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7호(2017년)

상주학. 상주의 불천위 종가 이야기

빛마당 2018. 2. 11. 17:42

상주의 불천위 종가 이야기
상주박물관 학예사  조 연 남
 


목   차




1. 종가의 의미와 관련 문화 이해하기 208

2. 상주 종가 현황과 전승되는 문화 211

3. “섬김과 나눔의 큰집, 종가” 전시 소개 215

4. 우애를 근본으로 이어져오는 월간 종가의 불천위 제사
   224

5. 지속가능한 종가문화 계승 그려보기 234


상주의 불천위 종가 이야기
상주박물관 학예사
조 연 남

1. 종가의 의미와 관련 문화 이해하기
  종가(宗家)는 한 문중에서 맞이로만 이어져 온 큰집으로서, 종손이 사는 집이다. 종손이 사는 집을 중심으로 하나 하나 따져보면 종가의 의미가, 그 사전적 의미를 약간 벗어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종가는 각 성씨별 시조가 아닌 불천위 조상과 같은 현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파종가를 일컫는다. 
  종가는 10대 이상(1700년 이전) 계승되는 집성촌의 문중 가운데 큰집을 의미하며, 불천위는 아니더라도, 서원에 배향되었거나 현조(顯祖)가 있는 문중의 큰집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종가는 10대 이상 계승되는 집성촌 문중의 큰집 및 서원에 배향되거나 현조가 있는 문중의 큰집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주환의『택리지』발문의 아래 글귀에는 종가의 특징이 잘 갈무리 되어 있다.

  “其俗家各戴一祖占一莊. 族居而不散處. 所以維持鞏固而根本不拔也.”

  “영남의 풍속은 가문마다 각각 ‘한 조상’을 섬기며, ‘한 터전’을 일구어 ‘일가들이 모여 살아’ 흩어지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조상의 업적을 튼튼하게 받들어’ 그 ‘틀’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미상『택리지(擇里志)』발문(跋文),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이 글에서는 특히, 불천위 현조를 중심으로 한 곳에 터 잡아 대대로 뿌리 내려온 큰집인 종가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종가는 중국의 유교 이념인 종법사상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종법은 원래 봉건제도를 위한 것으로『예기(禮記)』16 대전(大傳)에는 종법의 골간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자(庶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은 그 종을 분명히 하는 까닭이다. 서자가 장자(長子)를 위해 3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은 조(祖)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이자 별자(別子, 제후의 별자)가 조(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이가 종(宗=大宗)이 되며, 아버지를 계승하는 이는 소종이 된다. 百世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종(=대종)이 있고, 오(五世)만 되면 옮기는 종(宗=小宗)이 있다. 백세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종(宗)은, 별자의 자손이 별자를 계승하여 종을 이루었기에 백세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것이다. 고조를 계승하여 종을 이룬 경우에는 오세가 되면 옮기는 것이다. 조를 존숭하므로 종을 공경하는 것이며, 종을 공경한다는 것은 조를 존숭한다는 뜻이다.”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대종은 제후의 별자를 시조로 하여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종을 말하며, 소종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5세까지 제사하고 그 사이에 친족관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중국의 종법제도를 모델로 하여 종법에는 없지만, 한국에는 그 중간 개념의 파종(派宗)이 있다. 파종은 성씨별로 불천위 조상과 같이 뛰어난 조상을 파조로 하여 형성된 종이다. 배영동,「종가의 사당을 통해본 조상관」,『한국민속학』39, 2004, 121쪽.
 
  전통사회에서 종가가 갖는 의미는 국가 및 사회에 공헌한 것으로 인정되는 불천위 제사의 가풍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생활공간인 종택 및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포함한 재실, 서원 등의 유교문화 경관을 두루 갖추고 동성마을, 더 나아가 향촌사회에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즉 종가는 유교문화의 구심점이며, 다양한 전통문화를 오롯이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가는 조상 대대로 유무형의 다양한 문화를 전승해온다. 종택을 비롯한 종가의 여러 살림살이들은 그자체로 당대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학문적 성취를 비롯한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가풍은 그 종가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소통의 부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나눔과 배려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종가의 정신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특히, 명문종가 타이틀은 사회적 배려에 대한 충실여부로 판단되는데, 자기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타자와의 원활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종가의 기본 책무라 할 수 있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를 받드는 봉제사는 스스로의 긍지를 높이는 문화이며, 접빈객은 타자에 대한 배려의 문화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상주 우복종가 전경>

