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월포(月浦) 강사상(姜士尙)대감의 생애와 철학

빛마당 2014. 2. 26. 20:38

월포(月浦) 강사상(姜士尙)대감의 생애와 철학

                                                                                                                             

윤 재 수


머리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면서 만남이 이루어진다.어머니와의 만남, 형제 자매 등 가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태어난 고향의 만남으로 고향의 흙을 밟고 공기를 마시면서 삶의 출발점을 이루게 된다. 만남은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중하고 귀중한 인연은 밝고 맑은 사회를 만들어 주면서 천륜인 자연환경과 인륜인 인간환경에 직.간접으로 영향를 끼치면서 선연(善緣)이 되어 인간 사회에 평화와 번영의 달성하게 한다. 반면에 만남이 가치 없거나 폐기되어야할 경우에는 악연(惡緣)이 되어 인간사회를 파괴(破壞)하거나 퇴행적으로 영향(影響)을 주게 된다. 우리는 만남이 선연으로 이어질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만나야할 인연은 선연(先緣)과 후연(後緣)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선연은 태어나기 전의 인연이고 후연은 태어난 후의 인연이다. 선연은 우리 사람들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선연((先緣)에서는 만나야할 인연이라면 필연적으로 닥아 오게 되고 만날 수 없는 인연은 원한다 하여도 닥아 오지 않는다. 저 멀리 공간에서 낙엽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적(人的) 첫 만남은 신의 영역인 선연(先緣)에 의하여 성립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적(人的)인 첫 만남 이후의 인연인 후연(後緣)은 사람들의 노력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사람 모두에게 있다. 이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인연 따라 사는 것이 인생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만남을 선연(善緣)으로 이끌어 나가는 현명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오늘 사랑방에서는 상주 봉대에 뿌리를 두고 인맥을 형성한 진주 강씨의 후손이 월포 강사상 대감을 모셔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합니다. 봉대문중의 급제자에는 강사상 강사안 강사필 강서 강연 강신 강항 강박 강백 강영 강세백 강세륜 강홍립 강홍중 강필문 강필보 강필리 강필신 강필구 강필경 강석구 강석빈 강난형 강준흠 강시영 강경희 강국형 강문형 등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영남 유림에서는 법전 문중에서 문과 25장을 냈다는 것이 통설이며 상주 봉대에서도 문과 28장을 냈지만 이 중 많은 분들이 오늘의 서울 신림동 일원에 터전을 잡아 세거하였기 때문에 상주 봉대의 일부를 서울 양반, 즉 경반(京班) 대접을 하여 영남 향반(鄕班) 위주의 각종 기록에서 제외 된 경우가 많다. 중앙집권의 왕권 제도에서는 경성의 관직이 지방의 관직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강씨 종보 제431호 제목 “3대 문과급제의 영광과 관찰사 강홍중 선조님”에서는 봉대 가문의 3대 문과 급제와 법전 가문의 3대 문과급제 이야기를 하였다. 이외에도 봉대 문중에는 3대 문과급제가 2건 더 있다. 강사안, 강신, 강홍립의 3대 문과급제와 강준흠, 강시영, 강국형의 3대 문과급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번 봉대와 법전의 3대 문과 급제만으로도 타성씨들이 부러워하였는데 봉대 문중에서 3대 문과급제가 3건이나 나왔으니 봉대의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이외 봉대 가문의 문과급제 중에 강사상과 강서, 강영과 강필신, 강준흠 과 강시영은 부자(父子)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또한 강사상, 강사안, 강사필은 3 형제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강세백과 강세륜은 형제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법전 문중 문과급제 중 강덕서, 강억, 강징이 3대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고 지난 번 종보에서 이미 이야기 하였다. 그 다음 법전의 강태중, 강연, 강건은 삼부자(三父子)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옛날에는 과거 급제자가 나오면 마을 어귀에 장대를 세워 축하하였다. 이것을 솟대라 하는데 농기(農旗)모양을 하고 있다. 꿩 털이나 볏짚을 꼭대기에 장식하고 헝겊을 둘러 만들거나 용을 그리거나 새겨서 붉은 칠을 하거나 세 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영남에서 문과급제 베스트 20의 상위권에 우리 진주 강씨 2개 가문이 든 것은 대단한 광영이다. 이 두 곳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봉대와 법전의 평판이 아주 높아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남에서 봉대와 법전이라 하면 오늘의 삼성 현대 못지않게 네임 벨류가 있었다. 이것은 진주강문의 영원한 자랑거리로서 강씨 문중 후손들 모두의 긍지를 한껏 높여줄 것이다.

언론인이며 한국학(韓國學) 학자인 이규태는 처세술의 출중한 인물로서 상주의 황희(黃喜)정승과 월포 강사상을 큰 인맥으로 소개였습니다. 그는 그의 저서 한국의 인맥(韓國의 人脈) 3권 경상도(慶尙道)편에서 상주인물을 소개하면서 격의(格義)인맥과 식비(拭鼻)인맥을 론(論)하였습니다. 이단설(異端說)이나 대치된 주장을 용납함으로서 주관을 흐리게 하는 사유적 개념, 즉 모든 엇갈린 생각이나 주장, 견해, 사상을 일리가 있다 해서 반발 없이 수용함으로서 어느 한 파당으로 기울지 않는 태도를 격의사상이라 하였다. 격의 인맥의 대표적 인물로는 익성공 황희(黃喜)정승를 말하였다. 하루는 황희 정승댁 하녀 둘이 싸우다가 황희 정승에게 하소연을 해왔다. 한 하녀가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자 황희 정승은 “네 말이 옳다.”라고 하였고, 다른 하녀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자 역시 “네 말도 옳다.”고 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부인이 이내 “두 사람이 서로 반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당신 말도 옳소.”라고 하였다고 한다. 황희 정승이 건넨 말에는 논리상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황희 정승을 높이 사는 이유는 분쟁보다는 화합하려는 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그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하여 그것과 관계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상정(常情)인가. 이와 조금 다른 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온정주의(溫情主義)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조선시대 황희(黃喜) 정승이 이러한 온정주의를 대표하는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대치된 주장들을 아예 배제함으로서 주관을 흐리게 하는 사유적 개념을 식비(拭鼻) 혹은 문비(捫鼻 )사상이라 하였습니다. 식비인맥의 대표적 인물로는 월포 대감을 말하였습니다.

