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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출신 최초의 대제학 백충伯忠 박안신朴安信과 두 아들

빛마당 2014. 2. 24. 22:03

상주출신 최초의 대제학


백충伯忠 박안신朴安信과 두 아들

김 철 수 박사


전) 국립상주대학교 제2대 총장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주문화원장

상주출신 최초의 대제학


백충伯忠 박안신朴安信과 두 아들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目 次>

Ⅰ. 아버지 박안신朴安信

1. 박안신 선생의 행적

2. 박안신 선생의 정치적 위기

3. 박안신 선생의 졸기卒記

Ⅱ. 맏아들 박이창朴以昌

Ⅲ. 둘째 아들 박이령朴以寧

Ⅰ. 아버지 박안신朴安信

1369(공민왕 18)∼1447(세종 29), 세종 27년(1445) 6월 15일 상주사람으로는 제일 처음으로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분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박안신朴安信이고, 태종으로부터 받은 사명賜名은 안신安臣이었다. 호는 백충伯忠, 시호는 정숙貞肅으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박문로朴文老의 아들로 1369년(공민왕 18)에 태어났다.

조선조 태조 2년에 25세로 생원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정종 1년(1399)에 식년시式年試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격이 담대膽大하고 담론談論에 능하면서도 가사에는 청렴 검소하여 청백리 맹사성孟思誠과 교분이 두터웠다.

1408년 종6품에 불과했던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시절에 대사헌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목인해睦仁海의 모반사건에 연루된 태종의 사위 조대임趙大臨을 왕에게도 알리지 않고 재차 심문하여 “모약왕실謨弱王室”이라는 죄목을 강제로 실토하게 하여 맹사성과 함께 극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선생은 맹사성에게 “죽고사는 것은 명에 있으니 무얼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리오.”하였고, 옥중에서 시 한편을 지어서 임금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또한 당대의 실력자인 이숙번李叔蕃ㆍ황희黃喜ㆍ권근權斤과 영의정 하륜河崙과 좌의정 성석린成石璘 등이 뜰에 나와 부단히 주청奏請하는 바람에 극형은 면하고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

선생은 외직을 제수除授받든, 내직을 제수 받든 간에 맡은 일을 강직하게 수행하였다.

태종 12년에는 의성현령義城縣令, 세종 원년에는 오천도사汚川都事, 세종9년에는 황해도감사黃海道監司, 세종 11년에는 충청도감사忠淸道監司, 세종 14년에는 전라도감사全羅道監司, 세종 16년에는 평안도감사平安道監司 등 외직에 있었다. 임지에서 선생은 그곳의 해이된 기강을 쇄신하고 산업을 근려勤勵하는 등 안민정치安民政治를 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변방의 견고한 수비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였다. 왜에 대비해서는 병선兵船을 증강하고, 병선의 주재료인 소나무의 체계적인 수급방안 등 많은 대비책을 상소上疏하여 반영하였고, 북방 야인野人에 대해서는 적진내부에 대한 첩보활동을 통해서 많은 세부적인 대안을 상소하여 반영시켰다.

선생의 이 같은 공로 때문에 내직에 있을 때도 외직을 겸하여 제수받은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내직인 육조六曹에서는 형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대사헌,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우참찬, 예문관藝文館에서는 대제학까지 두루 역임하면서 현직 고관高官들과 왕족척신王族戚臣들의 비리와 무능을 수십회에 걸쳐 거침없이 탄핵상소彈劾上疏하는 등 인사제도人事制度, 봉록제도俸祿制度, 국방제도國防制度, 조세제도租稅制度의 쇄신에 앞장섰으며 특히 민생民生의 피해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편 세종16년에는 불교대장경목판佛敎大藏經木版을 보내 줄 것을 애원하던 일왕日王을 달래고 선린善隣을 위해 회례사回禮使로 발탁되어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종사관從事官 공달孔達 등과 일부 병졸을 거느리고 일왕이 있는 경도京都에 도착하였으나 일왕이 요구하던 대장경판이 사례물謝禮物에 없음을 탓하여 접견을 회피하자, 공은 교린交隣의 뜻으로 타일러 예접禮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일왕日王의 답서答書와 예물禮物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일기도一技島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연안에서 토벌 당했던 왜도倭盜의 후손들이 보복하기 위해서 회례선回禮船에 난입해서 병졸들과 전투가 벌어졌었다. 이때에도 선생은 선상船上에서 부동의 자세로 이들을 꾸짓고 타이르니 그 담대膽大한 위세에 더 이상 범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일행들은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의 담대함과 활달한 말솜씨가 인정을 받아서 명나라 천추사千秋使로 발탁되어 소임을 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 29년 정묘丁卯 11월 9일에 공이 79세로 죽으니 세종대왕이 승정원承政院에 교지敎旨하기를,

“예문관 대제학 박안신朴安信이 졸하다. 안신의 자는 백충이요 상주사람인데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 문로文老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사관史官에 보직되고 무자년戊子年에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을 보직 받았다.

