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7호(2017년)

상주학.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상주(尙州)

빛마당 2018. 2. 9. 12:30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상주(尙州)

-오산속집(五山續集) 간행과 설단봉사(設壇奉祀) 중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權 泰 乙

 

 

목 차

 

 

 

 

 

 

 

1. 머리말 8

2. 가계(家系) 및 행적(行蹟)과 문장평(文章評) 9

1) 가계(家系) 9

2) 행적(行蹟) 10

3) 오산문장평(五山文章評) 15

3. 오산(五山)의 영남관(嶺南觀)과 상주 사대부(士大夫)와의

교의(交誼) 21

1) 오산(五山)의 영남관(嶺南觀) 21

2) 상주(尙州) 사대부(士大夫)와의 교의(交誼) 25

4. 오산집(五山集) 원집(原集) 간행 33

5. 후손 차일용(車一龍)二大事業 35

1) 오산집(五山集) 속집(續集)간행 35

2) 설단(設壇) 봉사(奉祀) 38

6. 맺는 말 39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상주(尙州)

-오산속집(五山續集) 간행과 설단봉사(設壇奉祀) 중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權 泰 乙

 

1. 머리말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15561615), 문장 기재(文章奇才)로 알려진 명사로 개성(開城) 출신이나 사후 상주 거주 후손들에 의해 상주(尙州)와 특별한 인연이 맺어져 이를 살피기로 한다. 특히, 오산 12세손 진사 일용(一龍18391918)의 주도로 오산 정신과 그 문학적 업적을 상주에서 기리고 천양함에 오산속집(五山續集)간행으로 오산집(五山集)을 완성하고 실묘(失墓)하여 끊어진 향사(享祀)를 설단(設壇)하여 상주 후손이 봉사(奉祀)한 점을 중심으로 하여 오산과 상주와의 인연을 살피기로 한다. 이는, 위인의 정신은 받들어 천양하는 곳에서 더욱 살아남을 알기 때문이니, 방촌(厖村) 황희(黃喜)선생의 정신이 상주에 길이 남은 예로써도 알 수 있다. 정신문화는 가꾸는 곳에서 꽃피우고 열매맺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2. 가계(家系) 및 행적(行蹟)과 문장평(文章評)

가계(家系)오산집의 세계도(世界圖)연안 차씨 대동보(延安車氏大同譜)및 이면주(李冕宙) 찬의 <행장(行狀)>을 주로 참고한다.

 

1) 가계(家系)

오산 차천로(15561615)의 자는 복원(復元)이요, 다른 호는 귤실(橘室)난우(蘭嵎)청묘거사(淸妙居士)이다.

연안 차씨(延安車氏)의 시조는 연안군(延安君) 차전효(車全孝), 7대조는 문절공(文節公) 운암(雲巖) 원부(原頫)로 문과에 급제하여 간의대부에 이르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 등과 명성을 떨친 학자로 고려가 망하자 운암으로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가 개국공신으로 녹봉하려 하자 굳이 사양하였으며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평소 사원(私怨)을 품었던 정도전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세종 조에 신원되고 문절(文節)로 시호가 내려졌으며 전남 운암사에 제향되었다. 운암의 성리학과 서화가로서의 예능은 가학(家學)의 바탕이 되고 그의 충절은 의리 숭상의 가풍(家風)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조부 광운(廣運)은 경학(經學)에 밝아 교관(敎官)에 등용된 선비로 교육자다. 부는 이재(頣齋) (15171578)으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경사(經史)와 문학(文學)에 달통하였으며, 진사시를 거쳐 1543년에는 문과 식년시에 갑과(甲科) 2(榜眼)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갑과 제1(壯元)은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었기에 평생 문학으로 서로가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더구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에게 인정받아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군수로 교육자로서도 이름이 났다. 모는 아산 이씨(牙山李氏) 습독 계윤(繼允)의 따님이며, 오산(五山)5형제 중 제3남으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오산의 탄생에 설화가 있으니, 천재적인 문재(文才)를 타고났던 형 은로(殷輅)17세에 요절하였는데 상제(上帝)의 명으로 천로(天輅)로 환생하였다 한다. 이는, 오산이 천부적인 문재(文才)를 타고난 사실과 관련이 깊다 하겠다. 형뿐 아니라, 아우 운로(雲輅)도 문장가로 문명을 얻은 선비인데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문과 장원으로 내자시 정(內資寺 正)에 이르렀으며 호는 창주(滄州)로 특히 시에 능하였다. 한 집안에 삼세 5(三世五人 : 祖 廣運, 父 軾, 子 殷輅天輅雲輅)의 문장가가 났고, 아버지와 아들 둘(天輅雲輅)을 조선의 삼소(三蘇)로 불릴 만큼의 문운(文運)이 왕성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오산(五山)은 고려조 명문가요 충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가학(家學)으로 성리학을 전수하였고, 천부적 문재(文才)에다 문장 가문의 문학적 소양을 충실히 쌓아 대문장가로 이름을 남기었다 하겠다.

 

2) 행적(行蹟)

오산(五山)은 천재적인 문재(文才)를 타고나 7대조 문절공 이래로 형성된 의리 중시의 사상과 성리학문학적인 소양을 가학(家學)으로 쌓았다.

1577(丁丑22, 선조10)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교수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1586년에는 교서관 정자(9)로서 고향인에게 과거시험의 표문을 써 주었다가 발각되어 종성으로 유배가는 큰 사건이 있었다. <행장>에서도 이 사건을 밝히었고 나아가 선조가 오산의 문재를 크게 아낀 사실을 특기하였다. 유배를 명하고도 선조가 중사(中使)를 시켜 너무 실의에 빠지지 않게 술로 위로하게 하고 부채에다 시를 받게 하였으나 오산은 그 내막을 모르고,

 

만 번 죽어 마땅할 고신(孤臣)의 죄

오로지 살림은 성주(聖主)의 은혜로다.

장사(長沙)는 어느 곳이던가

천 리에 설산(雪山)은 저무네.

 

라고 하였다. 선조가 오산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그가 몸을 함부로 할까봐 절도사에게 명하여 특별히 예우토록 조치하고도 정작 오산은 모르게 하였다. 1588년에 방면된 뒤 이 사실을 알고 오산은 감격하여 울었다 한다.

1589년에는 일본 통신사(정사 황윤길부사 김성일)의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짧은 기간에 시 45천 수를 지어서 일본에 문명(文名)을 떨치었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수창한 연구시(聯句詩)는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한다.

