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24호. 상주인(尙州人)의 구국(求國) 정신

빛마당 2015. 3. 28. 22:08

상주인(尙州人)의 구국(求國) 정신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曺 喜 烈

목 차

1. 사량벌국(沙梁伐國)의 멸망과 국가부흥 운동148

2. 당교(唐橋)의 전설과 나당(羅唐) 전쟁152

3. 몽골 자랄타이(車羅大)의 상주 침입과 상주성 전투

156

4. 난계 김득배 선생의 홍건적 토벌158

5. 임천석(林千石)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159

6. 임진왜란을 통해 드러난 상주인의 구국 정신161

7. 독립운동162

8. 나오며168

상주인(尙州人)의 구국(求國) 정신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曺 喜 烈


 가족과 조상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애향심이 남다르고, 애향심이 있는 사람은 애국 애족심이 강하다. 잘못된 애향심은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건전한 애향심은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일이다.

‘나는 애향심이 있다. 애국심이 있다.’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평상시 그 정도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마음가짐은 위기(危機)를 맞으면 제대로 드러난다.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 역시 위기 때 그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개개인의 마음가짐도 그러하지만 집단의 마음가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상주인들이 국난(國難)을 당할 때마다 국난 극복을 위해 어떻게 참여하고 대처했는지의 형편을 살펴 상주인의 구국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주정신(尙州精神)’이 어떻게 생겨나 어떻게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해 보고자 한다.


1. 사량벌국(沙梁伐國)의 멸망과 국가부흥 운동

기록상 상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을 통해 짐작한다.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 아달라(阿達羅) 이사금(尼師今) 三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계립령의 길을 열다. (156년 4월 미상 음력)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鳥嶺) 동쪽을 말하는데,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마목현(麻木峴), 마골점(麻骨岾) 등으로도 불렸다. 신라가 이 시기에 계립령을 열었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남하 중이던 진한계(辰韓系) 석씨 족의 활동으로 보거나(천관우,『고조선사 · 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96~297쪽),

그 주체를 사로국(斯盧國)이 아닌 사벌국 (沙伐國)이나 그 부근의 유력한 집단의 정치적 · 군사적 활동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형우,『신라초기국가형성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200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189쪽).

이와 달리 그 주체를 신라로 인정하면서 한강 유역과의 교통로를 열었다는 제한적인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서영일,『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1999 한국교육학술정보원, 193쪽)〕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석우로(昔于老) 사량벌국을 토벌하다.

〔「옥산서원본 1537년 보물 제525호」「성암본 보물 제722호」「정덕본 1512년 보물 제723호」첨해왕(沾解王)이 재위하였을 때, 사량벌국 (沙梁伐國)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갑자기 배반하고 백제로 돌아갔다.〈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사량벌국을〉토벌하여 멸망시켰다.〕

〔현재의 경북 상주시이다. 사벌국(沙伐國)으로도 칭해졌다(정구복 외,『역주 삼국사기』4 주석 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740쪽).〕

〔첨해(沾解)로부터 2대 후인 유례왕(儒禮王) 14년경에도 청도에 있던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내침(來侵)하였다는 것을 들어 이를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이병도,『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한국교육학술정보원, 665쪽)도 있다(정구복 외,『역주 삼국사기』4 주석 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740쪽).〕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 유례(儒禮) 이사금(尼師今) 十年春二月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293년 2월 미상 음력)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9년(292)조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왜(倭)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에 쳐들어 왔고, 다음 해 사도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도성의 위치는 왜군의 주요 침입 루트였던 경주 동쪽 일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성의 위치를 경북 영덕으로 본 견해가 있다(이병도,『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83 한국교육학술정보원, 46쪽).『삼국사기』권34, 지리1 상주(尙州)조에 따르면, 첨해왕 때에 사벌국(沙伐國)을 빼앗아 주(州)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사벌국을 지금의 경북 상주로 비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법흥왕(法興王) 十二年春二月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다 (525년 2월 미상 음력)

〔『삼국사기』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상주(尙州)조에는 첨해왕(沾解王) 때 사벌국(沙伐國)을 빼앗아 주(州)로 삼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로 비정하고 있다.]

위 기사를 종합해 보면 학자들 중 일부는 156년 4월 이미 사량벌국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량벌국의 건국 시기를 알려주는 어떤 자료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멸망 시기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이견(異見)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시기를 첨해왕 재위시기(247∼261)로 보는 것이다.

