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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 조말수의 상산지 초책고

빛마당 2014. 2. 24. 22:05

舊堂 趙沐洙의 商山誌 草冊考(1)

금 중 현


전) 상주시청 근무(사무관)

현) 녹색경북21추진협의회 추진위원

현) 상주문화원 부원장

舊堂 趙沐洙의 商山誌 草冊考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目 次>

Ⅰ. 들어가며

Ⅱ. 조선시대의 지리사록

Ⅲ. 구당본 이전의 상산지

1. 상산지 창석본

2. 상산지 청대본

Ⅳ. 구당본 상산지 초책草冊

Ⅴ. 구당본 이후의 상산지

1. 상주목읍지

2. 고종년간의 목읍지

3. 상산지 무진본

Ⅵ. 현대의 상주지리사록

Ⅶ. 글을 맺으며

Ⅰ. 들어가며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역사 속에서 역사를 창조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 가고 있다. 이에 따른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가 통용되는 시대부터 기록으로 전하게 되었고 한 지역의 지역사地域史를 근원으로 하여 나라의 국사國史가 되고, 세계의 세계사世界史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바람직한 역사를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에 부합하여 뒷사람들의 삶이 더욱 발전되도록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상주에도 시대를 대변하는 여러 편의 향토지가 간행되어 오늘까지 전하여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후대에 또 하나의 책 편으로 계속이어 질 것이다.

우리 상주의 향토지리사록의 책본 별 개요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상주지리사록 책 본별 개요

책본별

간행년도

년차

간행주체

편저자

형식

지역범위

상산지창석본

1617(광해9)

132

개인(사찬)

이준

순한문(필사본)

상주목

상산지청대본

1749(영조25)

권상일

상산지구당본(초책)

1786(정조10)

37

조목수

상산지임진본

(상주목읍지)

1832(순조32)

46

조술립

채주욱 등

상주읍지

1871(고종8)

39

관찬

미상

상주목읍지

1895(고종32)

24

순한문

상산읍지

1899(고종36)

4

인쇄본

상주군

상산지무진본

1928(왜정)

23

정동철

국․한문

상주시

상 주 지

1989

61

권태을 外

혼용인쇄본

상주군

상주시사

2010

21

상주문화원

상주시

창석蒼石 청대淸臺 구당舊堂 본이라고 함은 편저자의 호를 책 본의 이름으로 취한 것이고, 상산지 무진본은 왜정치하 무진년에 간행된 것 이라고 하여 필자가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 지역 범위의 상주목 관할은 1914년 함창군이 상주군에 편입되기 이전의 구역으로 현대의 의성군 단밀면 일원과 문경시 영순면 산양면 산북면 일부 그리고 동로면 일부가 상주목 관내였음을 뜻한다. 1871년 이후 조선조 고종년간에 간행된 세 차례의 읍지邑誌는 책머리에 서문序文과 말미에 발문跋文이 없으므로 하여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어 간행 내용 중에 환적宦蹟 조목 최종 인물목에 상주목사 재직년도를 간행년도로 필자가 추정한 것으로서 뒷날의 상고詳考가 요하는 바이다. 향토에서 간행된 지리사록은 위의 표와 같이 483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10차례에 책 본이 간행되었으나 일반적으로 우리 상주의 예전 역사지리서를 상산지라고 총칭하기도 한다.

그중에도 1928년 왜정치하 무진년에 간행된 책 본은 앞에서 간행된 내용들을 종합 증보한 성격이 있어 이것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상고하는 경우가 많다. 옛 상산지 책 본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는 관계로 현대 사람들이 보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1984년도에 당시의 상주읍장으로 재직하던 김자상씨가 왜정 무진년 간행본의 주요부분을 발췌하여 국한문문체로 1차 번역을 하였고 뒤이어 2003년도에 상주문화원에서 김자상씨에게 재차 의뢰하여 왜정과 관련된 인물 등을 제하고 대부분 번역한 바 있다.

상산지 구당본은 이 책본 이후 46년뒤에 간행된 임진본(1932, 순조32)의 기록에 의하면 간행되었음이 분명하나, 지금까지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상산지병오초책商山誌丙午草冊. 구당지舊堂誌”라는 책 본이 발견되었 그대로 둘 것 초책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이나 편집이 거의 완성된 수준으로 정서淨書되어 주요 사록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할 정도로 소중한 책 본이다. 1749년(영조25) 청대본이 간행되고 1832년(순조32) 임진본 상주목읍지가 간행되기까지 83년이 지나는 동안 이 책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공간적 시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뜻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간행되었음이 분명한 책 본이 세간에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초책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지역사의 한 부분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상산지 구당본 초책을 중심으로 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상주지리사록의 대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조선시대의 지리사록地理史錄

조선시대의 지리사록은 조선조 초기에부터 각 고을의 지지地誌인 동시에 지방사록地方史錄이며 행정사례집으로서 읍지邑誌로 총칭하여 간행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전국적인 관찬지지官撰地志의 1차 자료로 각 고을 별로 작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형되고 구체적이었다.

따라서 우리 상주에 현존하는 최초의 향토지지인 상산지 창석본이 간행된 1617년 이전에 이미 전국적간행지지의 기본인 지역사가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상주와 관련된 주요 지리사록의 책본 별 개요와 상주 지역사에 관한 주요목록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조선조 상주관련 주요지리사록의 책 본별 개요

책본별

간행

년도

년차

간행

주체

편저자

지역범위

체재

상주지역사 주요목록

경상도

지리지

1425

(세종7)

-

관찬

하연河演

금유琴柔

김빈金鑌

경상도

필사본

연혁, 속현, 부곡, 명산대천, 사방계四方界, 호수, 인구, 토성土姓, 공부貢賦 토산土産, 제언堤堰, 봉수烽燧

*본주와7개속현별로구분

신찬팔도

지리지

1432

(세종14)

7

노사신

盧思愼

강희맹

姜希孟

전 국

경상도지리지와같은 지지의 전국합본

경상도

속 찬

지리지

1469

(예종1)

15

각읍도

경상도

경상도지리지

속편으로 항목 추가

수령명현守令名賢, 제언추가, 역참과거리, 영현嶺峴, 도진渡津, 정도程途, 약제, 도자기소, 읍성, 관방關防, 유명누대樓臺, 제영제영, 원우院穻

세종실록

지리지

1454

(단종2)

22

변계량

卞季良

전 국

연혁, 속현, 부곡部谷, 명산대천, 사방계 호수, 인구, 토성, 인물, 기후, 풍속, 간전墾田 토산, 토공土貢, 자기소.읍성, 역, 봉수, 누대제大堤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1911

45

사찬

이긍익

李肯翊

전 국

필사본

임진왜란사일부, 경상감영설치, 서원, 사벌국역사, 경상도내력

조선환여

승람

朝鮮寰輿勝覽

1937

26

이병연

李秉延

전 국

목활

자본

견치연혁.속현.군명.산천.군세.토산.기차역.교량.형승.고적.문묘.단묘.사찰.학교.수비(竪碑).능총묘.누정.제영 유현(儒賢)학행.명환.충효열.문무.사마(司馬)

교남지

1940

3

정원호

鄭源浩

영 남

활자본

연혁.군명.관직.성씨.산천.읍면동리.호구.토지.부세..토산.관공서.교원校院사찰.관안官案.인물.도로.교량.제언.시장.역원.봉수,능묘.고적누정.비판碑板책판冊版

위의 표에서 보는 바 경상도지리지는 조선시대 현존하는 지리지 중 가장 오래된 책 본으로서 1392년 조선이 개국한 이후 20여년이 지난 때에 경상도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지리사록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 또한 그 지역의 역사적 연혁과 관할하는 속현이나 주요지역(부곡) 그리고 명산과 대천 호수와 인구 성씨 인공적 방제시설(제언) 세금(공부) 지역의 토산품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우리 상주의 그 당시 인구와 호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경상도지리지 내용 중 상주관내인구 및 호수

지역별

호 수(호)

인 구(명)

비 고

2,392

12,164

5,718

6,446

본주(本州)

1,845

6,397

3,132

3,265

중모현

109

822

150

672

청리

54

629

307

322

단밀

140

1,425

700

725

산양

112

1,339

667

672

공성

110

1,279

630

649

영순

22

273

132

141

표에서 보는 바 당시의 상주목 관내인구가 12,164명이고, 호수가 2,392명이니 호당 평균인구가 5명 정도이다. 당시의 호수와 인구 기준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를테면 노비의 호수와 인구도 계수에 포함되었는지 중모현의 경우 남자 인구가 여자인구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것은 어떤 연유인지 의문스러움이 많기는 하나, 일단은 조사에 의한 통계라는 점은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경상도지리지의 편찬되기까지 조정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기 초 작업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현대와 같이 교통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국가적인 큰 일을 수년 간에 걸쳐 정책적 과제로 수행하여 경상도지리지가 간행되고 7년이 지난 1432년에야 전국적 지리지인 신찬팔도지리지가 비로소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록된 내용을 각 목·읍별로 조사하고, 일정한 체재와 기준에 따른 보고서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우리 상주 어디에도 그 기록에 전하지 않고 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지리지로부터 신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100여년에 이르는 동안에 책 본 별 수록 목록을 살펴보면 앞의 책 본에 의거하여 증보增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시대가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 수록하여 사회가 발전되고 다양해졌으며 책 본의 편집 또한 더 구체적이었음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인물, 기후, 풍속, 간전, 자기소, 읍성, 역, 누, 동이 추가 되었고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역참과 거리 영현, 도진, 정도, 약제와 원우 그리고 유명한 문학작품이나 남겨두어야 할 기록물을 제영이라는 목으로 구분하여 새로이 수록하였음은 지리 사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기준에 대한 중요성을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책이 간행되기까지 편찬과정은 한왕대에 완성되지 못하고 두왕대 또는 세왕대에 이르는 경우도 있으며, 이에 관여한 인사人士도 여러 사람일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지지의 편모片貌는 조선조 이전에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간략한 것이 수록되었으나, 주․군․현의 각 소속 관계와 변천 과정을 약기略記한 것에 불과 하다. 지리지다운 기록은 세종대에 와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전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지지편찬의 시도는 세종 6년(1424)의 일이고, 그때에 저술된 지지가 경상도지리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세종 14년(1432) 왕명으로 윤회尹淮, 신장申檣 등에 의하여 편찬되어 전국지지로서의 본격적 면모를 갖추어 세종실록에 수록하였다 따라서 세종실록 지리지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조선 초기 전국적 지리지로서 국가 통치 자묘로서의 가치를 더 하였다고 할 수 있고 그 뒤의 지리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고 본다. 세조대에 와서도 집현전 학사 양성지에게 지도까지 첨부하는 <팔도지지>를 편찬하도록 명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예종 대에까지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계속추진하게 하였지만 역시 완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양성지가 계속 추진하던 <팔도지지>는 성종 대에 와서야 완성 되었다 성종은 양성지가 만든 <팔도지지>를 기간으로 삼고 규모를 다시 크게 하여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양성지 등을 총재로 임명하여 <동국여지승람>으로 책이름을 바꿔 계속 찬수撰修하게 하여 성종 12년(1479)에 도합 50권의 책으로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후 성종 16년(1483)에 다시 김종직 등으로 하여금 수정을 더하게 하여 그 이듬해에 2차로 수정을 거친 <동국여지승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이 2차 수정 본은 정에 정을 더하여 5권이 늘어난 55권의 방대한 지리사록이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도 성현成峴, 임사홍林士洪 등에게 명하여 다시 수교修校를 거쳐 동왕 5년(1499년)에 완성하여 인출하였다. 다음 중종 대에 와서도 전대의 편찬 간행사업은 계속되어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에게 명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더하고 교오校誤하여 동왕25년(1530)에 끝을 맺으니 이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 본은 권수 55권 그대로이나 다만 증보 한 곳에 신증新增 두 글자를 삽입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사회 경제적 변화가 큰 폭으로 진행되면서 지역 실정의 변화를 반영한 읍지들이 각 고을별로 작성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전국적인 지리지가 편찬되어 지방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편찬된 것이 여지도서이다. 이 책 본은 조선전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을 변화된 조선후기의 실정에 맞게 개정된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말기 내지는 근대에 이르러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 정원호鄭源浩의 <교남지> 등이 간행되었는데 일개 개인 또는 사림들이 민족적 자존감과 사명감으로 상당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발로 뛰어 지역의 유지들과 관청의 협조를 얻어 간행된 역사서로 매우 소중한 책본들이다.

Ⅲ. 구당 본 초책 이전 상산지 개설槪說

1. 상산지 창석본

창석 이준은 이 책 본을 편찬한 후지後識에 “상산은 영남중에 상유上遊이니 산수의 수려함과 인재가 많음이 옛적부터 있어왔으나, 읍지가 없어 그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상주 최초로 목읍지를 편찬한 것임을 밝혔다. 편찬하게 된 경위는 당시의 강복성康復誠 목사의 권유에 따라 착수하게 되었고, 그 근거는 때마침 자기의 친구인 구희급丘希岌이 공관에서 등사한 것이 있어서 이에 그 기본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이 책본 편찬이전에 이미 작성되었던 사록의 자료가 있어 왔음을 밝힌바 있다. 그리고 “신동국여지승람과 잡지雜誌의 기록을 유취類聚하여 강목綱目을 정비하였다고 하였다. 편찬 도중에 정호선丁好善 목사의 독촉이 있어 10개목의 조목을 정하고 자문과 순방을 하여 편집의 가닥을 잡았다”고 하였으며 “만약 수집에 미진한 사항이 있으면 하루 빨리 보완하여 속간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창석의 후지를 살펴 보건데 비록 편찬사업은 자기가 주관하였다고는 하나 목사의 청이 있었으며 독촉까지 받았다는 점은 관청의 행정력을 의지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아울러 자문과 순방을 하였다고 하여 관내 지도자급으로 하여금 충분한 이해와 협조를 얻었고 지역별로 순방하여 현지 실상을 파악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석본이 간행되고 난 뒤 그의 손자 이재관李在寬이 속록을 내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책 본의 형태는 간결한 필사본으로 번호를 붙여 목록을 먼저 수록하고 뒤 이어 차례차례 서술하였는데 그 주요 사항별 내용과 특기할만한 것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목 록

商 山 誌 目 錄

1. 與地(其目凡11) : 沿革, 屬縣, 疆域, 山川, 城池, 驛院, 橋梁, 姓氏, 風俗, 烽燧, 津渡

2. 貢賦(其目6凡) : 田賦, 土貢, 土産, 戶口, 軍兵, 徭役

3. 學校(其目凡5) : 鄕校, 書院, 書堂, 學制, 學田

4. 秩壇(其目凡2) : 壇壝, 廟制

5. 官制(其目凡4) : 牧使, 判官, 文提督, 武提督

6. 公署(其目凡4) : 客館, 州衙, 附留鄕所, 醫局

7. 名宦

8. 人物(其目凡5) : 文官, 武擧, 蔭敍, 恩錫, 孝烈

9. 古蹟(其目凡6) : 古都, 古縣, 山城, 部曲, 亭觀, 寺刹

10. 文翰(其目凡6) : 題詠, 記, 序, 碑文, 上樑文, 雜著

2) 여지輿地

(1) 연 혁

사벌국沙伐國 - 상주上州 - 상낙군上洛郡 - 사벌주 - 상주尙州 - 사벌주 - 상주尙州 - 안동도독부 - 상주목 - 귀덕군 - 안동대도호부 - 상주목(전국 8목중 하나)으로 이어져 왔고, 조선시대에 목사가 우도병마 절재부사를 겸하게 되었다는 등 지역의 변천사를 수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 9개주를 나눌 때 신라본토에 3개주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웅주였다는 것을 수록하였다.

(2) 속현屬懸

화령, 중모, 산양, 단밀, 공성, 청리, 함창, 영순, 문경, 가은현과 예천다인현의 내력을 수록하였는바 문경 가은현은 고려 공양왕 때 문경에 감무를 두고 가은을 속현으로 하였으며 예천다인현은 고려 인종 때 예천 현을 이관되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사록을 수록하였다.

(3) 진관鎭管

상주의 수령이 관할하였던 군 지휘권에 관한 영역으로 1목 1부1군 5개현을 소속하였으나, 창석본 이 후 성주목은 1679년(숙종5), 선산부는 1699년(숙종25)에 별도의 독진 체제로 이관되고 김산군과 개령, 지례, 문경, 함창, 고령현을 관장하였다.

(4) 군명郡名

상주고을의 이름이 상주上州 - 상낙上洛 - 사량벌沙梁伐 - 사벌沙伐 - 상산商山 - 타아陀阿 - 귀덕군歸德郡 등으로 변천되었음을 수록하였다. 상주의 고을 이름은 이미 경덕왕때에 상주上州에서 지금의 상주로 개정된바 있었음에도 “尙州” 명칭이 누락된 것은 어떤 연유인지 모른다.

(5) 강역彊域

상주 고을의 구역을 밝힌바 주치로부터 동서남북 사방계四方界까지의 거리를 수록하였다. 동서의 길이는 137리요, 남북의 길이는 76리 이며, 동쪽은 비안현 까지 67리, 서쪽은 보은현 까지 70리, 남쪽은 선산부까지 39리, 북쪽은 함창현 경계까지 29리로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과 보은군 마로면, 구미시 옥성면 그리고 당시의 함창현 관할지였던 공검면 양정리 또는 함창읍 금곡리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6) 산천山川

왕산王山, 갑장산, 천봉산, 구봉산九峯山, 속리산, 사불산, 병풍산, 백화산, 노음산, 서산西山, 웅산熊山, 소곡산, 만악산, 왜유현倭踰峴, 대조현大鳥峴 등 주요 산과 고개 그리고 북천, 남천, 낙동강, 화천花川, 단밀천, 송라탄松羅灘 등 주요 하천에 이어서 공검지, 불암지, 대제지, 굴수지, 기지등 주요 관개용 저수지의 위치와 둑의 길이를 덧붙여 수록하였다.

(7) 성지城池

상주읍성의 둘레가 1549척 높이가 9척이고 성안에 21개소의 정과 2개소의 지가 있었다. 성 밖에는 원래 해자垓字가 없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구가 14개월 점거하여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성 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다.

(8) 역원驛院

역원은 명령을 전달하고 행여객行旅客을 접대하는 시설인데 임난 이후 거개가 무너져 행정보고 및 하달에 문제점이 있어 보수가 급선무함을 서술하고 뒤이어 낙양, 낙동, 낙원, 낙서, 낙평, 장림 등 6개역과 남원, 안빈원등 21개원의 위치와 읍치로 부터의 거리를 병기並記하였다.

(9) 교량橋樑

북천교, 남대교, 양산지교 등3개 교량의 위치를 수록함.

(10) 성씨姓氏

본주에 김, 박, 주, 황, 고, 이, 형, 라씨와 중모 단밀 현등 지역별 거주 성씨를 열기列記하였다.

(11) 풍속

속풍색간 민풍순박俗尙嗇蕑 民風淳朴이라고 하여 간결하고 검소하며 순박하다는 권근權近의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에 주민이 적에게 부화 굴종하는 자가 없어 복호復戶를 내렸다는 것과 선조임금이 상주 고을 사람들을 찬양하였다는 교서敎書를 수록함.

