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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유학사상 존재의의 학술대회 자료

빛마당 2014. 1. 18. 21:44

김 철 수

(상주문화원장)

<기조연설>

후계(后溪)・서대(西臺)・우곡(愚谷)・

석천(石川)선생의 행적(行蹟)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目 次>

Ⅰ. 머리말

Ⅱ. 후계(后溪) 김범(金範)선생

Ⅲ. 서대(西臺) 김충(金冲)선생

Ⅳ. 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

Ⅴ. 석천(石川) 김각(金覺)선생

Ⅵ. 맺는 말

I. 머리말

상주 땅에는 고래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고려시대 향리에서 최초로 사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장려한 김수자(金守雌)선생을 비롯해서 고려말 아들 3형제를 일러 ‘상산 3원수’라고 칭하는 김득배(金得培)・김득제(金得齊)・김선치(金先致)・박원작(朴元綽)・박축(朴蓄)・박회절(朴懷節)・박순충(朴純冲)선생 등 훌륭한 분들이 계셨는데, 특히 김득배(金得培)선생은 문무를 겸했던 탁월한 선비였습니다.

조선초에 이르러, 북촌(北村)에서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선생을 위시해서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난재(懶齋) 채수(蔡壽)・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이력(履歷) 이자견(李自堅)・이자건(李自健)선생 같은 훌륭한 선비들이 계셨으며, 상주 남촌(南村)에는 후계(后溪) 김범(金範)・서대(西臺) 김충(金冲)선생・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석천(石川) 김각(金覺)선생 같은 분들이 일찍부터 상주에서 학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서 상산선비들은 퇴계 이황선생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퇴계 이황 선생이 학문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전의 우리 상산선비들은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했고 그 이후라고 하더라도 학맥을 같이하지 않은 선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이들 상산선비들을 「퇴계학파」의 일원으로 일괄 간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 1세기 동안에 활동한 상산선비 중에서 후계(后溪) 김범(金範)선생・서대(西臺) 김충(金冲)선생・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석천(石川) 김각(金覺)선생에 대한 학문세계나 사회적 역할을 조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네 분은 지금까지 임란전의 인물로는 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일컬어져 왔기 때문에 선정하였습니다.

연치로 보면, 후계(后溪) 김범(金範)선생이 가장 연장자이고 다음이 후계 선생보다 한 살 작은 서대(西臺) 김충(金冲)선생이며, 그 다음으로 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은 후계 선생보다 12년 아래이고, 석천(石川) 선생은 14년 아래입니다. 따라서 네 분은 거의 동 시대에서 함께 활동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네 분들의 공통된 특징은 유교를 실천궁행한 상주를 대표하는 선비들로서 향풍쇄신에 앞장섰던 분들이고, 효(孝)를 충(忠)으로 승화시킨 분들이었으며, 모두 성리학 정신을 구현(具顯)하는데 열성적(熱誠的)이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분들은 출사(出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향촌사회(鄕村社會)에서 유학(儒學)을 이수(履修)하고, 이것을 보급(普及) 실천(實踐)한 선비였습니다. 따라서 이분들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충(忠)・효(孝)・의(義)・신(信)의 실현(實現)에 적극적인 한편 예(禮)의 구현(具顯)에도 앞장섰었습니다.

따라서 네 분 선생의 행적(行蹟)의 대강을 연치 순으로 기술하고자 합니다.

Ⅱ. 후계(后溪) 김범(金範)선생

후계(后溪) 김범(金範 1512∼1566)선생은 상산김문에서는 유일하게 불천지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나라에서 선생의 학문과 인품, 공훈을 인정하여, 임금이 손수 제문을 짓고, 사해강산을 하사하며 불천위를 받게 한 것만 보더라도, 유림에서 추앙받는 퇴계선생이나 율곡선생과 견주어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신 분입니다.

다만, 선생께서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정계진출보다는 성리학에 기초한 선비의 길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이 가문(家門)에서만 승계된 것이 아쉽습니다.

“네가 설산(玉果縣의 별명)에 머무니 내 마음 가볍고, 네가 떠나니 내 마음 무겁구나“

이 글은 선생이 옥과현감으로 계시다가 임지에서 돌아가시자 명종대왕이 직접 지은 제문(祭文)의 한 구절입니다.

선생의 자는 덕용(德容), 호는 후계(后溪)이고, 본은 상산(商山)이며, 1512년 12월 5일에 태어나셨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간(才幹)과 도량(度量)이 뛰어났으며 열 살이 체 안 된 나이에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名聲)을 들었습니다.

선생의 나이 12세 때인 어느 날, 우연하게 상주목사 박상(朴祥)이 부마도위(駙馬都尉)를 전송하는 자리에 여러 아이들과 함께 따라가게 되었는데, 부마도위가 이 아이들에게 ‘시(詩)를 지어보라’ 하자, 모든 아이들이 놀라 흩어졌는데 선생만 머뭇거림 없이 붓을 들고

字民牧伯垂仁澤 백성을 사랑하는 목백은 어진 혜택 내리는데

少年賢相氣橫秋 어진소년 재상의 기상은 가을하늘 가득 메우네

라는 시(詩)를 지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자만하지 않고 글공부에만 열중하여, 기해(己亥)년 가을에는 연이어 향시(鄕試)에 으뜸을 차지하였고, 27세 되던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시험관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선생이 후계(后溪)선생의 시부(試賦)와 사람됨을 보고는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한 시대를 저울질 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의 명성은 이로부터 더욱더 크게 떨치게 되어서 선생의 일자사구(一字四句)는 모두가 구슬과 옥처럼 보배로 생각하였고, 그 훈향(薰香)을 따르는 것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선생의 나이 40세 되던 1553년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몸을 상할 정도로 정성껏 상제례를 실천하였습니다. 당시 상주목사 신잠(申潛)선생이 이를 보고 감동하였으며,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던 선생은 이 신잠(申潛)목사와 함께 도곡(道谷)・석문(石門)・수양(首陽)・노곡(魯谷)・수선(修善)등 18개소의 서당을 고을마다 세우는 등 향토의 흥학육영(興學育英)을 자임(自任)한 대 교육자요, 천출(出天)한 효자(孝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상주의 흥학(興學)에 함께 노력했던 신잠(申潛)목사가 순직하자, 선생은 비통한 마음으로 유애비명(遺愛碑銘)을 닦았습니다.

“하늘이 어진 목사를 내셨으니, 실로 우리 부모 같았도다. 선정을 베풀어 절로 백성들이 교화되어 잘 다스려지니, 고아를 구제함에 부유하고 권세있는 집안을 물리쳤도다. 사류(士類)를 이끌어 도와, 임금님으로 하여금 알게 하였도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가르쳤으니, 은혜는 깊고 덕택은 두텁도다. 바야흐로 늦게 부임하였음을 노래하였더니, 가신 뒤는 사무치게 간절하도다. 비를 보며 눈물 흘리니, 인애(仁愛)를 후세에 남겨 영구하리라. 공덕을 이 돌에 새길 만하니, 공의 이름 사라져 없어지지 않으리라.”

1566년 봄에는 학문으로 천거(薦擧)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除授) 되었으나 벼슬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궁중의 사신(史臣)들은

“은거하여 지닌 뜻을 지켜 나아가고 옛것을 좋아하여 본받아 배워 진실로 한 고을의 선사(善士)라 일컬을만하고 또한 한 나라의 선사(善士)라 일컬을 만하다.”

고 평(評)을 했습니다.

또, 이해 가을에 명종(明宗)은 ‘권간(權奸)보다는 현사(賢士)’를 구하고자, 널리 암혈지사(巖穴之士)를 추천받았는데, 후계(后溪)선생을 비롯하여 대곡(大谷) 성운(成運)・남명(南冥) 조식(曺植)・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석봉(石峯) 한수(韓脩)・일재(一齋) 이항(李恒) 등 6인이 경명행수(經明行修)에 뽑히어 천거되었습니다. 이때 명종실록에는,

“진사 김범(金範)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상주(尙州)에 산다. 문명(文名)이 있어 누차 천거되었으나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탈하여 가업(家業)을 힘쓰지 않고 너무도 인자하고 자상하여 노복들에게 매를 가하지 않았다.

(進士金範 庚子司馬壯元也。 居尙州, 有文名, 屢擧中, 遂不赴科。性踈闊, 不事家業, 慈詳又過, 鞭捶不行於奴僕)

고 기록되었습니다. 명종(明宗)은 경명행수(經明行修)에 선생에게 바로 교지(敎旨)를 내리고, 기한 내에 옥당(玉堂)에 올라올 것을 재촉했지만, 선생은

“현사(賢士)를 기다리심에 마땅히 예(禮)를 두려워하며 따라야 할 것인데 불가함이 이와 같습니다.”

라며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렸습니다. 이에 명종 임금은,

“내 불민하여 큰 공적을 이룸에 욕이 될 뿐이니, 비록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하지마는 어찌 어진 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오늘날 말세(末世)를 당하여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사람이 귀한데, 네가 뽑혀 내 마음이 매우 기쁘구나! 이달 그믐 안에 말을 타고, 올라오라는 일은 이미 글을 내렸으나, 기한에 구애 받지 말고 서늘할 때에 말을 타고 올라오길 기다린다.”

는 따뜻하고 타이르는 듯한 교지(敎旨)를 내려 보냈습니다.

적막하고 가난한 선생의 시골집에 임금의 교지(敎旨)가 연이어 내려지는 것은 흡사 속백(束帛)이 동산과 언덕을 이루는 모습과 같았으며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신은 본래 지극히 미묘하고 지극히 천하여 문을 닫고 있으니, 소중히 여기심을 그쳐 주십시오, 울지 못하는 매미이며, 그림의 떡이고, 허황된 명성이니, 상달(上達)한 사람들 곁에 자리하여 외람되게 임금의 고마운 마음을 받자오니, 비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분골쇄신하여, 약간의 티끌만큼이라도 은혜를 갚기 위해 힘을 다해야하나, 다만 신은 하나 같이 썩어 무너진 병든 사람이라 세상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명사(名士)의 반열에 흠을 내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좋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히 소중하게 여기는 명기(名器)이며, 가볍지 않은 것은 대은(大恩)입니다.”

라고 진소(陳疏)하였습니다. 사양하는 뜻이 확고하였으나, 주상은 또 관등(官等)을 뛰어넘어 선생에게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하고, 친히 교지(敎旨)를 내려 타이르시기를,

“네 상소한 말을 살펴보니, 가히 조용히 물러나야 함을 알 수 있으나, 비록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 하더라도, 바야흐로 어진 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이와 같이 말하니 내 마음이 부족한 것 같구나! 그러나 조정(朝廷)의 의론이 어찌 우연으로 경명행수(經明行修)의 반열에 참여함을 허락하였겠는가. 그림의 떡과 허황된 명성이 아닐 것이니, 모름지기 내가 어진 이를 찾는 마음을 생각하여, 피하지 말고 올라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주상은 몸이 불편한 선생에게 약제를 하사하였으며, 감사(監司)에게 령(令)을 내려 가난한 선생에게 식물과 물품을 지급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도학과 문장으로 일세에 권형(權衡)이 되리라” 는 극찬을 받았고, 6조목의 학덕을 갖춘 명경행수(明經行修)의 징사(徵士)가 되어 “일심을 온전히 수양하여 덕을 굳게 지키고 오래도록 지닐 것”을 주장하여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조정에서는 후계 선생을 상주의 선사(善士)일뿐 아니라 일국의 선사(善士)라고 예우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평생을 징사(徵士)로 살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선생의 마음은 명종 21년 8월 28일에 올린 사직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19일에 ‘이달 그믐내로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는 유지(有旨)를 공경히 받았고 24일에 또 ‘기일에 구애받지 말고 시원할 때를 기다려서 올라오라’는 유지를 공경히 받았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후 성교(聖敎)가 친절하고 자상하며 성실하고 간절하니, 감격하고 전율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치세를 바람이 참으로 간절하고 어진이를 목마르듯 구하시어 널리 초야에 묻힌 자들을 초빙하되 지극한 성의를 보이시니, 산림에 은거한 야윈 선비들이 모두 스스로 분기할 것을 생각합니다. 무릇 혈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미천하고 용렬하여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 외람되이 은명을 받은 것은 미증유의 일입니다. 분골쇄신하여 조금이라도 그 은명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지금 곧 길을 떠나지 못하고 사정을 호소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은 타고난 기질이 경박하고 몸가짐을 삼가지 못하여 본디 심열(心熱)이 있었는데 나이가 노쇠함에 따라 더욱 심해집니다. 임술년 8월에 감기를 앓으면서부터 이내 광증이 일어나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몸이 손상되어 두 번이나 숨이 떨어졌다가 다시 소생하였습니다. 이후로는 정신이 허약하여 심병이 가시지 않습니다. 갑진년 정월에 전의 병이 재발하여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럭저럭 오늘에 이르렀는데 자못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한몸이 상한 것은 광증에 연유되었지만 마음이 진실로 자족하면 죄얼이 망령되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몰래 스스로 비탄해 하며 항시 부끄러움을 가집니다. 폐인이 되어서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그림의 떡과 같은 허명(虛名)이 현인을 갈구하시는 성상에게 알려질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은명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리니, 마음이 황급하여 몸둘 바가 없습니다.

신은 실로 썩은 병인(病人)에 불과합니다. 얼굴을 들고 세상에 존재하기조차 어려운데, 하물며 사대부의 반열을 더럽히며 세상에 흔치 않은 은총을 받음에리까. 더더구나 전폐(殿陛)의 아래에 가까이 들어가서 윤음(綸音)을 받음에리까. 교지(敎旨)에서 일컬은 바와 같이 반드시 당세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라야 성상의 갈구하시는 바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데, 신처럼 무상한 자는 결코 이 선발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몸의 병폐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음에리까. 명기(名器)는 아껴야 할 것이며 귀신은 속이기 어려운 것이니, 은총을 받은 자가 적격자가 아니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만일 염치 불고하고 구차하게 나아간다면 일시의 물의와 만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 미천한 신의 한몸은 족히 아낄 것 없지만, 아낄 것은 명기(名器)이고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이런 때문에 신은 차라리 포만(逋慢)의 주벌은 받을지언정 감히 분수가 아닌 자리에 스스로 처할 수 없습니다. 처음 교관(敎官)을 제수받고 명에 달려가지 못한 것은 (연전에 내시 교관(內侍敎官)을 제수받고 나아가지 않았다.) 어찌 자신의 편리를 도모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이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신의 애절한 심정을 양찰하시어 유념해 주소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평생을 징사(徵士)로 살려고 했던 선생은 명종(明宗)의 거듭되는 청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잠시만 왕명(王命)을 따르기로 하고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부임했습니다.

옥과현(玉果縣)부임하자마자, 선생은 무거운 일과 작은 일을 깨끗이 정리하고, 오로지 은혜를 베풀어 간소하게 하고, 백성의 근심을 풀어주고, 관리를 단속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매사 처리를 너그럽게 하였으나 방종함에 이르게 하지 않았으며, 학교를 세워 선비를 장려함에는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등, 덕의(德意)가 두루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격무(激務)속에서 평소의 지병이 더하여 55세를 일기로 임지(任地)인 옥과현(玉果縣)의 관아(官衙)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주상은 몹시 슬퍼하시며, 도감사(道監司)에게 교지를 내려, 상사(喪事)의 일과 상여(喪輿)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도와주고 감싸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또한 특별히 부의(賻儀)를 지극히 하도록 명하고, 제문(祭文)을 내려,

“크도다. 그 국양이여! 네 기국은 넓었다네. 빼어난 자품 간직하고 있어, 세상을 구제할 뜻 품었네. 경서를 들어 증명함에는 더욱 넓고 더욱 깊었다네. 문장은 흐르는 큰 강물 같고 옥 소리 울리 듯 했네. 전 왕조에 교육함을 즐겨, 학교에서 선비를 뽑았다네. 문인을 벼슬에 천거하매, 신중하고 또한 자세하였네. 아름다운 문장 지어, 네 그 편액에 으뜸 되었네. 중년에 굴레를 벗고, 한 언덕 구렁에 살았다네. 자주 굶주린 안회(顔回) 닮았고, 도잠(陶潛)의 집같이 쓸쓸했네. 궁핍하나 의(義)를 잃지 않은 채, 네 지켜 감은 견고 했네. 사람들이 처한 시골은 혹은 구하기도하고, 혹은 따르기고 하였네. 네 말은 충성이 되었으며, 네 행실은 공경이 되었네. 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어짐도 없고 이치도 어두웠네. 이에 명하여 천거하였더니, 육조가 모두 갖추어졌네. 좋은 소리 절로 들이더니, 네 그 선발에 뽑히었네. 세상에 알려, 오기를 재촉하니, 내 기쁘고 더욱 좋았다네. 생각하여 내린 상소의 글에, 병세를 알려오니 슬펐다네. 내구하고 공들여 마음 돌려 올라와 주었네. 옳은 말을 듣고자 하매, 강악(講幄)에서 들을 수 있었네. 군왕이 이치를 어지럽힌 일과 고금의 성공과 실패하며, 학문하는 방법들과 잘 다스리는 방법이었네. 조용히 호응 하더니, 울리 듯 대답해 주었네. 어찌 저 탱자나무와 가시나무에 상서로운 봉황이 살 수 있으랴. 설산(옥과현)에 있어 가볍더니, 네 머물다 떠나갔네. 전임한 뒤 채워져, 내 의지함은 두터웠네. 어찌 부족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하늘이 데려감, 빨리도 하네. 교촌관에 머문 것도 잠시, 내 사랑도 잠시였네. 재능도 다 펼치지 못하고 등용함에 한스러움만 남아있네. 나라가 병들고 망할 것 같아, 내 슬픔 깊어 만 가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평생을 징사(徵士)로 살려던 선생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대사간의 진소(陳疏)에 따라 증직(贈職)하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김범(金範)의 죽음을 들으시고 드디어 후한 부의를 내리고 호송하게 하셨는가 하면 거듭 사제(賜祭)하고 증직(贈職)하셨으니,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과 선비를 접대하는 예의가 시종 변함없이 극진하셨으므로 신들은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성의(盛意)를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으로 진실로 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논할 때의 요점은 실상을 얻는 데 있는 것이요, 작명을 내리는 것은 마땅하게 부합되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여섯 사람 중에 어찌 우열(優劣)을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살피건대 김범은 젊어서는 과업(科業)을 일삼다가 노경에까지 급제하지 못한 채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의가 아닌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학문의 공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취할 만한 행실은 적지 않았으니 이는 곧 한 고장의 선한 선비입니다. 전조에서 추천하여 기용했고 상당한 직을 제수한 것은 진실로 마땅한 조처였습니다.

죽은 뒤에 포증(褒贈)하는 경우는 반드시 도덕(道德)이 굉대하여 한때의 긍식(矜式)이 될 만하고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이라야 비로소 이런 융전(隆典)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베푸는 것이 혹시라도 어긋나게 된다면, 진실로 이름이 그 실상을 지나쳐 작명이 올바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따라서 김범의 영령이 지하에서 편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조에서 이 사람을 천거하여 거용한 당초의 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물정이 모두 온편치 못하게 여기니, 김범을 자급을 뛰어 증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하니, 물정이 그러하다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상주를 ‘학문의 고장’ㆍ‘예절향(禮節鄕)’으로 재확인 시킨 장본인이요, ‘충절향(忠節鄕)’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로서 끼친 업적은 아주 크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선생의 효성(孝誠)과 학문(學問)이 전국에 높이 알려짐으로, 1635년(인조 13)에는 효자 정여를 세워서 포상하고 옥성서원에 배향(配享)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아들 홍민(弘敏)은 산양 근암서원에 배향되고, 홍미(弘微)는 상주 봉산서원에 배향되어서 삼부자(三父子)가 모두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또한,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선생은 후계(后溪)선생을 ‘군자유(君子儒)’라고 했으며, 세속의 선비들이 배운 바를 실천하려고는 아니하고 입과 귀를 돕는 일에만 치중하였다고 개탄하면서,

“대개, 그의 학문은 집안에서 효제(孝悌)하는 일로부터 임금을 섬기는 일에 이르기 까지 풍속을 착하게 하고 남을 사랑함에 한결같이 수신하고 삼가 행함을 근본으로 하여 지조를 지킴은 확고하고 실행하는 바는 발랐으니, 진실로 독실하고 후덕하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다”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이 오래 수(壽)를 누렸다면, 경명행수(經明行修)에 같이 천거되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ㆍ대곡(大谷) 성운(成運)・남언경(南彦經)・한수 선생 등과 함께 오늘날까지 대 학자로 일컬어졌을 것이라는 아쉽고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Ⅲ. 서대(西臺) 김충(金冲)선생

선생은 본관이 상산(商山)이고, 자는 화길(和吉), 호는 서대(西臺)이며, 1513년(중종 8)에 성균관 전적 김옹(金顒)선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부친으로부터 도학(道學)을 전수받았으며, 문학(文學)은 저절로 성취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법가(法家)에서 성장하고 가학(家學)을 이어받아서 혐결(廉潔)하고 간졸(簡拙)하여 사람들과 왕래를 홀홀히 하였습니다.

39세 되던 1551년(명종 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에 임명된 뒤, 태상주부・형조좌랑・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며, 1553년 41세 되던 해에 황해도 좌막 겸 춘추관 기주관(정5품)을 역임하였습니다.

42세 되던 1554년에는 청홍도사(淸洪都事)가 되었고, 1556년 함흥부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성균관직강・호조정랑・승문원 교감(종4품) 등을 거쳐서 1561년 평택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53세 되던 1565년에 고향에 돌아 왔습니다.

오랜 관직에서 해방된 선생은 고향에서 작은 초막을 짓고 ‘서대초당’이라 이름하고 시를 읊으며 때로는 종이학(紙鶴)을 초당 위에 띄워 가까이에 있는 벗에게 자신이 집에 있음을 알리고, 이를 보고 찾아온 벗과 더불어 시를 읊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55세 되던 1567년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가서 호조정랑・봉상시첨정・성균사예(정4품)를 거쳐, 56세에는 추계군수 그리고 59세 되던 1571년(선조 4)에는 성균관 사성(종3품)・선공감정(정3품 당하)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다가 60세 되던 1572년 4월에 장자(長子)를 잃었고 이를 애통해 하시다가 그 해 11월에 6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사후에 선생은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서대시집(西臺詩集)?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까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성품이 곧고 청렴결백하여 권세에 아첨하지 않음으로 하여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고 간혹 헐뜯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인(文人)으로서 고상한 지조(志操)로 시(詩)를 하니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였습니다.

선생과 후계(后溪)선생과는 8촌간이었고 서대(西臺)선생이 한 살 아래였는데 후계(后溪)선생은 평생에 남을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대(西臺)선생에 대해서는 족제(族弟)로 대하지 않고 글이나 편지를 붙임에 반드시 선생(先生)으로 칭하였으니 그 인격의 무거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서대(西臺)의 행적을 알만한 직접적인 문헌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복 정경세 선생이 찬(撰)한 ?중직대부 성균관사성 김공묘갈명(中直大夫 成均館司成 金公墓碣銘)?과 무첨재(無忝齋) 정도응(鄭道應)이 쓴 <한거잡기(閒居雜記)>속의 시화(詩話) 2편 그리고≪상산지(商山誌)≫<인물>과 <문한>에 있는 시(詩) 3수(首)속에서 선생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선생의 문명(文名)이 높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서대(西臺) 김충(金沖)은 포의시에 아직 이름이 심히 알려지지 않다가 알성과에 장원을 하매 여러 학사들이 그 재능을 시험하기 위해서 벽송정(碧松亭)으로 초대하고는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운(韻)을 부르자 공(公)이, ‘碧松亭畔釋麻衣 恩雨當年夢也非 借問杜鵑何似鳥 終宵猶道不如歸‘라 하니, 여러 학사가 비로소 칭찬하고 굴복하였다.”

위의 시는 “벽송정(碧松亭) 가에서 삼베옷 벗으니, 임금님 은혜입어 꿈인가 생시인가. 두견에게 묻노니, 너는 어떤 새이길래, 밤 새도록 돌아감만 못하다고만 외는가?”라고 읊은 것으로 장원급제자의 포부조차도 느끼게 하는 시(詩)라 하겠습니다. 또,

“공(公)이 처음 급제하고 이름이 나지 않았던 어느 날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가게 되었다. 조정에 출입하는 선비들도 많이 왔었는데, 마침 풍악(楓嶽)으로 가던 중이 시축(詩軸)을 지니고 시를 구하자 공(公)이 즉석에서 일절(一絶)을 썼는데, ‘천하의 명산 36 가운데, 해동의 개골산(皆骨山)도 선산(仙山)일세. 10년이나 꿈에서도 비로봉 정상을 헤매니, 밤마다 솔바람에 베갯머리 서늘했네(天下名山三十六 海東皆骨卽仙山 十年夢繞毗蘆頂 夜夜松聲枕上寒).’라 하자, 좌중사람들이 붓을 놓고 다 사귀기를 청하였다.”

라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보면, 서대(西臺)선생의 시문(詩文)이 탁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상산지(商山誌)? ≪문한(文翰)≫에 등재된 <제정희아 연정차운(題鄭希雅 蓮亭次韻)>시(詩)에서

“龜山半浦兩幽棲 구산(龜山)과 반포(半浦) 두 그윽한데 살며

日日過從對小堤 날마다 작은 제방을 두고 왕래하네.

疎竹風邊開玉局 선근 대숲 바람가에 바둑판 벌이고

綠荷香裏灌蔬畦 연꽃 향기속의 채전에 물을 대네.

遊春却恐花難久 봄놀이엔 문득 일찍 꽃 질까 겁내고

話夜還愁月易低 애기 나누는 밤엔 달 일찍 질까 걱정하네.

交契歲寒誰繼得 지조지킨 교우는 누가 잇는가

蒼松依舊醮西溪 창송은 의구하게 서쪽 개울에 잠겼네.

라고 하였고, <우차운(又次韻)>시에서는

紅塵數載歎棲棲 홍진에서 몇 년이나 탄식하며 지냈던가

長憶君家竹下堤 늘 그대의 집이 대숲 밑에 있음을 생각하네.

苛葉受風香入室 연닢은 바람 맞아 향기가 방으로 들고

稻花含露碧盈畦 벼꽃 이슬 머금고 푸른 벼 논두렁에 그득하네

川分燕尾從西下 개천은 제비꼬리처럼 나뉘어 서쪽으로 흐르고

山作龜形自北低 산은 거북 형상 지었는데 북쪽으로 낮네.

詩景室今留手澤 시경(詩景)엔 아직도 손때 남았거니

下堪斜日過前溪 석양에 앞개울을 차마 지나지 못하네.

라 하였습니다. 앞의 시(詩)는 살아서의 교우(交友)를 사실적으로 그린데 비해서 뒷수는 정계함(鄭繼咸)이 작고한 후에 쓴 것으로, 벗의 수택만 남은 구산(龜山)을 차마 지날 수 없다는 정을 읊은 시였습니다.

한편으로 선생의 학문과 교육에 관해서는 선생의 시(詩)와 묘갈명(墓碣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생이 후계(后溪)의 <연악서당(淵嶽書堂)>시(詩)(1・2구)에서 차운(次韻)하기를,

爲學奇功只復初 학문하는 기이한 공은 단지 본성을 회복하는 일인데

難彫須戒責如予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는 말, 꼭 나를 경계하고 꾸짓는 것 같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복초(復初)는 처음의 본성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고, 되찾은 본성을 지키는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7・8구)에서는

殷勤更請諸君勉 은근히 거듭 청하나니 제군은 힘쓸진저

道在吾心不在書 도(道)는 내 마음에 있지 책(書)에 있는 건 아닐세

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초반 두련과 마지막 미련을 종합해 보면 본성은 회복하는 일이나 본성을 따라 행하는 길(道) 역시 본디의 내 마음을 지킴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또한 선생의 인품에 대해서는 제자인 창석(蒼石) 이준(李埈)선생이,

“우아하고 깨끗함(雅潔)을 스스로 지키고 보전하며 뜻을 고상하게 지님(志尙)으로 구차스럽지 않아 시가 맑고 온화하며 담백하여 많은 사람들이 전하여 외웠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은 묘갈명(墓碣銘)에서,

“공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굳세고 질박하며 남들과 사귐에는 준엄하고 공평무사한 태도여서 평소에 즐겨 벗을 초대하거나 방문하여 친하려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볼 때에는 더욱 고관에게 붙좇지 않았으며 당부할 이유가 있어도 일찍이 사정(私情)을 따르지 않는 까닭에 가는 곳마다 번번이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하였고, 혹시는 모함을 당하기도 하였다.

- <중략> -

모욕을 당하고도 참음을 남들은 공손함이라 여기고, 혹독한 형벌을 주장함을 충직이라 여기나, 공은 이 같은 데 능하지 못하여 곤경에 빠지고 궁함이 마땅하였도다. 남들은 공을 곤궁하다 여기었으나 공은 스스로를 영달이라 여기었도다.

서대의 물 맑고도 담담함이여, 완연히 공의 용모와 같았도다. 추동의 집 그윽하고도 깊음이여, 진실로 공이 살 곳이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명(銘)은 서대의 성품이 맑고도 담담하며 그윽하고도 깊은 성품을 가졌고, 아첨을 공경이라 여기고 가식적인 충직으로 권세가에 빌붙는 선비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선생은 능력과 재능을 지니고도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음을 부차적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또한, 선생이 돌아가시자, 승지 권문해(權文海)가 시(詩)로써 곡하되, ‘誰放臺西鶴 難招漢北魂’이라 하여 재능을 지니고도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음을 부차적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향리에서 지사(志士)로 존경받는 선비였으며, 경학과 시에 특출한 분이셨습니다.

Ⅳ. 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

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은 1534년(중종 29)에 상주 소곡리(素谷里)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경명(景明)이며 호는 우곡(愚谷)입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기질과 도량이 넘쳐서 주변에서는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도(孝道)하여 향방(鄕邦)의 부러움이 되었습니다.

선생이 어렸을 때는 부친이신 호군공(護軍公)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항간의 잡서(雜書)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고 더불어 노는 이도 단아(端雅)한 선비가 아니면 바로 나무라는 등 매우 엄하게 자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더 성장해서는 성운(成運)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에 전념하면서 인격 수양에 크게 감화를 받았습니다. 즉,

“성대곡선생을 쫒아서 지극한 이론을 널리 듣고는 몸소 충분히 터득하고 마음에 새겨 행하여 거경궁리함으로서 근본의 바탕을 삼았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나태함이 없었다. 혹 과거에 응시함이 이롭다는 말을 하는 이가 있으면 부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명예가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뜬 구름과 같을 뿐 아니라, 나의 허다한 정력을 자질구례한 기예에다 헛되이 소비하여 세상에 자랑함이니 또한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은 1566년(명종 21) 불기당(不欺堂) 노기(盧麒)・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창설하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데 힘썼습니다. 이때 선생은 낙사계 서문을 썼는데, 조약 11조를 제정할 때는 스승이신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그 뒤 1580년(선조 13)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선생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는데 서애(西厓)선생은 우곡 선생의 정통(精通)함에 감탄하였습니다.

또한 선조(宣祖)가, “재능이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여 국가가 파격적으로 등용하라”는 지시를 했을 때, 비변사에서는 30인을 천거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우곡(愚谷) 송양(宋亮)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이 48세 되던 1582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향토민들이 ‘소곡(素谷)’이라는 동네 이름을 ‘효곡(孝谷)’으로 바꾸었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나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등이 조정에 선생을 천거할 때도 효행(孝行)과 학행(學行)이 전제되었습니다. 또한 제자인 부제학 이준(李埈)선생은 만시(輓詩)에서,

“정성깊이 죽은이 섬기기를 산이 섬기기와 같이 하고 첩첩산중에서 옛집을 지키네. 소곡(小谷)이 이제부터 효곡(孝谷)이라 이름하니 고요하게 삶은 본시 신선(神仙)이 사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 있으니 이에 사실대로 기록함이라.”

하며 스승의 효성을 극찬하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초에 왜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은 선생은 위험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향교에 있는 선성(先聖)의 위판(位版)을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마을 사람들이 곡식을 많이 묻고 피난간 사실을 안 굶주린 향민들이 선생에게 물은 즉 ‘곡식의 주인이 없는데 그 곡식을 파내는 것은 크게 불의(不義)함이라. 아사(餓死)의 일은 작고 불의(不義)의 명분(名分)은 크니 깊게 생각지 아니함이 어찌 이렇게 심하리요’ 하니 다들 부끄러워하며 해산하였습니다.

그리고 1592년 선생의 나이 58세 때 김각(金覺)ㆍ이전(李琠)ㆍ이준(李埈)선생 등과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은 소모관(召募官)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듬해에 백화산(白華山)으로 피난 중에 왜적의 급습을 받아서 위급한 지경에 빠지자,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장자(長子) 이회(以誨), 차자(次子) 이필(以弼)이 순절하였습니다. 또한 선비 노경건(盧景健)에 시집간 딸, 선비 정이괄(鄭而适)에게 시집간 딸들도 시부모께 효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일가(一家)에서 충(忠)・효(孝)・열(烈)이 나온 귀하고 보기 드문 집안으로 향토의 미풍양속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생은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는 뜻한 바 없이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전념하였으나 선생의 학행과 효행 때문에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특히 1593년(선조 26) 정구(鄭逑)선생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을 때 주변에서는 선생이 고령(高齡)이고 나라가 전쟁 중이기 때문에 부임하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음은 곧 자신만 있음이요 군부(君父)는 없음이다.”라고 부임을 강행하였습니다.

선조가 환도 후에 각 능을 봉심케 하니, 대부분 능침(陵寢)의 제사(祭祀)를 폐하고 능재(陵齋)를 지키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오직 헌릉만은 하루라도 지키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는 중사순심(中使巡審)의 환고(還告)를 받으신 선조는 ‘심히 가상(嘉尙)하다’면서 선생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천제(薦除)하였습니다.

그 뒤, 선생은 다시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에 천제(遷除)되었으나 노령(老齡)이라는 구실로 사직하고 선영(先塋)곁으로 돌아와 신석(晨夕)으로 성배(省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묘(家廟)에 고(告)하고 친한 벗의 부음(訃音)이 와도 그렇게 하여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기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선생의 효성(孝誠)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효행을 기리고 향토에서는 ≪상산지(商山誌≫에 효자로 입전하였습니다. 또한 노경건에게 시집간 딸이 부군을 따라 순절하였고, 정이괄에게 시집간 딸 역시 피난길에 부군의 부자가 같이 병사하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수절하니 나라에서는 열부로 정려하고 향토에서는《상산지(商山誌》에 열부로 입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생 일가의 충효(忠孝)에 대해서 허후(許厚)는,

“가정 교훈 역시 말로 표현하지 않고 바른 도리를 쫒아 효우할 뿐이었다. 선생은 평생 자신을 굽혀서 남의 비위맞춤을 수치로 여기어, 비록 세상에 드러나게 쓰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아감에 예(禮)가 있고 물러남에 의(義)가 있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의 집안은 자랑스러운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가문이었습니다. 이는 향풍 쇄신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고결한 조선혼(朝鮮魂)을 임난사(壬亂史)에 길이 남기었습니다.

선생은 1594년에 통훈대부(정3품 당하)에 특진되었고, 1598년에는 한성참군이 되었으나 이미 선생의 나이가 65세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사직하고 고향에 효곡정사를 지은 뒤 주자학에 침잠하여 공부하고 후진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김각(金覺)・정경세(鄭經世)・이전(李琠)・이준(李埈)・김광두(金光斗)선생 등과 낙사계(洛社契)를 합계하여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는 등 향풍쇄신에 앞장 서셨습니다. 그리고 1606년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할 때도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선생은 유교의 이념을 몸소 행한 분으로 충효(忠孝)의 표본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선생이 도남서원 창설에 솔선하였던 배경은,

“때는, 큰 난리의 뒤를 당하여 향리에는 선한 풍속이 없고 선비들은 지향해야 할 일에 어두웠다. 이른바 학문한다는 선비들은 다 명예를 구하는 사사로움에 나아가 끝내 공정한 도에 들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일찍이 이를 걱정한 까닭에 동지 제현과 더불어 오현원(五賢院)을 낙동강 위에 창건하고, 조문으로 된 규정을 정하고 세워 학자로 하여금 귀의할 바가 있게 하고 권장하여 이끌어 보살핌에 있는 힘을 다하니,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본 받으려 하여 심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

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선생이 뿌려 놓은 충효사상(忠孝思想)은 문학으로서도 길이 남을 만큼 높았습니다. 1607년 낙사계가 개최한 백수회(白首會)에서 선생이 쓰신 <존애원백수회추차(存愛院白首會追次)>를 보면,

上洛州南里 상락주의 남쪽 마을에

選期遂盍簪 날 잡아 선비들 다 모였네.

蘭薰同密契 난향 나눈 친밀한 계군이요

竹性戒虛心 죽성은 허탄한 마음을 경계한다네.

流水勤日月 세월은 날(日月)을 아끼라는데

高山閱古今 높은 산은 고금을 열람시키네.

樽前□□□ 술잔앞(以下 落字)

□□老來禁 (落字)늙으막에 금했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유거(幽居)>란 시를 보면,

獨捕搖琴十載遊 혼자 가야금 안고 지낸 지 십년

數椽新築水環丘 몇 칸의 새집을 물 가 언덕에 세웠네.

篇中賢聖言言的 책 속 성현 말씀 말씀마다 적실하고

物外煙霞事事幽 세상 밖 연하엔 일마다 그윽하네.

人間夜久方塘月 한가한 밤 이슥해 연못엔 달이요

門閑山深桂樹秋 집안 조용하고 산 깊은데 계수나무는 가을일세.

存心暇日尋眞處 존심(存心)으로 여가마다 진실처를 찾고

愛賦田園芋栗收 전원에서 읊조리며 토란과 밤을 줍네.

라고, 은자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임진란을 겪고 난 뒤 큰 아들이 병화에 순절한 일을 회억하며 지은 <난후환고거(亂後還故居)>(권(卷)1)을 보면,

古里荒凉烏雀喧 옛 마을 황량한데 새들만 지저귀고

滿庭草鞠寂人痕 뜰 가득 잡초 자라 인적도 적적하네.

吾生未死霜鬢髮 내 죽잖아 터럭은 서리같은데

國事常危㤼夢魂 나랏일 아직도 위태해 꿈 속 혼이 놀라네.

爲父寃兒身後恨 원사한 아들 아비되어 살아 있음 한스러운데

無孫埋土淚先言 손자없는 자식 묻으니 말 앞서 눈물일세.

落花盡日靑山裏 진종일 꽃 지는 푸른 산 속에

獨望蒼天不掩門 외로이 청천을 우러러 문을 닫지 못하네.

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의병으로서 국가 위난에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전후에 황폐한 고향에 돌아와 순절한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통한을 경연(頸聯)에 절절히 풀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선생은 유학자로서 효와 충을 실천한 선비이기도 하지만 문학에서도 설리적인(說理的)인 시문(詩文)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1602년에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다시 사포서 별제ㆍ사헌부 감찰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향토의 존경받는 선비로 학문과 향토 선속(善俗) 회복에 선봉장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 도학의 정통성을 표방하는 도남서원(道南書院) 창설에 앞장 서셨습니다.

이렇듯 상산선비로서의 임무를 다하신 선생은 1618년 12월 9일에 85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저서로는 우곡문집(愚谷文集)4권 2책이 있고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Ⅴ. 석천(石川) 김각(金覺)선생

석천(石川) 김각(金覺)선생은 향리에서 월간(月澗) 이전(李㙉)과 창석(蒼石) 이준(李埈)같은 훌륭한 인물을 길러낸 교육자였고, 높은 학식을 가지신 학자였으며, ‘상산사노(商山四老)’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떨쳤습니다. 또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강하여 왜적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분연히 창의(倡義)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써 나라를 지키신 분입니다.

선생의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경성(景惺), 호는 석천(石川)이며 1536년 (중종 31) 10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친이신 운정(芸亭) 김언건(金焉健)선생의 가르침을 받아서 절의사상(節義思想)과 효우사상(孝友思想)에 심취하였고 특히 부친을 닮아서 효성이 특출하였으며, 시부(詩賦)에도 능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운 바를 몸소 익히고 일을 당하여서는 처단함이 명쾌하여서 아버지 운정(芸亭)조차도 “아이에게 통솔하여 다스리는 재능이 있다.”하였습니다.

선생이 31세가 되던 1566년에 노기(盧麒)ㆍ김성ㆍ송량(宋亮)선생 등과 낙사계를 조직하여 향풍쇄신에 동참하였고, 이듬해인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 진사가 되어 시명(詩名)이 널리 알려졌으며 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이 35세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이후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선생의 문하(門下)에는 월간(月澗) 이전(李㙉)과 창석(蒼石) 이준(李埈) 그리고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선생 같은 준재(俊才)들이 있었으며 학문을 몸소 실천한 학자요, 교육자였습니다.

그리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안령(鞍嶺)에서 이전(李㙉)ㆍ이준(李埈)ㆍ정경세(鄭經世)ㆍ송량(宋亮)선생과 석천(石川)선생의 아들 지복(知復)선생 등 10여명의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고, 6월에는 동지들이 1,400명이 늘어나자, 경상도 순찰사가 직접 ‘상의군(尙儀軍)’이라 이름하였고, 9월 13일에는 선생이 ‘상의군 대장(尙儀軍 大將)’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에 사기가 충천한 상의군(尙儀軍)은 안령 (鞍嶺)등 촌락에 출몰하는 왜병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러나 사기가 충천한 상의군(尙儀軍)이 잠시 방심한 것을 틈타서 왜병이 급습하는 바람에 안령전(鞍嶺戰)에서 많은 손실이 있었습니다. 이때 복재 정국성(鄭國成)선생과 우복의 동생 정명세(鄭鳴世)선생, 창석(蒼石)선생의 부모님 그리고 서재(西齋) 김신(金紳)과 아들 유성, 유명, 유휘, 유진 등 5부자가 희생되었습니다.

상의군(尙儀軍)은 총 70여회의 싸움을 통해 많은 전공을 거두었습니다. 임진년 12월 19일에 선생을 보은의 마래진(馬來陳)에 좌위대장(左位隊長)으로 추대하고 대외항전 구역을 확대하여 새로운 의병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 좌위대(左位隊)는 상주・보은・선산・함창 구역을 담당하고 황간・회덕・청천・진잠 구역을 우위대(右位隊)로 하며 진주・사천 등을 사천진으로 하는 3개 권역으로 정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체제로 항전(抗戰)에 임했습니다. 좌위대장인 석천의 휘하에는 상주목사 김해・충보의병장 김홍민・선산부사 정경달・상주판관 정기룡・보은현감 구유근・창의장 이봉・충의장 이명백・송의장 노경임이 있었습니다.

이에, 감사 이수(李睟)가 선생의 전공(戰功)을 행재(行在)에 보고하여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를 제수받았고 이후에 다시 더 높은 자리인 ‘함창현감으로 직책을 옮겨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의병대장으로서 막강한 역할과 큰 전과를 올렸지만, 모든 전공(戰功)을 소모관(召募官) 이준(李埈)선생과 판관(判官) 정기룡(鄭起龍)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병들의 공으로 돌리고 본인은 상직(賞職)을 사양하였습니다.

“<前略> 또한 신이 감당할 수 없음이 있고, 실은 따로 알려드릴 바로 있사옵니다. 지난 해(1592년) 5월, 군사를 매복시킨 일은 처음부터 한 사람이 한 것도 아니고 또 제가 가장 먼저 꾀를 낸 것도 아닌데 헛된 이름이 잘못 전달되어 장려하는 은전(恩典)이 잘못 내려져서 신이 사온서 주부(종6품)가 되었사옵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어 이를 감당하오리까. <中略> 아, 상벌이 밝은 연후라야 사람을 권선징악(勸善懲惡)함이 있고, 권선징악함이 있은 뒤라야 일에는 단정하고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인 즉 상벌은 임금님의 숫돌이니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의 상벌을 신이 감히 외람되게 논의할 수는 없사오나 다만 진중에서 본 바로써 천거하옵니다. 분주히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주선함에는 이준(李埈)만한 사람이 없고, 험하고 막힌 곳까지 추격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음이 가장 많기로는 정기룡(鄭起龍)보다 나은 이가 없사오며, 그 밖의 나머지도 화살과 돌이 날리는 전장을 드나들며 한 사람이 참획함이 수십 급에 이르고 혹 곡식(군량미)을 납부함이 수십 석이 되어 오랫동안 사용토록 지지(후원)한 이들이 있으나 아직 은명(恩命)내림을 받지 못하여 민심이 흩어질 우려가 없지 않은 즉 신은, 조정이 반드시 주어야 할 상이 규칙이나 구범에 맞지 않음에 유감이 없을 수 없사옵니다.”

1596년에 왜적이 용궁현(龍宮縣)을 유린하자, 조정에서는 그 대책으로 선생을 용궁현감으로 하여 적에 맞서게 하였습니다. 즉, 1596년 2월 9일에 비변사(備邊司)가 선조에게 건의한 바는,

“조령(鳥嶺)ㆍ죽령(竹嶺)ㆍ토잔(兎棧) 등의 지역은 실로 천험의 요새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 조령에는 이미 관방(關防)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만을 의지해 견고함을 삼고자 한다면 그 형세가 너무 단약한데, 그 아래 이화현(伊火峴)과 요성(聊城) 및 양산(陽山) 길도 아직 남아 있으니 반드시 다시 토잔에다 험조(險阻)를 설치하고 신원(新院)의 들에다가 크게 둔전(屯田)을 열어 조령과 더불어 서로 보익의 형세가 되게 한 후에야 충주(忠州)의 문호가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종전부터 공문을 보내 주지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일을 주장하여 조처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궁(龍宮)과 토잔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만약에 근실한 사람을 얻어 그 고을의 수령으로 삼고 상주(尙州)・문경(聞慶)과 합세하여 다스리게 하면 토잔의 일은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용궁의 새 현감 이지(李祉)는 자상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감당할 수 있겠으나 수비의 조치는 아마 그의 장기가 아닌 듯합니다. 상주(尙州)에 사는 주부(主簿) 김각(金覺)은 난이 일어난 처음에 기병(起兵)하여 군공(軍功)으로 6품(六品)에 오른 사람이니, 이곳 사람들을 단속하여 둔전을 만들고 험조를 설치할 계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지(李祉)를 체차(遞差)하고 김각으로 대신하여 이 일을 전담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죽령에는 영상(嶺上)에다가 토성(土城)을 쌓거나 혹은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단양(丹陽)ㆍ청풍(淸風)ㆍ풍기(豊基)의 군사와 합세하여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단양 군수 서희신(徐希信)은 사은 숙배를 하지 않고 부임하였기 때문에 본사(本司)에서 임무를 면대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새 감사가 부임할 때에는 특별히 이를 강정(講定)하여 지시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비변사 관리들의 예측과 같이 용궁현감으로 부임한 선생은, 둔전을 만들고 험조를 설치하여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높이 사서 1604년에는 온성판관(穩城判官)을 이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듬해 4월 8일에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兵使) 김종득(金宗得)이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온성부(穩城府)는 판관(判官) 김각(金覺)을 장신(將臣)으로 정하여 행영(行營)에 내왕하게 하고, 우후(虞候) 성우길(成佑吉)로는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종성(鍾城)과 온성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겸하여 동관을 수호하는 등 일을 살펴 강변(江邊)의 성세를 강성하게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은 가는 임지(任地)마다, 주어진 책무들을 충실히 이행하여 주변의 칭찬이 가득했던 신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아버지 운정(芸亭)으로부터 선비로서 자질과 덕행을 배웠으며 시문(詩文)에도 탁월하셨습니다.

갑술연간(甲戌年間)에 선생이 어린아이 10여명과 석천대에서 놀았는데, 그 때 남긴 선생의 <제 석천대(題 石川臺)> 시(詩)를 보면,

首陽山下石川臺 수양산 밑 석천대는

慳祕幾年今始開 간직한 비밀 몇 년만에 이제야 열었는가.

兒童莫破蒼苔滑 아이들아 푸른 이끼 함부로 마라

恐有塵間俗客來 티끌 세상 속객 올까 그게 두렵다

라고 하여, “티끌세상 속객 올까 그게 두렵다.”는 이 시의 종장은 어지러운 세상에 품은 고결한 선비의 마음이 우러나는 품격 높은 시문입니다. 또한 선생이 낙동강변의 합강정(合江亭)에서 지은 시(詩) ‘합강정(合江亭)’은 ?영남누대지?에 오를 만큼 격조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50년 후인 기사년(己巳年)에 당시를 회상한 제자 월간과 창석 그리고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은 석천대에서 유상하며 시를 남겼는데 이전(李㙉)선생은,

少日陪遊築此臺 어릴 때 모시고 놀며 이 대를 쌓았더니

百年蒙翳一時開 한 평생 몽의함을 일시에 열었네.