293년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폐허가 된 사도성(沙道城)을 다시 쌓고, 사벌주 호민(豪民) 80여 가를 이주(移住)시킨 것으로 전한다. 서라벌을 방어하는 성에 외동읍 모화리를 중심으로 동으로 삼태봉, 서쪽으로 두동면 지역에 이르는 관문성이 있는데, 서쪽은 ‘사량부’의 영역으로 사도부라고도 하였으므로 사도성은 사량부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사도성이 경북 영덕에 있었다는 설도 있어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떻든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사벌주의 호민 80여 호를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살기가 어려운 사도성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사벌주의 호민 80여 호를 이주시켰을까?

당시에도 사벌주는 비교적 사람이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 지금의 상주시 낙동면 신상리에서 약 20만 년 전까지 상한(上限)하는 구석기 시대 유적지가 국도를 개설하면서 발견되어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 당시의 생활방식에도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비록 먼 훗날의 일이기는 하지만 889년(진성여왕 3)에는 원종ㆍ애노가 일으킨 농민 봉기도 있었다. 잦은 정쟁(政爭)과 귀족들의 사치(奢侈)와 향락으로 농민은 점점 궁핍해 지고 있는데, 중앙정부는 지방의 주ㆍ군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텅 비고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사자(使者)를 파견해 오히려 조세(租稅)를 독촉하였다. 이러한 조세 부담은 피지배층인 일반 농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바로 사벌주를 근거로 해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그것은 당시 사벌주가 비교적 비옥하여 다른 지방보다는 세금 징수가 쉬웠다고 생각한 중앙 정부의 압력이 특히 거셌을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좋은 환경을 가진 곳에 건국한 사량벌국이 멸망하고 난 뒤, 사벌 사람들은 그대로 신라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국가 부흥운동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지도계층을 백성들과 떼어 놓을 필요성을 느껴 사벌주 호민 80여 호를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살기 힘든 사도성으로 강제 이주 시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 날 상주시 지역 지도자급 80여 가를 다른 곳으로 보내도 상주지역 발전에 문제가 발생할 것인데 하물며 이 당시에는 어떠했을는지 그 결과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듯 사벌국 멸망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나라가 멸망하면서 강력한 조세 독촉에 시달리거나 살기 힘든 먼 곳으로 강제 이주되는 비운을 겪었다. 아마도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나라의 중요성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것이다. 당시 나라라고 해봐야 지금의 상주 영역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이것이 지금의 향토애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2. 당교(唐橋)의 전설과 나당(羅唐) 전쟁

경북 상주시와 문경시 사이에 ‘떼따리〈당교(唐橋)〉’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다. 옛 사람들은 주로 ‘떼다리’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당교(唐橋)’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당교’라는 땅 이름이 생기게 한 사건이 일어났던 신라시대 당시 이 지역 일대는 상주(尙州)〈사벌주〉의 영역이었지만 지금은 ‘당교’ 지역이 문경시와 상주시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사이의 도랑 위에 다리<橋>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당교’를 이 다리 이름으로 알고 ‘다리<橋>’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다리<橋>’가 아닌 ‘달<땅, 地>’이기 때문이다. 즉, ‘떼다리’가 아니라 ‘떼달’인 것이다.

‘떼’는 ‘떼 놈’이라는 말에서 보듯 중국을 의미하는 말이고, ‘달’은 ‘땅’을 의미하는 옛 우리 말이다. ‘달’은 지금도 일부 말에 남아서 사용되고 있는데 ‘양달’과 ‘응달’이 그것이다. 양달은 햇빛이 드는 땅이고, 응달은 햇빛이 들지 않아 그늘진 땅을 이르는 말임을 누구나 다 잘 안다.

그러면 ‘떼달’이 어떻게 해서 ‘떼다리’가 된 것일까?

‘떼(唐)+달=떼달’은 말 끝에〈語尾助辭〉‘-이’가 붙어서 ‘떼(唐)+달=떼 달+이=떼 달이→떼다리’가 되었다. ‘떼’는 ‘당(唐)’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고, ‘달’은 땅<地>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이렇게 생겨난 ‘떼다리’라는 우리 말 땅이름이 한자로 기록하면서 ‘떼다리→당교(唐橋)’로 변한 것이라 수십 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떼다리’와 ‘당교’는 비슷한 빈도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 사용되었었다.

