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대를 이은 충성 규천(虯川) 전극항(全克恒)

빛마당 2016. 3. 29. 21:56

 대를 이은 충성 규천(川) 전극항(全克恒)

                                                                                                                                  금 중 현

 조선 500여 년 동안에는 여러 번의 외침이 있었지만 인조 년간에 병자호란이 가장 치욕적인 역사라 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 피난하던 인조 임금은 성을 내려와 항복을 하고 끝내는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는 치욕을 당하였고, 이 전란으로 하여 나라는 오래도록 어려움을 겪었다. 이 치욕적인 전쟁에 우리 상주 인물들 또한 직접 전쟁에 참전하거나 의병을 모병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사실들이 전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규천 전극항(1590, 선조 23 ~ 1637, 인조 15)은 도성(都城)을 지키다가 장열히 순국한 충신으로서 길이 추앙받아야 할 인물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 규천은 예조정랑 벼슬 자리에서 조정의 여러 대신 신료들과 함께 인조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서 규천에게 공은 여기를 떠나 도성의 궁으로 돌아가 사승(司承)을 하라고, 명령을 하였다. 이때 대소 신료들은 지금 적의 병사들이 도성에 가득하여 대단히 위험하다고 하였지만 규천 공은 왕명은 잠시라도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재촉하여 도성 안에 들어가 머무르다가 적병의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아마도 임금이 적병들이 점령한 도성으로 규천 공을 내려 가게 한 것은 적진의 상황을 살피고 비록 적진에서 어려움이 있다 하드라도 상징적으로 나마 사직을 이어 가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런 막중한 일을 맡아서 할 관료 중에서는 규천 공이 가장 믿을 만하고 책임성 또한 투철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본다. 공은 이 명령에 따라 수십 일 동안 도성을 지켰지만 결국에는 적병들에게 발각되어 향년 47세를 일기로 하여 순국하고 말았다.

 규천 전극항은 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좌의정을 증직받은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아들이다.

사서 선생은 우복과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상주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적전 제자로서 임진왜란에 창의하였으며 문필과 덕행으로 상주의 향풍을 일으킨 현사(賢士)로서  현대에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전극항의 자는 덕고(德古)이고, 규천(虯川)은 공의 호이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 들어가 경학(經學)을 공부하여 22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문과에 올라 예문관 검열(檢閱)과 전적(典籍)을 거쳐 전라도 도사 겸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였고 예조정랑 때 병자호란으로 순국하여 뒤에 도승지(都承旨)로 증직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규천 공의 아버지 사서 선생은 이조참의 벼슬에 있으면서 영남의 각 군현(郡縣)에 의병을 모집하는 의병장으로 임명받았다. 그 명에 따라 군사 수백 명과 함께 의곡(義穀)을 모아 문경 조령에서 대기하였다가 남한산성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사서는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 75세의 고령이었지만 의병을 모집하는데 기꺼이 참여하면서 국난에 의병에 가담하거나 군량미로 곡식을 납부하는 것은 모두 백성된 직분을 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수분정신(守分精神)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그 정신이 바로 사서 가문(家門)의 정신이요 아들 규천 공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나라를 위하여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구국정신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서선생은 늙은 몸으로 아들 규천 공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도성에 올라가 소문을 들은 바, 북청문 밖에서 살해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오래되어 흔적을 찾지 못하니 그 통한의 슬픔이야말로 어디에 비하랴. 돌아와서 집에 남아있던 옷가지 등 유품을 묻어 의관장(依冠葬)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사서선생은 곧바로 사직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돌아보면 신의 죽은 아들은 대를 이을 자식도 없고 다만 청상 과부가 된 며느리만 있을 뿐이니 저희 집의 사벽(四壁)을 세울 계책에 바라볼 날이 없습니다.....중략..... 밖에 출입을 거둔지 4달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 글 하나로 아버지 사서의 가슴을 애는 심경을 더더욱 알만하다.

세월이 흘러 1786년(정조 10)에는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喆)을 비릇한 상주 선비들이 규천 공의 천양(闡揚)을 건의하는 보고를 관가에 올렸고, 이어서 같은 해에 공의 현손(玄孫) 시옥(始玉) 공이 임금의 행차 시에 정조 임금을 직접 뵙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병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임금에게 일러 가로대,


전극항은 인조 갑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쳤습니다. 병자호란에 그의 아버지 증 좌의정 전식은 전 부제학으로 시골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전극항은 예조정랑으로 어가를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 갔었습니다. 이때 상께서 유사(留司)의 명을 내려 사람마다 위험하게 여겼으나, 전극항은 어가를 재촉하여 나가 성안에서 수 십일을 머물러 있었는데 적이 다시 크게 도발하는 바람에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라고 하여, 비로소 대를 이은 충신과 순절신(殉節臣)으로 명성을 얻게되어 마침내 왕명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는데 왕이 내린 축문에 이르기를,


