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상주문화 26호. 조선 중기 상주의 산림징사(山林徵士)

빛마당 2017. 2. 5. 19:58

조선 중기 상주의 산림징사(山林徵士)
-후계 김범(金範)을 중심으로-
 (사)경북 향토문화재단 이사장
강  경  모

Ⅰ. 머리말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통치체제의 변화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이 이를 정의하였지만, 크게는 일인체제의 전제군주체제라는 큰 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 왕조 정치의 특성으로 구분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겠다.
  먼저 조선의 개국은 당시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고 시행된 왕조교체로, 이들 신흥사대부들은 고려가 500년동안 줄기차게 시행하였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사업으로, 지방에 할거 하고 있는 반독립적인 향족세력의 타도를 위해 이들을 지방행정의 실무자로 세습시켜, 사회적 신분을 중인으로 격하시키고, 地方士族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해주는 대신 이들을 왕조정치의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지방군현제의 개편이 이루어지며, 지방사족의 정치적 진출을 장려하여 지방의 향교가 군현마다 설치되고, 여기에서 양성된 신진유학자는 과거라는 제도에 의해 중앙관료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공정한 과거제의 실시를 통한 광범한 인재의 등용은 중국과도 차별화된 새로운 독자적인 정치제도로 사대부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재들에 의한 사대부 정치는 차츰 이들의 기득권이 강화되면서 신흥 사대부들은 어느 사이에 이미 새로운 귀족집단으로 부상하여 왕권은 제약을 받고, 국가를 운영하는 법제는 이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 원년에 이루어진 계유정란(癸酉靖亂, 1453) 輸忠衛社協贊靖亂功臣(37員) : 1等(12員) 首陽大君, 鄭麟趾, 韓 確, 李思哲, 朴從愚, 李季甸, 朴仲孫, 金孝誠, 權 擥, 洪達孫, 崔 恒, 韓明澮.  2等(8員) 申叔舟, 權 蹲, 柳 洙, 洪允成, 田 畇, 尹士呁, 柳 河. 郭連城. 3等(17員) 李興商, 李禮長, 康 袞, 柳 漵, 權 躽, 柳 泗, 洪純老, 林自蕃, 安慶孫, 柳子煥, 薛繼祖, 權 擎, 洪順孫, 宋益孫, 韓明溍, 韓瑞龜, 李蒙哥, 
은 이러한 귀족계급으로 성장한 신흥 사대부 계층을 정리한 것으로도 보아야 하며, 이후 사육신, 이시애의 난, 남이장군과 성종의 등극 공신 등 4대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모두 5차례의 사건으로 탄생한 공신의 숫자는 자그마치 232명 1. 同德佐翼功臣(사육신사건) 41인.  2. 布義敵愾功臣(이시애 난) 42인.  3. 炳幾定亂翊戴功臣(남이장군 사건)  37인.  4. 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성종즉위공신) 75인.
에 달한다.
  다만 여기에는 신숙주, 한명회, 유자광 등 여러 차례 훈작을 받아 숫자가 중복되기도 한다. 이들에 의한 정권의 전단을 우리는 勳舊派의 정치라고 분류하며, 이들의 집권 기간은 중종대까지로 이어진다.
  대체로 성종에 의해 등용되었던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에 의한 사림정치는 성종의 죽음과 함께 그 막을 내리고 연산군에 의해 훈구대신에 의한 정치는 다시 시작되고, 중종대까지로 이어진다.
  이는 성종의 승하와 함께 그 막을 내리게 되었으니,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燕山君)에 의해 자행된 2차례의 사화로 훈구파들은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중종에 의해 등용된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사림에 의한 도학정치 또한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복병을 만나기까지 불과 6년이라는 짧은 수명으로, 중종대가 끝날때 까지는 사실상 전권을 행사한 훈구파의 시대라고 하겠다.
  이후 김안로, 윤원형 등 권신들에 의한 정치가 행해지기도 하였으나 권신이 물러간 빈자리는 사림(士林)들에 의해 채워졌으며, 이들은 상대할 외부의 적들을 잃어버리게 되자 치열한 내부분쟁으로 인하여 붕당(朋黨)이 형성되고 이 붕당이 산림징사(山林徵士)라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 조선 후기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중기 이후의 조선 정치사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였던 산림이 대두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인조반정 이후 국가로부터 대거 징소(徵召)받게 된 원인과 산림직의 설치, 학문적 배경 등을 기반으로 한 폭넓은 사우문생(師友門生)으로 연결된 영향력 등 상주와 관련하여 그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산림의 정의
  자연경관을 가리키는 자연적인 숲, 즉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의미를 지닌 산림(山林)은 본고에서 의미하는 산림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며, 산림은 “山谷林下에 隱居해 있는 學德을 겸비한 學者”로 여기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독서인(讀書人)을 의미하며, 또한 산림 아래에는 반드시 학문하는 학자가 있다(“山林之下 必有藏修之人”)라 하여 산림은 도회를 떠난 지방의 촌락을 의미하며 이러한 마을에 은거하여 학문을 강마하고 세상사에 거리를 둔 학덕을 겸비한 인사를 의미한다.  
  16세기의 조선 사회는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맞이하면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인물이 중시되는 사회풍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풍조가 조성되게 된 계기는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간의 전후 4차례에 걸친 사화라는 대립과 갈등을 거치면서 사림파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사화를 거치면서 사환(仕宦)에 매력을 잃고 관계를 떠나 초야에 묻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는 풍조가 조성되어 향촌으로 낙향하는 인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6세기 이래 이러한 사회풍조가 조성되게 된 동기는 빈번한 사화를 거치면서 유생 중에는 관인이 되려는 생각을 단념하고 향촌사회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처사적 사고(處士的 思考)를 가진 지식인그룹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실사회에 참여를 기피하고 은둔하려는 사고가 팽배하게 된 배후에는 정치의 난맥이 불러온 사화의 피해의식과, 사회변화에 따른 인식의 차이, 인재등용의 비정상적인 운용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실참여로 인한 막대한 정신적, 실물적인 피해를 경험한 이들은 이러한 의식이 점점 고착되어 갔다고 하겠다.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제창되었던 성리학적 규범인 대의명분(大義名分)은 조선 건국 초기에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왕권 승계 과정에서 그 명분을 잃었으며, 16세기 이후 여러 가지 명목으로 빈번히 시행한 과거의 결과는, 과장(科場)의 문란은 물론 大․小科에 급제하여 관리로서의 임용자격은 획득하였지만 임용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여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조선 건국이래 관료의 정규 등용문인 과거를 통한 출사만이 신분적, 사회적 지위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만은 아닌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의해 향촌사회에 은거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은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는데, 이들의 성장에 절대적 기여를 하게 된 요인은 경제적 자립과 학문적 기반의 2대 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들 수 있겠다.