격의 사상이나 식비사상은 주변의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묵묵히 실천한 현실 적응적 관료로서 30~40년의 무풍대작의 관직을 유지한 두 인맥의 처세술은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처세의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월포 대감은 그의 지위가 사회에 영향을 끼칠만한 높은 대사헌의 자리에 오르면서 말이 적어 지셨고 술을 좋아 하여 술자리를 자주 하였지만 술자리에서는 성과 없는 정치적 담론 속에 빠져들지 않으려 코만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문비재상이라 불렀다.

1. 월포 강사상의 가계(家系)

월포 대감의 가족 관계를 살펴보면 고조부는 강자평으로 세종 때 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증조부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학자로서 강형인맥을 형성한 강형(姜詗, ?~1504, 연산 10년)으로 성종조에 지평(持平)을 거쳐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幹)이며 조부는 세자 익위사 세마 강영숙(姜永淑, ?~1504, 연산 10년)으로 사인(舍人)이었고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아버지 강형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이들 부자는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월포 대감의 아버지 강온(姜溫)은 문과에 급제하고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밀양박씨 진사 박식(朴拭)의 딸이다. 배우자는 파평 윤씨 훈련원 부정 윤광운의 딸이었다. 정정공 강사상 부부에게는 4남 3녀가 있었다.

장남 서(緖)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감식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고, 오리 이원익 및 조충남(조광조의 종질)과는 특히 막역한 친구로 알려져 있다.

둘째 아들 신(紳)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숭정대부 우참찬으로 평난공신 진흥군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인(絪)은 유술을 좋아하고 경사에 통박하여 음직으로 출사한 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홍성공신 자헌대부 진창군이 되었다.

넷째 아들 담(紞)은 음사로 벼슬하여 서애 유성룡이 제철사가 되자 그 종사관에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위는 민여건(閔汝健), 이의가(李義可), 김충각(金忠각)이다.

강사상은 장남으로 세 동생을 두었다. 공조정랑(工曹正郞) 강사안(姜士安), 충청도 관찰사 소암 강사필(姜士弼), 강사부(姜士孚) 등이 그들이다.

월포 대감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 충청도 관찰사 였던 동생 사필과 양도의 접경지대인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서 만나곤 하였는데 이들을 본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하였다고 한다. 후금 토벌군의 대장으로 출병한 5도 도원수 강홍립은 둘째 아들 강신의 아들로 손자이다.

2. 월포 강사상의 생애(生涯)

강사상(姜士尙)은 1519-1581년대 조선의 문신이며, 자는 상지(尙之), 호는 월포(月浦), 시호(諡號)는 정정(貞靖)이다. 정정(貞靖)의 貞의 자의는 청백수절(淸白守節) 직도불요(直道不撓) 이고 정(靖)의 자의는 공기안민(恭己安民) 유덕안중(柔德安衆)이다. 강사상(姜士尙)은 말없이 정치하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월포 강사상는 1519(중종 14)년 상주목 산양면 존도리에서 7월 3일 출생하였다. 당시 상주목의 관활 지역은 상당히 넓었고 수령(守令)은 정삼품(正三品) 목사(牧使)였다.

15세 때에 아버지 강온을 여의고 어머니 정경부인 밀양 박씨를 극진히 모시고 어려운 가정을 이끌면서 근면성실하게 학업에 열중 하였다. 18세에 훈련원 부정을 지낸 파평윤씨 윤광운(尹光雲)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19세에 장남 강서(姜緖)를 얻었다. 24세인 1543년 (중종 34년)에 사마시(司馬試)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이 되었다.

27세인 1546년(명종 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1552년(명종7년)에 수찬, 헌납에 제수되고 1553년(명종 8년)에 정언을 거쳐 1554년(명종 9년)에 헌납, 이조정랑을 지냈고 1555년(명종10년)에는 검상, 사인, 부응교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557년(명종 12년) 응교, 전한, 직제학,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이때 재해에 대한 왕의 수성(修省)을 촉구하는 소를 올린 바 있다. 또한 1558년(명종13년)에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1559년(명종14년)에 부제학, 좌승지, 도승지가 되었고, 1560년(명종 12년) 병조참의, 예조참의, 부제학을 지냈고 1561년(명종16년)에는 도승지, 형조참판, 대사헌이 되었고 1562년(명종 17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3년(명종 18년) 부제학, 도승지, 첨지중추부사, 부제학, 대사간이 되고 그는 권신(權臣) 이량의 불법을 주상 하다가 오히려 이량의 미운을 받아 1564년(명종 19년)에는 부호군으로 좌천 되었다가 다시 도승지로 기용되었다. 1565년(명종 20년) 월포 대감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아우 사필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있었다. 이들 두 형제는 도(道)의 접경인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서 서로 만났는데 이를 본 인근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고 한다. 또한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한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사액을 요청해 허락 받기도 하였다.

또한 강사상은 1566년(명종21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리고 이듬해에 예조참판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의 원접사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68년(선조 원년) 선조 즉위 후 대사헌, 대사간이 되어 실록청 동지관사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간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조광조의 신원과 추숭을 건의하였고, 1570년(선조3년)에는 중궁 고명 주청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이 되었다. 1571년(선조 4년) 대사헌, 동지경연사로 활약하였다. 1573년(선조 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고 1574년(선조 7년)에는 형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1575년(선조 8년)에는 이조판서 1576년(선조 9년)에는 우참찬,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그해 11월에 우의정에 올랐다. 1581년(선조 14년) 8월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평상시 그는 국가의 치란이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정쟁에 초연한 처지를 취하였다. 시사나 공론이나 파쟁에 말려들지 않고 문비처세로 그 숱한 함정들에 빠지지 않고 살아낸 강사상은 도승지 대사헌 등 임금으로부터 신임 받는 요직을 두루 거친지라 그의 동조를 얻고자 갖은 술수로 의견을 도출하려 들었지만 그는 국가치란이란 천심이라 하고 코만 어루만졌을 뿐이라고「석담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소극적이라는 견해도 없지 않았을 것이나 임금을 가까이 모신 벼슬아치의 기울지 않은 자세요, 모략과 무고가 기다리고 있는 험난한 세상임을 감안할 때 신중한 처세철학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비를 일상화했던 우리 조상들은 심신이 교차하는 코의 과학을 터득하고 살았다는 것이 되며, 그 같은 처세가 면면히 흘러 지금의 정치풍토에서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허나 요즘 정관계인사들을 보면 문비조차 안하면서도 거짓을 밥 먹듯 하는 이가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해 신사(辛巳)년 10월 30일 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3세였다. 강사상은 다음 해에 금천나곡(구 신림 13동)107의 2호에 있는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중요한 유물로써 1997년 12월 31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셋째 아들인 진창군 인의 훈공으로 “증순충 적덕 보조공신 영의정 진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경석의 모갈에 의하면 강사상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모든 유생보다 뛰어나서 그의 장래가 기대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후로는 특히 사람을 사귀는데 조심하였다.