1592년 임란에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서한을 명을 받아 썼으며, 급박한 외교문서는 거의 오산이 담당했던 사실을 <행장>에서는,

 

임진난의 혼란한 때에 재능이 탁월한 인물이 조정에 가득하고 사단(詞壇문단)의 거장(鋸匠)은 손가락으로 다 셀 수도 없이 많았으나, 무릇 문사(文事)가 있을 때면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꼽았다. 격문(檄文)이 한 번 뜨면 적국이 두려워 하고 노포(露布)가 전해지면 중국인이 칭상(稱賞)하였으며, 신장(宸章)을 대신 지으면 하늘의 별이 빛을 내며 회전하는 것 같았다.”

 

라고 하였다. 요약하면 오산은 왕(나라)을 보좌하는 글 곧 보불문장(黼黻文章)의 제1인자였음을 특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592, 이여송(李如松)4만의 구원병을 거느린 제독으로 나왔을 때(1222), 왜적을 깨우치는 격문으로 <격유왜(檄諭倭)>문을 썼다.

1593, 이여송이 평양성을 수복하였을 때(18), 전승을 널리 알리는 노포문으로 <파 평양성 왜적 노포(破平壤城倭賊露布)>를 썼다.

1595(乙未), 이여송 제독을 송별할 때 여러 문신들이 지은 전별시책의 서문으로 <송이제독시서(送李提督詩序)>를 썼는데, 제목 아래 주()를 달아, “()을 받고 지었는데, 7언율시 백 수, 7언배율 백 운()을 다 하루 낮밤에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들 시가 문집에 실렸거니와 이로 인하여 오산의 시명(詩名), ‘東方文士로 중국에 널리 퍼지었다.

1597(丁酉) 문과 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행 봉상시정(行奉常寺正)접반사봉직랑삼척안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9(乙亥), 통진현감(6)을 역임하였다.

1601(辛丑), 교리(校理교서관 교리 종5)로서 교정청의 관직을 겸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평양에서 중국 사신 고천준(顧天俊)의 빈접사(儐接使)가 되었을 때 오산은 제술관이었으며, 이때 동고(東皐) 최립(崔岦)이 평양에 우거하여 공무의 여가에는 서로 만나 시를 주고 받았다. 동고의 간이당(簡易堂)에서 수창한 분들은,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 빈접사(儐接使)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 15631628) 연위사(延慰使)

남곽 박동설(南郭 朴東說, 15641622) 종사관(從事官)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 종사관

학곡 홍서봉(鶴谷 洪瑞鳳, 15721645) 종사관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 15561615) 제술관(製述官)

남창 김현성(南窓 金玄成, 15421621) 제술관

석주 권 필(石洲 權 韠, 15691612) 제술관

간이 최 립(簡易 崔 岦, 15391612) 평양 우거, 간이당(簡易堂) 주인

등이다. 당대뿐 아니라, 조선 한문학사 상의 대가가 다 모였다.

1605(乙巳선조 37) 416.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녹훈됨. 이로 인해 사후에 예조참판이 증직되었다. 공신회맹제에 지봉 이수광도 참석하였다.

1605(乙巳) 1113. 전 교서관 교리로서 공산(公山공주)에 유배 온 가규(可畦) 조익(趙翊15561613)을 방문하였다. 가규의 친구 8인이 상주에서 와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모임에서 느낀 감회를 <공산회 서(公山會序)> 70여 구로 잘 나타내었다.

1606(丙午) 4. 명나라 조사(詔使) 주지번(朱之蕃)이 평양에 왔을 때 월사 이정구가 빈접사가 되었다. 주지번이 일부러 회고시(懷古詩) 백운(百韻)을 새벽 전에 지어 바치라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오산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하여 제술(製述)에 응하였다. 큰 동이 술을 마시고 큰 병풍 뒤에 앉아 시를 읊으면 석봉(石蜂) 한호(韓濩)가 받아썼는데, “고성으로 크게 시를 외니, 물이 솟고 바람이 이는 듯하다(고성대창高聲大唱 수용풍발水涌風發)라고 하였다. 밤이 반도 못되어 백운(百韻)이 이루어지고 닭울기 전에 사신에게 바치니, 주지번이 촛불을 잡고 읽으며 감탄하여 격절(擊節박자맞춤)타가 부채 하나가 다 부서졌다 한다. 글로써 나라를 빛낸, 이문화국(以文華國)의 대수(大手)였다 하겠다.

1608(戊申) 21일 선조(宣祖) 붕어(崩御), 22일 세자 광해군 즉위. 225일 선조의 존호(尊號)소문 의무 성경 달효대왕(昭文毅武聖敬達孝大王)’으로 정하고 이를 종묘에 고할 때 오산이 고유문으로 <상 존호 고 종묘 구실문(上尊號告宗廟九室文)>을 찬하였다.

1609(己酉) 1(맹춘). <제 이 창석 준 형제급란도(題李蒼石埈兄弟急難圖)> 시를 썼다.

1609(己酉) 8.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이 상목경차관(桑木敬差官)이 되어 관동지방을 순찰하러 갈 때 시를 구하여 오산이 7언 율시로 전송하였다.

1611(辛亥광해군 3).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평양의 숭인전(崇仁殿) 비문을 썼는데, <숭인전 비명(崇仁殿碑銘)>은 오산의 찬이며, 기자의 사당인 기자묘 비문 즉 <기자묘 비명(箕子廟碑銘)>은 월사 이정구의 찬이다.

1614(甲寅) 99. 태조의 영정을 영변에서 전주로 옮겨 봉안할 때, 왕과 왕세자 및 대부(大夫)들이 서울에서 전주로 전송하는 의식에 대부의 뒤에서 종사하였다.

1615(乙卯) 35일 별세하다. 묘소는 과천(果川) 동별앙리(東別王里)에 들였으나 실전하였다.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이 증직되었다.

 

3) 오산문장평(五山文章評)

오산(五山), 임란을 계기로 선조의 지우(知遇)를 입어 천재적인 문재(文才)를 한껏 발휘하였다. 화급한 국사(國事)에 글로써 왕(나라)을 보좌하여 보불문장(黼黻文章)의 표본이 되고, 글로써 국위를 선양하여 문장화국(文章華國)의 대수(大手)가 되어 글로써 공신록(功臣錄)에 오른 문장가가 되었다. 오산에게 주어진 문장가로서의 별칭은, 삼소(三蘇; 父 軾五山弟 雲輅), 송도 3(松都三絶; 五山詩東皐文石峰筆), 서격사한(書檄詞翰; 車天輅韓濩權韠金玄成) 등으로 길이 남아 있다.