(12) 봉수烽燧

회룡산, 소산, 서산, 산양현소산, 국사당 등 5개소 봉수의 위치와 전후 전달지 와의 계통을 수록함.

(13) 진도津渡

죽암竹岩과 관수觀水 나루터에 배로 도강渡江하였음을 수록함.

3) 공부貢賦

농민은 경작토지의 수확물 중에서 공여工女는 그 의직포衣織布 중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나 대체로 9등분 이외로 가중加重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판적版籍이 모두 소실되어 9개부와 9공의법을 알 수 없으니, 토지경계를 바르게 하고, 균등하게 세금을 바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아직도 개선하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살펴 보건데 예나 지금이나 토지의 소유권과 조세정책은 국가유지의 근본일진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10여년이 지났음에도 토지 공부 정리가 미진하였다는 것은 당시 지방행정의 지지부진을 엿볼 수 있다.

(1) 전부田賦

구 분

평 시 결 수

1603년(임난 이후 선조25년)

비 고

수전水田

수전

15,592

8,363

7,229

3,874

1,470

2,404

원액原額

14,054

7,378

6,676

3,874

1,470

2,404

름전廩田

628

213

415

속전續田

910

772

138

살펴 보건데 1603년의 결수는 임진왜란 후 최초의 토지 조사를 실시한 계묘량전癸卯量田인데 이것은 현재 경작되고 있는 시기전時起田을 대상으로 하여 양안量案에 등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전세를 위 표에서 보는 바 임진왜란 전 평시와 난후의 면적 감소는 현격하여 평시대비 25%에 불과 하니, 임난의 피해가 심각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평시 결수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상주목에 간전墾田이 이미 15,360결이고 그중에 수전水田 즉 논의 면적이 5분에 2라고 수록된바 있어 그때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당시는 태종13년(1413) 상주에 속하였던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청산을 충청도로 이관한 연후이기 때문에 상주의 강역은 창석본 편찬당시와 같으므로 임진왜란 이전 경작 농경지 면적은 160여년이 지난 창석본 편찬시까지 큰 변동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2) 토공土貢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물을 중앙조정에 공납하는 것으로 봉상시奉常侍, 재용감齋用監, 상의원上醫院, 혜민서蕙民署 등 14개 기관에 참기름, 인삼 등 각종 진공물품의 수량을 수록하였다는데, 특별히 초석자리 5장 정포正布 94필, 홍시 30두, 우황牛黃 1부, 화살 8부, 창 2자루, 소뿔 22쌍, 소몽동(작은 몽둥이) 10개, 은어, 연밥, 자전거 등등 농경시대에 소요되는 품목들을 열기하였다. 품목별 종류와 수량은 조정 각 관서에 수요하는 용품일체의 연간 수급계획에 의하여 각 지방 목․읍에 할당한 것인 듯 하다.

(3) 토산土産

지역특산물로서 갑장산의 옥석, 대조현의 옥등석, 호도, 감, 밤, 은어, 송이, 인삼, 백화사(흰뱀), 완초莞草 등인데, 감은 그때부터 우리 지역의 특산품이었으며 백화사가 지역 토산품이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4) 호구戶口

평시에 7만 명 이었으나, 장부로는 상고 할 수 없고 임진왜란 후(1616)에는 만 여에 불과 하였다고 수록된 바,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막심하였음을 말해준다. 호구는 그 지역의 군세郡勢인 만큼 본 책 앞의 사록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시대별 호구 비교

책 본 별

호 수(호)

인 구(인)

비 고

경상도지리지(1,425)

2,392

12,164

세종실록지리지(1,454)

2,392

5,718

평시임난이전7만

상산지창석본

약 10,000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가 간행되기까지 29년이 경과되었음에도 호수는 같고, 인구는 오히려 6,446명이 감소하였는 것은 노비나 여자를 제한 남자인구를 적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창석본 간행 시는 만 여 명이라고 하여 계수적 통계를 수록하지 않았음은 의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7년 뒤 1606년(선조39)에 병오호적丙午戶籍 조사를 실시하여 전국적 조사를 실시한 바 있음에도 당시 조사된 호구 숫자를 수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난이 끝나고 인구 파악을 위하여 호구법 또는 요패법腰牌法 등의 실시를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전란 후 급격한 인구이동이 일어난 상황에서 유리민遊離民들을 원주지로 되돌아가게 하던 가 안집安集시켜야 한다는 등 이설이 있기도 하였지만 해당지역 지방관의 주관 하에 원주민과 유랑민을 불문하고 모두 함께 가호家戶로 등록하는 것으로 하였다.

(5) 군병軍兵

평상시에는 교양을 통하여 결합하고 유시시는 법령에 따라 동원한다. 병제兵制가 문란하고 장수가 주구誅求만 일삼으니 원성이 가득하다는 실태를 서술한 후 정로위丁盧衛 등 8조의 부분에 4,425명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에 보병이 775명으로 가장 많다.

(6) 요역徭役

행정업무에 부수적으로 소요되는 인력으로서 악공, 경방자京房子, 장빙藏氷 등에 동원하되 인원은 향당鄕黨의 협의로 정함을 서술함.

(7) 학교學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시의 교육풍토가 부화浮華한 문장을 시험하는데 치우치고 학규의 퇴패가 우심하다는 서술에 이어 향교, 서원, 서당 등 당시의 교육기관을 거론하였다. 향교의 위치와 선덕초에 판목判牧 조치曺致가 지은 남루南樓가 있으며 홍여방洪汝方의 기문과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가 있다. 서원은 낙동강가에 병오년(1606) 창건한 도남서원이고 서당은 가숙지제家塾之制에 따라 각 면에 있으며, 그 절반이상을 신잠申潛목사가 창건한 것이다. 학제學制와 학전學田은 소목小目만 정하였을 뿐 내용의 서술은 없다. 그러나 당시에도 각 교육기관별로 학제와 운영에 소요 되는 경작토지 등 학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4) 질사秩祠

(1) 단유壇壝

사직단社稷壇의 위치와 정곤수鄭昆壽목사가 위판을 봉안 하였다가 임난 후에 폐지.

(2) 묘제廟制

∙문묘文廟 : 향교 북쪽에 대성전大成殿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중수하였고 난중에 송이회宋以誨가 오성위의 위판을 별도로 보관하여 화를 피하였다.

∙오현묘五賢廟 : 서원의 뒤에 있으며 <봉안상량문>과 <5현 봉안문奉安文>, <춘추 향사축문享祀祝文>, <춘추향사축문 개5위1改五爲一>, 소재穌齋 종향시從享時 <5선생 고사유문告祠由文>, <소재선생 배향配享 제문祭文>, <서애西厓선생 배향5현묘제문>, <고유5선생문> 등 기록문을 수록하였다. 오현묘는 도남서원의 묘우廟宇인 오늘의 도정사道正祠를 말한다. 도남서원은 상주 최초의 서원으로서 창설 당시의 기록과 이후 소재 노수신盧守愼과 서애 류성용柳成龍을 배향할 때 그에 관한 제문諸文을 수록하였음은 기록문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고 서원의 기능을 존현尊賢과 양사養士라고 할진데 존현의사묘祠廟와 양사의 교육을 별도로 하여 앞의 학교 조목에 구분하였음은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이현사二賢祠 :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의 봉안제문奉安祭文과 춘추향사 축문을 수록하였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현묘五賢廟와 이현사二賢祠로 묘와 사로 그 격을 달리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史實이라고 하겠다. 도남서원의 5현은 동방의 유학儒學을 창시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부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適 그리고 그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봉향하였다는 것은 5현이 국조國祖급으로 숭상할 만큼 위가 높았다는 것과 그러한 위의 위판을 모신 5현사를 우리 상주에 세웠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뒷날 옥성서원玉城書院으로 발전한 이현사는 상주출신으로서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김득배와 상주의 흥학興學을 위하여 서당 교육기반을 확고히 한 신잠목사를 고을의 합의로 숭상하였다는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성황사城隍祠 : 천봉산에 있고 만민의 평안과 풍요를 신령께 비는 곳이라고 함.

∙여 단厲 壇 : 주북(州北)에 있으며 돌림병이 없도록 천신께 기도함.

∙기독사旗纛祠 : 주의 남문 안에 쇠꼬리로 만든 큰 깃대를 세워둔 곳으로 전쟁 출병 시 이 기독신에게 제를 지냈다는 것.

5) 관제官制

(1) 목 사 : 1명

(2) 판 관 : 1명 임난 후에 없어짐.

(3)문제독文提督 : 1명 구 참하문관參下文官으로 향교의 교수직이다. 예조판서 류성용이 교수를 제독으로 하여 6품문관으로 임명하고 소속된 고을의 제독교관을 겸하였다.

(4)무제독武提督 : 1명 만력경자년(1600)에 정승 이덕형李德馨이 처음시행한 제도로서 군대의 조련 하는 중국의 진법陳法을 모방하여 시행하였다.

6) 공서公署

공서는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곳이고 민원을 해결하는 곳이니 사치하거나 퇴루頹陋해서는 안된다. 관리는 부서簿書에만 골몰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완급을 가려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일들을 처결處決하며 공청을 잘 보수하여 관리하여야 한다는 서술에 이어 동헌東軒, 주아州衙, 서헌西軒에 이어서 누정樓亭과 주요 당원堂院을 수록하였다. 그 내용은 풍영루, 관수로, 응신루, 청량각, 추월당, 천향정, 군자헌, 향사당, 존애원으로 건물이 있고 없는 것을 표기하지 않고 건물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부기附記하였다.

7) 명환名宦

상주는 강역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교통의 요충지로 주목州牧은 높은 품직이고 이에서 제상으로 승진되고 명망이 높은 분이 많았음을 관풍안觀風案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병난 시 문적의 소실로 성명과 정적政績을 잘 모르나 잡지의 기록과 부로父老의 전언을 정리하여 수록하였다고 하고, 착오나 누락이 있을까 염려되고 고증考證이 어려워 선후의 잘못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고려, 조선 등 시대별로 공적이 있는 주목州牧을 차례로 수록하고 인물별 공적을 약술略述하였다.

시대별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1) 신라 : 김유신金庾信, 이등伊登

(2) 고려 : 이주좌李周佐, 김부일金富佾, 김인경金仁鏡, 최자崔滋, 안유安裕, 김영구金永○, 안축安軸, 정택鄭澤, 전리田里 등 23명

(3) 조선 : 권집경權執經, 강구손姜龜孫, 김수온金守溫, 손중돈孫仲暾, 권기權褀, 윤탕尹宕, 전팽령全彭齡, 신잠申潛, 정곤수鄭昆壽, 류성용柳成龍, 황준량黃俊良, 고응척高應陟, 권길權吉, 김해金懈, 정기룡鄭起龍, 김용金勇, 김취문金就文, 김상용金尙龍, 정호선丁好善, 김지남金止男, 조찬한趙纘韓 등 108명수록된 인물 중에는 공적이 없고 성명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때 상주 목사를 역임하다가 이일李鎰 중앙군 대장을 영접한다는 명목으로 화북면 용화 산중으로 피신하다가 왜병이 그들이 숨어있는 것을 알고 습격하여 목숨이 경각인차 가판관假判官,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구출한바 있는 김해金懈 상주목사도 함께 수록되었음은 특기할만하다 하겠다.

8) 인물人物

“예로부터 상주는 산천의 정기를 타고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혹은 공업으로 혹은 문장으로 또는 행의行誼로 칭송을 받아 마땅히 후세에 방명芳名을 전해야 할 분이 한없이 많다. 그러나 문헌에서 고증 할 수 없고 남아있는 기록 또한 상세하지 못하며 병난 중에 사녀士女의 효절効節 한 분이 많았음에도 창황蒼荒한 가운데 인멸 됨이 많았으니 이 어찌 천고千古에 한이 아니랴...........중략........... 인물은 개관盖棺하지 아니하면 기록하지 않는 것이 구례舊例이므로 이를 따랐으니 참고 하기 바란다.”는 장황한 서술을 하였다. 이와 같은 장황한 서술은 예나 지금이나 인물의 수록으로 인한 일각의 잡다한 구설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이해토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인물의 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려 : 김식金湜, 김일金鎰, 임춘林椿, 김수자金守雌, 김득배金得培, 김선치金先致, 김득제金得齊, 정의생鄭義生, 김록金祿,조운흘趙云仡 등 20명의 성명과 행적을 수록하였다.행적의 기록중 김득배, 김선치, 김득제 삼형제와 조운흘에 관한 것이 제일 많다.

(2) 조선 : 박안신朴安信, 박이창朴以昌, 노숭盧嵩, 황보신黃保身, 조숭趙嵩, 황효원黃孝源, 김수화金守和, 홍귀달洪貴達, 한가구韓可久, 홍언충洪彦忠, 김순고金舜皐, 강사상姜士尙, 김언건金彦健, 주세붕周世鵬, 김범金範, 박언성朴彦誠, 노수신盧守愼, 김우굉金宇宏, 정국성鄭國成, 권문해權文海, 김각金覺, 김홍민金弘敏, 김홍미金弘微, 조익趙翊, 이덕형李德馨, 김정룡金廷龍, 조우인曺友仁, 김혜金蕙, 황뉴黃紐, 정심鄭心 등 201명이 수록되었다.수록된 인물중에 행적이 가장 많이 수록된 인물은 노수 신, 홍언충, 박이창이고 김정룡, 조우인, 김혜등 일부 인물은 이 책본 편찬당시(1617)에 현존하는 인물들임에도 수록되었음은 의문점이다. 이와 같이 현존하였던 인물이 수록되었다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이 책본 자체가 창석 당시 편찬한 것이 아니고 책 본의 머리에 적어둔 바와 같이 창석의 손자 이재관李在寬이 다시 작성할 때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일반적 현사賢士 인물의 수록에 이어 효열孝烈과 은사恩賜 인물이 수록되었다.

(3) 효열孝烈 : 신우申祐, 강식康栻, 서상남徐尙男, 박세정朴世廷, 김유성金有聲, 정흥세鄭興世 등 27명이 수록되었는데 이 중에 12명은 임진왜란 때 해를 입은 인사들이다.

(4) 은사恩賜 : 노홍盧鴻, 강온姜溫, 조윤성趙允成, 고흥운高興雲, 황빈黃賓, 정여관鄭汝寬, 조광헌趙光憲 등 12명이다.

9) 고적古蹟

(1)고도古都 :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아래에 있다. 성결에 언덕이 사벌 왕릉으로 전하고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한 곳이다.

(2)고현古縣 : 화창化昌, 공성功城, 청리靑里, 영순永順 등 4개 현으로 화창현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본래는 지내미 현인데 경덕왕때 개명하였으나 지금은 그 영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고 영순, 공성, 청리3개현은 그 약사와 위치를 덧 붙여 수록하였다. 살피건데 이 조목에서 중모, 화령, 단밀, 산양현 또한 고현이었음에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의문으로 앞으로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3) 산성山城

∙백화산성白華山城 : 둘레가 1904척이고 성안에 1개소의 내와 5개의 우물샘이 있었다.

∙성산산성城山山城 : 주의 서쪽 40리에 있고 무오년(1618)에 정호선 목사가 중수하였다고 하고 이어서 우리나라는 3면이 적들로 둘러싸여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성을 잘 관리 보수하여야 한다는 서술이 있음 살펴 보건데 정호선목사가 무오년에 성산산성을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무오년은 1918년으로서 이 책 본이 간행되었다고 하는 1617년 이후인 만큼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4) 부곡部曲

장천長川, 무림茂林 등 12개 부곡을 이어서 적고 주치로부터의 거리를 덧 붙여 기록하였다. 부곡의 말미에 신증新增이라고 적고 장원향壯元鄕, 사마방司馬榜으로서 장원이 계속 이어져 장원방壯元坊(장원동네)이라 하니 김범金範, 김우굉金宇宏, 조휘趙徽, 하락河洛, 조익趙翊, 김광엽金光燁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라고 수록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신증”이라고 함은 구본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기록 하는 것이다. 이 창석본 상산지는 책머리에 적은바와 같이 최초의 향지였다고 하는 것과는 일면 상통하지 않은 것인즉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책 자체가 창석이 작성 한 것이 아니고 창석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 이재관이 새로 편찬한 것이 아닌지 연구할 과제이다.

(5) 정관亭觀

본주의 산은 상령商嶺, 물은 낙강洛江이라고 하니 대체로 신령스러운 산수의 이름이 그때그때 불려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옛적부터 전해온 것이다. 이에 따라 유람 할 곳이 많으므로 그 중에 가장 경치 좋은 곳을 차례로 적는다는 서술에 이어서 정관별 소재지와 지은 사람을 간략히 적었다. 수록된 정관은 육익정六益亭, 낙지정樂志亭, 초학대招鶴臺, 가사촌佳士村, 사담沙潭, 창석정蒼石亭, 우복산愚伏山, 석천대石川臺, 서대西臺, 임천석대林千石臺 등 33개소이다. 특별히 본 책의 편찬자 창석 자신의 호를 정자의 이름으로 취한 창석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청리 오른편 골짜기 곁에 맑은 물이 흐르는 그 밑에 송석松石의 아취雅趣가 있으므로 내가 점찍은 곳이다. 중간에 이거 하면서 패정하고 정자가 있던 곳으로부터 남쪽 수십보 쯤에 마을 사람들이 새로 서재書齋를 지어 관동冠童이 풍영風詠하는 곳으로 하였으니 만족하고 축하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6) 사찰寺刹

용암사龍巖寺, 승장사勝長寺, 미륵암彌勒庵, 소림사小林寺, 용담사龍潭寺, 흥왕사興王寺 등 6개 사찰만 수록하였다. 수록된 사찰중 승장사에 대한 설명문이 제일 많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장천부곡에 있으며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에 고려 충열왕이 조정의 명을 받은 상낙군上洛君 김방경金邦慶이 동쪽의 왜구倭寇를 물리치기 위하여 싸우러 가는 것을 왕이 김해부까지 전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가御駕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2. 상산지청대본

이 책본은 1749년(영조25)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편찬한 상주읍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갈한 해서체의 글씨로 체재나 편집이 질서 정연하고 단정하다. 청대가 이 책을 편찬할 때 나이가 70세였고 1617년 창석본이 간행된 후 132년이 지난 뒤에 간행되었다. 청대본 이전에 전국적 지리사록으로 1530년(중종25) <신동국여지승람>이 있었고, 이후 87년이 지나 창석본이 간행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책 본의 머리에 <서상산지후書商山誌後>, <이준상산지본속1李埈商山誌本續一>이라고 하여 창석본 상산지의 후기後記(편집후기)를 그대로 싣고 창석본을 근거로 계속하여 속지(續誌)로 편찬하였음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상산속지범례기사5월모일향회의정商山續誌凡例己巳五月日鄕會議定> 이라고 하여 이 책의 편집기준을 향회에서 정하였음을 먼저 알리고 7개 항목을 개조식個條式으로 나열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창석이 찬술한 구지에 의하여 부득이 보완해야 할 경우는 그 밑에‘보’자를 기록하고 계속하여 이어지는 항목에는 ‘신증新增’이라는 두 글자를 써 둔다.

◦문과 음직文科蔭職은 모두 수록하고 무과武科는 수령의 관직을 지낸 사람을 수록하며 사마방司馬榜은 모두 수록하고 그 행약行略은 각주脚註로 설명하였다.

