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7호(2017년)

상주학. 동양적 사유(思惟)와 정형 시법(詩法)

빛마당 2018. 2. 11. 17:12

상주의 시인들

동양적 사유(思惟)와 정형 시법(詩法)

-민주목의 작품세계-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박 찬 선

 

 

목 차

 

 

 

 

 

 

 

들다 292

 

1. 농법이 시법이다 295

 

2. 나무를 노래하다 300

 

3. 자적(自適) 달관(達觀)의 시학 306

 

4. 추억을 되새기다 311

 

맺다 314

상주의 시인들

동양적 사유(思惟)와 정형 시법(詩法)

-민주목의 작품세계-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박 찬 선

 

들다

시조를 짓는 시인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시조는 우리의 혼과 가락이 배어 있는 정통 민족문학이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 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를 쓴다는 일이 얼빠진 일 같아서 왠지 주제넘은 일 같이 생각되었다. 이 땅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기본으로 시조만은 꼭 익혀야 된다고 여겼다. 1970년대 중반 내가 시로 등단을 하여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 19192016)선생을 뵈었더니 박 선생은 우리 식구인데 외도를 했네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시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신 것이지만 시조를 접할 때마다 자꾸만 집히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시조를 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민병덕 시인도 그중 한 사람이다.

민주목(병덕) 시인은 오랫동안 상주라는 문학공간에서 함께 해온 시인이다. 타고난 우리가락의 시인이다. 그의 생활의 이모저모를 가까이서 보아온 사람으로서 이번 시조집산 세월의 발간은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다. 이제는 농사를 접었지만 이태 전만 해도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 시인이었다. 농사에는 농법(農法)이 있다. 생명을 귀하게 다루는 농법에는 진실과 정성이 기본이다. 때를 놓치면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수확으로 연결된다. 근면은 필수적이다. 민 시인에게 있어서 농법(農法)은 곧 시법(詩法)이요, 시법이 곧 농법이다. 씨 뿌리고, 김매고, 농약치고, 북돋우고, 기다려서 거두는 일이 언어를 다루는 시작(詩作)이나 다름이 없다. 영농의 현장에서 그는 시를 쓴다. 일을 하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비료포대에 투박하게 쓰거나 아니면 머리에 입력을 해두기도 한다. 막걸리 잔을 기우리며 머리에 입력된 시를 읊기도 하고 시골 장터의 배추씨 문서 같은 예의 누런 거름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작품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석한 기억력과 치열한 시적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류에 휩쓸리어 흉내 내기를 한다거나 경박한 정서에 머물지 않고 자기 모습대로 깊이와 무게를 지닌 시를 보여주었다. 심중에서 거듭 거듭 장고를 거친 뒤에야 내놓는 작품은 완제품이다. 토실토실한 가을 타작마당의 알곡처럼 잘 영글어 있다.

이렇게 자기만의 세계를 열고 닦아온 시조의 실력군인 민시인은시조문학추천(1984),매일신문신춘문예당선(1987)에 이어월간문학신인작품상,시세계신인상(2015)을 두루 차지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두르지 않고 황소걸음 걷듯 우리 것 우리 가락을 즐기면서 생활해온 결과이다.

수확한 농작물의 갈무리가 중요하듯 시 작품도 차곡차곡 쟁여둬야 할 텐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조집 발간을 채근하고 재촉했더니 이래저래 주워 모았다며 원고를 보내왔다. 그런데 정작 작품을 받아놓고는 바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너무나 큰 산이기에 한 모서리만 들쳐 낼 것 같아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잡을까 망설여졌다.

 

백수선생은시조창작법에서 시조에 대한 해석을 유(), (), (), ()로 풀었다. 한 번 흘리고, 한 번 감아 돌고, 한 번 마디 짓고, 그 다음에 풀어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마치 기, , , 결의 시상의 전개로 물 흐르는 것처럼 가락과 멋을 지녀야 함을 일렀다. 이러한 내용상의 기법과 함께 정(초장), (중장), (종장)의 정형성을 갖춤으로써 탄탄한 구성상의 특징을 지녔다. 시조에 대한 일반론을 가늠하며 민시인의 작품을 읽다가 그의 시관(詩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시는

미인이다

내 혼불 타 올리는

 

뿐이랴

늘 처녀지

우주의 벌()인가요!

