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예견한 강직한 선비 강서
미래 예견의 탁월한 식견과 강직한 조선의 선비 강서(姜緖)
김 재 수
토끼 꼬리만한 가을 햇살이 늬웃늬웃 서산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이른 저녁밥을 짓는지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한가롭게 마을에 번지고 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저녁때가 다 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한가롭게 마을 어귀에 접어들던 수레 하나가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골목에 한참이나 멈춰서 있었다.
‘허허, 기특한 지고...’
아이들의 대화를 넌지시 듣고 있던 사람은 유독 눈에 띄는 한 아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수레에서 내린 그는 그 아이에게 다가 섰다.
“어르신께서 어인 일이시온지요”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향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도 아이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인사를 했다.
볼수록 총명해 보이는 아이.
7세 때 부모를 잃고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하고 있다는 아이.
수레의 주인공은 이 범상치 않은 아이가 장차 나라를 위할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형편을 알게 모르게 뒤에서 보살펴 주기 시작했다. 이 소년이 자라 마침내 한 나라의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조선 중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申欽)이다. 그리고 상촌 선생 같은 이를 보배로 알고 길러 낸 분이 바로 당시 승지인 강서(姜緖)였다.
강서(姜緖).
1538년(중종 33)∼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원경(遠卿), 호는 난곡(蘭谷)이라 불렀으니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이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한 그는 1568년(선조 1) 음서(蔭敍)로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더니 1576년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을 비롯하여, 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홍문관부응교·사간원사간·수원부사·남양부사·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인천부사를 두루 지냈다.
사람을 잘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 분이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였다.
선조(1578년) 7월 1일.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아갔을 때이다. 이 때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함께 있었는데 ‘교만할 교(驕)’자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이 때 함께 있던 승지인 강서(姜緖)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시는 일은 지금의 이 시대를 지나 다음에 이를 만큼 탈이 되는 일이온데 이는 바로 전하의 ‘교(驕)’ 자 때문이옵니다.”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우의정 노수신이 두렵기도 하고 민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노수신은 못내 얼굴을 붉히면서 얼른 임금에게 아뢰었다.
“강서가 지금 아뢰는 말은 비록 형편과 처지가 같은 상대 이하의 사람으로서도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어렵고 민망한데, 가만히 주상의 천안(天顔)을 뵈오니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옛사람이 말한 것처럼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다는 말과 꼭 맞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강서가 솔직하다는 것은 내가 본디 알고 있었다.”
선조는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을 하는 강서의 강한 성품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루만져 주었다.
이 뿐만 아니었다.
어느 날 선조 임금이 조회 중에 지금 조정에 염치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 때 곁에 있던 당시 간관으로 있던 강서가 또 나섰다. 좌중이 갑자기 긴장 하였다. 강서는 곁에 서있는 정승 윤두수를 힐끔 바라 본 뒤에 말을 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 정승인 윤두수에게 죄를 주신다면 조정이 염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모두들 강서의 말에 어찌 할 바를 몰라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강서와 같은 간관이 있음은 조정의 큰 복이옵니다.”
윤두수가 엎드려 강서를 치하하며 아뢰었다. 자신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는 강서의 직언을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드린 것이다. 역시 당대의 재상다운 생각이었다. 임금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고야 마는 강서. 둘러섰던 모두의 긴장된 얼굴에 웃음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소. 강 간관도 어질고 윤 정승도 어진 재상이니 과인의 복이로다.”
선조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서와 이 바른 소리를 넓은 아량으로 품을 줄 아는 윤두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릇 한 나라 관리로서의 체면이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로구나’
둘러 선 모든 대신들이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이렇듯 강서는 인품이 활달 명쾌하고 인물을 식별하고 시대의 추세를 헤아림에 있어 다른 사람들과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그의 깊은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이발과 홍문관에서 함께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이발이 강서의 직언과 활달한 성격에 대해 약간 비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에 이 말을 듣고 있던 강서의 비위가 거슬렸다. 강서가 그냥 곱게 있을 리가 없었다.
"너 같이 늦게 태어나고 뒤에 배운 사람이 홍문관에 앉아 있으니 세상일을 알 만하구나. 네가 무리를 모아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 놓을 뿐 아니라 앞장서서 주장을 하니 도대체 무슨 일이 옳게 되겠는가. 그 일들의 마지막엔 죽음이 따를 뿐이다. 내가 사헌부의 관리가 되어 너를 탄핵하지 못하니 어찌 속상하지 않겠는가?"
강서의 폭탄선언과도 같은 이 말에 이발이 크게 기가 죽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고 옆 사람이 모두 놀랐다.
이 뿐만 아니었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공과 사를 분명히 하였다.
강서가 장령(장령)으로 있을 때 강서의 아버지 강사상의 생일잔치를 베푼 일이 있었다. 생일잔치를 다 끝낸 후 집무실에 들려 업무를 시작하는데, 그날 마침 고기를 먹지 않는 법을 범하여 잡혀온 10여 사람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가운데 자기 집의 종도 끼어 있는 게 아닌가. 이 때 강서는 그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허, 이게 웬일인가? 이 자는 우리 집 종이구먼. 하지만 법을 어겼으니 놓아 줄 수 없구나.”
