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상주모습(Ⅱ-Ⅱ)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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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지역 엘리트와 정치공간 42
1.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의 동향 42
2. 지역사회운동(地域社會運動) 49
3. 지역 엘리트의 양상 61
4. 결론 68 |
일제 강점기의 상주모습(Ⅱ-Ⅱ)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상주문화 26호에 게재되었던「일제 강점기의 상주 모습(1)」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상주의 식민지화(植民地化) 1) 지방지배체제의 재편성 (1) 수비대․헌병대․경찰의 출현 (2) 관료기구의 편성 (3) 농촌운동단체의 조직화 2) 상주의 일본인사회 (1) 상공업자 (2) 광업자 (3) 농업자 (4) 관공리
2. 읍내(邑內)의 ‘시가지화(市街地化)’ 1) 읍치(邑治)의 환골탈퇴 2) ‘시가지화(市街地化)’로서의 읍내(邑內) |
제1장 지역 엘리트와 정치공간
1.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의 동향
사족(士族)과 이족(吏族)들은 혼인을 통한 혈연(血緣)과 서원·서당을 중심으로 한 학연(學緣) 그리고 한문 지식의 습득의 정도로 신분적 계층구조를 재생산하였다.
1) 사족 혼인(士族 婚姻)의 지속
사족간의 혼인은 그 실태를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에 상주 출신 조강희(趙康熙)의 연구를 토대로 사족간의 혼인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10년간 영남지역 75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사족 가문의 혼인에 의한 연대(連帶)에 대해서 연구하였으며, 안동의 진성 이씨(眞城 李氏) 종손을 기준으로 위로 4대, 아래로 2대에 대해 각각 친가(親家)·외가(外家)·처가(妻家)의 혼인관계를 조사했다.
상주와 관련된 것은 ‘처가’인 외서면 우산리의 진양 정씨 우복파(愚伏派)의 사례이다. 시기는 1880년~1935년으로 한정하고, 이 기간에 정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거나 정씨 집안에서 출가한 경우를 조사하니 혼인이 40건이었는데, 시집온 사례가 16건이고 출가한 사례가 24건이었다. 그리고 혼인 관계를 맺은 지역은 안동, 봉화, 문경, 상주, 의성, 선산, 성주, 칠곡 대구, 달성, 고령, 경주, 영덕, 영양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에도 이처럼 철저하게 사족간의 혼인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2) 서원·서당을 결절점으로 한 사족(士族) 네트워크의 동향
서원(書院)의 교육기능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훼철되어 ‘단소(壇所)’로만 존속한 서원의 경우는 제사(祭祀) 기능만 남았던 점은 분명하다. 화동면 관제(官堤)에서 태어난 여석훈(呂錫塤)의 자전(自傳)에 따르면, 봉암서당(鳳岩書堂)에서 배운 뒤, 옥동서원(玉洞書院)에 가서 사서삼경을 비롯해 본격적인 유학을 공부했지만, 망국을 맞아 유학(儒學)을 그만두고 신학문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석훈(呂錫塤)이 학문에 뜻을 세운 것이 15세이므로 적어도 20세기 초까지는 옥동서원에서 주자학 교육이 존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향사(享祀)를 매개로 한 네트워크는 지속되었다.
남인계의 사액서원인 옥동서원에서는 식민지 시기와 관련된『준분록(駿奔錄)』,『분향록(焚香錄)』이 소장되어 있고, 사액서원인 흥암서원에도『분향록(焚香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식민지 시기에도 향사를 비롯한 각종 행사가 계속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원군 시대에 훼철되어 단소(壇所)만 남았던 도남서원, 효곡서원 등 서원에서는 단소 등을 거점으로 돌아가면서 임원을 맡아 이전의 문서를 관리 유지하였다. 바로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여러 서원을 재건할 수 있었다.
또한 흥암서원의 경우는 출판기능이 지속되었다. <표-1>은 1920년대에 흥암서원에서 출판된 문집이며, 전부 총독부도서관에 납본되었다. 비록 흥암서원을 구성했던 주요 문중 가운데 하나인 창녕(昌寧) 성(成)씨가 관여하였는데, 그러한 사업을 행할 정도의 재력(財力)과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표-1> 식민지 시기 흥암서원의 출판사업
서명 등 | 출판년 | 분량 | 인쇄 |
秋潭先生文集(成晩徵 著, 成海重 編) | 1926년 | 8권 3책 | 목판 |
洞虛齋先生 文集(成獻徵 著) | 1929년 | 1책 | 목판 |
同春堂續集(宋浚吉 著, 成稙 編) | 1929년 | 12권8책 | 목판 |
상주읍 서곡리(書谷里)의 도곡서당은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임원록(任員錄)』,『당안(堂案)』,『세의대금지불부(歲儀代金支拂賻)』등 식민지 시기의 활동기록이 있고, 봉암서당(鳳巖書堂)에는 학생부인『청금록(靑衿錄)』,『임원록(任員錄)』, 문중인사들이 한시(漢詩)를 읊은『봉암서당중수운(鳳巖書堂重修韻)』, 관(官)에 상소한『품목(稟目)』같은 기록물이 남아 있다.
그리고 봉암서당(鳳巖書堂)은 18세기 초 남인과 노론의 대립과정에서 ‘상서당(上書堂)’과 하서당(下書堂)으로 나뉘었다. 그 소장문서 가운데 식민지 시기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은 상서당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은 상서당의 문서뿐인데, ① 소속 학생부인『청금록(靑衿錄)』, ② 임원 명부인『임원록(任員錄)』, ③ 서당의 재건을 기념하면서 소속 문중이 모여서 서로 한시을 읊은 기록인『봉암서당중수운(鳳巖書堂重修韻)』, ④ 관에 대한 상소문인『품목(稟目)』, ⑤ 일종의 장학금 지출부의 성격을 가진『학비지출표』가 있다.
그리고 상주향교(尙州鄕校)는 19세기 중반에 교육기능을 잃었으며, 유림(儒林)들은 1920년에 설립된「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 상주지회」에 대부분 가입하여, 회원 수가 1,500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상주의 유림은 유도진흥회를 매개로 명맥을 이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유도진흥회」의 활동에서 두드러진 것은 연령 초과로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유림의 자식들이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군수를 회장으로 하는「대성강습소(大成講習所)」를 향교에서 연 일이다.