 

오늘도

가슴을 쓸며

삼가 심는 붓끝 목숨. -붓끝 목숨전문

 

민 시인이 시조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는 시조를 미인으로 은유했다. 단순히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혼불 타 올리는미인이다. 영혼의 불을 지펴 혼이 살아있는 미인. 혼이 없는 미인은 차가운 마네킹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혼은 일차적으로 살아있음의 증표요 민족혼이다. 참다운 존재에 대한 이념이요, 진리를 지키는 얼이며, 미인(시조)을 미인으로 아름답게 하는 근거이다. 그 뿐 아니라 처녀로서 우주의 벌이라고 했다. 상상력으로도 미치지 못할 한없이 넓고 평평한 우주의 들, 사람이 들지 않은 원시적 미개척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깨끗하면서도 광활한 들에 가슴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목숨의 씨앗을 심는다. 혼불이 깃든 미인이자 미개척의 들에 생명을 다해 심는 시조는 음풍농월의 자연예찬이나 사랑과 이별의 일상적 정서나 존재의 탐구와 현실 인식 등 어떠한 주제라 할지라도 그의 시조에는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다. 뜨거운 시혼으로 우주를 품으며 전존재의 생명을 담는 그의 시조는 시원하고 유장하여 좀살스럽지 않다. 대가의 웅지가 넘친다.

 

 

1. 농법이 시법이다.

툭탁 툭탁 우수 수수

아버님 모습 떠오르고

 

낟알을 모을 때는

어머님 얼굴 젖어든다

 

까치야 왜 앉으려다 뜨나

몇 알 쯤 먹어도 좋을 걸

 

풍구 타고 모인 알곡

놀빛 받아 웃는 아기

 

아내랑 좋이 들이니

방 가득 황금이다

 

귀뚜린

울음 꾹 참는가

꽃이 피는 저녁차림 -콩 타작2. 3

 

가을 철 콩 타작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콩 타작에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기, 아내다. 채독에 두들기거나 도리깨질을 하면 튀어 오르거나 우수수 떨어지는 콩 타작마당에서 아버지 모습과 어머니 얼굴을 연상한다. 지난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콩 타작 하시던 전경을 떠올린 것이다. 콩 타작은 예나 이제나 다를 바 없다. 푸짐한 수확의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타작마당의 흥겹고 넉넉한 품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했다. 민 시인이 부모님에 대한 사친의 자세를 알게 한다. 부모님이 생전에 누렸던 농사의 보람을 훗날 자식도 느끼면서 부모님의 음우를 기린다.

그리고 토실한 콩알을 놀빛 받아 웃는 아기로 비유함은 그만큼 사랑스러움을 나타낸 것이며 아내와 함께 일하여 수확한 방안 가득한 황금의 콩과 꽃 피는 저녁차림이 즐거움으로 앉는다. 콩 타작은 이렇게 가족의 관계에서 따뜻한 인정을 담고 있다. 여기에 까치에게 몇 알쯤 먹어도 좋다는 각박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에 정이 간다. 나만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즐거움을 누리려는 공유가 따뜻하다. 일을 마치고 저녁차림을 대할 때 귀뚤이도 울음을 꾹 참아서 꽃이 피게 하는 배려가 사람과 곤충이 다르지 않다. 까치와 귀뚤이도 함께하는 상생의 정신이 스며있다.

 

벼농사로 부제가 붙은푸른 승리는 모 기르기, 모 심기, 벼 기르기, 건들마, 다시 병충해, 출수기, 등숙기, 벼 수확으로 이어지는 연시조다. 벼농사의 전 과정을 읊은 셈이다. 제목의푸른 승리는 평평하게 쓰레질한 논에 뼘 남짓 파릇한 모를이앙기로 심는 작업을 점령하는 푸른 승리로 표현했다. 그렇게 점령한 모심기의 기쁨은 건들마에도 벼는 자라나서 푸른 잎 춤추는 벼들이 만당궁녀로 그려져서 음 칠월 논가에 서니/ 문득 나는 왕이 되기도 한다. 호방한 농부의 기개가 엿보인다.

