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尙州)’지명(地名) 연구
‘상주(尙州)’지명(地名) 연구
상주고등학교 교사 권 택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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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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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103 1.1 연구의 목적104 1.2 연구의 대상과 방법105 1.3 연구 방법107
2. 본론113 2.1 사벌113 2.2 상주(上州)125 2.3 상주(尙州)130 2.4 기타 지명(地名)133
3. 결론136 |
1. 서론
1.1 연구의 목적
고조선 이래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많은 국명․지명 들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된 듯하다. 문헌상의 기록이 있기 전에 이미 부족국가를 이룬 마한․진한․변한의 고대 국명․지명은 존재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름이 없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라․고구려․백제의 성립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였다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여러 근거를 들어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보통명사로 불리던 땅 이름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 땅의 지리적․사회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그 땅을 다른 땅과 구분하기 위하여 불리던 보통명사가 굳어져 고유명사로 바뀌었을 것이다.『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마한 54국, 진한․변한 24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국자(國字) 이름을 가진 작은 나라들의 이름도 그 기원은 삼국시대가 성립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즉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부족국가 시기부터 비롯하였을 것이다. 신라 역시 진한 6국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오늘날 상주(尙州)라 불리는 지명의 유래와 변화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사벌 또는 사벌국으로 불리던 상주 옛 지명․국명의 기원과 어원을 밝히고 다른 지명․국명과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이후 사벌이 상주(上州), 상주(尙州) 등으로 바뀐 이유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지명은 원래 지표상의 위치나 지역을 표시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지명은 그 장소나 지역이 가지는 자연․인문적 특징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다. 또한 지명은 비록 그 뜻과 형태가 사라지거나 변하였다 하더라도 다른 유물에 비하여 그 모습이 오래도록 남는 특징을 지닌다. 고대 국명․지명은 화석같이 남아서 오래 전 그 땅에서 벌어진 자연․문화적인 특징을 증명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고문헌에 기록된 국명․지명에는 고대어가 많이 담겨 전하고, 현 지명에도 고대어가 화석화(化石化)하여 전한다. 따라서 지명은 문헌 자료에 없거나 부족한 시대의 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와 같이 고대국명․지명 연구는 향가와 더불어 고대어 연구의 훌륭한 자료이다. “제일의적(第一義的) 연구 목적인 고대 국어의 연구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민족사를 밝히고 민족사 발전을 설명하는 데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란 의견에 동감하며 연구를 하고자 한다.
지명의 비정(比定)은 가능한 것이 있고 어려운 것도 있다. 또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상주의 지명에 대한 고찰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 필요한 것으로 본다.
1.2 연구의 대상과 방법
본 연구에서는 고조선 이래 현재까지의 현 행정구역상의 상주(尙州)를 대표하는 국명․지명을 연구하고자 한다.
삼한의 국명 기원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편술(編述)한「상서(尙書)」에「한맥지속(韓貊之屬)」이 나타남을 보아 기원전 6세기 이전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은 기원전 1세기의 일이다. 상주 지역은 문헌 기록이 없는 역사 이전의 일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사료와 중국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에 이미 많은 부족국명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한의 경우 3세기에 편찬된『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진한 12국명이 등장한다. 주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지금의 경상도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을 진한이라 한다. 진한 12국 중에서 상주와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는 나라는 호로국(戶路國)이다. “호로국은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었다. 진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신라에 점령되었다. 여기에서 맹주(盟主)국은 경주의 사로국(斯盧國)을 의미한다.” 함창과 상주는 지리적으로 인접하며 낙동강과 비교적 넓은 면적의 충적평야(沖積平野)를 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상주시 사벌면 지역으로 비정(比定)되는 사벌국의 치소(置所)는 함창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서기 64년(탈해이사금 8년) 8월에 백제가 와산성(蛙山城, 보은)까지 쳐 들어와 66년에 와산성이 무너지고 백제의 군사 200명을 와산성에 주둔시켰으며 또 구양성(狗壤城, 옥천)을 공격하자 왕이 기병 이천으로 이를 격파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란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이를 사벌국을 침범하고 넘보기 위해서 그렇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벌국이란 명칭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알 수는 없다. 다만 일명(一名) 사량벌국(沙梁伐國)이라고도 하는 사벌국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상주지역은 기원전 2세기∼기원 전후 시기에 속하는 청동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대표적인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에 사벌국은 일찍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국가는 큰 영역으로 존재하지만 고대의 국가는 성읍국으로 부족장이 웅거하던 성읍이 곧 국가였다. 인구가 적고 교통이 불편하였던 고대에 부족장이 있는 성읍이 나라였으며 큰 영역을 다스리는 국가는 군소 부족국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통합이 일어난 후대의 일이다. 고대 국가가 성읍국이었던 만큼 나라 이름도 대개 그 성읍 이름과 일치한다고 본다.
사벌과 상주(上州), 상주(尙州)의 지명(地名)들을 고찰하게 될 자료로서는『삼국사기』지리지,『삼국유사』,『고려사』,『동국여지승람』,『상산지』등의 우리 기록과『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사료도 이용한다.『삼국사기』, 지리지는 주로 권1~3에 해당되는 것으로, 신라․고구려․백제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 때의 개칭 지명(改稱地名), 그 이전의 구지명(舊地名),『삼국사기』편찬 당시의 지명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통일신라 이전의 구지명과 통일 후 경덕왕 때(757년)의 개칭 지명과, 그 이후 고려 시대의 지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명의 통시성 고찰에 도움을 준다. 이 외의 자료들도 고대 국명․지명의 설명을 위한 필요에 따라 인용한다.
1.3 연구 방법
언어는 역사적․사회적 소산으로 전승과정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지명 역시 전승되는 동안에 음형이 변하고, 그 뜻이 바뀌거나 다른 말과 섞이게 되어 원 지명 본래의 뜻을 잃게 되는 일도 많으며 문헌상에 기록된 국명․지명들도 이러한 전승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본다. 다만 지명은 다른 언어에 비하여 보수성이 강하여 비교적 원뜻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명은 어의(語義), 음형(音形), 표기(表記)의 삼요소로 이루어진다. 즉 고대 지명은 뜻과 소리로 이루어진 언어기로가 표기(借字)로 정착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기가 우리의 고대 음운체계와 맞지 않는 고대 한자음에 의해서 표기되었다. 그리고 고대 국어의 음운체계가 오늘의 음운체계와 다르며 표기 당시의 한자음이 15세기 이후의 한자음과 다르다. 또 차음(借音)과 차훈(借訓)(또는 차의-借義) 속에 보유하고 있는 고대어도 어형이 변하고 뜻이 바뀌거나 사어(死語)로 된 것이 많으며 자료의 양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제약 속에 고대 국어의 모습을 찾기란 매우 힘든 작업이다. 그래서 그 해독이 십인십색(十人十色)으로 읽을 수 있는 요술주머니와 같은 인상마저 가지게 하였으며, 또 그러한 만큼 많은 과오를 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전의 많은 연구를 바탕으로, 훌륭한 선대학자(先代學者)들인 거인(巨人)의 등에 올라 탄 기분으로 노력하면 고대 국어의 모습에 가까워 질 것이다. 필자가 연구방법으로 삼은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 표기상의 이해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의 사례를 유형화(類型化)하면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가 있다.