  가학에 의한 교육은 능문(能文), 능리(能吏)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학문적 우월성은 향촌지역의 새로운 지식인 그룹으로서 향촌사회의 여론을 선도해 갔으며, 이들은 보다 근거지 주변의 신개지(新開地)의 개간(開墾) 등을 통한 농장의 확보와 또한 족계, 동계, 향약 등을 조직하고 이러한 조직의 활동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결속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자녀에 대한 재산의 균분상속과 이에 혼인을 통한 처향, 외향의 경제적 기반까지를 더하게 되어, 경제적 자립기반을 갖춘 지주적 성격(地主的性格)이 보다 강화된 사족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학문적 소양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경제적 기반까지 함께 갖추었으니, 오직 과환(科宦)이야말로 절대적인 생계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게 되면서 벼슬에 연연하지 않아도 향촌사회에서 그 지위나 위상이 결코 저하되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재지적 지식인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생원․진사․유학(幼學)의 지식층들이 도처에 산재하게 되었다. 이들 중 뛰어난 학덕과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교육에 힘써, 많은 문도를 거느린 재야 지도자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인물들은 향촌사회의 중심인물에서 발전하여 山林으로 칭송되며 학계나 정계 등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정점인 16-7세기의 성리학은 학문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드는 시기로 이 시기 산림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연경관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닌, 성리학적 지식인을 가리키는 말로 획일화 되어 가면서, 여기에는 점차 존칭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비록 이황(李滉)이나 이이(李珥)처럼 정규 과거를 거쳐, 중앙정부의 관리로 있으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처사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숭앙을 받는 대표적 인물도 있지만,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같이 비록 재야에 은둔하였지만 학문과 덕망이 뛰어난 학자들은 과거라는 정규코스를 거쳐 환로에 오른 관료들보다도 더 존경하고 위엄 있는 경배의 대상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리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산림은 은둔지를 의미하다가 점차 은둔지에 은거한 학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어의가 점차 확대되면서 산림은 존칭화되어 스스로 본인을 산림이라 칭하기가 어렵게 되면서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인물에 한하여 이를 산림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산림이라는 자격요건은 나라로부터 징소(徵召)라는 특별대우를 받은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즉 과거를 포기하고 초야에 은거하는 기본조건 위에 학덕이 뛰어난 것으로 인정되어 국가로 부터의 징소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단계의 관직을 제수하는지에 대하여는 그 준거가 명확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대개 사헌부의 6품직인 지평이나, 후대 새로이 신설된 산림직에의 임명 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러한 산림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 시기는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며 이 시기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펼쳐진 일련의 개혁정국은 재야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 단초가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조광조를 위시한 개혁파들은 현량과(賢良科) 현량과(賢良科) ; 조광조의 건의에 의해 한(漢)나라의 賢良方正科를 본떠 시행한 과거제로 육조, 홍문관, 대간과 지방의 관찰사 수령이 직접 후보자를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는 그의 성명, 행실 등을 적어  왕의 친림 하에 근정전에서 대책으로 시험하였다. 중종 13년(1518)에 제도를 만들어 이듬해 120명이 응시하여 김식(金湜)등 28명을 선발하였다.
의 실시라는 한발 더 진전된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사림의 정계진출이 활발해 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하여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뒤이은 을사사화(乙巳士禍)까지 겹치며 신흥지식인 계급의 정계진출은 무산되었으며, 양대 사화는 사림파와 훈구파가 직접 부딪친 사건으로 그 피해가 워낙 커서 사림파의 사기는 크게 손상되었다.
Ⅲ. 사림의 대두
  그러나 초야에 은거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 가는 지식인 집단을 영원히 배제할 수만은 없어 인재등용의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었으니, 이 시기이후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함께 연서하는 집단적이 상소(上疏)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집단적 상소(上疏)로 이어질 수 있는 배경에는 학덕이 뛰어나고 많은 문도를 거느린 학자들이 산림으로 불리우며 향촌사회에서나 정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등장한 산림징사가 곧 은일지사의 일천으로, 재야의 고명한 학자를 초치하여 정책을 자문하고 경연과 세자의 훈육에 기하고저 하였다. 처음 명종 7년에 성수침(成守琛), 이희안(李希顔), 조식(曺植), 성재원(成悌元), 조욱(趙昱)의 5인을 일천(逸薦)으로 천거하여『明宗實錄』13卷 7년 7월 辛卯. 吏部啓曰“遺逸之人 曾令八道 搜訪馳啓 而慶尙, 淸洪, 京畿則已到 . . . . 請爲  先敍用 ... ... 傳曰皆除主簿
,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여기에 처음으로 천거된 5인을 살펴보면, 성수침은 파주에 거주하는 선비로 효행이 뛰어나고 청렴하며 經史에 통달하였고, 경상도 초계(草溪)에 사는 이희안은 재행이 탁이하며, 어머니의 삼년상에 시묘를 한 효자로, 중종 때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謝恩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었다.
  또한 晉州에 사는 조식은 성품이 방정염결(方正 廉潔)하고, 부모상에 삼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상례를 마친 효자였으며, 또한 집안이 매우 궁색하여도 결코 영달을 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도 공주에 사는 성제원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활달한 성격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어머니상에 한결같이, 예법대로 삼년상을 준행하였으며, 탈상하여서는 묘 옆에 집을 지어 종신토록 묘를 지키며 살 계획을 세웠다, 저평(砥平)에 사는 조욱은 재행이 고결하며, 가난을 편히 여기며 옛것을 좋아하고, 이록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스스로 한가함을 즐긴다고 하였다.
 
