아 있는 우리 상주의 향약은 남촌향약, 노동향약, 낙사계 그리고 조선말기의 상주 향약과 김명수 군수의 향약동심계와 비록 문헌으로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마을에서 있어왔던 동계洞契에 대한 대강을 살펴보았다.
남촌 향약은 상주남쪽 지금의 청리면과 외남면 그리고 신흥동 일부지역인 옛 청남, 청동, 외남, 내남 등 4개면에서 실시한 향약으로 조선 인조 12년 김상복 목사가 부임하였을 때 월간 이전과 수암류진이 관의 협력을 얻어 실시 한 것이다. 남촌 향약은 주자 증손향약을 근본으로 하고 그 각 덕목말미에 예안향약과 포산향약을 첨부 기록하여 세부 조항을 종합적으로 정비하였고 월간의 5세손 이광李珖이 자기 집에서 다시 정리하여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를 남촌4면향약南村四面鄕約이라 하였다. 노동향약은 상주 동쪽 외답, 헌신, 병성, 도남지역에 이미 1600년대에 실시해오던 향약의 제명록題名錄이 전하여 오던 것을 식산 이만부가 다시 정비하여 실시하였던 것으로 향내에 양반과 상민 모두가 참여한 상하동약上下洞約이다.
참여한 인원은 62명이고 약조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특별히 곡식 200석을 항시 비축하여 없는 사람에게 무이자로 대여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전향적이고 획기적인 환란상조 였다고 할 수 있다. 낙사계는 상주 남촌 지금의 청리, 공성, 외남, 3개 면을 중심으로 하여 송량宋亮 등 15명의 사족들이 결성한 병인계(1566)와 1578년에 이전 등 21인의 사족들이 결성한 무인계를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에 합계한 사족향약士族鄕約이다. 전란의 참화를 겪고 난 뒤 민심을 수습하고 미풍을 되살리고저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계는 존애원 설립의 기반이 되었고 조선후기에 까지 대계大契로 발전 되었으며 오늘에 까지 이어 지고 있다. 계 조약은 모두 11조로서 효제孝悌를 두텁게 하여 덕행을 쌓아 행하는 내용으로 계라고 하지만 약조의 내용이 향약과 대동소이하다.
상주 향약은 조선 말기에 전 승지 조 덕외 12명의 전직 관료와 지방유생들이 연명으로 하여 상주 목사에게 올린 건의문의 일종이다.
그 내용은 여씨 향약과 주자증손 향약 그리고 퇴계 향약을 종합하여 기록하고 당시에 여러 가지 사회적 폐단을 항목별로 상세히 기록하여 이를 시정 하도록 향약소에서 조문을 추가실시 할 것을 허락 해 달라는 것인데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 폐단의 사례를 솔직하게 적어 과감한 개혁을 요구한 것은 전제시대에 지방 관리의 폐정을 바로 잡겠다는 향민들의 절절한 절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김명수 군수의 향약 동심계同心契는 조선말기 상주군수로 부임함 김군수가 불과 반년동안 재임하면서 당시에는 사교邪敎로 치부하였던 천주교를 소탕하기 위한 관제 향약으로 1894년 갑오경장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관리의 부패로 인한 민심의 이 반등 혼란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침체하였던 행정에 돌파구를 향약시책으로 타개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타 현재 까지도 우리 상주사회 곳곳에 성행하고 있는 “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동계와 자치계, 리중계 등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향약은 사회 구성원 간에 질서 확립과 향민간에 서로 돕는 양속良俗을 협약으로 하여 원만한 사회로 이끌어 가자는 것이 그 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화로 하여 일부 힘 있는 자들이 오히려 남용 내지는 완력으로 주민을 괴롭힌 사례도 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전술한 상주 향약의 시폐증보절목時弊增補節目이나 1862년(철종13) 삼정문란으로 상주 민란이 발생한 뒤 향내의 뜻있는 인사 68인이 3정의 폐단을 구제 하고자 하는 9개 절목을 상주 목사와 경상도 관찰사에게 건의한 상주목 환결구폐절목還結捄幣節目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적폐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 참고인용문헌
1. 황영목<상주의 향약> 1983년 상주군
2.김무진<한국학논집제32집 : 조선시대향약 및 향안 조직에서의 의사결정 구조>2005
3. 채광식<상주문화제7호 또 하나의 상주향약> 1998 상주문화원
4. 권태을<상주문화 제19호 : 상주목환결구폐절목소고> 2009 상주문화원
5. 김철수<상주문화 제13호 상주향청> 2003 상주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