◦충절忠節과 효열孝烈은 정문 증직㫌門贈職을 받은 자를 수록하고 이외에 행실이 남다르게 지극하여 향리에서 널리 알 수 있는 자는 간략하게 그 행약을 더하여 수록한다.

◦처사處士 수재秀才로서 특별한 행실이 없으면 수록하지 않는다.

◦떠돌아 들어온 사람으로 여러 해 동안 입적하지 않고 거주한 자는 수록하지 않고 본주에서 출생한자는 이사 온 것을 구애하지 않고 수록한다.

◦명환名宦과 인물은 창석에 의하여 수록된 것은 그대로 한다.

◦“보” 신증新增한 것이 많은 항목은 부득이 매서每書마다 글자를 쓰지 않았다. 이어서 11개 항목의 목록에 이어 목록별로 차례차례 수록하였다. 이 청대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3. 청대본목록

전지前誌 창석본과 같이 11개 조목으로 구분하였으나 소목小目 일부가 삭제 또는 신증되었다.

1) 여지輿地 조목중 속현屬縣소목이 삭제되고 창석본 간행시 운영되었던 속현제도가 31개면으로 행정제도 자체가 개정됨.

(1)관제官制조 4개 소목에 영장營將 소목이 신설됨. 영장제도는 선조 33년(1600) 만력경자庚子년간에 새로이 창설되었다가 중간에 폐지하였고 다시 순치 갑오甲午 1714년에 도별道別로 5개 영을 두게 되므로 인함.

(2) 공서公署조 4개목에 “창고”목이 신설됨

(3)인물人物조 5개목중 문관文官, 무거武擧, 음서蔭敍는 같고 은사恩賜 효열孝烈을 충효忠孝와 정열貞烈로 구분됨

(4)문한文翰조 6개목중 제영題詠, 기, 서, 비문碑文,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 목을 기, 서발序跋, 문, 갈명碣銘, 제영題詠, 잡저雜著 순으로 일부 변경됨.

2) 여지輿地

창석본에 이어 사벌국의 역사를 기술 하였는데 다음 내용을 신증하였다.

◦함양박씨 세보에 박혁거세 7세손 아달라왕이 후사가 없어서 탈해왕의 손자 벌휴를 왕으로 세웠고, 아달라왕의 동생 8공자가 각각 주군州君에 봉하게 되니 사벌주는 그중에 하나인 듯 서기 185년(벌휴왕2) 아달라왕이 죽었으니 사벌국이 새워짐이 이때이며 서기 248년(첨해왕2) 신라에 멸망하여 입국立國한지 불과 60년이다.

◦신라건국 후 아달라왕이 죽을 때까지 200년이 사벌국시대인데 입국立國 위군爲郡의 고적이 전무하다.

(1) 연혁沿革

창석본과 같고 연혁의 끝에 옛 속현屬縣의 역사를 덧붙였음.

(2) 진관鎭管

창석본과 같고 끝에 “보”하여 고령高嶺은 지금 소속하지 않았음을 부기함

(3) 군명郡名

창석본과 같음

(4) 강역疆域

동서의 길이 137리를 “補”하여 180회로 하고 동은 단동면 서는 화북면 까지 라고 하였고, 남북의 넓이는 신증新增하여 남은 공성면 왜유현倭踰峴에서부터 북은 산북면 마전령까지 165리로 명정함.

“新增”으로 1주 31개면의 명칭과 주치州治로부터의 거리와 면 경계와 접한 구역의 주군州郡 명칭을 수록함.

(5) 산천山川

◦산은 신증표기 없이 상산商山을 추기하고 “新增" 하여 수선산修善山, 식산息山, 팔음산八音山 운달산雲達山, 등 27개 산을 추기追記하였고 천은 산양천, 중모천, 장천 등 7개의 천을 추기함.

◦공검지 등 5개 지 중에 대제지大堤池는 제외되었고 신증 표기 없이 연이어 묵계제, 현재 우제 등 33개의 제를 추기함

(6) 성지城池

창석본에는 1.여지조에는 성지목과 9고적조 산성山城으로 구분된 바 본책에는 창석본에 수록된 읍성에 이어 창석본 외 9고적 조산성목의 성산산성을 “신증” 수록함

(7) 역원驛院

창석본과 같고 25개 원 중에 죽현원竹峴院과 공성원功城院이 외는 금무今無하다고 함.

역원에는 기마騎馬 2필과 복마卜馬 5필 대마大馬 2필이 배치되었음을 신증표기 없이 덧붙여 수록함.

(8) 교량橋樑

북천교 등 3개 교량에 이어서 신증 표기 없이 점교簟橋와 광탄교를 추기함

(9) 성씨性氏

본주와 각면 별로 거주하는 성씨를 관향貫鄕과 함께 수록하였는데, 창석본을 근거로 하여 전반적으로 보완하였음

차) 풍속風俗 : 창석본과 같음

카) 봉수溄燧 : 창석본과 같음

타) 도진渡津 : 청석본에 이어 회동진檜洞津을 “신증”함

3) 공부貢賦

창석본에 따라 공부의 개념과 운영의 원칙을 먼저 서술하고 6개의 목별로 구분하였다.

(1) 전부田賦

창석본에 이어 “신증”으로 건융기사답험실수乾隆己巳踏驗實數라고 하여 1749년(영조25)에 조사한 실수實數를 수록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밭 : 8847결 75부 5속

◦논 : 6641결 30부

계 15489결 5부 5속으로 이중에 실제로 세금을 부과 할 수 있는 행용실전行用實田

◦밭이 6014결 57부 8속

◦논이 5415결 97부 8속

계 11430결 54부 16속이다.

(2) 토공土貢

창석본 시대에는 봉상시奉常寺 등 조정의 각 부서에 납부하던 공물을 지금은 대동비大同備로 납부 하므로 전지의 내용을 모두 수록 하지 않음.

(3) 토산 : 창석본과 같음

(4) 호구

“건융정묘호적수乾隆丁卯戶籍數라고 하여 1747년(영조23) 현제를” 신종수록 하였다.

호 수(호)

인 구(명)

비 고

28,988

90,163

44,361

45,802

살피건데, 경상도지리지 (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2392호 였었고 창석본에는 호수의 통계는 없고 평시에 인구가 7만 여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만 여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137년이 지난 시기에 계수적으로 비교적 정확한 통계수치를 수록하였다 할 수 있다.

(5) 군병軍兵

창석본에 이어 “신증” 하여 각 군정各軍丁 도합 12,162명중 그 절반을 어영장군이나 기병등 47개 부서에 배치계획 하였다. 그중에 보군步軍이라는 오늘날의 보병인 듯한 부서에 제일 많게 2858명을 배치하였으며 악공樂工 형조서사形曹書史, 상주진영 토포군관, 동래진속유황군東萊鎭屬流黃軍 등 행정부서에 필요한 모든 부서의 보조자를 구분하였고 중앙조정의 경안부京案付에 6790명 그 외 감영이나 병영에 5372명을 배치 계획하였다. 창석본에는 요역徭役이라는 목을 설정하여 악공이나 경방자京房子 등 사복제원司僕諸員을 별도로 하였으나, 본지에는 군병에 모두 포함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학교學校

(1) 항교

창석본에 이어 임진왜란에 사인士人 송이회宋以誨가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안정된 곳에 매안하여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는 기록과 정호선丁好善 목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중건重建하였다는 것 그리고 김안국金安國 도백道白이 향교를 순시하던 중에 권학문權學文 조현명趙顯明 도백의 명륜당 강학講學 그리고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향교에 도훈장都訓長을 역임하였다는 것을 “신증” 수록하였다.

(2) 원사院祠

창석본에는 서원의 명칭도 없이 다만 “서원”이라고 하여 도남서원을 유일한 서원으로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목을 달리한 원사院祠로 하고 “신증”이라는 표기 없이 도남서원을 필두로 하여 흥암興巖, 백옥동白玉洞, 옥성玉城 봉산鳳山 서원별로 그 위치와 건원년대建院年代 그리고 배향선현을 간략히 수록하였다.

(3) 서당書堂

창석본에는 집안마다 내려오는 서당이 각 면에 있었다고 말하였으나 본 책에는 하곡霞谷, 노동魯洞, 석문石門, 수양首陽 등 18개 서당을 수록하고 서당별 위치 창건년대 등 간략한 약사를 부기附記하였고 수계소修稧所 존애원存愛院 향약사鄕約社 향약당鄕約堂 등을 병기並記하여 원소院所에 본래의 기능에 교학敎學 기능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살펴보건데 창석본에는 각 면의 서당 과반을 신잠申潛 목사가 창건하였다고 서술한바 있으나 본 책에는 하곡, 노동, 석문, 도곡, 수양, 수선, 용문, 영빈, 매악, 오산, 고봉, 봉성, 백화, 봉암, 송암, 지천, 죽림 서당을 나열하고 말미에 이상 16개 서당은 모두 영천자신잠靈川子申潛 목사가 창건하였다고 수록하였다는데 위 수록된 서당의 합한 실제의 수는 17개 서당이니 숫자상 착오인지 알 수 없다.

서당으로 존립해 오다가 서원으로 승격한곳이 있으니 수양 서당이 옥성서원으로 봉암서당이 봉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수록되었음.

(4) 학제學制와 학전學田은 목록만 있을 뿐 내용은 없다.

5) 질사秩祀

창석본에는 단유壇壝, 묘제廟制 목으로 구분하였으나 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소목小目으로 구분하여 그 위치와 기능을 간단히 덧 붙였다.

(1)사직단社㮨壇 : 창석본과 같이 사직지신을 섬기는 역사적 사실을 수록하였으나 제의祭儀는 언급이 없다.

(2) 문묘文廟 : 오현묘五賢廟는 향교서원 조목으로 이기 하였고, 충열사忠烈祠를 신증표기 없이 수록하였는데 그 위치와 숙종무자(1708)에 창건하여 권길權吉 판관 정기룡鄭起龍 통상 김종무金宗武찰방과 그 결에 박걸朴傑등 임진왜란 때 순국 배향한 사묘祠廟임을 덧붙였다.

충열사는 뒷날 북천단소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충열사에 관련하여 살려 보건데 임란 때 중앙조정에서 파견한 정규군과 왜군과의 공식적인 첫 전투였던 상주 북천전장에서 순국한 열사는 위 충열사에 배향된 네분 외에 중앙군 대장이었던 순변사 이일 대장과 함께 종사관으로 참전한 교리 윤섬 좌랑 이경류 교리 박호 당시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와 임난 최초의 의병 김준신 그리고 김일 의병 등이 있다. 이분들에 대하여는 충열사가 창설된 후 30년이 경과된 영조 14년 (1738)에 성이한, 성이향 등 상주 선비들이 증연사甑淵祠라는 사묘를 창건하였다가 영조17년(1741)에 서원과 사단祠壇의 남설을 금하는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이후 정조16년(1792)에 상주성 밖 무양동에 삼충신과 일의사를 배향한 경절단景節壇을 설단하고 단 아래에 장사단將士壇과 이졸단吏卒壇을 설단하여 제향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맹진태, 김사현 등이 상소를 올려 <忠臣義士壇(충신의사단)>이라는 사호賜號를 받았고 이때 북천전쟁에서 함께 분전 순국한 낙동의 김일의사를 추배하였다. 1988년도에는 정부에서 임난북천 전투 현장을 지방문화사적지로 지정하고, 앞의 충열사와 충의단에 모셔진 8층신과 이름 없는 무명의사800여명의 위패를 합사合祀하고 매년 6월 4일(당시 전쟁 날짜였던 임진년 4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 상주시장의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 충열사와 충의단(충신의사단)에 관련하여 살려 보건데 모셔진 8충신 모두는 한 날짜에 한전장에서 순국하였는데도 충열사는 숙종 년간(1708)에 충의단은 무려 84년이 지난 정조 년간(1792)에 창설된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더구나 충의단에 모셔진 윤섬, 이경류, 박호는 조정의 촉망받는 간부급 관료였고, 김준신은 순수 민간인으로 자진참전한 임난 최초의 의사義士였음에도 뒤늦게 천양闡揚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다.

- 성황사와 여단, 기독사는 창석본과 같다.

6) 관제官制

창석본외 목사, 판관, 문제독, 무제독에 이어서 영장營將을 “신증”수록하였다. 영장제도는 선조33년(1600) 만력경자년에 새로이 창설되었다가 중간에 폐지되었고 다시 순조40년(1714) 순치갑오에 한 도에 5개소의 영을 두어 무과 당상의 관직으로 하였다,

7) 공서公署

창석본에 따라 관서의 역할과 관리 외 근무자세 그리고 건물의 관리 등에 관한 공직자의 의무를 먼저 서술하고 공서별로 그 위치와 간략한 약사를 덧붙였다. 그런데 창석본에 수록된 것과 새로 등재된 것을 “신증”으로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나열하다가 중간에 “신증”이라 표기하고 계속 적어 나갔으나 여기에도 창석본에 수록된 것을 재차 수록한 바도 있다.

대체적으로 앞의 창석본과 새로이 신증하는 것을 순서 없이 조정수록 한 것이다. 기록상 “신증” 이라고 표기하여 새로 수록 한 공서는 객관客舘, 사무당使無堂, 진남루鎭南樓, 진영鎭營, 제승당制勝堂, 사각射閣, 우림당羽林堂, 장대將臺, 무학당武學堂, 영빈관迎賓館과 의국醫局이다. 창석본에는 공서별로 간략한 설명문이 없고 주아州衙, 천향정天香亭에만 그 내력을 비교적 상세히 덧붙였으며 공서별로 유기有記라고 하여 공서의 기록이 있다고 표기하였다. 본 책에도 매 공서별 설명문이 부기附記되지는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주요공서는 상세한 설명문을 부기하였다.

(1) 객관客館 : 상산관을 말하는데 고려 때 창건하여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고 임난 때 모두 소실된 것을 현종7년(1666)에 이송령 목사가 옛 건물에 인하여 다시 지었다. 앞의 창석본에는 수록되지 않았는 것은 임난때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2) 풍영루風詠樓 : 고려 공민왕19년(1370)에 목사 김남득이 창건하고 이색이 기문을 짓고 이숭인이 시를 지었으며 우왕6년(1380)에 왜적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이인목사가 중건하고 권근이 기문을 짓고 조선성종18년(1487)에 설순조 목사가 중창하여 김종직이 기문을 짓고 중종30년(1535)에 목사 김취문이 중수하고 황준량이 상량문을 지었으나, 임난에 소실 후 다시 짓지 못하였다.

(3) 관수루觀水樓 : 낙동 나루터 머리 강기슭에 있었으나 문적이 없어 처음 것은 알 수 없고 효종3년(1652)에 목사 이지무가 중수하고 영조 9년(1733)에 김태년 목사가 개축하고 스스로 현판을 써서 달았다.

(4) 청량각淸凉閣과 추월당秋月堂은 금무今無라고만 하였다.

(5) 이향정二香亭 : 처음 이름은 연당蓮堂이라 하였고 정곤수 목사가 지었으나 임난때 소실된것을 한술 목사가 다시 지었다. 정자 좌, 우에 못을 파고 연과 화초를 심었으며 강복성 목사가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이름을 천향정天香亭이라 하였다가 이항 목사가 다시 연못을 손질하고 이향정 이라고 고쳤다.

(6) 의국醫局 : 남문 밖에 있었다. 본래는 조, 성, 강, 홍, 박, 김, 이, 전 등 8개 성씨가문에서 계를 모아 창설하였는데 중간에 관가에서 조세와 부역을 일부 감면하고 약제를 재배하여 관국官局으로 하고 8가문의 자손에게 위임하여 주관케 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상고컨대 존애원의 경우 창석본에는 공서公署조에 분류하여 기록이 있다고만 하였으나 본 책에는 학교조로 옮겨 수록하였다. 공서조에 “신증”표기 없이 새로이 “창고”목을 신설하고 양곡을 보관하는 주창州倉 공성창 등 7개창고와 말을 관리하는 고마청雇馬廳을 수록하고 그 위치와 간략한 약사 그리고 양곡을 수납하는 관찰구역을 부기하였다. 이어서 만력 병진년(1616, 광해8) 현재 곡종별 보관수량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 쌀 : 26692석, - 벼 : 13175, - 보리 : 9721, - 콩 : 35395

8) 명환名宦

창석본을 근거로 하며 왕조별로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 신라 : 김유신, 이등

(2)고려 : 이주좌, 김부일 등 23명이 수록되었는데 판관 전리田理가 누락되었음

고려시대 수록 인물중에는 중앙에 진출하여 고위관직을 지냈거나 학문이 뛰어나 시호를 받은 건축인물이 여러 명이다. 대표적으로 김부일, 정항, 정숙공, 김인경, 최자와 문묘에 종사된 안유, 안축이다.

(3) 조선조 : 창석본에는 권집경, 송인, 손중돈, 정기룡, 류성룡, 신잠 등 108명이었으나 본지에는 김해, 김구 등 73명을 제외하고 35명만 수록하고 창석본 간행이후 인물로 심락. 조개원등 28명을 “신증” 수록하였다.

9) 인물人物

창석본과 같이 공적을 쌓았거나 문장과 행의로 칭송을 받아 마땅히 후세에 전해야 할 분이 많으나 병난으로 기록이 인멸되어 누락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외가나 처가로 등 혼맥으로 인하여 향중 인물로 수록된 경우도 있다. 인물은 죽은 사람만 수록하였다는 등의 글을 서술하고 왕조별로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 문관文官

◦고려시대 : 창석본에는 모두 20명이 수록되었으나 박견朴甄 (상산박씨 시조로서 화령에서 살았다) 상산 김씨시조 김수金需 그리고 그의 아들 도, 식, 희일, 문도, 비공, 걸, 성, 지연, 치화, 분, 승귀, 상온, 등 상산 김씨계 인물과 상산박씨 박견의 아들과 이하 자손으로 원정, 천, 안의, 윤창, 등 21명을 “신증” 하여 수록하였다. 이에 반하여 상산김씨 낙성군 김선치의 아들인 김상안은 오히려 누락되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살려 보건데 본책에 새로 “신증”하여 수록된 인물은 대부분 상산김씨와 상산박씨시조와 그의 자손들로서 상주를 관향으로 한 인물들이다.아울러 고려시대 수록 인물중에는 상주를 관향한 인물로서 중국에서 난을 피하여 귀화한 상주이씨 시조 이민도 가있고 상산김씨 집안과 결혼으로 들어온 정택의 아들 정의생과 조운훌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이요 예천임씨의 시조인 임춘과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본주 장천 백원산白元山에 숨어 살았던 몽계 한 철중이 수록되었다.

◦조선시대 : 창석본에 모두 201명이 수록한 바에 이어서 김흡, 김고와 고려시대에 인물중 창석본에는 수록되었으나 본 책에서는 제외된 김상안 등 22명을 “신증” 표기로 새로이 수록 하였으며 우복 정경세의 아들 정심과 상주 황씨 시조로서 상산군에 봉해진 황효원, 소재 노수신의 동생 노극신 임진왜란에 군공으로 거제현령과 이순신 장군의 노량진전투에서 순국한 김사종 임진난 훌촌전투에서 순국한 윤식 등 20명이 제외 되었고 창석본 이 후 새로운 인물로서 이전, 이준, 전식, 강응철, 고상안, 홍여하, 이관징, 홍호, 김만절 등 223명의 명현名賢을 “신증新增” 표기로 하여 추록하였다.인물 항목에는 명환名宦이나 일반 명현名賢 그리고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은사恩賜, 등이 한 항목에 포함되어 그 성격에 따라 소목小目 별로 하지 않고 각각 별도의 목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창석본의 은사恩賜, 목은 전면수록 하지 않았다.