  이때 이를 해조(該曹) 該曹 : 어떤 사무의 전담기관, 담당관아의 준말.
에서 통보하여 상경토록 한 이들에게는 모두 주부(主簿) 主簿 . 조선시대 六曹의 부속기관들에 배속된 從六品의 하급郎官
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며, 또한 동왕 21년 5월에는 생원, 진사 중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순정하게 하여 육조(六條) 六條 . 經明, 行修, 純正, 勤謹, 老成, 溫和의 여섯 가지 덕목을 말함.
를 갖춘 자를 찾아 추천하게 하였다. 추천된 이들로 하여금 종친부의 내종(內宗)과 왕손(王孫)을 가르치게 하기위하여 천거를 하게 하였으며, 6월 21일에 이항(李恒), 성운(成運), 한수(韓脩), 남언경(南彦經), 임훈(林薰), 김범(金範)의 6인을 징소(徵召)「明宗實錄」33卷  21년 6월 庚辰 ·
하여 육품직(六品職)을 제수하였다.
  이에 조식(曺植)에 대해 평하기를 “방정, 염결하며, 세속을 벗어나 은둔하였으며, 추상(秋霜)같은 지기(志氣)가 있었다. 라고, 하였으며 중종 조에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은하지 않았고, 이때 6품 관직을 누차 제수하였으나 상소만 올리고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 매우 준격(峻激)하였다. 明宗實錄」33卷  21년 7월 19일 戊申 · 方正廉潔 二世出塵 秋霜志氣 老而彌厲 不能容人過惡 傲世太過 恒談 幾諷 蓋隱居放言者也 自言吾常多爲客氣所使也 中廟朝 亦除官 不拜 是時累授六品之職 乃上疏不起 言甚峻激 .......
”(중략) 라고 기록하여, 남명의 추상같은 지기와 방정염결한 자세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이들 산림에 대한 징소도 다분히 고식적이고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 말았음을 사관이 그 실상을 명종실록에 그대로 밝혀놓았다.
  
