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5세 신동(神童)에 귀신도 놀랄 심지를 지닌 서극일(徐克一)

빛마당 2016. 3. 29. 19:22

5세 신동(神童)에 귀신도 놀랄 심지를 지닌 서극일(徐克一)

김 재 수

 홍문관(弘文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그 가운데 나이 어린 한 소년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보송보송한 귀밑머리가 아직도 어린 애 티를 벗지 않은 아이. 이제 겨우 다섯 살의 사내아이가 좌중에 둘러앉은 많은 사람들 틈에 앉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다.

“네가 과연 시를 지을 수 있느냐?”

좌중에 한 어른이 아이를 향해 묻는다.

“제가 아직은 어리지만 운(韻)을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질문을 한 어른을 향해 다소곳이 고개를 든 어린 소년이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아이의 까만 눈에는 호기심과 총기가 가득 잠겨있다.

“그래?, 그럼 어디 낙엽(落葉)이란 제목으로 운을 부를 테니 시를 지어 보거라.”

아이는 잠시 창 넘어 바깥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붓을 잡고 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붓을 잡은 어린 손이 고사리 같은데 막힘이 없이 화선지 위로 시 한수가 붓끝에서 태어나고 있다.


王母調黃鷄(왕모조황계) 왕모(王母)가 황학(黃鶴)을 길들여서

朝天獻帝宮(조천헌제궁) 하늘나라에 조공(朝貢)하기 위하여제궁(帝宮)으로 바쳤다.

銀河閒放沐(은하한방목) 은하수(銀河水)에 가서 한가로이목욕(沐浴)을 하고,

刷羽落西風(쇄우낙서풍) 다시 서풍(西風)에 나라 내려오네.


좌중에 앉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허허, 실로 대단한 아이로구나.”

아이가 쓴 시를 읽으며 모두들 감탄하는 눈으로 다섯 살의 신동에게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서극일(徐克一).

 자는 선원(善源), 본관(本貫)은 이천(利川), 호가 율정(栗亭)이다. 별제(別提)와 승의랑(承議郞)을 지낸 서윤의(徐允義)의 아들로 정유년(丁酉, 1537) 중종(中宗) 32년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병오년(1546) 명종(明宗) 1년 식년시 문과(式年試文科)에 병과(丙科) 급제하였다. 관직은 판사(判事),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 서흥부사(瑞興府使), 원정(院正)을 역임하였다.

정유년(丁酉 1537) 중종(中宗) 32년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을 때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이 춘당대에 나아갔는데 세자가 입시했다. 입격한 유생 30인을 진강(進講)하게 하고 전교하였다.


“윤춘년은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손홍륜(孫弘綸)은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고, 서극일(徐克一)·김개경(金漑卿)·신여읍(申汝揖)은 향시(鄕試)나 한성시(漢城試) 중 3분(分)을 주고 이준의(李遵義)와 이수경(李首慶)은 향시나 한성시 중 2분을 주라.”


 선생의 젊은 시절의 일화와 서흥부사(瑞興府使)로 부임할 때 일화는 귀신도 감동할 만한 심지(心志)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선생이 젊은 시절, 산 속 글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밤중에 용모가 대단히 장대한 노인이 두건을 쓰고 도포를 입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서 방안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 선생을 공부를 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고 계속 피곤하게 하였다. 선생의 생각에는 이는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도깨비라고 여기고, 마음을 굳게 다잡고 흔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또 와서 귀찮게 구는 것이 어제와 같았으나, 선생은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노인이 말하였다.


 “자네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몹시 기특히 여겼다네. 그러면서도 자네의 그 정신은 어떤지 알아보려고 시험 삼아 내가 침범하여 방해한 것이라네. 그러나 자네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한 선비일세. 내가 한 구절 시를 부를 테니, 자네가 대구(對句)를 한번 지어보지 않겠나?”


그러면서 노인이 먼저 운을 떼었다.


