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민족교육의 요람을 찾아서
- 상주 화동면 자양학원(紫陽學院)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재 수
목 차 | ||||
Ⅰ. 들어가는 말222 1. 상주의 민족교육223 Ⅱ. 화동의 민족교육227 1. 자양학원의 설립227 2. 자양학원의 자취232 Ⅲ. 나오면서247 Ⅳ. 부록 : 영인 자료247 |
일제강점기의 민족교육의 요람을 찾아서
- 상주 화동면 자양학원(紫陽學院)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재 수
Ⅰ. 들어가는 말
일제가 우리 민족을 강제로 합병하기 이전에도 우리 상주에는 이미 지역의 인재들을 교육하기 위한 많은 교육기관들이 존재해 있었다. 크게는 향교를 비롯한 서원과 서당이 지역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었고 1886년에 설립한 연계소(蓮桂所)는 ‘인재를 육성하고, 도의를 강마(講磨)하며, 경로 효친을 하도록 함’을 목적으로 하는 등 민족교육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러함에도 일제는 강제로 우리 민족을 합병하고 우리 스스로 이루고자 했던 교육목적과 활동 여건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일제식민지교육을 위한 전제적 교육 정책을 펼치면서 민족교육활동을 견제해 왔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임에도 이 지역의 선각자들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 인재들을 교육하기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함에도 이제 일제강점기에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해 왔던 이 지역의 교육기관들의 발자취들이 대부분 남아있지 않아 그 면면을 살펴보기에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다행히 화동의 『자양학원(紫陽學院)』은 그에 관한 자료가 몇 편 이나마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우리 선각자들이 가진 그 시대의 교육에 관한 관심과 열정을 살펴 볼 수 있어 다행이다.
1. 상주의 민족교육
상주에는 앞서 밝힌 1886년 설립한 일종의 학계(學契)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들의 모임인 연계소(蓮桂所)가 있었다. 그 목적은 ‘건물을 세우고, 땅을 장만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도의를 강마(講磨)하며, 경로 효친’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연계소는 목적 달성을 위해 논 11두락과 밭 9두락의 재산으로 ‘금장소(錦粧所)’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조칙 발표 후 연계소는 ‘연계소문통(蓮桂所文通)’을 내어 흥학설교(興學設校)의 토대마련을 하고 자제(子弟)들의 교육추진을 하고자 했다.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이전부터 상주에는 민족교육이 태동하였다고 하겠다.
이 시기 신학문 교육기능을 활성화하기위하여 광무10년 고종황제의 교육칙어가 반포되고「경북각군사립학교 도교장」인 관찰사 이근호(李根澔)는 김진수(金進銖), 김호규(金濩圭)를 파견하여 학교설립을 권장하는 권유문(勸諭文)을 상주사림들에게 보내왔으며 1906년 5월 25일 우산수계소통향내문(愚山修契所通鄕內文)이, 6월 4일에는 광흥학교통문(光興學校通文)이 그리고 1911년 사립풍창학교 설립인가 청원서가 제출되기에 이르렀으나 고종황제의 민족교육정책을 일제식민정책은 이를 암암리에 방해. 압박하여 광흥학교만이 1906년에 발족하게 되었으나 이 학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의 발굴이 미미하여 이 학교의 소재지는 어디며 언제까지 존속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1908년 8월 26일 칙령 제62호로 ‘사립 학교령’이 나오자 뜻 있는 분들은 일제(日帝)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세워 자제들을 교육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1926년 10월 16일자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이 때 ‘상주군내 교육계 상황을 보면 중등(中等) 정도로는 다만 공립 농잠학교(農蠶學校)가 1개소로 생도 수(生徒數) 120명이요 공립 보통학교 7개소에 아동 수 남(男) 2,524인 여(女) 409인 합(合) 2,933명이요 강습소 6개소 중 인가를 득(得)한 3개소 아동 수효는 500여명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 후 우리지역에 사립교육기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사립풍창학교(私立豊昌學校) 설립
■ 소 재 지 : 慶尙北道 尙州郡 長川面 言上里
■ 설립인가 신청일 : 明治 四十四年 二月 二十六日
■ 주 관 자 : 낙동면 풍양 조씨(豊壤趙氏) 문중(門中), 서장례원전사보(叙掌禮院典祀補) 조남호(趙南琥)이지만 교장(校長)은 임대사간(任大司諫) 조남식(趙南軾)
사립 풍창학교는 일제가 사립학교 설립을 억제하고 있어서 학교 설립을 하지는 못했지만 풍양조씨(豊壤趙氏) 문중(門中) 구성원 모두가 노력했음을 짐작 할 수가 있다.