(2) 충절忠節

창석본에는 없던 신설된 목으로 임진 병자 양난 때 순국한 우성적, 박걸 노도응 을 수록하였다. 살펴 보건데 이 항목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있을 수 있다. 임진 병자 양난 당시 순국한 인물은 위의 3명 이외에도 많은 인사가 있었음에도 수록하지 않았는 점은 어떤 연유였는지 알 길이 없다.

(3) 효자孝子와 열여烈女

창석본에는 효열孝烈목으로 하였으나 본지에는 효와 열을 분리구분 하여 다음과 같이 하였다.

◦효자 : 고려 인물로 신우와 조선시대에 박세정등 27명이 수록된 창석본 이후 신증으로 김유성金有聲 정흥세鄭興世, 송이해宋以海, 염행검廉行儉, 조대윤趙大胤 등 36명의 효자를 “신증”하였고,

◦열녀 : 노기盧圻의 처를 비롯하여 윤씨, 박씨, 하씨 등 사대부와 유월六月 서을녀鋤乙女 정화貞化 등 23명을 신증 추록하였다. 살펴 보건데 효자와 열여 중에는 임진왜란 때 부모나 남편 또는 비록 노비이지만 상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중에는 임난 안령전투에서 5부자가 함께 순국한 김유성과 부모를 피난시키고 자기는 적과 싸워 목숨을 바친 정흥세, 권응정, 하경휘, 송이해, 하빈 등 출천지 효자가 그들이고, 김순의 처 윤씨 부장충원 처 배씨 사인 권손달의 처 김씨 사인 황위의 처 전씨 사인 정영국의 처 한씨 정병 최순형의 처 전씨 이응남의 처 한씨 사인 김체신의 처 정씨 정일외처 윤씨 하식의 처 박씨 하만계의 딸 하씨 광규의 딸 이씨 송량의 딸이요 사인 노경건의 처 송씨와 사인 정이괄의 처 송씨 형제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남계 강응철의 아들 강용정과 그의 아들 강식과 강원형제 우곡 송량의 아들 송이해와 그의 자매 형제는 대를 이어 한집안이 효열한 가문으로 세칭하여 강씨 집안 집성촌인 양촌리 터골 마을을 강효자 집으로 송씨 집안 집성촌인 공성면 효곡孝谷마을 이름이 이에 따라 지어졌다 한다.

10) 고적古蹟

사벌국 고성과 병풍산 그리고 사벌왕능에 대한 창석본의 기록을 더 구체적으로 수록하였고 기타 고적에 대한 것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사실을 수록하였다.

(1) 고도古都

◦사벌국의 수도는 알 수 없고 사벌왕능은 사벌촌 서쪽 수백 보 둔진산 밑 구릉에 언덕이 솟아 있고 담장이 무너졌다.

◦그 옆에 석탑이 있으니 고노들이 이곳을 왕묘라 전해 오고 있다. 현종13년(1672) 이초로李楚老 상주목사의 꿈에 “나는 사벌왕이다 내능이 사벌에 있는데 소와 양이 와서 침범하니 그대가 돌봐주기 바란다”고 하여 이 목사가 능을 찾아 봉축을 크게 하였다.

◦마을서쪽들 가운데 돌다리가 있고 속설에 왕활교王活橋라고 하니 이는 왕이 이다리 밑에서 적을 피한 때문이다.

◦사벌 흔국촌에 비석이나 초석이 많이 묻혀있고 5기의 석탑이 있었는데 도남서원을 창건할 때 계단과 주초로 사용하였고 지금은 1기의 탑만 남았다.

◦흔국촌 서북면 수리에 옛 산성이 있으니 이부곡 토성이라 전한다.

◦주북 석악 산록에 산성이 있으니 자산산성 이다.

◦병풍산에 고성이 있으니 사벌왕이 쌓은 것이라 전해오는데 성안에 못하나와 세 곳의 샘이있고 성 밖 동쪽은 100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어 성안에 물이 마르면 수차水車로 강물을 달아 올렸다 하며 남쪽 수리에 소금 창고터가 있다.

◦본주 성 밖 4모퉁이에 큰 사찰이 있어 사장사四長寺라 하였으니 남장南長, 북장北長, 갑장甲長, 승장勝長이다. 그 뒤 승려와 속인이 섞여 사는 것을 싫어하여 각각 근처 산중으로 옮기고 그 사적비寺蹟碑가 어느 밭 가운데 있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언제 어떻게 새워 졌는지 알기어려웠으며 만력년간(1600년대 선조년간)에 다시 갈아서 목사 류성용의 선정비로 세웠다.

◦상주上州 옛터가 주북 45리 밖 은성촌에 있으니 마을 밑에 창고와 관아의 옛터가 있으며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문무왕이 품일品日을 상주 총관으로 삼아 대장 김유신 등 18명의 장수와 함께 당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쳐 부셨다.

(2) 고현古懸

석본에는 화창, 공성, 영순, 청리 등 4개 현이었으나 본지에는 문경과 가은현 그리고 예천과 다인현의 속현 내력과 영동, 청산, 보령, 문경, 용궁, 개령, 함창, 비옥, 일선, 군위의 속현의 내력과 이현에 별도의 감무를 설치한 내력을 “신증” 수록함에 이어서 고적이라고 할 만한 유적지遺蹟地몇 곳을 다음과 같이 수록 하였다.

◦퇴옹정退翁亭 : 주북 광대천廣大遷 위에 있으니 나이가 많아 물러난 정승이 축조하였다고 하고 주초柱礎가 남아 있을 뿐 그 성명은 알지 못함.

◦운정雲亭 : “외북면 덕동에 있으니 중종 년간 경빈 박씨는 상호군 박수림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여름에도 파리가 얼굴에 앉지 않고 항시 무지개가 세수대야나 화분에 박혀 있으니 얼마 뒤 궁중으로 입궐했다. 중종과 처음만나 가락지 하나를 주었는데 이는 자기가 어릴 때 끼었던 반지 한 쌍 중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며 남은 것과 맞추어보니 꼭 맞은 한 쌍이었다.”는 신화 같은 글들을 실어 놓았다.

◦이어서 충신담忠臣潭, 절부애節婦崖, 임천석대林千石臺, 백암白巖, 군명교軍鳴郊, 봉황대鳳凰臺, 신라석탑新羅石塔, 효자리孝子里, 미륵당, 화령고성, 백화고성, 근암고성, 만경산고성, 사화진沙火鎭, 광대천廣大遷, 항갈암項葛巖, 삼정암三呈巖) 등에 대한 고사古史를 수록하였다. 그중에 백암白巖은 산양의 선암촌 남쪽으로 난계 김득배金得培가 운명한 곳이고 군명교軍鳴郊는 병풍산 북쪽에 그의 군사들이 난계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모여 들어 통곡한 곳이라고 수록하였다.

◦풍기 은풍면, 명봉산鳴鳳山 밑에 태실이 있고 그 비에 고려국 상주 명봉악鳴鳳岳이라는 글이 있다.

◦고려 공민왕10년(1361) 12월 왕이 홍건적 난을 피하여 남행南行할 때 공주가 연을 두고 말을 타고 연서역에 도착하니 상주판관 조진趙縉이 군병 1400명을 인솔하고 와서 대장군 김득배로 하여금 영솔하게 하여 광주, 이천, 충주를 거쳐 12월 복주福州에 왔고 이듬해 장수들이 홍건적을 파하고 경성을 수복하니 2월에 왕이 복주를 출발하여 3일후에 상주에 도착하니 상주 목사 최제崔帝의 대접이 불실하여 파직하였다. 안우安祐가 명에 의하여 행궁幸宮으로 오니 김용金鏞이 문지기로 하여금 죽이고 용궁에서 이방실李芳實을 산양에서 김득배를 죽여 상주에서 효수梟首하니 보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이후 왕이 상주에 있기를 8월까지이고 속리사로 떠났다.

◦고려고종 22년(1235) 몽고병이 충주에서 상주 백화산성을 공격하니 황령사 중 홍지洪之가 물리쳤다.

◦금돌성金堗城 : 백화산에 있으니 당나라 소정방의 30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정벌한 곳이다.

◦북천전장北川戰場 : 임진년 4월 24일 순변사 이일 중앙군과 왜병이 접전한 사실과 안령전투 용화동 전투 상주성 탈환전투 의병의 봉기와 승전勝戰 등 임진왜란 때 상주의 전쟁상황 전반을 “신증” 수록함. 상주의 임진왜란사를 향토사록으로는 본지에 처음 수록하였으며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장원향壯元鄕 : 주의 동남쪽 근처를 말하는데 김범金範 김우굉金宇宏 조휘趙徽 하락河洛 조익趙翊 김광엽金光燁이 계속 이어서 사마방에 장원을 하였는 고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창석본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함.

(3) 부곡部谷

창석본과 같이 장천長川 무림茂林 등 16개 부곡을 수록하고 주치로부터의 거리를 부기하였다.

(4) 정관亭觀

창석본과 같이 상주의 산수에 관한 것을 먼저 서술한바 있으나 본지에는 그 내용을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산칭 상산商山이라 함은 상서계봉商書契封 소주小註에 상은 태화지양太華之陽이라 하니 우리주의 상산은 그것으로 백화산 남쪽을 이르는 것이다. 사호四皓가 상락商洛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일명一名 지령모시상령芝嶺毛詩商嶺의 주에 이르기를 계봉상契封商은 지금의 상락上洛의 상이다”라고 하여 중국의 상산商山에 대한 고사古史를 간략히 서술하였고 “수왈水曰 낙강洛江이라 함은 낙동진洛東津이 상낙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낙동강이라는 강이름에 대한 사실을 수록하였다. 이어서 “이와 같은 영경지명靈境之名은 산수에 따라 옛적부터 전해 온 것이다. 강의 지류支流와 산의 골짜기가 모두 분수에 따라 배치되어 놀만한 곳이 많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절승絶勝한 곳을 다음에 열기烈記하고 인물의 선후는 구애拘碍하지 않는다”라는 창석본에 수록한 설명문을 먼저 서술하고 정관亭觀별로 그 위치와 건물을 지은이 또는 이름을 붙인 사람과 기록문記錄文을 남긴 선비들을 수록하였다. 창석본에는 육익정등 31개소의 누정대樓亭臺가 수록되었고 그 뒤에 지어진 정우정淨友亭 무우정舞雩亭 등 37개소를 “신증”수록하였음. 정관 조목에 수록된 것 중에는 지형지물地形地物의 경관이 아름다운 대 폭포瀑布 등과 식산폭포息山瀑怖 승장폭포, 사인대, 탁영담, 퇴치암을 경관지로 포함하였다.

(5) 사찰寺刹

창석본에 수록된 용암사, 승장사, 이륵암, 소림사, 흥왕사, 용담사 등 6개 사찰에 이어서 대승사大乘寺, 김룡사金龍寺, 윤필암潤筆庵, 남장사南長寺, 북장사北長寺, 갑장암甲長庵, 용흥사龍興寺, 동관음사東觀音寺, 망월암望月庵, 은선암隱仙庵 등 56개 사찰의 위치와 간단한 약사略史를 부기 하였다.

수록된 사찰 중에는 대승사에 관하여 산정에 사면불四面佛이 있고, 신라 진평왕이 이 산에와서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창석본에는 미륵암 라고 하여 그 당시는 화재로 사찰터만 남아 있어 대승사로 중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암자로 표기한 듯 하고, 묘적암은 나옹선사가 이 암자에서 출가하였다는 기록과 승장사에는 고려 충렬왕 때 동쪽의 왜구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한 상락공 김방경金方慶을 김해부에까지 가서 전벌하고 돌아올 때 이 절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수암䁐水癌은 수양서당 뒤 1리쯤 산 위 골짜기에 있는 암자로서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이 상주가 판관으로 도임한 곳이라는 내용을 부기하였다.

11) 문한文翰

이 조항은 내용 없이 조항만 있을 뿐이다. 추정컨대 문한편은 장문長文의 글인 만큼 별책別冊으로 편수한 것인 듯한데 이청대본에 따른 별책 본을 찾지 못하였다.

12) 총묘塚墓

창석본에 없던 것을 본지에 “신증”한 조항이다. 사벌왕릉 김선치金先致 노수신盧守愼 이전李㙉 김택金澤 김상안金尙安 황보신黃保身 황맹헌黃孟獻 김순고金舜皐 한가구韓可久 조정趙靖 김우굉金宇宏 류천지柳千之 조숭趙崇 김담수金聃壽 손만웅孫萬雄 김안절金安節 신우申祐 김홍미金弘薇 김록金祿 홍언충洪彦忠 이준李埈 전식全湜 등의 묘 위치를 부기하였다. 특별히 김택金澤에 대하여는 “상주외북 월제月堤 송현산松峴山 비석에 <진사추봉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김택지묘進士追封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 金澤之墓)”>라고 하고 아들은 함령군咸寧君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이고 사위은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이요 호는 稼亭이라는 것을 부기하였다. 이청대본의 끝에는 발문跋文(편집후기) 으로 “영조 25년(1749) 중추仲秋에 권상일權相一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616년(광해8) 창석공이 상산지 2권을 찬성하여 옥성동에 소장하였고

◦그 후 그의 손자 신와新窩 이재관李在寬공이 간략한 속록을 내었다.

◦1690(숙종6)에 향부로鄕父老 둘이 도남서원에 모여 상산지 속록을 초간하고 완성코자 하였으나 유고로 중지회고

◦금년 여름 목사 이협고의 명으로 향회鄕會에서 도감都監 3인을 선출하고 각 면이 면지를 수보하여 기초로 삼았다.

◦이와 함께 각문중의 보첩을 참고하고 구지(창석본)를 보완하여 속편으로 초고를 작성하였다.

◦여지의 지는 각읍지各邑誌에서 유래하여 총합하면 일국의 여지가 되는 것인데 여러 곳의 군읍이 모두 지가 있으나 우리 상산은 도내에서도 이름 있는 고을인데도 빠져있었는데 선배의 힘써 노력한 덕분으로 찬수撰修하여 이지가 완성되었다.

◦그 선배의 뜻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선배의 뜻에 따른 이 속편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우리 읍의 사적은 마침내 인멸되었을것이고 후인들에게 선배의 뜻을 알지 못한 바에 원망을 들었을 것이다.

◦이 지는 제승람諸勝覽에 실려 있는 것을 살려서 빠져 있는 것이 없도록 하는데 힘썼다.

◦“우리 상주 100여리 산천과 인물을 일목요연하게 알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노병중老病中 정력이 부족하여 초략草略을 면하지 못하나 이를 따라서 보완하는 군자君子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데 이 청대본이 찬술撰述 될 때까지의 제반기록이었던 각 면의 면지面誌 등 일체와 이에 참여한 인사들의 명첩名牒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 이 청대본이 1749년 간행된 후 16년이 경과한 후 1765년(영조41)에 조정에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간행할 때 우리 상주의 내용이 이 청대본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Ⅳ. 구당본舊堂本 상산지商山誌 병오丙午 초책草冊

1. 구당 조목수趙沐洙의 가계와 인물

구당 조목수의 처음 이름은 호연虎然이다. 1736(영조12)에 출생하여 1887년(고종24) 71세로 생을 마친 조선후기 상주의 큰 선비요 교육자였다. 시조는 고려시대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휘으로 풍양豊壤 조씨로 득관得貫한 분이고 조선시대에 상의중추원商議中樞院을 지낸 휘이 본향 상주에 터를 잡아 살았다.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으로 조선중기에 우리 상주의 큰선비였던 검간黔澗 조정趙靖공은 그의 7세조이고 고조高祖 입재立齎 조대윤趙大胤공은 효행孝行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은 분이다.

증조曾祖 소헌疏軒 조해趙瀣공에 이어 문학행의로 당대 사림에 추앙을 받은 중애中厓 조시경趙時經공은 그의 조부祖父이며 문과文科에 올라 지평持平을 지낸 존성재存省齋 석우錫愚공은 그의 아버지이다. 어릴 때부터 그의 조부 중애공에게 글을 익혀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깊고 넓었으며, 당대 사림士林을 이끌어 사문斯文의 표준表準이라고 할 만큼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구당舊堂은 조목수의 호인데 지금의 낙동면 승곡리 131-2번지 오작당悟昨堂(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2호 1982.02.24. 지정)의 당호이기도 하다. 당호를 ‘구당’이라고 한 것을 스스로 밝히기를 “이 집은 지은지 110년이 되었는데 선조의 옛 집을 옮긴 것으로 선조와 구업舊業과 구풍舊風을 잘 지키고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오작당悟昨堂이라 함은 예전 소학小學 경전에 “소학서중오작비小學書中悟昨非” 직역하자면 “어제(지난 날)의 잘못을 소학책을 읽고 깨닳았다.”라는 글에서 취한 것이다.

2. 구당본 상산지의 개설 및 경위

이 책본은 구당이 50세 되던 1786년 정조10년 병오丙午에 찬술하였다. 책이 간행되었다는 기록은 구당본이 간행된 후 46년이 경과된 1832년(순조32)에 간행된 관찬官撰 상주목읍지(임진본)의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顚末에 “본주의 전지前誌로 창석본과 청대본 그리고 구당본이 있다”는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지本誌는 전해지지 않고 그 초책草冊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지난해 (2011년) 겨울 어느 날 구당의 주손冑孫 조정희趙正熙씨로부터 그 초책草冊이 집안의 누구 집에 보관 된 것을 보았다는 전갈을 받고 비로소 초책사본 1부를 접하게 되었다. 초책이니만큼 완성된 책 본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초책의 편집이나 내용이나 정밀하여 그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있다고 보아 그 사실과 내용을 살려 보기로 한다.

3. 구당본의 주요내용

구당본은 전지 청대본이 간행 된 후 37년이 지난 뒤에 편수된 것으로 전지 청대본(이하전지로 통칭)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조목별 수록 내용을 살려보기로 한다.

◦전지에는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그리고 범례凡例와 목록目錄이 있으나 본지에는 표지 다음에 바로 내용을 수록하였다. 목록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전지의 순서에 따라 편수되었고 일부는 순서가 바뀐 것도 있음.

◦첫머리에 상주진商州鎭․상주목商州牧이라고 하여 목보다 진을 앞세워 군사적으로서의 상주의 위상을 매김 하였고, 강역疆域조의 주요지역과의 거리표기에 본주 연접지역은 전지와 같으나 일정日程을 병기並記 하였다.

- 경도京都 477리 5일정

- 동거東距 감영監營 180리 2일정

- 남거南距 통영 480리 5일정

◦건치연혁建置沿革전지와 같이 사벌국의 역사와 이후의 건치 과정 연혁을 서술하였으나 내용이 소략疏略

◦속현屬縣화령, 중모, 단밀, 산양 등 4개현의 간략한 약사에 이어 본주로부터 현 소재지까지의 거리를 “신증” 수록하였다.

