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간(黔澗) 조정(趙靖)의 한국문화사적(韓國文化史的) 위상(位相)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한국문화사적(韓國文化史的) 위상(位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권 태 을
목 차 | ||||
I. 머리말 8 Ⅱ. 가계(家系) 및 행적(行績) 9 1. 가계(家系) 9 2. 행적(行蹟) 11 Ⅲ. 한국문화사적(韓國文化史的) 위상(位相) 17 1. 검간(黔澗)에 대한 제현(諸賢)의 평 17 2. 검간정신(黔澗精神) 20 3. 양진당(養眞堂.보물 제1568호)의 존재 의의 34 4. 조정 임진란기록(趙靖 壬辰亂記錄·보물제1003호)의 존재 의의 48 5. 검간(黔澗) 조정가(趙靖家)의 문화 유산 55 Ⅳ. 맺는 말 57 |
I. 머리말
사람은 문화를 가진 유일한 동물로 일컬어져 왔으며, 사람의 가치는 그가 일생동안 이룩한 일이 인류문화·한국문화·향토문화에 기여하는 비중에 따라 결정된다 하겠다.
문화란, 과거 삶의 유산(遺産)이요, 현재 삶의 환경(環境)이며 미래 삶의 측도(測度)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창출(創出)한 정신문화 유산 및 유형문화재의 존재 의의가 한국 문화사 내지 상주문화사에서는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가를 살피는 일이 곧 검간(黔澗)의 존재 의의를 살피는 일이 되리라 믿는다. 본 고의 목적은, 검간(黔澗)의 존재 의의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살피고자 함에 있고, 이 같은 시도는 필자가 처음이라 생각한다.
본 고는, 양진당(養眞堂.보물 제1568호)과 조정임란기록(趙靖壬亂記錄. 보물제1003호)을 중심으로 하여 본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거니와 먼저 가계(家系) 및 행적(行蹟)을 개관한 뒤 본론에 임하도록 한다. 첨기한 사항은, 풍양조씨장천파종회에서 간행한 ≪養眞堂≫(2007)에 필자가 <養眞堂에 살아있는 黔澗精神>을 발표한 바 있어, 본 고는 졸고에서 인용함이 많음을 먼저 밝히는 일이다.
Ⅱ. 가계(家系) 및 행적(行績)
1. 가계(家系)
선생의 휘는 조정(趙靖․1555~1636)이요, 자는 안중(安仲), 호는 검간(黔澗)이며 관향은 풍양(豐壤)이다.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문하시중 평장사 맹(孟)이요, 7대조는 도평의사 숭(崇)이니 상주 시거조(始居祖)다. 6대조는 형조좌랑 하(夏)요, 5대조는 문과급제로 사인에 이른 서정(瑞庭)이니 청망(淸望)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고조는 생원으로 승사랑인 회(恢)다. 증조 윤녕(允寧)은 춘천도호부사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서울에 살았고, 조 희(禧)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가법(家法)을 세워 자손을 훈육함으로써 문흥(門興)의 초석을 놓았으며 벼슬은 직장, 서울에서 상주로 환향하였다. 부 광헌(光憲)은 효행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는데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묘갈명(墓碣銘)>에서,
“우리 고향에 문벌(門閥)이나 가성(家聲)으로 현저한 가문이 한 성씨만은 아니지만 효근(孝謹)한 행실로써 가문의 구업(舊業)을 계승하여 후손들을 유복(裕福)하게 한 사람으로는 꼭히 고향 조공(趙公)을 으뜸으로 추대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모(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찰방 윤최(胤崔)의 따님이니, 1555년(명종10) 8월 22일, 한양 연지동(일설, 상주 동문 밖 외가)에서 검간을 낳으셨다.
검간(黔澗)은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정(奉常寺正:正三品堂上)에 올랐으며 1636년(인조4) 7월 21일 82세로 졸하였다. 뒤에 아들 형원(亨遠)의 귀(貴)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속수서원과 장천서원에 봉안되었다. 배위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淸溪) 진(璡)의 손녀요, 문과로 목사에 이른 약봉(藥峰) 극일(克一)의 따님이다. 이로 인하여, 퇴계(退溪)의 수제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생이 되었으니, 곧 선생의 처삼촌이다.
검간(黔澗)은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초은(蕉隱) 기원(基遠·1574~1662)이니 생원으로 천거되어 황간현감에 이르렀으며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자신에게 자문해 오는 선비들에게, “조 황간(趙黃澗)에게 물어보라”할 정도로 중망을 입었다. 배 신평이씨(新平李氏)는 을사 명현(乙巳名賢) 사인(舍人) 천계(天啓)의 손녀로 2남 6녀를 두었다.
차남은 유담(儒潭) 영원(榮遠․1577~1640)이니 종사랑이요, 배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숭(崇)의 따님으로 3남 3녀를 두었다.
3남 홍원(弘遠․1583~1609)은 재능이 특출하여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으나 요절하였고 배는 여산송씨(礪山宋氏) 진사 광국(光國)의 따님으로 1녀를 두었다.
4남 형원(亨遠․1585~1643)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진장 등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1636)에는 부친의 상중에서 나랏명으로 전장에 나아가 공을 세워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종2품)가 되어 아들의 귀(貴)로 검간(黔澗)에게 이조참판이 증직되었다. 배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직장 약(趯)의 따님으로 계자(繼子)와 1녀를 두었다. 후배 의령남씨(宜寧南氏)는 판서 선(銑)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고, 삼배 경주이씨(州慶李氏)는 진사 신덕(愼德)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5남 병록(屛麓) 흥원(興遠․1596~1653)은 효행이 특출하여 ≪商山誌≫에 효자로 방명을 남기었다. 배 흥양이씨(興陽李氏)는 부제학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두었고, 후배 초계변씨(草溪卞氏)는 욱(昱)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장녀는 진성인(眞城人) 퇴계(退溪)의 증손인 참봉 이기(李岐)에게 출가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차녀는 동래인(東萊人) 참봉 정영준(鄭榮俊)의 아들인 참봉 위(煟)에게 출가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손자 이하의 친손․외손이 번성하고 현달한 이도 많으나 생략한다. (≪養眞堂≫(2007) 소재 졸고 참조)
2. 행적(行蹟)
1세(1555․명종10) 8월 22일, 한양 연지동 본가에서 출생.
(일설․상주 동문 밖 외가에서 출생)
5세(1559․명종14),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문장을 지을 줄 알아 어른들을 놀라게 함.
9세(1563․명종18), 조부 직장공이 사마온공의 가법을 세워 집안을 다스릴 때, 검간은 독려치 않아도 독서를 열중함.
11세(1565․명종20), 영남의 8학사(개암 김우굉․송오 여응구․송파 조희 등)가 승 보우를 탄핵하러 직장공을 심방하였는데 직장공과 부 승지공이 다 출타 중이였다. 검간이 아우 가규와 더불어 영접하고 접대함이 예절에 맞았다. 뒷날, 8학사가 ≪소청일기(疏廳日記)≫에서 직장가(直長家) 난용(鸞龍) 두 아이의 범절이 특출하였다라고 하였다. ‘난(鸞)’은 검간의 어렸을 때 이름이고, ‘용(龍)’은 가규의 어렸을 때 이름이었다.
◦ 9월, 직장공을 따라 상주로 환향함. 이 뒤로는 검간과 가규 형제는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배우러 다녀 크게 진취하니 원방계방(元方季方)이라 칭송되었다.
16세(1570․선조3), 부친의 명으로 아우 가규와 같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의 문하에 나아가 ≪소학≫․≪심경≫등을 배웠다. 한강은 당대 예학의 대학자였다.
17세(1571․선조4),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배알하니 크게 장려함. 청계(靑溪) 김진(金璡·검간의 처조부)이 검간을 보고, “이 사람은 장차 후덕한 군자가 될 것이며 후대에 자손이 반드시 번성하리라”고 예언하였다.
18세(1572․선조5), 약봉 김극일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처삼촌 학봉 김성일의 문하생이 되었다.
◦ 아우 가규와 나란히 향시에 합격하니 조씨가 쌍벽(趙氏家雙璧)으로 칭송되었다.
22세(1576․선조9), 향교에서 수업할 때 친구들이 검간을 시험하고자, 검간의 새로 지은 솜두루마기를 가난하여 헐벗은 어느 아이에게 주었다. 검간이 도리어 기뻐하며 아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모두들 탄복하였다.
30세(1584․선조17), 경상감사였던 서애가 검간가를 방문하여 시를 남기었다.
33세(1587․선조20) 2월, 조부 직장공의 상을 당하여 부친 승지공이 여묘 중에 병얻어 위독하니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34세(1588․선조21), 부친 승지공의 상을 당하여 상제례는 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고, 슬퍼함이 지나쳤다.
37세(1591․선조24) 2월, 복을 마침.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고, 묘소 아래 있는 작은 개울이 검간(黔澗)이라서 개울 이름을 자호로 삼음. 또한, ‘검(黔)’자는 발음이 ‘검(儉)’과 같아, 검소하고 화려하지 않은 뜻을 취하였다.
38세(1592․선조25) 4월, 임란에 모친을 모시고 속리산으로 피난갔다.
◦ 4월 14일부터 임난일기 쓰기 시작함.
◦ 7월 30일, 황령사에서 의병 창의군으로 결성함. 대장은 이봉(李逢), 검간은 좌막 겸 장서기였다. 군량미. 군기 조달 및 각 곳의 순찰사․의병진을 왕래하며 적토벌에 진력하였다.
39세(1593․선조26), 장남 기원(基遠․19세)과 차남 영원(榮遠․17세)을 도체찰사(류성룡) 진으로 보내어 표하병(標下兵)으로 종군하게 하였다.
42세(1596․선조29) 11월, 왜적이 재침할 기미가 보이자 왕과 대신들이 피난갈 궁리만 함에, 비분강개하여 월간(月澗) 이전(李㙉)과 같이 왕이 직접 적을 정벌해야 한다는 친정소(親征疏)를 올리었다. 허락하는 비답이 없자 12월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주도한 진영으로 가서 백의종사(白衣從事)하였다.
43세(1597․선조30․丁西) 2월, 도내 선비들에게 친정소를 상소하기를 청하는 통문(通文․검간 작성)을 내고, 예천향교로 제현이 집결하여 친정소문(親征疏文)을 닦음.(검간의 상소문이 채택됨). 상소하려고 3월에 상경하니 마침 별시문과의 공고가 나서 어떤 이가 과거도 보라 하니, “천리 길을 올라 온 뜻은 과거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하고, 끝내 과거를 보지 않으니 이 사실을 안 선비들은 다 검간을 의롭다고 하였다. 세 번의 상소가 다 시행되지 않자 눈물을 머금고 귀향하였다.
◦ 상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권길(權吉) 판관의 <진망사적(陣亡事蹟)>을 써서 비변사에 고하여 포상받게 함.(서울 체류 중)
◦ 아들 기원(基遠)과 영원(榮遠)을 화왕산 곽재우 창의진으로 보내어 종군케 함. ≪火旺倡義錄≫에 등재됨.
45세(1599․선조32), 천거로 희릉(禧陵) 참봉에 제수되었다.
◦ 청리에 우거 중인 화천(花川) 조즙(趙濈)의 집에서 내외족이 모여 화목을 강구하여 목인계(睦婣稧)의 근원이 됨.
46세(1600․선조33) 11월, 광흥창 부봉사가 됨. 난리 뒤의 장부 재정리, 서리의 농간 척결, 국고 손실을 엄히 막음.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조모(趙某)는 곧 오죽장(烏竹杖)이다. 어찌 단지 황죽(黃竹․일반죽)과 비길소냐.” 하니, 일시에 ‘烏竹杖’으로 불리었다. 공무에 강직. 정직하다는 평이 검간의 출세에는 도움이 되지 못함.
49세(1603․선조36), 광흥창 부봉사(정9품)로 공을 세워 군기시 주부(종6품)로 특진되었다.
◦ 가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됨.