나. 보광강습소(普光 講習會)
■ 소 재 지 : 상주시 무양리(현 성모병원부근)
■ 창 설 일 : 1919년 경
■ 존속기간 : 약 8년 정도
■ 주 관 자 : 문경 김용사(金龍寺) 주지 권상로(權相老)
다. 대성강습소(大成講習會)
■ 소 재 지 : 상주시 신봉리(상주향교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 설립
■ 창 설 일 : 1922년 6월
■ 존속기간 : 약 4년
■ 주 관 자 : 독립운동가 박인옥
라. 보명강습소(普明學園)
■ 소 재 지 : 상주시 서문동(현 상주초등학교 서편)
■ 대성강습소가 폐지되고 이곳에 교사로 있던 박인옥(朴寅玉)씨가 당시 상주청년회관을 이용하다가 서문외리 쌍거리로 옮겨 운영.
마.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
■ 소 재 지 : 낙동면 승곡리(양진당)
■ 창 설 일 : 1920년
■ 존속기간 : 1924년(약 5년)
바. 진명강습회(眞明講習會)
■ 소 재 지 : 내서면 능암리 감모재(感慕齋)
■ 창 설 일 : 1921년
■ 존속기간 : 1926년 경
사. 대건학원(大建學院)
■ 소 재 지 :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의 물미 성당 지금의 사제관(司祭館)
■ 창 설 일 : 1931년 12월,
■ 주 관 자 : (李聖仁 신부)에 김형태(요왕), 김희태(힐라리오) 등
■ 교 사 : 원장 김희태(金熙泰) 교사 김보록(金保祿. 바오로
종교적인 차원에서 자제교육을 시작한 것이 특징이다.
아. 동명학원(東明學院)
■ 소 재 지 :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187-1(밖먹실, 반먹실)
■ 창 설 일 : 1942년 경
■ 주 관 자 : 한약국을 경영하던 서석해(徐錫海)
■ 초대원장 : 초대원장에 서석근(徐錫瑾), 2대 원장에 서기호
(徐璣浩)
자. 기타
1) 용호학술강습소(龍湖學術講習所)
모동면 정문섭(鄭文燮)의 증언에 의하면 금천리에 있었던 강습소에 20명 정도의 남학생을, 같은 마을 출신 20세 전후의 청년이 자기 집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후에 크고 넓은 집을 빌려 93명의 아동이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가 1936년에 모동면 안평리에 개설.
2) 매호공민학교(梅湖公民學校)
지금의 매호초등학교 옛 자리에 1942년부터 흙벽돌 초가 맞배 건물 2칸에서 3년간 수업하다가 1945년 사벌동부국민학교 설립으로 없어졌다.
강사로는 정한조(丁漢朝), 김종호(金鍾浩)였다.
3) 중모의 진명강습소(進明講習所)
중모공립보통학교 연혁지에 진명강습소가 1924년 3월 31일 진명학교로 인가되고, 중모공립보통학교 부속학교가 되어 1학급을 운영하다가 1925년 2월 6일 폐지되었다고 전한다.
4) 청리의 청신강습소(靑新講習所)
청리 사람들이 계(契)를 모아 청신강습소를 운영하다가 청리공립보통학교가 생기면서 그 전신이 되다.
이외에 1920~1930년대 모서와 모동지역에 도안(道安), 중산(中山), 백학(白鶴), 화현(花峴), 모서(牟西), 명신(明新)이라 불리는 강습소가 있었다고 하지만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지 못한다.
Ⅱ. 화동의 민족교육
화동의 민족교육은 이미 자양학원이 세워지기 전인 1922년 이전에 선교리에 사설학원이 새워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때 세워진 사설학원에 대해 학원이름, 설립자 등에 대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여석훈 선생의 오광자소에 이영구(李榮求)씨 댁(宅)사랑(舍廊)에서 시작을 했고 다시 한산이씨(韓山李氏) 재실(齋室)로 옮겨진 내용만 기록으로 남아 그 자취를 가늠할 뿐이다.
1. 자양학원의 설립
자양학원의 설립에 관해서는 여석훈 선생의『오광자소(五狂자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가. 선교리 사설학원에서
1922년 임술년(壬戌年).
인근(隣近) 마을 선교(仙橋)리 이영구(李榮求)씨 댁(宅) 사랑(舍廊)에서 사설학원(私設學院)을 차리고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때 두 반으로 편성하여 한 반은 유급(有給)교사가 맡아 일본어(日本語)와 산수(算數)를 가르치고, 한 반(班)은 여석훈 선생이 한문(漢文)과 조선어(朝鮮語)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설학원은 교사를 구하는 일로 계속되지 못하고 장소도 이영구(李榮求)씨 댁(宅)사랑(舍廊)에서 한산이씨(韓山李氏) 재실(齋室)로 옮기게 되었다.
나. 자양학원의 설립
선교리(仙橋里)의 사설학원(私設學院)이 일어교사(日語敎師) 자질 문제(資質問題)와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재실(齋室)이라는 장소 문제(場所問題)로 어려움이 생겼다. 그러자 관제마을『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계원(契員)들 중심으로 관제리(官堤里)에 강습소(講習所)를 하나 설립(設立)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내 그해 추수(秋收)가 끝난 뒤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임시총회(臨時總會)가 소집(召集)되어 강습소(講習所) 설립 안(設立案)을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결의(決議)하기에 이르렀다.