  史臣曰……지금 유일을 찾아내라는 명이 비록 여러 차례 내렸었지만 그것은 단지 고사에 따랐을 뿐 좌불안석(坐不安席)으로 현인을 생각하는 간곡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서, 현인을 부르는 禮로 부르지 않았고 현인을 쓰는 道로 쓰지 않았다. 치의(緇衣) 緇衣 : 검은 물을 들인 옷,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학문을 가진 자(淄輩). 학문을 배우는 학생. 어리다의 뜻.
처럼 현인을 좋아하는 마음은 없고 소인이 적불(赤芾) 赤芾 : 슬갑은 바지위에 덧입는 바지로 무릎까지 오며 주로 말을 탈 때 입는 옷.
하고서 수레를 탔다는 기롱(譏弄) 譏弄 : 업신여김, 희롱함.
이 있으니, 이것은 군자는 멀리 떠나 산림에 숨고 소인은 함부로 행동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 애석하다. 『明宗實錄』26. 15년 8월 庚申. 史臣曰 …… 今者搜訪遺逸之命 雖已屢下 而只循諸故事 非出於側席思賢之誠 招之 不以招賢人之禮 用之 不以用賢人之道 緇衣無好賢之心 赤芾有乘軒之譏 此君子所以高擧而遠引 小人所以肆行而無忌憚也 惜哉.


  위의 산림징사는 당시 현실정치와 연결되지 못하였고, 또한 그 성격상 후대의 산림징사 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뒷날의 산림정치시대의 서막을 여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사림의 정계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선조의 등극과 함께 가장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좀처럼 중앙정계에 머물지 않던 이황(李滉)이 선조 즉위 한 달 후인 1567년 7월에는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고 이어서 을사사화 당시의 명현이었던 백인걸(白仁傑)이 71세의 노구로 직제학이 되었으며,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죄인이 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 등 여러 사람이 서용되었으며, 이후 사림의 등용은 점차 확대되었으며, 중종 말년이후 계속되어왔던 조광조(趙光祖)의 복권과 남곤(南袞)의 관작삭탈을 주장한 해묵은 사건들이 이때에 비로소 해결되었다.
  산림으로 징소되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며 우대받은 산림은 선조, 광해군 대의 정인홍(鄭仁弘), 성혼(成渾), 정구(鄭逑) 등을 들 수 있겠다.『黨議通略』, 宣祖朝 “成渾以道學爲儒宗, 自李珥卒 鄭澈等 每有事輒書議以決之.....
 이들의 당색은 정인홍은 북인(大北), 성혼은 서인(西人)이며, 정구는 남인(南人)에 속한다.
  성수침의 아들인 성혼(成渾 1535~1598)은 생전에 율곡 이이의 천거에 의하였으며, 1573년(선조 6) 사헌부지평으로 처음 징사가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비변사 당상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1602년의 기축옥사(己丑獄死)에서 동인인 최영경(崔永慶)을 죽게 만들었다는 모함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좌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의 시호를 받았다.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율곡 이이와 함께 배향되었으나 숙종 15년(1689) 출향(黜享)되었다가 5년 뒤인 1694년에 다시 성균관에 배향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은 대북정권을 세운 실질적 주체이며, 사헌부의 산림장령(山林掌令)으로 불리며, 강력한 제지적 기반을 가지고 중앙정국의 큰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직접 상소를 올리거나 경상우도의 사림 문인들을 앞세워 재야공론을 제공하였다. 특히 정인홍의 상소 한 장은 다른 것에 우선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황현[黃玹, 1855(철종6)~1910. 8월]의 문집인『매천야록(梅泉野錄)』『梅泉野錄』上 國史編纂委員會 刊. 10p "光海朝 李爾瞻用事 起鄭仁弘 列之三公 每大事 表裏相和 憑藉儒賢 之論 以行其胸臆 自是以來當局者踵之 朝局一變 輒推林下一人 以爲領袖 雖賢奸不同 未有不藉口山林者
에는 정인홍에 대하여, 대북의 이이첨(李爾瞻)은 큰 일에는 매번 정인홍의 주장임을 빙자하여 국사를 전단하였다고 하였다.
  후일 인조반정이후 정인홍이 발휘하였던 산림의 기능과 그 위력을 인식하였던 서인 공신들의 산림중용정책은 그대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인조 반정의 공신들이 반정 초 모여서 회맹(會盟)하는 자리에서 두 가지 사항에 대하여 밀약을 하고 이를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반정 초 훈신들이 모여 맹세하면서 두 가지 밀약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國婚을 잃지 말 것과 또 하나는 산림을 崇用하자는 것으로 이는 자기들 형세를 튼튼히 하여 名實을 거두기 위함이다.” 『黨議通略』仁祖朝 “世傳 反正初勳臣會盟 有密約二事 曰無失國婚  曰崇用山林 所以固形勢而收名實也”
  

