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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 개신교(상주시사 내용)

빛마당 2014. 1. 18. 22:14

第5編 조선후기(朝鮮後期)

第3章 文化의 變動

제4절 종교계의 변화

Ⅰ. 基督敎의 傳來와 定着 

                                                                  김재수

역사는 미래를 향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며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지표이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은 과거를 살피며 현재를 더욱 충실히 하고 미래의 발전을 모색함에 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지향해야 할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 온지 120년이 지났다. 그리고 상주에 교회가 세워져 이미 100주년을 넘긴 교회도 여럿이 있다. 이러한 시점에 최근 들어 각 교회들이 저마다 교회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빈약한 자료로 인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상주의 기독교 교회사를 일별 해 보는 일은 역사적인 자료의 정리나 개 교회가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기에 매우 유익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상주지역의 교회들이 개 교회의 역사를 살피는 일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보존된 자료의 빈곤이란 점이다. 특별히 기록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탓에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바르게 기록하는 일이나 기록한 내용들을 보관하는 일에 등한시했고, 개 교회는 그나마 있던 자료마저 유실, 소실, 되고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개 교회는 교회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때를 맞추어 지역권역별로 사료들이 정리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여기서는 상주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과정 즉 한국 교회사의 일면으로 개괄해보고, 경북지방의 교회 설립 과정에서 경서지역(상주, 문경, 선산, 김천)에 설립된 교회를 살피면서 그동안 기록물 속에 잠자고 있는 내용들을 찾아내어 상주에 새워진 교회들의 실상을 지극히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각 교회마다 6․25이후의 사항은 그 내용이 광범위 하여 그 이전으로만 제한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자료를 다 살펴야 하나 지 교회에서의 자료 제공이 원만하지 못하고 필자가 각 교회에 대한 자료를 다 살펴보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이 지역에 우세한 장로교단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자료가 제공되면 타 교단의 기록도 소개 할 것이다.

다행이 『경북기독교회사』의 발간과 『경북교회사』의 편역, 그리고 비록 복사본이기는 하나 『조선야소교 장로회 사기』와 『경상노회록』,『경북노회록』은 이 지역 교회사를 일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 기독교의 전래와 정착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기독교가 우리나라와 어떤 접촉이 있었는지 설명하기에 앞서 경교(景敎)와 천주교의 전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언급하기에 여기서는 경교와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루어진 기독교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가. 경교(景敎)

경교(Nestorius파 기독교)란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의해 이루어진 종파로 네스토리우스는 원래 안디옥 근처의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에 들어가 살던 수도사였다.

초대 교회에는 신론(神論)을 가지고 이단과 정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313년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아리우스(Arius)의 이론을 꺾고 오늘날 삼위일체론(三位一体論)을 확립하였다. 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이 일단 가라앉고 난 후에 다시 재연된 것은 기독론(基督論)이다. 즉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인데 당시 정통적인 기독교도들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갖춘 분이라는 신인일체(神人一体)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가 이와 같은 기독론을 흐리게 한다 하여 반대파에 의해서 비판받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의 주장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에서 추방당하고 안디옥 근처의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이단자로 낙인이 찍힌, 경건한 신학자 네스토리우스는그가 파문을 당하던 431년에 벌써 눈길을 멀리 동방에 돌리고 있었다.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와 그 일파는 페르시아에 있는 에데사시(市)에 작은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방 선교의 설계도를 그렸다. 이들에 의해 인도나 중국의 아득한 이국(異國)을 향해 복음의 소식을 소리쳐 전파했다.

1) 경교(景敎 Nestorius파)의 당(唐) 전래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불려 진 이름이다.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35년이다. 이 이름은 광명의 종교라는 의미가 있다. 당시 당 제국의 황제는 태종이었고, 태종은 아라본(Alopen 阿羅本:아브라함의 중국 명)이라는 선교사를 첨 맞아 그의 설교를 경청하고, 파사사(波斯寺)라고 하는 교회당을 세워 신민의 개종에 기여하였다.

한편 아라본은 635년으로부터 641년까지 경교(景敎)의 시리아어 경전 중에서 『예수 메시야경』, 『일신론』(一神論), 『일천론』(一天論) 등을 한역(漢譯)하였다. 그 후 8세기 말에 서역에서 온 경교 선교사 경정(景淨)에 의해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대진경교선원본경(大秦景敎宣元本經)』등의 책이 보다 훌륭한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경정은 781년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세웠다. ‘대진(大秦)’은 로마를 가리키므로, 로마의 기독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이다. 이 비의 내용은 처음에 신의 존재와 인간의 죄악,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설교, 전도, 선교에 관해서 쓰여 져 있고, 그 뒤에는 635년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781년까지의 경교의 중국 선교 약사(略史)를 적고 있다. 또한 경교는 광명이 충만한 가르침이라는 설명이 있고 경교의 입장에서 당나라 황제들을 칭송하는 한편 당시 중국에 있던 경교인들의 신앙의 모습, 예를 들면 세례식의 거행 방법, 7일 중의 첫날을 예배일로 정했다는 것, 교회 지도자들의 생활양식, 예배 때 불교에서 사용하는 목탁을 사용했다는 등의 기록들도 이 비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781년(당 건중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관(숭실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88.8*177.8cm

2) 신라(B.C. 57~A.D. 935)에 있어서 경교의 존재

당(A.D.618~907)나라는 신라와 협력했던 왕조로 7세기 후반 소위 삼국 통일 후 약 300년간 당나라와 외교, 문화 교류 및 무역 면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 때문에 신라에도 경교가 전파되지 않았겠느냐 하는 의문이 과거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던 선교사들이나 한국인 학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경교와 불교를 연구하던 영국인 학자 고든(E. A. Gorden) 여사는 1917년 우리나라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중국의 경교비와 같은 모조비(模造碑)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교가 신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과도 관련이 깊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신라시대의 불상 특히 석굴암의 무인상이라든지 십일면관음상 등이 경교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진 불상으로 추정하였다. 그 뒤 김양선 목사는 1956년에 경주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상과 마리아상에 의해서 경교의 신라 전파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 조그마한 십자가상과 마리아상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러한 것은 당나라와 신라가 외교 관계를 긴밀히 하고 있을 때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많은 불승뿐만 아니라 유학승, 공부하러 간사람 혹은 장사하러 간 사람들 가운데서 경교에 접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되고,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이러한 돌 십자가상이나 마리아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동경 한인 교회를 오래 동안 맡아서 시무하며 많은 한국 기독교회사 저서를 남긴 오윤태 목사는 『한국기독교사』 제1권 한국경교사편에서 한국 불교사에서 보이는 기독교적 혹은 경교적 요소를 많이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륵 신앙과 구세주, 관세음보살과 이적, 서학과 천주교를 연관시켜 고찰하고 있다.

돌 십자가상과 마리아상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적을 증명한다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24.5 *24*9cm

마리아상 :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경교의 흔적을 암시한다. 3.8*2.8*7.2cm

나. 외국 기독교인들과의 인연

오늘날 기독교 백년의 역사를 알렌 의사가 입국한 해로 잡고 있으나 그 이전에 이미 기독교인들의 접촉이 있었기에 그 전래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국을 처음 찾아 온 최초의 기독교인은 화란인 벨트브래(Jan Janse weltervee 한국명 :박연)로서 동료 2명과 일본으로 가다가 1627년 풍랑을 만나 동해안에 표착하고 물을 얻기 위해 경주까지 들어왔다가 관헌에게 검거되었다. 그는 지식이 높고 언동이 도인(道人)의 체통을 지켜 종교인으로 인정받았고, 1653년(효종 4년) 하멜(Hendrick Hamel) 역시 화란 상인으로 극동지역의 교역을 위해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가 귀국하였는데, 그가 쓴 ‘하멜 표류기’(1688)가 발간되어 이를 보고 구츨라프(Kal F. A. Guzaff)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가 됐다고 추측한다.

그 후 1세기가 지난 뒤 영국이 중국으로 보낸 사절단을 실은 알세트 호(Alcest)의 함장 맥스웰(Murry Maxwell)과 리라(Lyra)호의 함장 바실 홀(Basil Hall)이 대사를 광동에 내린 후 조선의 서해안 해도 작성을 위해 내한한 해가 1816년 9월 4일 이었다. 당시 노량진 앞바다에서 멕스웰 함장은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에게 대형 성경을 선사하였다. 이것은 정중하게 조정에 전달되었다. 이것이 한국에 성서가 들어 온 효시라 볼 수 있다.

다. 최초의 선교 활동

1) 칼․구츠라프(Karl F. A. Gutzlaff) 선교사

본격적인 선교사와 한국의 접촉은 1832년 칼․구츠라프(Karl F. A. Gutzlaff)목사로부터이다. 그는 1827년 화란 선교회에 소속한 독일인 선교사로 자바, 스마트라 등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그는 화란 선교회와 관계를 끊고 태국을 거쳐 중국인 선교에 방향을 돌렸다. 중국 동해안 지대를 항해하면서 선교하다가 조선으로 돌려 1832년 7월 17일에 황해도 백령도에 도착하니 카톨릭 입국보다 5년이나 앞섰다. 그는 다시 그곳에서 남하하여 7월 21일 군산에 도달하고 25일 에는 홍주, 고대도, 안항으로 항해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문 성경을 주며 전도하였고 의약품을 나누어 주고 주민들의 병을 고쳐주며 활약을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한문을 공부했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한문을 구사할 수 있었다. 칼․구츠라프 목사는 군산으로 내려가서 한문 성경을 주며 전도하고 의약품을 나누어 주었다. 그 성경과 교리서를 홍주 목사 이민희와 수군우후 김영수를 통하여 순조(純祖)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는 감자 종자를 나누어 주어 그 재배법을 가르치면서 전도 활동을 펼쳤다. 한편 홍주 목사의 서생 양씨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였으니, 이는 우리말 성경번역의 시초로 특기할 일이었다. 그가 서해안에 전도한 시일은 불과 40여일이었으나 그가 남긴 공적은 기록적이었다. 40일 후 그는 암어스트호의“예수 기독교”라 쓴 깃발아래 꿇어앉아 한국에 전도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장차 한국이 복음의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떠났다고 한다.

귀츨라프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2) 토마스 목사의 순교

칼․구츠라프 목사가 다녀 간지 33년이 지나 우리 땅에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가 찾아 왔다. 그리고 순교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1840년 9월 7일 미국 웨일즈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교 뉴콜레지에서 교육을 받아 1863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런던선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그의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1863년 12월에 상해에 도착하였고 1865년부터 산동성 치푸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한국으로 선교의 뜻을 옮기게 된 이유는 몇 가지 동기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가 상해에 도착한 이듬 해 부인 캐롤라인이 죽은 일이고 두 번째는 한국인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나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의 소식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65년 9월 4일 당시 산동성 연대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의 도움을 받아 산동인 우문태의 어선을 타고 김자문의 안내를 받아 황해도 창리도 자라리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웅진 해안 도서들을 약 2개월 동안 전도하다가, 서울로 가서 국왕에게 정식으로 선교의 허락을 받을 작정이었으나 풍랑이 심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는 북경에서 북경대학교의 교장 직을 잠시 보면서 한국선교 재개의 꿈을 꾸고 있을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동지사로 북경을 방문하였으므로 그를 만나 한국선교의 꿈을 피력하였더니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크게 그 뜻을 찬성하며 평양에 오면 그를 환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1886년 6월 토마스 목사는 미국 상선 제너랄 셔먼호에 승선하여 한국을 향했다. 제너랄 셔먼호의 목적은 서울로 가서 국왕을 만나 통상을 요청함에 있었으나 지리에 서툰 대원들이 대동강을 한강으로 오인하여 내륙 깊숙이 항해하여 평양에서 10리 밖인 만경대에 이르러 북경에서의 약속을 믿고 감사를 만나기를 요청했다. 그러던 중 모여든 군중과 병졸들이 함성을 치며, 혹은 돌, 화살 그리고 화승총으로 셔면호를 공격하였다. 셔먼호가 불타기 시작하자 놀란 선원들은 물위로 뛰어 피했으나 토마스 목사는 필사의 힘을 다해 싣고 온 성경을 강변에 산포하였다.

결국 토마스 목사는 박규수 감사 앞에 끌려가 국문을 받았으나 쇄국정책이 강화 될 때라 감사는 어찌할 수 없이 토마스 목사를 군졸들에게 맡겨 사형 시키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9월 1일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참수당하는 자리에서도 성경을 주었고 당시 목을 친 형리 박춘권은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고 평양의 초대교인이 되었다.

3) 죤 로스(John Ross) 와 죤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의 고려문(高麗門) 선교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 등지는 한국교회 수림을 위한 최초 기지가 되었다. 우장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를 낳은 곳이요 최초의 한글 성경을 번역한 곳이며, 봉천은 최초의 한글 성경을 출판하고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한 곳이다.

고려문은 압록강을 건너 약 120리 지점에 있었던 국제 교역지로 일본과 중국은 이곳을 이용하여 무역활동이 자유로웠으나 조선은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에 의해 쇄국정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뜻있는 국내 청년들은 국외로 나갔고 그들의 집합처는 고려문이 되었다.

죤 로스(John Ross) 목사와 죤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목사는 스코틀랜드 자유일치교회의 목사로 1872년 이래 만주의 우장과 봉천지대에 주재하여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두 선교사가 만주를 찾아 한국 전도를 계획한 것은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선교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라 믿어진다.

1873년 로스 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 전도하다가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에 들러 한국내의 실정을 탐색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쇄국정책과 금교령(禁敎令)이 준엄하여 서양인들을 만나주지 않을 정도였다. 오랜 시도 끝에 중국인 서기를 따라 로스 목사의 숙소로 인도된 의주 청년 4명이 있었다. 즉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 (金鎭基)였다.

네 청년은 상사(商事)를 핑계로 고려문에 와서 서양문화를 배우려 했다. 그들은 로스 목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고, 이들은 서양 과학문명을 배우기로 약속하고 선교 본부인 우장(牛莊)으로 갔다. 그러나 신앙문제는 완고 했다. 그러다가 만 2년이 지난 1876년 드디어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된 것이다. 이는 1884년 알렌 의사가 입국하기 전보다 8년이나 앞선 것이며 로스와 매킨타이어 목사의 놀라운 결실이었다.

John Ross(羅約翰)선교사

4) 성서의 번역

조선 청년 네 명이 개종하자 로스 목사는 그들과 협력하여 조선의 풍속과 역사에 관한 책과 더불어 성서번역에 착수했다. 한편 의주 청년 서상륜(徐相崙)이 1878년에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서 번역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79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당시 요안내복음)이 번역되었고 1880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당시 사도행적)이 번역되었다. 이 사업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 성서공회가 한국어 성경의 출판비를 전담하기로 되어 완전히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1887년 ‘예수성교전서(예수聖敎全書)’ 또는 ‘로스譯本(Ross Version)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한국어 성경이 출판되었다. 이 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해외에서 성서 번역이 먼저 시작되었고, 이 분들은 이 성서를 한국인에게 보급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5) 일본에서 이수정의 접촉

1882년 한국정부의 고관인 이수정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일본 개화의 선각자요 교계의 인물인 쯔다(津田仙) 박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쯔다 박사의 거실에 걸린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山上寶訓)’을 기록한 족자를 보고 감동되어 기독교인이 된 계기가 되었다.

쯔다 박사는 다시 야스가와 목사에게 소개하였고 믿음이 자란 1883년 4월 29일 자진하여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1883년 노월정(露月町)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이 소식을 들은 일본주재 성서공회 총무인 헬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와 만나게 되고 루미스 목사는 그의 높은 학문을 통하여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자극을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3년 처음으로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가 완성되어 1884년에 발간되었다. 이것은 제목 그대로 ’토를 단 한문성경‘이다. 한국인이 한문을 읽을 때 사용하는 이두식 토(吐)를 단 것으로 신약성서라고 하지만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국한되어 있다. 정확한 이름은 마태복음의 경우 ’신약성서 마태전(新約聖書 馬太傳)‘이라 했는데 나머지도 ‘신약성서’라는 말을 먼저 쓰고 ‘마가전(馬可傳)’, 루가전(露加傳), ‘약한전(約翰傳)’, ‘사도행전(使道行傳)’이라 썼다. 다음에는 1884년 말, 마가복음이 순 한글로 번역되고 그 이듬해 1885년 초에 요꼬하마에서 1,000부가 발간되었다.

1885년 4월 5일 한국 주재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두 사람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언더우드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수정에게 한글을 배운 적이 있다. 언더우드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 성서 번역이 우리나라의 복음 전파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성서에 이두(吏讀)토를 달아 펴낸 <신약성서 마가전>(1884)

로스 목사가 번역한 성경

로스역 성서 :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

사진은 1882년에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라. 최초의 교회 설립

1) 의주 기도소

성경이 번역되자 로스목사는 최초의 조선인 신자들에게 주어 고향으로 가서 전도하게 하였다. 그 때 이성하가 성경을 메고 갔으나 국금(國禁)의 책이라 국경에서 실패하였다

1883년 백홍준이 다시 성경을 지고 국내 반입을 시도했다. 백홍준은 묘책을 썼다. 성경책을 분리하여 종이로 만들고 다시 그 종이를 말아 끈으로 만들어 고지(古紙)를 사서 그 끈으로 묶어 겨우 입국에 성공하였다. 의주에서 다시 성경으로 만들어 고향과 이웃마을에 전파했고 약 반년 후에는 10여명의 신자를 얻어 백홍준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의주교회요 한국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정식 교회는 아니었고 기도소 정도였으며 백홍준은 초대 조사로 시무하다가 1893년에 순교하였다.

2) 서상륜과 솔내교회(松川敎會)

의주 청년 서상륜은 약종상을 하면서 만주의 우장을 찾았고 거기서 장티부스에 걸렸으나 매킨타이어 목사의 정성스러운 간호로 완쾌 되었다. 여기에 감화를 받은 서상륜은 다른 한국인 85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최초로 성경출간에 공헌하였다. 그는 고향전도에 나서다가 고려문에서 채포 되었지만 기적적으로 놓여 고향 의주에 돌아와 동생인 서경조(徐景祚, 처음 이름은 徐相佑였다)를 전도하였고 그 외 10여명의 친지들도 믿게 되었다. 이때 관가의 탐색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솔내(松川)으로 이사를 했다.

서상륜 형제는 솔내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솔내에 58호 가구 중 50호를 믿게 하고 1885년 순전히 저들의 힘으로 초가 8칸의 한국 최초의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한국인에 의해 최초의 교회가 황해도 장연군에 “소래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이 교회는 송천(松川)교회라고도 하며, 솔내교회라고도 하지만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할 때는 소래교회라고 한다. 그 후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복음 활동의 전초지 역할을 하였고 세례식 등을 여기서 거행하였다. 선교 100년의 역사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출발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서상륜에 의해 출발을 이루었으며, 이 사실은 뜻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교회가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라 불리는 최초의 교회이다.

1884년 6월 29일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사진 하)

1895년 기와지붕의 한식교회 건물로 개축한 소래교회 (사진 우-상)

마. 선교사의 입국

1) 알렌의 입국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자 오랜 쇄국의 잠에서 깨어나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어 1883년 한국에 미국공사관이 설치되고 한영수호조약, 1886년 한불수호조약을 맺게 되고 아울러 신앙의 승인까지 포함시켰으니 국외로부터 갈망하던 한국 선교의 물꼬가 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1884년 미국 공사관이 중심이 되어 서양인 의사를 구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산동성 주재 레이드 목사는 본국의 선교본부에 한국선교를 촉구했고 이미 상해에 잠시 와 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이 한국으로 갈 것을 지망했다.

알렌 의사는 1884년 6월 22일 선교부의 허락을 받았고 9월 14일 상해를 떠나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도착하였고 이틀 후 9월 22일 서울로 올라왔다. 그 당시의 입장으로 보면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의사 자격이었지만 미국 북 장로교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파견한 선교사 자격이었다.

1884년 알렌이 들어오던 해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민영익이 빈사의 상태에 빠진 것을 알렌이 의술로 구출하였다. 이 사건으로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얻게 되고 어의(御醫)로 임명을 받았다. 그것은 한국 선교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고 의술을 통해 세 번이나 훈장을 받으면서 선교 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86년 알렌이 병원 설립의 허락을 받아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광혜원 :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

2)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미국 북 감리교회와 북 장로교회는 한국에 복음 선교사를 파견하려는 계획을 구체화 시켰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부부가 제물포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미국공사의 만류로 아펜셀라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2개월 후인 6월에 재입국했고 언더우드는 전술한바 1885년 1월에 일본에 도착하여 이수정을 만나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받고 그를 통해 한국어를 공부하여 준비한 후 4월에 한국에 입국한 것이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서울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알렌이 설립한 광혜원 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알렌을 도우면서 한국어 학습에 열중하였다. 그리고는 곧 거리와 시골로 나가 한국인을 접촉하며 복음전파에 전념했다. 1886년 7월 11일에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 후 최초로 노도사(魯道士 노춘경이라고도 함)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솔내교회를 설립한 서상륜은 서울로 와서 언더우드를 송천에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1887년 가을에 다시 솔내교회를 방문하여 한국 최초의 교회 교인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새문안교회 장로)에게 한국 최초로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이 당시 서울에는 약 70여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아직 교회가 없어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에 교회를 세울 것을 알렌과 같이 협의하였다. 드디어 그가 서울에 도착한 지 2년 후인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들이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서울 새문안교회의 창립이다.

새문안교회 : 1887년 조직교회로서는 최초로 한국에 세워진 교회(좌)

정동제일교회 : 한국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설립(우)

한편 아펜셀라 목사는 1885년 4월에 입국했다가 일본으로 출국, 다시 그해 6월에 재입국하여 활동하다가 정동(貞洞)에 집 한 채를 구입하여 1887년 10월 9일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이를 ‘ Bethel 예배당’이라 하였다. 이 교회가 오늘날 정동제일교회요 감리교회의 출발이다.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지금까지 기독교 전래의 역사를 경교로부터 시작하여 개신교의 복음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데까지 개관하여 보았다. 이 땅에 천주교라든지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 경위를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첫째, 둘 다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쪽에서 기독교를 먼저 알려고 했고 또 기독교를 수입하려고 한 노력이 있었다. 개신교의 경우는 개화인들 가운데서 개화나 부국강병, 문화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기독교를 들여와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한국의 경우, 성서가 선교사보다 먼저 들어왔다는 것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천주교를 소개하는 책자가 먼저 들어왔고, 개신교의 경우는 성서가 먼저 들어왔다. 이런 것이 한국 기독교 전래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기독교 수용의 의지나 역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셋째로 개신교의 선교 방법에 있어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피선교국 다시 말하면 한국의 입장이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서 의료라든지 교육 같은 것을 먼저 들여보내고 이것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제거한 후에 복음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바. 선교사들의 지역 분할과 선교 방식

1) 선교지역의 분할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리자 구미 각국에서는 많은 선교사들의 파송이 이어졌다. 예를 들면 호주장로교회 데이비스 선교사(1889년), 캐나다 YMCA 선교사 게일(J. S Gale), 캐나다 침례교회의 펜윅(F. C. F두쟈차)이 입국하였고 1890년에 미국 북 장로교의 마펫(Samuel Maffett 馬布三樂)도 입국하였다.

그 후 영국 성공회의 콜페(C. Jhon Corfe), 1891년 미북 장로교 소속의 배위량(W. M. Baird)이 1892년 미 남 장로회의 레이놀드(W. D. Reinold) 외 6명이 1893년에 캐나다 장로회의 매캔지(W. J. Meknzie)가 1895년 미국 남 감리회의 레이드(C. E. Reid)와 북 장로회의 아담스(J. E. Adams)와 1907년 성결교 계통의 카우만(C. E Cowman)과 길보른(E. A Gilborne), 그리고 1908년 영국 구세군의 흘가드(Hoggard)가 들어왔다. 이들로 인해 선교지역이 겹쳐짐으로 인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93 1월에 장로교 내에서 하나의 협의 기구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선교부 공의회’였다. 이 후 호주 장로교 및 캐나다 장로교도 이에 가입하여 장로교는 이 기구를 중심으로 선교지를 분할하였다. 이 공의회는 나중에 북 감리교와 남 감리교와도 선교지를 분할하게 되는데 기타 다른 교단 즉, 침례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과는 선교지 분할에 대한 협의가 없었고 주로 장로교 내에서와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이 선교지 조정이 이루어 졌다.

선교지 분할과 조정은 주로 1910년대 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구체적으로 이루어 진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북 장로교는 서울과 황해도, 평안도, 경북 일대를 선교지역으로 하였다. 초기에는 부산도 포함하였으나 후에 호주 장로교에 이양하였고 이들의 선교 거점(Mission Station)은 남쪽으로부터 대구, 안동, 청주, 서울, 재령, 평양, 선천, 강계의 8지역이었다.

남 장로교는 처음 북 장로교와의 협의를 통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이 넓다하여 충청도 지역을 북 감리교에 넘기고 호남지역만 확보하였다. 선교 거점으로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이었다. 이를 이어 미 남 장로교가 들어왔으며 미국 남 감리 호주장로교는 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가 도착하였는데 그 후 그는 300마일에 이르는 선교여행을 하였다. 1890년 데이비스 목사가 순교한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의 경남 일원을 선교지역으로 삼았다.

카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지역을 맡았다. 원산, 함흥, 성진을 선교 거점으로 하였고 후에는 간도지역에서도 선교활동을 하였다.

북 감리교는 서울, 충청, 강원 남부와 평안도의 평양, 영변 등을 남 감리교는 개성, 강원 북부와 경기북부 및 황해도 남부를 각기 선교지역으로 활동하였다.

2)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채택

한국 선교가 궤도에 오르자 그 기본정책을 수립해야만 할 단계에 이르렀다. 1890년 6월 말에 한국주재 선교사들은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약을 하던 미 북 장로교에서 중국 산동성에 파견한 네비우스(John .C .Nevius)목사를 초빙하여 두 주간 선교 세미나를 열었다. 이때 채택 된 것이 네비우스 선교방법인데 그 중심은 자립(自立 Self support), 자치(自治 Self government), 자전(自傳 Self propagation)이다. ‘자립이란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한다. 자치는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한다. 그리고 자전은 한국인 스스로 전도하도록 한다.’ 이다. 즉 한국인 스스로 경제적 부담이나 운영 등을 맡음으로써 주인의식을 가지도록 한다는 것이 이 선교 정책의 골자이다. 이 정책을 채택하여 본격적으로 실시한 교단은 장로교였다. 이 같은 자립정책은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893년 1월에 조직된 장로교 선교부 협의회가 채택한 10개의 선교정책에도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①서민 층 전도를 우선으로 할 것, ②부녀자 전도에 힘쓸 것, ③지방에 소학교를 설립할 것, ④교역자 양성에 유의할 것, ⑤성경의 번역과 보급, ⑥한글 사용을 목표할 것, ⑦자립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할 것, ⑧자립전도 훈련, ⑨병원 전도에 힘쓸 것, ⑩환자 심방을 할 것 등이다.

사. 교단별 한국 선교

1)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때는 1884년 훨씬 이전의 일이다 그러나 굳이 1884년을 선교의 기준으로 한 것은 미국 북 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알랜(Horace N.Allen)이 우리나라에 선교를 목적으로 이 해 9월 20일 상륙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일을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이렇게 밝히고 있다.

“주후 1884년(甲申) 7월 4일에 韓美條約이 成立됨에 自是로 전도의 門이 始開하야 是年 9월 20일에 美合衆國 北長老會 宣敎醫師 安連 夫婦가 京城에 來往하고 翌年에 長老會 宣敎師 元杜尤와 美 監理會 宣敎師 亞扁薛羅가 繼來하고 同年 6월에 의사 혜론 夫婦가 亦來하야 並力 宣敎함으로 敎會가 創建하니라.”

이때 알랜과 함께 내한한 이들은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처, 세 사람이었지만 한 달 후인 5월 3일에는 역시 감리교의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그의 모친 스크랜턴 여사가 함께 입국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들어 올 때 26세였는데 이미 한국어에 대한 학습을 많이 하여 거리나 골목, 시골에 나가서 한국인과 직접 대화를 하면서 전도의 기회를 얻은 최초의 선교사였다

한편 아펜젤러 부처는 국내 정세로 인해 인천에 상륙은 했지만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 2개월을 보내고 1902년 목포를 가다가 난파를 당해 순교하기까지 배재학당(培栽學堂)의 설립과 순회 목사 및 성서 번역에서 많은 공헌을 남겼다.

