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3호

상주 지방의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

빛마당 2014. 3. 5. 15:30

상주 지방의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영남교회사연구소 마 백 락


서 언

상주 지방은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도 감영이 있었던 곳으로 유서 깊은 고을이다. 소백산맥 동편에 위치하고, 낙동강이 이 지방의 동남쪽으로 흘러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예로부터 많은 인재가 배출된 인물의 고장이기도 하다.

필자는「천주교 안동교구25년사」사료를 준비하기 위하여 1차 사료 조사차 이 지역들을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한바 있다. 그 자료들을 다시 정리하여 밝히고자 한다.


1. 이안 교우촌


1) 위치와 연혁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 배모기는 본래 함창군 상서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뱀의 목처럼 생겼으므로 양배모기 또는 양범리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주군 이안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에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문중 박해로 이곳에 정착한 서광수의 가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천주교 복음의 씨가 떨어졌다. 부근에는 사실과 은재(저음리), 작골, 감바우 등의 옛 신자 촌이 있다.

천주교가 이 지방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아마 1700년대 실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남인 학자들에 의해서인 듯하다. 실제로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포교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그 이듬해인 1785년 3월 명례방 김범우(토마스) 집에서 신앙집회가 있을 때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에 의해서 문중 박해로 문중에서 파적을 당한 서광수의 가족들이 이 지방의 이안면 배모기로 우거해 옴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씨가 뿌려졌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광수의 아들인 서유도 가정은 문경 한실로 이사를 가고, 그 집안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된 것으로 생각되는 경주 이씨 이응동의 선대 가정도 이곳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 박해(1801) 때 충청도 사람인 김만업이 상주로 귀양을 왔다. 그 후 이안의 배모기뿐 아니라 부근의 사실과 저음리와 멍애목, 앵무당, 산막터, 오도재, 보문, 서산 화장터와 그 부근의 마을인 율리(밤밭) 등 여러 곳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특히 상주 시내는 목사(牧使)의 아문이 있었으므로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되어온 신자들이 관아에서 영장에게 문초를 받다가 사망을 하거나 감옥에서 옥사를 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2) 서광수(1715-1786)의 신앙

서광수는 용인 현감을 지낸 서명함의 장남으로,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달성 서씨(達成徐氏)의 명문 가정이었다.

특별히 그의 집안 친척 중 당숙인 서명응은 정조 때 사학자로 홍문관 대제학 등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며, 또한 북학파인 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과 함께 중국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연구한 학자였다.

학자 집안에서 자라난 그가 실학을 연구한 것도 서명응이 1755년경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당시 중국에서 체류하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쓴 서학 서적들을 많이 가지고 오자 그는 이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여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그 후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되고,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그가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고을 배모기에 피난 와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그의 가문에서는 그와 그의 자녀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자, 문중회의를 열고 족보에서 파적시켜 버렸다 한다. 그리하여 그의 가정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그는 5남 유도 가정과 함께 이곳 상주 이안의 배모기에 우거해 왔다. 그러나 그는 그 이듬해인 1786년에 72세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2남 유오의 가정은 충주 장원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문경 여우목에서 살았다. 그 후 5남 유도 집안은 이곳에 얼마간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여 이안의 사실에 사는 이응동 집안과 당시 은재에 살았던 순교자 김 아가다 막달레나 가정들을 입교시킨 듯하다.

한편 2남 서유오 가정도 그 후손들이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서광수의 증손자인 서인순․서익순․서태순 3형제가 병인박해(1866-1873) 때 서울과 대구․상주에서 순교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1866)가 일어난 해 가을에는 그의 친척으로 추정하는 서유형(바오로)과 서유형의 형수인 박 루치아가 문경 모전에 살다가 상주 포교에게 잡혀서 상주옥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몇 년 전 안동교구의 주관으로 문경 한실 성지로 이장하여 모셔져 있다.

이렇듯 서광수 가정의 후손들은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후손 중에는 6명의 순교자가 났으며, 특별히 2남 유오의 후손인 고손자 서상돈(아우구스띠노)은 국채보상운동을 선도했을 뿐 아니라 천주교 대구교회 창립 시에 교회를 위해서 큰 공헌을 했다.