“문문산(文文山) 아래 충신의 묘가 있으니”


노인의 운이 떨어지자마자 선생이 대구를 맞추었다.


“류류천(流流川) 옆에 귀양 온 선비의 사당이로다.”


 자신의 운에 대구를 한 선생을 보고 노인은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면서 생년월일을 물었다. 선생은 자신의 생년월일을 알려 드렸다. 노인은 환하게 웃음을 웃으면서

“자네는 운수 또한 좋아서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할 것이며, 수명 또한 오랠 것일세. 평생에 만약 난감한 처지나 어려움으로 고민하게 되거든 반드시 내 생각을 하게. 내가 구해 줄 수 있을 것일세.”

라고 말하였다.

그 훗날 선생은 임금님 앞에서 경전을 강하는 자리에 들어 맹자의 난해한 문장을 겹겹으로 만났는데, 한곳은 주해(註解)가 대단히 자세하였지만 한곳에는 다만 전편(前篇)을 보라라고 했을 뿐이었다. 선생은 해석을 틀리게 할 것이 두려워서 망연하였는데, 노인이 문득 나타나서 전편에 있다는 그 주해를 말하여 주었다. 선생은 노인의 그 말대로 하니 시험관이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윽고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마침 서흥부사(瑞興府使)로 부임해가는 사람이 무슨 영문인지 부임하자마자 죽는 괴변이 생겼다. 그리하여 벌써 네 다섯 명이 그 자리로 부임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조판서 심통원(沈通源)이 선생을 적임자로 점찍으니, 선생은 회피할 핑계가 없게 되었다.

드디어 은혜에 감사하고, 떠나기 전에 이조판서 집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가려는데 그 노인이 찾아왔다.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사양하는 구실을 입 밖에 내지 말게.”

하고는 가 버렸다.

안에 들어가 이조판서를 뵈니 심통원이 물었다.

“서흥은 모두가 가지 않는 곳인데 공은 장차 어찌할 건고?”

선생이 대답하기를,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이미 은혜로운 명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임하겠습니다.”

심통원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자네야 말로 진정 달통한 사람일세. 인명이 재천이라 수명은 하늘에 달렸거늘 서흥이 어찌 사람을 죽이겠는가.”

마침내 선생은 서흥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각에 올라 통인(通引)에게 벼루와 물을 가져오라 하였는데, 통인이 발을 헛딛고 누각 아래로 떨어지더니 즉사하였다.

선생이 대경실색하고 있을 때 노인이 훌쩍 나타나서 말하였다.

“이곳에 사나운 도깨비가 있는데 자네를 해롭게하고자 하여 통인을 대신하게 하였네. 이제는 근심없네.”

이리하여 선생은 무사히 만기가 되어 돌아왔다.

 선생은 상주의 선비인 운정(芸亭) 김언건(金彦健), 후계(后溪) 김범(金範), 서대(西臺) 김충(金冲)과 함께 상주가 충과 효의 고장이 되는 초석을 마련하였으며,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 서산(西山) 민여해(閔汝諧),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와 함께 상주가 인재의 고장이 되게 한 큰 스승이기기도 했다.

 이러하듯 충효의 고장의 초석을 닦은 선생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두 사람 모두 효자였다.

특히 서상남(徐尙男)은 선생의 아들로 생원 진사이며 효행으로 참봉이 되었다. 아울러 임진왜란 때 상의군 의병의 좌막으로 참전하였고, 1593년 송이회(宋以誨), 덕휴(德休)와 함께 군공안(軍功案)을 가지고 순찰사 영을 다녀왔다.