대사헌大司憲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목인해睦仁海의 사건을 다스리다가 태종太宗의 뜻에 거슬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맹사성孟思誠에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으니 무얼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 하리오.’하고 시를 지어 벽 뒤에 썼었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고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 갑신년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와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였다. 이에 국가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대신에 안신安臣을 회례사回禮使로 보내어 예물禮物과 불경佛經 두어 권을 보내었다. 그러나 일본 왕이 우리 국가에서 대장경판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회례사回禮使 일행을 들이지 않고 오직 불경만 들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안신安臣이 치서馳書하여 교린交隣의 뜻으로 타이르니 그제서야 예접禮接을 허락하였다.

돌아 올 때에 일기도一技島에 이르니 우리와 원망이 있는 왜인들이 사신의 배를 해하여 보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신이 적에게 이르기를 ‘고금古今으로 어찌 사신使臣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적이 범하지 못하였다.

돌아와서 사간원司諫院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가 되고 공조工曹, 병조兵曹, 예조禮曹,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과 황해, 충청, 전라, 평안도 감사監司를 거치고 을미乙未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받고, 나이가 많아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윤허允許되지 않고 오히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발탁되고, 갑자甲子년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이때(丁卯 : 1447년 세종 29)년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9세였다.,,,,

조정에서는 조회朝會를 2일 동안 정지하고 조의弔意와 부의賻儀를 내렸다. 안신의 성품은 강하고 과감하여 담론談論을 잘하고 집을 다스리는 것이 검소하였기 때문에 시호諡號를 정숙貞肅이라 하였으니 곧은 도리道理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이요, 마음을 잡아 결단하는 것이 숙이다.

두 아들 이창以昌과 이령以寧이 정2품까지 이르는 충신들이었으나 그 중 이창以昌은 부친 정숙공貞肅公의 성품을 닮아 굳힘 없는 정무政務로 충성을 다하던 중 뜻하지 않은 부하의 실수가 있자, 평소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던 간신奸臣들이 침소봉대하여 이를 문책함에 이르러 자문自刎함으로서 조정에 본을 보여 주매 임금이 치존제문致尊祭文을 지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였고, 이자二子 이령以寧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서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북방 개척에 큰 공이 있었으나 세조世祖로부터 단종端宗을 옹호하려다가 계유정란癸酉靖難에 처교處絞되어 한 때 후손들이 공의 산소조차 찾지 못하다가 19세기 후반에 상주시 개운동의 대방곡大芳谷에서 찾아 후손들이 크게 통곡하였다

1. 박안신 선생의 행적

1) 맡은 바 직무를 강직하게 수행하였다.

박안신 선생은 태조부터 세종 때까지 무려 40년간을 벼슬길에 있었다.

외직으로는 의성현령義城縣令(태종 12년), 오천군사汚川郡事(세종 원년), 황해도 감사黃海道監司(세종 9년), 충청도감사忠淸道監司(세종 11년), 전라도감사(세종 14년), 평안도감사(세종 16년)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의 치적으로는,

(1) 지역의 해이된 기강을 쇄신하였다.

(2) 산업을 근려勤勵하고 안민정치安民政治를 하였다.

(3)왜적의 침입에 대해서 병선兵船을 증강하고 병선의 주 재료인 소나무의 체계적인 수급방안 등 많은 대비책을 상소하여 반영시켰다.

(4)북방 야인野人에 대해서는 적진내부에 대한 첩보활동을 전개해서 얻은 정보를 통해서 변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했다.

내직으로는, 육조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사헌부에서는 대사헌, 의정부에서는 우참찬, 예문관에서는 대제학까지 두루 역임하였다. 이때의 치적으로는, 1)현직 고관들과 왕족척신들의 비리와 무능을 수십회나 거침없이 탄핵 상소하는 등 인사제도, 봉록제도, 국방제도, 조세제도의 쇄신에 크게 기여하였다. 2) 민생의 피해가 없도록 늘 보살폈다.

