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尙州의 陶磁生産과 需要

빛마당 2014. 3. 7. 22:51

尙州의 陶磁生産과 需要

김 세 광

Ⅰ. 개요

예로부터 상주지역은 유명한 전통도자 생산지이다. 「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麗末․鮮初期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도자기를 생산되었다고 기록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연구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과연 그 생산지가 어디에 위치하였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문헌에 기록된 지명이 현재 사용되는 행정구역이 아니다.

둘째, 이에 관련된 연구가 너무 소홀하였다. 오늘날의 도자요지에 관련된 연구 및 조사는 정확한 자료, 즉 고분 출토자료, 편년해석이 정확한 문화재 혹은 골동품으로서의 현재가치 등 연구가 용이하다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접근하지 않았다.

인류는 수십만년전부터 이미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굽는 방법을 체득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흙을 빚어 그릇을 구워 만드는 솜씨를 8000여 년 동안 익혀 내려왔다. 그들은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표면을 장식하기도 하였고 여러 가지 형태를 고안하였으며 유약을 발라 용기로서의 기능을 촉진시켰다. 이 용기들은 수공업의 한 형태로 발전되어 오면서 생필품으로서 그리고 생계수단인 교환매체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전통도자기는 특별한 계층의 수요를 필요로 하는 궁중의 전유물, 귀족들의 사치품, 예술품으로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수요를 필요로 하는 생활용기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전통도자기소의 경영주체는 곧 ‘民’이었으며, 그 경영형태 역시 ‘교환’의 동기에서 비롯되는 ‘민영수공업’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필자는 상주의 전통요들을 조사하면서 과연 자기소의 경영주체인 「所民」들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생산하고 수요에 부응하였는지, 그들의 생산물에 대해 충분한 이윤을 차지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전통도자수공업은 어떤 형태로 발전․쇠퇴하였으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어떤 인과관계를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지표조사 등을 통해 경영특성을 이해하고 그 발전 및 쇠퇴과정을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한 바 있다.


Ⅱ. 13세기전후의 전통도자기소

교환을 전제로 한 상주의 민영도자수공업이 언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는가?


1. 사기장골의 경영특성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금소․은소․철소․동소··· 자기소 등 「所」의 학문적 비중은 큰데 비하여 이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고려시대가 아무리 귀족사회라 하더라도, 수공업부문에서 높은 수준으로 전업화 되어 있었던 「소」의 역할이 없었던들 청자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소」가 당대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 경영적 성격이 무엇인가?

이러한 자기소의 역할을 직접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고, 생산주체가 장인과 같이 천인에 속하는 집단일 때는 이렇다 할 기록을 찾는다는 것이 더욱 힘들다.

2) 사기장골의 성격 -지명유래-

우리나라의 지명 중 그 지방의 지세(地勢), 풍수지리, 특산물, 고사(古事) 등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 많다. 철점, 점촌, 너점, 독점, 사기점, 사깃골, 사기동, 사기장골, 점막, 도재이(도자기를 구운 장소라는 어원인 듯 함) 등이 그러하다. 현재는 폐요 되었지만 과거에 가마(窯)를 경영하고 있었던 장소 혹은 마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사기점(사기점골)」, 「사기소」, 「점(점골, 점마)」, 「도장골」, 「옹기점(옹점, 독점)」, 「사기담블」, 「사기장골(사기장골)」, 「사기막(사기말)」, 「사기등」, 「도막」, 「옹막」, 「백기리」, 「사구」, 「도구」, 「도촌」, 「도곡」, 「도동」 등이 있다. 그 외 현 지명으로 사용되지는 않더라도 무수히 많은 구전지명들이 많다. 대부분 지역 특산물과 관련된 곳이다.

지역의 주 생산품 종류에 따라 지명이 구전되어 온, 즉 자기, 철기, 옹기, 기와 등을 구웠고 그곳에서는 ‘거래행위’가 이루어지던 마을, 즉 「砂器場谷(사기장골)」…… 등 대부분의 공통점들은 사기 혹은 자기편들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표 > 도자기 관련 지명유래 비교

출처

구분

淺川功의 연구(A)

김세광의 연구(B)

비 고

사기

장골

표기

砂器匠谷

砂器場谷 (Sakeuitchyangkol)

사기장골의 ‘장(匠)’을→ ‘場’으로 표기함으로써 새롭게 해석.

해석

“그릇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의 예로서 ‘砂器匠谷’으로 표기하였을 뿐, 구체적 언급은 없다.

자기를 생산하고 및 거래(場)가 이루어 지던 곳(고을, 場, 谷 등)


3) 입지

입지란 상업교통로의 발달, 인구밀집, 상업도시 등 시장을 이루는 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를 말한다.

『擇里志』는 우리나라의 지리학과 사회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고전이며 인문지리적 측면에서 백성이 안주할 만한 곳을 입지조건을 들어 밝힌 한국학연구이다. 상주지역은 첫째, 당시 사기장골의 수요적 여건을 뒷받침해 주던 대외적인 교역로로서 ①북쪽으로 상주→문경→조령→충청도→경기도 등을 지나 중앙에 이르는 길과 ②남쪽으로 상주로부터 낙동(洛東津)→김해→동래로 통하는 천혜적인 유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둘째, 사기장골의 생산품은 상주권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인근지역의 수요를 흡수하기 위한 입지를 바탕으로 생산동기를 명백히 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자기는 민수용 생활용기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셋째, 자기의 취급상 특성으로 볼 때 장거리교역은 수로를 많이 이용해야 했을 것이며, 수로와 육로의 연결해 주는 이 근본적으로 상업발달에 좋은 여건을 조성해주었다. 그것은 륙로로는 영남로가 관통하고, 수로로는 낙동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생산품에 대한 공급구조(장내기)를 위한 여건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경제외적강제」구조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생산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4. 고려시대의 자기소

1) 수취체계

자기소에 대한 수취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所」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기존의 「所」관련연구의 대부분은 신분관계를 중심으로 소 문제를 다루었으므로 그 실체를 완전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봉건적 지배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특히 고려후기 이래 그 구조적 모순이 더욱 더 드러났다. 이러한 사실은 12세기 초 자기소의 공물이 過極徵求되어 장인들이 도망쳤을 때 각 所管官司에서 각 所별로 常貢의 많고 적음을 직접 배정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過極徵求’는 공물생산량을 위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所」의 책임자인 「소리」와 소관 관사들 사이의 부정한 방법의 결탁으로 인한 폐단이 많았다.

자기소의 「경제외적강제」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수취관계를 알아야 한다. 고려사 등의 사료에 의하면 각「소」에서는 금․은․동․철․사․주․지․와․탄․염․묵․곽․자기․어량․강 등을 공물로서 국가에 수납하였으며, 소민들에게「별공」을 부담케 했던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睿宗三年(1108) 二月判

ⓐ 京畿州縣 常貢外 徭役煩重 百姓苦之 日漸逃流

ⓑ 主管所司 下問界首官 其貢役多少 配定施行

ⓒ 銅鐵瓷器紙墨雜所 別貢物色 徵求過極 匠人艱苦 而逃避

ⓓ仰所司以其各所別 常貢物多少 配定奏裁”

즉 ⓐ경기주현은 常貢외에 요역이 너무 많고 과중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날이 갈수록 도피처를 찾아 떠나니 ⓑ主관할 所司는 계수관에게 공역(常貢+徭役)의 많고 적음을 파악하여 이를 적절히 배정 시행토록 하라. ⓒ동, 철, 자기, 묵, 종이 등을 생산하는 여러 소에서는 別貢物色을 징수하는 것이 너무나 많아서 장인들이 견디다 못해 도피하는 자가 많으니, ⓓ바라건데 所司는 각 所별로 별공과 상공의 많고 적음을 배정하여 결과를 보고토록 하라는 내용이다.

