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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상주길에 얽힌 이야기 풀기

빛마당 2014. 2. 24. 23:05

영남대로


상주길에 얽힌 이야기 풀기

김 상 호


현) 상주시청 근무

현)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영남대로


상주길에 얽힌 이야기 풀기


尙州鄕土文化硏究所 硏究委員 / 尙州市廳 金 相 鎬

<目 次>

Ⅰ. 이야기 풀기에 들어가면서

Ⅱ. 상주 영남대로의 개관

1. 도로의 개념槪念

2. 조선시대의 주요 간선도로幹線道路

3. 옛 도로의 이정표里程標

4. 옛길(도로道路)의 쇠퇴衰退

5. 영남대로嶺南大路와 역원驛院

6. 영남대로의 상주尙州노선路線

7. 노선路線의 분석分析

7. 상주지역의 영남대로 노선도路線圖

Ⅲ. 영남대로변의 유적

1. 낙동역에서 부치대이 고개

2. 부치대이 고개에서 성골고개

3. 성골 고개에서 송현

4. 송현에서 봉굴재

5. 봉굴재에서 당교

Ⅳ. 노선유지를 위한 활동

1. 옛길 문화 전승 활동

2. 상주구간을 마무리하면서

Ⅰ. 이야기 풀기에 들어가면서

영남대로는 총연장이 약 380㎞로서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동래를 잇는 최단 지름길이었다. 이 중에서 상주길은 전체 구간의 약 10%인 34㎞를 차지하고 있다.

영남대로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주요 도로의 명칭을 한양 기점으로 종착지와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서 서로(의주방향), 북로(경성방향) 등으로 정하였다. 도로 명칭을 보면 한양에서 동래 부산포에 이르는 도로는 「경상충청대로」, 「경상대로」, 혹은 「동남저부산 제4로」라 칭하였고, 일제강점기 초에는 이 길을 「동남지동래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로 명칭을 문헌상에는 거의 쓰지 않고 있었다.

 영남대로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령 북쪽지방인 충주, 죽산 일대 주민들 대부분은 조령 남쪽 지방을 영남으로 부르고 있었으며, 영남대로는 「영남(또는 경상도)으로 가는 큰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민들의 영남에 대한 인지를 구체화시켜주는 사료는 양지, 죽산, 선산 등의 읍지도인데 읍지도에는 도로 선에 따라 영남대로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이유로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옛길의 이름을 「영남대로」라고 명명하였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의 지역과 지역을 잇는 연결 통로이고, 이 도로의 이용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마을과 마을에 얽혀있는 조상의 흔적과 숨결이 유지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흔적은 구한말 전까지는 대로의 명맥을 유지하고,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근대 문명의 발달에 의한 건설 장비의 개발과 고속도로의 건설로 종전 영남대로의 기능은 쇠퇴를 가져왔고 흔적마저 사라져 가는 지경에 도달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현대문명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역사와 인성이 배제되고 속성문화의 한계성이 들어남에 따라 전통을 추구하는 신문화 기조에 의해 전통을 이어가려는 고전문화가 나타나고 있다.

옛길인 영남대로가 쇠퇴하게 된 원인과 길 주변에 있었던 역원과 발참, 상주지역에서의 영남대로 노선을 구체화하여 옛길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도로 유적의 보전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도로는 형성단계부터 인간에 의해 쉽게 만들어지고 소멸도 인간에 의해 쉽게 없어지는 특수성이 있으므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에 의해서만 그 흔적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상주지역에서도 옛 영남대로의 흔적은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흔적을 기초로 영남대로를 재조명하고 흔적이 잊히지 않고 옛길문화가 이어가길 기대하면서 옛 길의 쇠퇴 원인, 상주지역의 역원과 발참, 노선, 노선의 분석과 옛길변의 유적을 다섯 고개로 분류하여 상주길 이야기를 열어보고자 한다.

Ⅱ. 상주 영남대로의 개관

1. 도로의 개념

「길」이란 도로道路로서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 또는 물 위나 공중에서 일정하게 다니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로陸路, 수로水路(海路), 공로空路 모두를 의미한다. 한자적 의미에서 보면 “道”는 머리(首)와 움직임을 나타내는 “之”가 결합된 문자다. 즉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고 서서히 움직이는 방향의 뜻이다. “道보다 큰 의미인 “路”는 사람의 두발로 움직이는 행동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보행자가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할 것이다. 따라서 “道路”는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로의 기원은 집단과 집단을 연결시켜 문명을 발달시키는 연결통로라고 할 수 있다. 한 지역에서 터득한 지식, 기술, 생활양식 등 인간 생활사를 다른 지역으로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며, 오래전부터 이 도로는 생활사의 정도를 판가름하는 척도로 이용되어 왔었다. 지금도 각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도로의 거리와 포장률 등이 그 곳의 발달 정도의 척도로 이용되고 있다.

옛길은 그 시대의 생활사의 기준 척도였고 지금도 척도로 이용할 만큼 중요한 역사 자료이나 1910년 일제에 의해 우역제가 철폐되고 도로와 관련된 부동산은 국유지라는 명목으로 일인의 수중으로 넘어가 옛길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도로의 중요성이 인식되지 않아 아무런 저항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지만 시점과 종점이 확정된 시기는 한양천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중앙의 왕에 의한 신속한 명령하달과 지방과 수도와의 정보 교환, 유사시 군사의 이동 등 수요에 의해 주요 행정통신망을 한양과 감영을 비롯한 주요 행정 요충지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정비하였기 때문이다.

2.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

조선시대의 도로는 고려시대의 역도를 대부분 계승하여 여러 번의 변화를 거쳤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도로를 간선과 지선으로 구분하고 노선마다 번호를 붙여 관리하였는데 증보문헌비고의 주요 도로망을 정리하면 보면 표1과 같다. 상주의 노선은 제4로와 제5로에 해당된다.

번 호

속 칭

구 간

경유지

제1로

의주대로

한양-의주

-개성-화주-평양-안주

제2로

경흥대로

한양-서수라

-김화-함흥-경성-회령-

제3로

관동대로

한양-평해

-양근-원주-대화-강릉-

제4로

영남대로

한양-동래

-용인-충주-대구-밀양

제5로

한양-통영

-용인-충주-상주-성주-

제6로

한양-통영

-과천-공주-삼례-남원-

제7로

호남대로

한양-제주

-삼례-태인-나주-강진-

제8로

한양-충청수영

과천-평택-신례-보령-

제9로

강화대로

한양-강화

-양화-양천-김포-통진-

자료 : 한국도로사, 한국도로공사. 1981. p124~128


왜사의 상경로


 상주노선에 해당하는 제4로의 상주를 통과하는 노선은 2개인데 서울~부산 노선을 보면 ①서울-한강-판교참-검천-용인-직곡-양지-좌찬-진촌-광암-석원-종선-달천-충주-단월역-안부역-조령동초원(경상도)-문경-신원-유곡역-덕통참-낙원역-불현-낙동진-서차리참-고리곡-장천-동명원현-천암창-금호강-대구-오동원-팔조령-청도-유천-밀양-이창-내포진-황산역-양산-동래-부산으로 이어진다.

한편 대일교역은 삼포三浦의 교역소에서 한일상인들의 교역과 왜사倭使들의 공물과 답례로 교역이 되었는데 대부분 왜사들은 한양까지 왔다. 이 때 상경로는 좌로, 우로, 중로, 수로 등으로 분산시켰는데 상주를 통과하는 노선은 중로로서 대부분 왜사들이 사용하였다. 이 노선은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유곡-조령-음성-이천-광주-서울로 이어진다.

3. 옛 도로의 이정표

현대 도로는 도로마다 모두 이정표가 있고 각 구간별 거리가 표시되어 있어 현 위치와 갈 곳의 거리를 추청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로의 이정표를 어떻게 표시하였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역은 30리, 소표(소후)는 10리, 대표(대후)는 30리, 정자는 5리, 초막은 10리마다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는 중첩되는 경향이 있는데 경국대전의 자료가 최종 정리된 자료로 볼 수 있겠다.

區 分

小標

大標

小堠

大堠

亭子

草幕

1415년(태종 15)

30리

-

-

-

-

-

-

1442년(세종 24)

-

10리

30리

-

-

-

-

1485년(경국대전)

-

-

-

10리

30리

5리

10리

상기 표의 거리를 m법으로 환산해보면 아래와 같이 2㎞, 4㎞, 12㎞마다 도로시설물과 휴식시설을 설치하였다고 하겠다.

<周尺 6尺(21.04cm) 1步, 360步 1里, 30里 1息 基準>

이러한 도로시설물을 설치하는 방법을 보면 1442년(세종 24)에는 小標 및 大標(지명과 거리 기록)에 적석과 적토를 만들고, 지명과 거리를 기록하였으며, 경국대전 시행 때에는 堠(흙더미)에 정자목을 심고 장승에는 거리와 지명 기록하였다고 한다.


4. 옛길(도로道路)의 쇠퇴衰退

  옛길은 형성단계부터 쉽게 만들어지는 특성이 있다. 또한 길은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없어지는 보존성이 가장 짧은 인간이 만든 유물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수성으로 인해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국토의 대동맥이었고, 문화교류의 지름길이었던 것이 어느 시기부터 쇠퇴하여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시기에 도달하였다. 도로의 쇠퇴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도로의 쇠퇴 원인은 일반적인 도로의 쇠퇴 원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상주의 영남대로 쇠퇴원인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행정기관의 이전이다. 감영을 임진왜란 직후 충주의 충청감영을 공주로 이전(1598)하였으며, 상주의 경상감영은 대구(1601)로 옮겼다. 그 결과 상주로 집중되었던 경상우도의 교통량과 충주로 집중되었던 충청도 동부 지방의 교통량의 일부가 대구~추풍령~천안~수원을 잇는 교통로로 이동하게 되었다. 충주와 상주는 문경새재를 사이에 두고 각각 소백산맥의 북쪽과 남쪽 지방의 관문 역할을 했던 만큼 두 도시의 기능을 약화는 곧 새재의 쇠퇴 즉 영남대로의 쇠퇴를 유발하였다.

두 번째, 조선말기의 지방행정 제도의 문란으로 인해 발생한 각 지방의 민란이다. 진주에서 시작한 영남지방의 민란은 선산, 성주, 상주 등지로 확대되어 지방관청의 힘으로는 수습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1894년에 발생된 동학란과 1901~1940년경 충주와 문경일대에 발생했던 민란은 조령, 이화령등지의 교통을 마비시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서울에서 가까운 양재역 남쪽의 다리내 고개, 죽산 부근의 좌정고개, 청도의 팔조령 일대에도 빈번하게 도적 떼가 출몰하여 상인과 일반 여행자를 괴롭히고, 때로는 조정의 관리와 파발꾼이 기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민란과 도적의 출몰에 대한 정부의 토적대책討賊對策이 미흡하고, 노상의 기찰 역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상인과 여행자들은 조령과 같이 관이 설치된 공로나 험준한 영로를 피하고 추풍령, 화령과 같은 비교적 평탄한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 조선시대의 교통. 통신체제가 지닌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모든 역로는 중앙과 모든 지방행정 중심지를 직접 연결하는 수직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수직적 체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조정에서는 지방 사이의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한 수직적 교통체제의 결함을 인식하였으나 군현과 군현 또는 도와 도를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교통체계를 정비하지 못하였다.

네 번째, 신작로의 건설이다. 정기 시장 망을 토대로 형성된 조선후기의 상업로는 교통의 근대화 과정에서 철도와 신작로 건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존 도로 보다 빠르고 신속한 신작로는 영남대로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5. 영남대로嶺南大路와 역원驛院

역참과 관원은 도로의 부대시설이다. 영남대로가 통과하는 곳에는 대부분 역을 통과하도록 노선이 있고 모두 여행자의 휴식과 편익시설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영남대로 밀접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의 주 임무가 왕명 및 공문의 전달, 관물의 운송, 관리의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이지만 공식적인 숙박시설이 없던 시대에는 숙박업무가 역의 중요한 임무였다고 본다. 역을 처음 설치한 것은 문헌상 기록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知王 9년(487)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서는 여러 차례의 정비를 하여 전국을 22역도驛道 525역이라는 역조직驛組織이 완성되어 역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상주지역에 있었던 역원을 통해 그 당시의 주요 교통로를 추정해 본다.