식민지 시기에 상주향교에서는 석전제(釋奠祭) 행사가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향교를 매개로 한 유림네트워크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석전이 예전 그대로의 형태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 추기(秋期) 석전제(釋奠祭)부터는 그 때까지 음력 8월에 행하던 것을 음력 10월 15일에 개최하였다.
유도진흥회의 활동에서 눈에 띄인 것은 사회교육사업이다. 우선 연령 초과로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유림의 자식들이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1922년부터 군수를 회장으로 하는 대성강습소(大成講習所)를 향교에 열었다. 학생 수의 감소 등을 이유로 대성강습소는 1927년 3월에 문을 닫았는데, 이를 대신하여 계획된 것이 도서관의 설치이다. 초기에는 상주청년관을 사용하고 또 자금으로는 향교 재산을 충당하기로 했지만 계획이 지지부진하였고, 그러던 중 군청 내에서 향교 재산 수입의 일부만 사용하겠다는 방침이 나오자, 상주의 각 사회단체가 분개하여 논란이 일었다.
한편 독립운동이나 각종 사회단체에 참여한 사족계 인물도 많았다. 그래서 고등경찰도 사족계 인물을 특히 경계대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가장 주의를 요하는 자’로서 상주의 5개 ‘양반문중’에서 950명이 지정되었다. 당시 고등경찰이 경계하고 있던 상주의 양반은 <표-2>와 같다.
種 別 | 族姓 | 戶數 | 人數 |
양 반
양 반
| 長水 黃 | 34 | 167 |
昌寧 曺 | 60 | 300 | |
昌寧 成 | 653 | 3,925 | |
豊山 柳 | 11 | 70 | |
韓山 李 | 45 | 249 | |
晉州 姜 | 28 | 135 | |
晉州 鄭 | 70 | 429 | |
豊壤 趙 | 188 | 912 | |
光山 盧 | 149 | 629 | |
礪山 宋 | 73 | 385 | |
商山 金 | 50 | 230 | |
仁川 蔡 | 440 | 2,481 | |
계 | 12 | 1,801 | 9,912 |
위 가운데 가장 주의를 요하는 자 | 5 | 950 | 5,471 |
<표-2> 고등경찰이 경계하고 있던 상주의 ‘양반’
3) 이족(吏族)들의 활동
이족(吏族)들은 사족(士族)과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식민지가 되어 읍치(邑治)의 공직(公職)을 잃은 이후에도 이족(吏族)들은 사족(士族)과는 달리 천봉산 아래에 있는 성황당을 관리해 왔다.
1935년에 성황당(城隍堂)은 양로당(養老堂)의 어른들이 중수했다. 양로당은 조선시대 상주읍성 북측에 있었던 ‘무학당(武學堂)’에서 파생되었다. 1907년 무학당이 우연히 ‘공가(公家)’의 부첩(簿牒)에 혼입되어 버렸다. 그래서 1909년에 각 문중과 의논하여 당국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끝에, 6년이 지난 뒤 겨우 돌려 받았다. 그리고 이것을 보존하고자 토지를 희사받아, 인봉리에 토지를 구해 새롭게 7칸의 ‘양로당’을 지어 옮겼다. 또한 그 유지를 위해 계를 조직하여, 각 문중이 1원씩을 내어 계를 운용하게 되었다. <표-3>은 양로당의 구성 문중이다. 대부분이 조선시대에 호장과 이방 등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는 성씨들이다.
<표-3> 양로당의 구성 문중
(1924~1945년)
姓氏 | 人數 |
商山 朴 | 69 |
勁酒 李 | 16 |
金海 金 | 14 |
延安 車 | 14 |
達城 徐 | 7 |
晉州 姜 | 5 |
密城 孫 | 3 |
密陽 朴 | 2 |
金海 李 | 2 |
江陵 崔 | 1 |
계 | 133 |
이 양로당이 중심이 되어 1935년 성황당을 중수했는데, 이때에도 1900년에 중수할 때와 같이 박만식(朴晩植)이 주간을 맡았다. 또한 이때에 성황당 옆에 있는 바위에 신이 내렸다 하여 그것에 지붕을 덮고 박만식이 ‘영암각(靈巖閣)’이라는 현판을 썼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미륵당(彌勒堂)’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향리가 관료기구에서 배제되었지만, 이족(吏族)이 새로운 관공리(官公吏)로 진출한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6~1908년까지 호장을 지낸 박정한(朴挺漢)은 1910~1928년까지 18년 동안 상주면장을 지냈고, 그 후 일본인이 면장을 하자, 상주면협의회원이 되었다. 외남면장이었던 박인수(朴寅洙)는 상주곡자조합의 조합장과 도(道) 평의원을 지냈다. 박정준(朴正準)은 양로당계의 중심인물로, 1907년 상산금융조합을 설립하고 20년이 넘도록 조합장을 지냈다. 이와 같이 병합을 전후해서 이족들이 새로운 지배기구로 들어갔다.
또한 이족은 읍내에서 전개된 사회사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읍내에 있는 ‘서보(西洑)’를 유지 관리해 왔다. 서보(西洑)가 낡아서 1926년 3월에 종래의 석축(石築)을 석회관(石灰管)으로 교체하였다. 공사비용은 관개하는 지주(地主)가 부담하고 공사시설은 상주면에 위촉했다. 1927년 2월에 착공하여 4월에 준공하였고, 부속공사는 이듬해인 1928년 2월에 마쳤다. 그리고 침천정(枕泉亭)과 상산관(商山館)의 보존․이전사업을 주도하였다.
침전정의 전신인 이향정(二香亭)에 들어가 있던 농상공은행지점(農商工銀行支店)이 이전하게 되자 이를 자양산 기슭의 약수(藥水)로 유명한 장소로 이전하고 개명한 것도 이족과 읍내로 진출한 사족층이 주도했다. 그리고 상산관(商山館)도 이족과 읍내 사족층이 보존하여, 1907년 상주공립보통학교(상주초등 전신)가 개교하면서 이「상산관(商山館)」을 교사로 사용하였고, 그 이후에는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상주여중 전신)가 이 건물을 사용하였다.
