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상주문화 26호. 상주의 목회자(牧會者) 이희봉(李喜鳳)

빛마당 2017. 2. 5. 20:07

상주의 목회자(牧會者) 이희봉(李喜鳳)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재  수



Ⅰ. 들어가는 말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 온지 올 해로 130년이 지났다. 흔히들 개신교의 우리나라 전래라고 하면 1884년에 입국한 알렌(Horace Newton Allen)과 1885년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선교사의 입국으로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개신교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귀츨라프(Karl. F.A Gtzlaff 1803~1851)는 장산곶 부근과 군산만, 그리고 고금도 등지를 방문하여 선교활동을 폈다. 토마스(Robert Jermain Tomas 1840~1866)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자라리(紫羅理)에 상륙하여 두 달 반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보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6년 제네랄 셔먼(General Sharman)호에 편승하였다가 셔먼호 사건으로 체포되어 평양 성내로 끌려가 박규수(朴珪壽) 감사에게 심문을 받은 후 다시 양각도(羊角島) 위쪽에 있는 쑥섬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당하였는데『대구제일교회 90년사』, 1985, 12쪽.
 자기를 처형한 군인에게 한문성경을 전하면서 대동강 모래밭에 순교의 피를 흘렸다. 형리 박춘권은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고 평양의 초대교인이 되었다.(대구제일교회 90년사. 1985. “3.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전래”편 참조.
 그의 나이 27세였으니,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입국하기 19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1875년 매켄타이어 선교사는 만주에서 이응찬과 함께 한글 성경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 출판하여 국내 선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국내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즈음, 상주지방은 이미 1894년에 4월 28일 월리엄 마틴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한국 이름 배위량, 裵緯良) 선교사가 상주에 들러 5월 2일 까지 선교활동을 한 사실이 밝혀졌고 탁지일(부산장신대학교 교수).『월리엄 베어드의 부산 선교』326쪽~327쪽
 이어 부루엔(Henry.M. Bruen. 한국이름 부해리, 傅海利) 선교사에 의해 특별히 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상주에도 이미 110주년을 훨씬 넘긴 교회도 여럿이 있다. 이러한 시점에도 불구하고 상주 교회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이들에 대한 연구와 자료가 너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겨우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김재수(金在洙)”라는 인물을『상주문화』19집에, 그리고 “상주의 개신교 전래”를『상주문화』20집에 소개한 정도이다.
  130년이면 적어도 두 세대가 지나간 셈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는 갈수록 사라지고 역사의 증인이 될 만한 분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최근 들어 각 교회들이 저마다 교회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빈약한 자료로 인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상주의 기독교 인물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는 일은 역사적인 자료의 정리뿐만 아니라 개 교회가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갈수록 어렵기만 하다. 이는 기록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탓에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바르게 기록하는 일이나 기록한 내용들을 보관하는 일에 등한시했고, 개 교회는 그나마 있던 자료마저 유실, 소실, 되고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각각의 교회는 교회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때를 맞추어 지역 권역별로 사료들이 정리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본고(本考)는 상주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설립되기까지 어떤 분들의 노력이 있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문헌에 나타난 상황으로 보아 상주의 ‘첫’ 개신교 목회자 이희봉 목사에 대해 그 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첫’이라는 말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첫’이라는 단어가 바뀔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임을 밝혀 둔다.
  이희봉 목사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그가 많은 교회를 섬겼지만 각 교회마다 연혁에 한 줄 또는 두 줄 정도의 시무 경력만 기록되었을 뿐 그의 목회 활동에 관한 구체적 평가나 활동내용은 거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라도 정리하여 밝힘으로써 다른 이들의 연구에 적지만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다행이『경북기독교회사』 박창식,『경북기독교회사』, 코람데오, 2001.
의 발간과『경북교회사』 김병희 편역,『경북교회사』, 코람데오. 2004.
의 편역, 그리고 비록 복사본이기는 하나『조선야소교 장로회 사기』 차재명(車在明). 소화 3년 9월 8일
와 『경상노회록』 조현규 편집, 자료제공 이재원
,『경북노회록』 조현규 편집, 자료제공 이재원 경북노회록, 사본 24회~39회, 1999.
은 이 지역 교회사와 인물을 연구하는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Ⅱ. 이희봉 목사
  이희봉은 조선 말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정치적 싸움을 하고 선교사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딜 무렵 1876년 채종기 장로의 증언자료에 의하면 1873년 3월 5일 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북 김천 아포에서 전주 이씨 경영군(敬寧君) 경영군파는 태종 이방원의 12명의 아들 중 5번째 아들인 경영군 비(緋)를 중간 시조로 모시고 다시 1세부터 시작된다.
의 16대 손인 명문가에서 부친 이용각(李容珏), 모친 김해 김씨 덕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배우자 김성년 사이에 장남 종원을 낳았다. 종원은 후에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다시 손자인 인영은 안수 집사로 증손자 호근은 이희봉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믿음의 대를 잇고 있다.
  이희봉은 아버지 용각으로부터 한학을 가학(家學)으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학에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초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할 정도로 명석하였다. 부모님의 기대가 대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가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과거 포기라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에 대한 안타까움과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가 그를 기독교에 입교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그의 신앙은 깊어지게 되고 마침내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이희봉의 손자인 이인영과 증손 이호근 목사의 증언(2016. 6. 13일. 15시. 전화통화)

