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3호

상주『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 연구

빛마당 2014. 3. 5. 15:22

상주『향약동심계(鄕約同心)』 연구


천주교 신부 천주교안동교회사연구소장 신 대 원

목 차

1. 들어가는 말266

2.『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역주(譯註)268

3.『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구성과 목적288

4. 나가는 말292

상주『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 연구

천주교 신부

천주교안동교회사연구소장

신 대 원

1. 들어가는 말

1886년 한불조약이 성립된 이후, 국가차원에서 거론되었던 100여년의 길고 지루하던 천주교에 대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박해는 종식되었다. 하지만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론자들은 만인소(萬人疏)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척사(斥邪)운동을 전개하였고, 동시에 경성지역을 제외한 향리에서는 여전히 천주교에 대한 배척과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천주교에 대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탄압이 종식되었다고는 하나 향촌에서 전개되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비록 일시적이고 한시적이긴 하지만, 조정에서 주도하던 것과는 달리 향민들에게 척사의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단하고 찌들은 삶을 도와주는 상호부조적인 “향약(鄕約)”체계를 도입하여 향민들의 공동체운동을 조장하였다. 그러나 향민들의 공동체운동 역시 척사운동을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그러한 운동은 결국 명맥만 유지한 채 향민들의 일상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는 이러한 운동을 “교난(敎難)” 또는 외교적 절충에 따라 그러한 분쟁을 해결했다는 뜻으로 “교안(敎案)”이라고도 불렀다.

“교난”이라는 말은 박해(迫害), 사옥(邪獄), 군난(窘難)이라는 개념과 통하지만, 1785년부터 1886년까지의 박해와는 달리 이미 정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뒤이기 때문에, 박해나 사옥이나 군난과는 구별하여 어느 정도 상호 외교적 노력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가 짙은 개념이다. 대체로 교난은 1800년도 말이나 1900년대 초에 각 지방에서 두루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서도 1901년 제주교난과 1903년 황해도 해서교안이 유명하다. 경상도 북부지방에서도 안동이나 상주 등지에서 심심찮게 교난이 발생하였는데, 지금까지 교난의 구심점 노릇을 한 정황이나 문건이 포착되지 않아서, 이 지역에 대한 연구자들의 연구가 진전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경상도 북부지방의 교난도 다른 지방과 비슷하게 선교 성직자들과 향민들의 마찰, 천주교 신자와 외교인들 사이의 토지문제에 대한 분쟁 등 경제적인 이유, 신분사회의 모순에 대한 마찰 등등으로 인해 생겨났다. 이는 기존의 박해가 조정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교난은 오히려 천주교 문화와 향촌사회문화가 융합하는 과정 아래서 충돌한 사건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천주교가 당하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천주교가 향촌사회를 무시했던 정서도 교난이 일어나는데 일정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구한말 교난에 대한 연구자들의 연구는 이미 이 방면의 연구논문이나 저술서 등이 상당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여기에서 연구과제로 삼는 “상주교난”등과 같은 지극히 지엽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연구노력이 일천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개하려는『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전문연구는 이 방면의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전문지식보다는 의욕이 앞서지 않겠나 하는 두려움을 가진다.

본 연구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이른바 상주교난이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전국적으로 번졌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뿐만 아니라는 먼저『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전문을 번역하고 각주를 달 것이다. 그리고 이 문헌이 저술될 당시의 상주지역의 천주교와 향민들 사이 관련 사안들을 선교사들의 서한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다음 결론에 도달할 생각이다.

2.『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역주(譯註)

2-1『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와 상주교난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문서는 상주교난을 특징짓는 핵심문건이다. 교난은 박해가 종식된 뒤, 천주교〈혹은 개신교〉신앙이 합법적으로 보장되어 본격적으로 신앙을 전파하는 과정 속에서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인 측면에서 천주교와 한국의 문화가 충돌로 말미암아 야기된 지역적인 박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교난의 일례로 우리는, 1899년 안변동심계원(安邊同心契員)의 교인 축출소동, 1901년 상주 향약동심계(尙州鄕約同心契)의 천주교도 추방 결의, 장성향약(長城鄕約)에서의 서교인 작폐자의 징치 결의 등으로 일어난 교안을 들 수가 있겠다. 이 가운데서 1899년 안변동심계원(安邊同心契員)의 교인축출 소동과 1901년의 상주향약동심계(尙州鄕約同心契)의 천주교 추방결의 등 유교적 향촌의 향약에 의해 천주교인들을 향리에서 추방하거나 징벌을 가하는 집단행위로 인해 일어난 교안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다만 상주지방의『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라는 문서만을 역주(譯註)하도록 한다. 이 문서의 <서문>의 말미에 ‘崇禎五 辛丑孟夏 知州 光山 金命洙 序’라는 문장으로 볼 때, 이 문서는 숭정(崇禎) 5년 신축(辛丑, 1901)년 초여름에 당시 상주군수로 재임하던 김명수(金命洙) 군수가 작성한 것이다. 김명수는 상주목(尙州牧)이 군제(郡制)로 바뀌면서 4대째 상주군수를 역임하였는데, 그의 재임기간은 1900년 12월 18일∼1901년 5월 24일로서 고작 5개월 남짓하였다.

이 시기에 상주지방의 천주교회를 관장하던 담당 사제는 옥유아(玉裕雅, Louis Alphonse Marie Joyau, 1877-1907)신부였다. 그는 1901년 11월에 대구에서 조선교구장 뮈텔(閔德孝, Gustave Charles Marie Mutel, 1854~1933)주교에게 서한을 올렸다. 다음은 옥유아 신부의 1901년 11월자 사목서한 중 일부다.

