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인물 제5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호당(湖堂)에 선발된 황여헌(黃汝獻)·효현(孝獻) 형제

빛마당 2017. 1. 27. 19:40

호당(湖堂)에 선발된 황여헌(黃汝獻)·효현(孝獻) 형제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시 문화융성담당
김 상 호김 상 호*
 


莫將三寸掉頻頻(막장삼촌도빈빈)  세 치의 혀를 자주 흔들려고 하지 말라
舌劒談鋒解殺人(설검담봉해살인)  혀의 칼과 말의 칼끝은 사람을 죽이는 구실이니
千古三緘眞可戒(천고삼함진가계)  천고에 세 번 꿰맨다 함은 참으로 경계를 삼을 만한데
此生無路訪金人(차생무로방금인)  이 생에서 금인을 찾을 길이 없다

  이 시는『장계이고(長溪二稿)』에 수록된 ‘세치혀(三寸舌)’라는 시(詩)로서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1486~1566)선생이 지은 시이다. 선비가 가장 중시해야 할 언행의 조심에 대한 경계를 시(詩)로 표현한 것으로서 올곧은 선비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한시 번역 일부는 Naver 지식in의 도움을 받았다.

  상주에 장수 황씨 일족이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黃喜)의 둘째 아들 황보신(黃保身, 1401∼1456)의 후손이 세거하면서이다. 이들의 세거지는 조선시대 상주목의 속현인 중모현(中牟縣)으로서 지금의 모동면 수봉리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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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1452

 

 

 

 

 

 

 

 

 

 

 

 

 

 

 

 

 

 

 

 

 

 

 

 

 

 

 

 

 

치신

(致身)

 

보신(保身), 14011456

상주 입향, 소윤공파 파조

 

수신

(守身)

 

직신

(直身)

 

 

 

 

 

 

 

 

 

 

 

 

 

 

 

 

 

 

 

 

 

 

 

 

 

 

 

 

우형

(友兄)

 

종형(從兄)

1428~?

 

경형(敬兄)

1431~1492

 

공형

(恭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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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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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입향,

 

 

 

 

 

 

 

 

 

 

 

 

 

 

 

 

 

 

 

 

 

 

 

 

 

 

 

 

 

 

 

 

 

 

 

 

 

맹헌(孟獻)

14721535

 

윤헌

(允獻)

 

세헌

(世獻)

 

여헌(汝獻)

1486~1566

 

효헌(孝獻)

14911532



<가계도>

 

 황여헌·효헌 양 선생은 장수인(長水人)으로서 방촌의 현손이며, 보신(保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형(從兄)이다. 아버지는 부사 관(灌)이며, 어머니는 집의(執義) 강미수(姜眉壽)의 딸이다. 부사 관(灌)은 장남 맹헌(孟獻), 차남 윤헌(允獻), 삼남 세헌(世獻), 다음이 여헌(汝獻), 그 다음이 효헌(孝獻)으로서 5남 1녀를 두었다.

  4남 여헌은 1486년(성종 17)에 태어났다. 자는 헌지(獻之), 호는 유촌(柳村)이고, 당호는 삼성(三省)이다. 19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에 식년시에 진사 3등으로 급제하고, 24세 때인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저작·박사를 거쳐, 1511년(중종 6)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
한 뒤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515년(중종 10) 전적이 되었다. 46세 때인 1531년 사명당 유정에게 맹자를 가리켰다. 고대일록(정경운), 부록, 인명록
 이어서 이조참의를 지내고, 1533년 울산군수를 지냈다.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여 율시(律詩)와 송설체(松雪體)로 뛰어난 소세양 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진주인(晋州人), 자 언겸(彦謙), 호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 시호 문정(文靖), 좌찬성
, 칠언율시로 뛰어난 정사룡 鄭士龍, 동래인(東萊人), 자 운경(雲卿), 호 호음(湖陰), 대제학
 등 당시의 명유(名儒)와 교류하였다. 특히 그의 죽지사(竹枝詞) 악부시(樂府詩)의 일종으로 순(舜)나라의 임금이 남방을 순시하다가 창오야(蒼梧野)에서 세상을 떠나자 두 부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대나무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다가 마침내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다. 이후 지역민들은 두 여인을 상수의 신(神)으로 받들어 상군(湘君) 혹은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일컫고, 동정호 일대에 처량하고 원망어린 노래가 생겨났다.
는 명나라 문단에서도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의 승장인 사명당 惟政(송운대사),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풍천인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조선 중기의 승려·승병장.
의 스승으로 더욱 유명하다.

