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조합 설립과 상주군내 금융조합 연구
지적박물관장
리 진 호
1. 머리글
일제 때 농촌의 금융과 고리채 정리, 농촌 진흥에 기여한 금융조합에 대하여 살펴보고 상주군에서 운영되었던 지방금융조합의 연혁과 조합장, 이사의 이력을 번역 정리하는 것이 이 논문을 쓰는 목적이다.
금융조합에 관한 중요 저서는 한국측은 최재영『식민지조선의 사회 경제와 금융조합』(2006), 이경란,『일제하 금융조합연구』(2002), 고승제『한국금융사연구』(1982), 이석륜,『한국화폐금융사연구』(1984), 서광운,『한국금융백년』(1973), 윤석범,『한국근대금융사 연구』(1996)가 있고 압권은 최재영의 저서이다.
일본문헌은 후지사와 세이지로우(藤澤淸次郞)의 『朝鮮金融組合と人物』(1937), 조선금융조합협회『조선금융조합협회사』(1934), 동『조선금융조합의 현세』(1937), 아키다 유타카(秋田 豊)『조선금융조합사』(1929), 야마네(山本 譓)『조선금융조합협회사』(1934). 이마나리(今成政男),『朝鮮金融組合を語る』가 있는데 압권은 후지사와의 저서이다. 이외에 우방협회의『조선금융조합 회고록』(1984)과 그 속편(1986)이 있다.
이들을 정독하여 필요한 것은 간추렸고, 금융조합에 대하여 긍정, 부정 양면을 다 싣고 분석을 하였다.
금융조합에 대하여 일제는 선정중의 하나라 하고 이석륜은 “관습적인 신용수단이나 금융기구를 폐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금융을 핍박한 사정이 되었다”(479쪽)고 하였다.
금융조합이 생기기 전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조직한 계조직은 금융조합 설립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조합으로 인하여 금융이 핍박하게 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동의할 수 없다. 이는 전술한 것과 같이 고리채 정리나 농촌 잘살기 운동에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2. 농공은행 설립과 소멸
메가타 다네타로우(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은 1906년 한국정부로 하여금 농공은행 조례를 발표토록 하였다. 이것이 1906년 4월 21일 칙령 제13호로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민영기 명의로 공포한 전문 30조의 농공은행 조례이다. 농업․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하여 자본을 대부하는 것이 목적(제1조)이라고 하였다. 메가타는 일본의 농공은행 제도를 한국에 옮긴 것이다. 1907년에 한성, 대구, 전주, 진주, 광주, 충주, 해주, 경성(鏡城), 1908년에 공주와 함흥에 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 이 해에 메가타는 갑자기 계획을 수정하여 충주와 공주농공은행을 경성에 합병하여 한호농공은행으로 하는 등 각 도 은행을 합병하였는데 이는 “자본의 충실과 규모의 확장”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다. 메가타는 일본 흥업은행과 한국의 농공은행이 발행하는 채권을 인수하여 5년 동안 상환토록 협정을 하였다. 이로서 한국의 농공은행은 일본 흥업은행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흥업은행은 재원이 없어 이를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한국의 농공은행은 극도의 자본 빈약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농공 채권을 팔려고 하였으나 10주를 산 상인이 소용이 없다하여 그 주권에 인삼 1근을 붙여서 다른 사람에게 선사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설립취지를 망각하고 일본 이민들의 사업자금을 공급하는 척식은행으로 활용하였다. 1918년 6월에 조선총독은 조선식산은행령을 공포하였고 농공은행은 이에 흡수되었다. 한국인의 자본으로 설립된 농공은행은 일본인을 위한 은행으로 되었다. 일본 자금으로 농공은행을 설립하려는 정책이 실패하자 대한제국 예산으로 세운 것이 금융조합이다.
3. 금융조합 설립
메가타 다네타로우(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은 농공은행의 설립만으로는 농민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소농민의 상조를 정신으로 하는 금융기관을 설치하는 것이 적당한 정책이라고 하여 성안을 하였다. 이를 1906년 4월 이토우 히로부미 통감에게 창립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자 통감은 크게 찬동하고 더하여 조선 재래의 계의 정신을 근기로 하는 제도는 지금 초미의 급선무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금융조합은 “조선의 계를 근기로” 만든 제도임이 확실하다. 메가타가 창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메가타는 곧 그 요령을 만들어 한국정부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1. 2, 3개 군에 1개소의 금융조합을 설치한다.
2. 정부는 각 조합에 무이자로 1만원을 대부하고 그 필요가 없게 되면 반환한다.
3. 대부는 대인 신용대부로 한다.
4. 대부는 소액 단기로 한다.
