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향토사 연구위원
위원 강 효 일
지난 2010년말 남성청사 통합에 따른 기본 실시 설계용역비를 상주시의회에서 승인하였다고 한다. 상주시청 담당부서에서는 지난 의회에서 기본실시 설계용역 보고에 대하여 의원들의 충분한 검토 후 상임위에서 비용삭감 한것을 예결위에서 승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2011년 3월 8일 제 137회 임시회의 제4차 본회의에서 김성태 의원이 상주시 남성청사 기본실시 설계용역 “한국산업 관계 연구원 보고서” 가 남성청사 에 통합 건립이 타당하다는 조사연구결과는 잘못이 있다. 행정안전부 정부청사 관리규정 제8조 청사의 합동화에 행정안전부 장관이 청사수립 계획을 수립할때에는 (1).경제성 (2).장례계획과의 연관성 (3).행정능률 및 국민편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4).유관기관 청사의 합동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남성청사 통합은 위 8조에 결여된 보고서는 잘못이 있다.
1. 상주시청이 무양청사에 통합하게 되면 환경영향평가 와 경제성에 대하여.
(1). 필자는 1998년 8월에 있었던 엄청난 홍수피해를 똑똑히 보았다. 이때 제방이 유실되는 낙양천 제방은 현제 약60년이 된다. 당시 제방이 무너져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제방 밑에있는 상주시 무양청사가 재난의 위기에 있었다. 이때의 현장 사진은 수없이 많다. 무양청사 부지는 어렵게 생겼는가? 일제침략자들은 1912년경부터 자연환경을 파기한 토목공사에서 생긴 토지이다. 수천년동안 남장리에서 내려오는 하천의 물은 쑤안에서 무양청사 방향인 직선으로 내려오는 하천을 일제의 토목공사로 현재 쑤안에서 자산앞, 계산동 앞, 소각장 병성천으로 이어지는 하천의 물줄기는 상주성안의 모든 관청을 없애고 농경지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이것은 웅대한 상주를 역사에 지워버리는 것이 되었다. 무양청사는 하천을 북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무양청사 부지는 하천밑에 흐르는 지하수위에 생긴 토지가 현 무양청사 부지가 된다.
(2). 현재 무양청사는 옛 군청이 낙후되어 현재의 무양청사를 건립하여 상주군청이 무양청사로 이전하였다. 무양청사 건립에 대한 설계용역을 상주시민이 아는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1945년 이후 상주농촌도시를 대도시 산업도시 모방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조건 발전이 되는것처럼 선동하였으나 산업도시는 되지 않았다. 현제도 우리는 산업도시의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망상에서 무양청사에 상주군청 이전은 행정위주로 이전되었다. 무양청사는 상주문화회관, 상주문화원, 예총등 문화시설이 되어야 한다.
(3). 일본 침략자들은 1910년 국치일(한일합병)이후 상주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12년경에 상주전역 토지측량에 터잡아 상주시 쑤안에서 자산마을 앞, 계산동 마을 앞, 현 소각장 앞으로 연결되는 현제의 하천은 자연환경을 무시하고 북쪽으로 하천을 변경시킨 것이다. 일제 침략자들은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에 대한 환경평가도 없이 토목공사를 해놓고 천년의 역사를 가진 상주성도의 성과, 성도의 4대문, 경상감영 관청, 상주목관청 등을 철저히 파기하고 없애버렸다. 낙양제방을 쌓고 물줄기를 돌리고, 후천제방을 쌓고 물줄기를 돌리고 시내전지역을 농경지로 만들었다. 옛날 하천은 토지가 되었다. 이것이 무양청사 부지인데 부지의 땅속에는 수천년 내려온 하천밑에 지하수 위에 무양청사가 있다. 위력이 큰 태풍이 오면 무양청사는 옛 하천으로 변경 될 수 있다. 무양청사는 상주시청으로서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4). 건축공사와 토목공사가 아무리 잘되었으도 자연환경을 파기한 토목공사는 1998년 8월 12일 상주에 있었던 태풍의 위력이 축소된 하천이 그 옛날 하천으로 변하였다. 그 피해는 2000억원이 넘었다. 그때 무양청사위에 있는 낙양천과 쑤안에서 내려오는 후천(북천)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태풍의 위력이 더 큰것이었다면 상주시내는 더 큰 피해가 생겼을 것이다. 1998년 8월에 있었던 태풍에 대하여 상주시 수해백서의 기록은 900쪽이 된다. 위 수해백서 671~677쪽에 수해피해 당시 김정길 행자부 장관이 보은에서 승용차편으로 국도를 따라 수해지역을 확인하면서 상주시민운동장 귀빈실에 온다고 하였다. 필자는 장관이 상주에 온다는 연락을 받고 필자가 장관을 귀빈실 안으로 안내하였다.