서광수의 묘소는 처음 서울에서 낙향해서 살았던 상주군 이안면 배모기에 있는데, 5남 서유도의 묘소도 선영하에 함께 있다.


2. 정해박해 때 순교자들이 살았던 유적지

1827년 정해박해 때는 순교자 박보록과 박사의 부자가 살았던 멍애목, 순교자 김사건(안드레아)이 살았던 앵무동, 그리고 순교자 신태보 가정이 살았던 잣골 등이 있다.


3. 상주 시내의 옥 터, 관아, 처형 터

구한말 상주진영의 옥 터는 현재 상주시 성동동 남문시장 옛 소전걸(대구여인숙 포함)이다. 상주시는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도 감영이 있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관찰영이 대구로 이관된 후에는 상주 목사가 주재하면서 사법 행정은 물론 군(軍)지휘관을 맡아 군사들을 통솔했으므로 목사가 상주진(鎭)의 영장(營將)도 겸하게 되었다.

상주진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 7대 세조 때부터이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상주목사 겸 영장(營長)이 있는 관아(왕산 앞)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았으며 그때 심문을 받던 중에 배교하거나 순교하는 신자들도 많았다. 즉 구전에 의하면 이때 현재 왕산 바로 앞 남동쪽 큰 팽나무에 신자들이 매달려 문초를 받다가 죽은 신자들도 많다고 전해지고 있다.

심문 후에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서 갇혀있는 중에 옥사를 하거나 혹은 사형언도를 받고 형장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그때 형장은 옥 터 바로 옆인 성동동의 소전(현 대구여인숙 부근)과 서문 밖 병정들이 주둔해 있던 병영(兵營)이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는 멍애목에서 체포된 박보록, 박사의와 앵무동에서 체포된 김사건(안드레아), 안군심(리카르도) 등의 신자들이 모두 상주진영으로 잡혀 와서 문초를 받은 후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으며, 또한 1839년 기해박해 때도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860년 경신박해 때 상주지방은 포교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므로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했거나 배교를 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칠곡군 왜관 낙산리에 살던 성순교가 청리면 율리로 피난을 갔다가 상주진영으로 체포되어 가서 문초를 받은 후에 청리면 덕산리에 있는 서산에서 순교한 것 같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여우목과 한실공소 모전 등 여러 곳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상주진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문초를 받고 순교를 했거나, 석방이 되었거나, 아니면 성 이윤일(요한)과 한실공소 김 회장 형제 및 청리면 질리 사람인 송 아기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가서 순교 했다.

한편 신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상주목사 김중현은 신자들의 문초를 다 마친 후에 감옥에 갇혀 있던 70여 명의 신자들을 세편으로 나누어서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사람들, 둘째 편은 이곳 상주에서 처형될 사람들, 셋째 편은 중죄인이어서 여우목공소 순교자 이윤일(요한) 회장과 한실공소 김 회장 형제 등 3명은 대구로 이송하기로 하였다.

상주 옥에서 치명한 이들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은 장소가 어디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전해오는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상주 계산리의 옛 공동묘지와 또한 군위 법주공소(군위군 소보면 달산리)의 신자 공동묘지인 듯하다. 병인박해 때 이곳 상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태순(베드로)

서태순은 경상도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증손으로 충청도 장원에서 나서 문경 여우목으로 피난 가 얼마 동안 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후인 1840년경에 형제들을 따라 풍기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1859년 경에 형제인 철순, 익순 가정과 함께 대구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병인(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철순과 익순 형제 가족은 대부분 칠곡 한티로 피난을 갔고, 그의 가족은 그해(1866년) 봄에 문경 한실(문경군 마성면 상내리)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그해 겨울 문경 포졸에게 온 가족이 잡혀서 문경현 아문으로 압송되었다가 상주아문으로 이관되었다.