고려시대 상주도는 유곡幽谷(문경 호계), 낙원洛原(상주 낙상), 낙동洛東(의성 단밀), 청로靑路(의성), 철파鐵波(의성), 지보智保(예천), 통명通明(예천), 덕통德通(함창), 옹천甕泉(안동), 안기安基(안동), 안교安郊(풍산), 요성聊城(문경), 수산守山(다인), 쌍계雙溪(비안), 안계安溪(안계), 금조琴曹(안동), 통산通山(안동), 송제松蹄(안동), 연향連鄕(선산), 구기仇旂(선산), 우곡牛谷(군위), 상림上林(선산), 조계曹溪(군위), 문거文居(안덕), 화목和目(청송) 등 모두 25개 역참을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다른 관제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는데 그 후 시대의 변화로 역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관리체제의 개혁, 역원보충 · 역로驛路의 보수 · 개정 등이 이루어져 마침내 『경국대전』의 완성으로서 조선시대의 제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전국에 41개의 역로가 있었는데 경상도는 11개이고, 상주의 역은 문경 유곡도에 속했다. 유곡도 역은 요성, 덕통, 수산, 낙양, 낙동, 구미쌍계, 안계, 대은, 지보, 소계, 연향, 낙원, 상림, 낙서, 장림, 낙평, 안곡이었다.

상주에는 8곳으로서 낙양역(낙양동), 낙원역(낙상동), 낙동역(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낙평역(청리면 청하2리), 장림역(화서면 율림리), 상평역(모서면 도안리), 덕통역(함창읍 덕통리)이다.





 발참은 선조30년(1597) 이후는 통신만 전담한 파발 제도가 생겼고, 상주에는 3곳이 있었다. 낙동발참(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낙원발참(낙상동), 함창발참(함창읍 덕통리 추정)이다.

은 조선시대에는 역과 역 사이에 설치하여 공무 수행 관리가 사용하던 전통숙박시설이지만 후기에는 일반 여행자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상주지역에서는 남원(낙양동 추정), 안빈원(헌신동), 광제원, 요제원(낙동리 추정), 이두등원(보양리), 양산지원(양촌동 양산리 마을, 지천리), 흥왕원(인평동 월평리), 서원, 어암원(내서면 낙서리), 율원(내서면 서원리 밤원 마을), 부원(부원동), 북원(북문동 추정), 당제원(낙상동), 송원(사벌면 목가리 원터), 퇴산원(사벌면 퇴강리 물미), 유등원(낙동면 장천리), 죽현원(낙동면 용포리), 대두원(청리면 현내리), 중생원(모동면 신흥리), 장혜원(중모현 서리), 공성원(공성면 이화리 원말), 다방원(문경 모전 추정), 함제원, 당교원(함창읍 윤직리), 관천원(관천 기슭), 오리원(함창읍 신흥리), 동원(중모현 동리)이다.

상주지역에서 역참과 원이 영남대로와 관련 있다고 보이는 곳이 역은 낙원역(낙상동), 낙동역(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덕통역(함창읍 덕통리)이며, 발참은 낙동발참(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낙원발참(낙상동), 함창발참(함창읍 덕통리 추정)이다.

원은 안빈원(헌신동), 요제원(낙동리 추정), 당제원(낙상동), 송원(사벌면 목가리 원터), 관천원(함창읍 태봉리), 당교원(함창읍 윤직리)이다

6. 영남대로의 상주尙州노선路線

영남대로의 노선에 대하여는 역사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으나 영남대로의 길 찾기 활동 등으로 개략적인 윤곽이 들어 나고 있으며, 현재 조사 및 답사된 바에 의하면 상주 구간은 다음과 같이 5개 읍면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다.

구 간

노 선

문경

모전교⇒

함창읍

당교⇒윤직리⇒구역터(덕통2리)⇒덕통리⇒(구)태봉리⇒금곡리

⇒서낭당고개⇒

사벌면

덕가리(저수지)⇒덕가리(하덕곡)⇒용담리(토마)⇒

(경지정리로 노선 사라짐)⇒

계산, 동문동

낙상동(나원마을)⇒헌신동(병산마을)⇒

낙동면

성동리(성골마을)⇒백두점마을⇒구산마을⇒부치당마을⇒

터지목마을⇒낙동리(낙동나루터)⇒

의성

낙정리

그러나 위의 조사에서는 사벌 용담리 부근에서 구간 일부가 경지정리로 인해 사라져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목가리와 (구)태봉, 덕가리와 금곡리 구간은 노선 일부가 어느 시기에 변경이 되었다. 또한 응국 마을에서 나원 마을로 연결되는 나루의 위치와 나원 마을에서 사벌면으로 연결되는 노선 또한 불확실한 노선이다.



                                                                                             영남대로 상주노선도


7. 노선路線의 분석分析

1) 지형地形

대로의 해발 높이를 비교해 보면 아래 표와 같이 해발 지표고가 금곡현로와 송현로 모두 최저가 낙동나루 47m이며, 최고를 보면 금곡현로는 금곡현 96m, 송현로는 송현 125m로서 각 노선별 보면 금곡현로 49m, 송현로 78m의 표고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두 노선을 비교해 볼 때 송현로보다 금곡현로가 29m 더 낮고 길이 평탄하여 조선후기에는 금곡현로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교

윤직

구역터

대평들

금곡현

송현

나원

성동

불현

낙동

71

81

80

60

90

125

50

80

96

47



해발높이표 분석


2) 연장延長

전체 노선의 길이는 덕통역에서 낙원역까지 30리, 낙원역에서 낙동역까지 40리로 총연장 70리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덕통역에서 낙원역까지는 12㎞, 낙원역에서 낙동역까지 16㎞ 총연장 28㎞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덕통역에서 당교까지의 거리는 기록에 없고, 낙동진에서 낙동역까지 거리는 1리 이므로 상주구간의 영남대로 연장은 「28㎞(덕통역에서 낙동역까지 거리) + (덕통역에서 당교까지 거리) - 0.4㎞(낙동진에서 낙동역까지 거리)」가 된다.

전체 노선에 대하여 금곡현로와 송현로를 각각 측정한 결과 금곡현로는 총연장 32.2㎞, 송현로는 33.9㎞로서 송현로가 약 1.7㎞ 더 멀고 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록에는 덕통역에서 낙동까지는 약 27.6㎞이다. 금곡현로와 송현로의 연장을 비교해보면 금곡현로는 28.2㎞, 송현로는 30㎞로서 기록에 나타나는 거리는 금곡현로를 기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간

거리

금곡현로

송현로

당교~덕통

3.9

덕통~금곡현

4.9

덕통~송현

4.8

금곡현~하덕곡

2.4

송현~하덕곡

4.2

하덕곡~낙원

6.1

낙원~성동

4.8

성동~장천

4.0

장천~원마

6.1

총연장(㎞)

32.2

33.9

덕통~낙원

13.4

15.1

낙원~낙동

14.9

14.9

3) 성

영남대로에 접하여 있는 성은 4개이다. 윤직리의 해발 98m의 두산성이 있다. 두산성의 서쪽 하단이 대로와 접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고, 정기룡, 권응수 장군의 전투 기록을 보아 임진왜란 전후의 성으로서 17세기 후반의 성으로 볼 수 있겠다. 머리뫼 자락에서 별견되는 연질토기편과 정상에 있는 지석묘를 보아 삼한시대 이전부터 정착한 교통과 관방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겠다.

두산성에서 약 4㎞동남쪽에 덕봉성이 있다. 덕봉성도 서쪽 하단이 대로와 접하여 있고, 고려 공민왕이 피난시 잠시 사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4세기 중반의 성으로 볼 수 있다.

함창현과 상주목의 경계인 송현과 금곡현을 넘으면 나원마을 뒤쪽으로 성안산의 이부곡성이 위치한다. 이부곡성도 서쪽으로 대로와 접하고 있다. 이부곡성은 시굴조사 결과 삼한시대의 4세기 이전의 성으로 조사되었다.

이부곡성 남쪽으로 병풍산이 있는데 이 병풍산의 병풍성도 서쪽 자락이 대로와 접하고 있으며, 견훤의 부 아자개가 웅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0세기 초반의 성으로 볼 수 있다.

대로가 모두 성의 서쪽에 위치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성의 축조 시기가 4세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이 길을 사용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4) 나루

대로와 직접 연결되는 나루는 이안천의 봉황대 나루와 낙동의 낙동나루 2개이다. 영남대로와 같이 뻗어 있는 낙동강은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분기점이고 낙동강을 횡단하는 나루는 직,간접으로 영남대로와 관련이 있고 문물이 교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직.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나루는 하갈, 운성진, 역골, 퇴강, 회상, 대비, 대바위, 토진나루의 8개 나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진 나루와 운성진은 통행량이 많아 상당한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고개

대로에 속해 있는 고개는 상주목과 함창현의 경계에 있는 송현과 금곡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송현은 소나무 숲이 우거져 솔티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는 재로서 대로상 가장 높은 해발 125m의 위치에 있다. 그 다음이 불현인데 해발 96m, 금곡현 해발 90m, 성동고개 해발 80m로서 다른 지역의 영남대로 재에 비해 비교적 낮은 고개라고 할 수 있겠다.

6) 교량과 하천

대로에 속해 있는 교량은 당교, 죽교가 있다. 당교는 김유신의 소정방의 피살 기록에 따른다면 7세기 중반 이전에 놓여져 있던 다리라 할 수 있고, 죽교는 봉황대 주변에 동여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엽에 놓인 다리로 보인다.

대로에 연결된 하천은 나한천, 이안천, 동천, 남천, 장천으로서 모두 5개의 하천을 건너야 한다. 모두 건천이어서 통행에 커다란 장애는 없었을 것 같다. 다만 이안천의 봉황대에서는 봉황대 나루가 있어 배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강은 낙동강으로서 낙동 나루가 있어 대형 선박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7) 역. 원

대로에 있었던 역은 덕통역, 낙원역, 낙동역이 3개이고, 또한 발참도 같다.

원은 윤직리의 당교원, 태봉리의 관천원, 목가리의 송원, 헌신동의 안빈원, 낙동리의 요제원 5개라고 할 수 있다.

8) 지적도상의 흔적

영남대로의 노선의 주요 좌표가 될 수 있고, 도로 형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적도상의 흔적을 살펴보면 현재의 지적도에서는 대부분 노선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도로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일부 남은 부분의 주요 지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읍면동

리동

주요 지번

비고

대 로

함창읍

윤직

859-1

당교

덕통

552

덕통역

송현로

함창읍

신덕

839,852

솔티

사벌면

목가

산98,762,758,766,767-1,692,569,747,56-1

분기점

덕가

847

금곡현로

함창읍

금곡

산77,626

사벌면

덕가

925,914,885

대 로

사벌면

용담

424,1019-7,1059,1045-2,1466-2

계림동

낙상

1008,983,996,993,976-1

나루

동문동

병성

830

헌신

902-39,916,900,906,산72

낙동면

성동

206

신상

1074

상촌

1156

낙동

1119-8,1119-17,1119-30

낙동진

사벌면 덕가리 847번지는 송현로와 금곡로의 분기점이며, 낙상동 976-1(도)번지와 병성동 830(도)번지는 동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된 형태의 도로선을 유지하므로 동천을 건너다니던 위치로 보인다. 또한 병성동 830(도)번지와 헌신동 902-39(도)번지도 남천을 사이에 두고 지적도상 도로의 형태가 서로 연결된 형태이므로 남천을 건너다니던 위치로 볼 수 있겠다.



                                                <그림 6> 동천. 남천. 병성천 주변 영남대로


9) 고지도상의 영남대로 노선도

상주를 통과하는 노선은 고지도 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낙동진에서 덕통역까지 노선이 지도상에 표기된 것을 영남대로로 보고 고지도상에 나타나는 노선을 살펴보면 해동지도 상주목에서는 낙동진에서 불현을 통과하고 병풍산 서측을 통하여 회촌진 건너 중동면으로 가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고, 함창현 지도에서는 함창현 고산 서쪽을 지나 송현으로 통과하는 노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비변사인방안지도 상주목에서는 송현과 금곡현이 동시에 표기되어 있고, 금곡현은 함창현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고 상주목 지도에서 단절된다. 또한 함창현지도에는 송현에서 고산 동쪽을 통해 덕통역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표기되어 있다.