총회(總會)에서는 강습소(講習所) 건물(建物)을 건축(建築)하는데 1천원의 적립특별계금(積立特別契金)과 부족(不足) 되는 비용(費用)을 충당(充當)하기위해 별도(別途)의 현금(現金) 찬조금(贊助金)과 곡물 기부(穀物寄附), 노력 제공(勞力提供) 등을 받기로 결의했다.
1923년 계해년(癸亥年) 봄, 관제(官堤)에 건평(建坪) 15평(坪)의 강습소(講習所) 건물(建物)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자양학원(紫陽學院)』간판(看板)을 걸었는데 자양학원에 대해서 여석훈 선생은 다음과 같이 그 뜻을 밝혔다.
“『자양(紫陽)』이라는 말은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송(宋)나라의 대유(大儒) 주희(朱熹)의 별호(別號)이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선대인(先代人) 주송(朱松)은 중국(中國)의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 성남(城南)의 자양산(紫陽山)에서 글을 읽었다. 뒷날 주자(朱子)는 그곳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 부르고 자양(紫陽)을 자기의 별호(別號)로 삼았다. 또 주자(朱子)의 문하생(門下生)들은 그곳에 서원(書院)을 세워 자양서원(紫陽書院)이라 이름하고 주자(朱子)의 글을 자양지노필(紫陽之老筆)이라 하여 추앙(推仰)한데 연유(緣由)한 것이다.”
이렇게 정식(正式)으로 당국(當局)에 학술강습소(學術講習所)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하고 학생(學生)들을 널리 모집(募集)했다. 그리고 학생(學生)한테서 약간(若干)의 월사금(月謝金)을 받아서 그것으로 유급(有給) 일어 교사(日語敎師) 1명을 채용(採用)하고, 그 이외(以外)의 과목(科目)은 구봉회씨와 여석훈 선생이 맡아 전력(專力)했다.
유급교사는 1인은 쯔키오카 우사부로(月岡卬三郞)로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출신이었다. 조교 구봉회(具奉會)씨는 충북 보은군 마로면 궁기리 출신으로 관기공립보통학교 출신이다.
한편 설립연도에 대해『오광자소(五狂自疏)』에는 ‘1923년 계해년(癸亥年) 봄’이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상주시사(尙州市史)』에는 다음과 같다. 1922년(大正11) 6월 5일 인가를 신청하여 6월 15일 경상북도지사 후지카와 이사부로(藤川利三郞)에 의해 ‘경북학 제1631호’로 인가되었고 상주군청은 6월 16일 제1227호로 이를 확인했다. 학생 수는 1923년 8월 현재 1학년 여자 3명 남자 30명, 2학년 남자 26명, 3학년 남자 27명, 4학년과 6학년은 없고 5학년 남자 7명으로 모두 93명이었다.
그러나 ‘1925년 10월 월말 조사보고 표’에 의하면 1학년 2명, 2학년 6명, 3학년 12명, 4학년 8명, 5학년은 없고 6학년은 16명이었다.
학칙(學則)은 9장 29조로 되어있고, 입학금(入學金) 1원에 월사금(月謝金)은 1학년 40전, 2학년 60전, 3학년 80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정 사정이 곤란한 자는 후에 대체할 수 있도록 했고 모범생은 장학하는 의미로 1학년 간 면제하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자식(子息)을 가르치고 싶어도 월사금(月謝金)을 내지 못해 애를 태우는 사람을 위해 면(面)에 교섭(交涉)하여 면답(面沓)의 경작(耕作)을 주선(周旋)도 해 주고, 또 부형(父兄)이 연로(年老)하거나 극빈한 학생(學生)에게는 기한(期限) 없는 장래(將來)를 구두(口頭)로 담보(擔保)토록 하고 월사금(月謝金)을 면제(免除)해 주기도 했다.
다. 자양학원(紫陽學院)에 대한 탄압(彈壓)과 폐쇄(閉鎖)
1) 자양학원에 부정에 관한 무고
1926년. 자양학원을 설립한 지 3년 뒤이다. 근검저축계 계원(契員) 가운데서 자양학원(紫陽書院) 발족(發足)을 반대하는 사람이 오광선생을 모함(謀陷)하여 주재소(駐在所)에 부정(不正)이 있는 듯이 밀고(密告)를 한 것이다. 주재소(駐在所)에서는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서류(書類) 일체(一切)와 강습소(講習所) 건축 서류(建築書類)를 압수(押收)했고 이 일로 여러 차례 호출(呼出)도 당하고 오광선생은 심문(審問)도 받았다.