2) 외교에 능하였다.

세종 16년에 일본 회례사로 발탁되어 불교대장경목판을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일왕을 설득했다. 일본에 회례사로 갔을 때, 불교대장경판이 사례물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접견조차 거부하는 일왕을 설득해서 귀국할 때는 일왕의 답서와 예물을 받아가지고 왔다.

또한 명나라 천추사千秋使로 발탁되어 뛰어난 담론으로 소임을 다하였었다.

3) 변방의 수비에 주력하였다.

변방의 견고한 수비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특히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병선兵船을 증강하였고, 병선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소나무의 체계적인 수급방안 등 많은 대비책을 상소하여 반영하였고, 북방의 야인野人들에 대해서는 적진내부을 늘 정탐해서 세부적인 대응방안들을 강구했었다.

2. 박안신 선생의 정치적 위기

종6품에 불과한 사간원 좌정언시절에 육인회의 음모반란에 연루한 태종의 사위 조대임을 심문하게 되었다. 이때 태종의 뜻과는 달리 심한 고문을 해서 ‘모약왕실謨弱王室’이라는 죄목을 강제 실토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목인해睦仁海는 김해金海 관노官奴인데, 애꾸눈이고 활을 잘 쏘았다. 처음에 이제李濟의 가신家臣이었었는데, 이제李濟가 죽자, 주상을 잠저潛邸에서 항상 섬기는 바람에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또한 목인해의 아내는 조대림趙大臨의 집 종(婢)이였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조대림의 집에 무상으로 드나들게 되었고, 조대림도 목인해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목인해는 ‘조대림이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으니 이것을 모함하면 부귀富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비밀리에 조대림에게 접근하여 이르기를,

“흥안군興安君이 부마駙馬로서 금병禁兵을 맡았으나, 평소에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잡히게 된 것이오. 지금 장군총제掌軍摠制 중에서 뜻밖에 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그것이 두렵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오래 된 장수將帥이기 때문에 능히 임시응변臨時應變을 할 수 있지만, 공은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하니 마땅히 미리 제치制置하는 방술方術을 생각해야 하오.

설사 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더라도 내가 힘을 다해 공을 돕겠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릇 일을 경험한 장수는, 장차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궐문闕門에 양산陽傘을 베풀어 놓아 안팎이 서로 막히게 하여, 위에서는 바깥을 제어하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위에 통하지 못하게 해 놓고, 환관宦官을 붙잡아 왕지王旨를 꾸며 출납出納하게 하여 입직入直한 장상將相과 대언代言을 모조리 벱니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록 군왕君王인들 장차 어찌하겠소?”

라며 조대림을 유혹하자, 어리석은 조대림은 목인해가 진정으로 자기를 돕는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목인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기가 한 말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조대림을 죽여야한다고 생각하고는 이숙번李叔蕃을 찾아가서

“평양군平壤君이 두 마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공과 권규權跬ㆍ마천목馬天牧을 해하고 왕실王室에 불리하게 하기를 꾀하려고 하오. 또한 대림大臨이 일찍이 말하기를, ‘예전에 장인丈人이 그 딸과 더불어 사위의 과실을 말하였는데, 딸이 그 남편에게 고하여 도리어 장인을 죽인 일이 있다.’ 하였습니다.”

라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 엄청난 말을 들은 이숙번李叔蕃은 비밀리에 곧 바로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전후 사정을 파악한 임금이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목인해睦仁海를 불러서,

“네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또 대림이 나이 어리니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 과연 그렇다면 반드시 주모자主謀者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제는 어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목인해는 조대림이 실제로 모반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조대림을 꼬였다.

“근일에 대갑帶甲 수십 명이 경복궁景福宮 북쪽 으슥한 곳에 모여 공을 해하려고 하니, 공은 마땅히 관령管領하고 있는 병마兵馬로서 이를 잡으소서.”

하니, 조대림이,

“그렇다면 마땅히 안성군安城君과 의논해야 한다.”

라고 하니, 목인해가 말하기를,

“그것이 어느 군의 갑사甲士인지 알지 못하니 어떻게 고하겠소?”