2. 지역사회운동(地域社會運動)
1)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일제의 국채 1,300만원을 단연동맹(斷煙同盟)으로 갚아 버리자는 취지였다.
2월 초에 전국에 국채보상취지서를 반포하고 이어서 2월 21일에 대구의 북후정(北堠亭)에서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자, 경향 각지에서 참여하는 단체들이 속속 조직되는 등 각 지방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07년 3월 3일에 발신처가 없는 ‘상주 외서 이하리 국채보상소 입납(尙州 外西 伊下里 國債報償所 入納)’이라는 편지 봉투가 발견되고,「외서면 유천면 국채보상 성명성책(外西面 有川洞 國債報償 姓名成冊)」이 작성된 것으로 보아 상주에서도 발 빠르게 의연금을 접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가 있은 후 곧 바로 상주에 내려와서 이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주의 의연금 수합소는 김재익 공이 거주하였던 외서면 이천리였다.
상주와 함창에서 출연한 금액은 1,442원 22전이었으며, 현재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3천 8백 여 만원이고 참여한 인원은 수천 명이었다고 추정하였다.
2) 상주의 3·1운동과 그 주체
제1차 대전 이후 세계적인 민족운동의 물결과 맞물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 집회가 열렸으며, 이를 계기로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示威)’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상주도 이 흐름 속에서 3월 23~24일에는 상주읍내, 3월 29일 이안면, 4월 8~9일에는 화북면에서 총 5차례의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일자 | 장 소 | 참가인원 | 주모자 |
3월 23일 ~24일 | 상주장터 | 약 500명 | 석성기, 강용석, 성필환, 한암회, 조월년, 김성덕, 송인수, 박인옥, 성해식, 장재관 |
3월 29일 | 이안면 소암리 남측 제방 | 약 20명 | 채순만, 채세현 |
4월 8일 | 화북면 문장대 | 약 100명 | 이성범, 김재갑, 홍종흠 |
4월 9일 | 화북면 운흥리 | 약 100명 | 전성희, 정양수 |
<표-1> 상주의 3·1운동
상주 3․1운동의 특징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지역 엘리트의 존재 양상의 양면성이다. 즉 <근세>지역엘리트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 동시에, 신식학교 졸업생이나 3․1운동 이전에 있었던 독립운동의 영향 등 근대의 새로운 양상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소암리의 운동이 명백히 사족가문의 운동이었고, 화북에서도 한문 사숙을 연 이성범(李聖範)이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읍내에서도 사족계 가문의 출신자가 참여하였다. 그리고 후자와 관련해서는 우선 읍내에서의 운동은 신식학교를 나온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당시 보통학교가 입내에 있었기 때문에 이안 소암리와 화북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대신 소암리에서는 대한광복회사건, 화북에서는 의병투쟁이라는 독립운동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3) 1920년대 상주 사회단체의 변천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의 이른바 ‘문화정치’때 상주청년회와 다양한 단체가 상주에서 결성되고, 이를 주도한 것은 ‘유지’와 ‘청년’이었다.
그리고 1920년대는 지방의 단체활동이 활성화 되었다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는 침체 또는 변질되는 양상이었다. 이들 단체들을 시기별로 나누어 그 특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3·1운동 후 다양한 단체의 성립(1919~1924년)
상주에서 ‘사회단체’로서 최초로 조직된 것이「상주청년회」이다. 동아일보에,
“1919년 10월 26일 한홍우(韓弘佑), 강상희(姜相熙), 석응목(石應穆) 외 청년 수십 명의 발의로「상주청년구락부(尙州靑年俱樂部)」를 창립하였는데, 상주를 대표할 만한 실업가, 의사, 각황각색(各況各色)의 계급이 망라되었다.”
하였다. 그 후 이듬해에 회관을 신축하고,「보명학원(普明學院)」을 설립 운영하고,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상주 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상주청년회는 계급이나 연령을 초월하여 조직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청년회 초기의 간부 구성을 보면, 회장 조용연(趙龍衍)과 조후연(趙厚衍)은 풍양 조씨로 자산가였으며, 진양 정씨인 정재석(鄭在奭)은 입재(入齋) 정종로(鄭宗魯)의 아들인 정상진(鄭象晉)의 2남 직계손(直系孫)이다. 그외 박희성(朴熙成), 차우섭(車佑燮), 석응목(石應穆) 등도 참여하였다.
그 후「함창청년회(1920년)」,「옥산청년회(1921년)」,「청리청년회(1923년)」등 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단체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1921년 8월에「상주문우회(尙州文友會)」를 경성의학전문교생인 박희준(朴熙俊), 박원섭(朴元涉)과 경성청년학관생인 강용(姜鎔) 3인이 발기 조직하여 주로 강연회나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 중에서 박원섭은 박정현(朴正鉉)의 아들로서 박희준과 함께 이족계인 상산 박씨 출신인데 그러한 인물이 최첨단의 학문을 배우면서 이런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상주수평동맹회(尙州水平同盟會)」는 ‘천차만별인 무수한 계급을 타파하고, 만인이 수평선상에서 동일한 보조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목적 아래 1923년 8월 9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설립되었으며, 서상렬(徐相烈)․유종한(柳宗漢)․이민한(李玟漢)․박준희(朴準熙) 등과 주로 강연활동을 하였다.
「상주노동조합(尙州勞動組合)」은 1923년에 유종한, 김기목(金基穆) 등의 발기로 결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온정주의’를 표방하였고, 몇 차례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그밖에 이 시기에는 전국적인 유림조직인「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의 상주지회,불교사찰이 경영하던「보광강습소(普光講習所)」를 거점으로 한「상주유심소년단(尙州唯心少年團)」와 서정리(西町里)에 거점을 두고 체육사업에 힘을 기울인「상주체육단(尙州體育團)」, 그리고 기독계의「기독청년회(基督靑年會)」,「여자기독청년회(女子基督靑年會)」등이 생겨났다.