2) 영국성공회(英國聖公會)의 선교

영국성공회는 1890년 9월26일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가 여섯 사람의 성직자와 랜디스(E. B. Landis. 1865~1898, 남득시)등 두 명의 의사와 함께 부산에 도착, 주로 제물포와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 하여 1890년 12월 21일 서울 정동(貞洞)에 강림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고 같은 해 제물포에도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성당이 건립되었다. 한국인으로 첫 영세를 받은 사람은 1897년 10월 30일 한동막(韓東莫)이었으며, 다음 달 7일에 김희준(金熙俊 마가), 김군명(金君明 요한)이 각각 영세를 받았다. 김희준은 191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성공회가 처음 조선에 전래 되었을 때는 ‘조선종고성공교회(朝鮮宗古聖公敎會)란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3) 침례교(浸禮敎)의 한국 선교

침례교는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위크(M. C. Fenwick. 1865~1935, 片爲益)가 토론토의 코리언 유니언 미션에서 파송한 독립 전도자로 1889년 12월 8일 내한 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10개월을 우리말을 익히고 솔내에 가서 작은 집을 사고 농사를 지으며 우리 겨레와 함께 지냈다. 그는 1893년 한국선교의 어려움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1895년 강경, 공주 지방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했고 1903년 신명균(申明均)과 황상필(黃相弼)이 교사직을 받았다.

4) 성결교(聖潔敎)의 한국 선교

성결교의 한국 선교는 일본에 와 있던 미 감리교 카우만(C. E. Cawman) 목사와 킬보른(E. A Kilbourne) 두 사람이 1901년 일본 동경에서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노방 전도와 개인 구령 사업에 힘썼다. 이들은 원래 감리교의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정이었으나 차츰 신도수가 확장됨에 따라 기구조직이 필요해 졌고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단을 세우게 되었다.

한국에서 성결교가 정식 창설된 것은1907년 일본에서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金相濬), 정빈(鄭彬)이 귀국하여 서울 무교동에 집 한 채를 매입하여 ‘복음 전도관’을 개설함으로 비롯되었다.

5) 구세군(救世軍)의 한국 선교

구세군은 1908년 10월 본영 런던에서 로버트 호가드(R. Hoggard) 정령(正領)이 서울 구세군 영(營)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군복을 입었던 관계로 한일 관계가 어려웠던 당시 변을 당하기도 했다. 1908년 11월 22일 한국구세군의 첫 번째 교회인 서울 제일 영(현 서대문 영문)이 당주동에 개영 되었다. 1909년 구세군 사관학교를 설립했고, 1910년 구세군 한국 본영을 확립해 빈곤과 사회악의 대결, 순수한 복음 창달이라는 구호하래 적극적인 공헌을 남겼다. 초대 한국사령관이 호가드 정령의 8년 재임 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발전을 하였다.

6). 안식교(安息敎)의 한국 선교

1904년 하와이 이민으로 떠나던 손흥조(孫興祚)와 하와이 계발공사의 계몽원이었던 임기반(林基盤)에 의해 들어오게 되었다. 손흥조는 일본의 고배에서 제7일 안식일 기독재림교회의 구니야 목사에게 유은형과 함께 침례를 받아 최초의 안식교인이 되었다. 이들은 평안도 용강을 중심으로 선교에 나서 교회의 기초를 다졌고 결국 일본인 목사 구니야와 미국인 선교사 필드(F. W. Field)를 초청 1904년 진남포에서 선교를 했다. 이들은 용강의 선돌, 강서의 강대모루, 용강의 용동(구룡리) 및 중화의 바매기(개곡리) 등 네 교회를 창설하고 그 해 9월 27일 진남포에서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905년 미국 캔사스 출신의 W. R. 스미스(Smith) 목사가 초대 선교사로 부임하여 평안남도 순안에 선교 본부를 정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선교지가 전국으로 확대되자 1910년에 교단 본부를 순안에서 서울로 이전하였다.

아. 한국교회의 시작

1)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

한국인으로 최초의 세례교인은 1876년 만주의 고려문과 우장에서 메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신학문을 공부하던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가 마침내 성경을 읽고 마음을 열어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가 되었다.

2) 최초의 교회 솔내 교회(松川敎會)

만주에서는 서상륜(徐相崙)이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의 도움으로1882년 성경 번역을 하던 1884년 봄, 그의 고향인 황해도 長淵縣 大救面 松川洞 솔내(松川:九美浦)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이에 새워진 최초의 한국 교회가 솔내 교회이다. 이어 1885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는 장연의 솔내 교회를 방문하고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에게 세례를 주었다.

3) 첫 한국교회 유아세례인과 첫 장로

우리나라 교회의 첫 시작은 1885년(乙酉) 의주 사람 서경조(徐景祚)가 중국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귀국하여 황해도 에 이주하고 그 형 상륜(相崙)에게 성경서적을 다수 請得하여 鄰里에 전파하여 신자를 소집하였으니 이가 松川敎會의 창립이었다. 그 해 여름 서경조는 서울로 올라와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 해 가을 언더우드 목사는 송천에 순행하면서 경조의 아들 서병호(徐丙浩)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6년 7월에 노춘경이 국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음으로 기록되고 있고 1887년 1월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이 언더우드선교사에게 세례 받음으로 본격적인 전도가 시작이 되었는데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의 집인 정동 13번지 사랑방에 로스와 한국인 신자 14명이 참석하여 교회가 설립되니 이가 새문안 교회이다.및 그리고 언더우드 목사는 장로교의 조직을 따라 장로를 세우니 초대 장로로 서상륜(徐相崙) 백홍준(白鴻俊)이 로스 목사로부터 장로 직을 수수하고 유급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한편 1888년(戊子)에 선교사 언더우드는 각지에 순례를 마치고 선교계획을 확정한 후 다시 순행을 하여 황해도 장연의 송천에서 7인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설립한 후 賣書人을 선정하여 경성 근방, 장연 근방, 평양근방, 의주 근방에 전도하니 이는 조선 교역자의 임명의 초보였다.

4) 아펜셀라와 배재학당

1885년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선교사는 서울에서 학당을 개설하였는데 1886년 고종황제는 이를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게 되고 언더우드의 새문안 교회 설립에 자극을 받아 배재학당 학생인 고영필에게 세례를 주고 1887년 10월 9일 자신의 집 ‘베델 기도실에서 창립예배를 드리니 이가 감리교 첫 교회인 정동교회의 시작이다.

5) 최초의 한국인 순교자 백홍준

1887년 9월 27일 새문안 교회에서 장로 직을 받은 백홍준은 한국 최초의 조사(助師가)된다. 1892년 만주에서 전도여행을 하던 중 선교사와 내통했다는 죄목(禁敎傳道)으로 만주 봉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거기서 2년의 옥고를 겪던 중 1894년 우리나라 장로로는 첫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자. 교회의 직제 탄생

1) 조사(助事), 영수(領袖), 집사(執事)

조사(助事)의 시작은 1888년 언더우드가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등을 각각 關西(평안도), 海西(황해도), 경기 지방의 조사로 임명하면서부터이다.

조사(助事)란 선교사들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Helper.'를 직역한 낱말이다. 선교사들의 어학선생들은 한국인들과 접촉함에 있어서 중개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사들이다. 결국 조사라는 용어는 오로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룹 사이에서 중개자로서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역사기록에서는 조사는 대부분 ’助事‘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한 1929년에 차재명 목사가 저술한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上)에는 ’助師‘로 표기하고 있다. 즉 낱말이 바뀌어 진 것이다. 차재명의 사기(上)이 저술 될 당시 전국 각지의 성경학교 출신 조사들이 목사가 없는 교회들을 담임하여 예배와 사경회를 담임함은 물론 부지런히 개인 전도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조사들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일을 돕는 ’助事‘라기보다는 독자적으로 목사들의 직무를 대행하는 준 목사(準牧師)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즉 조사들은 사실상의 목사로서 일반 목사를 대신하는 의미의 助師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전도, 치리, 순회 심방 등의 일체 활동을 보좌하고 혹은 그 단독으로 조직, 미조직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보좌하기도 했다. 교회법의 정식 직분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초기 교회의 과도기적 교직, 또는 선교사 중심시기의 독특한 역할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들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여 1905년에는 80명 1906년에는 105명, 1907년에는 16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수는(領袖)는 청일전쟁(1894) 이후 교회가 대폭 증가하자 다시 조사를 도와 각 교회에서 조사 일을 대행하는 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영수’직이다. 영수는 당회에서 선출하기도 하고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에서는 그 지역 순회교역자가 임명하는데, 자격은 그 지역 토착 교인으로 신심이 두텁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을 택하였다. 영수의 역할을 지교회의 일반적 업무처리와 당회 사무, 교역자나 시찰위원회에 제반 업무를 수행하고, 교인을 대표하여 지도하며, 조사나 교역자를 협조하는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영수는 1894년 마펫(S. A Moffet.)선교사가 임명한 평양 장대현교회 영수인데 그는 이영언으로 추증된다.

집사(執事 Dwacon)는 1887년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가 장로 임직 후에 곧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솔내교회, 평양 널다리교회에서도 집사제가 실시되었는데 이 때는 서리집사만이 있었다. 1907년에는 장립 집사가 나왔으며 1908년에는 서울에 1명 평양 교회에 8명의 장립 집사가 있었다고 한다.

2) 장로와 목사

장로는 1887년 9월 27일 새문안교회 창립 때 처음으로 선출하였다. 그 후 1904년 송순명(宋順明)이 장로로 선출되면서 다시 세워제게 되었다.

1898년에는 장대현 교회의 이영언과 소래교회의 서경조가 장로로 피택 되었다. 그러나 이영언은 장립집사에서 피택만 받고 미처 장로가 되지 못한 채 작고하였고, 1900년에 서경조만 장립을 받아 당회를 조직할 때 한 사람이 되었다.

1900년에는 장대현 교회의 김종섭(金宗燮)이, 1901년에는 방기창(方基昌)과 길선주(吉善宙)가 장로로 장립 받아 1905년에는 전국에 잘로가 18명이었으며 1906년에 33명 독노회가 조직되는 1907년에는 47명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감리교에서는 1901년 김창식(金昌植 : 평양지구), 김기범(金基範 : 인천지구)이 각각 집사 목사로 장립을 받았는데 집사목사란 설교권이 없고 집례만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다가 1902년 아펜셀러가 사망한 후 최병헌(崔炳憲)이 목사로 안수받아 정동교회의 목사가 된다.

목사는 장로교회에서 1907년 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이 나왔다. 이 때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독노회)가 조직되면서 이들 졸업생 모두 목사로 안수 받게 되었는데 이들이 장로교 초대 7목사인 길선주(吉善宙), 한석진(韓錫晉), 방기창(方基昌), 서경조(徐景祚), 이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양전백(梁田白)이다.

차. 총회의 형성

1) 1907년 대 부흥운동

한국의 선교 역사는 초창기부터 활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1904노일전쟁이 발발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운이 기울자 망국의 한을 안은 국민들의 마음은 교회로 쏠리게 되어 선교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 그리하여 알렌 의사가 입국한 지 불과 16년 후에 한국의 교세는 벌써 257처, 전도소 287처 세례교인 수 3,690명, 총교인수 7,69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결정적인 불길을 일으킨 것은 초기 대 부흥운동이었다. 이 대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아디(R.A. Hardie)목사가 기도하는 중 새로운 영감을 받았고 이 체험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간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이 간증모임을 가지게 되고 1904년 원산(元山)에서 선교사들이 ‘하기사경회(夏期査經會)를 개척한 데서였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특색이 되고 그 부흥에 큰 원인이 된 부흥사경회의 효시였다. 때를 맞추어 미국 뉴욕의 죤슨(Howard A. Johnson)목사가 달려와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세계적 대부흥운동에 관하여 힘 있게 전파하였다. 은혜를 갈망하여 간구하는 소리는 하늘에 닿아 1907년 정월에 접어들면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부흥회가 1월 6일부터 10일간 평양 장대현(章大峴)교회에서 모인 대부흥회이다. 이 부흥회는 길선주 목사(당시 전도사)가 주도하고 선교사 방위량(William N. Blair 邦偉良)이 협조하였다. 이 부흥회는 매회 1,500명의 대중이 모여 낮에는 성경 공부, 밤에는 전도 강연 집회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가히 기도와 찬송은 천둥과 폭포 소리 같았고 한 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드디어 폭발하여 크나 큰 위세를 떨쳤다. 이 날 밤 사람들은 다투어 자기 죄를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의 여파는 전국으로 파급되어 1년 동안 교세는 배가 되었다.

특히 부흥 사경회는 이를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영속적인 연례행사처럼 되게 되었다.

장대현교회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ㄱ 자 예배당은 1900년 건립된 것이다

2) 대 부흥 운동의 의의

1907년의 대 부흥이 한국교회 형성사에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은 복음적이며, 경건주의적 신학의 기초가 된 점이다. 1907년의 부흥은 그 후 계속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이와 같은 부흥운동의 경향은 또한 그대로 한국교회 신학의 경향이 된 것이다.

둘째, 그것은 한국인과 선교사 간의 긴밀한 유대형성에 표본이 된 것이다. 그 때 한국인 성도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죄를 통회 자복하였고, 선교사들은 그들의 고자세를 자복하면서 한국인들과의 동고동락을 다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협력은 한국교회의 급속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셋째, 그것은 ‘전도하는 교회’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대 부흥이 일어난 1907년에 한국장로교회의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그 노회는 조직 즉시로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은혜 받은 교인들은 개인 전도에 힘써 당년에 교세는 배가 되었던 것이다.

3) 대 부흥의 배경

가) 한국교회의 성장의 동력

한국교회가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길을 미리 예비하고 기다린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였다.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의 그 바탕은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첫째, 정신적 공허상태의 지적이다. 신라 천 년과 고려를 이어오던 불교가 겨레의 종교 역할을 하다가 조선 500년간은 유교가 왕성해지면서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조선 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는 불교와 유교가 다 같이 쇠약하여 겨레의 정신을 지배할 능력을 상실했다. 이러한 공허 상태에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신적 공백의 자리에 복음이 급속하게 겨레의 정신세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국가의 비운을 맞은 것이다. 조선 말, 정부는 무력하고 우리 강산은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주변 열강들의 세력 각축장으로 변하다가 일본이 패권을 잡아 한반도가 그 식민지화 했을 미국 등 서방세계에 기대를 걸게 된 것이다. 이 때 전해진 기독교는 무언중 국가적 광복에도 소망을 걸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지도층들이 대거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교회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다른 나라는 기독교가 서구 식민지 체제와 함께 들어 왔지만 우리의 경우는 일본의 식미지 정책과는 무관하게 들어온 까닭도 있었다.

셋째, 기독교가 신문화를 동반한 사실일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마침내 밀어닥친 개화의 물결을 막지 못하고 국가의 문호는 개방되었다. 이때 기독교는 서양의 신문화를 동반하여 전래되었고, 한국 최초의 의료기관, 현대식 각종 학교들이 앞을 다투어 설립되어 민족개화에 큰 공을 세웠다. 상투를 자르고 제사를 폐지하며 모든 미신을 타파하고 부녀자들이 글을 배워 성경을 읽는 등 교회를 통해 급속히 개화되었고 이것이 기독교 전파에 큰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4) 공의회 시대

) 선교사 공의회시대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10년 미만이었지만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를 치리할 상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위원들이 공의회를 조직되었는데 선교사만이 회원이 되었던 선교사 공의회 시대(1893-1900)와 내외국위원이 함께 구성된 합동 공의회 시대(1901~)로 나누어진다. 이는 장래에 있을 정식 치리회를 위한 예비적 공회라 볼 수 있다.

제1회 회장은 이눌서(李訥瑞)이었다. 이 때 선교사 모삼열(牟三悅) 매일 교우들과 동반하여 시가지에 전도를 하니 당시 조사는 김영옥(金泳玉), 천광실(千光實)이오 전도사는 마영준(馬永俊), 이승두(李承斗)였다.

선교사 모삼열이 경기 동쪽 방면으로 순행하면서 김영옥, 천광실과 함게 양주 포천 등지에 전도하여 수처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이 평양 양촌(陽村)에 이주하, 한석진(韓錫晋)을 조사로 선정하여 회무를 돕게 하고 평양성 내 판동(板洞에 집 한 채를 사서 회당을 설립하고 교인들이 모이니 이가 평양에 수립한 첫 교회였다.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도 1893년에 세워지고 영남지역엔 부산에 초량교회(草梁敎會)가 이 때 세워졌다.

이 후로 평원군에 한천(漢川)교회가 1893년에 설립되었는데 송인서(宋麟瑞)라는 분이 복음을 믿고 평양으로부터 죽동(竹洞)에 이사를 와서 전도를 하였고 김정연(金鼎淵), 김봉준(金鳳俊) 믿음으로 주일을 지키더니 선교사 마포삼열과 전도인 이영언(李榮彦)이 와서 교회를 설립하니 한천교회(漢川敎會)라 이름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평원군 명당동교회(平原郡 明堂洞敎會), 용강군 죽본리교회(竹本里敎會)를 비롯하여1893년에 세워진 교회만 17개 교회가 세워 졌다.

한 편 선교사 마포삼열은 한석진으로 평안남도 전 지역을 순회하고 김근건(金謹根)으로 평안북도 전 지역을 순행케 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주일에 3차 예배와 수요일 저녁에 기도회를 가지기로 정하니 이 예가 거의 전국에 걸쳐 이루어 졌다.

나) 조선예수교 장로회 공의회(합동공의회)시대

1901년(辛丑) 선교사와 조선인 총대가 합하여 공의회를 조직하였으니 이가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가 된다. 회원은 조선인 장로 3인과 조사 6인, 선교사 25인이었고 회장으로 선교사 소안론(蘇安論)이 피선되었다.

이때 공의회는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장차 한국인 교역자를 양성을 지향했다.

아울러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다. 이 독노회는 네 장로교 선교회(미국 남 장로교, 북 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와 그곳 총회의 인준으로 설립되었으며 이 때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길선주(吉善宙), 한석진(韓錫晉), 방기창(方基昌), 서경조(徐景祚), 이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양전백(梁田白)씨가 목사로 장립되었다. 이 날 안수 받은 목사 중에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고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면모를 다짐했다.

이 때 교세는 선교사 32명, 한국인 목사와 장로가 40명, 학습교인이 21,842명, 보통교인이 69,098명, 세례교인이 17,890명이요, 조직교회가 38개, 미조직 교회가 984개, 각급 학교가 402개교요, 등록학생이 8,611명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독노회는 경충대리회(50교회), 평북대리회(160교회), 평남대리회(89교회), 황해대리회 (47교회), 전라대리회(127교회), 경상대리회(186교회), 함경대리회(78교회)의 7대리회에 737개의 교회가 참가하고 있었다.

1907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 7명.

다) 총회의 창설

1907년에 창설된 독노회는 1908년에는 서울에서, 1910년에는 선천에서 그리고 1911년에는 대구에서 모였다. 이와 같은 독노회 시대는 계속적인 부흥에 따라 불과 5년으로 끝나고 드디어 총회가 창설하게 되었다. 1911년 9월 17일, 대구 본교회(당시 대구남문교회)에서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 해인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할 것과 그럼으로 7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전라노회가 1911년 10월 15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12명, 장로 21명이 모여 조직을 마쳤고, 경충노회가 1911년 12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목사 12명, 장로 21명에 의해 조직되고, 황해노회가 1911년 12월 8일 봉산 봉산모동교회에서 목사 10명, 장로 34명에 의해 조직되고, 경상노회가 1912년 1월 6일 부산진교회에서 목사 18명 장로 18명에 의해 조직되었고, 평남노회가 1912년 1월 28일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26명, 장로 96명에 의해 조직되었고, 평북노회가 1912년 2월 15일 선천북교회에서 목사 26명에 장로 15명에 의해 조직되었고, 함경노회가 1912년 2월 20일 원산 상리교회에서 목사 14명, 장로 16명에 의해 각각 조직되었다. 더디어 대한(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12년 9월2일 87개의 노회가 조직이 되더니 마침내 191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가 7개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목사 52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 강당에서 열렸는데 초대 회장으로 원두우 선교사를, 부회장에 길선주 목사를, 서기에 한석진 목사를, 부서기에 김필수 목사를, 회계에 방위량 선교사를, 그리고 부회계에 김석창 목사를 각각 선출하여 마침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대를 열게 된다.

1907년 9월 평양에서 개최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

1912년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

영남지방과 관련이 되는 경상노회는 전국 7개 노회 중에 하나로 경상남북도를 그 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경상노회는 1916년 9월 평양신학교에서 열린 제5회 총회의 허락을 받아 경남노회와 경북노회로 나누어 졌으면 경북노회는 다시 8개 노회로 분리 발전하였다.

3) 기타 교회의 조직

가) 침례교

침례교는 1906년 충청도 강경교회에서 첫 대화회(大和會)를 개최하고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회’라 하고 펜위크 선교사를 초대 감목(監牧)으로 추대하였다.

나) 성결교

성결교회는 1908년 11월에 ‘경성성서학교’를 설립하고 1910년 4월 최초의 성결대회가 개최되고 같은 해 12월 영국인 존 토마스가 복음 전도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다) 성공회

성공회는 1908년에 이르러 전국을 서울, 강화, 수원, 진천 등 4개 지역으로 나누어 그 지역 관할 사제 아래 두는 조직 체계를 강화하다가 1910년 교회의 명칭을 ‘대한종고성교회(大韓宗古聖敎會)’ 로 했다가 다시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로 개칭하였다.

라) 감리교

감리교는 1904년 연회(年會)를 조직, 초대 감독에 해리스가 취임 하였다.

남 감리교는 이미 1897년 9월에 제1회 지방회를 경성에서 개최하였고, 1897년 12월에 이덕(李德)박사의 서재에서 남감리교 조선선교 연회(南監理敎朝鮮宣敎年會)가 제1차로 회집되었다. 아울러 1904년 김흥순에게 전도사 인허장을 주어 남 감리교 최초로 한국인 교직을 인정했다.

2. 영남지방의 장로교 전래

한편 영남 땅에 장로교 선교사로 첫 발을 디딘 것은 1889년 8월로 캐나다의 개신교 선교사 게일(James Scarta Gale, 1863~1937)이었다. 그는 부산에 주재한 장로교의 첫 선교사로서 이 지역 선교를 위한 탐색과 연구의 기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하디 의사(Dr. Robert A. Hardie) 부처의 내한과 부산지역에서의 의료선교 였다. 약 2년 동안 게일과 함께 선교사역에 동참하면서 부산지역 전염병 퇴치와 환경 개선 사업에 힘썼고 북 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Rev. William M. Baird 裵偉良. 1862~1931)을 도와 부산 초량교회 설립에 기여한 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호주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데이비스(Rev. joseph Hanry Davies, 1856~1890)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Davies)도 한국선교를 자원하여 1889년 10월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고 마침내 천연두와 폐렴이 겹쳐 한국에 온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에 불을 붙여 부산 경남 지역의 선교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 부부였다. 베어드 부부는 1891년 2월 2일 부산에 도착, 그 해 9월부터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베어드는 주로 개인 전도와 지역 순례를 통해 신자들을 확보해 나갔고 그 자신의 방을 개방하여 사랑방으로 활용하여 전도를 위한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이 방은 ‘동네 사랑방’으로 불리고 주 3회의 정기 모임과 기도회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1894년 영남지방의 어머니 교회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초량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교회는 평양 장대현교회와 같은 해에 창립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로서 1890년 서울의 새문안교회가 선지 3년 후 한강 이남지역에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된 것이다.

3. 경북지방의 장로교 전래

가. 베어드(Rev. William M. Baird)의 전도여행

경북지방에 장로교가 전래된 것은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베어드가 대구를 방문한 때부터이다.

베어드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1,240리의 대장정을 교통이 불편한 경북 지역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했다.

개신교 목사로서 처음 경북지방을 답사했다는 것은 경북지방 선교의 효시가 되는 중요한 선교 여행인 것이다. 베어드는 1893년 4월 22일에 서경조(徐景祚) 전도사와 함께 대구에 들어 왔는데 대구에서 3일간을 머물고 다시 25일 동명을 지나 상주, 안동, 의성, 신령, 영천, 경주, 울산을 경유하여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베어드는 대구를 방문하면서 “전도할 틈은 없었어나 많은 서적을 나누어주었다.”고 고백했는데 아마 청중을 대상으로 한 전도나 강연은 할 수 없었고 다만 기독교를 선전하는 책자를 배포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893년 4월 22일은 대구에 개신교가 전해진 날이 되었다.

한편 베어드는 다시 두 차례 대구를 방문했는데 대구는 경상도 북부지방의 중심도시며, 인구가 많고, 낙동강을 통해 서울과 부산이 연결되는 지점이며, 경상감영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요, 약령시가 열리는 상업의 중심지로 파악하여 대구를 선교의 전략지로 삼았다.

나. 대구제일교회의 설립

베어드는 1895년 12월 대구에 선교기지를 물색하였는데 1896년 1월에 구입한 남문 안에 위치한 정완식 씨의 대지 420평 초가 5동 20여 칸과 와가 1동 6간의 큰집을 구입(435원 50전을 주었다고 함)하였다.

이후 베어드는 1896년 그의 처남인 아담스(Rev. James Adams 安義窩)에게 대구 선교 업무를 인계하고 평양으로 옮겨 선교활동을 하였다.

아담스는 1895년 5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대기 중이었는데 1897년 11월에 부인과 아들, 그리고 그의 어학 선생이던 김재수(金在洙)와 같이 대구에 도착하였다. 김재수는 상주출신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산 선교부에 갔다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후에 이름을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하였는데 경북지방 최초의 교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베어드가 구입한 남문 안 사랑방은 1897년 12월에 대구에 온 존슨 의사(Dr. W. O. Johnson, 張仁車) 부부와 아담스 부부가 날마다 예배를 드렸고, 주일날은 김재수와 두 선교사 가족(아담스 가족 4명, 존슨 가족 2명 김재수) 등 7명이 모였는데 이들의 모임이 남문안 예배당의 시작이고 오늘 대구 제일교회(원 이름은 남성동 교회 또는 남성정교회)의 전신이 된다.

여기서 대구제일교회 70년사에는 대구제일교회의 창립교인으로 안의와 선교사, 장인차 의사, 김재수 조사, 학습교인 서면욱(徐勉煜 일명 徐子明),과 부지 주인이었던 학습교인 정완식(鄭完植) 등 7명으로 밝히고 있다. 이들은 경북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기록된다.

다. 부루엔(H. M. Bruen)의 선교 활동

부루엔(H. M. Bruen 부해리(傅海利)

부루엔(H. M. Bruen 부해리(傅海利), 1874~1957) 목사는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선교사로 1899년 9월부터 1941년까지 42년간을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경북 서북부 지방을 맡아서 순회 전도로 지역교회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경북 서북부 지역의 초창기 장로교회 대부분이 부루엔 목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영향력을 끼쳤다.

1901년 김천군 아포면 송천동교회를 시작으로 1923년까지 김천지역에만 11교회를, 1900년부터 1904년까지 구미지역에 6개 교회를 1901년부터 1907년까지 성주지역에 2개 교회를 총 19개 교회를 직접 설립 또는 설립에 관여 했다.

그러나 이 외에도 1900년 영천군 대창면 조곡교회를 시작으로 군위군 소보면 봉황동 교회. 고령군 임천면 안림교회, 고령면 헌문교회, 칠곡군 인동면 진평교회, 왜관읍 왜관읍교회, 북삼면 숭오교회, 석적면 황학교회, 약목면 복성교회, 달성군 현풍면 하동교회, 상주군 화서면 사산교회, 상주면 서정교회 까지 설립한 기록을 보면 1911년까지 2개 교회를 더해 모두 31개 교회를 설립하였거나 관여 한 것을 나타났다.

그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가 없는 곳에는 전도 집회를 통해 교회를 직접 설립하였고 이미 신자가 생긴 곳에는 교회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각 교회마다 주일학교를 열 개하여 신교육을 하게하고 각 지역마다 조사(助事)나 영수(領袖)를 세워 교회를 유지하게 하고, 전도부인(Bible Woman)을 세워 전도하기도 하였다.