 

정한 시 기회 받은

산고의 백일장이다

 

고이 지킨 지순 맘

풀려 놓는 벼꽃향기

 

하늘 문

활짝 열어놔

차등 없는 해님사랑 -6. 출수기 -이삭 팰 시기

 

농사는 사랑으로 짓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생장을 살펴보고 이상이 있나 없나를 확인한다. 배탈 난 사람 화장실 들락거리듯 해야 풍작을 기대할 수 있다. 벼의 장닢이 치솟아 오르고 여치 배처럼 봉긋하게 배흘림이 되어 때가 차야 이삭은 일제히 패기 시작한다. 민 시인은 벼 이삭 패는 것을 산고의 백일장으로 나타냈다. 새 생명의 출산에는 고통이 따른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가야한다는 쌀미()자의 상징. 순산이 아닌 산고를 겪음으로써 해산의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의인적 접근이 절창이다. 그것도 같은 시간에서 경쟁을 하는 백일장이라니 그의 예리한 관찰과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러한 인간적 감성에 지순한 마음으로 풀어내는 향기와 차등 없는 해님 사랑으로 자연의 은혜와 섭리를 기린다. 자연농법은 순리에 의한 것이며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이치를 읽게 한다. 그래서 알알이 익는 날은/내 마음도 따라 익고//이삭으로 영글 때는/믿음만 가득해라고 벼와 나, 자연과 내가 따라 익는 합일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에 소중한 것으로 벼 수확임을 내세우고 땀방울 먹힌 알들/백배의 내 사랑을노래한다. 알차게 이삭 익기만을 기원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벼농사는 사랑농사이다.

 

그대들 눈을 떠야

아침 해 둥실 뜨고

 

모시듯 삽을 들고

속삭이듯 일을 하는

 

하느님

아들임으로

하늘 아래 들로 사는

 

가꾸어 풍년 들어도

칭찬은 시절에 두고

 

뿌린 그 땀의 결실

거둠이 혹 적더라도

 

하늘 땅

조상님에게는

감사함에 푸짐했다

 

솟는 해 저녁놀은

그네들의 꽃밭이고

 

이슬길 서리 길은

성스러운 복되는 길

 

먼 하늘

둘러선 청산은

, 그들의 성전(聖殿)일래 -농군찬가

 

일찍 깨는 새는 굶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농부가 그렇다. 이른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들에 가는 부지런한 농부. 해가 떠서 농부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깨어나야 비로소 해가 뜨는 역발상의 이치가 거슬리지 않는다.

이제 농부에게는 기계화된 농기계뿐 아니라 일상 사용하는 농구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 삽을 모시는 일은 경건한 자세에서 비롯한다.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겁게 일을 하고 저문 냇물에 삽을 씻고 어둠살과 함께 귀가하는 농군. 농군도 하느님이 점지한 아들이기에 들에 살면서 개천(開天)과 함께 풍년을 기원한 것이 아닌가. 들을 걸우어 농사지으며 사는 순박한 흙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따라서 그의()씨 뿌려/ 가꾸며/거두며/들락날락하는 로서 생활 속의 들이다. ‘들이여!/죽도록 불러도/‘인 줄 모르지만// 진리의 산지(産地)/그대로가 열린 성전(聖殿)’으로 광야에서 방황했던 성인을 떠올리기도 한다.

땀 흘려 가꾼 풍년농사가 인위적인 것이지만 그 공덕을 시절(時節)에 두는 헌사와 배려가 농자대본(農者大本)을 수행하는 자세답다. 그것은 외경(畏敬)의 정신에서 온다. 환웅이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세상에 뜻을 펴듯 설령 결실이 적어도 투정하지 않고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님께 감사할 줄 아는 감은(感恩)의 철학을 보여준다. 제천(祭天)과 제사(祭祀)는 우리 겨레의 오랜 경배사상(敬拜思想)이다. 전통윤리에 대한 존숭(尊崇)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솟는 해와 타는 노을이 농부들의 꽃밭이고, 이른 아침의 이슬 길과 차가운 서리 길이 복된 길이며, 먼 하늘과 청산이 성스러운 전당이라는 웅혼한 자연관이 압권이다. 어려운 길이 오히려 복된 길로 생각하는 긍정적 사고가 신뢰감을 준다. 광활한 시야와 경건한 정신이 대자연을 품에 안는 바탕이 되고 있다. 농사는 자연을 거슬리고는 지을 수 없다.

농군찬가는 인간찬가이며 자연찬가이다. 민 시인의 시 세계가 왜소하지 않고 편협치 않으며 유현한 사유와 심원한 영역을 개척함은 인간관과 자연관에서 비롯되었다.

