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유학자 장지연 선생

빛마당 2014. 4. 11. 22:26

                    유학자(儒學者) 장지연(張志淵)선생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박사

 

1. 선생의 생애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초명(初名)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 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으로서 경북 상주에서 장용상(張龍相)과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석봉(張錫鳳)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여 1894년(고종 31)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895년 8월 일제(日帝)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을 궐기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으며, 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還宮)을 요청하는『만인소(萬人疏)』를 기초 하였다.

한편 1897년 사례소(史禮所)의 직원으로『대한예전(大韓禮典)』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인 1898년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으며, 그 해 7월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05년 민영환(閔泳煥)의 진품(秦稟)에 따라 정6품인 승훈랑(承訓郞)이 되었고, 1906년에는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이것이 유생으로써 받은 관직의 전부이다.

선생이 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사직한 이듬해였다. 1899년 1월에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主筆)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해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잠시 출판사인 광문사(光文社)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목민심서(牧民心書)』와『흠흠신서(欽欽新書)』등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그해 말 독립협회(獨立協會)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해산 당할 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1년 다시『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에 임명되었다가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民衆啓蒙)과 지립정신(自立精神) 고취(鼓吹)에 진력(盡力)하였다. 1903년에는《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를 완성하였으며, 1905년 선생은 승훈랑(承訓郞, 정6품)품계를 받았다.

그리고 1905년 11월 1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황성신문(皇城新聞)』1905년 11월 20일자(日字)에「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하(題下)에 국권침탈(國權侵奪)의 조약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을 규탄하는 한편,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써서 일제 헌병대의 사전 검열도 거치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였는데, 이일로 투옥(投獄)되었다가 65일 후에 석방되었는데 옥중에서 암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험악한 시국 형편 갈수록 더해지니(嶮巇時事日加初)

이 세상 살아갈 길 가엽기 짝이 없네(生世堪憐此去居)

입 있어도 말하기란 새 날기처럼 어려웁고(有口能言難以鳥)

무심히 지내자니 물고기만도 못하구나(無心自樂不如漁)

나라를 돌아보니 근심이 너무 크고(回看海內憂方大)

사람의 엉성한 게책 퍽이나 한스럽다(太息人間計其疏)

앞으로 숨 돌릴 길 곰곰이 생각하니(料理從今康濟策)

마음에든 시골찾아 농사짓고 글 읽으리(田園隨處課農書)

또한 이 사건으로,『황성신문(皇城新聞)』도 압수 및 정간처분 되었다.

이런 일로 인해서 더 이상 황성신문사에도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이듬해인 1906년에는 운정(雲庭) 윤효정(尹孝定, 1858-1939), 심의성(沈宜性), 임진수(林珍洙), 김상범(金相範)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는 한편,『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와『조양보(朝陽報)』등에 전 국민이 각성해서 실력을 배양하여 구국운동(救國運動)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論說)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리고 1907년 1월에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1866-1920)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1850-1913) 등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자,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고자 신문(新聞)과 잡지(雜誌)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하여 전 국민이 합심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7월 일제(日帝)가 헤이그말사사건(The Hague 密使事件)을 구실로 고종(高宗)을 강제로 양위(讓位)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彈壓法)을 잇달아 제정(制定)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 하였으나, 이일로 인하여 8월19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강제 해산되자, 11월에는 애당(愛堂) 권동진(權東鎭),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여병현(呂炳鉉,), 석농(石儂) 유근(柳瑾),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발기(勃起)하여 조직하였다.

그리고 휘문의숙(徽文義塾)의 장(長)과 평양일신학교장(平壤日新學校長)에 임명되었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43세 때였는데 저서인《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져서, 더 이상 고국에 머물 수 없게 되자, 45세 때인 1908년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해조신문사(海朝新聞社)를 경영하고 있던 정순만(鄭淳萬) 등이 이미 언론인으로써 명성이 있었던 선생을 주필로 모셨다. 그러나 해조신문사(海朝新聞社)도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간(廢刊)되자, 선생은 상해(上海)와 난징(南京)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는 도중에, 양쯔강(揚子江)의 배안에서 일제(日帝)의 첩자(諜者)로 보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하여 1908년 8월에 귀국하였으며, 귀국 즉시 해조신문에서 격렬하게 일제침략을 규탄한 죄목으로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나 얼마 뒤에 석방되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단체(敎育救國運動團體)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취지문(趣旨文)」을 지어 지원하고 학회(學會)의 편집원(編輯員)으로 활약하였으며, 같은 해 2월. 대한협회(大韓協會)의「정정부문(呈政府文)」을 지었고, 한편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에는 진주에 있던『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로 초빙되어 다시 언론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1910년 8월. 일제(日帝)가 나라를 병탄(倂呑)에 항의하는 선비들이 잇달아 자결(自決)하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선생의「절명시(絶命詩)」를 경남일보(慶南日報)』에 게재하여 일제를 규탄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경남일보(慶南日報)』가 정간되자 선생은 어쩔 수 없이『경남일보(慶南日報)』를 떠났다.

1911년 이후 선생은 일체의 활동을 접고 칩거하면서 한일합방(韓日合邦)이후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통탄하면서 술로써 망국(亡國)의 울분과 분노를 풀었던 것 같다.

이때 자신의 초상화에다 ‘자찬시’를 써 놓은 선생은 1921년 정월부터 병을 얻어 술도 끊고 음식도 가려 먹어가며 치료에 힘썼으나 그해 10월 2일 “내가 죽은 후에 묘비에 직명을 쓰지 말고 오직 ‘숭양거사(嵩陽居士)’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향인 마산(馬山)에서 눈을 감았다.

묘지는 창원시 구산면 현동리 독마산(禿馬山)에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선생의 년보(年報)

1864년(고종 원년) 11월 30일 경북 상주군(尙州郡) 목내면(牧內面) 동곽리(東 郭里)에서 출생

1869년(6세) : 향리(鄕里) 서당(書堂)에 입학

1873년(10세) : 모친상(母親喪)

1882년(19세) : 벽진이씨(碧珍李氏)와 결혼

1884년(21세) : 선산(善山) 용전(龍田)으로 이거(移居)했다가 다시 운계(雲溪)로 옮김

1887년(24세) : 부친상(父親喪)

1894년(31세) : 진사병과(進士丙科)에 급제(及第)

1895년(32세) : 의병(義兵)이 일어나자 의병격문(義兵檄文)을 지어 격려

1896년(33세)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를 용산 (龍山)에서 뵈옴

1897년(34세) : 러시아 공관(公館)에 파천(播遷)해 있던 고종(高宗)의 환궁(還 宮)을 청(請)하는 만인소문(萬人疏文)을 작성.

사례소(史禮所)직원에 임명됨.

1898년(35세) : 내부주사(內部主事)임. 남정필(南廷弼), 김택영(金澤榮) 등과 대 한예전(大韓禮典)을 펴냄

1899년(36세) : 시사보총사(時事報叢社) 주필(1월),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주 필(9월)에 임명됨.

1900년(37세) : 출판사 광문사(廣文社)의 편집위원에 임명되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펴냄.

1901년(38세) : 다시 황성신문사 주필에 임명되었다가 사장이 됨.

1903년(40세) : 《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를 완성.

1905년(42세) : 승훈랑(承訓郞 : 정6품)품계를 받음 관원 50여명과 일본시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로 신문이 정간되 고 64일 동안 옥살이 함.

1906년(43세) : 황성신문사에서 물러나 화개동(花開洞)으로 이사하여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를 펴냄. 통정대부(通政大夫 : 정3품) 의 품계를 받음.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발기. 휘문의숙(徽文義 塾)의 장. 평양일신학교장(平壤日新學校長)에 임명됨.

1908년(45세) : 러시아로 떠남. 해조신문(海朝新聞) 주필에 임명됨. 남경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중상.

1909년(46세) : 진주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로 초빙됨. 경남일보에 매천(梅 泉)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실었다가 신문이 압수되고 정간(停刊)됨.

1913년(50세) : 마산(馬山) 월영리(月影里)로 이거(移居)

1921년(58세) : 10월 2일 세상을 떠남

3. 위암 선생의 가계(家系)와 ‘인동작변(仁同作變)

인동작변(仁同作變)’의 장본인인 장윤혁(張胤爀)은 위암 선생의 5대조(代祖)이다. 자는 명경(明卿)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는데, 경신화란(庚申禍亂)으로 옥중(獄中)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슬하에는 시경(時景), 시진(時晋), 시욱(時昱)을 두었는데, 시경(時景)과 시욱(時昱)은 화란(禍亂)당일에 천생산(天生山)절벽에서 추락사(墜落死)하였으며, 시진(時晋)은 화란(禍亂) 전에 죽었으며, 증조부 석준(錫俊)은 창성유배소(昌城流配所)에서 돌아가셨고, 조부는 기원(璣遠)이고, 아버지는 용상(龍相)으로 자는 치백(致伯), 호는 운소(雲沼)였으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였다.

장재식(張在軾)은 위암의 아들이며 자는 경담(景聸)이고 호는 미당(眉堂)이다. 그리고「연미정실기(戀美亭實記)」를 지은 장석규(張錫奎)는 위암의 3대조이다.

인동작변(仁同作變)’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동작변(仁同作變)’의 전말>

조선 후기에 찬란한 문예중흥을 이룩하고 유교국가의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받던 정조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절정에 있던 1800년 6월 28일에 49세를 일기로 급서하고 말았다. 이후 10세 소년 군주 순조가 왕통을 이었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는 왕실의 최연장자가 국정을 보좌한다는 전례에 따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수렴청정 이후 대왕대비 김씨는 심환지, 김관주와 같은 노론 벽파의 강경론자들을 중용하는 한편, 성궁(聖躬)보호와 의리관철이라는 명분으로 반대세력에 대한 분격적인 공세를 강화해 갔다.

이러한 위압적인 분위기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8월 29일 경상감사 김이영이 ‘모반사건’이 일어났다고 중앙으로 급히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8월 15일 추석 당일 위암선생의 4대조인 인동의 장시경(張時景)은 동생인 시진(時晋), 시욱(時昱)과 함께 가노(家奴) 60여명을 거느리고 인동관아를 침범했다. 이들의 관아 진입기도는 무기와 군량의 탈취에 있었으며, 이후 선산과 상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해서 노론 벽파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인동 관병들로부터 제지를 받아 관문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중 동원된 무리들이 도망을 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결국 주모자인 장시경 3형제는 천생산의 낙수암(일명 미득암)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다.

