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7호(2017년)

상주학. 상주 근대 전통시장의 변천

빛마당 2018. 2. 9. 13:00

상주 근대 전통시장의 변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상   호

 


목   차




Ⅰ. 머리말 168
Ⅱ. 장시의 변천 169
Ⅲ. 조선시대의 상주 장시 171
Ⅳ. 일제강점기의 시장 176
Ⅴ. 시장 구역과 취급 물류 183
Ⅵ. 일제강점기의 상주읍내 시장 185
Ⅶ.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장시의 비교 191
Ⅷ. 현대의 시장 변천 193
Ⅸ. 지명에 나타나는 시장 198
Ⅹ. 인근 지역의 시장 202
ⅩⅠ. 맺는말 204


상주 근대 전통시장의 변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상   호

Ⅰ. 머리말
  시장(市場)의 시작 근원은 어디서부터인지 알기 어렵다. 인간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자주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필요에 따른 시기에 시장은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생산자와 소비자, 생산 물자를 전문으로 거래하는 상인이 모여 물자를 교환하거나 매매를 하는 장소를 장시(場市)·장(場)·장문(場門)이라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 시장 또는 시상(市上)으로도 불렀다. 일정한 점포를 만들어 전문 상행위를 하는 곳을 상점이라 하고 이를 시전(市廛)·시사(市肆)·전방(廛房)·전포(廛鋪) 또는 단순히 전(廛)이라 하였다.
  상주의 장시도 1018년 상주목이 되면서 대도회지로 발달되고 장시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 졌으나 문헌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근대의 자료 또한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 유교 중심의 사회에서 상업을 천시하는 풍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실학과 경제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고 사회 풍조가 변화됨에 따라 지방 장시가 본격적으로 사회 표면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회 여건에 따라 장시 경제를 직접적으로 조사하기에 이러는데 그 조사는 중추원에서 맡았다. 이때의 조사 내용도 부분적인 자료만 있을 뿐이며, 그 이전의 정부 조사 자료는 근원을 찾기가 어렵다.
  이 연구는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자료의 자료를 바탕으로 상주 장시의 변천사를 정리하고, 관계 자료를 집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고에서 시장(市場)의 용어는 그 시기 용어에 따라 조선시대 이전에는 장시(場市),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시장(市場)으로 통칭하기로 한다.


Ⅱ. 장시(場市)의 변천(變遷)
  기록에 나타나는 장시는 490년(신라 소지왕 12)에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열린 경사시(京師市)가 최초이며, 509년(지증왕 10)에는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이를 관리하는 시전(市典)이라는 행정기구를 만들어 관리하였다. 695년(효소왕 4)에는 남시전, 서시전을 추가하여 3개가 되었는데 이를 삼시전(三市典)이라 부른다. 三國史記 新羅 炤知王 12年 …初開京師市 以通四方之貨…

  고려시대에는 개성(開城) 광화문(廣化門)에 긴 행랑 모양의 방시(坊市)를 축조하였고, 1208년(고려 희종 4)에는 광화문의 장시를 크게 고쳐 상설 전포를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였으며, 1412년(태종 12)에는 대규모의 시전 행랑을 조성하였는데 종묘와 동대문 간에 2,500여 칸이 되었다고 한다.
  장시수(場市數)를 보면 1770년경에는 경기도 102개, 충청도 156개, 강원도 68개, 황해도 82개, 전라도 216개, 경상도 282개, 평안도 133개, 함경도 28개로서 1,067개 이었다가 1808년경에는 1,061개, 1927년경에는 1,052로 줄어들다가 일제강점기인 1935년경에는 1,494개로 늘어났다.

구 분

증보문헌비고

(1770)

만기요람

(1808)

임원십육지

(1827)

통계조사

(1935)

1,067

1,061

1,052

1,494

경기도

102

102

93

115

충청도

156

157

158

151

강원도

68

68

51

141

황해도

82

82

109

124

전라도

216

214

188

191

경상도

282

276

268

328

평안도

133

134

143

244

함경도

28

28

42

200



증보문헌비고

(770)

만기요람

(1808)

임원십육지

(1827)

통계조사

(1935)

1,067

1,061

1,052

1,494

경기도

102

102

93

115

충청도

156

157

158

151

강원도

68

68

51

141

황해도

82

82

109

124

전라도

216

214

188

191

경상도

282

276

268

328

평안도

133

134

143

244

함경도

28

28

42

200


 표 1. 문헌별 장시 현황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을 반포하여 조선을 일본의 원료생산지화·상품판매시장화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하면서 1914년 ‘시장규칙(市場規則)’을 제정하였다. 대정 3년 9월 총령 제136호, 개정 대정 9년 4월 총령 제38호, 대정 13년 9월 총령 제51호
 시장규칙 제1조는 한국시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상설 또는 정기의 재래시장을 제1호시장, 10명 이상의 동일 건물 내의 곡물·식료품 판매 공설시장을 제2호시장, 위탁·경매 등의 방법으로 화물 판매업을 자는 장소를 제3호시장,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영업자가 모여 물품이나 유가증권 등을 취급하는 장소를 제4호 시장이라 하였다. 특히 2호․3호를 합친 시장을 ‘신식시장’이라 하였다. 朝鮮の市場 , 朝鮮總督府, 1924, 5쪽
 이후 다양한 현대식 시장이 개설, 운영되었는데 공설시장은 1910년에 개설된 부산의 ‘부평정시장(富平町市場)이 효시이며, 이 시장을 시작으로 1938년에 29개, 1941년에 53개로 늘어났다.
  ‘시장규칙’은 광복 후에도 계속 유지되다가 1961년 ‘시장법’제정으로 폐지되었다. 재래시장(在來市場)은 1․6, 2․7, 3․8, 4․9, 5․10과 같이 매월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5일 만에 개시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5일장(五日場)으로 불리었고 정기시의 성격을 가졌다.
  1926년 조사된 1,300여 개의 시장 중 1,177개는 5일장이었으며, 28개는 10일제 시장, 16개는 부정기시, 97개는 매일시였다.


Ⅲ. 조선시대의 상주 장시(場市)
  조선시대의 상주 장시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은 ‘상산지병오초책(商山誌丙午草冊)’이다. 商山誌丙午草冊, 상주박물관, 민속원, 2015
 12개소의 장날이 5일장으로 구분하여 표기되어 있고, 장시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는 상주목 지역으로서 함창지역의 장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1일과 6일은 공성장으로서 장이 열리는 곳은 공성창 아래이다. 공성창은 현재의 공성면 거창리(창말)이다.
  2일과 7일은 상주읍장과 철곡장으로서 읍장은 성내로 표기되어 있는데 여러 번의 이동이 있어 별도 상술하겠다. 철곡장은 내북면으로서 현재의 화동면 지역인데 구체적인 장소는 알 수 없다.