◦진관鎭管상주진의 군사적 관할구역으로 성주목星州牧, 선산부善山府, 김산군金山郡과 문경聞慶, 고령高靈, 개령開寧, 지례知禮, 함창咸昌 등 5개의 현을 두었다는 전지의 내용 그대로 수록함.

◦군명郡名상주上州, 상낙上洛, 사량벌沙梁伐, 사벌沙伐, 상산商山, 타아陀阿, 귀덕군歸德郡으로 변화하였다는 전지의 내용 그대로임.

◦관원(官員)목사의 품계(정3품)와 이하 좌수座首 별감別監 별장別壯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 지곡관知穀官 기패관旗牌官 군관 의생 기생 관노에 이르기까지 목치牧置 관아에 수발하는 인원을 명정하고 판관判官과 교수敎授는 금무今無과라 하여 폐지된 직제였음을 표기하였다. 이어서 “신증”으로 영장겸토포사營將兼討捕使라는 직원을 명기하였는데 순치順治 갑오 창설(1774년 영조50)이라 표기하고 정3품 무관으로 대솔帶率 2인과 군관 200인 등 산하지휘인력을 부기하였다. 전지의 경우는 관제官制라고 하는 조항을 두었으며 공부貢賦조에 관안부官案府라는 목을 별항으로 하였으나 본지에는 이를 통합하여 수록하였다. 전지와 다르게 목사나 영장의 품계를 명정한 것과 영장이 토포사를 겸하는 제도의 신설년대를 표기하였음은 새로운 사실이다.

◦성씨姓氏 전지에는 본주本州와 산동면山東面 등 7개 면별로 거주한 관향貫鄕별 성씨를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본주와 단밀, 산양 등 옛날의 현과 장천長川 연산連山 등 옛 부곡部谷별 주거 성씨를 관향을 구분하지 않고 수록하였다.

◦풍속風俗“속상간색민풍순박俗尙簡嗇民風淳朴”이라고 하여 상주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다는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을 전지에 따라 수록함 이하 전지에 수록된 임진왜란에 주민州民들이 적에게 기부寄附하지 않아 조정으로부터 복호復戶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선조임금의 교서가 있었다는 내용이 모두 누락되었음

◦형승形勝전지에 따라 <동남백도지수東南百都之首요, 팔달지충八達之衝>으로서 신라 때부터 대부大府였다고 하는것에 최자崔滋, 안축安軸, 이색李穡에 이글이 전해졌음을 ‘신증’ 부기附記하였다.

◦산천山川산은 왕산과 천봉산등 18개 산․천은 북천, 남천, 낙동강 등 9개천을 수록하고 ‘신증’으로 갈가치葛可峙 증연甑淵 용유동龍遊洞 삼탄三灘을 새로이 수록하였다. 산천조에는 사불산四佛山과 낙동강洛東江에 대한 사기史記와 시문詩文 등을 비교적 상세히 부기하였다.

◦토산土産전지와 같이 옥석玉石 등석燈石 호도 감 밤 은어 등 12개 품목을 수록함.

◦진공進貢전지에는 토공土貢이라는 조목으로 “지금은 대동비납大同備納”이라고 서술되었으나, 본지에는 생꿩 생은어 소금 절인은어 호도 홍시 감 밤 마른꿩 산돼지 여우 인삼 백작약 백복령 적봉령 백복신 적작약 천남성天南星 자초용紫草茸 포황蒲黃 자고紫故 연화예蓮花蘂 차전자車前子 감국甘菊 생모과 연자蓮子 수달 간 백출白朮 등 30종을 ‘신증’ 수록하였다.

◦성곽城廓전지에는 여지조 성지城池목에 성지의 군사적 중요성을 서술한 후 읍성邑城의 규모와 시설물을 수록하였으며 임진난 때 왜병이 성밖에 10자 넓이 쯤 되는 해자垓字를 팠고 성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모두 누락되었고 읍성의 규모와 시설물도 다르게 표기되었다.

• 책본별 상주읍성 규모와 내용

책본별

둘레(척)

내 용

비 고

청대본

1,549

성안에 21개소의 정(井)과 2지(池)가 있다

구당초본

3,883

동서남북 4대문안에 4개소의 지(池)가 있다

◦관애關隘전지에는 성지 조목에 읍성과 성산산성을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을 별도 목으로 하여 그 위치와 성안에 시설물과 기타 사록史錄을 부기하였는데 전지보다는 사록의 내용이 매우 소략疏略함.

◦진보鎭堡 : 무라고 표기함

◦봉수烽燧회룡산回龍山 서산西山 국사당國師堂 산양소산山陽所山 중모소산中牟所山 소산所山 등 6개 봉수에 대한 기록이 청대본과 같음

◦면리面里전지에는 내동면內東面 등 31개면이었으나 본지에는 대평면大平面이 제외된 30개면별로 추치로부터 거리를 부기하였음

◦호구戶口

• 책본별 호구 수록내용

구 분

호 수(호)

인 구(명)

비 고

청대본

23,988

90,113

44,311

45,802

구당초본

18,642

69,443

32,292

37,351

전지 간행후 37년이 경과 된 시점에서 호수와 인구가 오히려 현격히 감소되었음은 의문이다.

◦전부田賦육전陸田(밭)이 8847결 5부 수전水田(논)이 6641결 30부로 도합면적이 15,489결로 전지 청대본과 같다. 이 또한 상당한 년륜이 경과하는 동안 경작 면적이 확장되어야 마땅하나 면적이 동일하다는 것은 의문이라 할수 있다. 이어서 전세田稅와 대동大同 균세均稅 결전結錢 선무목選武木 요역徭役 등 조세祖稅 양정量定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수록하였다.

구 분

양정(量定)

수납(收納)

비 고

전세(田稅)

쌀 1562석 12두 9도 1합 6석

콩 1609석 6두 9도 2합 6석

3월에 호조에 납부하여 허가받음

대동(大同)

작목(作木) 300동

쌀 670석 14두 8도 5합 1석

4월까지 육로로 선혜청에 납부

균세(均稅)

전세조에 쌀12석 4도 2합 4석

콩30석 11두 6도

결전(結錢)

5594양 6전 6분

강세(舡稅) 11양

전세 상납 시 같이 수납

선무목(選武木)

10동 2필

10월에 균청에 납부

요역(徭役)

시초(柴草), 탄(炭), 치(雉,) 계(鷄)값으로 매부(夫) 4양씩 납부

※양정의 석石 두斗 도刀 합合 석夕은 당시 통용하던 도량형度量蘅 단위이며, 전지에는 본지와 같이 구체적으로 세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나 본지에는 세목稅目별 구분과 수납방법까지 수록하였음.

◦봉름俸廩본지에 새로이 정한 조목으로서 관직자에게 지급되는 봉록을 정한바 다음과 같다.

∙아록위衙祿位 : 50결

∙공수위公須位 : 15결

∙수미收米 18석 콩5석 5두

∙공수미公需米 390석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120석

◦군액軍額전지에는 군병軍兵이라는 조목이었고 군병의 편성과 평시에 교양 그리고 유란시有亂時에는 법령에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결전하여야 하며 후세에 병제가 문란하고 옳은 장수가 없어 우려하는 바이니 하루 빨리 정도를 찾아야 한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본지에는 서술 없이 군별 인력만을 수록하였다.

•훈련도감 포보砲保 413명, 군향보軍餉保 5명, 어영정군御營正軍 209명, 자보資保 223명, 관보官保 617명, 금위정군禁衛正軍 389명, 자보資保 416명, 관보官保 851명, 병조기병兵曹騎兵 1,141명, 보병步兵 1,758명, 별기병別騎兵 15명, 금군보禁軍保 176명, 보직洑直 9명, 호련대扈輦隊 16명, 경역보京驛保 7명, 내취보內吹保 7명, 낙강여정落講余丁 8명, 보충대여정保充隊余丁 90명, 삼산봉군三山峰軍 300명, 악생樂生 23명, 악공樂工 5명, 보 18명, 이조유조서리보吏曹留曹書吏保 178명, 공조장인工曹匠人 222명, 전설사제원典設司諸員 47명, 주진군主鎭軍 500명, 지례신이정知禮新移定 12명, 수군사부水軍射夫 138명, 관일수官日守 30명, 율생律生 9명, 율부律夫 8명, 속오원군束伍元軍 2,691명, 복마군卜馬軍 165명, 보 165명, 병영兵營 초관哨官 1명, 기패관旗牌官 1명, 원군元軍 120명, 보 220명, 별무사군관別武士軍官 8명, 별무사기패관 20명, 양여보良余保 56명, 작령군作領軍 5명, 순영군뢰巡營軍牢 6명, 이상 총 인원 11,298명이 동원됨을 수록하였다. 전지에 수록된 인원은 총합이 12,162명으로 864명이 감원되었으나 각 군문별 인원은 대동소이함.

◦창고倉庫전지에는 공서公署조에 한목이었으나 본지에는 별도 조항으로 하였고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진휼고賑恤庫 읍창邑倉 산양 공성 중모 화령 은척 단밀창과 성산산성안에 있는 산성창山城倉의 위치를 열기列記하였다. 위 각 창중에 군기고와 대동고 진휼고는 본지에 신설하였고 각창에 재고된 양곡은 다음과 같다.

• 미 52,510석10두8도9합6석

• 콩(太) 50,087석4두4도9합5석

• 벼(조) 29318석1도2합1석

• 보리쌀(미모米牟) 7,062석3두9합3석

• 보리(맥) 670석12두5도5합3석

• 겉보리(피모皮牟) 7495석8두7도1합7석

창고는 을사(1785, 정조9)년에 허가한 바에 따라 10월에 개방하고 12월에 봉하며 곡종 중에 보리는 6월에 거둬 봉한다고 수록됨 이어서 신증으로 빙고氷庫의 위치를 끝에 수록함

◦단사壇祠사직단社禝壇 성황사城隍祠 여단廬壇 독사纛祠의 위치를 열기列記하였다. 전지에는 질사秩祠조 단유壇壝목에 수록한 바 있으나 본지에는 별도조항으로 함.

◦학교學校향교鄕校와 서원을 이어서 수록하였는데 서원으로는 도남道南 흥암興巖 옥성玉城 근암近嵒 봉산鳳山 서산西山 백옥동白玉洞 속수涑水 연악淵嶽 효곡孝谷 화암花巖 등 11개 서원에 이어 운계雲溪서원과 충열사忠烈祠를 “신증”표기 없이 추가 수록하였다. 전지에는 학교조에 향교 서원 서당 학제學制 학전學田 등을 목으로 구분하여 글머리에 학교의 중요성과 향교의 사략史略을 상세하게 밝힌바 있으나, 본지에는 교원校院별로 소재지와 소략疏略한 사실史實을 수록하였으며 학교조에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서당書堂목이 누락되었다. 본 조항에 새로이 충열사忠烈祠가 포함되었는데 사라고 학교의 기능이 아닌 존현尊賢에만 목적을 둔 사당이 이 조항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에 이미 향교나 서원의 기능이 양사養士 즉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궁실宮室 객관客官객관을 궁실宮室조로 상향上向하여 비교적 상세한 사실史實을 수록하였다. 궁실이라고 표기하였음은 실내에 국왕의 위패를 봉안한 높은 뜻을 의미 하거니와 초하루와 보름에 목사가 향망궐례向望厥禮를 올리는 곳으로 왕정시대 왕권의 상징적 성소聖所라는 것을 암시하고 본지편찬 당시에 이를 여행厲行 하였음을 엿볼수 있다. 전지에는 공서조목에 하나의 기관으로 소략한 사실만 수록하였을 뿐이었다.

◦공서公署주아州衙 사무당使無堂 제금헌製錦軒 사성헌四省軒 제승당制勝堂 힐융루詰戎樓 연군루鍊軍樓 향사당鄕射堂 양무당養武堂 영빈관迎賓館의 위치를 열기하였다. 전지에 수록되었던 추월당秋月堂 동헌東軒 서헌西軒 진영鎭營 사각射閣 우림당羽林堂 장대將臺 무학당 의국등은 모두 누락되었다. 누락된 건물중에 임난때 소실되어 당시에는 없는 건물도 있다하겠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존치되었을 것임에도 미수록 하였음은 의문이다.

◦누정樓亭전지에는 고적古蹟 조목에 분류하였으나 본지에는 신설한 조항이고 공서公署조에 포함하였던 풍영루風詠樓 응신루凝神樓 청량각淸凉閣 이향정二香亭 관수루觀水樓를 본 조에 이기移記한데 이어 자천대 한연당 합강정을 수록하였다. 조목의 첫 머리에 누정이 자리한 배경에 대한 서술없이 누정별 위치와 간단한 역사와 함께 관련된 문한文翰을 수록하였는데 풍영루와 응신루 한연당閒燕堂에 관한 기록이 많은편이다. 전지에 수록된 육익정 낙지정 개암 초학대 창석정 무정 등 61개 누정이 누락되었다.

◦역원驛院전지와 같이 낙양洛陽 낙동洛東 낙평洛平 낙서洛西 장림長林 낙원洛原 역이고 역별로 부기한 내용이 더 상세하게 수록되었음

• 역별주요수록내용

역별

주치로

부터 거리

역간거리(리)

말비치(필)

배치인력

비고

역리

낙양

주서3리

낙서30, 낙평20, 낙동40, 낙원15

2

5

94

52

16

낙동

주동40리

낙양40, 낙원40, 선산연향역40

2

8

565

64

25

낙평

주남25리

낙양20, 선산안곡20

2

2

3

5

78

19

낙서

주서30리

낙양30, 장림20

3

2

4

115

42

10

장림

주서55리

낙서20, 보은원남50

2

5

224

11

9

낙원

주북12리

낙양15, 낙동40, 함창덕통30

2

2

129

27

의 경우 전지와 같이 원별위치를 부기하였으나 본지에는 원의 현존유무有無를 신증수록하였고, 원 별로는 다음과 같다.

• 역별주요수록내용

원 별

주치로부터거리(리)위치

현존유무

원 별

주치로부터거리(리)

현존유무

죽현(竹峴)

주남 30

양산지(陽山旨)

주남15

공성(功城)

죽현 하

(일명 오리원)

서(西)

주서3

남원(南院)

주남40

어암(於巖)

주서15

안빈원(安賓院)

주남2

율원(栗院)

주서33

광제(廣濟)

주동11

부원(釜院)

주북8

이두등(泥豆登)

주동19, 주동30

북원(北院)

주북2

흥왕(興王)

주남9

송원(松院)

주북26

요재(要齎)

주동30

당제(唐梯)

주북15

퇴산(退山)

주북42

류등(柳登)

주남24

대두(大豆)

주남24

중생(重生)

주서65

장혜(長惠)

주서72

동(東)

주서56

반암(班巖

주북57

위 표에서 보는바 동원과 반암원은 본지에 새로이 수록된 것이다. 모두 23개원중에 21개원이 폐지되었고 죽현원과 공성원이 존치되었음을 알수 있다. 원에 이어서 발참撥站을 새로이 수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발참별 수록내용

발참별

주치로부터거리

배치인력

비 고

낙동(洛東)

주동37리

장(將)1군(軍)45

낙원(洛院)

주북16리

장1군45

살피건데 역은 통신과 인력 물자를 수송하는 국가 통치기능에 중요한 기관이었다. 6개역 중에 낙동역에는 565명에 이르는 많은 인력이 배치되었는데 이 역은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어 강을 건너는 수개소의 도강 인력이 포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밖에 장림, 낙원, 낙서 순으로 인력의 배치 규모가 컸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이와 같은 많은 인력에 대한 호구湖口 대책에 관한 내용 등 연구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원은 역과 역 사이에 공무수행관리가 투숙하던 국영 여관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하였다가 대부분 없어지고 선조 30년(1597) 이후에는 통신망만 전담하는 파발擺撥제도가 새로 만들어 졌다. 낙동 발참은 오늘의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이고, 낙원발참은 오늘의 상주시 낙상동이다. 전지에는 역원 조목을 여지輿地조에 목으로 책편의 앞에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책편의 뒤로 편집되었음도 고려할 사항이라 할 수 있다.

◦교량남대교南大橋 북천판교北川板橋 동술교東述橋 양산지교陽山旨橋가 수록되었으나 동술교 이 외는 모두 파괴되었다고 부기하였다. 전지의 점교簟橋와 광탄교廣灘橋는 누락되었고 동술교는 본지에 신증 수록된 것이다. 동술東述이라는 이름은 소리 나는 옛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 듯 하다. 지금의 상주시 동쪽 남천에 놓인 화개교 근방을 동수내 또는 동시내라고 하는데 옛날 이쪽에 우거진 숲(藪)이 있어 “숲이 있는 냇가”라는 것이 변형 되었는 것으로 본다.

◦도로본지에 새로이 설정된 조목이나 조선후기에 오면서 교통이 발달하므로 하여 도로의 기능이 부각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로라고는 하나 자동차가 왕래 할 만큼 넓은 도로는 아닌 것 같고 동서남북 4통5달의 연접된 지역과 그 중간에 주요지점간의 거리를 측정하여 수록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도로주요노선거리

방위별

도로노선별거리(리)

비 고

막곡(幕谷)20-함창경계7, 송현-용궁경계40

낙동40-선산경계5, 단밀-비안경계37

청남독송정(靑南獨松亭)30-안곡-선산경계10

공성-왜유현(倭踰峴)-김산(金山)경계17

낙서10-모동-황간경계60, 율원(栗院)20-보은경계40

◦도서島嶼전지에 없던 새로이 신설된 조목이나 내용은 없고 다만 무라고만 표기하였다.