4. 상주의 교회 시작

가. 경북지역 최초의 교인은 상주 사람 김재수(金在洙)

베어드 선교사가 1893년 4월 17일에서 5월 20일까지 경북 지방을 순행하게 되었다. 이 때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동명, 성주, 인동, 낙동, 상주, 안동까지 왔다가 다시 의성, 신령들을 거쳐 경주, 울산을 지나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 1893년 4월 27일 상주에 도착하여 마침 상주 장날이어서 간신히 방을 구하고 28일 여러 권의 도서를 팔았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미 전에 알고 있던 신자인 김 서방이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말한 김 서방은 부루엔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상주 사람으로 경북 최초의 장로 교인이 된 김재수(金在洙)이다. 그는 젊은 시절 심한 종창을 앓던 중 부산 선교부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891년에 걸어서 부산 선교부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하디 의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고 세례를 받게 된다. 세례교인이 되어 고향에 온 그는 문중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던 중 1894년 베어드 목사를 만나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고 1895년 5월에 아담스 목사를 만나 아담스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아담스 목사가 1897년 가을 대구선교지부로 부임할 때 함께 동행 하여 남문 안 선교기지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아담스 목사의 조사가 되었다. 1897년 존슨 의사가 와서 남문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 했을 때 이 예배에 참석한 최초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는 훗날 경북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이 김재수가 곧 김기원 목사이다.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김재수

나. 상주 출신의 교역자 이희봉(李熙鳳)

경북 상주 출신으로 일찍 기독교에 입교한 이는 상주 출신 이희봉을 들 수 있다. 그는 교역에 뜻을 두어 부해리의 조사가 되었는데 1901년 선산 죽원교회(지금의 대원교회)의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1915년까지 선산, 김천, 칠곡, 상주 등에서 조사로 시무하였다. 1910년 상주서정교회에서 보성의숙을 개설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 을 가르쳤다.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9회로 졸업하고 같은 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상주지방 11개 교회에서 이희봉 목사는 방혜법 선교사의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1918년 경북 노회장(3-4회)을 지냈고 1921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대구 칠성동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상주 남문밖교회를 개척하였고, 1937년 상주서정교회와 남문밖교회가 합병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872. 상주 출생

1901. 선산 도산(桃山)교회 조사. 김영채 김기원과 相繼시무.

1903. 김천 송천교회에서 덕계교회로 이거

1904. 선산읍교회 조사(노상동교회, 오가교회 겸임 조사)

1904. 칠곡군 왜관교회 조사

1904. 선산군 五桂洞(오계동) 교회 조사

1905. 선산군 習禮(습례)교회 조사

1905. 선산읍교회 광성(廣成)학교 설립(부해리선교사와 함께)

1906. 김천군 福田교회 조사

1909. 상주 서정교회 조사

1910. 도산교회 조사 사면

1910. 상주 서정교회에서 보성의숙 개설

1911. 구미 옥계교회 조사

1916. 평양장로회 신학교 제 9회 졸업, 방혜법 선교사의 동사목사

1916. 목사 안수

1916. 청산교회, 상주서정교회 목사

1917. 선산죽원교회 목사

1918. 경북노회장(3대, 4대)

1921. 대구 칠성동교회(제일교회서 분립) 목사. 그 이듬해 사임

1922. 김천 황금동 교회 목사

1926. 구미 상모교회 당회장

1929. 구미 강동교회 목사

1930. 상주남문밖 교회 개척

1931. 송천교회 당회장

1937. 상주남문밖교회 폐쇄. 상주읍교회와 합병

1937. 원로 목사 추대

다. 상주지방의 교회 설립

문헌에는 상주에 교회가 설립되기는 19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기록은 상회(노회)에 보고가 된 후부터 라고 보면 실제로 지역교회의 출발은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오늘날 오광교회나 상주교회, 상주시민교회가 이미 교회 자체의 연혁으로 100주년이 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으로 나타난 교회는 1908년이 상주에 교회가 설립된 최초의 해로 기록된다.

대구 남성정교회가 세워진 해가 1896년이라고 보면 12년 후의 일이다. 1900년부터 이미 경북지역에 36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가까운 선산에만 해도 1900년 이후 옥성면 죽원교회(현 대원교회)를 시작으로 8개 교회, 김천지역이 10개 교회가 설립된 이후이어서 원인이야 있었겠지만 다소 늦은 감이 없지는 않다. 아마 선교사들의 활약이 대구를 중심으로 북부지역으로 점차 확대되면서 경북 북부지역에 위치한 상주가 기독교의 접촉이 늦어 진 이유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근거로 하여 1900년 5월에 정씨라는 한 부인에 의하여 상주읍 서성동 소재의 집 4칸을 구입하여 성명 미상의 전도사가 가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경북지역 전반에 교회가 한창 세워 질 시기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교회는 그 설립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 장로교회 정치 체제상 교회 초기부터 문서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어려웠고, 대부분의 교회가 당회가 조직되기 전부터 존재 했으며, 당회 기록마저 소 실 유실된 경우가 많고, 또 하나 선교사들이 지역 교회를 관여하면서 신앙공동체가 본격적인 교회로 정착되자 대부분 자신의 선교 사역이 시작된 때로부터 설립연도를 잡은 점이다. 아울러 공식적으로 노회나 총회에 보고 된 내용과 교회 자체적인 기록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경북교회사나 교회사기에 기록된 순서로 상주지역에 세워진 교회를 1945년 해방 전 연간으로 한정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서정교회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근거로 하여 1900년 5월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북 교회사의 기록에는 1910년 상주군 상주면에 서정교회(현 상주교회․ 상주시민교회)가 세워졌다고 되어있다. 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선교사 부해리와 대구 남성정 교회 교인 서희원(徐熙媛) 여사가 각 50원을 기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부해리가 설립자로, 송병근(宋秉根)을 영수로, 최대익(崔大益)을 집사로 임명되었다.

1909년 3월 1일 이희봉 목사가 부임했다고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은 기록되어 있으나 이 때 이희봉씨는 조사로 시무하였고, 1916년 경상노회 제 12회 노회에서 청원을 받아 목사로 장립하였으며 정식 목사로 시무하였다. 1918년 6월 20일 위임 허락할 것을 노회에 청원하였다. 한편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1909년 이희봉 목사가 보성의숙을 개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14년엔 영수 박동수를 김덕서, 최병옥으로 대신하고, 집사 김기업, 김성칠을 대신하여 김일문이 시무하였고, 그 때 교회 내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보성여자학원(普成女子學院)과 부인야학교(婦人夜學校)를 설치하였다. 대구 선교부인 성마리다(成馬利多)가 본 학교를 위하여 200원을 헌금하고 김재돈, 조경삼, 유덕규, 이희봉 등이 각 50원을 헌금하였다.로 되어 있는데 상주사에는 이와 좀 다른 내용이 나온다. 1910년 상주교회 이희봉 목사는 보성의숙을 개설하였다. 이 학교는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을 가르쳐 낙후된 지역교육의 멍에를 벗고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것을 실천한 셈이다. 아울러 서정교회는 1949년 5월에 이 지역 첨으로 상주유치원을 개설하였다.1또 다른 기록을 보면 1928년 6월 5일 서정교회에 유치원을 인가받았고 불신자 중 특지가가 풍금 1대를 기증하였다는 서북 시찰장 이희봉 씨의 보고와 이어 여자 야학교를 설립 학생은 40여명이요 많은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하였다.

목조 건축 당시의 상주서정교회

서정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신축한 것은 1920년이다. 제7회 경북노회 서북지방보고서에는 ‘상주읍교회서는 수천원의 거액으로 20 여 간 예배당을 굉장히 건축하였사오며..’ 로, 이어 1921년엔 헌금교인이 이미 80여명이요 교인 중 한 분이 100여원 가치의 종을 사서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주년이 넘은 상주지역 교회의 발자취

1. 상주의 교회 시작

가. 경북지역 최초의 교인은 상주 사람 김재수(金在洙)

베어드 선교사가 1893년 4월 17일에서 5월 20일까지 경북 지방을 순행하게 되었다. 이 때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동명, 성주, 인동, 낙동, 상주, 안동까지 왔다가 다시 의성, 신령들을 거쳐 경주, 울산을 지나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 1893년 4월 27일 상주에 도착하여 마침 상주 장날이어서 간신히 방을 구하고 28일 여러 권의 도서를 팔았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미 전에 알고 있던 신자인 김 서방이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말한 김 서방은 부루엔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상주 사람으로 경북 최초의 장로 교인이 된 김재수(金在洙)이다. 그는 젊은 시절 심한 종창을 앓던 중 부산 선교부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891년에 걸어서 부산 선교부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하디 의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고 세례를 받게 된다. 세례교인이 되어 고향에 온 그는 문중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던 중 1894년 베어드 목사를 만나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고 1895년 5월에 아담스 목사를 만나 아담스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아담스 목사가 1897년 가을 대구선교지부로 부임할 때 함께 동행 하여 남문 안 선교기지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아담스 목사의 조사가 되었다. 1897년 존슨 의사가 와서 남문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 했을 때 이 예배에 참석한 최초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는 훗날 경북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이 김재수가 곧 김기원 목사이다.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김재수

나. 상주 출신의 교역자 이희봉(李熙鳳)

경북 상주 출신으로 일찍 기독교에 입교한 이는 상주 출신 이희봉을 들 수 있다. 그는 교역에 뜻을 두어 부해리의 조사가 되었는데 1901년 선산 죽원교회(지금의 대원교회)의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1915년까지 선산, 김천, 칠곡, 상주 등에서 조사로 시무하였다. 1910년 상주서정교회에서 보성의숙을 개설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 을 가르쳤다.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9회로 졸업하고 같은 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상주지방 11개 교회에서 이희봉 목사는 방혜법 선교사의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1918년 경북 노회장(3-4회)을 지냈고 1921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대구 칠성동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상주 남문밖교회를 개척하였고, 1937년 상주서정교회와 남문밖교회가 합병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다. 상주지방의 장로교회 설립

문헌에는 상주에 교회가 설립되기는 19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기록은 상회(노회)에 보고가 된 후부터 라고 보면 실제로 지역교회의 출발은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오늘날 오광교회나 상주교회, 상주시민교회가 이미 교회 자체의 연혁으로 100주년이 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으로 나타난 교회는 1908년이 상주에 교회가 설립된 최초의 해로 기록된다.

대구 남성정교회가 세워진 해가 1896년이라고 보면 12년 후의 일이다. 1900년부터 이미 경북지역에 36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가까운 선산에만 해도 1900년 이후 옥성면 죽원교회(현 대원교회)를 시작으로 8개 교회, 김천지역이 10개 교회가 설립된 이후이어서 원인이야 있었겠지만 다소 늦은 감이 없지는 않다. 아마 선교사들의 활약이 대구를 중심으로 북부지역으로 점차 확대되면서 경북 북부지역에 위치한 상주가 기독교의 접촉이 늦어 진 이유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근거로 하여 1900년 5월에 정씨라는 한 부인에 의하여 상주읍 서성동 소재의 집 4칸을 구입하여 성명 미상의 전도사가 가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낙서교회 자체 연혁에는 1902년 기도소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이 시기는 경북지역 전반에 교회가 한창 세워 질 시기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교회는 그 설립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 장로교회 정치 체제상 교회 초기부터 문서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어려웠고, 대부분의 교회가 당회가 조직되기 전부터 존재 했으며, 당회 기록마저 소 실 유실된 경우가 많고, 또 하나 선교사들이 지역 교회를 관여하면서 신앙공동체가 본격적인 교회로 정착되자 대부분 자신의 선교 사역이 시작된 때로부터 설립연도를 잡은 점이다. 아울러 공식적으로 노회나 총회에 보고 된 내용과 교회 자체적인 기록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경북교회사나 교회사기에 기록된 순서로 상주지역에 세워진 교회를 1950년 연간으로 한정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낙서교회

낙서교회는 1902년 부해리 목사의 전도로 최일만씨 댁에서 기도소로 시작하였다.

이어 1904년 4월 10일 선교사 방해법 목사를 통해 선각자 최일만 영수, 최성운 집사, 윤자선 집사를 중심으로 낙서교회가 설립되었다. 1905년 일차 예배당 건축을 했는데 초가 약 20평을 낙서리 163번지 대지 152평 위에 세웠다. 이 때 초대교인으로 위의 세 분 외에도 10여명이 있었다. 한편 낙서교회는 1925년 일본 강점기의 교회폐쇄 핍박에도 굳건히 견디었고 1951년 9월 13일 최영신 장로가 장립함으로 11월에 낙서교회 당회가 구성되었고 1953년 흙벽돌 와가 30평의 2차 예배당 건축이 있었다.

낙서교회 역대 교역자로 1904년부터 1924년까지 서상용 조사가, 1925년부터 1930년까지 김이경 조사가, 1930년부터 1938년까지 이덕성 조사가 시무 했으며 1951년에 가서야 한원도 목사를 모시게 되었고 당회가 이 해에 구성되었다.

3) 사산교회

사산교회는 1903년 3월 15일 부루엔(한국명 : 부해리) 선교사와 성도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총회 기록에는 1908년 3월 8일로 기록되어 있다. ‘1903년 3월 15일’이란 기록은 성도들의 구전에 의한 기록이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신앙공동체가 있었음을 말하며 때로는 이 공동체가 가정교회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경북 기독교회사와 경북교회사 기록을 보면 1908년 상주 화서면 사산 2리에 세워진 교회로 신자 여러 명이 특별한 규칙 없이 모여 예배하다가 선교사 부해리의 인도로 교인들의 헌금 54원으로 6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서 부해리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미 외부로부터 복음을 받은 이들의 신앙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1908년은 교회의 시작이지 복음의 시작은 아니라는 의미와 같다. 한편 1909년 이문주 조사가 석산, 사산교회를 겸임하였고 1911년 사산교회는 조사 이문주(李文主)가 사면을 하고 권국진(權國鎭)으로 교체되었고, 1912년 김익현(金翊現)이 조사로 시무, 1918년 조사 이희봉(李喜鳳)이 사산, 화산, 금흔, 오리원, 오광 6교회를 사면하고 조사 서상용(徐相龍)으로 교체하였다. 1922년 서상룡 조사를 대신하여 김의경이 사산, 금흔, 화산, 오리원, 오광, 각 교회를 겸임하였다.

4) 금흔교회

금흔교회 역시 1908년 사벌면에 세워진 교회로 신자 몇 명이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조사로 최군중(崔君仲이) 시무하였다.

1918년 조사 이희봉(李喜鳳)이 사산, 화산, 금흔, 오리원, 오광 6교회시무를 사면하고 조사 서상용(徐相龍)으로 교체하였다가 1920년 서상용은 다시 금흔, 오리원, 오광, 화산교회를 사면하고 김의경(金義敬)으로 교체, 1921년에는 다시 조사 김의경 대신 서상룡이 화산 오광 오리원을 겸임 시무, 1922년 김의경이 사산, 금흔, 화산, 오리원, 오광 각 교회를 겸임하였다. 결국 서상룡과 김의경이 서로 교체 시무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경북교회사에는 1922년까지 기록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덕교회 설립 배경을 보면 ‘1921년 3월, 중덕리 156번지에 대지 200평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를 세우고 ‘중덕교회’라 이름 하였다.’라고 증언하는데 사벌면 금흔리 325번지에 사는 김치부(83세) 할머니를 만나 본 결과 금흔교회는 지금의 충의사(금흔2리) 앞에 교회가 있었고(지금은 감나무 밭으로 변해있었음) 김치부 씨의 시부되는 석기모 영수가 교인들이 줄어들자 지금의 중덕리로 교회를 옮겨 중덕교회를 설립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미루어 금흔교회는 1921년에서 1923년 연간에 교회가 없어지고 중덕교회로 옮겨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 화산교회

화산교회 역시 1908년 2월 낙동면 화산리에 세워졌다. 교인 중 박동언(朴同彦)이 16원으로 3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봉헌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시작은 낙동면 신상(음지마을 1052번지)에서 박동언 영수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어 1930년 3월에 장사진, 김주봉 영수의 협력으로 방 1칸의 기도실을 확장하고 건평 14평의 교회를 신축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화산교회라 하였으며 1948년 5월에 김주봉 영수를 초대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6) 오리원교회

역시 1908년 신자들이 출연한 헌금 16원으로 4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오리원 교회는 1908년 설립된 상주의 교회로서는 현재 오리원이란 이름으로 전해오지 않은 교회이다. 교회가 서 있던 자리도 분명하지 않고 오리원이라는 지명도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잊혀 진 상태이나 현재 낙동면 용포리 용포초등학교와 농협 부근을 사람들은 원이라 불렀다는 증언은 들었다. 농협 앞에 서 있는 비석이 원래는 역마를 나타내는 비석이었는데 비문을 깎아내어 농협이름을 새겨 새웠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7) 오광교회

1908년 상주 공성면에 세워진 오광교회는 김성률(金聖律) 또는 김성택이 땅 50평을 헌금하고 일반 신자는 30원을 헌금하여 3칸짜리 초가집을 건축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오광교회도 이미 이 전에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오광교회 성도들이 증언하고 있으며 이들도 이미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린 경우이다.

오광교회 요람의 연혁을 보면 1904년 1월 상주군 공성면 금계리에 건평 10평을 건립하고 김필구 씨의 주동으로 약 40여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이어 1909년 4월 엄말술 씨와 곽유근 양씨가 주동이 되어 금계리에서 오광리 175번지 엄말술 씨 댁으로 이전 건평 12평을 건축하였다.

이후 1838년 500여원을 들여 20 여 평의 함석집으로 교회를 신축했다. 그러나 오광교회 연혁에는 1940년 4월로 기록되어있는데 아마 착오일 것 같다.

8) 석산교회

1908년 상주 모서면에 석산교회가 세워졌다. 이전에 몇 명의 신자들이 인도자가 없어 모서면 소정리에 예배 처소를 정하고 회집하다가 그 때에 본리(本里)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 방혜법(Herbert E. Blair. 1879~1945 邦惠法)이 설립자로, 조사는 정재순(鄭在淳)이 사산교회와 겸임하였다. 한편 1909년 이문주 조사가 사산, 석산 겸임조사로 1911년 석산(사산)교회는 조사 이문주(李文主)가 사면을 하고 권국진(權國鎭)으로 교체되었고, 1912년 김익현(金翊現)이 조사로 시무, 1918년 조사 이희봉(李喜鳳)이 사산, 화산, 금흔, 오리원, 오광 6교회를 사면하고 조사 서상용(徐相龍)으로 교체하였다. 다시 1920년 서상용은 금흔, 오리원, 오광, 화산을 사면하고 김의경(金義敬)으로 교체, 1921년 조사 김의경 대신 서상룡이 화산, 오광, 오리원을 겸임 시무, 1922년 석산교회는 영수 김제명(金濟明), 이만중(李萬重), 황학팔(黃鶴八)과 집사는 김제선(金濟善), 이만기(李萬基), 김만용(金萬容)이 함께 시무하고 조사는 서상룡을 대신하여 김의경이 다시 사산, 금흔, 화산, 오리원, 오광 등 각 교회를 겸임하였다.

9) 함창교회

1909년 3월 15일 부해리(H. M. Bruen)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주시 이안면 증촌리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7월에 함창읍 구향리에서 주일집회를 시작, 권중한 전도사가 첫 시무를 하였다. 1920년 3월에 함창읍 오사리에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1921년 정봉덕 전도사가 부임하여 2년 3개월을 시무하였다. 1930년에 이르러 일제의 심한 박해로 부득이 교촌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1945년 현 함창읍 구향리 130번지에 25평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사를 오게 되었다. 1948년 12월에 오형기 목사가 부임하여 1950년에 최초로 당회를 조직하고 1951년 9월 양범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53년에 가장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한편 1935년, 이 때 교회가 심히 어려워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다가 조영규 전도사가 노회에서 파송을 받아 열심히 전도한 결과 교인이 80-90명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교회가 심히 어려움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10) 옥산교회

1919년 3월 7일 상주군 공성면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의 설립에 대한 경위는 밝혀진 자료가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오광교회 연혁에는 1924년 1월 옥산교회가 분립하다로 되어있다. 한편 옥산교회 연혁에는 1919년 3월 7일 오광교회에서 분립하여 옥상동 초가 20평 예배당에서 곽부용 영수의 예배 인도로 성도 약 20여명이 모여 시작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편 1934년 12월 11일 제 33회 경북노회 서북시찰 보고서에 ‘상주 옥산교회는 400여원으로 함석집 20평에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불신자중 유지 석영목 씨는 해 교회 예배당 신축공사를 위하여 기지 30 여 평과 건물 7 간 을 기부하였으며 또 불신자 유지 문영창 씨는 30원짜리 종 1좌를 기부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11) 수상교회

1919년 3월 3일 상주군 청리면 수상리 김문석 씨 댁에서 최초의 집회를 열었다.

1922년 일반 신자의 출연금 50원으로 3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설립자로 김문석(金文錫) 씨는 영수로, 최칠복(崔七福) 씨는 집사로 서상룡 씨는 순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1923년에 조사 서상룡이 사면하고 김의경 씨가 다시 시무하였다. 1930년 교회를 수상리 최칠복 씨 댁으로 이전하고 이어 1935년 수상리 389번지 대마산으로 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이어 1940년 수상리 주부회로 신축 이전하였고 1944년 임순태 영수가 장로로 피택, 1945년 11월 김환계 조사(장로)가 교역자로 부임하였으며 초대 최칠복 장로가 1947년에 장립을 하였다. 한편 1938년 경북노회 소병영 시찰장의 서북시찰보고에 의하면 20여 평에 굉장한 예배당을 600여원에 준공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12) 중덕교회

상주군 사벌면 흔국리(현재 금흔 2리)에서 석기모 씨가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며 전도하던 중 1916년 3월 17일 현재 충렬사 옆 창고 앞 빈터에 예배처소를 짓고 예배를 드림으로 중덕교회가 설립되고 현 북부교회는 이 날을 교회 설립일로 지키고 있다.

이들은 열심히 전도하여 낙상, 중덕에서도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교회의 앞날을 생각하고 석기모 영수와 강용만, 신만국, 김행길, 강용건씨 등이 주선하여 1921년 3월, 중덕리 156번지에 200평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를 세우고 ‘중덕교회’라 이름 하였다.

교역자로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권연호 조사가 시무하고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이덕성 조사,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조영규 조사가 시무하였다.

이 교회는 1941년 12월 29일 서상용 조사가 시무하던 중 당회장 주낙서 목사(당시 상주 시찰장)에 의해 강용만, 신만국 장로와 함께 당회가 조직되었다.

1946년 교회가 부흥하여 최상수 조사가 목회하면서 예배당 25평을 증축하였고

1960년 김항성 목사가 목회하던 중 기존 예배당을 헐고 38.5평의 예배당을 교인들이 흙벽돌을 찍어 신축하였다. 이 교회는 1982년 3월 10일 교회 명칭을 중덕교회에서 북부교회(北部敎會)로 변경하였다.

13) 부원교회

1925년경 현 상주시 부원 2리에 부원교회가 설립되었다. 1925년 당시 상주읍 죽전리 김칠만 씨의 건너 방을 빌려 서상용 조사의 인도로 예배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부원교회의 시작이다. 1926년 3월 15일 현 부원에 있는 이덕지(후에 영수와 초대 장로로 장립) 영수를 주축으로, 성두식, 홍관식, 최연분 씨 등이 교회를 설립하여 부원교회라 칭하였다. 1936년에는 조영규 순회 전도사(부원, 중덕, 함창)가 시무하였고, 1940년에 와서야 서상용 조사가 부임하였다. 이어 1946년 12월 18일 초대 이덕지 장로가 장립되고 1948년 1월 12일 문찬규 목사가 첫 목사로 부임하였다. 1957년 2월 5일에 부원리 273번지에 목조 80평의 교회당을 신축 헌당하고 정석홍 목사를 위임하고 성봉환 씨를 장로로 장립하였다.

14) 양촌교회

1930년 11월 현 상주군 상주읍 양촌리에 정재순 목사와 손주안 전도부인이 참석하고 대구 제중원 전도부에 의해 설립이 되었다. 제중원 전도부는(지금의 동산병원) 1921년 직원 26명으로 전도회를 조직하고 이 병원을 통해 고침을 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여행을 나갔다. 이 전도여행은 예상외의 성과를 얻었는데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제중원 소속 전도인은 목사가 5명(박덕일, 김충한, 정재순, 김원휘, 강신창), 장로가 1명(허 일), 남전도사 2명(손영규, 황유하), 여전도사(전도부인) 10명(이주현, 정일선, 최경애, 송복희, 김남수, 최순은, 이민응, 김순애, 진기숙, 손주안)이었고 이들이 설립한 교회는 모두 112개이다. 양촌교회와 화령교회는 대구 제중원 전도부가 설립한 교회이다. 그러나 양촌교회 연혁에는 설립연도가 1930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 3월 강신우 씨의 초빙으로 대구동산병원에서 파송한 정재순 목사의 전도로 강봉우, 조특이, 정순녀, 신경순, 신성님, 정상순 씨 등이 동사에 모여 창립예배를 드리고 1933년 양촌동 680번지에 집을 30원에 매입하여 예배처로 삼았다. 이어 1941년 5월 일제 당시 양촌동 725번지 강봉우 교우의 밭에 새 교회를 지어 예배를 드렸으며 이때 유춘근 조사가 시무하였다. 라고 밝히고 있다.

15) 상주남문밖교회

1931년 이희봉 목사에 의해 개척되었다. 한편 노회록을 보면 1934년 노회에 이희봉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하였는데 이때 청빙 목사가 불참하여 반려하기로 가결되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어 1935년 12월 17일 경북노회에 임시노회에는 상주읍 남문교회 제직들이 분교 청원한 내용이 임사 제1부로 배속되고, 또 이어 1937년 3월 25일 제35회 제1임시회의에서 상주 시찰장 방혜법 씨의 남문밖교회에 이희봉 목사로 당회장 청원이 허락된 것을 보면 아직 미약하나 서정교회와 합병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1937년 5월에 남문밖교회와 서정교회가 합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경북노회 제36회 제 2 임시 노회록엔 1938년 8월 19일에 가서야 상주시찰장 주낙서 씨의 상주남문밖교회는 서정교회와 완전히 합동되었음으로 남문밖교회 폐지 신청은 받기로 허락된 것을 미루어 보면 서정교회와 이미 합병된 후 노회의 허락을 얻은 듯하다.

16) 화령교회

1935년 11월 상주군 화서면 신봉리에 화령교회가 설립되었다. 정재순 목사와 대구 동산 제중원 전도부에 의해 설립이 되었다.

그러나 화령교회는 일제의 교회 박해와 신앙공동체 안에서 갈등으로 교회가 분리 된듯하다. 그리하여 나누어 진 교회는 교회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다가 지금의 화령교회는 광복 이듬해 1946년 3월 2일 화서면 하현리에 소재한 김창진 목사(대구 제2교회 원로목사)의 집에서 김성상 사모와 세 아들(김광정, 광웅, 광택)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다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축음기로 찬송가를 들려주자 축음기 소리가 신기하여 모인 아이들에게 노래(찬송가)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이루어 졌고, 처음에는 아이들을 중심이었다가 점차 청소년과 주민이 모이기 시작함에 따라 방을 틔우고 넓혀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화령교회 원로장로인 김상용 씨가 이 무렵 학생으로서 상현리에서 출석하게 되었고 김성상 사모의 부군인 김창진 목사는 당시 서울 남산 신학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아울러 화령제일교회는 교회 창립을 1954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본래 화령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아닌가 하는데 이 또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만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다.

17) 신봉교회

1937년 3월 5일 서정교회에서 분립을 신청하고 경북노회가 이를 승인하여 상주군 상주면 신봉리 289번지에 교회를 설립하다. 안봉희, 김상걸, 안유경, 안창경 씨가 설립자로 되어 있다. 초창기 교회는 주로 설립자들의 가족과 이 지역에서 서정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안봉희 씨 소유 초가 앞마당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최초의 교역자로 서상용 조사가 순회시무를 하고 1940년에 이덕성 조사가 순회조사로 부임하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공식예배는 중단되었으나 김상걸 씨 댁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다가 1947년 6월 6일 김상걸 씨 소유 신봉리 302번지에 초가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경북노회기록에는 1935년 12월 17일 제34회 경북노회에서 서정교회 구내 신봉리에 교회를 분립하여 달라는 청원은 허락하기로 기록된 것을 보면 이미 신봉교회는 연혁 이전에 분리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어 위의 책 1938년 8월 19일 시찰보고회 내용 중에는 상주군 신봉교회에서도 150원을 들여서 12평 신예배당을 건축한 일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18) 공검동막교회

1938년 8월 19일 상주군 공검에 동막교회가 신설되어 전도인 1인 6개월간 파송 청원이란 기록이 나온다. 이어 상주 시찰장 주낙서 목사의 상주시찰 보고서에도 본 노회 장막전도대가 2차나 출장 전도함으로 신자 몇 사람이 생겨 여 성경학교 학우회에서 여전도인을 파송하여 많은 재미를 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 하는 교회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19) 병성교회

병성교회는 1945년 4월 13일 상주읍교회에서 분립 청원되어 이듬해인 1946년 3월 5일 박우만 씨가 병성동 회관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어 1949년 5월에 병성리에 첫 교회당을 신축하였고 1959년에 이상근 장로가 초대 장로로 임직하였다. 1969년 5월 25일 이명수 집사(현 원로장로)가 자기 소유 밭 388평을 헌납하여 교회를 금동골로 옮겨 1970년 교인들의 손으로 현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20) 상주제일교회

상주제일교회는 1946년 8월 14일 당시 상주읍교회 교인이던 박정탁 장로, 이문수 집사, 노정삼씨 부친, 홍장운 권사, 박순남 집사, 박경남 집사 등 10여명이 상주읍 냉림동에 소재하고 있었던 박정탁 장로의 정미소 사무실에서 설립예배를 드림으로 상산교회로 설립이 되었다. 1948년 8월 증경 장로인 안승락씨가 교역을 담당하였고 1949년 1월 30일 박정탁씨가 장로로 시무하였다. 1949년 2월 증경 장로인 안승락 씨가 전도사로 부임하였고 1949년 5월 29일 상산교회 헌당식 및 설립 3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첫 목사님으로 1952년 임병길 목사가 부임하였고 1955년 5월 6일 상주읍 서성동 163번지 앙산 아래 당시 건평 72평으로 건축을 시작하여 1955년 10월 준공하였고 같은 해 7월 31일 상산교회를 상주제일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21) 상주서문교회

상주서문교회는 1954년 3월, 대구 성남교회 이인재 목사의 지원으로 강인자씨 댁에서 서문교회 설립준비예배를 드렸고, 같은 해 이홍재 목사를 모시고 상주읍 서문동 113-6번지에서 강인자씨 외 7명이 모여 상주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대지 100평에 건평 150평의 교회를 건축하였는데 1955년 1월에 초대 서리집사로 김덕순, 김순열, 최수희씨를 임명하였고 1956년 1월, 남자 서리집사로 김용해, 황인두씨를 임명하였다. 1957년 이홍재 목사가 시무를 사임하면서 이현구 전도사가 시무하였고 1962년 5월 성전 증개축을 착공하여(성전 25평 사택 8평) 같은 해 7월 10일 성전증개축 완공 감사예배를 드렸다. 1964년 12월 3일 교회 헌당식과 김재창 목사의 위임 및 초대 김용해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라. 기타 교단의 교회설립

1) 성결교회의 설립

우리나라에 성결교가 정식 창설된 것은1907년 5월 30일이다. 영남지방에 최초의 성결교 전도관이 설립된 곳은 1914년 8월에 세워진 김천 전도관이다. 김천 전도관의 설립으로 성결교단이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상주지역은 의외로 그 발전이 저조하였다.