그림 1. 영남대로 지역의 상권과 정기시장 분포


       <출처 : 영남대로, 최영준, 378쪽>


  3일과 8일은 단밀장, 장공장, 삼탄장 3곳이 열렸다. 단밀장은 단밀창 아래로서 단밀창은 현재의 의성군 단밀면 지역이다. 장공장(長蚣場)은 장홍시 (長虹市)으로 표기된 기록도 있는데  尙州牧邑誌(1833)에는 長虹市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청리면 율리 일대이다. 청리면 율리(栗里)는 1914년 상률리(上栗里). 하율리(下栗里). 송령리(松嶺里). 벽암리(碧岩里). 석평리(石平里). 장홍리(長虹里)를 합하여 율리라 하였다.
 삼탄장은 내북면지역으로서 현재의 사벌면 퇴강리 일대이다.
  4일과 9일은 중모장과 은척장으로서 중모장은 중모창 아래로 기록되어 있는데 중모창은 현재의 모동면 용호리(창말)이다. 은척장은 은척창 아래로서 은척창이 열렸던 위치는 은척면 우기리(창리)이다.
  5일과 10일은 낙동장과 낙원장, 산양장 3곳에서 열리는데 낙동장은 낙동 진두로서 현재의 낙동면 낙동리(진두리)이며, 낙원장은 내북면으로서 현재의 낙상동, 산양장은 산남면으로서 현재의 산양면지역이다.
  이외에 4일과 6일에 북천장이 열렸는데 이 당시에는 폐하여 성내장(城內場)에 흡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냉림동 지역(북부시장)으로 추정된다. 날짜별 장날과 위치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장날

1.6

2.7

3.8

4.9

5.10

4.6

명칭

(위치)

功城場

(功城倉底)

邑場

(城內)

鐵谷場

(內北)

丹密場

(丹密倉底)

長蚣場

(外南)

化寧場

(化寧倉底)

三灘場

(外北)

中牟場

(中牟倉低)

銀尺場

(銀尺倉底)

洛東場

(洛東津頭)

洛原場

(內北)

山陽場

(山南)

北川場

(今城內)


 표 2. 상주 장날 현황(구당지 초책, 1786)

  임원십육지(1827)의 팔역 장시에는 5일장이 상주지역 9개, 함창지역 4개로서 전체 13개의 장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장시에는 현재의 행정구역이 아닌 단밀장, 산양장이 포함되어 있어 현재의 상주 행정구역의 장시는 11개 장시가 된다. 각 장시마다 관아로부터 거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관아 앞 2개를 제외하면 가까운 곳은 20리, 먼 곳은 60리까지 떨어져 있다.

장날

1.6

2.7

3.8

4.9

5.10

상주

(9)

功城場

(功東面)

40

丹密場

(丹西面)

60

州內場

(官門外)

長蚣場

(靑東面)

20

化寧場

(化西面)

50

洛東場

(外東面)

40

中牟場

(牟東面)

50

銀尺場

(銀尺面)

40

山陽場

(山南面)

60

함창

(4)

舊鄕場

(邑內)

柿巖場

(上西面)

20

赤支場

(南面)

20

舊衙場

 


 표 3. 팔역장시(임원십육지, 1827)


  한편, 지역마다 주요 거래 물목(物目)이 정리되어 있는데 그 당시의 식재료와 생활용품으로서 상주에는 물류가 풍족하며, 전체 29종이 기록되어 있다.  거래된 물목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상주장 주요 거래 물목>
饒, 米(쌀), 荳(콩), 麰麥(보리), 脂麻(참깨), 水蘇(부평), 綿布(면포), 綿花(솜), 苧布(모시), 麻布(마포), 縀(신발), 紬(명주), 繭絲(견사), 魚鹽(어염), 雉(꿩), 鍮器(유기), 鐵物(철물), 木物(목물), 土器(토기), 磁器(자기), 紙地(종이), 莞席(돗자리), 平凉子(패랭이), 烟草(담배), 烟盃(담뱃대), 棗(대추), 栗(밤), 梨(배), 柿(감), 牛犢(우독)
  함창지역의 장시도 상주와 같이 물류가 풍족하다 하였으며, 거래 물목은 상주보다 작은 15종이 기록되어 있다. 거래 물목이 작은 것으로 보아 상주의 장시보다는 많이 적은 장시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함창장 주요 거래 물목>
饒, 米(쌀), 荳(콩), 麰麥(보리), 綿布(면포), 綿花(솜), 明紬(명주), 棗(대추), 栗(밤), 梨(배), 柿(감), 鍮器(유기), 土器(토기), 烟草(담배), 雉(꿩), 雞(닭)
  상주목읍지(1833)에는 읍시, 공성시, 장홍시, 중모시, 저암장, 화령장, 은척장, 산양장, 낙동장, 단밀장의 10개 장시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는 1786년에 있었던 철곡장(내북), 삼탄장(외북) 낙원장(내북) 3개의 장시가 줄고 저암장(모서) 1개가 늘었다. 10개 장시 중에서 산양장은 현재의 문경시, 단밀장은 현재의 의성군에 해당한다. 이 기록에는 ‘市’와 ‘場’으로 구분하여 ‘市’가 4개, ‘場’이 6개로서 시장의 규모가 큰 곳을 ‘市’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거리는 상주 관아 앞에서 시작되고 가장 가까운 장시는 읍시(邑市)로서 관아 바로 앞에서 열렸으며, 가장 먼 곳은 모서면의 저암장으로서 80리이다.

구분

邑市

功城市

長虹市

中牟市

楮巖場

化寧場

銀尺場

山陽場

洛東場

丹密場

위치

衙軒前

공성

청동

모동

모서

화서

은척

산남

외동

단서

거리

-

40

20

50

80

50

40

60

40

60


 표 4. 장시 및 거리(상주목읍지)                     단위 : 리


  한편 현재의 상주 관할 구역내에 있는 함창읍 지역은 함창현, 함창군의 현, 읍지로 별도 기록이 되어 있어 상주목읍지에서의 현황에서는 모두 제외되었다. 따라서 함창지역은 경상북도함창군읍지(1899)에 따로 나타나는데 구향시(舊鄕市)와 남면시(南面市) 2개의 장이 열렸으나 이 당시에는 1일과 6일에 관아 문 밖에서 구향시가 열리고 남면시는 군(郡) 남쪽 15리에서 열렸으나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舊鄕市(官門外), 1.6일, 南面市(郡南15리), 今無

  조선 후기 상주의 장시를 문헌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연대

시장에 관한 기술

邑內

北川

洛東

丹密

功城

長蚣

(長虹)

中牟

鐵谷

楮巖

化寧

銀尺

洛原

三灘

山陽

1770

2

4

4.10

3

1

1

4

2

-

3

4

5

3

5

1830

2.7

 

4.9

1.6

1.6

3.8

4.9

 

-

3.8

4.9

 

 

5.10

1832

衙軒前

 

外東

(40)

丹西

(60)

功東

(40)

靑東

(20)

牟東

(50)

 

牟西

(80)

化西

(50)

銀尺

(40)

 

 

山南

(60)

1832

官門外

 

 

 

 

1895

2.7

 

4.10

존재

1.6

3.8

4.9

 

존재

3.8

존재

 

 

5.10


 표 5. 상주 시장의 변천(18~19세기)

①增補文獻備考 ②林園經濟志 ③商山誌(增補) ④慶尙道邑誌 ⑤嶺南邑誌


Ⅳ. 일제강점기의 시장(市場)
  경상북도의 전 주민의 1/4이 상공업인(商工業人)이고 그 중에서 상업인은 조선인 91,654명, 일본인 10,170명이다. 그 중심지는 대구, 안동, 상주, 경주, 포항 등 철도의 역 소재지로서 시장의 총수는 158개소였으며, 장시일은 통례로 음력 매월 1.6, 2.7, 3.8, 4.9, 5.10일의 조선시대 5일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개벽 제36호, 朝鮮文化의 基本調査(其二), 慶北道號 上(1923. 6. 1)

  상주는 조선시대 상주군과 함창군의 장시는 최종 11개 장시로서 현재 상주 관할 구역 내에는 읍, 공성, 장공, 모동, 저암, 화녕, 은척, 낙동, 구향의 9개 장시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4년에는 9개면에 읍내시장 3개(내동, 내남, 내서)와 낙동(외동), 장홍(청동), 공성 상․하(공동), 중모(모동), 화녕(화서), 구향(함창 현내)의 10개 장시가 열렸다. 그러나 장시일은 파악할 수 없으나 읍내 시장은 ‘성상리, 성하리, 남성내리, 서성내리, 창내리’에 5개의 소규모 시장이 있었고, 공성면은 ‘하신시리, 상신시리’의 2개, 모동면에는 ‘창리, 장수리’의 2개로서 전체는 13개의 소규모 장시가 열렸다고 하겠다.