“주교님, 사목을 시작하면서 주교님께 글월을 올리던 때는 이런 모든 사소한 골치 아픈 일들이 닥칠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개인적인 일들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날씨도 좋고 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며, 벼의 수확도 좋습니다. 이런 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상주지역에 도착하니 온통 박해 이야기입니다. 성모승천대축일부터 신자들이 저를 찾아와서는 자기들이 겪는 고난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신자들을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들 중의 한 부를 은밀하게 구하여 제게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사목방문 중이었으므로 신자들은 이 편지 두 통을 김보록(金保祿, Achille Paul Robert, 1853-1922)신부님께 갖다드렸으며. 김보록 신부님은 그것들을 주교님께 보냈습니다.

제가 그 신자들 구역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이 겪는 고충의 진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신자들에게 약탈을 자행하는가 하면, 신자들을 사회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문제의 회람(향약) 때문입니다. 과상골(Koa-sang-kol)공소에서는 이웃마을에 사는 10명의 예비자들이 저를 찾아와서는 자기들이 겪은 일과 두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등쳐 먹은 두 사람을 소환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명은 예천군수의 허가서를 제시하라고 고집을 부렸으며, 다른 한 명은 군수의 하인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충분하게 빼앗지 못했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담합하여 더 빼앗기로 하였습니다. 이상이 신자들의 보고내용입니다.〉 저는 첫 번째 사람은 돌려보냈지만, 두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빼앗은 것을 배상하겠다고 약속하는 각서를 작성하게 하였습니다.

회람 건에 대해서는 회람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을 소환시켰습니다. 그는〈혹은 다른 어떤 사람〉다른 마을에 사는 주민이면서도 신자들이 사는 마을 주민들의 명부를 작성하는 일에 관여하였습니다. 마을 주민명부에는 외교인들의 경우에는 이름과 나이가 기록되어 있으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름이 기록된 곳을 지워놓았습니다. 죄인들을 색출하려면 이것이 필요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는 이것의 의미를 알아낸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상주 목사의 회람(향약)과 마을 주민명부를 가져왔습니다. 대구감사의 회람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기에 버렸습니다..............(이하 생략)”

위 서한의 내용으로 볼 때, 당시 옥유아 신부는 상주의 “과상골”에서 상주목사의 회람과 마을 주민명부를 입수한 것 같다. 채광식(蔡光植) 선생의 견해에 따르면, 회람이란 곧『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약안(約案)이며, 주민명부란 산동면 과상리(현재 문경군 산양면 과곡리) 향약계안성책(鄕約契案成冊)을 가리킨다. 옥유아 신부는『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를 손에 넣고 회람의 책표지에 “이 책은 옥 신부가 상주 채 약정의 집에서 찾았다(此冊 玉神父 推尋於尙州蔡約長處)”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채 약정은 당시 산양면의 면약정(面約正)이거나 혹은 군약정(郡約正)일 가능성이 크다.

옥신부가 상주지방에 와서 교난을 겪은 뒤, 뮈텔주교에게 1901년 11월자로 보낸 사목서한과 상주군수가 1901년 초여름에 작성한『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사이에는 약 6∼7개월의 차이가 난다. 당시 상주군수가 상주를 떠난 것이 1901년 5월이므로 사실상 이 문건은 <서문>과 상관없이 그 이전에 작성되어 회람되어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다만 <서문>은『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가 시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상주군수로서의 공로를 스스로 자임하기 위해 별도로 기술한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당시 교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상주 인근의 김천, 성주, 예천, 안동 등지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서 지역의 유지들 및 그들이 부추긴 지역민들과 천주교인들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을 야기하였다. 이미 천주교에 대한 중앙정부의 박해는 종식되었고, 또 신앙의 자유를 정식으로 승인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관공서를 중심으로 하여 지방관리, 지역의 토호세력들, 지역주민들이 계속하여 선교사들이나 천주교인들에게 시비를 걸어 피해를 입히는 원인들을 살펴보자면, 결국 크게 보아서 서로 간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한 갈등구조 속에서 관리들이나 토호들은 천주교 문화로부터 지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를 결의하고, 약정(約正)을 규정하여 동(洞), 면(面), 군(郡) 등 지역단위로 세분하여 이른바 “향약공동체(鄕約共同體)”를 구성하여 시행에 들어갔던 것이다. “상주교난”에 대한 연구는 본 연구의 중심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약정 혹은 규약을 소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려고 한다.

2-2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역주(譯註)

<향약 서(鄕約 序)>

『주례(周禮)』에서 대사도(大司徒)가 고을의 세 가지 사안을 가지고〈향민들을〉가르쳤고, 고을의 여덟 가지 형벌로써 그들을 바로 잡았으니, 교화는 위로부터 밝아지고, 풍속은 아래로부터 바른 길을 좇게 되었다.「남전여씨향약」이 곧 그가 남긴 제도(遺制)이며, 회암(晦菴)선생이 수정(增損)하였으니, 그 규모와 조약이 더욱 상세해졌다.

대체로 일방(一坊)에서 시행하면 일방의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고, 일향(一鄕)에서 시행하면 일향의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다. 천하국가를 위하여 거행해서 베푸니, 모두 마땅히 손바닥을 보는 듯했다. 그러므로 만약 선정제현(先正諸賢)을 생각하여 관리가 들에서 거처한다면, 이로써 도적(導迪)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향약을 세상과 관련하여 가르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근래에 이르러 세급(世級)은 날로 비루해지고, 고을에서는 좋은 풍속을 없애버린 지 오래다. 요상한 학설이 자행되고, 혹세무민하는 부류들이 장차 빠르게 번지며, 에비도 없이 하고 군주도 없이하는 지경에 들어가니, 아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나는 경자년 겨울철에 이 고을을 지키러 왔는데, 읍리(邑吏)는 빼빼 말라 시들어가고 촌백성은 어리석었다. 비록 배가 부르더라도 올바른 방도를 지탱하여 지켜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또다시 갱장(更張) 뒤에 벽파(闢破, 문호개방)를 일컬으니, 민심은 뿔뿔이 흩어지고 풍속은 쇠퇴하여 문란해지며, 일반백성은 분수를 어기기가 거리낌이 없고 선비들은 염치없이 스스로 업신여기며 이익을 탐닉하여 뒤엉키고, 이상한 말들이 요란스러워도 다시는 윤리강상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는 교화가 미쳐서 이루어내지 못함이 아님이 없으며, 이때 이 향약이 화급하게 먼저 처리해야할 중요한 일이다. 나는 장차 이 고을에서 시행해서 고을의 백성과 선비들을 규합하였고, 즐겨 듣고서 따르기를 잘하니, 일이 매우 왕성해졌다.

