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추앙을 받은 청고한 선비 - 성만징(成晩徵)
박 찬 선
성만징(成晩徵, 효종 10, 1659∼숙종 37, 1711)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달경(達卿), 호는 추담(秋潭) 또는 환성제(喚醒齊)로 썼다. 상주에서 태어나 문경에서 살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순박하며 대단히 근엄(謹篤)하였다. 아주 치밀(精到)하게 학술에 조예(精詣)가 깊어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실학자로서 향리의 여러 선비와 함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창설(1599)하여 명의로서의 소임을 다한 청죽(聽竹) 성람(成灠)의 현손이다. 조부는 동곽(東郭) 진승(震昇)이요, 아버지는 호영(虎英)이며, 어머니는 덕수(德水) 이씨로 통덕랑(通德郞) 동야(東野)의 딸이다.「수석정기」로 문명을 떨친 통허재(洞虛齋) 성헌징(成獻徵)의 아우다. 1703년(숙종 29)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죽기 바로 전에 부솔(副率)이 다시 제수되었으나 미처 사직서를 올리지 못하고 별세했다.
8세에 뜰의 백일화를 보고 글을 지었는데,
百日花百日紅(백일화백일홍) 백일화는 백일을 붉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꽃은 열흘을 붉지 못한다더니,
今有百日紅(금유백일홍) 여기 백일(百日)을 붉은 꽃이 있네.
라고 읊어, 이때 이미 고정관념에서 얽매이지 않는 사물관을 가지고 있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이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고제(高足弟子: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나게 학덕이 높은 제자)로서 강문 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조광조(趙光祖)가 봉향된 도봉서원(道峰書院)에 배향할 때 일부에서 시비가 일자 앞장서서 변박하는 상소와 통문을 지었다.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에 대한 말썽이 일어나자 곧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을 지어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는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존왕양이(尊王壤夷)와 명나라와 친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친명배청사상(親明排淸思想)이 남달리 강하였다. 이것은 당시 미수(眉叟) 허목(許穆)이「동사(東事)」 등으로 자주를 표방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기설에 있어서는 “성은 곧 이다(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지지하여 낙론(洛論)에 접근한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스승인 수암의 “성은 곧 기이다(性卽氣)”라는 기성(氣性) 혹은 기국(氣局)의 호론(湖論)과는 배치된 설이다. 특히 예설(禮說)에 밝아 권상하 이세필 등과는 상당히 깊이 있는 이론적 문답을 주고 받았다. 또한 학성도(學聖圖)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가실목)에 있는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정조 11년(1787)에 추배(追配)되었다. 그러나 서원은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그 후로 단(壇)을 마련하여 매년 3월 중정(中丁: 음력으로 그 달의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 이날을 가리어 민가에서 제사를 지냈음)에 봉사하고 있다.
저서로는『추담문집』3권과「조령산성기」등이 있다. 추담집(秋潭集) 본집은 7대 손 석(檡) 등이 산일(散佚, 흩어져 없어짐)되고 남은 유문을 수집 편찬하여 사림의 협조를 받아 1926년 상주의 흥암서원에서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이다. 본집은 8권 3책으로 되어있다. 책머리에 총 목록이 있으며, 각 책 별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로 1702년에 황강에 가서 지은 경차선생운(敬次先生韻) 등 권상하의 시에 차운한 것이 가장 많다. 권2∼5는 서(書)로 주로 예설을 변론하였고 이기설, 경설에 대하여 토론한 것이며, 권상하, 정호, 이세필, 권욱, 권섭, 이태수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권6은 기(記) 제발(題跋)이다. 기 가운데 자족당기(自足堂記)는 남극주(南極柱)의 당명(堂名)을 풀이하면서 안분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권7은 잡저(雜著), 제문, 축문, 행장, 전(傳) 잡기(雜記)이다. 잡저 가운데 만동사시비변은 1704년에 만동묘 향사를 옹호하며 반노론계의 격렬한 논쟁에 맞서 지은 것이다. 권8은 부록으로 묘표(墓標), 가장, 만사 등이고 권말에 7대 손 석이 1926년 쓴 발(跋)이 있다.
