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청화관직(靑華官職) 미유식부(未有食浮) 김광엽(金光燁)

빛마당 2016. 3. 29. 21:21

청화관직(靑華官職) 미유식부(未有食浮) 김광엽(金光燁)

김 정 찬


 김광엽(金光燁, 1561∼1610)의 자는 이회(而晦)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국초(國初)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양경공(襄景公)인 휘 승주(承霔)의 6대손이다. 고조는 휘가 약내(若均)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승평군(昇平君)에 봉해졌으며,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 정(繕工監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수홍(粹洪)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다. 조고는 휘가 순고(舜皐)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 도총관(知中樞府事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선고는 휘가 침(琛)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행(行) 구령 병마만호(仇寧兵馬萬戶)를 지냈다. 비(妣)는 숙인(淑人) 원씨(元氏)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을 지낸 원수장(元壽長)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 신유년(1561, 명종 16) 8월 임오일에 태어났다. 5세 때 평양군에게 공부하였다. 6세에는 효경을 배우고 8세에는 소학을 배웠다. 10세에는 구촌서당에서 대학을 읽었고 12세에는 갑장사에서 공부하였으며 13세에는 평양군을 모시고 서울에서 살았다. 14세 때에 평양군이 서울에서 돌아가셨는데 15세에 상주로 돌아와 백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16세에 백원에서 독서하였고 18세에 결혼하였다. 19세에 주역을 읽고 홍범구주도 같이 공부하였다. 20세에 해인사를 유람하였고 22세에 귀허집을 저술하였다. 28세에 풍기 은풍면 취곡으로 이사를 갔고 30세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으며, 장성함에 미쳐서는 글을 짓는 데 힘을 쏟아 과거 시험장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만력 경인년(1590, 선조 23)에 생원시(生員試)에 일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문과(文科)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으로 들어갔다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날로 성해져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저작(著作)이 되고 부수찬(副修撰)과 수찬(修撰)을 거치고 부교리(副校理)와 교리를 거치고 부응교(副應敎)를 거쳤다. 간원(諫院)에 있으면서는 정언(正言)이 되고 헌납(獻納)이 되었다. 헌부(憲府)에 있으면서는 지평(持平)이 되고 집의(執義)가 되었다. 전조(銓曹)에 있으면서는 좌랑(佐郞)이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에서는 사유(師儒)가 되었으며, 곧바로 직강(直講)을 거치고 사예(司藝)를 거치고 사성(司成)을 거쳤다. 춘궁(春宮)에서 시강(侍講)하면서는 문학(文學)을 거치고 필선(弼善)을 거쳤다. 대시(臺侍)의 직에 출입한 것이 모두 15, 6년이었는데, 사람들이 식부(食浮, 덕에 비해 식록(食祿)이 너무 많다는 뜻으로, 관직에 비해 재능이 모자람을 뜻하는 말이다.)라고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 2) 가을에 옥당의 직에 있던 중 황달을 앓아 수레에 실려서 시골로 돌아갔다가 11월 정사일에 풍기(豐基)의 취곡리(翠谷里)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5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 다음 해에 가서산(加棲山)에 있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몸가짐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화락하고 평안하게 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평탄하게 하여 일찍이 특별난 행동이나 날카로운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비(是非)가 판가름 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또한 구차스럽게 동조하거나 뜻을 굽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주제독(尙州提督)이 되었으며, 전조(銓曹)에 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흥해군수(興海郡守)가 되어 나갔을 때에도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면서 말투와 안색에 조금도 불평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생토록 서책을 보아 경사(經史)를 두루 열람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서 초록(抄錄)하여 수십 권의 서책을 만들었다. 그 책들이 모두 이 세상에 간행할 만하였으나, 미처 업(業)을 끝내지 못하고 졸하고 말았다. 내가 듣건대 착한 행실을 하고서 보답을 받을 경우, 그 당대에 크게 받지 못하면 반드시 그 자손 대에 크게 받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마땅히 공의 후손들에게서 징험될 것이다.

 공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이인수(李仁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경후(慶後)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큰 딸은 진사 여희필(呂姬弼)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유학(幼學) 황유한(黃有漢)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하나이고 손녀는 셋이며, 외손자가 다섯이고 외손녀가 넷인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명(命)은 다음과 같다.


순후한 것은 공이 지닌 자질이었고 / 醇者質(순자질)

맑은 것은 공이 지닌 성품이었네 / 淑者性(숙자성)

공손한 것은 공이 하는 말투였었고 / 遜者言(손자언)

힘쓰는 것은 공이 하는 행실이었네 / 勉者行(면자행)

그런데도 큰 복록을 못 누렸나니 / 然而不祿(연이불녹)

명이 또한 그런 것을 어찌하리오 / 奈何命(내하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