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상주, 함창 태봉리는 민족의 성지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산신문 취재본부장
강 효 일
1. 들어 가면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던 남명 조식선생은 조선 제13대 명종 10년(1555) 단성현감 직을 거절하며 죽음을 불사한 “을묘사직소”의 직언은 우리 역사에 매우 중요하다.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벌써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멀어져 버렸습니다. ......(중략)...... 낮은 벼슬 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 질이나 즐기고 높은 벼슬 아치는 위에서 대충대충 하면서 오로지 재물만 늘리고 있습니다. ......(중략)...... 자전(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자손일 뿐이니 백천 가지의 천재와 억만 갈래의 민심을 어떻게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남명 조식선생은 하급관리인 서리들이 나라의 재산을 빼돌리고 백성들을 갉아먹고 있다는 “서리망국론”을 펴기도 했다. 백성은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신분이 낮은 그 많은 백성들에게 삼정(三政)이란 세금으로 재산을 착취하고 소수의 대민(양반ㆍ사대부)이 수많은 백성 소민(상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다가 봉건사회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부정부패를 방치하여 1592년 임진왜란 전쟁에서 조선 봉건사회는 철저하게 무너졌다.
조선은 무너진 봉건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 <향약(鄕約)>과 <계(稧)모임>을 만들었으나 복원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제19대 숙종 원년(1674)에 백성을 지배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만들었다. 전국에 사립학교인 서원을 세우고 서원에서 삼정의 부정부패가 발생하였다.
조선은 농민의 생존권 위협을 계속 방치하여 오다가 1862년 임술 농민항쟁이 전국으로 번지자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상주목 공성현 “소리” 농민항쟁은 대민(양반토호세력)의 가옥 100호를 소민이 불태웠고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조선은 1866년 천주교 병인박해 때에도 무력으로 진압하여 약 1만 명의 사람이 살해되니 인간의 평등권은 회복할 수 없었다. 그 뒤, 1891년 상주 함창 농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남명 조식선생의 을묘사직소와 같이 높은 벼슬아치와 낮은 벼슬아치들이 1550년부터 조선 후기까지 삼정 문란과 부정 부패가 농민들의 생존권을 계속 위협하여 왔다. 상주지역에서도 이와 같았다.
조선과 일본은 국교 확대이후 1889년의 천년 상주목의 부정부패와 농민항쟁 역사가 연세대학교 1991년 동방학지 제70호 66쪽~70쪽 신영우 교수의 논문에서, “김산(김천시)의 쌀값이 급상승하게 된 것은 조선과 일본 무역확대에 따른 쌀값 변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국내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면서 충청도와 경기도의 쌀값이 폭등하자 천년 상주 지역과 함창 지역의 쌀이 위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이곳의 쌀값이 폭등하였다. 상주 관원과 함창 관원들이 쌀을 수출하기 위해 생산자 농민을 착취하였다”고 하였다.
농민들의 생존권에 관한 사실은 1891년 함창 농민항쟁이 발생하게 되자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894년 상주 관아에는 동학 농민군 수천 명이 무혈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은 상주 낙동과 함창 태봉에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민보군(토호 양반세력)과 합세하여 1894. 9. 28. ~ 12. 21.까지 가장 추운 겨울에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반격도 있었다. 1894년 음 8월 21일, 영남지역 서북부에서 13접주가 회합을 하였다. 그리고 산양에서 취회를 한 후 농민군은 함창 태봉리 일본 병참부를 습격하여 죽내 대위를 처형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천년 상주 지역의 부정부패를 저지른 토호 세력들에게 상주 관아를 점령하여 넘겨주니 일본군의 농민학살 만행은 역사에 은폐되고 부정 부패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일본군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체찰사 운강 이강년(李康秊) 장군은, 1896. 1. 11. 고향인 가은에서 가산(家産)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 그날, 안동 관찰사 김석중, 순검 이호윤, 같은 김인담을 체포하여 가은 농암 장터 군중 앞에서 그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고 참수하였다. 이는 광복 39년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 같은 날, 이강년 장군 의병대는 서상열, 원용점 의병대, 김도화 의병대와 합류하여 예천군수 유인형(상주진영장, 낙동 일본군 도움 요청), 의성군수 이관영(상주 공성 북접 동학법사 변절 농민군 학살), 영덕군수 정재관 등 매국노를 응징하였다.