신라 경덕왕 <757년>은 순 우리 말로 불려오던 땅이름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어 한자로 옮겨 적게 했다. 이 때 어떤 이름은 한자의 음(音)을 빌어서 기록했고, 어떤 이름은 뜻을 빌어서 땅이름을 기록하면서 ‘떼다리’의 ‘떼’는 뜻을 빌어 ‘당(唐)’으로 ‘달’은 이미 ‘다리’로 변했으므로 뜻을 빌어 ‘교(橋)’로 기록하면서 ‘당교(唐橋)’가 된 것이다.

그 예로 경주 월성(月城)의 ‘월(月)’은 ‘달<地>’의 뜻을 빌어 ‘月’로 옮겨 기록한 것이고, 대구 달성(達城)의 ‘달(達)’은 ‘달<地>’의 음을 빌려 ‘達’로 기록한 것이다.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윤직리에 당교리(唐橋里)․쌍화리(雙花里)․두산리(頭山里)․용지리(龍池里)․영순면의 달산리(達山里) 일부․호서남면의 모전리(茅田里) 일부를 병합해서 상주군 함창면에 편입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원윤직리와 떼다리․쌍화․두산은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에 두고, 윤직리 일부와 용지리․모전리의 다방 터를 문경시에 편입시켰다. 그래서 신라가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들을 격멸했던 옛 ‘당교’는 상주시와 문경시 양쪽 모두가 나누어 가진 셈이다.

인공위성 지도를 통해 이 지역을 들여다보면 당시 당나라가 군사를 왜 이 지역에 집결시켰는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왜 이 지역에 주둔하여 후방기지를 만들었는지를 누구나 짐작할 수가 있다. 들 가운데 산으로 들러 싸인 곳이라 방어에 매우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교(唐橋)’는 ‘양의 탈을 쓴 이리’였던 당나라가 신라와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이제 그들의 마지막 목적인 신라 점령을 달성하기 위해 소정방의 지휘로 군사를 남하시켜 집결시킨 집결지이면서 신라 공격의 전초기지였다.

당나라의 이러한 야욕을 일찍이 알아차린 김유신 장군이 동맹군을 위로 한다는 구실로 위로연을 베풀었고, 이때 ‘짐(鴆)’새의 깃털을 넣어 만든 술을 먹여 모두 취했을 때 총 공격하여 소정방과 그가 지휘하는 최 전방 공격 부대를 전멸시켜 버린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형편은 이러한 사실을 군사 비밀로 간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라의 국력이 아직 당나라 군사를 대적할 만큼 강세하지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8년간의 긴 전쟁을 시작했다. 신라는 이 전쟁에 지면 삼한통일의 꿈은 커녕 나라의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강력한 저항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진출한 당나라 군사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는 데다가 북방민족이 중국 본토를 공격함에 따라 당군(唐軍)이 모두 철수하면서 나당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중국 측 기록에도 우리 측 기록에도 소정방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전하는 것이 없고, 소정방의 무덤조차 전해 오지 않는다. 바로 상주 땅 당교에 묻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교’는 ‘다리<橋>’이름이 아니라 ‘떼’의 군사가 머물던 ‘땅’, 또는 ‘떼’의 군사를 죽여 묻은 땅이다.

그렇다면 김유신 장군은 비밀리에 움직이는 당나라 군사의 당교 집결과 숫자 등의 정보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건 당연히 상주민의 제보였을 것이고, 연회를 위한 모든 음식이나 관련 준비 역시 상주민의 몫이었을 것이다. 당교의 당나라 군사를 공격할 김유신이 이끄는 군사 역시 멀리서 인솔해 온다면 당연히 당나라 장수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므로 성공 가능성은 떨어진다. ‘동맹군을 위한 위로연’이라는 행사 자체가 의심 받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지인이 이 작전에 동원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그 현지인은 대부분 상주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대 사건의 뒷정리와 끝까지 비밀로 간직하여 당나라 조정이 알지 못하게 한 것 역시 상주민의 나라 위한 마음과 지휘관과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3. 몽골 자랄타이(車羅大)의 상주 침입과 상주성 전투

지금도 우리나라를 전 세계인들이 고려(Korea)라고 할 만큼 우리 역사상 고려는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기는 했지만 몽골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는 데는 무력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외교력으로 버틸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그러자니 몽골의 부마국(鮒馬國)이니, 공녀(供女)니 하는 말들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고, 불심에 의지하여 나라를 지켜보겠다는 몸부림이 팔만대장경판 제작으로 나타나기도 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교력은 한계가 있어 잦은 침입을 받았고, 그때마다 많은 백성들이 죽고, 모든 재산은 약탈당하거나 불타 버리는 지경을 당해야만 했었다.