◦ 12월, 호조좌랑(정6품)이 됨. 난리 뒤 옥사가 가장 많은 호남의 안결사(按決使)가 되어 만 여 건의 송사를 공평하게 처결하니, ‘공명강의지인(公明强毅之人)’으로 명성이 남.
51세(1605․선조38) 3월 20일, 증광문과에 급제함. 겸 춘추관 기주관(정5품)이 됨.
◦ 11월 대구판관이 됨. 성주(星州) 아전 덕웅의 비리를 척결하여 명판관의 명성은 얻었으나, 상관의 무마 청을 거절하여 끝내 파직당함. 거사비(去思碑)가 섰다.(뒤에 상론)
52세(1606․선조39), 향중의 제현과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함에 동주(洞主)로서 성력을 다하였다.
◦ 성산에다 고봉서당을 중건하여 제생의 공부처를 만듦.
◦ 향약(長川․城東․魯谷․丹丘)을 실시하여 향풍을 쇄신함.
53세(1607․선조40) 4월, 경주 교수 겸 제독관이 됨. 벼슬이 낮음에 개의치 않고 흥학육영에 힘씀. 옥산서원에서 강의하였다.(8월)
54세(1608․선조41) 9월, 해남현감에 제수되었다. 민폐 제거, 명륜당 중수, 제생에게 소학과 경서를 강의함.
55세(1609․광해군1) 6월, 두미법(斗米法)을 상정(詳定)하여 악습을 척결하고 관리의 비리를 근절시키니, 감사가 두미법 개정안에 발푼을 써서, 호남 전역에 실시하게 하였다.(뒤에 상론)
◦ 아들 진사 홍원(弘遠)이 별과 동당시에 장원하여 10월 회시에 응시하러 가던 중 직산 소사천에서 익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함. 유애비(愛碑遺)가 섬.
57세(1611․광해군3) 3월, 공홍도(公洪道) 도사에 제수되었다. 한 권세있는 신하가 상공(上貢)하는 약재를 방납(防納)하는데 품질이 아주 나빠 점검하여 퇴짜를 놓았다. 권신이 사감으로 온갖 모함을 하여 파직당함.
◦ 12월, 청도군수에 제배되었다. 이때는 정인홍의 북인이 전횡하던 시기라 검간이 늘 말직에 머무니, 당시 우의정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금 영남 선비 가운데 조모(趙某) 형제는 강개(慷慨)한 기상에 곧고 선량(善良)한 사람인데도 아직 산열(散列)에 버려두고 서록(敍錄)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여, 청도군수에 제배되었으나 6년 동안 임기를 채우게 함.
◦ 녹봉을 덜어 자계서원(紫溪書院)을 건립(1612)하여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 삼현을 봉안함.(뒤에 상론)
61세(1615․광해군7), 장천서당을 고봉으로 이건하고, 학규를 정하여 장자 기원(基遠)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함. 귀향함에 청덕비(淸德碑)가 섬(1617).
65세(1619․광해군11), 청리서당에서 월간․창석․우복 제현과 서애선생 문집을 교정하였다. 이해, 안동 임하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에 환향함.
68세(1622․광해군14) 7월 16일, 상주 선비 25인과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를 가졌다. 도남서원 동주(洞主)였음.
69세(1623․인조1) 5월, 김제군수가 되었다. 반정(反正) 초에 외직으로 밀렸던 관료가 거의 내직으로 전보되었으나 검간은 외직으로 남음. 이곳에서도 학문을 장려하고 선치함.
70세(1624․인조2) 2월, 이괄의 난에 공주로 대가를 호종하였다.
71세(1625․인조3), 토호들의 비리를 엄척하니 저들이 갖가지로 무고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사림(士林)에서는 검간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왕이 포상하였다.
72세(1626․인조4) 4월, 통례원 상례(종3품)로서 국휼(國恤)에, 명나라 조문사절을 법도에 맞게 대함에 저들이 탄복하였다.
◦ 10월, 내섬시정(正.정3품)에 제배됨.
◦ 장자 기원(基遠)에게 양진당(養眞堂) 창건의 감동(監董)을 명함.
73세(1628․인조5) 5월, 정묘호란에 강화도로 호종하였다.
◦ 9월, 봉상시정(奉常寺正․정3품 당상)에 제배됨.
74세(1628․인조6), 임기 만료로 귀향하였다.
◦ 양진당(養眞堂)이 준공됨.
76세(1630.인조8) 9월, 제종(諸宗)과 풍양에서 시조묘(始祖墓)를 개봉(改封)하고 비(碑)를 세웠다.
80세(1634․인조12), 자제들이 수직(壽職)을 청하려 하자 엄히 불허하였다.
82세(1636.인조14) 7월 21일, 서거하였다. 당월까지 매일 가묘에 배알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음.
1642년(인조20), 아들 형원(亨遠)의 귀(貴)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730년(영조6), 속수서원에 추향되었다.
1740년(영조16), ≪검간선생문집≫이 발간되었다.
2008년 3월 24일, 장천서원에 봉안되었다.
Ⅲ. 한국문화사적(韓國文化史的) 위상(位相)
1. 검간(黔澗)에 대한 제현(諸賢)의 평
1) 국가적 동량(棟樑)으로서 군자(君子)-李光庭 評
눌은(隱訥) 이광정(李光庭)은 <검간선생문집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검간선생은 순수하고도 의지가 강직(剛直)한 기(氣)를 받아나서 특출한 자질을 갖추어 재능(才)은 족히 세상을 다스릴 만하고, 도덕 (道)은 족히 풍속을 교화시킬 만하고, 충성(忠)은 족히 임금의 과오를 범안(犯顔) 하여 간(諫)할 만하며, 강직(强直)함은 족히 퇴패한 기강을 떨쳐 일으킬 만하였다. 그러나, 젊어서는 자신을 숨기었다가 늦게야 문과(文科)에 올라 군현(郡縣)의 수령으로 바빴으나 한산한 관아에서 가라앉고 억눌려 세상에서는 선생이 과연 어떠한 그릇인지, 재능은 과연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도록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았고, 옳다고 여겨주지 않아도 속 태우지 않았으며, 작은 벼슬이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경우에 따라 직분을 다하였다. 벼슬을 받아 취임하여 일을 볼 때와 집에서 한가롭게 지내거나 향리에서 처신할 때에도 그 자취는 겉과 속이 환하게 일관되고, 평탄하고 험함에도 한결같았으니, 또한 그의 대교(大較)를 추측할 수 있겠다.”(원문략)
요약하면, 검간(黔澗)은 순강한 기(氣)․재능(才)․도덕(道)․충성(忠)․강직(强)함을 고루 갖춘 국가적 동량재였으나 불운(不運)하여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고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검간(黔澗)은 본질적으로 대기(大器)였고, 선비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의 군자(君子)였음을 특기하였다.
2) 명예를 탐하지 않은 선비(不好名之人) - 鄭蘊 評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묘표(墓表)>에서, 검간(黔澗)이 공경(公卿)의 그릇임에도 끝내 하위(下位)에 머문 것은,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공의 명예를 좋아하지 않은 지나침 탓이었다”
라고 하였다. 이는 곧, 헛된 명예를 좇지 않은 강직한 탓도 그 이유 중의 하나란 뜻도 된다.
3) 임금을 보좌할 만한 신하(輔弼之臣) - 高仁繼 評
월봉(月峰) 고인계(高仁繼)는 <행적>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방정(方正)한 말과 강직한 기상(氣像)은 모두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다 하였고, 만약 그로 하여금 나랏일을 의논하고 계획할 논사(論師)의 반열(班列)이나 임금을 도와서 인도할 보도(輔導)의 임무를 맡겼더라면 국사(國事)를 왕에게 전의하고 진술하여 널리 도와서 바로잡음(匡正)의 효과를 어찌 작다고만 할 수 있으랴.”(원문략)
4) 정의롭고 굳게 지조를 지키는 선량한 선비(慷慨貞良之人)
- 李恒福 評
우의정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1611년 (광해군3), 검간(黔澗)이 권신(權臣)의 비리를 척결하다 파직된 사실을 알고 당시 정권을 잡은 대북의 처사를 비판하며 한 말이다.
“지금 영남의 선비 가운데 조모(趙某)형제는 강개한 기상에 곧고 선량한 사람인데 아직 산열(散列)에 버려두고 서록(敍錄)치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원문략)
이는 곧, 검간(黔澗)의 성품이 불의를 보고는 정의심이 북받쳐 슬퍼하고 한탄함과 곧고도 선량한 선비라 평한 것이니, 정의롭고 정고(貞固)하며, 선량(善良)한 선비를 크게 기용하지 않은 데 대하여 책임을 물은 것이다.
5) 오죽장(烏竹杖)으로 칭도된 선비 - 李貴 評
연평부원군 이귀(李貴)는 율곡의 제자이면서도 당색을 초월하여, 광흥창 부봉사인 검간(46세․1600,연보참조)의 청명직절(淸明直節)한 공무 집행을 보고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굳세고 단단한 오죽에 비하여,
“조모(趙某)는 곧 오죽장(烏竹杖)이다. 어찌 단지 황죽(篁竹)(篁竹․일반 대나무)에만 비하랴” (원문략)
라고 하였다. 이런 평은 다 공무상 상관의 비리조차 파헤친 결과가 되어, 검간의 출세에는 지장이 많았다.
6) 버려진 국가적 동량재(棟樑材) - 任叔英 評
소암(疏庵) 임숙영(任叔英)은 당대 직신(直臣)으로서 검간에게 드린 시, <정검간선생시(呈黔澗先生詩)>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十年淹滯屈高才 십년을 엄체하여 뛰어난 재능을 굽혔으나
惟有剛腸不小摧 오직 강직한 기질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네.
吏隱江湖空老去 미관(微官)으로 강호에서 헛되이 늙는데도
無人解惜棟樑材 동량재를 알아 애석해 하는 이는 없네.
이 시 한 수가 검간(黔澗)의 일생을 축약해 주었다고 하겠다. 국가적 동량재로서의 큰 그릇이었으나 시운(時運)을 잘못 만나 크게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검간(黔澗)은 본질적으로 대기(大器)였고, 선비의 최고 경지인 군자(君子)였다는 사실만은 당대 석덕(碩德)들도 다 같이 인정하였다.
2. 검간정신(黔澗精神)
검간정신은 ≪양진당≫(2007)에 발표한 졸고를 다소 보완하여 재정리함을 밝혀둔다.
1) 가풍(家風)으로 내린 숭조상문(崇祖尙門)․효우목인
(孝友睦婣)
(1) 숭조상문(崇祖尙門)
검간(黔澗)의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을 받든 숭조상문에의 정신은, 선천적이기도 하지만 조부 직장공의 사마온공의 가법(家法)과 부친 승지공의 효근지행(孝勤之行) 및 당대 예학의 대가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등의 영향에서 이룩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묘표>에서,
“선조를 받는 예절은 더욱 공경함을 다하여 제기(祭器) 하나에도 격식이 있어 넉넉함과 검소함의 중용(中庸)을 얻었고, 제사의식과 일어나고 엎드리는 일은 하나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의식을 따르니, 비록 세상에 예서(禮書)를 읽고 옛것(道)을 좋아한다 일컬어지는 집도 실천하는 실질에 있어서는 공(公)만은 못하였다.”(원문략)
라고 하였던 것이다. 검간(黔澗)의 조상숭배 정신과 가문을 받든 정신을 몇 사례를 살피기로 한다.