이들 단체들은 연합해서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1924년 9월. 상주청년회를 중심으로 상주새모임․상주유심소년회․상주기독청년회․문우회․상주체육단․상주일요회 등이 연합하여 ‘상주교풍(矯風)대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교육운동이 가장 왕성하였다. 읍내에 보명학원(普明學院), 보광강습회(普光講習會), 대성강습회(大成講習會)가 있었고 그 외에 낙동에는 조명강습회(朝明講習會), 내서에는 진명강습회(進明講習會), 화동에는 자양학원(紫陽學院)이 있었다.
사회단체명 | 설립월일 | 위치 | 주요 간부 | 회원수 (명) | 비고 |
尙州靑年會 | 1919년10월 | 읍내 | 朴正鉉,金億周 외 | 200→100 | 초기 명칭은 ‘尙州俱樂部’ |
咸昌靑年會 | 1920년 4월 | 함창 | 金漢翊,金漢玉, 蘇漢玉 외 | 80→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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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道振興會 尙州支會 | 1920년11월 | 읍내 | 成益源 외 | 1500→680 | 상주군내 유림을 조직 |
玉山靑年會 | 1921년 | 玉山 | 鄭琪燮 | 3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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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州文友會 | 1921년 8월 | 읍내 | 韓岩回,朴熙俊 외 | 50 | ‘유학생 모임’ |
尙州唯心少年會 | 1922년 | 읍내 | 錢藏憲 외 | 40 | 불교계의 소년운동 |
尙州體育團 | 1922년 | 읍내 | 朴辰燮 외 | 40 | 지방체육사업 |
尙州水平同盟會 | 1923년 8월 | 읍내 | 徐相烈,劉宗漢, 李玟漢,朴準熙 외 | 45 |
|
尙州勞動組合 | 1923년 | 읍내 | 劉宗漢,金基穆, 池璟宰,朴哲 외 | 200 | 상주청년회관내 사무국 |
靑里靑年會 | 1923년12월 | 청리 | 金允鐘,黃一鶴, 朴敬來 | 30→77 | 창립일을 1925년 11월이라고도 함 |
甲子俱樂部 | 1924년 | 읍내 | 姜壎 | 20 | 1925년에 건설자동맹이라고 개칭 |
尙州새모음 | 1924년 7월 | 읍내 | 朴寅玉,池璟宰, 朴淳 외 | 18 | 1925년 상주청년회에 합류 |
尙州尙友會 | 1925년 | 읍내 | 朴正鉉,朴東和, 石應穆,梁然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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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州靑年聯盟 | 1925 10월 | 읍내 | 池璟宰,朴純, 朴哲,金大福 |
| 각지 청년회의 연합 |
尙州勞動靑年會 | 1925년가을 | 읍내 | 朴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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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峰靑年會 | 1925년11월 | 외서 | 姜龍壽,金周永, 安基烈 | 50→30 | 농촌청년 해방을 목표로 한 교육운동 |
中牟靑年會 | 1925년12월 | 모동 | 黃在殷 외 | 104 | 회관 건축, 무산아동에게 야학 |
尙州讀書會 | 1926년 1월 | 읍내 | 朴東旭,朴仁根, 姜壎 외 |
| 사회과학연구 |
尙州記者同盟 | 1926년 2월 | 읍내 | 池璟宰 외 | 기자수 13 | 東亞,朝鮮,時代 각 신문 등의 상주지국 기자 |
尙州勞動親睦會 | 1926년 2월 | 읍내 | 李聖實,朴石柱 외 | 70 | 경북선 상주역 노동자가 중심 |
尙州新友會 | 1926년 3월 | 읍내 | 朴淳,池璟宰, 朴寅玉,金億周, 朴 哲,金大福, 鄭琪燮 | 20 | 군내 운동의 ‘최고지도기관’을 자임하는 사상단체 |
外南靑年會 | 1926년 4월 | 외남 | 金英泰,車南龍 |
| 교육 |
尙州無産靑年會 | 1926년 5월 | 읍내 | 姜壎, 朴哲 |
| 무산청년운동 |
梁村自治會 | 1926년10월 | 상주 | 姜信愚 외 | 50 |
|
咸昌協同組合 | 1927년 1월 | 함창 | 黃履正,錢俊漢 | 400 | 1927년 상반기 매상 5천원, |
中牟協同組合 | 1927년 4월 | 모동 | 趙南哲,黃在殷 | 200 | 1928년 2월 해산 |
尙州協同組合 | 1927년 4월 | 읍내 | 金元漢,錢俊漢 |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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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里協同組合 | 1927년 9월 | 청리 | 金在濬,金允鐘 | 220 | 1929년 3월 해산 |
新幹會尙州支會 | 1927년 9월 | 읍내 | 鄭在龍,朴正鉉, 姜信愚,朴東和, 朴 淳,池璟宰, 姜 壎,金億周 |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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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州靑年同盟 | 1927년10월 | 읍내 | 朴淳,李玟漢, 金億周 외 |
| 상주청년연맹을 해체 재편 |
三益農民會 | 1927년11월 | 읍내 | 金顯達,李鍾九 외 | 200 | 3동의 농민이 연합해서 조직 |
靑總尙州郡 委員會 | 1928년 3월 | 읍내 | 鄭義燮,金億周,朴仁根,黃在殷,金漢翊,朴淳 외 | 427 | 상주청년동맹을 해체 재편 |
大坪農民組合 | 1928년 4월 | 외서 | 權聖熙,金允熙, 金容澤,朴周浩 | 20 | 상주청년동맹 간부가 조직 |
高麗共靑 尙州야체이카 | 1928년 | 읍내 | 姜壎 |
|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 |
<표-2> 상주 사회단체의 변천
(2) ‘청총(靑總)’ 결성과 ‘혁신’의 움직임(1924년~1927년)
1924년 4월, 서울에서「서울청년회」와「신흥청년동맹」이 ‘대중 본위의 신 사회 건설’과 ‘조선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될 것을 내세우며 각 지역에 있는 223개 청년단체를 결집시켜서「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靑總)」을 결성했다. 상주의 청년단체 중에서 여기에 가입한 단체는「상주청년회」,「함창청년회」,「옥산청년회」이다. 각 지역에 있는 청년회는 회원 주도의 조직 형태, 연령제한의 도입, 기부금이 아닌 회비제 도입 등을 시도하였다.