1) 수곡성일운매단홀(水谷城一云買旦忽)
2) 밀성군본추화군(密城郡本推火郡)
3) 남원일운고룡군(南原一云古龍郡)
4) 부평군본고구려부여군(富平郡本高句麗夫如郡)
5) 개산군본본고구려계차산(介山郡本高句麗階次山)
6) 백해군일운백이(伯海郡一云伯伊)
1)은 지명에 관한 같은 시대의 두 가지 표기를 보이는 것이다. 수 : 매, 곡 : 단, 성 : 홀 이 대응 관계에 있으며 일작(一作), 혹운(或云) 표기와 함께 두 지명의 공시성의 자료이다. 2)는 신라의 구지명과 경덕왕 때 개칭한 지명인데, 밀 : 추, 성 : 화 의 대응 관계를 보이는 통시성을 보여 주는 예이다. 3)은 원(原), pərə와 고룡(古龍) kɔrɔ는 언어의 차이는 있으나 이 둘이 모두 읍리를 표기한 것에 공통된다. 4)는 특별한 대응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더 좋은 의미의 말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5)는 개산은 계차산의 약형(略形)의 표기이며 6)의 해와 이는 어형에는 차이가 있으나 접미사로서 대응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지명 표기에서 대응 표기의 유형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응 관계가 차음 : 차음일 때에는 음형만을, 차훈 : 차훈 관계일 때에는 어의만을 알 수 있다. 오직 차음 : 차훈의 관계일 경우에만 음형과 어의를 함께 알 수 있다.
나. 차자의 구별
『삼국사기, 지리지』의 표기 방식은 1) 차음, 2) 차훈, 3) 차의, 4) 한역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의 예로 영동군본길동군(永同郡本吉同郡)의 대응 표기에서 영은 차훈표기이며 길은 차음표기이다. 영동은 영의 훈인 길과 동의 훈인 으로 중복표기이다. 2)의 예로 강양군본대량주(江陽郡本大良州)에서 강의 훈인 의 는 대의 어형의 표기한 것이어서 강과 대는 차훈표기이며 양은 kɔrɔ 또는 kara의 제이음절 rɔ/ra의 표기로 양과 양은 차음표기이다. 3)의 예로 동량현본고구려승량현운운금승령(㠉梁縣本高句麗僧梁縣云云今僧嶺)에서 동량과 승량, 그리고 승령은 모두 ‘민둥산’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승은 중머리가 민둥산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긴 차의표기이다. 4)의 예인 고성군본고구려달홀(高城郡本高句麗達忽)에서 성은 홀을 한역한 것이다.
또 한 형태소를 표기할 때 가) 차음+차음, 나) 차훈+차훈 다) 차훈+차음 으로 표기되는데 위의 4)달홀은 가)에, 4)고성은 나)에, 1))의 길동 과 2)강양․대량 은 다)의 표기에 해당하는데 강양․대량 처럼 앞 자는 차훈이고 뒤 자는 차음이다.
다. 형태소를 구분하고 조어형식을 살필 것
한 지명이 한 형태소로 된 것도 있으나 둘 이상의 형태소로 된 것도 많다. 그리고 두 형태소로 된 경우에는 어디까지가 한 형태소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수식․피수식 성분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가수현본가주화현(嘉壽縣本加主火縣)에서 가수는 가주+화에서 가주와 같은 형태소의 표기이다. 황등군본백제황등야산군(黃等郡本百濟黃等也山郡)에서 황+등야+산의 형태소이고 황은 ‘누르-’란 뜻의 차훈이 주(主)이고 등야는 고구려 지명 표기 달(達)에 보이는 것처럼 산(山)을 뜻하는 것인데, 그 아래에 보이는 산(山)은 등야가 산임을 보이는 설명적 표기이다.
라. 동일 장소의 이계(異系) 지명
동계(同系) 지명의 경우는 신라․고구려․백제의 구지명(舊地名)을 한역이나 차훈, 차음으로 대치(代置)하거나 약기(略記)하여 표기하였다. 그러나 이계 지명의 경우도 보인다. 임관군본모화군(臨關郡本毛火郡)에서 모화․임관은 이계 지명이다. 또 어모현본금물현(禦侮縣本今勿縣)일운음달(一云陰達에)에서 어모․음(달)은 차음 동계이나 어모․금물은 전혀 관련이 없는 이계 지명이다.
마. 동계 이표기(異表記)
아술․음봉․음잠․아주(牙述․陰峯․陰岑․牙州)는 동일 장소에 대한 지명이다.『동국여지승람』에 오산(烏山)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 9개가 보인다.
바. 기록된 지명의 시기와 분포
시기란 지명이 호칭된 시기가 언제부터 문헌에 나타나서 언제까지 불려졌는가, 또는 현재에도 그 지명이 남아 있는가의 문제이다. 분포란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하는 공간의 문제이다. 신라․고구려․백제 지역의 명칭이 따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지명의 시간성과 공간성은 함께 고려할 문제로 매우 중요하다.
사. 동원어(同源語)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찾을 것
동원어란 의미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원래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동계어를 말한다. 백제 지명 주성(主城)․주곡(主谷)은 주는 임성(任城)․임곡(任谷)의 임과 동계어로 보이는,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경우로 보인다. 동음이의어의 경우는 해구군본고구려혈구군(海口郡本高句麗穴口郡)에서 ‘해’와 ‘혈’은 발음이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동음이의어의 표기라 할 수 있다. 다만 유의할 점은 동음의 같은 표기 형태라 하여도 동계(同系)의 지명은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가야산(伽倻山)과 가야국(伽倻國)의 ‘가야’는 표기 형태는 같지만 전자는 대산(大山․長山)을 뜻하는 가라산(加羅山)에서 변이한 것이고, 후자는 국명 가라(加羅)에서 변이한 것이다.
아. 고대 한자음과 그 수용
고대 지명이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표기된 만큼, 차음표기의 경우 고대어를 재구하기 위해서는 표기 당시의 한자음을 알아야 한다. 여러 학자들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중국의 음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한자음이 우리의 음운체계와 음운구조에 맞게 변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자. 고대 음운체계와 음절구조에 따른 고대어 재구
지명 연구를 통한 고대어 재구(再構)는 고대 자음체계와 모음체계 그리고 음절구조에 맞추어야 한다. 차음표기의 국명․지명․인명 연구를 통하여 고대 자음․모음체계 등의 수립이 선행되고 이에 맞추어 고대어를 재구해야 할 것이다.
차. 단어족(單語族)의 고찰과 음운, 어의(語義) 변화에
대한 고찰
단어족이란 동일어원에서 파생된 여러 단어를 말한다. 고대 음운이나 어의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동계 지명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단어족으로 보이는 많은 예에서 그 대응 관계의 유형을 파악해야 한다.
카. 외적 비교와 내적 비교
고대 음운의 체계 속에서 외적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국어 ‘아(朝)’과 일본어 ‘asa(朝)’의 경우가 그러하다. 외적 비교에 앞서 내적 비교가 필요하다. 삼국․고려시대의 언어 비교 15세기 이후의 한글 표기법 변화 등을 의미한다.