45세(1599) 8월에는, 양재(良才)에 있는 증조 춘천도호부사묘와 조비 숙인홍씨묘를 성묘하고, 절사(節祀)를 지냈다. 외조부모의 기일은 늙을 때까지 몸소 참사하였다.(이상 행장)
56세(1610),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의 외후손으로서 우암이 무후인 까닭에 외손들에게 글을 보내어 1년에 한번 모여 잔 드리는 의식을 행하기로 의정하여 영구히 시행하였다.(연보)
74세(1628) 이후는 숭조상문에 더욱 정성을 다 하였는데 양진당 가묘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던 날 밤이 늦도록 문밖에 부복하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연보 참조)
76세(1630) 9월, 종친들과 풍양에 모여 시조묘(始祖墓)를 개봉(改封)하였다. 한때는 공빈릉(恭嬪陵)과 시조묘가 한 등성이에 있어 평분을 당하였다가 공빈릉이 폐릉이 됨에 따라 상소하여 분형(墳形)을 갖추고 비를 세웠다.(연보) 특히, 검간은 운명하는 달까지 어떤 경우에도 새벽에 사당 알현을 폐한 적이 없으니, 선생의 존재 자체가 자손들에게는 숭조상문에의 거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효우(孝友)
검간(黔澗)의 효성은 이미 행적에서 살폈거니와 앞의 숭조상문의 정신 역시 그 근본은 효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생에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부모의 산소 밑에 있는 작은 시내의 이름을 따서 호를 ‘검간(黔澗)’으로 삼은 사실만으로도 선생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특히, 33세에 조부상, 34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5년간 여묘에서 행한 검간의 상제례나 효성은 후세에 미담으로 남을 만하였다.
우애(友愛) 역시 일일이 예거할 수 없다. 특히, 검간이 바로 밑의 아우 가규(可硅)에게 보인 우애는 사생을 초월할 정도였음을, 가규의 묘를 천장하고 지은 제문 <제비중문(祭棐仲文)>의 일부로써 그 증좌를 삼고자 한다.
“양당(兩堂)이 빈 지도 오래되었고, 동생 다섯이 잇달아 떠나서 떠돌며 엎어져도 외톨이라 의탁할 것이 없었다. 다행히도 아우 굉(宏)이 살아있기에 오늘에 이르도록 향화(香火)를 가지고 다니면서 봄․가을로 성묘를 다니고 있다.
무슨 말을 하랴, 그대의 널을 어루만지게 될 줄이야. 비록 유명이 다르긴 하나 정의(情意)는 오히려 통하리라. 실성통곡함에 그대도 응당 슬프고 가슴 아프리라. 혼령은 어둡지 않으니 전염병을 막고 음으로 도와서 자손들에게 영원히 경사가 이어지게 하시라. 내 죽어도 유감없으니 그대는 똑똑히 들어야 함이. 오, 애통하도다.”
(3) 목인(睦婣)
9족(고조․증조․조․부․본인․아들․손자․증손․현손)의 종족 화목을 도모하고 외척과의 화합을 도모하여 가풍으로 내린 사실은 앞의 행적에서 자세히 살피었다. <행장>에 의하면,
“두 형제와 두 누이가 먼저 죽어, 그들의 어린 것들을 무양(撫養)하되 자신이 낳은 자식과 똑같이 하였다. 식구를 거느림에는 화열(和悅)하고, 정제(整齊)하였으며, 종족(宗族)에게는 은의(恩義)와 화목(和睦)을 다하고, 붕우에게는 반드시 성심을 다 하였다.”라고 한 사실로도 검간의 목인정신은 짐작할 수 있다.
목인(睦婣)을 강구할 목적으로 검간이 45세(1599) 10월에 종족 화천(花川) 조즙(趙濈)이 우거한 청리에서 내외손과 모여 목인회를 가진 유풍은 후손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었다. 검간의 증손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에 이르러 목인계(睦婣稧)가 조직되었다. 입재(立齋) 50세(1687)에 내외형제의 자질 20여 인을 거느리고 목인계를 조직하여 8개 조항의 약조를 정한 뒤 종신토록 시행하니 승지 이복(李馥)이 <목인계서>를 닦았다. 8조목은 친척간의 돈목을 꾀하는데 목적이 있다. 선조의 사당에 시향(時享)을 드릴 때나 명절에 모임을 원칙으로 한다. 3년 동안 재물과 곡식을 모아 선대 묘소 보존비에 쓰고 잉여분은 저축한다. 계중 자제가 재능과 노력은 하는데도 가난하여 학업을 이루지 못할 경우는 특별히 보조한다. 계조약의 규정을 엄히 지킨다. 당일의 주식은 각자가 지참한다. 규례를 세 번 어기면 축출한다는 등이다.
목인계의 미풍양속은 후대도 이어져서 1759년(영조35)에는 후손들이 추원당(追遠堂․지방기념문화재 제141호)을 건립하였는데 입재(立齋)의 현손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는 재사강안약조서<齋舍講案約條序>에서,
“우리 종족의 파가 각각 나뉘어져 비록 원근과 친소는 다르나 선조께서 보시기엔 모두가 똑같은 자손이니, 진실로 친소는 없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감히 화목하지 않을손가. 우리 가문은 곧 대대로 벼슬한 고가(故家)이나 효재충신은 선조의 유풍(遺風)이라 비록 한 자제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혹시라도 이를 실추시킬까 두렵다.
무릇, 종족의 의리는 친애(親愛)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친애하는 도리는 친목을 닦는 수목(修睦)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수목하는 의리는 가르쳐 기르는 교양(敎養)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교양하는 법은 연구하고 학습하는 강학(講學)보다 더 큰 것이 없다.”(원문략)
라고 하였다. 이른바 돈목(敦睦)․목인(睦婣)도 가르쳐 알게 하지 않으면 영속될 수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하겠다. 그러기에, 입제(立齋)의 증손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喆)은 <추원당기>에서,
“추원(追遠)이란, 제사에 정성을 다하여 조상을 추모함이다. 우리 검간(黔澗) 선조께서는 고상한 품덕과 뛰어난 덕행이 울연히 당세의 본보기가 되어 끼치신 풍속과 교화의 남은 향기가 우리 후손들에게 혜택을 내리어, 우리 종손과 자손의 번창으로 하여금 마땅히 가법(家法)을 지키게 하니 지금도 크게 불의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다 우리 선조께서 쌓은 덕이 오래도록 미침인즉 후손에게 내림이 크다 하겠도다.”(원문략)
라고 하였다. 살핀 바를 요약하면, 검간(黔澗)의 숭조상문(崇祖尙門)과 효우목인(孝友睦婣)은 풍양조씨장천파의 가업(家業)과 가풍(家風)이 되어 오늘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2) 강의(剛毅)․관후(寬厚)함을 겸전한 성품
(1) 강의(剛毅)한 성품
강의(剛毅)란, 강직하고도 의지가 강하여 권력이나 금력에 굴하지 아니함을 일컫는 말이다. 동향의 벗이었던 월간(月澗) 이전(李㙉)은 <행적>에서,
“공의 타고난 품성은 강직하고, 의논(議論)은 강개(慷慨)하였다. 착함(善)을 좋아함이 마치 맛난 음식을 대하듯 하고 악함(惡)을 미워함이 마치 원수 대하듯 하였다. 벼슬에서는 충근(忠勤)을 다하고 일에 임하여서는 굽힘이 없었다. 친한 벗을 대함에는 성심으로써 하고, 이웃을 대함에는 은혜로써 하였다. 장수(長壽)하여도 욕스러움이 없고, 부유(富裕)하여도 베풀기에 능하였다.”(원문략)
라고 하였다. 공사(公私)에 엄정하여 공(公)에는 강개(慷慨)하였으나 사(私)에는 성심과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하였다라고 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도 <묘표>에서,
“공(公)의 품성은 지극히 강의(剛)하였고 제행(制行)은 구차스럽지 않았으며, 지닌 마음은 쇠(鐵) 같고 주장하는 의론은 줄(絃)같이 발랐다. 남의 착하지 못함을 보면 마치 자신이 더러워질 듯이 여기니, 향당에서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여 어질지 못한 이는 감히 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르지 못하였다.”(원문략)
라고 하였다. 하나같이 검간의 성품은 가의함과 관후함을 겸전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에, 관직에서 강의(剛毅)했던 몇 사례를 들기로 한다.
검간(黔澗)의 강의한 공무 집행(46세. 1600)에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선생을 ‘오죽장(烏竹杖)’으로 칭도한 일이나, 대구 판관시(51세․1605) 상관의 비호를 받는 비도덕적인 아전의 비행을 척결한 일, 56세(1610)에 아우 가규(可硅)와 더불어 기축옥사(1589․정여립의 난)를 논하려 상경하였다가 상소를 올리면 북인을 돕는 일이라 하자 즉각 하향하여 만 일, 57세(1611) 때는 방남에 부정한 권신(權臣)의 비리를 단호히 척결한 일, 73세(1626) 때는 대궐의 각 기관에서 차출해 간 내섬시 소속 백여 명의 종을 다 원대 복귀시킨 일 등은 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검간의 강의(剛毅) 한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 준 예라 하겠다.
(2) 관후(寬厚)한 성품
강의하면서도 관후한 성품은 전항에서 이미 제현의 말로 확인하였다. 이 항에서는 관후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검간의 행적에서 재차 발췌하여 정리하도록 한다.
◦벗들의 장난을 옳다고 여겨 선뜻 받아들임.
“젊었을 때 향교에서 제생과 기거할 때, 친구들이 공(公)을 시험해 보려고 고의로 새로 지은 솜두루마기를 가난하여 헐벗은 벗에게 내어 주었다. 공이 즐거워하며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22세 연보 참조)
◦도둑과의 약속을 지킨 의리
임란에 피난 중, 아는 이가 공에게 찾아와 굶주림을 호소하였다. 공이 쌀자루의 반을 그에게 주었으나 선뜻 가지 않고 저문 탓을 대어 같이 잤다. 밤중에 그 자가 칼을 빼들고 해치려 하는지라 공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의리로 타이르고 자루 채로 다 주었다. 그 자도 크게 부끄러워 통곡하며 돌아갔다. 공은 이 일을 입 밖에 낸 일이 없어 집안사람들도 그가 누구인지 끝내 몰랐다.(행장)
위의 두 예만으로도, 천성이 관후하고 자애롭지 않으면 범인으로서는 감히 행할 수 없는 덕행이라 일컬을 만하다.
3) 음덕(陰德)을 베푼 적선인(積善人)의 인애(仁愛)
앞 항의 관후함이 다 인애(仁愛)의 발로요, ‘부유하여도 베풀기에 하였다.’한 인물평이 다 인애(仁愛)함의 증거다. 월간(月澗) 이전(李㙉)은 <행적>에서,
“집에서는 효우(孝友)하고, 남을 대함에도 충후(忠厚) 하였으며, 가엾이 여겨 아파하는 어진 마음 측달지인(惻怛之仁)은 궁한 이를 구제함을 최급선무로 여기었고, 그가 가진 바를 헤아려 가난한 이를 구제하니 원근에서 삶에 도움을 입은 이가 심히 많았다.”(원문략)
라고 하였다. 이는 동시대에 같이 살며 절친했던 벗의 증언이다. 손서(孫壻) 호옹(湖翁) 조정융(曺挺融)도,
“궁한 이를 가엾게 여겨 구제하는 어짊(仁)은 친하고 덜 친하고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았으며, 우환과 병환에는 더욱 있는 힘을 다하였다. 힘을 다하는 의리는 몹시 가난한 사람이 상을 당하였을 때가 가장 급하다고 여겨 사족(士族)으로서 선생이 사는 경내에 피난 온 사람은 거의 베푼 은혜를 입음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아 어질고 의롭다는 명성(仁聲義聞)이 오늘까지도 쇠하지 않고 있다.”(원문략)
4) 위국일념(爲國一念)의 충분의기(忠憤義氣)
검간(黔澗)의 위국일념은 벼슬길에서도 향당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해남현감이 되어 두미법(斗米法)을 상정(詳定․1609)하여 감사가 전 호남에 실시하게 한 선정(善政), 임란(1592)에 검간은 창의군 좌막 및 장서기로 의병활동을 하고, 아우 가규(可硅)는 충보군(忠報軍) 소모관, 아들 기원(基遠)과 영원(榮遠)은 도체찰사 진영의 표하병(標下兵)으로, 온 집안이 구국대열에 솔선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1597)을 전후하여 친정소(親征疏)를 세 번이나 올린 일, 화왕산 곽재우 의병장의 진영으로 두 아들을 보낸 일, 이시애의 난(1624)에는 일흔 살의 고령으로 왕을 호종한 일, 정묘호란(1627)에는 강화도로 어가를 호종한 일 등은 나라를 위한 일에는 어떤 자리에 처하여서도 신도(臣道)를 다하려 한 검간의 충분의기가 식을 줄 몰랐음을 알게 하는 증거들이다.