귀빈실 중앙에 김정길 장관이 앉고 앉은자리에서 오른편에 김근수 상주시장, 김경오 건설국장, 함문오 공보실 직원, 윈편에 경북 경찰청장, 김윤환 상주경찰서장, 필자가 앉게 되었다. 이때 귀빈실에 분위기는 침묵이 있었다. 할수없이 장관에게 필자가 발언을 신청하자 이에 승낙하여 현제 경북선 철도가 공검에서 함창사이의 철길이 유실되었는데 약 6개월이 되어야 복구가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상주의 피해액은 점점 많아진다고 하였다. 경부선의 철길이 유실되어도 2~3일이면 끝나는데 상주의 태풍피해 경북선 철도 유실은 피해가 너무크고 이것만 보더라도 상주 피해는 엄청납니다.
김정길 장관은 건설과장 김경오에게 피해의 하천에 대하여 피해가 생긴 그상태에서 하천을 축소하지 말고 그대로 복구하라고 지시한후 헬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갔다. 그후 김정길 장관은 상주피해금 1250억원에서 600억원을 추가한 복구비 1850억원 예산을 국회에 제출 상주시는 피해를 복구하였다. 그후 상주시 수해복구 토목공사가 전국에서 최우수지역이 되어 타지역 지방자치에서 수없이 다녀간 사실이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무양청사 주변 낙양제방과 자산마을 앞 제방은 큰태풍이 오면은 무양청사는 대단히 위험하게 된다. 현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무양청사 주변제방은 약 80년이된 그대로 방치되고있다. 현재 하천바닥은 모래층이 쌓여 하천바닥이 높아졌다. 무양청사의 안전성과 경제성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가 있어야하고 상주시민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 낙양제방의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송전탑은 다른곳으로 이전되어야 낙양제방의 안전에 도움된다. 위험한 무양청사에 통합 상주시청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5). 상주시는 모든 발전의 조건을 모두 모아놓고 상주의 환경과 반대되는 산업도시 보존 전 계획은 중지 되어야 한다. 상주는 고대사에서 현대사까지 사람이 살아가는 농촌전원도시이다. 일본패망이후 산업도시를 만든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의 환경은 전혀다르다. 이제 우리는 산업개발에 정신팔지말고 농촌 녹색 전원도시로 수정이 되어야 한다. 일제 칠략자들은 일본군 병참부를 위해 상주를 농산물 대량생산기기로 만들기 위해 토목, 건축공사는 자연을 파기하였고 상주성의 모든성곽, 성의 4대문, 상산관 건물과 같은 장엄하고 웅대한 경상감영의 관청, 상주목의 관청 한옥건물 20여채가 모두 파기 하였다. 우리는 일본정부의 토목공사 그 책임을 물어 원상복구를 요구하고 십년이 걸리고 백년이 걸리고 천년이 걸려도 원산복구를 하여야 죽었던 역사가 다시 살아 나야 한다. 역사의 성지, 민족정신의 성지인 상주 남정청사에서 상주시청이 다시 살아나야 상주가 산다. 현재 무양청사 부지는 일본 토목공사가 만들어낸 토지이고 이토지에 있는 무양청사는 정부재산 안전성과 경제성은 없다.
2. 상주시 남성청사의 역사적 당위성, 장례계획과 연관 성 세계속의 상주시 접근성이 우수한 곳이다.
(1). 상주시 남성청사 부지는 1600년경 상주성도를 확인해보면 상주성도 홍치구루(남문)에서 남쪽을 향해 약간 서쪽에 위치한 남산밑에 있는 마을앞에 남(南 남역남), 사(射 궁술사), 정(亭 정자정)이 있다. 현재 중앙초등학교 작은공원에 남사정을 지킨 수백년이 되는 큰 고목 2그루가 있고 남사정터가 있다. 남산에는 교촌이 있고(향교마을) 상주 대설위 향교가 있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며 이곳에서 조선 500년동안 초시(첫번째과거) 합격한 경상도 각지역의 선비들이 상주향교에서 복시(두번째과거)준비를 하고 무인들의 복시(두번째과거)과거는 남사정에서 준비하였다고 추정이 된다. 정기룡장군이 경남곤양에서 나이19세 서기1581년에 초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상주경상감영 상주목에서 정기룡장군의 나이25세 서기 1587년 까지 무인으로 복시과거준비를 하고 합격하여 서울무과 별시에 급제한 사실이 있다. 복시(두번째 보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서울무과 별시과거를 보지 못한다(과거제도). 그렇다면 정기룡장군은 상주경삼감영에서 복시에 합격한것이 분명해진다. 상주시 남성청사는 남산을 옆에끼고 남사정위에 서있다.