如今孝子恢堂構 오늘날 효자가 정당(亭堂)을 회복하니

風彩驚間躍後來 풍채도 놀라웁게 뒤에까지 빛나네.

라고 했으며, 이준(李埈)선생은

人去山空只有臺 사람은 가고 산은 비었는데 남은 건 대(臺)뿐

一罇今向小亭開 술병차고 오늘 작은 정자로 가네.

可憐五十年前客 가련쿠나, 오십년 전 객이,

疑是餘生化鶴來 흡사 여생에 학이 되어 온 듯 하네.

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선생은 엄격한 교육자였고 높은 학식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목숨을 내걸고 싸운 우국지사(憂國之士)였으며, 정경세(鄭經世)선생의 이야기처럼 70노경에도 존애원(存愛院)을 창립하고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세우는데 앞장을 서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1726년(영조 2)에 연악서원(淵嶽書院)에 선생을 봉향(奉享)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Ⅵ. 맺는 말

후계(后溪) 김범(金範)선생은 일찍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일세에 권형이 되리라”는 극찬을 받았고, 6조목(條目)의 학덕(學德)을 갖춘 명경행수(明經行修)의 징사(徵士)가 되어 ‘상주의 선사(善士)일뿐 아니라 일국의 선사(善士)’라는 칭송을 받은 분입니다. 또한 학문에서도 군자유(君子儒)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특출하여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대곡(大谷) 성운(成運)선생・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선생・석봉(石峯) 한수(韓脩)선생・일재(一齋) 이항(李恒)선생과 어께를 나란히 하는 대학자였습니다.

대(西臺) 김충(金沖)선생은 맑고도 담담하며 그윽하고도 깊은 성품(性品)을 가졌고,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친 문인(文人)이었습니다. 또한 벼슬길에서는 아첨을 공경이라 여기고 가식적인 충직으로 권세가에 빌붙는 선비들과는 거리가 먼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행적(行蹟)을 더 두드릴만한 직접적인 문헌자료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은 자랑스러운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가문(家門)을 이루어서 향풍(鄕風) 쇄신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고결한 조선혼(朝鮮魂)을 임난사(壬亂史)에도 길이 남기었습니다. 또한 낙사계(洛社契)를 합계하여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는 등 향풍쇄신에 앞장 서셨으며,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에도 중추적 역할을 하는 등 선생은 유교의 이념을 몸소 행한 분으로 충효(忠孝)의 표본이었습니다.

석천(石川) 김각(金覺)선생은 향리에서 월간(月澗) 이전(李㙉)과 창석(蒼石) 이준(李埈)등 훌륭한 인물을 길러낸 교육자요, 높은 학식을 가진 학자였으며, ‘상산사노(商山四老)’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떨친 분입니다. 또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강하여 왜적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분연히 창의(倡義)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써 나라를 지키신 분입니다.

상주 남촌(南村)에 사셨던 4분 선비들은 ‘사림파(士林派)’에 속하는 분들로서, 성리학 정신을 구현(具顯)하는데 열성적(熱誠的)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향촌사회(鄕村社會)에서 유학(儒學)을 이수(履修)하고, 이것을 보급(普及)하며, 충(忠)・효(孝)・의(義)・신(信)의 실현(實現)실천(實踐)과 예(禮)의 구현(具顯)에 일생을 바친 선비였습니다.

또한 상주지역 성리학의 역사는 13세기말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지역보다는 더 일찍 학문을 열었고 독특한 상주유교의 기틀을 형성해 왔기 때문에 늦었지만 그 역할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학술대회를 통하여 이와 같은 우리들의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尙州 선비 金后溪․金西臺․宋愚谷․金石川 先生의 思想과 活動

金 昊 鍾

(安東大名譽敎授․前 尙州博物館長․東國文化財硏究院長)

尙州 선비 金后溪․金西臺․宋愚谷․金石川 先生의 思想과 活動

安東大名譽敎授・前 尙州博物館長・東國文化財硏究院長 金昊鍾

<目 次>

Ⅰ. 序 言

Ⅱ. 四先生의 學問과 思想

1. 性理學 履修

2. 선비思想 硏磨

Ⅲ. 四先生의 活動

1. 鄕風의 整備

2. 忠孝의 具顯

Ⅳ. 結 語

Ⅰ. 序 言

본고는 朝鮮中期 상주 지방의 이름 난 선비 가운데 후계 金範(1512~1566)・서대 金冲(1513~1572)・우곡 宋亮(1534~1618)・석천 金覺(1536~1610)의 思想과 活動 樣相을 究明하고자 한 것이다.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朝鮮王朝는 佛敎의 폐단이 드러난 高麗王朝를 打倒하면서, 유교 즉 性理學을 國是의 하나로 標榜하였다. 따라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價値의 基準은 儒學이었다.

이러한 時代的 雰圍氣 속에서 16세기 중엽 嶺南의 큰 고을인, 尙州 地方의 영향력 있는 인사 가운데 우선 위의 네 분이 지닌 사상이 어떠하였으며, 그것을 土臺로 전개된 그들의 活動 內容을 考察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朝鮮은 建國 當時의 緊張感은 상당히 사라지고 비교적 平和가 持續되었으므로, 社會 각 階層은 그들 사이의 이익을 增進하기 위하여 서로 對立하는 趨勢였다. 특히 勳舊派와 士林派의 對決은 더욱 심하여 支配層이 分裂되었으므로 여러 가지 問題를 惹起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士禍와 党爭이 발생하여 士林派의 피해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의 士林派 系列들은 緣故地를 찾아 落鄕하거나, 현실 政治界를 떠나 學問 硏究에 沒頭하는 趨勢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상주 지방 4선비의 사상과 활동을 해명함으로써 당시 地方 士族들의 生活形態와 地方 社會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寄與를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에서 거론한 尙州의 네 선비들도 기본적으로는 士林派에 속한다. 이들의 淵源을 살펴보면, 대개 地方 中小 地主層들로 학문적 배경은 신유학인 性理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出生하면서부터 家庭의 性理學的 雰圍氣속에서 成長하여 學問을 배우고, 그것을 實現하는데 努力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思想과 活動을 解明하는데 있어서 한 가지 困難한 問題는 4분에 관한 硏究 資料의 偏差가 甚하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歷史에 관한 硏究는 자료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4선비에 대한 敍述 分量에 差異가 날 수 밖에 없겠다. 이 점 미리 諒解를 구한다.

Ⅱ. 金后溪․金西臺․宋愚谷․金石川 先生의 學問과 思想

1. 性理學 履修

성리학은 중국 北宋 때 형성된 新儒學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孔子 등에 의하여 仁을 중심으로 성립한 古典儒學은, 후한대에 印度에서 들어온 佛敎와 老子 등에 의해 주장된 道敎에 비하여 이론적인 체계가 未洽하였다. 그러므로 宋대에 와서는 萎縮되는 趨勢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古典儒學의 골격은 유지한 체 좀 더 整然한 理論으로 武裝하여 佛敎와 道敎에 對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作業은 당시 改革的인 知識人들이 추진하였는데, 내용의 중심은 理氣論과 心性論으로 哲學的인 理論體系를 갖추는 것이었다.

북송 때 성립된 신유학은 南宋 때 朱子가 나서서 이를 더욱 洗練되게 整理하였는데, 그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實踐的인 측면도 강조하여 ≪小學≫과 ≪家禮≫를 중시했던 것이다. 이런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하여 와서 受容된 것은 주지하는 것처럼 麗末鮮初이었다. 더욱이 朝鮮이 建國되면서 朱子性理學을 사상적 기둥으로 삼고, 이를 普及하고자 努力하였으므로 그 뒤 長足의 發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性理學을 修練한 士族들도 그 뒤 여러 가지 이유로 分化되어 處地가 달라지게되었다.

즉 政權에 가담한 士族들과 在野에 있는 士族들은, 서로 立場이 달랐으므로 그들의 處身 樣相이 같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약간 言及한 바 있지만 본고에서 擧論하고자 하는 조선 중기 네 사람의 尙州 지방 선비들은 基本的으로 在野의 知識人이었다. 따라서 지금부터 이들이 어떻게 性理學을 履修하여 갔는지를, 그들에 대한 略傳을 곁들여 考察하기로 하겠는데, 順序는 出生年度에 따르기로 한다.

먼저 후계 金範(1512~1566)은 字가 덕용이고, 본관은 商山이며, 호는 后溪였다. 아버지는 장사랑을 역임한 允儉이고 어머니는 종사랑 金增의 딸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親家와 外家 모두 士族 家門임을 알 수 있겠다. 근대 이전의 傳統社會에 있어서 通婚은 대체로 家格이 비슷한 가문끼리 이루어지는 趨勢여서, 勳戚은 훈척끼리, 士族과 鄕吏는 각각 그들끼리, 常民은 상민대로 서로 通婚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계는 출생 후 成長하면서 經史를 비롯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기에 정신을 집중했는데, 과거준비 공부인 科業보다는 性理學과 詩文學 修練에 더욱 置重하였다. 그의 재능은 특히 문장 쓰기와 시 짓기에 뛰어나 進士試에서 일등으로 拔擢되어 당시 考試官인 모재 金安國의 極讚을 받고 表彰되었다. 그는 禮學에도 精進하여 ≪朱子家禮≫를 열심히 익혀 이것을 冠婚喪祭 등 일상 儀禮에 準用하였다. 후계는 儒學의 經傳과 歷史를 깊이 硏究하여 실력을 쌓았으므로, 이것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 들었다.

이상으로 간단히 고찰하여 보아도 후계는 성리학 이수에 힘쓰는 한편 이것을 확대 보급하는 일에도 精進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의 성리학 수준을 가늠하는 저술 가운데는 인간의 心性을 다룬 人性論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兵火로 없어져 전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에는 서대 金冲(1513~1572)의 성리학 이수 과정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의 字는 화길이고, 호는 西臺이며, 본관은 商山이다. 아버지는 典籍을 지낸 顒이고, 어머니는 鄭俅의 딸이다. 특히 아버지 옹은 중종 때 賢良科에 及第한 뒤 성리학 교육의 최고 학부인 成均館의 典籍을 歷任하였으니, 그의 家學的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 환경 탓인지 서대는 일찍이 儒學의 經典과 歷史書籍 그리고 詩文學을 익혀, 명종 때 幼學 신분으로 별시 文科에 甲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 전적을, 자신의 아버지처럼 歷任하면서 性理學 硏究와 이를 교육 普及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우곡 宋亮(1534~1618)의 성리학 이수 과정을 고찰하여야 하겠다. 그는 字가 경명으로 호는 愚谷이며, 礪山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부호군 璫이 그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재령 康씨로 선무랑을 지낸 琬의 딸이다. 이렇게 士族 子孫으로 出生한 우곡은 聰明이 뛰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여러 서적을 읽고 이를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經史와 儀禮에 관한 서책을 더욱 좋아하여 이에 관한 一家見을 갖게 되었다.

그 뒤 性理學에 대한 疑問을 解消하기 위하여, 당시 이에 관한 該博한 지식을 갖고 있던 퇴계 李滉 선생을 찾아가 의문을 풀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속리산에 隱居하던 성리학자 대곡 成運을 스승으로 삼아 程朱學을 배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心性論에 심취하여 ≪心經≫ ≪近思錄≫등을 연구하여 論辯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朱子家禮≫를 耽讀함으로써 이를 실천하는데도 앞장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된 결과 그는 大義名分 구현에 주력하게 되었다. 주자성리학의 본질이기도 한 理學을 기본적으로 이수한 우곡은 義理名分論에 입각하여, 正統論이 중시되는 禮學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忠과 孝 등에 남다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주자성리학이 理學과 禮學으로 나누어지면서도 그 근본 철학은 正統論으로 체계화되어 至公無私한 마음과 本性을 항상 保存하고 기르려는 자세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倫理로 나타난 것이 3강 5륜이고 宗法 秩序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에 부합되게 우곡은 理學과 禮學에 두루 通達했을 뿐만 아니라 歷史學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졌음을 그의 문집 1권 雜著의 經說에서 파악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들을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춘추 ∘예기 ∘논어 ∘대학 ∘중용 ∘맹자 ∘효경 ∘이아 ∘좌전 ∘가례 ∘육례 ∘오성 ∘사단 ∘칠정 등으로, 여기에 그는 모두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는 性理學과 禮學 그리고 史學 등에 모두 精通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겠다. 우곡은 心性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禮에 대해서도 心性 못지않게 역설하고 있는데, 특히 국가를 統治하는 임금은 예를 바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禮爲首於四維…所謂爲國之 以禮兮 及人君之大柄粵…身修而家齊兮 意自誠而心正 至於君至於國 君正而國治兮…君君臣臣之 大義以定兮 以此而爲能 扶植其爲用也…五典因而有常信 治國而以禮兮 猶瞽者之有相 是爲 人君之大柄兮…

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要約한다면 禮가 義理나 淸廉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德目보다 으뜸가는 요소이기 때문에, 임금은 이것을 큰 原則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임금이 禮儀로써 몸을 닦아 스스로 바르고자 노력한다면, 大義가 確立되어 국가가 잘 다스려 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석천 金覺(1536~1610)의 性理學 履修 상황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는 서대 金冲의 사위로서 월간 李㙉형제의 스승이기도 한데, 字가 경성이고 호는 石川이며 본관은 永同이다. 아버지는 進士인 彦健이며 어머니가 풍양 趙씨 恞의 딸이다. 그가 尙州에 定着하게 된 배경은, 그의 5대조인 守和가 工曹參議를 역임했는데 수화의 妻家가 尙州였으므로 妻鄕을 따라 상주에 寓居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財産相續制度가 子女간 均分制였으므로 재산 관리상 사위가 妻鄕으로 옮겨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석천은 그의 五代祖가 本貫地인 영동에서 상주로 이사함에 따라서 상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석천의 五代祖母는 商山金氏인 참의공 漳의 딸이었다.

따라서 석천 家門의 배경은 親家와 姻戚들이 士大夫 가문임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가정 분위기는 자연히 性理學을 履修하는데 좋은 土壤을 提供했던 것이다. 이에 관한 다음 資料를 檢討하여 보기로 하자.

石川…考彦健進士 號芸亭 以厚德篤行…隱居授徒 至今吾鄕之 以文雅相尙者 其功爲多…公承學于家…從文獻諸公遊…丁卯歲中成均進士 未幾遭外艱…自是遂廢擧子業…

이라 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간단히 要約하여 說明하자면, 석천의 아버지인 進士 운정은 행실이 반듯한 處士形 선비로 尙州 고을에서 학생들을 모아 성리학 등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 고을의 文風을 振作하는데 상당한 功勞를 세웠다. 따라서 석천은 이러한 아버지 지도 아래 性理學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석천의 성리학적 바탕은 家學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뒤 석천은 性理學과 詩文學을 修練한 여러 벗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뒤에는 그 또한 進士 시험에 급제하여 仕路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곧 父親喪을 당하자 그는 科擧 준비 교육을 抛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主題에서 거론한 네분 선비들의 性理學에 대한 履修 過程을 槪觀하여 보았다. 麗末鮮初에 수용된 性理學은 太極說과 理氣論으로 체계화한 哲學的인 構造를 지닌 新儒學이었다. 이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먼저 受容한 階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지방에서 성장하던 新興士族이었으며, 이들의 주동으로 朝鮮王朝를 건국한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士族들도 조선왕조에 들어와 여러 대를 거치면서 役割에 차이가 남에 따라 階層分化가 진행되어 크게 勳舊派와 士林派로 나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상주의 4선비들은 系統上 士林派에 속하는 분들로서, 이들은 성리학 정신을 具顯하는데 熱誠的이었다. 이들 선비들은 가끔 出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基本的으로는 鄕村社會에서 儒學을 履修하고, 이것을 普及하며 實踐해 가려는 處士形 선비였다. 따라서 이들의 行動樣式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德目인 忠・孝・義・信 등의 實現에 적극적인 한편 禮의 具顯에도 앞장섰던 것이다. 儒敎 道德에 있어서는 家族道德이 더욱 尊重되었으며 가족도덕의 基礎는 孝였다.

이러한 孝와 함께 臣下의 임금과 국가에 대한 忠도 매우 重視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임금에 대한 盲目的인 忠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바른 길을 걸을 때, 충을 해야 한다는 抵抗的 要素도 지녔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선비들은 中央指向的인 官僚生活 보다는 地方에 남아 있으면서 선비정신을 갖고 悠悠自適하는 態度로 살아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들이 거주하는 鄕村社會를 性理學 思想으로 刷新하여 이를 敎化시켜 가고자 盡力했던 것이다.

2. 선비思想 硏磨

앞의 네분들은 조선시대 性理學을 터득한 知識人 즉 선비였다. 선비란 순수한 우리말로 이를 漢字로 표기할 때 士와 儒 두 글자가 함께 쓰인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儒學을 배운 識字層으로 仕宦者나 未仕宦者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이분들은 출생하여 어릴 때는 대개 家庭에서 儒學的 識見을 가진 父祖 등으로부터 家學으로 기초를 닦은 뒤, 스승을 찾아가 師門 관계를 형성하여 學問을 넓히는 한편 선비로서의 人格을 修養해 나갔다. 그리고 때로는 家學을 거쳐 가까운 精舍에 가거나 鄕校에서 수련하여 司馬試에 응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仕宦에 뜻을 둔 자들은 生員・進士 資格을 얻은 뒤 成均館에 진학하여 科擧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地方의 선비들은 대체로 생원이나 진사 자격을 얻는 상태 즉 小成에 만족하면서 在地士族으로서 鄕村 社會를 이끌어 가는 趨勢가 강하였다. 이때 그 지도 이념은 물론 성리학과 예학이었다.

앞에서 이미 이들 선비들이 性理學과 禮學을 이수하는 과정을 槪觀한 바가 있었다. 그들은 성리학과 예학을 익혔으므로 이러한 道를 지키는 한편, 그것을 현실사회에 實現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선비는 聰明하여 事物에 밝은 才 보다는, 正直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德을 더 重視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덕을 갖추자면 仁・義・禮・智・忠・信・樂의 일곱가지 德目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德目을 구비한 그들은 대개 鄕村指向的이어서 科業에 별로 뜻을 두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文友와 道友로서 지내는데 보다 比重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설령 급제후 벼슬길에 나섰다고 하더라도 곧 辭退하고 歸鄕한 뒤, 自然을 벗 삼아 향촌의 文友나 道友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선비사상을 그대로 닦아 나갔다.

이들의 선비사상 즉 선비정신은 性理學과 禮學에 대한 知識을 갖추고 德性을 두루 具備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儒學的 지식을 바탕으로 德을 兼備한 高潔한 人格으로, 行動과 禮節을 올바로 實踐하는 동시에 不義를 排擊하면서 사회에 正道를 구현하는 것이 선비정신이었다. 이런 조선의 선비 정신은 송대의 道學사상에 淵源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道學사상은 孔子와 孟子의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선비사상을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尙州 지방의 선비들이 어떻게 연마하고 실천해 나갔는지 그 양상을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우선 후계 金範은 어릴 때 이미 詩文에 뛰어 났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중종35년(1540)에는 進士 시험에서 壯元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喪을 당한 뒤로는 더 이상의 科擧를 抛棄한 체 향촌에서 선비사상을 닦는 데만 주력했던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문밖 出入을 가급적 自制하면서 선비로서의 뜻을 구하는 한편, 조용히 存養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평소 經史와 시문에 관한 서책 보기를 좋아하여, 內在하고 있는 깊은 뜻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山水를 遊覽하면서 거기에서 지내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그러므로 學問이 篤實하고 厚德하며 스스로 便安하고 安定된 진실한 선비였던 것이다.

그가 평소 文友로서 향촌에서 가까이 지낸 친구들로는, 서대 金冲과 운정 金彦健(1511~1570) 등 당시 鄕村社會에서 名望이 있는 선비들이었는데, 이들과 서로 호흡을 맞추면서 선비정신을 길러 나갔다. 특히 후계는 樂山樂水를 爲主로 精神 修養을 했는지 이에 관한 시문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다음 詩句를 吟味하여 보기로 하자.

獨立磯頭 伴鷗盟 不覺江風 吹面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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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江得雪 雪得翁 欲語妙意 知者難

위의 시는 전체 시 가운데 후계의 선비로서의 자연을 즐기는 모습과, 그가 內包하고 있는 精神 世界의 裏面을 들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만 拔萃하여 본 것이다. 이것을 풀이하여 본다면 大略 다음과 같을 것이다. 외로이 물가에 서서 갈매기 떼와 벗하고 있으니 강바람이 얼굴에 스쳐도 추운 줄을 모르겠네.… 추운 강은 눈을 맞고 눈은 늙은이를 맞이 하는데 묘한 뜻을 말하고자 하나 아는 사람이 없구려, 라고 恨歎하고 있다. 이렇게 후계는 性理學을 배운 뒤 그것이 指向하는 바를 現實에 具顯하고자 했으나, 이해하는 자가 많지 않아 幻滅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山水와 같은 自然에 더욱 接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서대 金冲의 선비사상 연마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서대도 典型的인 士族 家門에서 출생하여 性理學 修練에 精進하였다. 그리하여 유년시절부터 사대부가 지녀야 할 信念과 態度에 대하여 學習했다고 보여진다. 서대는 성리학적 理想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科業에도 주력하여 명종 6년(1551)에는 별시 문과에 甲科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文科에 급제하려면 科文六體를 공부해야 하는데 그 내용은 詩·賦·表·策·疑·義 등이다. 여기서 시나 부는 문학적인 내용이고, 표는 제후들이 王이나 皇帝에게 올리는 글이다. 그리고 疑는 歷史書에 관한 것이고, 마지막 義는 四書五經 등 儒學 經典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科業을 준비하자면 장기간에 걸쳐 이렇게 多樣한 內容들을 學習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러한 過程에서 자연히 선비로서 지녀야 할 知識과 思想을 涵養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士族들 가운데는 이런 科業을 처음부터 抛棄하고 儒學經典이나 詩文에만 매달리면서 自然을 벗삼아 悠悠自適하는 處士도 많았다. 그런데 서대는 비록 과업을 통하여 어려운 文科에 及第했으나, 그의 속마음은 처사를 指向했는지 벼슬길에 나선지 10년 만에 辭職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왕인 明宗의 性理學에 대한 確固한 信念의 不足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類推를 가능하게 하는 다음 자료를 보기로 하자.

上 幸成均館 行酌獻禮 試取文科 金冲等五人…史臣曰 親幸芹宮 酌獻先聖…第以異教 與吾道竝立 崇信之意 彼此無別 斯文將喪 士氣頓挫…

위의 내용을 해석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임금이 成均館에 행차하여 酌獻禮를 행하고, 문과에 金冲 등 다섯 명을 及第者 뽑았다. 史臣은 말하기를 친히 芹宮에 行次하여 先聖들에게 작헌례를 행하고…그런데 異教를 우리의 道學과 竝立하여 높여 믿게하는 뜻이 서로 分別이 없으니, 道學 즉 儒學이 장차 喪失되어, 士氣는 敗하여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문과에 급제한 서대는 史臣의 論評에서 보듯이 당시 임금의 儒學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後援이 부족한 상태에 실망하여, 벼슬길에서 빨리 辭退하고 歸鄕했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異敎는 물론 佛敎를 말하는데, 당시 임금의 母后인 文定王后가 승려 普雨와 결탁하여, 불교 興起를 試圖하였으므로 士大夫들이 크게 反撥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不確實한 態度에 失望한 나머지, 正統 性理學으로 修練된 서대는 內心 反撥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早期에 歸鄕했는지도 모르겠다.

고향으로 돌아온 서대는 선비사상 연마와 실현에 주력하여 在地 士族으로서의 일정한 役割을 遂行하였던 것이다. 서대 草堂을 지어 놓고 자연을 벗삼아 詩文을 짓기도 하는 한편, 儒學精神을 宣揚하는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平素 선비답게 淸廉 儉素한 姿勢를 지녔으며, 권력자에게 阿附하지도 않아 文科 及第者였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이번에는 우곡 宋亮의 선비사상 硏磨와 具顯에 대하여 살펴 볼 순서이다. 우곡은 선대부터 올곧은 선비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祖父인 시직공이 燕山君의 비합리적인 暴政에 反對하여 벼슬을 버리고 尙州로 와서 隱居했던 사실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家風을 繼承했는지 우곡은 어릴때 이미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 寡黙하고, 雜된 것과는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선비답게 儒學에 관한 서책만 주로 耽讀하였다. 그리고 《朱子家禮》를 깊이 연구하여 이를 實踐하는데 心血을 기울여 주변의 稱頌이 잦게 되었다.

우곡은 合理的이고 올바른 선비상을 自身이나 자기 家族에 局限하여 연마하도록 하지 않고, 이것을 周邊에 擴大하여 普及하고자 노력하였다. 여기에 관한 자료는 많이 찾을 수 있으나, 우선 손쉬운 다음 기록을 보기로 하자.

萬曆 壬辰之亂 隣村富者 多埋穀物 避倭遠去時 有飢餓將死者相議 欲分其穀曰 宋先生在近 不可不告也 使人來質 答曰無其主而掘其藏 是大不義也 餓死事小 不義名大 何不思之甚也 皆懷慚而散

이라 하였다. 이것을 풀이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만력 壬辰倭亂 때 이웃마을 부자가 곡식을 땅에 많이 묻어놓고, 倭軍을 피하여 멀리 避難을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 장차 죽게 될 무렵, 묻어놓은 그 곡식을 파내어 나누어 갖고자 했는데, 가까이 우곡선생이 있으니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可否를 質疑하였는데, 대답해 가로대 ‘주인이 없는데 감추어 둔 것을 파내는 것은 아주 큰 不義다. 굶어 죽는 일은 작은 일이고 不義라는 것은 큰 일이니, 어찌 甚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니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곡은 대쪽 같은 節義를 지켜 나가려고 애썼으며, 이러한 선비사상을 자신의 周邊은 말할 것도 없고 鄕里에 까지 傳播시키려고 노력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곡은 비록 處士 생활을 指向했지만, 주변에 사는 일반 百姓들의 생활에 無關心했던 것은 결코 아니고, 이들에게도 儒敎的인 思想을 확대 普及하고자 盡力했음을 알 수 있겠다. 우곡은 선비로서 志操를 지키며 高潔하게 處身하면서도, 自然과 더불어 여유를 갖고 韻致있는 생활을 이끌어 나갔는데, 그러한 자취는 그가 지은 詩文 가운데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에서 두 가지만 골라 吟味하여 보도록 하겠다.

○. 獨抱瑤琴 十載遊 数椽新築 水環丘

篇中賢聖 言言的…爲賦田園 芋栗收

○. 休怪山村 寂寞居 杜門空谷 故人踈…

早知不合 炎凉態 寧向西疇 把短鋤

주 20) 幽居 시를 필요한 부분만 골라 풀이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고 생각된다. ‘혼자 요금을 안고 십년 동안 놀았고, 몇 칸 집 새로 지으니 물이 언덕을 돌아가네. 책 속에 있는 聖賢의 말씀은 말마다 옳은데…田園生活을 賦로하며 토란과 밤을 거두네.’

주 21) 述懷 시도 필요한 곳만 뽑아서 풀이하여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을 것이다. ‘조용하고 괴이한 山村에서 寂寞하게 살다보니, 문을 닫은 빈 골짜기엔 親舊들도 적구나…일찍이 炎凉 世態에는 不適함을 알았으니, 차라리 서쪽들로 나가 짧은 호미나 잡겠네.’

주 20)의 내용에서는 조용히 거문고를 벗삼아 지내는 한편, 聖賢들의 儒學冊이나 읽으며 田園生活을 하는 우곡의 餘裕로움이 묻어난다. 주 21)도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 세상과 떨어져, 시골생활을 하겠다는 그의 孤高한 品格이 묻어나는 시이다, 그는 이렇게 自然을 벗삼으면서 선비정신을 보다 깊게 길렀던 것이다.

끝으로 석천 金覺의 선비사상 硏磨 樣相을 살펴보고자 한다. 석천도 典型的인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선비사상을 닦아 나갈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선비들은 行實을 바르게 하고 苟且한 利得을 바라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고 事理에 어긋나거나 義롭지 못한 일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行動할 때는 반드시 禮를 먼저 생각하였으며, 山水가 아름다운 곳을 무척 좋아하였다. 석천의 생활과 行動樣式도 대체로 이것과 類似한 부분이 많았다. 그는 家學을 土臺로 性理學을 修練하는 한편, 이것을 향촌의 자제 등에게 가르쳐 普及하고자 애썼다.

석천은 특히 아름다운 山水를 매우 좋아해서 이곳에 묻혀 살기를 원했는데, 그러한 사정은 다음 기록에서도 確認할 수 있을 것이다.

吾州之名山大川 何限而 山之高峻者 莫如離嶽 水之深廣者 亦莫如洛江…凡愛山樂水者 各適所寓而巳…採山可茹 釣水可 而有枯寒澹泊之趣者 吾之獨樂也 衆人皆厭 我則獨樂…沈潛聖賢之經…徒務遊觀 只探風景 日沈醉於盃酒 管絃之間…

위의 글은 그의 <獨樂堂記>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 拔萃한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석천의 선비사상의 一端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문장 중에서도 그의 선비로서 處世觀을 보여주는 곳만 골라서 풀어 보기로 하겠다. ‘무릇 山水를 좋아하는 자들은 각각 適當한 寓居地가 있다.…산나물을 뜯어 먹고 물고기를 낚을 수 있으며, 寒微하나 마음에 慾心이 없고 깨끗한 것이 내가 홀로 즐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하나, 나는 홀로 이를 즐거워한다.…옛날 聖賢들의 儒學 經典에 빠져…오로지 보고 즐기는데 힘쓰고 다만 風景을 探索할 뿐이다. 나날이 술을 마시면서 管絃 樂器를 演奏하련다.’고 하였다. 즉 석천은 鄕村에서 處士的 선비사상을 追求하며 山水에 파묻혀, 가난하게 살면서 儒學冊이나 耽讀한 뒤 이를 普及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때때로 술을 마시고 거문고나 가야금 등을 연주하면서 주변 山水의 수려한 風景을 감상하며 消日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것 이외에도 산수를 讚美한 몇 편의 詩가 전한다.

Ⅲ. 金后溪․金西臺․宋愚谷․金石川 先生의 活動

1. 鄕風의 整備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尙州 지방의 네분 先生들은 당시 이 고장을 이끌어 가는데 重要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正統 性理學을 履修한 學者들로 기본적으로는 在野의 선비생활을 指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自身들이 몸담고 있는 지방의 鄕風을 儒學的 理念에 맞게 刷新하여 整備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在地士族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鄕村에서 性理學을 價値의 基準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되는 것들을 擴大 普及하고자 힘쓰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 사이의 紐帶를 强化하고 그들의 社會經濟的 지위를 提高하여 鄕村社會를 掌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事情을 考慮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네 분 선생의 鄕風 整備樣相을 考察하고자 하는데, 順序는 역시 앞서 거론한 그대로 따르고자 한다.

먼저 후계 金範의 향풍 정비 노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는 스스로 經史에 대한 책보기를 좋아한 결과, 거기에 대하여 相當한 實力을 쌓아 一家見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鄕村에 儒風을 振作시키고자 우선 地方 子弟들의 儒學敎育에 注力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직접 經史에 의문을 갖고 質問하는 學童들에게, 그들의 實力과 才能에 따라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을 전체의 향풍을 儒學 敎育으로 쇄신하여 整備하고자, 당시 상주 목사인 신잠을 도와 각 마을 書堂 建立에 적극 協助했으며, 특히 道谷書堂을 맡아 이를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향촌에서의 후계의 功績이 널리 알려졌는지 드디어 經明行修로 薦擧되었으며, 뒤에는 玉果 縣監에 任命되었다. 여기서도 후계는 성리학을 크게 振興하여 고을 전체의 禮俗을 興起시키는 등 教化에 적극 노력하여 상당한 成果를 거두었다. 후계는 그의 鄕里인 상주에서 뿐만 아니라 잠시 맡은 玉果縣에서도 유학적 鄕風을 振作시키기 위하여 갖가지 努力을 展開하였다. 이러한 儒風의 확대와 普及에 妨害되는 요소에는 과감히 挑戰하여 저항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승려 普雨에 대한 處斷 要請이었다. 이에 관한 다음 자료에서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겠다.

臣等伏以事渉悖逆…伏聞賊僧普雨 窮凶極惡 彰發無隱 一國臣民 欲食其肉…殿下拒諫之過而已…若不更唱大義回天討賊則 臣等之負 殿下豈不甚哉…直以庛雨之心內主于中 故下之言 難入而上…士氣公論 實國家之元氣也命脈也…臣等俱以草茅之士 從事於學問 大倫大義粗得…異端之禍代或有之 未有今日之惨酷者也

라고 斷定지었다. 위의 내용을 대략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신 등이 생각건대 이 일은 悖逆에 關係됩니다.…듣건대 적승 보우는 흉칙하고 極惡하며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내니, 나라의 臣下와 百姓들이 그의 살을 씹어 먹고자 합니다.…殿下께서 臣下들이 諫하는 것을 拒否하는 것이 지나칩니다.…만약 다시 大義를 부르짖고 회천하여 討賊하지 않은 즉, 신들이 殿下에게 진 부담이 어찌 심하지 않겠습니까…보우를 庇護하는 마음이 宮中 안에 있으므로, 아랫사람들의 말이 위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士氣와 公論은 실로 國家의 元氣요 命脈입니다.…신들은 모두 草野의 선비들로서 學問에 從事하고 있습니다. 큰 倫理와 義를 약간 터득했습니다.…異端의 災殃은 때때로 약간 있었지만, 지금같이 慘酷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呼訴하였다. 在野 儒生들의 이러한 上疏는 당시 言路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상소문은 후계 단독으로 올리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유는 臣等으로 표시하여 複數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親知들이나 혹은 門下生들이 공동으로 성리학적 기준하에서 國風과 鄕風을 정비하는데, 妨害要素로 작용하였던 佛敎 측 普雨를 除去하고자 上疏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그의 文集에 登載된 것으로 보아서 그와 關係가 깊은 것은 分明한 事實이다. 이렇게 후계는 朱子學 정신을 토대로 하여 향풍을 刷新하고 整備하려는 姿勢였으므로, 이것과 어긋나는 현상에 대하여서는 直接 또는 間接的으로 執拗하게 抵抗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서대 金冲의 향풍 정비에 대한 활동을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서대에 대한 資料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매우 稀少하므로, 그에 관한 것을 제대로 解明하기는 상당히 困難하다. 그러나 설명할 자료가 적기는 하지만 이것을 穿鑿한다면, 그에 대한 輪廓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우복 鄭經世가 지은 墓碣銘을 검토하여 鄕風쇄신과 정비에 관계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골라 敍述하여 보고자 한다. 그는 正統 性理學을 공부하였으므로 學問이 醇正하였다고 한다. 이런 순정한 서대의 성리학적 지식은 널리 알려졌으며, 뒤에는 중종 己卯年에 실시한 賢良科에 及第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 뒤 벼슬길로 나갔으나 그의 속마음은 늘 고향 尙州의 儒學的 향풍 정비에 있었는지 곧 歸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고향에 서대 草堂을 지어놓고 自然을 벗삼아 지내는 한편, 鄕土 子弟들의 儒學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異端을 排斥하는데도 힘을 쏟게 되었다. 다음 그의 詩가 참고가 될 것이다.

爲學奇功 只復初…燈下惟親 簡卷舒

老子深情 誰復信 靈川遺意 恐成虛

殷勤更請 諸君勉 道在吾心 不在書

라고 하였다. 이 시의 중심적인 의미는 鄕村의 學生들이 初志 一貫하게 열심히 朱子學 공부만 할 것을 당부하였다. 공연히 노자의 道敎나 기타 異端에 기웃거리지 말고, 영천 신잠이 많은 書堂을 세워 儒學을 獎勵한 뜻을 온전히 지녀, 正道를 닦는데 心血을 기울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서대는 향촌 자제들을 정통성리학으로 修練함으로써, 앞으로 향풍을 정비하는 方向으로 策定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우곡 宋亮의 鄕風刷新과 정비에 대한 活動樣相을 살펴보는 순서가 되겠다. 우곡은 상주 지방의 鄕風을 改革하고 整備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努力을 展開하였는데, 그는 먼저 同志들과 더불어 향약의 일종인 洛社契를 조직하여 향촌을 敎化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鄕廳 등을 중심으로 하여 봄 가을에 鄕飮酒禮를 設行하였으며, 특히 道南書院 건립에 앞장서 향촌사회의 儒風 振作에 정력을 기울였다. 이에 관한 개략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以淑人心 扶世教爲心 乃與同志諸賢 重結洛社契 定行春秋 鄕飮禮 又建五賢院 於洛江之上 使諸生 有所依歸

라고 하였다. 즉 鄕村社會의 人心을 바르고 맑게 하여 세상의 敎化를 扶養하려는 마음에서 동지 여러분들과 함께 낙사계를 중결하고, 춘추로 鄕飮酒禮를 定期的으로 實行하였다. 그리고 또한 五賢院 즉 道南書院을 洛東江 上流에 建立하여 여러 儒生들로 하여금 歸依할 수 있는 場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먼저 낙사계는 鄕約의 일종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 향약은 士林派들이 ≪小學≫에 실려 있는 朱子의 <增損呂氏鄕約>을 母胎로 하여 각 地方 實情에 맞게 調停하여 이를 普及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향약은 鄕契나 鄕規 등으로도 흔히 指稱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대개 鄕射禮나 鄕飮酒禮와 함께 그 지방 士族들을 중심으로 擧行되었다. 우곡도 낙사계를 중심으로 하는 향약 보급운동에 앞장섰는데, 그것은 바로 鄕風을 儒學的으로 쇄신하여 整備하고자 하는데 근본 目的이 있었다. 이에 관한 다음 자료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周禮教典 以鄕三物 教萬民…鄕黨州閭莫不有學 使黎民知所依歸 相勸以進德謹行者 欲講明先王之禮樂也…惟我同志之人立社定約…有補於風俗

위의 자료를 간단히 훑어 본다면, ‘주례의 교전에 鄕村에서는 3가지(육덕・육행・육례)로 온 백성을 가르친다…鄕黨과 주려에는 가르침이 있어서 百姓들로 하여금 돌아가 依支할 곳을 알도록 한다. 서로 勸하여 德으로 나아가 행동을 삼가는 것은 先王의 禮樂을 講明하고자 함이다.…생각컨대 우리 同志들이 入社하여 鄕約을 정하고자 하는 것은…鄕村의 風俗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때 尙州 鄕約은 우곡 혼자 추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상당히 主導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우곡을 위시한 상주 地方 士族들의 鄕射禮나 鄕飮酒禮 및 鄕約 보급 운동은 勳戚 중심의 中央集權化에, 일정한 制約을 가하면서 在地士族들의 鄕村 支配를 强化하려는데 상당한 理由가 있었다. 이러한 운동의 延長線 상에서 당시 尙州 地方을 이끌어 갔던 재지 사족들은 書院 創設에도 積極的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우곡은 主導的인 役割을 遂行하였음을 다음 記錄에서 確認할 수 있겠다.

亮等 謹齋沐裁書…吾東方書院之設 大盛於退陶先生倡起之後…吾州以嶺之大邑 大獻之徵亦不爲不足 宜有一大書院 以爲尊師觀善之所 而獨未之有焉…

위의 자료는 당시 慶尙道 觀察使인 이시발에게 올린 글이다. 이 글을 보면 우곡이 主軸이 되어 慶尙監司 이시발에게 상주에 書院을 建立하여 달라고 呼訴하고 있다. 즉 경상도의 큰 고을인 상주에 서원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 서로 협조하여 빨리 세워 달라는 호소문이다. 이것 이외에도 道南書院 건립과 운영 과정에서 우곡이 主導的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상당히 많다. 여하튼 우곡은 상주의 향촌 사회를 儒學的으로 교화하고 정비하고자, 鄕約을 制定하고 鄕案을 마련하는 한편 鄕射禮나 鄕飮酒禮를 시행하여 敬老孝親 사상을 振作시키는데 앞장 서 나갔다. 뿐만 아니라 도남서원을 창건하는 일에도 선도적으로 나서서, 院規를 제정하는 등 일련의 일에 적극 加擔함으로써 상주 지방을 儒學的으로 敎化하는데 크게 寄與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향풍의 정비에 있어서 석천 金覺의 활동상황을 檢討하여 보기로 하겠다. 석천도 父祖 아래 士族家門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性理學的 雰圍氣에서 成長하였다. 그러므로 향촌사회를 유학으로 教化하여 정비하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석천은 그의 父인 芸亭이 典型的인 儒林으로 進士 자격을 얻은 뒤로는, 禮學을 더욱 실천하여 孝行이 뛰어났으므로 향촌 사람들의 尊敬을 받았다. 이러한 행위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향풍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아버지의 言行은 石川에 그대로 繼承되었다. 그리고 우곡이 서원 창설을 추진할 때나, 鄕契 형태로 향약을 주장할 때 이를 積極的으로 協助했으며, 戰亂이나 凶年 등 危急時에는 자기 族親이나 鄕村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對備策을 세웠다. 이에 관한 다음 자료를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다.

鳴呼我友慟哭…還鄕一紀修復舊契…草刱聖廟 今始更築 取材親往 與我有約…

이라 하였다. 이 제문은 우곡 宋亮이 지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는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그야말로 서로 형제와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주 고을의 鄕風을 改革하고 整備하는데 呼吸이 같아 成果가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낙사계를 收復하여 壬辰倭亂 後의 흐트러진 향촌의 民心을, 儒敎 道德으로 整備하여 향풍을 진작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서원을 창설하는 일에도 서로 협조하였다. 즉 書院 建築에 필요한 材木을 얻기 위하여 몸소 각처를 돌아다니며 직접 구하기도 하고, 각 고을 儒林들에게 通文을 보내어 協助를 구하는데도 앞장설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에 석천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世承德業’하고 ‘家傳孝友’하는 家風이 綿綿이 繼承되었으므로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의 戰亂이나 饑饉 등에 관한 대책은 다음에서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公承學于家…從文獻諸公遊…遇事割然處劇 無倦容 嘗謂歲有荒歉

不可無備 謀諸族黨 出穀若干 爲糶本以須不虞

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을 要約한다면 大略 다음과 같다. ‘석천공의 학문은 家學을 이었다.…문헌을 따라 諸公들과 交遊하였다.…일을 당하면 빈틈없이 이를 처리했으며, 게으름이나 遲延에 容納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歲月엔 凶年들 때가 있으니 對策을 세워 놓아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여러 族黨들이 謀議하여 곡식을 平素에 약간씩 걷우어, 이를 備蓄해 支出할 밑천으로 삼아 豫期치 못한 事態에 對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책은 그의 一族은 물론 이를 擴大하여, 一鄕의 經濟難 解決에도 보탬을 주어, 향촌 안정과 향풍 정비에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忠孝의 具顯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네 분의 상주 지방 선비들은 모두 性理學을 履修한 基本的으로 處士를 志向하던 學者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性理學과 禮學에서 强調하는 德目들을 尊重하여 이것을 具顯하려고 努力하였다. 그러한 덕목 가운데 특히 孝와 忠은 더욱 重視되어 상당한 관심을 쏟았는데, 이제부터는 네 분들의 忠孝의 구현 樣相에 대하여 解明하도록 하겠다.

먼저 후계 金範은 孝의 실천에 매우 積極的이었음을 다음 資料에서 確認할 수 있을 것이다.

其事親 未明而起 盥櫛問安 溫凊之禮 冬夏無愆…

喪祭之儀 一遵家禮…愛君憂國之念 至老不衰 君喪則居外素食 以終卒哭

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을 풀이한다면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새벽에 일어나 洗手한 뒤 머리를 빗고 問安했는데, 방이 따뜻하고 서늘한 지를 알아보는 禮儀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어김이 없었다.…喪祭의 儀禮는 하나같이 朱子家禮를 따랐다.…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늙어서도 衰頹하지 않아서, 임금이 죽으면 밖에서 지내고 蔬食하기를 卒哭祭까지 하였다.’는 내용이다. 위의 짧은 기록에서도 후계의 부모에 대한 孝心과 임금과 國家에 대한 忠誠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倭亂이나 胡亂이 發生하기 前에 生을 마쳤으므로 國家에 대한 忠誠은 크게 浮刻되지 않았지만, 國難의 危機를 당했다면 그의 忠誠은 크게 빛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후계의 임금에 대한 忠誠은 無條件的이지 않았고 君王이 儒學的 입장에서 合理的인 處事를 했을 때 보다 强化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痕迹은 승려인 普雨를 斬首하자는 上疏文 중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니, 앞에서 이미 거론한 上疏文 가운데 다음 句節에서 이를 把握할 수 있을 것이다.

殿下 庛一賊僧 拒一國之公論 恩一凶物 失一國之人心 可斷不斷 竟欲何爲耶

하고 임금에게 당시 物議를 빚고 있는 보우를 斬首하도록, 公論을 빌어 壓迫하고 있다.

다음에는 서대 金冲의 忠孝 구현 形態를 고찰하여 보기로 하자. 그에 관한 資料가 많지 않아 그의 忠孝具顯에 대한 사정을 제대로 밝히기에는 限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稀少한 자료이지만 이를 分析한다면 약간의 可能性은 있어 보인다. 우선 그의 墓碣銘을 살펴보겠는데, 이것은 주지하는 것처럼 우복 鄭經世가 지은 것으로 史料的 價値는 높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보면 서대의 家門도 典型的인 士大夫에 속하는 名門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서대의 性理學的 處地는 학문이 正統으로 醇正하고 尙古的 자세를 지닌 士族이며, 賢良科에 及第한 엘리트였다. 그리고 서대는 술도 평소 마시지 않았으므로 失手도 적어 올곧은 處身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의 處世的인 樣態는 “先進行裝 符禮義 晩年料理 有琴書”라는 우곡의 <題西臺亭> ≪商山誌≫표현과 같이 서대는 禮儀 바르고 義로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늙어서는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神仙처럼 보낸 고결한 선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商山誌≫ 人物條에는 그를 “廉潔簡拙 不能俯仰”이라고 評價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綜合하여 본다면, 서대는 性理學的 倫理를 제대로 遵守하고 이를 實踐하여 나간 사대부의 標本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서대는 家庭에서는 부모님께 孝道를 지극히 하고, 밖에서는 義理를 지키며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임금과 국가에 忠誠을 다했을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서대도 倭亂과 胡亂 이전에 죽었으므로 危機에 對應한 痕迹은 별로 찾아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우곡 宋亮의 忠孝에 대한 구현 樣相을 檢討하여 보도록 하겠다. 우곡의 家門도 先代 이래 士族으로, 특히 그의 祖인 洗輝가 시직으로 있다가 燕山君 暴政에 幻滅을 느껴, 벼슬을 그만 두고 尙州로 寓居하면서 定着하게 되었다. 그의 父는 휘가 璫으로 부호군이며, 妣는 재녕 康氏로 선무랑 琬의 女이다. 이것만 보아도 그는 正統 士族이 分明하다. 출생 후 性理學으로 修練된 가정에서 家學을 익힌 뒤, 자라서는 보다 깊은 儒學知識을 배우고자 당시 名望있는 퇴계 李滉과 대곡 成運을 찾아가 性理學과 禮學을 穿鑿하였다. 따라서 이런 過程을 거친 우곡은 在野 士族으로서 儒學과 禮學에 대한 知識과 敎養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겠다. 儒敎 윤리에서는 家族道德이 가장 尊重되었으며, 가족도덕에 있어서는 孝가 그것의 基礎가 되었다는 主張은 상당히 說得力을 지녔다고 이해된다. 그리하여 우곡은 儒敎道德의 핵심인 孝와 忠의 具顯에 心血을 傾注했던 것으로, 특히 《朱子家禮》실천에 積極的이었다. 이에 관한 다음 資料가 참고가 될 것이다.