가) 상주성결교회

상주성결교회는 1929년 박동의를 설립자로 본부에서 지원하여 설립 하였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1920년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상주성결교회의 설립에 관한 내용은 다음의 기록이 상세하게 전한다.

“상주는 경상북도의 대읍이요, 또한 교회 배치상 교회 설립의 필요를 인정하고 1926년 박문희를 파송하였으나 부임치 아니함으로 중지된 후 금일까지 이르다가 1929년 3월에 박동의를 파송하여 개척에 착수하였는데 순조로이 진행 중이더라.”

상주성결교회는 상주지역 성결교회 발전에 모체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9년 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백원성결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당 20평을 공사비 10만원을 들여 건축한 일이다.

나) 함창성결교회

1931년 함창성결교회가 세워지다. 함창성결교회는 1955년 제3회 경북지방회의록에 따르면 “24년간이나 천주교의 각군의 영세회장으로 시무하던 조웅돈씨가 함창교회에 입교하여 친척과 이웃사람에게 전도하여 크게 기여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 백원성결교회(현 관동교회)

1947년 정문조, 박기순, 권경순, 김남순 등이 설립하고 상주성결교회 청년회가 교회건축을 지원하였다. 1953년 7월 박사선 초대 전도사가 부임을 하고 1955년 5월 사택 5칸을 건축하였다. 1969년에 현 위치에 교회당 신축하고 1976년 12월 김목희, 장윤용 씨 두 분을 장로 장립하였다.

한편 다른 기록에는 1949년 상주성결교회 청년회 주관으로 외서면 백원 역전에 백원성결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당 20평을 공사비 10만원을 들여 건축한 일이다.와 1947년 사벌면에 사는 정문조, 박기순, 외서면의 권경순, 김남순 등이 당시 상주읍에 위치한 상주성결교회에 출석하다가 교회 개척의 필요성을 느껴 정문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때는 기도소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1949년 안창기 목사와 박사선 전도사를 중심으로 사벌면 원흥리(새두릉)에서 본격적인 교회 개척을 시도하였다. 이때 언급한 것처럼 상주성결교회 청년회에서 돕고 상주성결교회 김영훈 장로의 헌금으로 원흥리에 교회당을 신축하였으나 완성된 교회는 아니었다. 계속 교역자 부재 속에 상주성결교회에서는 안창기 목사, 김효순 전도사, 남덕규 목사, 최중석 전도사, 정규선 목사 등이 부임하면서 백원성결교회를 순회 인도하였다. 1951년 서울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상하 전도사가 약 2개월 동안 인도하였고, 1952년 봄부터 1953년 여름까지는 상주성결교회 홍병익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서울신학교 재학 중이던 여학생 이성애 전도사가 방학을 이용하여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렵게 교회의 명맥을 이어갔다. 1953년 7월에 함창성결교회에서 교역하던 박사선 전도부인이 박규순, 박정무 등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여러 교회의 보조로 현 위치인 외서면 관동리 135번지 땅을 매입하여 건축하고 1953년 8월 20일에 이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라) 내서성결교회

1949년 내서성결교회가 상주성결교회의 개척으로 설립되다.

2) 침례교회의 설립

경북에서는 예천과 포항이 침례교회의 오랜 텃밭이었다. 제3회 대화회가 1908년 충남 칠산교회에서 회집되었을 때 이미 예천 구역이 설정되었다. 그럼으로 경북 서북부 지역의 침례교 발전은 예천을 중심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 공주 신리교회에서 제8회 대화회가 회집되었을 때 이종덕 목사가 예천 구역에서 총찰(總察)로 함께 협력하였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가) 용담침례교회

1911년 2월에 상주군 사벌면 용담2리에 용담침례교회가 4명의 신자로 설립되었다.

1941년 초가 삼칸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활용하였는데 25년동안 순회목사가 시무하였다. 이 지역은 상주 읍내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지리적으로 예천 용궁과 풍양에 가까워 아마 예천 지방 침례교회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 보인다.

나) 두곡침례교회

1951년 상주군 은척면 두곡리에 교회가 설립되다. 1952년에 두곡리 박전구 씨 집에서 3년간 예배를 드리다가 김주원 장로의 도움으로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어서 20평 규모의 목조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다) 상주침례교회

1952년 1월 20일에 상주군 상주읍 인봉동 21번지에 상주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안상만 씨였고 1954년 인봉동에 대지 600평을 구입하고 1954년 10월 1일에 21평의 예배당을 기공하여 12월 20일 헌당하였다. 한편 1957년 1월에 낙동 침례교회를 개척하였다.

라) 청리침례교회

1954년 7월 27일 청리침례교회가 상주군 청리면 율리 1구 48-1번지에 박일래 집사가 개척하여 설립되었다. 이어 이 교회는 1969년 청리면 학하리의 학하침례교회를 개척하였다.

마) 낙동침례교회

1957년 1월에 상주침례교회가 낙동 침례교회를 개척하였다.

바) 묵상침례교회

1959년 상주군 사벌면 묵상리 765번지에 묵상침례교회가 개척되었다. 당시 서석봉, 안영우 외 3인의 청년이 중심이 되어 선교부가 제공한 24인용 천막을 치고 사벌 용담침례교회의 신정호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다.

사) 기타 침례교회의 설립

1970년 상주시 청리면 학하리 313번지에 황수석 가정에서 이봉순 집사와 11명이 모여 개척한 학하침례교회, 1972년 상주시 사벌면 덕담1리 168번지 덕담침례교회는 용담침례교회가 개척한 교회다. 1975년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709-10번지에 자매침례교회가 서북교회의 개척으로 설립되었다.

3) 감리교회의 설립

감리교회는 영남지방에서 다른 개신교단에 비해 그 교세가 매우 약하다. 감리교회가 경북지역에 들어오게 된 것은 1919년 김천시 성내동 177번지에 기존에 있던 사찰을 매입하여 교회가 시작되었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가 폐쇄되었다는 자체의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미약한 실정이다. 이어 1950년 6월 20일 ‘기독교 대한 김천감리회’라는 임시간판을 달아놓고 전쟁을 맞았다. 그 후 용문산의 나운몽 장로가 실질적으로 교회를 인수 하고 본격적인 교회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구에 감리교가 들어 온 것은 1948년 1월 당시 구세군 사관이던 윤삼효가 구세군을 떠나 감리교회로 갔고 이어 대구 시내 중구 향촌동 51번지에 2층 목조 건물을 사용하여 대구 감리교회의 첫 모임을 가졌다.

가) 함창감리교회

1951년 4월 18일 상주군 함창읍 구향리 함창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주로 한국전쟁 중 북한과 강원도 지역의 감리교인 들이 피난 와서 개척한 교회이다.

4) 구세군 교회의 설립

영남지역에 구세군의 선교는 1909년 8월 2일 조선 본령으로부터 발령을 받고 부임한 헤롤드 까우(Herold Gow)가 대구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경북 서북부 지방의 구세군 개척은 1917년 설립된 구세군 김천영문이었으나 폐쇄되고 1939년 6월 14일 이승용 사관이 당시 김천읍 대화정에 재 개척했으나 김기남 사관 때 다시 폐쇄되었다.

다시 1856년 이성옥 사관 때 남산동 61-6에서 가정예배로 시작하였다가 이듬 해 3월 평화동 282-2번지에 교회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구세군 본영에서는 1956년을 김천 구세군 김천영의 개전 원년으로 삼고 있다.

가) 구세군 신흥영문

1923년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상주군 모동면에 위치한 지역인데 이 곳은 영동과 김천에 가까운 지역이어서 김천 영문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일제 때 일본인의 광산 사무소로 이용되어 폐쇄 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시작하였다.

1973년 9월 23일 부임한 박내훈 특무가 시무할 때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고, 1996년 2월 27일 부임한 정부정 사관이 목회를 하고 있다.

나) 구세군 상주영문

1989년에 와서야 상주시에 구세군 상주영문이 개척되었다. 본 영문은 1989년 초대 윤관영 사관에 의해 본영의 개척자금과 각 교회들의 보조로 대구은행 2층에서 시작되었다. 2대 김필용 사관이 1년 정도 시무하였고 교회가 개척 된지 3년 만에 대지를 구입하였고 1992년 조립식 147평의 시설을 상주시 신봉동 227-1번지에 갖추었다. 1995년에 부임한 박하용 사관의 목회로 자립영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5) 성공회 교회의 설립

영남지방의 성공회 전래는 1903년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신자들을 위하여 일본 신부에 의해 가정예배로 부산 교회가 시작되었다. 대구 역시 1917년 대구에 살고 있는 일본인 신자들을 위하여 일본 신부가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34년 8월 14일 선산군 해평면에 부산교회에서 ‘성 애니스성당’을 세우고 축성식을 올린 후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했다.

가) 성공회 상주교회

경북 서북부 지방 유일한 성공회 교회는 성공회 상주교회이다. 1934년 11월 1500평의 넓은 교회 지를 마련하고 전도를 시작한 성공회 교회는 1935년 8월에 16칸 반의 성당을 신축하고 10월 2일 구세실 주교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6) 제칠일안식일예수제림교회의 설립

가)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상주교회

1928년 봄 상주읍 성하동 227번지에 박겸서 전도사를 비롯하여 황사홍, 이춘식, 박반석, 김씨 노인, 황점분, 최현숙 형제, 이국희(우필원목사부인-부두열 목사 사경회 때 개종) 강옥자, 김정환씨 등이 셋방을 얻어 집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1932년 4월 부인회 사업으로 야간학교를 시작하여 4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교사로 이국희, 최현숙, 장관신(박겸서 부인)씨가 수고하였다. 이후 교회를 설립 했던 박겸서 전도사는 제주도로 이주하였고 양총일 목사가 대구에서 왕래하면서 교회를 돌보는 한편 김인력 씨가 전도부인으로 봉사하였는데 그 후 교회는 혼란하여 1934년 잠시 동안 중단되었다.

1935 합회총회에서 배영길 씨가 상주 주재 권서원(勸書員)으로 임명되어 황사홍 예배 소장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처소를 다시 얻어 활동함으로 출석하는 신자가 다시 많아지게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와 1950년 6.25 사변이 있기까지 교회는 김 헌 장로 집에서 집회를 계속 하였는데 1.4후퇴 당시 박찬문 목사(남선대회 문서전도 주임)가 상주로 피난 옴으로 김 헌 장로와 함께 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그 후 우필원 목사도 피난을 오게 되고 이후 김관호 전도사가 서성동 제사공장에서 전도회를 개최하여 직원 및 주민 300여명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20여명이 안식일을 지키게 됨으로 교회는 터를 다시 다지게 되고 그 후 김관호 전도사가 18만환을, 김헌 장로가 3만환을 헌금하여 인봉동 62번지의 적산가옥(예배장소만 15평) 및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박찬문 목사는 대회로 돌아가고 당시 능암교회를 돌보던 박원우 장로가 상주로 왕래하면서 집회를 도왔다.

1954년. 초대 목회자로 최성훈 목사가 부임하였고 이어 박준호 선생도 함께 교회를 돌보았다.

상주지역의 제7일 안식일 재림교회는 이외에도 지역별로 6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나) 함창재림교회

다) 청리재림교회

라) 옥산재림교회

마) 용화재림교회

바) 용포재림교회

사) 능암재림교회

5. 교회의 개화 활동과 선교

1882년에 처음 간행된 그리시스(W. E. Griffis)의 저서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 ‘조선 사람의 가슴속에 기독교가 스며들자 그들은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과 이웃의 복리 증진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거짓된 경제관념에 의하여 마치 쇠고리와 같은 것으로 죄어있던 조선에 자유경재의 사상이 주입되었다.’라고 하여 민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 의식과 그리스도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기독교는 한말 우리 민족의 개화에 대한 욕구가 강할 때 수용되었다. 교인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진정한 개화가 불가능함을 알았다. 즉 봉건 적인 사회에서 지니는 인간관에 의해서는 새 시대에 필요한 개화․개혁이 불가능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발견되고 만들어진 인간에 의해서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러한 생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개화의 담당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가. 의료와 교육

1) 의료

선교는 전도, 교육, 의료라는 사도시대의 고전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선교 활동은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의 두 축으로 이루어졌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료사업의 시작은 1884년 선교사 알렌에 의해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죽음 직전의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면서 정부와 왕실의 신임을 얻은 알렌의 요청에 따라 1885년 4월 10일 광혜원(廣惠院, 곧 이어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뀜)이라는 국립병원이 개설되었다. 이어 이 병원은 스크랜튼, 헤론, 빈튼, 애비슨 등이 들어오면서 계속되었고 다시 이곳에서 의료교육기관을 설치하여 한국인을 모집, 영어, 의학 등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세브란스 병원과 의대로 발전하였다. 영남지방으로 보면 하디 의사(Dr. Robert A. Hardie) 부처의 영남지역에서의 활동도 의료선교 였다. 서울에 제중원이 설립되고 대구에 제중원이 세워진 것도 마찬가지 역할이었다. 경북지역의 의료 선교는 1897년 미 북 장로교 선교사인 존슨(W. O. Johnson, 場仁車)의 대구 방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899년 존슨은 병원 개업에 필요한 약품을 미국에 주문하고 개원 전에 ‘미국약방’을 열었다. 그 해 10월 미국약방으로 쓰고 있는 초가집을 수리하여 ‘제중원(濟中院)을 개원하니 이 초가가 오늘 동산기독병원이다. 제중원은 1921년 2월에 제중원전도회(동산병원전도회)가 창립되어 본격적인 전도 활동에 임하였다.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제중원을 통해 개척한 교회가 1921년부터 1937년 사이 112개의 교회가 세워졌음은 제중원을 통한 의료 선교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1890년 이후에는 인천, 평양, 개성, 대구, 부산 등지에 선교 병원이 확대되면서 기독교와 서양인에 대한 종래의 의혹과 편견이 줄어들고 복음 선교 사업을 위한 기반이 구축되어 갔다.

2) 교육

근대 교육은 1886년 아펜셀러의 배재학당, 스클랜튼의 이화학당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 교육의 필요성과 긴급함에 대해서는 1897년 간행된 ‘그리스도 신문’은 ‘그리스도인의 직책’이란 논설을 통해 ‘대한이 오늘날 형편에 처하여 위급한 사정을 생각할진대, 백성 교육하기가 시각이 급한지라...’라고 주장하였고, 1897년에 간행된 감리교계의 ‘조선크리스도회보’도 ‘교자론(敎子論)’이라는 논설을 통해 ‘대개 사람의 집이 흥망과 성쇠가 전혀 자손을 교육하는데 있으니 어찌 관계됨이 크지 아니하리요.... 옛 사람이 가라사대 자식에게 황금 한 광주리를 주는 것이 경서 한 권 가르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문호의 성쇠가 어찌 교육하는데 있지 아니타 하리요. 동포 형제들은 삼갈지어다.’라고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감리교의 이화, 배재학당에 이어 북 장로교도 정신, 경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지방에도 학교 설립이 계속되어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정부로부터 인가 받은 사립학교 총수 2,250여 개 가운데 장로교 501, 감리교 158개교를 비롯하여 신구교 합해서 무려 796개교가 선교사 계통의 학교로 나타나고 있다.

1885년부터 1909년까지 설립된 중요 기독교계 사립학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대

교명

교파

소재지

1885

廣惠院

장로교, 감리교

서울

培材學堂

감리교

梨花學堂

1886

璥新學校

장로교

1887

貞信女學校

1894

光成學校

감리교

평양

崇德學校

正義女學校

1895

日新女學校

장로교

동래

正進學校

감리교

평양

1896

攻玉學校

서울

1897

崇實學校

장로교

평양

信軍學校

감리교

서울

永化女學校

인천

1898

培花女學校

서울

盲啞學校

평양

明新學校

장로교

재령

1901

平壤神學校

평양

1903

崇義女學校

평양

1903

樓氏女學校

감리교

원산

貞明女學校

장로교

목포

1904

德明學校

감리교

원산

好壽敦女學校

개성

眞誠女學校

장로교

원산

懿昌學校

감리교

해주

1905

永明學校

감리교

공주

1906

啓聖學校

장로교

대구

信聖學校

선천

保聖女學校

선천

義明學校

안식교

순안

韓英書院

감리교

개성

美理欽學校

개성

1907

藥峴學校

천주교

서울

須皮亞女學校

장로교

광주

信明女學校

대구

紀全女學校

전주

1908

新興學校

전주

昌新學校

마산

1909

懿貞學校

감리교

해주

경북에서 가장 먼저 교육에 앞장선 것은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였다.

1901년 11월 11일 제일교회 안에 안의와(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喜道학교는 신교육 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같은 해 부마태(부루엔)는 대남남자소학교, 신명여자소학교는 지역 초등학교의 효시였고 아담스 목사가 1906년에 세운 계성중학교와 브루엘 선교사가 1907년에 세운 신명여자중학교는 지역 중등교육의 효시이다.

두 학교를 시작으로 대구와 경북 도내 여러 곳에 잇달아 학교가 설립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경북 각처 교회에 400원씩 보조해 학교를 세우게 했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학교를 설립했다.

1902년~1910년 사이에 개신교가 설립한 학교를 보면 대구에 2개 학교, 김천에 9개 학교, 선산에 7개 학교, 경산에 7학교, 칠곡에 4개 학교, 고령에 1개 학교, 의성에 1개교, 영천에21개교, 청도에 1개교, 달성이 1개교, 영일이 1개교로 38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참고로 1910년 2월 당시 우리나라에 세워진 종교계 학교 현황은 장로교가 501개교, 감리교가 158개교, 천주교가 46개교 불교계가 5교였고 운영 주체 미상이 84개교였다.

다음은 1902년부터 1910년 사이에 경북지역 기독교의 설립학교는 다음과 같다.

설립자

학교명

교회설립연대

지명

美國北長老敎會宣敎會

대남남자소학교

1902

대구

信明女子小學校

1902

松川敎會

양성학교

1902

김천

竹院洞敎會

창성학교

1903

선산

槐平敎會

선명학교

1903

선산

習福洞敎會

永明學校

1905

선산

路上敎會

廣成學校

1905

선산

新基敎會

啓洞學校

1905

경산 안심

松西洞敎會

普晶學校

1906

경산 하양

柳城敎會

私塾

1906

김천 봉산

崇島敎會

普興學校

1907

칠곡 약목

月湖敎會

永昌學校

1907

선산

五佳洞敎會

廣明學校

1907

선산

上毛敎會

私塾

1907

선산

巴川敎會

私塾

1907

김천

開浦敎會

開浦學校

1907

고령 개진

松林敎會

堂里學校

1907

경산

竹田敎會

私塾

1907

칠곡

實業敎會

私塾

1907

의성

平泉敎會

基督養德學校

1907

영천

長沙敎會

長沙學校

1908

영덕

新寧敎會

興和學校

1908

영천

茶洞敎會

私塾

1908

청도

月明敎會

彰成學校

1908

김천

柳城敎會

廣倫學校

1908

김천

太陽敎會

永興學校

1908

김천

福田敎會

基督明聖學校

1908

김천

鳳林洞敎會

基督道明學校

1908

경산

東胡敎會

啓南學校

1908

경산

田旨敎會

進新學校

1908

경산

堂谷敎會

崇德學校

1908

경산 자인

眞平敎會

克明學校

1908

칠곡

倭館敎會

私塾

1908

칠곡

牛川敎會

基督進道學校

1908

영천

縣內洞敎會

縣內學校

1908

달성

東部敎會

永眞學校

1910

김천

充基敎會

光基學校

1910

김천

浦項敎會

永興學校

1910

영일

이와 발맞추어 해방 이후에는 지방 교회들이 기회가 닿는 대로 대민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1950년~1960년대에 ‘성경구락부’의 설치가 이것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학교라는 공식적 배움터를 찾지 못하고 문맹으로 답답한 때 배움의 길을 열어 준 유일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성경구락부는 문맹퇴치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상주와 가까운 김천지방의 송천교회는 1901년에 설립한 교회가 1902년에 양성학교(養成學校)를 설립하였고, 선산군의 괴평교회가 1903년 선명학교(善明學校)를, 죽원교회(현 대원교회)는 1903년에 학당(學堂)을 운영하다가 1906년 영창학교(永昌學校)를 설립하였다.

1890년대 이화학당

나. 사회선교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끼친 근대화 작업은 교육 및 의료사업 외에 고아원의 설립, 신문 발간, 미신타파 운동, 금주, 금연 운동, 한글의 보급과 문맹퇴치 운동 등이다.

신문의 발행은 교회, 학교, 병원과 함께 개화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1) 신문의 발간

개신교는 독립신문이 발간된 그 이듬 해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감리교의 아펜셀러 목사 주관의 『조션 크리스도인회보』(1987. 2. 2 창간. 뒷날 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개명)와 장로교 언더우드 중심의 『그리스도 신문』(1987. 4. 1창간)이 그것이다. 두 신문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음에도 한국인의 계몽과 자주성을 고취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리스도 신문』은 창간 때부터 『농민평설』난을 두어 농사법을 계몽했고 가내수공업 소개 등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기사를 많이 실었다. 그리고 『국가문답』등 각종 문답 란을 만들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2) 한글보급과 문맹퇴치

한글 보급과 한글전용에 이바지 한 공로는 문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글은 반쪽글로 천대를 받아왔었다. 개신교는 한글을 민중의 글로 대중화시켰고, 국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문맹을 퇴치하고 개화를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개신교의 한글 운동은 성경 번역작업이 효시이다.

성경번역사업은 이미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성경이 먼저 들어왔다. 이는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특색이다.

만주에서는 서상륜(書相崙)이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의 도움으로 1882년 『누가복음』이, 1884년에 『사도행전』이 1887년에 이미 『신약전서』가 각각 번역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庭)이 1883년 4월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한문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신약전서 마가복음 언해』를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이는 한국의 개신교를 자생교회(自生敎會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 성경의 보급은 교인들이 한글을 해독하게 되었고 특히 여성을 의식화 시켜 여성교육 기회를 확대시켰으며 여권의 신장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 사장으로 활약한 서재필은 남녀평등 사상을 보급하여 일반 국민을 계몽하기도 했다.

성경의 보급으로 교인들의 의식이 높아지자 한글의 문법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한글 성경의 오역이 발견되자 1887년 성경 개역 사업이 시작되어 1900년에 『신약성서』를 끝내고 『구약성서』번역에 들어갔다. 이때 한글 성경번역과 출간을 위해 이미 야소교서회(耶蘇敎書會)』가 창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3년 1월 제1차 장로회 공의회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기로한다’는 결의를 통해 한글 전용뿐만 아니라 문법정비에도 앞장섰다. 더구나 1904년 9월 13일부터 열린 제4차 조선예수교장로회공회에서 김흥경(金興京)이 ‘국문을 사용하는데 동일한 규칙을 세우고 각인의 마음대로 문란하게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촉구에 따라 기일(게일), 배위량, 왕길지 등 선교사와 한석보, 김흥경, 김필수 등이 연구하여 보고하도록 『한글문법연구위원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구한국 정부가 1907년에 설치한 『국문연구소』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다.

3) 청년운동

한국에서의 청년운동은 이승만과 서재필을 중심으로 1896년 11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한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감리교의 엡윗 청년회는 1897년 9월 5일에 창설된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체계적인 것은 1903년 10월 28일에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 靑年會 YMCA)에서 비롯되었다. 이 청년회의 본질은 본래 교회가 접촉할 수 없는 층의 청년들을 그 특유의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데 있었다. 반드시 종교적이 아닌, 폭넓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기의식을 찾기 시작한 근대 한국의 청년들을 한데 합치는 민족적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청년회는 서울 종로의 현 위치에 3층 양옥 회관을 건축하고 당시 황태자 전하(李垠)가 친히 왕림해서 1907년 11월 14일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1918년 9월 대구에도 YMCA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서울YMCA(皇城基督敎 靑年會)의 조직을 본받았는데 이 조직은 이상재와 같은 독립운동 지사들이 동참하면서 민족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대구 YMCA는 대구교계 지도자인 이만집, 김태현, 백신칠, 백남채, 김덕경, 정광순, 이제인 등과 선교사 방혜법, 부해리, 별리추 등이 함께 발기하여 ‘교남기독청년회’라 이름하고 회관은 제일교회 구내에 두었다. 회장은 이만집, 부회장 정광순 이었고 제일교회, 남산교회, 서문교회 등 대구 시내 각 교회 청년 수 백 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한편 여성운동은 여자 선교사 스크랜턴이 첨 입국한 감리교회에서 선도역을 다하였다. 감리교의 여성운동단체인 조이스 회가 조직된 것은 1897년 10월 31의 일이다. 여성기독청년 조직인 YWCA는 3․1 운동 이후 전국 중요 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조직되었다. 즉 1922년 6월 전국여자 화령회가 서울에서 모여 조선기독교여자청년연합회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 유각경, 부회장 홍에스터, 서기 신의경, 부서기 김함라, 총무 김필례를 선출하였다. 대구 YWCA는 1923년 4월 제일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임성례를 회장으로 선출하여 조직이 되었다. 위의 두 단체는 기독교 정신으로 경북사회, 특히 청년층을 계몽하는 구심체가 되었다.

4) 사회 구습의 개혁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의 풍속과 전통 가운데 합리성이 결여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이의 시정을 위해 기독교인의 책임을 들고 있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사회 악습 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

(가) 술, 담배, 아편 금지

사회 악습의 개혁 가운데 첫 번째로 든 것이 술, 담배, 아편의 금지이다. 음주를 금한 것은 음주 자체가 죄와 관계되었다 라기보다는 이것이 건강을 해치고 개화를 저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점이었다. 음주와 더불어 흡연과 아편도 금하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음주와 흡연, 아편 모두 건강을 해치며 백해무익하다는 점을 들었다.

(나) 미신 타파와 결혼․상례의 개혁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미신타파에 앞장 선 흔적이 보인다. 이는 기독교의 유일신관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당시 우리 풍속에는 유일신관과 배치되는 많은 샤마니즘적인 전통이 많았기에 개혁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혼인의 폐단에 대해서도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조혼 풍습에 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부모가 정해주는 즉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하는 혼인을 폐단이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이다. 작첩의 폐해가 결국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 혼인 때문이란 것이다. 아울러 전통적인 장례에서도 번거롭고 불합리한 점에 대해서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유교적 가례에 대한 개혁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허례허식의 병폐를 고치고, 상례의 슬픈 참 뜻을 살려 보려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교회의 전통사회에 대한 이러한 개혁은 제사 폐지 등과 더불어 한국민을 자극하여 오히려 그 배타성과 전통적 풍습을 고수하려는 반동적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초기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거 교단적으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다) 여권 신장과 여성 교육

한국사회 내의 불합리한 전통에 대한 이 같은 도전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여권신장 운동에까지 미쳤다. 유교적 전통에 입각하여 남존여비의 가족 윤리를 고수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를 향해 기독교는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그 근거를 성서의 정신에 두고 있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남녀를 물론하고 마음을 한 가지로 주셨고, 남녀는 귀천의 구별이 없이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1897년 12월 31일 정동예배당 청년회에서 주최한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써 교육하며 동등권을 주는 것이 가하다’는 제목의 토론회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남녀평등에 관한 자기의 주장을 폈다. 이처럼 교회는 남녀평등이라는 새 사상을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토론회 형식을 통해 전파하였고 다른 한편 언론기관과 교회 및 학교를 통하여 일반 신자와 국민들을 계몽하고 주지시켜 나갔다.