  상주 역시 유교문화의 꽃을 피운 고을로서 아직까지 종가의 다양한 문화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주의 불천위 종가는 16곳으로 꼽아 볼 수 있다. 종가는 유교문화와 선비정신, 그 속에 묻어 있는 종손과 종부들의 삶이 녹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우리 지역에 있는 종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2011년 상주박물관 조사연구총서를 집필하기 위해 직접 불천위 제사를 조사한 자료, 올해 국립민속박물관과 전시를 준비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전시와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2. 상주 종가 현황과 전승되는 문화
(1) 경북에서 뒤지지 않는 상주 종가 문화
  경상북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 유교문화가 부흥했던 지역으로 각종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경주와 안동, 영주, 문경 등에서는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도록 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점차 퇴락해가는 종가문화를 살리고자 2009년부터 경북의 대표적인 종가문화를 조사 연구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조사연구서인『경상북도의 종가문화연구』 경상북도 · 경북대영남문화연구원,『慶尙北道 宗家文化 硏究』, 도서출판 동방, 2010.
를 간행하였으며, 연차적으로 경북종가의 문장․인장 제작 사업을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에 위탁하여 진행한 바 있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경상북도의 대표적인 종가는 모두 244곳이 있으며, 이 가운데 안동이 73곳으로 독보적이며, 영덕 25곳에 이어 상주가 16곳으로 세 번째를 달린다. 이 밖에 봉화, 예천, 구미, 성주 순이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경상북도 함께 지속적으로 “한국의 종가문화 발굴 및 활용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불천위 종가에 대한 기초 조사를 마친 상태이며, 현재는 불천위는 모시지 않지만, 종가로 지속하고 있는 가문의 조사를 진행 중이다.

연번

본관

파조/현손

종손명

종택/고택명

종택주소

불천위

사당

문화재

1

진양

정경세

정춘목

우복종택

외서면 우산리

정종로

 

우복종택

외서면 우산리

 

2

풍산

류 진

류한민

수암종택

중동면 우물리

3

광주

노수신

노병학

소재종택

화서면 사산리

4

풍양

조 정

조대희

양진당

낙동면 승곡리

5

풍양

조대윤

조정희

오작당

낙동면 승곡리

6

흥양

이 전

이병훈

월간종가

청리면 가천리

7

흥양

이 준

이준희

창석종가

청리면 가천리

8

진주

강 신

강준모

애련재종택

상주시 신봉동

 

9

옥천

전 식

전상룡

사서종택

외서면 관동리

10

여산

송 량

송상윤

우곡종택

공성면 효곡리

11

창녕

성 람

성시진

청죽종가

내서면 능암리

 

 

12

창녕

조우인

조대현

이재종택

사벌면 매호리

 

창녕

조계형

 

퇴우당종택

사벌면 매호리

 

13

인천

채 수

채홍근

난재종택

이안면 이안리

14

안동

권달수

권오하

동계종택

이안면 여물리

 

15

상주

김 범

 

후계종택

가장동

 

 

16

경주

손만웅

손경락

야촌종택

청리면 율리

 


상주 종가 현황 경상북도 · 경북대영남문화연구원,『위의 책』, 1150쪽.

 

 현재, 종가가 문경에 소재하고 있는 식산종가를 포함하면 상주의 불천위 종가는 모두 16곳이다. 지금까지 상주 종가 문화에 대한 연구는 폭넓게 진행되지 않았다. 종택의 건축학적 접근으로 박명덕 외 1인,「朝鮮中期 同族마을의 宗家 擴散 成立過程에 관한 硏究」,『大韓建築學會論文集』7권 4호(1991.8)에서 풍산류씨 수암종택과 풍양조씨 양진당과 오작당의 성립과정과 건축에 대해 밝히고 있다. 상주산업대학교와 상주문화연구소에서 집필 편집한『尙州의 文化』,「상주지방의 祭需에 관한 조사 연구」(新新社, 1994)에 상주 지방의 제폐 현황이란 소제목으로 하여 진주 강씨 애련재종택, 풍산 류씨 수암종택, 광산 노씨 소재종택, 흥양 이씨 종가, 풍양 조씨 종가에 대해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밖에 개별 종가에 대한 연구는 우복종가에 대한 연구가 단연 두드러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우복 정경세 종가의 제례」,『종가의 제례와 음식』(예맥, 2008)과 앞에서 언급한『경상북도 종가문화 연구』(2010)에서 상주의 대표적인 종가로 우복종가의 인문지리적 환경, 유교문화 경관, 종가 인물과 문헌자료, 건축적 내용 등을 다루고 있다. 또한 상주문화연구소, 김유희,「검간 조정(趙靖)선생의 불천위 제사에 나타난 문중의식」,『상주문화연구 19』(2009), 상주문화연구회,「불천위 제사의 현대적 의미」,『上州 4』(한일사, 2010)가 있다. 많은 종가를 보유하고 있는 안동에서 종가 관련 조사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다 할 수 있다. 
  사회문화가 급속히 변하면서 대를 이어 종택을 지키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다양한 종가문화가 단절의 위기에 놓인 지금, 2011년 상주박물관에서 상주의 불천위 제사를 직접 조사 연구하여 발간한『상주의 문중인물과 제사 문화를 담다』은 주목된다. 또한 종가 문화의 기록화를 통해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확보하고, 종가문화의 다양성을 활용하고자 경상북도 대표 종가를 기록으로 남긴『마르지 않는 효제의 샘물, 상주 소재 노수신 종가』, 우복 정경세 종가, 창석 이준 종가를 대상으로 만든 경북대학교의 종가 시리즈는 주목된다.
  또한 몇 년 전부터 경북 종가 및 종부들의 삶을 취재하여 연재하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며, 상주박물관에서도 ‘소통을 말하다, 우복 정경세’, ‘산수헌에서 우복종부를 만나다’ 등 종가 관련 인물 및 종부의 삶을 전시에 담았다.