  선생의 시는 많이 남아 있다. ‘장계이고’에 115편이 실려 있으며,『국조시책(國朝詩冊)』에 오르고 중국인에게 까지 회자되었던 ‘죽지사(竹枝詞)’란 시를 소개한다. 권태을,『상주한문학(상주문화연구총서5)』, 상주문화원, 114쪽, 2001.


竹枝詞(죽지사)
竹枝歌竹枝歌(죽지가죽지가)    죽지가 죽지가여
歌罷千年遺恨多(가파천년유한다) 노래 끝나도 천년의 한은 많기도 하네.
西風一夕湘水冷(서풍일석상수랭) 서풍 부는 저녁에 상주는 차갑고
洞庭木落生層波(동정목락생층파) 동정호에 잎 다 지니 파도가 이네.
黃陵廟前楓桂林(황릉묘전풍계림) 황릉묘 앞은 단풍든 계수나무숲
凄涼落日啼棲鴉(처량락일제서아) 처량히 해지는데 갈가마귀 우네.
舟人爭唱競波曲(주인쟁창경파곡) 뱃사람은 다투어 뱃노래를 부르는데
碧海千尋連泊羅(벽해천심련박라) 천길 푸른바다는 멱라수로 이었네.
泰關一閉歸不得(태관일폐귀불득) 진관문 한번 닫자 돌아갈 길 없고
滿庭秋草埋章華(만정추초매장화) 온 뜰엔 가을 풀 화려함을 묻었네.
可燐虞姬帳中泣(가린우희장중읍) 가련한 우미인은 장막 속에서 흐느끼고
英雄一逝恨無涯(영웅일서한무애) 영웅 한번가니 한은 끝이 없어라.
楚山蒼蒼楚水碧(초산창창초수벽) 초산은 창창한데 초수 또한 푸르리
騷人遷客幾經過(소인천객기경과) 시인과 나그네 몇이나 이곳 지났던가.
請君今日莫更歌(청군금일막경가) 청컨대 그대는 오늘 다시는 노래 말게
天涯落魄涙橫斜(천애락백루횡사) 천애에 낙백한 이 눈물만 흘리리.
  선생은 조선 초기의 대표 문장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많은 문장가와 교유하면서 중국에도 많이 알려진 유학자로서 당대 조선 문장 지위가『송계시권(松溪詩卷)』을 통해 나타난다.
 『송계시권』이 만들어진 경위를 보면,
 “1546년 1월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서거하자 명나라 사제천사(賜祭天使)의 부사로 왕학(王鶴)이 오게 된다. 조정에서 사신으로 오는 왕학은 식견과 시문에 뛰어났기 때문에 이를 맞이하는 원접사를 호음 정사룡, 종사관 만랑 이홍남, 한리학관(漢吏學官) 송계 권응인으로 꾸려 맞이한다. 이들은 당대 조선의 최고 문장가로서 발탁되었던 것이다. 왕학은 권응인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이별할 때 권응인에게 서문을 붙인 오언절구 시 한편을 써준다.
  왕학에게 시를 받은 권응인은 당대 명사 스승 정사룡과 박충원, 이홍남, 신잠, 심수경, 송인, 정유길에게 시에 대한 화답을 받고, 스승 호음이 써준 칠언율시 2수 그 운에 홍섬, 조사수, 이희보, 황여헌, 이황, 황준량, 심수경, 이양원, 이희보에게 시를 받아『송계시권(松溪詩卷)』의 시첩을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보물급 자료로 취급된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 당대의 대 문장가 16인 중의 한분이 유촌 선생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요 행적으로는 1518년(중종 13)에 성균관 전적으로 있을 때 신용개(申用漑) 등과 어명에 따라『속동문선(續東文選)』을 지어 임금께 바쳤다. 저술로는 낙고(洛稿), 삭고(朔稿), 서공고(書空稿) 등의 문집이 있었으나 병란에 소실되었다. 필법이 절묘하여 중국인도 탄복하였다고 한다.”『商山誌(창석, 청대, 무진본)』「人物條」