區分

內東面

內南面

內西面

外東面

靑東面

功東面

牟東面

化西面

縣內面

名稱

邑內

洛東

長虹

功城下

功城上

中牟

化寧

舊鄕市

位置

城上里

城下里

南城內里

西城內里

倉內里

津頭里

長虹里

下新市里

上新市里

倉里

長水里

新峰里

舊鄕里


 표 6. 상주군, 함창군 장날(조선지지 자료, 1914)


  이러한 장시들이 1936년의 자료에 의하면 가까운 장소에 여러 장시가 열리던 것이 정리되고 지역별 큰 장시로만 정리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때의 장시는 상주, 중동, 낙동, 청리, 공성, 모동, 화서, 함창의 8개 장시가 열렸다. 경영자는 읍면이며, 개시 회수가 조사되어 있는데 장시 개편 이후 열린 회수를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1928년에는 읍시, 공성시, 장홍시, 중모시, 저암장, 화령장, 은척장, 산양장, 낙동장, 단양장의 10개 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의 상주 관내에는 산양장과 단밀장을 제외하면 8개 장이다.

邑市

功城市

長虹市

中牟市

猪巖場

化寧場

銀尺場

山陽場

洛東場

丹密場

衙軒前

공성

청동

모동

모서

화서

은척

산남

외동

단서

-

40

20

50

80

50

40

60

40

60

 표 7. 장시 및 거리(상산지, 1928)                    단위 : 리


  상산지 증보판(1928)에는 8개 장시 이외에 함창시(咸昌市), 후평시(後坪市), 입암시(立巖市)가 별도 기록되어 있다. 함창시는 함창역 앞에 있고 함창역은 주(州)의 북쪽 옛 함창읍 건통리에 있었다. 咸昌市 在咸昌驛前 廢合後新屬本州, 咸昌驛 在州北舊咸昌邑件通里
 후평시는 청리역 靑里驛 在州南二十里後坪市
 앞에 있으며, 정묘년(丁卯年)에 신설하였다고 하였다. 後坪市 在靑里驛前丁卯新設
 입암시는 은척면 입암리(현, 봉중리)에 있고 이곳도 정묘년에 신설하였다고 하였다. 立巖市 在銀尺立巖里丁卯新設
 정묘년은 일제강점기의 상산지 발간(戊辰年, 1928) 전인 1927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1928년 당시 상주관내에는 11개의 장시가 열렸다고 하겠다.

구 분

상주시

신암시

낙동시

청리시

공성시

모동시

화녕시

함창시

장 소

남정리

신암리

낙동리

월로리

옥산동

용호리

신봉리

구향리

경영자

상주읍

중동면

낙동면

청리면

공성면

모동면

화서면

함창면

개시회수

70

70

69

59

61

71

71

70


 표 8. 상주 장날 현황(군세일반, 1936년 11월말)


  1933년의 자료에서는 그 당시의 시장 배치도가 나타나는데 옛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변경되는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상주읍신구시장평면도(尙州邑新舊市場平面圖)’에는 옛(舊) 시장과 신시장, 경찰서, 우체국, 여자보통학교 등 관공서 시설물 위치가 도면에 표시되어 있다. 이 평면도에 따르면 옛 시장은 왕산의 좌측 서성동 147번지 일대와 성하동 13번지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고, 신(新) 시장은 남성동 4번지와 1번지 일대에 3개소로 도시(圖示)되어 있다.

장날

16

27

38

49

510

명칭

(위치)

功城市場

(玉山洞)

咸昌市場

(邑內)

尙州市場

(南町洞)

中牟市場

(龍湖里)

柿巖市場

新岩市場

(中東面)

靑里市場

(月老里)

化寧市場

(新鳳里)

南面市場

(東幕里)

舊鄕市場

洛東市場

(洛東面)

 


 표 9. 상주 장날 현황(교남지, 1937)


  1938년 3월 4일(慶尙北道 産 第131號)에는 1936년 8월 8일 기 허가를 득하여 운영 중이던 경찰서 앞 남정리, 서정리의 상주읍시장 1490평(우시장 제외)중 남정리 1-1, 4-50, 6-2, 4-65번지 722평을 폐지하고, 남정리 85-10번지외 2필지 4,380평으로 상주읍에서 경상북도지사에게 시장 변경허가를 받아 이전 확장을 하였다. 시장 이전 사유는 구시장(舊市場)이 시가지 중심에 위치하여 위생, 교통 등의 불편이 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상주읍시장(尙州邑市場)은 남정리 85-10, 86-2, 87번지와 성동리 635, 636, 632-2, 632-1번지가 된다. 성동리 일대의 시장은 우시장(牛市場)이 된다. 이 시장 부지매입과 시설을 위해서 상주읍에서는  1933년 조선총독부에 2만원의 기채를 받아 조성 기금을 마련하여 시행되었다. 이때의 기채승인과 시장 변경허가 신청서 첨부 서류에 시장 관계도면이 있어 그 당시의 읍시장 현황 추정이 가능하다.


                                               그림 2. 尙州邑新舊市場平面圖


  ‘상주읍시장도(尙州邑市場圖)’에는 ‘상주읍신구시장평면도(尙州邑新舊市場平面圖)’에 표기된 신(新) 시장의 확대 도면으로서 시장 부지면적은 관유지(官有地)의 대지(垈地) 954평에 어류(魚類), 음식(飮食), 야채(野菜) 노점을 표기하였고 1933년과 1935년 장옥 신설과 매수 부지를 표기한 도면으로서 현대식 시장을 갖추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3. 尙州邑市場圖(市場敷地面積 954坪, 官有垈)

  다른 하나의 ‘상주읍신구시장평면도(尙州邑新舊市場平面圖)’에는 민유지(民有地) 답(沓), 4,936평에 신탄(薪炭), 가축(家畜), 잡화(雜貨), 곡물(穀物)의 시장 배치도로서 1933년 신설, 이축, 1934년 신설, 1935년 신설 건물과 매수할 토지, 철조망선, 노점, (?)숙사, 창고가 표기된 도면이다. 이 도면은 장래 이전할 시장을 도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위치는 현재의 중앙시장이 위치한 남성동 85, 86, 87번지 일대가 된다.