한때 이양이 세도를 부리려고 할 때 그와 동갑이라고 해서 친교해 오기를 청했으나 그는 끝내 문을 닫고 이양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이양 등의 모함을 받기도 했으나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강사상은 늘 학문하기를 좋아해서 “강목”, “대학연의” 등의 책을 즐겨 읽었으며, 경연에 참석해서도 그의 강의하는 목소리는 의록이 밝고 간결하였다고 한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과 덕산에 있는 남병 조식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다.

퇴계와 남명은 당시 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로, 이런 일은 그가 얼마나 학문을 좋아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석담일기”(석담은 이윤호의 호)에 의하면 심의경이 율곡 이이에게 “강사상은 왜 아직 정승에 오르지 못 했는가” 하고 물으니, 율곡이 웃으면서 “강모는 순목하고 시비함이 없으니 지금 그이야말로 정승이 될만한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그후 곧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30년 동안 한 번도 시사를 부정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으며 매양 말하기“국가의 치란은 하늘에 달린 것이지 어찌 인력에 좌우되겠는가?” 라고 하여 공론으로 다투는 일이 없었고 사정에 쏠리는 일이 없었으며 만사를 자연에 맡기는 태도였다.

술을 좋아하는데 술만 마시면 더욱 말이 없었고 사람을 대할 때는 그저 코만 만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희롱해서 비문재상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자손들에게 “집에 시서가 가득 차 있으면 어째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자손의 영화를 원치 않으며, 세상살이를 잘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다만 개, 돼지같이 무식한 자손이 됨을 근심할 뿐이다.” 라는 계언을 남겼다.

그는 여러 번 이조와 병조의 인사를 담당하는 전랑자리에 있었지만 청백함이 소문 나서 문전에 잡된 손님이 념겨다 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재물에 전혀 관심이 없어 논밭 한 뙈기도 없었다. 자손들이 “전장을 장만하여 노후에 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권하자 그는 웃으면서 “벼슬길에 나온 사람이 물러서지 못함을 근심할지언정 어찌 물러서서 들어갈 집 없음을 근심하랴” 하였다.

그는 관직에 30여년 동안 그것도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여 거처하는 곳이 불편하였지만 유유자적하면서 수신하는데 마음을 쏟았을 뿐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파평 윤씨로 부정 윤광운의 딸이다.

그녀는 정숙 근검하고 부덕이 있었으며 내조의 공 또한 컸다.

1603년(선조36년)에 선조는 재신 중에 자당 연세가 70세가 넘는 사람에게 왕명으로 합동 수연을 갖게 했는데, 이때 예조에서 바친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진흥군 강신(사상의 둘째 아들)의 어머니 윤씨 83세, 금계군 박동령의 어머니 임씨 75세, 공조판서 윤동의 어머니 남씨 80세, 병조판서 홍이상의 어머니 백씨 78세, 이조판서 한준겸어머니 신씨 70세, 여흥군 민중남의 어머니 이씨 84세, 병조판서 윤수민의 어머니 조씨 81세, 장악첨정 권형의 어미니 김씨 88세, 관찰사 이거의 어머니 채씨 102세.

이와 같은 영광된 자리에 그의 부인도 참석하게 되었으니 이는 세상이 부러워할 일이었다.

이 경수연의 성사에 대한 책인 “제경수연시권”은 동악 이안눌이 지었고 “경수연도서”는 백헌 이경석, 미수 허목, 만퇴당 홍만조, 성호 이익 등이 지은 것이다.

강사상이 영중추부사로 있을 때 병으로 자리에 눕자 선조는 어의를 보내어 그를 치료하게 하는가 하면 승자를 보내어 위문하였으며 그가 죽자 특히 애도하면서 정사를 잠시 쉬게 하고 조제를 내렸다.

1604년 선조 37년 아들 인(絪)이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자, 증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진천부원군(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 晉川府院君)으로 추증 되었다.

3. 강사상의 청치철학

1) 신념을 지키는 청렴강직한 정치인

일찍이 이양(李樑)이 세도할 때 그와 동갑이라고 친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으며 청백함을 지켜 문 앞에 잡된 손이 없었다. 그의 제자들이 그가 사퇴 후 준비로 적은 전장(田庄)을 이룩하고자 하니 그는 웃으며 말하기를 「벼슬하는 사람들이 물러가지 못할까 걱정이지 물러가 살 곳이 없을까 걱정인가」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이르기를 그가 벼슬한지 삼십년에 일찍이 한말이라도 시사(時事)를 논하지 않고 늘 말하기를 나라의 치난(治亂)은 하늘에 있고, 사람의 힘에 있지 않다 하며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공론을 벌리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정에도 따르지 않으며 자연의 순리에 맡길 뿐이더라 하였다. 정파싸움에 휩쓸리지 않는 초연한 태도를 취하였고 중국을 두 번이나 왕래하면서 외교활동에도 큰 공을 세웠다.