파. 후대 지명과 잔존어에 대한 고찰
고대 지명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어원의 지명이 후대의 문헌 또는 현행 지명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그 차자가 어떠하며 표기상의 대응 관계가 어떠한가, 어형(語形)과 어의(語義)의 변화는 어떠한가, 동일 장소에 대한 다른 계(系) 지명과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본다. 그리고 그와 동원어가 고려어, 조선어, 현대어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를 본다. 이는 고대 관명(官名), 인명(人名) 등에서도 예를 볼 수 있으니 진한 육촌장명 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의 ‘도리’는 오늘날 신돌석의 ‘돌(乭)’ 등 인명에 남아 있다. 또 고대 촌장을 의미하는 ‘간(干)’도 오늘날 일꾼, 살림꾼, 노름꾼 등의 접미사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대 지명은 후대 지명․문헌어, 현대 방언․인명 등에 의해서 거슬러 살펴야 할 것이다.
카. 다른 학문의 도움
고대 지명의 연구는 언어적 지식만으로는 어렵다. 역사학․고고학․민속학․지리학․전설 등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2. 본론
2.1 사벌
가. 문헌상의 기록
다음은 사벌을 비롯한 현 상주의 지명(地名)에 관한 주된 기록이다.
1) 尙州沾解王時 取沙伐國爲州 法興王十一年梁普通六年 初置軍主爲上州云云 景德王十六年 改名尙州 今因之
(三國史記, 地理1․尙州)
상주첨해왕시 취사벌국위주 법흥왕십일년양보통육년 초치군주위상주운운 경덕왕십육년 개명상주 금인지
2)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三國史記, 列傳 5, 昔于老)
첨해왕재위 사량벌국구속아 홀배이귀백제 우로장병왕토멸지
3) 甄萱尙州加恩縣人云云以農自活光啓中 據沙弗城 今尙州
(三國遺事2, 後百濟 甄萱)
견훤상주가은현인운운 이농자활광계중거사불성 금상주
4) 尙州牧本沙伐國 新羅沾解王取以爲州 法興王改爲上州 置軍主 法興王廢州爲上洛郡 神文王復置州 景德王改爲上州 惠恭王復爲沙伐州 太祖二十三年復改爲尙州 其後又改爲安東都督府 成宗二年初置十二牧 尙州郡其一也 (高麗史57, 19)
상주목본사벌국 신라첨해왕취이위주 법흥왕개위상주 치군주 법흥왕폐주위상락군 신문왕복치주 경덕왕개위상주 혜공왕복위사벌주 태조이십삼년복개위상주 기후우개위안동도독부 성종이년 초치십이목 상주군기일야
5) 尙州牧本沙伐國 一云沙弗 新羅沾解王取以爲州 法興王改尙州置軍主 眞興王改上洛郡 神文王復爲州 景德王改今名
(東國輿地勝覽28, 尙州․沿革)
상주목본사벌국 일운사불 신라첨해왕취이위주 법흥왕개상주치군주 진흥왕개상락군 신문왕복위주 경덕왕개금명
6) 沙弗國古城 云云 新羅末甄萱之父阿慈介據此城
(東國輿地勝覽28, 尙州․古蹟)
사불국고성 운운 신라말견훤지부아자개거차성
7) 尙州牧本沙伐國 一云沙弗 新羅沾解王取以爲州 法興王十一年梁普通六年也 改尙州置軍主 眞興王改上洛郡 神文王七年 唐垂拱三年也 景德王改今名 築城周一千一百九步復爲州 景德王改今名 惠恭王復爲沙伐州 (商山誌, 沿革)
상주목본사벌국 일운사불 신라첨해왕취이위주 법흥왕십일년 양보통육년야 개상주치군주 진흥왕개상락군 신문왕칠년 당수공삼년야 경덕왕개금명 축성주일천일백구보복위주 경덕왕개금명 혜공왕복위사벌주
기록은 편집자의 주관이 들어가며 불명확한 것도 있다. 그래서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록이 아니고서는 과거의 사실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문헌상에 기록된 사실을 정확하게 해독하며, 기록된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밝히며 나아가서는 당대의 역사와 결부시켜 문헌상에 기록된 이상(以上)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해독을 해 보자. 사벌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과 2)이다.
1)은, 상주(尙州)는 신라 첨해왕(재위 247~261년) 때에 사벌국을 취해 주로 삼았다. 법흥왕 십일 년에 처음으로 상주(上州)에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 십육 년(재위 742∼765, 즉 756년)에 상주(尙州)라는 이름으로 고쳐 지금에 이른다.(삼국사기)
2)는, 첨해왕 재위 시 옛 신라 소속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백제에 귀부하는 배신을 하여 석우로 장군과 병사가 그 곳에 가서 토멸하였다. 2)는 1)의 내용 중 앞부분을 자세히 말한 것이다.(삼국사기)
3)은,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광계 기간 중에 사불성을 근거로 삼았으니 지금의 상주다.(삼국유사)
4)는, 상주목은 본래 사벌국이다. 신라첨해왕 때에 취해 주로 삼았다. 법흥왕(재위 514~540) 때에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를 두었다. 법흥왕 때에 주를 폐하고 상락군으로 하였다. 신문왕(재위 681~692) 때에 다시 주로 하였다. 경덕왕(재위 681~692) 때에 상주(上州)로 고쳤다. 혜공왕(재위 765~780) 때에 다시 사벌주로 하였다. 태조(재위 918~943) 이십 삼년에(940년) 다시 상주(尙州)로 고쳤다. 그 후 다시 안동도독부로 고쳤다. 성종 2년(983년)에 처음으로 12목을 두었다. 상주군은 그 중 하나이다.(고려사)
5)는, 상주목은 본래 사벌국이다. 사불이라고도 한다. 신라 첨해왕 때에 취해 주로 삼았다. 법흥왕 때에 지금의 이름인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를 두었다. 진흥왕(재위 540~576년) 때에 상락군으로 고치고 신문왕 때에 다시 주(州)로 하였다. 경덕왕(재위 681~692)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동국여지승람)
6)은, 사벌국은 오랜 성이다.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이 성을 근거로 하였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
7)은, 상주목은 본래 사벌국(사불이라고도 한다)이다. 신라 첨해왕이 취해 주(州)로 삼았다. 법흥왕 십일 년(525년)에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를 두었다. 진흥왕 때에 상락군으로 고쳤다. 신문왕 7년 주위에 일천 일백 구보로 성을 쌓아 다시 주(州)로 하였다. 경덕왕(재위 681~692) 때에 지금의 이름인 상주로 고치고 혜공왕(재위 765~780) 때에 다시 사벌주라 하였다.(상산지)
문헌에 보이는 내용을 인과적으로 연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과 2)를 종합하면 상주는 신라 첨해왕이 사벌국은 신라의 통치 아래 있던 소국인데 백제에 귀부하여 명장 석우로를 보내 평정하고 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먼저 나온다. 신라가 경주를 중심으로 소백산맥 북쪽과 서쪽으로 세력을 팽창하던 시기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 지역에 해당하던 사벌주 지역을 확실한 지방행정조직으로 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주(州)는 대단히 큰 행정단위로 지금의 도(道)에 버금가는 광역 행정단위라고 할 만하다. 즉 북․서방 진출의 군사적 교두보로 이곳을 삼은 듯하다. 이는 법흥왕 때에 상주(上州)를 설치하고 군주란 명칭으로 행정기관의 우두머리를 삼은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후에 경덕왕 때에 대규모로 지명이 한자로 바뀌는 때에 오늘날에 쓰이는 상주(尙州)로 바뀌었다는 기록이다. 2)의 사량벌국은 3), 5), 7)의 사불과 함께 사벌국의 이칭(異稱) 임에 확실하다. 다음에 언급될 어원분석에서 다시 다루고자 한다.