동여도 전국지도에서는 낙동진에서 불현을 통해 읍성 밖으로 진입하고, 읍성 밖의 서쪽 노선을 통해 송현을 넘어 함창현으로 연결된다. 또 하나의 노선은 낙동진에서 불현으로 외동면을 거쳐 낙원, 덕통역으로 연결되도록 표기되어 있다.

1872년지방도인 함창현여지도에는 상주목에서 금곡현을 통해 고산 동쪽으로 노선이 표기되어 있다.

상산지도의 외동면도에는 진두津頭. 불현佛峴, 봉계鳳溪, 신촌新村, 성동城洞을 거쳐 읍내지도의 조공제 앞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북면도에서는 읍내에서 한 노선은 북계北溪로 연결되고 또 하나의 노선은 병현丙峴, 낙원洛原, 수암水岩으로 연결된다.

외북면도에서는 한노선이 덕상德上, 추가秋可, 가막可寞, 송원松元으로 연결되고, 또 한 노선은 백담白潭, 매상梅上, 매중梅中, 매하梅下, 퇴상退上, 퇴중退中, 퇴하退下, 갈산葛山으로 연결된다. 즉 상산지도에서는 낙동면의 낙동리, 구잠리(불현), 신촌리, 성동리로 연결된다. 성동리에서는 계림동의 낙상동(낙원), 수암(수암산)으로 연결되고, 수암에서는 사벌면의 덕가리, 목가리로 연결되어 송현을 넘어 함창현으로 연결된다. 또 하나의 노선은 계림동의 수암에서 사벌면의 덕담리, 매호리, 매협리, 퇴강리를 거처 퇴강나루를 통해 예천군 풍양면 낙상리와 와룡리 용두정과 삼탄으로 연결되고, 퇴강리에서 하갈리로 연결되어 하갈리에서는 하갈나루를 통해 영순면 말응리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하갈리에서 금곡리로 연결되는 표기는 없으므로 하갈리와 금곡리는 서로 연결된 통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지도별로 중요 연결 노선을 정리하면 송현과 금곡현이 동시에 표시된 지도가 1개, 금곡현 표기가 1개, 송현 표기가 3개이다. 지도의 제작연대가 18~19세기로서 그 당시에는 송현, 금곡현 모두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도명

제작년대

주요 통과 노선

해동지도

1750

송현과 고산 서쪽 통과

비변사인방안지도

1745~60

송현, 금곡현 표시, 고산 동쪽 통과

상산지도

1830

송현 통과

동여도

1850

송현 통과

함창현여지도

1872

금곡현 통과. 고산 동쪽 통과

8. 상주지역의 영남대로 노선도 : 별지

Ⅲ. 영남대로변의 유적

1. 낙동역에서 부치대이 고개

낙동은 한양에서 동래까지 영남대로 380㎞ 중에서 낙동강을 유일하게 횡단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루가 있는 곳이고,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에서 상주시 낙동면 성동리까지 10.5㎞ 구간이다. 낙동은 교통의 결절지로서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문화의 교류 장소이자 문물의 보급처가 되어 왔다. 또한 육지의 농산물이 낙동강 하류로 내려가고 바다의 수산물이 육지로 올라오는 바다와 육지의 최종점으로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여 왔으나 교통의 발달과 현대 문화의 빠른 전파로 점차 옛 수운과 내륙 교통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점차 교통망이 국토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추풍령으로 이동하다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됨에 의하여 그 기능과 명성은 상실해 버렸다. 따라서 그 당시 번성하였던 옛길 문화의 많은 자료가 남아 있었으나 낙동강의 범람과 범람을 방지하기 위한 낙동강 연안 개발 사업으로 대부분의 옛 문화자원이 소실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대로 상주 구간 중에서 가장 많은 자원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는 데 그 첫 번째 고개를 풀어 보고자 한다.

1) 동제당洞祭堂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649번지에 위치하며, 옛 낙동역이 있던 곳이다. 낙정 2리 낙정마을의 마을 회관 뒤편 산기슭에 위치한 당집이다,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기와 맞배지붕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주초는 21㎝ 방형의 마름 주초를 사용하였고, 그 위에 21㎝의 두리기둥을 설치하였다. 당집 주변에는 약 70㎝ 높이의 석축을 쌓아 평평하게 다져 놓았으며, 그 밖에는 수십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80여 호 정도의 각성各姓 마을인 낙정 2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 새벽(음력 15일 오전 2시경)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당집 내부에는 시어머니와 부부女婦를 모시고 골매기 선앙님을 모신다. 제관의 선출은 기혼자 중 청결한 자를 1명 선출하고 마을 대표 3명이 참석한다. 제관은 강물江水에 목욕하고 금음녀禁淫女하고 부정不淨한 것을 안보고 물건物件 값을 깍지 않는다. 진설은 찰밥, 우육, 과실류이며, 제비祭費는 마을 주민 헌납이다. 음복 후 동 회의를 개최한 후 의식을 마친다. 이 당집은 역마을인 낙상동에 있었던 마당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건물로 보인다.

2) 낙동역洛東驛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에 고려시대에는 상주도尙州道, 조선시대에는 유곡도幽谷道 소속의 낙동역이 있었다. 동쪽으로 구미시의 연수역까지 40리이고, 서쪽으로 낙양역까지 40리, 북쪽으로 낙원역까지 40리였다. 대마 3필, 중마 2필, 하마 8필, 역리 490명, 노 35명, 비 13명이 있었다.

그 당시 있었던 낙동역 건물은 낙정 2리 마을 초입 좌측에는 정미소 건물이 있고 그 뒤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정미소와 마을 사이에는 논이 비탈지게 조성되어 있다. 이 정미소 뒤쪽에 낙동역의 건물이 있었는데 30여년 전에 철거되고 지금은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3) 관수루觀水樓



 관수루는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산 121-6번지에 위치한다.

고려 중엽 때 낙동나루의 서안西岸인 낙동면 낙동리 강변에 창건되었다. 조선 초기 동안東岸으로 이건하였고, 그 후 5차례 걸쳐 중수하였는데 1874년에 유실된 후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9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관수루는 팔작기와 지붕을 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인데 하층下層은 모두 개방開放시키고 상층上層으로는 통문通門으로 연결하였으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위四圍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세운 헌함軒檻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五梁架의 이익공二翼工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관수루의 1749년 상산지에 있는 청대 권상일의 관수루 중창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觀水樓重創記 權相一

洛江之水發源於太白之黃池流數百里而過商山之境爲洛東津津頭數步許有觀水樓蓋自高麗中葉始建于江之西岸至我朝初移建於東岸峭壁之上此得於古老流傳而輿地勝覽及商山誌皆逸而不載故某歲某侯所建有未得以詳也崇禎甲申後九年李侯枝茂更加修茸而

地高且曠風雨之所磨易腐而毀我侯金公泰衍知州事之翌年癸丑樓忽傾圮棟瓦撓折侯盡然而傷嘆謂古蹟不可因遂泯滅思所以重建之時纔經大殺公私蕩然難於運一木役一民而猶盡心經畵不擾不憚治事於其年之季秋甲寅春告訖其規模材槇比舊愈壯而丹碧炳煥若新樓之聳出焉迺改飾諸賢題詠舊板且得退溪先生詩一篇竝刊而揭之于壁誠吾州之曠世奇事也將使冠蓋章甫之行過於是道者相續而登焉眺玩乎江山魚烏之勝景而有悠然自得之樂諷詠乎古昔賢哲之遺句而有不及同時之歎又見夫觀水二字之扁名而思其義不覺其景與意會而庶幾有悟於道體不可見之妙焉噫水之不捨畵夜而滔滔流去者有似乎天道之往過來續自無停息也水之包容衆流而淵澄洞澈者有似乎吾心之中含萬象澹然虛靜也況春水初生舟檣輕快而不費乎推移牽挽之力此可以取喻於仁體之呈露而大用之自然流行也江之發源旣遠而大故自此而又浩浩焉洋洋焉過四五百里注海而不知止焉此可以取驗於君子之學根本盛大故日進其德而自無窮已也蓋天

下之許多物事孰非此箇道理而惟於水最易親切見得故古之人取以爲樓名使人不以水觀水而以理觀水自有所感發而興起焉而亦惟我金侯之政含弘寬大無激無頹惟以務根本存大體爲事實有得於觀水之術焉是故終始惓惓於玆樓而不憚勤勞修創得成以繼古人之遺志其意豈偶然哉秪欲推吾之所得而化及於一境之民又欲推微得廣而化及於絡繹往來之行旅也樓中舊無記侯命相一敍其廢興之蹟相一是邑人之被化者不敢以不文辭於是謹書其顚末以備一樓之故實云爾

「낙동강의 물이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하여 수 백리를 흘러 상산의 경계를 지나 낙동진이 되고, 그 진두 수보 허에 관수루가 있으니 대개 이 루는 고려 중엽에 강의 서안西岸에 시건始建하였고, 조선 초기에 동안東岸으로 이건하였다. 하나 이는 고노들로부터 얻어 들은 것 뿐이고 여지승람이나 상산지에는 모두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언제 누가 세운 것인지 상세히 알 수 없다. 숭정 갑신후甲申後 9년(1653 효종4)에 이지무가 다시 수용修茸하였으나 위치가 높고 넓어서 풍우의 마손摩損이 심하여 쉽게 부패腐敗되거나 훼손되더니 우리 목사 김태연이 도임한 익년(1733 영조9) 계축에 이 루가 홀연히 무너져서 기둥이 부러지고 기와가 깨어져 버렸다. 김후가 몹시 슬퍼하고 상막像膜하여 고적은 민멸泯滅되어서는 아니 되니 중건할 생각을 하였는데 이때가 겨우 큰 난리를 겪은 뒤여서 공사가 창연하여 나무 하나를 운반하는 것이나 한 사람을 부역하게 하는 것이 다 어려웠으나 진심 경영하여 크게 번거롭지 아니하고 그 해 가을에 역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갑인년甲寅年 봄에 완공하니 그 규모나 재전材槇이 구 루에 비하여 더 웅대하고 단청이 새로이 하니 신루가 용출聳出한 것 같았다. 이에 제영諸詠을 쓴 간판을 개식改飾하고 또 퇴계 선생의 시 일편을 얻어서 함께 새겨 벽에 걸으니 실로 오주에 드문 기사이다. 장차 관개冠盖와 장포로 하여금 이 길을 지나 다닐때 줄을 이어 이 누에 올라서 강산과 어조의 승경을 조완眺玩하고 유연悠然자득한 낙을 즐기며 고석古昔 현철의 유구를 풍영하고 때를 같이 하지 못한 한탄을 하게 될 것이다. 무릇 관수 두자의 편명扁名은 그 뜻을 생각하고 그 경관은 깨닫지 못했으나 더불어 뜻을 모으니 도체를 거의 깨달을 것 같으면서도 그 묘는 발견하기 불가하다. 희라! 물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천도의 지나가고 이어 와서 정식停息이 없는 것과 같고 물이 중류衆流를 포용하여 맑고 깨끗한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만상을 머금어 담연澹然히 허칭한 것과 같다. 하물며 춘수가 처음으로 불어서 단장이 경쾌하여 밀고 당기는 함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비유하건대 인체의 드러남이 아무리 많이 써도 자연히 유행하는 것과 같다. 강의 발원이 이미 멀고 크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호호浩浩하고 양양洋洋하여 4~5리를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는 군자의 학이 근본이 성대하기 때문에 날로 그 덕을 더하여 스스로 무궁한 것을 취하게 되는 것과 같다. 대개 천하의 허다한 물건과 사례가 어느 것이나 이러한 도리가 아님이 있으랴 오직 물이 가장 쉽게 친근히 얻어 볼 수 있으므로 옛사람이 취하여 누명으로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물로써 물을 보고 리로서 물을 보아 스스로 감발하고 흥기하게 한 것이다. 또한 우리 김후의 정사도 함홍관대含弘寬大하여 격하고 퇴한이 없이 오직 근본을 힘써 대체로 사실을 하니 이는 관수하는 술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러므로 시종이 루에 권권惓惓하여 근로 서러움을 탓하지 않고 수창하여 고인의 유지를 계승하였으니 그 뜻을 어찌 우연이라고 하랴. 우리들의 소득을 미루어 일경의 백성들에게 덕화가 미치기를 바라고 또 적은 것이 넓어져서 이은공이 줄지어 왕래하는 행려에 까지 미치기를 바란다. 루 중에 원래 기가 없으니 김후가 나에게 명하여 이 발흥한 사적을 서술叙術하라 하므로 내가 읍인으로 덕화를 입은 처지에 글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사양할 수 없어 그 전말을 써서 이 루의 사적으로 한다」




 이 창건기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관수루는 고려 중엽 때에는 현재의 낙동리 인 진두리 북쪽 원마에 처음 창건을 하였고, 조선 초기에 동쪽 언덕인현재의 낙정리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하겠다. 그 후 1653년 이지무가 보수를 하였으나 위치가 높고 넓어 쉽게 훼손되어 1733년 목사 김태연이 도임하였을 때 무너졌다. 1733년 가을 역사를 시작하여 1734년 봄에 완공을 하였다.