 

2. 나무를 노래하다

나무는 아름답다. 나무는 저마다 개성이 있다. 나무는 스스로 아름다움을 가꿀 줄 안다. 나무는 어울려 산다. 나무는 한 자리에서 일생을 보낸다. 나무는 세상을 맑게 한다. 나무는 새들을 깃들게 한다. 나무는 향기롭다. 나무는 많은 열매를 단다. 나무는 속에 고운 문양을 그린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세월 속에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나무다. 민 시인이 읊은 나무는 어떨까? 그의 나무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생의 역마살(驛馬殺)

이젠 박힌 말뚝인가

 

몇 번을 손으로 쳐도

그냥 툭툭 소리 날 뿐

 

죽은 듯

죽은 듯 눈 감고

단전호홉 하는 걸까

 

그래도 꿈길은 만리(萬里)

발 뿌리나 뻗는 것을

 

한자리 지켜 온 삶

지심(地心) 원히 알아 얼려

 

저절로

솟치는 심기(心氣)

시방 두루 헤아릴 걸

 

짓궂은 계절이야

계절답게 풀어주고

 

야망이니 영생이니

그런 따위 모르는 너를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울이 되어 비추인다. -나무

 

만물은 유전한다고 한다. 늘 한 가지 모습으로 그냥 있질 못한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자연은 변화하고 순환한다. 무에서 혼돈으로, 혼돈에서 기가 나오며, 기가 변해서 형태를 이루고, 형태가 변해서 생명이 생겼다는 도가사상으로 보면 생명 있는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나무도 예외일 순 없다. 돌아다니며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역마살이 이제는 한 곳에 꽉 박힌 말뚝이자 죽은 듯 눈 감고 단전호홉을 하는 나무로 우의적 표현을 하고 있다. 단전호홉은 생명이 숨 쉼이다. 가장 중심에서 행해지는 생명운동이다. 땅속 깊이 뿌리 뻗어서 한 자리를 지켜온 삶은 땅의 마음 까지 꿰뚫어서 솟구치는 마음 기운이 사방에 두루 미친다. 나무는 지기(地氣)를 받아 생장의 기운을 얻는다. 그러기에 설령 변덕부리는 기상이변으로 제철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인정하며 탓하지 않고 순응하는 미덕을 지녔다. 그래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울이 되어 비추어주는 은혜를 입는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한다.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지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태양이 따가울까, 골짜기에 서면 물이 좋을까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은 없다.”는 이양하의 나무와 다를 바 없다. 여기에 야망도 영생도 모르는 나무와 더불어 어울려 살아가는 대우주의 섭리가 펼쳐진다. 야망과 영생은 인간이 가진 꿈이며 바람이다. 한없는 욕심과 영원토록 살겠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희원이다. 나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로 그냥 있을 뿐이다. 인간의 탐욕이 배제된 나무(자연) 그대로 그냥 있을 뿐이다. 나무는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알며 낙도(樂道)의 삶을 살고 있다.

 

가눠온 자존의 숲

가물대는 심지 위에

 

살 터진 빙점 찍어

날빛 새운 속앓이야

 

간간이 멧새들 와서

삼가 뽑는 은실가락

 

응달진 동장군이

매질하는 심술로도

 

꺾일 수 없는 고절(苦節)

고쳐 앉는 조선 선비

 

지난 날 흥겹던 영화

되짚어본 눈꽃이여

 

티 없는 오기를 품고

목숨 끝을 갈고 서도

 

저미는 생이 손이

꿋꿋이 몸 버터 본다

 

가슴속 다독인 불씨

질러보는 그날 환희 -겨울나무전문

겨울나무는 춥고 외롭고 쓸쓸하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도 자기의 모습을 흩트리지 않고 있다. 고고하게 자기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내면의 심지마저 무너지고 변절한다면 나무는 없다. 살이 터지고 의식이 가물대는 극한상황에서도 결코 굽힘이 없다. 그것이 나무의 자존이다. 설령 속앓이를 한다고 해도 간간이 멧새들이 와서 반짝이는 노래를 들려줌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나무와 새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새는 나무가 있음으로써 보금자리를 틀고 생존을 유지하며 나무는 새가 있음으로써 고통을 이길 수 있고 열락을 함께 할 수 있다. 흔히 날씨가 차가와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듯이(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동장군이 내습하여 횡포를 부린다고 해도 꺾이지 않는 절개를 지녔기에 조선 선비에 비유되었다. 선비는 의에 살고 의에 죽는다.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며 지조를 생명으로 삼는다. 선비정신을 지닌 겨울나무가 새하얀 눈꽃으로 누렸던 한때의 영화를 돌아보게도 한다. 흠이 없는 오기다. 그 오기가 목숨을 부지한다. 생이 손이 나서 아픔이 가중된다 할지라도 꿋꿋이 버텨내는 의기. 다독인 삶의 의지, 뜨거운 불씨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겨울나무가 고고하다.