하였다. 그러자 대림이 그러면 마땅히 계문啓聞해야 한다고 하니, 목인해가 다시 말하기를,

“도적의 꾀를 자세히 안 연후에 들어가 고할 수 있는 것이오. 또 이와 같은 일을 경솔히 들어가 고하면, 뒤에 소문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공에게 고하겠소? 또 사변事變이 위급하니 만일 왕지王旨를 받고자 하면 누설이 될까 두려우니, 먼저 군사를 발하고 나서 뒤에 아뢰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번에는 조대림이 목인해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한편 조대림이 역심을 품고 있다는 내용을 알고 있는 태종 임금이 목인해가 고한 일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조대림을 시험 했다. 소격전昭格殿에 초제醮祭를 행하라고 명하고는 조대림을 엿보았다.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하는 조대림이 범염犯染하였다 하여 사양하니, 임금이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목인해가 이번에는 전 호군護軍 진원귀陳原貴에게 이르기를,

“평양군平壤君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니, 자네는 나를 따라 구경하라.”

하고, 진원귀를 끌고 조대림의 집에 이르렀다. 조대림이 목인해에게

“난잡하게 횡행橫行하는 7, 8명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

하니, 목인해가 곧 대답하기를,

“꼭 내가 말한 흥안군興安君의 일과 비슷하오. 마땅히 위아래의 친교親交가 있는 사람과 의논해야 하오.”

하였다. 그러자 조대림이 나는 별로 친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여기까지 본 진원귀가 물러간 뒤에, 목인해가 또 조대림을 꾀이기를,

“거사擧事는 대유大儒와 의논하지 않을 수 없소. 대인大人께서 아시는 선비 재상(儒相)이 누구요?”

하자, 오직 ‘조용趙庸’뿐이라고 대답하니, “왜 부르시지 않으오?” 하였다. 그리하여 조대림이 조용趙庸을 불렀다. 그러고는 조용을 침실로 맞아들여서 연고를 고하니, 조용이 “주상께 아뢰었소?”하니 “아직 아뢰지 못하였소.”라고 답하자, 조용이 얼굴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서 이런 말을 들으면, 곧 주상께 달려가 고하는 것이 직분인데, 하물며 부마駙馬아니오? 주상께 고하면, 일의 허실은 주상께서 결정決正하실 것이니, 공은 빨리 계문啓聞하시오.”

하고는 조대림의 집을 나와서 바로 예궐詣闕하려 하는데 목인해가 사람을 시켜서 조용을 잡아 드렸다. 그러고는 이숙번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조용이 지금 평양군의 집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모주謀主입니다. 평양군이 만일 거사擧事하면, 내가 백마白馬를 타고 따를 것이니, 만약 대인大人의 군사와 만나거든, 군사를 경계하여 나를 알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칼을 뽑아 평양군을 베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붙잡혔던 조용이 틈을 엿보아 탈출하여 곧 대궐로 달려가서 이러한 상황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다.”

하였다. 해가 저물자 이런 사정을 모르는 조대림이 예궐(입궐)하여 아뢰기를,

“듣자오니 경복궁 북쪽에 도적이 있다 하니, 신이 이를 잡고자 합니다. 원하옵건대, 신에게 마병馬兵을 주소서.”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허락하였다. 그러자 조대림이 이번에는 입번총제入番摠制에게 갑사甲士를 빌려 달라 하니, 사종이 밀지密旨를 받고 전 호군護軍 허권許權 등 23명을 주었다.

그러고 임금은 이숙번에게 이르기를,

“대림이 만약 군사를 발하면 향하는 곳이 있을 것이니, 경의 집에서 조천화照天火를 터뜨려라. 내가 각을 불어서 응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지신사知申事(도승지)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들으니 평양군이 모반謀叛하고자 한다니, 궐내闕內를 부동浮動하고 요란擾亂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황희가 “누가 모주謀主입니까?” 하니, 임금이 “조용이다.” 라고 대답하자, 황희가 다시 말하기를,

“조용은 사람 됨이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목인해가 조대림에게 도적 잡기를 재촉하였다. 조대림이 군사를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목인해에게 묻기를,

“도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니,

“남산南山 마 총제馬摠制의 집 옆에 있습니다.”