5. 각 조합에 지배인으로 일본인 1명을 두고 급료는 당분간 정부에서 지급한다.
6. 일본인에 대하여는 따로 계획한다.
7. 자금의 용도는 농업과 토목, 수리에 그친다.
8. 각 조합에서는 농업기수를 연합하여 채용하여 농사 개량의 업무를 담당시킨다. 다행히 한국정부는 재정고문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1907년 5월 30일 칙령 제33호로 참정대신 이완용과 탁지부대신 고영희는 전문 14조의 지방금융조합규칙을 공포하였다. 중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농민의 금융을 완화하고 농업의 발달을 기도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한다(제1조). 업무는 조합원에 대하여 농업상 필요한 자금을 대여, 조합원이 생산한 곡류를 보관하는 일과 종묘, 비료 등의 재료 분배나 대여, 생산물을 위탁 판매하는 일이다.(제4조)
지방금융조합의 자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정부는 약간 금액을 교부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탁지부대신은 추천한 이사 1인으로 조합의 상무를 집행케 한다(제7조) 지방금융조합의 업무는 탁지부대신의 감독에 속한다.(제12조) <탁지부 대신이 추천하는 이사>는 후술하는 일본인 이사를 말한다.
이 규칙은 …메가타가 기안한 것이기 때문에 대한제국정부의 의도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대한제국정부와 협의하에 결정한 것이므로 그 속에서 정부의 금융구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1907년 5월 15일 지방금융조합에 관한 세조설명, 같은 해 7월 13일 지방금융조합업무집행내규를 공포하였다.
1914년 5월 22일 제령 제22호로 지방금융조합령(전문 95조, 시행은 1914년 9월 1일)을 공포하여 법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당시 탁지부장관 아라이 겐타로우(荒井賢太郞)는 제정 이유에 대하여 “종래 조선의 계제도와 구주 제국의 조합 제도를 참작하여 병폐된 농민에게 저리자금을 공급하여 금융을 완화하고 농사의 개량 발달을 기도하기 위한 창설 …”한다고 하였다.
1918년 6월 27일 제령 제13호로 지방금융조합령을 개정할 때 <…도를 구역으로 하는 금융조합연합회를 설립할 수 있다>고 하여 도 단위 연합회가 새로 설립되었다.(제9조의2~제93조의2) 1911년 12월 19일 조선총독부령 제152호로 지방금융조합규정을 발포하였다.
1914년 8월 지방금융조합회가 서울에 탄생하였다. 이곳에서는 주로 <지방금융조합회>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였다. 이회는 1919년 5월 조선경제협회로 개편하여 잡지 <금융과 경제>를 발행하였다. 그 목적은 금융재정사항을 조사 연구하는 것이다. 1928년 이 협회를 개편하여 재단법인 조선금융조합회가 되었다. 전국 금융조합과 동 연합회의 중앙기관이다. 위 협회 기부행위에 의하면 금융조합과 금융조합연합회의 발달과 연락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조선금융조합회연합회 본부(현 농업박물관)자료 :『朝鮮金融組合を語る』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경북지부.자료;『조선금융조합의 현세』
광복 후 조선군정장관 미육군소장 러취(A.L. Lerch)는 1946년 2월 21일 법령 제57호로 1946년 3월 2일부터 7일까지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금융조합연합회에 자연인 법인이 소유한 일본은행권을 예입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광복 후 잠시 휴면하였던 은행과 금융조합연합회가 업무를 개시하였음을 의미한다.
1946년 7월 2일 재무부장 미육군중좌 고든(C. Gordon)은 은행에 대한 훈령 제12호로 조선은행을 비롯한 각 은행과 금융조합연합회에 보조군표통화의 예입을 수리하고 예입된 액면가를 조선은행권으로 변상함을 지령하였다.(1항) 군표를 조선은행권으로 환전을 지령한 것이다.
1946년 4월 15일 조선군정장관 러취 미육군소장은 금융조합연합회 본부장과 각도 지부장을 아래와 같이 임명하였다.