뒷날 금리(禁吏)들이 일제히 나서서 강서의 종을 잡아온 다른 금리들을 벌을 줘야 한다고 아첨을 했지만 강서는 끝까지 그 금리들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강서는 자신은 자기 가문이 높은 벼슬로 번창할까봐 늘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벼슬을 하되 화려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외직에 임명되기를 자주 요구하였다.
선조 11년 (1578년) 지평으로 있던 강서(姜緖)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자 그는 곳 사면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선조는 비답을 내렸다.
“그대가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꾸밈이 없고 순박할 뿐더러 정직하여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렸음으로 이에 윤허한다.”
그는 오래도록 승지로 있으면서 번번이 충직한 말을 올렸다. 유독 술을 좋아하여 종일토록 술에 취해 있었으나 일 처리가 문란하지 않았으므로 아전들이 "전후 병방(兵房)의 일을 잘 처리한 이는 강서만한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선조는 강서의 이러한 꾸밈없고 순박하며 또한 강직한 그를 무척이나 아꼈다.
하루는 승지 강서(姜緖)가 동료들과 더불어 승정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자 술이 떨어지고 말았다. 술에 취한 강서가 동료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술이 떨어졌군. 내가 직접 구해보겠네."
강서는 술에 취한 김에 관복을 걸치고 선조가 있는 편전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강서가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이 떨어졌으니 전하께 아뢰어 술을 내려주시라고 하여라."
그러고는 다시 되돌아와 동료들에게 말했다.
"금방 술이 도착할 걸세."
선조는 강서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술을 내려주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기다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은 강서가 숙직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강서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마를 불렀다. 그러자 동료들이 그를 말렸다.
"아니, 공은 오늘 숙직인데 어째서 집으로 가는가?"
하지만 강서는 술에 취하여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내가 버릇없이 전하께 술을 내려달라고 청했으니 아마 나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곧 올라올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내일 아침에 벼슬을 내놓아야 할 것이니, 아예 집에 들어가 어명을 기다리려고 하네."
강서가 집으로 돌아가자 예상했던 대로 사헌부에서 강서의 죄를 논하는 상소문이 임금에게 올라갔다. 선조는 상소를 읽어보고는 그의 관직을 즉시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이조에서는 다음날 승정원의 업무가 시작될 때 이 사실을 알리고 강서를 파직시키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승정원에 사람들이 모이자 선조가 명하였다.
"어제 과인은 강서의 관직을 삭탈하였으니, 그는 이미 벌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 새로이 승지에 임명하겠다."
관직을 빼앗고 다시 임명하니 선조는 결국 그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은 셈이 되었다.
선조가 얼마나 강서를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강서는 앞날에 일어 날 일들에 대해 미리 알아내는 지혜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늘 친한 사람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예로부터 세상의 형편이 이렇게 어지러우면 반드시 나라에 큰 일이 닥쳐 올 것이다.”
그의 눈에 정말 다가 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가 보였을까?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죽게 됨을 다행히 여겼고 전쟁으로 인한 화(禍)가 가족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였다.
“난리가 나면 관동지방으로 피해 들어가거라. 그리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너희들을 살려 줄 것이다.”
가족들은 강서의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강서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과히 신통하다 할 만 했다. 그는 동생인 강신(姜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의 집에 들렸다. 그런데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예사롭지를 않았다. 그는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크게 염려를 했다고 한다. 이는 이 아이의 탄생이 경사가 아니라 후일 집안에 큰 화가 미칠 것임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바로 후일의 강홍립(姜弘立)이었다.
강홍립은 광해군 때 조정의 명분상 명나라를 돕기 위해 후금(뒤의 청나라)을 치고자 만주에 파견된 조선 군대 1만 3,000명의 도원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양면 외교에 끼어 그 말과 행동은 지극히 조심스러웠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한 가운데서 눈치를 보던 홍립은 청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그는 오히려 청나라의 선봉장군이 되어 조선을 침략 하는 불운의 장수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나라를 배반한 홍립을 반역죄로 사형을 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이 때 당시 영의정이었던 상촌 신흠이 나선 것이다. 홍립의 본심은 조선의 군사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일과 이 모든 것이 광해군의 양면 외교 때문이었음을 설명함으로 죽음 직전의 홍립을 살려 주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세상의 일과 사람들의 일에 관해 앞뒤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눈이 그에게 있었던 것일까? 그의 말처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정묘호란은 일어났고 강서가 승지 시절에 거두고 보살폈던 신공 신흠은 후에 영의정이 되어 강서의 친조카 되는 강홍립의 목숨을 살려주는 은혜를 갚았으니 말이다.
오리 이원익 대감과 젊을 적부터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는 늘 강서의 사람됨 가리켜 “큰 재주를 스스로 숨겼으니 이치에 밝아서 사물에 얽매여 지내지 않는 사람(達士)이었다”고 칭찬하였다.
조선시대.
빈번한 정쟁으로 살얼음판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눈치를 보지 않았고 바른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길뿐더러 바른 말이라면 목숨도 두려워 할 줄 모르던 올곧은 선비. 미래를 예견함에 탁월한 식견으로 시대의 변화를 헤아릴 줄 알았던 그는 오늘의 우리에게 참된 선비란 무엇인가를 몸소 가르치고 있는 참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