우선 1924년에 ‘상주새모임’이라는 사상단체가 결성되었다.상주에 거주하는 신진 청년과 해외 또는 국내에 유학하는 청년들인 박인옥(朴寅玉)․지경재(池璟宰)․박순(朴淳)․신영균(申永均)․김경인(金慶仁) 등이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현하 상주 사회의 중책을 부(負)한 청년계를 볼 때에 기(其) 사상의 부패함이 극도에 달하얏슴으로 그를 따라 일부 청년의 매일 출입하는 것은 부적당한 처(處)가 유(有)한 바 차(此)는 필히 그들을 선도(善導)하는 기관이 무(無)함”
이라고 하면서 청년에 대한 사상적 계몽을 꾀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25년 2월 23일에는 경북 각지에 있는 14개 청년단체가 ‘경북지방청년대회 발기회’를 상주의 보명학원(普明學院)에서 가졌는데 상주사람으로는 석응목(石應穆), 박정현(朴正鉉), 정기섭(鄭基燮)이 참여하였고, 3월 10일에 김천에서 청년대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단체의 개입으로 당국이 금지하여서 대회가 열리지 못하였다. 이후 상주청년회에서도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지방의 부르주아적인 명망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세대교체를 이유로’ 연령의 상한이 도입되었다. 경북지역에서는 대략 18~30세 언저리로 연령을 설정하였다.
따라서 연령으로 자연 도태된 박정현(朴正鉉)․박동화(朴東和)․석응목(石應穆)․양연옹(梁然翁) 등이「상주상우회(尙州尙友會)」를 새롭게 만들었으며, 이 시기에 강훈(姜壎)이 이끄는「상주갑자구락부(尙州甲子俱樂部)」라는 사상단체가 생겼으나 이내「건설자동맹(建設者同盟)」으로 개칭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에서 12월에 걸쳐서 외서면에「연봉청년회(連峰靑年會)」, 모동면에「중모청년회(中牟靑年會)」, 청리면에「청리청년회(靑里靑年會)」가 결성되었다.
1925년 가을에는 박철(朴哲) 등이 중심이 되어「상주노동청년회(尙州勞動靑年會)」를 조직하였고, 1926년 1월에는 강훈(姜壎), 박동욱(朴東旭) 등이「상주독서회(尙州讀書會)」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박순(朴淳), 지경재(池璟宰), 박인옥(朴寅玉), 김억주(金億周), 박철(朴哲), 김대복(金大福), 정기섭(鄭基燮) 등 20여 명이「상주신우회(尙州信友會)」를 조직하였다.
한편 1927년에 들어서 협동조합운동이 상주에서 전국 최초로 일어났다. 여기에는 상주군 함창 출신으로 1920년부터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전진한(錢鎭漢)의 영향이 컸다. 1920년 도쿄로 건너간 전진한은 1926년 6월에 유학생을 모아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조직하여 강령으로,
1. 우리는 대중의 경제적 단결을 공고히 하고 자주적 훈련을 기한다.
2. 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 본의의 자주적 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한다.
로 정하고 경상도에 ‘선전대’를 파견하였다. 전진한은 1927년에 출판된『협동조합운동의 실제(協同組合運動의 實際』라는 팜플렛의 첫머리에,
“협동조합은(...)경제적 약자가 상호부조의 협력에 의하여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기도하여 자본주의의 결함을 배제하고자 하는 이상(理想)아래에서 발생된 경제적 조직체이다”
라고 규정하였다.
전진한의 형인 전진준(錢鎭俊)이 중심이 되어 1927년 1월에 함창면 오사리(梧沙里)의 농가에서「함창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협동조합운동의 실제(協同組合運動의 實際)』에는 이 함창협동조합의 보고서, 정관, 장부조직(帳簿組織)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함창협동조합의 사업은 판매와 저축이 중심이었고 야학(夜學)에 대한 지원도 하였다. 이것이 모델이 되어 같은 해 4월에는「상주협동조합」과「중모협동조합」이, 9월에는「청리협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이 기운은 안동, 예안, 김천, 군위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1927년부터 1930년에 걸쳐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하는「신간회(新幹會) 상주지회」와 상주청년연맹이「청총(靑總) 상주군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27년 2월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민족통일전선을 제창하면서 창립된 단체가 신간회인데, 상주는 그 해 9월 4일 건견장(乾繭場)에서 강훈(姜壎)의 주도로 상주지회가 발족되었으며, 그때까지 상주에서 생겨났던 다양한 운동을 일시적이나마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들어「청총(靑總)」은 ‘전 민족적 청년운동노선’을 앞세워 각지(各地)의 개별단체(個別團體)들을 해체하고 중앙집권적인 ‘군(郡) 청년동맹(靑年同盟)’으로 전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상주는 1927년 10월 5일에「상주청년연맹(尙州靑年聯盟)」이 해체되고,「상주청년동맹(尙州靑年同盟)」이 박순(朴淳)을 중심으로 새로운 집행위원들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1928년 후반부터 이들 단체들이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먼저 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의 경우, 1928년 7월에 이론적인 중심이었던 전진한(錢鎭漢)이 조선공산당사건(朝鮮共産黨事件)으로 수감(收監)되었다.
1928년 11월말에는 강훈(姜壎)이 조선공산당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 수감되었다.
1929년이 되자,「신간회」나「청년회의 간사회」등이 종종 금지되는 등, 다양하게 압력이 가해지던 상황에서, 1930년 5월「상주청년동맹」관계자 9명이 상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안동, 문경, 예천, 봉화, 영주로까지 확대되어서 신문에서는「상주공산당 사건」이라고 했다.
대구지방법원의 공판 결과, 1928년경에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인「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靑)」의 세포조직이 상주에 존재한 것과 상주에서「고려공청 상주 야체이카」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강훈(姜壎)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1930년경부터는「신간회」·「청년회」활동에 대한 기록은 신문 등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1930년대에는 지역 사회단체들이 1920년대의 활동과는 다른 사회운동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기료 인하운동’과 ‘학교를 둘러싼 운동’이다.