위 같은 해, 3. 26. 제천, 안동, 선성, 봉화, 영주, 순흥, 풍기 등 7개 군의 의병대가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4일간 공격하였다. 의병대가 4일간 계속 공격하게 되자, 같은 달 29일 대구에서 증파되어 오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병대는 예천, 풍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때부터 함창 태봉의 민족정신과 독립군 의병대 정신이 이어져 이곳에서 많은 애국지사가 있게 되었다. 당시 상주의 애국지사는 전 세계에 민족정신을 빛낸 역사적 인물이었다.
2. 천년 상주목의 함창 태봉 역사
한국 한글학회가 지은『한국지명총람』제5권 경북편 제2편 제189쪽의 특수지역 <함창현> 지명은, ⑴ 고령 가야국(古寧伽倻國), ⑵ 함녕(咸寧), ⑶ 고릉(古陵) <폐현> 본래 고령 가야국인데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 또는 고릉(古陵)이라고 하고,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고녕(古寧)으로 고쳤으며, 고려 제4대 광종 15년(964)에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치고, 고려 제8대 현종 9년(1018)에 상주(尙州)에 붙였다가 뒤에 함창(咸昌)으로 고쳤다. 고려 제19대 명종 2년(1171)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조 제3대 태종 13년(1416)에 감현(監縣)으로 고치고, 제26대 고종 32년(1895)에 함창군(咸昌郡)이 되어 동면, 남면, 상서면, 수상면, 수하면, 북면 등 6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상주군에 편입되었다.
함창읍 태봉리는 고랄들, 굼들, 덕통마을, 보리들, 새잦들, 성골산, 태봉산(작은 동산, 105.5m)이 있다. 태봉리에 있는 태봉산은 조선 제14대 선조(宣祖)의 12남 인흥군(仁興君, 1604~1651)으로서 출생 시의 태(胎)를 태함을 만들어 봉하여 전해오다가 1930년 5월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대 왕실의 태실(胎室)을 서삼릉으로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이봉함에 따라 태실의 흔적은 없다. 정상에는 이름 모를 분묘(墳墓) 1기와 노송(老松) 한 그루 뿐이다. 인흥군의 모(母)는 정빈민씨(靜嬪閔氏)이다.
3. 일제 침략으로 천년 상주와 함창 역사는 없어지고
끝났다.
일제의 침략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동학농민군 약 20만 명을 철저하게 괴멸시키고, 고종 32년(1895) 5월 26일 조선 정부는 지방행정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천년 상주목은 없어지고 상주군과 함창군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때 안동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어 안동부는 일본이 만든 초대 관찰사 김석중(金奭中, 상주목 동학농민군 진압 유격장)이 임명되고 이 때부터 일제가 만든 안동부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상주는 구당 조목수(趙沐洙) 선생이 정조 10년(1786)에 찬술한『상산지(商山誌)』「구당본」을 상주박물관 번역본 제36쪽 천년 상주목 관원은 823명으로 되어 있다.
같은 구당본 제55쪽~56쪽 <군액> 훈련도감에는, 포보 413명을 비롯하여 합계 11,217명의 상주진영 군사가 있었으나, 일본 침략자들은 관원 823명과 군사 11,217명 모두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1912~1918년 사이에 상주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687년에 석축된 상주성의 성곽과 성안에 있는 수많은 관아(관청)를 모두 철거하여 논과 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행위는 1895년에 시행된 ‘한말(韓末) 지방제도의 개편(칙령 제98호)’에 따라 천년 상주목을 상주군으로 강등시켜 안동부 관할 구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이어져 왔으며 현재까지 일본의 그 정책이 이어져 천년 상주목은 복원되지 못하고 일본 침략자들의 그 정책이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현재의 상주는 일제침략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상주가 아직까지 농촌지역이 되어있는 모든 책임은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정부에 있으며 막대한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
4. 함창 농민항쟁과 상주목 동학농민혁명
상주 함창 농민항쟁의 문헌은 ‘한국역사 연구회’가 발행한 <1894년 농민전쟁연구 제1권 365쪽 1991년 7월 16일 발행>, <제2권 369쪽 1992년 5월 30일 발행>, <제3권 376쪽 1993년 2월 20일 발행>을 하였는데 집필자는 30명이 참여하였다. 위 제2권 제303쪽 연세대학교 백승철의 <개항이후 1876~1893년 농민항쟁의 전개와 지향> 제24쪽~328쪽에, 함창 농민항쟁 역사적 사실과 송찬섭 선생이 2013.11.7. 함창농민항쟁 “관남지에 묻힌 함성” 182쪽을 발표하였다.