  이희봉이 5,000년의 역사 속에 뿌리박은 샤마니즘 신앙과 아울러 불교와 유교 사상이 전통으로 이어진 이 나라에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참으로 그 시대에서는 생명을 건 고난의 길이었다. 이희봉은 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한국교회 초창기 조사가 되었다. 조사(助事)는 선교사들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Helpers'를 직역한 낱말이다. 선교사들은 통역을 위해 어학선생이 필요하였고, 이들은 종종 한국인들과 접촉함에 있어서 선교사와 일반 대중사이에서 중개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사들이다. 초기에 조사라는 용어는 오로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룹 사이에서 중개자로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성장한 1928년 차재명 목사가 저술한『조선야소교 장로회 사기』상(上)에는 조사(助師)로 표기가 바뀌었는데 이 당시 조사들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일을 도우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목사의 직무를 대행하는 준 목사(準牧師)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조사들은 사실상 목사로서 일반 목사를 대신하는 의미의 조사로 인식되었다. 이로 볼 때 당시 한국인 목사가 대거 양성되기 전 선교사를 도와 교역 일선에서 직분을 맡아 수고했던 이들을 말한다.
  이희봉은 이렇게 조사가 되어 선교사를 도와 선산의 죽원교회(竹院敎會), 노상동교회(路上洞敎會), 습례교회(習禮洞敎會), 김천지방의 대양교회(大陽敎會), 복전교회(福田敎會), 인의동교회(仁義洞敎會)와 상주 지역의 서정교회(西町敎會)를 비롯한 금흔(錦欣), 화산(花山), 오리원(五里院), 석산(石山), 사산(沙山), 오광(五廣) 등에서 시무하였다. 그리고 서정교회(西町敎會)에 시무하면서 1910년 보성의숙(普成義塾)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으며,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9회 졸업을 한 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다시 청산교회(靑山敎會), 상주 서정교회(西町敎會), 선산 죽원교회(竹院敎會), 고령읍교회, 황금동교회(黃金洞敎會)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8년 경북 노회장을 3~4회 연임하게 된다. 그 후 대구 칠성정교회(七星町敎會), 김천 송천교회(松川敎會)를 담임하다가 1931년 상주 남문외교회(尙州南門外敎會)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가 갑자기 건강이 문제가 되어 1937년 상주 남문외교회와 상주 서정교회가 합병을 하고 상주 서정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그리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 생활하다가 1940년 향년 64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이희봉 목사의 손자 이인영 목사의 사진자료에 기록된 내용 제공)