자존, 심지, 고절, 선비. 오기 같은 시어는 인간의 성향을 나타내는 낱말들이다. 상대적으로 이면에 빙점, 속앓이, 동장군, 매질, 생이 손 같은 고통을 나타내는 낱말이 있다. 이로 하여 겨울나무의 초연한 모습이 돋보인다. 마치 밤이 어두울수록 낮이 밝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옹두리 울퉁불퉁

할아버님 손 닮은

 

숱한 아픔 삭히느라

속도 검게 섞었으리

 

뻥 뚫린

아득한 그 속을

하늘도 내려 기웃기웃

 

그래도 그 뚫린 만큼

겉몸도 살릴 줄 알고

 

뻗치는 가지와 잎

가늠하여 달 줄 알며

 

유정(有情)

세월을 엮으며

우리네 삶도 다 알아

 

언 물 녹아 흐르는 노래

그 음계에 젖는 뼈대

 

()더위 힘든 목숨들

숨 고르게 그늘 펴주며

 

서북풍

매섭게 칠 때엔

목관악기로 울려라 -느티나무전문

 

느티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좋아하는 나무였다. 마을 어귀에 심어서 동수나무로 삼기도 하고 관상수로서 사랑 받아온 나무였다. 더구나 속이 단단하고 나무결이 좋아서 가구재로 사랑받는 나무였다. 밑동이 아름드리가 넘고 무수한 잔가지를 펼치고 있는 오래 묵은 우람한 나무는 대부분 느티나무다. 성자다운 외경의 나무. 울퉁불퉁 튀어나온 옹두리가 마치 한평생 살아온 할아버지의 마디 굵은 손 같은 느티나무. 오랜 연륜을 쌓으면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어서 속이 검게 탔으며 구멍까지 뻥 뚫렸다. 죽을 것 같은데 표피만 살아서 끈질긴 생명의 실상을 보게 한다. 느티나무의 외형에서 아픔을 삭이고 내면으로 들어가서 다시 하늘도 내려와 기웃거리는 첫 수의 구도가 예사롭지 않다. 속도 검게 섞는 아픔에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하늘의 관심이 곧 자연의 웅혼한 사랑이 아닐런가. 여기에 뚫린 만큼 겉몸도 가꿀 줄 알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고태미(古態美)가 우리의 시선이 머물게 한다. 무정한 세월이 아닌 유정한 세월, 우리와 함께 해온 나무이기에 우리네 삶도 다 알고 있다. 우리 가까이에서 그늘을 지워 시원하게 여름을 나게 하고 봄이 오는 소리를 담아 무늬 지우는 단단한 뼈대며 잎 진 겨울에는 모진 바람과 함께 목관악기로 깊고 그윽한 선율을 자아내는 나무를 그리고 있다.

민 시인은 나무의 외관(外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관(內觀)을 봄으로써 시적 의미망을 확대하고 있다. 나무를 인격화하여 나무와의 교감하고 나무와 하나 되는 자연관. 나무와 하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인이 어울린 동양적 사유(思惟)의 극치를 보여준다.

어제 밤/통일이 됐다고/이산 저산 하얀 봉화를 올린아카시아, 동장군/그 오는 어귀에/황포(黃袍) 입고 서 있는은행나무, 먼 새봄/ 몸으로 외우며/나이테만 엮습니다//나목과 하얀 맘/ 하얀 얼굴/물들고 싶은 생각//그리움 빛으로 터져/온 마을/화안하다//배꽃이 있다.

 

 

3. 자적(自適) 달관(達觀)의 시학

가난도 잘 뫼시면

명당쯤 되는 갑다

 

정치 종교

그 몹쓸 바람

사립문이 막아주나

 

뜰 앞에

잔잔한 물 웃음

한파가 뭐요 I.M.F

 

대문 아예 걸지 않고

밤 낮 자물쇠 없어

 

들며 나며

잦은 들일

마음 외려 편한 둥지

 

햇살도

날 깃을 펴고 와

개나리꽃으로 달게 핀다. -가난도 잘 뫼시면전문

 

우리 생활에 알게 모르게 깊이 베인 것이 명당론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터는 중요하다. 집터와 묘터를 보는 풍수사상은 일반화된 것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 사람이 잘 나고 못난 것은 땅의 조화에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부유하고 귀하게 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추구한다. 명당에 자리 잡으면 복을 받는 다는 사고는 인류의 보편적 생각이다. 그것은 천··인의 합일사상이며, 조상을 잘 섬기는 상생의 효사상이고 자손들의 번창을 바라는 희망의 뿌리사상이다. 흔히 출세한 사람들의 그 이면에는 조상의 무덤을 명당에 쓴 결과라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들린다.