위 사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所는 이미 12세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며 수납이 과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군․현 백성들의 책무인 地助, 別貢외에 부정기적인 요역을 부담한 데서 도피처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장인(所民)들은 상공 이외에도 부정기적인 별공을 과중부담 함으로써 생산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 원인이 된다. 자기소의 경우 생산동기를 잃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깊은 계곡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光宗卽位 命元甫式會 元尹信康等 定州縣歲貢之額

ⓑ 文宗二十年六月判 諸州縣 每年常貢牛皮筋角 以平布折價代納

ⓒ 睿宗九年十月判 貢中布一匹 折貢平布一匹十五尺 貢紵布一匹 切貢平布二匹 貢綿紬一匹 折貢平布二匹”

ⓐ에서는 각 군현이 매년 일정액의 貢賦를 부담했음을 ⓑ에서는 각 군현이 매년 부담해야 하는 상공품, 즉 소가죽, 근, 각 등의 경우에는 平布로서 대납할 수 있다. ⓒ각 군현이 부담하는 세공액 가운데 그 지역에서 생산이 어려운 경우에 평포를 기준으로 모시, 명주 등을 대납하였으나, 각 군현 중에서도 상공을 충분히 납부할 수 있었던 곳이 있었는가 하면, 자연적 조건이 불리하여 생산이 되지 않았던 품목은 대납하여 낼 수 있었다. 이는 고려왕조의 수취실현을 위한 보완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금, 은, 동, 철 등의 경우처럼 자원이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경우 생산이 힘든 곳에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대납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자기소의 경우는 그러하지 않다. 전국의 어느 지역에서도 생산에 필요한 태토, 용수, 땔감 등이 풍부했다. 당시 장인들은 이러한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도피처를 찾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어느 곳에서든 자기를 구우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대부분의 「소」가 공물수납을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수납된 것은 절예품인데 비해 비절예품에 한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 교환관계

도자기가 생활용기로서의 기능을 하였고 백성들의 수요를 필요로 하는 부분은 國․官이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즉 도자기는 다른 수공업품에 비해 民에 대한 수요가 필수적인 부분이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12세기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高麗工技至巧 其絶藝者 悉歸於公 ······”

즉 “고려의 공예기술은 정교하다. 그들 중 절예품은 모두 왕실이나 관가에 귀속······”라는 글이다. 도자기의 경우 질이 다소 떨어지는 제품은 생산자 임의로 처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특별한 수요에 충당하는 제품은 자기를 번조할 때 ‘갑발’을 사용하지만 일반 민수용품은 갑발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주지역에서는 갑발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시의 일반백성들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지 못했으므로, 지역에서 가까운 자기소라든지 향시를 찾아가서 스스로 생산한 농산물이나 삼베 등을 제공하고 생필품인 그릇과 교환하였다. 이를테면 12세기의 사료 “南女老幼 官吏工技 各以其所有 用以交易 ······ ”에서도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미 전국 각지에 鄕市가 싹트고 있었고, 거기에서는 각자가 생산한 물건을 교환하였음”을 볼 때, 생활용기로서의 도자기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13세기 후기, 충렬왕 3년(1277) 5월에 大然이란 중을 강화도에 보내어 유리와(청자기와; 필자 주)를 만들게 했는데, 그 품색이 “남쪽 상인이 팔고 있는 것보다 우수하더라”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자기와라든지 청자도자기가 시중에 매매되고 있었다.

<표 > 13세기전후 세기․자기별 생산의 증감추이

세 기

종 류

10

11

12

13

14

감소 및 확산

청자

193

269

115

115

107

감 소

분청

5

20

확 산

백자

4

14

10

22

40

확 산

도기

18

26

3

?

?

감 소

215

314

128

137

154

10→11세기(증가)

12세기(감소)

12→14세기(증가)

Ⅳ. 14․15세기의 전통도자생


1. 14세기 이후의 歷史的 배경

전문생산기술수준을 갖춘 민영도자수공업은 수취관계로 인한 공급구조적인 제약 하에서도 교환․거래를 위한 도자수공업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지나친 강제수납 등 「경제외적강제」는 권력형부조리를 낳고, 이로 인한 고려왕조의 구조적 모순은 자기 굽는 일을 전업으로 삼는 장인들의 생산의욕저하와 유망현상을 동시에 불러온다. 결국 장인들의 기술, 생산능력에 비해 도자요지는 더 이상 확산될 수 없었으며 생산량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14세기경에 이르러 침체되어 있던 도자수공업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즉 전통도자기 생산기술(번조기술)의 변화와 민영수공업이다. ‘눈배기자기’의 출현과 粉靑沙器生産窯址의 확산이 대표적이다.

14세기 이후 가장 특징 있는 생산품은 분청사기이다. 분청사기는 청자의 번조방법과 같은 산화기법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현재의 도자요지 관련 보고서들에서는 분청사기로 혹은 청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초자료들을 활용하여 14세기이후에 나타나는 자기별 생산을 추이는 다음과 같다.

<표 > 14~16세기 자기별 생산의 증감추이

시 기

종 류

14세기

15세기

16세기

청자

107

41

23

분청

20

279

169

백자

40

110

135

도기

?

?

?

154

430

327



2. 조선 초 전통도자기소의 경영주체

‘경영’이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그 나름대로의 생산요소가 결합되어 일련의 생산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인적요소로서 경영자인 사기장을 비롯한 수중군․ 잡역인 등이 있어야 하고, 물적요소로서 토지․시설장비․생산원료․연료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산물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주어진 유통경로를 따라서 실수요자에게 흘러가지 않으면 재생산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생산업이 어떻게 경영되었나 하는 촛점은 그 경영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데 있다.

1) 國․官窯論

“세조 13년(1467) 경기도 광주의 중앙관요를 비롯한 지방관요의 도자기 번조를 총괄하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정교와 새로운 국가사회 건설을 위하여 활기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유교주의체제의 중요한 실천구현체인 왕실및 관아와 향교, 사가에서 소요되는 의기와 제기의 번조 등으로 관요의 성격이 처음부터 더욱 뚜렷했으리라 짐작된다.”

“농민이 토지에 예속되고, 서울의 상인이 관설 상가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수공업자는 관부에 예속되어 이른바 관영수공업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관부에 예속되어 있는 이들 수공업자는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京工匠과 外工匠으로 구분 되었다. ‥‥‥ 이들이 만드는 제품은 무기‧도자기‧문방구가 대부분 이었다. 이들 수공업자는 모두가 관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리를 위한 물품은 제조 할 수가 없었다.”