상주에 전기회사가 생겨서 전등이 켜지기 시작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다. 전기회사는 대구에 본사를 둔「대흥전기주식회사(大興電氣株式會社)」로 일본인 자본의 대회사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서 전기료 인하운동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운동은 1930년 가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931년 2월에 각종 사회단체와 기자단이 시민대회를 열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혼성으로「전등료 인하 기성회」를 결성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상점을 통해 램프를 공동 구매하고는 5월 1일부터 5월말까지 600세대가 소등운동(消燈運動)을 전개하여 상주읍 북부는 ‘암흑지대’로 변했다.
또한 1930년대 신문에는 학교와 관련된 기사도 눈에 띄었다.
구분 | 학교 | 시기 | 내용 | 관계자 |
(1) | 상주농잠 학교 | 1933년7월 | 학교를 3년제 을종에서 5년제 갑종으로 승격 | 기성회 : 회장 朴正鉉, 부회장 趙誠惇, 稻垣德三郞, 石壽穆외 17명 |
(2) |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 | 1935년2월 | 군수에게 학급 증설을 요구 | 학부형회 : 朴晩相, 朴淳, 金億周, 石□基, 朴正準 |
(3) | 상주공립 보통학교 | 1935년5월 | 군수에게 학급 증설을 요구 | 학부형회 : 朴正鉉, 朴東和, 崔尙善, 姜壎, 金億周 |
(4) |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 | 1935년6월 | 학교 이전 및 확장 | 기성회 : 회장 朴正鉉, 부회장 趙誠允, 徐相烈, 간사 朴淳, 金億周, 崔尙善, 趙龍衍, 石□基, 趙誠旭, 朴重夏, 朴寅玉 외 |
(5) | 상주유치원 | 1936년4월 | 유치원의 재건운동 | 趙誠惇, 李采錫, 姜壎 |
<표-2> 1930년대 학교를 둘러 싼 운동
이렇듯 상주에서는 일제 식민지 하에서도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의 구별 없이 노력해 왔음을 알 수 있었고, 식민지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단체를 통해서 지역은 물론이고 나라를 걱정하는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다. 따라서 시대는 많이 흘러갔지만 그 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하는데 다 함께 노력할 것을 소망한다.
3. 지역 엘리트의 양상
1) 읍내(邑內)에서의 민족적 차별
식민지하 사회에서 지배하는 민족과 지배받는 민족 사이에는 민족모순이 상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민족모순은 특히 읍내에서 표면화되었다.
예컨대 상주의 북문통에 있던 대중목용탕에서 남탕을 일본인용과 조선인․중국인용으로 나누고, 여탕은 일본인이 먼저 들어간 다음에 조선인이 들어가는 규칙을 두었다가 ‘차별’문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및 서양 잡화시장의 상권을 일본인이, 주단포목을 중국인이 장악한 것에 상주 상업계의 중진들이 분기하여 남문통(南門通)에 있던 미염조합(米鹽組合)에 집합하여 상업주식회사를 설립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
특히 경북선 철도 개설 이후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하였다. 당시 곡물상을 경영하던 황성필(黃聖弼)은,
“1924년까지는 비교적 우리 조선인들의 세력이 우세하였지만 산업철도(경북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부터는 일본인 상업자 중에 유력자가 다수 이거(移居)해 오는 바람에 자연 조선인의 상권이 밀리게 되었고, 중국인들의 상권도 상당히 신장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1920년대 중반에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읍내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민족적 차별은 확연하였다. 1928년 8월에 사벌면 화달리에 사는 농민 양해성(梁海成)이란 사람이 고리대금업자인 나카무라 요헤이(中村要平)에게 돈을 빌렸는데, 저당 잡힌 토지 6 두락분을 나카무라가 경매에 부쳤기 때문에 남은 3두락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서 양해성은 어렵게 돈을 마련해서 빌린 돈을 갚았으나 나카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이용해서 증서도 저당권도 돌려주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경찰에 고발한 것에 화가난 나카무라는 자신의 처와 자식과 함께 양해성을 새끼줄로 묶어 폭행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들은 신간회 상주지회와 각 단체가 연설회를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상주경찰서장 오카모도(岡本)는 이 사건이 상해․폭행․불법체포이긴 해도 ‘사형(私刑)’이라고 할 수 없다면서 연설회의 개최를 허가하지 않았다.
또한 1931년 읍내를 포함한 상주면은 ‘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때까지 상주면장으로 십 수년간 활동해 오던 박정한(朴挺漢)이 돌연 도지사의 지시로 면직되었다. ‘경북의 지정면 소재지인 경주․안동․상주 중에서 상주가 일본인 호구가 제일 많으며 상당한 시설과 면세확장이 필요함으로 조선인 면장으로서는 도저히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수단가이요 명망가인 일본인 면장을 채용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역에서는 즉각 반발했다. 그리고 일본인 면장 배척운동으로 전개되어 4월 14일 상주면 33동의 44구장들이 상주청년회관에 모여서 2,000명의 연서를 도당국과 군당국에 제출하였으나 해방되는 날까지 상주면장에는 일본인만이 임명되었다.
이렇듯 읍내에서는 피식민자인 조선인과 식민자인 일본인 사이에는 무수한 마찰이 있어서 민족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듯한 상태였다.
2) 신구 엘리트의 관계
일제강점기 때 상주에서는 도처에서 충돌이 있었다. 1920년대의 운동은 청년들이 주체였다. 따라서 유림을 중심으로 한 원로계층과 새로운 세대인 청년들 사이에서 <유림 대 청년>이라는 내부적인 대립도 표면화 되었다.
예를 들면, 읍지(邑誌)발간을 둘러 싼 농쟁이 있었다. 17세기에 집필된 이래 수차에 걸쳐 증보되어 온 읍지『상산지(商山誌)』가 1929년에 활자로 출판될 즈음에 대립이 있었다.