2) 자양학원 교육 활동에 대한 조사
10여 일이 지난 뒤에 부정에 대한 혐의는 풀렸지만 근검저축계(契)의 일은 타인(他人)에게 위임(委任)하고, 자양학원의 경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자양학원은 그해 여름 교육(敎育)의 성과(成果)를 부형(父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름방학(放學)을 이용(利用)하여 학력 발표회(學力發表會)를 연 이틀을 가졌다. 하루는 부형(父兄)들을, 하루는 모자(母姉)들을 초청(招請)하여 학생들이 그간 배운 학문(學問)을 당당히 발표하는 기회를 열었다.
그러자 주재소(駐在所)에서는 이번에는 자양학원(紫陽書院)의 학생들이 순박(淳朴)한 부모형제(父母兄弟) 들에게 불순(不純)한 신사상(新思想)을 고취(鼓吹)시켰다는 트집을 잡아 학생(學生) 10여 명을 불러 청취서(聽取書)를 작성(作成)하게 한 다음 오광 선생을 불러 그 책임(責任)을 추궁(追窮)하였다.
선생은 이 일이 주재소(駐在所)의 계획(計劃)된 탄압(彈壓)임을 알고, 책임자(責任者)인 나 혼자서 시도(試圖)한 일이라 주장(主張)한 끝에 보안법(保安法) 위반(違反)혐의(嫌疑)로 상주경찰서(尙州警察署) 유치장(留置場)에서 13일간 구속(拘束)당하는 일을 겪었다.
3) 설립인가 반려 및 폐쇄
뿐만 아니었다. 선생이 자양학원(紫陽學院)을 발족(發足)한 이후(以後) 매년(每年) 군(郡) 학무과(學務課)에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해 왔지만 번번이 서류(書類)가 반려(返戾)되곤 했다. 그러다가 8년 째 되는 해에는 선생을 군청(郡廳)으로 불렀다. 그리고 학무과(學務課) 직원이 한다는 말이, “당신은 청년운동(靑年運動)도 하고 사회운동(社會運動)도 하면서 또 교육사업(敎育事業)도 하겠다고 매년 학원설립(學院設立) 인가원(認可願)을 내고 있는데 교육사업(敎育事業)과 사회(社會) 청년운동(靑年運動)은 이율배반(二律背反)되는 일이 아니오. 어느 쪽이든 하나를 택(擇)하시오.” 했다.
선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육사업(敎育事業)만 하겠다는 대답(對答)을 하고, 그날로 청년회와 신간회에 탈퇴서(脫退書)을 냈고 그 증명(證明)을 첨부(添附)하여 또 자양학원(紫陽學院)의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1930년 6월을 기(期)해 화동면(化東面)의 4년제 보통학교(普通學校)가 개교(開校) 일주년을 맞았다. 따라서 인가(認可)를 받지 못하고 근 10년간 경영(經營)했던 자양학원(紫陽學院)을 폐쇄(閉鎖)하고 말았다.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變)한다 했는데 자양학원(紫陽學院)은 근 10년을 두고 노심초사(勞心焦思)를 했으나 인가(認可)라는 새로운 변화(變化)를 얻지 못한 채 1930년 6월 화동면에 4년제 보통학교가 개교 1주년을 맞으면서 폐쇄되었다.
2. 자양학원(紫陽學院)의 자취
자양학원의 자취는 현재 화동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몇 가지 자료를 여기에 옮기며 학칙과 기타 일본어로 되어있는 기록들은 황병익 선생(상주공업고등학교 일본어 교사)이 번역 수고를 해 주셨음을 밝힌다.
1922년 6월 5일 여석훈(呂錫塤)이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 199번지에 자양학원(紫陽學院) 설립 인가를 신청하였다. 경상북도지사 후지카와 이사부로藤川利三朗)은 6월 15일 ‘경북학 제1631호’로 인가를 하고 상주군청은 6월 16일 제1227호로 이를 확인했다.
이 후 자양학원의 자료 일부가 현재 화동중학교에 보관되어 있어 그 일부를 실어 그 시대의 형편과 학원 운영의 한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학칙(學則) 대정(大正) 12년 8월(서기 1923년) 현재(現在)
제1장 總則
제1조 本 學院은 朝鮮總督府 道知事의 明을 받아 敎育에 關하여 칙어(勅語)의 취지에 의거 하여 보통학교(普通學校) 程度의 敎養을 實施하려는데 目的을 둔다.
제2조 授業 年限은 朝鮮 現在의 普通敎育에 依據해서 六學年으로 한다.
제2장 組織
제3조 본 學院을 紫陽學院이라고 稱하고 慶尙北道 化東面 및 그 부근 일원의 小學校 해당 年齡 들을 敎育하기 위해 設立하고 私立經營을 한다. 그 目的을 申請해서 每年 許可를 받아 講習 敎育에 繼續적으로 從事하도록 한다.