그런데 가난도 잘 뫼시면/ 명당쯤 되는 갚다라니 가난한 자의 복을 떠올리게 한다. 민 시인이 살던 상주시 북문동 세천 길 가에 항시 문 열린 집을 보아온 필자로선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한번은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갔다가 붉게 익은 자두 한 알을 따서 나온 적이 있었다.) 만년에 가난 때문에 고통 받고 세상을 떠난 두보를 생각하면 사고의 편차를 생각게 한다. 모시는 일은 경건한 일이며 공경이 따른다. 국민을 실망시키고 말 장난만하는 시끄러운 정치, 복과 구원을 내세워 현혹하는 사이비종교를 몹쓸 바람으로 간주했으니 그것을 사립문이 있다고 한들 막아줄 리야 있는가. 뜰 앞 마당가에 솟는 달고 시원한 물이 절로 삶의 기쁨으로 웃음을 자아내니 어디 밀려오는 I.M.F 외환위기의 한파가 대수로운 일인가.

높은 담벼락, 쇠창살을 꽂은 방범창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집들이 대부분인 닫히고 갇힌 세상에 대문도 걸지 않고 자물쇠도 없는 열린 집. 시원하게 개방을 해서 자유롭고 마음 편한 둥지가 순하고 맑은 인심을 알만하다. 닫을수록 걱정이 쌓이는 세태에 열어서 편한 넉넉한 국량이 초탈의 경지를 보여준다. 비밀리에 감추지 않는 열림의 생활철학이 달관과 자적,일탈의 경지를 보게 한다. 이러한 평정심이기에 햇살도/ 날깃을 펴고와/ 개나리꽃으로 달게 핀다//는 절창의 가락을 읊게 되리라. 따스한 햇살과 노란 개나리꽃의 조화가 가난을 뫼신 명당을 더욱 밝게 한다.

 

여긴

몹쓸 시기도 모함도

없는 성역(聖域)

 

까부신 세상이 겨워

둘레 덮어 은은한 그늘

 

풍기는

지린 내음이

고향 온 듯 편안하다

 

심우도(尋牛圖)

찾던 소도

꼬리 내려 줄 서있고

 

창틈으로 맑은 바람

간간 새소리 운()이 놓아

 

지긋이

눈을 감으니

문득, 정토(淨土)에 있어라 -어느 우사(牛舍)에서전문

 

이 글을 쓸 때는 조류 인플루엔자(AI)에 이어 구제역으로 소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때이다. 자연성이 억제된 좁은 공간에서 사육을 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들 하니 모두가 인간의 욕심이 빚은 결과가 아닐는지. 살처분 되어 땅에 파묻히는 모습이 처참하고 안타깝다.

우사에는 시기도 모함도 없는 소들만의 성역으로 말만 앞 세워 입만 놀리는 세상이 참고 견디기가 어려워서 차라리 지린 똥오줌 냄새가 더럽지 않고 고향 온 듯 편안하다고 했다. 우덕송(牛德頌)을 말하지 않더라도 소 먹이는 농부의 심정을 알겠다.

소를 찾아가는 심우도(尋牛圖),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그림이다. 주로 사찰 법당의 벽화로 그렸다. 본래의 나, 잃어버린 나를 찾아 가는 구도의 길, 길 위의 그 소들이 이제는 줄 서 있는 우사. 창틈으로 들어오는 맑은 바람과 새소리가 운이 좋아서 지그시 눈 감고 완상하니 극락정토가 바로 예가 아닌가. 마음 한 가닥에 지옥도 극락도 열리고 닫히니 서방정토가 따로 없지 않는가.

은 공간에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속박된 처지, 설상가상으로 구제역으로 수난 받는 때에 소들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의 우사를 떠올리면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러나 어쩌랴. 진흙 밭에 피는 연꽃처럼 딛고 일어서는 긍정적 화두가 세상을 다시 보게 한다.