“이조시대의 도자기 생산은 麗朝와 아울러 이 땅의 수공업 중 가장 발달된 부문의 하나이다. 이조시대의 도자기생산에 있어서 중시되어야 할 점은 그것이 농민수공업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수공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관사의 직영 또는 직접 감독 하에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2) 民窯論

당시의 도자 京匠人은 국가나 관사로부터 통제를 받기는 하였으나 조선 초 양반사회체제하의 백성들은 반인격체인 農奴의 신분이었고, 국가로부터 구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했다. 이들이 생산한 생산품의 일부는 공물로서 국가왕실에 수납되었고, 나머지는 일반 백성들(實需要者)이 사용했다. 경영주체는 「所民」이며, 그들이 만든 수공품들은 ‘교환’을 전제로 생산하였다.

조선후기 양란이 일어나 왕실용자기는 소멸되다시피 하였고 그로 인하여 질 좋은 御器類의 급속한 수요가 뒤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官人과 결탁한 대납업자들은 고리대업을 겸한 이른바 貢人資本으로서, 그들은 京主人이라 불려지는 특권 상인층으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직접생산자인 일반백성은 2중, 3중으로 수탈되었다.”

한마디로 당시의 수공업자들은 오늘날의 민영수공업과는 양상이 다른 半人格體的인 신분의 수공업자이었음을 말한다. 백성들은 ‘직접생산자’이면서도 ‘경영주체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다. 위의 사실들은 中宗年間(1506~1544)의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지금 각 고을의 공물을 살피건대, 토산물이 고르지 못한 데가 있어서 모두 防納하기에 이르렀는데, 한 되를 대납하고 한 말을 징수하며, 베 한 필을 대납하고 세 필을 징수하고 있으니, 이로 인하여 쌓인 폐단이 극단에 이르고 있다”

방납이란 더욱 백성들을 괴롭히고 수탈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지방 각 군에서 납입하는 공물 중, 혹 스스로 갖추지 못 할 경우, 官에서 대납하고 그 대가를 받아 보상하는 것을 防納이라고 한다.”

방납은 초기부터 합법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납업자들은 관인과 결탁하여 소위 「권력형 부조리」를 일삼음으로써 백성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생산물의 대부분이 공물로서 수취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장내기로 생산되어 그 물량이 더욱 더 많았다.

朝鮮王朝 前期에 있어서의 관영수공업은 실질적인 것이 못되었고, 민영수공업의 비중과 역할이 더욱 컸다.

고려 말 수납방법이 가혹해짐에 따라서 전업적수공업을 경영하고 있던 所는 퇴색하고 수탈의 격화로 인해 조선초 수공업적 수요는 그 균형이 깨뜨려졌다. 즉 이러한 원인행위자인 「封建的反動勢力」은 「소경영주체」를 「상공천예(商工賤隸)」로서 억압하였고, 그들의 제품은 일반백성들의 농업 및 부업생산물과 직접 교환되거나 향시를 통하여 유통되면서 제품의 부가가치를 증식시켰다.

麗末․朝初의 수납관계는 이처럼 經濟的 基礎構造에 대해 작용하는 변수로서 중요한 意義를 가지고 있다.

“所는 당시 廣範한 各階層用을 供給할 目的으로 各種物品을 생산하고 그 一部를 貢賦로서 國家에 收納했던 것이 아니고 元來 그것은 매우 限定된 階層사람들의 需要를 充足시키기 위한 存在였다.”

이 내용에서는 마치 도자기가 궁중의 전유물이었던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며, 민수용

으로는 전혀 생산할 수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후기의 「자기소」는 국영도 관영도 아닌 공동체적 「소영」 이었다. 왜냐하면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소리」를 중심으로 하여 「소」를 구성하고 있었던 「소민」 전체가 「소」 경영의 주체가 되어 여러 물적 요소를 조달 하였으며, 그들의 높은 기술적 수준으로 분화된 각 과정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협동적으로 자기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 논자들은 도자편이 비색이 아니라고 해서 청자가 아니고, 조선 초 퇴락청자라고 단정하고 있지만, 각 자기소에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청자는 한결같이 비색일 수는 없다.


사옹원(司饔院)의 정체에 대해 관요론에서는 조선왕조는 건국당초부터 사옹원을 두어 광주의 중앙관요를 비롯한 지방관요를 통괄하였다고 함으로써, 사옹원이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중앙과 지방관요의 도자기생산을 통괄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고려 목종(제 7대 998~1009)이래 상식국․사선서 등으로 불려지면서 왕실의 음식물을 조리․공급하는 관사로서 엄연히 존재하였다. 사옹원의 소임에 대해서는 『經國大典』에도 기록되어 있다.

司饔院의 소임은 결코 관어용도자기를 생산하거나 지방관요(官窯)를 통괄하기 위한 官司가 아니었다. 17세기초 兩亂이 마무리된 뒤부터 대량으로 요구되는 관어용도자기의 수요를 충당하고자, 전제군주의 대권을 등에 업은 사옹원이 관용을 빙자하여 종래의 廣州磁器所에 각지로부터 도토와 장작을 수납케 하고 사기공을 選上하게 하고, 명실상부하게 관영으로 경영된 것을 건국초까지 소급시켜 확대해석한 것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3. 古文獻上의 도자기소

주된 자료는 『世宗實錄地理志(이하 世志)』, 『東國與地勝覽(이하 勝覽)』, 『慶尙道地理志(이하 慶志)』, 『慶尙道續撰地理誌 (이하 續誌)』 등이다. 이 고전기록(사료)들에 의하면, 당시 도자기소의 경영실태를 알 수 있는 각 지방 토산품물에 대한 기록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1)『世志』의 자료

『世志』는 世宗의 命에 의해 1424~1432년 사이에 자료수집이 이루어졌고 1454년 『世宗實錄』의 편찬과 함께 간행된 것이다. 『世志』는 1424~1432년 世宗의 命에 의하여 조사가 이루어 졌으므로 이 기간에 실제 자기소가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세종 6년(1424)부터 그 자료를 수집하고. 정확히 1424~3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世志』에 전국 도자기소의 위치와 품질을 기록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도자기소가 있는 주, 군, 현과 그 품질의 상, 중, 하만 기록되어 있을 뿐, 각 자기소의 경영적 성격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양상을 파악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표 > 『世志』의 全國 陶磁器所 位置와 品質

地域

區分

京畿道

忠淸道

慶尙道

全羅道

品 質

品別

1

0

12

1

0

12

11

0

3

8

27

0

0

15

13

3

小計

14

23

38

31

品別

0

6

12

2

0

6

31

1

0

6

28

0

0

8

23

8

小計

20

38

34

39

24

61

72

70

地域

區分

黃海道

江原道

平安道

咸吉道

品 質

品別

0

6

6

0

0

2

2

0

0

2

11

0

0

0

2

3

4

45

84

7

小計

12

4

13

5

140

品別

0

5

12

0

0

0

10

0

0

1

10

1

0

0

7

8

0

32

133

20

小計

17

10

12

15

185

29

14

25

20

325

出處 :『世志』, 「土産品物」條.

당시 전국의 총 325個所 중 자기소가 140個所, 陶器所가 185個所로서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표 >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도자기소 중 대부분이 남쪽4도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경상‧전라지역에서는 자기소가, 경상‧전라‧충청지역에서는 도기소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世志』의 기록에서 주의하여 볼 것은 上‧中‧下品의 구분이다. 전국에서 上品을 생산하였다고 기록된 곳은 네 곳으로서 京畿道 廣州, 慶尙道 尙州와 高靈이다. 상주는 上品을 생산한 곳이 두 곳으로 무려 반을 차지한다.


