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을 실천한 선비 일묵재 김광두(金光斗)
소학을 실천한 선비 일묵재 김광두(金光斗)
강 경 모*
"이집 앞의 개울물이 검게 변하여 흐르는 걸 보니, 분명 오늘도 이 댁 도령이 글공부를 하고 있구나."
사람들이 집 앞의 개울물이 검게 흐르는 걸 보고 하는 말이다.
일묵재(一默齋) 김광두(金光斗, 1562∼?). 이분은 어려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또한 집안마저 어려워, 매번 종이를 살 돈이 없어 나뭇잎에 글씨를 쓰고는 이를 개울물에 씻어 다시 사용하니 개울물이 먹물에 물들어 검게 흐르면 이집 아이가 글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이다.
선생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성균진사이며, 본관은 상산(商山)으로, 자(字)는 여우(汝遇), 호는 일묵재(一默齋)로 1562년(명종 17)에 외남에서 출생하셨다.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생장하였으며, 일찍이 석천 김각을 스승으로 하여 수업하였으며, 이후 김성, 정국성 등 당대 남촌의 고명하신 선비들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으며, 서애 류성룡선생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과 함께 선생에게 나아가 공부를 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충효를 가훈으로 대대로 이를 지켜온 집안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판관인 종형(從兄) 김광복(金光輻)과 재종형 사종(嗣宗)과 권서(權署), 노함(盧涵) 등과 함께 병사를 모아 창의하여 청리에 진을 치고 왜적을 방비하였다,
7월에는 김광복⋅사종의 두 형들이 왜적과 싸우다가 같은 날 전사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난지 10년 뒤인 선조 35년(1602) 이들 김광복과 김사종 형제분에게 나라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공훈을 내려, 나라에서 두 분의 공적을 위로하였으나, 두 분은 불행히도 모두 후사가 없으셔서 선생이 대신하여 산소에 잔을 드리고 곡하면서 나라에서 공훈이 내려왔음을 알렸다.
이어 상주의 선비들인 우복 정경세(鄭經世)⋅사서 전식(全湜)⋅검간 조정(趙靖)⋅남계 강응철(康應哲)⋅북계 조광벽(趙光璧)⋅권경호(權景虎)⋅이홍도(李弘道)⋅채유희(蔡有喜) 등 여러 선비들과 함창의 황령사(지금의 은척면)에 모여 충청도 괴산 출신인 이봉(李逢)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율을 정하고, 단을 쌓아 왜적을 물리칠 것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였다.
선생은 창의진 내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장서(掌書)를 담당하였으며, 호남의 의병장 고경명 장군에게 달려가 군량과 화살을 얻어 오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은 의병으로 일어나 나라를 구하라는 학봉 김성일선생의 격문을 베껴 사방에 전달하여 의병이 일어나 왜적과 싸울 것을 독려하였다.
예천지역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용궁에 있는 왜적을 밤에 습격하기도 하였으며, 경상도 거창의 의병장인 김면장군과 충청도 보은 마로면에서 만나 합세하여 감문(김천), 일선(선산)지역에 남아있는 왜적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7년에 걸친 긴 전쟁의 피해는 참으로 참혹하여 사람은 열 명에 한 두사람 만이 살아 남았고, 논과 밭은 2/3가 황무지로 변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지는 얼마되지 않고, 사람들은 질병과 흉년이 겹쳐 살아 있는 사람도 굶어 죽게 되었다. 선생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지방 민심을 순화하고 전쟁복구 재건사업에도 매진하셨으니,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7년의 전쟁으로 만연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고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남촌의 선비들인 선생과 송량, 윤전, 이전, 이준, 정경세, 강응철, 김지복, 성람 등 13개 문중의 선비들이 모여 각자의 양식과 돈을 내어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의료원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게 하였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질병이 가라앉고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선비들은 이곳 존애원의 사업에 교육을 더하여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육의 장소로 만들어 가르치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백수회(白首會, 노인잔치)를 열어 지역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어 공경하였으니 선비로서 지역사회를 위해 마땅한 봉사활동을 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를 “높은 신분을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제)을 다하는 것”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400여 년 전에, 이미 이러한 일들을 직접 실천하였으니, 이것이 진정한 선비정신이 아니겠는가? 이는 우리들의 정신세계와 도덕관념이 서양보다도 훨씬 더 앞서있는 정신문화라고 하겠다.