몽골 군대는 1218(고종 5)년부터 고려 영토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의 요구에 따라 군량미를 보급하거나 공성전(攻城戰)에 군사 지원을 해야 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안겨주기 시작하더니, 1231(고종 18)년부터 1259(고종 46)년까지는 약 11회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그 중 몽골군이 상주를 통과하였거나 통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몇 번 있었는데 1232(고종 19)년 8월 침공하여 12월 16일 살례탑이 처인성에서 사살되어 회군하지만, 부인사 소장 대장경판이 소실된 것으로 보아 그 별동대는 이미 팔공산까지 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분명 상주를 거쳐 갔을 것으로 보인다.

1233(고종 20)년 윤 7월 15일 홍복원을 향도로 하여 고려를 침공했을 때는, 9월에 선봉부대 일부가 안동을 거쳐 9월 22일 해평까지 도달하여 고려 집정자 최우가 파견한 이유정의 병력 160명을 전멸시키고, 경주 방면으로 향했다. 기록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들이 상주를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고려사』고종세가(高宗世家)에 기록하기를『삼국유사』에 1238년(고종 25년) ‘동월(冬月) 몽고의 병화로 탑과 장육존상(丈六尊像)과 전우(殿宇)가 모두 불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해 10월, 경주의 황룡사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불에 탔고, 이듬 해 4월에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1247(고종 34)년에도 경상진안동도 안찰부사 전광재가 쓴 ‘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에 의하면 몽골군이 경주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1254(고종 41)년 7월 22일 자랄타이(車羅大)가 군사 5천으로 고려를 침입했는데 9월 14일 충주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그대로 남하하여 상주를 향했다. 당시 상주 백성은 2곳의 성으로 피난을 했다. 10월 19일 몽골군은 그 중 상주관민(官民)이 피난한 상주 서쪽 70리 지점의 상주산성을 공격했지만 황령사 승 홍지의 지휘로 상주관민이 합심하여 물리쳤다. 이 싸움에서 실패하여 상주에서 철수한 몽골군은 그해 12월 단계까지 진출하면서 20만 6천 8백 여 명의 포로를 잡아 돌아갔다. 이로보아 상주성 공격을 실패한 이들이 상주를 잿더미로 만들지 않고 순순히 물러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1255년에도 몽골군은 10월 2일 대원령을 넘어 이듬 해 4월 7일 현풍현에 나타났다. 4월 29일 이들은 또 다시 충주성을 함락했으니 침공로에는 분명 상주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254년 몽골군의 상주 침공이다. 고려 정부의 군사 지원없이 오직 상주의 관민(官民)만이 승려와 힘을 합하여 단계(丹溪)까지 쳐 내려 갈 만큼 강세한 몽골군을 막아낸 것이다.


4. 난계 김득배 선생의 홍건적 토벌

1361(공민왕 10)년 홍건적 괴수 반성․사류․관선생․주원수 등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했는데 이때 상주인 김득배는 도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복주까지 피난해야 하는 등 나라가 대위기에 처했지만 총병관 정세운을 비롯한 안우․이방실․황상․한방신․이여경․김득배․안우경․이귀수․최영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공(戰功)을 시샘한 김용이 교지(敎旨)를 위조해 총병관 정세운과 안우와 이방실을 죽이고, 김득배와 박춘을 산양에서 체포한 다음 김득배를 참수하여 상주에 효수했다. 이때 어느 누구도 겁이나 김득배의 억울한 주검을 장사지내지 못했지만 정몽주(鄭夢周)가 공민왕에게 간청하여 상주 남쪽 10리 지점 어느 곳에 장사했었다. 이 전투에는 김득배의 아우 김득제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비록 전쟁이 끝나고 왕에게 전승보고도 하기 전 간신에 의해 처참한 죽임을 당하기는 했지만,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나라를 구한 전공(戰功)은 상주인의 긍지로 남을만 하였기에 후세에 길이 자랑으로 전할 만 한 것이었다.