日月頭邊近(일월두변근) 해와 달이 머리에 가깝고
山河眼底空(산하안저공) 산천이 눈 아래에 비었네
憑臺聊遠望(빙대료원망) 대에 기대어 멀리 조망하니
直欲駕長風(직욕가장풍) 곧장 큰 바람이라도 타고 싶네
등문장대(登文壯臺) 문장대에 올라서 지은 시로서, 막힌데 없는 시원한 시정을 느끼게 한다. 해와 달이 머리에 가깝고 산천이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넓은 공간이 마음을 뻥 뚫리게 한다. 그만큼 우뚝 솟은 문장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바람이라도 타고 훌훌 날아오르고 싶은 활달한 심회가 걸림이 없이 확 트여있다.
宵分坐無寐(소분좌무매) 밤중에 앉아 잠 못 이루는데
水鑑海天開(수감해천개) 맑은 거울 바다 같은 하늘이 열리네
咫尺蓬壺影(지척봉호영) 지척에 봉래산 그림자
神仙來不來(신선래불래) 신선은 올 듯 아니 오네
상주 노음산의 절정에 있던 공암(孔菴)의 시에도 그의 청고한 시혼이 베어 나온다. 산 위 암자에서 맞이한 밤풍경이다. 잠 못 이루는 밤, 거울같이 맑은 바다같은 하늘이 열리고 어디선가 신선이 올 것 같은 상념에 젖은 밤의 정회가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기문 사사헌기(四事軒記)를 보자.
우리 이후 익저(李侯益著)가 여러 번 사무가 많은 읍을 다스려 빠른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올봄에 우리 상주에 부임하여 호령하고 영을 시행하되 폐단을 제거하고 이익됨을 일으키니 관리들이 귀신이라 칭하고 백성들은 즐겨 자기 업에 종사하였다. 매각(梅閣)의 앞에 예부터 작은 못이 있었는데 물이 탁하고 진흙탕이어서 우리 후(侯)가 ‘틔워 전답에 물 대는데 소용없는 못이라 그것은 있어서 방해만 된다. 이 같은 즉 매워 흙을 채워 꽃을 심고 대나무를 심으리라’하였다. 연못의 북쪽에 영벽당(影碧堂)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에 무너지고 있은 즉 깨끗이 철거하여 새로 지었다.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이에 일이 끝남을 고하였다. 우리 侯가 ‘영벽당이란 이름은 실(實)이 없다’ 하고 현액을 사사헌(四事軒)으로 바꾸고 인하여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 청하며, ‘몸은 염결(廉潔, 청렴하고 결백함)로 다스리고 백성은 어짊으로써 어루만지며 마음은 공(公, 여러 사람에 관계되는 국가나 사회의 일)으로써 지니고 일은 근면함으로써 직분을 다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이른바 사사(四事)다. 이름과 말이 여기 있으니 하여금 반우(盤盂)의 경계로 삼는 것이 또한 옳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내가 흥기하여 대답하기를, ‘이 같은 지고, 우리 侯의 뜻 성함이여. 옛날 일두(一蠹 정여창) 정선생이 안음현(安陰縣)의 현감이 되어 광풍루(光風樓)와 제월당(霽月堂)을 지었는데 그 뜻은 치인의 도는 수기(修己)하는 방법에 근본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드시 가슴을 깨끗하게 하여 한 점의 인욕(人欲)의 누됨이 없이 한 연후라야 거의 이룰 뿐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것을 잇는 자가 드물어 곧 사통으로 통하는 도시와 대읍에 누각(樓閣)과 대사(臺榭)의 경승은 많지 않음이 아니나 단지 완상하고 눈으로 즐기는 자료가 될 뿐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술(術)과는 관계가 없은 즉, 무익할 뿐만이 아니라, 실이 없어 직책을 비워 일을 폐하는 데 돌아감을 면치 못한다. 우리 후는 구중(九重, 王)의 근심을 나누고 백리의 교화를 펴서 그 지조를 청고(淸苦)히 하고 후매(呴沬)한 즉, 어느 뉘 이 염결(廉潔)과 같으며 어느 뉘 이 인(仁)과 같으랴. 