  이들 공신들이 회맹하는 자리에서 밀약한 것의 하나인 무실국혼(無失國婚)과 또 다른 하나는 숭용산림(崇用山林)으로, 왕실과의 혼인을 서인들이 독점함으로써 서인들의 집권을 더욱 공고히 하며, 한편으로 다른 세력들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이며, 숭융산림으로 산림에 대한 예우를 융숭히 하고 또한 등용하여 국가에서 유현을 존숭(尊崇)한다는 명분을 얻고자 한 것으로, 사류(士類)들의 지지기반을 획득하는 것은 곧 자기들의 숭명반청(崇明反淸)의 반정명분과 미약한 지지기반을 튼튼히 하여 정권의 안정적 유지를 이루는, 명분과 실리를 함께 얻고자 한 이들의 계산된 고도의 책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청의 침략전쟁 이후 산림과 더불어 버금가는 예우를 받은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Ⅳ. 산림직(山林職)과 징소(徵召)
  인조 대에 이르러 전조(前朝)보다 강조된 산림을 숭용하는 정책에 따라 활발해진 산림의 징소는 이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해 줄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였으며, 이는 산림만을 위한 산림의 자리로 산림직 이라는 새로운 자리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효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1585~1657)는 산림은 성덕(聖德)의 함양에 도움이 되고, 조정(朝廷)에 유익하며, 사림의 긍식이 되고, 조정의 신하들이 경탄(敬憚)하게 된다고 하여 그 효용성을 네 가지로 표현하여, 산림의 활용은 조정과 관료, 사림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효용성이 발휘될 수 있는 인사는 학덕이 높아서 군주나 세자의 학문도야에 도움이 되며, 또한 사림의 긍식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산림에 대한 특별예우를 위한 별도의 산림직으로는 성균관의 좨주(祭酒), 사업(司業)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찬선(贊善), 진선(進善), 자의(諮議) 등이 주로 산림 징사들에게 주어지는 직함이었다.
  인조조 김류(金瑬)와 이귀(李貴)의 천거에 의하여 김장생(金長生), 장현광(張顯光), 박지계(朴知誡)를 천거하였으며, 이들의 대우를 위하여 천거하였으나 김장생과 장현광은 이미 노령으로 사헌부의 직임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성균관의 유생을 훈도하는 직임을 맡기자는 이귀와 김류의 건의에 의하여 성균관의 사업은 정원이 일인이었음에도 이를 3인으로 정원을 늘려 임명하는 사례까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업에 임명된 인사는 인조 10년에 강학년(姜鶴年)이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효종 대에 이르러 이경석(李景奭)의 건의에 의해 선우협(鮮于浹), 최온(崔蘊), 윤선거(尹宣擧)가 임명된 바가 있다.『朝鮮後期山林勢力硏究』p 21. 禹仁秀 (1999. 일조각)
고 하였다 이는 성균관 사업은 종4품의 자리로 산림만을 위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성균관 좨주(祭酒)는 효종 9년 12월에 설치된 정3품 당상관직으로 그 설치목적에 대하여, 산림징사로 천거되어 좨주에 임명된 송준길(宋浚吉)이 올린 사직상소의 비답(批答)에 잘 나타나 있으니,
 
답하기를,
  태학에서 인재를 가르치는 적임자를 얻지 못한 지가 오래된 탓으로 선비의 습속이 날로 오염되는 추세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직책을 설치한 이유이다. 오늘날 중망을 지닌 숙유(宿儒)를 논한다면 경을 놔두고 누구를 거론하겠는가. ....... 『孝宗實錄』20. 9년 12월 丙寅 條

答曰 : “太學敎冑之任 不得其人久矣 士習日趨汚下 此所以設此職也 當今之世 論宿儒重望  則捨卿而誰..
     