5. 임천석(林千石)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

고려 말 악공으로 임천석이 있었는데, 그의 가계와 출신지에 대한 정보는 알지 못하지만『조선왕조실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선천(宣川)의 지인(知印) 김철현(金鐵賢)이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심하(深河)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무너지고 화살이 다 했습니다. 그러자 응하가 철현에게 ‘너는 떠나거라.’ 하니,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어찌 떠나겠습니까. 칼을 물고 자결하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그 뒤 응하의 사당을 의주(義州)에 세웠을 때 철현을 무하(廡下)에 배향하였으나 병자년의 난리에 사당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 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당시 상주에는 두 곳의 화산(華山)이 있었다. 하나는 청화산(靑華山)이고, 다른 하나는 백화산(白華山)이다. 이 중 어느 화산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해오는 지명이나 전설로 보아 백화산으로 추정한다. 고려의 국운이 저물어가는 것을 깨달은 임천석이 찾아 은거한 곳은 수도(首都)인 지금의 개성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상주이다. 굳이 깊은 산 중이나 경관이 뛰어난 곳을 찾는다면 상주까지 오지 않는다 해도 얼마든지 마땅한 장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상주까지 찾아 온 것을 보면 분명 상주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식을 상주인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임진왜란을 통해 드러난 상주인의 구국 정신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한 임진왜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방 중의 하나가 상주이다. 조선의 중앙군이 처음으로 전투라는 이름으로 전투를 벌인 곳도 상주이지만, 상주를 점령한 왜군이 보급품 마련과 보급로 확보를 위해 상주에 주둔하면서 깊은 산곡 간까지도 분탕질을 했기 때문이다.

상주에서 왜군과 전투가 벌어지기 훨씬 이전 화동 판곡의 김준신 공은 상주목사에게 방어책을 제시했고, 그 까닭으로 태평성대에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죄목으로 갇히기까지 했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관군을 인솔하여 칠곡의 석전까지 진출한 것은 물론, 상주로 귀환한 후에도 북천전투에 참전하여 전사를 하면서 조선 최초의 의사로 추앙받았다.

조선의 중앙군이라 불리는 군사 역시 실제적 중앙군 수는 불과 60여 명이었고, 선산인 찰방 김종무 공이 인솔해 온 100명 가량의 사근도 역졸을 제외하면 나머지 3/4의 병력은 모두 상주인이었다.

사실상의 상주 최초의 임진란 의병(義兵)은 군진(軍陣)의 이름도 없고, 당국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활동을 하긴 했지만 낙동 화산의 김안절이 모집한 100명 남짓한 의병이었다. 이 의진을 이끌고 북천 전장으로 출전한 이는 김일 의사이시다. 그는 임진년 5월 17일 상주북천으로 나아가 엄청난 무기 성능과 군사 훈련의 수준으로 보아 분명 패전할 것임을 충분히 짐작했을 뿐 아니라 주위의 만류까지 뿌리쳐 가며 출전하여 모두가 전사했다. 그 이후 상주인들은 의병진인 창의군 · 상의군 · 충보군을 조직하고, 북진한 왜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왜군이 보급품 조달이 어려워 결국 남해안으로 후퇴해야 하는 원인 제공을 했다.

정기룡 장군이 상주성 탈환전을 펼칠 때도 참전한 군사는 군사훈련 한 번 받아본 적이 없고, 활이나 칼 등의 무기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약 400명의 상주 백성이었다. 이 전투에서 성공한 다음 정기룡 장군은 우선 상주 전투에서 순국한 장졸들의 장사를 지냈다. 그때까지 주검들이 여름 더운 날 4개월 여 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장사한 그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충렬사가 처음 세워진 장소가 아니었을까 한다.