  여기서 이희봉 목사가 상주의 ‘첫’ 목회자로 세움 받음에는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복음의 확장에도 큰 역할을 다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은 그가 교육자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이다. 1910년에 세운 보성의숙((普成義塾)과 1920년에 세운 보성여자학원(普成女子學院) 및 부인야학교(婦人夜學校)는 상주교육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귀한 씨앗이 되어 마침내 1949년 5월 1일 상주읍교회 내 상주유치원(尙州幼稚園)이 설립인가를 받고 5월 5일에 개원(초대 원장 고윤봉 목사)을 한 것이다. 상주지역에서 첫 유치원 설립이다. 이렇게 시작한 유치원은 2003년 교회시설로 인해 폐원하기까지 54년의 역사를 이루어 상주교육사에 한 획을 긋게 했다.『상주교육사』, 상주교육청, 2004, 1300~1303쪽.
 그런데 상주교회와 시민교회 연혁에 없는 또 다른 기록이 경북노회록에서 발견된다. 1928년 6월 5일 동산성경학교에서 열린 제24회 경북노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주읍교회는 유치원인가를 받았고 불신자 중에서 풍금 1좌를 기부하였으며, 상주읍교회에서는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은 40여 명이 오며 많은 재미를 보옵나니다.”『경북노회록』, 1928. 6.5, 경북노회 제24회 노회록 10쪽.
 이 기록과 오늘날 두 교회 연혁은 차이가 나는데 이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내용이다. 위 내용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영향을 받은 상주읍교회는 1954년 상주성경중등구락부(尙州聖經中等俱樂部)를 설립하여 배움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터를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 6월 6일 교회 내에 있던 상주성경중등구락부를 상주성경중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계산동으로 이전하면서 성신고등공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요람』
 이는 오늘날 성신여자중학교의 전신이 된 셈이다. 1966년 성신여자중학교는 옥천학원이 설립되면서 새로운 교육의 터전으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희봉은 상주의 복음화와 교육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살았던 ‘첫’ 목회자였다.


Ⅲ. 이희봉 목사의 목회 활동
  이희봉 목사의 목회 활동을 위 자료들에 의해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1년
  〇 선산 도산(桃山)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이때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이었던 김기원(金基源)과 함께 시무하였다. 김기원은 본명이 김재수(金在洙)였는데 경북 최초(慶北 最初)의 장로교인(長老敎人) - 상주(尙州)사람 김재수(金在洙) -『상주문화』제19호
 애덤스 목사와 같이 대구에 온 어학선생으로 부해리 목사의 증언으로는 상주 출신이다. 대구장로교회사연구. 이재원. 도서출판 사람. 제1부 제6항
 그는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여 8세에 상주군 화산리 사숙(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조승장과 결혼하여 2남을 둔 사람으로 이희봉 목사와 함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을 하였다. 김기원 목사는 이희봉 목사보다 3년을 먼저 목회의 길을 걸었지만 고향인 상주에서 목회자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희봉 목사를 상주의 ‘첫’ 목회자라 이름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〇 선산군 옥성면 죽원교회가 설립되고 조사(助事)로 시무하다.

1903년
  〇 송천교회(松川敎會)에서는 영수(領袖)로 시무 중 이중희와 덕계교회 설립하고, 덕계교회로 옮겼다. 여기서 영수(領袖)는 청일전쟁(1894) 이후 교회가 대폭 증가하자 다시 조사를 도와 각 교회에서 조사 일을 대행하는 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영수’직이다. 영수는 당회에서 선출하기도 하고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에서는 그 지역 순회교역자가 임명하는데, 자격은 그 지역 토착 교인으로 신심이 두텁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을 택하였다. 영수의 역할을 지교회의 일반적 업무처리와 당회 사무, 교역자나 시찰위원회에 제반 업무를 수행하고, 교인을 대표하여 지도하며, 조사나 교역자를 협조하는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영수는 1894년 마펫(S. A Moffet.) 선교사가 임명한 평양 장대현교회 영수인데 그는 이영언으로 추정된다.『기독교대백과사전』, 1985, 교문사, 695쪽.

  송천교회 100년사에는 이때의 상황과 이희봉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03년 송천교회에서 여러 교회가 분립되었는데, 덕계, 김천 황금동, 추풍령, 죽원교회 등이 그것이다. 특히 덕계교회의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이중희와 이희봉(李喜鳳)이었다.
  이희봉은 덕계교회 분립 시 영수로 시무하다가, 1909년 상주교회 조사로 부임하여 시무했다. 이듬해 그는 보성의숙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으며,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아 청산교회와 상주 서정교회(西町敎會)를 거쳐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선산 죽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제3~4회 경북노회장을 지냈고, 1921년 대구 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대구 칠성동 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대구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가 주도하는 자치운동(自治運動)에 관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인들의 반대로 칠성동 교회를 사면하였다. 그 후 1931년 상주 남문밖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때 송천교회 당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상주읍교회와 남문 밖 교회가 합병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송천교회 100년사』