위 함창 농민항쟁은 함창 관아의 다양한 농민 수탈과 문제의 근원이 된 사마소(司馬所) 중건과 사마소의 경관을 위해 태연정과 선월정 정자가 있는 관남지 못을 준설하는 그 비용과 일을 하는 부역때문에 농민항쟁이 1891년 8월 2일~21일까지 19일간 농민 수천 명이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때 경상감영의 지시가 무력 진압으로서 관아에서는 주동자 등 22명을 체포하였다. 함창 관아의 관원 <신태선 현감>, <이방 김규목>, <향인 유광수, 권홍일, 이만기>, <진사 김면수, 김홍묵>, <수교 김정수>, <용궁녀 김정수의 첩> 등은 함창 관아에서 부정부패의 실세였다.
농민항쟁에서 함창 관아의 읍리(邑吏) “유칠준”이 함창 고을의 폐단에 관한 것을 써서 농민 수천 명에 앞장 선 남노선에게 주고, 남노선은 이에 터잡아 글을 써서 등소(고소장)를 함창현감에게 올렸다. 폐단 내용은,
“…… 함창현감 신태선이 부임한 지 두 해동안 교활한 이서 김규목과 향인 유광수, 권홍일, 이만기 그리고 진사 김면수, 김홍묵, 퇴기 용궁녀가 서로 짝이 되어 경계 내에 부유한 자에게 무고히 죄를 만들어 재산을 빼앗아 집안이 망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돈을 빼앗은 액수가 5, 6만 냥이어서 울부짖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민심이 들끓었습니다. 이방 김규목의 종용에 빠져 세금이 사라진 것이 4, 5천 냥인데 상납을 채울 길이 없자 향반 대 여섯이 짜고 관에서 필요한 “재용”이라며 결당 1냥씩 더 보태어 마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고을 사람들이 스스로 보태기로 한 양, 사람을 시켜 경상감영에 소장을 올렸는데 허락을 받지 못하자 일단 멈추었습니다. 김규목은 여러 가지로 계책을 써서 다시 향회를 열어 못을 파는 명령을 내리고, 양반과 상민은 물론하고 부역하도록 하여 채찍질 소리가 낭자하였습니다. 또한 군졸들이 끊이지 않고 들락그려서 이 때문에 집에는 닭과 개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김규목은 못 아래 작자들에게 2백 냥을 거두어 몰래 혼자 먹었으며, 호포 분배는 양반 집은 8전, 평민 집은 1냥 6전을 더 배정하여 농민들이 이를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생사를 돌보지 않고 모여 무리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함창 땅의 인민들이 김규목의 고기를 원하니 그 죄상을 살펴보면, 소 터럭을 뽑듯이 이루다 셀 수 없습니다. 일일이 바르게 조사하여 다시 채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올렸다.
이에 대한 경상감영과 상주목 관아와 함창현 관아에서 무력으로 농민 수천 명을 진압하고 농민항쟁의 지도자 남노선⋅남일원⋅이장화를 효수하고, 유칠준⋅김규목을 원악도에 정배하고, 유광수⋅이장운⋅채원군은 원악지에 유배하고, 박새상⋅박형식⋅정맹원⋅금영구⋅이만기⋅권횽일 등은 정배하고, 김의식⋅강천일⋅이복득⋅이근의⋅김종항⋅강신오⋅유성준⋅채상진⋅이기섭⋅신의구⋅신문희는 징계에서 석방되었다. 남노선⋅남일원⋅이장화는 상주진에서 360리나 떨어진 머나먼 진주목의 진주성에 1891.11.17. 도착, 효수되었다. 이곳은 1862년 임술 농민항쟁 때 상주 농민 지도자 정나귀도 진주에서 효수되었다.
함창에도 농민항쟁이 있었으나 부정부패는 계속 이어졌다. 함창 농민항쟁이 1891년에 있은 3년 후, 1894년 상주에 상주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다. 이에 관하여 연세대학교 신영우교수 동학지 제51권 195~236쪽. 같은 제52권 123~145쪽의 논문과 김석중의 토비대략, 소모사 정의묵의 소모일기에 지금의 상주동학농민혁명 기록이 있다. 수 천 명이 상주목의 상주성 관아를 1894.9.22. 무혈 점령하였다.
이때 농민군은 상주 대설위 향교 밑에 봉대마을 99칸의 기와집을 기둥에 밧줄을 걸어 당겨서 넘어 뜨렸다. 이것은 상주에서 토호세력으로 진주 강씨가 지목되어 기와집이 무너졌다는 기록이다.