2)『慶志』의 자료

그 序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永樂 二十二年 甲辰冬 十有二月 朔壬寅 春秋館受敎慶尙道州部縣 歷代官號 邑名沿革及離合 令戶曹 移關各道…… 乙巳冬十有二月朔日丙寅監司 晉陽河淵演亮識”

永樂 22년이라함은 世宗 6年(1424)년을 말한다. 즉 「慶志」도 「世志」와 같은 시기에 자료를 수집하고 찬술하였다. 戶曹에서는 각 도에 「慶志」의 찬술요령을 다음과 같이 하달하고 있다.

“一依例卜定貢賦 某某物 其土所山 某某物 是如施行爲乎矣 土産 金銀鐵銅 …… 磁器․陶器 …… 幷以詳悉施行事”

여기서 「卜定貢賦」란 「貢賻詳定都監」에서 작성한 「貢案」이지만, 그 貢案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토산물(某某物)이 각 州, 縣에서 생산되고 어떤 종류의 토산공물을 수납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낱낱이 수록하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찬술된 지리지의 토산공물조에는 경상도내의 27개 주현에서 자기 혹은 사기를, 23개 주현에서 도기를 「토산공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표 > 『慶志』의 陶磁器 土産品物 收納比較表

品目

區分

磁器

沙器

陶器

府郡

牧縣

小計

小計

小計

地域別

慶州道

2

2

-

3

7

-

2

-

-

2

1

2

-

1

4

13

11

安東道

1

1

-

2

4

-

-

-

1

1

1

1

-

4

6

11

8

尙州道

1

2

1

4

8

-

-

-

-

0

1

2

2

6

11

19

14

晉州道

2

2

1

-

5

-

-

-

-

0

-

-

1

1

2

7

6

6

7

2

9

24

-

2

-

1

3

3

5

3

12

23

50

39

出處 : 『慶志』, 「陶磁器 土産品物」條.

<표 > 『慶志』의 陶磁器 土産品物 地域別受納現況

磁器別

道別

磁 器

沙 器

陶 器

備 考

慶州道

慶州府 密陽郡都護府 梁山郡 罻山郡 慶山縣 昌寧縣 靈山縣

興海郡

彦陽郡

密陽郡都護府

罻山郡 淸道郡 解顔縣

13個所

安東道

順興都護府 永川郡 仁同縣 義興縣

義城縣

順興都護府 醴泉郡

盈德縣 仁同縣 義興縣 新寧縣

11個所

尙州道

中牟縣 功城縣 星主牧官 善山郡都護府 陜川郡 金山郡 高靈縣 軍威縣

尙州牧官

中牟縣 丹密縣 星主牧官 善山郡都護府 草溪郡(黃陶器) 金山郡 開寧縣 咸昌縣 龍宮縣 軍威縣

19個所

晉州道

晉州牧官 金海都護府 昌原都護府 咸安郡 昆南郡

晉州牧官

居昌縣

7個所

24個所

3個所

23個所

50個所

出處 : 『慶志』, 「土産品物」條.

「世志」와 「慶志」양지리지의 도자기소와 도자기토산공물은 거의 일치한다. 즉 전자에 도자기소가 있는 고을에는 후자에도 반드시 陶磁貢物이 기록되어 있고, 전자에 자기소만이 있는 고을에는 후자의 경우 磁器貢物만을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사실은 두 지리지의 자료가 서로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며, 거의 동 년대에 동일한 목적으로 찬술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3)『續誌』의 자료

『續誌』는 『世志』 및 『慶志』양지리지보다 약 반세기 후인 예종 원년(1469)에 찬술되었으며, 『世志』와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되었다. 전․후자는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되었으므로 특히 자기소의 폐쇄시기와 함께 경영적 성격을 파악하기가 용이하다.

<표 > 『續誌』의 陶磁器所

地域

區分

慶州道

安東道

尙州道

晉州道

品 質

磁器所

品別

0

5

7

0

0

1

2

0

0

1

5

0

0

1

7

0

0

(3)

8

(8)

21

(27)

0

(0)

小計

12

3

6

8

29(38)

陶器所

品別

0

1

12

0

0

0

6

1

0

0

5

0

0

0

6

0

0

(0)

1

(6)

29

(28)

1

(0)

小計

13

7

5

6

31(34)

25

10

5

6

60(72)

出處 :『續誌』, 「土産品物」條.

計부문의 ( )안은 『世志』의 경상도 소재 도자기소

『世志』와 『續誌』에 기록된 경상도 소재 도자기소의 수는 무려 12곳이나 차이난다. 즉 磁器所의 경우 전자에서 존재 했었던 38개소가 후자에서는 29개소로 9개소가 없어졌으며, 陶器所의 경우 전자에서 34개소이었던 것이 후자에서는 31개소로 3개소가 사라졌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도합 12개의 자기소가 폐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의 자기소가 줄기도 하였지만, 상품을 생산하던 자기소 또한 모두 없어졌다.

<표 > 『世志』『續誌』 磁器所의 比較

區 分

「世志」慶尙道條磁器所

「續誌」磁器所

品上

3

品中

8

8

品下

27

21

38

29

品中의 경우는 양 지리지 모두 같다. 그러나 品上의 경우『세지』에서 3개소이었던 것이『속지』에서는 전부 없어졌고, 品下의 경우 6개소가 없어졌다. 즉 品上을 생산했던 중모지역의 2개의 자기소가 없어졌고, 노산리에 品中 단 1개소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品上을 생산했던 고령현의 경우 品下로 격하되었다. 특히 상주목과 고령현의 경우는 중앙으로부터 간접통제를 받는 지역이어서 왕조의 구조적 모순이 더욱 많이 작용할 수 있었던 지역이다. 따라서 관어용 자기를 수납하는데 있어서 많은 장애 즉 지나친 강제생산․수납으로 말미암아 급기야는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勝覽』의 자료

성종 17년(1489)에 찬술된 『東國與地勝覽』에서는 각 주군현별로 도기 및 자기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표 4-7>에서 보는 바와 같이 「토산품물」조에 기록된 곳은 겨우 40개에 불과하다.『세지』의 기록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세종년간에는 전국 각 주군현 325개소에서 토산공물로서 도자기를 수납하였음에 비하여, 세종 6년(1424)~성종 17년(1489)까지 65년이 지난 성종년간에서는 겨우 47개소에서만 생산․수납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먼저 65년이란 기간 동안 “한편에서는 토산공물의 형태가 현물에서 米․布등 素材貨幣로 변혁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외방 도자기소의 경영형태가 완전히 변질”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영형태의 변질은 경기도 광주자기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다.『승람』에 와서 남은 품상의 자기를 생산하던 광주목 토산조에 “土産磁器品上 每歲 司饔院官率畵員 監造御用之器”로 기록하고 있다. 즉 每歲 사옹원 소속관원이 畵員을 데리고 와서 御用之器를 監造한다는 뜻이다. 이 자료는, 『승람』이 찬술되기 전 광주자기소가 국․관영적 성격을 어느 정도 띠고 있었다. 지방의 각급 도자기소와는 그 경영형태가 다르며, 사옹원 소속관원이 직접 그 생산요소를 조달시키는 한편 燔造과정에도 참가하여 어용자기를 생산케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영이라 함은 생산요소에 있어서 官人이 직접 개입한 분원경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표 > 『勝覽』의 全國 陶磁器 土産品物 收納比較表