이러한 ‘모반사건’을 보고받은 중앙에서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자 이서구를 안핵사(按覈使)로 선임해서 영남으로 급파하였다. 그로부터 25일이 지난 9월 23일 안핵사 이서구와 경상감사 김이영은 이 사건을 모반사건으로 결론 내린 공동보고서를 중앙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주모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인물인 장시경의 동생 장시욱(張時昱)과 가노(家奴) 영태는 사형에 처해 졋으며, 위암 선생의 5대조인 장윤혁(張胤爀)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7대 종손이자 백부인 장윤종(張胤宗)을 비롯한 4촌 내의 근친 모두가 수감되거나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동은 10월 7일 ‘모반의 고을’이라는 이유로 ‘현(縣)’으로 지위가 강등되었으며, 10월 20일 유배형을 선고받은 4촌 이내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는 등, 안핵사 이서구와 경상감사 김이영의 허위 보고로 무고한 인동장씨 집안이 모두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참변을 겪었다.

이것이 순조 즉위년(1800)에 인동에서 일어난 이른바 ‘인동작변(仁同作變)’의 전말이다.

<신원을 위한 노력>

사건 발생 10년만인 1810년에 이르러 그때까지 경상감영의 감옥에 수감 중이던 장윤종(張胤宗)의 3남 장시즙(張時楫)과 장윤문(張胤文)의 아들 장시하(時夏)ㆍ시정(時鼎)ㆍ시익(時益) 형제들은 석방되어 고향 인동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모반죄에 연루되었던 이들로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철저하게 회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으며, 사건의 연루자들에 대한 기억 또한 어느덧 묻혀갔다. 그 때문에 정부의 대대적인 대사면령이 단행된 1831년에도 ‘인동작변’으로 유배된 이들은 사면의 수혜를 입을 수 없었다.

그해 전라도 신지도에서 모진 고생을 이어가던 위암 선생의 고조부인 장석규(張錫奎)는 사면령의 혜택을 입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인동작변’의 심리가 한창 진행 중이던 9월 5일 대구 감옥에서 위암 선생의 4대조인 장시호(張時皞)를 아버지로, 분성 배씨를 어머니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렇듯 장석규(張錫奎)는 태어난 지 45일 만에 강보에 쌓여 어머니와 함께 신지도로 유배 왔으며, 9세 되던 해에 어머니와 큰누이가 바다로 투신자살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죽음을 결심하면서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문명적으로 맞아들여야만 했던 사명감과 의무를 곱씹어 보았다. 그것은 작게는 어머니, 누이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크게는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세상의 혐의를 푸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죄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1831년과 1843년 두차례에 걸쳐 고향인 인동을 방문하여 사건의 전말을 듣고자 하였다. 어머니 배씨 생존 당시 그해의 사건이 무고로부터 시작된 조작사건이라는 애기를 늘 듣고 있던 터였다. 유배지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을 무릅쓰고 감행한 고향 방문이었지만 고향 찬지 어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거나, 사건을 밝히려들지 말라는 훈계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전라도의 절도(絶島)로 유배되어 온 고위관리들에게 매달렸다. 1844년 금금도로 귀양 온 판서 이기연, 1849년 신지도로 귀양 온 승지 윤치영이 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국왕에게 직접 신원(伸寃)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본가의 본원사실(本原事實)과 감영 소재 심문기록을 소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건의 전말을 소상하게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백모와 모친이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고향방문에서도 별 뾰죽한 내용을 듣지 못한 상황에서, 본원사실을 작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그는 대구의 감영 소재 기록을 확인하는데 진력했으며 마침내 1844년 심문기록을 베껴올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신원의 당위성을 더욱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유배지를 떠날 수 없는 죄인의 몸이었으므로 신지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해배(解配)되어 서울로 귀환하는 승지 윤치영에게 15세 난 어린 장남 기원(琪遠 : 위암의 祖父)을 맡겨 신원을 전담하게 하였다. 족친(族親)인 참봉 장석봉이 1858년 당시 국구(國舅)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까지 기원(琪遠)은 7년에 걸쳐 임금이 행차하는 길목에서 격쟁(擊錚 :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ㅇ서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 괭과리, 북 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을 통하여 조상들의 신원운동을 벌여나갔다.

신원운동은 김문근이 사건 해결을 위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건 발발 60년이 되던 철종 10년(1859)에 이르러 이 사건이 의금부에서 재심리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인동작변’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신원의 길을 열게 한 장본인은 위암 선생의 고조부이며 나중에「연미정실기(戀美亭實記)」를 쓰신 장석규 선생이다. 그는 부모의 상복을 입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45세 되던 해부터 삼년동안 상복을 입었으며, 이후 밤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부모의 신원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는 신원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좋은 음식, 따뜻한 이불을 멀리하면서 죄인을 자처했다.

15세의 어린 장남(琪遠)을 신원운동 차 서울로 보내면서, 이제 죽어 부모의 인전에서 조금이나마 죄를 덜 수 있다는 생각에 도리어 안도하던 그였다.

그 때문에 7년에 걸친 신원운동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드러나지 않자 그의 애간장은 다 녹아내렸으며, 점차 쇠약해지고 병환이 심해져 갔다. 그는 선산으로의 양이(量移 :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에 적당히 옮김)가 결정된 1861년 2월까지도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렸다. 신원에 대한 집념으로 마지막 생을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던 그는(張錫俊 : 위암의 증조부), 장남 석규가 정부의 공식문서를 갖고 오던 그날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3월 11일 마침내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어머니와 큰누이의 유해와 더불어 그해 11월 그가 생전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향 인동 인근의 선산으로 옮겨져 묻혔다.

4. 유학자(儒學者) 장지연(張志淵)

위암(韋庵) 선생의 사상적 출발은 영남유학(嶺南儒學), 그중에서도 퇴계학맥(退溪學脈)과 연계되어 있다. 이와 같이 유학을 토대로 하는 선생의 사상적 입장은 선생의 일생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먼저 선생의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조선 중기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석학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선생이 12대조이며, 구한말 영남의 대유인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선생이 고조부뻘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유교가문에서 태어난 선생은 증조부뻘인 오하(梧下) 장석봉(張錫鳳, 1820-1882)8)선생의 지도아래 14세 이후 부터 장석봉 선생이 사망한 19세 때까지 집중적으로 유학공부에 몰두하였다.

이와 같이 가학(家學)의 전통 속에서 선생은 자연스럽게 주자학적 성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생은 19세(1882년) 때부터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인 방산(舫山) 허훈(許薰)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허훈선생의 학문적 계보이다. 허훈(許薰)선생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선생과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선생으로 부터 사사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퇴계학통의 말기의 대가(大家)이긴 하지만 학맥상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허전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한강(寒岡) 정구(鄭逑) - 미수(眉叟) 허목(許穆) - 성호(星湖) 이익(李瀷)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로 이어오는 근기학파(기호 남인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19세기 말엽에 영남에 전한 대학자이다. 그리고 류주목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 수암(修菴) 류진(柳袗)의 학맥을 이어받은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 두 학맥은 다 같이 퇴계학통에 속하면서도 지역과 기풍의 차이에 따라 학문의 경향은 상당히 달랐다.

그리고 허훈은 영남출신으로 일찍부터 영남지역의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또 류주목의 강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허전의 문하에서 근기의 학풍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허훈은 학문적 중심을 도학(道學, 性理學)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의 학문적 계보를 근기학파에 두고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독특한 사상적 계보속에 있는 허훈을 통해서 정통 주자학적 학문을 전수 받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근기남인학파의 실학사상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실학(實學)을 배경으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적 경향은 현실과 실용을 중요시하는 선생의 후일의 애국계몽사상 형성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오늘날 일반인에게 각인된 선생의 이미지를 형성시킨 30대 이후 중년시기에 이루어진 선생의 에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은 그 사상적 기반을 한편으로는 서구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의 수용을 통하여 이루어진 자강론(自强論)에 두고 있지만, 그 자강론은 기본적으로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유학(儒學)을 기반으로 해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인다는 일종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관점을 고수한 것으로 볼 수있다.

또한 이 시기에 선생은 당시의 타락한 유학을 비판하고 ‘대동사상(大同思想)’의 이념을 중심으로 원시유학(原始儒學)을 지향하는 유교개혁(儒敎改革)을 주장함으로써 유교개혁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장지연은 생애 후반기에 식민지적 상황에 좌절하여 일부 퇴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국학(國學)분야의 연구를 통하여 조선의 전통문화에 대한 학문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한국문화연구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시기에 일본학자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의 조선유학(朝鮮儒學)에 대한 비판적 강연을 재비판하는 글을 통해서 유학(儒學)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일련의 유학 옹호적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글이 바로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서술인?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인데, 이로부터 근대적 의미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유학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사적(思想史的)ㆍ문화사적(文化史的) 맥락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장지연을 재해석할 때 우리는 장지연이라는 인물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유학(儒學)에 대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주요 저서(著書)로는『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유교연원(儒敎淵源)』,『위암문고(葦庵文庫)』,『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동국역사(東國歷史)』,『대동문수(大東文粹)』,『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대한기년(大韓紀年)』,『일사유사(逸事遺事)』,『농정전서(農政全書)』,『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화원지(花園志)』,『숭산기(嵩山記)』,『남귀기행(南歸紀行)』,『대동시선(大東詩選)』등 많은 작품이 있으며, 그의 저작(著作)을 수집하여『장지연전서(張志淵全書)』가 간행되었다.

5. 장지연 선생의 유교관에 대한 기본 특징

선생의 관점에서 정립된 유학의 기본성격과 그것이 근대,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측면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 원시유학(原始儒學)을 지향하였다

선생의 유교관에 대한 특징은 원시유학(原始儒學)의 근본사상과 본질에 대한 지향이다.

선생은 일찍이 “천지만물의 이치는 항상성(恒常性)과 변화성이 있다. … 크게는 천하와 국가에서, 작게는 한 집안과 한 몸에서 어찌 일찍이 이러한 이치에서 어긋남이 있겠는가”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천하의 일은 때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 변함없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때를 따른다는 뜻은 위대하도다.’ 라고 말하니, 진실로 때에 따라서 변하지 않으면 어찌 역(易)의 도를 안다고 하겠는가. 그러하나 천하의 일에는 변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하니, 천도(天道)의 사시(四時)를 바꿀 수 있는가,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오륜(五倫)을 바꿀 수 있는가. 이것은 우주가 다하도록 만고(萬古)에 이르기까지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중용(中庸)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 역시 선생의 유학사상의 특징으로 거론할 수 있다. 이 부분은 “고집이 센 자는 불변에 익숙해 있고 변화에는 막혀있으며,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자는 변화에 힘쓰고 불변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고집이 센 자는 곧 굳어서 통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자는 안정되지 못해서 알맹이가 없으니, 모두 가운데에 들어 맞지 못한 것이다. 오직 일정함을 유지하면서도 변화에 통해야만 원칙(經)과 방편(權)의 도에 미칠 수 있으며, 때에 따라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정에 맞게 합치할 수 있다”라는 선생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오직 구학(舊學)만이 여전히 시세의 변천에 어둡고 조금도 융통성이 없어서 신학(新學)과 구학(舊學)이 서로 통하고 수용할 수 있는 측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니, 어찌 시의에 적합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서 신학(新學)과 구학(舊學)의 중용적 수렴이 필요함을 제기하였다.