라. 상주지역의 교육 선교 기관

1) 普成義塾 설립

상주지역에 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1910년 서정교회 안에 보성의숙을 설립한 일이다. 이 보성의숙은 1920년에 와서 보성여학교와 부인야학(婦人夜學)을 하였다. 1928년 6월 5일 경북 노회록에 따르면 상주 서정교회에 유치원을 인가받고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학생은 10여명이요 특지가로부터 풍금 1대를 기증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성의숙에서는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을 가르친 적이 있으며 그 후 1949년 5월에는 유아교육에 관심을 가져 ‘상주유치원’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 ‘상주성경중등구락부’를 개설하여 1960년에는 성경중학교로 발전하여 향학열에 불타는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고 이 성경중학교는 뒤를 이어 성신고등공민학교로 개명되어 오늘의 성신여자중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2) 성경구락부의 활동

서울이나 대구처럼 문서의 발간, 청년활동의 조직과 같은 구체적인 활동은 없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지방 교회들이 기회가 닿는 대로 전국적인 교회의 방침과 행사를 따라 개 교회도 역시 지역민들의 계몽과 지도에 힘써 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동은 1950년~1960년대에 지 교회마다 ‘성경구락부’와 ‘야학’의 설치가 이것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학교라는 공식적 배움터를 찾지 못하고 문맹으로 답답한 때 배움의 길을 열어 준 유일한 교육기관이기면서 새로운 시대에 눈을 열 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6. 기독교와 민족 운동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유럽 여러 나라가 아시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기에 세계 각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이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희생되어 식민지로 전락되었지만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오히려 한말 일제하에 기독교와 민족 운동이 결합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성경의 출애굽 사건, 불레셋과의 대결 등은 이웃 나라에 의해 고난과 시련을 겪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한말 ․일제하와 같은 우리의 시련과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민족의식, 애국심을 자극하는 한 요인이 된 것이다.

가. 애국 충군 운동(愛國忠君運動)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왔을 때 한말(韓末)은 대내적으로는 봉건적인 사회 부패를 개혁해야 할 중요한 때였고 대외적으로는 외국 세력이 침투하고 있던 때여서 국가의 자주 독립이 심각하게 요청되고 있었다.

한편 왕실 및 정부와 친분관계가 있던 선교사들과 교회는 1890년대 후반에는 애국 충군 운동을 벌여 국가 자주의식을 고양시켰는데 구체적으로는 국기게양을 통해 진작되었다. 국기 게양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행위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기 게양은 서울과 지방의 교회에서 즐겨 행하고 일반 가정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성탄절과 교회 절기에 십자기와 태극기를 좌우에 게양하였고, 기독교 계통의 학교 행사에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제창하였다. 심지어 교인들은 주일날 그들의 집이나 교회당에 국기를 게양하여 애국적이며 종교적인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1895년 북 장로교 선교보고서의 내용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당시에 부르던 애국가는 남 감리교 교인으로서 선교 활동을 하던 윤치호의 노래집인 찬미가 14장 1절을 가사로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와의 밀접한 관련 하에 애국심이 고양되었음을 알려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다.

1896년부터 기독교인들은 국왕 탄신일에 충군(忠君)적이고도 시위적인 대중 집회를 통하여 국왕의 탄신을 기념하고 적극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이와 같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국왕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모든 이들에게 보였다. 대부분 기도의 내용들은 자주 독립에 있었고 이들의 결의가 자주 의식의 심화에 역점을 두고 있었음을 1896년 행사에 관한 독립신문의 보도가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후에 만민공동회가 서울 종로에서 열렸을 때 민주적 훈련을 받지 않았던 대중들이 몇 달 동안이나 질서 정연하게 민주의 의사를 조정과 일반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1896년부터 있었던 국왕 탄신일 기념행사를 통하여 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협성회와 독립협회

위와 같은 활동을 하던 교회는 한말의 정치 단체에 가입 또는 동조하면서도 이루어 졌다. 이러한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협성회와 독립 협회이다.

협성회는 배제학당 내의 학생회로 1896년 11월에 설립되었다. 서재필의 지도를 받고 있던 이 쟁론회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및 관리들도 입회하여 한 때는 재적 회원이 6,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회원들 중에는 독립 협회에 가담하여 상당한 활동을 하였던 자들도 있으며, 후일 한국의 정치, 언론, 문화, 의료계의 선구자가 된 인물들도 많았다.

독립협회는 한말 독립주의를 고양한 민간단체로 2년 남짓 활동하다가 해산되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20C 초까지도 미쳤다. 애국 계몽운동, 신간회, 3․1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독립협회로부터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거나 그 활동을 하였던 이들이었다.

독립 협회에 기독교도의 참여 정도를 살펴보면, 독립 협회가 기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립 협회의 중심적 역할 맡은 이들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南宮檍) 등이었는데, 서재필, 윤치호는 이미 기독교에 입교한 지 오래였고, 이상재․남궁억도 독립 협회 사건 후 입교하여 기독교적 민족 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이상재는 후에 YMCA 운동에 투신하여 기독교 지도자․사회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이외에도 이승만(李承晩), 신흥우(申興雨)도 배재 출신으로 기독교와 밀접히 관련된 인물들이었으며, 주시경(周時經, 당시 주상호)은 배재 출신으로 독립신문 한글판을 내는데 공헌하였다.

독립 협회의 지회(支會)는 기독교와 더욱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지회 가운데 상당수는 교회 조직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인천 지회의 경우에는 복정채 이하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독립 협회에 가입되었으며, 평양 지회는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김종섭(金鍾燮), 안창호(安昌浩) 등 초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인물이 되어 성립시켰다.

따라서 독립 협회의 활동에 대한 기독교인의 참여 및 지원도 적극적이었다. 서울에서 독립 협회 중심으로 만민 공동회가 열리자 평양 교인들은 이를 지원하기 위한 모임을 열었다.

“평양 예수교인들이 모여 이번에 서울서 외국 사람들과 고문관을 해고한 일(서재필의 해고)로 백성들이 종로에 모여 연설함과 독립관에서 의리에 죽기로 동맹한 일과 시폐를 들어 상소한 일이며 정부에 몇 번 편지한 일을 들고 일제히 말하되 우리도 백성이 되어 이러한 충의 있는 일에 어찌 수수 방관하리요. 서울 사람들이 옳은 일과 충절만 가지고 죽을 것 같으면 우리도 그 뒤를 좇아 죽음이 백성의 직분에 마땅하다고들 하였다.(협성회보 1권 14호. 1898년 4월 2일자)”

독립 협회 해체 후, 일제의 독립 협회 회원의 대대적인 체포에서도 이 같은 측면에서의 일반적인 인식이 작용한다. 정부는 서울에서 이상재, 이승만, 신흥우, 남궁억 등 독립 협회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한데 이어 지방에도 회원들의 체포령을 내렸는데, 황해도에 내린 체포령을 보면, ‘독립 협회 회원은 야소교인이므로 야소교인을 모두 잡아 들여 조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같이 기독교도들은 독립 협회와 같은 단체들을 통한 독립주의, 민권 의식의 고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교회를 중심한 사회 개혁 운동, 개화 운동과 함께 한말의 사상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7. 한말 항일 운동

가. 선교사들의 교회 비정치화 시도

1901년 9월, 장로교 공의회에서 선교사들은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이라는 결의를 하였다. 내용은 교인의 국가에 대한 자세를 논한 것으로 교회의 비정치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 교회와 교우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전달되었다.

선교사들은 결의안 채택에 앞서 로마서13:1~7, 디모데전서 2:1-2, 베드로전서 2:13~17, 마태복음 22:15~21, 17:24~27, 요한복음 18:36 등을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 구절은 대개 ①권세는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거기에 복종하고 ②권세자, 즉 국가에 적당한 세금을 바치는 등 국가의 제도에 순복하고 ③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며, 이때에도 이 같은 의미로 제시되었다. 이를 근거로 결의된 것이 다음 5개항의 결의안이다.

‘1.우리 목사들은 대한 나라의 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하여 도무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작정한 것이오.

2. 대한국과 우리나라들(선교사들의 본국)과 서로 약조가 있는데 그 약조대로 정사를 받되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같은 일이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 일 보는 회가 아니오. 또한 나라 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오.

3. 대한 백성들이 예수교회에 들어와서 교인이 될지라도 그 전과 같이 백성인데 우리 가르치기를 하나님 말씀 거스림 없이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을 복종하여 나라 법을 다 순종할 것이오.

4. 교회가 교인이 사사로이 나라 일 편당에 참예하는 것을 시킬 것 아니오, 금할 것도 아니오. 또 만일 교인이 나라 일에 실수하거나 범죄 하거나 그 가운데 당한 일을 교회가 담당할 것 아니오. 가리 울 것도 아니오.

5. 교회는 성시에 붙친 교회요, 나라 일 보는 교회 아닌데, 예배당이나 교회 학당이나 교회 일을 위하여 쓸 집이오. 나라 일 의논하는 집은 아니오. 그 집에서 나라 일 공론하러 모일 것도 아니오.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데 공론하지 못할 나라 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욱 못할 것이라.‘ 결의안의 주된 내용은 4항과 5항으로 한국 백성인 교인들의 정치 참여 문제를 선교사들이 간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신민으로서, 교인으로서 즉 개인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가 간섭할 수 없다. 동시에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교회대로 따로 할 일이 있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인의 정치 운동은 가능하나 교회가 정치 운동을 하는 곳은 아니다’ 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그 뒤 한국 교회와 국가 간의 긴장 관계를 논할 때 하나의 방법적인 기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위 결의안의 채택 이후 교인 가운데 교회를 뛰쳐나간 사람들이 있었고, 더러는 이를 근거로 교회에서 출교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거의 이전에 애국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로 선교사들의 이 같은 자세를 비판하며 떠났던 것이다.

한편 교회 안에서는 일부 교인들이 오히려 실제적 운동보다는 의식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의식화라 함은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노골화하는, 일제의 한국 침략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일본과의 무역 불균형 관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던 것이 그 한 예이다. 또한 국가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입헌 군주제나 민주 공화제를 거론하면서 ‘엇이 되든지 법이 제대로 시행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 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의 비정치화가 추구되었지만 1904년의 러․일 전쟁을 계기로 더욱 더 노골적으로 감행되는 일제의 침략 앞에서 기독교인은 민족 문제에 대하여 침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되던 1905년부터 강제 병합이 있던 1910년 사이에 기독교인들은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나. 기도회를 통한 항일 운동

1905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것과 함께 기독교인의 항일 의식의 성장과 항일 운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하나가 교회의 종교적 의식인 ‘기도회’를 통한 항일․위국(抗日․爲國)의식 고취이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이 사실상 일본 군대의 관할 아래 들어간 상태가 되는 등 시국이 심상치 않음을 예견한 기독교계는 우선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1905년 9월의 장로회 공의회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 해 양력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7일간 한국 교회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부터 교회의 위국 기도회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전덕기(全德基), 정순만의 인도로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일주일간 서울 시내 연합 위국 기도회가 열려 연일 수천 명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루며 기도하였다. 이러한 기도회는 이후에도 교회별로 혹은 연합으로 계속되었다. 1907년 4월 작성된 ‘안창호의 귀국과 평안도 민정에 관한 내전양평(內田良平)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1907년경에는 지역 교회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나라 위한 기도회’를 진행시켰다고 한다.

1909년 순종 황제는 일제의 강권에 따라 지방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서북 지방을 순시한 적이 있는데, 이때 평양 교회가 순종을 환영하는 식을 행하고 기도할 때 교인들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위국 기도회의 낙루(落淚)’ 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런 기도회는 일제하에서도 새벽기도, 수요기도 등의 형태로 계속되어 민족정신을 보전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일제하에서의 교회의 이 같은 역할로 인해 해외의 독립투사들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할 때에는 먼저 교회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

다. 행동적인 항일 운동

기도회를 통한 교회 단위의 항일 의식 고취와 함께 기독교인들은 행동적인 시위를 통해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발표되자 야소교인인 최재학, 이시영 등은 평양에서 상경하여 조약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뿌리고 발표 열흘 뒤인 11월 27일에는 대한문 앞에서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다가 일본 순사들과 충돌하여 70여 일간 구금당하였다. 11월 30일에는 야소교인 김하원, 이기범, 김흥식, 차병수 등이 종로에서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하는 글’ 을 뿌리고 모여든 시민들에게 격렬한 항일 구국 연설을 하였다. 이들은 이를 제지하려던 일본 순사․헌병 십여 인과 충돌하여 군중들과 합세하여 투석전을 벌이다가 증파된 일본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연루된 사람 수백 인이 포박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이며 교육지사로 잘 알려졌던 정재홍(鄭在洪)은 박영효(朴泳孝)의 궁내부 대신 취임 환영 축하연에 이등 박문이 오리라 짐작하고 이등 박문을 암살하러 이 축하연에 나갔으나 그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분히 여겨 자살하였던 것이다. 또 고종이 양위한 다음날인 1907년 7월 22일에는 양주의 야소교 목사 홍태순(洪太順)이 이를 분히 여겨 대한문 앞에서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의 국민적 분노를 대변한 것으로, 이어서 일어난 전 중추원 의관 이규응의 자살과 함께 각지에서의 민심의 동요를 크게 격발 시켰다.

기독교인의 행동적 시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력에 의한 저항으로도 나타났다. 미국인 스티븐슨(須知分)은 원래 일본 외무성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거의 일본화 되었던 인물로, 일제가 한국 침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의 외교 고문으로 추천하여 한국에 왔었다. 그는 한국 외부(外部)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 앞잡이로 활약하다가, 일본을 위한 교섭을 벌이려고 미국 워싱턴에 가는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장인환(張仁煥)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장인환은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다..

또 천주교도인 안중근과 뜻을 같이 하고 이등 박문(伊藤博文)을 살해하려 했던 우연준(禹連俊)은 하얼빈 역, 바로 앞 역에서 이등 박문이 내릴 것에 대비하였지만 이등 박문은 안중근이 기다리던 하얼빈 역에서 내렸고, 때문에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안중근만큼 돋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을사조약 발표 후 상동교회에서 계속된 나라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였던 전덕기는 교우인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매국의 원흉인 을사오적(乙巳五敵)을 타살하려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일본 병사들에 의해 철저히 신변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덕기는 이후 상동교회에서 젊은이를 모아 유년 군대 양성에 힘쓰다가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의 결성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민중 목회에도 앞장섰던 그는 일제가 기독교계 민족 운동자 박멸을 목적으로 일으킨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이때의 심한 고문으로 재판도 받지 않고 석방되었다가 후유증으로 곧 별세하였다.

친일 매국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암살 음모와 거사는 이외에도 여러 번 행해졌다. 당시 21세의 나이로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이재명(李在明)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기독교에 들어온 후 귀국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거사에는 많은 평안도 출신의 젊은 기독교도들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재명 재판 기록에 의하면, 이들 젊은 기독 청년들은 한일 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의 이용구(李容九)와 총리대신 이완용을 살해하여 매국노가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국민들에게 국권 회복의 계기를 마련해주고자 모의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한 후 여러 차례 협의한 결과 이재명, 이동수(李東洙), 김병록(金丙錄) 3명이 이완용을, 김정익(金貞益), 조창호(趙昌鎬) 2명이 이용구를 살해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는 젊은 목사인 이학필(李學必)과 전태선(全泰善)도 가담하였다.

무력 투쟁도 불사하는 이 같은 기독교인의 항일 운동은 이들의 기독교 신앙 속에 애국과 민족의식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력 항쟁의 맥은 이후 일제하에서도 이동휘(李東輝), 강우규(姜宇奎) 등의 수많은 기독교 민족 운동가에 의해 이어진다.

라. 경제적 항일 운동

기독교인의 항일 운동은 위의 기도회 및 행동적 시위를 통해서 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구체화되었다. 통감부 아래에서 징수되는 각종 세금의 납부를 거부하는 세금 불납 운동, 신설된 시장세의 철폐 운동 및 국채 보상운동의 적극적 참여가 그것이다.

세금 불납 운동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예를 들어 함경도 경성군 서면 신향동의 예수교인들은 서로 일치하여 담배 경작세, 주세(酒稅) 등의 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들이 이런 종류의 세금을 거부한 것은, 기독교인은 전제 정치 즉 인도(人道)에 대적하는 제도나 세금에는 복종치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는 종래의 토지세 외에 각종 세금이 신설되었는데, 예를 들면, 가옥세, 주세, 담배 경작세 같은 잡세 들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통감부가 새로운 각종 세금을 만들어 한국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믿고 이를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부당한 세금은 납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금 불납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1910년경 평안도 순천 등지에서 시작된 시장세 반대 투쟁이 있다. 통감부가 시장세를 신설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당시 한국의 애국 교육 운동을 도맡았던 각 지방 사립학교의 재정을 끊어 이를 효과적으로 없애려는데 있었다. 종래 각 지방의 시장에서는 자율적으로 성금을 거두어 그 지방 사립학교의 재정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통감부는 사립학교 운영의 재원을 봉쇄하는 동시에 항일 의병의 진압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시장세를 비롯한 각종 잡세를 신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한국인들 특히 지방 사립학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같은 부당한 세금은 납부할 수 없다고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순천에서 일어난 이 시장세 반대 투쟁은 곧 그 지방 일대로 확산되어 안주, 영변 등지에서도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 뒤 이 사건을 조종한 다수의 인물들이 검거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예수교 신자였다.

기독교인들의 경제적 측면에서의 항일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에의 적극적 참여로도 이루어졌다. 출발은 기독교인에 의해서가 아니었으나 이 운동의 진행 과정에서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이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한 경제적 예속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가의 주권을 강탈당하는 결과와 직결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국채 보상 운동은 항일 구국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적극 전개되었다. 민중들에 의해 국채 보상회가 조직되고 황성신문사, 대한매일신문사, 보상사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의 성금을 접수하였다. 부녀자들이 금, 은 장식품을 내놓았고 시골의 농부들은 땔나무 판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 운동에의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특히 적극적이었는데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의 일단을 볼 수 있다. 황해도 장연군의 예수교 학교 남녀 학생 30여 명은 국채 보상 연설을 듣고 각자 분한 마음에 울면서 의연금을 바쳤는데 그 중 여학생 최준례는 가락지를 의연하였다. 삼화항(원산)의 예수교인들도 국채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이들은 먼저 교회 중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금, 은, 패물, 식기, 의복 등을 팔아 의연케 하고, 교회 소학교의 학생들에게 학부모를 권면하여 1개월 혹은 2개월 치 월사금을 미리 청구하여 모금토록 하였으며, 또 남녀 학도로 하여금 거리에 나가 국채 보상에 관한 계몽 운동을 벌이게 하였다.

이 운동은 소극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빚을 갚아 재정 자립․경제 자립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일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려는 반침략적인 국가 자주 운동, 즉 항일 독립 운동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일제는 이 운동을 적극 저지하였다.

한말 기독교인들의 이 같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항일 구국 운동은 일제하에서도 계속되어 국산품 애용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무실역행(務實力行)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마. 정치적 항일 운동

한편, 기독교인들은 조직적인 정치 활동을 통해서도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YMCA와 애국 계몽 단체인 서북 학회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일제는 특히 이 두 단체를 대단히 경계하여 기밀 보고서에서 자주 언급하기도 하였다.

당시 YMCA는 민족주의적 기독교인의 집합체였고, 서북 학회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를 중심으로 그 지방의 예수교도와 제휴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로 구국 자강 운동을 벌이던 단체로 정운복(鄭雲復), 안창호 등이 주도하였다. 1909년 일진회의 합방 청원이 있자 기독교인들은 이 두 단체를 비롯한 대소의 애국 단체를 통해 합방 반대 운동, 반 일진회(反一進會) 운동을 벌였으며 이를 지방으로 확산시켰다. 한편 안창호, 전덕기 등은 독립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는 데에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는데, 이 신민회에는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기독교계 민족 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일제는 이 같은 기독교계의 끈질기고 조직적인 항일 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한국 강점 후 소위 ‘안악사건(安岳事件)’과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105인 사건’은 기독교 계통의 민족 운동가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는데 오히려 국제 여론화되어 ‘기독교에 대한 박해’ 라는 세계 각처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8. 일제의 교회 탄압과 교회의 항거

가. 각종 탄압을 위한 법령 규칙의 강화

일제는 을사조약을 맺은 다음해 1906년에 이미 통감부령 제45호로 포교 규칙을 제정 공포했다. 이 규칙은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간섭, 통제, 탄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1915년 8월 총령 제83호, 1920년 4월 총령 제59호를 각각 공포하면서 기존의 포교 규칙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1938년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지도대책이라는 말살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 총독부 학무국은 지도대책이 나온 배경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37년 7월 지나사변(중일전쟁)이후 조선은 제국의 병참기지로 중요한 국가적 역할과 내선일체를 위한 비상시국 타개에 매진하려 하는데 전 조선 59만 명에 달하는 예수교도들은 시국에 대하여 냉담하고 신사(神社)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참여를 거부하고, 예수를 ‘만왕의 왕’이라 하여 불경죄를 짓고 있으며, 잘못된 평화관과 反戰的 언사를 논하는 등 사건이 자주 발생하여 이의 지도를 등한히 하면 시국 하(時國 下) 국민의 정신적 총동원을 저해할 뿐 아니라 시국을 인식하고 각종 국가적 행사에 협력하는 민중과의 사이게 더 마찰과 상극을 조성할 우려가 있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잦은 좌담회 개최로 일반 교도를 계몽할 것.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해 교회당에는 국기 게양 탑을 세울 것. 교도의 국기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실시함과 동시 戰勝 축하에 적극 참가를 종용할 것. 학생의 신사참배는 교육상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교도의 참배는 지방 실정을 참작하여 그들의 관념을 시정 이해하도록 강제하지 않고 실효를 얻도록 할 것. 서력 연호 사용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갖게 할 것.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서는 이상 각 항을 선교사 자각에 맡길 것. 찬미가, 기도문, 설교 중 내용이 불운한 것은 출판물의 검열 및 임감(臨監-현장감독)을 통해 엄히 취체할 것. 이에 불응하고 고집을 부리는 교도는 부득이한 겨우 관계법령을 활용하여 합법적으로 조처 할 것. 국체에 적합한 예수교 신 건설 운동에 관하여는 그 내용을 검토하여 순진하고 장래성이 예견 될 경우 적극 원조해 줄 것 등이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교역자에 대한 변절 강요. 둘째, 신사참배 강제 집행, 셋째, 성경과 교회의 개편 및 설교의 내용 사찰. 넷째, 기독교 신자 구속. 다섯째, 사이비 또는 어용기독교 단체의 활용 등이다. 이 규정은 광복이 될 때까지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얽어 맨 올가미로서 교회의 폐쇄와 수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다. 1943년에는 외국인 선교사 모두를 강제 추방하였고 고유한 각 교파의 명칭을 버리고 교단(校壇)이라는 일본 교파 명을 쓰게 하였다. 1943년에는 주일 밤과 수요일 밤의 예배를 금지 시켰다.

이들은 모세의 5경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 또는 내세 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삭제하였으며, 찬송가도 여러 장을 삭제하였다. 이것도 일본말로 읽고 설교하도록 강요하고 찬송가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였다. 성직자가 강단에 올라 설 때는 가운이 아닌 일본식 전투복을 입도록 했고 앞서 말한 일본국기 배례, 궁성요배, 출정 장병을 위한 무운 기원,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은 반드시 시행해야 했다.

교파의 해체 명령은 침례교는 재림사상 때문에 1942년 6월과 10월 사이에 전치규, 김용해 목사를 비롯하여 32인의 목사가 체포되었고, 1944년 5월 10일 교회 해산 명령을 받았다. 성결교는 그 이전인 1943년 5월에 재림사상 강조와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이 있었다 하여 200여명의 교역자가 구금되고 12월 29일에 완전히 해체되었다.

나. 3․1 운동으로 인한 탄압

1) 3․1운동과 기독교

일제의 강점 후, 초기의 기독교에 대한 회유 정책이 탄압 정책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 속에서도 기독교는 교단의 조직과 신자의 증가 면에서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1907년경 약 7만 명에 달하던 기독교인은 ‘105인 사건’ 등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1912년경에는 그 두 배를 훨씬 넘게 되었으며 3․1운동 직전에는 대략 25~3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발전은 기독교가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종래의 강권주의․침략주의에 근거하여 편성된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이전에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눌려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민족․약소국가들에서 새 질서를 수립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국권을 상실한지 9년여에 이르렀던 우리 민족도 민족 독립을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집중시키고자 하였다. 자연히 당시까지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진보적․자주적 기독 청년들이 다수 있었던 기독교계와,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계에서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에 들어서면서 해외 및 국내에서는 적극적인 항일 독립 투쟁이 계획, 시도 되었다.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이 미주에서 『대한인 국민회』를 결성하였고 중국에서는 김규식, 선우혁 등이 대한 청년당을 중심으로 회집하였다. 중국에서의 모임은 국내외를 망라한 거족적 독립 운동의 전개를 준비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주로 기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대한 청년당 중심의 모임에서는 이의 실행을 위해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여운형을 러시아령에, 선우혁, 서병호를 국내에 파견하여 종교계 및 독립 운동 지도자들과 접촉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3․1운동 준비는 상해 대한 청년당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에서 파견된 선우혁은 양전백 목사, 이승훈 장로 등 관서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 운동을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평양에서는 안세환, 윤원삼 등이 독립 선언 및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기독교계 학교 교사 학생의 동원 계획까지 상세히 마련되었던 평양에서의 준비는, 2월 중순경 서울에서 이루어진 천도교 측과의 합작 운동이 알려지자 계획을 수정하여 전 민족적 차원으로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서울에서의 3․1운동 계획은 기독교 측에서는 YMCA와 세브란스 병원을 중심으로 논의가 시작되었고 같은 시기에 천도교 측에서는 최린(崔麟) 등에 의해 준비되었다. YMCA는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의 지도로 민족의식을 각성 받은 다수의 청년․학생단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들 청년․학생들은 서울 시내 중학교 및 전문학교 기독학생 모임과 유기적인 연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은 3․1독립 선언을 위한 선언문의 배포와 시위를 위한 군중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적극적 참여와 지대한 역할은 이미 준비 단계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3월 1일을 기해 발발한 독립 만세 운동은, 당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신선, 원산, 의주 등 12개 처에서 일어났는데 모두 예수교회 내지 예수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들 주요 도시 및 지역에의 독립 선언서의 배포는 이미 학생과 교회 청년들에 의해 이루어진 후였다.

종래까지 3․1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를 논할 때는 대개 민족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라는 것 정도만 언급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의 준비 단계․민중화 단계․정부조직 운동으로의 전환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매우 컸다. 특히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기독교인의 참여는 매우 광범위하고 적극적이었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박해도 매우 심하였다.

3․1운동은 평화적 독립시위운동의 독립투쟁이었다.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일제의 황성(皇性)에 호소하고 자유 열강의 원조로 독립을 획득하고자 거족적 독립 염원을 집단적 시위로 나섰던 것이다. 전 민족이 맨주먹으로 강력한 일본 군사력의 탄압과 학살을 받으면서도 전국 곳곳에서 3개월간이나 계속 투쟁함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선포할 수 있었고 일제가 무단 일변도의 통치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따라 세계의 약소국가들에게는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었고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어 1910년 3월 1일 마침내 3․1 운동이 일어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민족 대표만이 아니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가장 많았다. 이 때문에 일본의 기독교인과 교회의 탄압은 가혹했다. 3․1운동으로 제암리 교회의 학살은 대표적인 만행이었고, 교회 파괴 47동, 일부파괴 27동, 손해 41동이며 1919년 6월 30일까지 투옥된 교역자만 151명, 일본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6명, 기독교 계통의 학교 두 곳이 소실되었다.