제4조 本 學院은 講習會長의 監督아래 學院 主人의 許可를 받은 한 사람이 책임을 맡아 相互 協議 하에 직원을 招聘해서 교육에 從事하도록 한다.
제5조 講習會는 회장과 학원 주인 및 직원 외의 生徒 父兄 중에서 學務員 약간 명을 뽑아서 학교의 維持 方法, 學事 一般의 論議를 하는 것을 한다. 유지 및 본 학원에 관계있는 분들로서 조직별로 細則을 規定해서 사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한다.
제6조 강습회 다시 확인 요망
제3장 維持方法
제7조 본 학원의 유지 및 경비는 학원에 대한 학부형 및 有志 분의 기부행위로 해서 不動産에 의해 생기는 收入 및 學術 獎勵資金 외에 매월의 月謝金으로 유지해 가며 본 학원의 직원들에 대한 給與는 有給도 있고 義務 奉仕에 의한 것도 있는 것으로 한다.
제4장 學年 學期 및 休日
제8조 학년은 매년 4월 1일에 시작하여 翌年 3월 31일에 마친다.
제9조 학년의 分割은 3학기로 한다.
제1학기는 4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제2학기는 9월 1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3학기는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로 한다.
제10조 休日은 左와 같이 한다.
祝日,
大祭日 (王室 제사일),
일요일,
朝鮮總督施政紀念日 10월 1일,
夏期 休業日 8월 31일부터 9월 10일에 이르기까지,
冬期 休業日 12월 26일부터 익년 1월 10일까지,
學年末 休業 3월 26일부터 3월 31일까지
제11조 前條의 休日 외에 臨時로 必要하다고 認定할 때는 特別한 일이 있을 때에 한해서 휴업을 할 수 있도록 하다.
제5장 學課 課程 및 每週 敎育時間 數
제12조 學課 課程 每週 敎授 時間 數는 左의 표와 같다.
가. 敎育課程
學科目 | 修身 | 國語 | 朝鮮語 | 算術 | 珠算 | 地理 | 歷史 | |
제1년 | 매주 | 1 | 4 | 4 | 5 | |||
과정 | 修身書1 | 讀本1, 2 | 讀本1 | 敎科書1 | ||||
제2년 | 매주 | 1 | 5 | 5 | 5 | |||
과정 | 修身書2 | 讀方3, 4 朝作2 | 讀本2 | 卷2 | ||||
제3년 | 매주 | 1 | 7 | 5 | 5 | 2 | ||
과정 | 修身書3 | 朝作1 讀方5, 6 綴方1 | 讀本3 | 卷3 | 加減乘法 | |||
제4년 | 매주 | 1 | 7 | 5 | 5 | 2 | ||
과정 | 修身書4 | 朝作1 讀方7, 8 綴方1 | 讀本4 | 卷4 | 乘除法 | |||
제5년 | 매주 | 1 | 6 | 4 | 6 | 1 | 2 | 2 |
과정 | 修身書5 | 朝作1 讀方9, 10 綴方1 | 讀本5 | 卷4, 5 | 除法 | 日本地理 上・下 | 日本歷史 上・下 | |
제6년 | 매주 | 1 | 6 | 4 | 6 | 1 | 2 | 2 |
과정 | 修身書6 | 朝作1 讀方11, 12 綴方1 | 讀本6 | 卷6 | 除法 |
學科目 | 農業 | 理科 | 體操 | 唱歌 | 習字 | 圖畵 | 手工 | |
제1년 | 매주 | 3 | 2 | 2 | 1 | 1 | ||
과정 | 卷1 | 卷1 | ||||||
제2년 | 매주 | 3 | 2 | 2 | 2 | 1 | ||
과정 | 卷2 | 卷2 | ||||||
제3년 | 매주 | 3 | 2 | 2 | 2 | 1 | ||
과정 | 卷3 | 卷3 | ||||||
제4년 | 매주 | 3 | 2 | 2 | 2 | |||
과정 | 卷3 | 卷4 | ||||||
제5년 | 매주 | 1 | 1 | 2 | 2 | 1 | 1 | |
과정 | 農業 上・下 | 理科 上・下 | 卷4, 5 | 卷4, 5 | ||||
제6년 | 매주 | 1 | 1 | 2 | 1 | 1 | ||
과정 | 卷6 | 卷6 |
나. 學生數
1학년 | 2학년 | 3학년 | 4학년 | 5학년 | 6학년 | 계 | |
남 | 30 | 26 | 27 | 7 | 90 | ||
여 | 3 | 3 | |||||
계 | 33 | 26 | 27 | 0 | 7 | 0 | 93 |
그러나 ‘1925년 10월 월말 조사 보고표’에 의하면 1학년 2명, 2학년 6명, 3학년 12명, 4학년 8명, 5학년은 없고, 6학년은 16명이었다.
다. 담임교사와 담당과목은 다음과 같다.