좋은 세상에 높은 표상을 품고 태어나 청풍 고절의 품성으로 세속의 번뇌를 벗어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죽어 세상에 이름을 남겼도다. 의로운 충성은 천년동안 이어져 배움에 의로움을 지키는 길이요, 나라가 위급할 때 정의로 목숨을 바치는 불꽃같은 충절은 백대에까지 이어 빛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상주 관아에서는 사벌면 화달리 현재의 상주국제승마장 위치에 정려각(旌閭閣)을 지어 천양(闡揚)하였으나 철종 년간에 불의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므로 하여 그 안에 두었던 집안에 이어온 귀중한 서책(書冊)과 함께 모두 타 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규천 공은 시작(詩作)에 뛰어난 재질이 있어 사람들이 동방(東邦)의 이백(李白)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였다. 9세에 우복 문하에 처음 입문할 때 우복께서 산장(山庄)으로써 시를 짓게하니 그 자리에서 시를 지었다고 하는 데 그 시인 즉,


산장 (山庄) 엄숙하고 장엄한 산

遠峀疑鎽列(원수의봉열) 먼 묏 부리는 마치 창을 벌린 듯하고

平波若鏡門(평파약경문) 평지의 물결은 거울 같이 열렸네

碧苔千丈石(벽태천장석) 푸른 이끼는 천길 벽을 덮었고

君作子陵臺(군작자능대) 그대는 엄자릉(嚴子陵)의 대를지었네


 라고, 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규천이 시작에 능했던 사실은 공의 아우 전극념(全克恬)이 남긴 贈都承旨虯川山人遺事(증도승지규천산인유사)에서 이르기를,


 그 재주가 민속하기를 마치 귀신이 실어다준 것 같음이 있어 작은 종소리 울리는 시간에 4운시를 짓고 밥 한그릇 먹는 사이에 문득 회문시(回文詩)를 지었다. 장문대작(長文大作)이라도 한자의 구차함도 없고 어법이 신기했으며 의취(意趣)가 표일했으며 독자로 하여금 어금니에 바람이 나게 하고 모골이 신선같이 느껴지게 하니 세인이 다 베껴서 외우게 되니 거의 종이값을 올릴 정도였다 ......중략...... 사람들이 이 태백의 후신으로 보았을 정도였다.


 라고, 평하였다. 이밖에도 유서깊은 도남서원의 임술년 낙강범월시회에서도 7언 40구를 남기는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규천 공은 지금의 흥암서원 서쪽을 접하는 증연(增淵) 냇가에 수석정(水石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당실(堂室)의 이름을 찬하(餐霞)라고 하여 한 때 이곳에서 기거한 바 있다. 수석정에 관하여는 여러 이야기가 전하지만 대표적으로 성헌징(成獻徵)의 기문을 여기에 옮기기로 한다.

水石亭 記 (수석정 기)


수석정은 규천이 지은 정자이다. 병자호란 뒤에 정자가 불에 타 없어지고 옛 터만이라도 남아 있어 시인 묵객들이 옛 터를 찾아 유상하는 곳이 되었은 즉, 사람들은 비록 그때 사람들과 다르다 하겠으나, 이곳의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중략..... 물건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운수이고 사람이 물건을 만나는 것도 또한 운수이다. 이 산수를 처음 볼 때 지난 날에는 서선(詩仙)이 아끼며 노닐었고, 지금은 사람들이 경치를 구경하고 즐기는 곳이 되었으니 ......중력..... 이 좋은 유서 깊고 뛰어난 경승지를 적막한 곳으로 비워두니 풍월은 주인이 없고 물안개만 자욱히 깊어지는 구나. 이 어찌 아깝지 아니한가?


 라고 하여, 선배 규천공이 남긴 자취를 세상에 알렸다.

규천이라는 스스로 지은 호(號)는 수석정 옆에 연이은 거대한 바위가 낙서골 냇물받이 수충부(水衝 部)가 되므로 하여 형성된 깊은 소(沼)에 용의 새끼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규룡(虯龍)이라는 뜻을 가지는 것이니 앞으로 용으로 승천(昇天)하여 더욱 큰 포부를 펼치겠다는 야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거니와 상서로운 용의 새끼와 자적(自適)하면서 담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뜻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품었던 포부를 한 끝 펼쳐보지 못하고 47세에 생을 마친 규천 전극항이야말로 너무도 아까운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죽음은 시대를 초월하여 더 높이 숭상하여야 할 것이다.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나라에서 내려진 정려(旌閭)는 귀하고도 귀한 증표이다. 바라건대 불의의 화재로 없어진 정려각(旌閭閣) 만이라도 복원하여 길이 귀감으로 남겨 지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1. <사서선생문집>, <규천선생문집>, <규천선생사적> 사서 선생 宗孫(전상용 씨)家 소장(所藏)

2. <상산지> 문한편(文翰編)

3. 권태을 저, <상주의 한문학>, 2001, 상주문화원 간행.

4. 이욱 순천대 교수 저, 논문 대를 이은 의병자 사서 전 식, <2014 제5회 상주문화와 역사인물 학술대회>, 도남서원⋅상주문화원 공동 주최.

5. <상주호국 충의록>, 1999, 상주얼찾기회 간행.

 6. <상주 누정록>, 2008, 상주문화원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