라고 하여, 산림직을 위한 자리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좨주는 대사성과 함께 성균관 최고의 관직으로 산림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자리는 정1품이 되어서 겸임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된 자리로 정1품직과 겸직한 사례도 있으며, 송준길, 송시열, 허목, 윤휴, 이현일, 박세채 등이 성균관 좨주를 역임하였다.  
  한편, 다음 대의 군주가 될 인물인 세자를 교육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으로서는 모든 교육적 측면에 있어 유학경전과 이를 통한 유교적 정치이념을 체득할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국가의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산림으로서의 위치는 경연에서의 역할 이상으로 기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자보도의 중요성을 역설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주청에 의해 인조 24년 5월에 산림직의 자리는 찬선, 익선, 자의로 전체 시강원의 자리인 찬선(贊善․정3품 당상관),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익선(翊善․進善종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說書․정7품), 자의(諮議․종7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위의 시강원 품계표에는 산림직이 처음 자리할 때의 상황이고 이후 속대전(續大典)의 규정에는 약간의 품계변화가 이루어 진 것으로 나온다.『續大典』贊善(정3품당상관). 兼輔德(종3품). 進善(정4품). 兼弼善(정4품). 兼文學(정5품). 兼司書(정6품). 兼說書(정7품). 諮議(정7품).
 이외에도 영조대에 이르러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이 새로이 산림직에 첨가되어, 경연관 초선(抄選)이라고 하면 경연관을 선발하는 것이 되며 여기의 경연관은 홍문관을 맡는 것도 아니요, 경연에 참여하는 모든 관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순수하게 산림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이 전의 경연관과는 다른 의미로 경연관에 초선되었다는 것은 국가로부터 산림의 자격을 인정받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학문적 대성과 함께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영예를 누린 산림을 열거하면 상당히 많은 수의 인사들이 있으며, 특히 정인홍, 김집, 송시열, 송준길, 허목, 윤선거, 윤증 등을 들 수 있겠다.


Ⅴ. 산림징사(山林徵士) 김범(金範)
  상주인으로 산림의 영예를 누린 분들은 많지 않으며, 특히 인조 조 이후 산림징사가 활발해 지면서부터는 남인보다는 노론들의 징사가 월등히 많다. 이는 조선 후기 서인집권과 결코 무관하지 않고, 영남 남인들은 어쩌다 한 분씩 나타나며, 상주인은 더욱 그 숫자가 적다고 하겠다. 여기에서는 은일로 천거된 인사 또한 산림으로 보아야 하며 이들에게 제수된 직임은 대체로 사간원, 세자시강원, 성균관 같은 기관들로 여기의 산림직 자리는 여기에는 남대(南臺)로 불리는 은일(隱逸) 또한 산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주인으로서 가장 먼저 징사되었던 후계 김범은 본관을 상산(商山)으로 하는 상주의 土姓으로 11세 손인 내원령공(得和)을 파조로 하는 시조로부터 19세 손이다.
  여기에서는 선생의 문집인 후계집(后溪集) 2권, 부록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세종조 집현전 부제학 김상직(金尙直)은 공의 5대조이며, 高祖는 신(愼)으로 지도염서승(知都染署丞)이고, 증조부는 극충(克忠)으로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이다. 조부는 건공장군충무위부사직(建功將軍忠武衛副司直) 예강(禮康)으로, 평장공(平靖公) 이약동(李約東) 李約東(1416, 태종 16~1493, 성종 24)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碧珍, 자는 春甫. 호 老村. 부 德孫으로 문종 1년에 증광문과 급제하였으며, 持平, 제주목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대사헌, 천주사로 명에 다녀왔으며, 경주부윤, 호조참판, 전라감사,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491년 지중추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었다. 금산의 景濂書院 제주의 橘林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청백리. 시호는 平靖 
의 사위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김윤검(金允儉)이며 어머니는 또 다른 상산김씨인 종사랑 김증(從仕郞 金增)의 따님으로, 1512년(중종 7)에 출생하였다, 27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진사 회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때 경상감사 김안국이 과거의 감독관으로 참석하여 공의 글을 극찬하였으며, 1553년(명종 8)에 부친 상을 당하고난 이후 과업을 전폐하고 오로지 학문 강마에만 전념 하였다.
  병인년 봄(1566 · 명종 21)에 내시교관의 벼슬과 함께 처음으로 징사(徵士)가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를 사양하여