영남지방의 3․1운동은 경북지방 22개 부, 군과 경남지방 21개 부, 군으로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이 보편화 되었다. 3, 4월 두 달 동안 경북 116회 경남 121회 등 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경북지역의 3․1운동은 대구에서는 3월 8일과 3월 10에 일어났고 경북 도내에서만 90여회의 만세 봉기가 일어났는데 27회는 미리 알아 막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구속되어 재판 받은 사람이 1,785명인데 기독교인이 481명이고 목사, 조사, 및 부속학교 교사가 30명이나 되었다. 이날 대구에서는 정오 대구의 목사, 장로를 중심한 기독교인들과 기독교계 학교인 계성, 신명 학교 학생들과 성서학원 학생들이 큰 시장(서문시장)에 모여 들었고 대구고보, 대구농림학생들도 합류를 하여 약 1,000명이 합세하였다.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가 소 달구지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려 했지만 미리 달려온 경찰에게 빼앗겨 공약 3장만 외친 후 만세를 선창했고 이 일로 인해 이만집 목사를 비롯한 김영서, 이재인, 김무생, 박재원, 신대근 등 141명이 경찰에 구속되고 재판 결과 이만집은 3년, 김태련 2년 6월, 김영서, 백남채, 김무생, 정재순은 2년, 박재원, 권희윤은 1년 6월을 이재인, 임봉선, 1년, 신태근, 이선애는 6월이 선고되어 형이 확정 되었다.

한 편 상주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의 기록을 살펴보면 상주의 독립만세는 총 회집 수가 4회에 참가자는 2,300여명에 이르고 이 일로 인해 사망자 수 17명, 실종자수 22명, 부상자 수 396명이었다. 한편 서정교회 정우경 집사는 독립운동 광고지를 살포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만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각 지역에서 일어난 상주지역의 독립만세 운동은 다음과 같다.

1) 상주 시내의 만세운동

상주의 만세운동은 애국학생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姜龍錫), 성필환(成必煥), 서울 중동학교 한암회(韓岩回), 보통학교 학생 조월연(趙月衍), 경성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石盛基) 등이 3월 중순부터 상주의거를 위해 준비해 왔다. 이들은 3월 23일(음력) 상주 장날을 거사로 정하였다. 3월 23일 오후 5시경 한암회를 비롯한 애국청년들이 시장 중앙에서 줌겨 갖고 있던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니 많은 장꾼들이 목이 터져라고 만세를 불렀다. 이 소식은 내서면까지 퍼져 상주군 내서면 성해식(成海植)은 부친상을 당한 지 두 달이 안된 상복을 입은 채 달려 나와 만세를 불러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상주의 독립만세 시위로 재판에 해부된 사람은 강용석 1년 2개월, 한암회 1년 6개월, 성해식 1년, 석성기 10월, 성필환, 조월연 6월, 그 밖에 장재관, 김성덕, 박인옥, 송인수가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2) 화북면 장암리의 함성

화북면 장암리 이장 이성범(李聖範)과 동지 김재갑(金在甲), 홍종흠(洪鐘欽), 이용회(李容晦) 등과 함께 4월 8일을 정하여 권고문을 보내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했다. 이들은 4월 8일 미리 약속한 문장산에 100여명이 모이자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주동자들은 모두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편 화북면 소재지에서 북서쪽 15리에 위치한 운흥리(雲興里)에서도 운흥리 유지 김성희(金聲熙), 정양수(鄭良洙이)도 이 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이 늦게야 알려져 1985년 10월 상주군이 중심이 되어 화북면 장암리에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

3) 이안면 소암리의 함성

상주군 이안면 소암리에서도 채순만(蔡淳滿), 채세현(蔡世鉉)을 비롯한 마을 청년 20여명과 함께 3월 29일을 거사일로 정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곳에서도 100여명의 동민들이 소암리 제방에 모여 만세를 불렀는데 채순만(蔡淳滿), 채세현(蔡世鉉) 등 마을 청년들이 체포되고 갖은 고문을 다 받았다.

이러한 독립만세 운동이 의성, 선산, 김천, 영덕지역에서 교회와 기독교 지도를 중심으로 극렬하게 일어난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둔 사항이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곳 상주에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교회와 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주도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기록된 자료가 나타나지 않아 정리하지 못함을 안타까울 뿐이다.

다. 신사참배와 교회의 탄압

1) 전국적인 탄압

일본은 정치적 외교적인 면 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한민족을 동화시키기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교회를 괴롭힌 것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종교단체법’을 만들어 한국의 교회를 파괴했는데 신사참배의 반대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백여 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신도가 투옥 되었으며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59명이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 (1944년) 주기철 목사의 묘,

서울 국립묘지 소재.

일본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란 이유, 애국심의 함양과 국민교육 차원에서 하는 것이니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기독교인도 여기에 참여하도록 강요했다.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 실행부는 1935년 12월 13일에 회의를 갖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 일로 인해 이 모임을 주도한 숭실학교 윤산은 교장과 숭의여중 스노크 교장을 파면해 버렸다.

이러한 일본의 강요로 1938년 8월 31일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1938년 9월 9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열린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하고 말았다. 총회에 참석한 회원은 목사 86명, 장로 85명, 회원 사이사이에는 일본 사복형사 97명이 끼어 앉아 반대 발언을 못하게 했고 단상에는 평안남도 경찰국장과 평양시 경찰국장이 홍택기 총회장 양 옆에 버티고 앉았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그날 총회를 마친 후 신사참배를 했으나 총회 결의를 무효라고 주장하며 거부하다가 순교한 이가 많았다. 평북의 이기선 목사, 평남의 주기철 목사, 경남의 한상동 목사, 경북의 이원영 목사, 전남의 손양원 목사 등이다.

참고로 이 때 결의한 결의문을 보자.

‘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違反하지 안은 本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외에 神社 參拜를 率先 勵行하고 追히 國民精神 總動員에 參加하여 非常 時局下에 銃后 皇國臣民으로써 赤誠을 다하기로 期함’이었다. 이 일 후 일본은 1939년 9월 11일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모인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란 어용단체를 만들게 하고 이 단체 이름으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였으며 1940년 9월 6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열린 제29회 총회에서는 ‘總會常置委員會’를 구성하여 총회 후에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뜻에 맞도록 운영하는 길을 열기도 했다. 1943년 5월 5일에는 총회 이름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바꾸게하고 친일 목사를 統理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1일에는 전국의 모든 기독교를 강제로 통합시켜 ‘日本基督敎朝鮮敎壇’을 발족 시켰다.

이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은 히브리민족의 역사라는 이유로 읽지 못하게 했고 장로교 기본교리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적대국의 산물이며 신약성경도 4복음서만 읽도록 했다. 또한 찬송가도 고처 부르게 하며 예배의식까지 손을 대어 예배 때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케하고 매월 첫주일은 애국주일로 정해 국방 헌금을 바치도록 했으며 1942년 싱가폴이 함락했을 때 전승축하예배를 보도록 요구했다.

1940년 제29회 총회 보고에 따르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전승축하회 654회, 무운장구 기도회 8,953회, 강연수 1,355회, 위문수 181회, 국방헌금 1,580,324원, 위문대 1,580개를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탄압이 극에 달한 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미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 1945년 8월 18일 목사, 장로, 기독교 지도자를 대량으로 학살하기로 하고 그 명단을 작성까지 했으나 그들이 집행일로 정한 날 사흘 전에 무조건 항복함으로 대량 학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전쟁이 끝나기 전 당시 종로경찰서 형사주임이던 崔雲露가 밝힌 것이다.

2) 경북지역의 탄압 실상

전국에 이어 경북지역에도 1935년 9월에 ‘대구교화단체연합회’를 만들어 기독교, 불교, 천리교, 유교를 묶어 지휘했고,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었을 때 지부격인 대구기독교연합회를 만들어 회장은 일본인 佐藤新五郞이 부회장 이하 임원은 일본인을 적당히 섞었다.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경북노회를 살펴보자.

경북노회는 총회가 이상과 같은 결정을 하기 전인 1938년 8월 19일 제36회 제2회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이날 대구성경학교 강당에서 열린 임시회의 회의록을 살펴보면 국민의례인 국기 게양, 국가 합창, 황거 요배, 황구신민 서사 제창에 이어 회장의 개회사, 찬송 6장, 박영조 씨 기도, 이상업 씨 성경 사도행전 20장 17절-35절 봉독, ‘밀레도에서 열린 신앙생활의 표준’이라는 문제로 설교를 하다. 참석한 회원은 선교사 2인, 목사 18인, 장로 30인이 출석.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 의식임을 확인하고 국민의 의무로 신사참배하기로. 회장 김봉도 회록서기 신후식 으로 되어 있다. 이 때 노회장 김봉도 목사는 총회 보고 시에 ‘시국 인식 문제로 일부 교역자가 고통을 당한 일이오며’ 하고 보고를 했는데 이 때 고통당한 자가 누군 인지는 기록이 없어 이 문제로 많은 교역자들이 어려움을 당한 것을 말하고 있다.

이어 1938년 12월 13일에 열린 제37회 경북노회부터 서력기원을 사용하지 못하고 소화13년이라 기록하였으며 노회를 국가의식인 국가합창과 황거요배, 국민서사제창으로 시작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의성 시찰장 박희석 씨가 발언한 청송지방 수 교회가 경찰당국의 간섭으로 동 군 내의 경안노회와 경북노회에 소속한 교회 등을 좌우간 단일 노회로 소속하라는 내용이 보고되어 노회 간부에게 맡겨 경찰당국과 교섭 해결하기로 하였다.

1939년 12월이 되자 경북노회 제38회 회기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야소교장로회경북연맹』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날 경찰부장 山村과 일본인 목사 佐藤이 축사를 하였다. 묵도 순서에 ‘皇軍 將兵을 爲하여’, ‘東洋平和를 위하여’라는 순서가 들어 있다.

이렇게 노회 안에 의용 조직을 한 일본은 마침내 제39회 경북노회에서 『國民總力慶北老會聯盟』 결성식을 1940년 12월 11일 오후 2시에 거행하였다. 이때 총대가운데는 이미 創氏改名을 한 목사가 17명, 장로가 46명이 등장한다.

이렇게 되자 예배당 정면에는 ‘皇道實踐 傳道報國’ 이라는 시국표어가 게제 되고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 이사장 天城虛心(劉載奇 목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지시를 각 교회에 하달하였다. 매월 초 1일에 신사참배 할 것. 매월 첫 주일은 애국예배로 지킬 것. 국가적 행사는 여행하고 꼭 국가의식을 할 것. 매일 가정에서 궁성 요배할 것. 정오에 묵도할 것. 시국표어는 예배당 정문에 붙일 것. 방첩에 유의하고 물자를 절약할 것 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산교회의 놋그릇에 관한 주일 광고는 1941년 8월 10일 주일 단순광고로 시작하여 8월 17일 주일은 호소광고로, 다시 8월 24일은 “오늘은 유기 헌납하는 날이오니 아무쪼록 한 가정이 1점 이상으로 가져 오셔야 합니다. 만일 아니가지고 오시면 권찰이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하겠습니다. 꼭 실시하십시오.”라는 위협광고를 하게 하여 얼마나 목회자들이 놋그릇 헌납이 큰 압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1942년 5월 7일 경북노회 연맹 이사장 宋昌根은 철물헌납을 알리는 공문을 각 교회에 발송하여 이 때 교회 종각과 종까지 헌납하는 사태를 만들었다.

일제는 이도 모자라 교회의 폐지와 병합을 이루었다. 1942년 5월 7일 경북노회 상무위원장 송창근 목사는 교회 폐지와 병합에 관한 공문을 각 교회 및 교역자 앞으로 발송하게 되는데 이에 맞추어 1942년 12월에 소집된 제41회 경북노회에서 각지방 시찰장이 보고에는 경북 지역의 여러 교회들이 합병되었는데 대구시찰 감산교회는 이현교회로, 경산시찰 가야교회는 의송교회로, 칠곡시찰 낙산교회는 금호교회로, 죽전교회는 왜관교회로, 오평교회 및 봉산교회는 약목교회로 병합 되었다. 성주시찰 인촌교회는 동포교회로, 중리교회는 원창교회로, 해평교회는 성주읍교회로, 법내교회는 창천교회로 병합되었고, 선산시찰 평지교회는 안림교회로, 월산교회는 화암교회로, 팔산교회는 유동교회로, 사도교회는 삼도교회로 병합되었다. 상주시찰도 세 교회가 병합 되었는데 이는 상주지역 박해에 살필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탄압은 교회조직의 상회인 경북노회를 해산하도록 강요받았다. 1943년 4월 30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경북노회 제41회 제1회 임시노회에서 출석회원 목사 28명 장로 35명이 모였는데(회장: 東原厚植) 해산권을 위임받은 8명의 중앙 상무위원회의에서 경북노회 해산을 결의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교회조직의 중추 신경 중 일부를 끊어내는 박해를 자행하였다.

3) 상주지역 교회의 박해

상주지역의 박해는 구체적 기록을 찾는 일이 먼저 앞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 역시 박해도 전국과 마찬가지 이다. 신사참배 강요는 전국적 현상이면서 이곳 상주에도 시내 앙산(央山)공원에 신사를 만들고 매 주일과 기타 주요 국가 행사시에는 주일 예배를 마치면 목회자들이 전 교인을 인솔하여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신사참배 시에는 일본인 순경이 큰 칼을 차고 감독을 했고 구령에 따라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은 구둣발로 차고 심한 욕을 하는 광경도 자주 목격되기도 했다. 아울러 전쟁 말기에 놋그릇 헌납 운동, 교회 종 헌납운동, 전승축하회, 무운장구 기도회, 강연회 참여, 위문단 조직, 국방헌금, 위문대 제작 등을 강요당했다.

1940년 ‘國民總力慶北老會聯盟’ 결성식을 한 후 애국주일을 지키고 황군위문대를 만드는 일이 논의되고 이 일로 인해 보고된 상주지역 교회들의 헌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광교회, 석산교회, 옥산교회, 낙서교회, 양촌교회, 신봉교회, 수상교회, 상곡교회가 각각 2원씩 납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탄압이 마침내 교회의 합병까지 이러러 1942년 12월 소집된 제41회 경북노회에서 각 지방 시찰장이 보고한 교회병합 내용에 공성면 오광교회는 옥산교회로, 상주읍 신봉교회는 서정교회로, 화령 금산교회는 사산교회로 병합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결국 1943년에 와서 주일 밤, 수요일 밤 예배를 금지하였고 서정교회 박병훈 목사는 황후에 대한 불경죄로 고등계 형사에게 연행되고 장로들도 경찰에 연행되어 부득이 교회의 문을 닫게 되었고 박병훈 목사는 만주로 망명을 갔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고 다시 시무하였다.

7. 광복과 교회의 회복

일제의 가혹한 교회 박해는 광복을 통해 오히려 새롭게 부흥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8․15는 국권의 회복인 동시에 교회와 신앙 자유의 회복이었다.

먼저 통폐합 된 일본식 교단이란 이름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주일 날 강제 동원하며 성수주일의 방해와 교회의 가장 큰 가시였던 신사참배에서 해방되었고, 각종 출판과 학교의 통폐합, 개명이란 굴레에서 벗어났다. 해외 망명 인사들 중 해방 정국의 3대 거두로 추앙된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도 입국하고, 추방되었던 선교사들도 다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더욱 옥에 갇혔던 지도자들, 지하에 숨었던 신자들도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교단 전체로는 1945년 8월 17일 교회연합해방감사예배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열리고 1946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숭동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 남부총회는 총회장에 배은희(裵恩希)목사를 부총회장에 함태영(咸台永)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는 북한의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간섭으로 참석할 수 없었지만 머지않아 남북대표가 함께 모여 명실상부한 대한예수교 총회가 조직되기를 바라는 통일지향의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이러한 염원에도 남북통일이 조속 실현이 어렵게 되자 1947년 4월 18일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2회 남부총회는 대한예수교 총회를 남부총회가 계승하기로 결의하고 이 총회를 대한예수교 제33회 총회로 명명했다.

한편 북한에서도 1945년 1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및 황해도 지방의 노회 대표들이 회집해서 잠정적으로나마 총회를 대행할 기관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직 된 것이 ‘이북5도연합노회’였다. 이렇게 남북은 3․8선을 경계로 두고 저마다의 광복 후 새로운 교회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해방 후 기독교 발전에 곁들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1951년 2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목제가 창설되어 군 장병들의 정신무장과 건전한 생활에 크게 이바지 했고 1954년 12월 15일 기독교 방송국이 설립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방송국으로 국민정신 순화 및 방송문화 창달에 새 전기를 마련했다.

8. 6․25와 교회의 수난

광복의 기쁨도 잠시 교회는 다시 6․25의 거센 파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산군의 남침은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자 광복 후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려던 교회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북한에서는 이미 6․25가 일어나기 전부터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 1945년 11월에 세워진 ‘이북오도연합노회’는 공산주의자들의 경계를 받기 시작했고 이들은 교회세력을 부르주아의 잔재 요소로 간주하고 그 근절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을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일부러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 문제에 부닥친 교회는 노회의 이름으로 결의문을 채택하고 특히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는 것과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구분, 교회를 예배 이외의 목적에 사용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공산당은 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1946년 11월 28일 『기독교 연맹』이란 어용단체를 구성하고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에 대해서 투옥과 추방으로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도 이들에 의해 통폐합되었는데 1946년 9월 창립된 감리교의 성화신학교와 장로교의 펑양신학교에는 각각 600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음에도 김일성은 이들 신학교 학생을 가각 60명으로 줄이고 1950년 3월, 둘을 통합해 정원 120명의 ‘기독교 신학교’로 축소시켰다. 이어 김화식(金化湜)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1월 순교하고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金仁俊)이, 그리고 이정심(李淨心) 역시 그해 12월 소련군의 고문으로 순교하였다. 그 뒤를 1948년에 김철훈(金哲勳), 1949에는 이유택(李裕澤)이 따랐다.

이 외에도 회장인 김진수, 허천기, 김길수 목사가 체포되었고 민족 지도자 조만식 장로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남한에서는 미군의 진주로 신앙의 자유는 완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6․25라는 민족 전체의 수난에서 교회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남한에서의 적도들의 살상의 대표적인 것은 이미 6․25가 일어나기 전 1948년 10월 20일에 일어난 여수․순천반란사건이었다. 여기서 이 지역 기독교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많이 살해되었고 특히 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폭도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준엄하게 대항하였던 목사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교자들을 보면 ‘사랑의 원자탄’으로 이름 높았던 손양원(孫良源) 목사를 비롯한, 저명한 부흥강사였던 김익두 목사, 구세군 노영수, 감리교의 송정근, 1930년대 농촌 사업의 기수였던 조민형(趙敏衡)과 신석구(申錫九), 장로교의 박경구(朴敬俅), 정일선(鄭一善)의 순교, 그리고 남궁혁, 양주삼, 송창근, 박현명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6․25를 통해 파손 손실된 교회 수는 남한에서만 장로교가 541 교회, 감리교가 239 교회, 성결교 106 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4 영문, 기타 교파에서도 그 손해는 막심하였고 순교 납치당한 교역자는 장로교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정확한지도 의문은 있다. 교회가 받은 박해는 이미 이 이상이기 때문이다. 전북 옥구의 원당교회는 78명의 교인 중 75명이 학살되었고 전남 영광의 김방호 목사 가족은 8명 중 7명이 동시에 총살당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런 피해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의 교회가 점령당했던 전쟁 초 인민군의 사무실이나 그들이 조직한 단체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이를 만류하다가 희생을 당한 교회 지도자들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집회장소로 허락한 경우 이들 모임을 정보로 접한 국군과 유엔군이 폭격이나 포격을 하여 어려움을 겪은 경우도 많았다.

교회의 피해는 엄청 났지만 이러한 시련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었음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6월 26일 서울 시내 각 교회 교역자들은 승동교회에서 긴급모임을 갖고 국군원호회를 결성했으나 28일 아침 서울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감으로 교회의 재빠른 결의는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1950년 7월 3일 대전제일장로교회에서 회집한 『대한기독교구국회』가 결성되고 회장에 한경직, 부회장에 김창근, 황치헌, 황종률 목사를 뽑았다. 이어 이들은 대구․부산을 비롯한 남한 33개 도시에 지회를 설치하고 정부와 협조하여 선무,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에 큰 기여를 했다. 이 때 미국연합장로회 선교부도 대대적인 구호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교파에 구별 없이 차량을 동원하여 교역자들과 그 가족의 피난을 도우고 구호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휴전 후 적어도 10년 동안 재기불능이라 보았던 교회는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놀라운 속도로 부흥하였으니 1955년까지 교회 수는 6․25 당시에 비교하여 약 2배의 증가세를 보였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인한 수십만의 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돌보고 피난민들을 교회에 숙식하게 하는 사랑을 베푼데 따른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로 전쟁 후 피폐한 가정과 사회에 큰 도움을 준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0. 교회의 분열

한국교회는 6․25와 같은 민족의 처참한 수난을 겪었음에도 교회분열이라는 羞恥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일제치하 신사참배문제가 서서히 폭풍우를 몰고 교회가 광복과 6․25로 인한 혼란에 바로 서기 전 밀어 닥친 일이다. 이는 신사참배로 인해 옥고를 치르다가 나온 출옥 성도(出獄聖徒)들의 독선과 이들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견지한 일반 성도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 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이해와 격려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본다.

가. 장로교의 분열

한국의 장로교는 교세가 왕성해 한국교회의 60% 이상을 차지함으로 한국에서 기독교라 하면 장로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왔다. 이러한 장로교의 성장은 급기에는 분열이란 행태로 얼룩지고 말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4대 교파는 통합(예수교 장로회), 합동(예수교 장로회), 고려파(예수교 장로회), 기장(기독교 장로회)를 드는데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약간 늦게 일어났지만 고려파와 기장파는 6․25를 전후해서 분립되었다. 고려파는 분립은 경남지방에서 신사참배로 오염된 교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에서 일어났고 기장파의 분립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학문의 자유와 교회의 현대화 또는 세계화 기치아래 일어났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6․25가 일어나기 두 달 전부터였다. 1950년 4월 21일 경남지방을 무대로 교회 재건을 밀고 나가던 고신파와 서울 근대주의 신학의 조신파의 문제로 장로교 총회가 한국교회사상 경찰의 간섭을 받으며 난동을 벌여 유회된 일이 일어났다. 그 후 두 달 만에 전쟁이 터지고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 부산으로 쫓겨난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 5월 24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속개된 총회(36회 계속)에서 고려신학교파를 정식으로 정죄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파는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慶南法統老會)를 조직하여 갈라졌다.

고려파의 주동적 인물은 한상동 목사였다. 그는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하다 자기와 함께 교도소에 있던 주남선 목사와 함께 교회정화를 외쳤다. 이들은 확고한 정통주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박윤선 목사와 의논,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이러한 고려신학교 측의 태도에 대해 기성 교회 측이 지나치게 독선적이라 하여 반발했고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를 계기로 고신측은 완전 분리되었는데 이를 고려파라 불렀다.

기장(基督敎 長老會)과 예장(예수敎 長老會)의 분립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고려파와는 달리 경건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 방법론 때문에 갈라진 경우이다.

한국교회사의 흐름은 신학교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40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보수신학의 전통을 이어 온 장로회 평양신학교는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무기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서울에서 조선신학교가 개교됨은 있음직한 일이었다. 조선신학교는 일본인들의 요구에 찬동하였기에 경기지사로부터 설립 허가가 쉽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인의 손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여서 선교사들의 보수적 신학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이 광복이 되면서 신앙의 자유가 회복되자 교수로 있던 김재준은 보수신학을 난타하기 시작했고,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가 자유주의라 하여 그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하여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과정들이 전국의 교회에 파급되어 결국 진보계와 보수계의 갈래를 잉태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6월, 51명의 학생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가 서울 남산에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는데 이 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후신임을 자처하며 출발하였고 이로 인해 전국의 교회로부터 많은 동정이 집중되었다. 물론 미국 남장로회나 북장로회 선교부의 후원도 뒤따르게 되었다. 한 총회 안에 입장을 달리하는 두 신학교의 존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1950년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다수의 힘으로 몰아치우려는 움직임이 생기고 이에 심한 격론이 일어나 한국교회사상 경찰동원이란 미증유의 치욕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1951년 9월 총회에서는 직영신학교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구에서 열린 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신학교는 계속 되다가 1952년 제37회 총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하고 조선신학교 직영을 취소한다고 재확인했다. 이렇게 되자 1954년 6월 새로운 신학사상의 수립을 지향한다는 조선신학교 측은 그 명칭을 『기독교장로회』라 칭하며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여 출범하였다. 보수와 진보를 내세운 두 진영의 화해와 협력은 불가능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와는 별도로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해서 이를 반대하고 보수 정통을 주장하는 복음동지협의회(N.A.E National Assembly Evangelists)합동(合同)측과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Churches)와의 유대와 친선을 중요시 한 통합(統合)측이 1959년 9월 대전에서 열린 제44차 총회에서 역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은 연동(連洞)파와 승동(勝洞)파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연동파는 1960녕 2월 17일 새문안교회에 모여 연동파 중립파 및 승동파 일부의 통합총회를 열어 통합 측의 이름을 얻게 되고 합동파는 승동파와 고려파가 합동하여 합동 측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의 분립은 서로간의 노선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 신앙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합동과 통합 두 교파가 분립된 것은 한국교회의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일치하려는 움직임과 노력이 시도 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1959년 예장 44회 총회는 NAE 측(합동)과 에큐메니칼 측(통합)으로 나뉘고 말았다

나. 감리교회의 분열

장로교의 분열 만 아니라 감리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경건과 신학보다는 교권, 다시 말해 인사 문제와 정치문제로 분열이다. 6․25 이후 감리교회는 감독의 재선(유형기 감독)문제로 내분의 요소가 부각되면서 1954년 3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제3회 총회에서 그의 재선을 헌법 개정을 통해서라도 강행하려는 총리원측 인사들과 이를 반대하는 호헌 인사들의 알력이 원인이었다. 이들은 그 해 6월 호헌대회와 신도대회를 열고 총리원측의 불법을 공격하고 1955년 3월에 총회와 연회를 소집하고 김응태(金應泰)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면서 완전히 분립하였다.

현재 감리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감리회 (보수), 기독교대한감리회(연합), 대한기독교감리교회(웨슬리기감), 기독교대한자유감리회(자감)로 나누어 져 있다.

다. 성결교회의 분열

1943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성결교회 복음이 일본 국체(國體)에 배치(背馳)된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면서 많은 신도들이 순교 및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재건총회를 개최하여 그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여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독립·자주권을 선포하였다. 이후 교회는 다시 성장의 궤도에 올랐으나 6·25로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최석모(崔錫模), 박현명, 이건(李鍵), 김유연(金有淵), 박형규(朴亨圭) 등이 납북되었다. 뒤이어 불어 닥친 교회분열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다가 몇 번의 합동작업 끝에 재 연합되어 1989년 현재 82주년의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1961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회(NCC)와 복음동지협의회(NAE)에 가입한 일로 인하여 1962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현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및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예성연합)과 중도파 등 몇 개 파로 나뉘어져 있다.

라. 침례교회의 분열과 통합, 새로운 종파의 탄생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 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기독교한국침례회'(http://www.koreabaptist.org/)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외에도 1960년대 후반을 기해 신흥교단으로 형성된 침례교회의 이름은 가진 ‘구원파’라는 이름의 교파가 있다. 구원파는 ‘믿음의 방패 선교회’ 라는 미국의 딕욕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첨에는 권신찬, 유병언 씨의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삼각지 교회, 세모 스쿠알렌과 세모유람선)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다시 권신찬 씨로부터 분리 된 이요한 씨를 중심으로 1983년 설립한 ‘복음수호파’로 대변되는 대한예수교침례회(일명 이요한 구원파)가 분리되었고, 20년 간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전파하며 대전 한밭중앙교회를 담임한 박옥수를 중심으로 한 대한예수교침례회의 기쁜소식선교회가 있다. 기쁜소식선교회는 2000년 2월 인터넷 방송을 시작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한편 1997년경에 이요한파에 속해있던 12개 교회가 이진배 씨를 중심으로 대한그리스도복음교회로 분리되었다.

11. 민족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협력

가. 하나의 교회를 향한 문서운동

1) 국역 성경 출판

1906년에 출간한 신약이나 1911년에 나온 구약성경은 1937년 개역신약이 나올 때까지 한국교회의 유일한 공인 성경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와 1947년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전 세계적인 성경 번역의 붐도 영향을 받아 1960년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67년 12월 새 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었다.

한편, 새로운 세계사의 동향은 1962년 10월 이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갈라진 교회와의 재 일치를 기본 방침으로 정하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이에 적응하여 교회 일치의 소망을 추세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행동의 하나가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와 로마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사이에 ‘성경공동간행위’ 합의가 이루어지고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 2월에 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어 9년간의 노력으로 1977년 부활절을 기하여 공동번역 성경의 완역 간행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은 보수신학자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2) 찬송가 출판과 보급

하나의 찬송과 한 마음 한 뜻으로 전도하자는 생각으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합동으로 1949년 ‘합동 찬송가’를 출간하여 약 20년간 사용하여 왔다. 이후 1967년 다신 ‘개편 찬송가’를 출간하였지만 찬송가 개편위원으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만 호응을 얻었고 나머지 여러 교단에서는 따로 ‘새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는 찬송가 분립의 시대를 맞았다. 한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한국교회는 세 가지의 찬송을 사용하였으니 그 불편함이란 너무나 컸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내 20여개 교단으로 총망라된 ‘한국찬송가통일위원회’가 구성되고 1978년 가을 ‘통일 찬송가’가 발행되었다.