1904년
  〇 선산군 무을면 오가동에 오가동교회(五佳洞敎會)가 세워지고, 선산면에 노상동교회(路上洞敎會)가 세워지면서 오가교회와 노상동교회에 조사를 겸임하다.
  선산면 노상동 교회는 지금 선산읍교회이다. 선산읍교회 100년사에는 이희봉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산면 이문동 706번지의 대지 288평 초가 5칸을 노재한외 4명의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부해리 선교사가 설립자로 노상동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노석원이 영수로 윤원옥이 집사로 시무하고 조사는 이희봉이 본교회에 시무하다. 선산읍교회(路上洞敎會)의 초대 당회장 목사는 선산읍교회를 설립한 부해리 목사로 1904년 부임하여 1914년까지의 기간     중에 인근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도산교회, 오가교회, 상모교회, 습례교회, 백자교회, 석산교회, 서정교회, 화산교회, 오리원교회, 오광교회, 사산교회, 금흔교회 등 13개 교회를 겸임하여 순회하면서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이희봉 조사(李喜鳳)는 선산읍교회 초대 교역자로 선산읍교회가 설립되던 해 1904년에 부임하여 1909년 사이에 선산읍교회와 오가교회 죽원교회 3개 교회를 겸임하여 시무하였다. 이희봉 조사는 부해리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몇 명되지 않은 교인들이나마 그들과 뜻을 모아 교회를 부흥시키기에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눈물의 기도로 호소하며, 호별 방문전도와 노상전도에 힘을 써 한 사람의 교인이라도 더 늘려 그들이 다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희봉 조사의 시무기간에 교회 구내에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인들은 물론이요,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한국 교회의 대 부흥기에 힘입어 교회성장에도 헌신적인 사역을 하다가 1909년에 상주교회로 전출하였다.
  이희봉 조사는 선산읍교회를 떠난 후 1916년 평양신학 9회로 졸업하고 1916년 6월 23일에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를 계속하였고, 1918년도에는 경북노회 3대, 4대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선산읍교회 100년사』, p.130.
 
 
 〇 칠곡군 왜관교회가 설립하니 왜관교회에 김영채, 박영조와 함께 이희봉이 조사로 시무하다. 왜관교회 연혁


1905년
  〇 선산군 선산면에 습례교회(習禮洞敎會)가 세워지고 조사로 시무하다.

1906년
  〇 김천군 복전교회(福田敎會)와 곡송면(谷松面) 대양교회(大陽敎會)가 세워지자 이희봉이 조사로 대양교회와 겸임(兼任)하다.

1907년
  〇 예천군(醴川郡) 괴당교회 (槐堂敎會) 세워지고 조사로 시무하다.

1908년
  〇 김천군(金泉郡) 봉산면(鳳山面)에 인의동교회(仁義洞敎會)가 첨엔 교인들이 복전교회에 다니다가 인의동에 새롭게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희봉이 인의동교회, 능치교회 양 교회 겸임 조사로 시무하다.

1909년
  〇 이희봉이 상주 서정교회(西町敎會-지금의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조사로 청산교회(靑山敎會)와 겸임하다.
  〇 도산교회(桃山敎會)와 칠곡(漆谷) 숭오교회(崇烏敎會)와 겸임 조사로 시무하다.
 
1910년
  〇 상주 서정교회(西町敎會)에서 보성의숙(普成義塾)울 개설하다(성경, 한문,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 교육)숙장 김동필, 숙감 강재원, 교사 천선희 제 씨이다.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요람 내 연혁편 참조
 
  〇 갈전교회(예천군 풍양면) 조사 시무하다.『갈전교회 100년사』「연혁」


1911년
  〇 구미 옥계교회(玉溪敎會) 조사. 옥계교회가 분립되어 나갔다 조사는 이희봉, 교인 수는 20여명, 남율교회(南栗敎會-칠곡군 석적면 남율동)가 분립되어 나갔으며 교인 수는 8명이었다.『구미강동교회』「연혁」


1913년
  〇 도산교회(桃山敎會) 조사 이희봉이 본 교회와 월호(月湖) 및 칠곡(漆谷), 진평(眞坪 ), 남율(南栗), 옥계(玉溪), 상주군 금흔(衾欣), 화산(花山), 오리원(五里院) 등 8교회를 겸임하다.