2) 시류에 초연한 친민의 정치인

술을 좋아하면서도 취하면 더욱 말이 없으며 사람을 대하면 코만 문지르니 세상에서 문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선조께서 좋은 술과 관락(官樂)을 하사하고 잔치를 베풀게 명하니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말없이 정치하며 실천에 옮기니 자연은 거짓이 없으며 바른 일 뿐임을 믿어 실천 하였으니 후인은 이를 널리 찬탄하였다. 그는 강직 하여 왕이 하는 일에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직소 하였다. 그 예는 명종실록에서 볼 수 있다. 홍문관 응교 강사상(姜士尙) 등이 차자를 올렸다. “신들이, 오는 15일 선릉의 망제를 친행한다는 전교를 보았는데, 이는 참으로 선조를 받드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 흉년이 거듭되었는데 경기가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떠돌아 죽음을 면하기에도 바쁜 지경입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진실로 불쌍히 여겨 돌보는 일이 시급한데 열흘 사이에 두 번이나 거둥하게 되면 조발(調發)의 번거로움과 농사에 방해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때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니 때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도리어 일에 해롭습니다. 원릉에 전배하고 몸소 제사를 받드는 일은 참으로 지극한 효성이니, 진실로 때에 맞게 한다면 아랫사람들도 당연히 따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이제 대신들이 아뢰고 대간이 논한 것은 참으로 백성의 괴로움을 중히 여기고 때가 아님을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난 가을에도 행하려다가 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또 정지하기가 송구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조종(祖宗)께서는 정사에 있어서 먼저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뒷사람을 계도했으니, 아기처럼 보호하는 마음을 체득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조상의 뜻을 계승하여 대업을 이어가는 도리인데, 때가 알맞지 않아 성알(省謁)을 정지하는 것이 효성에 무슨 결함이 되겠습니까. 중종 때에는 열흘 내에 두 번이나 배릉했었어도 그때는 백성들의 고통이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찌 그 일을 원용(援用)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선왕의 마음을 생각하고 아래로 조정 신하들의 의논을 따라 우선 배릉을 정지한다는 명을 내려 곤궁한 백성들의 폐단을 덜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어필(御筆)로 차자 끝에 쓰기를, “선릉에 배알하는 것은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정지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대신과 대간에게 답한 내용에 다 하유했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또한 명종 14년 (1559년) 기미(己未) 1월 3일 을해(乙亥)에 발생한 사건에서도 곧은 의리정신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병조 판서 권철(權轍) 등이 아뢰기를, “본조의 금란 서리(禁亂書吏)는 궐내의 잡인(雜人)을 규찰하는 일을 맡아서 합니다. 모든 봉물(封物)은 소인(小印)이 찍히지 않았을 경우에는 훔친 것으로 간주하고 잡아 고발해야 합니다. 1일에 어떤 사람이 소인이 찍히지 않은 미대(米帒)를 가지고 건춘문(建春門)을 나갈 때에 금란리(禁亂吏)가 사송(賜送) 여부를 분별하지 않고 붙잡아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미대가 찢어져 사송하는 물품이 땅바닥에 쏟아졌습니다. 매우 외람된 일이었으니 형조에 내려 추고하게 하신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어제의 전교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다만 금란리에게 외람된 일이 있으면 차지 내관(次知內官) 이 의당 정원에 고하여 전계(轉啓)해서 추고하게 하는 것이 옳은데, 내관들이 육조(六曹)의 아문(衙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금란 서리를 잡아다가 공초를 강요하였으니, 사체가 매몰되었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뒷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어제 낭청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춰 계달하게 하였으나, 정원이 ‘추고하라는 명이 이미 내려졌기 때문에 입계할 수 없다.’고 하므로 전달(轉達)하지 못하고 물러났었습니다. 무상한 신들이 중요한 자리에 외람되이 앉아서 환관들에게 멸시받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사정 또한 상달(上達)할 수 없었으니, 단 하루라도 태연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고 덕망이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들을 가려서 본조를 중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사면하겠다는 말을 보건대, 병조는 그 한 가지만을 알고 궐내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으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서리들이 금란을 빙자하여 내사(內賜)한 물품을 망가뜨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지나친 일이다. 모든 물품에 다 소인이 찍히기 마련인데, 어찌 그 미대에만 찍히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중궁 내관(中宮內官)은 궐내의 일을 사사로이 정원에 고할 수 없기 때문에 공초를 받아 아뢴 것이니, 이것 역시 이전의 전례이다. 만약 이를 잘못이라고 한다면, 간리(奸吏)들이 중간에서 작폐(作弊)하는 습속을 금하기 어렵고 내관들은 말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되며, 내사하는 물품이 산실(散失)되는 폐단이 또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경들의 사직은 온당하다고 볼 수 없다. 사직하지 말라.”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내병조(內兵曹)를 궐내에 두어 서리로 하여금 난잡을 금하고 절도(竊盜)를 잡아내게 한 것은, 궁위(宮闈)를 엄하게 하게 하고 출입을 삼가게 하려 한 것이었다. 금란리가 된 자는 정적(情迹)이 절도에 관련된 자를 발견하면 마땅히 잡아낼 뿐인데, 상이 내시들의 말만을 듣고 바로 하옥을 명하여 형신까지 하였으니,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법을 무너뜨림이 심하다. 권철 등의 사직은 환관들이 방자해지는 조짐을 막으려는 것이었는데, 상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이전의 사례를 들어 준엄한 말로 책망하였으니, 그 편파적인 누(累)가 또한 크지 않은가.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우승지 강사상(姜士尙)이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병조의 낭청이 당상의 뜻을 가지고 입계하려 하기에, 신은, 병조 당상이 입계하려 한 것은 금란 서리가 추고되기 이전이었을 터인데 상으로부터 이미 추고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그 계사(啓辭)가 추고되기 이전과는 혹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낭청에게 ‘금란리를 추고하라는 명이 이미 내려졌으니 다시 당상에게 물어 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낭청이 당상에게 회보할 때에 어떻게 말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병조 당상이 아뢴 바를 보건대, 전달(轉達)할 수 없었다는 말이 있으니, 매우 미안하여 황공히 대죄합니다.”사신은 논한다. 병조 당상이 금란리 사건에 대해 입계 [계장(啓狀)을 왕께 올림.]하려 한 것은 뒷폐단을 막자는 것으로 특별히 의도한 바가 있었는데, 강사상은 색승지로서 명이 이미 내려졌음을 내세워 전달하지 않았으니, 임금의 이목(耳目)을 가리웠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대죄(待罪)로써 그 책임을 메우려 한들, 어찌 덮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전교하기를, “전달하지 못한 것은 형세 때문이었지 경의 잘못이 아니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3) 자연현상의 변화에도 책임을 지는 정치가