3) 특수 분야를 통한 일치 운동

특수 분야는 산업선교와 군종사업과 경목제도, 의료선교, 학원선교, 방송선교 및 초교파적 부흥집회로 나눌 수 있다.

가) 산업 선교

산업 선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급속도는 사회구조나 산업구조의 변화로 이어지고 이에 맞는 선교활동의 대두가 필요했다. 1962년 영등포에서 조지송 목사에 의해 산업전도회가 발족되었고, 인천에서도 오명걸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후 산업선교를 위한 초교파적 기구로 카톨릭을 포함한 ‘한국산업선교 도시협회’가 있었으며 이들은 산업인을 위한 예배, 성경 연구, 신앙 훈련 등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임금 문제, 작업 조건, 노동조합 운동, 인권 침해, 부당 해고 등 갖가지 문제에까지 관심을 확대해 나갔다.

1971년에 개최된 한국도시산업선교협의회 주최 세미나 광경

나) 군종(軍宗)제도

대한민국 국군의 군종제도는 1950년 12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보다 앞서 1948년 11월에 해군에서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손원일 제독에 의해 채택되어 그 후 1950년 11월, 해군 본부에 군목실이 설치되었고, 육군은 1950년 12월에, 해병대는 1951년 5월에, 공군은 1952년 2월에 각각 설치되어 1952년 5월 19일 국방부 군종실이 설치됨으로 12월엔 합동으로 창립식을 열었다. 군목은 군내에서 종교와 도덕에 관하여 지도하고 예배 인도는 물론 성찬 세례식의 거행과 결혼, 장례 등도 관장하고 특히 개인적 상담을 통해 사상무장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70년대에 ‘전국 신자화 운동’이 일어나 일시에 세례를 베푸는 세계교회사상 최대의 합동 세례식이 전방의 한 부대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1970년대 군인합동 세례식의 모습

다) 경목(警牧)제도

경목제도는 감리교의 조선일 목사가 1960년부터 부평경찰전문학교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중 각 경찰서 유치장을 돌며 재소자들에게 전도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이어 1965년 5월에 감리교에서 2명, 성결교에서 1명 모두 3명의 목사가 서울시경에 파송되어 경찰 선교에 적극적인 참여를 한 것이 성과가 되어 1966년 서울시경과 경상북도, 충청남도 경찰국 등에서 정식으로 경목을 위촉하게 되어 경목제도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1969년에는 서울 중부경찰서 내에 경찰교회가 설립되었다. 경찰 선교 사업은 1974년 2월 22일 이래 ‘전경 신자화 운동’의 표어를 내걸어 성과를 얻었으며 경찰관 정신교양과 개인 상담을 통해 경찰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경찰선교 : 교회와 경찰협의회 전국대회 광경(1977년)

라) 의료선교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의료선교단체는 1948년 5월에 발족한 『대한기독교여의사회』가 그 시초이다. 그 후 1963년 3월 9일에 『한국농촌의료봉사회』가 1967년 1월 25일에는 『대한기독교간호원회』가 그리고 11월 20일에는 『한미의료선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독교 단체들은 1973년 3월 2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로 일치 연합하여 『의료선교위원회』로 발족하였다. 그 후에 조직된 『한국약사회』와 『한의사회』도 이 위원회 안에 들어 있다.

마) 학원선교

기독교 중심의 법인체가 설립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대단히 많다. 이 학교마다 교목제도를 두어 교목들은 종교교육과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학원 선교 단체로 각 교단마다 산하 조직체가 있는가 하면 『기독학생총연맹』, 『대학생선교회(CCC)』, 『대학생성경읽기회(UBF)』, 『한국기독교학생연맹(IVF』) 등이 있어 이들은 직 간접으로 학생들에 선교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바) 방송선교

시대적 변화와 요청으로 라디오나 TV를 통해 설교와 찬송의 전달로 얻어지는 효과는 실로 높다. 이러한 선교 목적에 따라 1954년 12월 5일 기독교방송국(HLKY)의 개국을 보게 되었다. 이어 1956년 12월 23일 화도선(Tom Watson)선교사에 의하여 인천에 시작된 극동방송(HLKX)이 설립이 되었고 이 방송은 특히 소련을 비롯한 중국과 북한 지역 등 공산권에 복음을 전달할 목적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은 TV시대를 맞이하여 CBS와 CTS기독교방송이 전 방위 선교를 담당하고 있다.

방송선교의 모체인 기독교방송 (CBS) 의 예배실황 중계 광경이다(1967년)

4) 전국복음화 운동의 전개

가) 초교파 부흥집회의 시작

한국교회가 식민지 시대와 6․25라는 엄청난 시련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환난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호를 절실히 깨닫게 되고 이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신념을 굳게 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모든 아픔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즈음에 세계적인 대 부흥사들이 속속 내한하여 복음화 전도 운동에 불을 붙인 일은 감사할 일이다.

먼저 6․25 동란 전에 피얼스(Bob Pierce)목사가 내한한 것을 시작으로 5,6차에 걸쳐 내한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함으로 약 2만 명의 결신자를 내었으며 이어 1952년 전쟁 중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가 부산에서 집회를 하였으며 1956년 2월에는 서울에서 대 전도집회를 함으로 수많은 결신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스스로 전국적 복음화 운동이 1984년 대두하였음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김활란 박사의 주도로 6․25 이후 교회의 분열을 저지하고 민족 복음화 운동의 기초를 놓기 위해 시작된 이 운동은 뜻밖의 호응을 얻어 1965년 한 해 동안 2,239회에 달하는 집회에 230만 명이 참석하였으며, 무려 4만여 명의 결신자를 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 편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73년 5월에 다시 한국에 와서 그의 전도 역사 최대의 인파를 기록한 집회를 여의도에서 개최하였다. 이 전도대회 첫날에 40만이 참석하였고 차차 늘어나 마지막 날에는 120만 명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집회에 세계 교회는 놀라움과 감탄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고 한국 교회의 성장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한국 부흥사들이 주축이 되어 개최한 1977년 ‘민족복음화성회’가 8월 15일에 여의도에서 막을 올렸다. 이 대회는 1907년 평양성령역사를 통한 부흥이 있은 지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성회였다. 외국인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루어 낸 대규모 집회에서 마지막 날 150만이라는 사상 최대의 인파를 기록했고, 특히 이 대회에서 2만 4천여 명의 새로운 결신자를 얻었음도 큰 성과 였다. 이 모든 집회는 거의 초교파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었고 한결같이 민족을 복음화하고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대 전제를 과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운동이었다.

나. 상주 지역에서의 교회 분열과 일치 운동

1) 상주지역 교단의 분열

이미 장로교단의 분열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이러한 교단의 분열은 지역 교회와 교인들의 선택과는 거의 관계가 없이 이루어 졌다.

다시 말하면 지역교회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신앙중심이었지 에큐메니칼 운동이 어떠니 복음동지협의회(N.A.E Nationa lAssembly Evangelists)며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Churches)와 같은 용어조차 몰랐고 그들이 지향하는 노선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벌인 추악한 교권싸움에 상처를 입은 희생양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그의 피로 한 형제 됨을 고백하던 교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교류가 끊기게 되고 점차 서로 담을 쌓아 오히려 남보다 못한 일들을 하게 만든 것은 지도자들이 앞으로 담당해야할 몫이다. 상주는 전통적으로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었고 1959년 이전까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단일교단으로 화목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1959년 9월 대전에서 열린 제44차 총회를 끝으로 각각의 주장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을 중심하여 통합과 합동으로 나누어지자 교회와 성도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분열의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주님은 그래서 남의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셨던 것이다. 당시 상주에서는 통합 측에 소속된 교회가 상주읍교회, 신봉교회, 병성교회, 양촌교회, 청리교회, 함창읍교회, 화령교회, 오광교회 등이었고 합동 측으로 소속된 교회가 상주제일교회, 상주서문교회, 부원교회, 옥산교회, 낙서교회, 외남교회, 도남교회, 함창교회 등이었다. 특히 수상교회는 이 분열로 인해 통합 측의 청리교회와 합동 측의 청리제일교회로 한 교회가 양분되는 아픔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지역교회의 일치는 교파나 교단의 일치가 아니면 사실상 어렵다고 본다. 왜냐 하면 교단의 분열은 연쇄적으로 지역교회의 분열과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과 합동 측은 같은 장신대학 심지어 같은 졸업 동기생이면서 교단이 갈라졌다는 이유로 서로 강단에 세우는 일을 금지하는 아이러니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아물게 되고 분열로 얼룩진 행태들이 점차 정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단이 고신, 기장, 예장에서 다시 예장통합, 예장 합동이 지금은 이름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교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08년 5월 현재 개신교 ‘상주시기독교연합회’에 소속된 교단은 성공회, 구세군을 포함하여 무려 23개 교단이 넘게 파악되고 있다.

2) 상주지역 교회의 일치운동

상주에서의 교회 일치운동은 교단의 일치라기보다는 연합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로의 교단을 인정하면서 각종 교회 행사에 협력하며 때로는 초교파적인 행사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다.

가) 상주시기독교연합회

초교파적인 모임인 ‘상주시기독교연합회’와 『상주시기독교교역자연합회』가 있다.

이들은 각종 조찬기도회와 구국기도회를 인도하고 연 1회 이상 연합부흥회를 개최하며 부활주일 연합예배를 주도하고 있다.

이 외에도 대부분 읍․면 단위로 초교파적인 연합회를 구성하고 각 지역 특성에 맡는 행사를 계획하고 추진함으로 교회 일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상주시기독교 연합회는 1982년부터 『상주지역기독교 교회연합회』를 형성했다. 이때는 시․군이 함께 협력하여 활동을 했는데 초대 회장에 박경순(상주교회), 부회장에 정진영(성결교회), 총무에 신광석(상주침례교회)목사님이 활동 하였다.

그 후 1991년 3월 25일 상주교회에서 상주시 지역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상주시기독교교회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초대 회장에 신광석(상주침례교회), 부회장에 장종근(상주동산교회), 총무에 차기천(상주교회), 서기에 김성환(상주성결교회), 회계 윤관영 사관(상주구세군)으로 하였다. 이어 1995년 『상주시기독교연합회』라 명칭은 변경하고 회의 목적도 상주시 복음화를 위하여 연합 사업을 시행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회원으로는 상주시에서 목회하는 교역자로 하되 이단 교단이 아니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때는 아마 시군이 통합되어 상주시로 변경됨에 따라 다시 출발하는 모임의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1995년 2월 22일에 열린 상주시 기독교연합회 통합 준비위원회 위원을 보면 위원장 박능팔(상주교회) 목사, 서기 유흥식 목사(중부교회), 위원으로 김성환, (상주성결교회), 김재석(상주중앙교회), 신광석(상주침례교회), 이남묵, 이 념(오흥교회), 우병렬(금동교회), 장중덕(신봉교회), 장종근(동산교회), 주용은(중심교회) 목사가 참석하고 있다. 그러나 『상주지역기독교교회연합회』와 『상주시기독교교회연합회』가 한 지역에서 두 모임으로 지속이 되다가 다시 『상주시기독교연합회』로 통일된 모임을 이어갔다. 한편 이들은 주로 교역자들의 모임이었는데 그 후 1998년부터 평신도인 장로들이 회에 참여함에 따라 목회자들만의 모임에서 벗어나 명실 공히 기독교연합회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역대 회장단은 다음과 같다.

연도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감사

1982

박경순(통합)

정진영(성결)

신광석(기침)

염원식(합동)

1983

임완철(성결)

이남묵(기침)

정덕균(성결)

1984

이남묵(기침)

고요삼(성결)

최정성(통합)

1985

고요삼(합동)

우병렬(통합)

김진운(성결)

1986

우병렬(통합)

김진운(성결)

오동희(고신)

1987

김진운(성결)

오동희(고신)

양정호(감리)

김수석(합동)

장중덕(통합)

김신종

1987

오동희(고신)

김수석(합동)

양정호(감리)

이장희

공재근

김진운(성결)

1988

김수석(합동)

양정호(감리)

장중덕(통합)

이철우(침례)

김원도(성결)

조성희

1989

김수석(합동)

양정호(감리)

장중덕(통합)

이철우(침례)

김원도(성결)

조성희

1990

장중덕(통합)

이철우(침례)

김원도(성결)

진항섭(감리)

최재덕(합동)

1991

김원도(성결)

진항섭(감리)

곽도희(기침)

최재덕(합동)

김은조(통합)

상주시기독교연합회로 명칭변경

연도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감사

1992

진항섭(감리)

곽도희(침례)

최재덕(합동)

1992

최재덕(합동)

최락규(침례)

김점용(기감)

김은조(통합)

1993

신광석(기침)

최락규(침례)

박능팔(통합)

김점용(감리)

김성환(성결)

장종근(합동)

김은조(통합)

이 념(나성)

연도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감사

1994

박능팔(통합)

김성환(성결)

이 념(나성)

유홍식(고신)

장종근(합동)

신광석(침례)

박병렬

1995

김재석(합동)

김점용(감리)

오명석(통합)

이 념(나성)

박준곤

1996

김성환(성결)

김점용(감리)

이병길

이 념(나성)

오명석(통합)

* 1998년 이후 장로들도 임원에 활동하였다.

1998년

회장 : 이 념 목사

지도위원 : 김재석 목사, 박능팔 목사, 송경환 목사, 신광식 목사, 우별렬 목사, 이남묵 목사, 조재근 목사, 김용해 장로, 엄기하 장로

상임부회장 : 홍정돌 목사

부회장 : 서성훈 목사, 이병길 목사, 엄희용 장로, 오길수 장로

총무 : 박봉규 목사 임은하 장로

협동총무 : 박경문 목사, 박용석 목사, 박원기 목사, 이유종 목사, 장영도 목사, 최종순 목사, 한성기 목사, 한진희 목사, 김안성 장로, 안창식 장로

서기 : 조양남 목사

부서기 : 이영수 목사

회계 : 이정주 장로

부회계 : 김호진 장로

감사 : 이남묵 목사, 박종환 장로

1999년-2001년까지는 자료 없음

2002년도

회장 : 유흥식 목사

상임부회장 : 이영수 목사

부회장 : 조재근 목사, 이완준 목사, 김종기 장로, 장옥현 장로

총무 : 조재학 목사

서기 : 정명철 목사

부서기 : 진장현 목사

회계 : 강병만 장로

부회계 : 정재현 장로

감사 : 김영윤 목사, 오재익 장로

2003년도

회장 : 박경문 목사

상임부회장 : 이완준 목사

부회장 : 정명철 목사, 주용은 목사, 강병만 장로, 지용해 장로

총무 : 김영윤 목사

서기 : 진장현 목사

부서기 : 김재열 목사

회계 : 김종기 장로

부회계 : 박종환 장로

감사 : 김재석 목사, 오재익 장로

2004년도

회장 : 이완준 목사

상임부회장 : 주용은 목사

부회장 : 조재근 목사, 문병식 목사, 강벼만 장로, 박인환 장로

총무 : 김영윤 목사

서기 : 김재열 목사

부서기 : 김기홍 목사

회계 : 김종기 장로

부회계 : 박종환 장로

감사 : 곽희주 목사, 오재익 장로

2005년도

회장 : 문병식 목사

상임부회장 김영윤 목사

부회장 : 조재근 목사, 김재열 목사, 이덕남 목사, 강덕희 목사, 오재익 장로, 김종준 장로

총무 : 김기홍 목사, 박인환 장로

서기 : 곽희주 목사

부서기 : 박훈대 목사

회계 : 강병만 장로

부회계 : 성백진 장로

감사 : 유흥식 목사 박종환 장로

2006년도

회장 : 김영윤 목사

상임부회장 김기홍 목사

부회장 : 주용은 목사, 강명원 목사, 김재열 목사, 강병만 장로, 김종기 장로

총무 : 곽희주 목사

서기 : 박훈대 목사

부서기 : 조영준 신부

회계 : 성백진 장로

부회계 : 박종환 장로

감사 : 이완준 목사, 오재익 장로

2007년도

회장 : 김기홍 목사

상임부회장 : 주용은 목사

부회장 : 김재열 목사, 강명원 목사, 곽희주 목사, 강병만 장로, 성백진 장로

총무 : 박훈대 목사

서기 : 조영준 신부

부서기 : 최원주 목사

회계 : 박종환 장로

부회계 : 김종기 장로

감사 : 문병식 목사, 김종준 장로

2008년도

회장 : 주용은 목사

상임부회장 김재열 목사

부회장 : 강명원 목사 곽희주 목사, 이덕남 목사, 강병만 장로, 박종환 장로, 정재현 장로, 김종준 장로,

총무 : 조영준 신부, 성백진 장로

부총무 : 이남수 목사, 박충호 목사

서기 : 최원주 목사

부서기 : 남동균 목사

회계 : 김종기 장로

부회계 : 김정모 장로

감사 : 김영윤 목사, 박인환 장로

2009년도

회장 : 강명원 목사

상임부회장 : 곽희주 목사

부회장 : 박훈대 목사, 최원주 목사, 이덕남 목사, 한태희 목사, 강덕희 목사, 정재현 장로, 김종준 장로, 박종환 장로, 성백진 장로, 박인환 장로

총무 : 이남수 목사, 김재수 장로

서기 : 남동균 목사

부서기 : 지경식 목사

회계 : 김종기 장로

부회계 : 김정모 장로

감사 : 김기홍 목사, 강병만 장로

나) 실로암

평신도가 주역이 된 초교파 장로들의 모임으로 1985년에 결성된 ‘실로암’이 있다. 안창식(상주교회), 성백일(부원교회), 김종기(상주중앙교회) 씨 3인이 가나안 서점에서 발기인 모임을 갖고 이어 시내 초교파 장로들에게 공문을 보내 같은 해 7월 8일 회의 명칭을 ‘실로암’이라 정했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초창기 회원 자격은 안수집사 이상으로 초대 회장에 안창식, 총무에 김종기, 감사에 성백일 씨를 선임하였다. 실로암은 이름의 뜻에 맞도록 현재 20년이 넘게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어려운 개척교회를 돕는 일과 각종 기독교 행사를 후원하는 일이며 이미 두 차례의 의료선교(필리핀, 중국)를 통해 회원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고 지역 복음 선교에 앞장서면서 2008년 2월에는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를 초청하여 상주시기독교연합회와 함께 부흥집회를 열기도 했다. 1995년에는 실로암 10년사를, 2005년에는 실로암 20년사를 편찬하였다.

2008년 현 회장 권상준, 총무 박의용 씨를 비롯하여 2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다) 갈보리회

실로암과 같은 평신도 모임으로 ‘갈보리회’가 있다.

갈보리회는 실로암 보다 연령층이 조금 낮아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 5월 7일 가칭 갈보리회 발기인 대회를 안희성(상주침례교회), 강신돈(상주교회),정재현(외남교회), 강명구(외남교회), 김성환(서문교회), 김용수(사벌교회) 씨 등이 모여 열고 이어 1990년 6월 3일 제1차 정기총회를 열어 회장에 강신돈 씨를 선임하고 강명구 씨의 제안대로 ‘갈보리회’라 이름을 지었다. 초교파적인 모임으로 회를 발족한 이들은 1991년부터 회지를 발행하게 되는데 이들 역시 어려운 개척교회를 돕는 일과 각종 기독교 행사를 후원하고 봉사하는 일이며 유명한 기독교 인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열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회원자질향상 세미나를 여는 등 그 활동이 활발하며 김진홍 목사. 구봉서 장로, 용혜원 목사, 최일도 목사, 장경동 목사 와 같은 분들을 초청하여 지역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

마) 이레선교회

이레 선교회는 초창기에 스포츠(축구)를 통한 활동을 전개하던 선교단체이다. 이들은 2001년 7월 6일 최초의 모임을 갖고 2001년 7월 6일일 초대 이충한 씨를 회장으로 총무 김용기 씨를 선임하여 첫 모임을 가지고 이어 8월 25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세계복음화와 미 자립교회 후원, 상주지역 복음화에 앞장서며 회원의 상호 친목을 도모하고 개인의 체력단련과 상주지역교회 교인들의 단합에 목적이 있다.’고 선교회 설립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레축구선교회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으로 하여 제1회 상주지역 초교파 교회 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한 이래 5회의 축구대회와 지역조기회 초청 축구대회, 구미, 대구지역 교회축구팀 초청 경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현재 회장단은 직전회장 박선태, 회장 성백률, 부회장 권용구, 문석안, 김용기 총무 권대식, 감사 차두진 씨와 감독 김선식 운영팀 안희찬, 찬양팀 최남욱, 명랑 운동회팀 김교철 씨 등의 임원과 고문을 비롯한 27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바) 상주시청 신우회

상주 시청소속 기독 공무원들의 모임이 ‘시청 신우회’가 있다. 이들은 직장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같은 직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선교정보교환을 목적으로 조직된 순수 초교파적인 평신도 단체이다.

1995년 3월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당시 농정과장인 진재언(현 옥산중앙교회) 씨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본청직원 20여명이 모여서 회를 시작하였다.

이 모임은 1998년 본청과 읍면동으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회원은 120여명이 넘게 모 이고 있으며 격월제 월레회를 통해 관내 교회 순회 예배를 실시하고 매 년 이웃돕기 행사(양로원, 고아원 방문)를 하는 등 직장 내의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다. 2006년도에는 도 단위 신우회 행사를 6월 6일 상주시민운동장에서 개최하여 도내 모범적인 신우회 모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대 회장은 다음과 같다.

○ 2대회장(1998 ~ 2005) : 임종목(현재 신봉교회 안수집사)

○ 3대회장(2005 ~ 2007) : 채영준(현재 시민교회 안수집사)

○ 4대회장(2008 ~ ) : 박희준(현재 성결교회 장로)

사) 상주경찰서 경목제도 운영

우리나라에서 경목 제도는 1966년 경찰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발족되었다. 이 경목 제도는 감리교의 조선일 목사가 1960년부터 부평 경찰전문학교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일방, 각 경찰서의 유치장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후 1965년 5월에 감리교에서 2명, 성결교에서 1명, 합하여 3명의 목사가 서울시경에 파송되어 경찰 선교에 적극적인 참여를 감행한 것이 좋은 성과를 올리게 되어 1966년에는 서울시경과 경상북도 충청남도의 경찰국 등에서 각각 정식으로 경목을 위촉하게 되어 경목 제도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다.

경찰 선교 사업은 1974년 2월 22일이래 '전경 신자화운동'의 일대 표어를 내걸고 힘쓴 끝에 1975년에 248명, 1976년에는 435명의 경찰관을 신자화 하는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오늘도 약 1천명에 가까운 경목이 경찰관 정신교양과 개인 상담의 시행등으로 경찰관 선교에 주력하고 있으며 또 한편 유치장에 수감된 이들의 위문과 교화 전도를 위하여 보람 있는 성과를 올리고 있음은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이라 하겠다.

상주경찰서는 1970년부터 경목제도를 도입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경목 사업을 담당해 온 분들은 다음과 같다.

년도

경목위원장

총무

1970-1974

김진곤목사 상주제일교회

1975-1978

유시홍목사 상주교회

신광석목사 침례교회

1979-1982

신광석목사 침례교회

1983

박경순목사 상주

1984-1985

김진영목사 성결

1986-1987

김수석목사 제일

1988-1992

차기천목사 상주

신광석목사(침례)

1993-1994

신광석목사 침례

김성환목사(성결)

1995-1996

김성환목사 성결

장종근목사(동산)

1997-2007

신광석목사 침례

장종근목사(양문)

2008

장종근목사 양문

조양남목사(성결)

현재 교단안배를 위해 상주결찰서 경목으로 장종근 목사(합동/양문)조양남 목사(기성/성결), 최원주 목사(통합/시민) 김영윤 목사(기감/감리) 김대근 목사(기침/사랑받는)가 활동하고 있다.

아) 상주의 향목 및 군종 제도 운영

상주의 향목은 향토 복음화를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었지만 그 활동은 기독교연합회의 활동과 그 역할이 대동소이하였다. 향목이 상주에서 조직된 것은 1970년대이며 향목위원장은 다음과 같다.

1972-1974 김진곤 목사(상주제일교회) 1975-1978 류시홍 목사(상주읍교회)

1979-1982 신광석 목사(침례교회) 1983-1985 박경순 목사(상주읍교회)

1986-1989 우병열 목사(이안교회)

1990년 이후엔 주로 장중덕 목사(신봉교회), 장종근 목사(동산), 최홍호 목사, 박경문 목사(청리제일), 조재학 목사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왔다.

상주는 육군 제5837부대 4대대가 상주에 주둔하고 이곳에 충성교회가 건립되면서 군에 대한 선교 활동이 이루어 졌다. 원래 군목은 군인 목회자를 통한 선교활동이지만 지역 활동은 향목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 졌다. 그 후 2007년 이후 ‘민간군인목사’제도가 시행되어 향목과 군목을 겸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0년 이전엔 주로 상주 향목 위원이었던 장중덕 목사, 장종근 목사, 최홍호 목사, 박경문 목사, 조재학 목사를 중심으로 부대 내 충성관에서 향목들이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1990년 12월에 상주지역 향목위원회가 부대 내에 충성교회당 건축결의하고 1992년 4월 신축지역 결정, 복지선정 및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1992년 5월 서울 헌인 교회(서현석 목사)가 충성교회당 건축 지원 결의하여 1992년 7월 18일 기공예배를 드렸다. 1992년 11월 26일 사단군종참모 나문찬 목사와 120연대 군목 이상현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전봉헌 예배를 드리면서 상주지역교회들이 뜻을 모아 교회 내 비품을 전달하였다.

역대 향목으로 부대 군목을 지원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1992. 11 - 1993. 12 김원태 전도사

1994. 01 박경문 목사, 조재학 목사, 이희련 목사 공동 사역

1995. 01 - 2008. 12 박경문 목사(50사단 민간 군인 목사)가 활동하고 있다.

12. 21C를 향한 한국교회의 사명

우리나라에 전파된 기독교는 세계인들이 놀라워 할 만큼 부흥되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가 근세 한국의 특수한 역사 전개 과정에서 잘 일치 했고 또한 아시아․아프리카와는 다른 맥락 속에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가 유럽 국가들의 대외 침략의 전위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비기독국가인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기독교를 통해 정의와 자유, 독립과 평등을 훈련받았으며 기독교를 통하여 민족주의에 눈 뜬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는 독립을 회복하려는 항일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3․1운동을 비롯하여 항일 민족운동에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적극 참여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 이후 자유와 평등. 정의의 성서적 이념을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이념이 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도 이러한 의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아픔을 견디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열망에 신앙의 방향과 궤를 같이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교회는 부흥될 수밖에 없었고 6․25와 같은 초유의 민족적 참사를 겪으면서 황폐화된 심령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은 신앙에 대한 갈망과 구원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6․25와 같은 참상과 혼란이 있은 이후 기독교의 교세가 더 왕성하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미국 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총무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이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2년 전인 1910년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로체스터 대회(Rochester Convention)에서 보고에서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보잘것없는 이 나라가 이제 비기독교 국가들 중에서 복음화 되어 더 거대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예상은 1세기가 지난 오늘 사실로 입증되었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틀을 다지기 시작한 교회는 그간의 수많은 대 사건들과 고난 가운데서도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6.25 직후 회개운동 그리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더 왕성해 지고, 해외 선교 열을 불어 넣어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 교회 안팎에서 격렬한 민주화 투쟁에 동참, 남북교회의 대화 통로 개통, 한국기독교 100주년 행사, 러시아 및 동구에 대한 교회 선교의 문호 개방, 연변 한국 동족에 대한 선교의 통로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는 사이에 한국교회는 1993년 2월 말 현재 천만 명의 교인, 세계 50대 교회 중 25개나 차지하는 엄청난 교세의 나라로 그 자리를 빛내게 되었다.

지난 100년간의 역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시한다. 이 중에는 복음전파와 교회의 대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책임을 동시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앞으로도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신앙이 삶의 실존 속에서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혁주의의 균형 잡힌 실천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개혁파 복음주의 역사가 나단 해취(Nathan Hatch)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포용하며 개인의 경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포함하여야 된다.” 라는 말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교회가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청교도들의 신앙관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교회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책임을 총체적으로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가 반성하며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이요 이 일을 통해 무너진 북한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미 이 일을 위해 각 교단들이 앞을 다투어 북한 동포를 돕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울러 북한에도 평양봉수교회, 칠골교회 등 가정교회에서 모여 예배에 참여한 성도의 수가 1만 2천여 명이나 모인다고 하니 한국교회의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도시대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처럼 우리나라 개신교 100년의 역사도 그와 같은 터전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시기이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안으로는 섬김을 통한 사회적 책임감당이요, 개인의 경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이루어야 하며 밖으로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는 일이다.