先生諱亮…壬年護軍公殁 先生將五十 哭泣居喪之節不以衰

故小變旣葬盧塚三年 食䟽食…觀其禮者 愈益賢之 稱其里曰

孝谷…壬辰有倭寇郡邑皆潰 使長胤以誨 往埋聖廟位版而歸…

鄕邑士大夫謀擧義 推先生爲將 先生辭病不能遂薦 石川金公覺以代之…

라는 내용이다. 이 기록을 풀이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선생의 휘는 량이다.…壬午年에 아버지인 호군공이 죽자 선생은 오십세의 나이에도 애통하게 號哭하였다. 그리고 居喪 등의 節次에 있어서는 주자가례 등 儒敎儀禮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따랐으며, 장례후 3년간 廬墓살이를 하면서 반찬없이 菜蔬로 된 식사만 고집하였다.…그러한 禮節을 지켜본 周邊사람들이 더욱 어질다고 稱頌하면서 마을이름을 孝谷으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壬辰年에 倭賊들이 각 고을을 노략질하여 무너지자, 長胤 이회로 하여금 鄕校에 있는 位牌를 묻고 돌아오게 하였다.…尙州 고을 士大夫들이 義兵을 일으킬 것을 圖謀하여 선생을 大將으로 推戴했으나, 病 때문에 수행할 수 없어 辭讓하고, 석천 金覺을 推薦하여 代身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위의 자료만 분석하여 보더라도 우곡의 忠과 孝에 대한 생각과 구현양상이 大體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行狀 뒷부분 內容을 고찰하여 본다면 性理學과 禮學을 그대로 實踐한 典型的인 선비로 나타난다. 家庭과 鄕村에서는 부모님께 정성껏 孝道하는 동시에 義理와 精誠을 다하는 한편, 國家가 危機에 처할 때는 이를 지키는데 나름대로 忠誠을 바치려고 애쓰는 淸廉하고 부지런한 선비였다. 그러나 그는 正義롭고 志操있는 선비였기에 임금에 대한 無條件的인 忠誠은 拒否하면서, 국가 최고 統治者인 임금의 合理的인 政治를 기대했음을 다음 資料에서 把握할 수 있을 것이다.

…民惟邦本 本固邦寧民之功…王者戒 以民而興以民而亡…

使國家危亂 以至顚覆 是天意 比君於舟 比水罔運 民猶水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記錄을 檢討하여 본다면 그의 政治 哲學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우곡은 國家의 根本은 오직 百姓이라고 보고, 근본이 堅固하게 安定되어야 나라가 便安해지는데, 이것은 百姓들의 功이라고 하였다. 임금은 백성들 때문에 興할 수도 있고 亡할 수도 있다는 事實을 警戒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國家를 危殆롭고 混亂하게 하여 顚覆시키는 것은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은 船舶이고 百姓들은 물로 比喩하면서, 배는 물이 없으면 運航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상은 이미 노자나 맹자 등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우곡 당시에 이런 생각이 다시 擡頭한 것은 時代 狀況과 無關치 않다고 판단된다.

끝으로 석천 金覺의 충효사상 구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석천도 그의 家門이 이름난 士族이었으므로 어릴때부터 性理學的인 倫理의 核心인 孝와 忠의 사상이 넘치는 雰圍氣에서 成長하였다. 여기에 관한 다음 기록이 참고가 될 것이다.

…金彦健 號芸亭 尙節操 有孝行 少時遊太學…子覺進士

能世其業 壬辰初 討倭有功 授龍宮縣監…金彦健 中庚子進士

孝行篤 至爲鄕人所敬…

이라 하였다. 이 內容을 풀이한다면 ‘김언건은 호를 운정이라 하는데, 節操를 崇尙하고 孝行이 있었다. 젊을 때 太學에 다녔다.…그 아들인 覺은 進士로서 능히 아버지의 그러한 業績을 이어나갔다. 壬辰倭亂 初에 倭賊을 討伐하는데 功績이 있어서 龍宮縣監에 除授되었다.…김언건은 庚子年에 進士에 합격했으며, 孝行이 篤實하여 고을 사람들의 尊敬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 짧은 자료에서도 석천의 忠孝思想에 대한 內容과 具顯 형태가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석천의 충효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 사실을 좀 더 具體的으로 把握하여 보고자 한다.

慶尙道 尙州義兵將 司醞署主簿 臣金覺…上言于主上殿下 伏以臣有殉國之心…

自變生之初 固欲紏聚散卒 以謀討賊之擧…擧皆竄伏 莫有與之圖事者

遂奉老母假息林藪…召募鄕人 收拾屯兵…分伏賊路 偵其往來 而邀擊焉…

위의 글은 尙州 義兵將인 김각이 왕에게 올린 글 가운데 일부분이다. 여기에서도 壬辰倭亂 初期의 混亂相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渦中에도 석천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면서, 어렵게 義兵將 役割을 遂行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는 상주 고을 사람들을 義兵으로 모집하여 倭賊들이 出沒하는 곳에 埋伏시켜, 奇襲하는 게릴라전을 수행함으로써 相當한 戰果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功으로 그는 中央政府로부터 6품 벼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도 그는 慶尙道內 각 義兵陣營에 檄文을 보내 倭軍에 대한 協同作戰을 誘導하는 등 國家를 救出하기 위한 忠誠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石川은 가정에서는 어버이에 대한 孝誠이 至極하였고, 밖으로는 國家와 鄕土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努力을 傾注했던 진실한 선비였다.

Ⅳ. 結 語

16세기 末葉을 중심으로 크게 活躍한 尙州 지방의 이름난 선비였던 김후계・김서대・송우곡・김석천 선생 등의 思想과 活動에 대하여 이제까지 考察하여 보았다. 그러나 네분 선생이 남긴 資料의 多寡에 偏差가 甚해 서술상 均衡을 잡기가 어려웠고, 또 네 사람으로 分散되다 보니 集中的인 穿鑿을 하기가 困難하였다. 그러나 主催側이 위의 네先生을 指定하여 硏究하도록 要請하였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따라서 論点이 흐리고 散漫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 考察한 바를 要約 整理를 함으로써 끝을 맺고자 한다.

먼저 네 분 先生의 學問과 思想은 이들이 基本的으로 士林派에 속하는 在地土着士族이었으므로, 학문은 신유학인 性理學을 중심으로 履修하게 되었다. 이수하는 방법은 대개의 경우 어릴 때 家學으로 학문 기초를 닦은 뒤, 書堂이나 精舍 또는 鄕校나 太學에 나가 학문 力量을 提高하거나 혹은 유명한 性理學者를 찾아가 學問의 水準을 높여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선비로서 지녀야 할 思想과 態度를 硏磨했던 것이다. 이들 네 분의 선생들은 性理學을 이수하고 선비사상을 연마하면서, 특히 禮學에도 관심을 기울여 ≪朱子家禮≫와 實踐儒學의 중요한 基準이 되는 ≪小學≫을 크게 注目하였다. 그리고 선비로서 敎養을 넓히고자 山水의 景觀이 秀麗한 곳에 亭子 등을 지어 거문고를 타거나 詩를 지어 서로 酬唱하면서, 友誼를 다지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네분 선생의 活動狀況을 고찰하여 본다면, 우선 이들의 現實的인 處地가 地方의 處士를 指向하고 있었으므로, 鄕村社會의 主導權을 잡는데 有用한 여러 가지 活動을 펼치게 된다. 우선 鄕案을 만들어 그들 사이의 紐帶를 强化하였다. 이런 土臺 위에서 鄕廳과 鄕校의 주도권을 잡아, 鄕約을 만들어 鄕風을 儒敎的으로 整備하고자 努力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國家와 그들의 生活理念이었던 儒學을 보다 擴大하고자 書堂과 書院 建立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네분 선생들의 活動 가운데,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忠誠과 孝道의 具顯이었다. 이 중에서 그들은 孝道에 보다 比重을 두고 부모님 生時나 死後에도 철저하게 이를 實行하여 稱頌이 잦았다. 그리하여 이들이 살았던 周邊에는 孝誠을 기리는 旌門을 흔히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 네분의 선생들은 外敵의 侵略으로 國家나 鄕村이 危機에 處할 때는 기꺼이 나서서 이들을 討伐하는데 앞장 설 姿勢를 堅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無條件的인 忠誠은 困難하다는 立場이었다. 그것은 당시 통치자인 임금이 合理的인 政治를 遂行할 때 忠誠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認識하고 있었다. 이들은 基本的으로 在地士族이었으므로 피지배층인 百姓들을 國家의 根本으로 생각하는 한편 임금은 배, 백성은 물로 보았다. 따라서 물 없이는 배가 運航할 수 없기에 百姓이 더 중요하다는 見解를 갖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생각은 일찍이 先秦시대의 老子나 孟子 등도 지니고 있었지만, 16세기 朝鮮王朝도 對內外的으로 상당히 어려운 處地에 놓였으므로 이런 사상이 다시 더 浮刻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조선중기 尙州 지방 鄕村 社會를 이끌어 나간 네 분 선비들의 思想과 現實에 對應한 活動樣相을 考究하여 보았다. 당시 士禍나 戰亂 등으로 地域 社會도 매우 어려운 形便이었으나, 이들 지역의 先覺者들이 앞장서서 잘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빨리 安定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보다 具體的인 解明이 要求된다고 하겠다.

后溪・西臺・愚谷・石川 先生의 文學精神

李 九 義

(경북대학교 교수)

后溪 金範・西臺 金・愚谷 宋亮・

石川 金覺선생의 文學 精神

경북대학교 교수 李 九 義

<目 次>

Ⅰ. 后溪 金範의 문학 정신

1. 머리말

2. 시정신의 생성 배경

3. 시에 나타난 정신세계

4. 맺음말

Ⅱ. 西臺 金冲의 문학정신

1. 머리말

2. 선비의 멋과 풍류정신(風流精神)

3. 도불원인(道不遠人)의 인문정신

4. 개결(介潔)과 고졸(古拙)의 미학

5. 맺음말

Ⅲ. 愚谷 宋亮의 문학정신

1.머리말

2.우곡(愚谷)의 학문과 교유(交遊)

3.우곡(愚谷)의 부(賦)에 나타난

정신(精神)

4. 맺음말

Ⅳ. 石川 金覺의 문학정신

1.머리말

2.임진왜란과 석천의 행적

3.시에 나타난 정신세계

4. 맺음말

Ⅴ. 맺음말

Ⅰ. 后溪 金範의 문학 정신

1.머리말

김범(金範: 1512-1566)의 자는 덕용(德容), 호가 후계(后溪) 또는 동계(桐溪),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세종 때의 명신(名臣)인 상직(尙直)의 후손으로, 진사과(進士科)에 장원(壯元)하니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극찬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실격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그는 효우(孝友)가 절륜(絶倫)하고, 행의(行誼)가 향려(鄕閭)를 교화(敎化)하였다. 경전(經典)에 밝고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임금께 입대(入對)하여 격군(格軍)의 모범(模範)과 광세(匡世)의 시무(時務)를 아뢰어 배운 것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징사(徵士)로 옥과(玉果) 현감(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순직하니, 명종(明宗)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그 사제문(賜祭文)에, “그대가 설산[玉果]에 있을 땐 내 마음 가볍더니, 그대 가고 나니 내 마음 무겁구나.”라고 애도하였다.

2. 시정신의 생성 배경

후계(后溪)의 삶을 통해서 보면 특별한 점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총명호학(聰明好學)하였다는 점이다. 문집이 있는 분들의 그 문집 서발문(序跋文)・연보(年譜)・행장(行狀) 등을 보면 대부분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총명호학(聰明好學)하였고, 부모와 웃어른들께 공손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고, 평소 근검절약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성품은 온화하여 성을 잘 내지 않았고, 사심(私心)없이 나라에 충성하였다는 것 등이다. 이 몇 가지 요건을 다 만족시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후계는 어떠한가? 먼저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지은 「후계전(后溪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은 태어나서부터 남달리 총명했고, 조금 자라서는 오로지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마침내 속학(俗學)・거업(擧業) 밖에 우리가 힘쓸 곳이 있음을 알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행동은 옛 선현들을 본받아 학문이 꽃피어, 진사과에 일등으로 합격하니, 시험관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두문불출하고 그 뜻을 닦았다. 본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들은 반드시 그 집을 찾아가 예를 올렸다.

고 하고 있다. 이 문장 뒤에 사친(事親)이나 형제간(兄弟間)의 우애(友愛)에 대한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다소 과장일지는 모르지만, 위의 몇 가지 요건을 다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가 총명호학(聰明好學)하였다는 것은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였다는 것으로 입증한다. 다음 글을 보면, 이 사실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5월. 생원과 진사 가운데 경명(經明), 행수(行修), 순정(純正), 근근(勤謹), 노성(老成), 온화(溫和), 등 육행(六行)을 구비한 사람을 이조, 예조, 대신이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조와 예조가 마침내 학생 이항(李恒), 전 참봉 성운(成運), 전 별좌 한수(韓脩), 전 참봉 남언경(南彦經), 전 참봉 임훈(林薰), 진사 김범(金範), 등 여섯 사람으로 천거에 응하였다.…(중략)… 이에 이들을 모두 6품직에 초서(超敍)할 것을 명하고 역마를 타고 상경하게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이조 판서 민기(閔箕)의 말에 따라 육행을 다 갖춘 사람을 경명행수(經明行修)로 고쳐 불렀다.

후계(后溪)는 영천(靈川) 신잠(申潛) 목사(牧使)를 도와 도곡(道谷)・석문(石門)・수양(首陽)・노곡(魯谷)・수선(修善) 등 18개소의 서당을 고을마다 세울 때 향토의 흥학육영을 자임한 대 교육자요, 출천한 효자이기도 하였다. 또 한편 그는 「무제(無題)」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和吉光初與德容 화길(和吉), 광초(光初)와 덕용(德容)은,

共生東國謝天工 함께 동국에 태어나 천공을 사양했네.

若使精甫叅佳會 만약에 정보(精甫)가 가회에 참석했다면,

人指商山四老翁 사람들은 상산의 네 늙은이라 했을 것을.

위 시에서 화길(和吉)은 서대(西臺) 김충(金冲), 광초(光初)는 유진(柳震), 덕용(德容)은 후계(后溪) 김범(金範), 정보(精甫)는 운정(芸亭) 김언건(金彦健: 1511-1570)의 자(字)이다. 당시에 이들을 상산사노(商山四老)로 불렀음을 알려주었다.

이조(吏曹)가 후계(后溪), 일재(一齋) 이항(李恒)・성운(성수침成守琛의 종제)・한수(韓脩), 남언경(南彦經), 임훈(林薰) 등을 전교에 의해 추천하여 6품직을 줄 것을 청하다 라는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사 김범(金範)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상주(尙州)에 살았습니다. 문명이 있어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성품이 소탈하여 가업을 힘쓰지 않고 너무도 인자하고 자상하여 노복들에게 매를 가하지 않은 재주와 품행이 있습니다.

3. 시에 나타난 정신세계

1) 내면 수양을 통한 참된 선비 정신

후계(后溪)의 인간미는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지은 「후계전(后溪傳)」에 보인다.

아! 공의 학문의 순수함과 효제(孝悌)의 독실함, 그 포부의 위대함은 선현들을 계승하여 후세에 드리울만하지만, 산림에 은거하여 그 만분의 일도 베풀지 못 하였다. 그러나 덕을 두터이 베풀어서 후손들을 위하여 남겨놓은 계책이 넉넉하였다. 그의 두 아들이 학문과 행실이 고고하여 모두 당대의 훌륭한 선비가 되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라 칭찬하게 하였다. 하늘이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그 후세를 빛나게 하는 것이 이처럼 변함이 없다.

후계(后溪)는 당대에도 인정받는 학자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같이 임금을 대하여 자신의 정견을 개진하였고, 상주 지방의 인물은 물론 다른 지역 출신의 선비도 후계에게 배운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각재(覺齋) 하항(河沆: 1538-1590)은 후계와 남명에게 배우기도 하였다. ?각재집?을 보면, “후계(后溪) 김범(金範)에게 나아가 수학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서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서(性理書)를 배우다.”라는 기록이 있다.

창석 이준은 ?후계전?에서, “공이 상소한 말에, ‘저는 본디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왕명을 받았습니다. 애석한 것은 명기(名器)이고 가벼이 해서 안 되는 것은 이수(異數)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간송정 주인 늙은이 참봉 채유부에게 줌(贈澗松亭主翁蔡叅奉有孚)」

官卑身易退 관직이 낮으니 물러나기 쉬워서,

學稼效樊遅 번지를 본받아 농사를 짓는다네.

偶得開庭地 우연히 뜰 밭 한 모퉁이 개간해,

橫遮種菊籬 국화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네.

當軒風有信 헌함에 기대니 바람 소식전하고,

窺戶月如期 눈틈으로 보니 달빛 약속 한 듯.

妙趣應難盡 오묘한 흥취는 다하기 어렵나니,

空題幾首詩 부질없이 몇 수의 시를 짓는다네.

「어떤 사람의 시에 차운하여(次或人韻)」

農談欵欵話隣翁 이웃집 늙은이와 농사 이야기 정다워,

濁酒寧辭榼底空 탁주 사양하지 않아 술동이 다 비었네.

一日睽離君莫恨 어느 날 떠나도 그대 안타까워 마오,

儘敎吟詠坐詩窮 시 짓는 법 가르쳐줘도 시가 막히니.

夜雨前溪水已生 밤비에 앞 내에 물이 흘러내리고,

曉來雷響耳邊盈 새벽녘에 우렛소리 귓전을 울리네.

淸詩寫盡田家興 맑은 시엔 농촌의 흥취 다 읊었으나,

閣茟慙無一句成 붓 놓으니 한구절도 이루지 못하네.

「아버님 담암공의 ‘우연히 지음’ 시에 삼가 차운함(敬次家君簟巖偶題韻)」

當日春風到石頭 봄바람 불어와 돌머리에 이르던 날,

頻傾盃酒興轉奇 몇 잔 술 마시니 주흥이 무르익었네.

飜思五十年間事 문득 오십 년 동안의 일을 생각하니,

不耐臨風憶舊時 봄바람 맞으며 옛날 기억 못하겠네.

三十兒扶六卜親 서른 살 아들 예순 아버지 부축하여,

探春行樂亦爲奇 상춘하는 즐거움 또한 기이하다네.

今年擬種蟠桃核 올해는 반도(蟠桃) 씨를 심으리니,

千歲當看結子時 오래 사시어 열매 맺는 것 보시리라.

「상소문을 가지고 가는 유생들을 전송하며(送陪䟽儒生)」 乙丑秋

斬焉寒鏪凜雪霜 살을 에는 찬바람 눈서리보다 모질어,

書生直氣貫靑蒼 서생의 곧은 기질 하늘에 다달았다네.

雷霆勇進無難色 우레처럼 용감해 어려운 기색 없으니,

應感天心第一章 임금님은 마땅히 이 한 장에 감응하리.

「연악서당에 붙임(題淵嶽書堂)」이라는 시의 자서(自序)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옛날에 김화길 선생과 동년 노공서와 술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노니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었었다. 지금 와서 보니 경관과 흥취가 서로 맞아 떨어져, 취해서 율시 한 수를 지어 동지들에게 보인다.”

身是重來眼是初 몸은 거듭 왔어도 눈은 새롭기만 하니,

古人詩語不欺予 옛 사람 시어(詩語)는 나를 속이지 않네.

溪淸偏愛朝雲捲 개울은 맑기만 한데 아침 구름은 걷히고,

山近還憐夕氣舒 산이 가까우니 일찍 저녁 기운 찾아오네.

宇宙藏中胷悔濶 우주에 감춘 몸 가슴은 바다 같이 넓고,

塵泥消了玉淵虛 티끌 사라진 마음은 빈 듯이 깨끗하다네.

靈川當日慇懃意 신영천(申靈川) 창건랄 때의 은근한 뜻은,

看取高堂額字書 높은 집에 붙어 있는 현판으로도 알만하네.

라 읊어, 이 시에 차운(次韻)한 이로서 김충(金冲), 김홍민(金弘敏)・이준(李埈)・강복성(康復誠)・김치(金緻)・정호선(丁好善) 등 당대의 상산 선비는 물론 상주목사를 비롯한 많은 선비가 후대에까지 차운시(次韻詩)를 남겼다. 후계(后溪)는 부(賦)에 능하여 「단사(丹砂)」・「서리(黍離)」・「존양(存養)」・「우주일북창(宇宙一北窓)」등을 남기었는데, 「그림자(影)」 시를 소개한다.

「차가운 강 위에서 홀로 눈 맞으며 낚시함(獨釣寒江雪)」

六出花飄歲已䦨 눈발이 흩날리니 한 해 이미 저물어가, 飄一作飛

蒼茫皓色浮江干 아득히 흰색이 강위에 자욱이 떠 나네.

滿目瓊瑶碧一痕 눈 가득 맑은 구슬 푸른 하늘 흩날리고,

烟沉鳥絶迷遠山 연기 자욱하고 새 날지 않아 먼 산 아득하네.

漁翁曉起一肩高 늙은 어부 일찍 일어나 한쪽 어께 추켜올려,

孤舟移棹臨前灘 홀로 노를 저어 앞 여울로 나아가네.

寒簑半祍笠半斜 추운 강에서 사립(簑笠)을 비껴쓰고,

風絲裊裊垂長竿 낚싯대 드리우니 낚싯줄은 바람에 간들간들.

無心手把曳復投 사심 없이 손에 잡고 끓었다간 다시 던지니,

玉屑隨竹篩淸瀾 옥가루 부서지듯 낚싯대 따라 맑은 물결 일으켜.

獨立磯頭伴鷗盟 홀로 낚시터에 서서 백구와 벗 삼기로 맹약하니,

不覺江風吹面寒 차가운 강바람 불어와 얼굴 스치는 것도 모르네.

自將身世盡中在 내 스스로 신세를 모두 이 가운데 두었나니.

忘機慣得漁簑閑 기심(機心)을 잊은데 익숙하니 사립옹이 한가로워,

幽閑物色領瀟泗 한적한 물색(物色)이 소쇄(瀟灑)함을 자아내고,

眞趣高情輸一般 참된 맛, 고아(高雅)한 정취 한결같이 실려오네.

寒江得雪雪得翁 추운 강은 눈을 얻고, 눈은 늙은 어부를 얻었는데,

欲語妙意知者難 오묘한 뜻 말하려 하나 지음(知音) 얻기 어려워라.

莫敎輕綃摹此景 붓 가벼이 놀려 이 경치 베끼게 하지 말지니,

恐與人間凡眼看 인간 세상의 범인들 눈으로 볼까 두려웁다네.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은 당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 )의 「강설(江雪)」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충일을 일궈가는 평담한 마음이 시에 녹아 있다. 바로 위기지학에 힘쓰며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참된 선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풍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며 소담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자세는 그 근원을 ?시경(詩經)?에서 찾을 수 있다. 「위풍(衛風)」 「고반(考槃)」장 3장 가운데 제1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考槃在澗 은거하는 곳이 시냇가에 있으니,

碩人之寬 큰 선비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獨寐寤言 홀로 자고 홀로 깨어 말하나,

永矢不諼 같이 이 즐거움 잊이 않으리라.

「모시서(毛詩序)」에는, 위나라 장공이 선왕의 덕업을 계승하지 못하여 어진 이로 하여금 물러나 곤궁하게 살도록 했기 때문에 장공을 풍자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였다. 선비들이 수양하는 것은 본디 자기 수양을 기반으로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접고 은거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늙어 현실에 참여할 수 없거나, 아니면 현실이 그를 수용할 자세가 되지 않았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이다.

기심(機心)은 세상의 득실과 이해를 계교하는 마음이다. ?열자?「황제편」을 보면, “옛날에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와 놀았는데, 갈매기들이 그를 의심하지 않고 함께 놀았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갈매기 한 마리를 잡아 오라고 하여 바닷가에 나갔더니 갈매기가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에게 기심이 생겨 멀리 한 것이다.”

「차 끓는 소리(瓶笙)」

阮生身世太顚狂 완적의 신세(身世) 미친 사람 같아서,

竹林一飮空千觴 대밭에서 한 번 마시면 천 잔을 비웠네.

寧随鄭泉作酒器 차라리 정천을 따라 술 단지를 만들어,

魂入壷中遊醉鄕 영혼이 술 병속에 들어 취향에 노니네.

三生結習未全除 삼생에 맺은 습관 다 없애지 못 했으니,

愛酒不解辭探湯 탐탕을 사양해도 술사랑은 놓지 않네.

吟啸不廢水火間 보글보글 끓는 소리 수화간에도 안 그쳐,

63.水火旣濟

自然之音諧短長 자연의 음정이 장단(長短)에 맞는다네.

如無如有斷復連 없는 듯 있는 듯 끊어졌다 다시 잇고,

忽遠忽近還迷方 먼 듯 가까운 듯 어디서 들려오는지.

盈盈缕缕久乃已 가득 차나 가느다라나 오래가선 그쳐,

欲尋曲調難宮啇 궁상각치우 가락 알려 해도 알기 어려워.

謾洩前身傲世懷 앞에서 세상 우습게 본다고 뇌까리나,

似恨不遭知峩洋 아양곡을 알아줄 이 없어 안타까운 듯.

誰識䄅筝是響泉 그 누가 알리, 아쟁소리 샘물소리인 것,

杳杳微音驚滿堂 아득히 들리는 소리 온 집안 놀라게 해.

聞來誤疑自雲霄 들으니 저 구름 낀 하늘에서 내려 온 듯,

側耳不覺聲在傍 귀 기울여도 곁에 들리는 소리 못 느껴.

東坡老仙非惡客 시선 소동파(蘇東坡)는 악객이 아니니,

夙世荷鍤追高陽 일찍 삽을 메고 고양(高陽)을 좇았다네.

耳醒餘䪨獨聴瑩 귀 틔이니 여운(餘韻)이 밝게 들리는데,

撚髭和以瓊琚章 수염 쓰다듬으며 경거(瓊琚)장에 화답해.

解事終敎名以笙 다 짓고 마침내 병생(甁笙)이라 이름붙여,

却伴騷客挑詩腸 시인들로 하여금 시심을 북돋우게 하네.

위 시는 후계가 진사 회시 때 지은 것이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김범이 진사 회시에 나아가 지은 「병생(甁笙)」시에, “차라리 정천을 따라 술 단지를 만들 걸(寧隨鄭泉作酒器)”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험관이 그 뜻을 몰라 남몰래 모재 김안국에게 편지를 보내 그 뜻을 묻고는 마침내 김범을 장원으로 발탁하였다. ‘정천’의 이야기는 ?운부군옥?이나 ?사문유취?에 실려 있으나 시험관이 그것을 몰랐다. 이 때문에 군자는 많은 것을 보고 잘 기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2) 마음의 화평(和平)과 수덕(修德) 입언(立言)

후계(后溪) 역시 석천(石川)과 같이 심성수양(心性修養)을 중시하였다. 그가 남명 조식과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임금이 고금 치란에 대해서 묻자 후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문을 강구하여 이치를 밝히고 덕성을 함양해나간다면 마음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화평해져야만 조정이 공경하고 겸양하여 정치와 교화가 널리 미치게 될 것입니다.

후계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군주가 선행해야 할 일은 학문을 강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학문을 강구하여 이치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덕성을 함양해간다면 마음이 화평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그의 교육관, 문학관이기도 하다. 학문의 목적이 인격수양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는 말과 통한다. 진정한 선비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일치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이 지행합일 정신은 신분과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안자(鴈字)」

太乙真人玉皇吏 태을진인은 옥황상제의 신하인데,

秋風忽起凌雲思 가을 바람부니 「능운부」생각나네.

翩翩直上九萬里 훨훨 날아올라 구만리 하늘가에서,

囬首人間杳一視 머리 돌려 인간세상을 한번 보네.

蟾宮借得老兔毫 섬궁(蟾宮)에서 늙은 토끼 털 빌려,

却向碧落書玉字 하늘 향해 ‘옥(玉)’자를 써 내렸네.

寒雲一片作素牋 찬 구름 한 조각 흰 종이 되어, (寒一作閑)

謾耀文章破天秘 빛나는 문장으로 하늘 비밀 깨뜨려.

行行畫畫自不亂 내리긋는 획마다 어지럽지 않으니,

點點分明看一二 점마다 분명해 하나하나 다 보이네.

鸞翔鳳翥若有神 난봉이 나니 마치 신선이 있는 듯,

字體縱橫渾相類 글자체 종횡으로 서로 잘 어울리네.

初疑鳥跡印数行 처음엔 개발새발 몇 줄 쓴 줄 알았는데,

竟非蝌蚪又非隸 뒤에 가니 과두문자도 예서도 아니네.

㡼公安得衒家鷄 예공이 어찌 현가의 닭을 얻었으리,

子雲悵望空長喟 양자운이 쓸쓸히 하늘 향해 탄식하네.

騷人夢罷夜無眠 시인이 꿈에 깨어 잠이 오지 않아서,

對月看天心暗記 달밤에 하늘 보며 마음속으로 암기하네.

少婦空閨獨起坐 빈 방의 젊은 아낙 홀로 일어나 앉아서,

欲草邊書憑一寄 변방에 계신 서방님께 편지 한 통 쓰려네.

雲移風動忽披翻 구름과 바람이 일어 갑자기 낚아채가니,

趂曉欲繞瀟湘墜 새벽이 되면 소상강 주위에 떨어지리라.

看來莫謂是天書 보고는 하늘이 보낸 편지라 말하지 마오,

恐敎吾皇侈心意 옥황상제 마음 사치롭게 할까 염려스러워.

願向書生座隅落 바라건대 서생의 앉은 자리 옆에 떨어뜨려,

拊鳳鵷班期作贄 봉원(鳳鵷) 짝하여 폐백을 드리리.

3)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존재론

후계는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의 이치에 대해서 읊고 있는데, 그의 「그림자(影)」라는 시를 보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먼저 그 내용을 들어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萬籟俱沉群動息 온갖 소리 잠기어 모두 다 조용한데,

蕩雲四散明蟾蜍 사방으로 구름 흩고 밝은 달 오르네.

散步中庭忽囬頭 뜰 안을 어슬렁거리며 고개 돌려보니,

傍有一人同蹰躇 곁에 한 사람이 머뭇거리고 서 있네.

招之不應推不去 불러도 대답 없고 밀어도 가지 않고,

行無轍迹居無廬 가도 자취 없고 머무는 집도 없다네.

彼何人也我何人 저 사람은 뉘이며 나 또한 누구인가,

形容與我巧相如 모습이야 교묘히 나를 닮았건만,

不自我先不自後 내 먼저도 아니요, 내 뒤도 아닐세.

一動一靜怕随余 한번 움직이고 쉼도 꼭 나를 따라서,

瞻之在前忽在後 쳐다보니 앞서더니 문득 뒤에 있네.

速則速兮徐則徐 빠르면 빨리, 느리게 하면 또 느리게

具體而微口不語 형체는 갖추어도 입 없어 말 못하고,

不違如愚猶起予 어리석은 듯 어김없이 나를 일깨우네.

山中沉晦自隱顕 산속 으슥한 데도 절로 숨기고 드러내며,

行裝有道非毁譽 행장은 법도 있고 훼예할 줄 모르네.

况乃交遊不擇人 하물며 사겨 놀되 사람을 가리지 않고,

本無貴賤寧親踈 본디 귀천이 없는데 어찌 친소가 있으랴.

三太白向玉兎舞 삼태백은 달을 향해 춤을 추고,

百東坡在憑亮居 백동파에는 냉이가 산다네.

世間誰似我與君 세상에 어느 누가 나와 그대 같으랴,

偕老偕亾惟有渠 늙음도 망함도 오직 그대와 나누네.

俄然月落不知處 이윽고 달이 지나 그 간 곳을 몰라,

此身獨立庭之除 이 몸 홀로 뜰 가에 서 있다네.

虛無寂滅竟誰是 허무적멸이란 이 누구의 뜻이던가,

怳如春夢同蘧蘧 하물며 호접몽에도 분명함이 있는걸.

是知無形自有形 무형 속에 유형이 있음을 알지니,

異哉此理誰知歟 기이토다, 이 도리를 누가 알련가.

人間何者非夢幻 세상사 어느 것이 몽환이 아니랴,

萬衆從來都是虛 만상은 모두가 빈 데서 오는 것을.

그림자는 본체(本體)가 아닌 허상이다. 허상이라 하여 도가에서 말한 허무(虛無)는 아니다. 무형이 유형으로부터 온 것을 알았다고 하였으니, 불가의 허무적멸과는 만상의 존재 의미가 다름을 시로써 읊었다. 이는 곧 무극이 태극이라는 주렴계(周濂溪)의 시를 설리시(說理詩)로 형상화한 것이다. 주렴계는 무극(無極)이 곧 태극(太極)이라 하였다. 무극은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실체가 너무나 커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극히 큰 것은 끝이 없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태극설을 후계가 묘사하고 있다.

후계가 살았을 당시에는 성리학이 가장 왕성하던 때였다. 이러한 성리학에 대한 견해를 주기론이니 주리론이니 기호학파니 영남학파니 하여 후대 학자들이 분류하기도 한다. 위 시를 보면, 후계는 기(氣)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본디 귀천이 없는데, 어찌 친소(親疎)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는 그 자신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귀하나 천하나 다 같이 사람이다. 귀한 사람만이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자아 자신이 만인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친하고 성근 차이가 있겠는가? 자아의 세계관은 바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이다. 이는 그 자신이 소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거거(蘧蘧)는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을 가지고 나비를 표현한 것이다. 장자의 이름이 주(周)이다. ?장자(莊子)?를 보면, “옛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인지라 스스로 즐거워하며 유쾌할 뿐 자신이 장주인 줄 몰랐다. 갑자기 꿈을 깨고 보니, 자신이 분명 장주였다. 장주의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의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하였다.

4)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통한 도학의 실천

후계(后溪)의 「존양(存養)」이라는 부(賦)를 보면, 그가 수신(修身)과 도학의 기본이 존심양성(存心養性)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그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蹇吾法夫前修 우리 법도 전수(前修)가 부족하여,

求蹈道之良規 도를 행하는 좋은 방법 찾는다네.

恒志存於自修 항상 자수(自修)에 뜻을 두고

罔晝夜而孜孜 밤낮을 잊고 부지런히 힘쓰네.

顧方寸之天賦 천부적인 마음을 돌아보며,

悟存養之爲切 존양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네.

惟在我之至理 나에 존재하는 지극한 이치는,

歛虛靈而內得 허령지각하여 마음속에 깨닫는 것.

然物化而柱神 그러나 물화하여 정신을 지탱하고,

漸遁初而喪眞 점차 초심을 벗어나 진실을 해치네.

冝用功於靜時 마땅히 정(靜)할 때 힘써 노력하고,

愓敬畏而日新 조심하고 두려워해서 나날이 새로워 져.

自沉潛而涵養 몸소 침잠해서 그 뜻을 함양하고,

恒顧諟而戒飭 항상 마음 돌이켜 경계하고 조심하네.

愼思慮於不見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신중히 생각하고,

節情欲於未發 미발(未發)한 상태에서 정욕을 절제해.

念必在於惺惺 항상 성성(惺惺)한 곳에 생각을 두고,

德要成於慥慥 덕은 독실한 데서 이루길 바란다네.

存勿失而養勿餒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잃지 말아서,

得至道之深造 지도(至道)가 깊이 나아감을 터득하리.

心欲安而理欲明 마음이 안정돼야 이치가 밝아지니,

詎一時之怠忽 어찌 잠시라도 게을리 할 수 있으리.

懼朝晝之牿亡 밤낮으로 곡망(梏亡)할까 두려워하네.

戒安肆於造次 조차간에도 안사를 경계하며,

秉莊敬於瞬息 순식간에도 경장을 잘 지켜.

對屋漏而無愧 방구석에도 부끄러움 없고,

居燕安而不悖 연안에 거처해도 폐하지 않네.

信厥本之罔害 그 근본의 해 없음을 믿고,

非遂物而馳外 외물 따라 밖으로 내닫지 않아.

旣盡功於存養 이미 존양에 공을 다하였으니,

內眞靜而積實 내면이 진정하여 실체를 쌓았네.

淡天君之泰然 담담하여 마음이 태연하고,

藹榮華之外發 영화가 밖으로 드러남을 애하네.

寔君子之盡性 이것이 군자의 진성(盡性)이니,

全降衷之懿德 강충(降衷)의 의덕(懿德)을 온전히 하네.

苟不存而致養 만약 존심양성을 하지 않는다면,

類揠苗而助長 알묘조장(揠苗助長)하는 것과 같다네.

何彼昏之汨喪 저 혼몽한 자들이 골상(汨喪)함이여,

昧在已之天理 자기한데 천리가 있는 것 모른다네.

放一心而不求 한 마음 놓아서 찾지 않는다면,

豈存養之可企 어찌 존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伊余志之好修 그것은 내가 닦기를 좋아하는 것,

思不悖其所學 그 배운 것을 거스르지 않으려 하네.

踐斯言而服膺 이 말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면,

矢顚沛而勿失 전패(顚沛)하여도 잃지 않으리라.

聊書紳而自詔 큰 띠에다 써 스스로 알리니,

庻存敬而兢愓 자못 경(敬)을 지켜 조심하여야.

箴曰 잠에 이르기를,

惟天賦人 오직 사람에게 천부적인 것,

理具於心 이치가 마음속에 갖추어졌네.

孰豐孰嗇 무엇이 풍족하며 뭐가 부족한가,

無古無今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네.

罔存罔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이 없다면,

乃滅初存 처음 보존한 마음 없어지니,

斯夫豈遠歟 이 존양을 어찌 멀리하리요.

靜以專內 정(靜)으로 마음 전일하고,

敬以直之 경(敬)으로 마음을 바루네.

卓彼先覺 저기 우뚝한 선각자들이여,

是我師兮 이분들이 나의 스승이라네.

존심양성은 내면의 수양방법이다. ?주역?을 보면,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면을 바르게 한다.” 하였는데, 이 구절이 도학(道學) 공부의 가장 중요한 요결이 되었다. 존심양성(存心養性)은 성리학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존양을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경계할 안사(安肆)이다. ?예기?를 보면,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락하고 방사(放肆)하면 날로 구차해진다.”는 말이 있다.

내면의 수양만을 강조하면 이것은 이학(理學)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의 수양, 즉 존심양성을 겉으로 드러내 행동으로 옮겼을 때 이것이 도학(道學)이 된다. 도학은 실천이 우선이다. 후계(后溪)는 이를 바탕으로 한 도학자였다.

맹자(孟子)가 우산장(牛山章)에서, 사람은 누구나 인의(仁義)의 양심(良心)이 있음을 설명하면서 비유한 말이다. 제(齊)나라 동쪽에 있는 우산에는 원래 나무가 많았는데 큰 도읍 곁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무를 자꾸 베어 내고 그나마 밤사이에 돋아난 싹을 또 가축들이 뜯어 먹으니 결국은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의의 양심도 마찬가지여서 자꾸 어긋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양심이 상하게 되지만 밤사이에는 기욕(嗜慾)이 가라앉고 양심이 다시 자라나게 된다. 그러나 낮에 다시 어긋나는 행위를 하여 자꾸 쌓이게 되면 결국은 우산의 나무와 같이 양심이 모두 없어져 금수와 같게 된다. 그렇지만 금수에 가깝게 된 것이 사람의 본 모습은 아니다.

5) 우주와 교합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

「宇宙一北窓」

余生世之曠達 내가 세상 살아가는 것이 광달하여,

隣太初之眞朴 태초의 진실하고 소박한 이와 이웃해.

倚幽戶而興感 으슥한 문에 기대니 감정이 일어나,

竊托慕於靖節 외람되이 도연명을 사모한다네.

属僞時之紛囂 거짓 세상의 어지러운 때 맞아

孑孤醒於群醉 여럿 취한 중에 나 홀로 깨었네.

寄一身於田園 이 한 몸을 자연 속에 맡기고,

任逍遙而肆志 조용히 지내면서 내 뜻을 펴.

籠宇宙於北窓 북창에서 우주를 집으로 삼고,

玩萬理而倘佯 만 리를 날아 어슬렁 거린다네.

風颼颼而吹枕 바람은 베갯머리에 불어오고,

月姸姸而流光 고운 달빛은 사방을 밝게 비추네.

飮閑中之幽懷 고요한 가운덴 유회(幽懷)를 품고,

蔵醉裡之浩思 취한 중에는 호연한 기상 숨겼네.

覷事物之建化 사물이 건화(建化)하는 것을 보고,

甘日適而熙熙 날이 가서 빛나는 것이 달가워.

迫古往而今來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이르도록,

曠天地與四極 천지와 사방을 밝히었다네.

寓理氣於浩漭 호망한 우주에서 이기를 만나니,

混萬像於坱北 앙북(坱北)에서 만상이 뒤섞이네.

豈意蕭然之一窓 어찌 쓸쓸한 북창만을 생각하리,

盡輸入於胷臆 모두가 마음속에 들어오나니.

擬羲皇之淳風 복희와 황제 때의 좋은 풍속 생각나,

興陶陶而容與 흥이 도도하면서도 한가로우니,

彼時人兮倀倀 그 때의 사람들이여 창창(倀倀)하도다.

巳獨知兮誰語 자기 혼자 앎이여 누구에게 말할까,

欣五柳之春和 다섯 그루 버드나무가 봄에 화창하네.

樂三逕之秋深 사잇길에 가을이 깊은 것을 즐기나니,

擧匏樽而怡顔 표주박 술잔을 들고 기뻐한다네.

撫桐絲而長吟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길게 읊조리니,

鳥知還兮雲出峀 새는 깃들 줄 알고 구름은 산위로 나오네.

自無心於天地 스스로 천지에는 무심한지라,

納遐情於萬宇 우주에 세상을 잊은 뜻을 들이네.

契幽心於深意 깊은 뜻에 유심(幽心)을 맺나니,

處寂寥而俯仰 고요한 데 처하여 지낸다네.

觀窈窕之天化 아름다운 자연의 변화를 살피나니,

室生白兮心天地 빈 방에 흰빛이 생김이여 마음은 천지라네.

肯外累之來舍 외루의 내사를 수긍하나니,

窓引風兮闔闢 창문이 바람에 끌려 닫히고 열린다네.

悟乾坤之在此 하늘과 땅이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迹已同於無懷 후회없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네.

藹浩然於一己 내 한 몸에 호연한 기상이 애애(藹藹)하나니,

審容膝之易安 편안하기 쉬운 작은 집을 찾는다네.

復何羨乎厦屋 다시 무슨 큰 집을 부러워하리,.

偉斯人之眞逸 위대하다 이 사람의 참된 즐거움.

遠塵想而脫落 티끌 생각 멀리하고 떨쳐버렸나니,

遐懷歸於聖門 아득히 성문(聖門)에 귀의할 생각.

齒點也之皷瑟 증점(曾點)의 거문고 연주에 맞춰.

應取賞於吾與 마땅히 내 그와 같이 감상할 지니,

聊詠歌而得得 애오라지 노래 부르며 의기양양하네.

謇閑淡之至極 아! 한담(閑淡)한 맛이 지극함이여,

固不周於時俗 참으로 시속에 따르지 않는다네.

後千載維己獨知 천년 뒤에 오직 나만 홀로 아나니,

喜此心之先獲 이 마음을 먼저 얻은 것이 기뻐.

歷萬古惟此宇宙 만년이 지나도 오직 이 우주가,

恨北窓之一歸 북창에 한 번 돌아가는 것이 애달파.

儻九原之可作 만약, 구원(九原)을 지을 줄 안다면,

微先生兮吾誰依 선생이 아니면 내 누굴 의지하리.

북창(北窓)은 진(晉)나라 도연명이 여름에 북창 아래 누워 있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복희씨 시대의 사람이라 하였다 한다. 이백의 「장난삼아 정율양에게 지어줌(戱贈鄭溧陽)」」이란 시에 “맑은 바람이 부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복희씨 시대 사람이라 하네.[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이라 하였다.

허실생백(虛室生白)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편에 “저 뚫린 벽을 보면 빈방 안에 흰빛이 있고, 거기에는 길한 징조가 깃들어 있다.[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사람의 정신이 맑아 욕심이 없으면 도심(道心)이 절로 생긴다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백련암(白蓮菴)의 경관이 맑고 깨끗함을 말한 것이다.

일심천지치중화(一心天地致中和)는 성정(性情)의 덕(德)으로, 마음이 정(靜)했을 때 존양(存養) 공부를 잘하는 것을 중(中), 마음이 동(動)했을 때 성찰(省察) 공부를 잘하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중화를 극진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생육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발라지고 내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해진다.” 하였다.

구원(九原)은 구중(九重)의 땅 밑이라는 뜻으로, 구천지하(九天地下)・구경(九京)・구천(九天)・황천(黃泉) 등과 같은 말이다. 원래 전국 시대(戰國時代) 진(晉) 나라 경대부의 묘지인데, 묘지나 저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6) 만민화합(萬民和合)의 대동(大同)사상

「訟」

惟皇天生民 생각하건대, 하늘이 뭇 백성을 낳았나니,

有欲蘊七情而內萌칠정(七情)이 쌓여 마음속에서 싹트려고 하네.

矧世降而滋僞 세대가 내려갈수록 속임이 더욱 많나니,

紛巧詐之交生 교묘한 속임수가 서로 뒤섞여 생겨났네.

驗流俗之澆漓 갈수록 경박해 가는 풍속을 경험했나니,

嘆玆訟之所由 이 ‘송(訟)’부를 짓는 까닭이 안타까워.

原神聖之卦易 본디는 신성한 ?주역?의 괘 이름으로,

爲後世而除憂 후세를 위해서 근심 없애는 것이라네.

何天水之違行 어찌 천수 송괘(訟卦)가 어긋나가는가,

致人心之日偸 사람들의 마음이 나날이 구차하기 때문.

有終朝之三裭 반대(鞶帶)를 받아도 하루아침에 세 번 뺏겨,

無九五之明德 임금이 밝은 덕이 없기 때문이라네.

人懷私而構念 사람들은 사사로운 생각에 잠기어서,

競興心而逞慾 다투어 마음을 일으켜 욕심을 굳힌다네.

紛發言之險膚 왁자지껄 말하는 것이 험하고 얕으니,

憑不厭乎爭奪 서로 빼앗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네.

非文巧而冒是 문교(文巧)하여 모시(冒是)함이 아닌가,

曲餙詐而侵直 완곡히 감사하게 꾸며 곧음을 침범하네.

亂群烏之雌雄 뭇 까마귀들의 암수 구별하기가 어려워,

眩鼠雀之牙角 어지러워라, 쥐와 참새의 어금니와 뿔이.

較利害於刀錐 저울 달고 주판 굴려 작은 이익 다투니,

辨眞僞於毫髮 털만큼의 차이에서 진위를 분별하네.

爭大小之有異 크고 작은 것이 차이 남을 다투나니,

情彼此之不一 실정이 피차(彼此) 한결같지 않다네.

縱兄弟李相鬩 함부로 형제들이 서로 다투는데,

况親戚之足恤 하물며 친척들을 어여삐 여기겠는가.

有興端於言語 송사(訟事)의 단서는 말에서 생기고,

亦萠猜於錢貨 시샘은 또한 금전에서 싹이 튼다네.

囙細嫌而成釁 조그마한 불평으로 큰 틈이 벌어지니,

致積微而爲大 자잘한 것이 쌓여서 크게 된다네.

始睚眦而狺然 처음에는 눈 흘기며 으르릉거리지만,

竟露刃而相賊 마침내 칼을 휘두르며 서로 해친다네.

或售詐而盡辭 간혹 속임수를 써서 말을 다하고,

或抱寃而不白 원통한 마음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네.

閙爭舌於官府 관부에서 혀놀려 서로 시끄럽게 다투지만,

積文牒於几閣 공문서는 책상 위에다 수북 쌓아놓았다네.

前才斷而後續 앞에서 겨우 끊었지만 뒤에 다시 잇나니,

憫汚俗之誰革 안타깝구나, 더러운 세상을 누가 바꾸리.

然民性之好惡 그러나 백성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豈無訟之無本 어찌 송사(訟事)의 근본이 없지 않겠는가.

苟在上之自明 만약 윗사람(임금)이 스스로 총명하다면,

固民情之莫遁 참으로 민심은 나쁘게 돌지 않으리라.

共惇義而尙行 다 같이 의리를 돈독히 해서 행동한다면,

孰起嫌而行詐 그 누가 혐의(嫌疑)를 일으켜 속이겠는가.

想平章於堯德 생각하니, 요 임금은 덕으로 백성을 고루 밝혀,

美質成於文化 아름다운 바탕이 문화를 이루었다네.

信無爲而敷敎 억지로 하지 않고도 가르침을 폈나니,

人效感而振作 사람들은 교화를 입어 진작(振作)하였네.

噫風化之漸衰 아! 풍속과 교화가 점점 쇠퇴하나니,

憤時俗之多僻 시속(時俗)이 많이 편벽된 것이 안타깝네.

旣虛實之未析 이미 허(許)와 실(實)을 나누지 않았는데,

矧淸源之能得 하물며 맑은 근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紛積積而搜搜 어지러이 쌓고 쌓아서 찾고 또 찾아가네.

競餙情而懷孽 다투어 실정을 꾸며 원한을 품었나니,

哀民心之汨流 민심이 나날이 골류(汨流)함을 슬퍼하네.

亦未袪於盛時 그 민심 성시(盛時)에도 없애지 못하였다네,

雖典法之深嚴 비록 전법(典法)이 삼엄할지라도,

猶巧僞之日滋 오히려 교위(巧僞)가 나날이 더해가네.

顧何術以反古 생각하건데, 무슨 수로 옛날로 돌아가서,

躋民俗於凞凞 백성들의 풍속을 밝고 밝게 하리요.