 

둘러보면 푸른 시구(詩句)

줄기줄기 일만장(一萬章)

 

철따라 새들 가락

골을 넘쳐 하늘을 울려

 

수굿이 이끼 쓴 바위

터를 잡은 신선(神仙)이여

 

저마다 아픔일랑

뿌리 곁에 감추이고

 

잎새 모두 훑긴 날도

어디 비명 있었던가

 

늘 낮춰 갈 길만 걷다

떠날 줄도 아는 계류(溪流)

 

뜬 마음 흰 구름조각

능선 숲에 잠들 즈음

 

달마중 키를 높여

초목들은 설레이고

 

온 산은 명상에 졸다

묵시(默視) 눈을 뜬다. -산 세월전문

 

산 세월은 산정(山情)이 넘치는 호방한 시세계를 펼쳐준다. 시인은 푸른 산에서 줄기줄기 일만 장의 푸른 시구를 읽어낸다. 모든 풀이 시요, 모든 나무가 시다. 뻗어 내린 능선이 시요, 치솟은 봉우리가 시다. 온통 시의 천지다. (자연)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락이다. 수굿이 이끼 쓴 바위가 신선으로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산에 산다. 그런가 하면 아픔을 감추고 잎새를 훑긴 날도 비명소리 내지 않는 인고의 삭임, 인고의 덕을 지녔다. 그리고 몸 낮춰 갈 길만 가다가 떠날 줄 아는 계곡물이 있다. 그것은 어짐()이요, 지혜().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는 모습을 구름이 뜬 마음으로 능선 숲에 잠 들 즈음으로 그려낸 미감과 달마중을 위해 초목들이 저마다 키를 높여서 설레는 동적 풍경으로 이어지고, 산이 명상에 졸다가 묵시의 눈을 뜨는 산으로 그려냈다. 명상에 조는 산도 묵시의 눈을 뜨는 산도 모두가 시인이 마련한 산이다. 정태(靜態)와 동태(動態)의 조화가 명품 산을 앉혔다.

말 없는 가운데 나타내 보이는 묵시의 눈은바위에서 그 난고(難苦)/뱃속에서 다 읽고/ 체험으로 겪는 노자(老子)’돌팍샘에서 뒷산/벼랑 끝에/돌팍샘 지어놓고//해님 먼저 들 새라/미명(未明)에 찾는 나날/한 모금/상큼한 맛에/하늘 땅 다 가진 듯으로산행 하루에서 몇 모금 우러르니/물 오른 나무일래// 앉아 눈을 감으니/ 이 몸 또한 푸른 산//누우니/삼라(森羅) 초록이/ 가슴위에 자라는 듯등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여유와 멋을 열어준다.

 

 

4. 추억을 되새기다

민시인은 시력만큼이나 돌아봄도 가멸차다. 어쩌면 시간상으로 보면 추억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는 회상이 담긴 것만 몇 편 골라 음미키로 한다.

 

잿마루 씻겨 가는

격한 물살 재운 소()

 

비쳐 든 동란의 총성

그 파문도 재워 둔 채

 

야윈 빛

얼굴인 낮달만

천수답을 갈고 있다. -고향 득천재() 둘째 수

 

국토에는 민중의 숨결이 그대로 배어있다. 하물며 유구한 세월을 엮어온 역사에 있어서랴. 소용돌이친 격랑의 역사적 사건을 잠재운 소. 다시 거기에 투영된 민족상잔(民族相殘)6.25동란의 총성과 국토의 가슴을 찢어놓은 비극의 현실을 재워뒀다. 희멀겋게 야윈 낮달만이 천수답을 갈고 있는 득천재. 국토의 현장에서 빚어진 통한의 사건으로 하여 낮달도 야윈 빛으로 동감하는 전이가 놀랍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빗물에 의존해서 농사를 지어야하는 천수답, 한계 지워진 생존의 현장을 낮달이 경작을 해준다. 농경을 일삼는 인간의 일이 인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감응하여 힘을 모아주는 공생의 은혜가 단순치 않다. 사람의 일이 하늘의 일이다. 사람의 일이 하늘에 의해서 이뤄진다.

 

마을 앞 감나무 위

까치집이 등불이고

 

동심(童心) 먼저 건너뛰던

돌 개울 반짝이고

 

솔바람 허욕(虛慾)을 눌러

눈보라를 날리는

 

마당가 모깃불 연기

구름일 듯 피는 밤에

 

구수한 할머니 얘기

초롱초롱 별님도 듣고

 

소쩍새 농심을 달래여

잠들 때까지 울어주는-내 고향은 1.3

 

유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 고향은 아름다운 꿈같이 전개된다. 감나무 위 까치집은 등불이다. 등불이 밝음을 열어주듯이 까치는 새 소식의 기쁨을 물어다 준다. 여기에 새 식구를 맞이하고 보내는 생명이 빛으로 있다. 돌이 많은 개울물에 징검돌을 딛고 동심은 앞질러 건너는 즐거운 나들이와 어울려 전원의 풍정이 솟아오른다.