(2) 종택에서부터 종손과 종부가 만들어낸 문화 
  종가는 우선 인문지리적 환경으로 동성촌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종가의 중심이 되는 종택은 생활과 사당공간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종택 외에 주변에 재실, 정자, 서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종택의 구성 요소를 보기 좋게 표로 만들어 놓은 자료가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종가의 공간별 용도와 기능(모형)

/

구분

건물명

공간명

공간의 용도

/여 구분

 

정침

안방(큰안방, 작은안방)

주부, 어린이

여성공간

(아녀자)

안대청

제사(불천위), 소반 보관

상방

며느리(미혼 딸)

부엌

취사, 난방

익랑1

미혼 딸

여성 손님 방

창고

곡식 저장

익랑2

미혼 자녀

아녀자

남성

서고

, 제기류

사랑채

큰 사랑방

가장(남성 손님)

남성공간

작은 사랑방

장자(남성 손님)

사랑 대청

손님맞이, 문중회의(불천위)

행랑채

행랑방

집안일 돕는 사람의 방

 

마구간

말 사육

 

부속공간

안변소

여성들의 변소

 

바깥변소

남성들의 변소

 

방앗간

도정, 제분

 

망자의 공간

일반사당

불천위, 4~1대조 신주 모심, 사당의례

불천위 사당(부조묘, 별묘)

늦게 인정된 불천위 신주 모심, 사당의례


 배영동, 앞의 글, 123쪽.


  또한 지금의 종가를 일으킨 불천위 현조를 비롯한 대를 잇는 인물들이 있으며, 종가에서 전승되는 역사적인 산물로 각종 문헌들이 전승된다. 모든 문화의 중심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다. 종손과 종부가 주축이 되어 가풍이 형성되고, 그 가풍이 대를 이어 이어지면서 다양한 문화가 종택 곳곳에 나타나게 된다.


3.“섬김과 나눔의 큰집, 종가”전시 소개
  이번 전시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기획에서부터 전시까지 함께한 공동기획전으로, 올해가 상주박물관 개관 10주년인 까닭에 그 의미가 깊다. 경상북도에서도 종가가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주에서, 예부터 지역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던 불천위 종가. 불천위(不遷位)는 국가나 학문에 큰 공이 있어 사당에 영원히 모시는 신위 조상을 중심으로 한곳에 터를 잡아 대대로 내려온 큰집이다.
  불쑥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고, 물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나누는 따뜻함이 있는 상주 불천위 종가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만나는 전시이다. 2017년 9월 18일 시작하여 12월 25일 종료될 예정이다. 상주 불천위 종가의 특징은 학문을 바탕으로, 섬김의 마음으로 종가를 지키고, 지역사회에 효제충서(孝悌忠恕)를 실천한 점이다. 삶속에서 섬김과 나눔을 실천했던 상주 종가 사람들의 참모습을 되새기며,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학문으로 뿌리내리다’, 2부는 ‘마음으로 섬기다’, 3부 ‘나눔으로 실천하다’이며, 2부는 다시 두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지는데, ‘대대로 받들다’, ‘우애를 다지다’이다. 3부는 다시 ‘충심을 다하다’와 ‘배려하며 살아가다’로 나누어진다. 부별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부, ‘학문으로 뿌리내리다’에서는 상주 종가 사람들의 학문에 대한 내용을 다양한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상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책을 늘 가까이하며 유학의 바탕인 효제충서(孝悌忠恕)를 실천하고자 배우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의 학문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한 서애 류성룡(柳成龍)을 만나 한층 깊어졌고,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으로 이름 높인 학자가 많이 나오면서, 상주 학맥(學脈)을 이루었다. 상주의 대표적인 종가들은 이렇게 학문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유학을 바탕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상주 학맥(學脈)으로 뿌리내린 종가의 이야기를 다뤘다.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배향 행사를 그린 유일한 기록화인 ‘성정계첩(聖庭契帖)’을 비롯하여,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의 학맥을 잇는 ‘삼선생 수적 주절주해(三先生手蹟朱節註解)’, 풍산류씨 우천종가의 학문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서애 류성룡의 ‘경상(經床)’ 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영호남의 소통을 이끈 학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종가의 대산루(對山樓) ‘공工’자 벽은, 학문에 대한 종가의 열정을 보여준다.