21세기를 맞아 예장(통합)만 해도 세계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는 83개국에 589가정, 1,077명이 나가서 활동하고 있으며, 예장(합동)의 경우 1,747명, 95개국, 962가정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아프카니스탄에 파송되었다가 납치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국내외의 관심이었던 ‘샘물교회’ 사건도 세계선교를 통해 한국교회가 진 빚을 감당하고자 하는 교회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외도 각 교단마다 세계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13. 21C를 향한 상주지역 교회 섬김의 현장

한국교회는 100년 전, 선교사들을 통해 받은 복음으로 인해 빚진 자의 삶을 살아 왔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교회내의 부흥과 세계선교를 향한 열정이 어느 나라 보다 강함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는 한편 21C라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교회 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교회가 교회를 위한 선교, 즉 교회의 내적 부흥과 발전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는 지역사회를 향한 섬김의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우리 지역 교회들도 이미 이 일을 위해 앞장서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가. 섬김의 시작

상주의 모교회로 상주지역 교회의 발전과 지역사회의 섬김에 앞장섰던 교회로 상주읍교회를 빼놓을 수 없다. 상주읍교회는 1900년 서정교회(西町敎會)로 출발하여 부원, 신봉, 상산(현 제일), 병성, 지사, 외답, 서문, 서곡교회 등 많은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1993년에 이르러 지역선교를 위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자 상주교회와 상주시민교회로 분립하였는데 이전까지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사역을 들면 다음과 같다.

1949년 5월 이 지역 최초 유치원인 상주유치원의 개설은 참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선각자의 사명이었다. 아울러 1954년 배움에 목말라하는 지역 청소년을 위한 성경중등구락부를 개교한 일, 이 구락부가 1960년 성신고등공민학교로 개칭하였는데 이 학교는 1969년 성신여자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성신여자중학교가 정식학교로 인가되고 재단이 별도로 설립되자 1970년 상주교육청에서 상주고등공민학교를 인가 받아 성신고등공민학교의 뒤를 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4년 교회 안에 독서실의 설치는 지금의 독서실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86년 5월 상주경로대학의 설립은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일이며 더욱 중요한 일은 1987년 월 1만부를 발간하는 『상주소식』지의 발간이다. 이 『상주소식』은 1989년 상주신문사로 이관했지만 당시 지역 주민의 여론 형성과 지역소식을 알리는 일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87년엔 여성교육을 위해 상주여성대학을 개교하여 그해 11월 제1회 상주여성대학 졸업식을 가졌으니 이러한 역할들이 이어져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지역사회를 섬기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상주교회

가) 청소년복지센터 개설

상주교회는 2003년 10월 청소년복지센터를 개설하였다. 어린이 영어교실과 한문교실, 바이올린 교실, 꽃꽂이교실 등의 교육프로그램으로 특히 바이올린 교실은 전공자들을 통해 보다 질 높은 특기신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나) 온누리노인복지센터 개소

무의탁 독거노인의 안정되고 건강한 삶 유지와 지역사회 자원을 통한 소외감 해소, 그리고 각종 지역주민 연대 프로그램을 통한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 『온누리노인복지센터』가 2007년 1월 29일 문이 열렸다. 주로 상담사업(방문상담, 내방상담, 전화상담)과 가정봉사원 양성사업, 가정봉사원 파견사업, 지역사회 연계사업(결연사업, 노인문화사업-위안잔치, 나들이), 노인지원사업(밑반찬지원-주1회, 생활지원사업), 홍보사업, 교육사업 등을 통해 무의탁 독거노인의 안정되고 건강한 삶을 도모하게 하고 가정봉사원 파견을 통해 독거노인의 소외감이나 고독감을 해소하며, 지역사회 자원이 참여함으로 지역주민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기대효과를 얻고 있다.

현재 시읍면지역에서 모두 90명이 대상자이다.

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주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이에 상주교회가 발 빠르게 대처한 기관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설립이다. 이 센터는 이미 2006년 7월부터 근로 또는 결혼을 통한 외국인 이주자들이 상주지역에도 많이 거주함에 따라 이들을 위한 한글교육이 필요함을 느껴 교회 안에 한글학교를 개설하여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교회는 보다 다양한 지원을 위해 2008년 3월 10일 정식명칭을 다문화가족지원센터로 문을 열었다.

이 센터는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접목하고, 한글공부를 통해 소외감을 해소하면 한 하늘 아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을 밝혔다.

주요 사업내용을 보면 상담사업(방문상담, 내방상담, 전화수시상담), 센터 내 교육(한글공부, 요리실습, 직업훈련), 아동양육사업(이주여성들의 자녀를 방문 교육), 우리말 이해교육, 우리역사 바로알기, 어울림 한마당( 다문화 가족의 초청으로 유대 강화), 배우자 교육, 국적취득(체류기간 연장, 국적취득), 지역사회와의 연계 프로그램 운영 등이 있다.

현재 상주시 관내 380여명의 다문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상주교회 4층에 사무실을 두고 교회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여 활동하고 있다.

2) 상주시민교회

가) 장애우 돕기를 위한 사랑 나눔 알뜰바자회

사랑 나눔 알뜰바자회는 1986년 4월부터 시작하여 2008년 현재 12회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년 800만원에서 1 천만 원 정도의 수익금은 상주지체장애인협회, 상주시각장애인협회, 상주시민교회 농아부, 밀알선교회(심장병재단), 상주장애인복지회관, 상희학교, 정오네 집(장애인 공동체), 실로암 안과, 제주도 평화의 마을(장애인공동체), 상주장애인교회, 상주농아인협회, 상주교통장애인협회, 천봉산 요양원 등에 지원을 하고 있다.

나) 시민경로대학

1986년 5월에 개강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2008년 현재 년 130여명의 수료자를 배출하면서 지역 노인들에게 평생교육의 기회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 상주농아인을 위한 농아부 설립

상주의 농아부는 2001년 3월 소외된 350명의 농아들을 위해 농아인 부부 목사(전임자 : 방성호 목사 부부)가 전담으로 하였다. 이 농아부는 농아인들을 위한 건강교육, 농아인들에게 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샘안양병원과 연계하여 무료로 ‘인공와우수술’을 하여 듣게 하는 데에도 일조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상주농아인 수화 통역센터농아부 수화교실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지금의 『상주농아인수화센터』가 세워지게 되었다.

라) 시민봉사대

1990년 『예수향기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2006년 4월 운영위원장과 봉사자 13명으로 조직하여 월 1회 목욕봉사로 섬기고 있다. 주로 섬김의 대상은 은광마을, 하늘지기, 푸른초장과 같은 노인복지시설에서 봉사하고 있다.

마) 인재양성스쿨 개설

2007년도에 어린이 도서관을 개설하여 독서클럽을 만들고 더 발전하여 2008년도에『인재양성스쿨』을 만들었는데 이는 사교육비의 증가로 인한 학부모와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건전한 인격으로 성장시켜 이 나라의 주역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곳에는 매일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교회 스쿨에서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학업의 성취도를 높이고 있다.

바) 무의탁무료급식센터

2008년 1월부터 시작하여 월 2회 무료반찬을 지역의 어려운 독거노인 분께 전하고 있다. 지원 대상자는 상주시 거주하는 독거노인 34명을 대상으로 년 900 여 만 원의 예산으로 교회 내 센터 장을 비롯한 반찬도우미 15명과 배달자 10명으로 운영하고 있다.

3) 신봉교회

가) 이웃돕기를 위한 바자회

2000년 11월 7일 제1회 이웃돕기 바자회를 개최한 이래 2008년 현재 7회의 바자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수익금 전액을 신흥동사무소가 제공한 기초생활수급자 및 소년소녀 가장, 기타 지원대상자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지원하고 있다.

나) 행복을 파는 가게 운영

2003년부터 교회 내에 아나바다 장터를 마련하고 매 주 수, 토요일에 자원봉사들을 중심으로 문을 여는 『행복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2003년부터 주로 결식학생을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 이 가게는 시내 상영초등, 상주여중, 남산중, 상주공고, 상주고등 등의 학교에 2008년 현재 총 금액 40,416,300원으로 연인원 90명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한편 상희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 매년 1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2008년부터는 ‘결식’이라는 이름을 빼고 일반 장학금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행복을 파는 가게는 각 지역 언론과 지상파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 져 상주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기증을 받아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다) 신봉 노인대학

‘노년을 힘차게, 즐겁게, 보람되게’라는 교훈으로 2003년 3월 26일부터 『신봉노인대학』을 개설. 초창기는 일 년제로 출발하였으나 2007학년도부터 2년제로 학제를 변경하고 수료자는 다시 평생교육원 과정을 신설하여 졸업생들을 관리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봉사자들의 중식을 제공과 차량운행을 통해 즐거운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과정으로는 오전에 공통수업(교양강좌, 건강관리등), 오후에는 특기 적성반을 운영하는데 컴퓨터반, 체조반, 한글반, 종이접기반, 합창반 등을 통해 평생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1학기엔 여행, 2학기엔 종합체육대회와 발표회를 연다.

라) 연탄은행

2002년 12월 17일 『밥상공동체복지재단』 대표인 허기복 목사가 연탄은행 1호점을 시작하면서 탄생한 기구이다. 『신봉 연탄은행』은 지난 2007년 3월 9일 신봉교회 내 9.9m2의 연탄창고를 짓고 전국 연탄은행 20호점(대표 박충호:신봉교회 담임목사)을 개원하면서 시작하였다. 연탄은행은 개인 후원과 후원기관을 통해 받은 기금으로 연탄을 구입하여 기초생활보호자,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에게 연탄을 배달 공급하고 있다. 매년 10월부터 시작하여 익년 4월까지 실시하는 연탄은행은 자원봉사자들의 후원과 연탄배달 봉사자들을 통해 어려운 이들의 겨울나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후원금 실적을 보면 2007년 23,397,435원, 2008년 12월 현재 30,814,664원으로 특히 2008년에는 예총상주지부의 후원으로 자선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2008년 목표는 전반기에 한 가구당 200장씩 지원했으나 2008년 후반기부터는 200가정에 600장씩 지급을 목표로 잡고 있다.

연탄 배달 실적으로는 2007년 상반기 124가구에 15,000장, 하반기에는 151가구에 쌀 1,510kg을 나누었고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2월말까지 253가구에 52,700장을, 2008년 하반기(12월 17일 현재)에 176세대 49,050장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연탄은행은 뜻을 함께하는 상주지역 인사들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업체와 기관들로부터 ‘후원 업체 체결’을 하여 2009년부터는 김천과 선상지역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4) 부원교회

가) 밀알선교회 이삭노인대학 개설

부원교회 『이삭노인대학』은 2001년 교육복지관의 헌당과 함께 2년제 학기로 개강하여 2004년 제1회 졸업식(39명)을 가짐으로 노인들의 건건한 노후 생활과 평생교육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삭노인대학은 농촌교회 인구의 감소로 인해 2006년 제2회 졸업식(32명)을 끝으로 종강을 했지만 2008년 이후 다시 개교할 계획으로 준비하고 있다.

5) 청리제일교회

가) ‘레인보우-지역아동센터(아동복지시설)

2006년 1월부터 『레인보우-지역아동센터(아동복지시설)』를 열었다. 점차 늘어나는 빈곤가정과 부모의 가출 또는 맞벌이 조손가정 등에 의하여 방과 후 보호와 학습지도가 필요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결식문제 해결과 다양한 사회복지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고 가정안전망을 강화하여 건전한 인격 함양은 물론 미래사회의 주역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지원하고자 이 센터의 설립하였다.

이 센터는 이미 2005년 8월부터 교육관에서 방과 후 공부를 시작했고 2005년11월 교육관이 개축되자 동년 12월에 교육연구 및 복지시설(아동복지시설) 사용승인을 얻었다. 이어 2007년 1월에는 결혼이주여성 한글교육 및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6) 상주나사렛교회

상주나사렛교회는 1995년 9월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는 교회 설립부터 그 목적이 장애인 특수교회로 설립되었다. 이곳엔 소외된 장애인(80%)과 노인, 그늘진 곳에 사는 비장애인(20%)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이들이 어렵고 소외된 분들이기에 정기적으로 온천욕과 관광, 그리고 겨울과 여름철에 교인 전체가 함께하는 2박 3일의 수련회 등을 통해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경험하게 한다. 주로 구성원들은 함창, 외서, 사벌, 공검, 모서 등 읍면지역과 개운동, 지천동, 능암리 등 시내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에게 매월 이․미용 봉사활동은 필수적이다.

7) 송계골교회

가) 사회복지법인 필그림하우스(가정복지 상담 및 순례자의 집) 운영

사회복지법인 『필그림하우스(가정복지 상담 및 순례자의 집)』그리스도 사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건강한 사회,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고 운영되는 복지법인이다.

1999년 1월에 필그림하우스를 설립하고 피해여성 쉼터와 무의탁 및 저소득 재가 노인을 위한 밑반찬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그해 2월 경북도로부터 요보호여성 긴급피난처로 지정을 받고 그해 6월, 『필그림가정폭력상담소』를 개소하였다. 이 후 상주성폭력 상담소, 가정폭력, 성폭력 통합상담소로 『필그림가정복지상담소』를 개소하고 2004년 11월 필그림하우스가 사회복지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3월 경북도 긴급피난처를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 ‘순례자의 집’으로 개소하였다.

위의 시설들은 그 명칭이 말해주는 것처럼 주로 여성관련 통합 상담소로 성폭력, 가정폭력 상담을 하고 교육으로 성희롱예방교육, 성폭력예방교육, 가정폭력예방교육과 가해자 및 피해자들의 치료 프로그램과 집단 상담,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운영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농촌 독거노인 지원사업을 주 1회 시행하고 있는데 주로 밑반찬 나눔을 통해 노인의 건강과 정서 서비스를 통한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8)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상주교회

가) 상주시 지역문화센터

2008년 1월5일 안식일 직원회에서 상주교회의 새로운 도전과 시도를 위해 상주시민의 복지향상과 건강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공익사업을 펼칠 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의 하고 상주시 서성동 110-46번지 2층에 문화센터를 설립하였다. 이 센터가 하는 주요한 일들은 다음과 같다

① 상담 - 일반인 및 청소년 MBTI 심리유형 검사 및 상담, 성장 프로그램 운영

② 보건교육 - 금주, 금연, 약물 상담 및 교육, 뉴스타트 건강 동호회 운영

③ 노인 - 상설 ‘실버 행복대학’ 노년기 세미나 운영

④ 여성 - 웰빙요리 강습, 노래교실, 이주여성 프로그램 운영

9) 기타 지역사회의 섬김 프로그램들

성신교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들은 농촌교회 실정에 알맞은 프로그램을 구안하여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다. 상시적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경로잔치, 마을 주민을 위한 자판기 시설 제공, 년 1회 이상 지역 노인을 위한 관광, 독거노인 보살피기, 이주여성 한글교육 등이다.

14. 2008년도 현 상주시 교회 현황

(상주시기독교연합회 자료 제공 - 가나다 순)

거동교회 김영업 합동 742-200 상주시 거동동 1구 98 534-3248

공검교회 강대식 통합 742-822 공검면 양정리 541-1152

공검서부교회 정주옥 통합 742-821 공검면 병암리 482-9 541-1914

관동교회 남동균 기성 742-922 외서면 관동리 100 532-8504

구서교회 이상진 합동 742-971 외남면 구서2리 358-1 532-9219

금당교회 김명철 합동 742-941 중동면 금당1리 410 535-0315

금동교회 노인종 통합 742-832 청리면 월로리 424-2 533-1153

금산교회 김 성 통합 742-861 화서면 금산1리 318-2 533-0853

낙동교회 이재호 합동 742-951 낙동면 낙동리 789-1 532-2340

낙동동부교회 정재석 합보 742-951 낙동면 낙동리 742 532-7504

낙동신상교회 김관영 통합 742-952 낙동면 신상1리 805 532-5286

낙동중앙교회 한병태 합동 742-954 낙동면 상촌리 868 532-1910

낙서교회 안영환 합동 742-852 내서면 낙서리 163 533-4614

내서교회 최병철 기성 742-851 내서면 신촌리 83-3 534-8601

능력교회 김현진 기성 742-170 상주시 가장동 418-30 534-8959

능암교회 김재열 고신 742-853 내서면 능암1리 52 534-5033

덕가교회 한종식 합동 742-962 사벌면 덕가리 349 533-8015

덕담교회 고시성 기침 742-963 사벌면 덕담리 168 532-8328

도남교회 이성복 합동 742-350 상주시 도남동 484-1 532-7078

도남삼일교회 김영수 고신 742-350 상주시 도남동 568-1 536-8922

동부교회 이흥수 기성 742-300 상주시 서곡동 129 532-3006

동산교회 최영민 합동 742-020 상주시 성동동 632-5 535-7607

두곡교회 황진수 기침 742-932 은척면 두곡리 69 541-8848

두릉교회 조명옥 고신 742-962 사벌면 두릉리 313-1 534-3456

득수교회 유면숙 기성 742-893 모서면 득수2리 184-6 534-6751

마공교회 노회운 합동 742-831 청리면 마공리 771 533-6653

매협교회 임종경 합동 742-963 사벌면 매협1리 1334 534-5258

매호교회 최득환 고신 742-963 사벌면 매호2리 511 533-8070

모동교회 황선일 고신 742-852 모동면 용호리 17 532-1288

모동제일교회 양재관 합동 742-912 모동면 덕곡리 483 533-3730

모서교회 박상달 합동 742-891 모서면 삼포리 226 533-2526

모서제일교회 한성기 통합 742-891 모서면 지산리 166-6 533-3894

무릉교회 장동진 통합 742-932 은척면 무릉리 243 541-5976

묵상교회 이완준 기침 742-963 사벌면 묵상리 765 533-8009

물량교회 이서종 합동 742-951 낙동면 물량리 887 532-7828

백화교회 이남묵 기침 742-893 모서면 정산1리 219-2 533-2837

병성교회 오명석 통합 742-340 상주시 병성동 453 532-0839

복음교회 예도해 개혁 742-070 냉림동 149-10 531-3203

봉강교회 한태희 기감 742-921 외서면 봉강2리 1031 532-7088

봉천교회 김일승 기성 742-851 내서면 고곡리 188 634-4074

봉촌교회 임종근 통합 742-861 화서면 봉촌리 316 534-2772

부곡교회 류혜경 기성 742-820 공검면 구곡2리 307 541-1202

부원교회 박훈대 합동 742-280 부원동 273 535-3102

북부교회 김진수 합동 742-240 중덕동 148 534-6092

사랑받는교회 김대근 기침 742-130 신봉동 584-17 536-7013

사벌교회 박영천 고신 742-963 사벌면 덕담3리 392-1 532-8265

사산교회 이정철 합동 742-861 화서면 사산리 284 536-5002

삼백교회 오창관 합동 742-902 낙양동 146-32

상산교회 배수호 기성 742-220 화산1동 835 535-5690

상주감리교회 김영윤 기감 742-090 무양동 201-2 535-8059

상주교회 곽희주 통합 742-090 상주시 무양동 1-161 535-1123-6

상주나사렛교회 주용은 나성 742-110 연원동 774-7 532-2419

상주남부교회 민길성 합동 742-160 상주시 지천동 510 533-7244

상주서문교회 이남수 합동 742-050 상주시 서성동 114 531-0031-4

상주성결교회 조양남 기성 742-902 낙양동 218-4 531-0107

상주시민교회 최원주 통합 742-050 서성동 10 536-2260-5

상주양문교회 장종근 합동 742-130 신봉동 495-1 535-8969

상주제일교회 강명원 합동 742-050 서성동 163-55 533-3411

상주중앙교회 류창열 합동 742-010 남성동 37-1 535-9021

상주침례교회 신광석 기침 742-060 인봉동 21-37 534-3384

새벽교회 김영구 고신 742-843 공성면 용신리 584 531-2990

새상주교회 신성옥 고신 742-040 상주시 복룡동 283-38 535-8947

서곡교회 김호철 통합 742-300 서곡동 127 532-3569

석산교회 김득두 합동 742-891 모서면 석산리 535 532-2223

석수교회 김종화 합동 742-843 공성면 인창2리 482 532-4291

선교교회 오세영 합동 742-882 화동면 선교리 422 533-9422

성복교회 한재덕 통합 742-952 낙동면 성동리 35 532-4172

성산교회 배만근 합신 742-130 신봉동 605 535-8038

성신교회 백동수 통합 742-952 낙동면 성동리 79-5 534-5196

세천교회 김종욱 합정 742-360 남적동 18 531-3391

소망교회 강세현 예성 742-210 계산동 358 534-0764

소망교회 박순자 기장 742-953 낙동면 비룡리 381 532-5883

소망교회 이덕남 기침 742-801 함창읍 윤직1리 709-10 541-9458

소상교회 조원희 통합 742-971 외남면 소상리 66 532-9429

소은교회 합동 742-972 외남면 소은리 294-4 532-9301

송계골교회 손호진 예성 742-862 화서면 상곡2리 226 534-5750

순복음교회 이영수 기하성 742-150 양촌1동 122 531-1429

신곡교회 김진해 기감 742-842 공성면 신곡1리 376 535-8938

신봉교회 박충호 통합 742-130 신봉동 262 534-2911

신상교회 박원봉 합동 742-971 외남면 소상리 198-1 532-9217

신상소망교회 조찬율 합동 742-970 낙동면 신상2리 605 532-9179

신암교회 최재호 합동 742-941 중동면 신암리 410-2 535-9833

신천교회 박상현 기장 742-911 모동면 신천1리 156 533-3745

신촌교회 전기정 기장 742-971 외남면 신촌1리 417 532-9239

안륭교회 윤종식 기성 742-813 이안면 안룡리 180 641-5370

양범교회 송원숙 통합 742-813 이안면 양범리 156 541-5314

양촌교회 김진영 통합 742-150 양촌2동 674-1 534-5435

양평교회 윤현선 기성 742-881 화동면 양지리 319-1 535-2597

엄암교회 이영생 통합 742-961 사벌면 엄암리 778 533-6117

영광교회 박욱환 합동 742-260 만산동 37-5 536-0892

영광교회 최종국 기성 742-803 함창읍 척동1리 192-1 541-2425

영락교회 김유신 통합 742-140 개운동 725-5 532-1421

예일교회 이태조 합동정통 742-320 외답동 2577-1 531-9981

오광교회 박세동 통합 742-841 공성면 오광2리 174 532-4508

오광제일교회 홍광정 개혁 742-841 공성면 오광1리 610 532-4637

오상교회 손재화 합동 742-942 중동면 오상리 366-1 532-9575

오태교회 좌장건 통합 742-821 공검면 오태리 801 541-1914

오흥교회 한진택 나성 742-190 오대동 227 534-7987

옥산교회 이명우 합동 742-844 공성면 옥산리 303 532-4125

옥산서문교회 이은규 예장개혁 742-844 공성면 옥산리 290-4 532-4510

옥산중앙교회 정인식 통합 742-844 공성면 옥산리 173-4 532-4147

외남교회 조재근 합동 742-972 외남면 흔평리 120-2 532-9052

외답교회 손은목 합동 742-320 외답동 785 532-2977

외서교회 김성규 대신 742-921 외서면 가곡리 58 533-1856

용담교회 정충균 기장 742-953 낙동면 용포리 590 535-1367

용담교회 최락규 기침 742-962 사벌면 용담리 531 532-8424

우하교회 김덕억 기감 742-842 공성면 우하리 305 536-1306

원흥교회 안종수 고신 742-962 사벌면 원흥1리 280-1 534-5067

율리교회 허지태 통합 742-832 청리면 율리2구 557 532-9257

은척교회 강덕희 기성 742-933 은척면 봉중리 311 541-3652

은척중앙교회 김성중 합동 742-931 은척면 우리1리 784 541-4243

이안교회 김종순 통합 742-811 이안면 가장리 213 541-6529

이안제일교회 장용득 합동 742-811 이안면 소암리 54 541-1262

이천교회 신동헌 대신 742-921 외서면 이천리 80 534-4156

이촌교회 예장개혁 742-921 외서면 이천리 535-5338

이하교회 천향수 합보 742-841 공성면 이화리 702 533-2896

인창교회 김재석 합동 742-843 공성면 인창리 176 532-3975

장동교회 김상교 합동 742-843 공성면 장동리 564 532-8042

죽암교회 윤춘남 고신 742-942 중동면 죽암리 564 532-9995

죽암제일교회 윤수조 고신 742-942 중동면 죽암1리 95 533-8401

중눌교회 김동기 기성 742-982 화남면 중눌2리 776 536-3866

중부교회 유흥식 고신 742-100 낙양동 174-8 535-0515

중소교회 이종훈 기침 742-821 공검면 중소리 456 541-0168

중앙로교회 지경식 고신 742-040 복룡동 383-2 531-0583

지사교회 오태복 통합 742-972 외남면지사2리 201 532-9456

지산교회 김점용 기감 742-813 이안면 지산리 394 541-5534

천호교회 김기홍 기성 742-220 화산동 1076-13 536-0692

청리교회 김재원 통합 742-832 청리면 수상리 343 532-6016

청리제일교회 박경문 합동 742-833 청리면 원장리 768-2 532-6247

청리침례교회 임용군 기침 742-832 청리면 율리 48-2 532-6233

치유교회 강우석 개혁 742-100 낙양동 146-107 536-0179

평안교회 김응수 합동 742-843 공성면 평천1리 33 532-4684

평온교회 장정설 통합 742-983 화남면 평온리 188-1 533-0891

평온중앙교회 이창익 기감 742-983 화남면 평온리 418-6 536-0476

평화교회 진장현 기장 742-040 복룡동 283-58 536-2453

포도원교회 이성묵 기성 742-912 모동면 반계리 30 531-1914

하늘지기교회 문오곤 통합 742-951 낙동면 구잠리 508-1 534-5509

학하교회 김교진 기침 742-832 청리면 학하리 313 532-6710

한우리교회 정세영 기하성 742-100 낙양동 535-0466

함께하는교회 이재철 기침 742-040 복룡동 349-18 534-2046

함창교회 문병식 통합 742-802 함창읍 구향3리 130 541-3278

함창교회 박상호 기성 742-802 함창읍 구향1리 218 541-3273

함창교회 이용환 기감 742-804 함창읍 오동1리 584 541-3279

함창제일교회 김재영 임마예 742-802 함창읍 구향리 155 541-3171

함창중앙교회 석명기 합동 742-802 함창읍 구향1리 200-4 541-9191

화개교회 서홍도 합동 742-310 화개동 192 532-3152

화달교회 조달용 고신 742-961 사벌면 화달1리 278 533-6919

화동교회 조승래 고신 742-882 화동면 이소1리 493-1 533-9044

화령교회 우용하 통합 742-863 화서면 지산리 107 533-0203

화령제일교회 심오섭 고신 742-863 화서면 상현1리 90-12 533-0912

화북교회 신현수 기성 742-871 화북면 용유리 419 533-8918

화산교회 황만석 합동 742-952 낙동면 화산리 1054 532-5830

회상교회 최봉선 고신 742-942 중동면 회상1리 518-1 532-9837

효곡교회 진태원 기감 742-842 공성면 효곡2리 243 535-8248

구세군

상주영문 강병남 구세군 742-130 상주시 신봉동 227-1 532-2151

신흥영문 김홍섭 구세군 742-910 모동면 정안리 533-4406

성공회

상주교회 안균호 성공회 742-080 상주시 서문동 35 535-3875-1104

기도원 및 수양관 요양시설

대학촌기도원 김진태 독립 742-942 지천동 750-6 532-3302

상주은광마을 김종건 742-954 낙동면 상촌리 318-1 533-7241

임마누엘기도원 문정심 통합 742-330 헌신동 120 533-7056

임마누엘수양관 유흥식 중부교회 742-850 내서면 평지리 4-1 532-6695

참샘수련원 최봉선 742-942 중동면 회상리 533-3513

천봉산요양원 이승부 742-280 만산동 96 534-4654

충성군인교회 박경문 741-140 상주우체국 사서함 7호 534-1113

하늘지기 문오곤 통합 742-951 낙동면 구잠리 508-1 534-5509

호산나수양관 이남수 742-850 내서면 신촌리 산 10-1 531-0036

상주시기독교 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상주교회 정승호 인봉동 48-1 536-7154

함창재림교회 정효수 상주시 함창읍 구향리 231 541-4514

청리재림교회 신현철

옥산재림교회 신현철

용화재림교회

용포재림교회

능암재림교회 윤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