약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나고, 상주인들은 난리 통에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미안한 듯 북천전장에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충열사를 세워 향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긴 전쟁으로 살아가기가 모두 무척 힘든 상태에서 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7. 독립운동

우리나라가 일본을 선공(先攻)한 일은 없었지만 일본이 우리나라를 괴롭힌 것은 문헌상으로 이미 신라 때 왜구가 사도성을 공격하여 사벌주 호민 80여 호를 이주 시킨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때에 와서는 나라가 위기를 맞을 만큼 점차 그 정도가 심해지다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일으켜 겨우 물리쳤는데, 한말에 와서 결국 그들에게 나라를 내어주는 꼴을 당하게 되었다. 예나 이제나 정치인들은 권력 다툼으로 그런 피해를 자초할 정도였지만 국민들은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적극 노력했다. 그러나 대부분 산악지형인 곳에서 의병진 조직과 활동이 두드러졌고, 상주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의병진 조직이나 활동이 타 지역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상주에는 왜병이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에 그만큼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상주인들의 활약상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896년 3월 29일 유인석 의진의 부장 서상렬이 안동, 선성, 봉화, 풍기, 순흥, 영주 등 6진과 연합하여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같은 유인석 부대의 부장인 이강년의 도움을 받아 상주의 태봉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1896년 4월 22일 상주에서 상주, 선산, 충청도의 우국지사 조동석, 허위, 이기찬, 양제안이 모여 의병을 모의하다가 금산(김천)에서 금산과 성주의 선비까지 연합하여 금산의진을 조직하였다.

1906년 5월 초 영양의 김도현이 상주의 노병대와 연락하며 의거 준비를 하였다.

1906년 노병대(盧炳大)가 서울로 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돌아와 청계사에 본부를 두고 노병대의 가산을 처분해 자금을 모아 동지를 모았는데, 이 때 김운로(金雲老), 송창헌(宋昌憲), 임용헌(林容憲)이 적극 가담하여 거사를 준비했다.

1907년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때, 노병대가 청주 진위대의 병사들을 맞아 전투력을 향상하여 보은의 분파소를 공격하고, 10월 7일 미원에서 싸워 적 5명을 사살했다. 1908년 봄 거창전투에서 적 10명을 사살했지만 우두령에서 패하여 속리산으로 돌아왔을 땐 남은 군사가 52명 뿐이었다. 7월 13일 보은에서 체포되어 1910년 출옥했지만 1913년 독립자금 조달 중 강도 죄로 잡혀 15년 형을 받고 대구옥에서 7월 9일 순국했다.

1907년 7월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를 당하면서 우리 민족의 구국 활동은 더욱 활발해지는데 이후 의병과 맞선 일본군 토벌대는 다음과 같이 진격하여 독립운동을 저지했다.

제1대 : 영천→청송→진보→영양(9월 12일)→봉화(9월 13일) ⇒신돌석 진과 충돌

제2대 : 안동 →봉화→ 풍기→예천 ⇒변학기, 민긍호, 박 처사, 김석정 진과 충돌

제3대 : 해평→낙동→태봉→문경(9월 12일) ⇒이강년, 장윤덕 진과 충돌

제4대 : 옥산→상주→함창→화령(9월 10일) ⇒노병대 진과 충돌

1908년 7월 2일 이강년이 체포되고, 그 해 10월 13일 형장에서 순국했는데, 이강년 의병진 장임록(將任錄)에 오른 상주인은 다음과 같다.

종사부 : 김성옥(金成玉)

좌종사 : 김만원(金萬源), 이원재(李元宰), 김진구(金進九),

채섬환(蔡暹煥), 홍우형(洪佑亨), 오우선(吳禹善)

1907년 9월 16일 예천 사람 장윤덕(張胤德)이 3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상주지역으로 진출하다가 총상으로 체포되어 함창읍 구향리 작은 언덕 함창에서 농암으로 가는 철로 건널목 왼쪽에서 포살되었다.

이외 상주 출신이거나 상주에서 활동한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이광렬(李光烈) : 1907년 안동에서 2차 재기하여 문경과 함창지역에서 활동했다.

이구채(李求蔡), 이언용(李彦用), 이완채(李完蔡) : 1908년 10월 9일 화령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외 목숨으로 항거한 선비들은 다음과 같다.

장지연(張志淵) : 상주 내동 출신,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통곡(是日也放聲痛哭)’ 논설을 게제.

홍승무(洪承武) : 상주 이안 출신, 1933년 10월 15일 경찰의 호출을 받자 동포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남기고 목매어 자결 순절하다.

경성 보통학교 교원 양성소 안의 비밀 결사에 참여하신 분으로 상주보통학교 교사 이순의(李舜儀)와 낙동면의 조태연(趙台淵)이 있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관계로 일본 경찰에 발각 되신 분으로는 상주읍 서곡리의 조필연(趙弼淵)이 있다.