자신의 잘못에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월포대감은 자연 현상의 변화에도 책임을 지고 홀연히 노력하여 쌓아온 직책을 초개와 같이 버리려한 덕망 높은 정치가였다. 1580년 2월 13일. 흰 무지개가 또 해를 꿰뚫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흰 무지개의 변이 연달아 일어나니 극히 놀랍다. 금일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감하고 음악을 철폐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3월 무신일 9일. 임금이 희릉(禧陵)ㆍ효릉(孝陵)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올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임금이 궁에 돌아온 뒤에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근래 흰 무지개의 변이 없는 해가 없어 극히 놀랍더니, 오늘 능을 참배할 때에 또 이변이 생기니 송구함을 이길 수 없다. 내 뜻을 잘 알아라.” 하였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주상의 하교를 받자오니 감격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대체 재앙을 푸는 도리는 형식이나 말절(末節)에 있는 것이 아니요, 몸을 굽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천심(天心)에 응하는 실질인 것입니다. 재변이 난 것이 꼭 어떤 일에 응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지정할 수는 없으나, 근일 경연에 드물게 거둥하시므로 조정의 실정과 항간의 민폐가 들리지 못하였사오니, 청컨대, 연달아 구언(求言)하시고 닦고 살피시기를 극진히 하십시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박순(朴淳)과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 흰 무지개의 변으로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이 어찌 경들의 과실이겠소? 신하다운 신하는 있어도 임금다운 임금이 없어서 재앙을 부르게 되는 것은 고금의 통환(通患)이오.” 하고 사직하지 마오.”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이 천재 지변을 만났으니 더욱 성찰할 것을 청하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姜士尙)이 상차하기를, “삼가 보건대, 요사이 흰 무지개가 형성되는 천재지변이 거듭 일어나 경외(京外)의 주문(奏聞)이 없는 달이 없습니다. 이것도 이미 심한데, 열무하고 돌아올 때 말이 날뛰고 인재를 뽑고 하례를 받을 때 가을 천둥이 일어나 위아래가 크게 놀라기까지 하였으니 듣기에 매우 황공합니다. 상고해 보건대, 옛날에 어찌 오늘날같이 심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재변을 만날 때마다 간절히 공구하신다는 전교를 내린 적이 진실로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행하고 받아들이는 즈음에 과연 모두 그 실상을 다하였습니까? 한갓 겉치레로만 하고 실상을 먼저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재앙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일이 내수사에 관계되거나 말이 내시에게 미치면 전하께서는 조금도 즐겨 들으시려는 성의가 없고 반드시 불쾌한 빛을 보이시니, 어찌 한쪽에 치우침을 면치 못하여 성덕에 큰 누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지난번 정원에 전교하시기를, 각기 가진 생각을 다 말하여 나의 허물을 보충하라고 하셨으나, 이처럼 정치에 크게 흠이 되는 일을 굳게 논집하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 한 가지 일로써도 전하께서 재앙을 소멸시키려 하심에 그 실상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앙을 만나서는 수성(修省)의 실상을 다 하시고 말을 받아들이심에는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소서.”하니, 답하기를, “이 차자를 보니 나의 잘못을 바로 맞혔다. 올해의 재변은 참으로 말로 다하기 어려운데, 모두 내가 박덕해서 불러들인 것이니 그저 두렵고 황송스러울 뿐이다. 임금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의 가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따를 만한 것이라면 어찌 즐거이 듣지 않겠으며, 만일 옳지 않은 것이라면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요사이 유신(惟新)의 노비에 대한 일은 사유(赦宥)를 받은 일인 듯하다. 사유 받는 일을 가지고 그치지 않고 극렬하게 논집하는 것은 헛된 말만 되고 무익할 따름이다. 만일 반은(頒恩)을 생각하지 않고 죄주어서는 안 될 사람을 다스린다면 반은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 ‘내시에게 말이 미치면 반드시 불쾌한 빛을 보인다.’고 했으나, 내수사의 제조(提調)라는 벼슬은 자기 마음대로 공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뜻을 앞서 내가 이미 다 말하였다. 차자의 논의에 유의하겠다.” 하였다. 그는 법도를 바로 세우고 백성들이 본받고 따르도록 제왕이 모범을 보이도록 촉구 하였다. 명종 14년 10월 3일 기사에서도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姜士尙) 등이 상차하기를, “임금은 좋아하고 숭상함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실덕(實德)을 힘써 높이면 선(善)을 좋아하는 성의가 나타나 아랫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을 것이고, 한갓 문사(文詞)의 화려함만을 취하면 실속 없이 과장만 하게 되어 사람들이 지향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니, 보고 느끼게 하는 기틀이란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 지난번 경연관이 아뢴 바에 따라서 유명한 사람의 유고(遺稿)를 인출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전하께서 문장을 숭상하는 문치(文治)에 마음을 두시려는 아름다운 뜻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당연히 그 숭상하는 바를 살펴서 하여야 합니다. 근본을 앞세우고 지엽을 뒤로하며 옳은 것을 편들고 그른 것은 억눌러서 한 세상으로 하여금 호오와 시비의 소재를 환히 알게 하고 감동하여 흥기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더구나 문집을 모으려면 마땅히 먼저 그 행실을 살펴 보야야 하는데, 그 사람의 시를 읊고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문장을 엮어 사문(斯文)의 영수로서 한 시대가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없어져 전해지지 않도록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만일 선한 사람을 해하려 음모를 꾸며 사람에게 해를 끼쳤거나 흉악하고 사특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국사를 크게 그르쳤거나 아첨하는 말로 총애를 받으며 조정을 어지럽혔던 자라면, 문장을 꾸미는 조그만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나머지는 볼 것이 없습니다. 어찌 오래도록 책으로 찍어 그 저술을 칭찬하고 그 이름을 드날리게 하여 후인의 모범이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숭상하는 바가 한번 잘못되면 풍속은 쉽게 바뀌어 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근본을 앞세우고 지엽을 뒤로하며 착함을 취하고 잘못을 버려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도록 하고 다스림에 유익함이 있게 하신다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전에 경연에서 대제학이 아뢴 것인데, 반드시 전례가 있었으리라 생각되었고 또 한 사람 때문에 그의 빛나는 재주를 버린다는 것은 옳지 않겠기에 인출하라는 말을 꺼냈던 것이다. 대신·해조와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겠다.”하였다. 상진·안현·이준경이 의논드리기를, “남곤·이행·강혼 세 사람의 시문(詩文)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뛰어난 글이니, 없어져 버리게 하기에는 아깝습니다. 그러나 공론이 이와 같으니, 이는 세 사람에 대한 참된 기록이며 만세의 정론(正論)입니다. 만일 그 문장을 아껴서 사사로이 인출하여 전포(傳布)하는 것이라면 금비할 수 없겠으나, 조정에서 유고를 모아 인출해 중외에 배포하는 것은 사체에 해로울 듯합니다.”하고, 판서 홍섬(汞暹)이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경연에서 이행 등 세 사람의 유고를 인출해 내자고 계청한 것은, 다만 이 사람들의 시나 문장의 저술이 뛰어나 없어져 버리게 하기에는 아까왔기 때문에 인출하여 유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종(侍從)의 차자에, 추향(趨向)과 관감(觀感)의 기틀이라는 말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굳이 공론을 어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출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하니, 인출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월포 대감은 왕의 주변에서 부당한 일을 자행하는 환관들을 논죄하기도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참찬관 강사상(姜士尙)에 이르기를, “환시(宦侍)의 임무는 문을 지키고 명령을 전하며 청소나 하는 것뿐인데, 요즈음은 조관(朝官)에게 시비까지 한다. 