오산은 문집으로 오산집(五山集)과 야담 수필집으로 오산설림(五山說林)과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주제로 한 강호가사 <강촌별곡(江村別曲)> 60구를 남기었다.

이에, <행장>을 통하여 몇 분의 오산 문장 평을 소개한다.

오산의 문사(文詞)는 수세(水勢)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도도(滔滔)하여 다함이 없는 것 같다.”[상촌(象村) 신흠(申欽)]

오산 스스로도 자신의 유여(裕餘)한 시정(詩情)과 속조(速藻)함을, “종이를 붙여 만리장성을 만들어 나로 하여금 빨리 쓰게 한다면, 종이는 다할지라도 시는 궁함이 없을 것이다.”(행장)라고 호언한 바도 있다.

오산의 좋은 시는 비록 두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우리 동방의 시인으로 차오산(車五山)과 이동악(李東嶽)이 대가(大家)의 종정(宗正)이 된다.”[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오산(五山)이 일본인에게까지 알려진 일화는, 임란에 오산 형제가 장단(長湍) 사곡(莎谷)에 살았는데, 동리를 지나던 왜장이 문장이인(文章異人)’이 사는 곳이라 하여 재 너머로 진()을 옮긴 일화가 있고, 전술한 바와같이 중국인이 오산을 동방문사(東方文士)’라 하였거니와 오산의 문장이 절이(絶異)함을 알고 익주부자묘비명(益州夫子廟碑銘)과 애강남부(哀江南賦)에 주해(註解)한 것을 중국의 사신들이 무늬있는 고운 비단(文錦) 칠단(七段)을 주고 사 갔다는 일화도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사기(史記) 73권을 모아 책을 만들 때, 거기 쓰인 고금의 주소(註疏)를 산정(刪定)할 책임을 맡겼더니 10개월만에 완성하였는데, 비록 완전무결하지는 않으나 학해(學海) 중의 한 낚시는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오산이 사학(史學)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게 하는 예라 하겠다.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은 조선조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거니와 지봉유설에서 오산의 문장은, “웅건(雄建)하고 기장(奇壯)하여 마치 장강(長江) 거해(巨海)가 물을 쏟아내면 낼수록 더욱 정지하지 않음과 같다.” 하여, 문장의 도도한 기세와 시심(詩心)의 유여함이 특출하였음을 특기하였고 거의 제문(祭文)에서는,

 

천기(天機)를 다 누설하니, 조물(造物)이 꺼리고, 사람이 혹 질시하네. 재주가 뛰어나게 높으니, 어리석은 자가 분별력도 없이, 망녕되이 헐뜯어 평하도다. 저들에게 자신의 역량 헤아림도 없으니, 그대에게 무슨 해로움이 있으랴. 이름은 우주 간에 빛나니, 그대는 망하지 않으리라. 한 때 굽히고, 만세에 펴리니, 얻고 잃음영광과 욕스러움, 필경은 무엇이 진짜인가. (중략) 기개(氣槩)는 서로가 진정으로 허용하여, 길이 지음(知音)에 의지하였더니, 아양일곡(峨洋一曲) 멈추니, 사람과 거문고 다 없어졌도다. 나에게 새로운 시가 있은들, 누구와 더불어 읊으며, 나에게 말 술이 있은들, 누구와 더불어 잔질하랴.”

 

라고 하였다. 지음(知音)을 잃고 애도하는 지봉(芝峰)의 말 속에는, 재주가 너무 높아 귀신이 꺼리고 사람이 질시함을 당하여 오산이 생전에 지기(志氣)를 다 펴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그러나, ‘이름은 우주 간에 빛나니, 그대는 망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죽어서도 망하지 않는 거기에 오산(五山)의 진면목이 있음을 공언(公言)하여 문장가로서의 영생을 예언하였다 하겠다.

다음은 한문 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분으로 알려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오산을 위한 만사(輓辭) 세 수를 지었는데 그 첫 수에서,

 

가업(家業)을 계승함에는 서향(書香)에 근본하고

대수(大手)로 인간에선 비길 데 없이 뛰어 났었네.

문장은 한진(漢秦), 시는 정시(正始)를 법 삼았고

재능은 굴송(屈宋), 기풍은 왕양(王楊) 따랐네.

교룡땅강아지지렁이가 비록 섞였든들

강과 바다 파도에야 감히 누가 버티랴.

작자는 이제 영원한 이별을 할지라도

작품이야 따라 매몰되진 않으리.

 

라고 애도하였다. 이 한 편의 만시는 뒷날 오산문학 연구의 작자작품론의 단서를 제공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할 곳은 경련(56)으로, 앞서 지봉(芝峰)이 제문에서 분수도 모르는 무리들이 오산과 겨룰 뿐 아니라 얕잡아 헐뜯기를 일삼았다고 한 주지의 생각을 월사(月沙)도 동감임을 암유(暗諭)하였다. , 강해(江海)의 파도같은 오산문장에 다 쓸려버릴 땅강아지지렁이들이 당대에는 오산의 세계에 버젓이 공존했음을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큰 사람이라야 큰 사람을 알아 본다는 말이 실감나는 만시라 하겠다. 역시, 월사도 오산과는 지기(知己)였음을 이 만시의 둘째 수에서,

 

저승에 이제 가면 지기(知己)가 없어

응당 인간의 옛정을 회상하리.

 

라고 하였다. 이에, 오산과 월사가 평소에 문학상에서는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작품을 논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행장> 소재 일화 한 편을 소개한다.

 

공이 하루는 월사 상공(相公)을 예방하였더니 상공이 나의 시()는 어떤가?’하고 물었다. 공이 이르기를, ‘대감의 시는 마치 태화(太華; 태산화산)의 산정같고 옥정련(玉井蓮)이 흐드러지게 피어 해가 비추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공이 기뻐서 이르기를, ‘그대의 시는 어떤가?’라고 하자 공이 말하였다. ‘나의 시는 쇠 백만 근을 모아 하나의 큰 망치를 만들었기에 산천의 초목은 말할 것도 없고 달려가 난타하면 꺾이어 멸망치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즉 옥정(玉井)의 연꽃인들 또한 상처를 입지 않겠습니까?’ 상공이 말하기를,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막역한 사이의 익살(滑稽)이지만 오산의 자기 시에 대한 대단한 자부와 월사의 남을 인정하는 너른 포용력을 동시에 보인 일화이기도 하다.