品目

區分

磁器

沙器

陶器

府郡牧縣

小計

小計

小計

京畿

-

-

1

4

5

-

-

-

1

1

1

-

1

6

8

14

10

忠淸

-

1

1

5

7

-

-

-

1

1

-

2

1

-

3

11

9

慶尙

-

-

1

3

4

-

-

-

1

1

-

-

-

1

1

6

5

全羅

2

-

1

7

10

-

-

-

1

1

-

-

-

-

-

11

11

黃海

1

2

-

-

3

-

-

-

-

-

-

-

-

-

-

3

3

江原

-

-

-

1

1

-

-

-

-

-

-

-

-

-

-

1

1

咸吉

-

-

-

-

-

-

-

-

-

-

-

-

-

-

-

-

-

平安

1

-

-

-

1

-

-

-

-

-

-

-

-

-

-

1

1

4

3

4

20

31

-

-

-

4

4

1

2

2

7

12

47

40

出處 : 『勝覽』, 「陶磁器 土産品物」條.

결국 중앙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경기도 광주자기소는 세조년간(1456~1468) 이래 서서히 그 경영적형태가 변질되기 시작하여 성종년간에 이르러서는 국․관영적인 성격을 비로소 나타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4.「品上」자기소와 일반자기소

1) 「品上」자기소

(1)『世志』에 나타난 「品上」자기소

<표 >『世志』의 品上磁器窯址 確認地域(1997년 현재)

區分

「世志」 생산지명

현재지명

종류

참고

1

京畿道 廣州牧 州東 伐乙川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번천리

象嵌, 印畵

姜敬淑, 『粉靑沙器硏究』, 一志社, 1986., pp. 24~25.

2

慶尙道 高靈縣 東曳峴里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기산동

象嵌

權丙卓,『前揭書』, 제 5장. 및 姜敬淑, 『上揭書』.

3

慶尙道 尙州牧 中牟縣 北楸縣里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

靑磁, 印畵象嵌

김세광의 연구

4

慶尙道 尙州牧 中牟縣 東己未隈里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靑磁, 印畵象嵌

김세광의 연구

(2) 상주 중모(中牟)지역 「品上」자기소 찾기

古文獻上에 나타난 尙州 中牟地域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東至比安縣界六十七里, 南至善山府界三十九里, 至東府界四十里, 至金山郡界四十七里, 西至忠淸道報恩縣界七十里, 北至咸昌縣界二十九里, 距京都四白七十里 .......”

즉 동쪽으로 비안현 경계까지 67리, 남쪽으로 선산부 경계까지 39리, 동부 경계까지 40리, 금산부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충청도 보은현 경계까지 70리, 북쪽으로 함창현 경계까지 29리, 서울까지 47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주의 땅이 얼마나 광대한 지역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尙州라는 명칭은 고려 초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성종 2년에 尙州牧으로 개칭 되었다가 뒤에 절도사를 두어 귀덕군이라 이름하여 영남도에 예속되었다.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지역의 범위는 현재의 충청도 지역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추풍령과 모동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사기점골과 충북 영동의 사부동 일대의 가마자리가 포함된다. 전자에서는 고려후기의 백청자, 후자에서는 조선초기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발견 된 곳이다.

조선조 중엽(1605년, 선조 38년)에 발간되고, 상주의 史實을 기록한 향토사기인 『商山誌』의 내용에는 중모지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中牟本新羅刀良縣, 景德王改名道安屬化寧, 高麗改令名來屬在州四五十里.”

중모는 원래 신라때 도량현이었는데, 경덕왕이 도안이라 개명하여 화령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때 상주에 속하게 두었으니 사오십리나 된다고 나타나 있다. 신라시대 때 중모가 화령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품상자기를 생산했다고 추정되는 어산리가 현재의 화령에 속해 있고, 지표조사된 窯地가 현지명과는 다르지만 이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얻었다. 『世志』에는 “中牟縣北楸縣里品上, 中牟縣東己未외里品上, 功城縣西院洞品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는 공성현이 있으며 도기소도 두 곳이나 된다. 『世志』외에도『慶志』에 중모현이 소개되고 있으며,『續誌』의 도자기소 위치에 있어서 “中牟縣奴山里品中”으로 소개된다. 이것은『세지』와『속지』의 편찬년도를 고려해 볼 때, 노산리가 시기적으로 조금 늦게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아쉬운 점은 기록된 「北楸縣里」와 「東己未隈里」는 현지명과 일치하지 않으며, 지명유래집에도 나타난 바 없다. 옛 지명과 현 가마터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東己未隈里」는 東(동녘 동), 己(이미 이 혹은 몸 기), 未(아닐 미), 隈(모퉁이 혹은 물이 돌아나가는 모퉁이), 里(마을)이 된다. 즉 “동쪽에 위치하여 물이 돌아나가는 지형의 마을”로 해석될 수 있다. 중모의 이러한 지형을 가진 마을은 여러 곳이 있지만, 자기조각이 발견되었거나 구전되어 내려오는 곳은 두 개의 마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중모의 백화산 아래를 흐르는 ‘전투갱변(일명 점터갱변 이라고도 함)’이고, 다른 하나는 모동면 상판리이다. 전투갱변 입구에 위치한 신덕리 가마터에서 지표조사를 하였으나, 그 수법이 매우 조잡하고 유약의 색깔, 태토의 질 등이 극도로 퇴락한 것이어서 조선초 品上을 생산했던 곳으로 보기는 어렵다.

모동면 솔보마을 고만학氏 소유의 과수밭 일대와 그 주변의 가마터를 모두 세 곳이나 발견하였다. 물론 원상태로 보존된 것이 아니라서 그 원형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깨진 자기들과 가마찌끼(적덩이)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상판리가 「東己未隈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北楸縣里」는 다음과 같다. 北(북쪽), 楸(가래나무 추), 縣(고을 현), 里(마을)이다. 주로 마을단위 앞에 쓰이는 東‧西‧南‧北 은 그 지역이 위치한 방향을 나타낸다. 이러한 地名沿革 역시 관련문헌이 없어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중모지역(모동과 모서를 말함)은 조선시대에 「기미요」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기미요」의 「기미」가 「東己未隈里」의 「己未」와 일치 하는지는 古書 등에서 기록된 바 없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된 실증자료는 「東己未隈里」가 곧 상판리라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

한편 중모지역에는 옛부터 가래나무(Juglans mandshurica MAX)가 자생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지역이 바로 화동면 어산리와 모서면 노산리 마을이다. 어산리와 노산리는 중모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2) 생산기술의 변화 : 技術進步

이 시기의 기술변화는 상품화율을 높이기 위한 「눈배기자기」의 출현과 둘째, 상감(象嵌)한 후 백토를 넣어 문양화 한 「분청사기」의 출현이다.

눈배기자기와 모래증을 이용한 공극의 모양은 서로 차이가 있다. 즉 「모래증자기」의 경우는 이음부위가 충분히 떨어져 있지 않아 번조시 그릇의 귀가 서로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눈배기자기」의 경우는 그 부위가 서로 충분한 공극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릇의 귀가 달라붙지 않는다. 따라서 「눈배기자기」가 「모래증자기」보다 상대적으로 상품화율이 높게 나타나게 된다.