◦제언堤堰전지에는 여지산천輿地山川 조목에 이어서 지제池堤를 구분하지 않고 수록된바 있으나 본지에는 새로운 조목으로 설정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지에 수록된 제언(22개제)

제언별

위치

규모(척)

제언별

위치

규모(척)

둘레

길이

둘레

길이

공검지(恭儉池)

주북27리

16647

10

생물제(生物堤)

단남

511

7

불암지(佛巖池)

주북40

1921

0.3

수정제(水淨堤)

단남

471

10

대제지(大堤池)

단밀

2896

10

대현제(大峴堤)

공성

914

4.5

기지(機池-

금폐(今廢))-

주남4

1181

3.5

옥산제(玉山堤)

공성

403

2

굴사제(堀史堤)

내북

2481

4

오감산제

(五甘山堤)

공성

605

5

오리방제

(五里坊堤)

중동

651

4

산천제(山川堤)

외남

918

5

연제(硯堤)

단동

1598

3

두모곡제

(杜毛谷堤)

외남

553

2

신제(新堤)

단동

647

6

기제(機堤)

모서

1,253

5.5

오리제(五里堤)

단남

538

3

남곡제(楠谷堤)

화동

883

6

부제(釜堤)

단남

550

진목제(眞木)

영순

1,288

3

연화제(蓮花)

산동

1,269

5

2) 본지에 신증 수록된 제언(29개제)

제언별

위치

규모(척)

제언별

위치

규모(척)

둘레

길이

둘레

길이

죽전제(竹田堤)

내북

1,070

3

분황제(分皇堤)

외동

480

3

유제(酉堤)

내북

699

2.5

언가방(言可坊)

장천

312

4

월봉제(月峯堤)

단동

939

7

상원제(上院堤)

장천

550

5

말지제(末只堤)

단동

2,465

3

월로제(月老堤)

청동

605

5

동원제(洞員堤)

단남

282

3

상초전(上草田)

청남

409

4

구좌제(仇佐堤)

외동

807

5

동정제(洞庭堤)

외남

863

9

송제(松堤)

외동

610

4

입암제(立巖堤)

모서

1,607

6

소제(小堤)

외동

650

대제(大)

화서

2,290

5

저제(猪堤)

외동

503

4

비아제(飛兒堤)

화서

1,600

5

이천제(伊川堤)

외서

1,800

5

검물석(檢勿石)

화서

1,300

5

유제(酉堤)

외북

1,447

6

매호(梅湖)

외북

834

4

남동제(襤洞)

외북

824

4

직곡(直谷)

산남

748

3.7

고윤석제(高允石)

산남

133

2

진정(辰井)

산남

170

2

대사제(大寺)

산동

600

2

이촌(梨村)

산동

1,251

3

오갈(烏渴)

대남

570

3

3) 전지에 수록되었던 제언이 누락된 곳(15개제)

묵계제墨溪堤, 우제牛堤, 산정제山亭堤, 형천제兄川堤, 이곡제泥谷堤, 무림제茂林堤, 매화제梅花堤, 덕동제德洞堤, 월당제月塘堤, 현수제賢守堤, 기제機堤, 봉산제鳳山堤, 장림제長林堤, 입석제立石堤, 동전제東前堤

살펴보건데 일반적으로 제언이라고 하면 인공적으로 물길을 막는 방재防災시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지에는 저수 기능인 지와 함께 둘레 또는 깊이를 측정하여 제 또한 지와 같이 물을 가두어 이용한 수리시설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수록된 것 중 공검지는 특별히 “함창 상주 몽리咸昌 尙州 蒙利”라고 하여 당시로서는 상주목 구역이 아닌 함창 현 구역에 있는 수리시설을 상주목 관내에까지 이용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본 조항 제언에 대햐여는 모든 제언의 규모를 부기하는등 전지보다 더 상세히 기록되었다.

◦장시場市전지에 없던 새로이 설정된 조목이다.

• 장시 별 내용

장 시 별

위 치

장시일자

장 시 별

위 치

장시일자

읍장(邑場)

재성내(城內)

2.7

철곡(鐵谷)

화동

2.7

북천(北川)

*읍장에포함

4.9

화령(化寧)

화령창고

3.8

낙동(洛東)

낙동진두

5.10

은척(銀尺)

은척창고

4.9

단밀(丹密)

단밀창고

3.8

낙원(洛原)

내북

5.10

공성(功城)

공성창고

1.6

삼탄(三灘)

외북

3.8

장공(長蚣)

외남

3.8

산양(山陽)

산남

5.10

중모(中牟)

중모창고

4.9

어염(魚塩)

무(無)

장시별 일자는 지금의 장날이 바로 그때 정한 날이라는 것이고 단밀, 공성, 중모, 화령, 은척에 있는 창고에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장이 섰음을 알 수 있다. 낙동장은 낙동강 배나드리였으며 소금을 파는 염창은 전지에 수록되었으나 본지 간행시에는 장 자체가 없어졌다 는 것이다. 이 조목이 신설되었다는 것은 사회가 발전되어 경제 활동이 산업화되고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엿볼수 있다.

◦목장牧場본지에 신설된 조목이다. ‘무’라고 표기하여 없어졌다고 하나 “분양된 말 4필을 매년 7월에 받아 길러서 다음 해 4월 본사本寺로 올려 보냈다.”라고 하였는데 본사本寺라고 함은 조정의 말 관리 부서였던 사복시司僕寺를 뜻하는 것인 듯하다.

◦불우佛宇용암사龍巖寺 승장사勝長寺 용담사龍潭寺 미륵암彌勒巖 남장사南長寺 용흥사龍興寺 동관음사東觀音寺 만경사萬景寺 청계사淸溪寺 대승사大乘寺 김용사金龍寺 묘적암妙寂庵 사사沙寺 등 13개 사찰이 수록되었다. 승장사와 용암사는 ‘금무今無’라고 하여 없어졌다고 하나 옛 기록을 상세하게 부기하였고 미륵암 또한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을 상세히 부기 하였다. 전지에는 사찰이라는 조목으로 표기하였고 본지에는 불우라고 하였으나 그 뜻은 같다. 전지에는 모두 62개 사찰이 수록되었으나 북장사北長寺 갑장사甲長寺 윤필암潤筆庵 등 49개 사찰이 누락되었다. 용암사 승장사 용담사 미륵암에 이어 “구증舊增” 표기후 남장사 용흥사 동관음사 만경사 청계사 대승사 김용사 묘적암을 열기하고 “신증新增” 표기에 이어서 사사沙寺를 수록하였다. 구증이라고 함은 전지에 새로이 신증 수록되었다는 뜻인데 전지 청대본을 상고한바 ‘신증’이라는 표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청대본의 전지였던 창석본에는 용암사, 승장사 미륵암, 소림사, 흥왕사, 용담사 등 6개 사찰만 수록된 바 있어 본 구당지에서 ‘구증’ 이라고 표기한 책본은 어떤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고적古蹟사벌국고성과 화창化昌 공성 영순 청리 등 4개 폐현廢縣에 대한 사략史略을 부기하였고, 이어서 무림茂林, 연산連山, 백원白原, 양령壤寧, 하해河海, 양보陽寶, 관제灌濟, 선은소鐥銀所, 가량加良, 보량保良, 평안平安, 주선主善, 단곡丹谷, 생물生物, 상이소上伊所 등 16개 부곡의 사략史略을 부기하였다. 16개 부곡 중 연산, 양녕, 하해, 양보, 관제, 선은소, 가량, 보량, 평안, 평산, 주선, 단곡, 생물, 상이소 등 13개 부곡은 ‘금무今無’라고 표기하여 없어졌다는 것이고, 무림, 백원, 부곡은 ‘금무’표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신증’표기 뒤에 왕활교王活橋과 봉황성鳳凰城 그리고 장천長川 부곡을 연기連記하였다. 살펴 보건데 왕활교와 장천부곡은 이미 전지에 수록된 바 있음에도 신증으로 표기되었음은 오기誤記인 듯하다. 전지에 수록된 중요한 고적사실古蹟史實이라 할 수 있는 사벌왕릉과 사벌촌의 비석을 도남서원 창건에 사용하였다는 것과 이 부곡 토성 자산산성 사장사四長寺 상주上州 퇴옹정退翁亭 운정雲亭 충신담忠臣潭 절부애節婦崖 임천석대林千石臺 백암白巖 군명교軍鳴郊 봉황대 신라석탑 효자리 광대천廣大遷 항갈암項葛巖 삼정암三呈巖 효자비 미륵당 화령고성 백화고성 근암고성 만경산고성 사화진沙火鎭 풍기은풍면 명봉산의 태실비석 고려 공민와의 상주남행南幸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장군의 죽음 금돌성金突城 백화산성과 홍지洪之의 몽고병격퇴 임진왜란 북천전장 장원향壯元鄕에 관한 사록史錄 등이 누락되었음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환적宦蹟전지에는 명환名宦 이라고 표기되었으나, 본주에 목백牧伯이나 판관判官 또는 교수敎授 등 관직을 역임한 사람 중에 공적이 있는 인물을 수록한 항목이라는 점은 같은 뜻이다. 전지와 같이 왕조별로 하여,

•신라 : 김유신 이등

•고려 : 이주좌, 김부일, 한충, 정극영, 정항, 양원준, 최유청, 최기우, 최득평, 최제, 윤혜, 김인경, 최자, 김부의, 안유, 정운경, 안축, 최충청 등 18명

•조선 : 권집경, 박이창, 이인손, 이전수, 유문통, 정종보, 이요연, 손중돈, 전팽년, 이덕창 신잠, 이진희, 홍보세, 남응노, 김취문, 정곤수, 윤탁연, 류성용, 김해, 권길, 한명윤, 정기룡, 김용, 한술, 강복성, 정효선, 김지남 조찬한, 이송령, 이초로, 조정만, 등.. 151명이 수록되었음.

수록된 인물을 살펴본바 조선조 이후에는 도임한 년도와 공적을 부기하였는데 공적이 없고 성명 또는 성명에 도임한 년도만 부기한 인물이 대 부분이다 전지에 수록된 인물이 누락 되거나 새로이 수록한 인물이 많다.

※ 전지수록 누락된 인물

- 고려조 : 김영구, 전택, 박분, 김남득

-조선조 : 안성, 하윤원, 이복시, 한암, 송인, 강구손, 권기, 황준량, 고응척, 윤국형, 심락, 박장원, 류다후, 이회, 이만원, 이식, 이종적, 김광우, 등 24명이다.

※ 본지에 신증 수록된 인물원성유, 이세항, 정식, 이징해, 권황, 박휘등 이제, 권부, 안상원, 김도협, 박사수, 이정숙, 김서노, 이종적, 이협 등이고 전지 이후에 역임한 조증회 원경렴, 이시증, 김성휴, 이민보, 조덕상, 임매, 정석달, 홍익팔, 이학원, 김이신, 심기태 등 12명을 신증 하였다. 본지에 누락된 인물 중에 고려 때 김영구, 정택은 상산관을 중수하였거나 본향에 처음 입향한 인물임에도 누락된 반면 조선시대 인물 중에 별다른 공적 기재가 없이 성명만 기록된 인물을 수록하였다는 것과 임진왜란 때 읍성을 버리고 용화산중으로 피신하였던 김해목사가 수록되었다는 것은 의외라 할 수 있다.

◦과제科第조선조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서 인물 성명에 등제년과 최종관직을 부기하였다. 전지에는 인물, 하나의 조목에 과제인물과 인물 현사賢士를 혼합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별도 목으로 구분하였으며, 중종조 이후부터 왕대별로 수록하였다. 과제인물을 별도 조목으로 분류하였음은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공식적으로 시험에 입격하여 진출하였다는 것에 더 무게가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과제 인물수록 내용 : 105명홍여강, 한겸, 강려, 김겸, 한가견, 한가구, 이곽, 이과, 신귀정, 이항, 김효급, 손등, 김광준, 노상지, 황맹헌, 강신, 권겸, 김정간, 김수화, 김사원, 노기, 조휘, 서극일, 신호, 김광복, 강사안, 강서, 강신, 조익, 강연, 강제, 강설, 황뉴, 김혜, 고상안, 최정호, 이원규, 서진병, 김의재, 정심, 김지복, 서희조, 노준명, 이양복, 한극술, 한극창, 강교년, 김호철, 조희인, 조정융, 여능, 김사락, 조우신, 전명룡, 이장, 신후제, 신후명, 이성익, 손만웅, 이재용, 이옥, 손경석, 이형상, 박세화, 김중겸, 정익, 조세후, 황익제, 황경익, 성기인, 홍도달, 류상익, 강필신, 이만유, 이지성, 황준, 하대연, 문덕겸, 김익겸, 황항, 송지현, 황개후, 정태형, 김수담, 김집, 김성흠, 류문룡, 조중직, 홍성원, 윤즙, 김이복, 서윤석, 홍상조, 권상룡, 신성택, 김용, 조석우, 고유, 김이상, 안정욱, 이 수, 노천우, 허유, 정언승, 조석호

◦인물人物전지에는 인물의 등제기준을 서술한 후에 인물의 성명과 성명 밑에 공적과 덕망행신行身德望을 부기하였으나, 본지에는 전지의 형식대로 왕조별로 인물을 수록하였다.

•고려조 : 김득배, 김선치, 김득제 등 상산3원수 형제와 상산김씨 시조 김수, 상산박씨 시조 박견, 김수자, 이민도, 조운흘, 김비궁, 김록, 신원수 등 11명을 수록함.

전지에 수록한 박원정, 박천 등 상산 박씨 박견의 자손과 김도, 김식, 김희일, 김문도, 김성, 김지연, 김조, 김치화, 김일, 김분, 김승귀, 김상곤, 등 상산김씨 자손 그리고 임춘, 박인석, 김선, 김구용, 정의생, 박안의, 한철중, 감자연, 김구, 김전, 김한, 김축, 김추, 김구용 등 28명이 누락되었음.

•조선조 : 전지에 수록된 인물줄 박안신, 김상직, 황효원, 노숭, 주세붕, 홍언충, 황효헌, 황영헌, 하락, 김범, 노수신, 김귀영, 강사상, 김충, 성윤해, 김우굉, 성람, 송량, 김순고, 김홍민, 이덕형, 김홍미, 정경세, 김각, 조정, 이전, 이준, 전식, 조우인, 고인계, 정기룡, 이연, 김안절, 류진, 김광엽, 채득기, 성헌징, 성만징, 강응철, 김담수, 이관징, 정도응, 류천지, 권상일 등 71명이 수록되었다.

전지에 수록된 인물중 홍여강, 조숭, 황보신, 김수화, 조서경, 홍귀달, 한가구, 한가견, 노우, 박수림, 장순손, 조윤령, 박언성, 노홍, 노기, 조휘, 정국성, 권문해, 조익 등 모두 413명이 누락되었음.

살펴보건데 누락된 인물중에는 소재 노수신의 입향조 노숭과 저자 구당 자산의 입향조 조숭과 조윤령 세종대에 명상 황희의 제3자로 본주에 입향한 황보신, 도덕문장에 뛰어난 홍귀달, 김혜, 조정융, 이구, 홍여하, 손만웅, 이만부, 황익제 등 여러 현달한 인사가 누락 되었음은 특이한 일이고 본지에 신증 수록한 인물은 성이 홍과 전지 청대본을 저술한 권상일이다.

◦충절忠節전지에 수록한 우성적, 박걸, 노도응에 이어서 박동형, 전극항, 미정未貞을 신증 수록하였음.

◦효자孝子전지네 수록된 고려조 신우, 조선조, 박세정, 박언성, 김희정, 임창무, 김범, 정흥세, 하경휘, 송이해, 송이필, 권응정, 박선간, 김언건, 김유성, 정일, 서상남, 이효원, 염행검, 이익화, 조구협, 김형석, 강원, 임성무, 장복례에 이어 신중으로 김씨 예귀주, 유유발, 이랑 등 모두 28명을 수록함. 전지에 수록되었으나 누락된 인물은 정은 , 하빈, 고응두, 이사즉, 이명이, 이숙, 조대윤, 강용정, 황재만, 이찬, 서명징, 김박, 조상준, 김순발, 안귀동, 임소사 등 16명이다.살펴보건데 지리사록에 인물로 수록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다 그런데 누락된 인물중에는 본지의 저자 구당 자신의 증조부인 조대윤이 누락되었음은 특이하다. 아울러 역사 인물의 수록은 편찬당시에 엄격한 검증을 거쳐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어야 하나 편찬 이전에 수록되었던 인물을 누락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다. 그러한 점에서 본지의 인물 항목은 400여 명 이상을 누락한 바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열녀烈女조선조에 김심의 처 김씨 교리 권달수의 처 정씨, 박사 강설의 처 황씨 정영국의 처 한씨, 양인 최인선의 처 김씨 최하규의 처 김씨, 이장의 첩 노씨, 송량의 딸이요 노경건의 처 송씨, 이봉의의 처 김씨, 강만보의 처 김씨, 사인 강치목의 처 채씨, 이민화의 처 권씨, 김자의 처 이씨 등 13명이다. 전지에 수록된 인물이 누락된 바는 참봉 김도의 처 하씨, 부솔 김헌의 처 양씨, 부장 충원의 딸 배씨, 김순의 처 윤씨, 사인 권병달의 처 김씨, 사인 황위의 처 전씨, 정병 최순형의 처 전씨, 이응남의처 한씨, 사인 김체신의 처 정씨, 정병 엄석산의 처 이씨, 양여 노흔의 처 현감 김유지의 종 유월이, 진사 정일지의 처 윤씨, 상란 하시지의 처 박씨, 참봉 하만계의 딸 하씨, 사인 이광규의 딸 이씨, 사인 이각의 처 신씨, 조하창의 딸 조씨, 사인 시매의 서녀 류씨, 중모 사인 황유의 처 윤씨, 장천의 사비 서을여, 송량의 딸이요 정이괄의 처 송씨, 부제학 김상직의 후예이고 사인 송도흥의 처 김씨, 사인 김수행의 처 이씨, 외남의 사비 정화 등 25명이다. 살펴 보건데 수록된 인물과 누락된 인물 모두 38명중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인물이 15명이다. 그 가운데 13명은 누락된 25명 안에 들어있다.

◦총묘塚墓전지에 수록된 김선치, 노수신, 성윤해, 김우굉, 전식, 이준, 홍언충의 묘와 신증으로 김범⁶⁴, 정기룡 묘를 수록하였다.전지의 것이 누락된 묘는 사벌왕능, 김상안, 곽득하, 고원, 이계선, 김윤종, 김자구, 황보신, 노덕기, 이전, 황맹헌, 황성원, 박안의 박윤창, 황보신의 처 홍씨, 김효우, 유제, 김거도, 한가구, 김순고, 조정, 신석번, 김득가, 조승, 류천지, 김담수, 손등, 손만웅, 김도, 김안절, 신우, 김홍미, 김록, 김흡, 김전, 김택 등 30개소의 묘이다.살펴보건데 누락된 묘 중에는 본지의 편찬자 구당 자신의 입향조 조숭과 그의 중시조 조정의 묘와 함께 수록된 인물에 버금할 만한 인물의 묘소가 누락되었음은 전통적 조선시대 조상숭배 정신과 괴리된다고 할 수 있다.

◦제영題詠<지형진사호기복地形眞似虎起伏> 이규보의 시, <사벌구기유승경沙伐舊畿猶勝景> 하륜의 시 <불견귀주낙수중不見龜疇洛水中>, 정발의 시, <거읍과상락巨邑跨商洛> 김조의 시 <천년낙수서응출千年洛水書應出> 박원형의 시, <려정천구원閭井千區遠>, 권맹손의 시, 이언적의 <북천시北川詩>, 유홍의 시, 이승인의 <풍영루風詠樓>, 이행의 시, 이황의 시, 황준량의 시, 조준의 <객사제영客舍題詠>, 김종직시, 조휘의 시, 류영길의 시 <추월당秋月當> 이황의 <관수루觀水樓 시>, 김일손의 시, 김종직의 시, 김지남의 <이향정二香亭 시>, 조찬한의 시 이정겸의 시, 오도임의 <진남루鎭南樓 시>, 이황의 시를 수록하였다. 수록된 제영시 중에 이언적의 북천시부터는 “구증”이라는 표기가 있은 후에 수록한 바 구증이라는 것은 전지에 신증으로 수록하였다는 것인데 전지 청대본에 신증으로 수록된 기록이 없다. 창석본과 청대본에는 문한文翰이라는 조에 서발序跋. 문, 갈명碣銘, 제영題詠, 잡저雜著 등의 목으로 제영이 들어있으나 조목만 설정되어 있을 뿐이고 책 본에는 편집되지 않았다. 아마도 글의 내용이 많으므로 하여 별책으로 편집된 것인 듯한 데 아직까지 그것을 찾지 못하여 안타깝다. 본 제영조에 흥암서원의 <어필비각御筆碑閣>에 숙종왕의 <비망기備忘記>와 비문 그리고 도남서원에 정경세가 지은 상량문 흥암서원 이건시 성우주가 지은 상량문, 옥성서원에 이준이 지은 상량문이 수록되었다.