담임 학년 | 담임 과목 및 시간 | 담임교사 |
第3・5學年 | 朝鮮語 除外한 全部 | 月岡卯三朗 |
第1・2學年 體操와 唱歌 其他 | 體操3時間, 唱歌 2時間, 圖畵 | 仝上 |
第1年 唱歌 및 圖畵 外 全部 | 第5年 朝鮮語 | 여석훈(呂錫塤) |
第2年 | 구봉회(具奉會) |
라. 擔任敎師의 出身 및 學歷
담당학년 | 본적 및 출신자격 | 직원 |
第5學年 및 제3학년 |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졸업 대정 | 月岡卯三朗 |
第2學年 | 충북 보은군 마로면 궁기리 334번지. 궁기공립보통학교 출신 | 조교 구봉회(具奉會) |
第1年 |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 | 조교 여석훈(呂錫塤) |
제6장 入學 . 休學 및 退學
제13조 生徒의 入學은 學齡에 도달한 남녀 아동으로 하고 입학의 시기는 매년 학년의 시작부터 30일 이내로 한다.
제14조 現在 收容 人員은 當分간 制限을 둔다.
제15조 入學 生徒는 그 學父兄 혹은 保護者가 連書해서 기한 내에 戶籍騰本을 첨부하여 提出해야한다.
제16조 다른 普通學校 및 私立講習所로부터 본 학원에 轉學하려고 할 때는 그 학생이 다닌 마지막 학교의 在學證明書를 添附하는 것에 한해서 同一學年으로의 入學을 許諾한다.
제17조 疾病 또는 기타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3개월 이상 出席하는 것이 可能할 때는 休學을 許諾할 수 있다.
제18조 生徒가 退學을 원할 때는 保護者가 申告하여야 한다.
제19조 본 학원에 다니는 생도로서 品行이 不良하거나 敎育上 다른 善良한 학생들에게 妨害가 되는 性行이 있어서 도저히 驕制할 수밖에 없다고 認定되는 경우나 본 학원의 교육목적에 違背될 때에는 退學을 命할 수 있도록 한다.
제7장 賞罰
제20조 학원은 왼쪽의 경우에는 褒賞을 附與할 수 있도록 한다.
1. 品行이 方正 할 것
2. 學事가 優秀할 것
3. 특히 先行이 있을 것
4. 精勤 模範이 있을 것
제21조 生徒로서 校則 및 학원의 교훈에 違背되는 행위를 하거나 혹은 月謝金을 2개월 이상 이유 없이 滯納하는 것은 相當한 懲戒를 내릴 수 있다.
제8장 修業 및 卒業
제22조 각 學年의 課程의 修業 및 全 課程의 卒業은 平素의 成績 및 각 學年末의 試驗 成績을
제23조 試驗은 제1학기 및 제2학기 및 學年 試驗의 3기로 區分한다.
제24조 각 學科의 採點은 100점을 最高로 하며, 平均 60점 以上을 合格者로 한다. 단 擔任職員의 認定하는 바에 의해서 不合格者라도 合格者로 될 수 있도록 한다.
제25조 본 學院에는 全 學年의 卒業을 認定하는 경우에는 左記 書式의 卒業證書를 授與하는 것으로 하며, 또 學業成績證明書를 주도록 한다.
第 號 卒業證書(書式) 生徒 名 年 月 日生 右는 本 學院 所定의 普通學校 程度의 全 課程을 卒業하였기에 이에 本 證을 줌 年 月 日 尙州郡化東私立紫陽學院 印 |
第 號 證明書 - 用紙 半紙 本籍 現住所 戶主 職業 姓名 戶主와의 關係 年 月 日 卒業 生徒名 生年月日 學業成績 第 學年
操行記載 右와 같이 證明 합니다. 年 月 日 尙州郡 化東私立紫陽學院 印 |
제9장 月謝金
제26조 月謝金은 左記와 같이 徵收한다.
제1학년 1개월 金 40錢
제2학년 1개월 金 60錢
제3학년 1개월 금 80錢
제27조 月謝金은 每月 5일 以內에 그달 분을 納付하고 入學金은 別途로 一金 一圓을 納付하도록 한다.
제28조 月謝金은 家庭 事情에 따라 納付가 困難한 경우 特別히 다른 賦役으로 대신 할 수 있고, 특별한 獎學生을 위한 模範生徒에 대하여 月謝金을 1학년간 免除할 수 있다.
제29조 본 학칙의 開閉의 경우 學務員會議 決議에 의거해 執行한다.