대한광복단에서 영남지방 조직담당으로 활약하신 분으로는 이안면 소암리의 채기중(蔡基中)이 있다.

광복회에서 활동하신 분으로는 이안면 소암리의 강순필(姜順必), 강정만(姜正萬), 채기중(蔡基中), 이안면의 권영묵(權寧默), 권중식(權重植, 별명으로 重秀, 聖佑)이 있다.

1919년 3·1 의거 당시 상주에는 일본인 34호 751명이 살고 있어서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만세 운동이 쉽지 않았는데 3월 23일 오후 5시 30분, 한암회(韓岩回)가 주동이 되어 만세를 불렀으나 출동한 헌병에게 체포되면서 중단되었다. 6시경 성해식(成海植, 일명 聖仁)이 부친의 상중(喪中) 상복을 입은 채 성문의 문루 계단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은 한한석(韓邯錫, 岩回) 1년 6개월, 강용석(姜龍錫) 1년 2개월, 김성덕(金盛德)과 성해식(成海植, 星仁) 장재관(張在瓘)은 1년, 그 외 6∼10개월인 사람은 강봉석(姜鳳錫), 박인옥(朴寅玉), 석성기(石成基), 성필환(成必煥), 송인수(宋仁洙), 조월연(趙月衍)이다.

3월 29일 밤 10시 쯤, 이안면 소암리에 사는 채순만(蔡淳萬), 채세현(蔡世鉉)은 채씨 일문의 청년 20명과 마을 남쪽 냇가 둑에 가서 만세를 불렀는데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었다.

4월 8일, 화북면 장암리의 이성범(李聖範)이 김재갑(金在甲), 홍종흠(洪鐘欽), 이용회(李容晦)와 상의하여 시위운동 권고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이 날 오후 2시 문장대 위에 큰 태극기 2개를 세워놓고 각 마을에서 올라 온 70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 김성희(金聖熙), 정양수(鄭良洙)와 준비하여 이 날 정오 마을 사람 100여 명과 만세를 부르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1919년 6, 7월 경 무관학교 생도 모집을 하던 상주 사람은 조성순(趙誠淳), 유우국(柳佑國), 조태연(趙台衍)이 있다. 1920년 8월 경 이 조직이 탄로 나 알려진 분으로는 상주면 인봉리 배승환(裵昇桓, 35세), 낙동면 육평동 조태연(趙台淵, 26세), 중동면 우천리 유우국(柳佑國, 25세, 의열단원), 상주면 인평리 조성순(趙成淳, 25세)이다.

1919년 10월 서울 종로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해 중국 지폐를 위조하다가 발각 된 사람 중 상주인은 상주읍 거동의 조남대(趙南臺)가 있다.

1920년 1월 26일 주요 기관의 건물을 파괴하고 요인을 죽이기 위해 고령 사람 문상직이 대구의 홍간제를 만주의 김용덕에게 보내 폭탄을 가져오게 하고 자신도 만주로 갔다가 국내로 들어오다가 잡히는 사건으로 상주 인봉동의 김사용(金思容, 36세)의 신분도 노출되었다.

1920년 2월 29일 심양에서 폭탄을 만들고, 상주의 유경원(柳慶元), 정재룡(鄭在龍), 내서면의 강후석, 조남윤(趙南潤)을 만나기도 하던 안동군 서후면 금계동 사람 김연환(金璉煥)이 상주 버스 정류소에서 체포되다.

1921년 1월 8일 군정서 의용병 모집 과정에 체포된 사람으로 상주에는 이태홍(李泰洪, 25세)이 있다.

1928년 일본 경찰이 파악한 의열단원은 국외 활동에 관계된 분으로 상주 중동 유우국(柳佑國, 사망), 국내 활동에 관계된 분으로 상주의 김사용(金思容, 47), 김재수(金在洙, 42)가 있다. 김재수는 1920년 9월 20일 경남 동래 구포의 상민은행 지점장이었을 때 거사를 위해 준비한 총기와 폭탄을 숨기고 있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일이 있었다.

1922년 12월 18일 의용단 조직이 탄로나 검찰에 송치된 분은 함창면 구향리 김재명(金在明, 56세)이 있다.