오산 문장평(五山文章評)의 결론으로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찬한 <오산집 발(五山集跋)>로 대신한다.

 

유독 오산자(五山子), 기이한 재능과 뛰어난 기백이 무리에서 아주 빼어나 당세를 압도하였다. 기백과 재치가 넘치는 문장과 웅건한 필치는 마치 큰 파도가 바다로 치달리듯하고 달리는 천리마가 비탈을 내리듯하여, 부딪치는 것은 바람 앞에 쓰러지고 만나는 것은 기세가 꺾이듯하였다.

깊이 생각지도 않고 붓을 들어 쓰기 시작하면 경각에 수 천 마디를 이루니 동 시대의 제공이 문단의 맹주로 여기었고 큰 명성을 지녔던 자들도 사양하여 뒤로 물러나 일두(一頭)를 양보하였다. 까닭에, 무릇 중대한 사명(辭命)이 있어 급한 데 부응하고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할 일에는 느닷없이 공에게 위촉하였고, 황제의 특사(詔使)를 안내 접대(儐接)하는 일이나 중국 사신과의 시를 주고 받음에는 일찍이 공이 참여치 않은 적이 없었다. 문집 중의 이 제독(李提督)에게 준 7언율시 백 수와 장편율시 백 운(百韻) 등을 보면, 하루 낮밤에 입초(立草)한 것이니 가히 증거할 수 있다 하겠다.(중략)

그의 독특한 경지에 이른 재예(才藝)는 저절로 얻은 경지라, 귀신이 도운 듯하니 배워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명성이 중국에 들리고, 심부름꾼이나 종들도 다 외었으니 가히 불세출의 영재(英才)라 일컬을 만하다.”

 

 

3. 오산(五山)의 영남관(嶺南觀)과 상주(尙州) 사대부(士大夫)와의 교의(交誼)

1) 오산(五山)의 영남관(嶺南觀)

오산(五山)은 아버지 대에 이미 영남과는 각별한 인연이 맺혀졌다. 아버지()가 문과 제2(榜眼)에 합격하였을 때 영남 상주 출신의 노 소재가 제1(壯元)이어서 두 분은 평생 문장으로 추허(推許)하였고, 학문에 있어서는 모재(慕齋)의 인정을 받아 오산 아버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한, 일본 통신사행의 제술관이 되어 학봉(鶴峰)과 수창하여 문명(文名)이 더욱 널리 퍼진 일 등이 다 오산이 영남에 대하여 관심이 높고 또한 긍정적이었던 원인들이었다 할 수 있다. 이에, 오산의 영남관을 몇 예로 살펴 본다.

 

(1) 교서(敎書)에 나타난 영남관

1600(庚子선조 33) 3, 김신원(金信元)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교서(敎書)를 오산이 찬하여,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었다. 우리 영남(嶺南)은 살피건대 신라의 고도(故都옛 도읍)로서 갖춤이 심히 아름다워 비옥한 땅은 벌여놓은 경계가 산과 바다를 겸하여 포괄하였다. 서쪽으로는 호서호남 땅과 접하였고, 북쪽은 관동을 막아 변경을 삼고, 동남쪽은 큰 바다에 접하여 섬나라 오랑캐가 반드시 거쳐 가야하는 큰길이 되었다.

땅이 크고 백성이 많아 나라에 들이는 뭇 부세(賦稅)3분의 2를 차지하여 실로 남쪽 벼리(가장 중요한 부분) 일대 도회라, 예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었다. 67(고을)의 일을 독단으로 처리해야 하고 좌도 우도를 통솔하여 거느리며 수륙절도사가 다 방백(方伯)에게 달린 까닭에 항상 매우 신중한 사람(重人)을 가려 임용하였던 것이다.”

 

간결한 말 속에 영남의 역사지리산업인물 등에 대하여 맥을 짚어 요약하여, 국방의 요충이요 남방의 벼리가 되는 웅도(雄道)를 다스림에 왕을 대신할 중인(重人)을 선용(選用)한 뜻을 잘 드러내었다 하겠다.

 

(2) 증시(贈詩)에 나타난 영남관

1611(광해군 3) 3,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윤방(尹昉)에게 7언배율(七言排律)의 장편 시 100()를 바치어 축하하고 선정을 희원하였다.

첫머리에서,

 

육십 칠관()이 한 도()를 이루어

남쪽 거진(巨鎭)으로 청구(靑丘)의 으뜸일세.

 

라 하고 나아가,

 

퇴옹(退翁퇴계) 도덕(道德)의 연원(淵源)은 광활하고

명노(溟老남명) 풍표(風標)의 기색은 추상같도다.

군자의 고을에는 직설가(稷卨家)가 남았고

사대부 마을에는 기구업(箕裘業)이 남았도다.

 

라고 하였다. 웅도(雄道)다운 지리적 풍토와 인문적 풍토로서의 퇴계남명의 학풍과 인재의 부고(人材府庫), 나아가 미풍양속을 크게 부각시켜 놓았다. 이같은 영남관은 자타가 공인했던 일반화된 관점이기도 하였다.

 

(3) 상소(上疏)에 나타난 영남관

이 항에서는 문묘(文廟)에 오현(五賢;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종사해야 함을 청한 상소문을 통하여 이 글에 나타난 오산의 영남관을 살피고자 한다.

5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상소는 1574212,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비롯하여 161095일에 5현을 문묘에 종사할 때까지 주로 영남 선비들에 의한 상소가 가장 많았다. 5현 중,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만 영남인이 아니지만 정암은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기에 학통상에서는 영남학통에 진 배 없었다. 오산의 상소가 언제 쓴 것인지는 미상이나, 영남인의 주장과 뜻을 같이 하여 평소 지녔던 학문인물에 대한 확고한 지견을 편 상소라 할 수 있다. 이에, 그 일부를 보면,

 

삼가 생각컨대,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온화하고 즐거우시며 인재를 양성하는 아름다움은 삼대(三代)에 못하지 않으시어, 문헌은 족히 후세에도 사실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가령, 다섯 유신(儒臣)은 서로 이어 태어나서 끊어진 학문을 잇고 (孔孟) 정밀하고 미묘한 말을 명백히 하여 도학(道學性理學)을 앞장서 밝혀 울연히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학자는 지금 우러러 보기를 태산(泰山)북두(北斗)같이 하고 비록 거친 곳의 오척동자(五尺童子어린이)라도 다 동방(東方)에 오신(五臣)이 있음을 알고 중국인 역시 반드시 그 성명을 들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중략)