그림 4. 함창시장(일제강점기, 1/5만)


  1936년의 상주 장시 규모를 보면 상주장은 연간 48회의 장시가 열리고 거래액이 45만원 전후였다. 한편 함창장은 거래구역이 상주군의 함창, 이안, 공검, 은척면과 문경군의 산양, 호계, 영순, 가은, 호서, 용궁의 각 면으로서 연간 거래액이 30만원 내외였다고 한다. 함창장이 상주장에 비해 이와 같이 거래액이 많은 것은 일제강점기에 ‘함창 쌀(米の咸昌)’로 불러질 만큼 미곡의 산지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명주의 산지로서 ‘함창명주(咸昌紬)’ 가 유명하였고, 1914년 함창군이 상주군에 병합된 후에도 ‘상주명주(尙州紬)’ 로 그 유명세를 유지하면서 미곡과 명주장이 장시의 거래 규모를 크게 한 것으로 보인다. 慶北大鑑奥附, 第十三節 尙州邑の素描, (尙州の經濟, 新興の咸昌), 1936, 1205쪽, 1207쪽




그림 5. 尙州邑市場圖
(薪炭, 家畜, 雜貨, 穀物, 市場敷地面積 4936坪, 民有沓)


  우시장은 성동리에서 영위하다가 도시가 확장되고 주변이 개발되어 도시화됨에 따라 도시 위생상 외곽지 이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외곽지로 이전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이전 시도를 하였는데 1988년 12월 3일(경북 고시 제212호) 상주시 가장동 산 11번지외 3필지 16,800㎡에 이전하기 위하여 도시계획으로 지적 고시를 하였으나 부지만 조성하고 이전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저수지였던 죽전동 354-1번지외 3필지 10,248㎡에 이전하기 위하여 1991년 8월 10일 도시계획 고시를 하고 추진하였으나 이곳에도 이전을 하지 못하였다. 계속 이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축시장의 운영을「농업협동조합법」에 의한 ‘축산업협동조합’에서 개설, 관리하도록「축산법」제34조에 규정됨에 따라 상주시 지천동 106-16번지에 2006년 9월 개장하여 상주축산업협동조합에서 매월 2일과 7일로서 월 6회 개장을 하고 있다.



그림 6. 상주읍시장의 변천도


  이와 같이 상주읍시장은 조선시대에 상주읍성 내 상주목 관아 동서쪽에 위치하다가 점차 관아 앞쪽으로 이동하고, 일제강점기에는 관아의 앞쪽인 태평루 앞으로 이동되었으며, 관아 앞 시장도 도시의 번성으로 인해 읍성의 남북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장의 이동 현황을 도식화하면 그림과 같다.


Ⅴ. 시장 구역과 취급 물류
  1920년 5월 24일 상주군수가 시장에 관한 관습을 조사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보고를 하였다. 慶尙北道 市場에 관한 건(表題-‘庶務綴’), 시장에 관한 관습조사(경상북도 尙州郡), 시장에 관한 건 회보, 尙州郡庶 제523호, 大正 9년(1920) 5월 24일, 尙州郡守, 朝鮮總督府 中樞院 귀중(중추원 조사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트베이스 자료
 이 조사 자료에 따르면 상주의 시장은



그림 7. 상주의 행상구역
 

읍, 공성, 중모, 화령, 낙동의 5개 시장으로서 모두 공설시장으로 운영되었다. 시장부지의 소유권은 읍시장이 관유지(官有地), 낙동시장은 동유지(洞有地)이며, 나머지 공성, 중동, 화령장은 모두 사유지이다. 시장에 물자가 공급되는 지역은 생필품의 보급과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지역으로서 동일 생활권으로 볼 수 있는 구역이다. 상주읍장은 시내지역과 서쪽으로 내서면, 북쪽으로 외서면, 동쪽으로 중동면, 남쪽으로 청리면까지 물자 공급구역이 된다. 공성장은 상주의 남쪽으로서 구미시 무을면까지이며, 중모장은 상주 서쪽으로서 중화지역, 화령장은 서북쪽으로 영동군, 낙동장은 동쪽으로 의성군까지가 수급지역이 된다. 여기서 화북면 지역은 제외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충청도 수급지역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名稱

(所有)

(장날)

物資 供給需用 區域

行商區域

去來物資

穀物

魚物,海草

鳥獸

果實

菜蔬

()

27

尙州面, 內西面, 外西面, 沙伐面, 洛東面, 靑里面, 外南面, 中東面

金泉郡, 報恩郡, 聞慶郡, 義城郡, 醴泉郡.

白米,大豆,小豆,,大麥,糯米,小麥,

乾魚,生魚,

,

,,

白菜,水芹,大根,,鹽類

功城

()

16

功城面, 靑里面, 外南面, 牟東面, 善山郡 舞乙面

善山郡, 金泉郡, 尙州郡, 永同郡

-

-

-

-

-

中牟

()

49

牟東面,牟西面, 化東面,化西面

尙州郡, 永同郡, 金泉郡

大豆,粳米, 糯米

-

-

-

-

化寧

()

38

尙州郡 化西面, 化北面, 化東面, 內西面 일부. 충북 永同郡 일부

尙州郡, 報恩郡

大豆,粳米, 糯米

-

-

-

-

洛東

()

510

尙州面 일부, 洛東面, 中東面, 義城郡 일부

尙州郡, 義城郡

-

-

-

-

-

 표 10. 상주 시장 구역과 거래 물자(1920.5.24. 상주군 조사자료)


  따라서 상주의 상행위의 구역은 상주를 포함한 김천시, 보은군, 문경시, 의성군, 예천군. 구미시, 영동군의 8개 시군이 된다. 이러한 시장이 형성되는 상행위 구역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관습에 의해 형성된 상권지역으로서 상주의 경제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Ⅵ. 일제강점기의 상주읍내 시장(市場)
  1920년 당시에는 읍시장을 포함한 5개 시장을 조사하였으나 그 중에서 가장 번화하였던 상주읍장 즉 현재의 상주중앙시장(尙州中央市場)의 현황을 보면 개시일은 매월 음력 2일과 7일로서 중매상인(해산물, 곡물) 65인, 소매상인 350인이 상행위를 하고, 중개인 수수료는 소 1두 당 3/100, 기타상품은 1/100이다.
  시장 사용료는 장옥은 매장마다 1칸에 5전을 징수하고, 노면상은 수수료를 받는다. 시장의 이용은 부근 5리 이내이며, 시장세는 매상고의 1/100을 징수하고 감독은 관리인을 두고 면 보조원이 1개월에 4~5회 순회하면서 관리한다. 주요 거래 물동량은 다음과 같이 월 17,222원이 거래되었다. 주요 거래 품목은 농촌도시로서 곡물류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잡화류다. 朝鮮の市場, 朝鮮總督府, 1924, 378~380쪽

곡물류

해산류

과실류

철물류

금물류

도자기

7,200

2,040

810

749

779

360

조수류

소채류

신탄류

사 류

지 류

잡화류

1,665

360

660

362

180

2,057


 표 11. 주요 거래 품목 및 거래액(1개월분)           단위 : 원


  이때의 시장은 상주읍시(尙州邑市), 공성시(功城市), 낙동시(洛東市), 중모시(中牟市), 화녕시(化寧市), 함창시(咸昌市), 신암시(新岩市) 7개 장시로서 모두 공설시장이다. 앞의 책 92쪽

  주요 거래 품목은 곡물(穀物), 생우(生牛), 신탄(薪炭, 땔감), 반물(反物, 옷감), 황물(荒物, 부엌용 잡화), 잡화(雜貨), 립(笠, 갓), 해산물(海産物), 야채(野菜), 생사(生絲)로서 상주시에 출장 상인의 수는 400명, 함창시는 200명, 구매자수는 상주시는 5천명, 함창시는 6~7백명 내외다. 1일 평균 매상고는 상주시가 6백원, 함창시가 200원 정도이다. 앞의 책 584쪽


Ⅵ-1. 거래물동량 및 가격표
  상주읍장의 시세를 보면 백미 1石에 5円, 소 1頭에 80円에 거래되었다. 백미 1석은 현재의 백미는 10말 즉 80㎏이 1석이나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144㎏이 1석으로서 적용되었다. 따라서 쌀 1㎏은 일제강점기 0.035원으로서 2016년 현재는 1㎏에 1,640원으로서 2016년 가격으로 쌀 1石을 환산한다면 236,160원이었다. 한편 소(牛)1마리의 값을 쌀값으로 환산해 본다면 1마리에 3,748,571원에 거래되었다. 1920년 당시의 상주읍장의 주요 거래 물목의 시세는 다음 표와 같다.