전쟁의 참화는 비단 질병만이 아니고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람들의 심성마저 사나워지는 것이 상례이다. 이에 창석선생과 함께 향교에 모여 ‘향교삭망강회절목’을 만들어 매달 초하루와 보름 날 학생들이 향교에 모여 그간 배운 학문에 대한 시험을 하여, 공부에 더욱 매진하도록 독려하였으며, 이러한 교육의 중요성에 비추어 당시 상주에는 교육을 위한 서원이 없음을 걱정하여 선생과 우복, 검간, 월간, 창석 등 제 선생이 다시 모여 상주의 선비들이 공부할 서원 건립을 의결할 때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崇報先賢桭起來學(숭보선현진기래학) 非書院則莫行(비서원칙막행) 故此朱夫子所以刱南康白鹿之制也(고차주부자소이창남강백록지제야) 以吾商文獻之鄕(이오상문헌지향) 獨無士子依歸之所(무사자의귀지소) 豈非斯文之欠典(기비사문지흠전) 而吾黨之所慨然也哉(이오당지소개연야재)」
“선현을 숭상하여 받들고 위하는 것은, 교육을 일으키고 이어가기 위함인데, 서원이 없는 것은 이를 행하지 않음이다. 이 때문에 주희선생께서 남강서원과 백록동서원의 제도를 만든 것이다. 우리 상주는 문학이 발달한 고장으로, 유독 선비들의 모이고 의지할 곳 하나 없다면 이는 선비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으로, 이를 우리들이 한탄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
라고, 하시며 서원건립에 흔쾌히 참여하시었다.
향내의 선비들이 모여 경상감사에게 서원 건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서애선생과 한강선생에게 서원건립의 절차와 선현배향에 관한 여러 가지 자문을 받고, 당시 상주목사인 김상용(金尙容)의 추천으로 낙동강변의 무임포(지금의 도남동)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때가 선생 44세 때의 일로, 서원의 건립에는 간사를 맡아 공사를 주간하셨다.
평소 병약하셨던 선생은 임진왜란 시 창의하여서도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진중에서 병환임에도 왜적과 싸우셨으며, 전란이 끝나자 전후 향촌복구를 위한 존애원의 설립과 운영, 도남서원 건립 등 전후 재건사업과 제자들을 위한 강론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47세에 운명하시니 어릴 때부터 함께 동문수학한 창석 이준선생이 다음과 같이 만시(輓詩)를 지어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朝廷政欲 徵賢士(조정정욕 징현사) 나라에서는 현명한 선비를 쓰고자 하나,
天道如何 禍勝流(천도여하 화승류)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여 화를 부르는가.
선생은 생전에 효제(孝悌)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시며, 언제나 소학서(小學書)를 읽고 또 실천하여 사람들이 소학군자라는 칭송을 하였다.
선생은 생전에 언행록, 일묵재문집 등 많은 저술을 남기셨으며, 월간 이전⋅창석 이준⋅남계 강응철⋅송광국⋅김극함⋅강용량⋅송덕성⋅우복 정경세⋅검간 조정⋅우연 김지복⋅칠봉 황시간⋅낙애 김안절⋅조홍원 등 선생의 많은 문도들이 제문을 지어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후 선생의 묘갈명(墓碣銘)은 청대 권상일 선생이 찬하셨고, 행장(行狀)은 입재 정종로 선생이 지으셨다. 공성면 용신리에 있는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