하였다. 조대림이 남산으로 향하려고 문을 나서자, 이숙번이 이를 엿보아 알고 조천화照天火를 터뜨렸다. 그러자 임금이 궐내闕內에서 각을 부니, 조대림이 궐내에 변이 있는가 의심하고 군사에게 이르기를,

“장차 어디로 갈까?”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각 소리를 들으면 궐문闕門에 모이는 것이 군령軍令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목인해가 “곧장 남산으로 향해야 된다.”고 우겼다. 목인해는 대림이 길에서 이숙번을 만나게 하여 마천목을 해하려 한다는 말을 사실로 만들고, 또 이숙번의 군사로 하여금 조대림을 쳐서 죽이게 하려고 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조대림이 목인해의 말을 쫒지 않고 궐문으로 향하였다. 궐문에서 조대림이 말에서 내리려고 하니, 목인해가 굳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여 조대림의 모반謀叛한 모양을 보이려 하였다. 조대림이 배회徘徊하다가 말에서 내려 들어가려고 하니, 문지기가 제지하였다. 그러자 목인해가 먼저 들어가 선언하기를,

“평양군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발하여 대궐로 향하였다.”

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임금이 총제摠制 권희달權希達을 시켜 대림을 붙잡아 대궐 뜰에 이르러 갑주甲胄를 벗기고 하교하기를,

“들으니 네가 난을 꾸미려 하였다 하니, 순금사巡禁司에 가서 변명하라.”

하고, 감옥監獄으로 보냈다. 그리고 곧 이어 국문이 있었는데, 조대림에게 장 20대를 때리고 모반謀叛한 정상을 묻고, 군사를 발한 까닭과 주모主謀한 사람을 세 차례나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목인해와 함께 대면시켜 안험案驗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조용을 체포해 와서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임금이,

“네가 이미 내게 불효不孝하였으니, 내가 어찌 너를 아끼겠느냐? 네가 비록 죽더라도 명예聲譽는 나쁘지 않게 하여야 하겠으니, 수모首謀한 사람을 고하여 스스로 밝히라.”

하며, 다시 장 64대를 때리자 비로소 조대림은,

“인해仁海의 꾀임을 받고 도적을 잡으려 한 것 뿐이고, 다시 다른 마음은 없었다.”

고 실토하였다.

조대림의 자복을 근거로 목인해를 다시 신문訊問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죄를 조대림에게 뒤집어 씌었던 목인해가 장 10여 대를 치자, 조대림을 무함誣陷한 사실을 자복自服하였다. 그리고 진원귀陳原貴가 이 목인해의 자복내용이 사실임을 증언하여서, 이번 일의 전부가 목인해의 음모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날 저녁 태종 임금은 조대림과 조용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태종 8년(1408) 12월 9일에 목인해睦仁海를 시가市街에서 두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양쪽에서 수레를 끌어서 찢어 죽였으며 인해仁海의 자식들도 교살絞殺하였는데, 백관百官을 모아 형의 집행을 감독하였다.

목인해가 모반사건을 일으켰을 때, 맹사성孟思誠이 대사헌大司憲 자리에 있었고, 박안신朴安信이 지평持平 자리에 있었다. 목인해가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주범이라고 실토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직책상 조대림을 국문鞠問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문하기 전에 태종 임금이 두 사람을 불러서,

“조 정승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이므로, 내가 그 아비를 중하게 여겨 그 아들을 부마로 삼은 것이다. 어찌 일찍이 매 한 대를 맞은 자이겠는가? 조대림이 만일 꾀한 바가 있다면, 비록 형벌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고하지 않겠는가? 만일 고하지 않거든, 억지로 형벌하여 공초供招를 받는 것이 어찌 마음에 쾌하겠느냐? 목인해와 대질하여 묻더라도 곤장을 가할 것은 없다. 만약에 고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잠시 형장刑杖을 가하여 반드시 그 사실을 토로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모반사건이 진실인가?”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임금의 간곡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사위를 심하게 고문하여 억지 자백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태종 임금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였으며, 이 사실 때문에 임금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저자에서 죽이려고 했다. 이때 맹사성은 얼굴빛이 창백하여 말을 못하는데, 박안신朴安信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맹사성孟思誠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상관이요, 나는 하관이나 이제 죽을 죄인이 되었으니, 어찌 높고 낮음이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대를 지조가 있다고 했는데, 어찌 오늘은 이렇게도 겁을 내는가. 그대는 저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하였다. 또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가져오라고 해서 기와조각에,

“내 직책 다하지 못하였으니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임금이 직간直諫하는 신하를 죽였다는 이름이 남게 될까 두렵네.”

하는 내용의 시를 써가지고 “속히 가서 임금께 보이라.”하였다. 박안신 선생의 시를 본 임금은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에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이 궐내에 들어와서 임금에게 ‘잘못된 일은 고치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임금도 노여움이 풀려 박안신 선생과 맹사성 선생을 죽이지 않았다.