이승방(李承邦) 본부장
박준동(朴浚東) 강원도 지부장
조병순(趙炳純) 충청북도 지부장
정재억(鄭在億) 충청남도 지부장
조일환(趙日煥) 전라북도 지부장
박영희(朴永喜) 전라남도 지부장
김영희(金英熹) 경상북도 지부장
박정규(朴禎奎) 경상남도 지부장
한양과 경기도 지부는 본부장이 관할한 것 같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1957년 2월 14일(시행은 같은 날짜) 법률 제437호로 농업은행법이 제정되었고 조선금융조합연합회령과 금융조합령은 본법 시행일부터 폐지하여(부칙 제64조) 농업은행에 인계하였다.(제65조)
1957년 2월 14일 농업은행법 제정일과 같은 날짜에 농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었고 시행은 3월 1일부터라고 하였다. 부칙에 조선농회령, 조선산업조합령은 폐지하며(제143조) 식산계령에 의한 식산계는 리동조합이, 금융조합에 의한 금융조합은 시군조합이, 조선금융조합령에 의한 대한금융조합연합회는 중앙회가, 조선통회령에 의한 대한농회와 특별시 및 도농회는 중앙회가, 시군 농회 중 일반 업무와 재산은 시군조합이, 축산과 원예 관계는 당해 시군구의 축산조합이 … 그 업무와 재산 일체를 인수하여 청산한다. 원예조합이 산업조합령에 의한 신용조합은 그 업종에 해당하는 각 특수조합이 조선중요물산동업조합령에 의한 동업조합으로서 본법에 의한 축산, 원예, 특수조합에 해당하는 조합은 각기 해당 축산조합, 원예조합, 특수조합이 그 업무와 재산일체를 인수하여 청산한다.(제2144조)
이렇게 금융조합과 연합회는 같은 날짜에 농업은행과 농업협동조합으로 계승되어 이원화로 운영하였다.
1961년 7월 29일 군사정부는 법령 제670호로 농업협동조합법을 제정하고 농업협동조합법과 농업은행법을 1961년 8월 15일 0시에 폐지하여(부칙 제3조) 일원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로서 조선 재래의 계를 이은 금융조합은 1907년 대한제국 때에 시작하여 한일합방까지 3년, 일제 때 35년, 광복 후 12년, 3시대의 격정기 50년을 지내고 변신을 한 것이다.
광주(光州) 재정고문지부에서는 1907년 5월 13일 탁지부대신의 훈령을 받아 곧 후지세(藤瀨)와 미스구치(水口隆三) 두 재무관보가 관내에 출장하여 조합원을 모집, 8월 10일 마감하니 1,000명이 넘었다. 8월 24일 관찰부 정당(正堂) 밑에서 오후 조선 최초의 금융조합 총회의 흔들 종을 울렸다.
각 군수와 총대 조합원이 착석하자 김규창(金奎昌) 관찰사가 훈시적 개회사를, 재무관 이노우에 마사지(井上雅二)가 경과보고를 하였다. 이어서 투표결과 조합장 최상진, 평의원 정재룡이 당선되어 최 조합장이 취임인사를 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금융조합 탄생이고 현 농협의 시초이기도 하다. 초대 조합장 최상진(崔相鎭)은 중추원 의관, 광주 농공은행 이사, 향교의 간부로서 일반 민중에게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명망가였다. 이후 전국의 조합장은 그 지방 덕망가가 되었다.
1907년 11월 1일 광주의 금융조합은 업무를 개시하였다. 1907년 말 현재 지방금융조합은 광주를 비롯하여, 수원, 나주, 상주, 경주, 성주, 밀양, 진주, 평양, 안주의 10개 조합이었다.
왜 일제는 전라남도 광주에 최초의 금융조합을 설치하였을까? 그 이유는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으나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일본 외무상이 재정지원을 하고 히가시 혼겐사(東本願寺)를 설립,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1898년 5월 광주실업학교 교장이 되어 농업과 양잠을 교육하였고 1905년 러일 전쟁 후 폐교하였다.(稻葉繼雄,『구한말 일어학교의 연구』, 九州大學출판회) 그후 2년 만에 광주금조를 설립하였으니 일제는 위 농업교육의 흔적에 세운 것 같다.
둘째, 전남은 평야지대이므로 전답이 많다. 따라서 금조의 대상지와 농민이 많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4. 조합장과 이사
지방금융(촌락)조합에서는 명목상 조합을 대표하는 조합장을 비롯한 임원으로 조선인이 많았고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로는 일본인이 다수 임명되었다. 1914년에 제정된 금융조합령에 의하면 조합장은 조합원이 선출하며 임기는 3년(제31조) 이사와 공동으로 금융조합을 대표한다.(제35조) 총회 소집권(제39조, 제40조) 총회 및 평의원 회의 의장이 된다.(제35조)
이천 금융조합 이사였던 이토우 구니오(伊藤國雄)의 회고에 의하면 “조합장은 실무는 전혀 보지 않는다. 조합장과 공동대표이지만 이사는 단독 대표권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이사는 식민지 조선의 ‘첨병’이라고 불리며 금융조합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 <세조설명>에 “조합의 업무는 이사에게 집행케 함”이라고 규정하였다. 메가타는 이들에게 “…많은 자금을 다루는 금융조합의 책임자로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훈시 할만큼 그는 불안하였다.