3)은 견훤에 관한 개인적 기록이며 4)는 상주 지명 변천에 대한 가장 종합적이고 정확한 문헌 자료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 지명인 상주(尙州)로 정해지기까지의 모든 부침의 과정이 망라되어 있어 상주의 지명 변천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내용을 살피면 상주목은 본래 사벌국인데 신라첨해왕 때에 사벌주로 삼았다. 법흥왕 때에 상주(上州)로 고쳤다 다시 주를 폐하고 상락군으로 삼았다. 주치가 감문주(지금의 김천)로 이동한 영향으로 보인다. 신문왕 때에 다시 주로 격상하였고 경덕왕 때에 상주(上州)로, 혜공왕 때에 사벌주로 고쳤다. 오늘 날의 지명인 상주(尙州)는 태조 왕건 재위 시인 940년에 정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후의 기록은 행정적으로 안동도독부(安東都督部)에 속하였다가 고려의 중앙집권을 위한 지방행정조직의 개편으로 목(牧)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으로 상주(尙州)란 지명과는 관계가 없다. 고려사의 기록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정사이다.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과 관계가 있는 부분은 왜곡이 있을 수 있으나 상주에 관한 기록은 고의적인 잘못은 없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일단은 고려사의 기록을 상주 지명 연구의 주요 문헌 자료로 삼고자 한다.
5)와 7)은 이전의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5)의 기록은 이전 4)의 고려사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는 상주가 주의 위치에서 상락군으로 그 위상이 격하된 시기가 4)의 고려사는 법흥왕 때이지만 동국여지승람은 진흥왕 때로 보고 있다. 고려사보다 동국여지승람이 후대의 기록이니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가 정사란 점을 감안하면 고려사의 기록을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6)은 아자개와 견훤에 관한 기록이다. 7)에 보이는 신문왕 때의 기록은 유의할 만하다. 7)상산지 등의 기록도 5)의 기록과 일치한다. 군사적 필요에 따라 설치된 상주(上州)의 주치(州治)가 군사적 필요에 따라 감문주(지금의 김천)와 일선주(지금의 구미 선산)에 있던 것을 통일 이후 안정된 시기에 다시 원래의 위치인 상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상락군으로 군의 위치에 머물렀던 상주가 다시 주로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비교적 규모 있는 성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는 기록이다.
나. ‘사벌’의 어원
1) 사벌과 서라벌
2.1 5)와 6), 7)에 보이는 ‘일운’은 공시성의 자료이다. 즉 ‘사벌’을 ‘사불’이라고도 불렀다는 뜻이다. 이는 3)에도 나온다. 또한 2)에 보이는 ‘사량벌국’ 또한 같은 시기에 불린 이칭(異稱)이라 할 수 있다. 즉 기원전후로부터 이곳은 명칭이 상주(尙州)로 확정된 태조 이십 삼년(940년) 이전까지 1,000여간 ‘사벌’을 필두(筆頭)로 ‘사불’ 또는 ‘사량벌’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통시성의 자료인 ‘-본(本)-’표기에 있어서는 4), 5), 7)의 자료에서 분명하게 일치된 의견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한 번 잘못된 의견이 계속 실릴 수도 있지만 여러 문헌 자료로 보아 사벌국이 상주목(尙州牧)으로 바뀐 것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간에 사벌주는 상주(上州), 상락군(上洛郡 ), 상주(上州), 사벌주(沙伐州)로 불리다 상주(尙州)로 바뀌었다. 상락(上洛)은 낙동강 상류를 지칭하는 상락(上洛)이다.
사벌=사불=사량벌에서 먼저 사:사:사는 대응 관계에 있다. ‘사’는 무엇인가. 경주의 옛 이름이 서라벌이다. sa-pərə는 sərə-pərə의 sərə의 이형태가 sara인데 이의 두 번째 음절이 탈락하여 sə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서라벌과 같은 의미를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벌의 ‘사’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東, 上, 首, 新 등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서라벌(徐羅伐)의 서라(徐羅)는 신라(新羅), 사라(斯羅), 사노(斯盧) 등과 같은 기원을 둔 형태소의 표기이고 서벌은 서라벌의 두 번째 음절이 탈락한 것으로 생각한다.
가) 赫居世云云國號徐羅伐 又徐伐 或斯盧 或鷄林 一說指脫解王時 始置鷄林之號 (三國遺事, 王曆)
혁거세운운 국호서라벌 혹사노 혹계림 일설지탈해왕시 시치계림지호
나) 時年十三年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寸 高盧村長 蘇伐公 望楊山麗云云 (三國史記, 始祖朴赫居世干)
시년십삼년국호서나벌 선시 조선유민 분거산곡지간위육촌 고노촌장 소벌공 망양산려운운
다) 二十一年築京城號曰金城 (三國史記, 始祖朴赫居世干)
이십일년축경성호왈금성
라) 東京明期月良 (三國遺事2, 處容歌)
동경명기월량
마) 伊伐湌 或云伊罰干 或云角干 (三國史記38, 官職上)
이벌찬 혹운이벌간 혹운각간
위 나)의 소벌은 서벌과 같은 언어 형태로 생각되며 다)의 금성의 金은 쇠의 səi로 벌이 平野, 城의 의미라면 금성도 서벌과 같은 표기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동경의 동은 səi의 표기이고, 京 은 səi-pərə 또는 sə-pərə의 pərə가 京임을 보이는 한역표기로 동경 역시 서벌과 같은 말의 표기이다. 삼국사기 관직명의 伊伐 역시 sə-pərə의 표기이다.
위에서 든 표기를 아래와 같이 형태소별로 분류한다.
가) 서라벌(徐羅伐), 서나벌(徐那伐), 서야벌(徐耶伐,)/신량귀(新良貴)/사로국(斯盧國)
나)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신로(新盧)
다) 서벌(徐伐), 소벌(蘇伐), 금성(金城), 동경(東京), 이벌(伊伐), 각(角)
위 나)의 사라, 사로, 신라, 신로를 한 형태소로 보고, 이를 A로 하며, 가)의 서라벌, 서나벌, 서야벌에서 벌과 신량귀, 사로국의 귀, 국을 B로 할 경우 가)은 A와 B를 합성한 것이고 나)는 형태소 B가 생략된 것이며 다)는 형태소 A와 B가 합성되었으나 A의 일부가 생략된 형태이다.