1914년
  〇 선산군 습례교회(習禮敎會) 조사 이희봉이 본 교회와 칠곡, 남률, 옥계 등 세 교회를 사면하고, 청산교회(靑山敎會)와 상주군(尙州郡) 석산(石山), 사산(沙山), 화산(花山), 오리원(五里院), 오광(五廣), 서정교회(西町敎會) 등 7교회 조사로 시무하다.
  〇 제9회 경상노회에서 평양신학에 공부하는 신학생으로 허락을 받다.

1915년
  〇 선산군 청산교회(靑山敎會)에서 이희봉이 목사로 시무하다.
  〇 1916. 평양장로회 신학교 제9회 졸업생 이희봉 씨를, 상주지방 11개 교회에 방혜법 선교사의 동사목사로 활동하게 하다. 경상노회 제12회 회의록. p.14. 1916년 6월 22일.


1916년 6월 24일
  〇 목사 안수 받다.

1916년
  〇 서정교회(西町敎會) 조사 이희봉이 목사로 위임하다.
  〇 1916년 12월 27일 오후 8시에 대구 남성정 예배당에서 조직회로 회집 이희봉 목사는 목사위원으로 참여, 피택 장로로 지효식, 소병식 씨를 문답시키기로 청원하다.

1917년
  〇 선산군 죽원교회(竹院敎會)에서 목사로 시무하다.

1918년
  〇 경북노회장(3대, 4대) 노회장 피선되다.
  〇 경북노회 역대 임원(광복 전)

3.
1918.01.01.
李喜鳳
金泳玉
金忠漢
李萬集
鄭在淳


4.
1918.06.18.




銅山聖經學校


1920년
  〇 서정교회(西町敎會) 영수(領袖) 박정탁(朴政卓 - 후에 상산교회로 분립(지금의 상주제일교회)이 시무하고 보성여자학원(普成女子學院)과 부인야학교(婦人夜學校)를 設寘하다. 대구 선교부인(宣敎夫人) 성마리다(成馬利多)가 본 학교를 위해 금 200원을 연보하고 이희봉, 김재순, 조경삼, 유덕규 씨는 각 50원을 연보 하다. 임종훈 편저,『경북교회사』「상주군편」. 1920년 기사.
 
  이 기사는 1920년에 경북노회 내 교회가 세운 학교 현황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20
新川교회
달성군 수성면
남녀야학교
 
三思교회
영덕군
東明學院
 
西町교회
상주군
상주면
普成女子學院 婦人夜學校
대구 선교부인 성마리다의 선교사 200원 연보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보성여자학원과 부인야학교는 1910에 설립한 보성의숙과 같은 내용인지 아니면 1920년에 새롭게 세워진 학교인지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이 기록이 빠져 있다.

1921년
  〇 서정교회(西町敎會) 목사를 사면(辭免)하다.

1921년
  〇 대구의 칠성정교회(七星町敎會)가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현 대구제일교회)로부터 분립되자 명예목사로 시무하고 여자야학부와 여전도회를 조직하다. 1922년에 사임하다. 임종훈 편저,『경북교회사』, 대구부교회사(남양제일교회)


1922년
  〇 김천 황금동 교회 시무. 1922. 6. 김성로(金成魯) 목사 사임하고 이희봉 목사 부임하다. 황금동의 40번지(42평) 및 59번지(120평)의 대지 두 필지(합 162평)를 매입하여 40평 규모의 목조 함석지붕으로 고패집 예배당 구한말 남녀 내외의 관습으로 남녀가 한 방에 모여 예배를 드리되 휘장으로 칸막이를 하는 방법. 이도 어렵게 되자 ‘ㄱ’자 건물을 지어 중간 모서리에 강단을 설치하고 휘장을 쳐서 한편에는 남자석, 다른 한편에는 여자석을 마련함. 남녀의 출입문도 다르게 만들었다. 이 예배당이 한국 재래의 고패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신축하여 황금동 183번지에 있던 교회를 이전하였다.
  황금동 교회 111년사에 나타난 이희봉 목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희봉 목사는 상주 출신으로 1903년 이중희와 함께 아포면 봉산리 소재 덕계교회 설립을 주도하여 그 교회 영수로 시무하다가 1909년 상주교회 조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 목사 안수를 받고 청산교회와 상주 서정교회를 거쳐 1917~1920년까지 선산 죽원교회에서 시무했다.
  1918년 제 3~4회 경북노회장을 역임했고 1921년 대구 칠성동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대구 신정교회 이만집(李萬集) 목사가 주도한 교회의 자치운동에 동조했는데 이로 인해 교인들의 반대로 칠성동교회를 사면하고 1922년 말에 김천 황금정교회로 부임했다.
  그가 부임한 이후 황금정교회는 부흥하여 1923년에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사임한 날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황금정교회로 부임한 이후에도 경북노회에서는 자치운동에 대한 이희봉 목사의 태도를 염려했으나 그가 김천으로 옮긴 이후에는 자치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하지 아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황금동 교회 111년사』177쪽.