  ....신은 지극히 미약하고 지극히 천하여 이미 문을 닫고 버려진 몸으로 겨울 매미와 그림의 떡과 같이 허명이 전달되었습니다. 외람되이 은명을 받은 것은 미증유의 일입니다. 분골쇄신하여 조금이라도 그 은명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신은 하나의 쓸모없는 병든 몸으로 얼굴을 들고 세상에 나가기도 어려운데 항차 사대부의 반열을 더럽히며 세상에 흔치않은 은총을 받음이리까.
  아낄 것은 명기(名器)이고 결코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양함이 바른 이유입니다. 后溪集 卷2 經明行修玉果縣監后溪先生行蹟條 .... 曰 臣本 至微至賤 杜門惜已 有同寒蟬畵餠虛名 上達側席 猥受恩命 曠古所無 固當糜身 粉骨報效涓埃 第臣 一朽敗病人 難以立世 況 玷名士大夫之列 以當不世 之寵乎 所可惜者名器也 不可輕者大恩也 辭義甚礭

 
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기어 이해 가을에 다시 이항(李恒), 성운(成運), 한수(韓脩), 남언경(南彦經), 임훈(林薰)과 함께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천거하여 불렀으며, 이는 육조(六條) 육조(六條) : 선비로 갖추어야 할 여섯가지 덕목으로 경명(經明), 행수(行修), 순정(純正), 근근(勤謹), 노성(老成), 온화(溫和)의 여섯가지 덕목을 갖춘 것을 말함.
를 갖춘 선비를 군왕이 불러 당세의 정치를 하문하는 고례에 의한 것으로, 이때 초치된 6명의 선비들에게는 모두 6품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바로 상경하여 임금을 뵙지 못하고 10월 7일에 남명 조식과 함께 두 사람이 임금의 부름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임금이 하문한 내용은 “고금의 치란(治亂)과 세도(世道)의 청탁(淸濁), 학문하는 방법의 가언(嘉言)과 선정(善政)에 대하여 듣고 싶다. 고 하였다. 이에 조식의 뒤를 이어 김범이 진언하기를,

  “소신은 사장(詞章)만 일 삼았을 뿐 본래 학식이 없는데 하문을 받들게 되니, 부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학문을 강구하여 이치를 밝히고 덕성(德性)을 함양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화평하게 한 다음에야 조정이 공경하고 겸양하여 정화(政化)가 널리 미치어 만민이 편안하게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고금의 치란은 널리 방책(方策)에 기재되어 있으니, 다스려 졌을 때와 같은 도(道)를 행하면 흥하지 않을 리 없고 어지러워졌을 때와 같은 일을 행하면 망하지 않을 리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선을 본받고 악을 경계하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明宗實錄』33. 명종 21년 10월 甲子


라고 답하였으며, 계속하여 도유우불(都兪旴咈) 都兪旴咈 : 都兪는 찬성을 旴咈은 반대의 뜻으로, 堯임금이 군신들과 정사를 논할 때 쓰인 말로, 군신간의 논의를 이름.
은 어느 시대에 있었느냐고 하문하니 이는 조식은 삼대(三代) 三代 : 夏, 殷, 周의 시대, 통칭 천하태평의 성대를 일컬음.
때의 일로써 군신이 모여 정사를 논하는 이야기를 말함이라 하였으며,
  김범은

  “치도는 반드시 오래 계속되고 전일하여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끊임이 없으면 오래 계속되고 잡되지 않으면 전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덕을 굳게 지킨 연후에야 끊어지거나 잡됨이 없고, 마음을 잡고 놓는 기미와 선과 악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깊이 통찰하여 맹성(猛省)한 연후에야 오래도록 정치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明宗實錄』33. 명종 21년 10월 甲子 : 範曰 治道 必須久且專 乃可以有成 不有間斷 則久矣. 不有相雜 則專矣 執德固 然後 無間無雜 一心操舍之機 陰陽消長之理 深察而孟省 然後可致久安之治矣