지난번에는 자기 부인을 간음한 일로 격쟁(擊錚)까지 하였으며, 또 액정(掖庭)에서 감히 잡스런 말을 내어 재상을 동요하였고 허물을 해조(該曹)에 돌렸으니 지극히 부당하다. 그러므로 이미 추고하라고 명했다. 장번 내관(長番內官) 우한영(禹漢英)은 법률을 알지도 못하면서, ‘환관의 처는 마땅히 사족(士族)의 예를 따라 논단(論斷)해야 하는데 간음한 자를 겨우 장 팔십(杖八十)에 그친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으니,【율(律)에는 ‘환관의 처를 간음한 자는 장 팔십을 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우한영이 함부로 의논했다.】 법전(法典)을 모르면서 함부로 떠든 것도 잘못이다. 이 환관도 마땅히 함께 추국해야 한다. 정원에 전교하려다가 자세히 알게 하느라고 말한 것이다. 전에 조관에게 시비한 자는 모두 죄를 입었다. 이 사람의 일이 지금 또 드러났으니 추고하여 치죄하라.”하니, 강사상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환관은 마땅히 문이나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는 것뿐인데,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놀랍습니다. 들으니, 좌의정 안현(安玹)이 병세가 위중하다 합니다. 대신의 병이 위중하면 상께서 위문하신 전례가 있습니다. 신이 원중(院中)과 의논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사신은 논한다. 강사상은 이미 상의 전교를 받들었으니, 당연히 환시의 방자하고 교만한 실책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잘잘못을 밝혀서 후일에 천권(擅權)하는 조짐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라고만 대답했을 뿐이니, 고문을 받드는 도리에 있어 크게 부끄러운 점이 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좌상은 순후(醇厚)하면서도 고집이 있어서 반드시 정사(呈辭)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서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의 병세가 이와 같은지를 알지 못했는데 지난번 경연에서 영상이 말을 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만약 문병을 하면 몸을 움직이게 되어 병세가 악화될까 염려되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뢴 뜻이 이와 같으니 문병해야겠다.”하였다. 때로는 임금이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 들이는 태도를 보이 도록 충간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 등이 상차하기를, “임금에게는 우레와 같은 위엄이 있으므로 신하가 감히 면전에서 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반드시 길을 열어놓고 간언을 구하고 안색을 온화하게 하여 그 간언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위엄을 부리면서 나를 어기지 말라고 한다면 충성스러운 말은 들을 수 없고 따라서 어지러워져 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전일 서희려가 상소를 올린 뒤에 정원에 내린 말씀을 보고 한심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왕세자가 관례를 행하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성대한 예입니다. 근본을 단정히 하는 정시의 예는 조금도 구차하게 거행해서는 안 됩니다. 서희려가 국자감(國子監)에 재직하므로 예가 아닌 것을 보고는 마음에 미안한 것이 있어서 감히 상소하여 아뢴 것으로서 그의 논의는 과격하지 않고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엄한 말로 거절하다가 마침내 애써 따르신 일은 일식과 월식이 고쳐지는 것 같아 사람들이 비록 쳐다보고서 알았지만, 자만해 하시는 기색이 이미 말하는 사이에서 드러났으므로 이 말이 한번 나와 중외에 전해지자 모든 신하들이 두렵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들은 말하기를 꺼리는 단서가 이로부터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옛날에는 간하는 관직이 따로 없어서 조정에 잘못된 정치가 있으면 사람마다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로가 넓었고 임금은 잘못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각기 자기 몸을 아껴서 임금이 자기의 허물을 들을 수가 없자 이에 간관을 두었던 것이니 간관의 설치는 쇠퇴한 세상의 일입니다. 간관 외에도 만약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어찌 태평 시대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이 말 한마디를 내는 것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므로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난번 시관이 복명하던 날에 특히 책제의 문목을 따져 물으신 뜻은 인사를 극진히 하려는 뜻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시험을 담당했던 자들은 모두 스스로 마음 편히 여기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에게 책문(策問)하는 일을 유사에게 위임한 뜻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예전의 치란은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므로 선비들에게 책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치의 잘잘못을 아뢰게 하는 것은 다스림에 반드시 도움이 없지 않기 때문인데, 만약 쇠퇴한 세상의 어지러워 망하게 된 일을 듣기 싫어하여 선비에게 책문하는 것까지 꺼리게 되면 참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아,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직분에서 벗어났다는 혐의를 피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또 문자와 사장(辭章)을 지을 적에 말을 가려서 쓰게 한다면 그 폐단이 마침내는 온 세상으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도록 하는 데 이를 것이니, 어찌 나라를 맡은 임금이 깊이 걱정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이 의논을 보니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옥당(玉堂)의 정성을 알 만하다. 내 비록 명민하지 못하지만 어찌 듣기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다만 서희려(徐希呂)의 상소가 비록 임금을 아끼는 뜻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대례(大禮)에 임하여 경솔하게 논하였기 때문에 내 뜻을 알렸을 뿐이다. 책제의 말은 비록 고사를 끌어내서 문제를 내어 유생들을 인도하는 것이기는 하나 순정(純正)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정(邪正)을 분변하였을 뿐이다. 임금이 어찌 그저 따르기만 할 뿐이겠는가. 신하가 진언하지 못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제왕이 시비를 분변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마땅히 유념해야 한다.”하였다. 자신의 피해를 생각하지 않고 곧은 충성심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권세가 이양을 멀리 내칠 것을 1차, 2차, 3차까지 끈질기게 청하여 목적을 달성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 등이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이양이 임금을 업신여기고 정권을 독단하며 당을 세워 나라를 망하게 하던 정상에 대해 일국 신민이 모두 실망하고 걱정하면서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입을 다물고 아무말 없이 오늘에 이른 것은, 다만 그 흉악한 위세가 너무나도 치성하여 감히 거스르지 못하고 차라리 전하를 저버릴지언정 이양을 저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그 죄악이 가득 차서 도망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공론이 격발하였고 성감(聖鑑)이 다시 밝아져서 죄책을 밝히 보이셨으니 이는 바로 종사와 조정의 복입니다. 이목의 관원이 여러 날을 복합(伏閤)하여 번갈아 소장(疏章)을 올려 합사(合辭)하면서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은, 진실로 악은 지극히 큰데 벌은 너무 가벼워서 여정(輿情)이 아직도 울분해 하고 있으며 뒷날 국가의 안위가 실상 이 계기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간인을 물리치기를 멀리하지 않고 가깝고 편한 곳에 유배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쉬고 노닐면서 조정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으니, 대악(大惡)은 징계되지 않고 인심은 의혹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전하의 뒷날 근심이 어찌 오늘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그리고 이감·신사헌·권신·이영·윤백원 등은 간심을 품고 사악한 자에게 달라붙어 그 세력을 도와 흉악한 짓을 이루게 함으로써 조정이 날로 문란해지고 국세가 날로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들이 지은 죄를 추구한다면 그 죄가 똑같습니다. 