광주 금조의 최초의 이사는 오쿠다 다네히코(奧田種彦)였다. 그의 회고록을 옮긴다.
… 구례에 출장 가니 당시 통화는 엽전뿐이었다. 합방 전이니까 일본 화폐는 환영하지 않았다. 대부용으로 은화를 주니 받지 않아 지폐를 주니 “이는 종이가 아닌가?”하였다. … 그 때 식견이 있는 사람이 와서 “지폐 쪽이 편리하다”하니 이번에는 지폐로 바꿔 달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일본인 이사는 화폐개혁에도 일조를 하였다.
창립총회를 마친 조합에는 이사가 임명되었다. 그들 중 동양협회 부속 전문학교(척식대학 전신) 졸업생이 많았다. 1907년 초여름 위 학교 졸업생 30명이 위 협회 간사 가도타 마사쓰네(門田正經) 인솔로 조선에 와서 교육을 받은 후 지방 금융조합 설립의 임명을 받고 임지에 갔으며 조합 설립 후 당연히 조합의 이사가 되었다.
이 30명은 동양협회 전문학교라는 삼류급 사립대학 출신으로 … 한국 농민을 위하여 금융조합을 만들었는지, 위 학교 졸업생들의 취직을 위해 만들었는지 참뜻을 판별하기 어렵다고 고승제는 혹평하였다.
이 후에도 이사 채용은 계속되었다. 이토우 구니오는 1927년 조선총독부 채용의 이사 견습으로 대학전문학교 졸업생 약 80명이 신규 채용되었다. 모모자와 미쓰오(桃沢光雄)는 “1931년 함경북도의 이사 견습에 채용되어 그 해 이사 견습의 강습을 받고 종성(鐘城)의 금융조합 이사로 부임했다.
이사의 급료는 상당히 많았다. 본봉 55원, 수당 33원, 교제비 15원, 사택료 15원으로 모두 월 118원, 수석 서기는 60원 쯤, 상업학교 졸업 서기 초봉은 약 28원으로 다른 근로자의 급료보다 높은 편이었다. … 물가는 황소 1두에 30~50원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수석서기의 약 2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인 이사 중에는 직권 남용, 직무 착오 횡령 등으로 조합원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일이 있다. 메가타가 “위험하다”고 한 말이 적중이 되었다.
경기도 이천금융조합 니이로(新納時雄)는 근무를 제대로 하지 않고 조합원에 대하여 대부사업 폐지, 술에 취하여 다른 집 담을 무너뜨리거나 싸움을 하고 사무원을 마음대로 내보내는 등 조합장 이하 여러 사람이 경기도 금융조합연합회 회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동복(東福) 금융조합에서는 조합원 김성문이 30원을 갚으러 와서 상환하였으나 1원 50전이 부족하다며 가와시마 쥬키(川島中喜) 이사가 폭력을 휘둘렀다가 사과했다.
경기도 장단군 문산금융조합 이사 오카 곤삼(岡根三)는 1923년부터 1924년 봄까지 2만여원을 횡령하였다. 금능금융조합 모리야마(森山) 이사는 업무 착오로 이미 변제 완료된 채무에 대하여 지불명령과 집행 명령을 발행하였다.
총독부 당국에서는 문제의 이사에 대하여 미봉적인 것이 많았다. 다른 조합으로 전직시키고 무마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5. 상주군내 금융조합 연혁
상주군내 1937년 금융조합의 일람은 다음 표와 같다.
순서 | 조합명 | 주소 | 설립 때 | 조합장 | 이사 |
1 | 상산 | 상주읍 성하리 | 1907.11. 5 | 鄭東晩 | 마스하라 도모유키 (增原共之) |
2 | 화령 | 화서면 신봉리 | 1922. 9. 1 | 洪寅燮 | 李鍾龜 |
3 | 상주 | 상주읍 | 1922. 9.12 | 이나가키 도쿠사부로우 (稻垣德三郞) | 이와나가 슌이치 (岩永俊一) |
4 | 옥산 | 공성면 옥상리 | 1925.12. 9 | 石壽穆 | 야마구치 히사토 (山口壽人) |
5 | 낙동 | 낙동면 낙동리 | 1928.12.20 | 趙翼衍 | 金昌勳 |
6 | 모동 | 모동면 용호리 | 1930.10.24 | 鄭在燁 | 鄭學基 |
자료 ; 후지사와 세이지로우(藤澤淸次郞),『朝鮮金融組合と人物』, 대륙민우사, 1937
이사는 거의 일본인 차지인데 절반인 3개 조합의 이사가 한국인이다. 이는 드문 일이다. 1항 상산금융조합은 1907년 8월 24일 한국 최초의 금융조합인 광주지방금융조합이 창설된지 불과 2개월 12일만에 설립되었으니 초기의 촌락금융조합이다.