抑愚頑之難化 우완(愚頑)한 사람은 교화하기 어려워,

豈道齊之有戾 어찌 도제(道齊)가 어긋남이 있으리요,

獨長思而永歎 홀로 한참 생각하다가 길게 탄식하나니,

寄遠懷於上世 멀리 상세(上世)에 내 생각을 부친다네.

증민(蒸民)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이다. 그 첫 장의 내용은 “하늘이 뭇 백성을 내었으니 사물이 있는 곳에 법이 있다네. 백성이 지닌 본성은 이 거룩한 덕을 좋아한다네.[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라는 것인데, 그 뜻은 ‘하늘이 만든 인간 사회는 어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관한 올바른 법이 있다. 이를테면, 귀와 눈이 있는 곳에는 소리를 들어 느끼고 형체를 보아 아는 기능이 있기 마련이고, 아비와 자식이 있는 곳에는 아비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아비를 효성으로 받드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는 것이다.

일투(日偸)는 엄숙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莊敬日强 安肆日偸〕

삼치(三褫)는 ?주역?에, “혹 반대를 하사받아도 하루아침에 세 번 뺏긴다.〔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라고 하였다.

문교(文巧)는 화려하게 꾸미고 기교를 부리는 행위를 말한다.

험부(險膚)는 험하고 얕음. “이제 너희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백성들에게 믿음을 일으킴이 험하고 얕으니, 나는 너희들의 다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겠다.(今汝聒聒, 起信險膚, 予不知乃所訟)”?書經集傳?卷5, 「盤庚」上.

도제(道齊)는 정치를 함에 있어 “덕(德)으로써 인도하고 예(禮)로써 가지런히 한다.”를 아울러 이른 말. 《논어(論語)》 위정(爲政).

Ⅱ. 西臺 金沖의 문학 정신

1. 머리말

김충(金冲: 1513, 중종 8–1572, 선조 5)의 자는 화길(和吉), 호는 서대(西臺),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휘가 삼산(三山)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휘는 옹(顒)이며, 호가 외재(畏齋)이다. 중종 기묘년(1519, 종종14)에 ‘옛것을 흠모하면서 뜻을 고상히 하고, 학문이 순정하고 바르다. [慕古尙志 學問醇正]’는 것으로 공천(公薦)되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비(妣)는 의인 정씨(宜人鄭氏)로 사인(士人) 정구(鄭俅?)의 따님이다.

西臺는 정덕 계유년(1513, 중종8)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공부하면서, 문예(文藝)를 스스로 닦았다.

39세, 신해년(1551, 명종6)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된 뒤, 태상시 주부(太常寺主簿), 형조 좌랑(刑曹佐郞),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두루 역임.

41세, 계축년(1553)에 해서(海西)의 막부(幕府) 보좌(補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역임.

42세, 갑인년(1554)에 호서(湖西) 막부로 전보(轉補)되어 청홍도사(淸洪都事)에 보임. 얼마 안 되어 파직.

44세, 병진년(1556)에 함흥부 판관(咸興府 判官)에 제수.

45세, 정사년(1557)에 함흥부 판관(咸興府 判官)에서 파직,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호조 정랑,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역임하였다.

49세, 신유년(1561, 명종16)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평택 현감(平澤縣監) 역임.

53세, 을축년(1565)에 치사(致仕) 후 귀향(歸鄕).

55세, 정묘년(1567)에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김.

56세, 무진년(1568, 선조1)에 초계 군수(草溪郡守)에 제수, 기사년(1569)에 파직.

59세, 신미년(1571)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선공감정(繕工監正) 역임.

60세, 임신년(1572) 4월에 큰아들이 죽어 곡하느라 몸이 심하게 상해 11월에 병으로 서울에 있는 집에서 죽음. 향년이 60세. 다음 해 3월에 장천(長川)에 있는 추동(楸洞)의 신좌을향(辛坐乙向) 언덕으로 상구(喪柩)를 싣고 와 장사 지냈으니, 바로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성품이 청렴하고 간소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 권력 있는 자들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한다.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대(西臺)는 시집(詩集) 한 권과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을 남겼다 하나 둘 다 현재에는 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소략하기 그지 없다. ?상산지(商山誌)?에 후계(后溪) 김범(金範)의 「연악서재(淵岳書齋)」에 차운한 시[次韻] 1수, 그의 아버지인 외재(畏齋) 김옹(金顒)의 「정희아[계함]의 ‘연정’에 붙임(題鄭希雅[繼咸]蓮亭)」에 차운한 시[次韻] 2수와 「수경재 즉사(水鏡齋卽事)」라는 시 1수, 그리고 무첨재 정도응의 ?한거잡기?에 실려 있는 시 1수, 합하여 5수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서대의 작품이다.

2. 선비의 멋과 풍류정신(風流精神)

서대(西臺)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551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느 장원 급제자가 그러하듯이 서대의 관직생활 또한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10년 남짓 관직 생활을 하고 과감히 그 세계를 떠났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평택(平澤)현령(縣令)으로, 정5품이었다. 어찌 보면 그의 재주에 비해 그 당대(當代)에도 현재에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당대는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으니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현재는 전하는 문헌이 없으니 연구자들이 그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는 기회를 막아 버렸다.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다간 그의 삶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문헌으로 미루어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실례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서대의 묘갈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청렴하고 개결하고 간솔하고 고졸(古拙)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냉랭하였고 평상시 거처함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서로 오가며 붙좇지 않았다. 조정에 서서는 더욱더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거나 간청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았으며, 청탁이 들어오면 일찍이 뜻을 굽혀서 따라 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맡는 자리마다 문득 어그러지거나 혹 죄에 얽혀들었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을 마치 짐독(鴆毒)처럼 보았는데, 호서(湖西)의 막부(幕府)에 있을 적에는 술에 취하여 술주정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모두들 코웃음을 치면서 탄식하였으며, 공 역시 끝내 시세(時勢)에 따라 부앙(俯仰)하고자 하는 뜻이 없었다.

무첨재(無忝齋) 정도응(鄭道應)이 지은 「한거잡기(閑居雜記)」에서 서대(西臺)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서대(西臺) 김충(金冲)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는 아직 이름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다. 그가 알성시(謁聖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자, 여러 학자들이 그의 재능을 시험하기 위하여 벽송정(碧松亭)으로 그를 초대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를 짓게 하였다. 운자를 부르자 공이 시를 지었는데, …(중략)…라 하니 여러 학사들이 비로소 칭찬하면서 그를 인정하였다. 공이 만년에는 서대(西臺: 상주 남보천 근방) 초당(草堂)에 주로 머물렀는데, 바람이 불 때 종이학을 띄우면 근방의 여러 노인들이 공이 온 줄 알고 반드시 그를 찾아가 경치를 논하였다. 공이 죽자 승지(承旨) 권문해(權文海)가 시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누가 서대(西臺)에 학을 놓아서, 한북의 혼을 부르기 어렵게 했나.[誰放臺西鶴, 難招漢北魂]”라 하였으니, 대개 공이 서울에서 객사하였기 때문에 한북혼(漢北魂)이라 한 것이다.

무첨재의 ?한거잡기(閑居雜記)?에 실린 서대(西臺)의 「벽송정(碧松亭)」 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碧松亭畔釋麻衣 벽송정(碧松亭) 가에서 삼베옷 벗으니,

恩雨當年夢也非 임금님 은혜 입은 것 꿈인가 생시인가.

借問杜鵑何似鳥 두견새에게 묻노니 너는 어떤 새길래,

終宵猶道不如歸 밤새도록 돌아감만 못하다고만 하느냐.

자아는 먼저 벽송정(碧松亭) 가에서 삼베옷을 벗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이 시를 짓기 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비단옷을 입을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였다. 벽송정이라는 액호(額號)에 걸맞게 자아의 마음은 희망이 있다. 승구(承句)에 가면, 자아는 자신이 장원한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시는 장원급제자의 포부조차도 느끼게 하는 득의(得意)한 시라 하겠다. 게다가, 향리에서는 그가 얼마나 한가한 생활을 즐겼던 가도 알려 주었다. 서대는 공부만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풍류와 멋을 알았다. 다음 글은 서대의 시재(詩才)를 알 수 있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는 풍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공이 처음 급제하고 아직 이름이 나지 않았던 어느 날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 가게 되었다. 조정에 출입하는 선비들도 많이 왔었는데, 마치 금강산으로 가던 중이 시축(詩軸)을 가지고 시를 지어줄 것을 요구하자 공이 그 자리에서 절구 시 한 수를 지었는데,…(중략)…,라 하자 좌중 사람들이 붓을 놓고 모두 그와 사귀기를 청하였다.

금강산으로 가는 중에게 지어준 시는 다음과 같다.

下名山三十六 천하의 명산 서른여섯 곳 가운데서 ,

海東皆骨卽仙山 해동의 개골산이 선산(仙山)이라네.

十年夢繞毘盧頂 10년 지나도 꿈엔 비로봉 정상 헤매,

夜夜松聲枕上寒 밤마다 솔바람에 베갯머리 서늘했네.

라고 하였다. 이를 보아도 서대(西臺)가 시인으로서의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상산지(商山誌)?에 실린 「수경재 즉사(水鏡齋卽事)」 시를 보면,

尹子執酒盃 윤자(尹子)는 술잔을 잡고,

李子展詩軸 이자(李子)는 시축을 펴네.

西臺獨無事 서대(西臺)는 홀로 일없어,

傾聽玲瓏滴 영롱한 물방울 소리를 듣네.

3. 도불원인(道不遠人)의 인문정신

선비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수히 의리(義理), 곧 진리를 찾기 위한 공부, 학문을 위한 학문이다. 다른 하나는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학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의 것을 위기지학(爲己之學), 뒤에 것을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한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어떠하였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 위인지학을 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문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다. 설령, 후세 사람이 지은 어떤 사람의 「행장(行狀)」이나 「연보(年譜)」를 보면, 아무개는 처음부터 과거(科擧)에는 뜻이 없이,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는 말을 자주 쓰곤 한다. 그러나 그 진위를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당사자가 과거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여 그 마음을 바꾸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대(西臺)는 대과(大科)에 장원급제 하였다. 그러나 그의 환로(宦路)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파직을 여러 번 당하였다. 이는 물론 그 자신의 성품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주위 사람들의 시기․모함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것이 우리민족의 가장 큰 단점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지는 서대(西臺) 묘갈명(墓碣銘) 가운데, 그 명(銘)을 보면 그의 벼슬살이가 순탄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다.

有受其唾 남이 뱉는 가래침을 받아먹으면,

人則以爲恭也 사람들은 그걸 보고 공손타 하네.

有乞其醢 남을 위해 초를 빌려 오는 걸 보면,

人則以爲忠也 사람들은 그걸 보고 충직하다 하네.

公不能此 공은 능히 그와 같이 못하였으니,

宜其躓而窮也 거꾸러져 궁해진 게 마땅하도다.

人謂公窮 사람들은 공을 보고 궁했다 하나,

公乃自以爲通也 공은 이에 스스로 통달했다고 여겼다네.

西臺之水淸且恬兮 서대의 물은 맑고도 한가롭나니,

宛若公之容也 완연하게 공의 모습 닮아 있구나.

楸洞之宅窈而深兮 추동의 묘 그윽하고 깊숙하나니,

寔惟公之宮也 실로 공이 묻히어서 잠든 곳이네.

칼을 거는 마음은 신의를 지키는 마음을 말한다. 춘추 시대 때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일찍이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서(徐)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서나라의 임금이 계찰이 차고 있는 칼을 보고는 갖고 싶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진나라의 사신이 함께 있었으므로 계찰이 즉시 칼을 풀어 주지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주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에 계찰이 진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를 다시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서나라의 임금이 죽은 뒤였다. 이에 계찰은 서나라 임금의 무덤 앞에 있는 나무에다가 그 칼을 걸어 놓고 떠나갔다. 《新序 節士》

공자가 말하기를, “누가 미생고(微生高)를 정직하다 하는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초(醋)를 빌리러 오자 그가 이웃집에서 빌려다가 주었다.” 하였다. 《論語 公冶長》

후계(后溪) 김범(金範: 1512-1566)의 「연악서당(淵嶽書堂)」 시에 차운한 서대(西臺)의 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爲學奇功只復初 공부의 가장 큰 공은 초지(初志)로 돌리는 일,

難彫須戒責如予 썩은 나무로 새길 수 없단 말 날 두고 한 듯.

窓前不絶聲絃誦 창문 앞에는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燈下惟親簡卷舒 등불아래 친할 것은 오직 책 펼치는 일이라네.

老子深情誰復信 노자(老子)의 깊은 심정 누가 다시 믿을 손가,

靈川遺意恐成虛 신령천(申靈川)의 끼친 뜻이 헛될까 두렵다네.

殷勤更請諸君勉 은근히 다시 청하노니, 제군은 힘쓸 지라,

道在吾心不在書 도는 내 마음에 있지 책속에 있는 것 아닐세.

자아는 공부의 가장 큰 목표는 초지(初志)로 돌아가는 일이라 하였다. 누구나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순수한 마음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순수성이 줄어든다.

신령천(申靈川)은 상주 목사를 지낸 신잠(申潛: 1491- 1554)을 가리킨다. 그는 신숙주(申叔舟)의 증손(曾孫)이며, 삼괴(三魁) 선생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이다. 그가 상주목사를 지낼 때, 하곡(하곡(霞谷))・도곡(道谷)・석문(石門)・수양(首陽)・노동(魯東)・수선・용문・영빈・매악・오산・고봉・봉성・백화・봉암・송암・지천・죽림 등 17개 서당(?상산지?에는 18서당)을 세웠다.

4. 개결(介潔)과 고졸(古拙)의 미학

시의 풍격은 그 시인의 인품과 직결된다. 서대(西臺)의 시 역시 그의 인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서대의 인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은 청렴하고 개결하고 간솔하고 고졸(古拙)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냉랭하였고 평상시 거처함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서로 오가며 붙좇지 않았다. 조정에 서서는 더욱더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거나 간청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았으며, 청탁이 들어오면 일찍이 뜻을 굽혀서 따라 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맡는 자리마다 문득 어그러지거나 혹 죄에 얽혀들었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을 마치 짐독(鴆毒)처럼 보았는데, 호서(湖西)의 막부(幕府)에 있을 적에는 술에 취하여 술주정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모두들 코웃음을 치면서 탄식하였으며, 공 역시 끝내 시세(時勢)에 따라 부앙(俯仰)하고자 하는 뜻이 없었다.

서대(西臺)는 자신의 아버지인 외재(畏齋) 김옹(金顒: 1484-1567)이 지은 「정희아 계함의 연정에 붙임(題題鄭希雅繼咸蓮亭)」이라는 시에 차운하여 「정희아의 연정(蓮亭)에 붙임 시에 차운함(題鄭希雅 繼咸 蓮亭次韻)」이라는 시 두 수를 지었다. 먼저 첫 번째 차운한 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龜山半浦兩幽棲 구산과 반포(半浦) 두 곳에 은거하면서,

日日過從對小堤 날마다 작은 제방을 두고 서로 왕래했네.

疎竹風邊開玉局 성근 대숲 바람에 바둑판처럼 벌어지고,

綠荷香裏灌蔬畦 연꽃 향기속의 나물 밭에 물을 대네.

遊春却恐花難久 봄놀이엔 문득 일찍 꽃 질까 겁이 나고,

話夜還愁月易低 얘기 나누는 밤엔 달 일찍 질까 걱정이네.

交契歲寒誰繼得 지조(志操) 지킨 교유는 누가 있는가,

蒼松依舊蘸西溪 푸른 솔은 변함없이 서쪽 개울에 잠겼네.

자아는 구산(龜山)과 반포(半浦) 두 곳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구산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증조(曾祖)인 정계함(鄭繼咸)이 살았던 곳이요, 반포는 서대의 아버지인 외재(畏齋)가 살았던 곳이다. 반포는 바로 서대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구산과 외재가 제방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여 살면서 날마다 왕래하며 서로의 정담을 주고받았다. 언뜻 보면 자아와 구산과의 관계라 볼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아, 곧 서대가 자신의 아버지 시에 차운하여, 그 아버지와 구산과의 교유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함련(頷聯)에서 보면, 성근 대숲이 바람이 불어오자 바둑판처럼 나뉜다고 하였다. 성글다고 하였으나 촘촘하지가 않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대나무[竹]와 바둑판[玉局]이다. 대나무는 곧고 바둑판은 질서정연하다. 또 함련 대구(對句)의 연(蓮)도 곧다. 이 단어는 선비의 개결(介潔)하고도 고졸(古拙)한 기풍(氣風)을 드러낸다. 자아도 그러하겠지만, 자아가 본 구산(龜山)과 외재(畏齋)는 소담하게 살아가면서도 선비의 기풍을 지녔다. 대나무나 연꽃처럼 그 성품이 곧으며,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경련(頸聯)에서는 외재(畏齋)와 구산(龜山)의 일상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봄이 오면 봄놀이를 한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은 일반 서민들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서민들은 봄이 오면 농사지을 준비를 한다. 또 생활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꽃놀이는 잘 할 수 없다.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꽃놀이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민족은 놀이 문화가 발달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철마다 꽃이 핀 동산에 모여 시주(詩酒)로 서로 흥을 돋우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몫이다. 당나라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같은 글을 보아도 그러한 정황을 알 수 있다. 자아는 대구(對句)에서, 밤에 서로 이야기 하다 달이 질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구산과 오재 두 사람이 그만큼 사이가 가까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사귐은 변함이 없었다. 비록 세월이 지나도 서로 변하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만큼 서로 간에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과 아집을 없애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구산(龜山)과 외재(畏齋)는 진실한 친구였다. 이들은 서로 죽어서 이별할 때까지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벗을 사귀는 데에는 믿음[信]이 가장 우선이다. 비록 이들이 향리(鄕里)에서 화려하게는 살지 못하였지만, 자신들의 미음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자아는 미연(尾聯)에서 스스로 세상에 지조를 지키는 교유가 몇이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만큼 지조를 지키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이다. 자아는 구산과 외재의 기풍과 정신을 푸른 소나무와 맑은 시냇물에 비유하였다. 그만큼 깨끗하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서대가 바라는 인간성은 지조를 지키며 그 마음을 맑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또 차운함(又次韻)」 시도 그 분위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시간적 배경은 사뭇 다르다. 앞의 시는 정계함(鄭繼咸: ? -1526)이 살아 있을 때 그와의 교우를 사실적으로 그려준 데 비해, 뒤의 시는 정계함(鄭繼咸)이 죽은 뒤에 지은 것으로, ‘석양에 앞개울을 차마 지나지 못 하겠네.’라고 읊었다. 벗의 수택만 남은 구산(龜山)을 차마 지날 수 없는 정을 읊었다. 그 내용을 들어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紅塵數載歎棲棲 홍진에서 몇 년이나 탄식하며 지냈는가,

長憶君家竹下堤 언제나 대숲 밑의 당신 집 생각했다오.

荷葉受風香入室 연잎은 바람 맞아 그 향기 방으로 들고,

稻花含露碧盈畦 이슬 젖은 벼꽃, 푸른 벼 논두렁에 가득.

川分燕尾從西下 제비꼬리처럼 갈린 개천 서쪽으로 흘러,

山作龜形自北低 거북 모양의 산은 북쪽으로 가며 낮네.

詩景至今留手澤 시경(詩景)엔 아직도 손때가 남아 있어,

不堪斜日過前溪 석양에 앞개울을 차마 지나지 못 하겠네.

라고 읊었다.

공은 평소에 시를 지어 읊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짤막한 절구(絶句)를 잘 지었다. 이 시들은 쓸쓸한 가운데에도 남은 맛이 있어 자못 사람들이 전해 외웠다. 그러나 모두 산실된 탓에 지금은 겨우 한 권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또 일찍이 들은 바를 직접 기록한 책 하나가 있어 이름을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라고 하였는데, 이 책 역시 병란에 없어졌다.

공이 살고 있는 곳 서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곳에 언덕이 하나가 있는데, 그 곁으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무들이 울창하여 좋아하여 아주 좋았다. 공이 평택(平澤)에서 돌아오신 뒤에 그곳에 조그마한 초가집을 한 채 지어 그 이름을 ‘서대초당(西臺草堂)’이라 하였다. 날마다 그 초당에서 시를 읊으며 흔연히 자신의 뜻을 얻은 것처럼 즐기면서 끼닛거리가 자주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높은 관작(官爵)이 흠모할 만한 것임도 잊은 채 지냈다.

공은 평생토록 시를 읊기를 좋아했는데, 더욱 짧은 절구 시를 잘 지었다. 그 시들이 쓸쓸하면서도 여운(餘韻)이 있어 사람들의 입에 전송되기도 하였지만, 모두 산실된 탓에 지금은 겨우 한 권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또 일찍이 들은 바를 직접 기록한 책 하나가 있어 이름을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라고 하였는데, 이 책 역시 병란에 잃어버렸다.

심수경(沈守慶)이 지은 ?견한잡록(遣閑雜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에게 여러 번 읽어서 반드시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부모님 계시듯 효성을 다하네.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號哭聲中冥夢回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에 여섯 신선이 모이니 참으로 즐거운 일,

觀行亭名留百수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하리라.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가에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하니,

洛江萬古流不舍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盧穌齋)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하고 있다.

위 글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당대 상주 문한(文翰)을 대표하는 분들이다. 노소재는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을 가리키는데, 그는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분이다. 서대(西臺) 역시 151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였고, 노기(盧麒)는 후계(后溪) 김범(金範: 1512-1566)은 진사과(進士科)에 장원 합격하였다. 불기당(不欺堂) 노기(盧麒: ? -?)는 자질이 개제하고 주관이 확고하며 세세한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군수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군민이 청신하다고 하였으나 문집이 전하지 않는다.

Ⅲ. 愚谷 宋亮의 문학정신

1. 머리말

송량(宋亮: 1534, 중종 29 - 1618, 광해군 10)의 자는 경명(景明), 호가 우곡(愚谷), 본관은 여산(廬山)이다. 그의 할아버지 휘(諱) 세휘(洗輝: 1463, 단종 1 -1532, 중종 27)가 상주에 처음 입향(入鄕)하였는데,그의 자는 군미(君美), 호가 회암(會庵)이다. 그는 성종(成宗) 때 시직(侍直)에 올랐고 연산조(燕山朝)에는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직(禦侮將軍龍驤衛副司直)에 올라 여러 차례 선정(善政) 하도록 간언(諫言)하였으나 왕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 그는 관직을 버리고 상주시(尙州市) 공성면(功城面) 소곡리(素谷里: 一名 小谷里)에 은거하여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서사(書史)를 스스로 즐겼다.

아버지는 휘(諱)가 당(璫)이며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을 행직(行職)하였다. 명종이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제수하였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때는 기로(耆老)로 품질(品秩)이 올랐다. 대대로 가정의 학문을 이었고 기량이 정대하고 지조가 맑고 검소하여 고을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재령 강씨(載寧康氏)로 선무랑을 지낸 완(琬)의 딸이다. 1534년 12월 20일 소곡리(素谷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어렸을 때에 이미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성장하여서는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깨달았다 한다. 1566년(명종 21) 노기(盧麒)·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만들어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1580년(선조 13) 47세 되던 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그와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다. 그 해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3년 뒤 1582년(선조 15)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때 공의 아니 50세였는데, 거상(居喪)하는 데 곡읍(哭泣)하는 절차가 쇠했다고 해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룬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는데 나물밥만 먹고 과일은 먹지 않으니, 공의 예절(禮節)을 보는 사람이 더욱 착하다고 하여 그 동리를 효곡(孝谷)이라 하였다.

11592년(선조 25) 임진년, 왜구가 들어와서 고을이 모두 함락되니 큰 아들인 이회(以誨)를 시켜 향교에 가서 신위(神位)를 묻고 오라고 하였다. 왜구가 이어서 삼경(三京)을 함락하여 왕이 서쪽으로 행차하면서 사방으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다. 그 때 고을 사대부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으나 공이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다.

1593(선조 26)에는 그가 백화산(白華山)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왜적을 만났다. 큰아들 이회(以誨)가 몸으로 아버지를 보호하다가 왜적의 칼날에 맞아 죽자 공이,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죽었는데, 신하는 임금을 위해서 죽지 못하였다.”라고 하고 북향(北向)해서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 모두 비통해 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상주의 은사인 송량은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고 학술(學術)이 통경(通經)하였다.”고 하고,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 “송량은 산림에서 도를 지켜 출세는 구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송량을 천거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난리 중에도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그 대가로 승의랑(承議郞)으로 전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으로 승진하였다.

1602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한성참군(漢城參軍)・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司憲府 監察(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낙동강 가에 오햔원(五賢院)을 세워 학규(學規)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우곡문집(愚谷文集)?4권 2책과 ?정성기(定性記)?, ?가례보유(家禮補遺)?가 있다.

2. 우곡(愚谷)의 학문과 교유(交遊)

우곡의 학문은 유학이며, 성리학이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그가 교제한 사람은 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 ?-1592)・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석천(石川) 김각(金覺: 1536-1610)・소암(素庵) 허후(許厚)・김응덕(金應德:자 慶伯)・김념(金念:자 期望)・윤진(尹瑱: 자 季守)・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1569-1626)・목옹(木翁) 송선(宋瑄: 1544-1629)・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김계(金繼:자 景胤) 등이다.

그는 대곡(大谷) 성운(成運)과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성대곡(成大谷)을 만난 것이 언제인지, 또 무엇을 배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곡문집(愚谷文集)?권1에는 「성대곡 운선생께 올림(上成大谷先生運)」이라는 편지가 실려 있다. 그가 성대곡을 만나 수학한 것은 퇴계를 만나기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성대곡에게 올린 편지의 한 부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본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멀리서 높은 풍도를 추앙한지가 자못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레 이끌어 가르쳐 주심을 입어 마음속에 가득했던 의혹을 처음 깨뜨렸습니다. 한평생을 거슬러 점검해보니 읽은 책이 얼마 되지 아니하였는데, 지난 날 경계하시고 일깨워 주셨으니 마음속으로 감사한 생각이 간절합니다.

위 편지를 보면, 우곡이 성대곡(成大谷)을 만난 것도 그가 어렸을 때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대곡의 높은 풍도를 추앙한 것이 수십 년이 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곡이 퇴계를 찾아 간 것은 1570년 퇴계가 죽기 바로 전이다. 그가 직접 퇴계한테 배우지는 않았고, 다만 한 번 퇴계를 만나기만 하였다. 그의 「도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숙거에게 보임(陶山歸路示鄭叔擧)」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그 시의 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踐實斯文德有輝 사문을 실천하여 덕이 빛남이 있어,

能令吾輩有依歸 우리들에게 의지할 수 있게 하셨네.

三千禮儀都融會 삼천의 예의를 모두 섞어 모으셔서,

四七端情始發揮 사단칠정을 처음으로 발휘하셨다네.

賴爾琢磨治玉石 당신 닦으신 길 따라 옥석 다스렸고,

隨吾緩急佩絃韋 나의 성품 완급에 따라 현위 찾았네.

生三事一爲人職 군사부 하나 같이 섬김은 사람 직분,

期望如心願不違 기대와 희망 마음 같이 어김없기를.

이 시는 앞 6구는 퇴계의 행적에 대한 칭송이다. 퇴계는 유학을 실천하여 덕을 빛냈고, 또 후학들에게 의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 삼천 여 가지의 모든 예의를 융회관통(融會貫通)하였고,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의를 처음으로 발휘하였다. 퇴계 이전에도 사단칠정에 대해 논의한 분들이 간간이 있기는 하였지만, 퇴계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주고받은 사칠논변(四七論辯)이 가장 유명하다. 시인은 퇴계가 옥석을 다스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장인(匠人)이 옥을 다듬듯이 학자가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야 학문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마지막 한 연(聯)에서 군・사・부(君師父) 일체이기 때문에 이를 하난 같이 섬기는 것이 사람 된 도리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와 희망이 지금의 마음 같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즉, 이 시는 우곡(愚谷)이 퇴계(退溪)를 향한 마음이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위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학문 방향은 퇴계의 학문을 이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퇴계를 만나러 예안(禮安)까지 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안동에 가서 퇴계를 만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때 퇴계가 돌아가시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퇴계께 집지(執贄)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한(恨)이 되었다.

앞에서도 들었지만 우곡(愚谷)이 만난 사람은 대부분 학자들이다. 그 가운데 그는 한강 정구와도 가끔 만난 것 같다. 그의 ?우곡문집?권1에는 「정도가 구가 찾아와 수창함(酬鄭道可逑見訪)」라는 제목의 시와 「정도가에게 답함(答鄭道可)」, 「정도가에게 줌(贈鄭道可)」 등의 편지가 실려 있다. 그가 한강 정구에게 지어준 「정도가 구가 찾아와 수창함(酬鄭道可逑見訪)」을 들면 다음과 같다.

一面情如舊 한번 만났어도 정은 친구 같아,

鄕山路幾重 고향에서 산길 몇 겹이었는가.

分時鴻與燕 이별할 땐 기러기와 제비 같고,

逢處蚷兼蛩 만날 땐 노래기와 메뚜기 같았네.

歲暮靑雲隔 해는 저무는데 벼슬길은 막혔고,

天寒白雪封 날씨 차가와 흰 눈이 쌓였다네.

衆芳摠蕪穢 뭇 꽃들 모두 다 시들어 버려서,

偏愛後凋松 오직 시들지 않는 소나무 좋아해.

위의 시로 보아서는 우곡과 한강은 처음 만났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정분은 오래도록 만난 친구와 같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사는 곳은 대단히 멀다. 이것은 실제의 거리도 되겠지만 마음속의 거리이다. 비록 두 사람이 산을 굽이굽이 돌아 가야할 먼 거리에 있다. 그 먼 거리에서 서로 만났으니 그 정분은 말 할 수 없다.

시인은 해가 저물지만 벼슬길은 막혔다고 하였다. 여기서 해가 저문다는 것은 한 해가 저무는 것도 되고 또 시인의 나이가 많은 것도 된다. 해가 저물거나 나이가 들었지만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못 하였다. 그러니 그 착잡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이 저문다는 것은 시든다는 것과 서로 통한다. 날씨가 춥고 흰 눈이 쌓여 아름다운 꽃이 다 시들었다. 그러나 오직 소나무는 시들지 않고 푸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이 그만큼 송백(松柏)과 같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만큼 시인의 의지가 강하다.

그의 나이 47세 되던 해 상주 목사로 부임한 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서애는 말할 것도 없이 퇴계의 제자이다. 서애가 상주에 부임함으로써 상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애에게 배웠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그가 퇴계의 학풍을 몸에 익힌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3. 우곡(愚谷)의 부(賦)에 나타난 정신(精神)

1) 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의 심학(心學)

그의 문집 권1에 실려 있는 작품을 보면, 「마음은 한 집안의 주인과 같음(心如一家主)」, 「예는 임금의 큰 자루(禮者君之大柄)」이라는 부(賦)와 「마음은 한 집안의 주인과 같음 잠(心如一家主箴)」, 「임금된 사람은 백성을 하늘로 여김 잠(王者以民爲天箴)」 등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心]과 예(禮), 임금[王]과 백성[民]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서 우곡(愚谷)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마음은 한 집안의 주인과 같음(心如一家主)」 부(賦)는 마음이 한 집 안, 곧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는 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을 바탕 한 심학(心學)을 주장하고 있다. 과,

靈臺廓兮淡如 마음을 비워야 맑은 것 같고,

止水活兮澂澈 멈추었던 물도 활발히 흘러야 깨끗하네.

立誠意之玄關 성의를 마음에 세우고,

奉天君而作辟 하늘을 받들어 벽지게 하라.

使一身而聽命 한 몸으로 하여금 천명을 듣게 하여,

任百體而從令 온 몸에 맡겨 명령을 쫓게 하라.

喩乎家而取比 집에 비유하면,

可以反於三隅 세 구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네.

參三才而有身 삼재(천지인)에 참여함으로 내 몸이 있어,

御二五之元氣 이오(음양오행)의 원기를 다스리네.

寓良貴於仁里 참으로 귀한 것을 인의 마을에 붙여,

列爵土於安宅 벼슬과 땅을 안택에 줄지었네.

對半畝之方塘 반 이랑 네모난 연못을 대하여도,

揭神明而容膝 마음을 걸고 무릎을 움직이리.

闢四門而洞達 사방에 문을 열면 통철에 이르고,

坐明堂而出治 명당에 앉았다가 나아가서 다스리네.

余欲聞乎六律 내가 육률(樂律, 六合, 天地四方)을 듣고자 하니,

曰惟耳之從事 이르되 오직 귀로 말미암은 일일세.

余有命乎四體 내가 사체를 명령함이 있으니,

亦惟口之出納 또한 오직 입의 출납일세.

一視聽與言動 한번보고 듣는 것과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在是君之品節 여기에 그대의 품위와 범절이 있다네.

非由外而入內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아옴이 아니니,

豈自內而去外 어찌 안으로부터 밖으로 가리요.

顧是主於身上 이것을 돌아보건대 身上을 주장함은,

惟一般於家裏 오로지 집안과 한가지라네.

爰吾人之處家必有主焉 이에 우리들이 가정을 처리함에 반드시 주장함이 있다네.

導率家之齊與不齊 가정을 다스림에 다스리고 다스리지 못함은,

在一人之得失 주인 한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데 있다네.

身之修與不修 몸을 닦고 닦지 못하는 것은,

在一心之出入 한 마음의 용도(用度)에 있다네.

心虛靈而應 마음이 비어야 반응하나니,

萬人有家而統一 만인이 집이 있으나 하나로 통일하네.

家無主則乃亂 가정에 주인이 없으면 곧 문란해지고,

身喪心則茅塞 몸이 마음을 잃으면 곧 띠처럼 막힌다네.

形雖異而理一 형태는 비록 달라도 이치는 같으니,

分則殊而事同 나누면 다르지만 일은 같다네.

將微妙之難見 곧 미묘하여 보기 어려움을,

寓有形於無形 유형을 무형에 붙인다네.

猗聖人之先覺 아! 착하신 성인의 선각은

開未開於方來 장차 올 일에 남이 깨닫지 못 한 것 알아,

廓吾心之天地 내 마음을 천문지리에 깨닫게 하고,

置一家於度內 한 가정을 법도 안에 두는 것이 어떠리.

何時人之貿貿 시대의 사람들이 무무하여

昧此心之固有 이 마음의 고유함을 모르고

任其放而不求 그 방만한 마음에 맡겨서 찾지 아니하고

曠其室而不居 그 마음의 집을 비우고 살지 아니하고

誘於物而外遷 물욕에 유혹되어 밖으로 옮겨

問家主兮何處 가정의 주인이 어느 곳에 거처하는지 묻나니

余獨守此側陋 나는 홀로 이곳 측루를 지키고

思古人之嘐嘐 옛 사람은 닭 우는 소리 들으면 일어남을 생각하고 .

仰先哲之玄訓 선철들의 현묘한 훈계를 앙모하여,

戒後來之賓者 뒷사람들에게 경계하노라.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예는 임금의 큰 자루(禮者君之大柄)」이라는 부(賦)의 결구(結句)는 3구를 제외하면 모두 여섯 자로 되어 있다.

2) 예치(禮治)를 통한 도덕적 이상주의

?논어?를 보면, “시에서 마음을 일으키고, 예에 서며, 음악에서 완성한다.”는 말이 있다. 이에 주자(朱子)는 “시를 통하여는 착한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예(禮)는 공경하고 사양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며, 절문(節文)과 도수(度數)의 상세함이 있어 사람의 살과 피부, 근육과 뼈의 묶임을 굳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중간에 우뚝 자립하여 사물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는 것은 반드시 예에서 얻게 된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예는 임금의 큰 자루와 같음(禮者君之大柄)」은 변부(變賦)의 형태로 일정한 운(韻)이 없다.

余觀夫上天下澤之爲履兮내가 상천하택(上天下澤)의 이괘(履卦)를 봄이여,

禮爲首於四維 예가 사유(禮義廉恥)의 으뜸이라네.

定名分於上下兮 명분(名分)을 상하로 정함이여,

辨等級於尊卑 등급을 존비(尊卑)로 분별한다네.

肆所謂爲國之以禮兮 이는 나라를 다스림에 예절로 한다함이여,

及人君之大柄 임금의 대병(大柄)에 이르도다.

粤自天理之節文兮 으음, 천리의 절문(節文)에서 비롯함이여,

有四時陰陽之井井 사시와 음양의 질서가 반듯함이 있네.

在乎身在乎家修身而家齊兮제 자신과 집에 있어 몸을 닦고 집 안을 다스림이여,

意自誠而心正 뜻이 스스로 정성스러워야 마음이 발라진다네.

至於君至於國君正而國治兮임금과 나라에 이르러 임금이 발라야 나라가 다슬린다네,

闢四門於紫宸 자신(紫宸)에 사대문을 열어 놓네.

天經已立地緯已定兮 하늘과 땅의 이치가 이미 정해짐이여,

卑高以之自陳 낮은 자와 높은 자가 이로써 스스로 진모(陳謨)하네.

履德之基履和之極兮 덕의 기초를 밟고 화합의 지극함을 실천함이여,

大本以之自立 나라의 대본(大本)이 이 때문에 스스로 섰다네.

父父子子之彛倫以明兮 어버이는 어버이 노릇, 자식은 자식노릇하는 윤리가 밝음이여

以此而爲能修率 이로써 수신(修身)도 하고 가정도 통솔한다네.

君君臣臣之大義以定兮 임금은 임금 노릇 신하는 신하 노릇하는 대의가 정해짐이여,

以此而爲能扶植其爲用也 이로써 임금을 위하고 신하를 쓰는 도의를 붙들고 싶다네.

無往而不備兮 어디를 가나 갖추지 않음이 없음이여,

隨所處而斯得用之於宗廟兮처하는 곳마다 이것을 얻어 종묘에서 씀이여,

五鼎三鼎之器數有制 오정(五鼎)과 삼정(三鼎) 기수(器數)의 제도가 있네.

用之於朝廷兮 이것을 조정에서 씀이여,

六卿九卿之名位攸序 육경과 구경의 명칭과 지위가 차례가 있도다.

會同朝聘之必以是兮 모여서 조회에 맞이함에 반드시 이것으로 함이여,

人乃和而政擧 사람들은 화목하고 정사(政事)가 거행(擧行)되도다.

事神使民之必以是兮 귀신을 섬기고 백성 부리기를 반드시 이로 함이여,

郊以格而邦寧 교신(郊神)이 이르고 나라가 평안하도다.

體主一而無適兮 주일(主一) 무적(無適)을 체득(體得)함이여,

作萬事之紀綱 만사(萬事)의 기강(紀綱)이 되었도다.

百揆賴而時敍兮 백규(百揆)가 힘입어 때맞추어 폄이여,

五典因而有常信 오전(五典:五倫)이 이로 인해 항상 믿음이 있도다.

治國而以禮兮 나라를 다스림에 예로서 함이여,

猶瞽者之有相 장님에게 도움이 있는 것과 같도다.

是爲人君之大柄兮 이것이 임금의 큰 자루[大柄]가 됨이여,

可以濟夫刑政 이로 형벌(刑罰)과 정사(政事)를 다스릴 수 있다네.

誰能允執而爲法兮 누가 능히 진실로 잡고 법 삼을 수 있르이요,

惟昔哲王之無競命秩宗 오직 옛 철왕(哲王)이 질종(秩宗)의 명령에 다툼이 없도다.

典三禮而夙夜惟寅兮 삼례(三禮)를 맡아 밤낮으로 오직 공경함이여,

用此柄而百姓平章齊七政 이 큰 자루 쓰면 백성이 평화롭게 빛나고 칠정을 다스리리라.

熙庶績而群后德讓兮 모든 공적이 빛나고 여라 제후가 덕을 양보함이여,

用此柄而庶事熙康 이 대병(大柄)을 쓰면 모든 일이 빛나고 즐거울 것이로다.

夏禹成湯之祗敬兮 하우(夏禹)와 성탕(成湯)이 지지경천(祗地敬天)함이여

咸率履而不越 모두 솔선하여 실천하는데 넘지 않았네.

吁嗟乎商受之猖披兮 아, 슬프다! 상수(商受)가 창피(猖披)함이여,

柄乃移於周室 자루가 마침내 주나라 왕실로 옮겼도다.

修唐虞之鼎器兮 당우(唐虞)의 정기(鼎器:國祚)를 닦음이여,

致萬邦之協和 만방(萬邦)의 협력과 화합을 이루었네.

夫何以柄而假人兮 어찌하여 자루를 남에게 빌려서,

紛八佾於三家 팔일무(八佾舞)를 삼가(三家) 대부들이 문란케 하리.

肆宣尼執其柄而罔愆兮 공자님께서 펴서 그 자루를 잡는데 허물이 없음이여,

惜于奚之繁纓 우해(于奚)의 말배때 끈과 말 장식을 아끼도다.

哀王風之漸降兮 왕풍(王風)이 점점 강쇠(降衰)함을 애석하게 여김이여,

柄已倒於下堂 자루가 이미 하당(下堂)으로 거꾸러졌다네.

迨後王縱敗而不敬兮 뒤 임금이 방종하여 패함에 이른데도 공경하지 아니함이여,

孰能擧其大綱 누가 능히 그 대강(大綱)을 들 것인가.

夫雖曰禮云禮云兮 비록 예의라 하고 예의라 함이여,

豈是漢朝之綿蕝 어찌 한(漢) 나라 조정의 면절(綿蕝: 表識)이 아니리요.

痛矣新莽之多行無禮兮 슬프도다, 신(新)나라 왕망(王莽)의 무례를 많이 행함이여,

隨斗柄而僭竊 북두의 자루를 잡고 왕위를 도둑질 하였네.

慨禮讓之世遠兮 안타깝도다, 예로 사양하는 세상이 멀어짐이여,

鮮能用夫天秩 천리의 질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도다.

猶幸周柄之已東兮 오히려 다행하게도 주나라 자루가 이미 동쪽으로 옴이여,

仰父師之八條 부사(父師:箕子)의 팔조(八條)를 앙모하였네.

允矣文獻之足徵兮 참되도다, 문헌으로 증험할 수 있음이여,

題今日之從周 오늘의 주나라를 따름이 아름답도다.

郁郁乎文哉兮 빛나고 빛나는 문채여,

初非偸竊乎糠粃 처음부터 껍데기를 취하지 아니함이로다.

優優乎大哉兮 넉넉하고도 위대함이여,

不啻咀嚼乎膏腴 고유(膏腴:기름진 밭)를 경작할 뿐 아니로다.

謇余慢愚而學禮兮 나의 게으르고 어리석음을 책망하여 예를 배움이여,

佩服三代之柄兮 삼대의 자루를 마음에 차고 복종함이여,

倘借赤也之章甫兮 혹시나 적야(赤也: 남쪽, 禮)의 장보(章甫)를 빌림이여,

願從大夫而爲相兮 대부로부터 정승이 되기를 바람이여.

3)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인문정신 계승

또 같은 책 「잡저(雜著)」를 보면, 「경설(經說)」・「육예(六藝)」・「오성(五性)」・「사단(四端)」・「칠정(七情)」 등의 제목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의 학문 세계는 그 당시 유행하였던 이학(理學)에 심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경설(經說)」에, “대학과 중용은 퇴계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대학은 수신의 근본이며 덕에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의 일이며, 중용은 도를 밝히는 글이요 마음을 전하는 법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의 일이다.’…(하략)…고 하셨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가 퇴계를 자신의 학문의 전범(典範)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천인책(天人策)」・「호현책(好賢策)」・「풍속책(風俗策)」 등을 지었다. 「천인책(天人策)」에서는, “천지의 마음[心]은 곧 우리 사람들의 마음[心]이다.”라고 하여, 그는 자연과 인간은 일치,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공자부터 내려오는 전통 유가(儒家)의 견해와 일치한다.

「호현책(好賢策)」에서는 “임금이 어진 선비에게 대접을 대접하기를 정성과 예의로써 한다면 선비들이 기꺼이 올 것입니다. 그 혹시라도 대접하기를 성(誠)과 예(禮)로써 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올을 팔려고 하며 옥을 살 사람을 찾겠습니까? 그러니 어진 재주를 가진 사람을 얻어 쓰려고 하는 사람은 현사(賢士)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성(誠)과 예(禮)가 지극하지 않음을 근심하여야 할 것입니다.”라 하여 임금이 선비에게 정성과 예의로써 대접한다면 선비들이 기꺼이 임금을 찾아 올 것이고, 선비에게 정성과 예의로써 대접하지 않는다면 선비들이 기꺼이 임금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임금은 현사(賢士)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성(誠)과 예(禮)가 지극하지 않음을 근심하여야 한다[不患賢士之不來, 而惟患誠禮之未至也].”고 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논어?의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신이 남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라.”라는 구절에서 몇 글자만 바꾸었다.

「풍속책(風俗策)」을 보면, “주경원이 말하기를, ‘풍속은 윗사람으로부터 비롯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풍속이 피폐함을 허물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이끄는 방법을 다할 것을 근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 풍속이 좋고 나쁨은 임금이 하기 나름이라 하였다. 따라서 만인(萬人)의 위에 존재하는 임금이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이끌어 아름다운 풍속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근심하여야 한다고 그가 주장한다.

이상 몇 편의 책(策)에서 보면, 그는 인간과 자연 관계에서는 인문정신(人文精神)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어진 이를 가려 뽑아 피폐한 풍속을 바로 잡을 것을 주창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실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이것의 그의 학문과 정신세계이다.

Ⅳ. 石川 金覺의 문학정신

1. 머리말

본 절에서는 석천(石川) 김각(金覺: 1536,중종 31-1610,광해군 2)의 시에 나타난 정신세계를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석천은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출신으로, 자는 경성(景惺), 호가 석천(石川)이며, 본관은 영동(永同)이다.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자(滋)이고, 아버지는 진사(進士) 언건(彦健)이며, 어머니는 풍양(豊壤) 조씨(趙氏)로 참봉을 지낸 조이(趙恞)의 딸이다. 그는 서대(西臺) 김충(金冲)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렴(守謙)・중렴(重謙)・덕렴(德謙)・경렴(敬謙)이다.

그는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낙동강 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여름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전과를 올렸다. 경상감사(慶尙監事) 김수(金邈)가 그의 전공(戰功)을 행재(行在)에 보고하여 사온서주부(司倍署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제수하였으나 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1596년 왜적이 용궁현(龍宮縣)을 유린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용궁현감을 제수하여 적에 맞서게 하였다. 그 뒤 1604년 온성판관(穩城判官)을 역임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위 글에서 보면 석천은 진사시에만 합격하였고,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비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월간(月澗) 이전(李㙉)・창석(蒼石) 이준(李埈)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나라 안이 온통 혼란스러운 때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는 입신양명(立身揚名)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제자인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였다.

2. 임진왜란과 석천의 행적

석천의 문집을 보면 그가 살아서 교유한 사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가 죽고 난 뒤 「만사(挽詞)」 또는 「만시(挽詩)」를 남겼다.

만사(挽詞)를 남긴 사람은, 강우(姜䨞)・윤진(尹瑱)・성람(成灠)・조정(趙靖), 문인으로 이전(李㙉)・이준(李埈), 김식(金湜)・강응철(康應哲)・조익(趙翊)・고인계(高仁繼)・고상안(高尙顔)・민척(閔滌), 문하(門下) 김극함(金克諴)・황정간(黃廷榦)・김안절(金安節)・조희인(曺希仁)・김원진(金遠振)・김복례(金復禮)・손당(孫禟)・권응거(權應擧) 등이다. 또 제문(祭文)을 남긴 사람은 송량(宋亮)・윤진(尹瑱)・정이홍(鄭而弘)・이준(李埈) 등으로 상주 출신이 대부분이다. 상주 출신이 대부분이라고 하여 이들의 학문이 얕은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상주에는 안동이나 다른 지방보다 선비가 많았다.

석천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그의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임진왜란이다. 왜적이 자신의 고향인 상주에 쳐들어오자, 그는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김안절(金安節)의 ?낙애유고(洛涯遺稿)?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임진년에 왜구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그 때는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하였다. 선생과 김각(金覺)․김일(金鎰)이 서로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한 방향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왜구들이 가까이 쳐왔다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기를, “충과 효는 본디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다.