『상산지(商山誌)』1929년판은 3권으로 되어 있다. 그 중 권지 일(卷之一)과 권지 이(卷之二)는 1832년의 신증본(新增本)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서, 창석본(蒼石本)을 원본으로 하여 청대본(淸臺本)의 증보 부분을 ‘구증(舊增)’, 1832년 신증본의 증보 부분을 ‘신증(新增)’, 그리고 이때 새롭게 증보한 부분을 ‘보(補)’라고 표기하였다. 권지 삼(卷之三)은 새롭게 쓰여진 것인데, ‘신증’ 이후 1920년대까지의 최신 내용을 구래(舊來)와 같은 목차 구성 즉, 여지(輿地), 공부(貢賦), 학교(學校), 질사(秩祀), 관제(官制), 공서(公署), 고적(古蹟), 명환(名宦), 인물(人物), 문한(文翰)으로 나누어 적었다.
정동철(鄭東轍)에 의한 발문「서 상산지 후(書商山誌後)」에 의하면「상산지」편집의 경위는 아래와 같다.
구당본(舊堂本, 신증본)으로부터 대략 100년이 지났으니 새로운 상산지를 발간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향교(鄕校)’와 ‘산사(山寺)’였다고 하나 ‘산사’가 어느 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향교의 제사집단이나 유도진흥회가 주도해서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1926년 무렵이라고 추정된다.
교감(校勘)사업이 힘들어 두 세 명의 동지와 함께 7~8개월을 덧없이 보내고 다시 하남거사(河南居士)와 학생들의 협력으로 1년 정도 후에 겨우 3권의 책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편찬․교감작업은 성귤(成橘, 창녕 성씨), 이시은(李時殷, 흥양 이씨), 조기연(趙驥衍, 풍양 조씨)이 하였고, 인쇄를 맡은 간사는 송주백(宋柱百, 여산 송씨)와 강신용(姜信鏞, 진주 강씨)이며, 배본을 담당한 것은 송돈호(宋暾浩)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유림집단이 주도하여 편집 및 발행이 행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편집과정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준비 중인 상산지는 내용에 잇서서는 현대에 적당치 못한 봉건적 사상을 고취하는 기괴한 추태가 잠재하야 잇서서 발기 당시에 참석하얏든 모씨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에 신간회 상주지회를 비롯한 상주의 각 사회단체가 분기하여 적극적으로 발간을 반대했다. 실제로 1927년 말부터 1928년 전반에 걸쳐 신간회나 상주청년회의 총회 결의사항에도 ‘상산지(商山誌)의 건(件)’이 들어가 있었다.
상산지 발간의 반대논리는 아마도 편찬을 사족 층이 주도하여 조선시대의 목차 그대로 증보하는 형식을 취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신문기사에 따르면,
“소위 양반들인 편찬 주도자들이 궁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일천이백여원이라는 대금을 수합하야다가 작년 3월부터 지금까지 중앙여관에다 총본령을 두고 상산지 편집교정 운운하면서 매일 수십 명씩 회합하야(...)출판도 하기 전에 전기 금액을 전부 소비하였다.”
따라서 경찰서에서는 이 신문기사에 근거하여 편집에 관련한 ‘유지 10여 인’을 호출하여 모은 금액을 반환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이 기사 이외에 이 문제를 언급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위는 밝히기 어려우나 이 시기의 대립양상을 드러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편 1929년판『상산지』제3권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족(吏族)에 관한 기술이 증보된 점이다. 예컨대, <과제인물 조(科第人物條)>에는 1장에서 서술한 상산 박씨 박자완(朴自完)의 사적(事蹟)이 기술되어 있고, 충절 조(忠節條)에는 월성 이씨인 이경남(李景南), 이지원(李枝元), 이삼억(李三億), 상산박씨인 박정인(朴正仁)이 적혀 있고, 효행 조(孝行條)에는 월성 이씨인 이경번(李慶番), 이복운(李復運)과 그의 처인 차(車)씨가, 열행 조(烈行條)에도 상산 박씨의 처가 실려 있다.
그 밖에 신간회 상주지회가 향교의 철폐, 향교 재산 처리권의 획득, 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정기총회에서 결의했다. 이러한 대립의 배경에는 일부의 유림단체와 총독부 체제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3) 지역 엘리트의 의식
(1)『신상주』의 발행 주체
상주면이 상주읍으로 승격된 1931년에 월간『신상주』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이 잡지는 1931년 시점에서 읍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지역 엘리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당시 ‘군’단위에서 이런 잡지가 발간된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이 잡지의 간부는 다음과 같다.
稻垣德三郞 尙州商工會長 (社交顧問)
朴正紹 濟正醫院長 (衛生顧問)
趙翼衍 同人代表社長
姜 昊 同人主筆
金漢翊 同人
趙珏衍 同人
黃在殷 同人
이나가끼(稻垣)는 당시 상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고, 박정소(朴正紹)는 이족계인 상산 박씨로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졸업한 후 읍내에서 1919년에 제정의원(濟正醫院)을 설립한 의사이다. 조각연(趙珏衍)은 풍양 조씨 검간파 출신으로 주식회사 상주주조(尙州酒造)의 사장을 역임한 자산가이고, 조익연(趙翼衍)은 풍양 조씨 검간파 출신으로 고향인 낙동면의 면협의원을 하고 있었다. 황재은(黃在殷)은 장수 황씨로 중모청년회․중모공동조합․상주군위원회에 관여해 온 청년운동계 인물이다. 김한익(金漢翊)은 함창 김씨로 역시 청년회 운동에 관여해 온 인물이며, 가장 중요한 주필 강호(姜昊)는 출신 가문을 알 수 없으나 이 정도로 폭넓은 사람들을 통솔한 것으로 보아 상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다가 1928년 체포되어 1931년 4월에 석방된 강훈(姜壎)의 필명이 아닌가 추정한다.
따라서『신상주』는 청년운동 출신 인물이 함께 만든 잡지라고 볼 수 있다.
신상주사(新尙州社)의 사무실은 남문통에 있던 상산인쇄소 안에 두었다. 그리고 광고는 쪽당 20~50원으로 게재 위치에 따라서 특등부터 3등까지로 나누어 받았다.