한국 촌락·도시금융조합은 합하여 부군별 개소가 많은 순서는 경성 12, 수원·포항·나주 9, 부산 8, 광주, 7, 대구·안동·상주·김천·정읍의 6개소이다. 군부의 금융조합 수가 대개 3개소인데 상주는 그 2배니까 많은 편이다.
제3항 상주금융조합은 도시금융조합이다.
당시 탁지부장관 스즈키 시즈키(鈴木 穆)의 개정령 설명은 아래와 같다.
… 하층 금융기관인 지방 금융조합령을 개선하여 소상공업자에 대한 금융 융통의 편리를 개척하고 둘이 맞물려 그 만전을 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행 지방 금융조합법령은 그 조합원은 오로지 농민에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소상공업자 특히 시가지의 업자는 전혀 가입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자산, 신용이 박약한 자는 보통 은행에서 융자하는 것은 한층 곤란한 사정이 있어 거의 금융권 밖에 고립된 감이 있다. 그래도 그들의 금융은 양은 많지 않지만 절실한 것이 적지 않다. 따라서 소상공업자는 밤낮으로 각고 고생하며 부지런히 일을 해도 자금의 가혹에 견딜 수 없으므로 전당포(質屋) 다노모시고우(賴母子講), 또는 고리대금업자에게 기대어 심한 불이익 하에 돈을 융통하는 부득이한 상태…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외되었던 도시의 소상공업자의 융자를 위하여 지방금융조합령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전의 금융조합은 구분상 촌락금융조합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사한 결과 1937년 현재 전국의 도시금융조합은 60개소였다. 상주금융조합은 그 중의 하나이다.
5.1. 상산금융조합
소재지. 상주읍 성하리
설립 때. 1907년 11월 5일
창립 당시는 상주, 함창, 문경, 용궁의 4개군이라는 광대한 구역이었으나 시세의 진전과 업무의 번창, 조합원의 증가에 따라 현재는 상주읍의 13개리와 사벌, 내서, 외서의 3개면이 되었다. 조합장은 초대 이경운, 박정준에 이어 현재는 정동만이다. 이사는 마쓰다 후미오(松田文雄), 다케다 하큐죠우(武田百藏), 오카이마 지로우(岡今治郞), 구라타 렌조우(倉田連藏), 시모 한사쿠(志茂半作), 시라하타 쥰조우(白幡準三), 가와무라 도시샤(河村時舍), 요무라 긴지로우(大村金次郞), 싱구우 모토다쓰(新宮本立), 마스하라 도모유키이다. 이들 이사와 조합장은 마음을 합하여 조합의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워낙 도내 제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니까 그 업적도 좋고 특히 지방의 개발, 산업 개선 진흥을 위하여 공헌한 바는 크다. 조합의 5년 간격 현황은 아래와 같다.
연도 종별 | 20년전 | 15년전 | 10년전 | 5년전 | 최근 |
조합원수 | 736 | 1,040 | 991 | 677 | 3,034 |
출자금 | 7천엔 | 10천엔 | 18천엔 | 12천엔 | 32천엔 |
적립금 | 6 | 9 | 28 | 38 | 9 |
차입금 | - | - | - | - | - |
예탁금 | - | 15 | 65 | 70 | 70 |
예 금 | 1 | 61 | 156 | 144 | 158 |
대출고 | 19 | 114 | 160 | 143 | 279 |
20년 전에 비하여 조합원 수는 4.1배, 예금은 158배, 대출고는 14.7배가 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조합장 정동만 ?~?. 생지 불명.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1927), 와서면장(1929), 젊은 민완가. 부락민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신지식에 의한 신시설을 행하는 것은 실로 기분이 좋다. 조합원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수완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도 역시 조합원의 경제 갱생에는 온 몸을 던져 노력하고 있다.
이사 마스하라 도모유키. ?~?. 히로시마현 출신. 다쿠쇼쿠(拓殖)대학을 졸업(1925), 젊은 조합장과 동년배니까 말도 통하고 일도 투합하여 착착 성적을 올리고 있다. 오랜 역사의 조합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점은 실로 대견스럽다. 부인 갱생부락, 양잠부락이라 하는 농진운동에는 절대적인 노력을 하여 향상되고 있다. 금융조합 이사가 되어(1930) 안계조합을 거쳐 상산조합 이사가 되었다.