라고 설명하여, 바른 치도의 길에 대한 깊은 함의를 개진하였다고 하겠다. 또한 임금이 한의 소열왕(昭烈王) 昭烈王 : 삼국시대 蜀나라왕 유비(劉備)
이 공명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한 까닭을 물으니 김범은 여기에 당시의 상황에는 현재(賢才)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이는 소열왕이 세 번이나 공명을 찾아간 이유이지만 공명이 즉시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겠다고 답하였으며, 또한 산림으로 임금의 징소에 빨리 응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조식은 헛된 이름으로 임금을 기망할 수 없기 때문에 빨리 나오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며, 김범은 징소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뜻은 잘 알 수 없으나 신이 요량하건대 민망(悶望) 悶望 : 대개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까 걱정하는 모양.
한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 하였다.
 
  “간신이 제거된 뒤에는 해가 다시 중천에 뜬것 같아 음산한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밝고 따뜻한 햇살이 자라나서 초야의 선비들을 불러 모아 편전에서 인견하며 마음을 열고 성의를 다해 접대하니,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한 일을 즐거워하는 본심이 여기에서 드러났다. .....『明宗實錄』33. 명종 21년 10월 甲子
   
  
라고 하여, 이날 임금이 남명 조식과 후계 김범을 불러 인견하는 자리의 정경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명종 임금과의 전대(殿對) 殿對 :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왕과 대면을 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
 후 불편한 몸으로 임지에 부임하여 시정을 펴보지도 못하고 불과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임소에서 졸하니 수 55세이다. 이 소식을 접한 임금은 조회를 철폐하고 제문을 지어 조사하였으며, 지방의 수령들에게 선생의 운구에 만전을 기하라는 특별 전교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상주인으로는 처음으로 육조(六條) 중 경학에 밝고 행실이 돈독한 선비를 이르는 말인 경명 행수(經明行修)로 산림에 천거되었다. 우계 성혼, 남명 조식, 일재 이항, 한수, 남언경, 임훈 등 당시의 쟁쟁한 대학자들과 같이 함께하여 조선시대 산림정치의 서막을 장식한 제 1세대 인물로 천거되었다는 것은 당시 상주의 학문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또한 사후인 1635년(인조13)에 효자에 정려(旌閭)되어 불천위(不遷位) 사당이 세워진 출천의 효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상주 옥성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큰 아들인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 1540, 중종 35~1594, 선조 27)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3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삼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에는 상주에서 의병을 모아 충보군(忠報軍)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고 뒷날 상주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둘째 아들인 성극당 김홍미(省克堂 金弘微, 1557, 명종 12~1605, 선조 38) 또한 문과 급제를 하였으며, 임진왜란에는 경상좌도 도사가 되고 좌부승지, 형조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승문원 부제조 등을 역임하고 강릉부사로 재임 중 과로로 병을 얻어 사퇴하였다. 상주 봉산서원에 제향되어, 삼부자가 모두 서원에 향사된 사례라 하겠다.


Ⅵ. 결어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선시대 전 시기를 정치주체를 중심으로 크게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본다면, 후계 김범을 비롯한 재야학자들을 징소(徵召)하여 국정에 대한 자문을 한 이 시기는 대체로 조선 중기에 해당하며, 정치체제의 변환시기로, 한명회로 대표되는 공신세력들이 노쇠하여 자연 도태되고 또한 조광조를 위시한 과도한 급진개혁주의에 대한 염증의 반대급부로, 김안로(金安老), 윤임(尹任), 윤원형(尹元衡)으로 대표되는 외척권신세력이 집권하였으나 이들의 집권에 대한 명분도 없고 특별한 정치이념도 없었다. 이 시기는 대체로 중종 말기에서 명종 대까지로 이들의 집권기는 의외로 짧았으며, 정치형태 또한 훈신정치의 답습에 불과하여, 이 시기를 훈신정치기의 마지막으로 생각함이 오히려 더 옳을 것이다.
  이후 사림정치로의 정치체제의 변환은 선조 조의 동서붕당의 성립과 정인홍의 회퇴변척, 인조 조 숭용산림의 기치아래 등장한 김장생, 장현광, 박지계와 병자호란을 거치며 이경석, 송시열, 송준길의 등장과 윤휴와 박세당의 사문난적, 윤증과 송시열의 반목, 박세채의 거중조정, 허목 등 기라성 같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을 등장 시킨 수많은 정치적 쟁점들을 탄생시킨 산림정치의 서막을 상주의 선비인 김범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은 본인의 학문적 수준은 물론이요, 상주의 학문적 수준은 당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교육향으로서의 상주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