임진년 왜구가 대거 침입해오자 낙애 김안절과 석천, 그리고 김일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물론 임진년 의병을 일으킨 기록은 ?석천선생유집?에도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두 편의 격문이 있는데, 「도내 모든 군진에 보내는 격문(檄道內諸陣文)」과「다시 도내에 보내는 격문(再檄道內文)」이 그것이다. 이 두 편의 격문은 석천과 그의 제자인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연명으로 보낸 것인데, 실제로 지은 사람은 석천이 아니라 창석이었다. 그것은 두 번째 격문의 첫머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석천집?에는 “복이(伏以)”로 시작하지만, ?창석집?에는, “이준이(李埈以)”로 시작한 것을 보면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상주(尙州) 의병장인 사온서 주부 김각과 소모관인 교서관 정자 이준(李埈) 등은 삼가 재배하며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시어 돌아오지 못하시고 세상은 몹시 어지러우니, 적개심을 분발할 책임은 신하된 도리상 당연히 져야 한다. 묻노니, 밤낮으로 와신상담하는 나머지에 가슴속에 계획하는 여러 가지 일이 족히 흉한 적의 심장을 쳐부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다스리고 있는 두어 고을만은 적의 부대가 이미 물러갔으나 그 밖에는 아직도 가득 차 있으니, 국가에 보답하는 의거와 울타리를 굳건히 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는 불길을 잡는 것보다 급한데 같은 배에 풍파를 만났으니 어찌 구원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함께 협조하고 성의를 다하여 각기 부족한 힘을 합쳐서 방휼(蚌鷸)의 형세를 좌절시킴이 오직 이때이다.

「다시 도내에 보내는 격문(再檄道內文)」을 들면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하늘에다 활을 쏘는[射天] 흉적을 없앨 마음이 분발하여 취일(取日 몽진한 임금을 도로 모셔옴)의 공을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지 2, 3사람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 약간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 침범한[侵鎬] 적을 무찔러 서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 본주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창고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군량은 반쪽의 콩도 저장된 것이 없고 무기는 한 개의 화살촉도 남은 것이 없어서, 저 옛날 제(齊) 나라 군사가 밥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처럼 먹이기는 어렵고 주(周) 나라 군사가 창을 겨누고 섰듯이 무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우레처럼 공격하고 번개처럼 달리는 날랜 군사는 모두 다 빈 보따리뿐이요 구정(九鼎)을 들 수 있고 적의 깃발을 빼앗을 만한 힘센 무리는 태반이 빈주먹이라, 적을 토벌할 뜻은 있으나 무력을 써볼 수 있는 바탕이 없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는 것이외다. 생각건대, 제공(諸公)들이 다스리는 고을은 난리를 겪은 것이 본 고을같이 심하지는 아니하니 만약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준비에 힘을 같이해 주신다면, 저 허세를 부려 날뛰는 놈들 쯤은 바로 한 바다에 거꾸러져 사라져가는 잿더미와 같은 격이니 한 도내(道內)의 많은 병력으로 어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개미처럼 모여서 그 독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각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혹은 한 바리의 곡식이나 혹은 부스러기 쇠붙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제공에게 힘 되는 것은 극히 미세하지만 군수에 소용되는 것은 매우 긴요할 것입니다. 장차 군사가 먹을 양식이 있어 싸 가지고 가는 데 근심이 없고 무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 만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은 부뚜막에 걸린 솥 속의 고기라 문드러지게 삶아낼 것이요, 우리는 진흙 속과 이슬 속에서 헤매는 부끄러움을 쾌히 씻을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서로 구원해주신 책임이 중흥하는 즈음에 힘입은 바 클 것입니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자 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올려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월(越) 나라와 진(秦) 나라가 서로 형편을 상관하지 않듯이 여기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형세를 무시한다면, 기대했던 본의가 심히 아닐 것이니 협력하여 일을 같이 하자는 청원을 또 어느 곳에 구하리까. ?경상순영록?에 보인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석천경수시 서문(石川慶壽詩序)」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리 고을의 석천장(石川丈)은 복을 받은 분이다.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연과(蓮科)에 급제하였고 말년에는 동어부(銅魚符)를 찼으며, 나이가 칠십이 되었는데도 화락한 빛이 줄어들지가 않아 허리는 굽지 않았고 눈은 침침하지 않아 강건함이 한창 젊었을 때보다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또한 세 아들이 슬하에서 모시고 있으며, 내외(內外)의 여러 손자들이 집 안에 가득한데, 모두들 시서(詩書)를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다가 세 아들은 또 집안이 모두 넉넉하여 쌀은 다른 사람에게서 꾸지 않더라도 충분하며 국은 나물국이 아니라 고깃국을 끓일 수가 있어서 평상시 봉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므로, 옛사람이 부모님을 편하게 봉양할 길이 없다고 상심하던 것이 이미 그 앞에는 올 길이 없다.

석천장께는 어려서부터 서로 좋아하여 늙어서까지 변치 않는 벗이 세 분 있는데, 주부(主簿) 송공(宋公)과 현감(縣監) 윤공(尹公)이며, 나머지 한 분은 바로 나의 작은 아버지이다. 세 아들들이 손님을 청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이분들의 문에 나아가 청하였는데, 이는 이분들이 혹 오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고 하더라도 석천장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러 도에서 의병(義兵)이 다투어 일어나 적을 토벌했는데, 많은 경우에는 수천 명이었고 적은 경우에도 8, 9백 명이나 되었다. 예컨대 경상도의 경우 내암(來庵) 정 선생(鄭先生)ㆍ송암(松庵) 김 선생(金先生)ㆍ곽재우(郭再祐) [의령], 김홍의(金弘毅) [상주, 충보군(忠報軍)], 김각(金覺) [상주, 상의군(尙義軍)이라 부름], 노경임(盧景任) [선산, 숭보군(崇報軍), 권응수(權應銖) [영천]…(중략)…. 이들 모두는 뛰어난 역량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 나머지 크고 작은 규모의 의병군들이 곳곳에서 반향을 보이며 일어났지만, 남북이 가로막혀 소식이 단절되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만 기록해 두어 후일의 고찰에 대비할 따름이다.

상주(尙州)에 사는 주부(主簿) 김각(金覺)은 난이 일어난 처음에 기병(起兵)하여 군공(軍功)으로 6품(六品)에 오른 사람이니, 이곳 사람들을 단속하여 둔전을 만들고 험조를 설치할 계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하략)…(?朝鮮王朝實錄? 선조 29년 병신(1596,만력 24, 2월9일 조.

김각(金覺)을 온성 판관(穩城判官)으로, 남궁간(南宮橌)을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이경조(李慶祚)를 인제 현감(麟蹄縣監)으로, 권식(權植)을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김홍상(金興祥)을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박익(朴益)을 하동 현감(河東縣監)으로 삼았다. (?朝鮮王朝實錄?宣祖 37년 갑진 조)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兵使) 김종득(金宗得)이 아뢰었다. “온성부(穩城府)는 판관(判官) 김각(金覺)을 장신(將臣)으로 정하여 행영(行營)에 내왕하게 하고, 우후(虞候) 성우길(成佑吉)로는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종성(鍾城)과 온성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겸하여 동관을 수호하는 등 일을 살펴 강변(江邊)의 성세를 강성하게 하였습니다.(?朝鮮王朝實錄? 선조 38년 을사(1605,만력 33) 4월8일 임자 조),

창석 이준의 「낙고초당에 붙여 줌(寄題洛臯草堂)」이라는 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千仞臺臨水北涯。衰年不合此樓遲。幽居更卜雙江會。勝槩寧論七澤奇。垂釣每侵鷗鳥界。採茶頻赴羽人期。何緣共泛孤亭下。睡到空溟細雨時。

창석 이준의 「石川壽席述賀」를 들면 다음과 같다.

庭空瑞雪和朝旭。餘香不衰籬下菊。綺席和氣春融融。仙樂玲瓏雜琴筑。座上青瞳紺髮翁。偉氣山河始孕淑。懸車當日不待年。五馬功名一隍鹿。愷悌何不卑康寧。止足由來免殆辱。婆娑丘壑樂幽致。薖軸不須誇在陸。園中花竹蒔五畝。架上詩書揷幾軸。今朝正屬湯餠辰。滿眼風光樂事足。天開壽域宴耆英。有肴如坡酒如玉。酒酣阿翁先起舞。諸郞侍立何以祝。願敎遐算等龜鶴。長使詩人詠松竹。壼天熙熙白日遲。盤飣屢薦蟠桃熟。瑤池時會不老仙。玉函傳受長生籙。年年瑞日屆懸弧。萬壽尊前五彩服。祥輝長照老人星。大年不羡莊叟木。翁言兒輩前聽言。諸郞一時來俯伏。永山名鄕肇吾家。世世玄莬爲鼎族。綿綿遺緖戎罔墜。一一令終皆有俶。至我皇考績學深。隱德邦人企高躅。舊烈如非樹無彊。餘慶那能逮不穀。藐孤惟懼忝家聲。蚤夜懍懍臨淵谷。傳家清愼以爲法。行已謙卑復自牧。但願靑氈保舊物。不貴黃金高柱屋。窮通有命天可逃。禍福由人龜莫卜。說罷兒孫叩頭謝。奉以周旋益矜束。孫謀貽厥乃如此。吉人宜爲神所祿。斯言豈但一家訓。凡我升堂合相勖。生年古難閱期頤。兵禍仍傷遘慘酷。襄陽耆舊晨星稀。白首惟公健黃犢。玆惟累世積善報。亦由一生行義篤。賓從如流慶壽考。粉黛聯行迷玉局。高年更喜致三老。勝事端宜繪一幅。紫霞堪傾北斗酌。赤壁何用南飛曲。風頭漸高且添酒。日脚欲沒仍秉燭。伊余素是契家子。夙歲蘭堂飽淸馥。掘井雖媿不及泉。刻鵠猶期尙類鶩。沈痾但恨逼遲暮。大德將何酬敎育。誰人不願養逮親。風樹終難追啜菽。今觀盛事感喜交。雙淚無端自迸目。黃絹幼婦投賀詞。絳縣老人同遐福。(?蒼石先生續集?卷1, 「石川壽席述賀」 ?韓國文集叢刊?64, 593쪽).

3. 시에 나타난 정신세계

1) 호연지기와 도학(道學)의 실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유행하기 시작한 뒤의 시에는 설리(說理)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도학파(道學派)니 사장파(詞章派)니, 또는 사림문학이나 관인문학이니 하여 조선 초기의 문학 경향을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흑백논리로 양분할 수 없는 것이 이 당시의 정신적 흐름이었다. 다시 말하면 도학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장파라 하더라도 도학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학파나 사장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려서 공부한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서(性理書)를 기본적으로 다 읽었다. 도학파와 사장파를 구분 짓는 것도 경계도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벼슬을 했다고 사장파에 넣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석천(石川)이 생존한 시기(1536-1610)는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등이 살았던 때와 많이 겹친다. 같은 시기에 생존한 성리학자라 할지라도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로 나뉜다. 석천의 「호호가」는 그 자신의 드넓은 기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마치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서로 통한다. 「호호가(浩浩歌)」14수 가운데 첫 번째 시를 들어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浩浩歌一闋 호호가 한 마리 지었나니,

浩浩知何事 넓고 넓어 무슨 일 알리.

浩浩世間事 넓고 넓은 세상의 일들이,

浩浩堪長喟 넓고 넓어 길게 탄식하네.

시가 아니라 노래이기 때문에 성(聲)과 운(韻), 즉 염(黏)이 맞지 않는다. 한 구절에 ‘호호(浩浩)’라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어 어찌 보면 단조로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우리는 자아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자아 자신의 드넓은 정신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자아는 「호호가」 한 마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나 넓고 넓어 무슨 일을 알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넓고 넓은 것은 바로 인간 세상이다. 자아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좁은 것이 아니라 넓게 보았다. 그것은 자아 자신의 국량이 그만큼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국량의 넓음은 자신의 기운이 넓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넓고도 넓은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쩌면 옹졸한지도 모른다.

석천이 생존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 한층 무르익고 있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이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기질적인 측면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내재해 있는 기운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통이 크다 작다하는 것은 성리(性理)보다는 정기(情氣)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석천이 「호호가」를 지은 것은 그 자신의 정기(情氣)가 넓고도 넓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시에 나타난 그의 정신은 주리(主理)가 아닌 주기(主氣)이다.

이는 상주지역의 학문 경향을 알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즉, 상주는 충청도와 인접해 있다. 석천이 살았던 당시 상주는 지금보다 그 면적이 훨씬 넓었다. 경상북도 의성과 문경・예천, 충청북도 보은의 일부가 조선 시대에는 상주 땅이었다. 특히 충청도와 인접하였기에 호서지방의 학풍도 수용하였다. 예를 들면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속리산에 은거하였을 때, 그에게 가서 배운 상주 선비들이 더러 있다. 우곡(愚谷) 송량(宋亮) 같은 분을 예로 들 수 있다. 석천은 바로 우곡과 절친한 사이였다. 따라서 그도 우곡의 학풍과 그다지 차이가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석천은 의병장이었다. 앉아서 글만 공부한 선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행동으로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주리(主理)가 아닌 주기(主氣)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호가(浩浩歌)」14수 가운데 두 번째 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有路直如矢 곧은길은 화살과 같으니,

從古稱周行 예부터 주행이라 불렀네.

如何今世人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

莫由謂無傷 무상하다 말하지 말라나.

화살처럼 곧은길이 있다. 이러한 길을 주행이라 한다. 주행(周行)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큰 길’, 또는 조정(朝廷)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화살처럼 길이 곧다고 하였다. 이 곧은 길, 곧 주행(周行)은 한편으로는 출세 길이다. 사람이 당시로 봐서 한 번 관직에 나아가 큰길을 달리듯이 관운이 순조로우면 그 사람은 출세하게 된다.

그러나 벼슬살이 한 사람치고 한두 번 좌천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본의든 아니든 간에 관직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일에 연루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화살처럼 자신을 해친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광이 도리어 자신을 옥죄는 것을 모른다.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자신을 상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단지 못하고, 벼슬하는 일이 자신에 해롭지 않다고 말한다. 자아와 세상 사람들의 통념이 차이가 난다. 이러하니 자아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호호가(浩浩歌)」14수 가운데 네 번째 시를 들면 자아와 세상 사람들과의 괴리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

謂白人言黑 내 희다 하니 사람들은 검다 하고,

謂黑人言白 검다 하니 사람들은 희다고 하네.

黑白豈無別 검고 흰 것 어찌 분별하지 못 하리,

看取由心曲 마음 쓰는 데 달려 있는 것을.

자아가 희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검다하고, 자아가 검다고 하면 사람들은 희다고 한다. 희고 검은 것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흰 것은 시(是), 검은 것은 비(非)이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 알아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욕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시비(是非)나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어진다. 수오지심이 없으면 짐승과 다름없다.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또 반성할 줄 모른다.

자아는 이러한 시비지심(是非之心)은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하였다. 마음[心]이 이성과 감정을 통괄한다. 바로 심통성정(心統性情)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은 인의 단이라고 말하였다. 인(仁)은 성(性)이고, 측은(惻隱)은 정(情)이다. 이것은 정(情)쪽에서 심(心)을 본 것이니 대개 심(心)은 성정을 포괄한다.”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제5수

欲言羣毁至 피해 아주 심하다 하고 싶으나,

箝口我心欺 입을 막고 내 마음을 속인다네.

處世吾誰適 세상살이 누구를 따라 가리오,

盲聾分所宜 장님도 해야 할 일 분간하는데.

2) 대의(大義)와 정명주의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제6수

衆咻謂我癡 사람들은 나 보고 어리석다고 하고,

我亦不辭癡 나 또한 어리석다는 말 사양 않네.

處世昧所變 세상 변화에 대처하는데 눈 어두워,

是以人所癡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어리석다 하네.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제7수

平生無大仇 평생토록 큰 원수진 일 없고,

耳目爲我仇 귀와 눈이 나의 원수가 되네.

聰明各有司 총명은 제각기 맡음이 있으나,

其奈舌難囚 어쩌나 혀 가두기 어려운 것을.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제11수

吾觀世間物 내가 생각하건대 세상의 사물은,

莫不有本生 본성(本性)이 없는 것이 없으니.

只好辱人先 남들 욕(辱) 보여 앞서고자 하면,

還哀忘所生 도리어 본성 잊은 것이 슬프다네.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제13수

惟觀義與比 오직 의리와 비(比)만을 살피고,

莫論彊與弱 강하고 약한 것 논의하지 마라.

吾心苟不縮 내 마음이 위축되지 않는다면,

儻來皆橫逆 장차 모두 빗겨 어긋날 것이니.

3) 독락(獨樂)을 통한 여민동락(與民同樂)

석천(石川)이 희암(希菴) 윤진(尹瑱)에게 지어준 시 몇 수를 보면 그의 정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먼저 「희암 윤진의 시에 차운함(次尹希菴瑱)」이라는 칠언율시 2수(首)를 차례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半世偏憎俗 반평생 동안 홀로 세속을 싫어해,

平生獨愛山 평소에 나 혼자서 산을 사랑했다네.

奔趨知昨誤 분주히 돌아다닌 지난 잘못 깨닫고,

嘯傲覺今閒 세속을 떠나니 지금이 한가롭다네.

有德人爭慕 덕 있으니 사람들 다투어 사모하나,

無官祿未班 관직 없으니 봉록 따르지 않는다네.

何時一罇酒 언제나 술 한 잔 같이 기울이면서,

相對竹林間 대숲에 앉아 서로 마주할 수 있으리.

먼저 수련을 보면, 자아는 반평생 동안 홀로 세속을 싫어했다고 하였다. 세속을 싫어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자아 자신에게 물욕이나 명예욕이 없다는 것이다. 석천(石川)이 희암(希菴)의 시에 차운하여 지었기 때문에, 희암의 시도 이러한 정조를 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희암(希菴) 윤진(尹瑱)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그의 원시(原詩)는 알 수가 없다.

자아는 반평생 동안 산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산은 ‘그치다[止]’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止)’는 무조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갈 때는 가고, 가만히 있을 때는 가만히 있는 것[時止則止, 時行則行]이다. 자아는 이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다. 그것은 실제 몸이 가만히 있기도 하겠지만, 마음이 세속의 여러 욕심에서 벗어났다. 함련(頷聯)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함련에서, 자아는 분주하게 돌아다닌 지난 잘못을 깨닫고, 이제 세속을 떠나 한가롭게 지낸다고 하였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그 마음이 자유롭다.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전한다.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인(仁)을 구하는 공정(工程)이다.

경련에 가면, 자아는 자신의 입장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그는 덕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였다. 실제로 석천은 그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다. 자아는 자신이 덕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고민은 비록 그 자신이 덕이 있지만, 관직에 몸담고 있지 않으니 봉록이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스스로 하는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관직에 몸담고 있지 않으니 마음과 몸이 여유롭다. 자아는 이제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은 신세[攀籠]에서 벗어났다. 이럴 때는 친한 벗이 생각난다. 언제나 대숲에 마주 앉아 술 한 잔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여기서 자아의 기개를 암시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대 숲[竹林]이다. 물론 이 말은 상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나무는 예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지조와 절개는 선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꺾이지 않는 대나무의 성질처럼 자아 자신이 올곧은 선비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두 번째 시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短髮變新白 짧은 머리에 흰머리 생기나니,

衰顔凋舊紅 야윈 얼굴에 옛 홍조 잃었구나.

豹隱商山下 표범처럼 상산 아래 은거하고,

鱗潛洛水中 물고기같이 낙수 가운데 잠겼네.

韓筆詩無敵 한유의 글씨와 시 상대자 없고,

顔瓢樂不窮 안연의 안빈낙도는 무궁하다네.

塵心自息靜 세속의 마음을 스스로 잠재워,

從此伴仙翁 지금부터는 신선을 짝해 지내리.

수련(首聯)을 보면, 자아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빠져 짧아졌고, 또 세었다. 젊었을 때는 불그레 홍조를 띤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야위어 얼굴에 혈기가 없다.

함련에서, 자아는 표범처럼 상산 아래에서 은거하고 물고기처럼 낙수 가운데에 잠겼다고 하였다. 표은(豹隱)은 본디 깨끗함을 좋아하여 눈이나 비가 내릴 때에는 제 몸을 더럽힐까봐 염려하여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남산의 검은 표범이 자신의 털 무늬를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해서, 무우(霧雨)가 계속된 7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도 가만히 머물러 있기만 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가 전한다.

상산(商山)과 낙수(洛水)는 본디 중국이지만, 이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상주(尙州)와 낙동강(洛東江)을 가리킨다. 자아는 현재 낙동강 가 상주에서 살고 있다. 비록 그가 시골에서 은거하고 있지만, 자아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자부하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당나라 한유의 글씨[문장]와 시, 그리고 전국시대 안연(顔淵)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부합한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산을 사랑하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기 우거할 곳이 따로 있다. 높은 산 큰 강에 우뚝한 대(臺)와 넓은 집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즐길 곳이요, 숲이 깊고 고을이 으슥하며 단걸음에 오를만한 대(臺)나 띠집은 한인(閒人)이 즐길 만한 곳이다. 몸은 강호에 있으면서도 뜻은 공후(公侯)를 사모함은 세속인의 즐거움이요, 큰 소나무 우뚝이 그늘 지운 데서 망건을 벗어 걸고 서성이며 노는 것은 내 홀로 즐김이다. 부귀와 여색을 탐내면서도 칼․톱․도끼 등 형구(刑具)에나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세속인의 즐김이요, 나물 캐고 고기 낚으며 몸이 여위고 추위에 떨면서도 고한(枯寒)하고 담박(澹泊)한 맛을 지닌 것은 나의 독락(獨樂)이다. 낚시터에선 고기 노는 모습을 보고 산에 올라 바람 쐬며 우유자득하여, 시비도 모르고 근심과 즐거움조차도 다 잊은 채 나날이 고기와 새들과 더불어 친하게 지내는 일 또한 나의 독락이다. 뭇 사람들이 다 싫어해도 나는 홀로 즐기리라. 아, 늙은이의 즐김은 참으로 다함이 없도다.

비록 그러하나, 천지는 변함이 없고, 산천은 예와 같은데, 사람의 일에 궁함이 있고 희비가 서로 찾아든다. 다만 하루의 즐거움을 즐길 줄 알지만, 이 다음에 그것이 슬픔이 되는 줄 모른다면, 비록 강산을 즐겨도 금함이 없고, 풍월을 즐겨도 다할 리가 없지만, 도리어 조물주의 시기를 받게 될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확 틔우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며, 전원으로 돌아가리라는 고상한 흥취를 일으키고, 냇가에 이르러서는 물같이 흐르는 세월을 탄식할 줄 알아야만, 도체(道體)의 무궁함을 알아 가슴속에 호연한 기운이 일고 심경이 옥같이 맑아져 굽어보고 우러러 보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천기(天氣)가 활동함에 요순임금과 같은 기상이 일어 천지와 더불어 그 유행을 같이 할 것이다.

희암은 그의 나이 67살 때 「존애원 백수회(存愛院 白首會)」라는 시를 지었다. 또 석천이 죽자 그를 위해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을 짓기도 하였다. 그가 상주에다 새 삶을 마련한 것은 다른 분들과 수창(酬唱)한 데서도 알 수 있으나,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는 효자로 천거되어 현감(縣監)에 올랐다. 「희암의 ‘새로 거처함(新居)’ 시에 차운함(次希菴新居韻)」이라는 칠언율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茅屋蕭森不斲椽 서까래도 다듬지 않은 소담한 초가,

一生心事任天然 한 평생 마음가짐을 자연에 맡겼다네.

衰容白髮羞明鏡 늙은 모습 샌 머리 거울 못에 부끄러,

病眼靑燈怯細煙 횡한 눈빛 등불 켜니 가는 연기 겁나.

莫把悲歎較往日 슬픈 탄식 지난날과는 비교하지 말라,

欲將彊健入新年 장차 강건하여 새로 젊어지고 싶구나.

疎慵又退能詩力 등한하고 게으른 나 시 짓는데 힘쏟아,

斗酒何緣和百篇 한 말 술로 어찌 100편 시에 화답하리.

「희암의 ‘일송정’시에 차운함(次希菴一松亭韻)」 칠언절구 2수

虬枝龍幹倚巖根 구부정한 줄기와 가지 바위에 기대 서,

獨立亭亭迥不羣 홀로 우뚝한 모습 뭇 나무와는 다르네.

密葉蔽空成翠幄 촘촘한 잎 하늘 가려 푸른 장막 되어,

知君高臥盪塵煩 그대 그곳에 누워 세상 번뇌 씻으리라.

栽柳當門何必五 문 앞에 버드나무 하필이면 다섯 그루,

尋松作徑不須三 솔밭 찾아 난 길 세 갈래 할 필요 없어.

一幹直立凌雲外 한 줄기 곧고 곧게 구름위로 우뚝 서서,

獨伴幽人也未慙 홀로 은자와 짝하니 또한 부끄럽지 않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수의 시는 희암(希菴) 윤진(尹瑱)의 일송정(一松亭)이라는 시에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여기서 자아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한그루 소나무이다. 우선 소나무라고 하면, 날이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한 겨울에도 버티고 서 있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은 충절(忠節)을 상징한다. 유인(幽人)은 숨어 사는 사람, 곧 은거자(隱居者)를 뜻한다. ?주역?을 보면, “은거하는 사람이라야 올곧고 길하다.”는 말이 있다. 험한 바위틈에 기대어 홀로 서 있는 소나무가 자아와 일치한다. 자아는 은자(隱者)이다. 비록 도연명(陶淵明)처럼 관직이 높지 않고 외진 시골에서 한가로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정신은 도연명처럼 소극적이지 않다. 그의 정신은 낙락장송처럼 굳세다.

4) 세교(世敎)와 교훈주의

공자 이후 유가(儒家) 선비들의 공통적인 문학관은 세교론(世敎論)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교훈설(敎訓說), 수훈설(垂訓說)이다. 서양에서는 고전주의 작가, 또는 비평가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그 의미는 문학 작품이 인간에게 어떤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리학이 주된 사상이 된 조선시대에는 이 세교론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필수적이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개개인에 따라 그 정도와 대상이 차이가 날 수 있다. 석천(石川)은 무엇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는가? 이 점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한다. 먼저 「호호가(浩浩歌)」14수 가운데 그 여덟 번째 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吾人於此世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所貴有大義 귀하게 여긴 것은 대의 지키는 것.

背義謂無傷 의리 등지고도 해치지 않았다 하면,

其如近禽獸 그것은 짐승과 다름없는 것이라네.

자아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이 대의(大義)를 지키는 것이라 하였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의리가 있는 것이다. 이 의리는 먼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분간할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 인간이면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외물의 욕심이 이끌리지 않는다면,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이 오욕과 칠정에 자신의 이성이 속박당할 때에는 이러한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이다.

의리를 등지는 것은 남을 해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남들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의리의 바탕이 되는 것은 예의(禮儀)와 염치(廉恥)이다. 이를 우리는 인문(人文)이라 한다. 하늘의 무늬를 천문이라 하고 땅의 무늬를 지리(地理)라 한다. 천문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있고, 지리에는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있다.

사람에게 인문이 없으면 짐승과 다름없다. 예의염치(禮儀廉恥)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통한다. 인의예지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四端)이다. 사람에게 사단이 있는 것은 사체(四體)가 있는 것과 같다. 자아는 먼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의리(義理)리라고 한다. 「호호가(浩浩歌)」 가운데 아홉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養子知大恩 자식을 길러야 큰 은혜 안다는 것,

傳說自古人 옛 성현들로부터 이 말씀 들었네.

徒能善保抱 한갓 어버이 잘 봉양하는 것으로,

胡寧忍貴親 어찌 차마 어버이 귀하게 한다 하리.

의리는 인간이 지켜야할 대강(大綱)이다. 그 절목은 다름 아닌 오륜(五倫)이다. 자아는 먼저 자신이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님 은혜를 안다고 하였다. 이는 먼저 부자유친(父子有親), 곧 부자자효(父慈子孝)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자식을 길러 봐야 자신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감한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거의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이 잘 되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잘 되는가는 각자의 인생 목표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자식이 부모께 가장 잘 효도하는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효자의 본보기로 우리는 노래자(老萊子)와 증자(曾子)를 흔히 거론한다. 이 두 사람은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물질만으로 부모님을 봉양, 즉 구복지양(口腹之養)하는 것은 진정한 효도가 아니다. 따라서 자아는 전구와 결구에서 이를 꼬집고 있다.

의리를 실천하는 가장 기본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의 바탕이 되는 것이 효(孝)이다.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열 번 째 시를 보면, 석천의 부모님이 자신에게 바라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 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父母生育日 어버이께서 나를 키우실 적에,

所望惟仁賢 바라시는 것 오직 어질고 어짐.

擧足其可忘 행동에 어찌 이 말씀 잊으리오,

棄身還其先 자신 버림은 조상을 버리는 것.

이 시도 크게 보면 효도(孝道)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을 자식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효도이기 때문이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를 보면, 자아의 어버이가 자아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인현(仁賢)이다. 이는 비단 자아의 부모님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옳지 않은 부모가 없기[無不是之父母] 때문이다.

부모가 요구한다고 하여 자식들이 그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는 그렇지 않다. 자식으로서 부모께 효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자아의 부모가 자아에게 바르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 아들이 마음이 인자(仁慈)하고 똑똑한 것을 바라고 있다. 마음이 너그러우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인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는 언제나 외롭지 않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이러한 부모님의 말씀을 자아는 실천한다.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서 자아의 의지가 나타나고 있다. 자아는 어찌 행동함에 있어 이러한 부모님 말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자신을 버림은 조상께 돌아간다고 하였으니, 자신을 버리는 것은 곧 조상을 버리는 것이 된다.

위 시에서는 자아의 효도에 관한 견해를 묘사하였다. 「호호가(浩浩歌)」14수 가운데 열두 번째 시는 벗을 사귀는데 대한 경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世人好交結 세상 사람들 사귀기를 좋아하나,

交結莫如若 사귐은 자신만한 것이 없다네.

及到分歧日 서로 사이가 벌어지는 날에는,

其誰免讎敵 그 누가 원수 됨을 면할 수 있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가운데는 서로 친한 사이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자도 자신만 한 사람이 없다.

사이가 좋을 때는 간이라도 빼 줄 것 같지만, 사이가 벌어지면 금방 원수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따라서 자아는 벗을 사귀는데 있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호호가(浩浩歌)」14수 중 제14수

吾生苦已晩 내 나이 들어 이미 늙었으니,

浩歌終何益 호호가 부른들 무슨 소용 있나.

仰天一大吁 하늘 쳐다보며 크게 탄식하니,

兩鬢皆欲白 구레나룻이 모두 세려고 하네.

「아들들에게 경계함(戒兒曹)」 오언절구

晩年得汝輩 늘그막이 너희들을 얻었으니,

一喜懼還極 기쁘기도 하지만 두려움도 지극해.

勤則顯門戶 부지런하면 집안을 빛낼 것이고,

怠則壞簪族 게으르면 벼슬 집안 무너뜨리리.

5) 훈리자(訓理者)로서의 하늘

사람이 하늘, 곧 자연을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정신세계를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세 가지 의미로 받아 들였다. 첫째는 단지 푸른 하늘의 의미, 창창자(蒼蒼者)로서의 천(天)이다. 이는 자연과학의 입장에서의 하늘을 말하는 것으로 단지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의 빛만을 가지고 하늘이라 여기는 관점이다. 중국의 당군의(唐君毅)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비인문정신(非人文精神)이다. 둘째는 하늘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입장이다. 하늘이 전지전능하여 사람을 다스린다는 입장이다. 곧 주재자(主宰者)로서의 하늘이다. 셋째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교감한다는 입장이다. 자연의 질서를 보고 인간이 그 질서에 따라 순응하는 것, 곧 훈리자(訓理者)로서의 하늘이다. 이 자연관을 다른 말로 하면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이요, 인문정신(人文精神)이다. 세 가지 가운데 석천은 하늘, 또는 자연을 훈리자로 보았다.

석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574년(선조7) 제자들을 가르치는 여가에 석천대에 올라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다. 그 제목이 「석천대에 붙임(題石川臺)」인데, 그 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首陽山下石川臺 수양산 아래 석천대(石川臺)에서,

慳秘幾年今始開 간직한 비밀 몇 년만에 열렸나.

兒童莫破蒼苔滑 아이들아 푸른 이끼 함부로 마라,

恐有塵間俗客來 티끌세상 속객 올까 두려웁구나.

수양산 아래 석천대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이 석천과 그 제자들이다. 이것에 사람의 발길이 처음 들어섰으니 고이 간직한 자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자아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간직하려 한다.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있는 그대로이다. 어찌 보면 사람의 발자취가 찾아든 자체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발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특히 오래도록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던 석천대 밑의 이끼는 쉽게 발자국을 남긴다. 사람이 이끼 위를 지나가면 이끼가 망가진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자연의 모습을 잃게 된다. 자아는 비록 10여명의 동자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강론하려 하지만, 태초의 신비를 훼손할까 걱정이다. 이것은 바로 자아의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 마음이 불순하다면, 이끼를 짓이기는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자아는 자연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달았다. 이를 미루어 보면 그는 자연을 훈리자(訓理者)로 보았다. 즉, 자연의 변화를 거울삼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

이 시에 대해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서문을 곁들인 차운시(次韻詩)를 지었다.

위 시는 석천 선생의 작품이다. 지난 갑술(1574)연간에 선생께서 동자(童子) 10여 명을 데리고 이곳에서 노니시며 시를 읊으시고는, 이윽고 절구 한 수를 바위에 새기셨다. 지금 시를 지으신지 50년이 지나 장령공(掌令公) 무회(旡悔: 金知復)가 옛 터를 닦아 대(臺) 아래에다 조그만 정자를 새웠다. 자연 풍광이 어우러진 것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홀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겼지만, 다시 옛날의 풍류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까워 어찌 느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선생께서 그 때 지으신 시를 기억하여 눈물을 닦으면서 그 시에 화답한다. 이윽고 형님과 같이 온 다른 여러 분들이 이 놀이를 기록하라고 청하여 기록하니, 그날은 기사년(己巳年: 1629) 3월[淸和] 초아흐레이다. 문인 창석 이준이 쓰다.

위의 시에 대하여 창석(蒼石)과 그의 형인 월간(月澗) 이전(李㙉), 남계(南溪) 강응철(姜應哲)이 시를 남겼다. 이는 50년 전에 석천을 따라 석천대에 간 10여 명의 동자 가운데 이 세 사람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석천은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석천경수시서(石川慶壽詩序)」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우리 고을의 석천 어른은 복을 받은 분이다.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연과(蓮科)에 급제하였고 말년에는 동어부(銅魚符)를 찼으며, 나이가 칠십이 되었는데도 화락한 빛이 줄어들지가 않아 허리는 굽지 않았고 눈은 침침하지 않아 강건함이 한창 젊었을 때보다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또한 세 아들이 슬하에서 모시고 있으며, 내외(內外)의 여러 손자들이 집 안에 가득한데, 모두들 시서(詩書)를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다가 세 아들은 또 집안이 모두 넉넉하여 쌀은 다른 사람에게서 꾸지 않더라도 충분하며 국은 나물국이 아니라 고깃국을 끓일 수가 있어서 평상시 봉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므로, 옛사람이 부모님을 편하게 봉양할 길이 없다고 상심하던 것이 이미 그 앞에는 올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삶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낙동강(洛東江)과 위천강(渭川江)이 만나는 합강(合江)에 가에 새운 정자를 짓고 그 정자에 붙여 시를 지었는데, 「낙고 초당에 붙임(題洛皋草堂)」이라는 칠언율시가 그것이다.

沙岸松皋枕碧流 모래가 소나무 둑 푸른 강 베고 앉은 곳,

計將終老築菟裘 장차 늙음을 다하려 은거지를 마련했네.

窓前二水千尋合 창 앞에는 천 길 깊은 두 강물 합하였고,

天外三山一髮浮 하늘 밖에는 삼산이 가벼이 떠 있는 곳.

斜日渡江翻絶壁 해거름에 강 건너니 절벽 거꾸로 비치고,

行雲拕雨過長洲 떠가는 구름은 비 몰아 긴 모래톱 지나네.

世間萬事無心久 세상의 온갖 일에 무심한지 오래되었는데,

磯上閒盟共白鷗 한가로이 낚시하잔 맹약 백구와 같이하네.

낙고초당(洛臯草堂)은 지금의 합강정[今合江亭]이라는 원주가 붙어 있다. 수련(首聯)을 보면, 낙고초당의 위치와 건립 동기를 묘사하고 있다. 모래톱 위로 소나무가 들어차 있는 둑이 있고, 그 위에 이 초당이 있다. 위에서 보면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과 강둑, 그리고 흰 모래톱, 푸른 강물이 보인다. 소나무는 푸르다. 깊은 강물 푸르다. 이 푸르른 두 대상을 사이에 두고 흰 모래톱이 펼쳐 있다. 흰색은 순수함을 상징한다. 푸른색은 성장, 희망, 발전, 개방, 진전 등을 상징한다. 소나무의 푸름과 강물의 푸름은 물론 다르다. 소나무의 푸름은 엄격히 말하면 녹색이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 하듯이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를 의미다. “한 해가 저문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은 것을 안다 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정자가 있는 주위 환경이 이렇듯 절개와 지조, 그리고 순수하면서 언제나 그 마음이 열려 있고 발전적이다.

이곳에 자아는 자신이 늙어서 은거할 곳을 정하였다. 대구(對句)의 토구(菟裘)는 본래 춘추시대 노나라의 지명인데, 은거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은공(隱公) 11년 조(條)에, “내가 장차 토구 땅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늙으리라.”는 말이 있다. 자아가 나이가 들어 신체상으로는 늙었지만, 그 마음은 홀로 시들지 않고 언제나 푸른 소나무와 같다.

함련(頷聯)에 가면 자아의 시선이 다시 아래위로 향한다. 정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 길 깊이의 두 강물이 서로 합하여 한줄기가 되어 흐른다. 물론 이 합강(合江)의 깊이는 아주 깊지는 않다. 여기서는 물리적 깊이가 아니라 자아의 마음의 깊이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자아가 내려 보니 두 강물이 하나로 합쳤다. 두 줄기 강물이 하나로 합친 것은 자연적이다. 이는 당나라 이백(李白)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라는 시 경련(頸聯)의, “삼산 봉우리 푸른 하늘 속에 반쯤 잠기었고, 두 강물은 나뉘어 백로주로 흐른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는 말과는 서로 대가 된다. 석천의 시는 둘이 하나가 되는 원리인데 비해 이백의 시는 하나가 둘이 되는 원리이다.

자아는 낙고초당이 있는 언덕을 내려와 강을 건너려 한다. 강을 건넌다고 했으니 정자는 상주(尙州)에서 봤을 때는 강 건너 편에 있다. 자아가 강가에 이른 시각이 아침이 아니라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다. 지는 해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저녁이 되면 모든 것이 활동을 멈춘다. 사람도, 새도 모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바로 귀소(歸巢)이다. 귀소(歸巢)는 활동은 멈추지만, 안식을 가져다준다.

해가 저물어 강을 건너려 하자, 절벽이 강물에 비친다. 마치 공중에서 거꾸로 물구나무 서기 하듯, 절벽이 거꾸로 서 있다. 그런 때 지나가는 구름이 비를 뿌린다. 구름은 본체(本體)가 없다. 구름이 비록 본체는 없더라도, 한가로이 떠가는 구름은 흥분하거나 격동하지 않는다. 경련(頸聯)은 자연의 한가로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한가로운 분위기가 미련(尾聯)과 연결된다.

자아는 이미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다. 마치 구름이 실체가 없듯이 세상의 일에 욕심을 버렸다는 말이 된다. 자아가 욕심을 버렸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마음이 한가로운 것은 마치 강 위의 백구(白鷗)와 같다. 자아와 외물(外物)과의 교감이다. 그는 외물에 부림을 당하는 것[役於物]이 아니라 외물을 부리[役物]고 있다.

斜日渡江翻絶壁 해거름에 강 건너니 절벽 거꾸로 비치고,

行雲拕雨過長洲 떠가는 구름은 비 몰아 긴 모래톱 지나네.

世間萬事無心久 세상의 온갖 일에 무심한지 오래되었는데,

磯上閒盟共白鷗 한가로이 낚시하잔 맹약 백구와 같이하네.

한편 그는 중화(中和)를 통하여 오욕(五慾)을 절제하고 있다. 그의 「느낌이 있어(有感)」라는 칠언절구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得莫欣欣失莫悲 얻어도 기뻐 말고 잃어도 슬퍼 마라,

惟天所命一從之 오직 하늘이 명한대로 따를 뿐이니.

若將理外謀身世 이치에 어긋나게 꾀부려 세상 살면,

在十終爲八九非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은 잘못되리라.

?중용?을 보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 감정이 일어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하였다. 중(中)은 미발(未發) 곧 정(靜)의 상태이고, 화(和)는 이발(已發) 곧 동(動)의 상태이다.

Ⅴ. 맺음말

后溪・西臺・愚谷・石川 先生의 敎學이

尙州儒學史에 끼친 영향

권 태 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金範・金沖・宋亮・金覺 先生의 敎學이

尙州儒學史에 끼친 영향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권 태 을

<目 次>

Ⅰ. 머리말

Ⅱ. 상주유학 개관

Ⅲ. 4선생의 교학 특성

1. 후계 김범의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2) 교학의 특성

(3) 소결(小結)

2. 서대 김충의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2) 교학 특성

(3) 소결(小結)

3. 우곡 송량의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2) 교학의 특성

(3) 소결(小結)

4. 석천 김각의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2) 교학의 특성

(3) 소결(小結)

Ⅳ. 맺는 말

- 4선생의 교학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

Ⅰ. 머리말

상주의 유학은, 한국유학사와 맥을 같이 하며 전개되어 왔고, 또한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녔음도 사실이다.

본고는,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까지 활약하였던 4선생(后溪 김범・1512∼1566, 西臺 김충・1513∼1572, 愚谷 송량・534∼1618, 石川 김각・1536∼1610)의 교학을 통하여 이 시기 상주유학의 특색 및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 여기서 일컫는 교학(敎學)이란 교육과 학문을 지칭함이며 가르치고 기름이란 뜻을 포함한 용어임을 밝혀 둔다.

본고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초기(15세기 중엽∼16세기초)에 함창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 선비들의 불의에 과감히 맞서 의리를 실천(다음 장상론)했던 유풍(儒風)과 종합하여 15세기에서 17세기초(조선전기)까지의 상주유학(유학사)의 특색을 밝히는 데 다소나마 기여하고자 함에 있다. 다만, 한 분만도 힘겨운데 네 분의 학문과 교육을 논하는 일이 역부족이요. 외람됨을 안다. 그러나 상주유학(사)의 진정한 가치나 한국유학사에서의 위상 정립은 이 시기의 유학 내지 유학사적 특색을 밝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본다. 필자는, 졸저 ≪상주한문학≫(2002)과 졸고 ≪상주시사≫(2010) 중의 <상주학술․문학편>에서 살핀 바로써 4선생의 교학 특색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을 개관하도록 한다.

Ⅱ. 상주유학 개관

상주는, 신라와 더불어 역사․문화를 같이 해온 고도(古都)요 웅주(雄州)로서 상주유학의 연원(淵源) 또한 깊다 하겠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행연구는 전무하고, 고려 이전의 상주유학을 국가시책에 미루는 방법 외에는 관계 문헌 자료조차 거의 조사되어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통일신라(688년 이전의 유학을 화랑정신 보급 및 국학 설치(682년) 등과의 관련성에서 살핀 바 있고, 통일신라 이후 역시 국가적인 유교정책에 따른 상주목의 유학책, 당나라 유학승으로서 학덕이 높은 고승(王師)이 상주에 주석한 분이 많았던 사실 등으로써 이 시기 상주유학의 위상을 추론한 바가 있다(상주시사, 제3편 학술참조).

고려조 역시 전기(918, 태조 1∼1170 의종24)는 국책으로서의 유학 교육 및 불교 성행과 더불어 전파되었던 선진국(중국)의 유학사상을 엿본 바가 있다(학술편 참조). 김수자(인종조・1122∼1146)는 상주 상산김씨 출신으로, 인종조의 학교 제도와 유학장려책의 한 면모를 엿보게 한 <행학기>를 남기었고 향리에서는 최초(기록상)로 사학(私學・서당)을 설치하여 유학을 장려한 공이 큰 선비였다. 또한, 고려 후기(1170∼1392멸망)에 이르면 상주토성으로서 상주박씨문・상산김씨문에서 중앙의 관계 출신자가 대거 등장하고 ≪고려사≫에 등재된 오른 분들도 많음을 알 수 있다. 상주목사 동산수 최자(1212년 장서기, 1241년 목사 부임)의 증언으로서도 상주유학이 선진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상락(上洛・상주 고호)에서 장서기(1212년 부임)로 있다가 뒤에 그곳 태수가 되어 다시 부임(1241년)하였다. (중략)

동남로에 출진(1247년)하고 상락을 순력하였는데 목사와 군수로부터 향교(鄕校)의 여러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가시(歌詩)와 인계(引啓)를 바치느라 나란히 나와서 길을 메꾸었다. 나이가 일흔이나 여든 살 남짓한 네 노인이 스스로 상원사로(尙原四老)라 부르며 짧막한 인(引) 및 절구시(絶句詩) 네 수를 바치었다.”

이 증언은 상주향교의 활성화, 상주문학의 성행, 학덕을 겸한 선비(尙原四老)로 상산사호(商山四皓)의 고장이 될 만한 풍토 등이 영남의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엿보게 해 주었다. ≪보한집≫에 상주 관련의 일화가 많은 것도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써도 상주가 교육향・문학향・유교(인물)향 등의 명예를 지니게 된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고려말에 이르면 상주가 영남의 제1문화선진지로 자리를 굳혔음을 상주목사로 부임(1343년)하는 근재 안축(1287∼1348)을 전송하며 익재 이제현(1287∼1367)이 쓴 서문을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남의 주군(州郡) 가운데 경주(慶州)가 가장 크고 상주(尙州)가 다음이라, 그 도(道)의 이름이 경상(慶尙)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使命)을 받든 자는 반드시 먼저 상주를 거친 뒤 경주에 이르는 까닭에 풍화(風化)의 유행은 상주를 말미암아 남으로 갔지 일찍이 경주를 말미암아 북상한 적은 없었다.”

거듭 밝히거니와 고려조에 이르면 상주가 고도요 웅주에 걸맞는 문화(교육・학술・정치・문학・경제 등) 향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상주유학이 선진했던 구체적 사실은 난계 김득배(1312∼1362)를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계 김득배는 회헌 안향(1242∼1306)・역동 우탁(1262∼1343)의 학통을 이은 불훤재 신현(1298∼1377)의 제자로 문무를 겸전했던 탁월한 선비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무고로 원사한데다 병화로 난계의 글을 보존하지 못하여 그의 유학사적 존재 의의는 앞으로의 고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여기서는, 상주유학 풍토나 조선유학사에 여말의 충절 선비들이 이룩한 절의사상을 난계를 통하여, 상산충의(商山忠義) 삼절(三絶)을 소개하여 둔다.

<난계 김득배(1312∼1362)는 선비로서 홍건적난의 충신이었으나 김용의 모함으로 고향에서 원사하였다. 난계의 제자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왕에게 허락을 받아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고 만시(輓詩)와 제문(祭文・동문선 소재)을 지어 애도하여 천하에 우뚝한 절의를 세웠다. 뒤에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순절하자 그의 제자 단구재 김후(金後・1372∼1404)가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예장하고 만시(輓詩)로써 애도하여 역시 절의 사상을 높이 천양하였다.>

상산충의 삼절은, 왕조 교체기의 혼란은 물론 신왕조에 대한 거부 세력의 미담이기에 더욱 표면적으로는 금기시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주의 선비는 물론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분들이 끼친 충의・절의 사상은 어느 교육보다도 상주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교육으로 살아남았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조선초에 이르면 상주읍성 중심 못잖게 함창 지방에서 중앙에 진출하여 현달한 선비가 많았다. 이분들 중에는 불행히도 연산군의 불의한 폭정을 막으려다 순절한 분이 많았고, 조선초 도학파 선비의 의리실천의 표본들이 되어 영남사림파 형성에 상주 함창 순절인의 절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하겠다. 이는, 고려말의 난계 김득배․포은 정몽주・단구재 김후 등이 이룩한 절의사상과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에, 함창 지방의 절의인을 간략히 소개하여 상주유학 조선초기의 학풍을 대신하고자 한다.

남계 표연말(1431∼1498)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학자요 문장가였다. 연산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은 직신으로 무오사화(1498)에 배소에서 순절하였다. 허백정 홍귀달(1438∼1504)은 문과로 대제학에 이른 학자요 문장가로서 역시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갑자사화(1504)에 화를 당하였으며, 아들 우암 홍언충(1473∼1508・문과교리)을 비롯하여 언승(진사현감), 언방(1470∼?・문과 박사), 언국(1475∼1504・진사 참봉) 등의 형제가 유배되거나 피화되어 군자유(君子儒)로서 허백정은 오늘까지도 존숭된다. 동계 권달수(1469∼1504)는 문과 교리로, 연산군의 비의를 사사건건 간하다가 갑자사화(1504)에 화를 당하였는데 죽은 순간까지도 동료를 아끼어 모든 죄를 자신이 안았던 신의는 영남 사림파의 자부심이 되었고, 부인 동래정씨도 남편의 순절에 자진한 열부로 일가충열(一家忠烈)을 이루었다. 이 외에도, 난재 채수(1449∼1515・문과 대사헌), 퇴재 권민수(1466∼1517・문과대사헌), 이자견(1454∼1529・문과 판서), 이자건(1455∼1524・문과 좌참찬), 이자화(?∼1520・문과 참판) 등도 다 연산군의 불의에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좌천되거나 유배되어 선비도(道) 실현에 앞장섰던 선비들이었다. 앞으로 연구의 과제이지만, 영남 사림파 형성에 함창 중심 도학자들이 이룩한 절의・의리사상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실만은 여기 밝혀 둔다.