원시유학을 지향하는 선생의 관점은 공자(孔子)에 대한 남다른 존숭(尊崇)의 마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선생은 “우리들은 모두 공자(孔子)의 가르침 속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마땅히 성인이신 공자께서 탄생하신 연도를 기원으로 삼는 것이 마땅한다”라고 하였고, 1915년에 지은 「공자탄일(孔子誕日)」이라는 글에서는 “오늘은 과거의 성인의 도를 이어받고 미래의 학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어서, 만세동안 유가의 으뜸가는 스승이며 억년동안 교화의 근본이신 공자(孔子)님의 탄생일이다. … 공자(孔子)께서는 아무런 칭호도 없이 10여 세대동안 전해지면서 학자들이 으뜸가는 분으로 받들었다. 천자ㆍ왕후로부터 중국에서 육례(六藝)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자(孔子)와 견해를 맞추고자 하니, ‘지성(至聖)’이라 말할 만하다. 오호, 공자(孔子)께서는 참으로 유교의 으뜸가는 분(宗主)이라고 말할 만하다”라고 칭송하였다. 또한『매일신보(每日申報)』에 「유교조공자(儒敎祖孔子)」라는 제목으로 1917년12월15일부터 같은 해 12월28일까지 12회에 걸쳐 공자(孔子)와 관련된 사항을 연재하였다.

그리고 「대동교육회취지문(大同敎育會趣旨文)」에서도 “대동교(大同敎)는 지성선사(至聖先師)인 공자(孔子)가 세운 교이며, 자사(子思)와 맹자(孟子)가 전해준 통서(統緖)이다. 대체로 공자(孔子)의 교에는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의 두파가 있다. 그러나 그 으뜸가는 가르침을 헤아려 보면 춘추삼세(春秋三世)의 뜻에 있으며, 만세토록 큰 가르침을 세우고 태평을 여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여, 대동사상이 공자(孔子)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곤궁하고 불우한 상황에서도 만세(萬世)에 도가 행해질 수 있도록『춘추(春秋)』와『역경(易經)』의 「번사전(繫辭傳)」을 저술한 공자(孔子)의 높은 뜻을 기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원시유학에 대하여 선생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주된 이유는 선생이 추구하는 유교개혁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원시유학 정신의 구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2) 유학(儒學)을 경세학(經世學)으로 규정하였다

선생의 유교관에서 또 다른 특징은 유학(儒學)을 경세학(經世學)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 학문 수학기(修學期)에 기호남인계통의 실학파(實學派)의 계보를 이어받은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스로도 자신의 학문이 실학적, 실천유학적 박학성의 특징이 있음을 말하였다.

선생은 “세상에서는 공자(孔子)를 간혹 정치가ㆍ경제가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체로 유교의 본지는 경술(經術)이나 육예(六藝) 사이에 얽매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며, 참으로 경국제세(經國濟世,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제하는)의 대도(大道)이다. 이러한 대도를 어찌 후세의 부패한 유자들이나 곡학아세하는 선비들이 더불어 논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유학을 경세학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공자(孔子) 문하의 제자들은 학업을 마친 후에는 돌아가서 모두 그가 연마한 학술을 실제로 하는 일에 적용하여 모두 그 이름을 떨쳤으며, 그 학문이 뒷사람들에게 전해질 때도 반드시 세상의 요구에 따라 실제로 쓰일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후세의 유학을 공부한다는 무리들은 공허한 이론에만 사로잡혀서 입만 놀리는 일을 배우는데 정신없다고 비판하였다.

유학을 경세학으로 보는 것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은 이른바 ‘도학(道學)’에 대한 선생의 해석이다.

도학(道學)이 한대(漢代) 이후로 쇠미해지다가 송대(宋代)에 이르러 다시 천명되었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중심으로 하는 송학(宋學)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 아니라 모두 실제적인 성리(性理)의 학문이며, 치국ㆍ평천하(治國ㆍ平天下)의 방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관점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는 유용한 학문인 송학(宋學)이 공리공담으로 폄훼되는 것은 그 학문 자체에 내포된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학문을 공부한다는 유학자들의 능력과 문자에 치우친 공부식에 기인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따라서 ‘유학은 경세학’이라는 것이 선생의 일관된 유교관이었다.

3) 한국유학(韓國儒學)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한국유학의 기원을 기자(箕子)로 보았다. 선생은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와서 8조의 법으로 교화하니, 이가 곧 유교(儒敎)의 종조(宗祖)이다. 무왕(武王)이 상(商)을 정벌할 때 맨 먼저 홍범(洪範)의 큰 도를 말하였다. 그 도덕과 학문은 일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고 하였고, “우리동방은 세상의 동쪽에 있으면서 중국의 땅에 연결되어있고, 기자(箕子) 성인(聖人)으로부터 시작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교화가 열렸으며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베풀어졌다. 그 예악과 문물은 일찍이 바다 바깥의 여러 나라보다 훨씬 뛰어났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유학의 기원이 그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일찍부터 그러한 가르침이 널리 퍼진 문화의 땅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실증성과는 별도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주장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천백년이래로 시서(詩書)를 외워서 모범으로 삼았고 문학을 높이 숭상하니, 집집마다 글읽는 소리가 울려 퍼져서 인현(仁賢)의 교화가 잘 이루어졌고, 넓고 큰 옷자락과 넓은 띠가 매우 빛나는 예양의 풍속이 있었다. 풍속의 아름다움, 문물의 성대함은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고, 밝지않은 것이 없었다”라는 글도 이 땅이 오랜 유학의 전통을 가진 문화적 선진국이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이후 더욱 표출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러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하여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국수주의적인 주장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오히려 주체적인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하여 민족적인 자존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애국활동과 민족정신을 강화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해서 선생은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와『매일신보(每日申報)』를 통하여 한국유학과 관련된 논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선생은 한국유학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적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유학통사인『조선유학연원(朝鮮儒敎淵源)』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생의 연구성과가 없었다면 한국유학에 대한 근대적인 학술연구의 첫머리에서부터 일본인의 독무대가 되었을 것이며, 한국유학사 연구 나아가서 한국사상사 연구와 관련해서 언제나 아쉬움이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조선유학연원(朝鮮儒敎淵源)』한 작품만으로도 우리 지성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며, 민족의 자존심을 살린 셈이다.

4) 현실 속의 ‘유학자(儒學者)’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개화기 이후 많은 지식인들은 유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러고 유학을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유교개혁주의자도 있었다. 선생은 유교개혁계열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유교개혁과 관련된 선생의 입장은 이른바 유학자라고 하는 부류들의 의식개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학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유교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자들의 잘못된 유학이해와 실천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근세에 이른바 유학하는 무리들은 겉으로는 예모를 갖추어 큰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르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경전의 문자요, 마음으로부터 궁구하는 것은 반드시 성리학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우리는 공자(孔子)의 문도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 실제모습을 살피면 꼭두각시의 가면에 불과할 따름이다.

다만 고전의 훈고사이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수시변통(隨時變通)시대에 따라서 알맞게 변화하고 상황에 맞추어 일을 해나가야 하는 뜻을 알지 못한다. 오늘날에 요순(堯舜)의 정치로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하니, 이것은 이리 저리 빙빙 돌아가는 일이며 공자(孔子)의 대도(大道)를 알지 못한 것이다. 하(夏)의 역법(曆法)을 시행하고 은(殷)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周)나라의 면류관을 쓰는 것은 공자(孔子)의 수시변통(隨時變通)하는 대경(大經)이자 대법(大法)이니, 만약 공자(孔子)께서 오늘날의 세상에 계신다면 또한 반드시 오늘날의 풍속에 따라서 옛도를 행하실 것이다. 어찌 오늘날 유자(儒者)라는 사람들이 고제(古制)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시세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랴.

이 글에서 선생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변화의 수용을 거부하는 이른바, ‘유자’들을 공자(孔子)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비’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이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근세의 새로 나온 경박한 무리들은 공부자(孔夫子)의 문을 바라 볼 수 없고, 공부자(孔夫子)의 경계를 살필 수 없다. 다만 부패한 유자(儒者)의 언행에만 집착하여 곧 제멋대로 공부자(孔夫子)를 비난하고 배척하면서 ‘저 유교(儒敎)라는 것은 본래 그러하다’고 말한다.

융통성이 없는 편협한 유학자의 행실을 물리치고 성인(聖人)이신 공자(孔子)에게 나란히 이르고자 하는데, 이른바 바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물안의 개구리와 얼음을 알지 못하는 여름 벌레의 견해는 그 견문이 좁기 때문에 처음부터 심하게 책망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름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무리라고 하면서 또한 매우 부끄러워 할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당시 유자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편협한 견해와 어긋날 때는 오히려 공자(孔子)를 비난하기까지 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선생은 이러한 집단을 한마디로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 낮은 식견을 가진 무리로 평가한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다름없이 “도포를 입고 유생(儒生)의 관을 쓰며, 밤낮으로 공자(孔子)의 글을 암송하고 아침저녁으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익힌들 실제 일이나 행실에서 드러날 수 없다면, 이것은 어린이가 공부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공자(孔子)의 도를 배운다고 말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선생은 당시 유학자들이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상황에서 탈피하여 제대로 공자(孔子)의 도를 배우는 유일한 길은 “오직 수시변통(隨時變通)하면서도 옛 도(道)를 어그러뜨리지 않아야 되는 것”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관점은 일종의 중용적인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며, 공자의 표현을 빌리면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자세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유교개혁과 관련하여 적용해 본다면, 선생이 추구하는 유교개혁은 유학의 근간을 흔드는 근본적인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공자(孔子)에 근거를 두고 공자(孔子)를 다시 제대로 봄으로써 희미해져 가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다시 일깨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유학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선생은 “유학(儒學)을 따르는 선비들이 책을 읽고 도(道)를 배우는 것은 본바탕(體)와 응용능력(用)을 갖추고 고금(古今)에 널리 통하며, 먼저 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기초를 세워서 장차 세상의 요구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이다”라고 하였다.

선비들이 이렇게 새로운 시대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길러 학업과정을 개량하고 유풍(儒風)을 진흥시킬 수 있을 때 유학의 앞날에 희망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시대적 변화에 둔감하게 되면 유학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선생은 예측하였다.