그렇다면 사라, 사노, 신라, 서라로 표기된 sara/sərə의 뜻이 무엇인가? 이는 首의 뜻을 지닌 것으로 본다. 현대어에서도 새들의 우두머리격인 매를 의미하는 수리와 머리 한 가운데를 위미하는 頂수리 역시 머리의 중복 표현이다. 즉 sara/sərə는 아래 지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홀(上忽), 차홀(車忽), 수니홀(首泥忽), 술나홀(術奈忽)의 상․차․수니․술나와 같은 계통이다.
車聖縣本高句麗上 一作上 忽縣 景德王改名 今龍城縣
(三國史記, 地理2, 唐津)
차성현본고구려상 일작상 홀현 경덕왕개명 금용성현
上忽 一云車忽 (三國史記, 地理4, 高句)
상홀 일운차홀
峯城縣本高句麗述尒忽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三國史記 地理2, 交河郡)
봉성현본고구려술이홀현 경덕왕개명금인지
述尒忽縣 一云首泥忽 (三國史記, 地理4, 高句)
술이홀현 일운수니홀
述川郡 一云省知買 (三國史記, 地理4, 高句)
술천군 일운성지매
위 상홀, 차홀, 차성, 술이홀, 수니홀, 술천, 생지매의 상, 차, 술이, 수니, 술, 생지 등으로 표기된 형태소를 A라 하고 홀, 성, 천, 매로 표기된 형태소를 B라 할 때, 이 지명들의 조어 방식은 A가 B를 꾸미고 있다.
위에서 서라벌, 금성, 사로국, 신량귀의 벌, 성, 국을 형태소 B라 하였는데, 이 중에서 차음에 의해서 고유어를 표기한 것이 벌, 귀이고 성, 국은 pərə 또는 -ki 혹은 na(壤)을 한역한 표기이다.
서라벌, 서벌, 금성 등은 장성(長城), 대읍(大邑) 또는 수읍(首邑)의 뜻이고, 벌(伐)이 생략된 사라, 사로, 신라, 신로 등도 같은 뜻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서라벌과 어원이 같은 사벌(沙伐)은 사불(沙弗)과 같은 곳의 이름으로, 이는 수읍(首邑)을 의미하는 sa-pərə의 표기라 생각한다. 즉 sa는 sərə(首)의 이형태(異形態) sara의 제2음절이 탈락한 것이며 pərə는 성읍(城邑)을 뜻하는 것이다. 사회․역사적인 자료와 지리적 장점을 가진 상주는 고대에 부족국이 있을 만한 곳이며 사벌국은 그 부족국의 수읍명(首邑名) 곧 성읍명(城邑名)에서 유래한 것이다. pərə의 신라 지명은 화(火), 벌(伐), 불(弗) 등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화(火)나 벌(伐) 등의 지명이 많이 보인다. 또한 이들이 같은 뜻임을 다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新羅地名多火 火乃弗之轉 弗又伐之轉
(東國輿地勝覽, 卷22, 蔚山郡)
신라지명다화 화내불지전 불우벌지전
사벌을 또한 사량벌(沙梁伐)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설명해 보자.
新良縣本百濟沙尸良縣 景德王改名 今黎陽縣
(三國史記, 地理3, 潔城)
신량현본백제사시랑현 경덕왕개명 금여양현
위 지명을 사시량=신량=여양의 등식 관계에서 볼 경우 사시량은 sara-na의 표기이다. sara는 首의 뜻이고 na는 흙(壤)의 뜻이다. 그리고 경덕왕 때에 개칭한 신량은 sara-na의 -ra가 생략된 표기이며 고려 때에 개칭한 여양의 여는 현행 훈(訓)인 새(曉)에 관형사형 어미가 첨가된 샐의 표기이고 양은 이에 제이음절 모음을 표기한 ‘샐아’의 표기로 신량과 같은 어형이다. 그리고 sara-na의 na(良)는 서라벌(sara-pərə)의 벌(pərə)과 대치(代置)가 가능하다. 또한 량(良)과 梁(량)은 음이 같다. 이는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벌의 공시대 이칭인 사량벌은 음차(音差)인 량(梁)과 벌(伐)이 중복 표기된 것으로 본다.
2) ‘사벌’과 ‘소부리(所夫里)’ ․‘사비(泗沘)’
충청남도 부여는 옛 백제의 수도이다. 이곳의 옛 이름이 소부리, 사비이다.
가) 十六年春 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國號南夫餘
(三國史記26, 聖王)
십육년춘 이도어사비 일명소부리 국호남부여
나) 自今突城至所夫里城遣弟監天福 (三國史記5, 太宗王)
자금돌성지소부리성견제감천복
다) 自泗沘乘船廻唐 (三國史記5, 太宗王)
자사비승선회당
라) 夫餘郡本百濟所夫里郡云云 景德王改名 今因之
(三國史記, 地理5, 夫餘郡)
부여군본백제소부리군운운 경덕왕개명금인지
위에서 보이는 소부리와 사비는 어떠한 뜻이 있고 또 둘의 관계는 어떠한가. 양주동 교수는 “소부리는 ‘’ 곧 서나벌, 사벌, 서발, 각, 경과 동어이다. ‘동’은 고훈이 이므로 소부리 역시 동경()이다.”라고 하였다. 도수희 교수는 소부리를 서벌과 함께 동원, 동원경, 신원, 신원경, 여명원 등으로 풀이하였다. 위의 두 의견은 서벌, 소부리의 서, 소를 동(東)과 신(新), 여(黎)로 본 점에서 비슷하다. 黎(새-)는 東(새)와 같은 어원일 것이며 新(새)도 이들과 의미상으로 통한다. 그러나 서벌, 소부리가 동경, 동원에서 명명된 것이라면 어느 곳을 서경, 서원으로 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방위에 의한 명칭은 대립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명자는 고구려인이나 중국인이 아니고 신라인이고 백제인이다. 또 명명의 시기도 신라와 백제가 강대국이 되기 이전의 부족국 시대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진한 12국 중에 사노국으로 나타나며 백제는 마한 54국 가운데 백제로 나타난다. 이로 보아 그 국명이 실린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이전, 즉 3세기 이전에 형성된 말이라 보아야 한다. 백제는 성왕 때에 소부리로 천도하였는데, 그 수읍명도 함께 가져갔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소부리는 사벌과 마찬가지로 sərə-pərə(수읍) 혹은 그 변이형인 sərə-pəri에서 sərə의 제2음절이 탈락한 sə-pərə 또는 sə-pəri의 표기로 본다.
사비는 소부리의 약형으로 보고자 한다. 사와 소는 같은 어형의 표기이며 비는 부리의 제2음절 r이 탈락한 어형의 표기로 생각한
다. 즉 puri<pərə-i의 표기로 볼 때 이는 제2음절 r 이 탈락하여 pui, pi로 변하였을 것이다.
부리>버리>부이>비
이(i) 모음 앞에서 r의 탈락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사비와 소부리는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비성, 사비국 등에서 보듯 사비가 성읍국의 지명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즉 사벌의 어원과 소부리, 사비의 어원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모두 수읍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즉 방언에 따라 달리 불려진 것이라 보인다. 이는 위에서 보았듯 같은 진한에 속한 서라벌도 그 어원은 사벌과 같지만 불려진 것은 다른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지리적 차이만큼이나 그리 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어 어원 해독이 가능하다.