위기일발의 순간을 박안신 선생의 재치로 잘 넘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면하기 했지만, 사헌부 대사헌 맹사성孟思誠 선생은 장 1백 대를 맞고 한주韓州 향교鄕校의 재복齋僕으로 정배定配하고,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박안신朴安臣 선생은 영덕현盈德縣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이 모반사건은 막을 내렸다.

3. 박안신 선생의 졸기卒記

세종 29년(1447) 11월에 예문관 대제학 박안신朴安臣이 졸하였다. 안신安臣의 자는 백충伯忠이요, 상주尙州 사람인데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박문로朴文老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사관史官에 보직되고, 무자년에 사간원 좌정언을 제수받았다. 대사헌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목인해睦仁海의 사건을 다스리다가 태종太宗의 뜻에 거슬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사성思誠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으니 무얼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하고, 시를 지어 벽 뒤에 썼다. 여러 번 옮겨 사헌 집의가 되고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 갑진년에는 일본日本에서 사신을 보내어 와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였다.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고 안신安臣을 보내어 회례사回禮使를 삼고 예물과 불경佛經 두어 권을 보내었다. 그 지경에 이르니 일본왕이 국가에서 대장경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거절하여 들이지 않고, 오직 불경만 들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안신安臣이 치서馳書하여 교린交隣의 뜻으로 타이르니, 그제서야 예접禮接을 허락하였다. 돌아올 때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우리와 원망이 있는 한 왜인이 사신의 배를 향하여 보복하려 하였다. 안신이 곧 배에 올라 적에게 이르기를, ‘고금으로 어찌 사신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적이 마침내 범하지 못하였다. 돌아와 사간원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가 되고, 공조ㆍ예조ㆍ병조 참의와 병조ㆍ예조ㆍ형조ㆍ공조ㆍ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과 황해ㆍ충청ㆍ전라·평안도 감사를 거치고, 기미년에 형조 판서를 제수하고, 명년에 의정부 우참찬에 옮기고, 임술년에 공조 판서로 나이가 많아 물러가기를 청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이조 판서에 발탁되고, 갑자년에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에 옮기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9세였다.

조회를 2일 동안을 정지하고 조의弔儀와 부의賻儀를 내렸다. 안신의 성품은 강하고 과감하고 담론談論을 잘하고 집을 다스리는 것이 검소하였다. 시호諡號를 정숙貞肅이라 하였으니,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이요, 마음을 잡아서 결단하는 것이 숙이다.

아들은 박이창朴以昌ㆍ박이령朴以寧이다.

○藝文館大提學朴安臣卒。 安臣字伯忠, 尙州人, 判司宰寺事文老之子。 登(弟)〔第〕, 補史(宮)〔官〕, 戊子, 拜司諫院左正言, 與大司憲孟思誠等共治睦仁海之事忤旨, 太宗欲置極刑, 謂(司誠)〔思誠〕曰: “死生有命, 何憂何懼!” 乃作(請)〔詩〕題壁。 後累遷司憲執義、判膳工監事〔判繕工監事〕。 歲甲辰, 日本遣使來請《大藏經》板, 國家不許, 遣安臣爲回禮使, 送禮物及佛經數本。 至其境, 國王聞國家不許《大藏經》板, 拒不納, 唯許納佛經, 安臣馳書, 諭以交隣之意, 乃許禮接。 及還, 至一岐島, 有一倭與我有怨者, 欲害使船以報之, 安臣卽乘舟, 謂賊曰: “古今寧有殺使之人乎!” 賊終不能犯。 還, 拜司諫院右司諫大夫, 歷工禮兵曹參議、兵ㆍ禮ㆍ刑ㆍ工ㆍ吏曹參判、司憲府大司憲、黃海ㆍ忠淸ㆍ全羅ㆍ平安道監司。 己未, 拜刑曹判書, 明年, 遷議政府右參贊。 壬戌, 以工曹判書, 請老乞退, 不允, 擢吏曹判書。 甲子, 遷藝文大提學, 至是卒, 年七十九。 (䮕)〔輟〕朝二日, 弔賻。 安臣性剛果, 善談論, 治家儉嗇。 諡貞肅, 直道不撓貞, 執心決斷肅。 子以昌、以寧。

Ⅱ. 맏아들 박이창朴以昌

국법의 위엄을 보여준 청백리였다.

본관은 상주尙州. 아버지는 대제학 안신安臣이다. 1417년(태종 17)에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다. 1426년 전라도에 감찰로 파견되어 조희정趙希鼎ㆍ양맹지梁孟智ㆍ이신李伸ㆍ문헌文獻 등이 재물을 감춘 것을 탄핵하였다.