<표 > 「눈배기」와 「모래증」자기의 상품화율 비교

구 분

「눈배기」

「모래증」

비 고

채택자료 및 시기

13세기이전 청백자

14~16세기 청자류

상주지역에 한함

접착된자기

총자기수

137개

458개

166개

350개

그릇 귀가 붙은 자기를 ‘접착된자기’라 함

상품화율(%)

321/458(70.2%)

166/350(52.6%)

70.2-52.6= 17.6%↑

자료; 중모지역 지표조사 무작위추출.

눈배기자기의 경우 17.6%정도의 더 높은 상품화율을 보인다. 따라서 14세기이후의 「눈배기자기 생산기술」의 채택은 당시 전통도자기의 생산력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술변화는 소규모 자기소를 경영하여 생업으로 삼고자하는 「소민」들의 생산동기를 더욱 자극시키게 되고, 14세기이후 전국적인 窯擴散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전통도자를 생산하고 있는 대부분의 요(窯)가 「눈배기자기 생산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자기의「상품화율」을 높이기 위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짐(돋임)」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는 주로 효율적인 열관리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지표조사에 의하면 14세기이후의 자료로서 다양한 종류의 「돋임」이 많다. 이러한 사실 역시 14세기이후 자기생산의 기술진보에 기여를 하였음을 시사한다.

中牟地域에 있어서 생산기술의 변화란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고려후기 청자 및 백청자의 생산단계에서 분청사기로 제작형태가 이행되어 갔다.

둘째, 눈배기자기의 출현으로 제품의 실패율을 줄일 수 있었다. 즉 번조과정 쌓기공정에 있어서 눈배기자기의 생산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셋째, 갑발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돋임의 사용하여 번조함으로서 가마내의 「생산가능면적」을 최대한 활용했다. 왜냐하면 동일조건하에서 생산량을 최대한 증가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갑발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이물이 붙어 표면이 깨끗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갑발을 사용하지 않고도 上品의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영사(번조용 땔감)의 사용할 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기술상의 문제가 뒤따른다. 따라서 두 곳의 자기소는 적어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특별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2) 일반자기소

14~16세기와 관련된 중모지역의 요지는 「品上」자기소인 어산리 및 상판리 외에 몇 군데 더 있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었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표 > 현재까지 추정된 14~16세기의 중모지역 일반자기소

구분

위치

운영시기

추정된 가마수

비고

1

화동면 노산리

15세기말~19세기초

2기

상감분청(權丙卓, 鄭良謨, 尹龍二 등의 연구서), 및 인화분청, 백자(이 연구)

2

모서면 지산리

14세기말~15세기

2기

상감분청, 인화분청

3

모동면 신덕리

15세기

1기

상감분청

4

모동면 용호리

15세기

1기

상감분청

5

상주군 중모동리

15세기

?

鄭良謨, 尹龍二의 硏究書 등에 印花粉靑瓷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지명과 요지가 불분명함.

자료: 지표조사

네 곳의 공통점은 상갑기법과 인화기법, 즉 일종의 분청사기가 생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자기소들은 어산리 및 상판리자기소 생산기술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노산리요지의 경우 15세기말~19세기초에 걸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鄭良謨와 尹龍二의 1994년의 연구서에는 노산리가 15세기 요지(상감분청자)로 조사 되었으나, 이전의 일인학자들에 의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한 것 같다. 그리고 權丙卓의 『전통도자기의 생산과 수요』에서는 노산리를 토기-청자가 관련되는 요지군으로 조사되어 있으나 조선후기의 백자까지로는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물론 전국의 수많은 요지를 일일이 정확한 규명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노산리 일대에서 몇 년에 걸친 지표조사를 하는 동안 조선후기의 백자를 대량으로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 시기를 확대하게 된 것이다.

상주군 모서면 노산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지점에는 마을 사람들이 일명 ‘사기장골’으로 부르는 밭지대가 있다. 이 일대는 화강편마암 지대이며 토질은 사질양토 위에 양질사토로 구성되어 어산리의 조건과 비슷하다. 임목분포는 소나무류 55%, 참나무류 45%의 천연림으로 되어 있다.

가마의 운영초기는 토기와 청자가 관련 되는 고려말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상판리 및 어산리요지와는 달리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폐쇄된 것같다. 즉 『經志』와 『續誌』의 비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품상자기소의 폐쇄시기가 15세기 후반인 반면, 그보다 훨씬 뒤에 폐쇄된 것같다.


Ⅴ. 16․17세기 전통도자수공업의 발전과 쇠퇴


1. 16세기 전통도자생산의 배경

13세기까지의 교환을 목적으로 한 전통도자수공업은 사회경제적인 제약에 의해 큰 발전을 보지는 못하였다. 「경제외적강제」요인들은 「所民」들의 생산의욕에 지장을 주게 되며, 급기야 생산동기를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所民」들이 주체가 되어 도자기에 대한 생산활동도 “민영”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14세기이후 새로운 번조기술의 변화는 생산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을 가져온다. 번조기술의 변화, 즉「눈배기자기」의 출현은 자기생산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눈배기자기 번조방식을 채택하는 민영도자기소들이 전국의 곳곳에 들어서게 되고, 15~16세기에 걸친 「窯址擴散」의 주요인이 되었다. 그 내용들은 앞장들에서 밝힌 전국의 요지현황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에 있어서의 이러한 상승요인에도 불구하고, 16세기말의 이른바 「도자기전쟁(茶豌戰爭)」으로 불리는 임진(1592)․정유(1597) 양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 도자수공의 생산 전반에 걸쳐 침체국면을 맞게 된다. 즉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볼 때, 이름 있는 도자기 생산지역은 모조리 거쳐감으로써 그 지역의 거의 모든 생산활동을 중단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16세기말에 경영되고 있었던 도자기소의 대부분이 폐쇄되었거나 생산기술이 저하되면서 도자수공업의 발전요인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그림) 시기․자기별 전통도자기 생산의 증감추이

(그림 ) 시기별 전통도자기 생산의 증감추이

전란을 통하여 침체되었던 우리나라의 도자수공업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戰後需要의 붐과 더불어 경제정책의 변화에 기인하여 새롭게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맞는다. 경제정책의 변화 즉 封建財政需要는 과거의 수납체계인 공물과 요역을 대행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면서 교환경제를 불러 일으키고 농업과 수공업을 크게 자극시키고, 인구증가율 또한 높아지게 되자 生活容器에 대한 民에 대한 수요 즉 “demand push"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제요인들이 복합적인 상호작용을은 所民들의 생산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촉진제가 되었으며, 17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전국적인 窯擴散을 가져옴으로서 발전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조사된 요지현황에 의하면 18세기(후기로 추정) 이후부터 엄청난 요지수의 감소현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간수요층의 기호변화에 의해 유기 및 옹기등이 출현함으로써 일어나는 쇠퇴현상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조사된 바에 의하면 18세기(후기로 추정) 이후부터 엄청난 요지수의 감소현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간수요층의 기호변화와 이에 부응하는 대체기술 즉 대체재화(유기, 옹기 등)의 출현으로 인해 도자기에 대한 상대적인 需要減少 현상이 발생하고 쇠퇴되어 간다.