그는 많은 신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해 12월 18일, 혹은 19일에 순교하였다. 그의 부인 김 데레사와 옥중에서 탄생한 외동딸인 서 마리아는 동정녀로 커서 1885년 경 부터 대구교회 설립 초창기에 김보록 신부님을 도와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편 서태순의 시신은 부인과 보부상으로 이곳에 드나들면서 가끔 그의 옥바라지를 했던 조카 서상돈(아우구스티노)과 그의 형제 친척들에 의해서, 그들이 피난 가서 숨어 살았던 칠곡 한티로 옮겨서 안장했다.

김 아우구스티노

그는 원래 고향이 청주 ‘갈매골’ 사람으로 문경 한실로 이사를 와서 살다가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 그해 겨울에 다른 많은 가족들과 함께 문경 포교에게 잡혀서, 상주아문으로 이송되어 역시 그해 음력 12월 18, 혹은19일에 62세로 순교하였다.

김 토마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아우구스띠노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베네딕도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빈첸시오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프란치스코

아우구스띠노의 형제, 포졸들에게 잡히기는 김 아우구스띠노보다 10일 후에 잡혔으나 순교는 함께 하였다.

김 서방

김 아우구스띠노의 조카, 김 프란치스코와 함께 잡혀서 순교는 모든 친척들과 함께 하였다.

김 서방

김 프란치스코의 둘째 조카, 그와 함께 잡혀서 순교를 하였다.

장 서방

부부가 함께 잡혀 김 프란치스코와 함께 순교하였다.

장 서방의 아내(성본명 미상)

그의 장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수산나

공주의 김 안드레아의 딸, 박 야고보의 아내이다. 문경 호항이(여우목)에서 살다가 문경 포졸에게 잡혀 상주로 이관 되었다가 12월 15일에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김 요셉

그는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서 문경 한실로 이사 와서 살았는데 동정을 지키기로 뜻을 세워 묵주 제작을 직업으로 삼고 살다가 병인박해(1866년)를 만나 상주 포교에 잡혀서 순교하였다. 그의 연령과 순교일은 미상이다.

김 베드로

김 요셉의 사촌, 문경 한실에 살았고, 역시 김 요셉과 같이 동정을 지키기로 뜻을 세워 열심히 살다가 병인년에 잡혀서 상주로 이관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연령과 순교일은 미상이다.

모 막달레나

김 베드로의 모친이며 아들과 함께 잡혀 순교하였다.

박상근(마티아)

그는 문경 아전 이었는데 그의 숙모 홍 마리아와 함께 잡혀서 순교하였다. 나이는 30세이며 병인년(1866년) 12월이었다. 현재 묘소는 안동교구의 성역화 계획에 따라서 문경읍 마원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홍 마리아

박 마티아의 숙모, 박 마티아와 함께 잡혀서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박 막달레나

그도 역시 박 마티아의 친척인데 함께 잡혀서 순교하였다. 나이는 45세였다.

김 안토니오

위의 아우구스띠노의 종손,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서유형 바오로

문경 모전에 살던 그는 형수 박 루시아와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문경 한실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박 루시아

위의 서유형 바오로의 형수로서 문경 모전에 살다가 함께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했다.

현재 그의 묘소는 문경 한실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박 바오로

그는 덕산 산다리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에 문경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문초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나이 45세.

안창규

문경 호항리(여우목)에 살다가 체포되어 상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에 화형 되었다.

안 아우구스띠노

1866년에 순교했다. 아마 문경 호황리(여우목) 사람인 듯하다.

안 요한

문경 호항리에 살다가 체포되어 상주진영으로 이송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에 치명했다.