이제, 충의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노와 의기(忠憤義氣)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친정소(親征疏)의 일부를 보기로 하거니와 편의상 왕이 친히 왜적의 징벌에 나서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동참을 바라 도내 선비에게 보낸 통문부터 살피기로 한다.
<통도내오당문(通道內吾黨文)>(1597․丁酉 2월)
“아, 종묘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정도(正道)며, 몸소 갑주로 무장하는 것은 원수를 갚는 대의(大義)인 것이다. 이제 성가(聖駕)가 영호남의 요충지에 진주하여 안으로는 병기를 갖추고 밖으로는 기선(機先)을 제압하여 수시로 싸우기를 독려한다면 위령(靈威)이 임하는 곳에 사기가 백배나 솟아 앞뒤에 옹위하여 반드시 대승할 것이다. 그런데 묘당(廟堂)에서 하는 일을 살펴보면 아직도 확정된 생각이 없고 구차히 옛일을 답습하여 임진년의 패전한 자취를 또 밟으려 하니, 이를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 유림(儒林)의 수치인 것이다.”(원문략)
국난(國難)에 신명을 바쳐 구국함이 선비의 도리라고 하였다. 다음은 제3차의 친정소를 차례로 살피기로 한다.
(1) 1596년 11월, 친정소(親征疏)
“사직(社稷)이 이곳에 있으니 전하의 사직이요, 종묘(宗廟)가 이 곳에 있으니 전하의 종묘이며, 2백년 이래 전해 온 전장문물(典章文物)이 또한 전하에게 매이지 않은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한 번 버리고 간다면 종묘․사직이 누구를 의지하고, 전장문물이 어디에 의지하며, 억조창생이 누구를 믿겠사옵니까. 한 번 버린 것도 실책이온데 두 번이나 그르칠 수 있겠사옵니까! 설령 도성을 지키면 죽고 버리면 산다 하더라도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중략)
전하께서 만일 온 나라 사람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후퇴하는 것으로써 양책(良策)을 삼는다면 종사(宗社)도 그만이요 국가도 그만이니, 신등(臣等)은 오직 고향 사람과 함께 발을 싸매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나무를 안고 죽어, 살아서는 적의 손에 더럽히지 않고, 죽어서는 충의(忠義)의 귀신이 되는 것이 기원이오니, 또 어찌 다른 것을 계교하겠나이까. 말이 이에 이르매, 오장이 타는 듯하며 기가 질려 제재(制裁)할 바를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오직 전하께서 유의하시옵소서.”(원문략)
이른바,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담은 충간의담(忠肝義膽)의 상소문이라 할 만하다. 이 상소는 월간(月澗) 이전(李㙉)과 함께 올린 상소로, 위언(危言)을 서슴지 않은 직언(直言)이요 쟁신(諍臣)의 충분의기(忠憤義氣) 그 자체라 이를 만하다. 이 상소를 올려도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비분강개하여 시 두 수를 지었는데, 그 첫째 수, <음시견회(吟詩遣懷)> 시에서,
親討元非懷廟謨 몸소 토벌함이 원래 묘모를 깨드림 아닌데
聖君猶復罪還都 성군(聖君)은 오히려 또 환도함을 탓하도다.
區區獻計歸無用 구구히 드린 계책 무용지물로 돌아가니
我亦乾坤一腐儒 나 또한 천지간에 한 썩은 선비로세.
라고 자탄하였다. 좋은 계책이 무용지물로 돌아갔으니 그 계책을 낸 상소자는 한낱 천지간의 썩은 선비에 불과하다 하였다. 감히 왕의 처사를 바로 그르다 아니 하였으나 여전히 사생을 불고한 직언임에 틀림없다.
(2) 1597년 丁酉 3월, 친정재소(親征再疏)
“임금께서 몸소 임하시고 사졸들이 모두 힘쓰면 크게는 흉적을 격파할 것이며 작게는 적병을 물리칠 것이요, 설령 불행하여 패전한다 하더라도 군신 상하가 한 마음으로 싸워 종사를 지키는 데에 욕됨이 없으면, 그것이 도성을 버리고 백성을 등지며 변방에서 구차히 보전하는 것보다는 만 배나 나을 것이옵니다. 하물며, 멀리 천(遷)하는 즈음에 이외의 변란이 수종(隨從)의 열(列)에서 일어난다면 중로(中路)의 고단한 행차가 또한 우려할 점이 없을 것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옵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이 말로써 전하에게 진달할 자가 있을지 신등은 기필하지 못하겠사옵나이다. 알고서 말하지 않으면 조정의 신하들이 전하를 버리는 것이요,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께서 스스로 나라를 버리는 것이옵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임금께서 권장하여 부모형제가 왜적에게 살해된 원한이 있는 자는 따로 한 부대를 편성하여 복수하게 하였다 하는데 이는 원한을 품은 자들이 적과 과감히 싸워 물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 전하께서 물러가고 도리어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신하에게 책임지우려 하니 아, 또한 어려운 일이옵니다.”(원문략)
설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사생불고의 직언이다. 왕(王)이 왕노릇 못하면서 신하는 신하노릇하기를 강요당한, 임란의 국치(國恥)는 초한 것이란 자괴심마저 들게 하는 상소문이다. 검간(黔澗)의 상소문이 제현의 상소문 가운데서 채택된 연유도 알 만하다 할 수 있겠다.
(3) 1597년 丁酉 3월 이후, 친정삼소(親征三疏)
“지금 적병이 벌써 변경에 상륙하여 죽을 날이 임박하였으므로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을 올려 나라에 보답하겠사옵니다. 아, 친정(親征) 두 자는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만구일담(萬口一談)으로 당연하다 하온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어렵게 여겨 소장(疏章)이 앞뒤의 연달았으나 아직도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니 신등은 그윽히 의혹하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분발하지 못하고 구차히 편안할 것을 취한다고 논한다면 이는 부당한 일이요, 전하께서 후뢰(後賴)하는 데만 급급하고 복수에는 범연(泛然)하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또한 불가한 일이니,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바를 추측할 수 없사옵니다.”(원문략)
일국의 군왕이 한 백성의 의지만도 못한 현실, 임진왜란은 총체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적을 부른 격이 되었음을 여실히 알게 하였다.
이 세 편의 상소문은, 하나같이 역사성․정치성․사회성․국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고, 유교사상의 실효성으로서 선비정신은 이 나라 보존의 원동력이었음도 알게 하였다. 나아가, 검간(黔澗)의 강의(剛毅)․충분(忠奮)․의기(義氣)가 글자마다 넘쳐나는 세상 소문은 선생의 문장력이 당대에 얼마나 높았던가를 여실히 보여 준 증거라고도 하겠다.
5) 교육자로서의 존현(尊賢)․양사(養士)에의 성심(誠心)
검간(黔澗)이 벼슬길에서 존현(尊賢)․육영(育英)의 실효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낸 경우는 청도군수(재임1611~1617) 재임기라 할 수 있겠다. 청도가 낳은 효절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손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탁영의 조카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효행과 절의를 숭상하여 녹봉을 덜고 손수 감동(監董)하여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창건하여 3현을 봉안한 일은 특기할만하다. 또한 향리에서는 1606년, 도남서원(道南書院) 창건시 우복(愚伏)․창석(蒼石)등 제현의 추대로 동주(同住)가 되어 성력을 다하였으며, 1615년 이후 부터는 장천의 고봉서당을 중건하여 문중에서 운영함으로써 조선조 후기까지 검간의 흥학육영 정신은 계승되었다. 특히, 검간은 예학에 밝아 72세(1626) 때는 통례원 상례(종3품)로서 국휼(國恤)에 명나라 사절단의 조문에 예법대로 행하여 저들이 감복하였으며, 향당에서는 예가(禮家)로서 높은 위상을 아는 이가 다 칭송하였다. 검간의 이같은 정신 또한 가풍(家風)으로 내려졌다.
6) 시문(詩文)에 드러난 청경고고(淸勁高古)한 정인군자
(正人君子)
검간(黔澗)의 유고(遺稿)가 거의 회진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후손이,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문집의 서문을 받으려고 유고를 보내었다가 미수가의 화재로 다 잃었던 것이다. 실로 검간의 옥고(玉稿)는 거의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손들의 성력으로 재수집한 시문으로서도 봉황의 깃털을 주운 경우보다야 훨씬 낫다 하겠다. 본 항에서는 선배 제현의 검간문학 평으로써 필자의 생각을 대신하도록 한다. 먼저, 손서 호옹(湖翁) 조정융(曺挺融)의 평(墓誌), 소재)부터 살피기로 한다.
◦ 서사경절(書辭警絶)․시격경고(詩格勁高)
“그의 문장은 정밀하고도 오묘(奧妙)하며, 강의(剛毅)하고도 중후(重厚)하여, 정수(精髓)만 있고 군더더기가 없다. 정우복(鄭愚伏)은 그의 서사(書辭)가 경절(警絶)함에 감탄하였고 오선자(吾先子)께서는 그의 시격(詩格)이 굳세고도 고상함에 감복하였다.”(원문략)
◦ 색미구절(色味俱絶)․시격우고(詩格尤高)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묘표(墓表)>에서 아래와 같이 검간의 문장을 평하였다.
“그의 문장은 정밀하고도 오묘(奧妙)하며 강의하고도 중후(重厚))하여 정수(精髓)만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 겉에 드러난 풍채로서의 색(色․겉)과 속에 감춰진 뜻으로서의 미(味․속)를 절묘하게 다 갖추어 일당백이었고, 시의 격조(詩格)는 더욱 높아서 지을 때마다 반드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원문략)
동계의 평은 호옹의 평과 대동소이한데도 특히 검간의 문장이 겉과 속이 절묘하게 조화된 것을 검간의 성품이 그대로 문장에 반영된 결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눌은(訥隱) 이광정(李珖庭)은 ≪검간선생문집서≫에서, 자신의 생각을 동계(桐溪)가 다 말하였다 하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 청경고고(淸勁高古)한 정인군자(正人君子)
“창연한 고색과 온아한 문채와 옥석(玉石)이 부딪치듯 하는 맑은 성율이 오히려 청렴하고 강직함(淸勁)과 고상하고도 예스러움(高古)의 고고한 운치(餘風)를 상상하게 한다. 진실로, 그 성정(性情)의 바른 데서 흘러나와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말이 되었음을 믿을 수 있도다. 한스러운 일은, 원고가 유실되어 다 전하지 못함이다.”(원문략)
눌은(訥隱)은, 호옹(湖翁)․동계(桐溪)의 말을 종합 정리하여 검간(黔澗)의 문장을 평가하되, 그의 청렴하고도 강직(淸勁)하며 고상하고도 예스러움(高古)은 검간의 성정이 바른 데서 저절로 유출된 것이기에, 글을 통하여 검간의 인품이 정인군자(正人君子)였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3. 양진당(養眞堂.보물 제1568호)의 존재 의의
1) 양진(養眞)의 의미
‘기를 양(養)’ 자의 의미 속에는, 보살펴 양육함. 초목을 가꾸거나 인재를 배양함․품성을 기름․인격을 닦음․성실히 지킴․향상시킴 등의 뜻이 내포되었다.
‘참진(眞)’자의 의미 속에는, 정성(精)․순박함(淳)․진실함(眞實)․본성(本性)․자연지도(自然之道)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그러기에, 양진(養眞)이란 사전적 의미는, ‘타고난 성품을 기름’ 또는 ‘본성을 수양함’ 등으로 나타나거니와 가은(可隱) 조학수(趙學洙)는 <養眞堂 重修記(양진당 중수기)>(1808)에서,
“대개, 외물(外物)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나의 본성(本性)을 기름이란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곧, ‘양오진(養吾眞) 곧, 나의 타고난 참된 성품을 기름’ 이란 뜻으로 집약된다. 이는 바로, ‘마음을 선한 곳으로 집중하여 잡념을 없앰’의 ‘주일무적(主一無適)’과 ‘공경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함’의 ‘경이직내(敬而直內)’함을 일생의 수행 덕목으로 삼았던 검간(黔澗)의 경사상(敬思想)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검간의 경사상(敬思想)을 단적으로 보여 준 <수주부(數珠賦)>의 처음과 끝의 몇 구절을 소개하여 음미하도록 한다.