나. 학교 일반 현황에 관한 자료
1) 학원 부속 부지 현황
1. 학원 소재지 : 화동면 이소리 304번지
2. 부지 : 약 300평 동척 토지 차지(東拓土地 借地)
3. 교사 건평 : 1동 36평
4. 공장 일부 : 13평
5. 학교보관림00지 : 화동면 이소리 0전
6. 보관림 면적 : 약 3정보
7. 부속 답 소재지 : 화동면 연정0 5두락(斗落)
8. 부속 부지 소재지 : 관제 2필. 이소리 301 번지, 이소리 302 번지
9. 부지 합계 : 652평
10. 면사무소 토지 소작 : 이소리 747번지 791평
11. 상토지 소작 : 반곡리 75번지 207평
합계 내역
1. 전(田) 및 부지 학교 부속지 계 : 약 5반 3무 20평
1. 소작지 : 계 약 2,865평
1. 학교보관림 : 계 약 3정보
1. 학교부지 차지(借地) : 계 약 300평
1. 학교 및 교사 건축비 : 계 750원
1. 기부금 : 8월 현재 47명분, 미수액 금 347원
1. 기본금 : 0, 전부 학교 건축비 지출
2) 학원의 수입 및 지출 현황
지출 계산(최근 1년00)
수입부 : 일금 915원 0수입 고 년액(高年額)
내역
일금 110원 : 부속지 년00 10석(石)(석 11원 상0)
일금 0 175원 : 소작지 2,865평 수입 0 25석
일금 200원 : 월사금 년액 전납자 25명분
일금 330원 : 월사금 년액 00물자 60명분
지출부
일금 66원 소작료금 면사무소 납입(?)
일금 180원 직원 3명 식비 년 액
일금 15원 납세금액 년 계
일금 408원 직원 3명분 수당 년 액
일금 30원 학교 부지료 000
일금 80원 농사 일반 지출 년 액. 비료 인부 지불
일금 30원 산림묘0 식부 및 잡지출 년 액
일금 50원 학교 수리비 년액
일금 66원 소모품 잡비 년액
계금 915원
다. 기타 자료
1) 紫陽學院 設立 認可書
慶北學第 1,631號 尙州郡 化東面 以所里 199 番地 (尙州郡廳 大正 11. 6. 16 第1227號) 呂 錫 塤 大正 11年 6月 5日 附願私設紫陽講習會 開催의 件을 認可함 大正 11年 6月 15日 慶尙北道知事 藤 川 利 三 郞 |
2) 紫陽學院 月末調査 報告書
大正十四年拾月 紫陽學院 月末調査 報告書 1. 兒童 |
3) 地方費 補助金 確認書
尙州郡 化東面 私設學術講習會 設立者 呂錫塤 大正 15 年度 이 私設學術講習會 經費에 對하여 道 地方費로부터 金 45 圓을 補助하며 但 補助金은 敎授用 機械, 器具, 圖書의 購入費에 使用할 것 大正 15年 9月 28日 慶尙北道知事 須 藤 素 |
4) 地方費 補助申請書
昭和 4年 1月 13日 尙州郡 化東面 私設學術講習會長 呂 錫 塤 慶尙北道知事 須 藤 素 殿 地方費 補助金 申請書 本 講習會는 이미 認可를 얻어 申請 中에 있은 것이므로 本 年度에도 地方費 補助를 받을 必要에 依해 左記 事項을 갖추어 申請하기에 地方費가 내려질 수 있도록 付託드립니다 左記 1. 生徒數 80名 1. 開催期日 大正 10年 4月부터 오늘까지 1. 經費豫算書는 別紙와 같음 經費豫算書 收入 一金 80圓 : 入學金 1人 1圓 80人分 一金 880圓 : 授業料 1人 1個月 平均 1圓 11個月分 一金 70圓 : 基本 財産 土地 小作料 收入 一金 50圓 : 實習 生産物 賣却代 計 金 1,080圓 支出 一金 720圓 : 講師手當 月 30圓 2人 12個月分 一金 20圓 : 學院敷地料 1個年分 一金 30圓 : 實習地 借入代 1個年分 一金 30圓 : 建物 修理費 一金 50圓 : 備品費 一金 230圓 : 雜給 및 雜費 計 金 1,080圓 收支上 差引 殘金 없음 |
5) 秋水軒(秋水軒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
1. 上下 一心
2. 忠實 服業
3. 勤儉 治産
4. 0信 0義
5. 敦厚 成俗
6. 去華 就實
7. 荒怠 相戒
8. 自彊 不息
6) 紫陽學院 8訓
1. 正直 天眞
2. 元氣 活潑
3. 勤儉 勉勵
4. 敦厚 0實
5. 規律 整然
6. 衛生 起居
7. 0000
8. 自彊 不息
7) 學生 作品集
大正 12年 5월 30日 作文 參考 紫陽學院
(가) 봄의 山 - 3年
봄이 되면 산과 들이 하나로 푸르게 된다. 따뜻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봄의 경치 중에서 봄의 산 경치가 가장 좋다고 생각되며, 아침저녁으로 초록의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푸른 하늘 하얀 구름, 하늘에 수놓은 구름모양, 새의 노래도 말 할 수 없는 기분이 되는 봄의 산. 봄날의 산은 잊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나) 자양학원의 노래(교가인지 아니면 학생작품인지는 알 수 가 없음)
1. 우리들은 산의 玉
팔음산 자양학원의 少年
산과 산의 그 안에서
最高 높은 白樺山
2. 자양학원은 우리들의 학교
팔음산과 같이
백화산과 같이
격조 높은 사람이 되리라.(5月 17日)
(다) 散步의 必要 -3年
‘산보가 왜 필요한가?’ 라고 하면 우리들이 공부, 공부만 한다면 머리가 피로하기 때문에 가끔씩 운동을 함으로써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습니다. 운동 중에서도 산보는 적당한 운동이 되며, 그 까닭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됩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경치 좋은 곳으로 가끔씩 소풍을 데리고 갑니다.