1923년 1월 24일 독립공채를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던 사람은 상주면의 이희봉(李喜鳳, 35세)이 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동경 불령사(不逞社)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으로 화북면 장암리 박준식(朴準植, 일명 朴烈, 본적은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이 있다.

1924년 1월 5일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다 체포된 안동 풍산 오미동 사람으로 상주보통학교 교사이던 김지섭이 체포되고 1928년 옥중에서 순국했다.

1926년 9월 19일과 11월 16일 청리보통학교 훈동〈교사〉이중근(李重根, 경주인)이 소련 혁명을 예로 들며 청년운동의 필요성과 모험적 행동을 요한다는 편지가 검열에 발각되면서 안중근의 노래를 가르친 것이 드러났다.

1927년 9월 4일 신간회 상주지회를 결성하였다.

1942년 5월 18일 계림에서 활동하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회에 편입되면서 광복군 제1지대가 되고, 종전의 광복군 제1, 2, 3, 5지대는 제2지대가 되어 이범석이 지휘했는데,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된 사람들이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던 분으로 김영이(金榮伊, 1924∼전사), 이창재(李昌宰, 1920∼), 한상렬(韓相烈, 1924∼1949)이 알려져 있다.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 하시던 분으로는 상주 모서 출신의 이태준(李泰俊1833∼1920)이 의사로 몽골에서 병원 개업 중 김규식에게 거금으로 도왔다.

중국 본토에서 항일 활동을 하시 분은 권태휴(權泰烋, 1917∼), 권준(權晙, 重煥, 重錫, 姜炳秀, 陳民覺, 張從化, 揚武, 張樹華 1895∼1959) 두 분이 알려져 있다.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 비밀이 탄로나 잡힌 분으로는 교유(교사)였던 상주읍 낙양리의 강동석(姜東錫)이 광복 후 출옥했다.


8. 나오며

상주인으로 구국 활동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하여도 그 수가 상당하였고, 특히 임란 때는 왜군과 조선의 중앙군이 상주 북천에서 처음으로 접전했는데 이 때 그 대부분이 상주 사람이었음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이때까지의 상주 정신이라면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충성심과 구국 활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장 선 분이 많지 않음은 왜 일까?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조선 후기 일제에 맞서 싸운 이들이 많이 배출 된 고장이 대부분 경북 북부 지역임을 보면 우선 산간지역이라는 것과 유학의 본고장이라는 것, 일본 헌병이나 수비대 주둔이 없었다는 것이 먼저 눈에 띈다.

앞에 소개된 분들 외에도 일제의 징병 거부나 탈영 등의 방법, 또는 명령 거부 등의 방법으로 저항한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계심을 어릴 때 실제 겪은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하고 있지만 이제 증언을 해 주실 분이 계시지 않아 정리 할 수 없어 안타깝다.

반면에 상주인으로 친일(親日)활동을 하여 널리 알려진 이들을 소개한다.

우선『조선신사명감(朝鮮紳士名鑑)』에 오른 이는 총리대신을 지냈지만 한일합방을 수창(首唱)하고 일진회(一進會) 회장을 지내고 뒤에 천도교에 귀의한 낙동면의 이용구(李容九)와 상주 서성리 출신으로 경북 자인군수를 지냈던 홍창섭(洪昌燮)이 있다.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 오른 이는 모동면 지장리 이병서(李秉瑞), 화동면 신촌리 이형재(李瑩在), 내동면 복룡동 이상엽(李相曄), 내동면 성동리 조세규(趙世圭), 내남면 낙중리 이무룡(李武龍), 내남면 구만리 신순구(申舜九), 은척면 봉상리 이병욱(李炳旭), 청동면 중평리 이원형(李元炯), 내동면 성동리 이문혁(李文爀), 화남면 평온리 이원춘(李元春), 모서면 소정리 이강오(李康五), 모서면 사제동 김종식(金鍾植), 모서면 석산리 조철하(趙轍厦), 모서면 학소리 윤영수(尹泳洙), 청남면 탑동 김회찬(金會燦), 청동면 월로리 심연택(沈鍊澤), 청동면 원장리 윤임세(尹任世), 화동면 양지리 김기홍(金基泓), 공동면 다부동 김윤진(金允鎭), 외남면 금당리 김장환(金章煥), 장천면 신평리 조남봉(趙南鳳)가 있다.

이 외에도 나라가 위급할 때 마다 반민족 반국가 행위를 한 이들도 더러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대물림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