  5남 효헌은 1491년(성종 22)에 한성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숙공(叔貢), 호는 축옹(畜翁)·현옹(玄翁)·신재(愼齋)이다. 진사로서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 정자가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홍문관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2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성과 황해도관찰사, 1528년 이조참의, 그리고 이조참판에 올라 1530년 이행(李荇) 등과 함께『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32년 지방관인 안동부사로 보임되었다가 갑자기 졸하였다. 사람됨이 담론(談論)을 좋아하고 풍의(風儀)가 아름다워 귀공자 같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므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많은 사람이 애석하게 여겼다 한다.
  모동면 수봉리 옥동서원에 1786년(정조 10) 사림의 의논에 의해 추배되어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 자시(子時)에 제향되고 있다. 저서로는 넷째 형 여헌(黃汝獻)의 유집(遺集)과 엮은『장계이고(長溪二稿)』가 전한다. 장계이고는 상하 2권으로 상권에는 ‘유촌선생시고(柳村先生詩稿)’, 하권에는 ‘축옹선생일고(畜翁先生逸稿)’로서 시·제문·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의 저서는 하유편(下惟篇)과 갈굴편(渴堀篇)이 있다.『長水黃氏世譜』卷之一, 375쪽

  선생의 시고(詩稿)는 극히 적은데『장계이고』에 수록된 시는 11편으로서 그 중에 ‘贈洞年(증동년)’이란 시를 소개한다. 권태을,『상주한문학(상주문화연구총서5)』, 상주문화원, 114쪽, 2001.


贈洞年(증동년)
屈指吾同傍(굴지오동방)  우리 동방 급제한 해 손꼽으니
于今十七年(우금십칠년)  이제 십칠년  일세.
相離星似散(상리성사산)  서로 이별해 별같이 흩어졌으나
投分柒逾堅(투분칠유견)  의기 상통함은 옻칠같이 더욱 굳었네.
盃酒聞韶館(배주문소관)  문소관에서 술잔 나누니
笙歌歲暮天(생가세모천)  생황과 노래에 한 해가 저무네.
暮辭今日醉(모사금일취)  오늘 취한다고 사양치 마소
人世信茫然(인세신망연)  세상은 실로 망연한 것을

  또한 선생은 이조참판을 파직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평상시의 행색과 인품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나이 40세가 되지 않아 이조참판을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포의(布衣)를 입은 형상은 마치 서생 같아, 보는 사람이 모두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 저녁에 신륵사에 유숙하였더니, 유생 서넛이 둘러앉아 멸시하여, 공이 말석에 자리 잡았다. 한 유생이 먼저 말하기를, ‘얼마 전 금강산에 갔는데 정말 명산이었소. 한 중이 황모씨의 시를 소매에서 내 보이는데 정말 훌륭한 작품(佳作)이었소’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도 일찍 한번 가보았는데 과연 공의 말과 같았소’하니, 유생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서생이 어찌 그리 일찍이 구경하였을까?’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일찍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 때 우연히 한 번 보았소’하니, 유생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창황히 달아났다. 공이 그들을 불러 말하기를, ‘공들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정말 솔직하니, 친구가 될 만하다’하고, 작은 술상을 차려 마음껏 즐겼다. 이 후로 서로 내왕하며 매우 깊은 우정으로 사귀었다.」