6. 생애의 빛[긍정성]과 그늘[부정성]

조선왕조의 말기는 국가존립ㆍ민족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가(國家)가 사라져 버렸다. 특히 유학사상(儒學思想)을 바탕으로 근대국가ㆍ근대사회 체제의 수립을 추구하였던 선생은 허망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국가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민족(民族)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민족의 유산과 정신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고전(古典), 전고(典故), 풍속(風俗), 역사(歷史) 등 국학연구(國學硏究), 특히 우리민족의 사상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학사상(儒學硏究)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와의 논쟁으로 더욱 자극을 받아서 마침내『조선유학연원(朝鮮儒敎淵源)?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첫 한국유학사를 완성하는 한국인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사실은, 1913년 이 후에 이루어진 국학 및 유학에 관련된 선생의 대부분의 저술들이 당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機關紙)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매일신보(每日申報)』에 기고한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사회심리적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첫째로, 지식인은 자기의식(自己意識)의 표출을 통하여 자신의 사회적 존재성을 확인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데, 선생도 이러한 심리상태가 아니었는가 여겨진다. 둘째로, 민족계몽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민족계몽을 위한 일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 동조하여, 결과적으로 일제강점을 인정하는 듯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유학과 관련해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유학(儒學)의 본령(本領)은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 즉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이 경우에 수기(修己)는 다른 무엇보다 자아(自我)의 완성을 1차적 목표로 하기 때문에 수양론(修養論)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치인(治人)은 타(他)를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며, 유학의 경세론(經世論)이 여기에 해당한다. 선생의 경우에는 유학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부터 경세론적 유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선생이 원시유학(原始儒學)을 지향한 것도 원시유학이 경세론적 실천중심의 사상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당시 퇴계학맥에 속하는 일반 유자(儒者)들과는 달리 선생은 그 유학사상 중에서 수양론의 측면이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自我)에 대한 함양에는 크게 힘을 쏟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치인(治人)과 관련된 주무대는 국가이다. 이러한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다시 수기(修己)라는 기억 저편의 고향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버렸다.

그렇다면 유학의 치인(治人)과 관련해서 남은 유일한 길은 관념적인 ‘평천하(平天下)의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 경우 선생이 현실속에서 ‘평천하(平天下)의 이상(理想)’으로 받아들인 이데올로기가 바로 백인종과 황인종이라는 인종간의 대결 구도에서 아시아를 지키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日本)을 중심으로 연합해야 한다는 해묵은 ‘동양평화론’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원초적 모순’의 선택으로 인해서 생겨난 그늘은 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선생이 걸어간 또 하나의 길, 즉 민족문화연구 및 유학연구와 관련해서 선생이 남긴 업적은 민족의 문화사와 사상사 분야에서 여전히 밝은 빛으로 작용하고 있다.

7. 대표저서(代表著書) 소개

1) 소설 애국부인전(愛國婦人傳)

위암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일치단결해서 일제 세력들을 몰아낼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래서 쓴 것이『애국부인전』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창작소설로 분류할 것인지, 번역ㆍ번안소설로 분류할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순수 창작소설로 보기에는 프랑스의 구국전사(救國戰史)를 다룬 소재가 너무 이국적이고, 번역이나 번안소설로 보기에는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된 요소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1907년 광학서포에서 발간한 번안전기소설로 순 국문으로 되어 있다.

애국부인전은 장지연이 ‘숭양산인’이라는 필명으로 190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일합방 직전에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 애국계몽소설의 하나로써 프랑스가 영국과 백년전쟁을 벌인 당시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를 여걸로 묘사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나올 무렵의 시대상황은 1905년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무렵이었다. 따라서 위암은 이러한 시점에 애국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알리는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애국부인전》을 발표한 것이다

조국을 구하고자 소녀의 몸으로 출정한 여주인공 잔 다르크가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아리안(오를레앙) 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다시 파리 성을 탈환하려고 출정했다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화형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작가인 위암 선생은 작품의 말미에서 잔다르크와 같은 애국 충의의 여자가 우리나라에도 있는지를 물음으로써 이 소설의 저술동기를 드러내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주인공의 활동을 그려 우리 민족에게 귀감이 되게 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제에 대항하는 구국영웅의 출현, 민중적 저항으로서의 의병봉기, 국가적 위기 속에서의 여성의 현실참여 등을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당시의 전기문학이 대부분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음에 비해 순국문체로 씌어 있고, 총 10회의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을 취하고 있어 전대 국문소설의 전통에 의거한 작품임을 짐작케 하는데, 이 점은 작품 서두에서 주인공의 출신과 시대배경을 서술한다든가, 장면을 전환시킬 때 ‘차설’, ‘각설’ 등의 공식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든가, 묘사의 경우에도 한문고사나 상투적인 표현을 구사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 작품은 인물과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군담소설(軍談小說)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천상계(天上界)를 배제하고 주인공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형상화했다는 점, 국민대중의 힘에 의존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등의 보다 평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위암선생은 애국계몽 또는 개화계몽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한말의 지식인이다. 전통적인 한학을 수학하면서 유교적 교양을 쌓았던 선생은 시대적 변천에 직면하여 새로운 역사의식을 체득하게 되자, 자기 학문과 사상을 개신하였다. 그리고 망국의 비운에 처하게 되자 구국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놓고 앞장서서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전통적인 자기 학문을 개신하고 시대적 변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던 사상적인 변모는 선생의 계몽적인 언론활동에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선생은 지금까지는 주로 ‘신문(新聞)’이라는 새로운 언론매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글쓰기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계몽활동의 극대화를 이룰 수가 없다는 판단에서 소설을 쓴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잔 다르크는 가난한 농가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영국의 침략으로 프랑스가 위기에 처하자, 직접 전쟁에 나아가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이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하자, 왕이 프랑스 남부지방으로 피난한 상태에 놓여 있다. 잔 다르크는 용맹을 날리면서 영국군에 대항하여 침략을 저지하고, 모든 백성들이 이에 고무되어 함께 대항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영국군과 내통한 프랑스 장수의 속임수에 걸려 포로가 되고 결국 화형에 처해진다.

이 작품에서 위암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침략적인 외세로서의 영국군과 위기에 몰려 있는 프랑스의 상황이다. 이 같은 역사적 상황은 통감부의 설치 이후 일제의 침략 위협에 처해있던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침략으로 위기에 몰렸던 프랑스를 구출하기 위해 몸을 바친 잔 다르크의 용맹과 애국 충정을 우리도 본받아서 국가의 자주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모두가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비록 총칼을 손에 쥐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철저한 애국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2)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58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위암 선생은 초인적이라 할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다.《위암문고(韋庵文庫)》ㆍ《대한최근사(大韓最近社)》ㆍ《동국역사(東國歷史)》ㆍ《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ㆍ《대동문수(大東文粹)》ㆍ《대동기년(大東紀年)》ㆍ《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ㆍ《일사유사(逸士遺事)》ㆍ《농정전서(農政全書)》ㆍ《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ㆍ《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ㆍ《화원지(花園志)》ㆍ《숭산기(嵩山記)》ㆍ《남귀기행(南歸紀行)》ㆍ《대동시선(大東詩選)》등이 위암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리고 이 많은 저서 중에서『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을 위암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유학(儒學), 곧 유교(儒敎)의 학문적 연구에서 근대적 성과는 애국 계몽 사상가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초기의 업적으로는 위암 장지연(張志淵)의 ≪조선유교연원 朝鮮儒敎淵源≫(1922)을 들 수 있다.

책의 제목이 ‘유교(儒敎)’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당시에도 유교(儒敎)의 교화적 이해와 학문적 이해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위암선생은 이 책에서 ‘유교(儒敎)’와 ‘유학(儒學)’을 혼용해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한국 유학사의 통사적 서술을 시도한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책은 성리학의 이론적 쟁점을 부각시키고, 호락학파(湖洛學派)ㆍ경가양파(京嘉兩派) 등 유학의 학파적 분류를 개념화했으며, 학파적 전개과정과 각 입장의 사상적 다양성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라는 점에서 매우 높은 가치가 있다. 또한 ‘호남 유학(湖南儒學)’ 등 지역 학맥과 서북(西北)지역 유학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위암 선생의 학문적 관심이 우리의 유교전통을 사상적으로 객관화하고 재인식함으로써 유교사상의 새로운 전개 가능성을 계발(啓發)하고 열어주었다는데 의미가 있으며, 이로부터 한국인에 의한 한국유학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학자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은 조선유학사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규정하려는 입장이었으나 위암은 ‘변고교형강연(辨高橋亨講演)’에서 이에 대해서 아주 예리하게 비판적인 논평을 하였다. 즉,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이 유자(孺子)와 유학자(儒學者)를 나누고, 도학(道學)을 송대(宋代)에만 한정시키며, 성리학(性理學)의 공론적(空論的) 성격을 지적하고, 도학(道學)을 실학(實學)과 상반(相反)되는 것으로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위암선생은 도학의 정통성과 진실성을 확신하고, 성리학이나 도학이 공론이 아님을 논변(論辨)하여 참된 도학자(道學者)와 부패한 통속선비(腐儒俗士)를 혼돈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위암 선생은 한국유학의 전통과 특히 도학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입장을 전개하였으며, 한걸음 나아가 성호(星湖)와 다산(茶山)의 실학적 학풍(學風)의 정당성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또한『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에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계승되는 도통연원(道統淵源)을 기준으로 삼으며, 퇴계(退溪), 율곡(栗谷)의 학통을 부각시키면서 성호(星湖)의 성리설에서 종합을 찾고 남명학통(南冥學統)과 화담(花潭)의 장횡거(張橫渠)학풍에 주목한다. 그리고 퇴계, 율곡의 학통을 따라가면서 반계(磻溪), 다산(茶山), 연암(燕巖), 감헌(堪軒)의 실학파(實學派)를 유학이 경세(經世)를 겸하고 있는 일파로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여기서 위암은 기호(畿湖), 영남(嶺南)의 유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선우협(鮮于浹), 장세양(張世良), 황순승(黃順承)에서 박문일(朴文一)에 이르는 관서유학(關西儒學)과 최신(崔慎), 이재형(李載亨), 한몽린(韓夢麟), 이원배(李元培), 유여호(劉汝豪), 임종칠(林宗七), 홍이우(洪理禹) 및 주명상(朱明相) 등 관북유학(關北儒學)의 학풍을 찾아내어 유학사의 사각(死角)지대까지 비춰주고 있다. 또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문하의 봉루(鳳樓) 유신환(兪莘煥)문하 사이에 명덕(明德)과 심(心)을 이(理)로 볼 것인가, 기(氣)로 볼 것인가의 문제에 따른 경가양파(京嘉兩派)의 분열이 위암에게는 같은 시대 선배들 사이의 논쟁이었다.