이 후 1874년 유실되어 1989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겠다.

관수루에 있는 퇴계 이황李滉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洛東觀水樓(낙동관수루) 李滉(이황)

洛水吾南國 우리 남쪽나라 낙수가

尊爲衆水君 모든 물중에 으뜸이다.

樓名知妙悟 루의 이름이 묘한 것을 깨달아 알겠고

地勢見雄分 지세는 자웅을 나눈 것 같이 보인다.

野闊烟凝樹 들이 넓으니 연기는 나무에 엉켜 있고

江淸雨捲雲 강이 맑으니 비도 구름을 거두네.

匆匆催馹騎 바쁘게 나귀 타기를 재촉하니

要爲趁公文 공문을 일찍이 보내려는 것이다.

觀水樓(관수루) 牧使 柳桓(목사 유환)

宿客携琴夜入樓 숙류하는 길손 거문고 안고 밤에 루에 들어오니

碧簷星月耿新秋 푸른 처마에 별과 달이 새 가을에 빛나네.

櫓聲驚夢江天曉 노 젖는 소리 강천의 새벽에 꿈을 깨우니

身世渾疑幻白鷗 나의 신세가 흰 갈매기의 환상인가 의심되네.

又(또) 金馹孫(김일손)

江花江月十登船 꽃 피고 달 밝은 강에서 자주 배에 오르니

司馬靑衫己五年 사마에 푸른 적삼이 이미 다섯 해로세.

莫謂宦遊無所得 벼슬길에 소득없다 말하지 말라

風流長夜鏡中天 긴 밤 강물 속의 하늘에 풍류 있도다.

觀水樓(관수루) 許傳(허전)

公事頻過洛 공사로 자주 낙동강을 지내 다니니

舟人識使君 배 띄우는 사람이 사군을 알아본다.

江聲千里大 강물 소리는 천리에 크게 들리고

地勢二州分 땅의 형세는 두 고을을 나누었다.

漁戶排津樹 어부의 집에는 나루에 나무들이 줄서 있고

䀋帆掣海雲 소금 배는 바다에 구름 끌고 왔네.

陶山空悵望 도산을 공연히 슬피 바라보는 뜻은

歌短不成文 노래 짧고 왕성한 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번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의 관수루關水樓가 있다. 이 관수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요수樂水 신권愼權,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구연 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 사림이 세웠다. 여기서 「관수觀水란 맹자는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 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이 관수루의 관수도 이와 같은 뜻을 내포한 관수루가 아닌가 한다.

4) 낙동강洛東江

낙동강에 대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천大川이 셋이니, 첫째가 낙동강洛東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奉化縣 북쪽 태백산太伯山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聞慶縣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順興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선산善山에서 여차니진餘次尼津, 인동仁同에서 칠진漆津, 성주星州에서 동안진東安津, 가리현加利縣에서 무계진茂溪津이 되고, 초계草溪에 이르러 합천陜川의 남강南江 물과 합하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고, 영산靈山에 이르러 또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물과 합하여 기음강岐音江이 되며, 칠원漆原에서는 우질포亐叱浦가, 창원昌原에서는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어 김해金海에 이르고, 밀양密陽 응천凝川을 지나 뇌진磊津이 되고, 양산梁山에서 가야진伽倻津이 되고, 황산강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대천의 첫째는 낙동강이고 근원은 황지, 초점, 소백산에서 흘러 상주에서 비로소 낙동강이 됨을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내륙으로 몸을 틀면서 동해를 따라 새로운 산줄기를 만든다. 이 산줄기가 낙동정맥洛東正脈으로 태백산 줄기인 구봉산九峰山()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태백시의 백병산白屛山(1,259m), 통고산通古山(1,067m), 울진의 백암산白岩山(1,004m), 청송의 주왕산周王山(907m), 경주의 단석사斷石山(829m), 언양의 가지산迦智山(1,240m), 울산의 취서산鷲棲山(1,059m), 부산의 금정산金井山(802m)을 거쳐 송도해수욕장 옆,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서 끝나면 그 길이는 약 370km이다.



 낙동강은 백두대간, 낙동정맥, 남남정맥의 안쪽을 흐르는 강이다. 흔히 ‘낙동강 칠백리’라 하는 것은 안동에서 부산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안동에서 발원지인 황지黃池까지가 육백리이니 낙동강의 총 길이는 천삼백리다. 수원이 강원도 태백시 潢池에서 나와 수백리를 흘러 상주의 경계에 들어오면서부터 낙동강이라 하니 上洛으로 들어와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낙동강의 상주구간에서는 낙강시회가 열렸고, 낙강시회의 원류는 고려의 대표적 시인인 백운白雲 이규보가 활약하던 고려 명종 때부터이다. 이 낙강시회는 경북 상주의 낙동강에서 퇴강~경천대~관수루 사이의 40리 구간을 중심으로 1196년(고려 명종 26년) 백운 이규보로부터 1862년(조선 철종 13년)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간 도남서원·경천대·각종 누정·선상 등지에서 51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시회 작품을 기록한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이 현재 상주 도남서원에 보관되어있다.

이 시회에 참여한 주요 문인들로는 이규보를 비롯한 안축, 김종직, 유호인, 김일손, 이황, 류주목, 조익, 이준, 전식 등이다.

낙동강의 읊은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洛東江(낙동강) 李奎報(이규보)

百轉靑山裏 백 굽이 푸른 산 속을

閒行過洛東 샛길로 낙동을 지나온다.

草深猶有路 풀이 깊어도 길은 나있고

松靜自無風 소나무 고요하니 바람이 없도다.

秋水鴨頭綠 가을 물은 오리 머리처럼 짙푸르고

曉霞猩血紅 새벽노을은 원숭이 피 같이 붉어 있다.

誰知倦遊客 누가 게으르게 유람하는 나그네가

四海一詩翁 세상에 시 짓는 늙은이인 줄 알랴.

又(또) 安軸(안축)

雨餘山色染藍靑 비온 뒤의 산 빛이 쪽빛같이 푸르게 물들었는데

十裏奇巖水墨屛 십리에 기이한 바위 수묵화 병풍 같도다.

刺史歡迎新安部 자사를 환영하는 신안부에서

木蘭舟上構茅亭 목란의 배위에 띠 지붕 정자를 세웠네.

5) 낙동나루

낙동나루는 조선시대 육운陸運과 수운水運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우리나라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혔고 낙동강의 나루에서는 최대의 상권을 형성하였다.

또한 낙동역과 후기의 낙동 발참을 겸하고 있는 수로와 육로의 교통과 통신까지의 결절점으로서 동래에서 출발한 영남대로가 처음으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남북방향으로 뻗은 대로 외에 의성과 선산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시장과 객주 촌이 형성되어 부산 구포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낙동나루에 소금과 수산물을 내리고 쌀과 곡물을 아래로 실어 나르는 수산물과 농산물의 물물교환 장소로서 소금배와 상선들이 꼬리를 이었고 주변의 객주 집과 주막에는 외지 선원들과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을 잇는 낙단교가 건설되기 전 낙동 나루는 양 지역 간 유일한 문화교류의 통로였고, 진두리 대안에 위치한 낙정리는 역촌과 하항을 겸한 곳으로 낙동역이 있었음으로 주민들이 현재도 '역마役馬'로 부르고 있고, 염창이 있어 낙동강 상류 지역으로 공급되는 해산물이 집산되는 현재의 복합 물류 유통단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배의 정박 위치는 낙정리 쪽이다.

낙동진을 읊은 김종직의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洛東津(낙동진) 金宗直(김종직)

津吏非瀧吏 나루에 관리는 여울에 관리가 아니고

官人卽邑人 관인은 바로 고을에 사람이더라.

三章辭聖主 세 번 글을 올려 성주에게 사죄하였고

五馬慰慈親 오마로 어머니를 위안하였다.

白鳥如迎棹 흰 물새는 돛대 배를 환영하는 듯하고

靑山慣送賓 푸른 산은 손님 보내는 데 익숙하였네.

澄江無點綴 맑은 강물이 한 점도 얽힌 것이 없으니

持以律吾身 나의 몸가짐도 이와 같이 단속하리라

6) 진두리

진두리는 낙동역의 반대편에 위치한 낙동강과 접한 서안西岸으로서 대규모 시장의 형성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진두리 북동쪽으로는 원마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마에서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밤실로 건너는 나루가 있었고, 이 나루를 낙동후진도선장, 뒷디미 나루라고 하였다. 낙동나루는 큰 배가 뒷디미 나루는 작은 배가 운행을 하였다고 한다. 배는 원마에 정박을 하였다.




 이곳은 요제원要濟院지로 추정되는 곳으로서 옛 번화가와 교통의 요충지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의 1934년(갑술년) 대홍수로 앞 변두리의 객주가客酒家와 일본인 가옥이 완전히 피해를 입게 된 후 100여호의 취락이 구릉 상으로 이주하고 구 객주터는 경지로 바뀌게 되었으며, 진두리의 배후습지가 논으로 개간되었다. 지금은 낙동휴양단지 조성으로 낙동 강변에 여관등 위락시설이 들어서게 되었고 198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으로 인한 신 제방의 설치로 옛 면모를 알 수 없게 변하였다.




 이때 집단 이주된 낙동면 낙동리에는 지금도 일제 강점기 시기의 건축물이 다방茶房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다방 앞쪽에 1914년 헌병대 예하의 낙동헌병분견소가 설치되었고, 1919년 8월 21일 상주경찰서가 설치되면서 면마다 주재소를 설치하였는데 낙동에는 낙동 주재소를 설치하였다. 1946년 낙동지서로 개칭이 되고 1995년 1월 27일 낙동파출소로 개칭이 되었다.

7) 낙동리 비석군碑石群

낙동면 낙동리 287번지 낙동중학교 교정 안쪽 담장 밑에는 9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옛날 낙동리 영남대로 주변에 세워져 있는 것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비가 세워져 있던 위치는 알지 못한다.

현재 세워져 있는 비는 목사 홍후주영세불방비牧使洪候疇永世不忘碑, 목사 홍후종무영세불방비牧使洪候鍾茂永世不忘碑, 목사 박후제소영세불방비牧使朴候齊韶永世不忘碑, 목사 홍후우경영세불방비牧使洪候祐慶永世不忘碑, 목사 이후장소영세불방비牧使李候章韶永世不忘碑, 목사 이만윤선정비牧使李晩胤善政碑, 이방 박의려송덕비吏房朴儀勵頌德碑, 이방 최공두헌송덕비吏房崔公斗憲頌德碑, 이방 박만식吏房朴晩植의 비로서 상주목사 불망비 6개와 이방비가 3개이다.




 이 비의 주인공 중 상주목사로 재임한 내용을 살펴보면 목사 이장소는 1808년(순조8) 9월 부임하여 1813년 7월 이임하였다.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백고伯固. 1813년 낙동면에 영세불망비, 화서면 신봉리에 선정비가 있다.

목사 홍주는 1843년(헌종8) 윤 7월 부임하여 1847년 5월 이임하였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석여錫汝, 화서면 신봉리에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고, 1845년 객사를 중수하였다.