이상서 시몬

상주 사람으로 상주에서 잡혀 1866년에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나이 50세

전 사베리오 부인

1866년 1월 공주에서 순교한 순교자 전 사베리오의 부인으로 아마 문경 동로면 부럭이에 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로 이송되어 와서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안 세시리아

예천 사람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66년에 순교했다. 나이 15세


4. 서산(西山) 화장 터


1) 위치와 연혁

상주시 청리면 덕산리에 있는 서산(西山 509m)은 김천에서 상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한 청리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 떨어진 들 가운데 삿갓 모양으로 우뚝 솟은 청수하고 아담한 산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그의 영정각을 이곳에 짓고 수호해 오다가 1899년 상주 목사 이한능이 헐어 버렸다고 한다. 이 서산(西山)은 상주 공성면과 외남면 청리면의 접경지역에 있으며 옛날 박해시대 때 이 부근에 신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청리면의 율리(밤밭)와 이웃의 삼괴리 마을 등에는 많은 신자들이 살았는데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이곳 서산 화장 터 바위에서 순교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화장바위는 서산(西山)의 동쪽 산중턱에 있으며 크기가 사방 10㎡ 넓이의 약간 길쭉한 바위다. 이 바위에서 신자들을 처형시켜서 불에 태웠다고 하며 바로위에 있는 공동묘지에도 이름 모를 무명 묘소가 많이 있는데 혹시 순교한 신자들을 이곳에 묻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바위와 약간 밑쪽으로 떨어진 또 하나의 바위에는 천주교 박해 후 이 마을과 부근의 주민들이 돌림병이나 나쁜 병으로 사망하면 이 바위에서 화장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 성순교(본명 미상)

성순교(成舜敎)는 창녕성씨(昌寧成氏) 명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인 성섭(成涉)은 일찍부터 성리학과 실학을 연구하다가 천주교를 받아들여서 가문의 후손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종증손자인 성순교(成舜敎)는 1792년 칠골 달오(왜관)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여러 나라의 문자와 언어를 쉽게 배웠다.

당시 유명한 실학자이며 천주교인인 다산 정약용을 따라 정치 경제의 학문을 익히고 김정희와 함께 친하게 사귀어서 매년 봄, 가을에 서로 찾아 방문하였다. 그는 당시 권문세가인 풍산 홍씨(豊山洪氏) 집안에 장가를 들어서 23세 때에 상주의 향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서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 후 처남인 홍영모와 좌의정 홍석주가 벼슬할 것을 권고했으나 “우리 집은 대대로 청백리로 내려오는 까닭에 부친께서 모두 권문세가에 의탁하고자 하지 않아 하나의 통덕랑으로 세상을 마쳤으니 내가 비록 보잘것없으나 조상들의 죄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는 1836년부터 청나라의 사신을 따라가서 중국 선종황제를 알현하고 이어서 공자묘와 인도의 세일론 섬의 석가모니 유적지와 서양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1841년에 러시아를 거쳐 현학로와 함께 일본도 여행하고 돌아왔다.

1859년 경신박해를 만나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가 살고 있던 가실(현재 낙산성당) 집을 외가에 맡기고, 신자촌인 상주 청리의 율리로 쫒겨 왔다가 후에 다시 서산(청리면 덕산리)에서 순교하였다고 후손들이 전하고 있다.


3) 율리 신자 촌과 서산 화장터 바위

신앙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관내는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1860년 경신박해 전에 벌써 이웃인 청리면 율리(밤밭) 마을에 많은 신자들이 살다가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잡혀서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1.5㎞ 떨어진 청리면 덕산리의 서산(西山) 화장터 바위는 앞에서 말한 1860년 경신박해 때 칠곡군 왜관(달오)의 현 가실성당 터에 살다가 잡혀간 성순교를 비롯하여 처형을 당한 신자들의 시신을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후 이 바위에 돌림병이나 몹쓸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도 태웠다고 한다. <증언자 상주군 청리면 덕산리 이재연(73세), 이석규(64세)> 그뿐 아니라 서산은 상주군 공성면, 청리면 외남면에 접한 별로 높지 않은 산이나 그 산 둘레에 탑골 청계 등 많은 옛 신자 촌들이 있다.

또한 앞에서 말한 교회 문헌상의 기록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경상도 청리면 질리(현재 청리면 마공리?)의 송 이아기는 대구감영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교회의 공식적인 통계표에는 1899년에 삼괴정(청리면 삼괴리) 공소에서 김성학(알렉스)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신자 수는 22명이다.