  2부, ‘마음으로 섬기다’에서는 종가의 효제의 실천을 이야기하였다. 종가에서는 사람의 도리 가운데 효제(孝悌)를 으뜸으로 여겼다. 종가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와 돈독한 우애를 나누며,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들과 함께 정성껏 제사를 받들며 종가를 대대로 지켜갔다. 그 중심에는 불천위 조상이 계신 사당(祠堂)을 중심으로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위하는 섬김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효제(孝悌)를 가훈으로 삼아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며, 자손 대대로 제사를 받든 종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산송씨 우곡 송량(愚谷 宋亮), 1534~1618을 모신 효곡재사(孝谷齋舍) 현판(懸板)을 통해 지극한 효성으로 마을 이름이 바뀐 사례를 알 수 있고, ‘이동식 감실’은 6.25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조상 섬김의 정신을 실천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아픈 동생을 업고, 백화산을 넘어 살아난 형제의 이야기를 그린 ‘월간 창석 형제 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는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입재 조대윤 종가의 사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동실 감실은 주목된다. 또한 현 종부의 시어머니는 6.25때 인민군과 국군을 번갈아가며 사당에 숨겨주다가 결국은 인민군한테 들켜서 국군도 죽고 사당이 불에 탔는데, 할매가 극적으로 사당의 신주를 꺼내 와서 지금까지 위하고 있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신주를 보관하기 위해 현 종손과 작은 삼촌들이 감실을 지게에 메고 매일 상주 갑장산의 재실까지 다녔다고 한다. 



                                                   <이동식 감실>


  2-1, ‘대대로 받들다’에서는 불천위 조상을 중심으로 대대로 제사를 받들며 부모님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효(孝)의 실천이자 의무로 여겼다. 종손(宗孫)과 종부(宗婦)는 불천위 조상의 공덕을 본받고자 종가를 지키면서 정성껏 제사를 받들고, 일가친척들은 제사에 참여하여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는 등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왔다.
   2-2, ‘우애를 다지다’에서는 부모님을 섬기는 것 다음으로 형제간의 우애(友愛)와 집안의 화목(和睦)을 중요시했다. 종가 사람들은 형제간에 서로 아끼는 우애를 바탕으로 종가를 받들며, 일가친척들 간에도 서로 화합하는 가풍을 이루면서 대대로 종가를 지켜갔다.



                                                  <월간창석형제급난도> 

  3부, ‘나눔으로 실천하다’에서는 종가에는 남에게 덕을 베풀고자 하는 나눔의 정신이 스며있다. 종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하고, 나라와 고을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앞장서서 집 안팎의 사람들을 잘 보듬었다. 나아가 그들은 향촌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여러 종가와 서로 힘을 합해 학교나 의료시설을 세우는 등 이웃과 더불어 살아갔다.

  집 안팎으로 덕을 베풀어 나눔을 실천한 종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안반(案盤)’과 ‘백비탕(白沸湯) 그릇’에 얽힌 유물 이야기를 통해 종가 사람들의 배려심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가가 함께 세운 최초의 사설 의료 기관인 존애원(存愛院)과 교육 기관인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자료들을 통해 그들의 나눔과 실천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 상주의 상황을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임란일기(壬亂日記, 보물 제1003호)는 종가의 사회적 역할을 짐작케 한다. 



<우복종가 안반> 


  위의 우복종가 안반은 종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안반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여러 차례 종부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다. 안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떡을 떡메로 쳐서 전부다 집에서 설떡을 하잖아요. 우리 시어머니가 설떡을 몇 가마씩 해야 세객을 맞는데요. 봄에 설 쉬고 사당 세배 오고하는 분들을 세객이라고 해요. 세객을 맞을려면 떡을 몇 가마니씩 하신데. 집에서 할 때는 마당에 떡메를 놓고 떡을 치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이렇게 밑으로 내려앉으시면서 문을 닫으시더래요. 고모님하고 숙모님이 “형님 왜요?” 하니까, “사람 죽는다.” 급히 먹다 막히면 죽는다고 내가 안 보면 급히 안 먹는다고, 그래 당신이 피한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안에 깊은 뜻이 있어요. 배려하신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고 먹고 싶은 만큼 먹어라’ 이런 마음이었겠죠.“
 이준규(1943년생), 진양정씨 우복 정경세 종가 14대 종부
 
  역시 수암 류진 우천 종가에서 전해지는 백비탕에 얽힌 이야기이다. 우천종가에서는 가전청백 충효세업을 가훈으로 삼아 온 집안으로, 녹봉이 떨어졌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물인 백비탕을 내 놓았다. 비록 끓인 물이라도 놋그릇에 담아 정성껏 대접함으로써 손님에 대한 예를 다했던 종가의 접빈객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우천종가 백비탕 그릇> 

 
  “제 육대조부 낙파 류후조 할아버지가 여기 낙향해서 우천 와 계실 때 같이 정승 하시던 류하 한계원 대감이 집에 오셨어요. 마침 그때 녹봉이 늦게 도착해서 음식이 다 떨어져서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녁상을 낼 게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 물을 끓여서 뚜껑을 덮고 그 다음에 간장 넣어 상을 내어왔는데, 낙파 대감이 먼저 뚜껑을 열고 저녁 듭시다 하고 간장을 타면서 마시는데, 손님도 안 마실 수 없지 않습니까? 주인이 그리 마시는데, 한 대감이 그렇게 저녁을 드시고 하룻밤 주무셨지요. 아침이 됐는데 또 백비탕이 나오는 거예요. 이 어른이 가시다가 ‘야! 내가 쌀을 좀 보내야 되겠구나’ 생각을 하고 이제 강을 건너가는데, 마침 그 사이에 대감 할아버지의 녹봉이 왔어요. 빨리 하인이 불렀어요. 모시고 오너라. 해서 그때 다시 와서 식사를 하고 가셨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류창하(1943년생), 풍산류씨 우천종가 14대손