5.2. 화령(化寧)금융조합
소재지. 화서면 신봉리
설립 때. 1922년 9월 1일
조합원의 약 6할이 자작 겸 소작농, 약 4할이 소작농이다. 화서, 화북 2면과 화동면의 일부(신설 당시는 면 일원)를 구역으로 하였다. 역대 조합장은 정동섭, 이선, 홍인섭(현)이고 이사는 이완의, 손태인, 이종구(현)의 노력 경영에 의하여 업적은 순조롭게 나가고 있다.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조합원의 부채정리, 자작농 창정, 저축 장려로 임원, 총대, 지도원에 의하여 지도의 철저를 꾀하는 것과 함께 각 상호 연대 조장에게 조원의 지도 통제를 시키고 있다. 상호 연대조의 보급 강화, 식우계의 조직, 식산계의 설치 등을 새로 했는데 장차는 식산계를 더 보급하여 판매 구매사업을 확장할 예정이다. 직원은 한순교, 윤주용, 정형묵, 정준곤, 이석준이다. 10년전부터 최근 현황은 아래와 같다.
연도 종별 | 10년전 | 5년전 | 최근 |
조합원수 | 822 | 850 | 1,965 |
출자금 | 9천엔 | 10천엔 | 21,130엔 |
적립금 | 6 | 10 | 21,619 |
차입금 | 74 | 100 | 203,112 |
예탁금 | 12 | 20 | 23,413 |
예 금 | 27 | 27 | 50,062 |
대출고 | 108 | 133 | 263,721 |
10년 전에 비하여 조합원수는 2.4배, 예금은 1.9배, 대출고는 2.4배가 늘었다.
조합장 홍인섭. 1886~?. 상주군 화서면 지산리 출신, 한문 수학(~1906), 서서면 서기부터 면협의원, 군학교평의원, 군농회 통상의원을 역임하였다. 공공사업에 기여 공헌하는 바 많고 화령조합평의원으로 서민금융 발전에 진력하였기 때문에 조합장에 천거되었다. 조합원의 증모와 예금 흡수에 전력을 쏟았고 조합원의 신뢰가 두터우며 명망이 높다. 주소는 출생지와 같다.
이사 이종구. 1902~?. 문경군 호서면 모전리 출신.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1927), 곧 금융조합에 들어가 창천금융조합 이사(1928), 이어서 화령금융조합으로 전근하였다. 취미는 바둑, 원예. 주소는 화서면 신봉리
5.3. 상주금융조합(도시금융조합)
소재지. 상주군 상주읍.
설립 때 1922년 9월 12일
설립 이래 얼마 안되었지만 그 성적은 매우 좋고 견실한 발전을 하였다. 조합원도 격증하고 갱생하는 조합원이 심히 많다. 발전의 원인은 조합장과 이사가 열심이고 연달(練達)된 인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임직원이 보좌를 열심히 하여 업적이 뚜렷하게 되었다. 대금의 합리화, 예금의 격증, 조합원의 부채 이탈 등 조합의 노력으로 현저한 발전을 한 것이다. 최근 조합의 현황은 아래와 같다.
연도 종별 | 최근 |
조합원수 | 718 |
출자금 | 29,500엔 |
대출금 | 267,365 |
예금 | 303,585 |
조합장 이나가키 도쿠사부로우. ?~?. 생지 불명. 조선적으로 명망있는 재계 상공계의 유지이다. 조합의 발전을 기하고 상주지방의 상공계 서민의 번영을 위하여 진력하여 동 조합 위대한 사업이 착착 발전하고 있다.
이와나가 슌이치(岩永俊一) ?~?. 상주금융조합 이사. 생지 불명. 와세다대학 상과 졸업, 내한(1924)하여 예안(현재 안동시) 금융조합, 감포금융조합 이사를 거쳐 상주금융조합 이사가 되었다(1933)」조합장과 이사가 다 일본인이다. 이는 상공업자는 일본인이 많고 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5.4. 옥산금융조합
소재지. 상주군 공성면 옥산리
설립 때. 1925년 12월 9일
상주군 공성, 모동, 모서 3개면이 구역이었으나 현재는 공성, 외남, 청리 3면이다. 전 조합장 송주하, 전 이사 모리 겐지(森謙治), 스다 아쓰시(須田 篤)와 현 직원의 활약으로 해마다 업무가 충실하게 되었다. 조합원은 중산계급이 좀 많고 경기가 회복되어 대체로 생활이 안정되었다. 협동조합 정신의 양양, 의무 이행의 확실, 고리채의 근절을 기하는 등 의지를 쏟고 임직원이 협력일치하여 지도원, 총대를 통제 지도하고 농촌진흥 자력갱생을 철저히 하는 것과 함께 조합 취지의 보급 철저에 노력하고 있다.