◦책판冊板신설된 조항이다. 소학대전小學大全, 성학10도聖學十圖, 소재집蘇齋集, 도덕경道德經, 천기대요天機大要, 병학지남兵學指南. 두창집痘瘡集, 구수략九數略, 동춘집同春集 등을 수록하였다. 끝의 동춘집은 뒤에 다른 모양의 글씨체로 가필加筆 하였고, 본조항의 글씨 모두가 전편보다 난필인편이다.종합적으로 살펴 보건데 구당본 초책은 완성된 책 본이 아니고 초책草冊이니 만큼 공식적으로 완전한 지리사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책머리와 끝에 서발문이 없고 기록으로서 꼭 있어야 할 책편의 편집기준이 없는 것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으로 시회가 발전됨에 따라 새로운 중요한 사실史實들이 수록 된 것은 사료로서 귀중하다고 사료된다.

•새로이 수록된 항목 : 진보鎭堡, 봉름俸廩. 도로道路, 도서嶋嶼, 장시場市, 목장牧場, 과제인물科第人物, 책판冊板

이에 반하여 일부 항목은 중요한 사실임에도 누락 되거나 과도히 축소되고 후계기록이 없다는 것이 의문되는 점이라 하겠다.

◦누락된 항목 또는 주요 내용 : 도진渡津 학교 조의 서당書堂, 질사秩祠, 관제官制, 고적조의 북천전장과 몽고군과의 항쟁 수록 인물의 과도한 누락 등 이다.

Ⅴ. 구당본 이후의 상산지

이 글 머리에 거론한바 우리 상주의 향토지리사록인 상산지 중에 구당본 이후의 책 본은 순조와 고종 년 간에 4차에 걸쳐 간행된 상주목읍지 또는 상주읍지와 왜정 1928년의 상산지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 순조 32년(1832)에 간행된 상주목읍지는 조정의 명에 의하여 간행된 첫 관찬지라는 점과 편집후기 격인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顚末이 수록되었다는 점에 큰 뜻을 들 수 있다고 본다. 책 본별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상주목읍지(임진본)

순조 32년(1832) 임진년에 간행딘 것으로 청대본이 간행되고 83년 구당본이 간행되고는 46년이 지난뒤에 편찬된 관찬지리사록이다. 우선, 이 지에 수록된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읍지는 40여 조목을 기록한 사실史實이므로 소루疏漏하거나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됨

◦우리 상산에 읍지가 있었음은 구지(창석, 청대본을 지창한 듯)의 서문을 상고한 바 창석본 간행시 구희급丘希岌이라는 사람이 공관에 있던 기록을 등출謄出하였는데 그 간행연대는 정덕연간(1507년 중종 2년~1521년 중종16년)으로 추정한다.

◦창석본, 청대본, 구당본이 계속이어서 수찬한 것을 목의 예리禮吏에 보관 되어 있었으나 화제로 소실되고 겨우 몇 권 남은 것을 읍리邑吏들이 필사한 것으로 그 진를 알기 어렵다.

◦다만 청대본 등사본책 한권이 백화서당에 보존 된 것이 본가의 초본과 내용이 같으므로 이것이 진본이다.

◦금년 임진 6월(순조32년 1832)내각에서 열읍列邑의 지를 수정하여 주상의 어람에 대비하라는 명이 있어 침랑寢郞 강세은姜世誾이 읍지 보수를 관장하였으나 때마침 큰 홍수로 향인들이 서로 왕래 할 수 없어 백화서당과 권청대가에 소장된 구지(청대본)를 참고하고 상고詳考하기도 전에 관의 독촉이 있어 급작히 마감하여 영문營門에 제출하였다.

◦제출된 원고의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는 영문의 책망으로 다시 향부로鄕父老들을 모아 황찬희, 소줄립 내가(채주욱) 다시 닦는 것으로 하였다.

◦각 서당에 통문을 보내어 면지面誌를 수합하고 목사와 향대부鄕父老 등에게 신중한 심리를 하였다.

◦범례는 청대본에 준하여 먼저 강세은이 찬술한 것을 보완 첨삭添削 교정校定하였다.

◦대개 문과, 무과, 음사, 충절, 효행, 열행 등에 누락이 있어 새로 입록한 자가 고려조에 21명 조선조에 324명의 생원과 진사, 학생을 혹 구지舊誌에 의거 등록하고 또 속록으로 추가한 것이 183명이며, 세대가 바뀌거나 휘, 함의 잘못과 시호諡號의 오기誤記 등 잘못된 곳이 34곳이었다. 이상 발분의 내용요약에 이어 저술에 함께 참여한 조술립의 상산지 전말顚末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산 순조 32년(1832) 임진 6월에 영문營門

※경상감영에서 본읍으로 읍지를 수정 보완하여 어람에 대비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이에 따라 목사가 향교에 하첩下帖하고 향교는 각 서당에 통문을 보내어 향회를 개최하고 강세은 등을 선임하여 향사당鄕射堂에 장소를 정하고 읍지 수정작업을 착수하였다.

◦각 면의 자료가 홍수로 두 곳만 제출되어 빠지고 소략한 내용이 되어 영문에서 다시 수정 제출하라는 명에 따라 다시 편수자를 선임하였다.

◦창석본, 청대본, 구당본 등 구례舊例에 따라 수정 보완하고 새로 수록하는 것은 남잡濫雜하지 않도록 한다.

◦창석본은 과제科第와 인물을 합하여 일록一錄을 하였음은 후일을 고려하여 심장深長하게 처리 한 것이니 만큼 공문에 인물은 귀천상하를 불문하고 인물 그 자체만으로 취하라는 지시에 따르겠다고 목사에게 보고 하였다.

◦즉 인물의 등록은 생원, 진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관직이 없더라도 문장과 행의가 특별한자는 모두 수록한다.

◦이와 아울러 봉대의 강승지(강세륜)와 우천의 류도정(류심춘) 등 관내 유력한 문중의 대표에게 자문을 구한 즉 과제와 인물을 별조別條로 하지 않은 청대본의 예를 고치는 것은 부당하고, 영문에 제출한 읍지가 환퇴(되돌려 온 것)된 것은 급박한 중에 대강 마감한바 착오와 흠결이 있어 향증의 공의公議가 붕등崩騰한 것은 당연하여 다시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다.

◦도남서원의 회중에서 원사에 입향한 선배를 1건에 병록幷錄하여 향중에 두었다가 후일後日을 기다린다고 하였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장천 조씨 문중의 두승지 공은 아무런 주각註脚(※이름밑에 설명문)이 없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하여 본면의 면지를 살펴본바 상세히 입록되어 있으므로 양해된 것으로 안다.

◦드디어 창석, 청대, 구당의 전지前誌와 강세은이 새로 편집하여 영문으로부터 환퇴된 신지를 참고하여 연혁, 명호, 산천, 정사亭榭 등을 이 시대 현상에 따라 편집하였다.

◦인물편은 청대본의 예에 따라 증보하였으니, 혹 소루疏漏한 것과 흠결이 있는 것은 향의鄕議로 결정하였다.

◦읍지가 완성되어 전지와 비교한 바 인물편에 있어 고려조에 사환仕宦 21인 조선조에 문과 70인, 무과 23인, 음사蔭仕 173인 충절 6인 효행 23인 열행 28인이 빠졌고 잘못된 곳을 수정한 곳이 34곳이며 금지중今誌中에 생원 171인을 구지의 예에 따라 새로 수록하였고 학생 6인은 구지 그대로 두었다.

◦일을 착수한지 15일에 마치고 돌아갔다.

위에 채주욱의 발문(편집후기)과 상산지 전말을 살펴 보건데 서술의 내용이 인물편의 수록 대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영문(경상감영)의 공문에 인물은 귀천상하를 막논하고 다만 그 인물됨에 대한 것만으로 하라는 것이 라든지 향내 유력인사들께 초안을 보여 교열을 받는 과정에 여러 사람들을 듣고 인물에 대한 의견에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라는 등 편집과정에 향내 여론이 비등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인물이외에 연혁이나 산천과 고적 등에 관하여는 별다른 언급이 없이 전지 창석, 청대, 구당본을 그대로 이기 한 것이다. 본 상산목읍지와 전지 구당초본과 청대본과의 조목별 내용을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책 본의 첫 장에 읍성을 중심으로 한 상주 목치牧治의 지도를 수록한 주요 산천과 건물 그리고 서원, 사찰, 역원, 나루터와 연접주군의 경계 지점을 표기함.

2) 건치연혁建治沿革 : 전지와 같음

3) 속현屬縣

전지의 화령, 중모, 산양, 단밀 등 4개현에 화창, 공성, 영순, 청리현의 사실史實을 부기하였다.

4) 군명郡命 : 전지와 같음

5) 관직官職

창석, 청대본은 관제官制 조안에 하나의 목이었고 구당본에는 관원官員으로 이름하였으나 내용은 같다.

6) 성씨姓氏

성씨 밑에 관향貫鄕을 부기한 전지와 다르게 지역별로 성씨만 나열하였다.

7) 산천山川

왕산 등 10개 산과 낙동강 남·북천 위수渭水 금수錦水 등 5개 천이 수록되어 전지 수록분 중 여러 개소가 누락 됨.

8) 풍속風俗 : 전지구당본과 같이 간단함

9) 방리坊里 : 전지와 같이 31개면 그대로 임

10) 호구戶口

◦전지前誌와 임진본 당시 호구상황

책 본 별

호수(호)

인 구(명)

비 고

본 지

17,877

65,035

30,624

34,411

구당본

18,642

70,443

32,292

37,151

청대본

28,988

90,163

44,361

45,802

창석본

평시 인구 7만 임난후(1616) 호적상 겨우 만 여 명

※ 구당본 인구합계 70,443은 60,443을 착오 계산 한 듯함.

11) 전부田賦

한전旱田 8,847.75 수전水田 6,641.30 도합 15,489.05 결인데 청대본과 구당본 모두 같다. 이어서 전세田稅 위태位太 대동大同, 수미需米, 균세均稅와 화세火稅 등 조세의 수량을 명정하였다.

12) 군액軍額

훈련도감 포보砲保 외 44개 부문으로 전지 구당본과 대동소이 하다.

13) 성지城池

읍성 1개성을 둘레 3,888척, 높이 9척 동서남북간에 4개 못(池)이 있다고만 하였다.

14) 임수林藪

새로이 신설된 조목이다.

◦서수西藪 : 주서 5리 북천위에 울창한 숲으로 조령朝令에 의하여 심고 보호하였으므로 어령수御令樹라고 속칭함.

◦율수栗藪 : 주동5리에 있고 예부터 이르기를 서쪽의 산형山形이 지네가 웅크리고 읍기邑基를 침노하는 것 같아 지네와 상극한 밤나무를 서로 바라보는 쪽에 심어 독기를 제거하고자 한다는 설이 있음.

15) 창고倉庫

군기고軍器庫와 대동창大同倉 그리고 읍창과 산양, 공성, 화령, 중모, 은척, 단밀 견훤 등 지역창을 수록하고 주치로부터 거리를 부기하였다. 구당본에는 진휼창賑恤倉이 있었는데 누락되었고, 견훤창은 전지의 산성창山城으로서 견훤산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전지 청대, 구당본에는 각 창고별로 재고 양곡을 부기 하였으나 본지에는 누락됨.

16) 군기軍器

본지에 새로 수록된 항목이다. 군무軍務에 소요되는 장비의 목록과 수량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흑각궁黑角弓 21장, 산성조山城條 20장

◦상각궁常角弓 3장, 교자궁校子弓 75장

◦산성조 175장, 장전長箭 320부

◦산성조 101부, 편전片箭 249부

◦통아桶兒 249부, 산성조 81개

◦장창長鎗 95자루, 산성조 25자루

◦환도環刀 94자루, 단혈예單穴銳 1자루

◦삼혈예三血銳 2자루, 정 2면

◦삼지창三枝 2자루, 요령搖鈴 1개

◦화승火繩 1152사리, 행고行鼓 19좌

◦소쟁小錚 15면, 화전火箭 16자루

◦부자釜子 46자루, 조총鳥銃 731자루

◦산성조 13자루, 화약火藥 4489근 14양

◦산성조 100근, 연환鉛丸 1,345,707개

◦산성조 3,460개, 거마창拒馬鎗 320좌

◦남비개南飛蓋 217개, 산성조 13개

◦화약승 432개, 산성조 13개

◦이약통耳藥桶 267개, 화철火鐵 431개

◦환추環錐 432개, 승철菱鐵 1,900개

◦군막軍幕 61부, 사관혁射貫革 5좌

◦고관혁砲貫革 20좌, 기관혁騎貫革 2좌

◦왜의倭衣 1건, 수기帥旗 1면

◦백기白旗 1면

수록된 군기 중에 산성조라고 함은 산성조 앞의 품목과 같은 것을 산성에 소요되는 수량을 뜻한다.

17) 관액關扼

전지와 같이 화령의 성산상선城山山城 1개 산성이다.

18) 봉수烽燧 : 전지와 같다.

19) 학교學校

향교와 도남, 흥암, 옥동, 옥성, 근암, 봉산, 서산, 속수, 연악, 효곡, 화암 등 17개 서원을 열기하고, 서원별 위치와 배향인물을 수록하였으며, 이어서 충의단忠義檀을 추가수록 하였다.

20) 단묘壇廟 : 전지와 같다.

21) 능묘陵墓

사벌왕묘, 김선치, 성윤해, 노수신, 김우굉, 김범, 홍언충, 이준, 전식 묘의 위치를 수록하였으나 전지의 정기룡 묘가 누락되고 사벌왕묘를 신증수록 함

22) 불우佛宇

용암사, 한산, 용담, 미륵, 남장, 용흥, 대승, 김용, 동관음, 만경, 청계사 등 11개 사찰이 수록 되었는데 전지 구당본에 수록된 묘적암과 사사가 누락되고 한산사를 추기하였으나, 청대본에 52개 사찰이 수록된 바에는 크게 부족하다.

23) 공해公廨

전지의 공서公署항목이다. 재금당, 사무당, 청유당, 객관, 제승당, 우림당, 영빈관, 향사당이 수록됨. 전지에 수록된 주아, 사성헌, 힐융루, 연군루, 양무당이 누락되고 객관, 우림당, 청유당이 신증됨.

24) 누정樓亭

전지에 수록된 풍영루, 추월당, 청량각, 이향정, 자천대, 관수루, 합강정 등 7개 누정에 이어 태평루, 범향정, 대산루, 정우정, 병천정을 수록하고 뒤이어 전지 청대본 고적조에 수록된 충신담, 절부애 임천석대, 백암, 효자비를 본 항에 수록함.

25) 도로道路

목치牧治 구역 동서간 137리 남북간 76리 동쪽 비안현 경계까지 67리 남쪽 선산부 경계까지 39리, 서쪽 보은현까지 70리, 북쪽 함창현 경계까지 29리, 경상감영까지 180리, 경상우병영까지 360리, 경도까지 480리 등을 수록함.

전지에는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경유로선과 거리를 표기 수록하였으니 본지의 도로라는 항목과는 객관적 개념상 견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6) 교량橋梁 : 전지와 같다.

27) 도서島嶼 : 전지와 같다.

28) 제언堤堰 : 전지와 같다.

29) 장시場市

읍시, 공성, 장홍, 중모, 저암, 화령, 은척, 산양, 낙동, 단밀 등 10개 시장외 위치를 수록함. 전지에 수록된 북천, 은척, 철곡, 삼탄, 장과 어염魚鹽 장시는 누락된바 본지 편찬당시에 폐지된 것으로 짐작된다. 전지에는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을 명정하였으나 본지에는 누락되었다.

30) 역원驛院 : 전지와 같음.

31) 목장牧場 : 무

32) 형승形勝 : 전지와 같음.

33) 고적古蹟

사벌국 고성 1개소만 수록하고 전지의 화창현과 공성, 영순, 청리 패현의 사실기록 그리고 무림 등 16개 부곡 또는 소와 왕활교, 봉황성의 사실기록은 누락됨.

34) 토산土産

옥석玉石 등 12종이 수록되었다. 이 중에 전지에 수록된 등석燈石이 누락되고 철이 추가 수록됨.

35) 진공進貢 : 생치生雉 등 30종으로 전지와 같다.

36) 봉름俸廩 : 전지와 같음

37) 환적宦蹟

전지와 같이 왕조별로 신라의 김유신, 이등, 고려의 이주좌, 조선의 권집경 등 총 235명이 수록되었다. 이 가운데 전지 이후 환적인물이 22명이고 공적기록 없이 성명만 수록된 인물이 상당히 많다.

38) 과거科擧

고려 김희일 등 22명, 조선 206명 도합 228명이 수록되었고, 과제별 등과 내용과 관직 그리고 간단한 가계를 수록하였으며, 전지에 수록된 108명 보다 월등히 많다. 이 중에는 전지에서 누락된 고려인물 22명과 전지 간행이후에 등재된 인물이 추가 된 것도 있겠으나, 새로이 수록된 인물이 상당하니 그 사유를 알 수 없다.

39) 인물人物

고려시대 박견 외 10명과 조선조에 박안신 외 88명이 수록되었다. 전지에는 모두 82명이 수록된바 전지 강행이후 새로운 인물이 등재된 것이다. 청대본에 500여 명이 수록된 것에 비하면 소략한 편이다.

40) 충절忠節

전지의 우성적, 박걸, 노도응, 박동형, 전극항과 미정에 이어 김준신, 김일, 김홍민, 김유성, 윤식, 이돈서, 채득기를 신증 수록하였다. 신증수록 된 인물은 임진, 병자, 양 난에 공을 세운 인물을 추가 수록한 것이다.

41) 효행孝行

전지와 같이 고려조의 신우를 비롯하여 모두 42명이 수록됨. 전지에 28명이 수록된 바 14명이 증가 된 것은 책 본 간행 년 간에 새로운 인물도 있겠으나, 일부는 효행 발천이 새로 이루어진 경우인 듯하다. 그러나 전지에 이미 수록된 바 있는 김유성과 임성무가 누락되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42) 열행烈行

모두 조선조 인물로 17명이 수록됨. 전지에 13명이 수록된바 4명 증가분은 책본 간행 년 간에 새로운 인물이거나 열행 발천이 새로 이루어진 것이다.

43) 제영題詠

누정이나 서원 또는 사우祠宇별로 전해온 글의 전문全文을 수록하였다.

◦향교鄕校 : 홍귀달의 기문, 강세륜의 명륜당 기문

◦향사당鄕射堂 : 이준의 기문, 주세붕의 제명서

◦지락헌至樂軒 : 채수의 기문

◦수석정水石亭 : 성헌징의 기문

◦도남서원道南書院 : 정경세의 상량문

◦흥암서원興巖書院 : 성우주의 상량문

◦어필비각御筆碑閣 : 숙종의 비망기備忘記, 권상하의 음기陰記

◦옥성서원玉城書院 : 이준의 상량문

◦서산서원西山書院 : 송명흠의 상량문

◦충의단강당忠義壇講堂 : 성재주의 상량문

◦관수루觀水樓 : 김일손의 시, 이황 의 시

◦서헌西軒 : 김종직의 시

◦연악서원淵嶽書院 : 김범의 시, 목사 정호선의 시

◦봉산서원鳳山書院 : 노수신의 시

◦계정溪亭 : 정경세의 시

◦존성당尊性堂 : 구봉령의 시

◦매호정梅湖亭 : 류성룡의 시

◦태극정太極亭 : 송명흠의 시

◦영빈관迎賓館 : 정종로의 시

◦소리정素里亭 : 정종로의 시

◦구만정九灣亭 : 김재현의 시

44) 책판冊板

소장처所藏處별로 보유하고 있는 책판을 수록하였다.