  3-1, ‘충심을 다하다’에서는 효자(孝子) 집안에서 충신(忠臣)이 나온다는 말처럼, 종가 사람들은 집안에서 부모님께 효를 다하듯이, 밖으로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그들은 임진왜란으로 고을이 위태로워지자 앞다투어 의병을 일으키거나, 어린 나이에도 전투에 참여하는 등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봉사했다.

  3-2, ‘배려하며 살아가다’에서는 종가 사람들은 봉제사(奉祭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와 함께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정성껏 접대하는 일을 큰 덕목으로 삼아, 집안을 찾은 손님에게는 물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대접하려 하였고, 아랫사람의 마음도 잘 헤아려 따스함과 배려심이 깃든 집을 꾸렷다. 집 밖으로는 여러 종가들이 힘을 합해 상주의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도남서원’ 등 학교 시설을 세웠다. 또한,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을 세워 아픈 사람을 치료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였다.


  특히, 존애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의료기관이다.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비롯되었다. “존애원은 정자의 ‘마음을 지키고 길러서 타인을 사랑한다’에서 이름한 것이다. 나와 네가 비록 친소親疏는 다르나 한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 기운을 고르게 받았은즉 마음 속 깊이 차마 못하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 동포와 더불어 사는 것이 어찌 사람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낙사휘찬』,「존애원기」 


4. 우애를 근본으로 이어져오는 월간 종가의 불천위 제사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여러 종가 가운데 한식과 동지 차사를 지내고 있는 월간 이전 종가의 불천위 제사를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이전(李㙉, 1558(명종 13)~1648(인조 26))은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이며, 호는 월간(月磵)이다. 이수인(李守仁)의 아들이고, 이준(李埈)의 형이다. 종가라 하면 오래된 고택을 쉽게 머리에 떠올리지만, 월간 종택은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이 살기에 알맞도록 조금씩 바뀐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종가를 일군 월간 이전의 6대조는 원래 단밀 예전에는 상주에 소속되어 있던 곳으로,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을 일컫는다.
에 살았다고 한다. 그의 증조부가 당시 벼슬을 버리고 이곳 상주 청리에 첫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월간의 아버지가 지금의 청리면 ‘유천’, 즉 ‘달래’에 옮겨와 살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월간을 말하지 않고, 어찌 창석을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분은 형제라도 지금 뿌리내린 그 후손들을 촌수로 따지면 30촌을 넘어간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촌수를 따지지 않고 서로 오고 감이 옛 형제분 못지않다.
  청명 한식이 지난 다음날이다. 2011년 4월 6일 12시 월간 이전의 차사가 있다.  12시 가까이 도착을 해서인지 이미 집사를 선정하는, 집사분정과 제물 진설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월간 종가에는 현재 종부가 홀로 지키고 있다. 넷째로 태어난 젊은 종손은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아, 종부 노릇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다. 종손이 죽기 전까지인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종가에는 고지기가 있었다고 한다.
  종손과 지금의 종부는 평생을 달래에서 종가를 지키며 살았다. 한해 농사를 지으며 종가의 살림살이와 육남매를 길러냈던 것이다. 종손이 떠난 10년 이란 세월은 종부에게 여간 큰 시간이 아니다. 종부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즉 ‘한배미(한밤)’에서 시집을 왔다. 자연마을 이름인 ‘한배미’는 부림 홍씨가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온 마을이다. 종부는 군위의 이름난 부림 홍씨 종부의 이름은 홍숙자(여, 77세)이다.
로, 종가의 윗대 어른이 ‘한배미’ 서원 향사에 갔다가 혼례가 성사되어 종가집 맏며느리가 되었다고 한다. 살림이 빈천한 종가에 시집와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종가를 꾸려가고 있으나, 점차 나이가 많아져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종가의 제사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3월, 6월의 두 번의 불천위 제사, 한식 및 동지 차사, 묘제를 지낸다. 이 밖에 설, 추석 명절, 4대 봉사 때마다 모시는 제사는 종가 차원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 역시 종가문화의 일부이다. 불천위와 한식 및 동지 차사의 차이는 크지 않다. 각각 시절이 다름으로, 시절에 맞게 올라가는 제물, 대표적으로 떡의 종류가 달라지고, 특히 동지에는 팥죽이 더해진다. 종가에서 동지와 동지 차사를 각별히 여김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한일합병되고 난 다음에, 우리네 그 긍께 나한테 따지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여 아닙니까? 이 어른들이 양력설을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왜설’이라고 했어. 왜설. 왜놈들 설이다. 우리는 절대 양력설을 못 쉬겠다. 왜설을. 그래가주고 음력설을 쉴라고 하니깐 음력설도 못 쉬게 하잖아. 그니까도로 양력설은 왜설이라 못 쇠고, 음력설을 쉬지 마라고 못 쉬그로 해서 못 쉬고. 그래가주고 동짓날 달래나 일가들이 전부다, 그것도 낮에 멀쩡하게 지내면 왜놈들한테 또 그 들킨다든지 하면 또 말썽이 생기거든. 그래서 동짓날 새복에 일찍 일어나가주고 설을 다 쉬었어요. 일가들이.
  그래고 집에서 설을 쉬고 어 달래 모이가주고 동지 차사를 지냈거든. 그래서 동지차사가 언제라도 좀 늦어. 집에서 설을 쉬고 와서 동지 차사를 지내다 보니깐. 그러니깐 왜설을 안 쉬기 위해서, 그래고 음력설을 못 쉬게 하니깐 못 쉬고. 그래서 동짓날 설을 다 쉬었어요. 그래 고거는 아주 참, 뭐 어데 문서로 돼 있는 데도 없고 그 저 구구전전으로 입으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얘기라요. 지금까지 계속 내려와요. 그래서 동지를 더 참 소중하게 여기고 그랬어요. 제보자 : 이채하(남, 75세) 상주시 화동면 거주. 
 