지금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발을 싸매고 천 리를 와서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중략) 엎디어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언적(彦迪)의 허물없는 처지임을 풀어주시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황(李晃) 4()과 합하여 문묘에서 제사를 받는 반열에 들게 하시면 사문(斯文)은 귀의할 곳이 있게 되고 후학(後學)은 존중하여 본보기로 삼을 바가 있게 되리니, 이는 특별히 신등의 다행만이 아니라 실로 후학 만세의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영남을 바로 얘기한 것은 아니나 오산의 영남관이 아주 긍정적이었음을 알게 하는 자료로는 충분하다 하겠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같이 오산은 영남의 사대부 모재 김안국소재 노수신학봉 김성일 등과는 깊은 연관이 있었거니와 이 밖에도 약포 정탁서애 류성룡 등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시를 주고 받았다. 오산의 영남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호의적인 관점은, 오산정신(五山精神)이 영남에 뿌리내리는 데 풍토 조성의 청신호같은 것이었다 하겠다.

 

2) 상주(尙州) 사대부(士大夫)와의 교의(交誼)

이 항에서는 상주 사대부들과의 문학상 교의를 살피는데 그친다.

 

(1) 소재 시(齋詩)에 차운(次韻)

소재 노수신(15151595), 오산에게는 부집(父執)이어서 공경심으로 차운한 시가 두 수 있다. 소재가 진도 유배중 산인(山人) 탄웅(坦雄)에게 써 준 것으로 보이는 시에서는 공경히 차운함(敬次)’이라 하였고 그 미련(79)에서는,

 

아마도 장검을 차고

소리 높이 초사(楚詞)를 읊었으리.

 

라고 하였다.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어려서부터 충신(忠信)한 도리를 다 하려는 뜻을 닦고 늙어서도 그 뜻을 지킴에 길고 예리한 장검을 차고 충신연주사(忠臣戀主詞)<이소(離騷)>를 외었듯이 소재 역시 유배지에서 변함없는 충신한 마음을 초사(楚詞)에 우의(寓意)하였으리라 본 것이다. 또한, 노 소재가 회재 이언적의 봉림대운(鳳林臺韻)에 차운한 시에서는,

 

백세에 성인은 간간이 나오는데

천년에 상서로운 새는 어찌 드디게 오는가.

창망한 우주는 오늘만이 아니건만

적막한 풍광은 옛날과 다르네.

산은 백운을 띠어 색상(色相)을 남기고

달은 단혈에서 나와 심기(心期)를 드러내네.

장강은 끊임없이 흐르는 진원(眞源)이 있으니

빈 배를 띄워 마음대로 가고 싶네.

 

라고 읊었다. 서조(瑞鳥)는 봉황(鳳凰)으로 성인이 나면 나타난다는 신령스러운 새다. 회재(晦齋)가 봉황이 이르는 세상이 오기를 고대하였듯이, 소재가 그리 하였고, 또 오산이 그리 하고 있다. 회재나 소재가 바라던 바를 오산이 또 바라고 있으니, 이 시로서도 오산이 살았던 현실 또한 상서로운 징조가 보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서도 그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없었던 현실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원(眞源근본 근원)에로의 회귀를 염원한 오산의 심기(心期)는 미련(78)의 끝 구에 다 응축되었다 하겠다.

 

(2) 가규(可畦)와 수창(酬唱)

오산(五山)은 가규(可畦) 조익(趙翊15561613)과 동갑인데다 지기(志氣)가 상합하여 시를 주고 받은 일이 많다. 관계에 진출하면서 친숙해 진 것으로 보이니, 궁궐의 밤에 읊은 시의 경련(56)을 보면,

 

명예를 탐하여 죽는 날까지 모래로 밥을 짓고

사는 꾀 졸렬하여 돌밭에 씨뿌리네.

 

라고 하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질을 얻지 못할 일에 매달리고 있음을 노래하여, 순탄치 못한 환로를 벗에게 하소연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속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벗임을 알게 한 시이기도 하다.

가규(可畦)가 장령으로서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 처리의 모든 책임을 송강 정철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공산(公山공주)으로 유배(1602.4.)를 가게 되었다. 4년 뒤(1605), 가규의 고향 벗 8인이 공주로 위로차 방문하였을 때 오산(五山)도 마침 공주에 머물고 있었다. 가규가 고향의 벗들과 모임을 가졌을 때(1605.11.16.) 오산도 초청하여 함께 즐기었다. 이날의 일을 <공산회 서(公山會序)>로 기록하였는데 먼저 참석인을 밝히었다. 제명첩(題名帖)에 올린 사람은 다음과 같다.

 

충청도 관찰사 李弘老, 字 裕甫, 庚申生(1560), 연안인, 서울거주

전 내시교관 池達海, 得源, 辛丑生(1541), 충주인, 서울거주

충의위 朴汝珩, 伯獻, 癸卯生(1543), 나주인, 상주거주

급제(及第) 趙 翊, 棐仲, 丙辰生(1556), 풍양인, 상주거주

전 교서관 교리 車天輅, 復元, 丙辰生(1556), 연안인, 개성거주

유학(幼學) 韓 璞, 大玉, 辛亥生(1551), 청주인, 상주거주

진 사 韓 璡, 仲瑩, 丙辰生(1556), 청주인, 상주거주

행 부호군 姜 績, 仲成, 辛酉生(1561), 진주인, 상주거주

성균 학정 全 湜, 淨遠, 癸亥生(1563), 옥천인, 상주거주

유 학 趙光璧, 汝完, 丙寅生(1566), 풍양인, 상주거주

유 학 洪友閔, 孝伯, 丙子生(1576), 남양인, 상주거주

유 학 趙 係, 仲叔, 甲申生(1584), 풍양인, 상주거주

 

가규(可畦)는 이 날의 일을 오산이 한 자리에서 70여 구의 서문을 써 상세히 기록한 데 대하여, “가히 대수(大手)로 일컬을 만하다.”(1605.11.16일자)라고 하였거니와 한 번 쓰고는 한 자도 수정가감이 없자 상주에 오산의 문명(文名)이 이로써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문은, 가규가 유배된 4년만에 고향의 친구 8인이 금란지교(金蘭之交)교칠지교(膠漆之交)의 우정으로 벗을 찾아온 아름다움을 보고 70여 구로 찬미하고 그 의미를 특기하되, “뜻과 취향이 서로 통하니, 부풍(扶風)의 호걸스런 선비가 아니겠는가. 10년의 막역(莫逆)한 친구를 불러내어, 하루를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 자연의 낙토(樂土)인 무하유(無何有)의 세상을 만들도다.”라고 하였다. 이제, <공산회 서>를 쓴 날 시를 읊어 가규에게 주며 겸하여 제공(諸公)에게 보인 시를 보면,

 

공산(公山)은 아름다운 삼한(三韓)의 땅인데

멀리서 제군 초췌한 사람 위문왔네.