種 類

品 名

數量

金額

穀物類

白米

大豆

小豆

大麥

糯米

小麥

50

10

1

1

20

5

2

250

230

25

18

360

300

54

魚物類

乾魚

生魚

20

20

1,500

400

海草類

-

5, 200

 

織物類

포목

명주

廣唐木

50

50

30

350

500

750

薪炭類

-

100

300

鳥獸類

300

20

24,000

100

雜 類

木材

竹物

鍮器

草席

白紙

麻靴

草靴

笠子

陶器

厚紙

麯子

100

10

10

10

10

10

100

100

30

50

10

10

200

200

5

100

20

100

50

20

30

50

200

60

果實類

1

1

20

30

20

40

菜蔬類

白菜

水芹

大根

10

10

10

10

5

15

5

20

鹽 類

-

50

45


 표 12. 상주읍장의 시세


Ⅵ-2.2 운영방법
  시장을 별도로 감독하는 기관은 없다. 거래 방법은 매도인과 매수인이 직접 매매를 행하고 우시장에서만 중개인의 매개에 의해 매매가 이루어진다. 우시장의 매개자 수수료는 5개 시장 모두 판매가격의 8/100이다.
  시장세 징수는 시장 관리자가 보조자를 두고 매 장날마다 나가서 판매가격의 1/100을 징수한다. 시장 사용료를 보면 상주읍장은 관유지(官有地), 낙동장은 동유지(洞有地)로서 사용료가 없다. 사유지(私有地)인 공성장, 화령장은 시장 관리자가 소유자에게 보통 소작료와 같이 납부하며, 중모장은 점포 1개소에 대해 매 장마다 2전 5리를 징수한다.
  장내에서의 이자를 보면 상주읍장은 100円에 대해 日步 10錢 혹은 15錢, 공성장, 화령장, 낙동장은 月 4分, 중모장은 100円에 대해 月步 5円의 이자가 일반적이다.
  시장 조사 당시 함창장에 대한 조사 자료는 없는데 개략적으로 소개된 자료를 보면 상주군 지역의 함창, 이안, 공검, 은척, 사벌면과 문경군 지역의 산양, 호계, 영순, 가은, 호서, 농암의 각 면이 장시 경제권으로서 5일장에서 연간 거래액(取引高)가 30만원내외에 달한다고 하였다. 著藏拾達, 慶北沿線發展誌(第五節 新興の咸昌面), 群書堂書店, 1931. 211쪽


Ⅵ-3. 일본인의 상권 잠식
  일제강점기 때에는 사회, 경제의 대부분은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나 실제 일본인에 의해 시장경제가 운영되어 온 근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경제적 통계자료는 확보하기 어려워 일제강점기의 인구와 일본인의 직업 통계 자료를 통해 일본인의 상주 시장 경제 잠식 현황을 일부분이라도 유추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인구의 변이를 살펴보면 면지역을 제외한 상주시내의 인구는 1911년에는 6천여 명에서 1938년 1만 4천여 명으로 2.3배가 증가한다. 이 중에서 일본인은 380명에서 1,183명으로 3.1배가 증가된다. 일본인의 비율이 가장 높을 때는 1924년으로서 인구수의 13%가 넘는다. 1933년에 가장 많은 일본인이 거주를 하였으나 그 이후는 점차 줄어들었다. 상주시내 인구 중에서 일본인의 거주 비율이 가장 높을 때에는 1913년부터 1933년까지 10여 년간으로서 일본인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이때가 일본인에 의해 상권 잠식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년도별

상주읍내 인구

조선인

일본인

외국인

인구수

비율

인구수

비율

인구수

비율

1911

5,924

5,530

93.3

380

6.4

14

0.2

1912

5,854

5,330

91.0

508

8.7

16

0.3

1913

5,395

4,829

89.5

549

10.2

17

0.3

1914

6,189

5,360

86.6

806

13.0

23

0.4

1915

6,618

5,816

87.9

774

11.7

28

0.4

1916

6,978

6,174

88.5

771

11.0

33

0.5

1917

7,260

6,485

89.3

734

10.1

41

0.6

1922

8,663

7,675

88.6

922

10.6

66

0.8

1924

8,658

7,442

86.0

1,144

13.2

72

0.8

1925

9,639

8,466

87.8

1,086

11.3

87

0.9

1933

11,911

10,611

89.1

1,242

10.4

58

0.5

1934

12,328

11,108

90.1

1,171

9.5

49

0.4

1935

13,260

12,011

90.6

1,181

8.9

68

0.5

1936

13,590

12,314

90.6

1,187

8.7

69

0.5

1938

14,144

12,960

91.6

1,183

8.4

1

0.0

 표 13. 상주 민족별 인구(1918년)


  한편 1917년 상주군의 일본인 직업 비율을 보면 전체의 인구 중에서 농업이 26%, 상업/교통업의 인구 비율이 34%이상으로서 장시의 상권 또한 일본인이 상당부분 잠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구분

농업

공업

상업/

교통업

공무/

자유업

기타

유업자

무직/

미신고

합계

호수

(%)

90

25.4

69

19.4

99

27.9

81

22.8

11

22.8

5

1.4

355

 

 

(%)

302

26.0

183

15.7

411

34.4

221

19.0

35

3.0

10

0.9

1,162

주업자

94

52

66

11

131

89

74

16

15

20

0

0

 

기타자

21

11

5

2

24

27

7

6

0

0

0

0

무업자

53

71

37

62

55

115

28

90

0

0

0

0


 표 14. 상주의 일본인 직업, 남녀별 통계(1917년 말)

Ⅶ.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장시의 비교
  조선시대(구당지, 1786)와 일제 강점기(교남지, 1937)의 현재 행정구역 내 150여 년 사이의 장시를 비교해 보면 구당지 함창지역 장시 자료가 제외된 자료이다.
에는 10개의 장시가 있었고, 교남지(함창지역 제외)에는 7개의 장시로서 3개의 장시가 줄어들었다. 이는 철곡, 삼탄, 은척, 낙원의 4개장이 사라지고 신암장이 신설된 것이다.
  장시일은 중모장이 조선시대 4.9일이 일제강점기에 2.7일로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5일장의 장날은 모두 음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장날은 1938년 1월 1일부터는 음력의 장날을 양력으로 바꾸었다. 동아일보. 1937년 12월 28일, 7면 5단, 尙州 市場도 陽曆으로 施行
    [상주] 경북 상주군에서도 일반 민중에게 생활개선을 여행하는 동시에 시대에 순응하야 시일도 소화 十三년 一월 一일부터 전군 각 시장에 양력시일로 변경 실행한다는데 구력 시일을 원칙으로 하야 그대로 양력 시일에 적용하며, 음력 말일의 시일이면 양력에도 말일 개시라 하며, 군내 각시장과 시일변은 다음과 같다 한다.
    尙州邑市日, 陽曆 2日, 7日, 12日, 17日, 22日, 27日
    洛東市日, 陽曆 5日, 10日, 15日, 20日, 25日, 30日(大月에는 31日)
    功城市日, 陽曆 1日, 6日, 11日, 16日, 21日, 26日
    咸昌市日, 陽曆 1日, 6日, 11日, 16日, 21日, 26日
    靑里市日, 陽曆 3日, 8日, 13日, 18日, 23日, 28日
    化寧市日, 陽曆 3日, 8日, 13日, 18日, 23日, 28日
    牟西市日, 陽曆 4日, 9日, 14日, 19日, 24日, 29日(平年) 2月에는 28日
 즉 음력 1.6일장은 양력 1.6일에 장이 서는 것이다.