상주 읍성을 중심으로 한 선비들의 활동은 함창 절의파 선비들보다도 거의 한 세대 뒤에 활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상주유학을 주도해 온 상산김씨나 상주박씨는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흥쇠가 엇갈려 조선조에 이르면 고려조에서보다 유학활동이 침체되었다. 이 같은 시기(16세기 중엽∼17세기초)에 상주에는 효제(孝悌)를 근간으로 하는 선비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운정 김언건(1511∼1570)은 진사로 교육자, 효행으로 사후 감찰이 증직된 효자이기도 하며 연악서원에 봉안되었다. 아들 석천 김각(다음 장 상론)이 효를 충으로 승화시켜 충효가의 평성이 났다. 서재 김신(?∼1592)은 무인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국함. 서재가 왜적에게 해를 입게 되자 아들 김유성(효자, 정려)・유명・유진・유희 등 4형제가 아버지를 구하려고 왜적과 항적타가 부자가 다 동시에 순절하여 ‘일가오충효(一家五忠孝)’의 방명을 남기었다. 후계 김범(1512∼1566, 徵士, 다음 장 상론)의 학문과 효성, 서대 김충(1513∼1572, 다음 장 상론)의 문학과 법도, 우곡 송량(1534∼1618, 다음 장 상론)이 임란에 왜적의 급습을 당하자 아들 송이회와 이절이 순절하여 아버지를 구하였고, 우곡의 두 딸로 효열로 정려가 내려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미풍을 후세에 내리었다. 석천 김각(1536∼1616)의 忠孝・율정 서극일(문과 正) 효자, 회암 윤진(1541∼1612) 효행으로 천거되어 현감이 됨, 월간 이전(1558∼1648)은 아우 창석 이준과의 우애로 전국에 알려진 선비, 서상남(율정의 아들) 진사・효자, 판곡 성윤해(학자・교육자・봉산서원 봉안), 불기당 노기(군수・교육자), 민여해(생원진사, 교육자・월간 창석 남계 강응철의 스승), 복재 정국성(진사・교육자, 김광두의 스승, 임란순국), 초간 권문해(문과 승지, 상주 우거, 대동운부군옥 저술), 괴정 김성(교육자, 김광두의 스승), 주일재 정이홍(학행으로 찰방, 임란창의), 유진(柳震・진사) 등도 당대 상주의 향풍・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비들이다. 특히 이분들 역시 상주가 충절향의 미풍양속을 이어 천양하는데 효제를 수양・학문의 근간으로 삼았던 선비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분들 중에서도 후계 김범・서대 김충・우곡 송량・석천・김각 등의 4선생을 선정한 것은 지금까지 향토사에서 임란전의 인물로는 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일컬어져 왔기 때문이다.

상주유학사상 16세기 중엽으로부터 17세기초까지의 상주유학의 특성과 유학사상의 위치 등을 고찰하는데 필자는 4선생을 선택하였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주의 인물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 임진왜란 직전의 약 1세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 상주유학(사)에 가장 영향을 폭넓게 끼친 선비로 향토사에서는 대체로 4선생을 일컬어왔기 때문에 4선생의 학문과 교육을 살피기로 한 것이다. 다른 분들에 대한 고찰 역시 이루어져야 되리라 믿으며, 우선은 4선생을 통하여 조선 중기초의 유학상 특성을 밝히고 그것들이 지니는 상주유학사적 의의를 고찰하기도 한다.

Ⅲ. 4선생의 교학 특성

1. 후계(后溪) 김범(金範・1512∼1566)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1) 학통(家學)

8대조 김득화(金得和) : 내원서령, 상산김씨 파조(派祖)

7대조 정신(鼎臣) : 증찬성사

6대조 겸(謙) : 선산부사・대호군・병조참의・권근에게 상주 풍영루기문을 받음. 삼은(三隱; 포은・목은・야은)과 오촌(五村; 陽村・遁村・杏村・厖村・桑村)과는 사우간으로 전해짐. 또한, 야은 길재의 스승이라고도 전함(상산지)

5대조 상직(尙直) : 1405년 문과급제, 집현적 부제학, 경연 겸 사관으로 세종이 총애한 문신이요 시인임. <승장사기>(상산지)를 남김.

고 조 신지(慎知) : 도염서승, 내원서령.

증 조 극충(克忠) : 통례문통찬, 세조1년 (을해)의 찬위에 상주로 은거하여 벼슬을 포기함.

조 예강(禮康) : 건공장군, 충무위부사직.

부 윤검(允儉) : 장사랑

본 인 범(範) : 자 덕용(德容)・호 후계(后溪) 또는 동계(桐溪) 옥성서원봉안. (※서대 김충과는 8촌)

자 홍민(弘敏) : 문과 전한. 임란창의대장, 근암서원 배향

홍미(弘微) : 문과 이조참의. 서애문인, 봉산서원 배향

6대조 이래의 도학과 문학을 가학(家學)으로 전수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 가학의 연원은 일문(一門)의 난계 김득배 등이 이룩한 도학에 닿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산김씨가문의 유학연원(儒學淵源)은 깊다 할 수 있다. 이에, 6대조 김겸(태종조 1401∼1418, 호 橋西)의 시(상산김씨세보권1) 한 수를 소개하여 조선초의 선비정신을 엿보도록 한다.

日暮松京慷慨新 해질녘 송경 생각하면 강개한 마음 새로운데

俯思天命屬眞人 가만히 생각하면 천명은 진인에게 맡겨졌네.

平生自號橋西老 평소에 자호를 교서노인이라 하였는데

斯世還爲漢北隣 이 세상에선 도리어 한양과 가깝게 되었네.

圃冶勁忠扶大義 포은・야은은 굳은 충성으로 대의를 붙들었고

厖陽籌策濟蒸民 방촌・양촌은 백성 구할 계책을 세웠네.

夷齊尙父無相悖 백이・숙제와 상보는 서로 어그러지지 않나니

强作明朝利用賓 힘써 밝은 조정의 이로운 빈객 되었네.

이 시는, 태종조에 영남의 민심을 진무하러 나아가 지난 일을 회억하며 쓴 시로, 조선초 선비들의 의리사상이 두 측면에서 해석되었음을 알게 한 시라 하겠다. 백의・숙제의 절의를 숭상하면서도 태공망의 경세제민의 사상도 존중되어야 할 것임을 노래하였다. 단, 그 어느 쪽의 의리나 나를 위함이 아니라 모두를 위함이어야 함은 시어(詩語)의 밖에 무한히 펼쳐 놓았다.

2) 약력

후계의 약력은 <가장・家狀>, <전・傳>, <유사・遺事> 등에서 간략히 정리한다. (이하의 다른 세 분도 대동소이함.)

1512년(임신・중종7), 12월 5일생.

1521년(10세), 뛰어난 재간과 도량이 시에 드러남.

1523년(12세), 상주목사 박상(朴祥・재임 1521∼?)이 부마를 야외에서 전송할 때 아이들도 구경, 부마가 아이들에게 시를 짓게 하자 다 도망쳤으나 후계만이 남아,

字民牧伯垂仁澤 백성을 사랑하는 목백은 어진 혜택 내리는데

少年賢相氣橫秋 어진 소년 재상의 기상은 가을하늘 가득 메우네.

라고 읊었다. 이때부터 시명이 널리 퍼짐.

1540년(27세), 진사과 장원, 시험관 모재 김안국(1478∼1543)이 후계의 답지를 보고, “도학과 문장으로 일세에 법도와 표준이 되리라.”(德業文章 權衡一世)라고, 칭찬함.(家狀)

※선비로서의 명성이 더욱 드러남.

1553년(40세), 부친상을 당하여 몸을 상할 정도로 상제례를 실천하자, 당시 목사 영천 신잠(부임 1552∼1554)이 감동함. 목사의 흥학에 음양으로 도왔을 것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교육에 성심을 다함.

1554년(갑인・명종9, 44세) 목사 신잠이 순직함에 유애비명(遺愛碑銘)을 닦음.

“하늘이 어진 목사를 내셨으니, 실로 우리 부모 같았도다. 선정을 베풀어 절로 백성들이 교화되어 잘 다스려지니, 고아를 구제함에 부유하고 권세있는 집안을 물리쳤도다. 사류(士流)를 이끌어 도와 임금님으로 하여금 알게 하였도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가르쳤으니, 은혜는 깊고 덕택은 두텁도다. 바야흐로 늦게 부임하였음을 노래하였더니, 가신 뒤는 사무치게 간절하도다. 비를 보며 눈물흘리니, 인해(仁愛)를 후세에 남겨 영구하리라. (공덕을) 이 돌에 새길 만하니, 공의 이름 사라져 없어지지 않으리라.”(김범, 申靈川遺愛碑銘)

이 명(銘)은 곧 신영천의 덕을 찬양함이면서 후계의 경세관이라도 하겠다. 또한, 내용으로 보아 신영천 목사가 선비를 장려하기 위하여 중앙에 천거한 일이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후계도 그 추천된 선비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1562년(19세), 8월 한질(寒疾)로 병을 얻은 뒤로는 병마에 시달림.

1566년(병인・명종21・53세), 봄, 학문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5월23일. 6조(六條)를 갖춘 선비로 남명 조식・대곡 성운・일재 이항・동강 남언경・후계 김범・석봉 한수 등이 천거 됨.

※6조는 晋나라 때 군(郡)의 중정(中正)이 인재를 천거하던 조목

1조. 충각비궁(忠恪匪躬) : 충성스럽고 공손하며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함

2조. 효경진례(孝敬盡禮) : 효도하고 공경하여 예의를 다함

3조. 우우형제(友于兄弟) : 형제와는 우애를 다함

4조. 결신노겸(潔身勞謙) : 몸을 깨끗이 하고 공로가 있어도 뽐내지 않음

5조. 신의가복(信義可復) : 믿음과 의리를 회복할 만함

6조. 학이위기(學以爲己) : 자신의 수양을 위하여 학문함

(이 6조는 명종21・9・12. 명경행수(明經行修)로 바뀜. 뜻은 경술에 밝고, 품행이 방정함)

◦6월 21일. 이조에서 6품직을 내릴 것을 청하여 윤허됨.

※진사 김범 소개

“경자년(1540) 사마시에 장원을 하였고, 상주에 산다. 문명(文名)이 있어 누차 천거되었으나 끝내 과업에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탈하여 가업에 힘쓰지 않고, 너무도 인자하여 노복들에게 매를 가하지 않았다.…”

(≪명종실록≫, 명종21(경진), 6월 21일. 이조에서 아뢴 말. 후계선생연구회, ≪징사 후계 김선생≫ 소재. 이하도 실록의 사실은 같음)

◦8월 11일. 옥과현감에 제수됨

◦8월 28일.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림

※사신(史臣)이 논함

“(이항 등 7인) 이들은 은거하여 뜻을 구하고 옛 도(道)를 좋아하여 본받아 배워 진실로 한 고을의 선사(善士)라 일컬을 만하고 또한 한 나라의 선사(善士)라 일컬을 만하다. (중략) 6경(역・시・서・예경・춘추․예악)의 심오한 뜻을 탐구하고 4자(대학・중용・논어・맹자)의 전수 심법을 얻어 도덕(道德)・성명(性命)의 학으로 후세에 모범을 보일 자들이 또한 나와서 보좌할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이는 후계가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린 뒤에 사신이 논평한 글임)

◦10월 7일(갑자). 사정전(思政殿)에서 상서원 판관 조식과 옥과현감 김범이 같이 배알함.

왕이, 말세를 당하여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명경행수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고금의 치란(治亂)・세도(世道)의 청탁, 치국(治國)의 방법, 위학(爲學)의 방법, 가언(嘉言), 선정(善政)에 대하여 아뢰라 함.

※요지

정화(政化) : 학문을 강구하여 이치를 밝히고 덕을 함양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화평하게 하여야 함.

치란(治亂) : 고금의 흥망을 거울삼아, 흥은 본받고 망은 징계해야 함.

치도(治道) : 오래도록 지속되고 전일(專一)하여야 함.

구현재(求賢材) : 삼고초려하는 성심으로 어진이를 구해야 함.

※평(評) : 조식의 말은 대단히 예리하고, 김범의 말은 지나치게 겸손하다.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옥과현감에 부임함.(상산김씨세보)

◦11월 28일. 관아에서 순직함.(상산김씨세보)

◦12월 10일(병진)

정원에서 전교, 옥과현감 김범이 죽었다 하니 슬프고 측은하다. 초자(超資)하여 벼슬을 추증하고 특별히 부제(賻祭)를 내리라 함. 부의와 사제문은 내렸으나 증직에 대하여는 당시 대사간이, ‘평소 좋아하지 않을 선비’(素不喜儒)라 하여 저지됨. 뒷날 대곡 성운이 졸하였을 때도 이 기준을 따름.

◦효행으로 정려가 내림(1635년), ≪상산지≫에 효자로도 입전됨. 배향(1647) 옥성서원

3) 학통․약력 요약

후계 김범(1512∼1566)은 안향 이후의 도학을 전수한 우탁의 문인 불훤재 신현(1298∼1377)의 제자인 난계 김득배, 난계의 제자 포은 정몽주, 포은의 제자 단구재 김후(난계의 3종손) 등으로 전승된 도학을 6대조 교서 김겸과 5대조 김상직이 이어 가학으로 내림. 5대조는 학문뿐 아니라 문학에도 능한 분이었고, 기묘현량과(1519년)에 급제한 당숙 외재 김옹은 상주목사 영천 신잠과 동방급제자로 후계의 학문과 처세에도 큰 영향을 미치었다고 할 수 있다. 학통상에서 보면 비록 가학(家學)이라 일컬을 수 있으나 그 영원은 고려말의 정통 도학의 정맥에 닿았다고 할 수 있다.

6조목의 학덕을 갖춘 명경행수(明經行修)로 천거되어 병중이었으나 명종의 지극한 예우에 감동하여 옥과현감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큰 뜻을 미처 펴기도 전에 관에서 순직하였다.

상주를 명실공히 학문의 고장・예절향으로 재확인시킨 장본인이요. 충절향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로서 후세에 끼친 공업은 아주 크다 하겠다. 이 항의 결론으로서 <사제문>을 소개한다.

<사제문・賜祭文>

“크도다 국량(局量)이여, 네 기국(器局)을 넓혔도다. 빼어난 재능 간직하고, 세상을 구제할 뜻 품었도다. 경술(經術)로써 증명함에는 더욱 넓고 더욱 깊어, 문장에 넘쳐나고 패옥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하였도다. 전 왕조에서 교육함을 즐겨 선비를 가려뽑아 학교에 입학시키고, 문인에게 과거에 관한 일을 맡김에 능히 삼가고 또 상세히 하였도다. 화려한 문장을 이루어 네가 규정된 수(數)에 으뜸이 되었도다.

중년에 속박에서 벗어나 한 언덕 한 골짜기에서 살아 안회(顔回)와 같이 가난하여 자주 양식이 떨어졌고 도잠(陶潛)과 같이 쓸쓸하였으나, 궁하여도 의리를 잃지 않고 너의 뜻을 지킴이 굳었도다. 사람이 시골에 처하면 혹 느슨하기도 하고 경쟁하여 다투기도 하나 너의 말은 충직하고 너의 행동은 공경하였도다.

내가 나라 워하는 생각에 어짊도 없고 이치에도 어두워, 6조를 갖춘 선비를 천거하라 명하였도다. 난초의 향기와 같은 인품이 저절로 드러나 네가 그 선발에 뽑히었도다. 좋은 말을 펴도록 재촉해 불러 내 너의 착함을 칭찬하려 하였더니, 밀봉한 상소로 자신의 죄를 탄핵하기를 병을 들어 슬픔을 진달하였도다. 나의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마음을 돌려 올라왔도다. 이치에 맞는 말을 듣고자 하여 강악(講幄)을 여니, 군왕의 다스림과 어지러워짐, 고금의 얻고 잃음, 학문하는 방법, 태평성대를 이루는 방법 등으로 조용히 주고 받음이 마치 울림에 답하듯 하였도다.

어찌 탱자나무와 가시나무에 상서로운 봉황이 깃들 수 있으랴. 설산(雪산)의 작은 일과 큰 일이 네가 가고 네가 머묾에 달렸었도다. 직무를 맡은 뒤 상하가 화합하여 내가 의지함이 바야흐로 두터웠더니 어찌 잠깐이라 아니하랴, 하늘이 속히도 빼앗아 갔도다. 교재관(翹材館)에 머문 것도 잠시요 나의 사랑함도 잠시었도다. 베풀게 하였으나 재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쓰고자 하였으나 한만 남았으니, 나라가 병들어 초췌해질까봐 나의 슬픔은 깊기만 하도다.”

이 제문은 기(起)・승(承)・轉)・결(結)의 4단 구성을 취하였으니 각 단락의 개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起) : 국량과 기국이 크고 넓으며 제세(濟世)의 뜻을 지녔으며, 경서(經書)의 취지에 맞는 글에 능하여 진사에 장원한 인재다.

승(承) : 궁하여도 지조를 지켜 의리를 변치 않았고, 시골에 처하여서도 언충(言忠)・행경(行敬)의 선사(善士)로 일국의 선사(善士)와 같았다.

전(轉) : 6조목에 해당할 만한 학덕(學德)이 저절로 드러나 명경행수(明經行修)의 선비로 발탁됨. 병을 핑계로 사양했으나 왕의 정성에 뜻을 굽힘. 왕의 이란(理亂)・고금의 득실・학문 방법・치치(致治)의 술책을 물음에 메아리같이 대답하여 가납되다.

결(結) : 크게 쓰려 하였으나 하늘이 앗아가니 슬픔은 깊기만 하다.

※“설산의 경중이 네가 가고 머묾에 달렸었도다.”

왕의 신하에 대한 신망이 어떠했던지를 알게 함.

가히, 군신간의 의리를 가늠할 만한 사제문이요, 일향(一鄕)의 선사(善士)가 일국(一國)의 선사(善士)임을 후계)가 실증해 보임으로써 상주의 위상은 모든 문화면에서 크게 높아졌다 하겠다. 후계와 동시에 추천된 남명 조식・대곡 성운・남언경・한수 등이 수를 누리어 학자로 오늘날까지 일컬어짐에 비하면 후계의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2) 교학의 특성

후계 김범의 학문 성향을 수양론에 치중한 사실로 파악하고 그 수양의 성향을 정시(靜時)에서의 수양 내지 학문을 중요시한 사실을 처음 발표한 논문이 있어 크게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1) 군자유(君子儒)로 입명(立名)한 선비

군자(君子)란 덕망 높은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일컬음이요, 유가(儒家)의 이상적 인간형이기도 하다. 이같이, 군자다운 선비로 후계 김범을 평한 것은 궁중의 사신(史臣)이었으니,

“은거하여 디닌 뜻을 지켜 나아가고 옛것을 좋아하여 본받아 배워 진실로 한 고을의 선사(善士)라 일컬을 만하고 또한 한 나라의 선사(善士)라 일컬을 만하다.”

(약력, 1566. 6. 28 참조)

라고, 하였던 것이다. 선사(善士)는 덕이 있는 훌륭한 선비를 일컬음이요 “한 고을의 선사라야 한 고을의 선사와 벗할 수 있고, 한 나라의 선사라야 한 나라의 선사와 벗할 수 있다” 한 분은 맹자다. 나아가, 후계 김범의 사람됨을 군자라 평한 이는 식산 이만부(1664∼1732)이다. 이는 곧, 후계가 군자유였음을 공안한 것이라 할 수 있거니와 먼저 식산의 군자유에 대한 관부터 보기로 한다.

“선비란 학문하는 이를 지칭함이다. (중략) 공자께서 군자유가 되어야지 소인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필자주, 논어・옹야)라고 경계한 까닭은 무엇인가. 군자로서 선비는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 군자의 학문을 하는 사람이요, 소인으로서 선비는 비록 군자의 학문은 하되 마음에 지닌 바에 한 터럭만큼이나마 실(實)하지 못한 곳이 있은즉 곧 군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선비란 이름은 있으나 소인에 가까운 일을 하는 자이다. 마음이 실(實)하고 불실(不實)한 것과는 어디에서 이를 구별할 것인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함(爲己)에서 학문하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함(爲人)에서 학문하는가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군자유와 소인유의 구별은 곧 성실(實)한가, 불성실 한가에 달렸고 성실함과 불성실함의 구분은, 자신의 수양을 위하여 학문(爲己之學)하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학문(爲人之學)하는 가에 달린 것이라 하였다. 식산 이만부가 후계 김범의 학덕을 일러 군자라 한 것은 곧 후계가 군자유를 지향한 선비였음을 천양함이라 할 수 있다. 식산은, 입과 귀를 돕는 일로만 학문을 함에 비하여 후계는 군자로서 선비였다고 하였다.

“대개, 그의 학문은 집안에서 효제(孝悌)하는 일로부터 임금을 섬기는 일에 이르기까지 풍속을 착하게 하고 남을 사랑함에 한결같이 수신하고 삼가 행함을 근본으로 하여 지조를 지킴은 확고하고 실행하는 바는 발랐으니, 진실로 독실하고 후덕하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다.”

이는 곧, 뜻한 바와 행하는 바(知行)을 일치하도록 자신을 다스릴 줄 안 군자였음을 특기한 것이다. 이로써 보면, 선비면 다 이상형을 군자유(君子儒)에 둘 것이나, 나라에서 인정하고 향당에서 군자유를 실현한 선비로 추앙받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 본다.

2) 수도(修道)를 중시한 학문

유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로써 그 긍극적 목적은 천하에 밝은 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그 목적 수행의 단계를 ≪대학≫에서 개인적인 수도(修道)의 단계로써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삼고, 사회적 행도(行道)의 단계로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 삼는 게 통례다. ‘명명덕’을 성취하는 일이 유자의 최고 이념이나 학문하는 여건・취향에 따라 수도(修道)적인가 행도(行道)적인가 하는 차이를 보이게 됨은 사실이나 두 과정은 결코 별개로 여겨서는 안 됨을 영조대왕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 명덕(明德)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나의 한 마음(一心)에 있고, 명덕을 밝히는 공부는 또한 어디에 있는가? 또한 나의 한 마음에 있다.”

이는, 명덕은 인간 본래적인 본성이니 내 한 마음을 다스림에 따라 천부적인 덕을 지니기도 하고 밝히기도 함을 강조한 것으로, 역시 수도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지수 정규양(1667∼1732)이 쓴 후계집 발문을 먼저 보면,

“선생은 유독 나의 한 마음(一心)을 온전히 수양하고 덕(德)을 굳게 지켜 오래도록 오로지 하는데 온갖 마음을 쏟았다.(필자주: 명종에게 진대한 말) 논자들은, 제공이 진대한 바가 그 누군들 지극한 계책으로 임금님을 도와서 인도할 것이 아니리오마는 근본부터 철저하게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는 선생의 말이 가장 절실하였다고들 하였다.

선생의 학문 단계는 비록 후학이 감히 엿보아 추측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이제 문집 중의 저 존양부(存養賦)・태부(怠賦)・의부(疑賦) 등의 부(賦)를 보면 근본을 맑고 깨끗이 하여 유지하여 지키는 의리 아님이 없으니, 가히 선생의 덕행과 공업이 실로 스스로의 일심(一心)을 온전히 수양하고 덕을 굳게 지켜 오래도록 오로지 하는 데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정주(程朱)의 수양법으로 핵이 되는 공경을 주로 함의 주경(主敬) 공부에 있어 마음이 이미 드러난 기발시(旣發時)의 성찰(省察)보다도 미발시(未發時)의 존양(存養)을 더 중시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존양(存養)은 곧 본심을 지켜 놓지 않고 천성을 순하게 하여 해치지 않음을 뜻하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이다. 후계가 의부(疑賦)를 통하여 심덕(心德)을 극명(克明)함으로써 의심을 짓지 못하게 함이나, 태부(怠賦)를 통하여 한결같은 경(一敬)을 씀으로써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할 것을 주장한 것 등도 다 그 본지는 주경(主敬) 공부의 존양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존양부․存養賦>의 첫 부분만 보면,

“마땅히 조용할 때에 노력을 기울여 삼가 경외하고 일신(日新)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다듬음으로부터 학문과 견식을 넓혀서 심성을 기른다. 항상 마음에 새겨 잊지 말고 훈계하여 삼가 드러나지 않는 데서 깊이 생각하고 발하기 전에 온갖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완양전구・完養專久’함을 그대로 읊은 것이요, 미발시(未發時)의 수도(修道)에 수양의 비중을 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공경함으로써 존심양성한 뒤라야 불의(不義)가 행해질까봐 성찰할 일도 덜게 됨을 귀하게 여긴 탓이라 하겠다. 비유하면, 근원(샘)을 맑게 하면 탁류가 흐르지 않는 이치와 같다 하겠다.

3) 자득(自得)함으로써 교화의 표본이 된 스승

후계 김범은 경서와 사서와 제자백가류의 서책을 읽지 않음이 없었고 특히,

“시경・서경・논어・맹자・대학・중용 및 소학등의 책인 즉 다 미묘한 데까지 정밀히 연구하여 스스로 깨달아 얻음(自得)이 많았으며, 반드시 내 몸에 친(體行)히 하고 실천함에서 증명하려 하였기에 세속의 유자들이 단지 이목만을 돕는 것과는 달랐다.”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앎(知)과 행(行)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음을 자득(自得)이라 여겼기에 가능한 공부요 수양이었다 하겠다. 맹자도, 자득한 뒤라야 남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道․방법)로써 함은 자득(自得)하고자 해서이니, 자득하면 거(居)함에 편안하고, 거함에 편안하면 이용함이 깊고, 이용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씀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스스로 얻어 깨달음이 저절로 남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에, 행적의 몇 사실로 후계가 스스로 자득한 바가 이웃에게는 어떤 감화를 주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뜻을 지님에 어려서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겸허하고 온화하여 일찍이 남에게 얼굴빛을 변함이 없었다. 비록 지극히 어리석어도 반듯이 지성으로써 대한 까닭에 사람들이 다 즐겨 그의 덕을 흠모하고 어진이나 어리석은 이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다 감화되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이 돌아가심에 미치어 완고한 사람이나 천한 종들도 다 눈물을 흘리며 진정을 다하여, ‘덕인(德人)을 잃었도다!’ 라고 하였다. (중략)

삼가고 후덕하고 충직하고 공경함으로써 향리에 처하는 도리로 삼아 교화하고 따뜻하게 기르며 선량하게 하여 한 지역을 교화시키었으니, 지금의 상주 풍속이 아름다움은 다 공의 힘을 입은 파급이라 하겠다.”

이는, 후계 김범이 일생을 통하여 자득(自得)한 성실(誠實) 하나로 일관하여 자기완성은 물론 남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어 나아가 상주의 풍속을 아름답게 한 주역이 되었다고 한 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정규양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선생의 가르침(風)을 들은 자는 다 효제(孝悌)에 돈독히 하고 염치에 힘쓸 줄 알아 학업을 진보시키고 학문과 기술을 닦고 익힌 까닭에 선생의 향토는 홍유(鴻儒・대학자)와 석덕(碩德・학식이 많은 선비)이 대를 이어 태어나서 지금도 시례(詩禮)의 풍속이 울연하다.”

라고, 하였다, 또한, 권두인(權斗寅)은 서문에서,

“사담(沙潭)과 성극당(省克堂) 두 공이 아들이 됨으로써 능히 높은 덕을 수립하여 가학(家學)을 더욱 창대하게 하니 세인이 다투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칭송하였다.”

라고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요약하면, 후계는 자득(自得)함으로써 교화를 베푼 선비였다고 하겠다. 한 마디로, 후계의 존재 자체가 교화의 표본이 되었다고 하겠다.

(3) 소결(小結)

후계 김범의 학통은, 삼은(三隱) 오촌(五村)과는 사우관계로 도학에 밝았던 6대조 김겸과 세종조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5대조 김상직으로 전승된 가학(家學)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선대에는 일문(一門)에 대학자 난계 김득배가 나서 회헌 안향・역동 우탁・불훤재 신현으로 전승된 도학을 이어 포은 정몽주・단구재 김후로 이어지는 도학가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후계의 가학은 도학사상(史上) 그 연원이 깊다 하겠다. 후계는, 가학으로 도학과 문학을 전수하였으며 기묘현량인 당숙 김옹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후계는 재능과 도량이 걸출하여 12세에 상주목사(박상)와 부마(성명미상) 앞에서 시를 지어 일찍부터 시명(詩名)이 났다. 27세에 진사과 장원에 뽑혔을 때 시관이었던 모재 김안국이 후계의 답안을 보고, “도학과 문장으로 일세에 권형이 되리라” 하였으니, 모재의 식안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효성이 지극하여 상주목사 영천 신잠을 감동시키었고 그의 흥학육영 사업에 동조하였으며, 순직(1554년)함에 신영천유애비를 닦았다.

6조목의 학덕을 갖춘 명경행수(明經行修)의 징사(徵士;1566년・53세)가 되어 이란(理亂)・치도(治道)・구현재(求賢材) 등에 대하여 계책을 드리되 ‘일심을 온전히 수양하여 덕을 굳게 지키고 오래도록 지닐 것’(완양전구・完養專久)을 주장하여 왕의 신임이 두터웠고, 조정에서는 후계의 인품을 상주의 선사(善士)일 뿐 아니라 일국의 선사(善士)로 예우하였다. 옥과현감에 부임(1566・10월)하여 큰 뜻을 미처 펴지도 못하고 순직(11월 28일)함에 왕이 애도하여 사제문(賜祭文)에서 ‘설산(雪山・옥과현)의 경중이 너의 가고 머묾에 달렸다’ 라고 급서를 심히 애석해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후계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상주유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지대한 공을 하였다 하겠다.

후계의 교학 특성은 첫째, 군자유(君子儒)로 입명(立名)한 선비란 특성이 있다. 효제・충신을 근간으로 하는 성실 하나로 일생을 일관하여 6조목을 갖춘 명경행수의 징사가 되었으며 끝내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유자의 최고 이상형인 군자유(君子儒)로 입명하였다. 둘째는, 수도(修道)를 중시한 학문을 한 선비란 특성이 있다. 후계는, 사회적인 행도(行道)보다는 개인적인 수도(修道)가 선행되어야 함을 실천으로 보인 선비다. 일심(一心)을 다스림에 완양전구(完養專久)함을 주장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도자로서 선비도(道)를 이룩하였다. 셋째는, 스스로 깨달아 얻은 자득(自得)으로써 향토의 유학자 뿐 아니라 귀천․노소가 없는 모든 이의 교화・감화의 표본이 되었다.

한 마디로 후계는, 상산김씨 도학가(道學家・金得培 중심)의 연원에 맥을 닿은 가학(家學)으로 도학과 문학을 전승하여 명경행수(明經行修)로 징사(徵士)가 되어 일국의 선사(善士)로 추앙되었고, 향토에서는 군자유(君子儒)로 대대로 추앙받고 있다. 후계로 하여, 상주에 성행한 가학(家學)은 한국 정통도학맥에 연원이 닿은 것이 많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고 이는 곧 상주의 유학은 상주 나름의 유학사를 후계 이전부터 형성해 왔음을 확인한 것이라 하겠다. 후계의 학덕은, 당대 상주가 지녔던 미풍양속으로 예향(禮鄕)․교육향(敎育鄕)・유향(儒鄕)에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큰 몫을 하였을 뿐 아니라, 충절향(忠節鄕)으로 거듭나는 데에도 그 초석을 높은 선구적 존재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실로, 후계의 존재 자체가 감화・교화의 표본이 되었다고 하겠다.

2. 서대(西臺) 김충(金冲․1513∼1572)의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1) 학통(家學)

8대조 김득화(金得和) : 내원서령, 상산김씨 파조(派祖)

7대조 정신( 鼎臣 ) : 증찬성사

6대조 겸( 謙 ) :선산부사・대호군・병조참의. 권근에게 상주 풍영루기문을 받음, 삼은(三隱: 포은・목은・야은)과 오촌(五村・陽村・遁村・杏村・厖村・桑村)과는 사우간으로 전해짐. 또한 야은의 은사로도 전해 집.(상산지)

5대조 상직( 尙直 ) : 1405년 문과급제, 집현전 부제학. 경연 겸 사관으로 세종이 총애한 문신이요 시인임. 상주 <승장사기>를 씀.

고 조 신지( 愼知 ) : 도염서승・내원서령.

증 조 극효( 克孝 ) : 충무위부사정.

조 삼산( 三山 ) : 전력부위.

부 옹( 顒 ) : 호 외재(畏齋). 진사

(1518), 학행으로 천거되어 계공랑・사옹서직장. 기묘현량과에 급제(1519)하여 전적. 학문을 위하여 사직함.

본 인 충( 冲 ) : 호 서대・문과장원, 성균사성, 시에 능함. 효곡서원 봉안.(후계와는 8촌)

자 지대(之垈), 지연(之衍; 호 西川, 사헌부감찰, 임란창의유공), 女權以中, 女金覺(다음 장 상론), 女卞慶長 생원, 女辛鳳瑞・진사, 女尹瑱・현감・효행천거.

서대가의 학통은 후계가의 학통과 맥을 같이 하여 선대는 회헌 안향・역동 우탁・불훤재 신현으로 전승된 도학을 전수한 난계 김득배가 다시 포은 정몽주・단구재 김후로 내린 도학의 연원에 맥이 닿는다. 3은 5촌과 사우관계였던 6대조 김겸의 도학과 세종조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5대조 김상직의 도학과 문학은 물론 기묘현량과 출신인 부친 김옹의 도학과 청렴・의리가 형성해 온 가학을 전수하였다. 특히, 김옹은 상주목사 영천 신잠(재임 1552∼1554)과는 기묘현량과 동방급제자로 신잠이 재임시 경영했던 흥학육영에 동참하였을 것은 자명하나 기록이 없어 아쉽다. 서대 김충이 연악서재에서 후계의 시에 차운한 시에서도 영천 신잠의 끼친 뜻(18개 서당건립)을 극구 찬양한 사실로도 서대가와 신영천과는 당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을 것임은 알 수 있다.

서대가 비록 시에 능하였으나 학문 역시 도학가의 가학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2) 약력

서대의 행적을 알 만한 문헌 자료가 현재는 없다. ≪서대시집≫과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 있었다 하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서대의 행적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우복 정계세가 찬한 <중직대부 성균관사성 김공묘갈명>과 무첨재 정도응이 쓴 <한거잡기・閒居雜記> 소재의 시화(詩話) 두 편 및 ≪상산지≫ <인물>과 <문한>의 시 세 수가 전부이다. 묘갈명에 의거하여 약력을 간추린다.

1513(계유・중종8), 출생. 자 和吉, 호 西臺.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도학을 전수하였으나 문학은 저절로 성취할 만큼 재능이 뛰어남.

1551년(명종6・39세), 4월. 알성문과 장원, 성균전적・형조좌랑・사헌부감찰(정6품)

◦한양 제학사들 사이에 시명(詩名)이 남.

◦학사들이 서대의 시재를 시험코자 벽송정으로 초대하고, 호운(呼韻)함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일좌를 탄복시킴.

碧松亭畔釋麻衣 恩雨當年夢也非

借問杜鵑何似鳥 終宵猶道不如歸

※시의(詩意)에 자연귀의 사상이 두드러짐.

◦삼각산 중흥사에 조정의 선비들과 모임. 풍악(금강산)으로 가는 중이 시를 청하여 아래와 같이 지으니, 일좌의 선비들이 붓을 멈추고 사귀기를 청함.

天下名山三十六 海東皆骨卽仙山

十年夢繞毗盧頂 夜夜松聲枕上寒

※시의가 쇄락(灑落)하여 서대의 아취(雅趣)를 느끼게 함.

1553년(41세), 황해도 좌막 겸 춘추관 기주관(정5품).

◦성품이 곧고 청렴결백하여 권세에 아첨하지 않음으로 하여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고 간혹 헐뜯음을 당하기도 함. 술을 독약처럼 여기는데 술주정을 부렸다고 탄핵받자 남들이 웃고 탄식하였다 함.

1556년(44세), 함흥부 통판.

1557년(45세), 성균관직강・호조정랑・승문원 교감(종4품).

1561년(49세), 평택현령.

1565년(53세),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

◦서대초당을 짓고 독서하고 시 지으며 때로는 종이학(紙鶴)을 초당 위에 띄워 가까이 있는 벗에게 자신이 있음을 알리고, 더불어 시를 읊음(한거잡기).

<水鏡齋卽事>

尹子執酒盃 李子展詩軸 西臺獨無事 傾聽玲瓏滴

※시의가 유한(幽閑) 청정(淸淨)하다.

1567년(55세), 호조정랑・봉상시첨정・성균사예(정4품)

1568년(56세), 초계군수

1571년(59세), 성균관사성(종3품)․선공감정(정3품당하)

1572년(60세), 4월 장자를 잃고 건강을 상할 정도로 애통해 함.

11월 서울 집에서 별세

◦문집 실전, 효곡서원 봉안

3) 학통․약력 요약

서대 김충은 후계 김범과는 8촌간으로 같은 학통(가학)을 이었다고 하겠다. 고려말 도학의 정통맥을 이은 난계를 이었다고 하겠다. 고려말 도학의 정통맥을 이은 난계 김득배의 학통을 이어 6대조 김겸과 5대조 김상직은 가학으로 도학과 문학을 내리었고, 기묘현량과 출신인 외재 김옹은 서대에게 특히 의리학을 전수하였다고 하겠다. 서대가 벼슬길에서도 청렴결백하고 질박한데다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라 간혹은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하기도 한 것이 성품 탓도 있겠지만 부친으로부터 받은 교학 때문이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서대의 학통이나 행적을 자세히 알기 위하여서는 뒷날을 기다려야 하리라 본다.

(2) 교학의 특성

서대의 학문이나 교육에 관한 정보는 묘갈명이 전부이나 그나마도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뒷날의 연구를 기다리며, 여기서는 시와 묘갈에서 그 단편적인 면모나마 살피기로 한다.

1)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중히 여긴 선비

서대 김충이 후계의 <연악서재・淵嶽書齋>(7언율시) 시에 차운한 두련(1・2구)에서는

爲學奇功只復初 학문하는 기이한 공은 단지 본성을 회복하는 일인데

難彫須戒責如予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는 말, 꼭 나를 경계하고 꾸

짖는 것 같네.

라고, 하였다. ‘복초(復初)’란, 처음의 본성을 되찾음을 일컫는 말이다. ≪논어・학이≫편,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의 주(註)에서,

“학(學)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나 이것을 앎에는 먼저 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뒤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선각자의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善)을 밝게 알아서 그 본초(本初・性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초(復初)’는 곧, 본성을 되찾음이요 이 본성을 지키는 마음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두련의 둘째 구에서는 낮잠을 자다가 스승인 공자에게 꾸지람을 들은 재여의 고사를 들어 항상 성실한 마음으로 본성을 회복하는 일에 근면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미련(7・8구)에서는,

殷勤更請諸君勉 은근히 거듭 청하니 제군은 힘쓸진저

道在吾心不在書 도(道)는 내 마음에 있지 책(書)에 있는 건 아닐세.

라고, 맺았다. 도(道)란, 본성을 따라 ‘당연히 행하는 길’이라 도란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그러니 그 도의 실행 여부는 내 마음에 있지 책에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곧, 두련과 미련을 종합해 보면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나 본성을 따라 행하는 길로서의 도(道) 역시 본디의 내 마음을 지킴에 있음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까닭에 서대 역시 본심을 보존하며 착한 성품을 길러냄이란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중요시 하였고, 나아가 후진들에게도 이를 깨우치려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2) 남의 본보기가 된 법가의 후예

법가(法家)란 법도를 지킨 세신(世臣)을 가리킴이니, 여기서는 대대로 법도를 지켜 온 가문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서대가를 법가라 칭한 것은 당대 상주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던 일로 보인다. 석천의 아들 김지복(知復・문과 장령)이 자신의 어머니를 소개하여, “비(妣)는 상산김씨 사성 충(冲)의 따님이요. 기묘현량(己卯賢良) 옹(顒)의 손녀다. 여러 대 쌓은 인덕(仁德)의 보답으로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의 아름다움과 내조의 공을 한 몸에 모아서 법가(法家)의 출신이라 칭송받았다.” 라고 하였고, 창석 이준은 묘갈명에서.

“공의 휘는 각(覺)이요 비(妣)는 상산김씨 사성 충(冲)의 따님이다. 법가(法家)에서 태어나 부인이 지켜야 할 법도를 안팎으로 갖추어 일문(一門)의 본보기가 되어 모두 추앙하였다.”

라고, 하였다. 서대가가 당대에는 널리 법도가로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거니와 서대 또한 법가의 출신답게 진퇴에 다 예의(禮義)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우곡 송량은,

先進行藏符禮義 선배의 나고 듦은 예의에 부합하니

晩年料理有琴書 만년에 보살핀 일은 금서와 벗함이었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아도 서대는 예의범절이 뛰어난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가풍에 감화되어 벼슬에 나아가거나 초야로 돌아 오거나가 다 예의에 맞았던 것이다. 이제, 서대의 인품에 대하여 살피기로 한다. 창석 이준은,

“우아하고 깨끗함(雅潔)을 스스로 지키고 보전하여 뜻을 고상하게 지님(志尙)으로 구차스럽지 않아 시가 맑고 온화하며 담백하여 많은 사람들이 전하여 외었다.”

라고, 하였다. 성품이 아결(雅潔) 지상(志尙)하여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널리 전송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그 시를 외고 그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한 말과 같이, 서대의 시에서 그의 고상한 인품까지도 느끼었을 것이다.

또한 우복 정경세는 묘갈명에서,

“공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굳세고 질박하며 남들과 사귐에는 준엄하고 공평무사한 태도여서 평소에 즐겨 벗을 초대하거나 방문하여 친하려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볼 때에는 더욱 고관에게 붙좇지 않았으며 당부할 이유가 있어도 일찍이 사정(私情)을 따르지 않은 까닭에 가는 곳마다 번번이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하였고, 혹시는 모함을 당하기도 하였다.”

라고, 공의 인격과 행적을 요약하였다. 나아가 우복은 묘갈명에서,

모욕을 당하고도 참음을 남들은 공손함이라 여기고, 혹독한 형벌을 주장함을 충직이라 여기나, 공은 이 같은 데 능하지 못하여 곤경에 빠지고 궁함이 마땅하였도다. 남들은 공을 곤궁하다 여기었으나 공은 스스로를 영달이라 여기었도다.

서대의 물 맑고도 담담하이며, 완연히 공의 용모와 같았도다. 추동의 집 그윽하고도 깊음이여, 진실로 공이 살 곳이었도다.

라고, 하였다. 이 명(銘)은, 서대의 성품이 청염(淸恬・맑고도 담담함)하고도 요심(窈深・그윽하고도 깊음)한 성품을 기리는 데 주지가 있으면서도, 아첨을 공경이라 여기고 가식적인 충직으로 권세가에 빌붙는 선비들과는 멀었기에 재능을 지니고도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음은 부차적으로 알려 주었다.

(3) 소결(小結)

서대 김충은 후계 김범과는 한 집안에서 태어난 3종제로서 후계와 가학의 전수는 거의 같았다 할 수 있겠다.

3은(三隱) 5촌(五村)과는 사우관계였던 6대조 김겸의 도학은 야은(冶隱)의 스승이 될 만큼 높았다 전하고, 5대조 김상직 역시 세종조 집현전 부제학으로 경학과 문학에 뛰어난 선비였으며, 이분들은 상산김씨가문에 전승된 난계 김득배의 의리실천의 도학에 깊히 감화된 선비들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서대의 부친 김옹은 기묘현량과 출신의 도학자로 당대에 상산의 법가(法家)로 불릴 만큼 학덕을 겸전한 선비였으나, 조광조의 실각으로 인한 영남 사림파의 고통을 서대 역시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대는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하였으며 고상한 뜻을 지켜 권세가에게도 굽힘이 없어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으나 향리에서는 지사(志士)로 존경받은 선비로 역시 경학과 시에 특출한 분이었다.

다만, 서대의 교학의 특징을 첫째,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중히 여김으로써 수도(修道)의 소중함을 일깨운 선비요. 둘째, 법가(法家)의 후예로 그의 학문과 인격은 남의 본보기가 된 선비란 특성을 살펴보았다. 다만, 서대의 행적・교학 등은 뒷날을 기다려 재평가되고 정리되어야 하리라 본다.

3. 우곡(愚谷) 송량(宋亮․1534∼1618)의 교학 특성

우곡 송량에 대하여는 간단한 인물 소개에 그쳤고, 학회에서 우곡의 역사관과 효곡서원에 대한 발표는 이구의교수의 뿌리학회에서의 학술적 접근이 처음임을 밝혀 둔다.

(1) 학통과 약력

1) 학통(家學)

고 조 송복산(宋福山) : 여산인, 자현대부 판한성부사, 세종조에 문학으로써 천거되어 벼슬에 나아가 선정을 베풂.

증 조 숙기( 叔琪 ) :사헌부 집의, 세종조에 유일(은일)로 천거되어 한성서윤이 됨. 언론이 예절에 맞아 사림의 추중을 입었고, 세칭 월당선생(月塘先生)으로 일컬어짐.

조 세휘( 洗輝 ) : 용양위 부사직, 연산조에 사직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주 소곡(素谷)으로 은거하여 시거조가 됨. 만년은 서사(書史)로 날을 보냄.

부 당 ( 璫 ) : 용양위 부호군, 명종조에 선공감역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대대로 전해진 가학을 이어받고, 도량이 정대하고 절조가 굳었으며 청렴하고 검소하여 향사림의 존숭을 받음.(家狀)

본인 량 ( 亮 ) : 자 景明 호 愚谷

자 이회(以誨, 임란에 부친을 구하려다 순절, 정려), 이필(以弼), 위와 같은 일로 순절, 정려), 이수(以脩, 병절교위), 이기(以琦, 장례원판결사), 이진(以鎭, 효행), 이안(以安), 여노경건(女盧景健, 임란순절, 열부 정려), 여김계(女金繼, 진사), 여신태(女申兌), 여정이괄(女鄭以适, 임란순결, 효열부 정려)

우곡 송량은 가학으로서는 부친 호군공의 가르침을 받았다.

“호군공이 일찍이 가르침에 법도가 있어 여항의 잡스러운 책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고, 더불어 노는 이도 단정한 선비가 아니면 바로 경계하여 나무랐다. 이로 말미암아 깊이 감화된 바가 있어, 한 마디 말로 자신의 과실을 공격하는 자를 얻으면 곧 나의 스승이라 여기었다.”

이로써 보아도 우곡은 어려서부터 호군공의 엄훈으로 대인관계나 학문연구의 방법을 철저히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우곡은 대곡 성운을 사사하여 인격 수양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성대곡선생을 좇아서는 지극한 이론을 널리 듣고는 몸소 충분히 터득하고 마음에 새겨 행하여 거경궁리함으로써 근본의 바탕을 삼았다. 그러므로 감히 혹시라도 나태함이 없었다. 혹, 과거에 응시함이 이롭다는 말을 하는 이가 있으면 부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명예가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뜬 구름과 같을 뿐 아니라, 나의 허다한 정력을 자질구레한 기예에다 헛되이 소비하여 세상에 자랑함이니 또한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하셨다.”

위의 말은, 거경궁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곧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철저했음을 알게 하는 말이라 하겠다.

우곡은, 가학으로서는 자기관리에 철두철미한 인격자가 될 것을 부친으로부터 전수하였고, 대곡 성운을 사사하여서는 위기지학에 철저한 거경궁리의 수양법을 배웠다고 하겠다.

2) 약력

1534년(갑오・중종29), 12월 20일 출생

◦“어려서 한양에 들어 예원(藝苑・문예계)에서 놀아, 명성은 성균관에 알려지고 탁월한 재능 마음껏 펼쳤네.”

◦대곡 성운을 사사하여 학문하는 방법을 들음.(정확한 연대는 미상)

1566년(33세), 불기당 노기・복재 정국성 등과 낙사계(洛社稧)를 조직하여 향음주례를 실시하고 향풍쇄신에 솔선함.

◦낙사계서문을 쓰고 조약 11조를 제정할 때에는 대곡 성운의 자문을 받아 완성함.

1570년(37세), 가을,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뵈러 감, 집지 전에 서거(당년)하여 회한으로 여김, 복재 정국성에게 보낸 시에서, “능히 우리 무리로 하여금 귀의할 곳 있게 하네.”라고 하였다.