1430년 4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1434년 내자소윤內資少尹으로서 경기ㆍ황해도에 파견되어 진휼賑恤의 상황을 살폈다. 1443년 우부승지, 1445년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447년 인수부윤仁壽府尹 · 공조참판 ·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0년 호조참판 ·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중추원부사에서 형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경창부윤慶昌府尹 · 평안도감사가 되었고, 9월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때 먼 길에 대비, 많은 양곡을 가져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붙잡히자 국법을 어긴 것을 뉘우치고 자결하였다.

박이창 선생은 평소 해학이 넘치고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였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박이창은 젊은 시절 상주에 살았는데 게을러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향시에 응하게 되었는데, 시험장에 들어가서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조교曹交처럼 키만 크고 향시장에서 백지를 내고 나오면 반드시 남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며 억지로 붓을 들어 글을 써 바쳤더니 장원이 되었다. 즉시 아버지에게 편지를 올려,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든 가운데에서 제가 수석을 차지했으니, 영광이 아닙니까”

하였으며, 이후로 뜻을 굳세게 하여 마침내 급제하였다.

그 후 처음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을 때의 일화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처음 임명을 받아 근무처로 가면 ‘면신례免新禮’ 라는 것을 하였다. 일종의 관례로써 오늘날의 ‘신고식’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면신례라는 것이 매우 혹독하고도 짓궂었던 모양이다.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울고 웃기, 흙탕물에서 구르기, 얼굴에 똥칠하기와 같은 짓궂은 장난을 참아야 했고 뒷짐을 지고 머리에 쓴 사모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직속상관의 이름과 직책을 외우는 어려운 게임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벌이 내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면신례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고 조정에서는 금지령까지 내린 적도 있었다. 율곡 이이도 면신례를 거부하여 쫓겨난 적이 있었다.

박이창 선생도 면신례를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겨 거부했다. 신참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지 않자 선임자先任者들은 여러 번 꾸짖으며 50일이 지나서도 면신免新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에 박이창 선생은 분기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이 앉아서 일할 곳으로 올라갔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당시 사람들은 박이창 선생을 가리켜 ‘자허면신自許免新’이라고 하였다.

신참에게 행해지는 면신례를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과감히 거부 할 만큼 그의 성격은 직설적이고 엄격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또 한 가지 강직한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례상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평안도 고을에서 마른 양식을 많이 챙겨주었다. 본래는 여비에 보태 쓰라고 인사치레로 주는 것이었지만 이것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이 있었다. 박이창 선생이 이러한 일을 알고 임금에게 아뢰면서, 그 폐단을 낱낱이 진술하였다. 왕이 그의 말을 듣고는 그 폐단을 시정하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박이창 선생이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가게 되었다. 그는 길이 멀었기 때문에 부득이 많은 양미糧米를 준비해 가지고 가다가 발각되었다.

맡겨진 사신의 임무는 수행하야 했기에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의주에서 잡혀 신안관新安館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박이창 선생이 밤중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과 배를 찔러 거의 죽게 되었다.

서장관書狀官 이익李翊이 소식을 듣고 가서 그를 보았다. 이때 박이창 선생은

“노신이 본디 오명이 없었고 충성을 다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당초에 양미를 다만 국법에 정해진 양만큼 가지고 가려 하였으나 통역관들의 말이

‘지금 마침 장마가 시작되었으니 팔참八站에 들어서서 수재水災를 만나 중도에 막혀서 양미가 떨어지면 굶어 죽을 것입니다. 더 가져 가십시오.’

하기에 나도 옳게 여겨 드디어 쌀 40 말을 더 갖고 갔습니다. 장차 그 일의 전말을 아뢰려 했는데 이미 국법에 저촉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성상을 뵈며 동료 대신들을 보겠습니까.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또 계속하여 말하기를

“의주에 도착했을 때 이런 결심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일행을 호송하는 중국인이 많으므로 타국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겠기에 여기 와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돌아가셨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승정원에 전지를 내려,

“박이창은 반드시 법을 어긴 것이 부끄러워 자살했을 것이다. 심히 측은하다. 만 리 길에 고생했으므로 나는 처음에 잡아오고 싶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들의 강력한 청에 못 이겨 따랐더니 이제 와서는 후회막급이다. 치제致祭하고 쌀, 콩, 관곽을 내려주라.”