위암 자신은 한말근대유학사(韓末近代儒學史)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처럼 상세한 서술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유학사의 문제들은 오늘날 한국유 학사상사(韓國儒學思想史) 이해와 서술에 지침과 기본구조를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위암 선생은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죄인을 일본인이 감싸고 있는데 대해 ‘청복수소(請復讐疏)’를 올려 춘추의리(春秋義理)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비추어 일본을 성토(聲討)하는 도학적(道學的)의리론(義理論)의 일면(一面)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암 선생은 장자(莊子)가 “유자(孺子)는 시(詩)와 예(禮)를 들먹이며 남의 무덤을 파낸다”는 비난(非難)을 당시 타락한 거짓 유자에 대한 자기반성의 자료로 받아들일 만큼 포용적(包容的)이고 진취적(進取的)인 자세를 지녔었다.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은 당시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 되었는데 위암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22년 아들인 장재식(張在軾)이 3권 1책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내용은 한문으로 서술되어 있다.

(1)『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의 서장(序章)

이아(爾雅)에 말하기를, “태평(太平)의 사람은 어질다”했는데, 태평이란 동해(東海)의 이름으로 곧 우리나라를 가르키는 것이다. 우리 동쪽나라 사람은 그 성질이 어질고 착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사람들이 예부터 그 주위의 인접한 종족을 말할 때 남만(南蠻)ㆍ북적(北狄)ㆍ서융(西戎)은 모두 벌레 충(虫)자나 개 견(犬)자를 붙였지만, 오직 우리나라만은 이(夷)라고 일컬었으니 이(夷)란 ‘활쏘는 사람(弓人)’을 말하는 것이다.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말하기를, “동이(東夷)는 변을 쓰고 비단 옷을 입으며 제기(祭器)를 써서 제사를 지내니 이른바 ‘중국에서 예법(禮法)을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고 한 것이다.” 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그 책과 글이 모두 화하(華夏)와 같으니 옛날부터 예의(禮儀)가 있다고 일컫는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하였다.

단군(檀君) 말년에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가 주(周)나라를 피하여 온 뒤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법으로 교화(敎化)했으니 이 홍범구주는 하늘이 우(禹)임금에게 내려 준 것을 기자가 그 도(道)를 얻어서 이것을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전해 준 것이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하도(河圖)는 하수(河水)에서 나오고, 낙서(洛書)는 낙수(洛水)에서 나왔는데 성인(聖人)이 이것을 본받았다.” 했으니 홍범(洪範)은 역상(易象)의 원리이며 유교(儒敎)의 종조(宗祖)인 것이다. 에로부터 훌륭한 제왕들의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기자가 이것을 무왕에게 전수한 후에 몸소 조선에 와서 8조(條)의 가르침을 베풀어 이로써 우리를 교화했다.

지금 이 8조가 모두 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자(孔子)가《주역》에서 찬(贊)하기를, ‘기자(箕子)의 명이(明夷)’라고 하셨는데, 명이라는 말은 도(道)가 동쪽지방에 밝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조선을 유교의 종주국(宗主國)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께서《논어》에 말씀하신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고 싶다(乘桴浮海).”고 하신 것이다.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欲居九夷)”고 하신 말이 있으니 이는 대개 우리나라가 유교를 오랫동안 숭상해 온 나라이기 때문에 공자께서 기자가 포교(布敎)해서 도(道)를 행한 것과 같이 하고자 하여 이런 말을 하신 것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와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작은 배로도 항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왕래가 빈번하여 기자(箕子)ㆍ백이(伯夷)ㆍ숙제(叔齊)ㆍ대련(大連)ㆍ소련(小連)이 왕래한 사실이 서책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으니 공자가 살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때 만일 공자께서 참으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기자처럼 우리나라에 전교(傳敎)하고 교화하셨다면 어찌 우리나라 지역이 유교의 근거지가 되어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애석하게도 시세(時勢)에 구애되어 끝내 과연 행해지지 못해서 기자 이후로 삼한(三韓)의 여러나라를 거치면서 징험할 만한 서적이 없어서 유교에 대한 흥쇠(興衰)를 상고할 수가 없고, 다만 이상(理想)으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제나라와 노나라의 왕래가 잦았으니 공자의 무리로 전도(傳道)하러 온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도(道)를 배우고 돌아온 자가 응당 적지 않았을 것이나 대개 이것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은 역사에 빠져서 그런 것일 것이다.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교(神敎)를 숭상하여 불교가 전해 들어오면서 불교가 성하게 행해져서 공자의 가르침은 미미하게 겨우 행해지다가 삼국(三國)의 중엽(中葉), 즉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48년 신묘(辛卯), 즉 고구려 영류왕(營留王) 14년, 백제 무왕(武王) 32년에 비로소 자제(子弟)들을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유학시켰다.

대개 이때는 당나라 태종(太宗)이 국학을 증축(增築)하여 경학(經學)을 확장했기 때문에 삼국이 모두 자제들을 유학시켰던 것인데 이때는 곧 정관(貞觀) 5년<三國史記에는 宣德王 仁平 7년 庚子에 비로소 자제들을 보내어 당나라 국학에 들어가게 했으니 곧 정관 14년이었다>이라 했으니 이것이 경학(經學)이 중흥(中興)한 시작이다.

이로부터 전쟁을 일삼느라 문교(文敎)에 힘쓸 겨를이 없었지만 당시의 큰 유학자나 큰 학자로는 강수(强首)ㆍ제문(帝文)ㆍ수진(守眞)ㆍ양도(良圖)ㆍ풍훈(風訓)ㆍ골번(骨番)등의 이름이 한 세상에 나타났었으나 그들이 남긴 말들이 모두 없어졌으니 애석한 일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야 비로소 문화를 숭상했고, 신문왕(神文王) 2년에는 국학(國學)을 처음으로 세워 오경(五經)으로 국자(國子)를 가르쳤으니, 이것이 국학의 시작이었다.

(咿啞曰太平之人仁太平者東海名卽指吾東方也吾東方之人其性仁善故南蠻北狄西戎皆從虫從犬惟東方稱夷夷者弓人也杜氏通典曰東夷冠弁衣錦器用俎豆所謂中國失禮求之四夷者也又曰其書文並同華夏自古以禮義稱者良有以也檀君之季殷太師箕子避周以來以洪範九疇之道敎化東方洪範九疇天所以錫夏禹而箕子得其道以是傳之于周武王者也易云河出圖洛出書聖人則之洪範者卽易象之原理而儒敎之宗祖也自古聖帝哲王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大經大法皆具於洪範一書箕子旣傳于武王又躬行于朝鮮設八條之敎以敎化吾人則其八條雖遺缺失傳然孔子贊易曰箕子之明夷明夷者其道明於東方也然則朝鮮雖謂之儒敎宗祖之邦可矣是故論語孔子乘桴浮海之志有欲居九夷之語盖謂吾東是儒敎舊邦故夫子欲如箕子之布敎行道而有是言也且况吾東與齊魯隔一衣帶可一葦航之自古交通甚緊如箕子夷齊大連小連一往一來箸顯簡冊則孔子之欲居也是矣向使孔子果然浮海而東如箕子之斷行傳敎化于吾東安知吾東一域爲孔敎根據之邦而廣吾東於天下也耶

惜乎其拘於時勢而終不果行也自箕氏以後歷三韓諸國之代文獻無徵儒敎之興衰無從考稽也以理想推之吾東與齊魯來往頻繁則孔氏之徒爲傳道而來者與吾東人之學道而還者不應不少而槪無聞焉此史乘闕佚之故也至新羅高句麗百濟之代始尙神敎自佛敎傳入釋敎盛行孔子之敎微微僅存曁三國中葉卽新羅第二十九代眞平王建福四十八年辛卯(高句麗營留王十四年百濟武王三十二年)始遣子弟入唐國學盖是時唐太宗增築國學恢張經學三國並遣子弟留學者也卽貞觀五年也(三國史宣德王仁平七年庚子始遣子弟入唐國學卽貞觀十四年也)此經學中興之嚆矢也自是從事兵革未遑文敎然當世弘儒碩學有任 首及帝文 守眞 良圖 風訓 骨香等皆著名一世而惜乎其遺言泯沒文武王統一以後始尙文化神文二年始立國學以五經敎國子此國學之始也)

위암은 이 서장(序章)에서 동방유교의 근원을 기자(箕子)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원리로 한 팔조지교(八條之敎)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유교는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구경(九經)을 해석한 것을 그 최초로 삼았다고 하였다.

또한 위암은 이후 고려시대가 되어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정주학(程朱學)을 처음으로 전했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정주학을 강구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수창(首唱)하였으므로 정몽주는 조선 유교의 종주(宗主)라 하였다.

이어 퇴계 이황(李滉)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분변(四端七情分辨)에 대해 주고받은 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사칠이기문답(四七理氣問答), 이이의《성학집요(聖學輯要)》의 심성정설(心性情說),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다른 유학자의 연원과 함께 실었다.

또한『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에는 88명의 유학자들을 인물중심으로 소개하였는데 상주 선비로서는 노수신(盧守愼)ㆍ정경세(鄭經世)ㆍ조익(趙翼)ㆍ남한조(南漢朝)ㆍ정종로(鄭宗魯)ㆍ권상일(權相一)ㆍ유심춘(柳尋春)이 소개되어 있다.

(2)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의 총론(總論)

위암 선생은 여기에서 조선 유교의 전체 흐름을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조선에 유교가 일어난 것은 실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천명하여 우리나라 유교의 종주(宗主)가 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송유(宋儒)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파이고, 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이 전수한 학문은 기성(箕聖)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명이(明夷)의 교화가 비록 원시 상태를 개벽(開闢)하지는 못했으나 문명의 가르침을 편 것은 그 유래가 참으로 유구한 것이다. 다만 고증할만한 문헌이 없어 홍범팔정(洪範八政)의 다스림에 대한 규범과 조리를 상고할 수가 없으나《지나사(支那史)》를 보면 다음과 같다.

범엽(范曄)의《후한서(後漢書)》를 상고해 보면, “기자가 쇠약한 말세의 운을 당하여 조선으로 피하여 가서 8조의 약속을 베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금법을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음란한 행실과 도둑이 없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고, 유순하고 근신하는 것으로 풍속을 삼아 도의가 있었다. 가르친 조목이 간결하였지만 신의가 있었으니 성현이 법을 만든 근본정신을 얻었다.”고 하였다.