그런데 사교(邪敎)를 곁에 끼고 민심을 어지럽히면 이미 여덟 가지 형벌을 부과하고 있었지만, 이 향약에 실천하는 자는 모두 눈을 크게 뜨고서 쓸개를 펼치고 곳곳에서 올바로 잡으니, 백성의 습속은 형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올바름에로 돌아갔다.

아! 우리 갓난아기는 아직 군자의 은택으로 나아가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하루아침에 개과(改過)를 깨닫고 교화로 돌아와 천선(遷善)하여서 허물을 멀리하고 따르며, 다시 올바름에로 돌아오니, 인륜이 밝아지고, 예의와 풍속이 정성스러워지며, 기강이 세워지고, 명분이 올바르게 된다면, 제나라와 노나라의 변화도 또한 장차 다시 이 고을에 나타나게 된다.

내가 장차 부드럽게 풀어서 돌아와 한가롭게 해 줄 수 있다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공덕은 다시 뒤에 오는 자가 좇아오는 발걸음에 희망이 있게 할 것이다.

숭정 오 신축(1901년) 맹하(초여름, 음력사월)) 지사(상주군수) 광산 김명수가 짓다.

<향약절목(鄕約節目)>

무릇 향약은 4가지 <강령>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덕스러운 일은 서로 권해 줌을 말하고, 둘은, 허물과 실패는 서로 규제해 줌을 말하며, 셋은, 예의와 풍속은 서로 주고받음을 말하고, 넷은, 걱정스럽고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래 남전여씨에게서 나왔으나 주희 선생이 일찍이 그것에 보태고 덜어서 행하였고, 후대의 현인들도 역시 대부분 본떠서 따라 하였다.

대체로 사람의 좋은 풍속을 이끌어주는 방도는 이것보다 올바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옛것을 참작하여 지금과 통하게 해서 조약을 세우니, 민중은 덕망과 문행을 가진 자들을 추대하고, 더불어 품격이 있고 사리를 아는 자들이 각각의 적임자를 천거하여 뽑고,〔도약정과 부약정과 약유사는 각 1인, 각 마을에는 직월과 색장과 별검각 1인이 있다〕세 가지 호적장부를 비치하였으며, 무릇 향약에 들기를 원하는 자는 한 장부에 적고, 덕업을 살펴볼 수 있는 자는 다른 장부에 적으며, 과실을 규제할 수 있는 자는 셋째 장부에 적고는 약유사(約有事)가 그것을 주관한다.〈직월은 매월 덕업을 살펴볼 수 있는 자와 과실을 규제할 수 있는 자를 약유사에게 보고하고, 약유사는 장부에다 기재하고, 회집일(會集日)에 곧 면약정(面約正)에게 알린다.〉

하나, 도약정은 비단 지주로써 한 고을 속에서 조정의 관리와 선비를 천거할 뿐 아니라 그 지사는 언행이 독실하고 덕망이 높으며 사람을 규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며, 향약 속에서 회의하고 천거하는 사안.

하나, 효는 부모를 섬기고, 경은 웃어른을 섬기며, 형과 아우와 벗하고, 친척과 화목하며, 부지런히 자제를 가르치고, 힘써 성경을 읽으며, 가려서 벗과 교제하는 것은 반드시 선을 좇아 실행해야 할 사안.

하나, 어른과 젊은이, 신분의 높고 낮음에는 각기 차례가 있고, 행위는 명분에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선비와 농사꾼과 장인과 장사꾼은 각기 본업을 지키고 옛 규범을 잃어버리지 말라. 마치 이교가 규범에 벗어나는 사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두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사안.

하나, 품은 뜻으로는 청렴과 절개를 지키고, 행위로는 충성과 절의에 힘쓰며, 법령을 두려워하고 규도를 잃어버리지 않고, 힘써 멸사봉공하며, 세금 내는 일을 어기지 말라는 사안.

하나, 一 書冊農光 相互假借 使書農之 亦 … (해독불가) … 不失其○事

하나, 힘써 널리 시혜를 베풀어 불쌍한 자, 고아, 약자를 어루만지며,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고, 대중을 위하여 일을 모아야 하며, 능히 정성스럽고 충실한 마음을 모조리 다해야 한다. 만약 도리도 아니고 마땅함도 아니라면 공덕으로 범하지 말라는 사안.

위 덕업상권의 조목은 향약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각자가〈행실을〉독실하게 닦고, 서로 권면하며, 회집하는 날 선적을 기록한 것을 약정에게 보여주며, 서로 더불어 받들어 장려하고, 그 능히 행할 수 있는 자가 그 능히 행할 수 없는 자를 타일러야 한다.

하나, 백성을 위하여 멸사봉공은 급선무의 일이다. 이즈음에 나라 비용이 탕갈하니, 모든 관리는 모름지기 녹봉을 받고 군대의 총수는 방료하여야 하니, 모두 다른 길이 없다.

임금이 처소에 드는 일은 불안하고, 각기 다른 모양으로 위로 올려야 할 채무나 납세는 기한이 지나도록 지체하니, 어찌 관리와 백성 사이가 다투어 고민되지 않겠는가?