2.2 상주(上州)
상주(尙州)의 지명이 사벌주에서 상주(上州)로 변경되었음을 앞선 문헌 자료에서 확인한 바 있다. 먼저 상주(上州)로 변경되었을 당시의 정치․군사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지명 변경의 중요한 사유가 될 수 있다.
신라 지증왕 때인 505년에 실직주 군주로 이사부를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신라의 지방 조직이 군사적 필요에 따라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초기에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3세기 중반 무렵에 이미 상주 지역을 사벌주로 삼았다는 글이 있지만 이는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을 통하여 볼 때 5세기까지의 신라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부족연맹체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증왕 때부터 시작한 지방 조직의 개편은 통일 이전의 5주 2소경으로부터 통일 이후인 685년(신문왕 5년)에 9주 5소경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경덕왕 때에 중국식으로 지명 등을 고친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삼국사기』지리지 상주조에 의하면 서기 525년 법흥왕 11년에 상주에 처음으로 군주를 두고 상주(上州)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상주(上州)에 대한 첫 기록이다. 또한 『삼국사기』신라본기 525년 2월조에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의 군주로 삼았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이기에 상주와 사벌주의 명칭은 논란을 삼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정식 지명이 상주(上州), 상락(上洛), 상주(尙州)로 바뀌어도 여전히 사벌이란 명칭이 오랜 기간동안 사용된 것만은 여러 문헌자료를 통하여 볼 때 분명하다. 525년부터 사용된 상주(上州)란 명칭은 757년(경덕왕 16년)까지 230여 년 동안 상주(尙州)의 명칭이었다.
군사적 필요에 따라 상주(上州)의 치소가 중간에 감문주(甘文州-김천 개령)로 이동(557년), 일선주(一善州-구미 선산)로 이동(611년)하였다가 상주 지역으로 돌아온 것이 685년(신문왕 5년)의 일이다. 신라가 삼국의 통일을 완료하여 군사적 필요가 감소하고 행정적 기능을 강조하여 조직한 지방 행정조직인 9주 5소경의 한 주로 상주가 다시 편입된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上州)의 치소가 변경된 시기에 상주 지역이 상락군(上洛郡)의 명칭으로 불려지긴 하였으나 크게 보아 6세기 전반에서 8세기 후반까지 상주 지역의 명을 상주(上州)로 불러도 무방할 듯 하다.
보다 전체적인 상황에서 상주(上州)가 설치된 것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통일 이전 신라 5주는 실직주(505년, 삼척)를 필두로 상주(上州)(525년, 상주), 신주(新州)(552년, 경기도 광주), 하주(下州)(555년, 창녕), 비열홀주(556년, 강원도 안변)가 차례대로 신설되었다. 이는 신라 국력 신장에 따라 편입된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이후 고구려, 백제, 가야 등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지방 행정․군사조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주를 다스린 우두머리의 명칭이 군주(軍主)인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지방에 주둔한 군부대의 명칭은 정(停)이었다. 머무르다는 의미 같이 지방에 상주(常住)한 군부대로 짐작된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수도 지역에 있던 대당(大幢)(544년, 진흥왕 5년)에 이어 서기 552년에 상주정(上州停-673년에 귀당貴幢으로 명칭 변경)이 설치되었다.(삼국사기 지리지) 이후 685년(신문왕 5년)까지 한산정(신주), 우수정(비열홀주), 하서정(실직주), 완산정(하주)의 6정이 성립되었다.
이처럼 신라는 5주에 6정을 두어 각 지역의 군사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진덕여왕 2년(648년)에 김유신 장군을 상주행군총관(上州行軍摠管)으로 임명하여 백제와의 싸움에서 상주가 중요한 전방의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 무열왕(660년)이 김유신, 품일, 흠춘 의 군사를 백제 정벌을 위해 출전시키고 자신은 현존 최고(最古)의 석성(石城)인 금돌성에서 37일간 머물다가 백제 의자왕의 항복 보고를 받고 백제 소부리성으로 떠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통일 이전에도 백제와의 주요 전쟁에서 중요한 베이스캠프의 역할을 하였던 상주정은 이후인 문무왕 13년(673년)에 귀당(貴幢)으로 승격된다. 통일 신라 초기의 군사 편제는 당(幢)과 정(停)인데, 경주 등 수도권을 담당하던 지방군사조직인 대당(大幢)과 더불어 상주 지역이 신라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왜 상주(上州)가 명칭이 되었는지 고찰해 보자. 먼저 이전의 지명이었던 사벌과 비교하여 본다. 차음도 차훈도 아님이 분명하다. 사벌과 상은 소리 상 일치하는 점이 없다. 억지로 sara/sərə의 계통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벌은 소리를 빌려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한 음차임에 불과하고 상주(上州)는 창녕 지방에 설치된 하주(下州)와의 관계로 볼 때 뜻으로 표기한 글자임이 분명하다. 물론 상주와 하주는 30년간의 간격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아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방위(方位) 개념이란 상대적(相對的)이다. 상하(上下), 좌우(左右), 동서남북(東西南北)이 들어간 지명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쓰였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주(上州)란 윗 고을의 의미이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볼 경우 상주는 서북지역이다. 북(北)을 위(上)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남(南)을 위로 볼 것인가는 더 알아볼 문제이다. 다만 상주를 상락군(上洛郡)으로 하였다는 기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중국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낙수상락서산(洛水上洛西山)에서 비롯되는 이 명칭은 처음으로 강다운 강으로 변모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상주는 본류와 영강, 내성천, 이안천, 위천 등의 물이 한 데 합류하여 배가 드나들 만큼 큰 강의 흐름이 상주에 와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를 통해 상주는 신라의 젖줄이기도 한 낙동강의 큰 흐름이 시작된 명칭의 의미로 상주(上州)라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낙동강의 하류 지방인 경남 창녕 지방의 군사 조직을 하주(下州)라 한 것과 일치한다. 이후 상주(上州)의 주치가 김천이나 선산으로 군사적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이동하지만 상주(上州)란 명칭의 시작이 상주 지역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상주(上州)가 상주(尙州)와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문명은 강의 흐름과 일치한다. 강은 주위에 넓은 농경지가 있고 농수(農水) 및 식수(食水) 확보에 유리하다. 그리고 주변에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면 이를 의지 삼아 일국의 도읍으로 삼기에도 무방할 것이다. 서울, 평양, 경주, 공주, 부여, 상주 등지에서 고대 왕국이 번성하였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상주 지역은 공검지라는 큰 못이 이미 삼한시대부터 있어 왔다. 양쪽의 높고 낮은 산이 둘러싼 좁고 긴 땅이 공검이다. 특히 북․서쪽은 비교적 높은 산악이 있어 물이 충분히 흘러내린다. 여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자연하천을 만들고, 그 출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것이 삼한 시대의 큰 못인 공검지이다. 공검지는 지금의 사벌, 상주 지역의 평야지대에 농수를 공급하였다. 이를 통한 부의 형성이 고대 왕국인 사벌국을 낳고 기르는 힘이었을 것이다.