曰余一心難禦 나의 한 마음 지키기 어려워
十年求學 10년을 배움의 길 찾았도다.
靜思存義 조용할 때는 존양(存養)함을 생각하고
動必窮格 움직일 때는 반드시 궁격(窮格)하였도다.
(중략)
操之有要 마음 지니는 요결은
敬爲之則 공경(敬)함이 법칙이로다.
勿貳以二 이(二)로써 이(貳)를 하지 말며
勿參以三 삼(三)으로써 삼(參)을 하지 말지어다.
惟心惟一 마음은 오직 하나이거니
萬變是鑑 만 가지 변화도 이로써 살피도다.
첨기할 사항은, 검간(黔澗)이 자연지도(自然之道)에 순응하고 잘 지킴(養眞)으로써 선생은, “기품이 완전하고 골격이 청수하며, 젊어서부터 음식을 배부르게 하지 않았고, 육십 이전에도 오직 국․장․과핵(果核)만을 드셨다. 모진 겨울에도 얇은 옷, 홑옷만을 입으니 몸이 더욱 경쾌하고 건강하셨다. 80세에도 지팡이를 짚지 않았으며 동산이나 언덕에 산책을 하여도 종일토록 싫어하지 않았고, 말을 타고 원행을 하여도 괴로움을 몰랐다. 촛불 밑에서 가는 글씨를 써도 필력이 단정하고 경건하여 젊을 때와 다름이 없어 사람들이 지상선(地上仙)이라 일컬었다.” 할 정도였다. 양생(養生)이 곧 ‘양오진(養吾眞)’에서 결과된 것임도 확인할 수 있다. 검간정신(黔澗精神)은 곧 양진사상(養眞思想)의 결실(結實)이라 할 수 있다.
2) 양진당(養眞堂) 건립목적 및 창건자(創建者). 감동자
(監董者)
양진당(보물1568호)은 국가지정 문화재 2023점(국보313점․보물1710점, 2013년 5월 현재) 중의 하나요, 상주의 국가지정 보물 17점 중의 하나인데, 이밖에도 검간가(黔澗家)에는 ≪조정임란기록≫(보물 제1003호)과 ≪조정종손가 소장문적≫(보물 제1004호) 등 두 점이 더 있다.
본 고는 가은 조학수가 찬한, <양진당 중수기>(1808)와 <양진당중수상량문>(1807)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문과 번역문은 ≪양진당≫(2007)에 수록되었음을 밝혀 둔다.
(1) 건립 목적
대종가(大宗家)의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명예를 받드는 숭조상문(崇祖尙門)에의 봉선공간(奉先空間)이요, 백대지천(百代至親)의 목인공간(睦婣空間)이며, 독서하고 정신의 원기 보양하는 독서이양(讀書頤養)의 교육공간을 마련하는 데에 건립의 목적이 있었다.
(2) 창건자(創建者)와 감동자(監董者)
양진당의 창건자는 검간(黔澗) 조정(趙靖)이고, 감독하고 통솔한 감동자는 초은(樵隱) 조기원(趙基遠)이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검간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동량재로 양진당 창건에 주자(朱子)의 가례도식(家禮圖式)을 따랐으며, 초은은 검간의 장자로 황간현감에 이른 선비요, 수암(修巖)이 신뢰하여 존중하였으며, 매사에 규모있고 엄정하며 건축에도 조예가 깊은 국량(局量)이 큰 분이었다.
임란 7년을 겪고 난 뒤 집이 황폐화되어, 검간(黔澗)이 양진당(養眞堂) 터를 손수 가려 닦고 건축의 감동은 장자에게 명하여 맡게 하였다. 초은(樵隱)은 부친이 지시한 가례도식(家禮圖式)의 제도를 따르되 구상함이 커서, 실용을 위주로 하고 화려함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균형이 잘 잡힌 균제미(均齊美)가 있고 방정(方正)한 규모에서 질서나 조리가 선 정정(井井)함이 생기었다.
양진당(養眞堂)의 가묘(家廟)는 1626년(인조4)에 준공하였고, 양진당의 모든 건물은 1628년에 준공되었다. 현재 양진당 창건 연대는 가묘 준공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3) 양진당(養眞堂)의 기능(봉선․목인․교육공간)
(1) 봉선공간(奉先空間)
양진당의, 선조를 제사하는 봉선공간(奉先空間)은 가묘(家廟) 다. 양진당 창건에서 가묘를 가장 먼저 준공(1626)한 것도, 검간(黔澗)의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명예를 길이 받들려는 효심(孝心)의 발로였다고 하겠다. 가묘를 건립하고 신주를 모시던 날 일흔이 넘은 고령임에도 검간은 문밖에 부복하여 밤이 깊도록 추모하여 자제들이 선생의 건강을 염려하니, “선조의 신주를 새로 받들고 어찌 문득 자리를 떠나 스스로 편안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양진당에 모이는 후손이면 또 어찌 이 유훈이 떠오르지 않으랴.
(2) 목인공간(睦婣空間)
양진당이 9족(고조․증조․조․부․본인․아들․손자․증손․현손)과 그 외척과의 화목을 다지는 목인공간의 기능을 수행한 것도 검간의 목인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검간 45세(1599) 10월에, 일족으로서 청리에 우거해 있던 화천(花川) 조즙(趙濈)의 집에서, 내외족이 모여 화목을 다진 이래로 후손들은 양진당을 구심점으로 하여 목인정신을 이어갔다. 검간의 증손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에 이르러서는 목인계(睦婣稧)가 결성(1687)되어 후대에까지 가풍(家風)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를 기준으로 하면 백대를 내려도 다같은 손자라는 목인정신은 현재도 풍양조씨 장천파의 전통정신으로 계승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풍양조씨연수원 설립 목적도 목인정신에 그 뿌리가 있다 하겠다.
(3) 교육공간(敎育空間)
양진당(養眞堂)이 교육공간으로써의 기능을 하게 된 것도 창건의 목적에 둔 것이었다 하겠다. 5가(五架) 10영(十槛)의 양진당을 완성하고, 집 뒤로는 대나무․삼나무․홰나무 등의 수목을 가꾸고 정원에는 화초를 심어 경관이 뛰어난데 만권 서적을 비치하였다. 이는, 독서하고 학문할 도서관의 구실과 정신의 원기를 보양하고 덕을 닦는 공간이 되게 한 것으로 교육의 공간이 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검간(黔澗)의 흥학양사(興學養士)를 위정의 요체로 삼았던 교양. 교육정신이 창건초부터 의도적으로 이어지게 하였고, 만년에는 선생 스스로 운명하는 날까지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으며 선현의 교훈이 될 만한 말은 늘 책상머리에 적어두고 자성(自省)의 거울로 삼았으니, 이는 곧 교육의 힘이 큼을 선생이 몸소 보인 것이라 하겠다.
후손들이, 추원당을 건립할 때도, 목인계를 결성할 때에도 검간(黔澗)의 교육정신은 맥맥히 이어졌고 이 정신은 일제하의 험난한 시기에도 민족혼 고취의 높은 이상으로 승화되었다.
4) 양진당(養眞堂)의 문화적 가치
(1) 4백년을 지켜 온 검간(黔澗)의 정신문화
양진당(養眞堂)은 검간(黔澗)이 후손에게 물려준 봉선(奉先)․목인(睦婣)․교육(敎育)의 공간이다. 이 양진당은, 앞에서 살핀바와 같이 ‘검간정신(黔澗精神)’이 맥맥히 살아 숨쉬는 정신문화의 산실이다. 본 항에서는 검간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검간정신문화의 산실이 된 양진당을 어떻게 보전해 왔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먼저, 가은 조학수가 찬한 <양진당중수기>의 한 대목을 보도록 한다.
“지난번에 종제(宗弟) 중진(仲鎭)군이 병상에 있으면서도 오직 옛집을 중수하여 부탁함이 간절하니 일문의 여러 부로(父老)들이 자신의 걱정거리로 여기고 집지을 범의를 정하였으며, 재력인즉 약간의 재물을 종가에서 내었다. 이를 책임 맡은 사람이 해마다 보태어 늘이기를 갑인년(1794․정조8)으로부터 14년이 지난 정묘년(1807․순조7) 봄까지 하였다.
먼저 가묘(家廟)를 중수한 뒤 그 해 가을에 재물을 모으고 장인(匠人)을 모집하여 몸채 및 곁채의 들보와 마룻대 문설주와 장연(棖椽)․쇠연(榱椽)의 서까래와 난간과 처마 사이에 새것으로 많이 갈았으나 규모와 제도는 옛 관습을 그대로 따랐다.
이듬해 무진년(1808․순조8) 여름 4월에 이르러 침실․거실 등의 일이 먼저 끝난 까닭에 가묘에 일의 성취를 고하고, 이튿날 임오일에 택신(宅神)을 제사한 뒤 입주하였다.
양진당인 즉 차례로 일을 시작하여 그 제도를 조금 바꾸어서 네 모서리의 서까래를 들어 올리고 들보를 겹으로 하여 마루를 넓히니 전에 비하면 더욱 막힘없이 통하고 아주 크게 넓어졌다. 대개, 이는 종족의 화목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원문략)
중수기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첫째, 양진당 중수를 당부하고 중수비의 밑 재물을 낸 사람은 종손 악연(岳然)이다. 종손이 병으로 47세로 죽자, 후손들이 자신의 일로 여겨 1807년 봄까지 14년간을 재물을 늘렸다.
둘째, 1807년 봄부터 가며 중수, 가을에 재물을 모아 전국에서 장인(匠人)을 모집하여 몸채․곁채 등을 보수하였으나 규모와 제도는 예대로 하였다.
셋째, 1808년 4월에 침실. 거실 등을 중수하고 가묘에 고하였으며 택신을 제사하고 입주하였다. 양진당의 중수에는 종족의 화목장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 제도를 조금 바꾸어 크게 넓히었다.
라고 할 수 있다. 검간의 정신문화가 스며있는 양진당 중수에 후손들이 보여 준 성력이나, 검간정신을 그대로 잇고자한 전통의식 등이 두드러짐을 알 수가 있다. 특히, 규모와 제도를 가급적이면 옛 관습대로 보전하였기에 오늘날 양진당이 건축의 보물이 된 것임은 특기할 만하다 하겠다. 이같은 성심은, <양진당중수상량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뛰어난 장인(匠人)을 명하여 솜씨가 뛰어난 양공(良工)을 모으니 남쪽에서 북쪽에서 오도다. 옛 제도대로 함을 지켜 새로 깎되 훼손된 데마다 보수하도다.”(원문략)
선조의 정신문화가 깃든 문화재를 보존하는데 후손들이 보여준 전통의식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문화재 지정 및 보수 사항을 간략히 요약한다.
1975년 12월 30일, 건축양식과 기법의 탁월함이 전통가옥 자료로 인정되어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됨.
1979년, 문화공보부로부터 제2차 문화재 보수 3개년 계획에 따라, 80년에 해체 보수하도록 요청하여 승인됨.
1980년 2월 4일, 사업지침 시달됨.
1980년 5월 29일, 상주군과 문화재건설업체인 새한건축설계연구소와 설계용역 체결함.
1980년 7월 12일, 양진당 건물이 목조건물이므로 학술조사를 통하여 명확한 고증을 거친 뒤 복원하도록 설계기간을 연장함.
1980년 11월 21일, 상주군과 양진당 보수에 대한 학술조사를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함.
1980년 12월 23일,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학술조사 시행을 수락함.
12월 29일, 실측조사 착수함.
12월 30일, 해체공사 착수함.