함허자(涵虛子)도 말하기를, “기자가 중국인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갔는데,《시(詩)》,《서(書)》,《예(禮)》,《악(樂)》, 의무(醫巫), 복서(卜筮)의 전문가와 백공 기예(百工技藝)들도 함께 따라갔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시서를 가르쳐 중국의 예악 제도와 부자 군신간의 도, 오상(五常)의 예를 알게 하고, 8조로써 가르쳐 신의를 높이고, 유술(儒術)을 돈독하게 하여 중국의 풍교(風敎)를 양성(釀成)하였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조선을 ‘시ㆍ서ㆍ예ㆍ악의 나라이며, 인의(仁義)의 나라’라고 한다.”고 하였다.

앞서 함허자가 말한 ‘유술을 돈독히 하였다(篤儒術)’라는 세 글자에 의하면 유교의 창시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대역(大易)의 상(象)에도 ‘기자의명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1천여년이 지나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선불(仙佛)을 받들어 유교는 밝지 못했다. 중엽 이후에 국학을 세워 경술(經術)을 숭상하여 점차 공자의 가르침을 존중할 줄 았았으니, 홍유후(弘儒侯) 살총(薛聰)과 임강수(任强首)ㆍ문창후(文昌候)ㆍ최치원(崔致遠) 같은 분들은 모두 유학으로 이름이 났다. 그러나 유학이 문사(文詞)와 선석(禪釋 : 불교)의 사이에 섞여서 나온 정도로 순수한 유자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가 일어난 후에도 역시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 사이에 간혹 문장과 경술을 익힌 선비가 있어 사문(斯文)을 도왔으니 해주(海州)의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 흥주(興州)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상당(上黨)이재(頤齋) 백이정(白頤正), 단양(丹陽)역동(易東) 우탁(禹倬), 안동(安東)의 국재(菊齋) 권보(權甫), 영산(靈山)의 덕재(德齋) 신천(辛蕆) 및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 제공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불교가 기세를 부리던 시대에 유독 문학과 유술로써 이름이 났지만 순수한 유학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록 그러나 고려시대는 마침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과 때를 같이 하였기 때문에 고려 말의 제현들이 차차로 송유의 학파에 물들게 되어 이로써 조선의 유학이 비로소 변화하게 된 것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정주의 글을 강구하여 처음으로 성리학을 주창하였다. 이로부터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포은의 문하에 수학하여 그 도를 전해 받았는데 불행히 혁명의 시대를 당하여 포은은 순국하여 강상(綱常)의 책임을 자임하였고, 야은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은둔하여 평생을 늙어 지절(志節)을 굳게 지켰다. 그래서 두 분 현인은 모두 도를 잡고서도 세상에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학문을 사예(司藝)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에게 전하였고, 강호는 이를 그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전하였다. 점필재는 그 문인이 매우 많았으나 그 중에서 오직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만이 도학을 전수받았고, 그밖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뇌계(雷溪) 유호인(兪好仁) 등 제공이 문장을 전수받았다. 한훤당이 도학을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 전하였으니, 실로 포은의 정통파이다.

정암이 중종 때에 격물(格物)ㆍ치지(致知),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을 바탕으로 요순시대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목표로 성스러운 뜻을 가졌었고, 충암(冲庵) 김정(金淨), 노천(老泉) 김식(金湜)이 이들을 도와 장차 풍속을 크게 변화시키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묘년의 화란이 일어나 충성스럽고 선량한 선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여 선비들의 기개가 떨어져 이학(理學)을 피하게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당금(黨禁)이 비로소 누그러지니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영남에서 수학하고, 문정공(文靖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호남에서 학문을 창도하여 우리 도가 다시 밝아지려 하였으나,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을사사화가 일어나 이에 사문의 액이 극도에 이르렀다.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주자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제자(諸子)의 학문을 연구하여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그러나 을사년에 제현이 화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세상길에 뜻을 두지 않고 한결같이 겸손 퇴거하여 오직 이 도학을 강명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으니 살로 조선 유학계의 집대성이다. 그래서 그 문하에 제자가 많았으니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경공(文敬公) 월천(月川) 조목(趙穆),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문충공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등 제공이 모두 도학을 전수하여 왕성하게 일세의 유현(儒賢)이 되었다.

한강은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전하고, 서애는 문장공(文莊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전하였으며,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퇴계를 사숙(私淑)하여 한강과 함께 일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여헌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수암(修巖) 유진(柳袗),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제공에게 전하였는데 모두 유술로 영남에서 이름이 났다.

포은으로부터 시작하여 야은ㆍ강호ㆍ점필재ㆍ한훤당ㆍ일두ㆍ회재ㆍ퇴계ㆍ한강ㆍ여헌ㆍ우복 등 제현을 배출하여 도학으로써 서로 전했다. 포은이 처음으로 주창하여 유학의 종주가 되고 퇴계에 이르러서 더욱 천명하여 백세의 사범이 되었으니, 이이후의 영남 유현은 모두 이를 연원하였다.

선조 초에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관동으로부터 일어나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여 도학을 강론하여 밝히고 조정암을 사숙하여 세도를 만회하려는 뜻을 두었으나 불행이 나랏일이 어려울 때 중도에서 죽었다. 같은 때의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더불어 학덕과 마음이 서로 맞아 세상의 사범이 되었다. 율곡은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에게 전하고, 사계는 아들인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정공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에게 전하였다. 신독재는 가학(家學)을 잘 계승 발전시켜 사계가 죽은 뒤에 우암과 동춘당이 스승으로 그를 섬겼다.

또 일찍이 수몽(守夢) 정엽(鄭曄)과 더불어 우계를 스승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신독재의 문인에는 문경공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兪棨)가 가장 이름이 드러났고, 수몽의 문인에는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구포(鷗浦) 나만갑(羅萬甲) 등 제공이 문장으로 일컬어 졌다. 우암과 동춘당은 효종(孝宗)의 존경과 총애를 받고 등용되어 인망이 매우 중하였고 우암 역시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자신의 책무로 삼았으나 효종이 승하하고 이어 숙종 때에 나랏일로 인하여 귀양가서 죽었다.

원래 우암의 문하에 문정공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고제(高弟)로 있었다. 그러다가 훗날 그의 아버지 미촌 윤선거의 비문(碑文) 일로 우암과 틈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파가 갈라진 유래이다.

문순공(文純公)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는 우암에게 수학하여 순수하고 독실하게 행하였다. 황강(黃江)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문인에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외암(巍巖) 이간(李柬), 봉암(鳳庵) 채지홍(蔡之洪), 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 관봉(冠峯) 현상벽(玄尙壁), 매봉(梅峯) 최징후(崔徵厚), 추담(秋潭) 성만징(成萬徵) 등 제인이 있으니, 이들을 강문팔학(江門八學)이라 하는데 모두 호중(湖中)의 학자들이다. 당시 낙중(洛中)에는 도암(陶庵) 이재(李縡),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등 제공이 있었으니 성기(性氣)의 분변으로 호락(湖洛)의 학파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기호(畿湖)의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통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기호에서 학문을 창도하였는데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용문(龍門) 조욱(趙昱), 유헌(遊軒) 정황(丁煌) 등 제공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으로 더불어 한 세상에 대치하여서 산림에서 강학하였다. 청송은 그의 아들 우계 성혼에게 전하였으며, 우계의 문인에는 신독재 김집이 있고, 신독재의 문인에는 미촌 윤선거가 있고, 미촌은 그 아들에게 전하였으니 바로 명재 윤증이었다. 명재의 문인에는 제안당(制安堂) 성지선(成至善), 상촌(橡村) 한영기(韓永箕),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일암(一庵) 윤동원(尹東源) 등 제공이있는데 이는 또 정암과 우계의 학파가 명재에 이르러 갈라져서 소론의 당파가 된 것이다.

율곡은 주자를 사숙하여 학문을 창도하여 사게에게 전하고, 사게는 우암에게 전하였으며 우암은 수암에 전하고 수암은 남당에게 전하였으며, 남당은 문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에게 전하였으니 이는 율곡의 연원이요, 호학(湖學)의 파로 그 당파는 노론이 된다.

근세의 이른바 유학계를 보면 기호는 후락의 학으로써 나뉘어 문호가 대치되었다. 문원(文原) 이우신(李友信), 그 아들 지산(砥山) 이민행(李敏行),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송내희(宋來熙)-자는 자팔(子八)이며 제주(祭酒)벼슬을 지냈다-. 문경공(文敬公) 화천(華泉) 이채(李采),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문경공 계운(溪雲) 김낙현(金洛鉉), 단번(檀樊) 윤치조(尹致祖), 명담(明潭) 윤병익(尹秉益), 영서(潁西) 임로(任魯), 송계간(宋棨幹)-송명흠(宋明欽)의 손자로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직순(金直淳)-김양행(金亮行)의 손자이다- 및 그의 아들 김인근(金仁根)-벼슬은 판윤(判尹)에 이르고 시호는 문경이다-, 수재(修齋) 송후연(宋厚淵),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병덕(趙秉悳)-시호는 문경이다-, 이민덕(李敏德), 박성양(朴性陽),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만주(兪萬柱), 운고(雲皐) 김박연(金博淵), 이동윤(李東允), 민치복(閔致福), 이교년(李喬年), 김재해(金載海), 강재건(姜在健), 유기일(柳基一) 등 제공은 혹 경연관(經筵官)으로 선발된 사람도 잇고, 혹은 대관(臺官)과 음사(蔭仕)로 이름이 드러났는데 유고(遺稿)가 있기도 하다. 최근 사람으로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운가(雲稼) 심기택(沈琦澤), 간재(艮齋) 전우(田愚)-자는 자명(子明)이다- 등 제씨가 있다.

호남에는 장헌주(張憲周), 만희(晩羲) 양진영(梁進永),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지평(持平)을 지냈다-, 기우만(奇宇萬) 등 제씨가 있는데 기우만은 바로 고봉(高峰)의 후손이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가학을 이어받았다.

영남에는 정헌(定軒) 이종상(李種祥), 정와(訂窩) 김대진(金垈鎭), 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서산(西山) 김흥락(金興絡),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유도성(柳道性), 장녹원(張祿遠), 이만도(李晩燾), 김도화(金道和), 장심택(張心澤), 곽종석(郭鍾錫),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등 제씨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가(古家)의 모범으로 경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관북지방에는 가실(可室) 주명상(朱明相)이 있고, 관서지방에는 운암(雲庵) 박문일(朴文一)-유일(遺逸)로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등 제씨가 모두 유가의 학행이 있는 선비들이다.