구 분

장시수

1.6

2.7

3.8

4.9

5.10

구당지 초책

(1786)

10

(12)

功城場

邑場

鐵谷場

長蚣場

化寧場

三灘場

丹密場

中牟場

銀尺場

洛東場

洛原場

山陽場

교남지

(1937)

7

(11)

功城市場

咸昌市場

尙州市場

中牟市場

柿巖市場

新岩市場

靑里市場

化寧市場

南面市場

舊鄕市場

洛東市場

 표 15. 상주 장날 비교

  시장의 개시일은 각 시장에 따라 일정하지 않지만 대개 5일마다 개시하고 방법은 그 부근의 시장을 순환하면서 개시하는 것이 상례이다. 대부분 5일장으로서 상인(行商人)은 각 시장을 순환하면서 행상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전체 23개를 장시가 열리는 개장일에 따라 노선을 연결해보면 장시를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의 이동 경로와 장시의 번성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림 8]과 같이 가장 번성했던 지역은 상주읍내장이고 함창, 중모, 화령, 은척장 순서로 번화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각 장시와 장시 사이의 거리는 10~46㎞이며, 평균 23㎞(58리)정도 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읍내와 은척장이 번성한 반면 일제강점기에는 상주읍내와 함창 쪽으로 장시활동이 활발하여 경제의 중심지가 이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8. 개장일 현황도

Ⅷ. 현대의 시장(市場) 변천
  시장은 공설과 사설시장으로 분류되고, 공설시장에는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으로 분류되었다. 해방이후의 시장 자료는 1966년부터 나타나는데 상주시청 홈페이지 e-Book의 통계 연보를 기준하였다.
 연도별 장시의 변화는 다음 표와 같으며, 그 이전의 자료는 확보할 수 없다.

구분

총계

공설시장

상주

함창

사벌

중동

낙동

청리

공성

외남

내서

모동

모서

화동

화서

화북

외서

은척

공검

이안

1966

21

1

1

1

1

3

1

1

 

1

1

1

1

1

3

1

1

1

1

1967

28

2

2

1

1

4

1

2

 

1

2

1

1

2

3

1

1

2

1

1968

~72

21

1

1

1

1

3

1

1

 

1

1

1

1

1

3

1

1

1

1

1973

~74

23

3

1

1

2

3

1

1

 

1

1

1

1

1

2

1

1

1

1

1976

22

3

1

1

1

3

1

1

 

1

1

1

1

1

2

1

1

1

1

1978

22

4

1

1

1

2

1

1

 

1

1

1

1

1

2

1

1

1

1

1980

23

3

1

1

1

2

1

1

 

1

1

3

1

1

2

1

1

1

1

1984

17

2

1

1

1

2

1

1

 

1

 

1

1

1

1

1

1

1

 


 표 16. 시장의 변화


 1973년에는 23개의 시장이 있으나 상주에 사설시장 2개가 증가되고, 화북에 공설시장 1개 감소되고 이안에는 정기시장 1개가 감소된 반면 상설시장 1개소가 증가하였다.
 1974년에는 이안면의 상설시장이 정기시장으로 되었다.
 1976년에는 중동 정기시장이 2개에서 1개로 감소되었다.
 1977년에는 전체 시장의 개수는 22개로 동일하나 상주장이 2개에서 1개가 감소하여 사설시장 1개가 추가 되었으며,
 1978년에는 상주에 정기시장이 1개 늘어나고 낙동이 3개에서 2개로 1개 줄어들었다.
 1980년에는 상주에 정기시장이 1개 줄어 21개가 되었고,
 1983년에는 내서가 1개 줄어 전체 21개가 되었다.
 1984년에는 상주 정기시가 없어지고, 이안장에 감소되어 전체 17개가 되었으며, 이 때 부터 상주장은 상설시장만 있게 되었다.
 1985년에는 상주의 공설(정기) 시장이 없어지면서 사설시장만 남게 되었으며, 공설(정기) 15개, 사설(일반) 1개로서 전체 16개가 되었다.
 1986년에는 사벌 1개, 내서장 1개가 없어져 전체 14개가 되었으며,
 1987년에는 외서장 1개가 없어지고 화북장 1개가 늘어 14개가 되었다.
 1988년 시장은 교통의 발달로 인해 5일장이 점차 쇠퇴하여 20개 장시 중 9개는 폐지되고 11개만 유지되었다. 상주군행정지, 1988, 구일출판사, 285쪽

시장명

위 치

개설일

면적()

장날

낙 동

낙동 낙동

1937. 5.10

4,443

510

청 리

청리 월로

1938. 3.25

5,412

38

공 성

공성 옥산

1958. 4. 8

7,230

16

용 호

모동 용호

1914.12.15

6,420

49

삼 포

모서 삼포

1962. 3. 8

6,195

38

화 동

화동 이소

1965. 2. 1

15,812

510

화 령

화서 신봉

1965. 2. 1

12,205

38

화 북

화북 용유

1965. 1.15

1,983

49

은 척

은척 봉중

1968. 4. 9

1,617

49

공 검

공검 양정

1951.12.10

13,022

510

함 창

함창 구향

1951.12.10

11,669

16


 표 17. 정기시장(1988년)

시장명

위 치

폐지일자

면적()

낙서장

내서면

1983. 7.22

2,975

사벌장

사벌면

1984. 8. 4

3,693

상촌장

낙동면

1984. 8. 4

2,314

세천장

상주읍

1984. 8. 4

8,979

아천장

이안면

1984. 8. 4

836

북부장

상주면

1985.11.12

14,512

평온장

화북면

-

1,653

용화장

화북면

-

1,322

신암장

중동면

-

2,846


 표 18. 용도 폐지된 시장(1988년)

 1989년에는 함창, 사벌, 중동, 낙동, 청리, 공성, 모동, 모서, 화동, 화서, 화북 2, 은척 1, 공검 1개로서 상주군지역은 14개가 되었다.
 1990년에는 사벌장, 1991년에는 청리장이 없어져 13개가 되었다가 1996년까지는 14개로 유지되었다.