식산계 설립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업무구역 전반에 보급함과 함께 창고 건설, 공동 구입사업을 적극 알선하여 농촌금융을 조합만으로 인수하여 조합 전반이 이용할 계획이다. 직원은 김한정, 성효강, 김성필, 김종호
조합의 10년 전부터 5개년 간격 현황은 아래와 같다.
연도 종별 | 10년전 | 5년전 | 최근 |
조합원수 | 597 | 835 | 1,937 |
출자금 | 6천엔 | 9천엔 | 20천엔 |
적립금 | - | 11 | 13 |
차입금 | 45 | 104 | 161 |
예탁금 | 27 | 22 | 38 |
예 금 | 35 | 41 | 79 |
대출고 | 59 | 135 | 215 |
10년 전에 비하여 조합원수는 3.2배, 예금은 2.3배, 대출고는 3.6배 늘었다.
조합장 석수목 1888~?. 상주군 공성면 옥산리 출신. 상주직업전습소, 상주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치잠(稚蠶) 공동사육조 교사(1915), 공성면 서기(1917), 공성면장(1932), 공공을 위하여 힘쓴바 많고 농촌진흥 실행위원장 학무위원, 군농회 의원, 애부(愛婦)부인회 고문을 겸하고 있다. 장차 구역 내의 총인구를 조합에 포용하여 대가족으로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주소는 조합 주소와 같다.
이사 야마구치 히사토. 상주군 옥산금융조합 이사. 사이타마현 출신. 메이지대학 전문부 졸업, 다시 상학과를 졸업(1934.3), 내한하여 옥산금융조합 이사가 되었다(1934.3). 석수목 조합장과 협력하여 조합 번영에 힘을 썼다. 취미는 야구, 바둑.
5.5. 낙동금융조합
소재지. 상주군 낙동면 낙동리
설립 때. 1928년 12월 20일
업무구역은 상주군 낙동면, 중동의 2개면, 의성군 내밀면 3면이다. 지미는 비교적 좋고 주민이 거의 자작농으로 그 생활은 일반적으로 유복하게 보이지만 해마다 홍수를 당하여 그 때마다 피해가 막대하여 영농의 수입은 기대할 수 없다. 이 지방은 금광지대로서 노임으로 농민의 주머니는 얼마쯤 윤택한 상태이다. 역대 이사 강주석, 정학기, 김창훈이 설립 이후 일관된 지도방침을 계승 노력하여 조합은 발전 도상에 있다. 지도상황은 우선 지도원, 총대의 훈련 즉 지도 일선에 서서 인물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부락 간담회, 조장 타합회를 이용하여 조합 취지의 보급, 금융지도를 행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부업의 장려로서 가내 공업인 가마니 짜기 사카모토(坂本迪藏),『새끼·가마니발전사담』우방문고 18호, 1973이 자세하다. 새끼 가마니는 일제 때 주된 부업이고 이 사업은 종자개량,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를 장려 지도하는 한편 절미 저축을 시키고 있다. 금년 안에 가사상담소를 신설하여 조합원의 조합으로서 참다운 기능을 발휘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5년전과 비교한 최근 조합 현황은 아래와 같다.
연도
종별
5년전
최근
조합원수
625
2,051
출자금
2천엔
14,187엔
적립금
-
7,606
차입금
98
223,882
예탁금
11
16,060
예 금
18
50,546
대출고
104
272,793
5년 전과 최근을 비교하면 조합원 수는 4.9배, 예금은 2.8배, 대출금은 2.6배가 늘었다.
조합장 조익연. 1899~?. 낙동면 상촌동 출신. 사립중동학교를 졸업하고(1923) 가업인 양조업에, 또 토지 관리 경영에 일찍부터 실업계에 투신하였다. 군내 굴지의 자산가로서 지방민의 선망의 대상일뿐 아니라 지극히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지방민의 신뢰가 두텁다. 조합장으로 조합원의 지도에 노력하는 한편 면협의원, 상주군농회 통상희원으로서 조합 내외를 불문하고 동분서주 지방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취미는 바둑,
모동금융조합사무소
자료 ; 조선금융조합과 인물
독서.
이사 김창훈, 1910~?. 경남 김해군 김해면 부내리 출신.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1934), 곧 황해도와 아울러 경상북도지부 이사 견습을 거쳐 낙동금융조합 이사가 되었다(1935). 취미는 낚시, 등산. 주소 낙동면 낙동리. 후지사와, 앞의 책, 626쪽.