매번 세금을 부과할 때마다 때를 넘겨 거두어들이거나 돌려주니, 이에 말하기를 ‘백성을 위한 도리’라고 한다. 각 면의 약정과 유사는 각 마을의 별검과 직월과 색장을 지휘하고, 아무도 국고로 들어가는 조세를 논하지 말라. 스스로 각기 마을의 책임자는 관처에 납부하고, 부지런히 힘써 봉공하며, 위로 납부하는 데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위 환난상휼의 조목은 향약회원들이 반드시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어기고 소홀히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릇 예컨대 향약회원이나 유사가 모두 장부에 적음으로써 도약정에게 보고한다면, 취하여 차례로 천거하여 맡기는 일.

하나, 술에 취하고 노름하며, 무고로 얽어매고, 싸워 송사하는 것은 아울러 일체 엄중히 금하는 일이다. 만약 이 세 가지 허물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직월은 약유사에게 보고하고, 장부에 적어서 회집일에 벌을 논할 사안.

하나, 혹 외부의 유혹에 따르고 침입하여 이교를 감염시키는 자가 분수를 업신여기고 기강을 범하고 이하로 윗사람을 능멸하면, 향약 가운데서 뜻을 밝혀 반드시 개혁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개혁을 거부한다면, 회집하는 날을 기다리지 말고 곧 면약정에게 보고하고, 면약정은 도약정에게 보고하여 경계하고 벌을 주어 계도할 사안.

하나, 행동으로는 공손하지 못하고 말씨로는 비난받을 짓을 하는 자는 향약 가운데서 반드시 규제하고 책망해야 하며, 그로 하여금 조심성 있게 신중토록 해야 할 사안.

하나, 즐겨 놀고 장난치며 게으름피우며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향약 가운데서 그를 경계하고 가르쳐야 한다. 듣지 않으면 장부에 적고, 회집일을 기다려 대중이 규제할 사안.

하나, 혹 사람들의 자제를 유혹하고 거짓으로 꾸며 재물을 사취하는 자가 있다면, 이구동성으로 벌을 내세워 곧 향약에서 퇴출할 사안.

하나, 혹 그릇된 짓으로 남을 속여서 변덕스럽게 법을 정하여 사사로이 스스로 계를 만드는 자는 특별히 벌을 내려 즉시 향약에서 퇴출하고, 또 해당 관서에서 징치할 사안.

위 과실상규의 조목은 동약인(洞約人)들이 각자 성찰하고 서로 규계하며, 작게는 은밀하게 규제하고, 크게는 회중이 훈계한다. 만약 듣지 않으면 회집일에 직월은 면약정에게 보고하고, 면약정은 마땅한 도리를 가르쳐 깨우쳐주며, 사과하고 고쳐먹기를 청하고, 약유사로 하여금 장부에 기재하도록 하여 그를 기다려 준다. 만약 겨루어 따지고 복종하지 않는 자 및 끝까지 고칠 수 없는 자는 곧 사안을 삭제하고 향약에서 퇴출한다.

하나, 관혼상제는 각기 예제에 따르거나 혹은 상중을 틈타 시집가고 장가드는 자가 있어서 해가 지고 밤에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장사를 지내는 자는 반드시 규찰하고 막아서 금해야 하는 사안.

하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 맞절을 하는 것은 예절을 어그러뜨리지 않으니, 매번 절기마다 젊은이와 어린이는 반드시 웃어른에게 문안을 드려야 하거나 혹은 어떤 일에 임하여 결정하기 어려우면 청하여 덕망이 높은 어른에게 아뢰고, 삼가 그 적절한지 아닌지를 듣기를 바라는 사안.

하나, 슬프고 경사스러우며 혼인하고 장사지내는 것은 제 힘에 따라 서로 돕지만, 혹 때를 넘겨 혼인하지 못하고 때를 넘겨 장사지내지 못하는 자는 향약 가운데에서 특별히 구조해야할 사안.

하나, 향약을 세우고 세달 뒤, 향약회원 가운데 만약 부모의 초상과 아내의 초상을 당하였거나 또 혹은 자신이 죽으면, 색장과 별검은 급히 달려가 유사에게 보고하고, 유사는 본 마을과 부근의 각 동네를 지휘하며, 향약회원들은 각기 빈 가마니 한 장을 내놓는다. 또 닥나무로 만든 흰 종이 세 묶음과 술 한 동이 부조하고, 종이와 술에 해당하는 가격은 회비로 갈라서 나누어주며, 초종시기에는 각기 자기 양식을 먹고 다니고, 일제히 초상 때에 상례에 관한 일을 주관하고 보살펴야 할 사안.

하나, 장례 때 약정과 유사는 색장과 별검으로 하여금 일개면 각 마을 향약회원을 지휘한다. 그 집안 형편에 따라 각기 식승을 내고〈1말로 가령 헤아려 논하자면, 10승은 1말〉, 쌀 1승을 부조한다. 만약 빈궁하여 부조할 수 없는 자도 역시 장정 1명이 나가서 도우며, 각 동리의 직월과 색장과 별검은 그 동리의 쌀 몇 승, 역장정 몇 명에 따라 각기 목록을 갖추며, 각 마을 각기 양식을 먹고 다니면서 상례를 도와야 할 사안.

하나, 효도와 우애는 행위를 달리함이 있으니 규명하여 별도로 상을 준다. 또 관리가 알게 하여 표창할 사안.〈대략 주안상을 차려주고, 계가 열리는 날을 기다렸다가 윗자리에 앉게 하며, 별도로 시상한다.〉

하나, 향약 가운데 노인이 80세 이상이면 회비를 깎아주고 세의(선물)를 보내는 사안.〈계물이 보이지 않으면, 비록 1승의 쌀과 1근의 고기와 모피와 돈이라도 보낸다.〉

하나, 길흉대사에서는 쓰임을 빛나게 하고 사역을 적게 하며, 모두 있는 이나 없는 이나 서로 살펴야할 사안.