목사 박제소는 1850년(철종1) 6월 부임하여 1852년 6월 27일 충주목사로 이임하였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문재文哉, 영세불망비는 1852년 9월 건립되었다.

목사 홍종무는 1852년(철종3) 7월 부임하여 1855년 12월 이임하였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유승有承, 1852년에 홍치구루를 중수하고, 성황사, 주창, 대동창, 단밀창, 견훤창, 청류관을 중수하였다. 남장사 입구에 1855년 영세불망비가 세워졌고, 1856년 낙동에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목사 홍우경은 1874년(고종11) 2월 부임하여 1875년 7월 보은군수로 이임하였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치선穉善, 1876년 낙동에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목사 이만윤은 1894년(고종31) 10월 부임하여 1895년 5월 병으로 사임하였다. 본관은 진성眞成, 자는 계조繼祖, 동학농민혁명으로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1895년 향음주례를 실시하였고, 1895년 낙동에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이 낙동리 비석군의 건립 위치로 볼 때 목민관이 선정비를 세우는 위치는 국민이 주로 통행하는 대로 주변에 설치하였으며, 목사 영세 불망비 6개는 1808년부터 1895년까지 세워진 것으로 볼 때 구한말까지 대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8) 나각산螺角山




 낙동면 낙동리와 구잠리. 물량리 경계에 있는 해발 240.2m의 소라 뿔처럼 생긴 산이다. 산의 형상이 소라 모양이고 역암의 암봉이 솟아 있다. 하나는 둥글어 원봉圓峰이고 하나는 첨봉尖峰인데 두 개가 쌍으로 솟아 있어 기묘하며 부의 상징인 노적봉露積峰과 귀의 상징인 필봉筆峰을 겸하고 있다.

동쪽에는 마고할미바우가 있고, 북쪽에는 남자바우가 서쪽에는 여자 바우가 있다.

이 산 정상에서는 북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줄기와 남쪽의 낙동리 마을과 갑장산 아래 펼쳐진 농경지와 장곡, 구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의 중간 중간에서 역암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노출된 바위에 강자갈이 박혀 있어 그 모습이 기묘한 형상을 연출하고 있고, 정상은 노출된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산 아래의 경작지에서도 역암에서 떨어져 나온 강자갈이 흩어져 강바닥을 연상케 한다.

지금은 정상의 두 봉우리를 현수교로 연결하고 전망대를 설치하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근 낙동강의 전망이 전경을 잘 볼 수 있고 정상 접근이 쉬워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다. 이 산 아래로 상주~영덕간 고속도로의 건설로 터널이 뚫려져 있으며, 낙동강에는 또 하나의 교량이 낙동강을 횡단하고 있다.

2. 부치대이 고개에서 성골고개

부치대이 고개에서 성골고개까지의 구간은 낙동면 구잠리 불현에서 낙동면 성동리까지 약 4㎞의 구간이다.

불현은 해발 96m이고 성동은 해발 80m로서 낮은 고개로서 두 고개 사이에는 장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류되고 장천 주변은 낮은 분지로 구성되어 있어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왔다. 일찍이 인류가 정착함에 따라 주변에는 각종 고분이 산재되어 있고 신상리 마을에는 암석신앙인 당산제를 얼마 전까지 지내왔으며, 분황리의 대비나루와 강창나루가 있어 낙동강을 횡단하여 중동면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 신상리 거북 당산제堂山祭

낙동면 신상리에는 거북바위 당산제를 지내왔다.




 국도에서 마을의 서남방에 위치한 갑장산 주봉을 향하여 1㎞정도 올라가면 큰 마을에 상신단이 있고, 작은 마을에 하신단이 있다. 하 신단은 마을 동남쪽으로 수령이 오래된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논둑에 열을 지어 서 있고, 마을 쪽으로는 마을공동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 우물에서 갑장산 쪽으로 언덕위에 거북형태의 바위가 3개가 시멘트 모르타르 마감된 대상부에 놓여져 있는데 거북의 형태와 돌다리의 형태를 거북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 신단은 큰 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작은 마을 보다 높은 단을 만들어 그 위에 놓여져 있는데 바닥은 작은 마을과 같이 시멘트 모르타르 마감이다. 작은 마을 보다 바위가 크고 형태는 거북 또는 돌다리 형태로 3개의 바위가 1열로 놓여져 있으며, 종전에는 큰나무 아래에 있었으나 나무가 죽어 베어내고 새로 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이 암석 신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고 상단신은 남신 하단신은 여신으로 부부신격으로 모시고 있으며, 매년 전 주민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제로 거행되었으나 지금은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상단 거북 바위는 3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측면에서 관찰하면 완연한 거북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돌다리 또는 방구백이라고 부르고 상신단에서 남신에게 산신제를 지내고 여신에 대한 거북 거릿제(街祭)를 올렸다고 한다.

2) 신상리 구석기 유적




 낙동면 신상리 구촌마을 주변은 해발 120m정도의 나지막한 단독 구릉성 산지인 ‘용두산’의 남쪽 능선상으로 신상리 유물산포지가 위치한다. 신상리 구석기 유적은 낙동강과 장천이 합수되는 곳에 장천에 의해 형성된 충적 평야에 위치하고 있어 생활 주거지로서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구석기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상주인의 생활 터전으로 이용되어 왔다.

신상리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곳은 구촌마을 남쪽에 위치하는 해발 74.9m 구릉의 남동사면이다. 이 유적은 중기구석기시대(1문화층)와 전기구석기시대(2문화층) 유적으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었고, 1문화층에서는 복합석기 1점, 2문화층에서는 망치돌 1점이 출토되었으며, 주변의 지표에서 다양한 석기 8점을 수습하여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점이 발견되었다. 토층의 시료에 대한 연대측정결과 2만 5천년 전에서 20만년 전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3) 신상리 고분군

신상리 고분군은 상주분지의 동쪽 경계인 병풍산과 낙동강을 사이에 둔 단독 구릉성 산지인 속칭 ‘용두산’의 사면에 형성되어 있는 고분군으로서 용두산 서쪽 사변과 남쪽 사면일대에는 구석기 유적이 위치하고 있고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삼국시대 고분군이 조영되어 있는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문화복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고분군 Ⅰ에서는 삼국시대 목곽묘 9기. 석곽묘 31기. 옹관묘 1기. 민묘 1기 등 모두 42기의 분묘를 비롯하여 1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유물로는 옥석류 2점. 토제류 162점. 금속류 101점 등 모두 265점이 출토되었다. 고분군 Ⅱ에서는 2기의 삼국시대 석실묘가 확인되고 토제류 17점. 금속류 2점 등 모두 19점이 출토되었다.

4) 불현 비석군




 불현은 낙동역에서 상경을 할 때 첫 번째 넘어야 하는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도 옛길 옆에 비석거리가 조성되어 있었다.

낙동에서 국도 제25호를 따라 해발 96m의 부치대이(佛峴)로 올라가면 불현이 나오는데 불현은 구잠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서 불상석이 있었기 때문에 길손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옛 영남대로 옆인 구잠리 산56번지에는 목사조후영화선정송덕비牧使趙侯永和善政頌德碑, 목사유후언현영세불망비牧使兪侯彦鉉永世不忘碑, 이방박정준청백비吏房朴正準淸白碑, 군수이후관하불망비郡守李侯觀夏不忘碑 총 4기의 비가 일렬로 서있는 것은 비석거리 형태의 비석열로서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목사 조영화는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기穉祈 통훈대부 영천군수 1862년(철종13) 5월 24일 임명 받아 6월 17일 부임하였다가 1865년(고종2) 3월 16일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이임하였다.

목사 유언현은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중필仲弼 1778년(정조2) 1월 24일 임명받아 2월 11일 부임하였다가 1779년(정조3) 12월 대동미 상납기한 경과로 파직되었다.

군수 이관하는 본관은 전주全州, 1896년 (고종 33) 6월 임명받아 8월 18일 부임하였다가 1897년 5월 중추부의관中樞府議官으로 이임하였다.

5) 성골 고개 주막

성골고개는 병풍산 동남향의 자락에 국도 25호선이 지나가면서 낮아진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시내 헌신동에 진입하게 되는데 우측에 슬레이트 1층 건물 현대슈퍼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옛 주막 건물이다. 미서기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게로 사용하는 곳이 있고 그 뒤쪽에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구멍가게로 사용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길목의 주막으로서 많은 주막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가게 바로 옆에 간이 버스 승강장이 설치되어 있다.

3. 성골 고개에서 송현

이 고개는 낙동면 성동리 병풍산아래 고개에서 해발 80m에서 사벌면 목가리 해발 125m까지 15.1㎞ 구간으로서 상주지역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송현이다.

이 구간에는 아자개가 웅거하였다고 하는 병풍산성과 병풍산, 헌신동, 성동리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고 공성의 웅이산에서 발원하는 상주의 남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병풍산 동쪽 자락이 도남동에서 낙동강과 합수된다.

또한 낙상동에는 낙원역과 원, 발참이 조선 후기까지 있었고 상주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이부곡토성이 영남대로와 접해 있어 고대부터 조선까지 이용되어온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으며, 목가리에는 송원이 자리하고 있어 이용자의 편리를 도모하였고 송원 옆에는 대정원이라는 샘이 아직까지 마을의 간이상수도로 이용되고 있다.

목가리의 송현은 옛 도로의 형태가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병풍산성屛風山城




 병풍산성은 상주시내에서 동쪽으로 5㎞지점으로서 영남 내륙간의 수운과 육상 교통로와 교차지점이며, 상주분지의 넓은 충적평야를 기반으로 낙동강과 육상 교통로를 통해 물자의 보급과 수급, 수송이 모두 편리한 요충지로서 상주시 병성동과 낙동면 성동리 경계지점의 병풍산에 위치하고 있다. 병풍산은 해발 365.5m로서 365.5m와 294.8m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과 능선을 막아 쌓은 마안봉형의 포곡식 산성을 쌓았다.

축조시기에 관해서는 옛 사벌국고성과 후백제왕의 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했다는 상산지의 기록과 조선학보의 삼한시대 축성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지표 조사 결과 성곽 관련 유물에서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와편이 발견되고 더 이른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6~7세기의 병풍산 고분군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고 후삼국 또는 고려 초 혼란기에 산성을 개축 또는 수축해 이 지역 주요한 거점 또는 요충지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성곽의 형태는 7각형에 가까운 전체 둘레 1.864㎞로서 축조수법은 지형조건에 따라 내탁에 의한 토석혼축의 편축법과 내외협축법이 사용되었고, 성벽은 능선 구간이 가장 길고 그 다음이 비탈, 계곡 순이다.

2) 병풍산 고분군




 병풍산 고분군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25호로 병성동 병풍산 일대에 578,161㎡를 1998년 4월 13일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병풍산 고분군은 병풍산의 약 7부 능선에서부터 사면을 따라 산 아래 도로변까지 지름 20m에서 작은 것까지 연속적으로 조영되어 있고, 조영된 범위는 병풍산에서 시작하여 산 아래인 병성동, 헌신동, 낙동면 성동리에 걸쳐 조영되어 있고 이러한 조영은 상주시내 분지 방향으로 외답동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병풍산 아래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국도 제25호의 확장공사로 여러 번의 발굴조사가 있었다. 2011년 병성동지역과 헌신동 일부 북쪽 사면에 조성된 고분을 지표 조사한 결과 862기의 고분이 확인 되었고, 모두 도굴되었다. 지금은 도굴된 봉분을 복구하는 정비사업이 2012년부터 진행 중이다.

3) 헌신동 고분군

상주분지의 동편 병풍산 남쪽 능선 말단부인 낙동면 경계에 위치하며 25번 국도가 지나가는 성골고개를 사이에 두고 성동리고분군과 마주하고 있다. 도로공사로 인한 발굴조사에서 토광묘 2기, 삼국시대 석곽묘 111기, 옹관묘 4기, 고려시대 석곽묘 4기와 조선시대 민묘 32기 등 모두 167기의 유구가 확인되고 유물은 지표 채집된 유물을 포함하여 토제류 774점, 금속류 396점, 옥석류 108점등 모두 1,278점이 출토되었다. 분묘는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출토된 토기 가운데 상당수는 재지계在地系 양식이며, 일부는 경주양식을 보이고 있다. 유구밀도는 83㎡당 1기로서 단위면적당 유구 밀도가 높게 나타나며 이러한 밀도는 병풍산남쪽 능선 일대가 당시의 지역집단이 선호하였던 묘역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병성동 고분군




 병성동고분군은 병풍산에 조영되어 있는 고분군으로서 여주-구미간 중부내륙고속도로 13공구 구간내 포함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조사에서 초기철기시대 수혈유구 2기, 삼국시대 석곽묘 37기, 옹관묘 7기, 석실묘 11기, 고려시대 석곽묘 2기, 조선시대묘 18기, 건물지 1동 등 모두 78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토기. 자기류 587점, 금속류 360점, 옥석류 90점 등 모두 1,037점이 출토되었다.