◦모친상에 효자로 이름이 남.

1582년(49세), 부친상에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향토민이 동명(素谷)을 효곡(孝谷)으로 부름(창석 만사).

◦사림에서 효행으로 천거하고자 함에 환성재 하락이, “송모는 단지 한 가지 선(善)한 일로만 칭송할 일이 아니다.” 하여, 멎었다.(가장)

◦천인(天人)・호현(好賢)・풍속(風俗) 등의 책문을 지어 경세(經世)의 뜻을 보임.

1592년(임진・선조25․59세), 장자 이회로 하여금 향교 대성전 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김.

◦김각(의병대장)・이전・이준 등과 의병을 일으켜 소모관이 됨.

1593년(60세), 백화산 피난 중 왜적의 급습에 위급한 부친을 구하려다 이회와 이필이 순절함.

◦선비 노경건의 처 송씨(순절・열부정려), 선비 정이괄의 처 송씨(수절・효열부 정려).

◦자녀를 잃고 난 뒤 우곡이,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죽었는데, 신하는 군왕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구나.”라 하고, 북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가 다 감동하였다 함.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로 향토의 미풍양속 조성에 큰 영향을 끼침.

◦한강 정구가 왕에게 효행・학행으로 천거함.

“상산의 일사(逸士) 송모는 효우가 출천하고 학술이 경서(經書)와 부합한다” 라고, 하였음.(가장)

◦오봉 이호민이 행재소에 천거함.

“송모는 임천(林泉)에서 수도(守道)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짐을 구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음.(상동)

◦왕이 헌릉(태종릉) 참봉에 제수함. 우곡이 고령인데다 전쟁 중이라 좌우에서 부임을 만류하니,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음은 곧 자신만 있음이요. 군부(君父)는 없음이다.” 라 하고, 부임함.(상동)

◦10월 4일, 선조가 환도하여 각 능을 봉심케 하니, 헌릉만이 온전히 받들고 있어 승의랑(정6품)을 내림.

◦유곡도 찰방에 제수되어 매사에 선치(善治)함.

1594년(61세), 관찰사 홍이상이 선정자로 보고하여 통훈대부(정3품당하)에 특진됨.

1598(65세), 한성참군이 됨. 곧 사직하고 귀향하여 효곡정사를 짓고 주자학에 침잠하여 공부하고 후진을 가르치며, “천하의 즐거움을 이것과 바꿀 것은 없다” 라고 함.(가장)

1599년(기해・선조32・66세), 김각・정계세・이전・이준・김광두 등과 낙사계를 합계하여 향풍쇄신에 솔선함.

◦가을, 존애원(存愛院) 창설에 솔선하여, 존심애물의 인애정신을 실현함.

1602년(69세), 전옥서 주부・사포서 별제・사헌부 감찰(정6품)이 내려졌으나 불취. 향토의 존경받는 선비로 학문과 향토 선숙(善俗) 회복에 주축이 됨.

1606(73세), 김각・정경세・조정・이전・이준・김광두 등과 합력하여 조선 도학의 정통이 영남에 있음을 표방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함.

◦창건시 정약통문(定約通文)과 관찰사(李時發)에게 건립 비용을 협찬해 줄 것을 건의하는 글을 씀.

1607년(74세), 정월 보름. 존애원 백수회(白首會) 개최에 주빈이 됨.

1614년(81세), ≪주자어류≫(140권)를 종지(宗旨)만 간추려 5편으로 요약한 ≪정성기・定性紀≫를 편찬함.(현재는 서문만 남음)

1618년(무오・광해군10․85세), 12월 9일 별세함.

◦≪우곡선생문집≫(4권), 효곡서원 봉안.

3) 학통․약력 요약

가학으로서는 부친으로부터 자기관리에 철두철미한 인격자가 될 예의와 선비의 처세에 대하여 엄한 가르침을 받았고, 대곡 성운으로부터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근간으로서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요체를 들었다.

우곡은 출천한 효성으로 향토민을 감화시켜 효곡(孝谷)이 생겨나게 하였으며 나아가 임란에는 효를 충으로 승화시키었고, 아들들은 효로써 순절하고 딸들은 열로써 순절하였다. 한 가정에 충효열의 장한 일이 생김으로써 향토의 미풍양속을 더욱 진작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정신문화사에도 길이 남을 만한 조선혼의 거룩함을 보였다고도 하겠다.

우곡은, 과거에 뜻 둔 바 없이 위기지학에 오로지 하였으나 학행과 효행이 절로 드러나 천거한 이가 많았고 조정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헌릉 참봉에 제수되어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으나 벼슬이 낮다고 하여 추호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더구나, 향당에서는 우곡의 존재 자체가 교화・감화의 표본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낙사합계 결성・도남서원 창설 등에서 늘 솔선한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또한, 우곡은 만년에도 더욱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위한 저술에 힘써 ≪주자여류≫(140권)을 그 종지만 요약하여 ≪정성기・定性紀≫ 5편을 남기었다. (현재는 서문만 남음) 이로써도 우곡은 학덕을 겸전한 상산의 큰 선비었다 할 수 있다.

(2) 교학의 특성

1) 수기(修己)를 중시한 경세관

유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실천하여 천하에 명덕(明德)을 밝힘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공자의 도(道)에 근거한 가르침이다. 수기치인의 도는 크게 스스로의 수기(修己)를 우선으로 하는 수도적(修道的:格物・致知・誠意・正心)인 측면과 보다 사회적으로 남을 다스림(治人)을 중시하는 행도적(行道的 ;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 측면으로 그 편중됨을 나눌 수는 있으나 수도(修道)와 행도(行道)가 결코 둘이 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우곡은 수기를 우선으로 하여 수도함을 중시한 경세관을 지녔음을 잠(箴)・명(銘)・책(策) 등에서 확인하도록 한다.

잠(箴)은 일깨움을 목적으로 하는 경계의 글로, 우곡은 두 편을 남겼다. 마음은 한 집안의 주인과 같다는 <심여일가주잠・心如一家主箴>을 통하여, 주인이 없는 집이 패망하듯 마음을 잃은 일신(一身) 역시 망한 몸임을 밝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과 방종한 마음을 거두어 다잡는 수방심(收放心)의 실행이 소중함을 경계하였다. 또한, 왕이 된 자는 백성으로써 하늘을 삼아야 한다는 <왕자이민위천잠・王者以民爲天箴>으로써는 왕의 진정한 하늘(天; 眞理・至重至要)은 저 창창한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백성임을 경계하였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을 하늘로 여겨, 왕 스스로를 날로 새롭게 함(日新)으로써 군도(君道)나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가능함을 일깨우려 하였다. 이 또한,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경세관임을 알 수 있다.

명(銘)에는 장단을 재는 자(尺)를 통하여 마음에 새길 경계의 뜻을 드러낸 <장척명・長尺銘> 한 편이 있다. 이로써도 본래적인 제도나 법도를 잃으면 존재의 가치가 없음을,

“모난 술그릇(觚)이 모나지 않으면, 모난 술그릇이라 할 수 있으랴, 모난 술그릇이라 할 수 있으랴.”

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모가 나야 할 그릇이 모를 잃으면 본질을 잃음이라 경계하였다. 이는, 명실상부한 명분(名分)을 잃으면 스스로의 존재 가치는 물론 이루는 일이 다 헛것임을 스스로에게 경각시키려 한 명(銘)이나, 서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명분(名分)을 명분답게 지킴은 성실(誠) 밖에 없음을 경계한 우곡의 경세관이기도 하다.

책(策)은 왕의 물음(策問)에 대답하는 대책(對策)과 선비가 정사에 대한 계책을 스스로 왕에게 드리는 진책(進策)이 있다. 우곡의 <천인책・天人策>은,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왕이 묻고 이에 답한 대책문이다. 그 첫머리에서, “임금(君)은 하늘의 자식(子)이다. 임금이 능히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방법은 한 마음(一心)이 성실(誠)한가 아닌가에 불과하다.” 라고, 전제하였다. 나아가, 임금의 마음이 중정(中正・치우침이 없음)해야 할 일과 학문이 정성(精誠)에서 이루워져야 할 일을 제시하여 왕의 경세관을 경각시키려 하였다. 이 또한 군도(君道)의 요체는 성의(誠意)・정심(正心)의 단계적 수양을 거친 다음이라야 베푸는 정사가 중정무사(中正無私)하고 정성되어 임금과 백성, 하늘과 사람 사이의 정도(正道)가 행하여지리라 헌책하였다.

<호현책・好賢策>은 어진 인재를 좋아하는 방책을 왕에게 드린 진책이다. 우곡은, “성실함으로써 본심을 보전하고, 예의로써 자신을 단속(반성)함이 곧 인재를 취하는 근본이 바름이다.” 라고, 하였다. 본심을 지키고 예의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왕이라야 어진 인재를 얻을 수 있다 한 것이다. 이 또한, 수기(修己)에 성실한 뒤라야 치인(治人)의 군도(君道)가 이루어지리라 현책한 우곡의 경세관이다.

<풍속책・風俗策>은 교육으로 감화시키는 풍화(風化)의 주체가 임금(君)인 만큼, 풍속은 위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과 미풍양속을 짓는 도솔(導率・이끌고 거느림)의 방법으로는 ‘바른 것(正)으로써 거느리고’(率之以正), ‘예의로써 이끎’(導之以禮)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위정상(爲政上) 이상적인 덕치주의(德治主義)․예치주의(禮治主義) 실현을 강조한 우곡의 경세관이다. 이 또한 임금부터 바름(正;正心・正道)과 예의를 갖춤이 곧 미풍양속을 이루는 근본이라 헌책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를 요약하면, 우곡은 서민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수기修己)를 우선하는 수도(修道)의 대상을 정심(正心・수방심(收放心)・일신(日新)・성의(誠意)・성실(誠實)・중정(中正)・정성(精誠)・예의(禮義) 등으로 삼았다. 이는, 일반 서민에게서만이 아니라 위로는 임금(君)에 이르기까지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은 나의 수양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일깨운 우곡의 경세관이다. 각 편에 은밀히 함축시켜 놓은 군도(君道)・왕도(王道) 정치에의 염원 또한 주목할 만한 경세관이었다 하겠다.

2) 덕치(德治․禮治)를 위한 휼간(譎諫)

이 항에서는 부(賦) 세 편을 통하여 우곡이 왕의 덕치를 위하여 어떤 휼간을 하였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심여일가주부・心如一家主賦>는, 앞에서 살핀 같은 제목의 잠(箴)과 주지는 같으면서도 정심(正心)・수방심(收放心)을 못하였을 때 주인은 없어진다는 사실로써 후세인에게 충고한다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임금(君)을 지칭하지 않았으나 이면적으로는 임금에게까지 넌지시 간(諫)함임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예자군지대병부・禮者君之大柄賦>는, 예의란 임금의 대병(국가를 다스리는 큰 권력 곧 大權)이니, 대권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읊었다. “임금이 발라야 나라가 다스려짐”(君正而國治)과 “하늘의 날줄(經・常道)이 서니, 땅의 씨줄(緯・조화나 질서)이 전해진다.”(天經已立 地緯已定)는 사실을 읊어 군신・상하의 관계가 바르게 됨을 전제로 하였다. 나아가 중국에서는 하・은・주 삼대의 지치(至治)가 하대로 내리며 예양의 사상이 쇠퇴하였음을,

“예의로 겸양하는 세상이 멀어짐이여, 능히 하늘의 질서를 쓰는 자가 드물도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주(周)나라의 대병(大柄)이 기자(箕子)가 동래함으로써 조선으로 옮겨져 왔다 하였다. 주나라의 왕이 쓰던 예(禮)가 조선으로 옮겨와 기자가 팔조지교(八條之敎)를 베푼 사실을 긍지로 삼았다. 이 부는, 표면적으로는 중국보다는 조선이 덕치(예치)에서 더 정통성을 지닌 사실을 읊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예(禮)를 임금(君)의 대병(大柄)으로 옳게 운용하고 있는가 하는 휼간이 함축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의란부・猗蘭賦>의 ‘의란’은 아름다운 난초란 말이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불우한 심사를 노래한 곡으로 ‘의란조(操)’의 준말이다. 이 곡은, 공자가 천하를 주류하고도 자신의 도를 행할 수 없어 노나라로 돌아와 산골에 은거할 때 향기를 뿜는 난초만 무성함을 보고 자탄하여 지었다 한다. 우곡은 의란조를 부(賦)로 읊어,

“오제(요・순・우・탕・문무) 이미 죽음이여, 장차 어디로 돌아갈꼬, 선니(宣尼․공자)의 혼령 계심이여, 내 장차 이에 귀의하리라.”

라고,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공자(공자학)에게 귀의하리란 소망을 노래한 것 같다. 그러나 천하에 도를 행하고도 남을 공자를 등용치 못함으로써 공자의 자탄을 담은 의란조를 의란부로 읊은 이면에는 역시 인재등용의 득실을 임금에게 묻고 있는 작자의 휼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 편의 부(賦)를 통하여서도, 정심(正心)・수방심(收放心)을 못하면 한 가정의 주인 노릇을 못하듯 왕노릇도 못함과 같음을, 덕치(예치)의 주체인 왕이 덕과 예를 갖추지 못하면 또한 왕노릇이 어려움을 인재등용의 득실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짐을 휼간하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들 휼간 또한 서민으로부터 임금에 이르기까지 자기수양이 우선하여야 함을 넌지시 간함으로써 우곡의 수기(修己) 중시의 수도관(修道觀)과 경세관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3) 향풍(鄕風)을 쇄신한 충효가법(忠孝家法)

우곡의 일생은 충효・예절의 생활화로 점철된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항에서는 우곡가의 충효가법이 향토의 풍속에 어떤 폐단을 없애고 새롭게 하였는지를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우곡의 효행을 일일이 예거할 수는 없지만, 4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감동한 향토민이 효곡(孝谷)으로 동명을 바꾸어 부른 사실(창석 이준의 만사) 하나만으로도 그 효행의 실체를 가히 짐작은 할 수 있다. 더구나, 한강 정구나 오봉 이호민 등이 조정에 우곡을 천거할 때에도 다 학행과 효행을 겸비한 선비로 추천하였다(60세 약력 참조).

임진왜란에 우곡은 의병을 일으키고, 아들 이회(以誨)와 이필(以弼)이 목숨이 위태한 아버지를 구하러 왜적에게 대항하다 순절하여 나라에서는 정려를 내려 효행을 기리고 향토에서는 ≪상산지≫에 효자로 입전하였다. 딸 노경건의 처 송씨는 부군을 따라 순절하였고 정이괄의 처 송씨는 피난길에 부군의 부자가 같이 병사하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수절하니 나라에서는 열부로 정려하고 향토에서는 ≪상산지≫에 열부로 입전되었다. ‘일가충효열’의 가문이 태어남으로써 향풍 쇄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을 뿐 아니라 고결한 조선혼을 임란사에 길이 남기었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천거로 헌릉(태종릉) 참봉에 제수되니 좌우에서 우곡이 고령(60세)인데가 전쟁 중이라 부임을 만류하자,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음은 곧 자신만 있음이요. 군부(君父)는 없음이다.”(가장)

하고, 부임한 사실이나 같은 해 10월 4일 환도한 선조가 가장 먼저 각 능을 살피게 하였을 때에도 수직자(守直者)는 헌릉밖에 없어 일곱 품계나 뛰어넘어 정6품 승의랑이 된 사실도 우곡의 충성이 충심(衷心)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곡의 충효・의리에 대하여 허후(許厚)는,

“가정 교훈 역시 말로 표현하지 않고 바른 도리를 좆아 효우할 뿐이었다. 선생은 평생 자신을 굽혀서 남의 비위맞춤을 수치로 여기어, 비록 세상에 드러나게 쓰이지 않는다 하여도 나아감에 예(禮)가 있고 물러남에도 의(義)가 있었다.”

라고 하여, 우곡은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실행함을 소중히 여겨, 효우 또한 우곡이 실행한 바요 정정당당한 삶을 살아 진퇴에도 예의(禮義)가 있었다고 한 것이다. 특히, 효우정신으로 가법(家法)을 삼아온 가풍에 대하여는 긍지와 사명감이 남달랐으니, 아들 이진(以鎭)을 우복 정경세의 문하로 보내면서는,

“보배나 재물은 쓰임에 다함이 있지만 충효를 누림은 무궁하니 모름지기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은 즉 우리 집 가법(家法)에 누됨이 없으리라.”(가장)

라고 하여, 충효의 가법을 전수하여 전승하기를 당부하였다.

우곡은, 몸소 충효를 실천하였고 나고 듦에 예의를 지킴으로써 그 존재 자체가 후학들에게는 교화의 표본이 되었다. 1566년(병언・명종21), 당대 상산의 큰 선비들이었던 노기・김신・정국성・김성・정여관・권문해・정이길・김각・윤진 등의 16인과 낙사계(洛社稧)를 최초로 결성하여 풍속의 세속화를 막고 미풍양속을 짓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낙사계조약서문>을 썼으며, 진덕근행(進德謹行)・과실상규(過失相規)・성애상접(誠愛相接)・환난상구(患難相救)・유경상하(有慶相賀)・유상상조(有喪相吊) 등의 11조목을 제정할 때에도 “고례(古禮)에 합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방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여겨, 스승인 대곡 성운에게 질정을 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1599년의 낙사계 합계 때나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할 때에는 향당의 기덕(耆德)으로서 매사의 자문에 성실히 임하였음은 필자도 이미 파악한 바가 있다.

우곡은 전승의 가법으로서의 충효 정신을 몸소 실현하고 자녀들을 교화시켜 자신을 비롯한 자녀 4인이 ‘일가충효열’의 거룩한 정신을 발양함으로써 가문의 명예는 물론 향풍쇄신의 인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우곡가의 충효 가법은 그 자체가 곧 산 교훈이요 교화의 대상이었다고 하겠다.

4) 후학을 위한 선배의 원려(遠慮)

우곡의 학문과 교육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많지는 않다. 특히, 그의 도학 사상을 소상히 알 만한 ≪정성기・定性紀≫(2권)나 예학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가례보유・家禮補遺≫(3권)의 일실은 물론 유문(5권) 조차도 병화・화재로 잃어 현재는 원집(2권)과 부록(2권)을 합쳐도 4권밖에 남아있지 않다.

우곡의 학문과 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대방가를 기다리며, 본고에서는 우곡이 어떤 태도로 학문에 임하였고 교육적 효과를 바랐는가에 주안을 두고, 후학을 위한 선배의 원려가 무엇이었든지만 살피기를 한다.

후학을 위한 학문 풍토 조성에 공적으로 활약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낙사계 조직이나 존애원 건립에 솔선한 것들이 다 광의의 교화운동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학문과 교육의 장으로서 도남서원(道南書院) 창설(1606・선조39)에 솔선한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우곡이 도남서원 창설에 솔선하였던 배경을,

“때는, 큰 난리의 뒤를 당하여 향리에는 선한 풍속이 없고 선비들은 지향해야 할 일에 어두웠다. 이른바 학문한다는 선비들은 다 명예를 구하는 사사로움에 나아가 끝내 공정한 도에 들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일찍이 이를 걱정한 까닭에 동지 제현과 더불어 오현원(五賢院)을 낙동강 위에 창건하고, 조문으로 된 규정을 정하고 세워 학자로 하여금 귀의할 바가 있게 하고 권장하여 이끌어 보살핌에 있는 힘을 다 하니, 사람들이 다 마음을 다하여 본받으려 하여 심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가장)

라고, 하였다. 임란을 겪은 뒤 민심은 불안정하고 선비들조차 명예를 쫓는 데 급급하여 학문의 본질을 잃을 지경에 이른 향토의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존현・교학의 서원을 창설함에 솔선하였다 함이다. 창건시 정약통문(定約通文)을 내어 서원 건립의 장애 요소를 제거하였고, 당시 경상관찰사(李時發)에게 건립의 비용을 보태어 달라는 편지를 보낸 일 등은 다 후학을 위한 원려에서 였다 하겠다.

다음은 사적으로 후학・초학자를 위하여 저술한 두 가지 일을 소개하도록 한다. 첫재, ≪정성기・定性기≫(5편 2권)를 저술한 일이다. 이는, ≪주자어류․朱子語類≫(140권)를 각 분야별로 요지만 간추려 성정(性情)을 안정하는 단서(법칙)라는 뜻으로 ≪定性紀≫ 5편을 저술한 것이다. 저술의 목적을 우곡은,

“단지 책이 질 수가 너무 많아서 사대부들이 오히려 애석하게도 한 번 보는 데는 부지런하나 한갓 구이지학(口耳之學) 만을 숭상하여 승부를 가리기에 힘써서 이기(理氣)・성정(性情)에서도 그릇되게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심지어는 이단의 도를 스승삼고 이단의 논을 인애(人・仁愛)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실로 이 책을 미처 보지도 않고 자기 견해로 억측하여 판단한 것이다. (중략) 권(卷)에 따라 분류하고 그 도체(道體・본체)와 학문하는 종지(宗旨・으뜸의 뜻)만을 간추렸은즉 곧 태극(太極)・성명(性命)・건순오상(健順五常)・원형이정(元亨利貞)・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의 무릇 5편을 합쳐 한 책으로 만들어 이름을 ≪정성기≫라 하였다. 그것이 주자가 반복하여 발명한 상세함에 혹 차례의 차이나 오류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러나 또한 혹시라도 조금은 신학(新學・초학자)이 강명(講明․해석하여 명백히 함) 함에 편리하고 간편함을 돕는데는 보탬이 있으리라 이를 뿐이다.”

라고 하여, 신학(新學・초학자)들이 ≪주자어류≫를 강명하는 데 편리하고 간편함을 돕기 위하여 저술하였음을 밝히었다. 이는, 후학을 위한 원려에 기인한 저술이면서 평소에 우곡이 주자학에 정통하였음을 알게 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서문만 남아 그 전모를 알 수 없음이 아쉽다.

둘째는 <경설・經說>을 저술함이다.

우곡은 경서의 해설로서 <경설>을 남기었는데 그 내용은 총론을 비롯하여주역(周易)・서(書)・시(詩)・주례(周禮)・의례(儀禮)・춘추(春秋)・예기(禮記)・논어(論語)・대학・중용(大學中庸)・맹자(孟子)・가어(家語)・효경(孝經)・이아(爾雅)・하소정(夏小正)・좌전(左傳)・가례(家禮)・육예(六藝)・오성(五性)・사단(四端)・칠정(七情) 등이다.

이는, 각 경서(뒤의 4제는 경설)마다 저자・구성・교육 목적・오류변증 등을 가하여 각 경서의 특성을 밝힘으로써 신학자들에게는 각 경서를 이해하는데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이에,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설을 소개한다.

“퇴계선생 왈, ≪대학≫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입덕(入德)하는 문(門)인 까닭에 학문하는 일이라 이르고, ≪중용≫은 도(道)를 밝히는 글이요. 마음(心)을 전하는 법인 까닭에 교육하는 일이라, 하셨다.

수신하고 입덕하는 일이 아니면 명도(明道・도를 밝힘)하고 전심(傳心・마음을 전함)하는 가르침(敎)을 베풀 수 없으며, 명도(明道)․전심(傳心)하는 가르침이 아니면 수신하고 입덕하는 학문을 탐구할 수 없다. 이것이 ≪중용≫과 ≪대학≫이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다.

학자가 용공(用工․공을 들임)함에는 심신(心身)에서보다 더 절실함이 없는 까닭에 ≪대학≫에서는 마음(心)을 말하였고, 교육자가 도를 논함에는 성리(性理)보다 먼저 할 것이 없는 까닭에 ≪중용≫에서는 성(性)을 말한 것이다.

주자가 대학서문에서 성(性)을 논한 것은 ≪대학≫의 정심(正心)이 실제 성선(性善)이기 때문에 성(性)의 처음(初・근본)을 회복하기 위함 때문이요. 중용서문에서 마음(心)을 논한 것은 ≪중용≫의 설성(說性)이 본디 마음에 온축된 것을 드러냄으로써 심법(心法)을 밝히기 때문이다.”

후학을 위한 우곡의 원려는, 일차적으로 유도를 보호하고 창명함에 있었지만 나아가서는 후학들의 학문하는 지름길을 열어주려는 마음과 경서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게 하는 데까지 미치었다. 이는 곧, 도학자요. 교육자로서 후학을 위한 원려를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고 선비의 도를 다하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원려였다고 하겠다.

(3) 소결(小結)

우곡 송량은 예의와 절의를 숭상해 온 가학을 전수하였으며 특히 부친으로부터는 실천 위주의 선비도(道)를 익히어 어려서부터 자신을 단속함에는 철저하였다. 밖으로는 당대 성리학의 대유였던 대곡 성운을 사사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수양법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들어 일찍부터 벼슬길을 멀리 하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우곡의 학문이나 교육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주자어류≫(140권)와 ≪가례보유・家禮補遺≫(3권) 및 유문 5권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일부 또는 서문만 남아 아쉽다.

우곡의 효성은 천출이어서 부친상에는 동명이 효곡(孝谷)으로 바뀔 정도로 남을 감화・감동시키었으며, 임란에는 의병의 소모관이 되어 충성하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다 효에 순절하고 딸들은 효열에 순절함으로써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지고(至高)한 덕행을 이루었다. 이로하여 향토사에 방명이 영세토록 남아,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길이 일깨우는 산 표본이 되었고,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위태할수록 왕명을 따름이 신도(臣道)라 여겨 고령(60세)임에도 불과하고 전란 중에 임소로 나아가 직무에 충과 성을 다하여 불과 1년만에 위계가 통훈대부(정3품당하)에 이르렀다. 그러나, 벼슬길에는 잠시요, 향리로 돌아 온 뒤에는 학문과 교육에 성의를 다하였으며, 후진을 위한 학풍 조성이나 향풍의 쇄신에는 늘 솔선하여 실행을 위주로 하였다.

우곡의 교학 특성은 수기(修己)를 중시한 경세관을 먼저 들 수 있다. 특히, 잠(箴)・명(銘)・책(策)을 통하여 왕도(王道)・군도(君道)의 성취는 나부터 도를 닦은 뒤라야 백성을 다스릴 수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일깨우려 하였다. 다음은, 덕치(德治・禮治)를 위한 휼간(譎諫)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서도 덕치의 주체인 왕이 정심(正心)・수방심(收放心)을 못하고서는 왕도・인재등용 등에 성공할 수 없음을 넌지시 직간(直諫)하였다. 세 번째는 향풍을 쇄신한 충효가법(忠孝家法)을 들 수 있다. 우곡은 가학으로 충효사상을 전수하여 스스로 충효의 실체를 ‘일가충효열’로 보여줌으로 하여 향풍의 쇄신뿐 아니라 상주가 충절임을 가법을 통하여 재확인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향토에서 우곡이 참여한 낙사계・존애원・도남서원 설립・운영 등에서도 지행(知行)이 합일된 선비였기에 항상 사림의 긍식이 되어 임란 후의 상주의 민풍・향풍을 순화시키고 미풍양속을 전승하는 일에도 지대한 공을 하였다 할 수 있다. 넷째는 후학을 위한 원려(遠慮)를 들 수 있다. 공적인 일로서 낙사계・존애원・도남서원 결성이나 창설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곡은 사적으로도 후학을 위한 염려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는 신학자(新學者・초학자)를 위하여 ≪정성기≪定性紀≫(2권)와 ≪가례보유≪家禮補遺≫ 및 <경설・經說> 등을 남기었으니 이는 곧 우곡이 학자로서의 원려였으니 역시 선비도 실현의 사명감에서 였다 할 수 있다.

4. 석천(石川) 김각(金覺・1536∼1610)의 교학 특성

(1) 학통과 약력

1) 학통(家學)

5대조 김수화(金守和) : 영산인, 공조참의, 상주 시거, 당대 대문장 괴애 김수온의 제, 배 상산군 김득제의 손녀.

고 조 민 ( 旼 ) : 형조좌랑

증 조 공저 (公著) : 동지중추부사, 1507년(중종2), 권신 유자광을 참할 것을 주청하였다가 남곤・심정의 무고로 극형 당한 직신(直臣), 명종조 신원, 복작.

조 자 ( 滋 ) : 장사랑, 은거불사, 배 흥양이씨 효열로 의인(宜人)에 봉해지고 복호・정려가 내림, 부군의 상을 당하여는 8세아 언건을 데리고 10리 길을 오가며 묘소 참배.(운정집)

부 언건 (彦健) : 호 운정(芸亭), 성균진사, 후덕하고 실천궁행한 교육자요. 효자로 추숭됨.

“은거하여 후생을 가르쳐 지금 우리 향토가 예문(藝文)과 예악(禮樂)으로써 서로 숭상하는 것은 그의 공이 크다.”(이준, 석천묘갈명)

학행・효행으로 천거되어 증사헌부 감찰, 연악서원 봉안, 교유(交遊), 퇴계 이황・소재 노수신・갈천 임훈・옥계 노진・후계 김범・서대 김충・입암 류중영・초당 허엽・불기당 노기・약봉 김극일・학봉 김성일・후조당 김부필・사암 박순・금계 황준량・송계 권응인 등.(운정집・서율정 교유록)

본 인 각 ( 覺 ) : 자 경성(景惺), 호 石川, 연안서원 봉안, 배 서대 김충의 여(女), 기묘현량 김옹의 손녀, 法家 후예로 칭송됨.

자 지백 (知白・창의유공 동부참봉) : 지절(知節・선공감첨정)・지덕(知德)・지복(知復・문과장령), 女康震立․주부(벼슬)

석천 김각의 학통은 5대조모가 상산군 김득제의 손녀인 관계로 난계 김득배를 비롯한 김득제의 도학에 맥이 닿을 수 있었으며, 당대 대학자요 문장가였던 괴애 김수온의 아우(5대조부)였던 점으로 보아도 석천가의 가학은 도학・문학상으로도 연원은 깊다 하겠다. 또한, 증조의 직절(直節)과 조모 흥양이씨가 효열부로 정려가 내린 일이나, 부친 운정 또한 학행・효행으로 벼슬이 내린 선비로 향풍 쇄신에는 물론 당대 영남의 명공 석덕들과 폭넓은 교우를 통하여 상주의 학문 풍토 조성에도 운정선생으로 칭도되었다. 석천은 연원 깊은 가학으로 도학과 학문의 전수는 물론 의리와 효열이 이룬 가풍에 교화되어 스스로 효를 충으로 승화시킨 임란창의장이요, 교육자로 길이 남게 되었다.

2) 약 력

1536년(병신・중종31), 10월 25일생.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부친 운정의 가르침을 받아 절의사상과 효우사상에 깊은 감화를 입음. 효성이 특출함.

◦배운 바를 몸소 익히고, 일을 당하여서는 처단함이 명쾌하니 운정이, “아이에게 통솔하여 다스리는 재능이 있다.” 하였다. 시부(詩賦)에도 능하여 어려서부터 명성이 났음.

1566년(31세), 노기・김성・송량 등과 낙사계를 조직하여 향풍쇄신에 동참함.

1567년(32세), 성균진사가 되어 시명(詩名)이 널리 퍼짐.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함.

1568년(33세), 문하의 월간 이전(학천・현감)・창석 이준(문과・부제학)・월담 김정룡(문과・군수) 등이 다 준재들이다.

◦9세였던 창석 이준이 물에 빠진 친구를 의리와 기지로 구함을 알고 ‘장래 위인이 되리라’고 격려함.

1570년(35세), 부친상에 효자로 널리 알려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함.

◦낙동강 가에 합강정을 짓고 은거함, 종족들에게 “평일에 쌓아둠이 없으면 병란이나 흉년에 대비할 수 없다” 하고, 사창(社倉)의 뜻을 좆아 각기 곡물 약간씩을 내어 비축하게 함.(이익, 행장)

1592년(임진・선조25・57세), 4월 임진왜란 발생. (이하의 실기는 석천문집 소재, 倡義事實 참조)

◦5월초, 의병을 일으켜 대장이 됨. 5월 안에 전공으로 사온서 주부에 제수됨.

◦6월 10일, 안령전에서 중과부적으로 대패, 제자 이전의 부모 피화 정우복 부상, 김신부자 충효에 순절.

◦6월 이후, 백화산 고모담에서 의병 재결집(창석연보).

◦6월 15일 후, 의병장 김각 등이 사천의 적을 급습함(경상순영록).

◦9월 13일, 포병 및 군량을 구하러 용화동(목사 김해가 숨어있던 곳)으로 감.

◦10월 16일, 전투할 목적으로 다른 진영과 합세함.

◦10월 25일 후, 상주 가판관 정기룡이 발령을 받을 때 갑장산 영수암에 의병장으로 참석함.

◦창의유공으로 선무원종훈록에 오르고 봉정대부 (정4품) 군자 감정에 특배됨.

◦12월 2일, 창의대장 김각이 진중에 머물며 ‘죽현육진도(竹峴六陣圖)’를 제작하여 급습을 꾀함(창의사실 중, 丁景達亂中日記).

◦관찰사 김수(金睟)가 상주에서 기병하였다 하여 석천 휘하의 의병의 군호를 尙義軍으로 함.

◦12월 14일, 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감문의 적 퇴치를 모의함.

◦12월 18일, 상의군대장 보은 마래진과 회합을 약속함.

◦12월 19일. 상의군대장 김각이 연합군의 좌위대장이 되어 우위대장 한명륜 등의 제 진장과 감문・선산의 적 토벌을 위해 25일에 회합하기로 함.

◦12월 24일, 송산(松山)으로 의진을 옮김, 옥천군수・상주목사・영동현감・상의군대장・상주판관 정기룡 등이 상주의 적을 급습하려 했으나 적과 내통한 중이 있어 실패함.

1593년(계사・선조26・58세), 1월 13일, 상주판관 정기룡과 죽현전 복병 논의, 공성을 분탕질한 적 200명 중 상당수를 죽임.

◦1월 18일, 죽현전을 위하여 상의군대장과 선산부사가 회합함.

◦1월 중, 왕에게 창의토적 전말을 알리고 자신에게 내려진 상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림(陳倡義討賊顚末仍辭賞職疏) 모든 전공을 소모관(이준)・판관(정기룡)과 휘하인에게 돌림.

◦1월 28일, 상의군대장이 복병으로 왜적을 사로잡음이 많음.

◦3월 3일, 백화산 고모담에서 장남 지백이 전사함.

◦4월 18일, 상의군대장・상주판관・광주목사・영동현감・상주목사・선산부사 등이 죽현에 6진을 매복시킬 모의를 함.

◦4월 20일, 선조 환도

1596년(61세), 용궁현감(재임 1596∼1598)에 제수됨. 임기만료 전에 용퇴하여 자연과 벗하려 함.

“세상이 어지러움에 자신의 안위를 잊고, 원한을 품고 적에게 저항하였으며, 공을 이루고 물러나 한가하고 편안히 자신의 뜻대로 하였으니 어질도다.”(성호이익, 행장).

1599년(64세), 송량・정경세・이전・이준 등과 낙사계를 합계하여 전후 저상된 민심을 수습하려 함.

◦존애원 창설에 자문을 맡음.

1606년(병오・71세), 송량・정경세・조정・이전・이준・김광두 등과 합력하여 동국유학의 정통맥이 영남에 있음을 표방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함.

◦석천경수연(石川慶壽宴)을 베풂, 시책(詩冊)의 서문은 우복 정경세가 쓰고, 창석 이준은 축하시 560언(言)을 씀.

1607년(72세), 존애원 백수회 개최에 주빈이 됨. (송량 74세・김각72세・정이홍 70세・윤진 67세 등), 이 백수연(경노회)는 20세기까지 미풍양속으로 지속됨.

1610년(경술・광해군 2・75세), 1월 26일 별세.

◦연악서원에 봉안됨.

◦아들 지복의 참소무훈(參昭武勳)으로 좌승지에 증직됨.

◦≪석천선생유집≫(原集・附錄) 1책.

3) 학통․약력 요약

석천가의 학통은 친가・외가 양쪽으로 다 그 연원이 깊다 하겠다. 친가로는 세종조의 명신이요 조선 굴지의 학자며 문장가였던 영산부원군 괴애 김수온(1410∼1481)의 친아우인 김수화는 석천의 5대조다. 또한, 외가 역시 고려조의 정통 도학을 전수하고 전승한 난계 김득배의 친 아우인 상산군 김득제의 손녀가 석천의 5대조모다. 석천가의 가학 연원은 한두 대에 이룩된 경세학・문학・도학・의리학 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상대에 이룩된 가풍에다가 석천의 증조부가 실행한 직절(直節)과 조모가 이룩한 효열 등이 바로 부친 운정에게로 전승되어 운정은, 전래의 가학과 가풍을 더욱 천양하여 당대 상주의 향풍・학풍 조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교육자로 세칭 운정선생이요, 학행과 효행으로 나라에서 벼슬을 내리고 ≪상산지≫에 효자로 입전된 큰 선비가 되었다. 석천은 이같은 가풍과 가학에 젖고 교회되어, 효(孝)를 충(忠)으로 승화시킨 임란의 의병대장이요. 평화시에는 존재 자체가 교화・감화의 표상이 된 교육자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제자 창석 이준이 지은 <묘갈명>의 일부로써 석천의 학통・약력의 요약으로 삼는다.

“공은 포의(布依) 때부터 남에게 은택을 내릴 뜻을 지니어, 넉넉히 저축하여 흉년을 예방하였으니 그 베풂은 이미 두루 미치었다 하겠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왜적을 만나 힘없는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큰 난리(임진왜란)에 뛰어들어 승리할 계책을 냄이 마치 군려(軍旅・군사일)에 노련한 사람같았으니 평소에 포부를 지니지 않았더라면 능히 이 같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리오. 병란(兵亂)이 조금 안정되자 몸을 잃고 얻음이 상충되는 데에서 능히 벗어나 돌아와 임천(林泉)에 누웠으니, 생애의 마침을 잘 하는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뒷날, 공의 포부와 이룬 일의 대개를 알고자 하면 이를 좆아서 살필 일이다.”(이준, 묘갈명, 원문략)

(2) 교학의 특성

1) 의리(義理)로 일관한 교육자

석천이 의리를 숭상한 사실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의리를 숭상한 몇 사실만 예거하도록 한다. 먼저, <호호가・浩浩歌> 제8수에서, “의리를 저버림을 해로울 게 없다 하면, 이야말로 짐승에 가깝다.”(背義謂無傷 其如近禽獸)라고 읊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길 것이 대의(大義)라고 하였다.

석천은 33세에 제자를 가르쳤는데, 이전(학천・현감)・이준(문과・부제학)・김정룡(문과・군수)・김극함(진사) 등의 준재들이 문하생이다. 창석 이준이 9세에 익사 직전의 벗을 구하였다.

“하루는 뭇 아이들과 같이 목욕을 하다가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졌다. 뭇 아이들은 놀라서 허둥지둥하며 다 흩어져 달아나려 하자 선생(창석)이 말하기를 ‘물에 빠진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음이 옳은가!’ 하고, 곧바로 물로 들어가 그 아이를 잡으려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않았다. 뭇 아이들에게 시켜 비늘처럼 나란히 벌어서서 손을 잡고 그 아이를 구출해 내었다.

김공(석천)이 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실로 독을 깬 고사와 같도다, 다른 날 반드시 위인이 되리라.” 라고, 하였다.

이는, 창석의 의기로웠던 어린 날의 일화이기도 하지만 스승인 석천이 평소에 무엇을 아이들에게 교훈하였는지도 알게 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또한, 창석이 10세에 석천문하에서 배웠는데, 제자들에게 장래 희망을 묻자 뭇 아이들이 부귀라고 하였으나 창석은, “다른 바람은 없습니다. 단지 효제충신(孝悌忠信)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자, 석천이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한다.(상통) 이 몇 사실만으로도 석천이 평소 어린 제자들에게 무엇을 강조하였던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핏줄은 보이나 정신은 안 보이지만, 핏줄에서보다 정신의 영향하에서 사람은 성장하고 완성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앞에서 들었던 제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우애의 화신(월간・창석)・효행・소학선생(김정룡) 등으로 추앙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 여겨진다. 다음은, 창의하여 토적한 전말을 왕에게 보고하며 자신에게 내려진 상과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陳倡義討賊顚末 仍辭賞職疏)의 일부를 보도록 한다.

“또한 신이 감당할 수 없음이 있고, 실은 따로 알려드릴 바도 있사옵니다. 지난 해(1592) 5월, 군사를 매복시킨 일은 처음부터 한 사람이 한 것도 아니고 또 (제가) 가장 먼저 꾀를 낸 것도 아닌데 헛된 이름이 잘못 전달되어 장려하는 은전(恩典)이 잘못 내려져서 신이 사온서 주부(종6품)가 되었사옵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어 이를 감당하오리까. (중략)

아, 상벌이 밝은 연후라야 사람을 권선징악(勸善懲惡)함이 있고, 권선징악함이 있은 뒤라야 일에는 단정하고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인 즉 상벌은 임금님의 숫돌(연마도구)이니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의 상벌을 신을 감히 외람되이 논의할 수는 없사오나 다만 진중에서 본 바로써 천거하옵니다. 분주히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주선함에는 이준(李埈)만한 사람이 없고, 험하고 막힌 곳까지 추격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음이 가장 많기로는 정기룡(鄭起龍)보다 나은 이가 없사오며, 그 밖의 나머지도 화살과 돌이 날리는 전장을 드나들며 한 사람이 참획함이 수십 급에 이르고 혹 곡식(군량미)을 납부함이 수십 석이 되어 오랫동안 사용토록 지지(후원)한 이들이 있으나 아직 은명(恩命)이 내림을 받지 못하여 민심이 흩어질 우려가 없지 않은 즉 신은, 조정이 반드시 주어야 할 상이 규칙이나 구범에 맞지 않음에 유감이 없을 수 없사옵니다.(석천선생유집・疏)

첫 단락은 겸양(謙讓)을, 둘째 단락은 명실상부한 명분론(名分論)을, 셋째 단락은 공성불거(功成不居)의 미덕을 보여 주었다. 겸양 속에 내재한 생사를 같이 했던 모든 의병들에게 지키려는 석천의 의리심과, 명분론을 들어 자신의 공성불거함이 당연한 의리일 뿐만 아니라 왕에게는 신도(臣道)를 다 하려는 석천의 의리심임을 보여 준 상소문의 일부분이다. 공을 가로채고, 공을 다투느라 전장에서가 아니라 의리의 현장에서 살고 죽는 일이 임란 7년 동안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서 석천은 현장(賢將)도 이루기 어려운 공성불거(功成不居)의 의리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당대의 명공 석덕들이 석천을 더욱 우러러 본 것도 이같은 의리정신에 있었고, 그러기에 석천의 존재는 그 자체가 바로 감화・교화의 표상이 되었을 것도 자명하다. 학문하고 가르침이 일치하기에 석천을 현인(賢人)・군자(軍子)로 추숭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계당 류주목이 석천의 상소문을 평한 말을 첨기한다.

“문집 중의 상(賞)을 사양하는 한 상소는 언사(言辭․말)가 질박(質朴)하고 확고하여 충간의담(忠肝義膽)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없다. 이에서도, 그 본원(本源․근원)에서 드러난 바와 가지나 잎사귀를 꾸민 것과는 전혀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2) 효(孝)로써 충(忠)을 이룬 문무겸전의 선비

석천이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선비이면서 효를 확충시켜 충으로 승화시킨 충신이었음을 공안한 선현의 말로 본론을 삼고자 한다. 먼저, 효로써 세업을 이룰 수 있었음을 밝힘 바 있는 우복 정경세의 말부터 보면.

“일찍이 들으니 군자(君子)의 효에 큰 것(大)이 있다 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출세하여 이름을 드날려서 부모를 드러냄이 효의 마침이다’라고, 하셨다. 이른바, ‘입신(立身)’이란 자줏빛 인끈이나 푸른 색 인끈을 찬 고관대작을 일컬음이 아니요. 이른바 ‘양명(揚名)’이란 이정(彛鼎・종묘제기)에 공신의 공훈을 새김을 일컬음은 아니다. 공경(敬)으로써 게으름을 이기고 의리(義)로써 욕망을 억제하여 자신을 조심하고 삼감으로써 남들로 하여금 ‘군자의 아들’이라 칭하게 하면, 어버이를 영광되게 함의 큰 것이 된다. 원컨대, 이런 까닭에 세 아들은 이에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다. 이는 경수연(慶壽宴)에서 효(孝)의 가장 큼이 부모를 드러냄이라 하고, 그 드러냄은 벼슬로써가 아니라 ‘군자의 아들’로 일컬어질 만큼의 도덕을 실천함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말의 이면에는, 군자로 존경받은 아버지 운정(芸亭)의 아들됨에 석천은 그 효를 다 하였으니, 석천의 세 아들도 세덕(世德)의 효의 본질을 지키라 한 것이다.

이 같은 효의 본질을 지켜 석천은 효자로서만이 아니라 충신으로서, 효의 충으로의 승화를 이룬 분임을 계당 류주목은 아래와 같이 특기하였다.

“선생이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덕행의 아름다움을 많이 쌓아, 평소 강학함에 한 자를 읽으면 한 가지의 효를 얻고 한 구절을 읽으면 한 가지의 충을 얻음이 오랜 세월 동안 쌓여서, 의리를 드러냄이 정성스럽고도 깊어 끝내는 우뚝한 공을 수립한 바니 그렇잖았으면 능히 그러할 수 있었으랴. (중략)

지난 날 우리 왕고께서 말씀하시기를, ‘운정(김언건)옹의 지극한 행실과 아룸다운 덕은 족히 한 세대의 모범이 되어 석로(石老)가 이를 이어 몸소 효제하고 충의를 지켜 성대하게도 향토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는 운정옹의 효가 곧 석천공의 충인 것이다. 충신을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는 말은 마땅하다 하겠다. 아, 이른바 세덕이 아니랴.“

이는, 효자였던 아버지 운정의 지행합일에 깊이 감화된 석천이 끝내는 효를 확충하여 충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부모를 드러내어 효의 지극함을 다한 사실을 특기한 것이다. 실제, 진사과 출신의 선비였던 석천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그 대장이 되어 전공으로 정3품의 벼슬을 받게 됨으로써 상주학술상에 문무겸전의 선비 한 분을 더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국도였던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투철한 국가관을 지닌 선비로써 문무겸전의 탁월한 인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석천이 가정적으로는 입신출세하여 부모를 드러낸 효의 지극함을 다한 효자가 되었고, 사회적으로는 어버이 섬기는 정성으로 임란의 위급한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 대장이 되어 진사였던 일개 서생이 무훈으로 정3품당하관의 벼슬까지 받은 충신이 되었음을 기린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개인에게 뿐 아니라 향토사에 길이 남을 효충의 인물을 더하는 일이 되었고, 상주는 고래로 문무겸전의 인물이 계속 이어진 사실도 알게 하였다. 문무겸전의 인물이 많이 배출(석홍지・김득배・김선치・김득제・박양유・박원작・홍귀달・김순고・강홍립・김각・이준・채기중 등) 된 사실은, 상주의 역사가 나라(사별국・고령가야국)로부터 시작되어 국도(國都)였던 역사・지리・정치・사회・문화적 배경에서 국가 존립의 양축이 문무병행에 있음을 저절로 깨닫게 된 상주의 독특한 인물관・학술관이 형성되어 온 결과였다고도 하겠다.

3) 충절향의 명예를 드높인 의병장

이 항에서는 석천이 임란에 쓴 격문과 선조가 상주의병에게 내린 교서를 통하여 상주로 하여금 충절향의 명예를 드높인 석천의 공을 살피기로 한다.

<도내 제 진(陣)에 보낸 격문・檄道內諸陣文>

“상주의병장 사온서 주부 김각, 소모관 교서관 정자 이준 등은 삼가 재배하며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몽진 간 임금님의 수레가 미처 돌아오지 않았는데, 북풍은 싸늘합니다. 원한을 품고 적에게 저항할 책무는 신하들이 진 짐이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수를 위하여 와신상담한 나머지 흉중에 수많은 경영과 계획을 가진 자라 하여 족히 흉적의 심장과 간을 깨뜨릴 수야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사는 몇 고을의 땅은 적의 세력이 이미 그치었다 하나 와탑(잠자리・자기구역) 밖은 오히려 왜적이 가득차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할 일로 번진(藩鎭)을 튼튼히 해야 할 계책을 냄이 마치 불에 타는 급한 사람을 구할 때와 같이 시급하거늘 같은 배를 타고 바람을 만나고도 어찌 구제함을 늦출 수 있으리오. 함께 꾀하고 힘을 합쳐 일을 처리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쓰며 정성을 다하여 각기 왕개미나 말개미 같은 작은 힘이나마 떨침으로써 방휼지세(蚌譎之勢)를 꺾을 수 있는 바로 이때가 그때입니다.“

윗 글은, 몽진 중의 왕을 염려하는 마음, 만 가지 계획보다 실행을 우선으로 하는 실천유학자의 원려지심(둘째 단락)과 임란이란 격랑에 요동치는 한 배를 탄 백성끼리 나에게 바람(적세력)이 조금 덜 분다고 하여 바람막이에 처한 동족을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느냐(셋째 단락)는 반문을 통하여 함께 분기할 것을 효유하고 경각시키었다. 실로 연군(戀君)의 정과 방휼지세를 타자는 지략과,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위함이 바로 보국에의 충(忠)이란, 자구마다 넘쳐나는 진충(眞忠)이 독자에게 절로 전해지니 말은 짧으나 뜻은 긴 언단의장(言短意長)의 묘를 살린 격문이라 하겠다.