위 예속상교의 조목은 동약인들이 서로 바로잡아 젊은이들이 등한이 하고 소홀이 하지 말게 한다면 관습과 풍속이 옳게 이루어진다. 직월과 색장은 여러 차례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차곡차곡 쌓아서 약유사에게 보고하고 장부에 기재해두게 되니, 회집 일에는 상벌의 목록으로 삼는다.

하나, 만약 환난의 화급함을 가지고 있다면, 동약에서의 가까운 자가 먼저 구제하러 가면서 면약정에게 보고하고, 면약정은 직월과 색장으로 하여금 회원 가운데 두루 고하여 규합하면서 감독함으로써 구휼로 삼아야 할 사안.〈만약 불의 난이 지나가면 가촌을 모아 그 얼개를 돕고, 화적이 지나가면 힘을 합쳐 자취를 좇아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

하나, 만약 질액을 가졌다면 서로 의술과 약품을 묻고 구제함으로 삼을 사안.

하나, 동약(洞約) 가운데 혹 어떤 약탈과 강탈의 우환이 뜻밖에 나타난다면, 비록 밤낮으로 다급한 사이에 있더라도 기침소리를 듣고 즉시 나아가 힘을 합쳐 나아가 있는 이나 없는 이를 구제하는 것처럼 한다. 그러므로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각각 자기 동네에서 적발하여 삭녹할 사안.

하나, 사람들에게 덮어 씌워서 스스로 펼칠 수 없도록 하는 자는 향약 가운데서 발명하여 구제한다. 만일 사사로움을 따라 내밀한 폐단을 가진다면, 회집하는 달에 마땅히 벌을 논해야할 사안.

하나, 이웃마을에 혹 어려운 일이 있다면, 비록 향약회원이 아니더라도 역시 마땅히 구제하고 도와야할 사안.

하나, 계원 가운데는 현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먼저 일백 냥(전)을 나누어 주면, 피땀 흘려 번 돈(右錢) 일백 냥은 도약소 각 계원에게 나누어 주고, 각기 아래 가운데 대민에게는 5전, 소민에게는 3전씩 마련하여 준비할 사안.

하나, 계물과 계원 가운데서는 각기 자기 면에서 그 황폐함과 풍요함을 해소하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설명하며, 유사 2-3인을 차출하고, 유사는 마땅히 출납을 맡아야 한다. 매 초하루마다 4리(4%)로써 적당한 이자로 정하고, 회계일에 원금과 이자는 납부한다. 갓바치는 나누어서 지급하고, 만약 부랑민에게 지급하고 되 돌려받기가 어려워 물건이나 돈 따위를 잃어버리는 처지가 되면 유사를 꾸짖고는 말없이 징납한다. 또 혹 만일 되 돌려받기가 어려운 곳이 있다면 스스로 납부하는 가운데 힘을 합쳐 돌려받아야 할 사안.

하나, 집회 일에 그에 따라서 약원 몇 사람은 그 쌀 몇 말을 정하여 한꺼번에 요기를 하고, 계에서 소유하고 있는 돈 가운데에서 나누어 지급하며, 남용하지 말아야할 사안.

하나, 31개 면은 모두 춘삼월과 추구월에 약회를 정하고 도약정의 지휘를 기다려 설치하고 실행하며, 또 각 면에서는 2개월마다 한차례씩 약회하며 면약정의 지휘를 기다려 설치하고 실행하고 난 뒤에는 도약정에게 보고해야 할 사안.

이상에서 향약은 대체로 30조목이며, 매년 춘삼월과 추구월 초하루에 동약인들이 그 도약정의 지휘를 기다렸다가 모두 모인다. 집회 일에 도약정은 당상에 자리하고, 부약정 이하는 약정에게 배례하며, 약정은 답례한다. 끝나면 모두 섬돌로 내려가서〈부약정 이하 직월과 여러 임원들은 계단으로 내려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쪽 계단으로 내려간다.〉나이 순서대로 동쪽과 서쪽에 서고, 서로 읍례를 행하며, 예가 끝나면 각기 곧 자리하는데〈약정은 당에서 북 남향으로 자리하고, 양원 가운데 연령으로 존중받는 자는 서남향으로 자리하며, 부약정과 유사와 직월은 차례대로 약정의 왼쪽에 남향으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서 순서대로 동쪽과 서쪽 바라본다.〉

직월이 목소리를 높여 규약을 일고 한 번 지나가면, 부약정은 그 뜻을 추설하고, 회원 가운데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아 터득하여 관통하도록 하며〈약중의 소민은 한문을〔알지〕못하니, 언문을 사용하여 번역하여 베껴서 논함〉, 회원 가운데 잘하는 자와 대중이 추천하는 잘못하는 자가 있다면, 직월이 규합하고, 약정은 그 실상을 파악하여 대중에게서 다른 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그것을 글로 적도록 하고, 인하여 그 잘하는 자의 기록을 읽고 적으며, 한 번 잘못되면, 약정은 또 유사에게 명하여 잘못된 기록을 적도록 함으로써 편정은 앉은 자리에서 각자가 말없이 살펴보고, 한 번 잘못된 것이 끝났다면 이에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면 반드시 휴식을 하고, 다시 당상으로 모여서 혹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토론하거나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따져서 설명한다.

회원 가운데 자제나 기술을 배우려는 자로 하여금 성현의 책 1편을 소리 내어 읽도록 한다.〈20세 이상은 사서를 강송하고, 20세 이하는 효경과 소학을 강송함.〉 세상풍속에 이르러서 상스럽고 외설적인 것에 이르러서는 터무니없고 사특한 말을 미워하고 두려워한다면, 모두 입에서 나오지 말도록 하되, 단지 힘써 정숙하고 화락하게 하며, 만약 어기는 자가 있다면, 직월은 그때마다 규합하고, 해질 때까지 서로 배례를 하고 모두 물러난다.