  여기서 자치운동이란 1921년 말 대구 신정교회 이만집 목사가 순도학교장 김의균(金宜均)을 권고 사직시킨 것이 교회에 큰 충격을 주어 직원 일동이 총 사직을 결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분규에 휘말리게 되었고 드디어 1922년 4월 9일 예배 시에 일부 교인들이 이만집 목사에게 항의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어려움이 벌어졌다. 대구 시내의 다른 일부 교회에서도 이만집 목사를 동조하여 대구교계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당회는 항의한 70명을 출교 시켰고 출교당한 70명은 당회원을 갈아 달라고 노회에 진정하였다.     노회는 이만집 목사 등을 정직하고 당회원을 면직하였는데 이만집 목사와 당회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한 사건을 말한다.『대구제일교회 90년사』 103쪽 및『황금동교회 111년사』177쪽 각주.
 

1926년
  〇 왜관교회 6대 목사로 부임하다(1926-1927).
  〇 구미 상모교회 시무하다. 상모교회 연혁에는 없음
 

1929년
  〇 구미 강동교회 시무하다. 강동교회 연혁
 

1931년
  〇 경북 상주읍 성동동 641번지에 상주남문외교회(尙州南門外敎會) 설립 및 김천의 송천교회 담임하다.

  1931년 상주남문외교회 설립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창기의 나라 형편(1931년은 만주사변이 일어 난 해이다. 조일강제병합 후 많은 일본 상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간교한 꾀로 한국인의 재산을 수탈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전답을 강제로 사들이고 강점한 토지는 소작료를 5활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받았다. 영세농민에게 빌려준 곡물은 이활 이상의 고리로 추수 때 현물로 받아들이니 이 민족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으며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이 땅을 잃고 일터를 잃고 중국 땅 만주로 해외로 이민을 갔다. 1936년이 되자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을 내걸고 일본인을 만들기 위하여 학교에서는 조선어 가르치던 것을 중지하고 일본어만 사용토록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그 시기에 애국애족심을 가지고 금릉군 아포면 덕계교회에서 영수로 시무하시다가 1903년 상주서정교회(후에 상주읍교회) 조사로 부임했다. 그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과 졸업 후 1909-1917년까지 다시 상주읍교회에 시무하였고, 당시 59세의 연세로 1931년 상주읍남문외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상주남문외교회를 중심으로 땅에 상주읍 외각지대인 거동, 서곡, 화개, 병성지역까지 전도하여 초창기에 30여명이 회집하는 주일 예배를 드릴 정도로 교회가 성장되었다. 주일 낮 예배를 마치면 이 목사님께서 초대 교회의 사랑으로 야외예배 때처럼 점심 식사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식사 후 교우들 간에 인정이 넘치는 대화가 오가며 거리가 먼 교우들이 다시 오후 예배를 함께 드림으로 주일을 성수하게 하였다. 그 시절 온 교우들이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교우들 간에 웃음과 기쁨이 있고 사랑이 넘쳐 인간관계가 훈훈해 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와 교우들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는 새로운 일꾼을 뽑기 위해 1936년 12월 8일, 제35회 경북노회 때 장로선택 청원을 하였는데 이 때 피택(被擇)을 받은 채병은(蔡炳殷) 영수는 저의 선친(先親)으로 장로고시 준비를 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미국선교사가 매년 사경회(査經會-요즈음 부흥회)나 성탄절 때에는 만국기를 예배당에 달고 축하의 밤 순서(독창, 합창, 성경암송, 성극 등)로 즐거웠고, 긴 밤을 지새우다 밤참 먹고 새벽송을 돌던 그 시적의 기억이 새롭다.
  이렇게 성장하던 상주남문외교회가 1937년 5월 상주읍교회와 합병하게 되었다. 이는 이희봉 목사님이 당시 65세로 갑자기 건강이 좋지 않아 시무하시기 어렵게 되었고, 남문외교회 자체도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이 시절에는 장로교는 분쟁이 없음)
  상주읍교회와 합병할 때는 주일 예배 참석인원은 50여 명으로 기억되며 교회 헌법에 준하여 6년간 시무하시던 이희봉 목사님을 원로목사 예우로 하고 마침내 합병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7년 12월 14일 제36회 경북노회(노회가 1년에 1회)에서 장로 고시 때 채병은(채종기 증언자 부친), 이종호(李鍾皓) 씨는 장로 합격되어 1938년 4월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참고로 1932년 일본에서 성주 후평교회로 돌아 온 선친 채병은 장로께서는 첨에는 부산으로 이사를 갈려고 준비를 하던 중 이희봉 목사님의 요청으로 1932년 5월에 상주로 이사를 와서 남문외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다.
  이미 65년 전의 일이라 기억에서 많이 사라졌지만 유년기에 내가 본 현장과 그때 사정을 전해 듣거나 본 사실을 더듬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시 상주남문외 교회의 교우들은 남성동에 채병은 가정, 정무갑(鄭武甲) 가정, 권중호(權重鎬) 가정, 이 집사, 박 집사(목재상을 했음), 성동동에 강 집사, 강 선생, 홍영주(洪永柱), 인봉동 장용식(張龍植(전대구농림교장 장재수 부친), 신봉동 강석홍(姜錫鴻) 낙양동에 강신유(姜信有), 김영호(金永鎬), 거동리 성태순(전도부인), 서곡리 이 집사 가정, 병성리에 김정택(부인 이연희), 화개리에 최 집사 가정이었다.” 2001년 3월 1일. 고(故) 채종기(蔡宗基) 상주교회 원로장로 증언기록.
 