술 가지고 와 실로 좋은 밤놀이 이루고

흉금을 열어 옛 친구의 뜻 저버리지 않네.

타향에서 즐거운 모임 가장 그리던 일인데.

옛벗 새로 사귄 벗 모두 한 자리에 모였네.

그 중에 다소간의 한스러움 있으니

바다로 드는 장강(長江)은 다할 기한 없음일세.

 

라고 읊었다. 미련(78)의 끝 구에 함축시킨 오산의 시의()가 묘함을 볼 수 있으니, 기다림의 한계를 넘은 시간의 흐름임금을 향한 고신(孤臣)의 간절한 염원 등이 응결되어, 환희 중에서도 풀릴 기약없는 유배 중의 벗을 향한 오산의 한스러움이 곧 좌중 모두의 한스러움임을 가없이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이 시 외에도 가규(可畦)의 긴 유배(1602. 1607. 5)가 풀린 3년 뒤에야 장령(4)으로 종5품 경상도 도사로 나아갈 때도 위로와 격려를 시로써 대신하였다.

 

(3) 이 창석 형제급란도(李蒼石兄弟急難圖)에 시를 씀

이 시오산집과 흥양이씨대종회 간행의 兄弟急難圖朱書節要(1993)에도 번역되어 실려 있어 참고하였다.

 

그대의 집안 좋은 형제

대의(大義)로 연지(連枝) 중히 여겨

피난 땅에 전쟁 일어났을 즈음

도적들 닥칠 때 목숨 보전하였네.

아우가 마침 병을 앓으니

형이 차마 서로 떨어지려 하겠는가.

칼날 무릅쓴들 어찌 두려워 하랴

활 당겨 홀로 버티었으니

오직 정성스러운 뜻의 감동이라 이를 뿐

웅장한 계획의 기이함이라 믿을 수 없네.

큰 기러기 그림자 이어지니

작은 할미새 울음소리 함께 따르네.

슬피 기원한 옛일은 들었지만

성내어(적을) 꾸짖은 일은 오늘날 보네.

오로지 진정한 속마음 분기함에 기대었을 뿐

어찌 손발로 하여금 이지러지게 할손가.

이리 늑대 도리어 달아났으니

확실히 귀신이 도와 주었음일세.

무력으로 누가 이를 당해 내랴

서생이 마침내 이와 같았네.

한 사람의 남자 이름을 우주에 떨쳤으니

천고에 드문 남아로세.

칼 어루만지면 더욱 깊이 감탄하니

급란도 볼수록 나의 생각 일으키도다.

 

이 시는 기유년(1609) 맹추(7)에 오산(五山)이 쓴 이 창석 형제급란도 시다. 전장의 적과 항쟁하며 병든 아우를 업고 백화산성으로 올라 끝내 동생의 목숨을 보전함은, 무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부(一夫)의 천생 우애(天生友愛)천륜(天倫)의 의리(義理)가 빚어낸 숭고한 형제애의 결정(結晶)이었다. 오산(五山)에게 상주는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4) 조 이재()에게 시를 줌

오산이 이재에게 준 시는 1609(己酉) 8월에 쓴 시다. 이재가 상목경차관(桑木敬次官)으로 관동 지방을 편력(遍歷)함에 앞서 오산에게 시를 지어 줄 것을 청하였을 때에 오산이 응하여 쓴 시. 이재가 오산보다 여섯 살 밑인데도 평소 친숙했음을 이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관동 26()를 다 답사해야 하는

이번 여행길은 한가롭게 놀 일은 아닐세.

왕사(王事)에 종사하러 궁성을 하직하고

선옹(仙翁)을 짝하러 십주(十洲)에 이르렀네.

바다를 뒤덮은 오색구름에 햇빛이 비치고

늘 봄인 벽수(碧樹)는 가을을 알지 못하네.

경치는 촉박한 여정의 여가에 수습하리니

생각해 보니 돌아올 때엔 필력(筆力)이 굳건해지리.

 

공무로 관동을 순력해야 하지만, 촉박한 속에서도 금강산의 절경에서 산수 자연의 기()를 얻어, 돌아올 때에는 필력(筆力)이 더욱 굳건해지리라 하였다. 이로써도 오산이 이재의 문명(文名)을 익히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특히, 오산은 5현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린 바가 있고, 이재는 16105현을 문묘에 종사할 때 집례관(執禮官)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묘정집례 계첩후 서(廟庭執禮契帖後序)를 씀으로써 5현을 존숭하는 마음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뒷날 이재가 매호정사(梅湖精舍)를 완성(1624)하고 당대 문장 명사들의 글을 받을 때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택당(澤堂) 이식(李植) 등과 같이 오산(이때 오산은 )의 아우 창주(滄州) 차운로(車雲輅)<차 호사 운(次湖舍韻)>을 쓴 사실로도 이재가 오산 형제들과는 교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소재 노수신과는 아버지와 동방급제한 인연으로 오산이 평소 소재를 부집(父執)으로 공경하였으며, 특히 가규와는 동갑이면서 의기상합하여 막역지우로 사귀었다. 가규의 벗 8인이 유배지인 공주로 가규를 위문갔을 때 오산과 만나 시를 주고 받고 <공산회 서(公山會序)>를 씀으로써 오산의 문명(文名)이 상주에 일찍부터 높았음을 특기할 수 있다. 창석 이준과는 형제급란도 시로 더욱 친밀하였으며 오산이 상주의 미풍양속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겠다. 6세 연하의 이재에게 시를 준 사실로 보아 오산 당대에 상주에도 전국적인 인물(소재우복창석가규이재 등)이 많음을 그가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은 자명하다. 오산은 생전에 상주를 지난 적(일본 통신사행)이 있었을 것이나, 그보다 정신상으로는 상주와 생전에 활발히 왕래할 수 있었다 하겠다.