3.『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구성과 목적

본문에서 사용한『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는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복사한 “Mutel문서 1901-64”의 사본이다. 이 향약규약은 14쪽으로 비교적 짧은 그러나 규약으로서는 비교적 길면서 한문본(漢文本)으로 엮어져 있다.

규약의 구성은 <향약서(鄕約序)>와 <향약절목(鄕約節目)>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향약절목>은 32조목으로 되어 있다. 절목의 내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4강령(四綱領)을 기본으로 하여 현실 안에서 실천이 가능하도록 마련하였다. 전체적으로 말해보면, 규약의 내용은 주로 중국 송대(宋代) 향약을 따르고 있다.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조직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우선 도약정(都約正)이 있는데, 그는 지주로써 한 고을 속에서 조정의 관리와 선비를 천거할 뿐 아니라 그 지사는 언행이 독실하고 덕망이 높으며 사람을 규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도약정 아래 부약정(副約正)과 약유사(約有事)를 각기 한 명씩 지명하여 군전역의 향약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 면부(面部)에서는 면약정(面約正) 1명과 마을(洞)에는 직월(直月), 색장(色掌), 별검(別檢)을 각각 한 명씩을 두어 각 향리의 실제적인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규약을 정하고, 그 규약에 따라 조직을 구성한 목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형식적인 측면과 실질적인 측면이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김명수 군수는 <향약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술하고 있다.

나는 경자년 겨울철에 이 고을을 지키러 왔는데, 읍리(邑吏)는 빼빼 말라 시들어가고 촌백성은 어리석었다. 비록 배가 부르더라도 올바른 방도를 지탱하여 지켜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또다시 갱장(更張) 뒤에 벽파(闢破, 문호개방)를 일컬으니, 민심은 뿔뿔이 흩어지고 풍속은 쇠퇴하여 문란해지며, 일반백성은 분수를 어기기가 거리낌이 없고 선비들은 염치없이 스스로 업신여기며 이익을 탐닉하여 뒤엉키고, 이상한 말들이 요란스러워도 다시는 윤리강상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는 교화가 미쳐서 이루어내지 못함이 아님이 없으며, 이때 이 향약이 화급하게 먼저 처리해야할 중요한 일이다. 나는 장차 이 고을에서 시행해서 고을의 백성과 선비들을 규합하였고, 즐겨 듣고서 따르기를 잘하니, 일이 매우 왕성해졌다.

얼핏 보면, 당시 사회 곳곳에 문란해진 풍속들을 바로세우고, 윤리강상을 모르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를 조직하고 그 규약을 실천하려는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고 좀 더 깊이 천착해 보면, 결국 조선후기에 끊임없이 제기되던 “척양(斥洋)”과 “척사(斥邪)”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을 알 수 있다. 다시 군수 김명수의 <향약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근래에 이르러 세급(世級)은 날로 비루해지고, 고을에서는 좋은 풍속을 없애버린 지 오래다. 요상한 학설이 자행되고, 혹세무민하는 부류들이 장차 빠르게 번지며, 에비도 없이 하고 군주도 없이하는 지경에 들어가니, 아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중략> 그런데 사교(邪敎)를 곁에 끼고 민심을 어지럽히면 이미 여덟 가지 형벌을 부과하고 있었지만, 이 향약에 실천하는 자는 모두 눈을 크게 뜨고서 쓸개를 펼치고 곳곳에서 올바로 잡으니, 백성의 습속은 형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올바름에로 돌아갔다.