1934년
  〇 10월 21일 ‘한국교회 50주년 희년’ 행사에 교역자 상(25년 이상 시무) 수상하다. 1934년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래된 지 50주년을 맞는 희년이었다. 이해 6월에 서울에서 선교 5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10월 16일부터 한 주간은 ‘희년축하경북대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강사는 마포삼열 선교사, 길선주 목사와 감리교의 윤치호(尹致昊) 선생이었다. 대회 중 10월 21일 주일에는 ‘희년축하기념예배’가 있었는데 길선주 목사는 “애락원의 꽃씨”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날 이희봉 목사 외 15명이 25년 이상 목회활동 공로로 교역자 상을 수상하였다.『대구제일교회 90년사』, 108쪽.


1937년
  〇 이해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상주읍교회와 상주남문외교회의 합병 후 원로 목사로 예우하여 추대하다.
  〇 원로목사로 추대 후 무양동 한국전력 개폐소 옆에서 농사와 목장(젓소)을 경영하며 생활하다.

1940년
  〇 65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Ⅳ. 나오면서
  한 사람의 인물이 태어나서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은 지역 역사는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 세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의 경우 개인의 문집이나 활동한 내용을 그 집안이나 가문에서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리해 두어야 하고, 아울러 지역사회가 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남기지 않으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 시대에 함께 생존했던 인물도 사라지고, 그 시대에 기록했던 기록까지 없어지게 되면 인물을 연구하고 후세에 알리는 일은 더 어렵다.
  이 번 이희봉 목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아울러 한 사람의 생애나 활동을 기술할 때는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일반적으로 오고 간 내용만 한 줄의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 분에 대한 삶을 구체화하기엔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시기에 이 땅에 태어나 목회자로서 최선을 다해 상주 지역 복음화와 교육을 위해 헌신한 이희봉 목사에 대해 오늘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누군가 이 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가 있다면 미쳐 찾아 내지 못한 그 분의 삶에 대해 보다 많은 자료를 찾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앞서 밝힌 것처럼 ‘첫’이란 단어가 때로는 ‘첫’이 아닌 결과를 불러 올 수 있음을 마음에 늘 두고 있다. 필자가 찾아 밝힌 몇 줄의 미비한 내용들이지만 다음 연구자들에 의해 보다 더 보완 되는 기초 자료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