 선생이 상주에 거주할 때 젊은 시절부터 재주가 널리 알려져 여러 훌륭한 분들과 교유(交遊)하다가 돌아가시자, 낙서(洛西) 이산(尼山)에 장사했는데 그의 아들인 상남이 그곳에 여막(廬幕)을 치고 아침 저녁으로 묘를 찾아 예를 다했다. 묘 아래에는 참나무 숲이 있어서 휴식하는 장소로 적합하여 박씨(朴氏) 성을 가진 열 너덧 살 된 동자(童子)가 그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나무 아래에 가니 다섯 노인이 선생(克一)과 함께 모여 앉아 정자의 이름을 관행(觀行)이라 하고 마주 앉아 시가(詩歌)를 수창(酬唱)하니 편장(篇章)이 많이 쌓였다. 선생이 시 한 수를 동자에게 주며 상남에게 말하여 주라고 하자 동자가 그 문리(文理)를 해득하지 못하여 독송하지 못했다. 선생이 크게 노하여 회초리로 동자의 종아리를 때리자 동자가 여러 번 읽어 겨우 외우자 드디어 꿈을 깼다.

극일이 급히 상남을 불러서 불을 밝히고 외우는 시를 쓰게 했는데 그 시에 관행정(觀行亭)에 여섯 신선이 모이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관행정 이름이 백세(百世)에 전해질 것이므로 낙동강 위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을 세울만한 일이다.

낙수(洛水)가 도도히 흘러 다하지 않고 청산 아래는 조그마한 효자의 여막이 있다. 효자가 효성과 힘을 다해서 비바람도 피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찾아와서 호곡하는 소리가 아득히 꿈속에서 들리어 온다고 하므로 심히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상남에게는 정랑(正郞)을 증직했다.

한편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見閑雜錄)을 보면 위의 기록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심수경은 서극일과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고 밝히고 선생의 직위를 판사(判事)라고 불렀다.


尙州素稱文獻之邦(상주소칭문헌지방)주는 본래 문헌의 고을로

吾同年及第判事克一居焉(오동년급제판사극일거언)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有二子尙男漢男(유이자상남한남)두 아들 서상남과 서한남을 두었다.

己丑年間(기축년간)기축년에

判事棄世(판사기세)판사가 세상을 떠나니

二子居廬于墓側(이자거려우묘측)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廬傍有松亭(려방유송정) 여막 곁에 송정이 있었고

有一童子(유일동자) 한 동자가

學書於廬所(학서어려소)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童子夜夢見(동자야몽견) 동자가 어느 날 꿈을 꾸니

亭中六人會坐(정중륙인회좌) 송정에 여섯 명이 모여 앉아

謂童子曰(위동자왈) 동자에게 말하기를

首坐者廬相國蘇齋(수좌자려상국소재)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 노소재 수신이고

次即金判事沖(차즉금판사충) 다음은 판사 김충이고

次即盧判事祺(차즉로판사기) 다음은 판사 노기이고

次即判事克一(차즉판사극일) 다음은 판사 극일이고

次即金進仕彦健也(차즉금진사언건야)다음은 진사 김언건이다 했다.

坐中名其亭曰觀行(좌중명기정왈관행)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이라 하고

作一詩令童子讀文(작일시령동자독문)시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累遍期於成誦(루편기어성송)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覺而記得(각이기득) 깨어서 기억하니

詩曰(시왈) 그 시에 이르기를

靑山山下數椽孝子營(청산산하수연효자영)청산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효자가 지어

孝子幾竭如在誠(효자기갈여재성)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효성을 다하네.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효자불폐풍여우일삼래)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號哭聲中冥夢回(호곡성중명몽회)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관행정중륙선회진악사)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觀行亭名留百(관행정명류백사)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라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락강강상가이립륙선사)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洛江萬古流不舍(락강만고류불사)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라 하였는데

似是蘇齋手段也(사시소재수단야)아마 이는 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事甚奇異(사심기이) 일이 매우 기이하여

尙人傳播云(상인전파운)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


 기축년(己丑年)에 세상을 떠나니, 묘소는 낙서(洛西) 이산(尼山)에 있고, 저서로는『율정집(栗亭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