1981년 7월 31일, 해체공사는 완료함.(공사비 내용은, ≪양진 당≫(2007)에 자세히 수록됨)
1982년 9월 26일, 양진당 중건기념을 개최함. 양진당 중건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조원연(趙元衍), 양진당중건비찬은 조남철 (趙南轍)임.
2005년 7월 10일, 보물 제 1568호로 승격 지정됨.
검간(黔澗)이 양진당(養眞堂)을 창건(1626)한 이래 380년을 후손들이 지켜, 지방문화재(제85호)로부터 국가지정 보물(제1568호)로 지정받을 때까지의 성심은 놀랍다 하겠다. 작자지심(作者之心)을 잘 지킨 후손의 성심도 대단하여, 양진당 중건에 참여하였던 실측조사단의 지도위원 신영훈(申榮勳)이 지적한 창건 당시의 장인에 대한 견해를 요약하여 첨기한다.
‘양진당(養眞堂) 창건시의 대장인(大將印)은,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조성할 때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였을 때와 같이 백제의 옛 땅에서 장인의 솜씨를 익힌 대장인을 초빙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 견해는 비록 추측이나, 창건자 검간(黔澗)이나 감동자 초은(樵隱)의 사업 안목이나 규모가 얼마나 높고 뛰어났던가를 알게 한다. 특히, 초은은 황간현감이었던 관계로 백제 땅의 장인이 수준 높음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모든 일의 규모와 제도, 문화적 위상은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의 기국(器局) 여하에 좌우되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견해라 하겠다. 검간의 정신문화가 지켜짐도 우연은 아니라 하겠다.
(2)「군자유(君子儒)가 되라」유훈(遺訓)한 교육장
양진당(養眞堂)이 창건 당시부터 교육적 기능을 담당한 것은 앞에서도 살피었다. 검간(黔澗)의 자손 교육은 몸소 행함을 보임이었다고 할 만하다. 4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51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것은 벼슬에 연연하여서가 아니라 가성(家聲)을 실추시키지 않으려는 사명감에서였다 할 수 있다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74세(1628) 이후는 양진당에 기거하며, 운명하는 날까지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고, 자손을 훈계할 때면 반드시 사람된 뒤에 학문하라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교훈하였다.
“차라리 죽는 날까지 독서를 아니할지언정 하루라도 소인(小人)의 말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을 집어내어 자서(子壻)들을 경계하되, 무릇 사람이 입지(立志)함에는 응당 이같아야한다 하였다”
오로지, 선비의 입지(立志)는 군자유(君子儒)가 됨에 두어야 함을 강조한 훈계라 하겠다. 즉, “너는 군자의 선비가 되고 소인의 선비가 되지 말라.”한, 공자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군자유(君子儒)가 되라 이르신 검간(黔澗)의 유훈은 자손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양진당이 목인계(睦婣稧)․강학계(講學稧)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일제하의 민족혼 고취의 신교육장으로, 현재의 풍양조씨연수원으로 그 유훈은 산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3) 민족혼(民族魂) 고취의 산실(産室)
검간정신(黔澗精神)의 교육성심은 대대로 이어져 일제하의 국난기에도 민족혼 고취의 애국심으로 발양되었다. 검간 후손의 지사(志士)들이 사립풍창학교(私立豐昌學校) 설립의 목적을, “男子의 須要 處世上智識機能을 授으로써 目的”이라 하여, 남자에게 곡 필요한 처세상의 지식과 기능을 전수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표면적인 설립 목적은 처세상 필요한 신교육 전수에 있다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신교육을 통한 민족혼 고취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2월 26일, 사립풍창학교 설립인가서를 도청에 낸 선각자는 전 문중을 대표한 교주 장례원전사보(掌禮院典祀) 조남호(趙南琥. 1867~1934)와 교장 대사간(大司諫) 조남식(趙南軾․1844~1920) 이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물적․인적 자원의 확보는 물론 운영 세목까지 완벽하게 갖추었으나 일제는 끝내 학교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비록 사립풍창학교를 개교시키지는 못하였으나, 한일합병의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8.22.)를 만회하려 했던 항일․우국의 정신은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이 적지는 않다 하겠다. 학교 이름 ‘豐昌’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어의대로 하면 ‘넉넉함’, ‘창성함’등이나 속뜻을 보면, ‘풍양조씨가(豐壤趙氏家)에서 앞장서 창도(唱導. 외쳐 인도함)함’이란 의미심장함이 있다. 설립인가서를 낸 교주 조남호의 이력서 작성 경우만 보더라도 저들의 연호를 쓰지 않고 ‘開國四百二十年’등으로 조선 개국을 기준으로 한 연대를 썼고, 장례원 전사보에 서임(敍任)된 것은 ‘隆熙四年七月十三日’ 곧 대한제국의 연호로 1910년 7월 23일이요, 의원면직한 것은 ‘同年八月二十八日’이니, 경술국치(1910.8.22.)를 당한 지 엿새만이다. 학교를 설립하지는 못하였으나 검간정신을 이어 자손으로서의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한 숭조상문(崇祖尙門)에서 위선념(爲先念)과 민족혼을 고취하려 했던 위국념(爲國念)만은 오늘도 살아있는 정신이 되었다 하겠다.
다음은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에 대하여 살피기로 한다.
1920년,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1877~1934)이 신문명에의 자각을 돕기 위하여 낙운사숙(洛雲私塾)을 개설하였다. 삼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민족적 자각에는 새 기운을 불러 넣는 계기가 되어, 처음은 낙동․중동면을 비롯하여 선산․의성 등지에서 모인 50명 내외의 학생을 교육하였지만 학생 수가 급증하자 1921년에는 양진당(養眞堂)으로 학교를 옮기고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로 개칭하였다. 이 이름 역시, 어의대로 하면 ‘아침이 밝다’이지만, 속뜻에는 ‘조선의 개명’을 희구하는 바람이 함축된 것임도 알 수 있다.
학생 2백여 명을 갑․을․병 3개 반으로 편승하여 신교육을 통한 민족적 자각을 꾀하고 나아가 민족혼 고취의 선두에서 인재를 양성하다가 1924년 5월 1일, 낙동초등학교가 개교함에 따라 문을 닫았다.
특기할 사항은 설립자가 우국지사였을 뿐 아니라 강습소 운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낙재(樂齋) 조태연(趙台衍․1895~1965)은 항일독립 유공자며, 강사였던 백담(白潭) 조상연(趙相衍․1897~1965) 역시 민족정신이 투철한 지사였다. 특히 목포인(木浦人) 강사 김영현(金英炫)은 삼일운동 당시 목포․대구형무소에서 장기간 복역한 항일지사였다.
검간정신(黔澗精神)은 3백년을 내리며 자손들의 의지처가 되고 활력소가 되어, 자손을 흥기시키고 백성으로서 떳떳한 인간적 가치를 깨우쳐 왔다 하겠다.
(4) 풍양인(豐壤人)의 정신 함양장 풍양조씨연수원
(豐壤趙氏硏修院)
① 개원 목적
숭조상문(崇祖尙門)하고 효우목인(孝友睦婣)하며 인애충의(仁愛忠義)하고 존현양사함의 문풍(門風)을 진작시킨 검간정신(黔澗精神)을 이어,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창출하여 만대의 미래를 열어갈 후손들에게 풍양인(豐壤人)의 정신 함양장(涵養場)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다.
② 개원일 및 장소
1984년 7월 26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소재 검간종파(黔澗宗派) 종택 양진당(養眞堂․보물제1568호)에서 개원하였다.
③ 개원자 및 연수 대상
처음은 풍양조씨검간공파종회(豐壤趙氏黔澗公派宗會)의 발의로 연수원이 태동되었으나, 현재는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에서 운영한다. 개원의 목적에 부합하는 연수를 위하여 1984년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대학생을 대상으로 연수하였으나, 참가 범위 역시 대학생, 중고생, 일반 청장년, 부녀층으로 확대되었다.
④ 연수원 연혁
◦1984년 1월 16일, 풍양조씨 장천파 종택인 양진당(養眞堂․보물 제1568호)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한 결과 문중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기로 의결하고, 이후 수차례 실무 협의를 가짐.
◦1984년 4월 20일, 풍양조씨 연수원 운영위원회 결선 및 임원선출과 규약을 제정함.
◦1984년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연수원 운영을 위한 모금활동을 시작하여 경향 각지에서 최초로 175만원을 모금하여 책상, 의자 등 교육 자재를 마련함.
◦1984년 7월 26부터 30일까지, 개원과 동시에 제1기 연수를 실시함. 참가 인원은 총 37명인데, 이 가운데 풍육장학생 6명 중 5명이 참가하여 매년 동참함.
◦1984년 8월 14일부터 ?일까지, 제2기 연수 실시함.(24명)
◦1985년 이후는 매년 1회 실시하기로 함.
◦1987년 제5기부터는 매년 8월 11일부터 15일까지로 날짜를 고정함.
◦2004년 양진당 중문간채 중수 공사로 옥류정(玉流亭)에서 연수 실시함.
◦2009년 8월 11일, 풍양조씨연수원 현판 새로 닮.
부사공 장학생 20명 연수원 참가 실시함.
◦2013년 8월 11일, 풍양조씨연수원 개원 제30주년 기념행사 실시함
⑤ 연수원 운영 개요
◦연수 장소 ; ≪풍양조씨연수원≫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소재 양진당(養眞堂․韓國文化史的 보물제1568호, 조정 선생 종택)
◦연수 일정 ; 매년 8월 11일부터 15일까지(4박5일)
◦연수 내용 ; 풍양조씨 유래 및 시조 만들기
보학, 족보 찾기 및 가첩 만들기 등
예절교육, 계촌법과 호칭 및 생활예절 등
제례와 제수
인성교육
유적지 순례
일반상식 특강 및 체육활동 등
◦숙 식 ; 양진당 방 9개 이용.(50명 정도 수용가능)
식사는 일가 부녀자들이 윤번제로 무료 봉사함.
◦교 재 ; 족보 10질 및 단행본 준비
◦교육 재정 ; 각파 종회 및 개인 종친들의 협찬과 성금으로 충당함.
⑥ 연수원 수료생 현황
제1기(1984년)~제30기(2012년)
구분 | 수료자 | 성 별 | 파 별 | ||||||
남 | 여 | 호군 공파 | 회양 공파 | 금주 공파 | 남원 공파 | 상장군 공 파 | 기타 | ||
총계 | 1,061 | 678 | 383 | 538 | 401 | 32 | 57 | 32 | 1 |
⑦ 풍양조씨연수원 개원30주년기념행사 추진위원 조직표
고 문 별 첨 | 추진위원장 | |||||||||
조준희(연수원장) | ||||||||||
준비위원 | ||||||||||
사무국장:조용권 | 부위원장:조성동(부원장) | 조세희,조성길 조중연,조성호 조강좌,조성일 조창희,조유연 조성념,조선희 | ||||||||
조직 구성 | 기획/총무팀 | 의 전 팀 | 행 사 팀 | 홍보/재무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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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정 임진란기록(趙靖 壬辰亂記錄․보물제1003호)의
존재 의의
1) 내용 개요
≪임진란기록≫의 내용은,
日記 1592(선조25).4.14~12.4. (2권)
南行錄 1592(선조25).8.25~1593(선조26).11.7.(1권)
日記附雜錄 1593(선조26).12.25~1594(선조27).2.4.(1권)
西行日記 1597(선조30).1.24~1597.3.19.(1권)
見聞錄 1권 및 학봉유사(鶴峰遺事)로서 김성일(金誠一)에 관한 것, 의병격문(義兵檄文)으로서 고경명격문(高敬命檄文)등 몇 편이 포함됨. 모두 6종 7책이다.
2) 사회(社會).역사(歷史) 사료적(史料的) 가치
검간(黔澗)의 ≪임진란 기록≫은 한국문화사에 보물 한 점을 더한 명저이다. 이 일기는, 1592년 4월 14일부터 1597년 3월 19일(중간에 누락이 있음)까지 상주․함창을 비롯한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 임란 7년을 겪으며 몸소 견문한 당대 사회. 역사상의 제문제들을 기록한 것이다.