혹시라도 치우치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감히 안락하게 놀기만 즐기지 아니한즉 어느 뉘 이 공(公)과 같으며 어느 뉘 이 근(勤)과 같으리, 그리고도 오히려 내 일이 미진하여 이 사자(四字)에 부끄러움이 있는 까닭에 이에 마루에 편액을 걸고 이름을 돌아보아 의리를 생각함으로써 밤낮 수용의 자리로 삼으며 어찌 실지상의 사람 일하는 것이 아니랴. 사사(四事)의 이름이 비록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갠 뒤의 바람과 달)의 기상과는 같지 않으나 눈으로 보아 스스로 청치(淸致)를 완상한다하고 세상일을 소홀히 하는 자와는 서로 거리가 먼 것이다. 뒷날 이 마루에 올라 이 백성을 기르는 사람은 능히 우리 후(侯)를 체험할지니 상민(商民)의 복은 다 함이 있으랴. 도리어 이를 생각하리라. 해그름에 관아가 파하여 아전이 흩어지니 뜰은 비고 산이 달을 멀리서 토하니 화각(畫角, 뿔피리)소리는 그치고 정신을 모아 조용히 않았으니 의상은 초연한 즉 이른 바 염인공근(廉仁公勤)의 쓰임이 일찍이 광풍제월의 근본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다. 우리 侯는 이를 점검(點檢)하라. 1702년 맹동(孟冬)에 창녕 성만징이 기(記)하다.
기문의 빼어남을 읽을 수 있다. 목사 이(李) 후(익저)의 치적을 칭찬하고 못의 변경과 서정적 취향의 영벽당의 이름을 사사헌으로 바꿈으로써 실용정신과 다스리는 사람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영벽당의 이름에는 속 실의 내용으로 열매나 씨로서 참으로 차 있는 충만함이 없기에 사사헌으로 바꾸었다. 사사란 나의 다스림과 백성의 어루만짐 및 공인으로서 부지런하게 직분을 다한다는 것이니 사사의 진실된 면을 보게 한다. 이것과 견주기를 일두 선생이 안음현의 현감이 되어 광풍루와 제월당을 지어서 치인의 도가 수기의 방법과 다르지 않음을 일러 주었다. 아울러 비 갠 뒤의 바람과 달의 해맑은 모습에서 세상일을 맑고 아름답게 하는 자세를 본 것이다. 염인공근(廉仁公勤) 즉 사사(四事)의 쓰임이 광풍제월의 근본에서 비롯했음을 이르고 있다. 영벽당→사사헌(염인공근, 廉仁公勤)→일두의 광풍루와 제월당(광풍제월)→사사로 이어지는 완벽한 구조와 내용에 합당한 논리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글이란 도를 꿰뚫어 담는 그릇이라(文者貫道之器也)이라는 말을 가장 정치하게 실현한 추담의 맑고 고아한 시 정신이 녹아 있음을 확인케 한다.
그의 시 보문고사(普門古寺) 한 편을 더 보자.
古寺千年在(고사천년재) 옛절은 천년을 있었는데
僧空室半頹(승공실반퇴) 중은 없고 절은 반이나 무너졌네
鳥啼迎客至(조제영객지) 새는 손님을 맞아 지저귀는데
依舊木蓮開(의구모련개) 예대로 목련은 피네
인간세상의 변화와 자연계의 항존(恒存)을 대비시켜 보문의 옛 절에서 느낀 정서와 회포를 드러냈다. 새 울고 꽃 피는 자연의 순리와 영원성을 노래함으로써 인생의 무상을 실감케 한다. 그가 시에 능한 큰 인물(大手)이었음을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명가의 후예로 성리학(예설)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으로 일가를 이룬 선비로서 의지에 찬 청고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 각주는 다음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상주를 빛낸 사람들Ⅳ 상주의 인물 |
발행일 : 2015년 12월 일 발행처 : 상주문화원 발행인 : 원장 김철수 인 쇄 : 한 일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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