초기철기시대 유구는 능선의 등대와 경사가 급한 사면에 조성되어 있고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와 원형점토대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의 출토형태를 볼 때 2세기경에 조청된 것으로 추정되고, 삼국시대 석곽묘는 수혈식석곽과 횡구식석곽으로 분류되나 횡구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횡구식석곽묘 가운데에는 선축한 1차 석곽의 단면을 파괴하고 양장벽을 연장하여 2차로 석곽을 후축한 구조로서 성동리 고분군에서 널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조성은 5세기중엽에서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석곽묘는 편병과 사발의 기형적 특징을 통해 9~10세기 무렵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조선시대 묘는 대략 1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5) 성동리 고분군

성동리 고분군은 상주시와 낙동면 낙동리와 경계에 위치하며 25호 국도가 지나가는 성골고개를 사이에 두고 헌신동 고분군과 마주하고 있다.

성동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구간 건설공사에 따라 멸실 우려가 있는 매장문화재 및 문화유적의 성격과 분포범위를 파악하기 위한 구제조사를 2차에 걸쳐 실시하였다.

1차 조사결과 삼국시대 토광묘 25기를 비롯하여 석곽묘 81기, 옹관묘 3기, 고려시대 이후의 석곽묘 4기, 토광묘 64기 등 모두 177기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토기·자기류 512점, 금속류 498점, 석기 1점, 경식을 포함한 기타 47점 등 모두 1,058점이 출토되었다.

이 성동리 고분군은 4세기대의 토광묘에서 조선시대의 분묘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무덤이 조영되어 있고, 특히 삼국시대 석곽묘는 선축된 석곽의 봉분과 한쪽 단벽을 파괴하고 양장벽을 연장하여 또 다른 석곽을 축조하여 추가장을 행하였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2차 발굴조사에서는 기 발굴된 성동리 고분군의 북동쪽 사면 하단부에 해당하며, 목곽묘 1기, 삼국시대 석곽묘 39기, 옹관묘 1기, 고려시대 건물지 1동과 조선시대 민묘 22기 등 모두 64기의 유구가 확인 되었다. 유물로는 토제류 352점, 금속류 180점, 옥석류 18점 등 모두 550점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석곽묘는 수혈식과 횡구식 설실로 구분되는데 수혈식 석곽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징은 다른 고분군에 비해 석곽의 규모가 대체적으로 작으며 유물의 크기 또한 약간 축소된 경향을 보이고 있어 특별한 매장풍습의 일단을 보여주거나 혹은 지역 집단내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 석곽묘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 후반부까지 조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표조사에서 화살촉 3점이 수습되었는데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같은 유구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유적 간 유구밀도는 82㎡당 1기이다.

6) 나원 마을

나원 마을에는 낙원역洛源驛이 있었는데 상주의 북쪽 16리에 위치하고, 유곡도에 속한 역이다. 북으로 덕통역까지는 30리이며, 말 4필, 역리 111인, 노비 22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낙상동 849-4번지 상에 마차와 마부 형상의 조형물을 제작하여 설치하고, 주변에 조경을 실시하여 소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낙원발참 터(洛源發站址)로서 장 1명, 군 45명이 있었다. 나원 마을 뒤 100여 미터 되는 도룡산 기슭에는 마당馬堂이 있었다. 매년 정월 보름 동제를 지낼 때 말 꼬랑지 털을 문주에 걸어 놓고 동제사를 올렸다 하여 마당제馬堂祭라 불렀고, 본래 역마을이었던 이곳의 마신당馬神堂이지만 약 200여년 전부터 마당의 신위는 파평 윤씨(정부인), 경주 최씨(숙부인) 충주 지씨(의인)등 세 성씨를 골맥이 시조신始祖神을 위한 동신제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 용지에 편입되어 철거되고 없다. 이 마당은 옛 낙원역의 마당이 변형되어 마을신앙으로 전래된 것으로서 국제승마장이 건립되면서 승마장 안에 옛 마당의 형태로 복원을 한 후 국조오례의에 의해 국가 제례를 학술세미나를 통해 복원하여 2011년부터 매년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7) 낙상동 사지寺址

사지寺址는 낙상동 산 9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사지로서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 구간 내에 편입되어 조사된 유적이다. 이 유적 조사는 1999년 8월 6일부터 10월 5일까지 60여일에 걸쳐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결과 유구는 탑기단 적심석과 토광묘 1기가 조사되었고, 유물은 석탑재 23매를 비롯하여 기와류. 금속류. 기타 석재 저울추 등이 출토되었다. 산지 사찰로 추정되고 금당 앞에 놓이는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다르게 이곳은 중심 가람과는 다소 떨어진 능선 위에 탑을 배치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배치는 지형의 기운이 허한 곳에 탑을 세워 기운을 보강하거나 기운이 강한 곳에는 탑을 세워 기운을 악화시키려는 산천비보사상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기단부의 적심석과 잘 짜인 구조로 보아 탑의 건립이 완성되었음을 전제할 수 있는데 상당수의 탑재가 이미 유실되었으며, 잔존 탑재에서도 후대에 떼어낸 흔적이 남아 있고 일부 탑재는 미완성의 흔적을 보이는 부재도 있어 조성 도중에 중단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탑이다. 적심석 내부는 풍화암반층을 굴광하고, 그 안에 잡석과 사질토를 깔아 다진 뒤 그 중심부에 2중으로 거대한 중앙적심석을 놓았다. 이 처럼 탑 기단부에 2중으로 거대 중앙적심석을 놓은 예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되지 않은 특이한 구조이다.

석탑재 이외에는 청동편과 철제품이 수습되었는데 청동편은 부식이 심하고 일부만 남아 있어 그 형태나 기형을 알 수 없으나 청동합편으로 추정되고, 철기류는 철정편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제품이 발견되었다. 기와류는 암키와와 수키와만 출토되었는데 태선문. 세선문. 사지격문이 시문되었고 내면에는 마포자국이 선명하다. 태토와 분할 방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제작시기로 추정한다.

탑재는 사벌면 화달리 소재 충의사 사무실 뒤편에 임시 보관하다가 현재는 상주박물관 야외 전시관으로 이전하였다.

8) 여근석女根石




 나원마을 북동쪽 산인 성안산 줄기에 여근 상징인 공알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 곧바로 보이는 외답 마을의 부녀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외답마을 청년들이 몰려와서 공알바위를 부수려고 했을 때 건너편 외답마을에 큰 불이 나서 쫓아가면 마을에는 아무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공알바위를 손상하지 못하게 신기루처럼 헛것이 보이며 바위에 손을 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이 마을이 직접 보이는 만산동에는 남근상징 바위의 남근석이 있어 남근상징바위를 장애물로 가렸다고도한다. 이 장애물을 벗겨내면 낙상동 마을 아낙네들이 바람이 나서 가출하는 일이 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낙상동 마을 사람들은 한때 낙상동의 여근 상징의 불바위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시켰다고 한다.

한편 외답 마을에도 남근석 형상의 바위가 있는데 일부는 두꺼비 형상이라고도 하고 일부는 남근상징 바위라고도 한다. 방향은 낙상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앞에는 제단을 놓아 마을에서 동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9) 이부곡토성吏部谷土城




  이부곡토성은 낙상동 나원마을의 북동쪽에 위치하는 성안산과 그 북쪽과 남쪽, 동쪽에 위치하는 해발 155.5m, 157.8m, 141.1m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계곡을 감싼 C자형의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1,239m, 동서간 직선거리는 330m, 남북간은 340m이며, 면적은 112,947㎡이다. 성내외부는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근대에서 현대에 조성된 민묘가 많이 산재하고 있어 주변 지형 훼손이 심하다.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애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채집되고 있다. 이 산성은 1998년 12월 28일부터 1999년 12월 23일까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하였다.

조사결과 토성은 구릉의 바깥쪽 사면에 편축형으로 성토하여 축조하였고 성문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계곡부의 성벽만은 협축형으로 쌓았다. 성내의 수원은 북동쪽 계곡으로 모여 집수되고 배수되며 성문에 가까운 성내에 집수시설을 마련한 듯하며 트렌치 구간에서 출토된 토지의 양상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성곽의 안팎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주고 두형토기를 사용하던 시기에 이미 이 구릉지의 높은 곳에 주거지를 만들어 살았음을 말해준다. 축성의 상한은 무문토기시대의 말기인 두형토기 사용기 이후이고 하한은 삼국시대 경질 토기가 출토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경질 토기가 출현하는 4세기보다는 앞선다고 할 수 있다.

10) 용담리 유적

유적은 중부내륙고속도로 구간(여주~구미)에 포함되어 1998년 11월말부터 12월초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주거지 6기를 비롯하여 구 5기, 토광묘 1기를 확인하였고, 1999년 5월 20일부터 8월 24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의 수혈유구 2기를 비롯한 고려시대 석곽묘 1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7기, 저장시설 3기, 토광묘 8기, 구 4기, 주혈군 1기, 기타 4기등 모두 30기가 확인되었고, 유물은 토기. 자기류. 41점. 금속류 2점. 석기 9점. 기타 19점 등 모두 71점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주거지는 말각장방형과 원형으로 분류되고, 말각장방형의 주거지는 540㎝이상이며, 화덕시설은 할석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원형 주거지는 길이 220~360㎝이며, 화덕시설은 바닥면을 얕게 파고 만들었으며 여기에 이어져 굴뚝을 북쪽의 수혈벽을 파고 만들었다.

출토된 분청사기는 포류문의 흑백상감된 것으로 고려청자의 전통을 아직 간직하고 있으며, 수파문. 초문. 귀갑문. 인화문 등 전형적인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가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성 시기는 15세기로 추정한다.

백자는 굽의 형태나 번조 받침에서 오목굽이나 모래받침이 보이지 않은 특징을 보이고 있어 조성 시기는 16세기로 추정한다.

수혈주거지 조성자는 소규모의 취락을 형성하고 단기간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며 시기는 16세기경으로 판단된다.

11) 송현松峴




 송현은 해발 128m로서 상주구간의 영남대로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의 고개이다. 이곳에도 서낭당이 있어 서낭당 고개, 장고개라고 하며, 신덕마을 주민은 신덕리 728-1번지 주변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추가마을에서 함창장을 보러갈 때 이용된 고개였으며, 이 고개를 경계로 함창읍과 사벌면이 분리된다. 북쪽인 함창읍은 솔티의 좁은 계곡이 이안천까지 연결되어 함창평야가 시작되고, 남쪽인 사벌면은 이 고개를 경계로 사벌평야가 시작된다. 창의진이 1592년 8월 7일 임란당시 송현 마을 입구에 매복하여 왜군을 사살하고 군수품을 노획했다고 한다.

早發洛原驛  허 적

霜多如雪氷如玉 서리는 눈처럼 내렸고 얼음은 구슬같이 많은데

朝日照之光陸離 아침 햇살 그곳에 비춰 반사되고 있구나

早發洛原到松院 일찍 낙원역을 출발해서 송원에 도착하니

未行十里人馬疲 십리도 오지 못했는데 인부와 말은 지쳐버렸다네

路邊枯樹森森立 길가의 썩은 나무 우뚝우뚝 서있는데

朝旭輝光鳥雀集 아침 햇살 눈부시니 온갖 새들 모여드는구나.

行色凌凌遡北風 행색은 늠름하게 북풍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時聞氷底泉流澁 가끔씩 얼음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네.