의병활동상․관료들의 활동상․전황․백성들의 인심과 고통상(굶주림․질병․왜적침해 등), 왜구의 만행상 등을 견문한 대로 소상히 기록해 주었다. 검간(黔澗)은 몸소 창의군(昌義軍) 좌막과 장서기로 군량미 조달 및 토적의 일로 여러 진을 왕래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아우 가규(可硅) 조익(趙翊)은 충보군(忠報軍) 소모관, 장자 기원(基遠)과 차자 영원(榮遠)은 도체찰사 진영의 표하병(標下兵) 곽재우 의진의 의병으로 활동하여 한 집안이 다 구국의 대열에 나선 때의 일기다.
검간(黔澗)의 이 일기는, 우국일념의 충분의기(忠憤義氣)와 의로(義路)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 했던 고고한 선비 정신의 날줄과 씨줄이 되어 짜놓은 당대 사회상(社會相)이요, 역사적 증언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검간(黔澗)의 ≪조정 임진란 기록≫은, 사생을 넘나드는 절박한 극한상황에서도 선비의 도리를 다하려 했던 지사의 당대 임란전란사의 증언이요, 사회적 동향의 보고문이라 하겠다. 이 일기는, 바로 임진왜란 7년간의 역사․정치․사회․민속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 보물 제1003호로 지정되었거니와 만대에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엄한 표폄(褒貶)의 척도(尺度)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수행해 가리라 믿는다.
3) 정신문화적 가치-우국애민(憂國愛民)의 보전(寶典)
이 항에서는 검간(黔澗)의 나라 걱정하고 백성 사랑하는 우국애민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 준 일기의 몇 사례를 살피기로 한다.
(1) 인재등용의 실책(1592.4.17.)
“왜적의 변란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주장(主張)은 임금님을 지척에서 모시던 유신(儒臣)들로 활 쏘고 말 타는 기예를 익히지 못하였으니, 기회를 포착하여 왜적을 제압함도 반드시 잘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의 성패가 어떠할지는 넘치지 않더라도 몹시 우려된다.”
(2) 국은을 배신하는 위정자들(1592.4.23.)
“그 때 마침 한 군졸이 피난민 하나의 목을 베어들고 ‘이것이 왜적 나졸이다’ 하고 외쳤다. 상주목사와 함창군수는 그 진위를 가리려 하지도 못하고 안으로는 마음이 겁에 질리고 밖으로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현혹되어 자기 한 몸만 이 위기에서 빠져나 보려는 절실한 생각에서 군대를 버리고 지름길로 도망치는 꼴이 마치 제무리를 버리고 험준한 곳으로 달아나는 노루와도 같았다.”
“어리석은 백성이야 애당초 말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국록을 먹고 몸을 공직에 맡긴 자는 그래도 알고 느낌이 있으련만, 난을 당하여 구차스럽게 그것을 모면하려하고 심하면 군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치는데 이르렀으니, 저와 같이 국은을 저버리는 자는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뽑으며 그 죄를 헤아린다 하여도 용서하기 어렵다. 심히 통탄할 일이다.”
(3) 화(禍)를 자초한 위정자 (1592.5.6.)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않았으니 도성은 한낱 허장(許張)된 험고(險固)의 설비요, 국가의 근본을 완전히 정하지 못하였으니 백성의 마음은 희망을 걸 여지가 없다. 사람의 꾀가 이 지경이거늘 천도(天道)를 어찌 논하랴.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니 길이 통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
(4) 성(城)도 나라도 내어준 위정자(1592.5.14.)
“만약 의(義)를 부르짖는 사람이 있어 수백 명 정예군을 규합하고 주로를 막아 놈들의 왕래를 끊어버릴 것 같으면 유리된 백성들이 본업에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득하게 멀리 서울에 들어간 왜적도 진퇴를 못하고 낭패할 것이며, 뒤에서 적을 막아 싸우기 여러 날이 되면 놈들의 형세는 장차 곤궁하게 될 것이다. 그렇건만, 우리의 계략은 이런 점에 착안하지 못하여 경기 이하로부터 더 멀리는 연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몇 백 고을이건만 한 사람도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는 이가 없다. 방백(方伯)과 장수(將帥)는 곧 국가와 생민의 사명(司命)이거늘 모두가 도망쳐 숨어버려 간 곳을 알 수 없다. 성(城)을 기울이고 진(陳)을 버려 도적의 손아귀에 넘겨주고 칼을 거꾸로 달아매고도 오히려 대질릴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왜적들은 우리의 국세(國勢)가 해이해졌음을 익히 알고 아무 거리낌없이 들락날락거리며 왕래하는 폼이 마치 무인지경을 방불케 한다. 우리의 계책이 저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슬프다 하랴!”
(5) 성을 버리고 도망친 상주목사 김해가 표창 받은 현실
(1592.5.28.)
“오직 상주목사 아무개만은 자제와 잔졸을 거느리고 홀로 고립무원의 성을 죽기로 지키고 도망치지 않았고,(중략) 임금님으로부터 상주목사에게는 포상을 중히 하였다 한다. (중략) 왜적의 세력이 장차 제 고을에 이름에 굳게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문득 도망칠 꾀를 낸 것은 상주목사가 더 심하였다. 그렇지만 저자들은 감히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어 임금을 속이는 장계를 올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상도(常道)를 어그러뜨림에 이르게 하였으니, 통탄하고 통탄할 일이다.”
(6) 상주 사족(士族)의 참화 (1592.6.15.)
“듣자니, 공성․외남․청리에 사는 김사종(金嗣宗)․권서(權署)․노함(盧瑊)등이 각각 군인을 모아 그 수효가 거의 천 사오백여 인에 달했는데, 그들이 왜적에게 굳세게 항전하여 적을 살상한 수가 수백여 인이나 되니, 이 때문에 왜적은 끝내 그 마을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한다. 그런 뒤 군인들이 임의로 각기 흩어져 튼튼히 지킬 수 없게 되자 왜놈들이 틈을 타서 졸지에 치달아, 김사종이 말을 달리며 왜적 칠팔 명을 사살한 뒤 화살이 떨어지고 또 철환을 맞아 뛰어나왔다. 앙심을 품은 왜적들이 흉악한 짓을 멋대로 부려 사족(士族)들을 많이 살해하였다. 진사 김유성(金有聲)과 그의 아우 유진(有振)․유문(有聞) 및 그의 부친(필자주․金紳)과 진사 신봉서(辛鳳瑞), 진사 정국성(鄭國成)․황유원(黃裕元)․이숙평(李叔平․李埈의字)의 부모도 살해되고, 부인․처자 등 20여 인도 사로잡혔다. 내한(內翰) 정경임(鄭景任․鄭經世의字)은 적탄에 맞았으나 겨우 죽음을 면하였지만 거의 모두가 해를 당하였고, 언룡(言龍) 정인서(鄭獜瑞) 및 그의 아들 정건(鄭健)도 살해되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놀랬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애도하였다.” (註․임란초에 있었던 안령의 참화)
(7) 국가기강 붕괴와 왜구의 만행(1592.6.23.)
“국가의 운명이 무너질 지경에 처하고 법금(法禁)이 해이해져 약육강식하는 뭇 횡포가 만연하여 상하와 노주(奴主)도 모르게 되었다. 시세의 변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리요. 집에 보관했던 서책과 모든 기물이 병화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신주(神主)를 묻은 곳도 왜적에게 파헤쳐졌다고 하니 이것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8) 창의군(昌義軍) 창의(倡義) 맹약(1592.7.30.)
“조반 후에 찰방 권종경(權從卿. 名 景虎), 내한(內翰) 정경임(鄭景任. 名 經世) 등과 함께 황령(黃嶺) 동구로 가서 창의하여 토적할 일로 회동하였다.(중략)
모두의 의논이 이봉(李逢)을 주장(主將)으로 추대하고 함창의 이천두(李天斗)로 중위장, 전식(全湜)․송광국(宋光國)․조광수(趙光綬)․홍경업(洪慶業)으로 기록을 담당하게 하되 나도 그것을 겸하도록 하였다. 의정(議定)이 끝난 뒤 주장(主將)은 북향하여 재배하고 통곡하며 해를 두고 맹세하였다.
그런 다음 모든 사람들도 북향하여 절을 하였다. 그리고, 또 주장에게 절을 하였다. 이에 주장(主將)이 말하기를,
“나라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맹서는 죽음이 있을 뿐, 번심하여 더럽힘이 없도록 하라.”
고 하자, 모두들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또 정경임에게 명하여 동맹의 뜻을 기록하여 동맹록(同盟錄)의 첫머리에 적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어 삼장(三章)의 군율을 세웠다. 적과 맞닥쳐서 물러서는 자는 참하고, 후사(後事)를 기약하고 물러서기를 꾀한 자는 참하며, 명령을 어긴 자․시기를 잃은 자․터무니없는 말로 대중을 현혹한 자는 모두 군율에 의하여 단죄한다.
슬프다. 오늘의 모임은 말라고 해도 그냥 두지 못할 뿐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이다.”
(9) 친정소(親征疏)상소 동참 선비들(1597.2.15.)
“열읍(列邑)의 선비로는 안동의 권주(權疇), 예안의 김평(金坪), 봉화의 김중청(金仲淸), 영천의 장여직(張汝直)․금복고(琴復古), 풍기의 곽수지(郭守智)․용궁의 전찬(全纘)․조원개(趙元凱)․장여침(張汝忱)․박성열(朴成烈)․윤숙(尹潚)․이호(李湖)․이순(李焞), 상주의 신경익(申景翼)․조정(趙靖)․황정간(黃廷幹)․이전(李㙉)․김광두(金光斗)․김원진(金遠振)․조광벽(趙光璧), 개령의 이여림(李汝霖)․이윤무(李胤武), 선산의 박홍경(朴弘慶),예천의 권욱(權旭)․조우인(曺友仁)․이덕음(李德音) 등 40여 인이 예천 향교에 모였다.
(10) 검간(黔澗)의 충분의기(忠憤義氣)(1597.3.15)
“고개(조령) 위에 도착하니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오랫도록 일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마침 고개에서 검역(檢疫)을 하다가 머물러 가라하며 잘 대하여 주었다.” 이때 검간이 이시발에게 준 <鳥嶺山城 贈贊畫使 李養久時發> 3수(문집권1) 중의 제 1수에서,
冦至無長策 왜구 침입하여도 좋은 대책 없으니
吳薪亦枉陳 와신상담 조차 역시 빈말이로세.
纔廻蜀道駕 임금의 수레 겨우 촉도에서 돌아와 놓고
復議奉天巡 다시 변방으로 파천할 일만 의논한단 말인가.
縱有金湯險 비록 금성탕지의 험준한 성 있다한들
誰爲社稷臣 누가 사직을 지킬 신하란 말인가.
刳肝竟無補 심혈을 기울인 상소 끝내 쓸모없이 되었으니
心膽自輪囷 마음만 절로 구불구불 얽힌 듯하네.
이상의 몇 사례는, 검간(黔澗)의 우국애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도, 선생의 충분의기(忠憤義氣)가 글자마다 넘쳐나는 보전(寶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정 임진란기록․보물제1003호≫의 존재 의의는, 역사(歷史)․정치(政治)․사회(社會)․민속(民俗) 등의 사료적(史料的) 가치와 정신문화적 가치 등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다만 검간의 임란일기는 전문적인 분석․연구를 기다리는 중이다.
5. 검간(黔澗) 조정가(趙靖家)의 문화 유산
1) 문향(文鄕) 상주에 빛을 더한 장천문고(長川文庫)
검간(黔澗)을 비롯하여 그 후손들이 남긴 문집들은 가히 장천문고(長川文庫)를 이루다시피 하였고,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 유고(遺稿))들은 문화향(文化鄕)이라 일컬을 수 있는 상주에 빛을 더하였다 할 수 있다. 본 고는 저자와 유고집의 이름만 밝혀둔다.