상주동학농민혁명은 1894.9.22.~12.21. 사이에 약 2,800여 명을 일본군과 민보군(토호양반⋅관군)이 동학농민군을 마구잡이 학살을 자행하였다. 농민항쟁의 원인 제공은 조선 전국 각 지역마다 삼정문란 부정부패로 1862년 임술 농민항쟁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왔다. 조선 사회는 강력한 신분제도와 인간 평등권 회복을 철저히 배척하면서 인간을 노예화하는 그러한 사회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모순으로 또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791 신해교난>⋅<1801 신유교난>⋅<1715 을해교난>⋅<1827 정해교난>⋅<1839 기해교난>⋅<1846 병오교난>⋅<1866 병인교난> 등에서 사회적 모순과 부정부패에 관한 범죄는, 백성이 배를 주리고, 슬픔에 울고, 질병에 괴로워하고, 천대와 억압에 신음하는 것이 전국 관아에서 일어났고, 조선 25대 철종 13년(1862) 농민항쟁은 경상도⋅충청도⋅전라도⋅황해도⋅함경도 등 37개 각 지역에서 삼정문란으로 인한 부정부패에 대한 농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러한 부정부패와 신분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인륜을 어기고 천륜을 어겨서 하늘에 빌 곳이 없는 큰 죄악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유학인들은 인간평등을 철저히 배척하는 범죄가 계속 이어져 오다가 1894년 일본군을 앞세워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함으로써 조선 정부는 일본과 싸우지도 못하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 지배를 받아 온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16세기부터 임진왜란이란 전쟁으로 봉건사회가 무너지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을 조선 정부가 이를 확충하기 위해 “서원(書院)”을 남설(濫設)하는 바람에 18세기 말 정조(正祖) 때에는 전국에 서원이 650여 개나 건립이 되어 있었다. 고종 8년(1871) 3월 20일,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들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그것에 대한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역을 피하려는 무리들의 “소굴”이 되어 국가 재정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농민들에게, 제사비용을 부담시키거나 행정에 압력을 가하는 등 그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에 관하여 대원군은 서원의 실체를 조사하게 하고 설립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에는 횡포가 극심하고 백성의 원성이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겼다. 유생들의 반발이 심하여 상소가 잇달았으나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孔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용서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로 맞섰다. 그리고 1871년에 전국의 650여 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이때 상주는 서원이 17개소인데 “모동의 옥동서원과 상주시내 흥암서원”을 제외한 그 나머지 15개소 서원은 철폐되었다.
5. 함창 태봉 일본병참부 만행
함창 관아(현, 함창읍사무소)에서 사벌면 퇴강리 쪽으로 약 2Km에 위치하고 있는 태봉리 태봉산(105.5m)에서 영강쪽으로 이어지는 솔밭에는 1894년 일본 병참부가 주둔하였다. 이곳의 일본 병참부에서도 농민을 체포하여 수없이 학살하는 만행의 역사를 태봉리 마을 사람들은 이에 증언하여 주었다.
상주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1994년 상주동학농민군 사적지를 조사할 때 태봉 마을 주민들은 일본군이 태봉산 솔밭에서 상주농민을 마구 학살한 사실을 증언하였다.
6. 태봉산 태봉리는 민족 독립운동 성지이다.
⑴ 태봉 이범호 선생 독립운동.
태봉산 태봉리에 1890년 6월 15일, 독립운동을 하신 민족독립운동 애국지사 이범호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의 자는 도흥, 호는 회강.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의 42대손으로 함창군 태봉리에 태어나셨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전해오는 함창 지역의 부정부패 때문에 있었던 농민항쟁과 출생지 태봉에 일본군이 주둔하여 농민을 마구 학살하는 만행을 수없이 전하여 들었고, 또한 나쁜 일본군을 보고 기억하여 애국지사의 길을 살았던 분이시다. 이범호 선생 나이 만 6세 때인 1896년 3월 26일 태봉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운강 이강년 장군 의병대가 4일간 전투를 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이범호 선생은 이러한 현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안동관찰사 김석중, 예천군수 유인형, 의성군수 이관영, 영덕군수 정재관 등이 독립군 의병에게 죽었다.