  일제에 대항하여 양력설을 쇠지 않기 위해 동지 때 설을 쉬면서 팥죽을 떠서 차사를 위했다는 것이다. 이는 월간 창석 두 종가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달래 이씨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 자존심이 강하다는 부분을 읽을 수 있다. 종가의 제사 문화는 횟수와 제물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부터 점차 축소되어 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종부는 그럼이 없다. 가까이에서 종가의 살림살이를 지켜보고 있는 이태하씨는, 

  그 종부가 거기에 대해서 갖다가 한 가지 우리가 고마운 것이 그렇키 해도 당연히 내가 하는 걸로 알고, 제사 지내겠다 못 지내겠다. 그 얘길 안한께 우리가 고마워. 다행히 또 종부가 있으이, [종부 : 내 할 일이니 뭐 누구한테?] 그래 인제 그 뭣한 종가에는 제사를 지내니 못 지내니 그런 기 없어요.

라며, 홀로 종가를 지키면서 제사를 유지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종가의 문화를 이어가는 종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내 할이니 뭐?”라는 종부의 말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연하단 의미가 담겨 있다. 

(1) 겨우 향화를 받들 정도의 종가의 살림살이
  종가의 살림은 예나 지금이나 넉넉지 않다. 종부의 입을 통해 “째지게 가난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전은 앞의 이야기에도 나와 있듯이 아껴 쓰고, 낭비하지 않는 검약을 몸소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런 까닭인지 종가의 살림은 넉넉지 않았는데, 이는 제사 제물에서도 그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문중의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중살림살이. 월간에 갖다가 지금, 인제 지금 앞으로 계획은 그 인제 이래여. 인제 종가에 이래 보면은 갖다가 어느 내가 인제 옆에서 종가를 겪어보니깐 원래 종가라 카는 데는 갖다가 쓰임새가 많아여. 많은데 그걸 갖다 자손들이 다 모르고, 종손이 인제 자연히 전부다 쓰고 나면은 갖다가 지금 경제적으로 궁핍해요. 궁핍해요. 그러니깐 자연히 갖다가 그 모든 게 어려와. 어렵고 한데, 우리는 그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이 자손들이 모이만, 절대 갖다가 그 싸우고 그런 건 없어. 말다툼하고 언제든지 그 연장자가 이야길 하면 항상 순의를 하고, 사랑에 모여도 큰 소리 한 번 안 나고 웬간하면(웬만하면) 다 상의를 해서 하고 이는데, 지금 앞으로 갖다가 문제가 있는 것이 세금 관계라든가 모든 게 나오고 하면 겨우 꾸려나가는 그 정도지, 여유라는 거는 하나도 없어요. 지금. 그래. 제보자 : 이태하(남, 78세),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달래. 