다음은 선조가 경상도내 사민에게 내린 교서(敎慶尙道內士民書)를 소개하여 충절향의 명예를 드높인 의병장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살펴본다.

<경상도내 사민에게 내린 교서>

“하물며 너희 상주는 적이 오가는 요충에 해당되어 능히 흉적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으랴. 다행히, 너희 국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이 서로 솔선하여 일어나서 충의로 격려하여 군신의 대륜(大倫)으로 하여금 이미 어두워진 천지에 밝게 내걸어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조차도 또한 적을 따름을 수치로 여길 줄 알아 적을 따른 자가 없었으니 아, 가상할 뿐이로다.

이것이 어찌 우리 선조의 혜택이 너희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젖어듦이 있어 그로 하여금 쉽게 풀어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니며, 평소 예악을 익히게 한 일 또한 헛된 일이 아니었도다. ≪시경≫에 말하지 않았던가, ‘백성은 타고난 착한 천성을 지녀 아름다운 덕을 좋아 한다.’

라고, 너희를 두고 일컬음이로다. 너희가 이미 이런 충정(忠貞)을 바치었으니 내가 감히 사랑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니, 나의 명을 공경하여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상주는 적이 왕래하는 요충에 있어 임란에도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고장이다. 그러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충의로써 군신의 대륜(삼강・오륜 등)으로 암흑 같은 천지를 밝히었으므로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조차도 적을 따름을 부끄러운 줄 알아 적에게 귀부한 자가 없었다. 또한, 열성조의 은택과 교화의 효과가 상주에서 드러났으니, 백성에게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착한 천성이 있다 한 성인의 말씀이 옮음을 상주의 백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음에 왕조차도 감동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상주 전역에 복호를 내리었으니 그 같은 유례도 드물 것이거니와 이로 인하여 상주가 충절향이란 명예를 나라로부터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일이, 상주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의 공훈이려이와 그 중심에 석천 김각이 있었음을 조정에서도 인정하여,

“임진왜란에 선생이 앞장 서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주의 백성으로 한 사람도 적에게 귀부하지 않았으며 다른 고을에 비하여 적을 목베고 사로잡은 것이 가장 많았다. 까닭에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상주의 창의지사(倡義之士)에게는 포상하고 깨우침의 말씀이 내려졌다. 선생인즉 선무원종훈일등(宣武原從勳一等)에 기록되고 등급을 뛰어넘어 군자감 정(正・정3품)이 제수되었으며 한 고을의 사민(士民)에게도 아울러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라고, 하였다.

상주로 하여금 충절향의 명예를 드높이게 한 것은 선비들의 의병활동이었지만 그 중심에 상의대장(尙義大將) 김각이 있어, 그의 공이 지대하였음은 특기할 만하다.

(3) 소결(小結)

석천 김각은, 친가로 5대조가 세종조 집현전 학사로 명신이 된 괴애 김수온의 친 아우였던 관계로 제자백가서와 육경에 해박한 지식과 불경이나 시문에도 달통하였던 학문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며, 외가로는 5대조가 문무겸전의 홍건적난의 삼원수였던 상산군 김득제의 손서였던 관계로 난계 김득배의 3형제가 이룩한 도학사상과 군사학에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까닭에 석천가의 가학은 도학・군사학・문학에 있어 수준 높은 가학을 형성하게 된 연원이 깊다 하겠다. 게다가 증조의 직절(直節)과 효자로서 향당의 표준이 된 부친 운정의 학덕에 감화되어 끝내는 효를 충으로 승화시킨 충신으로 석천은 남게 되었다고 하겠다.

석천 김각의 교학 특성은 첫째, 의리로 일관한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석천이 후학을 교화한 것도 의리학이었고 스스로 실행한 것도 의리의 미덕이었다. 특히, 전공을 세워 충신이 될 만큼의 공을 이루고도 그것을 자랑삼지 않고 도리어 공을 남에게 넘김으로써 충간의담(忠肝義膽)이 빚은 공성불거(功成不居)의 미덕은 석천 김각으로 하여금 현장(賢將)・군자(君子)로서 향사와 국사에 남게 하였다. 둘째, 효로써 충을 이룬 문무겸전의 선비였다는 특성이 있다. 석천은 효의 극진함을 다함으로써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효자가 되었고, 효심을 승화시켜 연군(戀君)・보국(報國)에의 충성을 실현함으로써 충신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상주는 신라 이래로 조선말까지 문무겸전의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고장임을 알게 하였고, 나아가 상주가 상대에는 국도(國都・사벌국, 고령가야국)였다는 역사・지리・정치・문화적 배경으로 문무겸행의 국가관과 학문관이 자생하여 전승된 고장임을 실증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셋째, 진사과 출신의 한 선비로서, 국난에 의병장이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선비가 선무원종1등에 녹훈되고 정3품의 군자감 정(正)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상주로 하여금 나라(선조)로부터 명실공히 충절의 고장임을 인정받게 한 수훈의 공을 이룬 인물이 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한 마디로 석천 김각은, 연원 깊은 가학을 전승하여 향당에서는 효자로 입명하였고 나라에서는 충신으로 입명한 선비였다고 하겠다.

Ⅳ. 맺는 말

- 4선생의 교학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

본고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초기에서 임진왜란 전까지 시기에 상주유학의 학풍과 교학적인 특색을 밝혀 상주유학사를 정립하는 데 있다. 조선 전기 초반(15세기 중엽∼16세기초) 함창 중심의 선비들이 이룩한 도학적 의리실천이 영남 사림파 형성에 기여한 유학사적 의의와 종합하면 조선초기로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상주유학의 교학 특색을 밝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함창 중심의 선비들이 영남 사림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실만을 개관(상주시사3권, 학술편)하였으나 그것은 문제 제기에 그치는 정도였음을 밝혀 둔다.

그러기에, 본고의 일차적 목적을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초까지 활약하였던 4선생(후계 김범・1512∼1566, 서대 김충・1513∼1572, 우곡 송량・ 1534∼1618, 석천 김각・1536∼1610)의 교학의 특성을 밝혀 이것들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을 살피는 데 두었다. 본고에 사용한 교학(敎學)이란 교육과 학문 곧 가르침과 기름이란 뜻으로 사용하였고, 4선생을 선정한 기준은 향토사에서 4선생의 학덕을 이 시기의 어느 선비들보다도 크게 평가해 온 관례를 따랐다.

먼저, 상주유학을 시대적으로 개관하여 논의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상주는, 신라와 더불어 역사・문화를 같이 해온 고도(古都)요 웅주(雄州)였던 만큼 그 유학적 연원도 깊다 하겠으나 문헌 자료가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신라시대는, 통일(688년)전의 유학은 화랑정신(김유신・품일∼죽지랑 등) 보급 및 국학 설치(682년) 등과의 관련성에서 살필 수 있고, 통일후의 유학은 역시 국가적인 유교 정책이나 당나라 유학승으로서 고승이 상주 권역에 주석한 분들이 많아 제 관련성에서 상주의 유학 보급과 전파 및 그 위상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는, 전기(918・태조1∼1170・의종24)는 국가적인 유교정책과 불교 성행과의 관련하여 상주유학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게다가, 국학의 학유였던 상산김씨 김수자(인종조・112∼1146)가 기록상 최초로 상주에서 사학(私學)을 실시한 것으로 보아도 상주의 유학이 어느 지역보다도 선진하였을 것은 알 수 있다. 후기(1170∼1392)에 이르면 상주 토성으로서 상산김씨나 상주박씨 문중에서 ≪고려사≫에 입전된 인물이 많이 배출하였고 또한 중앙에 진출하여 현달한 선비들도 많았다. 특히, 1247년 동남로를 순력하던 최자를 통하여 상주 향교의 활성화 및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유풍을 따르는 선비(尙原四老 등)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고, 1343년 근재 안축이 상주 목사로 부임할 때 익재 이제현은 서문에서 경상도의 이름이 생긴 연유와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상주의 문화가 경상도에서는 으뜸이었음을 알려 주었다(Ⅱ.상주유학 개관 참조).

고려 후기의 상주유학사상 특기할 만한 선비는 난계 김득배(1312∼1362)이다. 그는, 설총…회헌 안향(1242∼1306)・역동 우탁(1262∼1343)의 도맥을 이은 불훤재 신현(1298∼1377)의 제자인 난계 김득배가 다시 문하에 동방 유학의 시조 포은 정몽주(1337∼1392)와 여말 지사 조운흘(1333∼1404)을 제자로 두었으며, 포은 문하에 김후(金後・1372∼1404, 문과 황희와 동방급제, 보문각 직제학, 두문동72현, 난계 김득배의 3종손, 후 산청에 은거)를 두어 상주 유학상 도학적 연원이 깊음을 알게 한다.

<상상충의(商山忠義) 삼절(三絶)>

문무겸전의 여말 충신 난계 김득배(1312∼1362)가 김용의 모함에 원사함에, 동방유학의 조(祖)요 충신인 제자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왕의 허락을 받아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고 만사(輓詞)와 제문(동문선소재)을 지어 애도함. 포은이 선죽교에서 순절하자 제자 단구재 김후(1372∼1404)가 역시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고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하였다.(상산지・동문선・상산김씨선제적・산상김씨세보)

※여말 상주는 이미 의리실천의 도학사상이 전국 수준에 이르렀으나 왕조 교체기에 고려 충신의 도학사상이 크게 천양되지 못한데다 뒷날 자손이나 향토에서도 이에 대한 뒷받침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극성한 성리학 풍토는 이미 고려조(예, 12세기중엽의 김수자 사학, 김득배의 도학 등)에서 자생적으로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초(15세기 중엽∼16세기초), 함창 중심의 사림에서 의리실천의 도학자가 크게 나타났다. 먼저, 연산군의 비리에 직언을 하다 순절한 선비는, 남계 표연말(1431∼1498・김종직문인, 문과 동지중추부사, 학자, 문장가, 무오사화에 순절), 허백정 홍귀달(1438∼1504・문과대제학, 학자, 문장가, 갑자사화 순절), 아들 홍언국(진사 참봉, 갑자사화 순절), 동계 권달수(1469∼1504・문과 교리, 갑자사화 순절), 부인 동래정씨 열녀 정려가 내리었다. 직언을 하다 좌천・유배된 도학자들은 난재 채수(1449∼1515・문과 참판), 퇴재 권민수(1466∼1517・문과대사헌), 이자견(1454∼1529・문과판서), 이자건(1455∼1524・문과좌참찬), 이자화(?∼1520・문과참판), 허백정의 아들 홍언승(진사현감), 홍언방(1470∼?・문과박사), 홍언충(1473∼1508・문과교리) 등이 있다.

※영남 사림파 형성의 진원지, 상주 충절향에의 정신 전승.

조선 전기 후(16세기 중엽∼17세기 초)에는 상주읍성 중심의 선비들 중에서 효제를 실천 덕목으로 하여 충효사상을 드높인 선비가 대거 출현하였다.

운정 김언건(1511∼1570・진사, 효자, 교육자), 서재 김신(?∼1592・의병장, 순국, 五父子忠孝家), 후계 김범(1512∼1566・효자, 교육자), 서대 김충(1513∼1572․문과장원, 교육자, 문학), 우곡 송량(1534∼1618・효자, 교육자, 一家忠孝烈), 석천 김각(1536∼1610・진사, 임란창의대장), 율정 서극일(1540년 문과, 효, 문학), 유진(柳震・1549년 진사), 회암 윤진(1541∼1618・효천 현감), 서상남(효자), 판곡 성윤해(1520∼1586・성리학・교육자), 불기당 노기(학천군수, 교육자), 민여해(생원・진사, 제자 이전・이준・강응철), 복재 정국성(1526∼1592・진사, 학천 참봉, 제자 정경세・김광두, 임란 순국), 초간 권문해(1534∼1591・문과, 대동운부군옥, 우거), 괴정 김성(교육자, 제자 김광두), 주일재 정이홍(1538∼1620・진사, 학천 직장), 월간 이전(1558∼1648․우애의 화신) 등이 있었다. 거의가 효행・학행으로 상주의 민풍・학풍의 순화・교도에 큰 역할하였다.

※충효향의 초석을 놓음.

다음은, 4선생의 교학 특성을 요약한다.

후계 김범(1512∼1566)의 학통은 가학이지만 그 연원은 깊다. 8대조 김득화가 난계 김득배와는 3종형제였기에 난계를 중심으로 한 상산김씨가문의 도학과 문학・경세학・군사학 등이 자연스럽게 후계가의 가학에 영향을 미치었을 것은 자명하다. 더구나, 후계의 6대조 김겸은 삼은(三隱; 포은・목은・야은)・오촌(五村; 양촌 권근・둔촌 이집・방촌 황희・행촌 이암・상촌 김자수)과는 사우관계요, 야은의 스승이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도학과 덕행이 뛰어났다. 5대조 김상직은 집현전 학사로 경학과 문학에 뛰어난 선비였으며, 당숙인 김옹은 기묘현량과 출신의 학덕을 겸전한 선비어서 후계가의 가학은 그 규모나 수준이 크고 높음에 있어서는 영남 굴지의 가학이었다 할 수 있다.

후계가, 6조목(약력 참조)을 갖춘 ‘경학에 통달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명경행수(明經行修)의 인재로 추천되어 한국유학사에 길이 남은 남명 조식・대곡 성운・일재 이항・동강 남언경・석봉 한수 등과 징사(徵士)가 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조정으로부터 ‘상주의 선사(善士)요 일국의 선사(善士)’로 추대되었고, 옥과(전남 곡성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관에서 순직함에 명종이 사제문에서, “어찌 탱자나무와 가시나무에 상스러운 봉황이 깃들 수 있으랴. 설산(雪山・옥과)의 경중사가 네 가고 머묾에 달렸었도다.” 라고 애도하였다. 상주유학의 위상을 전국 수준으로 격상시킨 주역이 되었고, 상주가 유향(儒鄕)・추로지향(선비고장)・교육향이었음을 전국에 재확인 시킨 선비가 되었다.

후계의 교학 특성은 첫째, 군자유(君子儒)로 입명(立名)한 선비란 특성이 있다. 유가의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가 되어 학문하고 행위하는 선비로 입명하였으니, 나라에서는 일국의 선사(善士)라 하였고, 향당에서는 군자로 추앙받았다.(이만부, 후계선 생유사) 둘째, 수도(修道)를 중시한 학문을 지향한 특성이 있다. 바른 행도(行道)를 위하여 근본을 튼튼히 하려는 수양적 자세로 나의 일심(一心)부터 정심(正心)해야 함을 강조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생활화 하였다. 셋째, 자득(自得)함으로써 교화의 표본이 된 스승이란 특성이 있다. 앎(知)과 행함(行)을 오로지 내 한 몸에 갖춤으로써 선사(善士)요 군자(君子)의 덕이 절로 사림의 교화적 표준이 되었다.

요약하면, 후계의 존재 의미는 특히 상주유학사상 그 위상을 극대화시켰다는 데 있고, 상주유학의 교학 풍토 조성은 물론 미풍양속의 조성에도 큰 스승으로 남았다 하겠다.

서대 김충(1513∼1572)의 학통은 후계의 가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후계의 3종제로서 상대에 형성된 도학・문학・경세학・군사학에 이르는 폭넒은 학문을 전수받았고 특히,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을 위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표방하고 학덕이 겸비된 현량을 선발하던 기묘현량과(1519) 출신의 부친 외재(김옹)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고 자라 예법을 숭상하는 법가(法家)의 후손이 되었다. 다만, ≪서대시집≫이나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 일실되어 전모를 밝힐 수 없음이 아쉽다.

서대가 문과에 장원하여 시로써 전국을 울린 일이나 성균관 사성에 벼슬길은 간략하게나마 우복 정경세 찬의 <묘갈명>을 통하여 알 수 있고, 교학적인 행적도 그의 인품을 평한 데서 향토에 긍식이 되었을 것은 유추할 수 있다. 서대는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하며 곧은데다 예법을 중히 여겨 불의와는 일호도 타협치 않은 까닭에 재능을 지니고도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시화(詩話) 두 편과 아울러 시 두 수(전체5수)를 보존한 것이 우복의 손자 무첨재 정도응의 <한거잡기>란 사실이다.

서대의 교학 특성은 첫째,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중히 여긴 선비였다는 특성이 있다. 이는, 다른 세 분들과도 일맥상통하며 특히 후계와는 수도(修道)를 중시함으로써 가학이 같은 교학적 환경에서 자란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남의 본보기가 된 법가의 후예란 특성이 있다. 향토사․묘갈명을 비롯한 서대 관련 기사에는 공통으로 예법을 중시한 법가의 후예였음을 특기하였다. 이는, 부친 외재의 가르침으로 의리․예절이 몸에 밴 까닭에 서대의 처신이 곧 사림의 존경받는 표본이 되었음을 드러냄이라 하겠다.

서대 김충은, 향토사에서 길이 받드는 선비(연악서원 봉안)이나, 그 상세함을 밝힘에는 문헌 자료의 발굴을 기다려야 하겠다.

우곡 송량(1534∼1618)의 학통은 가학과 대곡 성운의 교학에서 정리할 수 있다. 가학으로는 예의와 절의를 숭상해 온 가풍을 부친인 당(璫)이 정대한 절조와 청렴결백함을 생활화하는 선비도(道)를 아들에게 깊이 교육함으로써 우곡은 평생에 자기단속에 철저한 선비로 존경받았고, 효의 화신으로까지 존숭되었다. 대곡 성운을 사사하여서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근본으로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들어 평생 학문을 제1위적인 선비의 도로 삼았다.

우곡은 효제충신을 생활화하여 동명이 효곡(孝谷)으로 바뀌었으며, 임란 중에는 아버지는 효를 충으로 승화시키고 아들 둘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다 효에 순절하였고 딸 둘은 효열에 순절하여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지고지순한 덕행을 이루었다. 작게는 향속・민풍을 크게 순화시켰으며 끝내는 조정에 알려져 난중에 헌릉참봉이 제수되어 다시 일신을 돌보지 않고 직무에 충성을 다하여 정3품의 위계에 올라, 평소 익힌 선비도를 세상에 알리었다.

잠시 벼슬길에 있었으나 곧 학문하고 교육하는 선비로 돌아왔다. 향토의 학풍과 민풍을 순화시키는 공적인 일로는 낙사계 결성과 합계, 존애원 창설, 도남서원 창설 등에 솔선하였으며, 개인적인 학문으로는 주자학에 깊이 연구하고 해박하여 ≪주자어류≫(140권)의 종지(宗旨)만 발췌하여 ≪정성기・定性紀≫(5편 2책)과 ≪가례보유・家禮補遺≫(3권)을 저술(현재는 정성기 서문만 남음)하였고 또한 대소의 모든 경서(經書・경설 포함)에 대하여 <경설・經說>을 남기었다. 우곡의 효행은 부각되었지만 학자로의 부각은 미미하나 당대 한강 정구・오봉 이호민・환성재 하락 제현이 조정에 천거할 때에는 다 학행과 효행을 겸한 선비로 인정한 사실이나 1681년 경까지도 앞의 저술이 보전되었던 사실도 확인(5대손 방유, 발문)할 수 있다.

우곡의 교학 특성은 첫째, 수기(修己)를 중시한 경세관을 지녔음을 들 수 있다. 앞의 두 분이 다 수기・수도를 중시한 것과 일맥상통하지만 우곡의 수기는 행도(行道)를 전제한 수기이기에 서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수기의 주요성이 강조되었다. 왕도(王道)・군도(君道)의 성취가 곧 수기(修己) 뒤의 치인(治人)임을 깨우치려 한 수양관이요. 경세판이라 하겠다. 둘째, 덕치(德治)를 위한 휼간(譎諫)을 서슴치 않았다는 특성이 있다. 전 항과 상맥한 것으로, 덕치(德治)・예치(禮治)로써 지치(至治)를 이루어야 함을 위로 왕에게까지 넌지시 간하였으나 주장의 의지가 곧고 굳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향풍을 쇄신한 충효가법을 이룬 특성이 있다. 우곡가의 ‘충효열’은 향풍 쇄신만이 아니라 조선혼의 위대함을 보인, 만대의 표본이 되었다 하겠다. 넷째, 후학을 위한 선배의 원려심이 깊었다는 특성을 들 수 있다. 공적인 낙사계・존애원・도남서원 설립과 창설에 앞장 선 일이나 ≪정성기≫・≪가례보유≫・<경설> 등의 저술 활동이 다 후학을 위한 원려에서 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약하면, 우곡은 당대에 ‘일가충효열’의 지고지순한 덕행을 이룬 효자․충신이요 상주에 주자학(定性紀・家禮補遺)을 보급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한 학자였다 하겠다.

석천 김각(1536∼1610)의 학통은 친・외가의 가학에서 살필 수 있다. 친가로는, 세종조 집현전 학사로 특명을 받아 영산부원에 이른 학자요.

문장가였던 괴애 김수온(1409∼1481)은, 당대 경학과 제자백가의 설과 불경에까지 두루 통달하였던 굴지의 선비였고 그 아우가 석천의 5대조 김수화이다. 그리고 5대조모 상산김씨가 난계 김득배의 아우인 상산군 김득제의 손녀였다. 이로써 석천가의 가학은 친가로나 외가로나 그 학통의 연원이 깊고 교학의 수준이 전국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석천은 전래의 도학・문학・경세학・군사학에 이르기까지 폭 넒은 학문의 세계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게다가 증조의 직절(直節)과 조모의 복호와 정려로 포상된 효열 등에 감화된 바와, 학행・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지고 예문(藝文)과 예악(禮藥)으로 향토의 표준이 되었던 부친 운정선생의 훈육은, 석천으로 하여금 선비의 도를 문무겸행으로 이루게 한 원천이 되었다 하겠다.

석천은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통솔할 재능이 있다” 라고 인정받았고, 스스로 의리실천의 모범을 보여 이전・이준 김정룡 등의 제자들에게도 의리 존중의 인격 형성에 힘썼다. 특히 유비무환에 솔선하여 임란 20년 전부터 문중 공동의 비축미를 마련케 하여 질병과 병란에 대비하였다. 임란이 발발하자 1592년 5월 이후는 의병을 일으켜 상의군 대장이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5월 안에 전공으로 사온서 주부에 제수되고 같은 해 10월 이후에는 정3품의 군자감 정에 특배되었으니, 진사였던 선비의 군사학적 수준이 어떠하였던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무겸행을 이룩한 선비(박원작・석홍지・김득배・김득제・김선치・홍귀달・김순고 등)가 계속 이어진 국도(國都・․사벌국, 고령가야국)였던 상주 학풍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하겠다. 더구나, 공을 이루고도 그 공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은 공성불거(功成不居)의 미덕을 지녀 현장(賢將)・현인(賢人)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벼슬길에 있은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귀향하여 선비 본연의 교학에 전념하며 낙사계・존애원・도남서원 등의 설립과 창건의 솔선함에는 우곡과 쌍벽을 이루었다.

석천의 교학 특성은 첫째, 의리(義理)로 일관한 교육자였다는 특성을 들 수 있다. 가학과 학문 수양으로 몸소 의리의 실천화로 자신을 검속하였고, 제자들을 훈육하되 의리가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고 하였다. 석천의 의리 실천은 공성불거(功成不居)로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효(孝)로써 충(忠)을 이룬 문무겸전의 선비였다는 특성이 있다. 고려조나 조선조나 숭문억무(崇文抑武)는 한 국속이 되다시피 하였을 때에도 국도(國都)였던 역사・지리적 배경에 힘입어 국가 존속은 문무병행에 있음을 자각한 선비도 많이 배출되고 몸소 문무병행의 업적을 남긴 선비들도 대대로 배출된 사실을 입증하였다. 이 같은 학풍은 상주 교학의 가장 큰 특성의 하나라고도 하겠다. 셋째, 충절향의 명예를 드높인 의병장이란 특성이 있다. 석천은 임란에 도내 각 진영에 충간의담(忠肝義膽)의 격문을 보내어 국가 위난에 선비가 처할 도리를 일깨웠으며, 진법에도 능하여 적을 급습할 ‘죽현육진도’를 손수 제작한 무행(武行)으로 상주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귀부하는 백성이 없이 전공을 이룸으로써 천하에 떳떳한 도리(인륜도덕)가 있음을 왕조차 알고 감동하여 상주 의병에게 내린 교서에서 상주 전역에 복호를 내리고 특히 대장인 석천에게는 벼슬을 내려 격려(경상순영록)하였다. 상주가 충절향(忠節鄕)임을 나라가 거듭 확인한 배경에 석천을 비롯한 상주의병이 있었음은 특기할 만하다.

석천은 효의 지극함을 다한 선비(진사)로서 끝내는 효를 충으로 승화시켜 상주로 하여금 충절향(忠節鄕)임을 나라가 인정하게 한 주역이 되어 현장(賢將)・현인(賢人)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실로, 석천의 선비도(道) 역시 실천 유학의 소산물이었다 하겠다.

이에, 4선생의 교학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을 아울러 총 결론을 맺고자 한다.

본 고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 전기(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의 상주유학사를 정립하는 데 있다. 필자는 조선 초기(15세기 중엽∼16세기초) 함창 중심의 유학자들이 연산조에 선비도(道) 실현으로서 신명을 바쳐 의리를 실천함으로써 영남 사림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실을 개관(상주시사 제3권・학술편 및 상주한문학 등)한 바 있다. 그래서 본 고의 일차적 목적은,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까지 활약하였던 4선생(후계 김범・1512∼1566, 서대 김충・1513∼1572, 우곡 송량・1534∼1618, 석천 김각・1536∼1610)의 교학 특성을 밝혀 이들 특성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을 살피는 데 두었다.

상주유학은 다음과 같이 각 시대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신라시대는, 화랑정신 및 국학 설치(신라 통일・688년 이전)와 국가적 유교정책 및 당나라 유학승으로 고승이 상주에 주석한 이가 많았음(신라통일 후)과의 관련성에서 상주유학의 보급과 전파와 그 위상을 유추하여 보았다.

고려시대는, 전기(918∼1170)에 이미 국학 학유 김수자(인종조 1122∼1146․상산인)가 <행학기> (동문선 소재, 인종조의 유학정책)를 남겼을 뿐 아니라 상주에서 사학(私學)을 실시하였고, 후기(1170∼1392)에 이르면 향교의 활성화 및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유풍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상주에 많았음(최자, 보한집)을 알 수 있고 익재 이제현은 1343년 상주목사로 부임하는 근재 안축을 전별하는 서문에서 상주의 문물은 영남의 으뜸이라 한 사실 등에 비추어 상주유학의 위상을 추측한 바 있다.

조선시대는, 그 초기(15세기 중엽∼16세기초) 함창 중심의 의리 실천의 도학자들이 대거 출현하여 영남 사림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를 개관한 바 있다.

특기할 사실은, 고려조에 이르면 상주의 유학이 영남 제일의 교학적 위상을 점하게 된 일이다. 가학(家學)의 성행으로 고려 중기 이후에는 이미 상산김씨문과 상주박씨문에서 중앙 진출의 선비가 대거 출현하고 고려사에도 여러 선비들이 등재되었다. 또한, 난계 김득배(1312∼1362)의 상주유학사적 존재 의의는 특기할 만하다. 난계는, 동국에 도학(道學・성리학・정주학)을 전파한 회헌 안향을 비롯하여 역동 우탁・불훤재 신현으로 전승된 도학을 난계가 계승하여 다시 동방유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1337∼1392)와 지사 조운흘(1333∼1404),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단구재 김후(1372∼1404, 포은 제자, 난계 3종손) 등에게로 전승시킨 여말의 대유학자였다. 특히,

문무겸전・홍건적퇴치의 충신 난계 김득배의 원사(寃死), 불사이군에의 절의 순절인 포은 정몽주(난계를 위한 만사와 제문, 동문선 등재), 불사이군에의 절의를 지킨 단구재 김후(포은을 위한 만시) 등이 차례로 보여 준 상산충의 3절(商山忠義三絶)

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상주의 유학 풍토・수준・특성 등을 가늠케 하는 실증이 된다. 상주유학 발전상 외적 요인으로 목민관의 영향이 역대로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적 요인의 성숙 없이 외적 요인만으로 상주유학의 발전을 논함은 삼가야 되리라 본다. 고려말에 이르면, 전국 어느 지방보다도 수준 높은 유학의 제반 풍토가 상주에는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왕조 교체기에 고려 충신이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공공연히 천양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지금껏 상주유학의 고려조 이상에 대하여서는 사적(史的)으로 체계화된 연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4선생의 교학 특성을 총결하면 다음과 같다.

후계 김범(1512∼1566)은, 상산김씨문(난계 김득배・김득화 등)의 도학・경세학・군사학 등에 연원을 둔 가학 곧 야은의 스승이었다는 설이 있는 6대조 김겸의 도학과 집현전 학사였던 5대조 김상직의 경학과 문학, 기묘현량과 출신인 당숙 김옹의 도학 등을 포괄한 가학으로 학덕을 쌓았다. 후계가의 가학은 도학상 영남 굴지의 가학이라 할 수 있다.

진사시에 장원을 한 후계가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으나, 충・효・우애・겸양・신의 등의 6조목을 갖춘 명경행수(明經行修, 경학통달・품행단정)의 징사(徵士; 남명 조식・후계 김범・대곡 성운・일재 이항・동강 남언경・석봉 한수)가 됨. 조정으로부터 상주의 선사(善士)요 일국의 선사(善士)로 존중되었으며 명종의 사제문(賜祭文)에서는 그의 인품이 봉황으로 비유되었다. 후계의 명경행수 천은, 상주로 하여금 유향(儒鄕)・추로지향(鄒魯之鄕)・교육향임을 전국에 청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상주 사람의 사기 진작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후계의 교학 특성은, 군자유(君子儒)로 입명한 선비・수도(修道)를 중시한 학문・자득(自得)함으로써 교화의 표본이 된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후계는, 상주유학의 위상이 전국적이었음을 실증한 징사로 상주유학 풍토 조성은 물론 방향 설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하겠다. 후계의 교학 특성은 곧 그것들이 후계의 학덕이 되어 상주유학사에 선비상(像)・선비도(道)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서대 김충(1513∼1572)의 학통(가학)은 후계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표방한 정암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기묘현량과(1519년) 출신인 부친 외재의 훈육을 받아 예법을 숭상하는 법가(法家)의 아들이라 칭도되었다. 문과에 장원하여 문재를 조야에 떨치었으나,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하며 불의와는 추호도 타협치 않는 곧은 성품 탓에 성균관 사성에 그치었다. 서대의 교학 특성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중히 여긴 선비・남의 본보기가 된 법가의 후예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서대 역시 상주의 민풍 순화, 학풍 조성에 크게 기여한 선비였다는 사실은 들 수 있으나 그 자세함은 문헌 발굴 뒤로 미룰 수 밖에 없다.

우곡 송량(1534∼1618)은, 예의와 절의 숭상의 가학과 대곡 성운의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근간으로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들어 학덕을 닦았다. 우곡은, 출천한 효성을 지니고 나서 향토에서는 효곡리(孝谷里) 효자요 일국에서는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고상한 덕행을 이루게 한 선비로, 학행과 효행으로 헌릉참봉에 제수되고, 직무에 충성을 다하여 1년만에 정3품당하의 위계에 오른 충신이다. 우곡은, 주자학에 조예가 깊어 후학을 위하여 ≪정성기・定性紀≫와 ≪가례보유・家禮補遺≫ 등을 저술하고 <경설・經說>을 남기었다. 우곡의 교학 특성은, 수기(修己)를 중시한 경세관・덕치(德治)를 위한 휼간(譎諫)・향풍을 쇄신한 충효 가법・후학을 위한 선배의 원려심(遠慮心) 등의 사실을 들 수 있다. 우곡은 학덕에 뛰어난 선비로, 학문상에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요. 도덕상에서는 충효열의 지극한 덕행을 몸소 이루고 자녀들에게까지 감화시킨 효충의 실천자라 하겠다.

석천 김각(1536∼1610)의 학통(가학)은 친・외가의 학통을 포괄한 가학이었다고 하겠다. 친가의 5대조 김수화는 세종조의 학자요 문장가로 전국적 명성을 지녔던 괴애 김수온의 친 아우였고, 5대조모 상산김씨는 난계 김득배의 아우인 상산군 김득제의 손녀였던 관계로 석천가의 가학은 학문적인 수준이나 연원이 높고 깊다 하겠다. 더구나, 조모는 효열로 복호와 정려를 받은 분이요 부친은 학덕으로 운정선생으로 칭도왼 분이라. 석천은 충・효・열의 가풍에 절로 감화된데다 통솔할 재능을 타고 난 효자이기도 하였다.

성균관 진사로 임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상의군 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워 당해년에 종6품(주부)에 제수되었다가 정3품당하의 군자감정에 특배된 충신이다. 선조가 상주의병에게 교서를 내려 상주야말로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륜・彛倫)있음을 실증한 충절향임을 치하하여 전역에 복호를 내리고, 석천에게는 벼슬을 내려 충의를 권장하였다. (경상순영록) 석천의 교학 특성은, 의리(義理)로 일관한 교육자・효(孝)로써 충(忠)을 이룬 문무겸전의 선비・충절향의 명예를 드높인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석천은, 인격이 고매하여 공성불거(功成不居)의 미덕을 이루어 현장(賢將)・현인(賢人)으로 존숭되었고, 문무겸전의 학문을 성취함으로써 국도(國都)였던 지리・역사적 배경에서 전승되어 온 상주 학풍의 또 한 면을 여실히 보여준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상에서 살핀 바를 요약하여 결론을 삼는다.

상주는 읍성국가(사별국・고령가야국) 시대 이래로 고도(古都)요. 웅주(雄州)였기에, 상주유학은 신라의 유학사와 그 맥을 같이 해 왔다. 이는, 상주의 별호(上洛・商山, 990∼994면 제정)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고려조에 이르면 상주가 명실공히 영남 제1의 문물지(文物地)요 추로향(鄒魯鄕)임을 자타가 인정(이제현의 증언・1343)하게 된다. 더구나, 여말에 이르면 동방유학의 비조로 일컫는 포은 정몽주(1337∼1392)에게 회헌 안향 이래의 도학을 전수한 난계 김득배(1312∼1362)의 존재는, 상주유학의 연원과 위상을 충분히 가늠케 하는 실증이 된다. 게다가, 홍건적난의 충의인 난계 김득배・절의 순절인 포은 정몽주・두문동72현 단구재 김후(포은 제자・난계3종손)세 사제간에서 발현된 ‘상산충의3절・商山忠義三絶’은 한국유학사에도 길이 남을 미덕이라 하겠다.

조선 전기 초반(15세기중엽∼16세기초)에는 함창 중심의 의리파 선비들이 연산군의 불의에 맞서 신명을 바쳐 선비도를 실현함으로써 한국유학사상 영남 사림파 형성의 주역들로 남게 되었다. 상주유학사에 의리 존중의 도학사상을 계승하여 후대에 내린 공도 크다 하겠다.

4선생은 조선 전기 후반(16세기중엽∼17세기초)에 활약한 선비들도, 사림의 최대 비극인 사화기(1498・무오사화, 1545・을사사화)는 거의 벗어났으며, 함창 도학자들보다는 한 세대 뒤가 된다. 4선생 사이에도 전현(前賢; 후계 김범・1512∼1566, 서대 김충・1513∼1572)과 후현(後賢; 우곡 송량・1534∼1618, 석천 김각・1536∼1610)은 동시대에 활약하였으나 근 20년의 차이가 있고 교학상의 특성에도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전현(후계・서대)은 보다 개인적인 내실을 다지는 수기(修己)를 우선으로 하여 수도(修道; 격물・치지・성의・正心)적인 교학의 성향을 보인다. 수양법으로는 정주학(程朱學)의 정신 수양론인 ‘본심을 보존하며 착한 성품을 기름’이란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써 인간성 회복에 주력하였고, 선비의 이상형인 군자유(君子儒)가 됨을 최고의 선비상(像)으로 삼았다.

이 같은 교학적 특성은 상주유학사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신봉하는 선비들에게 세대를 넘어 큰 영향을 끼치었다 하겠다. 후대에 까지 상산사호풍(商山四皓風)의 선비도(선비상)를 지향하는 학풍이 이어진 것도 전현(후계・서대)의 덕택이라 하겠다. 이 같은 교학 특성은, 기묘사화(1519)에 축출된 정암 조광조에 의하여 실시된 기묘현량과 출신인 김옹을 당숙(후계)・부(서대)로 모셨던 관계로 보다 안분수기(安分守己)적인 위기지학에 더 치중한 탓이었다 하겠다.

또한, 전현(후계・서대)은 예의・도덕 특히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생활화를 통하여 자득(自得)함을 소중히 여기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교학의 근본으로 삼았기에 상주유학사에 효열충(孝烈忠)에 특출한 인물이 많이 나고, 충효・충절향의 고장으로 선양되는 바탕을 다져 놓았다 하겠다. 전현(후계・서대)이 이룩한 실천유학의 학풍은 천하가 성리론으로 치달을 때에도 상주 선비들 사이에서는 실천유학에 종사한 선비가 많았음은 특기할 만하다.

후현(우곡・석천)도 수기(修己)・수도(修道)에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유도를 실현함에 보다 사회적인 치인(治人)・행도(行道;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전제로 한 교학 태도를 취하였다. 이 같은 교학 태도는 전현(후계・서대)과는 달리 선조 즉위(1567) 후로 임란까지 이어지던 내우(사색당파・반란) 외환(여진・일본 침략)으로 국가 위기 관리조자 점점 한계를 드러냄에, 신라 이래 상주 사림의 특색이라 일컬을 수 있는 국가 위난을 구제하려는 전통적 국방의식 하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교학 태도였다 하겠다. 석천이 임란 20년 전에 문중 전체로 비상식량을 비축했던 사실에서도 치인(治人)・행도(行道)적인 선비의 처사를 볼 수 있다.

후현(두곡・석천)이 임란을 당하여 효(孝)를 충(忠)으로 승화시킨 선비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우곡 송량은,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지고한 덕행을 이루어 조선혼의 위대함으로써 조야를 감동시키었으며, 석천 김각은 진사인 선비로 문무겸행의 의병대장이 되어 공성불거(功成不居)의 현장(賢將)으로 존경받고 상주 전역에 복호를 내린 충절향의 충신으로 나라가 예우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효의 충으로의 승화는 곧 인간의 본성이 선(善)함을 확인하는 일이기에 선조가 상주 전역에 복호를 내리며 의병에게 내린 교서에서도, “백성은 타고난 착한 천성을 지녀 아름다운 덕(性善)을 좋아함”을 너희들에게서 본다고 하였던 것이다.

4선생이 이룩한 교학 특성 12조목(후계3・서대2・우곡4・석천3)을 통하여 상주유학사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학문이 발생할 풍토가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조선 전기 후반(16세기중엽∼17세기초)에 4선생의 교학 특성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몇 사항은 특기할 만하여 요약해 둔다.

첫째, 유학적 풍토의 다양성과 독자성을 들 수 있다. 성리론에서도 퇴계・율곡의 학통이 공존하였고, 소재 노수신은 양명학을 전개함. 학문적 자유와 학자적 양심을 지키려는 유학자가 이어졌다.

둘째, 이론 중심의 성리학이 극성으로 치달을 때에도 상주에는 전통적인 실천유학의 학풍이 주류를 이루어 이용후생학적 실학의 선구자인 태촌 고상안이나 실심실학의 선구자인 식산 이만부같은 선비가 상주학풍 속에서 태어났다. 뒷날, 위암 장지연의 실천유학도 상주의 학풍에서 자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예의・도덕을 숭상한 전통적 학풍은, 심성론 위주의 이론 성리학이 공허한 데로 치달을 때에도, 상주에 인간성 회복을 위한 예학이 왕성토록 하였다.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당대 긍정 의례를 정립한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우복 정경세를 비롯하여 우곡 송량, 김시태 및 국례의 수호가 곧 국가 주권의 수호임을 역설한 식산 이만부, 당쟁을 초월하여 조선 예학을 집대성한 계당 류주목 등의 배출은 다른 지방에서는 그 유례가 드문 일이라 하겠다.

넷째, 국도(國都)였던 웅주(雄州)의 역사・지리・정치・군사적인 특성하에서 형성된 국가 유지의 두 축이 되는 문무겸행의 학풍이 상주에서는 신라 이래로 형성되어 왔다. 그 예로, 고려 최초의 수질구궁노(천균노;활)를 제작한 박원작, 상주성 항몽대승첩의 주역인 석홍지, 문무겸전의 홍건적난의 삼원수로 일컬어지는 김득배・김득제・김선치의 삼형제, 조선 최초로 문겸선전관・비융사 설치로 철갑옷 제작을 한 홍귀달, 조선 최초로 군함에 대포를 설치한 김순고, 임란 상의군대장 김각, 임란 육적의 영웅으로 상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정기룡 등의 무훈이 상주 학풍상에서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겸행의 학문(학술) 풍토는 상주 학풍의 독특한 특성이요, 이 또한 4선생의 교학 특성에서 확인된 것이라 하겠다.

다섯째, 학문에 못잖게 특장을 보인 4선생을 통하여서도 상주의 문학은 한국적이었음을 확인하였다. 후계는 진사과 장원이요 서대는 문과 장원이었을 뿐 아니라, 상주의 문학 세계는 넓고도 다양하여 국문학사에서와 같이, 시・경기체가・시조・가사・소설・수필・일기 등의 다양한 문학 풍토가 일찍부터 조성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미풍양속의 보존책으로 낙사계를 조직한 일, 인애정신의 발양으로 존애원을 창설한 일, 조선의 정통 유도의 맥이 영남에 있음을 표방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한 일 등은, 상주의 교학 풍토가 독자성을 지니고 일찍부터 조성된 결과임을 4선생의 교학 특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4선생의 존재 의미는 물론 4선생의 교학 특성은 상주정신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하겠다.

討 論 文

심 상 훈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연수기획실장)

鄭 時 烈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朴 貞 熙

(경북대학교 외래교수)

「尙州 선비 金后溪・金西臺・宋愚谷‧金石川 先生의 思想과 活動」 토론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연수기획실장 심 상 훈

이 논문은 조선중기 상주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던 后溪 金範(1512~1566), 西臺 金冲(1513~1572), 愚谷 宋亮(1534~1618), 石川 金覺(1536~1610)의 思想과 향촌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던 모습을 구명한 글이다. 발표자는 이들의 행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학문과 사상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역할 등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당시 士禍나 戰亂 등으로 지역사회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빨리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원인을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지역 先覺者들이 봉사와 헌신 그리고 솔선수범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해보면, 첫째, 이들의 학문은 신유학인 性理學을 중심으로 履修하게 되었으며, 대개의 경우 어릴 때 家學으로 학문 기초를 닦은 뒤, 서당이나 精舍 또는 향교 등에서 학문을 배우거나 유명한 성리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의 수준을 높여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선비로서 지녀야 할 사상과 태도를 연마했다. 아울러 禮學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둘째, 이들은 현실적인 처지가 지방의 處士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鄕案을 만들어 그들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이런 토대 위에서 鄕廳과 鄕校의 주도권을 잡아, 鄕約을 만들어 鄕風을 유교적으로 정비하고자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와 그들의 생활이념이었던 儒學을 보다 확대하고자 서당과 서원 건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셋째, 이들의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忠誠과 孝道의 구현이었다. 이 중에서 효도에 보다 비중을 두고 부모님 생시나 사후에도 철저하게 이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통치자인 임금이 합리적인 정치를 수행할 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 학문과 관련해서

▸발표자는 이들이 대개의 경우 어릴 때 家學으로 학문 기초를 닦은 뒤, 서당이나 精舍 또는 향교 등에서 학문을 배우거나 유명한 성리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의 수준을 높여 나갔다고 하였다. 家學 이외의 사승관계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 학풍 진작과 관련해서

▸발표자는 이들이 상주지역 학풍 진작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하였는데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알고 싶습니다.

▸상주지방 士族들의 鄕射禮나 鄕飮酒禮 및 鄕約 보급 운동은 勳戚 중심의 중앙집권화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면서 在地士族들의 향촌지배를 강화하려는데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들이 제자들이 상주지역의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울러 퇴계 이황도 도산십이곡 등 문학작품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키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분들도 그러한 노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3. 忠‧孝을 구현하기 위한 활동

▸발표자는 이들은 충과 효 가운데 효도에 비중을 두고 부모님 生時나 死後에도 철저하게 이를 실행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충보다는 효를 중시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4. 현대사회 상주시민들의 역할

▸현대를 살고 있는 상주시민들이 이들의 고귀한 정신과 삶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며, 지역 사회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해야 될까요?

李九義 교수의“尙州 四先生의 文學精神”에 대한 討論文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鄭 時 烈

상주는 예부터 이름 있는 고을이다. 이 지역에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우리 학계에 기여한 공로가 큰 분들이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 전기와 중기에 걸쳐 생존한 네 분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그다지 활발하지 못 하였다.

오늘 상주문화원에서 주최한 이 네 분에 대한 학술대회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상당히 의의가 있다.

언뜻 보니 아직 발표문의 원고가 완성되지 못 하였기에, 몇 가지 의문점과 보완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토론자로서의 그 책임을 면할까 한다.

1. 后溪 金範의 문학정신에서,

유형과 무형의 존재론이라 하여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논하고 있는데, 그 논지의 연원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존심양성을 통한 도학의 실천이라 하였는데, 존심양성(存心養性)은 많은 부분에서 이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학(理學)이 도학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울러 후계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갖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요?

2. 西臺 金冲의 문학정신에서

서대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학이 어떻다고 단정하기는 대단히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에게 어떤 선비의 멋이 있는지, 또 풍류정신에서 풍류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발표자께서 말씀하신 풍류정신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또 개결(介潔)과 고졸(古拙)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3. 愚谷 宋亮의 문학정신에서

우곡(愚谷) 송량(宋亮)은 임진왜란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분 가운데 한 분인 것 같습니다. 아들과 딸을 왜군에 의해서, 왜군 때문에 잃었으니까요. 이분이 우곡(愚谷)은 성운(成運), 퇴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이 두 분의 어떠한 면을 본받으려고 하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 심통성정론의 심학이라 하셨는데, 육상산(陸象山)의 심학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요?

4. 石川 金覺의 문학정신에서

석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제자인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의병을 일으켜 구국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석천이 지은 「호호가(浩浩歌)」 14수를 보면 그의 국량이 대단히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당시는 대단히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정명주의(正名主義)가 더욱 절실했을 것입니다. 석천은 자연에서 어떠한 이상을 추구하려했는지요? 또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요? 그가 세교론(世敎論)을 주장하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두서없이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이상으로 제 질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논문 쓰시기 바랍니다.

權泰乙 교수의 “尙州 四先生의 敎學의

특성”에 대한 討論文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외래교수 朴 貞 熙

본 연구는, 조선 전기 후반(16세기 중엽∼17세기 초)에 활약한 后溪 金範・西臺 金冲・愚谷 宋亮・石川 金覺 先生의 교학 특성을 밝혀 이들 특성이 상주유학사에 끼친 영향을 고찰함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본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 전기(조선개국-임진왜란 전)의 상주 유학사 정립을 위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지역의 유학사를 정립하려는 시도 자체도 그 유래가 드물 것으로 생각합니다. 古都요 雄州였던 상주의 유학이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온 유학사적인 개관을 연구한 것 역시 오랜 고찰에서 얻어진 결과라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사항에 대한 질문으로 저의 임무를 면할까 합니다.

첫째, 상주 유학사 정립의 최종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둘째, 상주유학 특히 대표적인 선비 선정의 애로점과 그들의 교학 특성을 밝히는 연구 과정 가운데 가장 시급히 선결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셋째, 西臺 金冲 선생은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시를 통하여 그의 교학 특성을 찾았는데, 詩 속의 사실과 현실적인 것과의 차이는 없는지요? 이런 점들이 알고 싶습니다.

두서없이 질문을 드려 송구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질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3회 상주문화사적과 역사인물 학술대회

后溪 金範・西臺 金冲・愚谷 宋亮・石川 金覺 先生의

尙州 儒學史上 存在意義

2012년 5월 7일 인쇄

2012년 5월 10일 발행

발행 상주문화원⋅도남서원

경북 상주시 상산로 235번지

TEL.(054)535-2339

인쇄 도서출판 한 솔

경북 상주시 상산로 332번지

TEL.(054)536-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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