12) 목가리석조관세음보살입상




 대로에서 약 300m 정도 남서쪽 야산 기슭인 사벌면 목가리 산 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보살 입상은 지방문화재자료 제43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있고 방향은 남동쪽을 정면으로 하고 시멘트 블록조, 슬레이트 지붕, 1칸의 건물에 안치되어 있는데 약 10도정도 기울어져 있다. 주변에서 채집되는 와편은 조선시대 중호문와편이 많고 간혹 고려시대 어골문편도 확인되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옛날에는 이 건물 양측으로 큰 전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는데 지금은 죽어 없어졌다고 한다.

상반신과 두부가 크게 표현된 석불로서 크기는 246㎝이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의 정면에 비로자나불이 새겨져 있다. 보관 띠의 좌우에는 원권문을 배치하고 귀는 어깨에까지 닿았으며 의섭은 통견으로 표현이 단순하다. 좌수는 복부에 두고 우수는 손등을 밖으로 향하여 편채 자연스럽게 내렸다. 하부는 八자상의 의섭 사이로 군의가 짧게 표현되어 있다. 외부 색상은 황토색을 띠고 있으며, 마을 주민은 이곳이 원래의 위치가 아니고 동남쪽 산기슭에 노출된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 문화재는 상주시에서 2003년 기울어진 입상을 바로 세우고 보호각을 건립하고 관람로를 개설하여 관광자원화 하려고 하였으나 토지 소유자의 반대로 정비를 하지 못하였다.

입상 동남쪽으로 약 5m 지점, 사면하단과 과수원사이에는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는데 하대갑석, 상대면석, 상대갑석, 제1탑신, 제1. 2. 3 옥개석의 부재가 남아 있었는데 근간에 원래의 탑과는 달리 이형탑으로 높이 207㎝가 쌓아져 있었다. 조성 시기는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로 보이며, 2007년 11월말에서 12월 4일 사이에 도난을 당하여 현재는 탑의 형태를 찾을 수 없다.

사벌면 주민은 목가리 쪽인 입상 주변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고, 함창읍 신덕리 주민은 송현을 넘어 송현 고개 마루 우측 민묘가 조성된 곳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송현 고개 마루에는 누석의 흔적이 보인다. 원터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이곳에서 올렸다고 한다.

13) 대정원大井員




 「상산지 고적조에는 송현길 가까이에 3칸의 기와집 가운데 큰 석불이 한 구가 안치되어 있고, 그 옆에 큰 샘물이 바위 구멍사이로 용출하는데 그 사방과 밑은 함과 같이 다듬어져 있으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고 겨울에는 더운물, 여름에는 찬물이 솟아 샘 아래로 흘러 10여두락의 논에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지어 예부터 대정원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샘의 깊이는 3~4m 정도이고 크기는 3m정도의 정방형에 시멘트 옹벽을 설치하여 마을 간이 상수도로 이용되고 있다. 샘의 바닥은 석회암으로서 용출되는 물에 석회암이 녹아 수석을 연상하게 하는 모양이다.

4. 송현에서 봉굴재

이 고개는 사벌면 목가리 해발 125m에서 함창읍 덕통리 덕봉성까지 4.8㎞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는 송현을 넘어 이안천을 건너고 함창평야를 태봉산 옆으로 가로질러 곧바로 덕통역이 있었던 덕통으로 들어간다. 덕봉산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온 줄기에 덕통리와 척동리 마을이 있다. 봉굴재는 함창초등학교 영동분교(폐교) 남쪽 골짜기인 범골과 척동리의 북서쪽사이에 있다. 영남대로는 이 봉굴재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이 구간에도 상주 평야와 같이 이안천과 영강이 합수되어 충적 평야를 이루고 청동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살아온 터전이다.

그러나 1934년(갑술년) 대홍수로 태봉산 주변에 번창하였던 태봉 마을이 유실되어 마을 전체가 현재의 태봉 마을로 이주한 자연재해의 현장이다.

이 태봉마을을 영남대로에 직접 접해 있어 주막촌이 형성되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병참부대로 이용되어 왔다.

1) 봉황대鳳凰臺와 봉황정鳳凰亭

봉황대는 시실 서북쪽 함창읍 금곡리 490번지에 위치한다. 이안천과 접해 있고,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 절벽에는 봉황대鳳凰臺의 암각서가 있고 그 위에 봉황정이 있다.

옛날 이곳은 영강串川과 이안천猪川이 합수되고 알운戞雲, 비봉飛鳳, 덕봉德峯의 세 산이 앞에 있어 이태백의 ‘삼산이수시三山二水詩’ 구를 따라 대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이 곳 산수가 좋아 습독習讀 류희임柳希任이 대 위에 소요逍遙하고 그 위에 수장壽藏할 곳을 얻으니 후손이 추원사모追遠思慕하는 곳으로 1500년대에 봉황정을 세웠다. 전윤석全胤錫의 기문과 채휴징蔡休徵의 ‘등봉황대유감登鳳凰臺有感’의 시가 있다.

꽃피는 좋은 시절 봉황대에 올라

어른 아이 좋은 놀이 이 가운데 펼치네.

한가한 중 종일을 단란히 보냈지만

홀로 우헌愚軒 빠져 마음에 걸리네

정자는 시멘트블록 담장 안에 정면 2칸, 측면 칸반이며, 5량가 팔작집으로 동남향 방향이다 . 앞에는 툇마루와 측면에는 쪽마루를 시설하고, 내부는 마루방을 꾸몄다.

2) 태봉산胎封山과 태실胎室

태봉산은 옛 고녕가야국과 함창현의 지역으로서 함창읍 태봉리 산109-1번지 해발 105.5m의 태봉산 정상에 위치한다. 태봉산은 영강과 합수되어 낙동강을 이루는 합수 지점의 평야에 돌출되어 있는 산으로서 태봉산 이외에 고산孤山, 료도寥島, 투구봉으로 불려 지고 있으며, 영남대로와 접하고 있어 예부터 대로의 길잡이 역할을 하여온 산이다. 이 산 아래에는 태봉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갑술년(1934년) 대홍수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현재의 태봉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태실이 있었던 정상 부근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고 태실은 서삼릉으로 이봉함에 따라 태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태실은 선조의 12남 인흥군仁興君(1604~1651)으로서 모는 정빈민씨靜嬪閔氏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물은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있다. 인흥군의 출생일은 만력 32년(1604) 2월 7일생이고, 장태일은 만력 36년(1608) 11월 7일로서 출생 후 4년 9월 만에 태실을 조성하였다.

3) 동학농민東學農民 전투지戰鬪址

태봉에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일본 병참부대가 주둔하였고, 1896년 3월 29일부터 2일 동안 예천. 안동, 영천(영주), 봉화, 제천 등의 연합 의병진은 선성(예안)의병을 선두로 태봉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했다. 이 연합 의병진은 예천을 거쳐 3월 26일 산양장터에서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며 동맹을 서약하였다. 서약을 하면서 역적의 무리가 되지 말 것, 중화 제도를 바꾸지 말 것, 죽고 사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지 말 것, 사적으로 보지 말고 적을 보면 진격할 것의 다섯 가지의 맹약문을 채택하였다. 이 때 참여한 의병은 권재호가 거느린 안동의병 250여명, 김도현이 지휘하는 신성의진과 서상렬이 지휘하는 호좌의진 100여명, 금석주가 지휘하는 봉화의병 53명이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의병을 진압하러온 관군을 접대한 예천군수 유인형을 처형하고 3월 27일 산양에서 용궁으로 향했다가 3월 28일 산양에 진을 쳤다. 이들은 의병진별로 공격선으로 이동해서 안동의진은 덕통역에, 호좌의진은 함창에, 영주. 순흥. 예안의진은 포내촌에 풍기의진은 당교에, 봉화의진은 동산촌에 머물렀다. 3월 28일 호좌의진 황기룡이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3월 29일 연합의진이 태봉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의병은 약 700여명이고 일본군은 50~100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의병은 3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용궁 쪽으로 후퇴하였다.



 4) 덕통산德通山과 덕봉성德峯城

덕통산은 땅재산, 오개봉, 옥녀봉, 덕봉으로 불린다. 함창읍 덕통리 산 14번지이며, 해발 139.5m이다. 이 산에는 덕봉성이 있는데 테뫼식 토성이며, 고려 공민왕 10년(1361) 10월 홍건적이 침입해 왔을 때 왕은 12월 중순 복주(안동)으로 피난을 하였고 김득배 등이 활약하여 난이 평정되자 1362년 2월 왕은 상주로 향하면서 덕통에 머물 때 축조된 성으로 보이며 산의 8부 능선에 400m정도의 토성 흔적이 발견된다.

동쪽 기슭에 당집이 있고 정상부 북쪽에 산신단이 있다. 산신단은 시멘트로 단을 만들고 ‘옥여봉천황산신지위玉輿峯天皇山神之位라 쓰고 옆에 단기 4260년이라 쓰여 있다. 산제당은 단칸 규모, 기와에 동향으로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5) 덕통역德通驛

함창읍 덕통리에 있었다. 조선시대 유곡도 찰방 소속의 덕통역으로서 큰말 2, 중말 2, 짐 싣는말 4필과 역리45,여종 11명이 있었는데 고종 건양 원년(1896) 폐지되었다. 처음에는 덕통 2리인 구역터에 설치되었다가 현재의 덕통리로 옮긴 후 그 역터는 구역터라고 불렀다 한다.

德通驛 別徐察訪忭 하 진

七日連衾話 7일이나 같이 지내다가

三冬久別懷 삼동에 이별하는 마음이로다

前江初碧柳 앞 강가에는 버들잎이 돋아나고

古驛已殘梅 오래된 역에는 매화가 시들어버렸네

節序驚遊子 계절은 나그네를 놀라게 하고

行藏媿薄才 행장은 박재를 창피하게 하는구나

臨岐又分手 갈림길에서 헤어지며

愁緖自難裁 이 시름은 가누기가 어렵도다

6) 갈마산渴馬山 송계松稧

함창읍 덕통리의 덕봉성 서쪽에 있는 낮은 산이다. 이 산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묘지 조성을 할 때에 송계를 만들어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이 송계는 1966년 함창읍 덕통리, 척동리, 태봉리 인근 주민 54명의 계원이 묘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갈마산의 임야를 매입하였고, 1천여만원의 운영자금으로 매년 음력 정월 10일에 정기적으로 취회를 하고 있다. 원래의 송계는 18세기 정조 년간에 공유림을 확보하고, 이를 공동보호, 공공이용을 위하고 권력층의 침탈로 인해 축소되어가는 공산의 유지와 보호하기 위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 단위의 조직체를 말한다.

그러나 이 산에는 본 취지와는 다르나 평야지대이고 산림과는 거리가 멀어 묘지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대적 집합계로 발전하여 구성되었고 계의 규칙에 계원이 계에 들어올 때에는 백미 한가마니를 내도록 하고 계원 상사喪事시 조기 1매와 탁주 두말을 보자補資하도록 하였다.

5. 봉굴재에서 당교

이 고개는 봉굴재를 올라서면 덕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두산까지 낮은 능선과 계곡을 만들면서 연결되어 있는데 덕봉에서 두산까지는 산 능선을 타고 영남대로가 연결된다.

이 길의 남쪽에는 이안천이 만들어낸 함창평야가 펼쳐지고 북쪽에는 영강이 만들어낸 점촌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과 농촌사회의 여유와 풍요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이러한 풍요와 곡창지대로 인하여 예부터 많은 전쟁의 현장과 역사의 현장이 되어 왔다.

여기에는 현재의 덕통리에 덕통역이 있기 전에 역이 있었던 구역터가 있고, 호연정과 두산산성을 거쳐 때때리까지 연결된다.

때때리는 당교로서 경북선철도와 나한천으로 상주시와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당교는 신라시대의 김유신장군과 당나라의 소정방, 임진왜란 때 정기룡장군과 권응수 장군, 의병 활동 등 군사적 요충지와 교통의 길목으로서 상주의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위치이다.