5. 삼괴리 신앙 고백비


1) 위치와 연혁

상주군은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문중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 가정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이후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특히 신앙고백비가 서 있는 상주시 청리면 삼괴 2리와 그 부근의 내서면, 공성면 등지는 옛날 박해시대 때의 신자 촌들이 많았다. 청리면 삼괴 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 김씨( 金海 金氏, 盆城金氏) 집안의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 중에 장남인 삼륙(三陸)과 차남인 삼록(三綠)등 형제들이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년~1873년)가 일어남으로써 다른 형제들은 믿음을 중단해 버렸고 둘째인 삼록(도미니코1843년~1873년)만이 끝까지 천주교를 믿었다.

박해 중에는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니다가 1886년 한불수호조약 이후에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될 무렵인 1894~1900년 초에 그와 그 집안의 문중들이 살고 있던 석단산(石壇山) 아래의 현재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짜기의 쌍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 위에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를 건립하였다. 크기는 높이 127㎝, 폭 39㎝, 두께 22㎝이다.

이 신앙고백비 건립 때 사용한 비용은 쌀 5가마와 상당한 금액이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석에 비문과 글씨는 자기가 직접 써서 새겼다. 그런데 이 비석 건립 때 갈방 노인(본명 미상)등 몇 몇 신자들도 합심해서 보태었다고 한다.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의 건립 시기는 그의 손자인 김순경(79) 노인의 증언과 신앙고백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1894~1900년 초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 김복운(金福云1783~1839년)의 막내아들인 넷째 석주의 아들인 학택(學澤)의 출생연도가 1894년이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이 가능해 진다.

김삼록(도미니코, 1843~1935)의 가정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전 이미 형제들이 신앙을 받아들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맏형 삼륙(三陸)등은 박해가 무서워서 믿음을 버렸고 오직 둘째 김삼록만은 계속 천주교를 열심히 믿으며 박해를 피해 다녔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후 공식적인 박해가 끝난 후인 1894~1900년 초에 자기 집 뒤의 석단산 아래 큰 바위 위에 이 신앙고백비를 세웠다.

그는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순박한 신자이지만 아마 구한말부터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가담을 했던 것 같다. 즉 그의 손자인 김순경(79세)의 증언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그 무렵부터 내내 일본 순사들이 그의 뒤를 미행했으며 또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왔지만 미리 주위에서 알려 주어서 피신했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독립운동은 당시 김문옥 신부를 도와서 문경의 공평본당과 상주 서문동본당 전교회장을 하면서도 민족 사상을 가졌던 최동선 회장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은가 싶다.


3) 신앙고백비 발견 경위

김삼록이 1894~1900년 초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에도 아직 지방에 사사로운 박해가 있었으므로 이 신앙고백비를 가리기 위해서 비석 앞에 포플러나무 외 잡나무들을 많이 심어서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도록 가려 두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79세)이 모든 잡목들을 베어 버려서 어느 정도 앞이 트였다. 그 후 1982년경 당시 상주 서문동본당 이성길(바오로)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 아들을 만나서 이 신앙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현지를 답사하여 교회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2년 뒤에는 1984년 사학자인 서울의 오기선 신부가 현지에 와서 답사하고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을 했다.

이 신앙고백비는 건립 연대는 지금부터 약 100여년 남짓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신앙의 증거를 위해서 돌에다가 비를 세웠다는 것은 대단히 가치가 있는 일이며 또한 아직 한국교회에서 이외 다른 신앙고백비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높다 하겠다.

그밖에도 이 지역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인 서상돈(아우구스띠노)이 어릴 때 살았다고 전하는 율리 교우촌과 순교자 송이야기가 살았다는 마공리(청리면 질리)등이 있다.


4) 청리 신앙고백비 비문(碑文)

전면(前面)

第一 天主功衛咸 첫째, 천주님을 두려운(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五 敎于衛咸 다섯째, 교우를 받들어 모신다.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제작

癸卯生 本 盆城 金 계묘년(1843)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