이범호 애국지사는 대한독립항일투쟁 총사 하권에서,
“…… 이범호 선생의 일명은 도흥, 회강이며, 서기 1890년 6월 15일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태봉리에서 출생하여 한문서당에 수학하였다. 서기 1908년에 일본 신호에서 사립학교를 다니고 귀국하여 함창군청 교원으로 있다가 노령쌍성자로 가서 공산주의자로 활약했으며 일제의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던 사람이다 ……”
라고, 조선총독부 경무국에는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⑵ 태봉리 인근 척동리 권준 장군의 독립운동
권준(權晙, 1895.5.2.~1959.10.27.) 장군은 태봉리 일본 병참부가 인접해 있는 척동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린 시절 역시 일본군을 보면서 보냈다. 척동리에서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장군은 1921년 북경에서 의열단을 창단하여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종로경찰서, 총독부, 동척 등의 폭파사건과 도쿄 이중교의 폭탄 투척 사건에 대하여 자금조달에 책임을 지고 활약하던 중 국내에 잠입하다가 일정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고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4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 동지를 규합하여 한국인 군사학교를 설립.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장군은 루한지역에서 한국인 의용군의 비서장으로 중·일 전쟁 최전선에서 싸웠다. 1944년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서 재직 중 8·15 광복을 맞이하여 무한지구 교포선무단장과 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광복군 제5지대원을 귀국시킨 후 중국 국방부 소장전문위원으로 취임하였다가 연장, 영장, 단장 등을 역임, 중국 육군 87사 부사장으로 버마 지국에서 활약하였다. 귀국 후 장군은 육군에 입대, 수도경비사령관 제3관구 사령관 등을 역임, 육군 소장으로 퇴역하였다. 장군은 1955년 10월 27일 영면하였다.
7. 맺는 말
조선조에 남명 조식선생이 죽음을 불사한 “을묘사직소”의 직언과 같이 “서리망국론” 이후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까지 봉건국가를 유지시키는 봉건사회가 철저하게 무너지자 조선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을 확인할 수 없다. 오직 양반과 사대부의 향약과 서원, 계 모임, 오가작통법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삼정문란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화되었고, 농민의 생존권 문제가 수백 년 이어져 오다가 조선조 철종 시대인 1862년 임술년 농민항쟁이 전국에 걸쳐 발생하였고 이에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또한, 1866년 천주교 병인박해는 약 1만 명이 살해되었고, 1867년에는 전국에서 650개 서원철폐가 있었고, 1876년 조일수호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농산물의 가격 상승과 농촌의 빈곤때문에 각 지역마다 농민항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백성을 위하는 정책은 없고 각 지역의 봉건사회 지도층은 일본군의 도움으로 농민항쟁을 진압하고 양반과 사대부는 봉건사회를 유지하는 역사적 잘못이 있었다. 국가를 지키는 농민 수 십만 명을 마구 학살한 후 일본에게 식민지가 되었고, 그 이후로 식민지의 역사는 지워지지 않았다.
봉건국가와 봉건사회의 신분제도로 인하여 각 지역마다 백성들의 모습은 배를 주리고, 슬픔에 울고, 질병에 괴로워하고, 천대와 억압에 신음하는 목소리는 듣지 아니하고, 온갖 모양의 억눌림, 의롭지 못하는 인권유린과 부정부패는 계속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살기위해 배신자가 생기고, 밀고자가 생기고, 원수가 생겼다. 쫒고, 달아나고, 죽고 죽였다. 가산을 빼앗긴 채 유리 방황하게 되고, 굶어 죽은 자, 얼어 죽은 자, 병을 얻어 죽은 자, 억울하게 죽은 자 등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의 만행은 조선 사회 전 지역에 걸쳐 자행되자 이것 때문에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즉, 세계 역사에 빛나는 전투 중의 하나가 함창 태봉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군과 싸운 전투였다. 이 전투는 대한민국의 민족정신을 세계에 보여준 자랑스러운 역사다. 이 역사는 애국지사와 민족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우리 역사에 1891년 부정부패에 항거한 함창농민 항쟁에서 남노선, 이장화, 남일원 등은 진주목 관에서 군무효수로 처형되었다.
우리는 함창 농민항쟁과 상주동학 농민혁명, 상주 낙동에 주둔했던 일본군과 함창 태봉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수천 명의 농민을 학살하는 죽임을 당하고 우리의 억울함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웠던 빛나는 태봉 역사는 민족정신을 세계 역사에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천년 상주의 모든 역사와 문화의 파기는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정부가 복원하여야 할 책임이 있으며, 이에 우리는 거룩했던 민족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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