상주(上州)와 하주(下州)가 상대적인 의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 뜻을 빌렸음을 의미한다. 즉 상주는 낙동강의 상류 지방을, 하주는 낙동강의 하류 지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설치된 5주의 하나인 신주(新州)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주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치소를 두었다. 오늘날 경기도 지역에 설치된 주이다. 이곳은 원래 백제의 땅에서 고구려로, 그리고 6세기에는 신라 지역에 편입되었다. 즉 신라의 입장에서는 새로운(新) 고을(州)인 것이다.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6세기의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지방을 차례대로 점령하고 이를 통치해야만 했다. 법흥왕은 연호(年號)를 제정하는 등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앞선 중국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정치․행정․군사 등의 문화는 언어의 유입을 의미하며 당나라의 언어는 한자이다. 이후 경덕왕 때인 757년에 대대적인 지명 등의 변경이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한자는 유입되었으며 법흥왕 때에는 정치․행정적으로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상주(上州)란 지명의 원천이라고 짐작한 『산해경』등의 책도 많이 유포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것이다.
2.3 상주(尙州)
상주(上州)에서 상주(尙州)로 지명이 바뀐 것은 경덕왕 16년, 즉 757년이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상주(上州)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삼국사기를 고려사 후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이나 상산지 등의 모든 기록은 경덕왕 때에 상주(尙州)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고려사의 기록이 오기(誤記)인 듯싶다.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널리 편 것으로 유명하다. 747년에 중시라는 관직명을 시중으로 바꾸고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으며, 757년에는 신라의 지명을 모두 중국식(漢子式)으로 바꾸었고 759년에는 벼슬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지명 개정의 원칙은 중국식이었다. 전국의 지명을 중국의 지명과 같이 대체로 두 자로 된 한자로 바꾸는 것이었다. 상주에 속한 석리화현(昔里火縣)을 청효현(靑驍縣)으로 바꾸는 식이었다. 중앙 정부는 통일된 지명을 사용함으로써 명칭을 단순화하고 중국식의 선진문화를 도입하여 행정을 원활히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水城郡 本高句麗買忽郡 景德王改名 (三國史記 券35)
수성군 본고구려매홀군 경덕왕개명
買忽 一云 水城 (三國史記 券37)
매홀 일운 수성
수성군은 고구려지명 매홀군을 바탕으로 개명하였다. 매홀은 같은 시기에 수성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도 권37에 보인다. 매홀은 음독표기이며 수성은 훈독표기이다. 표기는 달랐지만 의미는 같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두 가지가 나란히 쓰이다가 훈독 위주의 지명, 즉 중국식 지명인 수성 표기로 정한 것이 경덕왕 때이다. 이는 다음의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永同郡本吉同郡景德王改名今因之
영동군본길동군경덕왕개명금인지
길동은 음차이며 이를 중국식 훈차로 표기한 것이 영동이라는 것이다.
즉 상주(尙州)는 상주(上州)에서 왔다. 하주(下州)가 통일신라 9주 5소경으로 편성된 경덕왕 때에 강주(康州, 진주)로 편입되고 통일 신라의 영역은 대동강 이남 지역으로 확대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방위상의 행정 개념인 상주(上州)가 더 이상 존재하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래서 상주(上州)는 상주(尙州)로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상(上)은 ‘위’, ‘하늘’, ‘임금’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尙)은 ‘높다’, ‘숭상하다’는 뜻이다. 上과 尙은 발음도 의미도 같다. 물론 발음이 같았다고 할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의 음과 당시의 음은 달랐으리라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뜻만은 많이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상주(上州)가 상주(尙州)로 바뀐 것은 훈차(訓借)라 판단된다. 삼국통일을 위한 숨 가빴던 시기의 군사적․방위적(方位的)의 개념의 의미였던 상주(上州)의 설치시기와는 달리 삼국이 통일되고 한자 문화가 완전히 유입되고 모든 지명을 한자로 변경하겠다는 경덕왕의 의지와 상주가 여전히 신라 제2의 도시로 각광받던 시기에 이 지역 선조들의 뜻과 중앙정부의 뜻이 이 지역의 이름을 상(尙)으로 이끌어 낸 것이라 생각한다.
경덕왕 때에 상주(尙州)로 지명이 바뀐 이후 경덕왕 바로 다음의 국왕이었던 혜공왕 때에(765~780) 다시 사벌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새로 바뀐 지명이 어색했고 경덕왕의 잇따른 개혁 정치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발을 짐작하게 한다. 그 이후 약 150여 년간을 다시 사벌주로 불리던 것이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상주(尙州)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덕왕과 한가지로 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앞선 중국의 문화 유입을 통하여 통치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중국식 지명 변경도 그 방편이었을 것이다. 중국식 지명 변경이 다수의 귀족계층의 지지를 이끌어 낼 만큼 중국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었던 시기가 고려 초기이다.
983년에(성종 2년) 지방 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주는 전국 12목(牧)의 하나가 되었다. 1019년(현종 9년) 전국 8목의 하나인 상주목으로 고쳐져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지금도 상주가 교통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많이 불편하였던 그 당시에 전국 사방으로 통하는 국토의 중심이며 낙동강의 물류 이동과 조령 등의 길을 확보하고 있던 상주의 중요성은 수도가 경주에서 개성 등 경기도 지역으로 바뀐 시기에도 매우 중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 세종 때에 경주와 함께 상주에 경상도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1459년(세조 5년)에 진(鎭)이란 군사적 목적의 조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중에 경상도의 감영이 대구로 옮겨감에 따라 상주는 목(牧)으로 격하(格下)되었다. 전쟁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도의 지리적 중심으로 상주가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주는 경상도의 서북에 치우쳐 있다. 군사적 목적이 강할 수밖에 없던 전쟁 때에는 물자 수송, 통신 등에 유리한 경상도의 지리적 중심지인 대구 지역이 적합하였으리라 생각한다.
1895년(고종 32년) 23부(府)제의 실시로 상주목은 상주군으로, 함창현(咸昌縣)은 함창군으로 달리 부르게 되었다. 1914년 부․군․면이 통합될 때에 상주군과 함창군은 상주군으로 통합되어 18개 면(面)을 이룬다. 인구의 증가로 1931년 4월 상주면이 상주읍으로, 1980년 12월 함창면이 함창읍으로 승격하였다. 특히 대전과 같은 시기에 읍이 된 상주가 현재는 대전과 현격한 규모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도로교통 등에서 소외되어 공업화가 뒤처진 때문이라 생각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인구의 증가에 따라 1986년 1월 상주읍이 상주시(市)로 승격되어 상주군과 분리되었으며, 1989년 4월 상주군의 화북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됨에 따라 상주군은 1읍 17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상주시와 상주군이 상주시로 합쳐지면서 현재 상주는 도농복합형(都農複合形)의 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4 기타 지명(地名)
사벌주와 상주(上州), 상주(尙州) 이외의 상주 지명(地名)을 조사하고 그 의미를 알아보자. 상주가 사벌주로 불리던 시기의 이칭으로 사불(沙弗), 사량벌(沙梁伐)은 사벌=사불=사량벌에서 먼저 사:사:사는 대응 관계에 있다. ‘사’는 무엇인가. 경주의 옛 이름이 서라벌이다. sa-pərə는 serə-pərə의 sərə의 이형태가 sara인데 이의 두 번째 음절이 탈락하여 sə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서라벌과 같은 의미를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벌의 ‘사’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東, 上, 首, 新 등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서라벌(徐羅伐)의 서라(徐羅)는 신라(新羅), 사라(斯羅), 사노(斯盧) 등과 같은 기원을 둔 형태소의 표기이고 서벌은 서라벌의 두 번째 음절이 탈락한 것으로 생각한다. 사불은 sa-pərə인 사벌의 이칭 sa-puru로 이해하며 그 뜻은 동일하다.