1) 두산頭山



 머리뫼는 윤직 3리이고 구역터의 북쪽이 된다. 해발 98m의 낮은 산으로 산 모양이 용의 머리 같아서 머리미라고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을 치고, 선조26년 4월 28일까지 주둔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전투 기록을 보면 「1592년 9월 27일 창의진이 당교 왜적 야습, 같은 해 11월 15일 이축과 정범례가 당교 야습, 같은 해 10월 27일 이후 당교 주둔 120여명의 왜적 사살, 1593년 3월 권응수 장군이 당교 왜군을 쳐서 큰 성과를 거둠」의 전적이 있었다. 모두 당교에서 전투를 하였다고 하는데 왜군이 선조26년 4월 28일까지 주둔한 곳은 머리뫼이므로 이곳과 모전천이 마주치는 곳에 당교가 있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머리뫼 동쪽자락에는 호연정이 자리잡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방형 암석이 있는데 작은 성혈 4개는 군락을 이루어 분포되어 있고, 1개는 가장자리 부분에 위치하여 총 5개의 성혈이 있다. 큰 성혈은 2개로서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석묘로 보인다. 또한 산 아래쪽 능선을 따라 경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경지에서 나오는 토기편은 사벌면 화달리와 금흔리 주변과 외남면 흔평리 토성에서 발견되는 토기편과 유사한 종류의 연질토기편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원삼국시대 이전부터 거주하였던 교통의 요충지로 보이는 곳이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경작을 하기 위하여 밭을 갈면 가끔씩 토기편과 와편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지명을 보면 성내산(오동리)이라는 지명이 있다. 성내 산이라면 주변에 성이 있었다는 것인데 머리뫼의 머리뫼 산성(頭山 山城)이 있어 만들어진 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2) 호연정浩然亭

머리뫼 동쪽 기슭인 함창읍 윤직리 689-10번지에 위치한다. 이 정자는 평산平山 신유申裕(1496~1541)가 간신을 논핵한 후 귀향하여 1534년 건립하였다. 중간에 폐정되어 손수 심은 은행나무만 남아 있었다. 1752년(영조 28) 후손 신진원申鎭元이 중건하고, 남명 조식曺植이 명염하고 수암 권상하權尙夏 서미書楣했다. 1891년(고종 28) 후손 황이 중건하였고, 1984년 후손 광현光鉉이 중수하였다. 건물은 시멘트 기단위에 앞면 툇기둥만 1단 낮추어 두리기둥을 세우고, 5량가의 초익공으로서 평면구성은 중앙대청 1칸에 좌우로 온돌방 1칸을 배치한 중당협실형이다.

3) 사암思岩

처자바우, 치마바위라고하며, 함창읍 윤직리 752번지 회나무 밑에 있었다. 이 바위는 마을에서 매년 솔가지로 덮어 한 번도 몸체를 드러낸 적이 없었고 만약 몸체가 보이거나 부정하게 되면 마을 부녀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흘날 깨끗한 동제관을 선발하여 동제사를 지내면서 소나무 가지를 서너짐 가져다 덮고 오래된 솔가지는 걷어내지 않고 덮기만 한다. 바위를 덮은 솔가지를 들치거나 쑤석거리면 동네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서 가출한다는 믿음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2004년경 국도 확장공사 구역에 편입되어 회나무를 캐내고 바위는 헐어서 함창읍내 쪽으로 약 150m 이동하여 주유소 앞 공지에 이건하였는데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않고 이건한 한 상태로서 그 원형을 찾기가 힘들다.

4) 당교唐橋

함창읍 윤직 3리로서 때다리 때때리, 땟다리라고 부른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모전천이 흐르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한 소하천이 흘러 두개의 천이 합수되며,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와 문경시 모전동茅田洞(띠밭)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경북선 철도가 놓여 있다. 문경시 모전동은 해발 71m의 평야가 모전천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고, 윤직리는 해발 81m의 고지대로서 모전동과 윤직리는 약 10m의 자연 단애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 해발 71m의 평야가 시작되는 곳인 나한천에 당교가 놓여 있었다. 지금은 국도 3호선 확장으로 인해 흔적은 사라지고, 경북선 철도 남쪽에 조그만 콘크리트 구조 다리가 놓여 있다.

이 지방에서는 사투리로 “뛔놈(唐人)”을 쓸어 없앤 곳이라 하여 “뙤다리 또는 띄다리(唐橋)”라 부르고, 김유신金庾信장군이 당군을 쓸어 묻었던 곳이라 전해오고 있다. 마을 이름 모전茅田은 띄밭의 한자 의역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 좌·우도에 이르는 목에 해당하는 갈림길인 이곳에 왜적이 굳게 지키므로 아군이 좀처럼 공격하지 못하다가 상주판관인 정기룡鄭起龍장군이 기습으로 일격에 적을 섬멸한 곳이다.

또한,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마저 정벌하려고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때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그 음모를 알고 당병唐兵을 초대하여 짐주라는 독주를 먹여 모두 독살시켜 쓸어 묻은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당교는 “현의 북쪽 6리에 있고,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이 그 계획을 알고 당나라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서 당교唐橋라 이름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창의진이 1592년 9월 27일 이축으로 하여금 당교의 왜적을 야습하였고, 같은 해 11월 15일 이축과 정범례가 당교를 야습하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해 10월 27일 이후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120여명의 왜적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1593년 3월 권응수 장군이 당교에서 안동, 군위 등에서 분전하던 영남의병대장 김해와 더불어 왜군을 쳐서 큰 성과를 거두어 경상도병마절도사 겸 방어사에 특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당교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영남대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문경시청 전정에는 정영호박사가 연혁을 지은 당교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당교사적비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민족통일의 성업은 국조 단군의 개국 이래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이었으니 이러한 숙원을 풀어준 나라가 신라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청소년들이 건전한 기풍과 자기 문화를 키운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고구려와 날쌘 백제를 아우르기 위하여 일시 당의 세력을 빌렸지만, 통일을 이룩하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와도 의연히 맞서 싸워, 당군의 말발굽을 우리 땅에서 말끔히 지워 버렸다.

이 어찌 장한 자주정신의 발로가 아니랴! 당이 신라의 통일 성업을 도운 것은 신라마저 속국으로 삼기 위한 욕심에서였다. 신라는 이를 재빨리 간파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맞이하여 당나라의 침략야욕을 여지없이 분쇄했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장군이 침략자로 돌변한 당의 소정방을 물리친 역사적 다리가 바로 되다리 당교이다. 통일의 비원을 싣고 달리는 3번국도 옆에 당교사적비를 세움은 통일의 의지를 오늘에 다시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자주정신과 통일 위업을 이 시대의 점촌 시민도 마땅히 본받아 조국통일의 과업을 앞당겨 실현시키는 횃불이 되자」

이 사적비는 옛날에는 문경지역이 상주목의 속군현으로서 상주와 문경을 구분 할 필요성이 없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자치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당교 사적비도 상주지역에 세워져 상주의 유적으로 남아 있어야 함이 당연한데도 문경시청 전정에 세워져 문경의 역사 산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에 따라 상주시에서도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문경시 점촌동, 영신리의 삼거리에 당교사적비를 2008년에 세워 전적지를 알리고 있다.

南征 주세붕

正德十五載 명나라 정덕 15년(1520년)의

重陽越三日 중양절 3일지나

(중략)

夢罷東樓月 잠깨니 동루에 달이 떠 있어

曉踏唐橋沙 새벽에 당교의 모래밭을 밟는다

千年古戰場 천년의 옛 전쟁터에

何處埋干戈 어디에 그 무기를 묻었는가

侵羅固不道 신라를 침략한 것은 도가 아니요

坑卒亦非仁 병졸을 묻은 것 또한 말도 안되지

古寧佳麗地 고녕(함창)은 좋은 터인데

孤山柏自春 고산의 잣나무만 봄이네

溪岳鍾靈異 산과 물은 영험함을 모아 놓았고

人物多賢臣 인물 중에 현신이 많다네

眼豁尙州界 눈앞에 펼쳐진 상주

昔者沙伐國 그 옛날엔 사벌이었지

村巷民風淳 촌사람들은 순박하고

蠶農田野沃 잠농에 들판은 비옥하다네

薄晩飮叔藝 저물녁에 숙예를 마시고

倒載長川暮 거꾸러져 수레에 실려 장천에 왔네

假寐古縣下 고현 아래에서 선잠자며

月明思親苦 밝은 달에 부모 생각에 괴롭다네

西征詩 이언적

唐橋院樓上 당교원의 누상에

有僧施丹雘 스님이 단청을 했다는 말이 있다네

自言起此宇 스스로 이 집을 만들었다는데

積累歲逾八 세월은 흘러 벌써 8년이나 지났다네

Ⅳ. 노선유지를 위한 활동

1. 옛길 문화 전승 활동

옛길은 앞서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이용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특수성이 있으므로 옛길의 명맥을 이어가고 흔적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옛길 이용과 옛길을 걷는 체험문화가 일반화되어야만 그 길이 보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길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것은 상주지역은 인구의 감소와 농촌사회로서 길 문화의 중요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으로서 몇몇의 선각자의 노력과 일회성 행사로서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그 지역에서 지역민이 옛길의 중요성과 의미, 가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동질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옛길의 보전과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겠다.

필자는 2004년부터 상주의 영남대로를 연구․조사를 하여 2006년 상주문화원발행 상주문화 제16호에 “상주의 영남대로”를 소개한 후 2008년부터 영남대로 특화포럼 활동과 옛길걷기체험을 매년 시행하고 있다. 연도별 주요 활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 포럼 활동

- 2008.07.16 : 영남대로 특화 포럼(1회, 120명, 혁신협의회 주관)

- 2008.10.21 : 영남대로 특화 포럼(2회, 100명, 혁신협의회 주관)

 옛길걷기 체험

- 2008.01.28 : 점촌~낙동 성동 옛길(23.8㎞) - (상주문화연구회, 6명)

- 2009.02.28 : 낙동 성동~낙동 옛길(10.0㎞) - (상주문화연구회, 14명)

- 2009.06.05 : 송현 옛길(8.0㎞) - (구미 자연사랑연합 90명)

- 2010.02.20 : 송현 옛길(8.0㎞) - (연구회, 학생, 시민, 65명)

- 2010.06.26 : 덕통역 옛길(10.0㎞) - (구미 자연사랑연합 50명)

- 2011.03.26 : 경천대 옛길(4.0㎞) - (구미 자연사랑연합 50명)

- 2012.03.19 : 낙동강 옛길(4.0㎞) - (구미 자연사랑연합 50명)

2. 상주구간을 마무리하면서

상주지역의 영남대로는 영남대로 총연장 380㎞의 10%가 상주를 통과하고 있다. 노선도 해발 125m이하의 비교적 낮은 위치에 도로가 형성되어 있다.

대로의 노선이 사벌면 하덕곡에서 함창읍 태봉산까지는 금곡현로와 송현로 2개 노선으로 분기되어 사용되어 왔으며, 송현로 보다는 금곡현로가 표고와 경사가 낮아 더 많이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주구간의 영남대로 총연장은 금곡현로 32.2㎞, 송현로 33.9㎞로서 송현로가 약 1.7㎞ 더 멀고 험한 길이었다.

또한 대로에 접해 있는 산성은 두산성, 덕봉성, 이부곡성, 병풍성이 도로와 인접하여 있어 예로부터 이 길이 국가의 기간시설로 사용되어 온 길임을 알 수 있다

고개가 불현, 성골고개, 송현, 금곡현, 봉우재를 넘어야 했고 이 길 주변에는 낙동역, 낙원역, 덕통역과 발참이 있었으며, 원은 윤직리의 당교원, 태봉리의 관천원, 목가리의 송원, 헌신동의 안빈원, 낙동리의 요제원 5개가 있었다.

강과 하천은 낙동강과 나한천, 이안천, 동천, 남천, 장천의 5개 하천을 횡단하여야 한다. 이 강과 하천을 건너는 대로와 직접 연결되는 나루는 이안천의 봉황대 나루와 낙동의 낙동나루이다. 영남대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나루는 하갈, 운성진, 역골, 퇴강, 회상, 대비, 대바위, 토진나루의 8개 나루가 연결되어 육운과 수운의 기능을 상호 보완하였다.

이렇게 상주구간 영남대로는 조상의 숨결과 얼이 서려 있고 수 천년간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여 왔던 국토의 대동맥 역할을 하여 왔으며, 그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많은 문화유산이 묻혀 있다.

우리 상주인은 지금 이러한 「길의 역사를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 또는 없애 버릴 것인가」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형국이고, 어떤 길을 선택할 사람은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