구분

정기시장

일반시장

개소

부지

건물

개소

부지

건물

개소

부지

건물

14

83,117

19,037

12

67,936

2,602

2

15,181

16,435

함 창

1

12,872

657

1

12,872

657

 

 

 

중 동

1

873

 

1

873

 

 

 

 

청 리

1

3,493

10

1

3,493

10

 

 

 

공 성

1

5,788

509

1

5,788

509

 

 

 

모 동

1

3,642

188

1

3,,642

188

 

 

 

모 서

1

6,490

94

1

6,490

94

 

 

 

화 동

1

12,057

185

1

12,057

185

 

 

 

화 서

1

16,013

497

1

16,013

497

 

 

 

화 북

2

3,574

7

2

3,574

7

 

 

 

은 척

1

1,481

455

1

1,481

455

 

 

 

화 남

1

1,653

 

1

1,653

 

 

 

 

남 원

1

11,244

15,147

 

 

 

1

11,244

15,147

동 성

1

3,937

1,288

 

 

 

1

3,937

1,288


 표 19. 시장 현황(1996.12.31)                          개소, ㎡

 1997년에는 화동과 공검장이 없어져 12개가 되었고, 전체 부지면적은 67,031㎡, 건물 연면적은 18,475㎡가 되었다.
 2000년에는 청리장이 없어져 11개소, 전체 부지면적 48,471㎡, 건물 연면적 18,472㎡가 되었으며, 2001년에는 중동장과 화남장이 없어져 9개소, 부지면적 45,945㎡, 건물 연면적 18,347㎡가 되었다.
 2003년에는 개소수는 같으나 건물 면적만 18,382㎡로 변경이 있었으며, 2007년까지 동일하게 유지되어 오다가 2010년에는 함창, 공성, 화서, 은척, 남원도 5개소 대지면적 34,871㎡, 매장 502개 7,388㎡로 2012년까지 유지해 왔다.

시장명

개소

점포수

면적()

매장면적

대지면적

5

502

7,388

34,871

함 창

1

22

663

12,872

공 성

1

7

610

7,038

화 서

1

42

237

2,236

은 척

1

20

306

1,481

남 원

1

411

5,572

11,244


 표 20. 시장현황(2012년말 현황, 통계연보 자료)

 2013년부터는 인정시장이 전통시장으로 변경되고 남원동에 1개소가 증가되어 현재의 전통시장은 다음과 같다.

시장명

개소

점포수

면적()

매 장

대 지

6

301

11,678

43,056

함 창

1

16

663

12,872

공 성

1

4

610

7,038

화 서

1

45

-

2,236

은 척

1

22

238

1,481

남 원

2

214

10,167

19,429


 표 21. 시장현황(2013년말 현황, 통계연보 자료)

 화령장
  화서면 신봉리 132번지 일대이다. 고려 때부터 중화(中化)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번화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령장(華令場)이라 하다가 뒤에 화령장(化寧場)으로 지명을 따라 바꾸었다고 한다. 공설시장으로는 1965년 2월 1일 상주군에서 인가를 받아 개설되었고, 매월 끝자리 숫자가 3, 8일이 되는 날이며, 시장의 면적은 12,205m²이다. 상주지명총람, 화서면조

 함창장
  함창읍 구향리 122-번지 일대(옥자걸)이다. 1952년도에 개설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시장의 기능은 조선시대부터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12,000㎡의 면적에 100여 개의 노점이 장사를 할 수가 있고, 매월 끝자리가 1,6이 되는 날짜에 선다.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1951년 구향리에 당시 연못(관남지)을 매립하여 시장을 개설하였다. 상주군, 1988, 행정지, 409쪽

 중모장
  용호리 49번지 창말 북쪽에 1914년 12월 19일 개설되어 매달 끝자리 숫자가 4,9일이 되는 날 장이 서고 있다. 면적은 6,420m²다.
 토전장
  토전나루 가에 서던 새로 생겼던 장. 신암리 220번지에 1957년 7월 9일 장이 개설되어 매달 끝자리가 4,9일이 되는 날 열렸으나, 제 기능을 보이지 못하다가 1990년 11월 6일 공식 폐쇄되었다. 면적이 2,846m²였다.
 사벌장
  1953년 매호 2리에 개인 부지 800여 평에 상인이 임대하여 점포와 노점을 마련하고 4,9일 장이 개설되었다. 상주와 풍양인이 모여 성시를 이루었다. 공검장의 영향으로 점차 기능을 상실하였다. 상주문화원, 사벌지, 1999. 188쪽

  1962년 7월 10일 사벌면 덕담리 440번지외 2필지 부지 4,030평에 덕담리 시장을 개설했다. 부지는 덕담리 유개우(柳改祐)가 기증을 하였으며, 점포 2동 40평을 1960년 5월 20일부터 7월 10일까지 건립하여 시장을 개시하였다. 건립비는 10만원이 투입되었다. 상주군, 1988, 행정지, 420쪽

 화동장
  1958년 이소리에 부지 4,500평, 장옥 4개소로 공설시장을 개설하였다. 1979년에는 장옥 4동을 보수하였다. 앞의 책, 495,497쪽

 은척장
  1975년 봉중리에 군비 지원을 받아 장옥 4동을 건립하여 신 시장을 개설하였다. 앞의 책, 531쪽

 공검장
  함창시장까지 거리가 8㎞, 상주 12㎞로서 주민생활에 불편이 많아 1953년 공검지 부지 1만여 평을 구입하여 시장을 개설하였다. 앞의 책, 538쪽


Ⅸ. 지명에 나타나는 시장
  지명에는 그 당시의 생활상이 지명으로 유래되는 특성이 있다. 장시의 경우에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특수성이 있는 장소로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지명에 나타나는 장시 관련 지명을 조사해 보면 18개 읍면 중에서 외남면에는 장시 관련 지명이 없고 나머지 17개 읍면에서는 31개소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 지명은 농촌지역의 시장의 특성상 수요가 있을 때 잠시 장이 열리다가 수시로 없어지거나 새로운 시장이 개설되어 구시장(舊市場)으로 알려져 있는 곳도 포함되어 있다.

구 분

상주

사벌

중동

낙동

청리

공성

외남

내서

모동

모서

화동

화서

화북

외서

은척

공검

함창

이안

지명수

31

2

2

3

2

1

3

-

1

1

1

1

2

3

4

1

1

1

2


 표 22. 시장 지명 현황                                  (개소)


  우시장(牛市場)은 공성과 상주 2곳이며, 전문 점포 형식으로서 상주시내에는 곡물전, 닭전, 목물전, 포목전, 쌀전, 어물전, 옹기전, 자리전, 잡화전, 채소전, 삿갓전이 있고, 산촌지역인 중동과 외서의 사기그릇을 구워 파는 사기점, 놋그릇을 만들어 파는 화서의 놋점, 이안의 나무 등 땔감을 파는 신탄전의 지명도 나타난다. 이러한 지명은 현재는 없으나 어느 시기에 시장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명으로서 지역 단위로 소규모의 시장이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렸음을 알 수 있다. 각 읍면별로 나타나는 시장의 지명은 다음과 같다. 조사된 지명은 한국지명총람(5) 경북편2, 한글학회(2001)에 조사된 지명과 행정읍면동을 기준하였다.