사벌을 또한 사량벌(沙梁伐)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설명해 보자.
新良縣本百濟沙尸良縣 景德王改名 今黎陽縣
(三國史記, 地理3, 潔城)
신량현본백제사시랑현 경덕왕개명 금여양현
위 지명을 사시량=신량=여양의 등식 관계에서 볼 경우 사시량은 sara-na의 표기이다. sara는 首의 뜻이고 na는 흙(壤)의 뜻이다. 그리고 경덕왕 때에 개칭한 신량은 sara-na의 -ra가 생략된 표기이며 고려 때에 개칭한 여양의 여는 현행 훈(訓)인 새(曉)에 관형사형 어미가 첨가된 샐의 표기이고 양은 이에 제이음절 모음을 표기한 ‘샐아’의 표기로 신량과 같은 어형이다. 그리고 sara-na의 na(良)는 서라벌(sara-pərə)의 벌(pərə)과 대치(代置)가 가능하다. 또한 량(良)과 梁(량)은 음이 같다. 이는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벌의 공시대 이칭인 사량벌은 량과 벌이 중복 표기된 것으로 본다.
즉 사벌과 사불, 사량벌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대에 불리어졌고 다만 발음상의 차이로 달리 불리기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상주는 신라 법흥왕 때에 상락(上洛)으로도 불리었다. 중국 고대 지리지인 산해경에 나오는 상락지수(上洛之水)란 말의 의미는 여러 군대의 지류가 모여져 큰 강이 됨을 의미한다. 상주는 본류와 영강, 내성천, 이안천, 위천 등의 물이 한 데 합류하여 배가 드나들 만큼 큰 강의 흐름이 상주에 와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상락이라 이름하였고 이는 상주(上州)란 이름에 영향을 미쳤음을 앞에서 논증한 바 있다.
또 상주를 이르는 이름으로 상산(商山), 낙양(洛陽) 등이 있다. 상산은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난세를 피해 산시성 상산에 숨어 살았던 동원공, 하황공, 용리선생, 기리계 등 노고사를 이르는 상산사호(商山四皓)에 비롯된 이름이다. 이들의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기 때문에 사호라 한다. 상주를 언제부터 상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문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고려 초기 이후로 짐작된다. 속리산이나 백화산, 작약산, 갑장산 같은 훌륭한 산과 낙동강이란 큰 강이 자리 잡은 상주 지역은 세상의 난을 피해 은자들이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하며 세월을 보내기 위한 장소로 어울렸기에 이와 같은 지명이 붙여졌을 것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상주 지역의 선비들이 만든 상주에 대한 기록을 담은『상산지(商山誌)』등에 그 용례를 엿볼 수 있다.
또 낙양이란 이름도 있다. 낙양은 현재 중국 허난성의 직할시이다. 주(周)나라 무왕이 상(商)나라 주왕을 물리치고 구정(九鼎)을 옮겨 두었던 곳이 주나라 땅인 낙읍(洛邑)인데, 이후 낙읍은 낙양으로 일컬어진 주나라의 수도이다. 낙읍을 낙양이라 처음 부른 것은 전한(前漢) 시대 성주(城主)가 머문 곳을 낙양이라 칭하였고 후한(後漢) 때에 낙양이 한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위(魏)․수(隨)․당(唐)나라의 국도(國都)로 고대 시기 중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후 낙양은 번화한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이와 같은 의미가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상주를 낙양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 부족국 시대부터 번화하였던 상주 지역이 신라․고려 시대에도 경주와 개성 같은 수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는 지리적 이점과 교통의 중심, 물자의 풍족함 등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도시로서의 위상이 확고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로 인해 상주의 별칭으로 중국의 수도이며 이후 동양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의 대명사가 된 낙양이란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언제부터 낙양이란 별칭이 사용된 것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문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로 짐작된다. 지금도 상주에는 낙양동(洛陽洞)이란 지명이 있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낙동강(洛東江)은 상주의 옛 지명인 상락(上洛)과 별칭인 낙양(洛陽)의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낙동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나라의 낙읍 근처에 낙수(洛水)가 있다. 낙수는 당나라 시대 양자강 남쪽과 운하로 연결된 경제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즉 낙동강을 중심으로 물류가 이동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낙양이란 이름은 상주의 별칭으로 손색이 없었다고 보인다.
3. 결론
지금까지 상주(尙州)의 지명(地名)에 대해 연구해 보았다. 기원전후 시기에 부족국가의 치소였던 지금의 사벌면 일대로 추정되는 곳의 지명이 사벌이었으며 그 뜻은 수읍(首邑)이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상주의 명은 신라의 팽창시기의 군사적 목적과 중국 한자 문화의 유입, 창녕일대의 하주(下州)란 명칭과 지리적 대칭을 이룬 명칭인 상주(上州)로 변경되었으며 경덕왕 때에 삼국 통일 이후 정치적 안정을 위한 중국문화의 적극적인 도입과 행정구역 개편으로 ‘높다’, ‘숭상하다’는 뜻을 지닌 상(尙)이 ‘위’, ‘하늘’, ‘임금’의 뜻을 지닌 상(上)을 대신하여 상주(尙州)란 명으로 정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주의 별칭인 사불과 사량벌은 사벌의 이칭이며, 상락(上洛)은 중국『산해경』의 상락지수(上洛之水)에서 왔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만나 비로소 강다운 강이 되는 지리적 특징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별칭인 상산은 상산사호란 은자들이 숨어 살았던 중국의 땅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낙양이란 이름 역시 번화하였던 중국의 옛 수도 이름에서 빌려 왔다. 상주가 번화하면서도 숨어 살만한 깊은 산을 가진 곳이란 명칭일 것이다.
이렇게 상주(尙州)란 명칭은 오랜 세월 간 부침(浮沈)을 거듭해왔으며 지금도 그 세월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상주(尙州)의 지명에 관한 문헌 자료를 조사하고 앞선 학자들의 연구방법과 연구내용을 검토하기도 하면서 필자의 역량이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하지만 오랜 도시인 상주의 지명에 대한 연결고리를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에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을 밝혀 두며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증보(增補)을 통해 보충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1. 이기문,『국어사개설』(민중서관, 1976)
2.『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사, 고대사
3. 네이버 백과사전
4. 차광식,『사벌국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5. 김형규,『삼국사기의 지명고-地名考-』(진단학회, 16)
6. 도수희,『백제어 연구』(주식회사 제이앤씨, 2005)
7. 이병선,『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아세아문화사, 1982)
8. 이형우,『고대사벌국 관련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사벌국고(沙伐國考)’(상주시, 상주산업대학교부설 상주문화연구소, 1996)
9. 김종환,『고대사벌국 관련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지명고(地名考)’ (상주시, 상주산업대학교부설 상주문화연구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