면 | 광 고 주 |
표지 뒤 | 朝鮮殖産銀行 尙州支店, 咸昌産業組合 |
목차 뒤 | (慶北參與官, 慶北産業部長)兪萬兼, (尙州郡守)崔恒默, (尙州警察署長)久枝懶三, (尙州郡 外西面)鄭忠默 |
62쪽 | 酒井洋服店, 崗崎雜貨店, 永信洋品店 |
63쪽 | 大興電氣株式會社 尙州支店, 尙州穀物商組合, 尙州麵子組合 |
64쪽 | 尙州郵遞局, 化寧郵便所長 |
65쪽 | 尙州郡廳 |
66쪽 | 尙州郡農會, 尙州郡畜産同業組合, 尙州郡森林組合 |
67쪽 | 尙州邑事務所 |
68쪽 | 尙州酒造株式會社 |
69쪽 | 咸昌酒造, 崔尙善酒造長, 釜院酒造長, 化西酒造長 |
70쪽 | 尙州邑會議員(14명 연명) |
71쪽 | (慶尙北道評議員)朴寅洙, (慶尙北道評議員)吉野尙太郞, (尙州商工會長)稻垣德三郞, (尙州邑學校費議員)趙龍衍 |
72쪽 | 尙州郡洛東面事務所, (洛東面學校費議員)趙箕衍 |
73쪽 | 金子齒科醫院 尙州出張所, 玉山金融組合, 化寧金融組合, 中牟金融組合 |
74쪽 | 化東面事務所, 化西面事務所, 內西面事務所, 牟東面事務所, 牟西面事務所, 沙伐面事務所, 中東面事務所 |
75쪽 | 義增永商店, 永聚和商店, 福興和商店, 義興永商店, 尙州旅館, 朴順西旅館, (布木商)朴容勳, 三昌商會, (布木商)全武德, (司法代書人)趙基奭 ․ 崔海圭 ․ 朴喜發, (尙州公醫)志方勝夫, (海陸都賣商)車憐規, (牟東面議員)黃轍周, (化東學校議員)趙誠雲, (靑里驛前)尹大五 ․ 金元出, (自轉車店)朱用守, (恭儉面 釜谷里)蔡基哲, 在鐘堂時計店 |
76쪽 | 稻垣文華堂, 中牟公立普通學校職員一同, (玉山驛前)文永昌 |
뒤 표지 | 商山印刷所 |
<표-3>『신상주』의 광고주
광고주는 읍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상주 내의 각 지역에 걸쳐 있다. 또한 경제적 유력자와 함께 관청이나 관공리도 이름을 올리고 있어,『신상주』는 청년들이 주도했지만 행정이나 재계 유력자를 끌어 들인 것이 특이하다.
4. 결론
상주는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적 요충지였고,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水運)과 영남대로를 이용한 육운(陸運)의 중심지였다. 또한 일찍부터 성리학이 도입되어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문향(文鄕)이기도 한 곳이다. 특히 조선 200년 동안은 경상감영이 있어서 경상도를 관할했던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의 강제 통치가 시작되고부터 상주는 수난을 거듭하였다. 도로 개설을 핑계로 상주성(尙州城)이 헐리고, 경상감영 건물 등 대부분의 문화유적이 훼손되었고, 지역을 관장하는 주체(主體)가 바뀜으로서 숱한 내부적 갈등을 겪었다. 또한 그러한 변화의 물결속에서 살았던 어른들도 타계(他界)하고 자료도 소멸(消滅)되어서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상주는 무엇이 어떻게 변했고, 그 속에서 어떤 갈등들을 겪었는지 모르고 있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일본사람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교수가 일제강점기에 변화한 상주의 모습을 촘촘하게 조사하여『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이란 책을 발간하였다. 고마운 일이었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2016년에 펴낸『상주문화(尙州文化)』제26호에서「일제 강점기의 상주모습(1)」이란 제목으로 이분의 이야기를 전했고, 이번『상주문화(尙州文化)』제27호에 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자 한다. 다만 원저(原著)에 있는「지역사회 속의 신식학교」와「일기를 통해 본 식민지 경험」은 지면관계로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상주지역사회를 지배했던 사족(士族)들은 대개 14~17세기에 걸쳐 처가(妻家)나 외가(外家)에 의지하여 상주에 입향(入鄕)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16세기 무렵이 되자 사족들은 향안(鄕案)․향사당(鄕射堂)․동약(洞約)․서당(書堂) 등을 매개로 하여 상호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지역을 강하게 지배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이족(吏族)들도 지역 엘리트로 활동하였다.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입향(入鄕)이나 의병(義兵)활동을 통해 지위를 획득해 간 것에 반(反)하여, 상주의 이족(吏族)들은 오히려 왕조의 교체기나 임진왜란 등을 계기로 지방행정을 맡는 동시에 읍치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족이나 이족이 지배했던 지역의 지배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족의 중심처(中心處)였던 향교(鄕校)가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로 이름을 바꾸면서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족 가운데서 사족을 지향하는 가문이 등장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사족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유학(幼學)’을 칭하는 민중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족 가운데 ‘토호(土豪)’로 악명을 떨친 일족도 나왔다. 그래서 1870년경에 서원(書院)과 사우(祠宇)들이 훼철되어 사족의 권위와 함께 사회경제적 기반이 흔들렸다.
농촌구조도 변화를 거듭하였다. 농가에서 부업으로 하던 양잠업이 일본의 정책에 힘입어 크게 번성하였고, 주조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지금까지 집에서 술담는 것은 생활의 일부였으나, 1916년에 시행된 주세령으로 집에서 술 만드는 일이 금지되었고 전업적인 주조업자가 생겨서 중요한 지역경제주체가 되었다.
한편 지역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던 사족은 혈연 네트워크와 더불어 서당 등을 통한 학연 네트워크가 식민지의 변화에 호응하면서 존속되었다. 또한 이족의 경우도 성황당을 관리하고 제의(祭儀)를 유지하였다. 또한 사족과 이족이 공동으로 사업을 하기도 하고, 이족의 이름이『상산지』에 반영되는 등, 사족과 이족이 공통된 목적 아래 함께 움직였다.
또한 ‘유지(有志)’나 ‘청년(靑年)’들이 새로운 지역의 엘리트로 등장하였다. 신간회의 리더가 사족 또는 이족가문의 출신이거나,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 인물이 사족계이기도 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또 다른 학자들이 또 다른 시각에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조명해 준다면, 일본이 우리에게 끼친 피해를 더 확실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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