2. 16세기후반의 양란과 전통도자생산의 침체

“고려말 이래로 우리나라 동남방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은 우리 백성들이 사용하고 있던 생활자기를 약탈하곤 하였다. 즉 그것은 일본 무사들에게 한국 도자기에 대한 끝없는 동경심을 유발시켜 약탈행위를 저지르게 하였던 것 같다. 또한 임진왜란도 어떤 의미에서는 「茶豌戰爭」” 혹은「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표 5-1> 1592년 일본의 침투경로

구 분

침투인원

침략경로 및 내용

비고

제 1진

18,000명

小西行長, 宗義智, 松浦鎭信등이 이끌고 350척의 병선에 분승하여 釜山浦에 상륙→ 양산→ 밀양→ 대구→ 상주방면

상주

직접침략

제 2진

22,000명

加藤淸正, 鍋島直茂, 등이 이끌고 부산에 상륙→ 경주→ 영천→ 신령방면

제 3진

11,000명

黑田長政, 大友義統 등이 이끌고 부산→ 김해(제 4진과 합류)→ 창원→ 웅천(현재의 마산)→ 의령→ 삼가→ 합천→ 고령→ 성주→ 개령→ 추풍령방면

상주

간접침략

제 4진

14,000명

毛利義成, 島律義弘 등이 이끌고 김해(제 3진과 합류)→ 창원→ 웅천(현재의 마산)→ 의령→ 삼가→ 합천→ 고령→ 성주→ 개령→ 추풍령을 거쳐 북상

상주

간접침략

출처 : 山田萬吉郞, 『三島 刷毛目』.

柳成龍의『懲毖錄』,『東國戰亂史』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조선을 불법상륙한 일본군의 침략경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柳成龍의『懲毖錄』,『東國戰亂史』, 李相栢의 저서 등의 기록을 참고하면 <표 >와 같다. 비고에서 알 수 있듯이 1, 3, 4진은 각각 상주를 직․간접으로 침략하였다. 침략 3, 4진이 비록 추풍령 방면을 거쳐 갔다고 할지라도 품상자기 생산지역인 중모지역의 상판리 자기소를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첫째, 일본군은 낙동강 유역의 州․縣地域은 가장 먼저 짓밟았다. 이러한 지역은 高麗末․朝鮮初期에 걸쳐 이름 있는 도자기 생산지역이었다. 정유재란에 있어서도 동일한 일을 되풀이 하였으니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경영되었던 분청사기도자요지의 대부분이 전란의 영향으로 인해 생산활동은 거의 중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양란을 겪는 동안 일인들의 茶碗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수요적 욕구로 인해 당시의 능력있는 많은 사기장들이 피납되었거나, 혹은 반대급부로서 특별한 대우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동기에서 이적하였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그동안의 「경제외적강제」로 유린만 당해오던 사기장들로서는 충분한 동기와 긍지를 가지고 높은 기예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표 5-2> 전란기 사기장 관련자료

구분

내용

비 고

a

“慶長年問(정유재란)에 풍신수길의 조선정벌에 종사한 黑田長政이 韋土라고 하는 곳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그 마을에 「八山」이란 도공이 있었다. 黑田長政은 팔산을 陳屋에 불러서 作陶솜씨를 칭찬하였다. 渡海 退陳할 때 黑田長政은 팔산의 부부와 한 아들을 데리고 왔다. 黑田長政이 筑田 入國과 함께 팔산에 명하여 鞍手郡에서 도기를 굽게 하였다”

李慶熙, 「高取燒始祖」“「八山」은 陜川李氏라 한다.”, 大邱實業專門大學, 1977., 유인물 p3.

b

“高取燒에 관해서는 두 개의 고문서가 남아 있는데 제5窯까지는 이 두개의 문서와 완전히 일치된다. 그리고 초대 八山 및 그 자손의 상황까지도 잘 알수가 있다. 그 하나는 高取本家에 남아 있는 「高取家記錄」이고, 다른 하나는 博多에서 발견된 「高取歷代記錄」이다. …… 그 원문에 따르면 開窯의 高取八山 父子는 黑田長政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도공으로서 慶長 5년(1600) 黑田潘이 筑田의 博多에 입국함과 동시에 현재의 福岡縣 安手郡 永滿寺에 그 제1요를 건축하였다. 한편 八山의 장인 井土新九郞는 加藤淸正을 따라서 왔으나 八山의 開窯와 때를 같이하여 開窯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 처음 八山은 潘으로부터 奉祿 78扶持를 수급받았다.”

左藤進三 著․李慶熙 譯, 「高取燒」, 大邱實業專門大學, 1977., p4.

c

“黑田長政의 밑에서 嶺南 南海 韋登人 八山의 손에서 비롯된 筑前의 「高取燒」와 그 支流인 「遠州高取」, 細川忠興의 밑에서 釜山人 尊階 손에서 비롯된 豊前이 「上野燒」, 그 支流인 「高田燒」(一名八代燒), 鍋島直茂 밑에서 金江人 李參平의 손에서 비롯된 肥田외 「有田燒」와 그 支流인 「伊萬里燒」…… 九州에 있는 名窯는, 특히 苗代川産燒는 압도적 盛名을 가지는 자이니, 이것은 義弘에게 끌려간 申 李 朴 卞 姜 沈 金 崔 등 二十二姓 八十餘名이 義弘의 保護下에 一村을 自作하고 朴平意 沈富吉 등의 倉辨으로 窯業을 專事하여 銳意 改良해 나온 結果라. 뒤에 沈富吉의 後孫에 壽官이란 名工을 出하여 盛譽를 길이 保存하니라. ……”

崔南善, 「壬辰亂」, 1931., pp. 61~62참조.

자료 a의「八山」이란 도공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전쟁 속에서 적장으로부터 그의 높은 기예를 칭찬받았다. ‘상공천예’로서 착취만 당해오던 그로서는 신분적 열등의식에서 오는 ‘위기감’이나 「경제외적강제」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적장「黑田長政」의 ‘고려다완’에 대한 강렬한 수요적 욕구를 고려해 보자. 그가 조선도자기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바였을 것이다. 조선에 침입하고 보니 고도로 숙련된 사기장인이 그의 앞에 있었고, 八山을 자신의 潘으로 납치하고자 하는 의도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야기는 가상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첫째, 八山과 적장 黑田의 합의점?은, 八山으로 하여금 전가족과 장인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이주케 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 이를 싯점으로 일본의 도자산업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료 b에서도 a의 내용을 매우 긍정적으로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즉 黑田은 八山에게 窯를 건축해 주는 등 거의 완전한 작업환경을 조성해 주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상급무사’대우에 해당하는 「奉祿 78扶特」를 수급해 줌으로서 당시 조선의 사기장들로서는 상상조차도 할수 없을 만큼의 너무나 대조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자료 c에 나오는 「李參平」의 경우는 “일본에서 명예가 높아감에 따라 皇室의 進供과 海外輸出에 쓰이게 되어 업이 더욱 성해진지라, 參平은 神으로 尊祀를 받게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八山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피납되었던 도공들에게 비슷하게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도자수공업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의 도자산업은 발전할 수 있게 된 반면, 우리나라는 생산기술저하라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도자생산의 감소․증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상주지역의 도자요지는 양란기간을 통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특히 상주는 전국 4곳 품상자기 중 2곳이나 존재했던 지역이어서 일본 침략 시 자기소를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란 당시 일부의 사기장들은 피랍되어 갈 것을 염려하여 도피한 곳은 문경관문이었다.