군수 김명수는 “세급이 날로 비루해지고, 고을에서는 좋은 풍속을 없애 버린 지 오래다. 요상한 학설이 자행되고, 혹세무민하는 부류들이 장차 빠르게 번지며, 에비도 없이 하고 군주도 없이하는 지경” 이르게 된 원인을 전적으로 “사교”에 전가하고 있다. 이 “사교”가 곧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준동하는 “천주교”이며, 이 천주교를 이 땅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주민운동이 바로 “향약동심계”다. 결국 상주교난뿐 아니라 전국 각 지방에서 일어난 각종 교난은 그 발단이 천주교와 기존의 조선사회와의 사이에서 야기된 갈등과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천주교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종교적 박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의 규약을 보면,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향리를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여겨 일심동체의 사회, 대동(大同)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데 의의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교(邪敎)” 혹은 “이교(異敎)”를 배척한다는 측면에서는 이 규약만큼 보수적(保守的)이고 수구적(守舊的)인 규약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향리와 관리들은 자신들이 외부에서 들어 온 이질적인 사상과 문화를 배격하고 자신들이 현재 향유하고 있는 사상과 문화를 지켜내려는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별도의 한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세계정세와 목전으로 다가 온 시대변화를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치부를 드러내었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치부가 결국엔 “교난”이라는 문화적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이러한 충돌로 말미암아 그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전통적인 풍속을 지켜내기는커녕 오히려 결과적으로 새로운 국제질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도래로 말미암아 주류(主流)에서 변두리로 내몰리는 추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상에서 볼 때,『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규약은 향리공동체를 도모하는 듯 보이지만, 실행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천주교와 서양세력을 척결하는 것으로 정조준 되어있다. 이 때문에 1901년 옥유아 신부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의식을 극복하려는 방편으로써 규약을 찾아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4. 나가는 말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와 지방관아의 박해는 공식적 의미에서 1785년부터 시작하여 1886년 한불조약으로 말미암아 종식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조선사회의 박해원인을 따져보면 크게 정치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충격에 있었다. 이제 공식적인 박해가 종식됨에 따라 문화적인 충격만 남았다. “교난”은 결국 서양과 조선사회의 문화적 갈등 속에서 빚어진 박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두 가지 문화적 갈등 속에서 조선사회는 면면히 내려 온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이질적인 문화로부터 보호해야할 책임감 내지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이미 박해가 종식되었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융합 또는 흡수할 없는 이유들을 내세워 교난을 발생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에 대한 상주교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한 교난의 한 가운데『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가 자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는 두 가지 상반되는 문화적 충동(衝動)으로 인한 조선사회 기득권 계층의 반응의 결과물이다. 이는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의 미풍양속을 수호하려는 결연한 의지로 해석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조선의 것을 지켜가면서도 새롭게 대두된 문화에 대한 일정정도의 두려움 및 유가이념으로 점철된 사회제도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걱정스러움도 한몫을 담당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문화 또한 어느 기득권층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이 걸어 온 시간적 배경이 역사라면, 그러한 배경 속에 흔적을 남긴 공간적 배경은 곧 문화가 된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가 또 다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거쳐 공동체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데, 우리는 그것을 전통이라 부를 수 있겠다. 따라서 “교난”은 두 가지 서로 상반된 문화적 충동을 넘어서서 전통과 전통이 맞부딪힌 일대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가 부딪혔을 때, 양측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대화하고 타협하며, 서로 상대방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보장해준다면, 적어도 충돌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18세기 조선 후기사회가 그러하듯이 20세기 초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는 노력들이 “교난”이라는 박해형태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개별적이고 지엽적인 역사와 문화는 언제나 결속력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대와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개별적이고 지엽적인 역사와 문화는 누가 먼저 타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문화를 개방하느냐에 따라서 개인과 지역과 나라의 규모나 형태나 내용상에 있어서 확연히 발전 하는가 혹은 퇴보 하는가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00여년의 기나긴 국가의 공식적이고도 공개적인 박해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일각에서〈상주교난과 같은〉다시 박해의 불꽃을 피우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은 국익뿐 아니라 지역적 발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바다. 21세기는 “역사와 문화의 시대”다. 과거를 통하여 오늘의 삶을 돌아보고, 오늘을 통하여 미래로 향하는 디딤돌로 삼는 사람들이나 민족들이나 국가들만이 결국 성공하는 개인, 지방, 민족, 국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말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논어(論語)』위정(爲政)〕의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향약동심계(鄕約同心稧)』원문

<향약 서(鄕約 序)>

周禮大司徒 以鄕三物 敎之鄕八刑 糾之敎化 明於上風俗 義於下藍田 呂氏鄕約 卽其遺制 而晦菴夫子 有所增損 則其規模條約 尤加詳焉

盖行之一坊 而可以化一坊之民 行之一鄕 而可以變一坊之俗 擧而措之 爲天下國家 皆當示諸掌 故若稽先正諸賢 官居野處 莫不以此爲導迪之 第一件事 鄕約之有關 於世敎者 有如是矣

挽近來 以世級日 卑鄕無善俗久矣 異說恣行 惑世誣民之類 將駸駸然 八於無父無君之域 可勝痛哉

余在庚子 季冬來守尙州 則邑吏之凋殘 村民之愚 雖果難支 保規正之方 而況復更張後 稱以闢破 民心漫散 風俗頹敗 小民則犯分無忌 士夫則沒恥 自侮利慾 紛拿異言 喧豗不復 知有倫常 此莫非敎化 不及之致 此時此約 急急先務 則余將施行於麗州 而合州之民士樂 聞而善從事 甚盛矣

而俠邪敎 亂民心 旣在八刑之科 爲此約者皆明目 而張勝隨處 糾正之 則民俗不待 而自歸於正矣

噫 吾赤子 未遂君子之譯 久矣 一朝覺悟 改過而歸化遷善 而遠辜靡然 復歸於正 八倫明禮俗 成紀綱 立名(分)明正 則齊魯之變 亦將復見 於尙州矣

余將解緩 而歸間 則化民成俗之功 復有望於後來者 之踵成也

崇禎五 辛丑孟夏 知州 光山 金命洙 序

<향약절목(鄕約節目)>

凡鄕約之有四 一曰 德業相勸 二曰 過失相規 三曰 禮俗相交 四曰 患難相恤

此本出藍田呂氏 而朱夫子 嘗增損以行之 後來諸賢 亦多倣行

盖導人善俗之方 莫義於此 故遂酌古通今 以立條約 衆推有德 望文行者 與有風力 知事者 薦出各任(都約正, 副約正, 約有司 各一人/ 各洞又有 直月, 色掌, 別檢 各一人) 置三籍

凡願八約者

<德業相勸>

書于一籍 德業可觀者 書于一籍 過失可規者 書于一籍 約有司掌之(直月每月 以德業可觀者 過失可規者 告于約有司 約有司書于籍 會集日 乃告面約正)

一 都約正非徒 以地主薦出一鄕中 朝官與士人 簡擇其知事 篤行望重 可規八自約中 會議薦望事

一 孝事父母 敬事長上 友于兄弟 睦于親戚 勤敎子弟 務讀聖經 擇交朋友 必從善行事

一 老少尊卑 各有序 行不踰名分 士農工賈 各守本業勿失 故常

若有異敎 不經之事 一切勿犯事

一 志守廉介 行勉忠義 畏法令不失規 度謹奉公 勿愆賦事

一 書丹農光 相互假僧 仗書農之.....................................................