 공검(1)
  공검장(恭儉場) : 양정리에 있는 시장으로서 양정장이라 한다.
 공성(3)
  구시장(舊市場) : 옥산리 서쪽, 산현옥산(山玄玉山)으로서 산현리 북쪽에 있는 산현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전에 시장이 있었는데 옥산동으로 옮겼다.
  우시장(牛市場) : 옥산역 북쪽에 있는 쇠장이다.
  신시장(新市場) : 공성 지서 북동쪽에 새로 생긴 시장이다.
 낙동(2)
  장  터 : 낙동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장터 : 노루실 동쪽에 있는 들인데 장이 섰다고 한다. 노루실은 강두백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강두백은 아름마로서 장곡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내서(1)
  갈방장터 : 평지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초엽에 생겼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순 갈대밭이었다고 하며, 길옆에 장이 섰다고 한다.
 모동(1)
  중모장(中牟場) : 용호리 중간 마을 북쪽에 있는 장으로서 4,9일에 장이 선다.
 모서(1)
  모서장(牟西場) : 사제 남쪽에 있는 장으로서 3,8일에 선다. 사제(社堤)는 삼포리이다.
 사벌(2)
  사벌장(沙伐場) : 덕담리 장터에 1,6일 장이 선다.
  매호장(梅湖場) : 매호 장터에 4,9일 장이 선다.
 상주(2)
  공익시장(公益市場) : 상주장 또는 상주읍장으로서 남문 안에 있으며 2,7일 선다.
  ­ 곡물전 : 쌀전이다
  ­ 닭  전 : 상주장 서쪽에 잇는 마을로서 닭전이다.
  ­ 목물전 : 상주장 서쪽 닭전과 연해 있는 마을로서 포목전이다.
  ­ 쌀  전 : 곡물전으로서 채소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어물전 : 시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어물전다.
  ­ 옹기전 : 시장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옹기전이다.
  ­ 자리전 : 시장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자리전이다.
  ­ 잡화전 : 시장 중간에 있는 마을로서 잡화전이 많다.
  ­ 채소전 : 시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채소전이 많다.
  ­ 소  전 : 성동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남성리 상주장의 소전이 있다.
  ­ 삿갓전 : 성 아래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삿갓전이 있었다.
    새장터 : 박등산 북쪽에 있는 들로서 전에 장이 섰다고 한다. 박등산(迫登山)은 논실(외답동) 동쪽에 있는 산이다.
 외서(4)
  장터거리 : 가곡리로서 버럼배미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장이 섰다.
  백원장터 : 외서면 백원리에 있는 장터이다.
  새장터 : 절골과 붐땀골 사이에 있는 새로 된 장터이다. 외서시장으로 세천(가른다리)의 남적시장을 말함이다.
  사기점 : 신점리(新店里)이며, 도재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기점이 있었다.
 은척(1)
  은척장(銀尺場) : 봉중리의 은척시장이다.
 이안(2)
  장터골 : 사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나뭇꾼들이 장을 이루던 곳이다. 사실은 대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수청거리 : 장터라고 하며, 선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술청이 있었고 장이 섰었다. 선동은 안룡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중동(3)
  사기점 삐알 : 가무골에서 신암리 신암으로 가는 고개인데 사기점이 있었다.
  신암장 : 토전장이며, 토전나루 옆에 새로 생긴 장이다.
  새장터 : 주막걸로서 월방 남쪽에 있는 들이다
 청리(1)
  청리장(靑里場) : 청리면 동쪽에 있는 시장으로 3,8일 선다.
 함창(1)
  함창장 : 읍장 또는 함창읍장으로서 옥자걸 동쪽에 있는 함창면의 시장이다. 옥자걸은 새동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옥터가 있었다고 한다.
 화동(1)
  시장(市場) : 이소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화동장이 섰다.
 화북(3)
  화북장(化北場) : 화북장터, 장터라고 하며, 용유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1953년 4월 29일 시장을 설치했다.
  운흥장(雲興場) : 용화리에 있는 장으로서 예전부터 있었는데 없어졌다가 1963년 다시 열어 1,6일 선다.
  평온장(坪溫場) : 평온 서쪽 끝 지서 앞에 있는 시장으로서 1964년 1월 6일부터 열렸다.
 화서(2)
  통점 : 동점, 동점리라고 하며, 놋점이 있었다. 명통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명통은 금곡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화서면 상곡리이다.
  화령장(化寧場) : 신봉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서 화령시장이 선다.


Ⅹ. 인근 지역의 시장(市場)
  문경장은 1930년대 개설되었으며, 주월산 아래 위치하여, 산촌으로 구획된 일정한 시장 구역을 형성하고 있어 시장이 활발한 편이었으나, 이농현상 등 농촌인구의 감소로 인해 현재는 기능이 쇠퇴되었다.
  가은장은 조선시대부터 시장을 형성해 오다가 1981년 정식으로 시장 개설허가를 받았으며, 198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하여 이곳의 광산이 폐광되면서 그 기능도 쇠퇴하여 지금은 오전 한 때 잠깐 동안 시장이 형성되고 있으며, 2,7일장이 서고 있다.
  동로장은 조선시대부터 ‘벌재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며, 근대에는 1965년 2월 개장했다. 산간오지로서의 독립적인 기능을 유지하여 충북 단양군까지 행상 구역이 되었었다. 3,8일에 장이 선다.
  농암장은 산간농촌을 배경으로 60~70년대에는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으나 1980년 수해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1981년도에 개설허가를 받았다. 5,10일 장이 선다. 현재의 문경시 장시는 다음과 같다.

구분

16

27

38

49

510

문경지

(172)

진남

(마성 진남)

읍내

(문경)

유곡

(유곡)

호남

(점촌 흥덕)

가은

(가은 왕능)

읍외

(문경)

송면

(농암 삼송)

농암

(농암 농암)


 표 23. 문경의 장날


  김천은 육로의 주요 교통로로서 상업이 발달하였다. 도의 경계지역으로서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3도의 상인이 모여 들어 김천장은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대구, 평양, 전주, 강경과 함께 전국 5대 시장으로 꼽혔으며, 지금도 3도의 산물이 모여들어 삼도시장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김천, 지례, 대덕 등의 정기시장만 남았다.

구분

16

27

38

49

510

금산군지

(1899)

-

아산

(천하)

-

읍내

추풍

(황금소)

김천

(감천)

경북향토

자료지

-

남면

개령읍

아산

이수천

금산읍

추풍

지례읍

김천


 표 24. 김천의 장날


Ⅺ. 맺는말
  시장은 인간이 채집과 수렵생활을 하던 선사시대 이후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상행위를 발전시킨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앞서 시장의 역사와 유래를 알아보고 상주에 시장이 최초 언제부터 개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와 근대의 자료를 통해 조선시대의 시장을 유추해보고, 현대시장의 변천과정을 조사해 보았다.
  또한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 때 시장에서 거래되었던 품목과 거래 가격과 장시의 수는 필요에 따라 시장이 형성되고 폐지되는 사례가 빈번하여 일관된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1920년 때의 행상구역은 상주를 포함한 김천시, 보은군, 문경시, 의성군, 예천군. 구미시, 영동군의 8개 시군으로서 이 구역은 상주의 시장경제 생활권이 된다.
  시장(市場)이란의 용어 사용은 조선시대 장시(場市)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장시(場市), 시(市), 시장(市場)으로 혼용하다가 1938년 이후부터는 시장(市場)의 용어로 정착하게 된다.
  시장의 수는 현재의 행정구역 내에는 11~13개로서 가장 번성했던 곳은 상주 읍내 장이고 함창, 중모, 화령, 은척장 순서로 번화하였으며, 각 시장 사이의 거리는 10~46㎞이며, 평균 23㎞(58리)정도 이다.
  가장 번성하였던 상주 읍내 장의 위치 변경은 처음 읍성 내에서 관아의 동서에 위치하다가 점차 관아 앞쪽으로 이동되고 시가지의 도시화와 시내 인구 증가 등에 따라 시내가 번화해 지면서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가축시장은 위생상의 문제로 현재의 청과물시장으로 그 밖의 표목, 잡화, 소채류 등은 현재의 중앙시장 위치로 이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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