3. 대동법의 실시와 전통도자수공업

1608년(광해군 즉위)부터 1677년(숙종 3)까지 전후 약 70년에 걸쳐서 함경, 평안 양도를 제외한 전국 6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17․18세기의 비약적인 인구증가는 ‘대동법’ 실시의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대동법이 실시될 당시 조선왕조는 두 가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경국대전 체제의 모순이 노정되어 경제적 바탕이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란으로 인한 재정수입원이 고갈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싹트고 있던 과정 속에서,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봉건제는 줄곧 흔들리는 불안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기 까지는 다음의 세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일어나 봉건적 지배질서를 크게 흔들어 놓게 된다.

첫째, 내적모순을 외부세계로 발산하려던 일본군이 침입하여 봉건조선의 모든 질서와 요소를 파괴해 버리는 이른바 양란을 일으켰으며,

둘째, 양란이 마무리 되자 세계사상 어디에나 볼 수 있었던 ‘전후수요붐’이 일어났다. 특히 봉건재정의 수요는 그 이전까지 조세의 수납체계인 공물과 요역을 대행하는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즉 이전과 달리 대동법은 쌀을 중심으로 하는 실물화폐제도의 획기적인 전환구조를 가져오게 되었고,

셋째,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실물화폐제도는 먼저 교환경제를 더욱 발달시키고 다음으로 농업과 수공업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에 따라 정치․경제․사회의 각 부문은 실물화폐인 쌀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자극하고 보완하는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경제사회 전반에는 봉건적인 것과는 달리 이질적이면서 자본주의적인 요인들이 싹트게 했다.

대동법은 임진이후 賦役과 貢納制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으로 田 1結에 대하여 米 16斗를 징수함으로써 부역과 공납을 대신한다는 세제개혁정책이다. 대동법의 실시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 재정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이러한 국가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貢物制度를 개혁하여 조세징수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제정되었다. 즉 공부부담의 불균형과 방납의 폐해 및 서리의 주구 등 공납제의 폐단으로 인해 전쟁직후의 농민들의 부담능력의 한계와 저항을 야기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등장하였고, 이에 대한 지배체제의 재편성과 국가재정의 궁핍화를 통한 안정을 꾀하였다.

대동법은 조세체제의 변화를 통하여 경제체제에 대한 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는 결국 상품의 유통체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유통체제의 변화는 생산체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과정에서 전통도자수공업은 더욱 더 자극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당시의 전통도자기란 일반민수용품 즉 식생활용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특히 전후의 수요붐은 민수용품의 경우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더구나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교환경제의 발달은 가장 중요한 생활용품 중의 하나인 전통도자기의 생산을 더욱 증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7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요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전통도자에 대한 「대체기술」이 출현되지 않는 한 계속적인 생산의 증가가 있었을 것이다.


4. 조선 후기의 인구성장과 변화

조선전기 1392년의 인구는 대략 750만명이었는데, 이 인구가 1592년경에는 1,012만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인구증가율이 0.15~0.20%였었다. 비교적 정확한 추정이 가능한 조선말기의 인구수(1910년에 약 1,750만명)와 비교할 때, 조선후기에 있어 인구는 약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인구증가율 역시 생활용기인 자기에 대한 「demand push」의 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며, 17세기의 전국적인 요의 확산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전기에서 후기사회로의 이러한 변동은 인구현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조선후기 인구변동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구의 성장 폭이 빨라진 인구증가율의 질적 변화이다. 이와 함께 생산력의 축적될 수 있었고, 이러한 생산력의 발달을 기초로 상업자본의 축적과 도시의 확산 등 근대성을 띠는 요소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인구변동은 제반 사회제도의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동법의 실시는 여기에 더욱 큰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하겠다.

양란이 끝나고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자기소는 다음의 <표 >와 같다.

<표 >17․8세기 상주의 전통 도자기소

구분

위치

운영시기

추정 가마 수

비고

1

화동면 노산리

15세기말~?~19세기초

2기

분청(인화상감) 양란 전/ 귀얄분청, 백자 17․8세기 이후

2

내서면 북장리

17세기

1기

백자 및 철화백자

3

내서면 평지리

18세기

1기

백자

4

모서면 백학리

19세기

1기

백자

5

모동면

6

모동면


5. 전통도자수공업의 쇠퇴

전란을 통하여 침체되었던 도자수공업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전후수요의 붐을 타고 새롭게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맞았다. 이와 더불어 봉건재정수요는 과거의 수납체계인 공물과 요역을 대행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면서 쌀을 기준으로 하는 실물화폐제가 실시되었다. 실물화폐제는 먼저 교환경제를 불러일으키고 농업과 수공업을 크게 자극시키는 역할을 하게된다. 인구증가율 또한 높아지게 되자 생활용기인 도자기의 民에 대한 수요 즉 “demand push"요인은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제 요인들이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所民들에 대한 생산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촉진제가 되었으며, 17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전국적인 窯擴散을 가져왔다. 이는 민간수요의 증대현상과 더불어 가장 자연스럽게 「탈 수공업→ 산업화」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즉 11세기에 최대를 이루던 청자는 14세기에 이르러 분청사기로 대체되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에 최대를 보이던 분청사기는 다시 16세기를 기점으로 급속히 감소되어 17세기에는 거의 자취를 감춘다. 한편 백자는 16세를 중심으로 하여 분청사기에 대한 대체기술로 등장하게 되나 16세기 말경에는 전란의 영향으로 거의 폐소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다시 증가함으로써 생산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18세기후반의 백자가 여전히 높게 나타나는 이유는 17세기로 조사된 백자요지를 18․9세기까지 소급시켜 편년을 해석함으로서 여전히 높게 나타난 원인이라 하겠다. 따라서 18․9세기경에는 약간의 백자생산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자기가 자취를 감추고 유기로 대체되어 갔다.

15세기이후를 기점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요인이 전란으로 인해 다시 침체되었고, 17세기이후 급속한 증가를 가져오던 자기의 생산은 18세기이후 감소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러한 수요의 감소에 대응하는 대체기술이 필요했다. 필자는 그것을 유기(鍮器)의 출현과 사회적 수요 증가로 보고 있다.

유기가 언제부터 출현했는지에 대한 근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사회․경제적으로 격동하고 있었던 18세기 이후 유기의 사회적 수요가 크게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한 유기의 출현은 민간수요층의 기호변화에 의한 요구였던 것 같다.

“鍮器는 東國의 풍습으로 鍮器를 가장 귀하게 여기므로, 아침저녁으로 밥상에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그릇이었는데, 옛날에는 王家나 臺富之家에서만 사용하던 것이 이제는 山間草室에도 서너벌씩 유기그릇이 있게 되었고, 따라서 가는 곳마다 鍮匠들이 爐를 개선하고 유기를 제조한다.”

“일반적으로 鍮器를 가장 중히 여겨 사람들로 하여금 밥, 국, 나물, 고기까지 식탁용의 놋그릇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 심지어는 세수대야나 요강까지도 놋쇠로 만든다”

위의 기록을 보아도 鍮器에 대한 수요층이 18세기 이전부터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상주 도자수공업이 쇠퇴되어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찾을 수 있겠으나 대체제의 출현이 가장 큰 원인이라 여겨진다.


Ⅵ.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