삼위(三危)로 내쫓아도 중외의 마음이 시원하지 못할 판국인데 전하께서는 가벼운 형벌을 써서 아끼시는 듯한 느낌을 주니, 이것이 어찌 간사한 자를 버리되 의심치 말라는 뜻이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국가와 종사를 생각하시어 공론을 쾌히 따르시어 이들을 모두 먼 곳에 내쳐서 위망을 돌려 화평을 이루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간사한 자를 제거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엄하게 해야 하나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역시 적중함을 얻어야 하는 법이다. 이양 등 육간(六奸)의 죄는 위에서 짐작하여 이미 정했기에 내 뜻을 모두 양사에 알렸다. 참으로 죄를 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그러나 월포 대감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하여 이양 일당의 중형을 청하는 상차를 올렸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처신을 신중히 하고 말도 근신하였다.】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악을 제거하되 멀리하지 아니하면 물정이 의심하게 되고 간하는 말을 좇되 성실히 하지 않으면 공론이 무너지게 됩니다. 고금 천하에 국운의 안위와 사기의 흥상(興喪)과 조정의 화복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양사에 답하신 성비(聖批)의 말씀을 보니 첫째 ‘그 일이 소란을 야기한다.’ 하시고, 둘째 ‘내 마음이 편치 않다.’ 하시었는데, 간흉의 우두머리에게 승냥이나 뱀같이 달라붙었던 자들에게 약간의 벌만을 주시고 엄한 죄를 내리지 않으시니, 뒷날 국가를 위망하게 할 징조가 어둠 속에 잠재해 있다가 장차 헤아리지 못할 화가 닥쳐온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조처하시겠습니까? 공론이 시행되지 않고 물정이 의심하고 위태하게 여기자 조정에서나 사림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까지도 갈수록 더욱 답답해 하면서도 그래도 오히려 성명께서 이를 통촉하시어 이 음침한 기운이 시원하게 걷칠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바랐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하찮은 작은 환관이 일찍이 원흉과 맺어 심복이 되어서 성명을 가리우고 안팎으로 주고 받으며 못하는 짓 없이 다한 것을 전하께서만 모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외정(外庭)에서는 분명히 보고 대론이 격발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고 도리어 공론이라 해서 다 진실일 수는 없다고 의심하시고 정녕하신 하교까지 내리셔서 조목 조목 분석하여 변명하시니 신들은 여기서 더욱 정번이 극간 대사(極奸大詐)한 흉물이 되어 임금을 기망한 죄는 죽임으로도 용서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부당하게 보호하고 은총을 베푸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는 다만 내정에서 소제나 하는 사람으로 친척과 벗도 없고 처자와 재산도 없는 것들이라 국가에 해를 끼칠 것이 못된다.’고만 여기시고 조정의 물의와 대간의 말은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사당에 의탁한 쥐와 호위(虎威)를 빌린 여우란 그 형세를 당할 수 없고 위엄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응당 그 죄에 맞도록 죄를 주어 서둘러 귀양을 보내야 하는데도 아직도 의심하고 애석해 하시니 이런데도 믿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위망의 화가 조석간에 임박해 있어도 다시는 전하를 위하여 말씀드리는 자가 없지 않을까 은근히 두렵습니다. 아! 종기를 치료하되 악혈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을 막기 어렵고 풀을 제거하되 뿌리를 놔 두면 남은 넝쿨이 반드시 뻗어나게 마련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종사의 대계를 위하여 이목의 관원을 깊이 믿으시고 공론을 쾌히 좇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이 차사(箚辭)를 보고 내 그 당론(讜論)을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 원흉만을 죄주고 협종한 자는 다스리지 말라고 했는데 남은 지당(枝黨)까지 다 제거하자면 어찌 소란스럽지 않겠는가.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여 사기가 많이 상한다면 임금의 마음인들 어찌 편안하겠는가. 임금이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적중함을 얻어야 하는 법인데 간인을 없애는 일이라 해서 적중하지 않게 사람을 다스릴 수는 없다. 간흉의 우두머리와 승냥이나 뱀같이 따라붙은 자들을 내 어찌 아무렇게나 헤아려서 그 죄를 정했겠는가. 오늘날 환수(宦竪)의 선악에 대해서는 위에서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군신간에 정의(情意)를 통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변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이목의 관원을 못믿는 뜻이 되겠는가. 원흉과 체교(締交)했다 하나 상의 명을 받들고 이양을 찾아 본 것을 가지고 체교했다고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또한 적중하게 치죄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 등이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전날 간흉을 제거할 때에 그 죄에 합당한 형벌로 다스리지 않고 모두 관대한 법을 따랐으니 그 형전을 상실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었는데도, 대간은 이목의 자리에 있으면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고 논의를 고집하지도 못하고서 복합(伏閤)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정계(停啓)하고 말았으니, 언론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과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중외의 여러 사람들의 심정이 울분해 하면서 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사세로 보아 그대로 머물러 있기 어려운데, 헌납 유전(柳琠)은 더구나 구차하게 서로 용납한 과실까지 있습니다. 대사헌 기대항 이하와 대사간 박영준 이하를 모두 체차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성 등이 이양 등의 중벌을 청하다. 홍문관 부제학 강사상 등이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원흉 수악으로서 임금을 무시하고 정권을 독단하였으며 사독(邪毒)하고도 험특(憸慝)한 사람으로서 붕당을 맺어 나라를 폐망케 하는 화를 이루었으니 그 죄악이 이미 극에 달한 터라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는데 멀리 귀양 보내는 것마저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시니 이것이 바로 지금 인심의 불안함이 전날보다 더 심하고 조야(朝野)의 울분이 오래될수록 더욱더 격렬해지고 있는 원인입니다. 처음 간흉을 제거할 때를 당해서는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전하의 간언을 물흐르듯이 따르시고 간인을 제거하되 의심을 갖지 않으시는 성덕(盛德)을 우러러보았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멀리 물리치는 명을 아끼고 계시니 어찌 성감(聖鑑)이 아직도 그들의 정상을 다 통촉하지 못하시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삼가 성교(聖敎)를 보건대, 혹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저지른 처사다.’라고 하시기도 하고 혹은 ‘간흉 다스리는 것을 적중하게 했다.’라고 하시기도 하였는데, 신들은 깊이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중외를 위협하고 억누르며 조정에 그 독을 마구 구사하여 국가의 권력이 제몸에서 나오게 하고 임금의 위엄이 위에서 고립되게 하고는 분에 넘치게 사치와 참람을 함부로 자행(恣行)하여 그 소행을 보면 장차 못할 일이 없게 되었었는데, 이것이 과연 어리석고 망령된 처사입니까. 노(魯)나라 소정묘(少正卯)는 정사를 어지럽힌 데 불과했는데도 오히려 양관(兩觀)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이처럼 큰 죄를 졌는데도 가까이 편한 곳에 귀양 보내어 향사(鄕社)에서 편안히 놀며 지내는 것이 마치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간흉을 다스리는 데 적절하게 한 것입니까. 예부터 권간(權奸)이 국가를 위망에 빠지게 한 것은 항상 임금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화환(禍患)이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알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알고도 제거하지 못하고 제거를 해도 멀리 내쫓지 못한다면, 그 악을 징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은 가만히 조정의 의향을 엿보고는 그 기탄없는 마음을 더욱더 펼 것이므로 종묘사직의 근심은 차마 말 못 할 바가 있을 것인데, 그때 가서 형전(刑典)을 상실한 후회를 한들 추급(追及)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공론을 따르시어 물정을 시원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간흉 다스리는 일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전에 이미 그 죄를 참작해서 정했으니, 이제 와서 죄를 더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내 뜻을 근일에 다 효유했던 것이다.”하였다.