  종가 이름으로 된 땅이 조금 있다. 거기서 나온 소출로 일 년 동안 종가 제사에 향화(香火)를 올리는 정도이다. “원래 종가라 카는 데는 갖다가 쓰임새가 많아여. 많은데 그걸 갖다 자손들이 다 모르고, 종손이 인제 자연히 전부다 쓰고 나면은 …” 이 대목에 눈길이 간다. 그만큼 이래 저래 종가의 쓰임이 많은 모양이다. 항상 넉넉하진 않지만, 종가 사랑에서는 한 번도 큰소리가 오고 간 적이 없다. 언제나 웃어른의 말에 따라 살림살이를 꾸려 간다. 이 역시 말 안 해도 윗대부터 내려온 가풍 덕택이리라.
  종가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설날이 지나면 상주에 사는 일가친척들을 모두 모아 공식적인 모임을 연다. ‘유천일가계’라는 이름으로 계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점심 준비를 하여 일가친척들과 모여 밥을 먹으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은 물론 문중의 큰일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이다. 한가한 시절이라 젊은 사람들도 비교적 많이 참석하여 문중의 화합을 다진다. 이 밖에 사람이 비교적 많이 모이는 차사나 동지 때 살림살이에 대해 간단히 의견을 주고받는다. 2008년에 발간된 월간선생문집은 문중에서 주도한 것으로, 이종욱이라는 분이 선뜻 돈을 내놓은 덕분이다.
  2011년 한식 차사에는 20~30명 정도가 종가에 머물렀다. 제물을 준비하는 분이나 제사에 참석하신 분들이나 하나같이 나이가 많다. 그 가운데 음복상을 차릴 때 할머니들 틈에 끼어 접시에 열심히 제물을 담고 있는 젊은 분이 눈에 띤다. 제물을 썰고 접시에 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 뵈어도 제물만 벌써 20년 동안 만져온 솜씨라고 한다. 종가의 음식은 물론 다양한 문화를 이을 아랫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다. 

(2) 가풍에 맞는 검소한 차사 상차림
  차사 당일 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전날 음식 만드는 모습을 담지 못했던 까닭에 사진이라도 담아보자는 욕심이었다. 이번에 올라간 제물은 제주 예전에는 집에서 손수 만들어 전해오던 가양주가 있었다고 한다.
, 메, 갱, 삼탕(육탕, 어탕, 소탕), 두부전, 편, 포(대구포, 육포, 문어포), 구이(황태, 파전, 미나리 등 각종 전, 돼지고기, 닭), 김, 조기, 숙채(고사리, 도라지, 취나물, 배추, 시금치), 실과(대추, 밤, 곶감, 호두, 배, 사과, 수박) 등이다. 옛날부터 청빈했던 월간 종가의 삶을 드러내는 듯하다. 제물을 장만하는 것은 종부와 마을에 살고 있는 친인척 세 분을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 맡았다. 제물에 관해서는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제사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편과 구이이다. 편은 본편과 웃기로 나누어진다. 본편은 시루떡과 찰편을 쓰고, 웃기는 본편 위에 오르는 것으로 웃기 또는 잔편이라고 하는데, 사정에 맞게 가짓수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올해 장만한 편은 시루떡, 찰떡, 쑤꾸리, 부편, 송편, 송기단자, 경단, 전, 조악으로 모두 9켜이다. 시루떡과 찰떡은 방앗간에서 해오며, 나머지 잔편은 직접 만든다. 종부가 젊었을 때는 모든 떡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조사자 : 시루떡 본편은 방앗간에서 해요?] 예. 나머지는 집에서. 옛날에는 여 다 했지. 집에서 시루떡. 꼭지에 마 시루에 쪄가주고 마 집에서 다 했어. 디딜바-(디딜방아) 찧가. 시방은 저 방앗간이 나왔어. 디딜바- 찍고 하면 겨울에는 막 얼어가. 화로 불 담아가 솔로 씻고 아이고 옛날엔 참말로 죽을 고생 했어. 옛날에는 그 지내고 나만. 

  디딜방아에 가서 쌀을 찧어서 집에서 꼭지 시루에 쪄서 떡을 만들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세월이 좋다. 하지만, 예전에는 제사라고 하면 젊은 새댁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했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이 없어 가짓수를 줄이는 것은 물론, 떡의 양 역시 많이 줄였다. 특히 대추와 밤을 썰어서 고물로 묻히는 잡과편은 손이 많이 가서 더 이상 만들 사람이 없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번에는 오르지 않았다.
  편에서 눈에 띠는 것이 바로 송기단자와 송편이다. 송기 색깔이 살아 있어 기름을 묻혀 놓으니 반들반들하다. 송기단자 역시 손이 많이 간다. 소나무의 송기를 벗기면 그 나무는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어린 소나무가 있으면, 거기 있는 것으로 여름에 벗긴다. 송기의 특성상 한꺼번에 많이 벗기질 못한다. 제사를 위해 여름에 미리 장만해 놓았다가 활용한다. 벗겨서 말려서 삶는데, 잘 안 삼킨다. 송기단자 안에는 껍데기를 벗긴 팥고물이 들어간다. 팥은 붉은 색이므로, 붉은 색은 귀신을 쫓는다고 믿기 때문에 제물에는 쓰지 않는다. 옛날부터 송기단자를 하는 것은 제사의 범절로 내려 왔다. 평소에는 잘 먹을 수 없는 떡인 까닭에 별식으로 여겼다 한다. 
 