5.6. 모동(牟東)금융조합
소재지. 상주군 모동면 용호리
설립 때. 1930년 10월 24일
연도
종별
5년전
최근
조합원수
272
1,850
출자금
2,730엔
28,730엔
적립금
-
9,982
차입금
15,000
242,042
예탁금
12,445
10,836
예 금
6,470
42,229
대출고
10,957
289,870
구역은 당초부터 모동, 모서의 2면과 화동면의 일부이다. 조합장 신상학이 퇴임하고 현재 정재엽이다. 이사는 초대 이상황, 현재는 정학기이다. 업무개시는 다음 해 2월 1일이다. 조합 설립 이전은 고리채에 고통 받는 자가 많고 병폐가 극에 달하여 있었으나 조합 설립 이후는 조합의 활동이 잘되어 고리채는 거의 갚아 조합원은 점차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 정 이사는 조합원의 정신적 자각을 일깨우는 것을 조합운동의 근본으로 하고 그 지도 훈련에 주력하고 있다. 부락간담회를 열고 취지의 철저, 대부금의 용도를 지도하고 연수회 개최, 지도원과 총대 상호 연대 조장 등의 회의로 지도법의 타합을 행하는 등 직접 간접으로 주도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새로 사업계, 식산계, 식우계 등을 증설하였는데 장차도 이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공동구입, 공동판매사업을 진행코자 한다. 다시 산업부문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조합원의 경제 발전, 생활개선을 위하여 활동할 기술적 공작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식산계는 2개소에 설치하고 있다. 직원은 서인건, 김연묵, 장학수, 박완두, 이인우. 5년전과 최근의 조합 현황은 아래와 같다.
조합장 정재엽. 1883~?. 상주군 모서면 도안리 출신. 소년 때부터 약 15년간 한학을 배웠다. 모서면협의원(1927~), 삼림조합평의원, 학무위원 당시 모동면에는 中牟공립보통학교(1923년 설립)가 있었으니『조선교육대관』경북편 52쪽. 이 학교 학무위원이다.
모서면장을 지냈고 지방의 제1인자이다. 모동금융조합 조합장(1927), 금융지도의 철저, 조합원의 증모, 고리채 정리에 힘쓰고 있다. 조합원의 생활개선이 된 것은 그의 지도에 의한 바가 크다. 취미는 바둑, 한시, 독서, 주소는 출생지와 같다.
이사 정학기. 1905~?. 영일군 동해면 도구동 출신.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1925), 낙동강금융조합 이사(1929), 모동금융조합으로 전근하였다(1935). 조합원의 증모, 금융지도의 철저, 고리구채의 정리, 식산계의 증설, 조합원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항상 조합 발전을 위하여 연구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취미는 바둑, 독서, 음악. 주소는 조합 주소와 같다. 후지사와, 앞의 책. 137쪽.
6. 맺음글
기왕의 연구는 메가타 재정고문이 처음으로 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일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 일제의 연혁지에 메가타는 조선 재래의 계를 기초로 금조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계 시대를 절사할 이유가 없다. 납세를 위한 계를 제외하면 모두 계 제도를 이어 받아 자생조직인 계를 관제조합으로 만든 것이다. 계는 고려조 말부터 시작하였고 중국과 일본에는 없다고 하였으니 금조의 기원은 1392년부터 기산해야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2016년 현재 그 역사는 무려 624년이나 된다.
일본은 식민지시대의 선정의 하나라도 하고 한국의 학자들은 하나같이 금조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고승제는『한국금융사 연구』에서 ‘1943년… 금조의 저축실적은 3억 6,742원이다. …이는 일본의 군사비 조달을 위하여 한국 농민의 소득을 여지없이 수탈하여 갔다’(146쪽)고 하였고, 이경란은『일제하금융조합의 연구』에서 “금융조합은 식민성, 폭민성, 수탈을 갖고 있다.”(7쪽)고 하였으며, 최재성은『식민지조선의 사회경제와 금융조합』에서 “금조는 한국농촌을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식량과 원료 공급자로서 가능하도록 개편하는데 기여하였다.”(395쪽)고 하였다.
상주금융조합의 탈곡기 사용법 지도
자료; 금융조합사
그러나 이들은 금조의 조합원 고리채를 위한 저리 융자, 공동구입, 판매, 자작농 창출을 위한 노력과 업적, 개인적인 활동이지만 조합장과 이사들의 문맹퇴치 운동에 대하여는 외면하였다. 공과를 함께 논해야 되는데 과에만 치우친 감이 있다. 그리고 그 과실에 대하여 구체적인 제시가 빈약하다.
어쨌든 계(契) 시대와 50년 간(1907~1957)의 금융조합에 대한 시군지의 기술은 거의 없고 현재 후신인 농협 연혁만이 있는 것은 유감스럽다. 이 논문이 그 공백을 메우는데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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