고 하며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그 치존제문致尊祭文을 통해서 문종은

“생각하건대, 경은 타고난 성품이 탁락卓犖하고 조행操行이 곧았다. 소고昭考에게 지우知遇받아서 갑자기 발탁되어 이목耳目의 관직官職에 두었고, 후설喉舌, 계옥啓沃의 공이 많았고 논열論列의 충성을 다하였다. 사리私利를 버리고 봉공奉公하였으며 문화文華를 취하지 않고 실질實質에 힘썼다. 황고皇考께서 이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추밀樞密에 등용하시니 중외中外에서 국사에 힘써 성망聲望과 치적治積을 크게 나타냈다.

내가 즉위함에 이르러 위임委任과 의중倚重이 또한 돈독하였다. 경에게 사절使節의 노고를 부탁하여 명국明國으로 예폐禮幣를 받들고 갔던 것이다. 우연히 금령禁令에 저촉되었으나 그 정실情實은 조심하는데 있었다. 유사有司의 계청에서 법으로 보아 경을 심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하였지만 결국에는 중의衆意에 물었고 우선 법사法司의 상소한 것을 쫒아서 하였더니 경이 수치스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켜 생명을 버리고 결백潔白을 보이게 된 것이다.

경의 경개耿介함은 내가 아는 바인데도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실상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왕명을 받고 나갔다가 시체로 돌아 왔으니 유명幽冥을 달리하는 사이에 의를 등진 것이 실로 많구나. 후회後悔하여 미칠 바 없으니 내 마음을 어이하랴?

이에 호상護喪할 것을 명하여 상여喪輿는 선영先塋 아래로 돌아가게 하였고 모든 부물賻物을 내림에 있어서도 상식常式에 더함이 있노라. 사람을 보내어 비박菲薄한 치존致尊을 베풀어서 나의 부끄러움과 슬픈 마음을 펴는 바이니 영혼靈魂이 있으면 경은 이 심정을 알 지어다.“

하였다. 그리고 공이 변을 당한지 17일만에 문종께서는 좌의정, 우의정, 좌찬성, 좌찬찬을 불러서

“지금 건량乾糧 의 연고 때문에 박이창朴以昌의 변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조정에 들어가는 사신使臣이 반드시 숫자를 더해서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에 결정한 40두로써는 약간 부족할 것이니 내가 또한 그 숫자를 더하려고 한다.”

하며 문종 1년 10월 3일에 문종은 건량의 량을 공론하게 하여 40두를 더 추가시키기도 하였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로서 국법을 어긴 것은 분명 책임져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국법을 어기게 되었던 사정은 ‘부득이’한 것으로 돌아와서 해명만 잘 하면 문제될 것이 없는 사항이었다. 더구나 이미 그의 벼슬이 낮지 않은 터에 그만한 일은 충분히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구차하게 용서를 받는 대신 자살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함으로써 관료로서 법을 어긴 데 대한 대가를 치렀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지나치게 과격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권력만 믿고 함부로 국법을 어기면서 치부를 했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한 일이었기에 오히려 그의 희생을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그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 박이창이 국법을 어겼음에도 임금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장례식 때 쓸 여러 물품과 비용을 하사한 것도 그의 곧은 신념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중국에서 알고서도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서 굳이 조선에 와서야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으로 나라의 체면까지 고려할 줄 아는 그의 치밀함 역시 관료의 자세로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가 국법을 어긴 것은 청백리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그는 청백리가 되었다.

Ⅲ. 둘째 아들 박이령朴以寧

1433년(세종 15) 부사직으로, 도원수 최윤덕崔允德의 막료로 건주야인建州野人 정벌에 참여하였다. 1440년 이후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 첨지중추원사, 전라도의 병마절제사ㆍ도절제사都節制使ㆍ처치사處置使를 지냈다.

1449년 모친의 상중에 있었으나 달달족達達族의 침입에 대비하여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事로 불려나갔다. 그 후 황해도병마도절제사ㆍ공조참판ㆍ평안도도절제사ㆍ중추원사를 지냈다. 1500년에 사은사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기반을 마련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金宗瑞의 무리라 하여 무안으로 유배되고 연일로 옮겨진 끝에 1453년에 교살되었다. 또한 가족들도 남해의 섬으로 유배되고 집은 조득림趙得琳에게 주어졌다.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에서 원통하게 죽은 역대 인사들을 공양하는 대상에 들어 있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의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을 때 별단別壇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