4) 인의(人義)를 실천한 사상가

월포 대감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국왕과 중신, 재야 유학자들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기술이 탁월 하였다. 1560년 7월 21일 왕조실록에는 예조참의 강사상의 중후하고 명달하여 공론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명종실록 30권 1564년 2월 17일 기사에는 강사상은 청렴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조심하고 삼가 집안의 검소함이 한사(寒士)와 같다고 이름이 나 있다. 전에 이양 등의 미움을 받아 화를 입어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곧은 절개는 더욱 빛을 발하였다. 그는 후족들에게 훈계의 시를 남겨 훈육하였다. 그의 가훈 시를 소개한다.

가훈시(家訓詩)

가유시서영만축(家有詩書盈滿車丑) ) 집안에 시서책 축으로 쌓인들

기나아손불호서(其奈我孫不好書) 어찌랴, 아손들 책을 좋아 아니하면

비원영화능세세(非願榮華能世世) 세세로영화누릴길 원해서가 아니라

이우무식견시여(以憂無識犬豕如) 개.돼지같이 무식할까 두려워 일세라고

읊었다. 독서의 목적이 인간답게 되고자 함에 있음을 훈계하였다.

월포(月浦)는 벼슬길에 있으면서 어릴적 정든 고향에 맘대로 가지 못함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곽외전삼경(郭外田三頃) 성곽 밖에는 서너이랑의 밭이요

계변옥수연(溪邊屋數椽) 개울가 묘옥은 수어 칸일세

고향귀미득(故鄕歸未得) 고향에 가고자하나 돌아가질 못해

추사정망연(秋思政茫然) 이 가을 생각은 정녕 망연하구나.

고향을 떠나 공직생활에 여염이 없지만 때로는 고향을 잊지 못하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맺는 말

월포 강사상은 상류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사회적환경과 집안의 사정이 매우 어려웠지만 강건한 신념으로 가정을 돌보면서도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후 관계에 진출하여 영욕의 길을 걸었지만 시류에 합류되거나 붕당에 휩싸이지 아니하였다. 공론으로 다투는 일이 없었고 사정에 쏠리는 일이 없었으며 화합하고 융합하는 정치철학으로 30 여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쳤다. 그는 자손들에게 “집에 시서가 가득 차 있으면 어째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자손의 영화를 원치 않으며, 세상살이를 잘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다만 개, 돼지같이 무식한 자손이 됨을 근심할 뿐이다.” 라는 계언을 남겼다.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정사가 혼탁하였지만 맑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어느 한 파당에 국한 하지 아니하고 전체를 생각하는 사상이 임금의 신임을 얻고 동료와 백승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셨다. 신념을 지키는 청렴 강직한 친민(親民)의 정치인, 책임 있고 인의를 실천한 처세의 큰 교훈을 남긴 월포 강사상 대감의 생애와 정치철학을 교훈 삼아 고향 상주고을을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최실광 한국족보대전 한국씨족사연구회 1989. 3 도서출판 청화

권태을 상주한문학 상주문화원 2001. 12. 종합출판 문창사

이종기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3. 10. 삼성인쇄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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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권 홀로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2003. 1. (주)사계절출판사

중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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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포 강사상 대감의 생애 요약

강사상(姜士尙) 1519-1581 조선의 대정치가, 자(字)는 상지(尙之), 호(號)는 월포(月浦), 시호(諡號)는 정정(貞靖)

1519년 (己卯) 중종(14년) 7월 3일 생

1543년 사마시 급제

1546년 문과 병과 급제

1552년 수찬, 헌납,

1553년 정언,

1554년 헌납, 이조정랑,

1555년 검상, 사인, 부응교,

1557년 응교, 전한, 직제학, 동부승지,

1558년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1559년 부제학, 좌승지, 도승지,

1560년 병조참의, 예조참의, 부제학,

1561년 도승지, 형조참판, 대사헌,

1562년4월 성절사로 명나라 왕래,

1563년 부제학, 도승지, 첨지중추부사, 부제학, 대사간,

1564년 부호군, 도승지,

1565년 대사헌, 경상감사,

1566년 동지중추부사,

1567년 예조참판, 원접사, 대사헌,

1568년 대사헌, 대사간,

1570년 주청사, 대사성,

1571년 대사헌, 동지경연사,

1573년 병조판서,

1574년 형조판서, 판윤,

1575.이조판서,

1576년 우참찬, 형조판서,

1578년 병조판서,

1578년 11월 우의정,

1581년 8월 영중추부사

1581년 (辛巳) 宣祖, 10월 30일 졸(63세)

묘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난곡에 있다.

증대광보국 영의정 정정공 강사상[姜士尙]

*증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진천부원군(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 晉川府院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