一 務廣施惠 撫恤孤弱 爲人謀事 爲重集事 能盡誠恪 若非理非義之事 功勿于犯事

右 德業相勸之目 同約之八 各自獨修 互相勸勉 會集之日 以記善籍 示于約正 相與推獎 其能行者 以警其不能行者

<患難相恤>

一 爲民 奉之急務之事也 際此國用 ○○百官 須祿 軍摠放料 俱是無路

丙枕不安 各樣上納之愆滯 豈非官民間競悶乎

每當賦稅超時回納 乃可曰 爲民之道 各面約正有司 指揮於各洞別檢直月色掌 勿論某之納 自各其洞督 納于官處 恪勤奉之無滯 上納事

右 患難相恤之目 國約之人 必一心合力 不犯違慢之過

凡如約者有司 皆書于籍 以告都約正 取次遷任事

<過失相規>

一 醨酒賭技 搆誣鬪訟 幷一切禁斷事(若有犯此三過者 直月告于約有司 書于籍 以爲會集日論罰)

一 或有蹈於外誘 侵染異敎者 蔑分犯紀 以下凌上者 自約中以義喩之 必使改革 若蔪開 則不待會集日 卽告于面約正 面約正告于都約正 懲罰擯出事

一 行不恭遜 言有造訕者 自約中 必規責 使之謹飭事

一 遊戱怠惰 不有職業 自約中 戒之誨之 不聽 則書于籍 待會集日 衆規事

一 或有誘人子弟 構虛騙財者 齊聲揭罰 卽爲出約事

一 或以挾雜 不正之事 多變成憲 私自作契者 別般施罰 卽爲出約 又○官徵治事

右 過失相規之目 同約之人 各自省察 互相規戒 小則密規之 大則衆戒之 若不聽 則會集日 直月以告于面約正 面約正以義理 誨諭之謝過 請改則使(約)有司 書于積以俟之 若爭辨不服者 及終不能改者 卽削案出約

<禮俗相交>

一 冠婚喪祭 各從禮制 或有○喪嫁娶 入日夜偸葬者 必糾察防禁事

一 尊卑○(枺?)楫 不違禮節 每歲時 少幼必拜候尊長 或臨事難決 則請告于長老 夙望聽其所否事

一 哀慶婚葬 隨力相助 而或過時不婚 過時不葬者 自約中 別般救助事

一 立約三朔後 約員中 若當親喪與妻喪 又或身死 卽色掌別檢 奔告有司 有司指揮本里與附近各洞同約人 各出空石一葉 且紙三束酒一壺賻之 而紙酒價 以契物劃給 初終時 各其齎糧 一齊護喪事

一 葬禮時 約正有司 使色掌別檢 指揮於一面各洞同約人 隨其家勢 各出食升(以一斗假量論之 十升爲一斗) 一升米賻之 若貧窮不能賻者 亦出壯丁一各助之 而各洞直月色掌別檢 隨其洞 米幾升 役丁幾 各具單子 以各里 其齎糧往護事

一 有孝友異行 有別般施賞 又聞官獎事(略具酒物一床 待契會日 ○上之座 別般施賞 契物不瞻 則○(法?)一升米 一斤○○ 具○(送?))

一 吉凶大事 光用僅○ 皆有無相○事

右 禮俗相交之目 同約之人 互相糾正 毋少漫忽 則習俗可成矣 直月色掌 迭○(窟?)其勤慢 以告約有司書于籍 爲會集日 賞罰之目

<患難相恤>

一 若有患難之急 則洞約之近者 先爲赴救 而告于面約正 面約正使直月色掌 編告約中 糾集而○之 以爲救恤事(若過火難 則○家村 助其結構 過火賊 則合力追踪○(擯?) 不見失物)

一 若有疾厄 則 相問醫藥 以爲濟救事

一 同約中 或有却掠 寇奪之患 出於不虞 則○(隨?)入日夜倉庫之間 警卽赴合力救

免○有無 故不參之人 各其洞中 摘發削錄事

一 或被人誣枉 不能自伸者 自約中 發明以救之 如有循私 來密之○(解?) 則會集日之目 當罰論事

一 隣里或有緩急 雖非洞約 亦當救助事

一 契中不可無物 故自官先 爲一百兩(錢)劃給 則右錢一百兩 劃付於都約所 各員各下中 大民五錢 小民三錢 式辨備事

一 契物約員中 各自面 解其禍 饒○(詮?)信人 差必有司二三人 有司任當出納 每朔 以四利 例適利會稧日 本利椎納 ○(匠?)爲分給 浮浪難捧處 至於見失 則謗有司 無辭徵納 而又或有 有難捧處 則自納中 合力推捧事

一 會日 隨其納員幾人定其飯未幾斗 一時饒饑 而契錢中 ○○勿爲濫用事

一 三十一面 都約會 春三月 秋九月 爲定待都約正 指揮設行 且自各面 二朔一次式約會 而○其面約正 指揮設行 後來告于都約正事

以上鄕約 凡三十二條也 每歲 春三月 秋九月 朔 同約之人 待其都約正指揮 皆會 而會日都約正 坐于堂上 副約正以下 行拜禮於約正 約正答拜 訖副約正以下 皆降階(副約正以下直月諸任 降自○(陔?)階 餘人降自西階) 以齒序 立於東西 行相楫禮 禮畢各就坐(約正坐堂北南向 約中 年最尊者 坐堂西南向 副約正有司直月 次約正之左南向 餘人以齒爲序 東西相向) 直月杭聲 讀約一遇 副約正推說其意 使約中 諸人曉解貫通(約中小民 有不文者 用諺文 翻謄以論之) 約中有善者 衆推之有過者 直月糾之 約正詢其實狀 于衆無異辭 乃命有司書之 因讀其善錄 一過約正 又命有司 以記過籍 編呈在坐各默觀 一過旣畢乃食 食畢必休 復會于堂上 或討論經史 或辨說義理 使約中 子弟疑業者 講誦聖經一篇(二十以上 講四書 十歲以下 講孝經 二歲小學) 至於世俗 鄙俚淫褻 怨○(愬?)神怪 邪僻之言 則功勿出諸口 只務整○(帚?) 雍容有違者 直月輒糾之 至晡復行拜 楫禮方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