조선 중엽 이후로 오로지 문벌로 사람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초야(草野)의 선비는 묻혀 지내 일컬을 만한 사람이 없이 선비로 늙어 죽었다. 고가(古家)의 세족(世族)들은 헛된 이름을 숭상하고 당이 같으면 옹호하고 당이 다르면 공격하여 서로 싸웠다. 그래서 영남의 이른바 서애와 학봉이냐, 학봉과 서애냐 하는 위차문제(位次問題)로 논의가 분열하기에 이르러 병론(屛論) 호론(湖論)의 분파를 일으키게 하였다.

기호는 호락의 논쟁이 나누어진 데다가, 또 이른바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이 있어 유교계는 창검이 난무하는 싸움터로 변하였다. 호중에서도 역시 우암이 먼저냐, 동춘이 먼저냐 하는 선후의 다툼이 생겨 한 집안에서 풍파를 일으켰다. 아, 이는 성인의 세대로부터 멀어지고 어진 선비들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니 유교가 쇠퇴하고 정쟁(政爭)이 일어난 것이다.

당론이 분열된 이후 동서의 색목(色目)이 서로를 공격하고 시기하여 올바른 공론이 행해지지 못한 지 오래였다. 하물며 근래에는 벼슬하는 집안은 부귀를 누리고, 초야의 사람은 농촌에 묻혀서 더는 학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세상의 도의가 날로 비루해 지고 풍속이 날로 무너지게 되었다. 이러므로 그 사이에 혹 재질이 높고 아름다운 선비가 있어도 시대의 조류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원대한 목표를 싫어하여 피하고 절제와 검속을 싫어하여 이욕의 구덩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군자의 도는 남과 북의 거리보다도 더 멀어지게 되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자기 몸을 지켜 선을 행하는 선비마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 하늘이 우리 유학을 없애고자 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또한 가면 다시 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가 있어서인가. 대개 우리 조선의 유교는 조선 중엽 이전에는 사화로 인하여 참혹하게 짓밟혔고, 중엽 이후에는 붕당의 피해를 입어 스스로 결박당하였으며, 근세에 와서는 저절로 시드는 나무나 불 꺼진 식은 재처럼 점점 사라지고 스스로 부패하기에 이르렀다. 아, 조선의 유교가 그 본말이 대체로 이와 같을 뿐이니 회복되어 생기에 넘치고 왕성해질 날이 있겠는가?

<總論 原文>

朝鮮儒敎之興實自鄭圃隱先生始闡明性理之學爲吾東儒敎之宗然是宋儒程朱氏之學派也若夫堯舜禹湯傳授之學肇自箕聖明夷之敎化雖未畫闢鴻荒文明之敎其來久矣文獻無徵洪範八政之治規條理無從考稽然以支那史攷之

按范曄後漢書曰箕子遭衰世之運避地朝鮮施八條之約使人知禁色無淫盜門不夜扃柔謹爲風道義存焉省簡敎條而用信義其得聖賢作法之原矣涵虛子亦曰箕子率中國五千人入朝鮮其詩書禮樂醫巫卜筮之流百工技藝皆從而往焉旣至朝鮮敎以詩書使其知中國禮樂之制父子君親之道五常之禮敎以八條崇信義篤儒術釀成中國之風敎故曰詩書禮樂之邦仁義之國

據此篤儒術三字則儒敎之倡實自箕聖而始矣大易之象謂之箕子之明夷者不亦信乎歷千餘年而至于新羅之代崇奉神釋儒化未明中葉以後建國學尙經術稍稍知尊孔氏之敎如薛弘儒任强首崔文昌諸公皆以儒學名多雜乎文祠禪釋之間謂之醇乎儒者則未也高麗之興亦以佛敎爲宗間惑有文章經術之士羽翼斯文有如海州之崔文憲公興州之安文成公上黨之白頤齋丹陽之禹易東安東之權菊齋靈山之辛德齋及益齋李文忠諸公當異敎橫流之際獨以文學儒術擅謂之眞正醇儒則恐未敢知也雖然高麗之代適與宋氏濂洛閩時相値故麗季諸賢稍稍傳染於宋儒之學派而由來朝鮮之學術於是乎始變化矣

圃隱鄭先生講究程朱之書首倡性理之學自是吉冶隱親炙於圃隱之門傳承其道不幸値革命之世圃隱以身殉國임綱常之責冶隱終老金烏之下堅守志節兩賢皆把道以不得行于世而以其學傳之江湖金司藝江湖傳之于其子佔畢齋佔畢其門人甚繁啓寒暄金文敬公一蠹鄭文獻公以道學傳其他金濯纓兪雷溪諸公以文章傳金寒暄傳之于靜庵趙文正公實圃隱之嫡派也靜庵當中宗時以格致誠正之學有堯舜君民之志而金冲庵淨金老泉湜羽翼之將丕變風俗挽回世道己卯之禍忠良並戮士氣消沮人以理學爲諱仁廟嗣服黨禁始弛而晦齋李文元公修學於嶺南河西金文靖公倡學於湖南斯道復明仁廟遽崩明宗初元復有乙巳之禍斯文之厄極矣

退溪李文純公尊師考亭硏究諸子爲百世之師宗而目擊乙巳諸賢之禍無意世途一事謙退唯以講明斯道爲己任實朝鮮儒學界之集大成也故其門弟甚盛如寒岡鄭文穆月川趙文敬鶴峯金文忠西厓柳文忠高峯奇文憲諸公皆傳道受業蔚爲一世儒賢寒岡傳之于眉叟許文正公西厓傳之于愚伏鄭文莊公旅軒張文康公私淑退溪與寒岡並爲一世之師表旅軒傳之于金鶴沙應祖趙澗松任道柳修巖袗鄭守庵四震諸公皆以儒術著嶺南自鄭圃隱始吉冶隱江湖金佔畢金寒暄鄭一竇李晦齋李退溪鄭寒岡張旅軒鄭愚伏諸賢輩出以道學相傳圃隱首倡之爲儒學之宗至退溪以尤闡明焉爲百世師範自是厥後嶺南儒賢皆其淵源也

宣廟初元栗谷李文成公起自關東溯究朱子之學而講明斯道私淑靜庵而儒挽回世道之志不幸値艱虞之際中道而歿同時與牛溪成文簡公同德同志爲世師範栗谷傳之于沙溪金文元公重峯趙文烈公沙溪傳之于其子愼獨齋文敬公及尤庵宋文正公同春宋文正公愼齋克世家學沙溪歿尤庵同春事之以師又嘗與鄭守夢曄師成牛溪愼齋之門尹美村兪市南最著守夢之門申東淮翊聖李白洲明漢羅鷗浦萬甲諸公李文章稱尤庵同春堂孝宗朝尊寵登庸期望甚重而尤庵亦自任以尊華攘夷之責及孝廟昇遐以邦事被鼠而歿先是尤庵之門有尹明齋爲高弟後以其父美村尹文敬公墓文事遂貳於尤庵此老少論黨派分裂之所由始也遂庵權文純公學于尤庵純實篤行敎授于黃江其門人有韓南塘元震尹屛溪鳳九李巍岩柬蔡鳳岩之洪李華巖頤根玄冠峯尙壁崔梅峯徵厚成秋潭萬徵諸人號稱江門八學皆湖中學者時洛中有李陶庵縡金三淵昌翕朴黎湖弼周諸公以性氣之辨湖洛之派所由分也

畿湖趙靜庵承金寒暄之統始倡學于畿輔而成聽松守琛李灘叟延慶趙龍門昱丁遊軒煌諸公皆登其門與徐花潭敬德並峙一世而講學山林聽松傳于其子牛溪文簡公牛溪文人有金愼齋愼齋文人有尹美村美村傳之其子拯卽明齋尹文正公也明齋文人有成南坪至善韓漁村永其朴定齋泰輔尹一庵東源諸人此又靜庵牛溪之學系而至明齋分爲少論之黨派

李栗谷私淑朱子而倡學焉傳之金沙溪沙溪傳之宋尤庵尤庵傳之權遂庵遂庵傳之韓南塘南塘文人宋剛齋穉圭此栗谷之淵源而湖學之派其目爲老論

近世所謂儒學界畿湖則以湖洛之學分峙門戶而李友信(號文原)其子砥山敏行著庵兪漢雋宋來熙(字子八官祭酒)李采華泉諡文敬宋達洙(守宗齋)任憲晦(鼓山)金洛鉉(溪雲諡文敬)尹致祖(檀樊)尹秉益(明潭)任潁西魯宋棨幹(明欽孫諡文敬)金直淳(亮行孫)及其子仁根(官至判尹諡文敬)宋厚淵(修齋)宋秉璿(淵齋諡文忠)趙秉悳(文敬公)李敏德朴性陽李象秀(文堂諡文簡)兪萬柱金博淵雲皐)李東允閔致福李喬年金載海姜在健柳基一諸人或以抄選經筵官或以南臺蔭仕著稱亦有遺稿最近有崔益鉉沈琦澤雲稼田愚字子明號艮齋諸氏湖南則有張憲周梁進永(晩羲)蘇輝冕(仁山持平)奇宇萬諸氏宇萬卽高峰之後蘆沙之家學

嶺南則有李種祥(定軒)金訂窩垈鎭柳徽文(好古窩)柳疇睦(溪堂)金興絡(號西山)張福樞(四未軒)李震相(寒洲)權璉夏(頤齋)柳道性張祿遠李晩燾金道和張心澤郭鍾錫錫英(晦堂)諸氏俱以古家模範立脚於經學關北則有朱明相(可室)關西則有朴文一(雲庵逸執義文憲公)諸氏皆儒家操行之士也叔季以來專以門閥取人故草野之士多湮沒無稱老死布褐古家世族崇尙虛名黨同伐異或同室操戈拳踢相加如嶺南之所謂匪鶴鶴厓先後之爭競至破裂論議致有屛論虎論之分派畿湖湖絡之論分而又有所謂時僻詩壁之黨儒界化爲劒戟之場無湖中亦有尤春春尤先後之爭同堂之內激起風波嗚呼世遠人亡儒敎衰矣政爭起矣

自黨論分裂之後東西色目互相撕捱自相猜疑公論之不行久矣況挽近仕宦之家酣豢富貴草野之人埋沒農圃不復知學問之事世道之日下風俗之日壞職此之故間或有才高質美之士而不能自拔於流俗避遠標榜厭惡拘檢歸於利欲窠臼中其視君子之道不啻朔南之相去繼往開來之學尙爾無論獨善自修之士亦不可得見嗟夫天豈欲喪斯文耶抑亦有無往不復之理耶盖我鮮之儒敎中葉以前斬伐於士禍之慘中葉以後梏喪於朋黨之害至于近世如自梏之木無火之灰消沮凘爍自底腐敗嗚呼朝鮮之儒敎如斯己矣未知有恢復生旺之日耶

(3) 유교란 어떤 것인가(儒敎者辨)

위암은『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의 말미(末尾)에「유교란 어떤 것인가(儒敎者辨)」라는 제목으로 유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붙여 놓았다.