 

 

4. 오산집(五山集) 원집(原集) 간행

오산집(五山集) 원집은 오산 사후 근 2백 년만에 나라(정조)에서 간행하였다. 오산집 발간을 주도했던 대제학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쓴 발문을 보면 발간의 경위나 문집의 규모 등을 알 수 있다. 이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그 후손이 쇠퇴하여 대대로 내리던 가성(家聲)을 잇지 못하여 남은 시문(詩文)의 초고나 남긴 작품조차 사방으로 흩어져 전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지금도 애석해 한다.

참으로 다행하게도 우리 성상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도서부(圖書府)를 건립하고 버려지고 잃은 것을 널리 찾아 모아 다 비국(秘局)에 갖추었는데, 명하여 차씨(車氏)의 유서(遺書)를 구하게 하였다.

널리,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은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 후예를 호남해서(海西황해도)에서 찾았는데, 비로소 5(五世) 유고(遺藁) 10여 권을 바치었다. 그러나 종이가 찢어지고 일부가 떨어져 나가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이에, () 양호(良浩)에게 명하여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은 산정하고, 잘못되고 누락된 것을 변증하여 온전한 책을 편성하도록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신이 외람되이 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내각(內閣규장각)으로부터 명령이 내려 또 인간(印刊)하여 들이라 하였다. 신이 삼가 또 대조하여 틀린 것을 바로잡고 부()를 나누어 차례()를 나열하고 아울러 삼세고(三世稿필자주, 祖 廣運父 軾子 殷輅雲輅)를 합하여 한 질로 만들고 8편으로 나누어 중국 취진당 활자(聚珍堂活字)를 본떠서 인간하여 바치었다.”(원문략)

 

오산집(五山集)간행의 경위를 보면, 글도 흥망성쇠의 시운(時運)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는 보불문장(黼黻文章)문장화국(文章華國)의 대수(大手)로 칭도된 오산이 남긴 작품이 지키는 이가 없어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졌는지도 알 수조차 없고, 남은 것조차도 근 2백 년(1615五山卒1791년 원집 발간) 뒤에야 정조(正祖)의 문치(文治)를 천재일우로 만나 원집을 발간하게 되었으니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말대로 오산이 정조에게 입은 은혜는,

 

비유하면, 천지 자연의 이치가 운행하여 조화를 이루어, 온갖 품물(品物)을 화육(化育)하여 이룸과 같다.”

라고 하겠다. 이에, 오산집의 내용을 밝혀 둔다.

五山集(原集) 내용

() 14. (絶句律詩排律 ) 470여 수

() 5. 242書牘 3雜著 3

疏章 2碑銘 1墓誌銘 1祭文 6

() 6. 敎書 2告由文 12歌謠 154上樑文 41露布 1편 및 世系圖(홍양호 찬)

5. 후손 차일용(車一龍)2대사업(二大事業)

1) 오산집(五山集) 속집(續集)간행

(1) 가은(柯隱) 차일용(車一龍18391918)

차일용(車一龍)의 자는 문서(文瑞)요 호는 가은(柯隱)이다. 오산(五山)12세손이며 조부는 계록(繼祿)이다. 부는 청산(靑山) 남두(南斗)니 통정대부 사헌부 장령이요, 모는 원주원씨(元州元氏), 양대의 묘소는 청리 가정촌 뒤 산록에 있다. 차일용은, 1882년 증광진사가 되고 1890년 수릉참봉(綏陵參奉)이 되었으며 중추원 의관으로 위계는 통정대부(3)에 올랐다. 1908오산집원집(4)과 속집(2)을 발간하였다. 나아가, 장판각(藏板閣)을 짓고,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경산재(景山齋)를 지어 춘추로 오산을 상주에서 향사(享祀) 하였다. 당시 문집은 2백 질을 도내 사림에 반질하였다. 아들 상진(象鎭)은 호가 지사(芝史)로 군부주사(軍部主事), 손자 영한(永翰1874?)1893(癸巳고종 30) 9월 경과정시(慶科庭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가은(柯隱) 차일용(車一龍)이 선조 오산(五山)의 음덕을 잊지 않으려 한 것도 이같이 가문을 빛낼 자손이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은(柯隱)상산지(1928) <과제인물(科第人物)>로 등재된 선비다.

 

(2) 속집 발간 경위

속집의 서문을 쓴 이면주(李冕宙), 오산(五山)이 대대 문장가에서 태어나 가학을 전승하여 당대 문단의 거두로서 그의 문장은 마치 신조(神助)를 입은 듯함이 있음을 특기하였다. 나아가, 임란의 혼란기에 글로써 임금을 보좌한 보불문장지사(黼黻文章之士)요 글로써 나라를 빛낸 문장화국(文章華國)의 대수(大手)였음도 부각시키었다. 그러나 후손이 영채하여 남긴 작품을 다 보존치도 못하고 근 이백 년 뒤에야 정조의 큰 은혜로 원집이 발간되었으나 속집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었다.

 

원집(原集)이 비록 이미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활자를 사용한 까닭에 널리 나누어 줄 수 없었고, 또 속집 2권이 아직껏 상자 속에 있어 그 주옥같은 시문(詩文), 다 후세의 지극한 보배라 오랫도록 집안에 감추어져 있어 반드시 광기(光氣)가 밖으로 드러날 일이었다.

상산(商山)에 거주하는 12세손 참봉 일용(一龍)이 일찍이 성균관에 들었고, 그의 손자 영한(永翰)이 또 문과 급제자의 명적에 올라 선조의 음덕(陰德)에 추감(追感)하여 아직껏 겨를을 얻지 못하였던 속고(續藁)를 완수하려 하여 여러 종족에게 통지하였다.

이미 인간된 것과 미간된 것을 6책으로 합하여 장차 판목에 새겨 인간(印刊)하려고 기궐씨(새기는 이)에게 부탁하고 전함을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하여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요약하면, 조상의 음덕으로 사대부가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진사문과급제가 남에, 숭조상문(崇祖尙門)에의 위선념(爲先念)이 간절하여 오산 선조의 속집을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속집 발간의 경위를 가은(柯隱) 차일용(車一龍)도 발문(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었다.

 

“(원집을 낸) 그 뒤 백여 년 사이에 유문(遺文)이 세상에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좀먹은 상자에서 찾아낸 간행하지 않은 것이 또한 수어 권이 되었다. 오래가면 갈수록 증거할 문헌이 없어질까 두려워 이에 원집과 같이 간행하여 오래 보존토록 하였다.”

 

단약(單弱)한 후손들의 위선념(爲先念)은 어떤 경우에서나 대대로 이어졌음을 엿보게 한다. 이에, 속집의 내용을 소개한다.