  흰 송편이 둥글둥글하다. 상주에서는 보기 드문 떡이다. 쑤꾸리는 쑥으로 만든 것으로, 맛이 좋다고 한다. 부편은 역시 안에 껍데기 벗긴 팥고물을 넣는다. 여름에는 쉬기 때문에 부편은 올리지 않는다. 쑤꾸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고물 안의 떡 색깔로 구분한다. 시루떡 바로 위에 올라가는 찰떡은 두께가 시루떡에 비해 얇다고 한다. 전과 조악은 기름에 지진다는 점에서 다른 잔편과 차이가 난다. 전 조악 순으로 조악이 편의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본편과 잔편이 다 만들어지면, 떡을 차례차례 올려서 괸다. 떡의 괴임은 종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루떡, 찰편, 쑤꾸리, 부편, 송편, 송기단자, 경단, 전, 조악이 오르는 것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시루떡을 편대에 맞게 자르는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나무로 된 편대는 종가의 오랜 제사 문화를 드러내 준다. 

순 서

(위에서 아래)

첫 번째

조악

두 번째

세 번째

경단

네 번째

송기단자

다섯 번째

송편

여섯 번째

부편

일곱 번째

쑤꾸리

여덟 번째

찰떡

아홉 번째

시루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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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대에 괜 모습




  상주에서는 보통 구이의 제일 위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닭이다. 구이 제일 위에 문어를 올리는 안동과는 다름이 있다. 종부의 말대로 구이 괴는 순서를 따라가면, “구이 젤 밑에 가오리, 명태포, 그라고 인제 적 구운 거 막 차례차례. 그것도 순서 있지. 제일 높은 적은 미나리, 젤 위에 올라가고. 고 다음에는 배추. 첨에는 배추. 배추, 파, 그렇게 올라가.”라고 이야기 한다. 각종 전이 올라간 위에 산적이 놓이는데 여기는 산적이 없다. 제철에 맞는 제물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 되므로, 차사 때는 무적은 빠진다.

  ‘달래’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면, 당일날 해야 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식 장만이 끝난다. 젊은 사람들이 없는 제물장만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종부를 비롯한 함께 제물을 장만해 주는 일가친척들 종부와 함께 음식 장만을 거들어 주었던 분으로는 안병숙(여, 72세), 윤사년(여, 78세)씨가 있으며, 모두 달래에 살고 있다.
의 나이도 많다. 옛날보다 제물의 가짓수는 줄었지만, 준비하는 정성은 다름이 없다. 나이 많은 종부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지금껏 제사를 줄이지는 않았다. 

(3) 사당 문을 열고 제사를 받들다
  12시 차사 시간에 맞추어 종가에 도착했다. 이미 차사의 제관들이 모두 정해졌다. 사랑채에서 어른들이 모여 제관분정을 마친 것이다. 종손이 젊은 데다 다른 지역에 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까닭인지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오늘의 제관은 초헌관에 이정협(李楨協), 아헌관(亞獻官)에 이채하(李采河), 종헌관(終獻官)에 이종욱(李鍾旭), 유식(侑食)에 이정석(李楨碩), 축(祝)에 이종욱(李鍾郁), 집례(執禮)에 이권(李權)으로 정했다. 사당 문이 열리고, 문 위에 제관분정표가 붙여지고, 제물이 상 위에 올랐다.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홀기가 있다. 차사는 홀기에 따라 진행된다. 이태하씨와 제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5월 5일 단오날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에 참석한 것과 창석 이준 선생의 제사의 예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에는 여성도 제사에 참석한다는 점과 월간 종가에서는 유식례를 행하고, 부복만으로 마치는 데 비해 합문의 절차가 있다는 점이다. 

  창석 집에는 특기할 만한 거는 우리는 갖다가 메밥을 두 그릇을 떠 놓는데, 그 집에는 단설이라. 메밥이 인제 하나 뿐이라. 그런데 그는 왜냐카면 창석 할아버지가 “남자 가는데, 여자 따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단설을 하는데, 지금도 보면은 그 집에 메밥이 하나라. 우리는 두 겐대. 현재 화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문중에서 이태하씨와 더불어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며, 역시 한학에 밝은 편이다. 동지 차사에는 할머니까지 모셔 단설이 아닌 복설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덧붙인다. 제보자 : 이채하(남, 75세)
 

  형제간에도 이렇게 제사의 예법은 다르다. 제사의 절차는 유가의 제례 범절 안에서 가가례(家家禮)로 집집마다 그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5. 지속가능한 종가문화 계승 그려보기
  종손과 종부 어르신은 언제 아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까에 대해서 우려하는 바가 큰 모양이다. 점차 연세도 많아지고, 이곳저곳 아픈 곳이 많아, 더 이상 많은 손님을 치르기 어려운 형편이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종가라고 하면, 기와집이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종손 종부의 모습을 떠올린다. 또한 어렵게 살던 시절 그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기획전을 하면서, 상주의 대표 종가 어르신들을 만났다.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그 바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를 이어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 조상의 제사를 잘 섬기며, 형제간의 우애를 바탕으로 지손들과 서로 화합하며 문중을 이끌고, 나라에 큰 일이 닥쳤을 때 먼저 나서서 의병을 일으킴은 물론, 집으로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삶 속에서 실천한 종가 사람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지속가능한 종가문화의 단면이며, 우리가 앞으로 가꾸어 나가야할 참된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