  그 이후 선생은 안동부사로 있다가 43세로 졸하였는데 사관(史臣)은 그를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조선왕조실록』, 중종 27년 임진(1532, 가정 11) 6월17일 (갑오)

 「서울 사람으로 세종조(世宗朝)의 명상(名相)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고손(高孫)이다. 사람됨이 담론(談論)을 잘하고 풍의(風儀)가 아름다워 금의공자(錦衣公子)와 같았고 학문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문장(文章)도 유명하였다. 그런데 병을 간호하고 부모를 봉양할 뜻으로 외방의 보직(補職)을 구하여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못가서 졸하니, 나이 43세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는 문장과 몸가짐에 있어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사모하였다. 그러나 그 가풍이 일 만들기를 좋아하고 잔재주를 훌륭하게 여기는 습관이 있음을 면치 못했으므로 그가 힘써 엄폐하려고 했으나 엄폐할 수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나무랐다.」

  한편, 양 선생 사후에 우복 선생 鄭經世(1563∼1633):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문장공.
은 축옹 선생의 4남 황징(黃憕) 黃憕(1521~1578): 자 백강(伯康), 좌랑, 문장공 정경세가 묘갈을 찬함(『상주시사』제5편 인물, 328쪽)
의 묘갈문을 쓰면서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우복집』「별집」(제1권), 습유(拾遺)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 황공(黃公) 묘갈문(墓碣文) 초기(草記).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지낸 관(瓘)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막내의 이름은 효헌(孝獻)으로,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바로 공의 황고(皇考)이다. 이분은 덕행(德行)이 탁월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청백리(淸白吏)라 칭하였으며,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이면서도 대제학(大提學)의 망(望)에 올랐다. 이에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일찍이 말하기를, ‘축옹(畜翁)의 문장은 전아(典雅)하여 유촌(柳村)보다도 더 좋다.’하였는데, 유촌은 바로 이분의 형인 여헌(汝獻)으로, 세상에서 정황소(鄭黃蘇) 명종 당시에 문장이 뛰어나기로 이름났던 세 사람으로, 정사룡(鄭士龍), 황여헌(黃汝獻), 소세양(蘇世讓)을 가리킨다.
라고 칭하는 분이다.」

  지금도 옥동서원 주변에는 양 선생과 관련한 고사가 전해온다. 하나는 옥동서원 뒤에 있는 만경산의 산 봉우리 이름이 헌수봉(獻壽峰)인데 이산 봉우리가 헌수봉이라 불러진 것은 양 선생이 매년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를 올려서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봉우리라 하여 산봉우리의 이름을 헌수봉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또 하나의 고사는 신덕리에 관한 마을 이름이다. 옥동서원의 효시인 횡당(黌堂)이 처음 지금의 옥동서원의 정면인 석천 건너편에 남향하여 있는 신덕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의 의미는 학문에 일관(一貫)하여 학문의 도를 신덕(新德), 즉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양 선생은 호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를 할 때에는 중모현에 독서당(讀書堂)인 횡당(黌堂)을 세우고 1518년에는 방촌 황희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 후 독서당을 폐쇄하지 않고 지속하면서 백화서원(白華書院)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이 서원이 옥동서원의 효시가 된다. 이 서원은 현재 국가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또한, 양 선생은 조선의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일찍이 나라로부터 호당에 선발되었고, 학문이 출중하여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사후에 유촌 선생은 세상에서 정황소(鄭黃蘇)라고 칭하는 분으로 축옹 선생은 문장이 중후하면서도 우아하여 유촌 선생보다 더 좋다는 평가를 볼 때 양 선생의 학문은 당대의 으뜸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양 선생의 행적은 옥동서원 주변 일대 지명에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지역에서 존앙(尊仰)의 대상이 되어 지명이 만들어지고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