오산집 속집내용

() 12. (詩謠 5수 포함) 470여 수

() 3. 敎書 3揭帖 5

() 4. 32131發文 2雜著 3附錄(輓辭 3發文 1行狀 1續集跋)

산문은 원집보다 조금 적으나 시는 원집과 같다. 이로써도 오산(五山)의 문학 작품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더욱 아쉽기만 하다. 현존하는 오산집(五山集)은 그 보전에 있어 가히 천우신조라 이를 만큼의 기이함이 있다. 당대 제일 문장의 명예를 얻었던 오산의 유문(遺文)은 그의 사후 근 2백 년만에 왕(王祖)의 원려(遠慮)에서 원집(原集)이 간행(1791)되었고, 다시 백여 년 뒤에는 지손인 참봉 일용(一龍)이 선조의 음덕을 추념(追念)하고 유문을 길이 보전하기 위하여 미간(未刊)의 속집을 발간할 때 기간(旣刊)의 원집을 합침으로써 오산집(五山集)은 집성되었다.

문집 완성(文集完成)은 오산행적(五山行蹟)의 총체적인 집약이며, 나아가 오산정신(五山精神)의 영구 보전에의 염원이란 점에서 오산집(五山集)이 상주에서 완성된 것은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한 인간의 또 하나의 삶은 그 정신이 살아있는 곳에서 다시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설단(設壇) 봉사(奉祀)

묘소는 숭조상문(崇祖尙門)에의 후손들 근거지로서 오산의 묘소(果川 東別央里)를 실전한 것은, 후손들의 결집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할 수 있다. 묘소의 큰 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12세손 일용(一龍)이 설단(設壇)한 경위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또한 선조의 묘소가 지금은 실전이어서 후손들의 애통한 일이 되었지만 마땅히 어찌 하리오, 바야흐로 단소(壇所)를 가정(柯亭청리 소재) 선영 곁에 설치하여 존경하여 받들고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도리를 다 하고자 하였다. 이 두 가지 일(필자주속집과 원집 합책, 설단)은 합하여 우리 문중으로서는 막중한 거사에 관계됨으로 각 파에 통지하여 상량(商量)하고 확실(確實)히 하여 일을 마치었다. 그리고, 원집(原集)에는 감히 서문을 더할 수 없으나 지금의 속간(續刊)에는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에, 서문과 행장의 글을 받아 이를 붙임으로써 아마도 불후의 사적이 되리라 이를 뿐이다.

1909(己酉) 31512세손 진사 수릉참봉 정3품 통정대부 일용(一龍) 삼가 씀.”

 

오산(五山) 묘소 실전으로 상주 거주 참봉 일용(一龍)을 비롯한 후손들이 설단(設壇)한 경위와 목적을 밝히었고 나아가 문집을 속간함에 원집과 속집을 합본한 이유와, 이 두 가지 일이 문중의 중대한 일이기에 각 파에 통지하여 상량하고 확실히 하여 일을 마치었다고 하였다.

이에, 연안차씨대동보를 참조하여 오산집간행과 설단 봉사(設壇奉祀)의 내막을 보다 상세히 부연한다.

광무 무신(光武 戊申1908)12세손 진사 일용(一龍)과 사림(士林)에서 회의하여 원집(原集) 4권 및 속집(續集) 2권을 간행하였고, 장판각(藏板閣)을 지었다.

경인년(1910)에 사림과 회의하여 상주 가정촌(柯亭村) 뒤 산록에 설단(設壇)하였고, 이시좌(李時佐18511932) 찬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였으며, 춘추로 향사(享祀)하였다.

결론적으로, 상주 거주 오산(五山) 12세손 일용(一龍)의 주도로, 오산집(五山集)(원집과 속집 합본) 집성 간행과 설단(設壇) 봉사(奉祀)를 성취한 것은, 상주(尙州)로 하여금 오산정신(五山精神) 발양(發揚)의 거점(據點)이 되게 하였다 하겠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본 고는, 오산(五山)과 상주와의 관계를 선생 12세손 차일용(車一龍) 주도로 오산집 속집을 간행함으로써 현존하는 오산집(五山集)은 사실상 상주에서 그 완성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전한 오산 묘소를 대신하여 상주 가정촌(柯亭村) 후록 선영 곁에 단소(壇所)를 설치하여 춘추 향사를 상주 후손들이 봉행한 사실을 살펴 보았다. 특히, 이 두 사업은 한 문중의 막중사로서, 연안 차씨 각 파와의 숙의 끝에 동의를 얻어 이룩된 두 사업으로 인하여 오산 봉사손(五山奉祀孫)의 중임(重任)이 백여 년 전부터 상주 후손들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오산정신(五山精神)의 상주 정착화(定着化)를 기대할 수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할 수 있다.

또한, 오산(五山)의 영남관(嶺南觀)이 크게 호의적인 사실과 나아가 상주 사대부들과의 교의가 문학적 교류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적 교류에서도 각별함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같은 고찰은, 오산과 상주와의 관계를 살핌에는 부차적인 고찰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산정신의 상주 정착화에 있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정신문화 배경 고찰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차일용(車一龍) 당대에 이미 이 창석 형제급란도의 주인공인 월간(月澗) 이전(李㙉)10대손인 이시좌(李時佐)가 오산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한 사실로써도 확인할 수 있다.

요약하면, 본 고는 오산정신(五山精神)의 상주 정착화와 연계하여 오산(五山)과 상주(尙州)와의 관계를 살핌에 중점을 두어 왔다. 상주 거주 후손 12세손 차일용(車一龍)의 주도로 오산정신이 상주에 정착할 수 있는 두 사업 곧 오산집(五山集)완성과 설단(設壇) 봉사(奉祀)한 일은 주 고찰의 대상이었다. 오산이 상주와는 지연(地緣)은 없으나 인연(人緣)으로 하여 오산정신 상주 정착화 이후의 긍정적 효과에 대하여서도 고찰하였다. 그러나 오산정신을 상주에서 천양하기 시작한 것도 백년이 넘었으나 일제하동족상잔의 불운을 겪어 예대로 시행되기도 어려웠고 더군다나, 선생의 행적과 정신은 물론 작품의 문학적 고찰 등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과제로 남았다 하겠다.

한 인물의 정신은, 그 땅에 뿌리 내리고 성장토록 하는 후손과 지역민의 각별한 성심이 결집되었을 때에만, 풍성한 열매도 기대할 수 있다는 말로 결언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