유교란 어떤 것인가?

《주례(周禮)》태재지직(太宰之職)에, “유(儒)는 도로써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하였고,《설문(說文)》에 이르되 “천(天)ㆍ지(地)ㆍ인(人)을 통달한 것을 유(儒)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유(儒)를 어찌 쉽게 말하겠는가?

《예기(禮記)》〈유행(儒行)〉편에 공자가 애공(哀公)의 물음에 답하여 말하기를, “박학(博學)하여 궁하지 않고 독실하게 행하여 게을리 아니하며, 유심(幽深)한 데 있어도 음란하지 않고, 상통(上通)하여 박히지 않으며, 어진 이를 존모(尊慕)하고 여러 사람들을 포용하며, 모를 다듬어(毁方) 화합한다.”고 하니 노그럽고 넉넉함이 이와 같음이 있다. 또 말하기를, “유자(儒者)는 내칭(內稱)할 것이 있을 때는 친한 것을 피하지 않고, 외거(外擧)함에는 원망을 피함이 있으며, 공적을 닦고 일을 쌓으며, 어진 이를 추천하여 진달(進達)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유가(儒家)는 음양을 따르고 교화를 밝힌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육예(六藝)의 글을 널리 배워 천도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하며,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는 성법(成法)인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니, 유자의 학문이란 본래 이와 같은 것인, 어찌 일찍이 명예나 벼슬을 꾀하는 마음이나, 편당을 세워 사계(私計)의 영위를 꾀하는 모습이 근세에 명색이 소위 산림학자(山林學者)라는 따위들 같겠는가? 장주(莊周)는 말하기를, “유(儒)는 시(詩)와 예(禮)로써 발총(發塚)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유(儒)를 비방한 말이다.

그러나 유학을 빌려서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는 자는 어찌 발총의 기롱(譏弄)을 면할 수 있겠는가?《논어(論語)》에 말하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는 되지 말라.”고 하였는데 공안국(孔安國)이 주석하여 이르기를, “군자는 도를 밝히려 하고, 소인이 유자가 되면 그 명예를 자랑한다.”고 하니, 아아, 세상에 참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유자가 많도다.

혹자가 말하기를 노(魯)나라는 유교를 썼기 때문에 쇠퇴하였다는 말이 있는 것을 양자(揚子)가 이미 자세히 분변하였다고 한다. 시험삼아 보건대 송대(宋代)에는 유현(儒賢)이 배출되고 도학이 크게 일어났으니 실로 삼대(三大) 후로 문명이 가장 성대하였다. 그럼에도 마침내 금(金), 원(元)이 침공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고, 마침내 중국이 망했으니 유자(儒者)의 효용(效用)이 어디에 있는가?

또 조선으로 말하더라도 신라와 고구려시대에는 모두 불교를 숭상하고 유학은 밝지 않았는데도 그런 때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게 잘살아 혹은 1천년 혹은 8백년이나 국권을 유지하였으며, 고려의 왕씨(王氏) 또한 불교를 존숭하여 받들기를 유교의 갑절이나 하였는데, 한번 송유(宋儒)들의 학문이 들어옴으로부터 본국의 교화가 반드시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이렇다하게 소란을 진정하지도 못하고 쇠약한 것을 일으켜 회복하지 못하였다.

우리 조선이 고려를 대신하여 일어나서 성군(聖君)과 어진 신하가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학을 중히 여기며, 초야에 있는 유학의 선비도 누구 할 것 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존상(尊尙) 장려하였으므로 유교가 빈빈(彬彬)하게 일어나 전고에 없이 발달하여 저 송나라 유교의 왕성함보다도 오히려 지나쳤으니 참으로 극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요순시재와 같은 이상적인 다스림을 이루지 못하고, 국세는 도리어 쇠약해져서 오늘 같은 형세에 이르렀으니 어찌된 것인가? 이 어지 유(儒)를 써서 노를 쇠퇴하게 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 어찌 유교의 지이겠는가? 양자가 말하기를, “노나라는 진유(眞儒)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만일 진유를 썼다면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고려의 멸망은 유교의 잘못이 아니라 왕씨의 자멸이니 비록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등의 제현(諸賢)이 있었다고 하지만, 큰집이 이미 기울어진 시기를 당하여 한 손으로 어떻게 능히 떠받쳐 지탱하겠는가?

우리 조선이 쇠약한 데 이른 것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노나라에서 진유를 쓰지 않았기 때문과 같다는 것이다. 사화(士禍)의 참혹함과 붕당의 폐해는 이미 앞에 말했거니와, 연산군(燕山君)의 무신년 이래로 이름있는 유학자가 어느 시대에고 없지 않았지만 일체 형옥에 걸려들어 화액을 입고 불우함 속에 곤박되어 제대로 마지막을 맞은 사람이 거의 없으니, 또 하물며 당파가 분열된 이후로 한가지로 합심단결하여 국사를 처리해 나가려는 자가 있었겠는가?

공자의 이른바 어진 이를 사모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며, 모난 것을 없애고 화합하는 자는 널리 한 시대에 구해 보아도 얻지 못하였다. 율곡의 현명함으로도 동서(東西)의 당쟁(黨爭)을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영조(英祖)의 성명(聖明)으로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을 탕평(蕩平)하려고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니, 전현의 이른바 오래도록 선한 정치가 없는 것은 어찌 붕당의 해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것이 어찌 유교가 그렇게 한 것일까. 실은 바로 정치가 점차로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또 유교의 이름을 빌려 세상을 속이고도 아닌 듯이 위장하여 부끄러운지조차 알지 못하는 자의 죄이다. 이는 다만 선왕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바로 공맹(孔孟)의 죄인이거늘, 이것을 가지고 유교를 죄책하면 유교가 어찌 이를 수긍하겠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도가 궁하면 자기 한 몸이나마 처신을 잘하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면 천하와 함께 도를 잘 행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선비가 처세함에 있어 몸을 닦고 어진 말을 세워 선각자로서 후각자를 깨닫게 하는 것이 궁곤에 처하는 도리요,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여 은택이 생민에게 미치는 것은 그 지위를 얻은 일이니, 유교의 도술이란 이러할 따름인가 한다.

<儒敎者辨 原文>

儒敎者何也周禮太宰之職儒以道得民者說文去通天地人曰儒儒豈易言乎哉禮記儒行孔子對哀公問曰博學而不窮篤行而不倦幽居而不淫上通而不困慕賢而容衆毁方而瓦合其寬裕有如此者又曰儒有內稱不避親外擧有避怨程功積事推賢而進達之故漢書云儒家者流順陰陽明敎化又云博學乎六禮之文所以明天道正人倫致至治之成法者儒者之學本如是矣曷嘗有釣名巧宦之心樹黨營私之計如近世所謂山林學者者哉莊周曰儒以詩醴發塚憤此世排儒之言然假儒學而欺世盜名者惡得免發塚之譏歟論語曰汝爲君子儒無爲小人儒孔安國註以爲君子將以明道小人爲儒則矜其名嗚呼世固多矜名之儒矣

或有言魯以用儒而削揚子早己辨之祥矣試觀宋代儒賢輩出道學蔲興實爲三代後文明之最盛而卒致金元凌夷天下大亂神州陸沉儒者之效用安在哉且以朝鮮言之新羅高句麗之代皆崇尙佛敎儒學未明時則國富兵强境內安堵歷年或一千或八百高麗王氏亦尊奉釋敎倍加儒術一自宋儒之學輸入本國敎化未必加明騷亂未能鎭定萎蘼不振我鮮代興聖君良弼崇儒術重道學草野儒學之士不網羅登庸尊尙獎勵斯文之振興治彬彬然度越前古駕軼有宋儒敎之盛可謂極矣奈何未能做堯舜君民之治國勢反芻於衰微至于今日何哉此豈非用儒魯削之驗歟

嘻是豈儒敎之罪也楊子曰魯不用直儒故也如用眞儒則無敵於天下麗社之邱墟非失儒也麗氏之自滅也雖有圃冶諸賢當大廈己傾之日隻手而焉能拱持乎至若我鮮之衰微所謂魯不用眞儒之故也士禍之慘朋黨之害旣述之於前矣自燕山戊申以來名儒弘碩代不乏人一切罹於刑獄困於坎坷能令從者鮮矣又况黨派分裂之後有能同寅協恭共推一車子之想者耶孔子所云慕賢而容衆毁方而瓦合者滔滔一世求之不得矣以栗谷之賢而欲調停東西而不能焉以英廟之聖而欲蕩平老少而不得焉前賢所謂百年無善治者豈非朋黨之害歟是豈儒敎之使然也實乃政治之馴致也抑又假儒名而欺世主靨然不知爲耻者之罪也是非但先王之罪人卽孔孟之罪人也以此而罪儒敎則儒豈首肯乎哉孟子曰窮則獨善其身達則兼善天下皆士之處世修身立言以先覺覺後覺居窮之道也立身行道澤被生民者得位之事也儒敎之術如斯已矣乎

8. 결론

장지연 선생을 우리는 단순하게 일제강점기 때 언론을 통해서 항일운동을 하신 독립운동가로 보아 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시절에 계몽운동을 펼친 산생의 가슴에는 어려서부터 연마해 온 도도한 유학의 흐름이 있었다. 선생은 평생을 유학연구에 몰두해서 이에 관련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래서 선생의 사람을 평가할 때, 독립운동가보다는 유학자로 보아야 한다.

선생은 성리학과 실학을 토대로 하는 전통유학자에서 다시 개화와 자강을 주장하는 계몽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유학의 혁신, 더 정확히 말하면 유학자의 의식개혁을 촉구하면서 사상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한 개혁운동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주된 논리는 여전히 원시유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애국계몽가로 활동할 당시에도 선생은 유학전통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생의 유학연구는 생애의 후기에 총체적으로 결집되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생의 한국유학연구는 유학전통을 근대적 방식으로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선생은 근대적 의미에서 유학연구의 초석을 놓았으며, 유학연구의 객관화ㆍ전문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유학연구는 전통유학에서 강조하는 주체적 인식론과 수양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부정적인 요인도 없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유학연구와 주체적인 유학적 가치의 실천은 때에 따라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유학연구에 중심을 둘 때 자연히 수양론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유학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다시 정리하면, 선생은 근대라는 변화의 시대속 에서 경세적 활동을 통하여 유학정신의 실천에 앞장섰으며, 자신의 시대적 실천무대인 국가가 사라지고 나자 다시 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우리의 사상적 전통을 알리는데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