모깃불 매캐한 연기가 구름같이 피어오르는 밤에 멍석에 누워 할머니 얘기를 반짝이는 별님도 함께 듣는 정경. 소쩍새도 농심을 알아서 이슥한 밤, 잠 들 때까지 울어주는 산촌이 꿈의 마을을 펼쳐준다. 지금은 사라지고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시골모습이다.

이러한 고향에 무슨 헛된 욕심이 있을까마는 솔바람이 이를 눌러서 눈보라로 날려버린다. 농심에는 허욕이 없다. 뿌리고 가꾸며 거두는 일에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념이 있다. 하늘에 순응하면 존재하고 하늘을 거슬리면 망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신념으로 삼고 있다. 농심은 신념이자 종교이다.

 

지은 죄

벌 받는다

쪼그려 또 쪼그려 앉아

 

위에는 임의 눈빛

알전구

내려보고

 

그 주욕(酒慾)

다 훑어 내도

몸은 이리 만삭(滿朔)이네 -화장실 우감(偶感) 3 전문

 

화장실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위생적으로 정비되어 배설의 쾌감을 느끼게 한다. 시원하다. 그런데화장실우감에서는 전 시대의 불편한 구조가 등장한다. 쪼그려 앉아야 하고 머리 위에는 동그란 알전구가 달린 옛 구조. 모든 사람이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두루 파악하고 있는 전지전능한 임의 눈빛 같은 알전구가 비친다.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남김없이 확연하게 보고 있으며 운명을 관장하고 있는 절대자의 형형한 눈빛이 있다.

그런데 술 욕심으로 과음한 뒤지만 삭혀내지 못하고 모조리 게워내도 몸은 이리 만삭으로 배가 부르다. 역설이다. 육신의 배부름 보다도 정신의 배부름이 문제다. 탐욕은 훑어내도 그대로 남아 꺼질 줄을 모른다.

주욕(酒慾) 다 훑어 내도 몸은 이리 만삭(滿朔)이네낮달이 천수답을 갈고 있다솔바람이 허욕을 눌러에서 시적 인식의 명징함을 본다. 넓게는 선적 깨달음으로 이어져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추억의 시편이다. 시가 안정감을 유지하며 의미망을 구축한 것도 청정한 삶을 희구하는 경건한 자세에서 비롯함을 알게 한다. 몸은 만삭이 된 세속에 있으나 불계(佛界)와 속계(俗界)가 둘이 아님을 떠올린다면 시를 통한 마음 밝힘이 아침햇살로 온다.

 

 

맺다

지금까지 농법이 시법인 시와 나무를 소재로 자연을 노래한 작품과 자적(自適)과 달관(達觀)의 시, 그리고 동심을 떠올리는 추억의 작품을 보았다. 하늘 열림에 대한 경배와 우주의 섭리에 따른 농법과 자연관, 각박한 현실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며 초연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동경과 갈망, 선적 깨달음을 읽었다. 이 외에도 가족과 혈육에 대한 사랑(애인 중에 애인」「팔려가는 아내)과 명소(경천대 해맞이」「김유정 문학촌에서」「옥천사」「삼강주막)에 대한 시적 조명이 담겨 있다. 이것은 작품의 주제와 성향, 시적 발상에 따른 나눔이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혼융되어 있는 원융(圓融)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흙처럼 융숭하면서도 기름지고 까마득히 펼쳐진 들처럼 넓다. 무엇보다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류는 동양적 사유로서 무르익은 시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으며 중후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시조의 품격을 지닌 점이다. 특히 유현한 세계를 천착하면서도 시조의 정형을 온전하게 유지한 것이 놀랍다.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신념으로 조사의 생략(지순한 마음을 지순 맘)이나 낱말의 축약(귀뚜라민-귀뚜린)으로 파격을 배격했다. 시조의 현대화에 따른 문제와 주어진 상황이 변화난측(變化難測)한 시대에 조금은 이탈을 해도 좋을듯한데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장과 구의 배열이 틀에 박힌 듯이 일정하다, 결벽증 같은 고집이 있다. 형식과 내용을 아우르는 정형의 시법,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익혀온 독특한 시적 체질이기도 하다.

우리 혼, 우리 가락, 우리 멋, 우리 춤에 대한 숨고르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이와 변종을 불허하는 정격과 정형에서 우리 것은 지켜지고 빛이 날 것이다. 민 시인의 시법에 충실한 시들이 돋보이는 이유이자 강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