(1) 장천문고(長川文庫)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 ≪黔澗先生文集≫
基遠(1574~1652),≪樵隠傃≫. 榮遠(1577~1640),≪儒潭遺稿≫
趙稜(1607~1682),≪黔澗先生文集≫.元胤(1633~1688),≪竹坡遺稿≫
振胤(1635~1709),≪客膝軒遺稿≫. 大胤(1638~1705),≪立劑遺稿≫
章胤(1640~1708),≪東皐遺集≫. 德胤(1642~1690),≪廣川實記≫
彦光(1656~1718),≪注巖遺集≫. 趙瀣(1666~1734),≪疏軒遺稿≫
自敬(1670~1723),≪露埄遺集≫. 學經(1677~1756),≪雲谷遺稿≫
自修(1678~1735),≪藥泉遺稿≫. 時經(1686~1755),≪中厓遺稿≫
天經(1695~1776),≪易安堂文集≫. 麟經(1698~1780),≪直方齊遺稿≫
緯經(1698~1780),≪吹箎齊遺稿≫. 錫春(1716~1791),≪慕友堂遺稿≫
錫愚(1721~1760),≪存省齊遺稿≫. 錫龍(1721~1792),≪晩樂齊遺稿≫
錫喆(1724~1799),≪靜窩先生文集≫.錫老(1725~1777),≪日省齊遺稿≫
錫穆(1726~1793),≪靜舎文集≫. 昞然(1731~1788),≪松窩遺稿≫
錫?(1735~1804),≪漁浦遺稿≫. 沐洙(1736~1807),≪舊堂先生文集≫
學洙(1739~1823),≪可隠遺稿≫. 南洙(1744~1822),≪灑掃齊遺稿≫
岐然(1745~1827),≪可村遺稿≫. 濯洙(1761~1803),≪醒齊遺稿≫
述舜(1762~1810),≪不欺齊遺稿≫. 趙㯖(1761~1803),≪致齊遺稿≫
述周(1778~1858),≪省愆齊遺稿≫. 述立(1791~1870),≪慕構遺稿≫
述大(1798~1867),≪東一齊遺稿≫. 鉉基(1805~1866),≪通德郞遺稿≫
東佐(1807~1888),≪叢桂文集≫. 相悳(1808~1886),≪危齊文集≫
駿九(1823~1902),≪石樵遺稿≫. 龍九(1830~1882),≪樛園遺稿≫
疇九(1832~1912),≪通德郞遺稿≫
※ 누락된 유고․문집은 계속 보완되고, 앞으로도 문집은 계속 발간되리라 믿는다.
(2) 10세(十世) 33인의 ≪풍성세고(豐城世稿)≫
선조의 유문(遺文)을 소중히 함은, 선조의 정신을 받들기 위함이다. 사천(思泉) 오작당(悟昨堂;立齋宗家)이 상주문화 창달에 기여함이 큼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기할 일 중 1922년에 발간된 ≪풍성세고(豐城世稿)≫가 으뜸이 된다. 이 세고(世稿)에는, ≪검간선생문집(黔澗先生文集)≫을 비롯하여 검간의 제2자 유담(儒潭) 영원(榮遠)과 모암(慕庵) 능(稜), 입재(立齋) 대윤(大胤), 소헌(疎軒) 해(瀣), 중애(中厓) 시경(時經), 존성재(存省齋) 석우(錫愚), 구당(舊堂) 목수(沐洙), 성건재(省愆齋) 술주(述周), 총계(叢桂) 동좌(東佐) 등으로 세대를 갈며 33인이 남긴 2백여 권의 유고를 집성하였다. 이로써 검간선생가(黔澗先生家)는 ‘10세 유고가 전하는 가문’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같은 세고는 상주 정신문화사에도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였다고 하겠다.
오작당(悟昨堂) 창건 4백주년이 되던 2003년에, 4세유고(四世遺稿 ; 검간․유담․모암․입재유고)에다 소헌(疎軒) 혜(瀣)의 유고를 더하여 ≪國譯 豐城世稿≫(全)을 발행(발행자․正熙)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
2) 문화재의 보고(寶庫) 조정가(趙靖家)
세가(世家)라도 지방문화재 한 점을 보전하기가 쉽지 않음이 현실이다. 지은 마음(作者之心)을 대대로 잃지 않고 지킨 것이 곧 오늘의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이에 검간선생가의 문화재를 열거한다.
(1) 국가 지정문화재(보물 3점)
<조정 임진란 기록>(보물제1003호), <조정증손가 소장문적(보물제1004호), <상주 양진당(養眞堂)>(보물제1568호)
(2) 경상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문화재자료 7점)
기념물,<상주 승곡리 추원당(尙州 升谷里 追遠堂)>(제141호) 민속자료, <상주 오작당(悟昨堂)>(제32호) 문화재자료, <의암고택(依巖古宅)>(제177호), <풍양조씨 족보판목 및 보각(豐壤趙氏 族譜板木 및 譜閣)>(제208호), <상주 용산정사(尙州 龍山精舍)> (제 438호), <상주청간정(尙州 聽澗亭)>(제558호)
Ⅳ. 맺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은 풍양조씨장천파(豐壤趙氏長川派) 종손으로 1555년(명종10) 8월22일, 한양 연지동(일설․상주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예가(禮家)의 가학(家學)을 전수하고, 당대 예학의 종장이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퇴계(退溪)의 수제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 경학․예학․문학을 익히었다. 사대부가의 긍지를 지키기 위하여 49세(1603), 진사시에 합격하고, 51세(1605)에는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세록지신(世祿之臣)의 후예로서 진력하였으나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의(剛毅)한 성품과 당쟁에 희생되어 중용되지 못하고 봉상시정(정3품 당상관)에 그치었다. 그러나, 비록 위계가 낮은 군현(郡縣)의 목민관이 되어서도 신도(臣道)․선비도(道)를 다 하여, 가는 곳마다 거사비(去思碑․1605, 대구판관)․유애비(遺愛碑․1609, 해남현감)․청덕비(淸德碑․1617, 청도군수)가 섰다. 1636년(인조14) 7월 21일, 향년 82세로 서거하였고, 1642년에는 아들 형원(亨遠)의 귀(貴)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속수서원(1730년)과 장천서원(2008.3.24.)에 봉안되었다.
선생은 제현의 인물평에 의하면, 국가적 동량재(棟樑材)로서 군자(君子, 任叔英․李光庭), 명예를 탐하지 않은 불호명지인(不好名之人), 임금을 보좌할 만한 보필지신(輔弼之臣․高仁繼), 강개한 기상에 곧고 선량한 강개정량지인(慷慨貞良之人․李恒福),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강건한 오죽장(烏竹杖) 등으로 평가된 인격자였다. 한 마디로, 국가적 동량재(棟樑材)요 정인군자(正人君子)로서의 재덕을 갖춘 큰 선비였으나, 불운(不運)하여 그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검간(黔澗)을 중용치 못한 것은 당대 위정자의 실책이지, 검간의 본질적인 인간적 가치에는 더 함도 덜 함도 있지는 않았다.
나아가, 동량지재(棟樑之材)요, 정인군자(正人君子)며, 팔십 생애에 양생(養生)의 달인으로서 지상선(地上仙)으로 일컬어졌던 인물로서의 검간정신(黔澗精神)은 다음과 같이 크게 나눌 수 있다. 숭조상문(崇祖尙門), 효우목인(孝友睦婣), 강의관후(剛毅寬厚), 충분의기(忠憤義氣), 존현양사(尊賢養士), 정인군자(正人君子)에의 정신을 발양한 선비였다.
이같은 검간정신(黔澗精神)은 곧 양진사상(養眞思想)으로 집약(集約) 되었다. 양진(養眞)이란, ‘양오진(養吾眞)’ 곧, 천부적으로 타고난 나의 본성이나 천지 운행의 자연지도(自然之道)를 잘 보존하고 기른다는 뜻이다. 이같은 양진사상(養眞思想)은 검간(黔澗)의 모든 사업과 덕행의 근본정신인 경사상(敬思想)과도 일맥상통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풍양조씨장천파 대종가(大宗家)의 봉선(奉先)․목인(睦婣)․교육(敎育) 공간으로써의 기능을 다 하는 양진당(養眞堂․보물 제1003호)과 난중일기인 조정임진란기록(趙靖壬辰亂記錄․보물제1003호)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밖에도 검간가(黔澗家)의 문화유산으로써 조정종가문적(보물제1004호) 및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7점은 다 검간정신(黔澗精神)의 결정(結晶)들이라 할 만하다.
조정임진란기록(보물제1003호)은, 역사․정치․사회․민속의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있고, 만대에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엄한 표폄(褒貶)의 척도(尺度)가 되리라 믿는다. 또한, 문학적 가치도 있다.
양진당(養眞堂․보물 제1568호)은, 작자의 지은 마음(作者之心)을 영구히 보전하려는 후손들의 계승의지가 점철된 정신문화적 가치와 건축․예술적 가치를 지니었다.
검간가(黔澗家) 문화유산(文化遺産)은, 이 또한 정신문화적 가치와 국가문화와 지방문화의 위상을 한 층 드높인 가치가 있다 하겠다.
이와 같은 가치는,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에 국가적 보물의 창출자(創出者)요, 조정가(趙靖家) 문화유산의 근원이 된 국사적(國士的) 존재로서의 위상(位相)을 차지한 검간(黔澗) 조정(趙靖)으로 영구히 남게 하였다. 문화사(文化史)에 살아있는 정신이 오르면 그때 비로소 인간 본질적인 존재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작게는 향토문화사에 정신문화를 남기어도 그 생명이 지역 사회와 더불어 가거늘, 검간선생(黔澗先生)은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에 검간정신(黔澗精神)의 집약으로서 양진사상(養眞思想)을 남기었으니 국사적(國士的) 존재로서의 위상(位相)이 높음을 느낄 수 있다. 상주사(尙州史)에서 검간(黔澗)의 문화사적 존재 의의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편람(便覽)을 위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도식화(圖式化) 하면 다음과 같다.
성장; | 한강문인(寒岡門人) | 예가(禮家) | 학봉문인(鶴峰門人) | |||||
경학 ․ 예학 | 경학.예학.문학 | 경세학 | ||||||
⇩ | *제현의 평(評) | |||||||
인물; | 동량지재(棟樑之材) 정인군자(正人君子) 지상선(地上仙) | ← | 君子(任叔英․李光庭), 不好名之人(鄭蘊),輔弼 之臣(高仁繼),慷慨貞良 之人(李恒福),烏竹杖(李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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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 검간정신(黔澗精神) | |||||||
숭조상문 ․ 효우목인 ․ 강의관후 ․ 충분의기 ․ 존현양사 ․ 정인군자 | ||||||||
(崇祖尙門) ․ (孝友睦婣) ․ (剛毅寬厚) ․ (忠憤義氣) ․ (尊賢養士) ․ (正人君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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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 양진사상(養眞思想) | |||||||
양오진(養吾眞), 타고난 본성이나 자연지도(自然之道)를 잘 보존하고 기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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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 난중일기 | 대종가의 奉先 ․ 睦婣 ․ 敎育場 | 국가 ․ 지방문화재 | |||||
조정임란기록(보물1003호) | 養眞堂(보물1586호) | 趙靖家문화유산 (보물․문화재) | ||||||
내용; | 1592.4.14~1997.3.19 <일기>, <남행록>, <일기부록>, <서행일기> | 검간정신의 산실 군자지향의 교육장 민족혼의 고취장 풍양인 정신함양장 | 장천문고(42인의문집) 풍성세고(10세33인의문집) 국가보물 3점 지방문화재 7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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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 역사, 정치, 사회, 민속사료적(史料的)가치, 문화적 가치 | 정신문화적가치 건축적가치 예술적가치 | 정신문화적가치 국가 ․ 지방의 문화유산 선양의 가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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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적(韓國文化史的) 위상(位相) | ||||||||
국가적인 보물(寶物) 문화재 창출자(創出者)요, 조정가(趙靖家) 문화유산의 근원(根源)이 된 국사적(國士的) 존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