나도 산보는 참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 石山으로 遠足(5月 24日 3年)
어제 선생님으로부터 소풍을 간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학교에 아침 일찍 갔었다.
학생들은 모두 도시락을 준비해서 백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이 일학년, 이학년, 삼학년, 오학년 순으로 일렬을 지어 앞에 있던 냇가를 건너 아래로 내려갔다.
석산 학교에 가서 앞 냇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나서 강을 건너가니 높은 산 아래 村落이 있었다. 그곳이 石山里였다. 학교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아래서 학교를 참관하고, 석산학교 학생들과 테니스를 하고, 도시락을 먹기 위해 앞의 냇가로 가서 5학년은 모두 고기잡이를 하고, 3학년이 하는 물가에서 목욕을 했다. 조금 울퉁불퉁했지만 모든 나쁜 것을 버리고 나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처음부터 좋다고 생각되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서 갑자기 비가 내렸기에 힘껏 달렸지만 우리들은 비로 인해 옷도 몸도 흠뻑 젖어 버렸다.
(마) 우리들의 學校 -5年
우리들 학교는 상주군 화동면에 있는 사립학교로 선생님들도 모두 열심히 하시며 다른 보통학교와 다른 곳으로, 현재 학생 수는 100명이 넘는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로 학과는 보통학교보다 더 다양하며, 平素 무엇보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처럼 학교 校舍와 운동장이 넓고 멋지며, 씩씩한 학생들이며, 善良합니다. 우리 학교는 校舍 및 設備나 施設이 완전치 못한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우리를 激勵하면서 모두 立身揚名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우리들은 그러한 선생님들의 意志를 받들어 큰 강물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사) 時의 宣傳 記事 -5學年
-時의 歌(노래)-軍艦 마치
멈추어도 가도 모두 사람들이요
시간이 가고 있는 와중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이 목숨
뜻있게 살고 싶어라.
자고 있어도 깨어 있어도 가는 시간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우리들 앞에 오고 있는 것들을
귀한 옥이라며 스스로 위안해보자.
(아) 白頭山 - 3學年
白頭山은 朝鮮과 中國과의 國境에 있고 朝鮮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그 높이는 약 구천 尺이고, 그 頂上에는 周圍가 3里나 되는 못이 있고 이것을 天池라고 말한다.
이 山에서 發源해서 東으로 흐르는 물이 豆滿江이 되고, 西쪽으로 흐르는 물이 鴨綠江이 된다. 그 沿岸에는 森林이 많아 木材의 産地로서 有名하다.
(자) 아픈 친구 병문안 -6월 15일
鄭君이 오랜만에 缺席을 했기 때문에 先生님도 學生도 모두 심히 걱정을 했습니다.
鄭君이 病으로 그런 적이 있었기에 한층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픈 弟子는 어떨까? 점점 더위도 더해가고 있기 때문에 衛生에 注意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학교에서 전번 6월 10일에 (해석 못함). 정군도 학교에 와 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5학년도 3학년도 演說에 나와서 病에 대한 演說을 들었습니다. 그때 豫防에 대한 말도 있었습니다.
학교 공부는 정군이 잘할 수 있기에 걱정되지 않지만 하루라도 빨리 完快되어 出席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少年易老 學難成 一寸光陰 不可輕
未覺池塘 春草夢 階前梧葉 已秋聲 (주희)
Ⅲ. 나오면서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요람가운데 화동면에 위치했던 자양학원(紫陽學院)에 관해 살펴보았다. 다행히 자양학원은 부족하나마 몇 가지의 자료가 남아 있기에 그 시대 교육의 여건을 살펴보기에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의 모습, 그리고 학생 현황과 교직원 현황, 자양학원의 운영의 일면, 학생들의 평소 작품 등을 가늠할 수 있었음은 다행이었다.
향토사 연구를 하면서 기록문화의 보존이 잘 되지 못하고 있음이 늘 아쉬웠다. 본고를 통해 그나마 자료가 책으로 엮어져 오래 보존할 수 있음은 다행할 일이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귀중한 향토 사료의 발굴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느낀다.
Ⅳ. 부록 : 영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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