◦부내府內 : 소학대전小學大全 동은집垌隱集, 도덕경道德經

◦도남서원 : 소재집蘇齋集, 우복집愚伏集

◦서산서원 : 선원집仙源集, 청음집淸陰集

◦흥암서원 : 동춘집洞春集

◦남장사 : 구원집九畹集

◦옥성서원 : 월간집月磵集, 창석집蒼石集

◦근암서원 : 우암집寓庵集, 한음집漢陰集

2. 고종년간의 목읍지

전지가 1832년(순조32) 상주 목읍지로 간행되고 39년이 지난 1871년(고종8)과 1895년(고종32) 및 1899년(광무3)에 편찬 되었고, 근세에 와서 한국지리총서 경상도읍지, 영남읍지 등의 지리지에 상주 목편으로 수록된바 있다. 대체적으로 고종 년간에 간행된 책 본은 그 내용이 전지 창석, 청대, 구당지와 순조 년 간의 목읍지를 참조하여 증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증보 또는 수정된 내용의 상고는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3. 상산지 무진본

1) 1928년 왜정 치하 때에 간행 되었다. 지는 모두 7권3책으로서 1914년 상주와 함창의 행정구역이 통합된 후 처음으로 간행된 인쇄본이다. 그 1책 1, 2권은 대체적으로 창석본과 청대본의 편집 순서에 따라 임진본까지 증보한 내용으로서 책의 첫머리에 창석이 지은 창석본의 서상산지후書商山誌後에 이어서 청대본의 청대 권상일이 쓴 발문跋文을 수록하고 상산지 모록에 이어 내용을 편수한 연후 책의 끝부분에는 임진본에 편저자의 일원이었던 채주욱蔡周郁이 지은 발문跋文과 조술립趙述立이 지은 상산지 전말鎭末을 수록하였다.

2) 2책 3,4,5권은 전지들을 근거로 하여 목록이나 내용을 대폭 수정 편찬한 것이다. 관제官制나 공서公署, 학교學校 그리고 명환名宦 조목예는 군청에 행정관, 군수, 경찰서, 재판소, 사법관, 헌병분대장, 우편국, 은행소, 금융조합 등 왜정 당사의 행정제도에 따라 정해진 관서별 기관장을 수록하였다.

이 책본은 우리 한민족에 치욕의 역사 기록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진데 통분을 머금고 자강自强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2책 수정편수를 위한 범례설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상산지는 창석 이선생이 창시하여 청대 구당 양선생이 속록續錄을 내었고, 이어서 순조년간 임진년에 속찬하여 앞의 3선생의 지를 시대에 연유하여 증하고, 감한 것이다.

(2)구지 중에 창석이 니은 것을 원본을 고정하고 청대본에 새로 수록한 것을 “구증舊增 구당본은 임진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울러서 신증新增”이라고 표기하고 이번에 새로 수록하는 것은 “보”자로 표기하였다.

(3)우리 상주의 전장문물典章文物은 창석이 편찬한 문한文翰 일련에 수록되었고, 선조와 인조 이후에 관청이나 원, 숙, 정, 대에 선배들이 지은 것을 뒤에 수록하였다.

(4)3책 6,7권은 문한文翰편으로 제영題詠, 기, 서, 비문碑文, 제문祭文,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 등이다. 앞의 본책 편집 범례에 밝힌바와 같이 6권은 상권으로 창석본에 1편으로 전해온 것이고 7권은 하권으로 인조조 이후에 지은 글들이다.

책의 끝에는 이 책의 편집후기인 서상산지후書商山誌後를 수록하였는데 지은일자는 순묘임진후純廟壬辰後 97년 무진중양戊辰重陽 일이고, 지은이는 진양후학晉陽後學, 정동철鄭東轍, 근지謹識라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이 책은 창석, 청대, 수다본과 임진년 상주목읍지를 상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범례에서도 밝혔거니와 책의 끝에 후기 작성일자를 순묘 인진후 97년 이라고 하여 주악의 고종 년간 수차례 간행된 목음지에 대하여는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상산지라고 하면 왜정 무진본 1책, 1,2권 상고하기 쉽다. 그 이유는 전지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수록한 최종분이라고 것이고,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김자상씨가 번역본을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무진본 내용 전번에 대한 상고祥考는 뒷날의 과제로 남긴다.

Ⅵ. 현대의 상주지리사록

1. 상주지尙州誌

1) 왜정 무진본 이후 61년이 경과되고 1989년에 간행되었다. 이 당시는 상주시와 상주군이 분리된 때 였기에 당시의 상주시장 박응규朴應圭, 상주군수 최상종崔祥鐘이 공동으로 편찬한 것이다.

2) 편찬기준은 다음과 같다.

(1)상주시․군은 예부터 하나의 문화생활권에서 역사를 이어왔으므로 통합하였다.

(2)상주는 신라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경상도의 큰 고을이었으므로 상주시․군에 한정치 않고, 부분적으로 인근 시․군과 관계가 깊은사항은 함께 수록하였다.

(3) 이 지는 향토사 이므로 지방의 특색을 부각하였다.

(4)본지에 수록된 각종자료와 통계숫자는 1986년도를 기준으로 하고, 부분적으로 첨기하였다. 또한 소목별로 참고문헌과 자료제공자 인용부분을 밝혔다.

(5)인물편은 상산지와 함창지를 중심으로 하여 시대별로 묶었으며 성씨에 한하여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였으며 근대인물(별세한 자)도 수록하였다.

(6) 년대 표기는 왕조와 서기를 병용하였다.

(7) 본지는 한자와 한글을 병용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주서注書를 붙였다.

3) 수록내용은 역사, 지리, 정치, 행정, 사법․치안, 산업․경제 교육, 문화, 학술․문학, 예술, 사회․체육, 종교, 관광명소, 동리실태, 인물 등을 현대적 편집 기법에 따라 편수하였다.

4) 집필자는 당시의 상주부시장 황철중과 상주부군수 김주동을 공동 집필위원장으로 하고, 류시완, 황영목, 김자상, 황인목, 권태을, 전하은, 박성해, 김희철, 박찬선, 이상기, 이봉욱, 양상길이 각 분야 별로 나누어 집필하였고, 실무편찬위원은 황영목, 이상기, 박찬선, 권태을, 이철우, 박우홍 등이다.

2. 상주시사尙州市史

전 상주지가 간행된 이후 21년이 지난 서기 2010년도에 간행되었다. 이 책본은 상주시에서 발간하고, 상주문화원에서 주관하여 1995년도 분할되었던 상주시․군이 다시 통합된 바에 따라 이전의 상산지 무진본의 구역 범위로 하였다. 내용은 고도 웅주였던 옛 상주의 위상에 걸 맞는 종합 역사서로 역사, 정치, 행정, 경제, 문화․예술1, 문화․예술2, 인물 등 전 5권의 책본 이다.

Ⅶ. 글을 맺으며

역사지리사록은 지역의 자연과 인문을 총합한 한시대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울에 비춰진 그 내용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새로운 지리사록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웅주거목雄州巨牧으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우리 상주 역사를 사록史錄으로 남긴 창석본 상산지를 위시하여 청대본과 왜정 무진본으로 시대적 사실史實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에 연하여 이번에 새로이 구당본 상산지 초책이 발견되어 또 한시대의 역사적 편린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완성된 책 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또한 전지에 이어진 또 하나의 사록이요 후지와 상산지 전말이 수록된 상주목읍지의 전지라는 점에서 한 역사서 이다 라고 본다. 여기까지 구당본 초책을 중심으로 한 전후지를 간략히 살펴 서술한 내용들을 다시 요약하는 것으로 본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시대의 지리사록 전반에 대한 것을 간략히 서술하여 상주의 최초지지地誌인 상산지 창석본 간행이전에부터 전해진 전국적 지리사록의 현황과 그 이후 전국적 또는 경상도지지의 간행 사실을 살펴 상주향토지지와의 관계를 대강이라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 구당본 초책 이전에 우리 사주 최초의 지지로 알려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된 창석본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다. 창석이 지은 후지後識에도 상산 최초의 목읍지라고 하였으나 친구인 구희급丘希岌이 공관公館에서 등사한 사료를 기초로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공관에는 경사도지리지 등 전국적지지 편찬 당시 상부에 보고된 자료가 있었으나 한권의 책본으로서는 이 책본이 최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전부田賦, 호구戶口, 학교 묘제廟制 등 몇 가지 주요한 항목에 대하여는 앞으로 전국적 지지의 내용과 비교하여 시대적 변천에 따른 종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수록된 내용 중에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고 여기에 적어 둔다.

◦현재의 상주尙州라는 지역명칭은 이미 신라 경덕왕 때에 개정된바 있음에도 군명郡名조에 빠져있음.

◦인물조에 수록된 인물은 개관蓋棺하지 아니하면 수록하지 아니한다는 원칙을 정하였음에도 1617년 본지 간행 당시에 생존하였던 김정룡金廷龍(1619卒), 조우인曺友仁(1625卒), 김혜金垓(1624卒) 등이 수록되었음.

◦부곡部谷조 끝에 “신증新增”이라고 표기하고 “장원향壯元鄕”에 대한 사실을 수록하였는데 주지하다시피 “신증”이라고 함은 원지元誌에 없던 것을 새로이 수록한다는 것인즉 이에 대한 의문

◦산성山城조, 상선산성城山山城의 기록에 정호선丁好善 목사가 무오년에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무오년 이 해는 본지가 간행된 다음해인 1618년인 만큼 본지 간행년도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

◦위에 몇 가지 의문점을 살펴보면 현재 전하고 있는 창석본, 상산지는 창석이 편찬한 원본이 아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석본 이 후 간행된 청대본 발문跋文 첫머리에 “그 옛적 1616년(광해8)에 창석공이 상산지 2권을 찬성撰成하여 옥성동玉城洞에 소장하였고 그 후 선생의 손자 신와新窩공 이재관李在寬이 간략한 속록을 내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에 들어낸 몇 가지 의문점을 이 기록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전하고 있는 창석본 상산지는 창석의 손자 신와공의 증보본增補本이 분명한 듯하다.

셋째, 청대본 내용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창석본이 간행되고 132년 이 경과된 1749년에 창석본을 근거로하여 속지로 간행된 지지이다. 13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는 병자호란이나 숙종대의 당쟁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승평昇平한 시대도 있었을 것임에도 그 사이에 한권의 지지가 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하겠다. 청대본은 대체적으로 창석본에 비하여 목록의 제정이나 내용이 더 정연하고 정갈하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면이 신설되고 군사를 관할하는 진영鎭營의 신설 그리고 창고, 목이 신설 되었으며 여지조에 사벌국의 역사를 소상히 수록하였음은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호구戶口나 공부貢賦 등 주요항목은 전지前誌와 비교하여 변천된 상황을 살펴보았다. 인물조의 충절忠節 목을 새로 신설하여 우성적, 박걸, 노도응 3명을 수록하였는데 주지하는 바 임진왜란에는 이외에도 많은 충절 인물이 있음에도 수록되지 않았음은 어떤 연유인지 모른다.

상주의 임진왜란사를 간략하게나마 향토사록으로는 처음 수록하였다. 청대본은 영조41년(1765년) 조정에서 간행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상주편의 기본 자료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넷째, 이 글의 주제主題인 구당본 상산지 초책에 대하여 상고詳考하였다. 구당본이 찬술되었음은 분명하나 그 원지는 전해지지 않고 작년에(2011) 그 초책草冊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과 형식이 비교적 정갈하여 원지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항목별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만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구당본은 청대본이 후 37년이 경과된 1786년(정조10)에 간행된 것을 대개 전지 청대본에 의거하여 편수한 것인데 시대가 경과된 만큼 여러 항목의 새로운 사실들이 수록되었다.

◦첫머리에 상주진, 상주목이라고 하여 목보다 진을 먼저 표기하여 군사적으로 여러 군현을 통할하는 상주의 위상을 매김 하였음.

◦강역조에 주요지역과 거리를 명기한데 이어 새로이 일정日程을 병기 하였음.

• 경도京都 477리 5일정

• 감영監營 180리 2일정

• 통영統營 480리 5일정

◦목사와 영장營將의 품계를 새로이 명정하였다.

◦호구를 청대본과 비교한바 오히려 현격히 감소되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 청대본 : 23,988호 90,113명

• 구당본 : 18,642호 69,443명

• 감 소 : 5,346호 20,670명

◦전부田賦조에 토지경작면적이 청대본과 같이 15,489결인데 이 또한 의문점이다.

◦관직자에게 지급되는 녹봉祿俸인 봉름俸廩 항목을 신설하여 녹위별 지급수량을 명정하였다.

◦창고조에 각창별재고량을 수록하고 1785년(정조9)에 허가한 바에 따라 10월에 개방하고 12월에 봉하며 보리는 6월에 거둬 봉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수록함.

◦객관客館인 상산관을 궁실宮室로 상향 표기하여 국왕의 위패를 봉안한 왕권의 상징성을 부각하였다.

◦역원驛院조에 역별로 배치한 인력과 말의 비치내용을 소상히 수록하고 원의 경우 각 원별 현존 유무를 소상히 밝혔는데 23개 원 중에 21개원이 폐지되고 죽현원과 공성원은 존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조선후기의 통신체계였던 두 개소의 발참撥站을 새로이 수록함.

◦도로道路 조목을 새로이 설정하여 도로로서의 기능이 부각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지에는 여지조與地條에 지·제 구분 없이 합쳐서 수록한 바 있으나 산업화시대로 변천되므로 하여 팔수 농업기반시설인 제언提堰목을 새로이 신설하여 제언별 규모를 소상히 수록하였음.

◦장시場市 조목의 신설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시장경제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시실을 수록한 것에 반하여 전지에 수록된 일부 중요한 항목이 누락되었거나 과도히 축소되고 후계기록이 없는 경우도 있다.

◦학교조에 당시로서는 중요한 교육기구라 할 수 있는 서당書堂이 누락됨.

◦공서公署조에 동헌東軒, 진영鎭營 등 꼭 있어야할 건물의 누락

◦누정樓亭조에 전지에 수록되었던 육익정六益亭, 초학대招鶴臺, 창석정蒼石亭, 무정舞雩亭 등 무려 61개소의 누정이 누락됨.

◦불우佛宇조에 전지에 수록되었던 62개 사찰 중에 북장사, 갑장사, 윤필암 등 49개 사찰이 대량으로 누락됨.

◦고적古蹟조에 사장사四長寺 북천임난전장, 금돌성, 공민왕의 상주 남행南幸 사실 등 30여 중요한 역사적 사실史實들이 누락됨.

◦과제科第, 환적宦蹟, 일반 현사賢士 인물조는 전지에 비하여 400여 명이 누락되었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역사인물을 사록史錄에 등재한다는 것은 엄격한 검증을 거쳐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 수록됨이 마땅하나 전지에 수록된 인물을 누락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라는 점에서 경이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누락된 인물중에는 편저자 구당 자신의 상주입향조 조숭趙崇과 중시조라 할 만큼 현달한 조윤령趙允寧, 그리고 구당의 증조부 조대윤이 누락되었으며,

◦총묘塚墓조에도 사벌왕능, 황보신 이전 김담수, 김안절, 김홍미, 김택 등 36개소의 총묘가 누락되었는데 그 중에 구당의 직계 조상인 조숭, 조정의 묘가 누락되었음은 전통적 조상숭배 정신이 투철하였던 그 시대로서는 더욱 경이로운 일이었다고 하겠다.

다섯째, 구당본 이후의 상산지에 대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구당본 이후에는 모두 5차례의 지지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주지와 상주시사市史로 이름한 지지가 간행된바 있다. 먼저 구당본이 간행되고 46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상주목읍지(임진본)를 들 수 있다. 이지에는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顚末이 수록되어 창석, 청대, 구당본에 이르기까지의 편찬 경위와 임진 6월(1832) 내각의 지시에 따라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이지가 완성되기까지의 경위와 편집기준을 비교적 소상히 밝혀 놓았다. 상산목읍지는 대체적으로 전지 구당본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의 첫 머리에 상주목치지도尙州牧治地圖를 수록하였음.

◦호구의 전지에 비하여 감소 되었음

• 구당본 : 18,642호 70,443명

• 본 지 : 17,877호 65,035명

• 증 감 : 감765호 감4,308명

◦임수林藪 조목의 신설 : 서수西藪와 율수栗藪의 사실기록을 수록함.

◦제영題詠조에는 향교 등 건물의 각종기문記文 상량문 그리고 비문과 명현들의 시문詩文 전문을 수록함. 이에 반하여 일부 주요한 항목이 누락되거나 너무 소략疏略한 부분이 있음도 간과 할 수 없다.

◦학교조의 서당書堂에 관한 사실 누락 됨.

◦성지城池조에 읍성 1개소만 수록하여 관내 유수의 고성古城이 누락 됨.

◦산천山川조의 유명산과 대부분의 하천이 누락 됨.

◦창고조의 창고별 재고량 누락 됨.

◦능묘陵墓조에 다수의 유명인사 묘소가 누락 됨.

◦불우佛宇조에 다수의 유명사찰 누락 됨.

◦누정樓亭조의 소략疏略

◦고적古蹟조에 부곡部谷와 고현古縣, 그리고 임난북천전장 등 여러 가지의 역사적 사실들이 누락됨

◦과거科擧조에 인물의 등록은 과거에 등재된 명록에 따라 수록한 것인데 전지에 없던 인물이 본지에 다수인 새로이 수록되었음은 어떤 사유인지

◦인물人物조에 구당본과 같이 청대본에 수록된 500명에 크게 못 미치는 88명이 수록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관찬官撰으로 간행된 상주목읍지(임진본)는 상산지 전말顚末과 후지後識를 수록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참고 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은 소중하다하겠으나 후지에 적은 바와 같이 1차 작성된 문건이 영문營門에 보고되어 내용의 불실로 다시 돌아오고 그 과정에 관의 독촉이 있었다는 등 편찬 당사의 정황을 알 수 있다. 구당본이 간행되고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46년이 경과되는 년 간에 인문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임에도 변천된 사실의 내용이 비교적 소략하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고종 년간 4차에 걸쳐 간행된 목읍지와 왜정부진본에 대하여는 근대와 현대를 거치는 격변기의 지지이며 순한문純漢文본의 마지막이고 그 내용 또한 복잡한 점도 있다. 이상으로 본고의 주제인 구당본 상산지 초책草冊에 대한 전·후 지지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상주역사 변화과정을 종합적으로 알기위한 창석본 이후 모든 지지에 대한 내용의 비교 검토에 대하여는 뒷날의 과제로 남긴다.

다시 한번 언급하거니와 구당본 상산지 초책은 초책草冊이니 만큼 완성된 책 본이 아니므로 인물의 누락이나 내용이 다소 모자라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완하는 과정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초책 자체도 어떤 인사가 베껴 쓴 필사본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적어 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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