(2). 경상감영 상주목은 무인을 뽑을수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상주 대설위 향교 옆에있는 남사정은 군사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과 창의 훈련과거 준비를 하고 격구를 할수있는 무인의 인재를 뽑는 남사정의 부지는 넓은터에 있었다. 그것은 상주동양청식주식회사가 1912년경에 토지측량을 하고 남사정의 부지는 등기를 하지않아 동척으로 귀속되었고 1912년경 상주농잠 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사유지를 사지않고 남사정의 터 위에 학교를 세웠다. 실습지도 위 터를 사용하였다. 위 학교가 상주대학으로 바뀌면서 상주시 가장동으로 이전하고 현재 상주문화회간, 상주도서관, 상희학교, 중앙초등학교, 상주시 남성청사로 이어지는 역사다.
(3). 위 남사정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즉시 동년 6월에 일본군은 조선전국에 주둔하였다. 이때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대한 척왜양창을 앞세워 목숨을 걸고 싸운 농민군을 상주 민보군이 낙동일본병참부와 결탁하여 1894년 9월 28일 상주성안에 있는 농민군 1백명이 학살되고 같은해 12월 17일 ~ 18일 사이에 2600명이 학살되었고 일본군에 체포된 강선보, 강홍이, 김경준 외 10명은 상주 소모사에 인계되어 소모사는 남사정(상주시 남성청사)에서 1명은 효수하였고, 강홍이, 김경준외 9명은 총살하였다. 이와같은 역사는 세계사에서 상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민족의 성지 남사정이다. 그위에 상주 남성청사가 있다.
(4). 상주시 남성청사 옆에있는 남산은 우리민족의 성지이다. 이제 이역사는 다시 찾아야 한다. 조선정부의 서울 남산은 수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애국가 제2절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기상일세. 제3절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구름없이 밝은달은 우리가슴일편 단심일세. 이것이 서울 남산이고, 우리상주의 남산은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역활을 한 명산이다. 그 옆에 상주 남성청사가 있다.
(5). 임진왜란의 왜군은 1592년 4월 25일 상주경상감영과 상주목을 점령하였다. 이때 권길 가판관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왜적은 상주성에 약 1만명을 주둔하였다. 왜적은 위 같은해 11월 25일까지 7개월 동안 점령하면서 온갖만행을 저질렀다. 위 같은해 10월 김성일 초유사가 경상감사에 임명이 되었다. 이때 김성일 경상감사는 전쟁터에서 돌격장, 유격장을 하고 있는 나이 30세 정기룡 장군을 경상감영 상주목 기판관에 임명하였다. 임명하게 된 이유는 정기룡 장군으로 하여금 가판관(심판관, 재판관) 중책을 임명한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적의 말발굽에 초토화가 된 경상도의 회복하는데도 정기룡장군 이외 적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사로서 훌륭한 기질과 무예를 가졌을 뿐 아니라 병서에도 밝으니 난시에는 이에 더한 인물이 없느니라.
임명장을 받은 정기룡 장군은 위 같은해 10월 20일경 상주 갑장산 골짜기 영수암자에서 관병장 김관부, 의병장 김각등 몇 명을 도임식에 참석하였다. 이후에 정기룡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 통제사를 제15대 제17대 두 번이나 하셨던 살아있는 불굴의 장군이 되었다. 가판관 정기룡장군이 영수암자에서 의병장 1천여명이 모여들었고 기병 1백여명, 보명 200명으로 의병 1천여명을 갑장산 골짜기에 훌련을 시키면서 상주성 탈환 배수진을 쳤다.
위 같은해 11월 20일 병사 400명원을 동원해 관솔이 있는 장목4개를 각자 준비하고 의병에게는 한사람씩 햇불10개를 준비하였다. 이것은 적은 병력으로 대병력을 물리치는 지략이다. 11월 23일 정기룡 장군은 캄캄한 밤을 이용 병사들을 남천에서 시작하여 남서쪽 (현 남산과 남성청사앞들)을 거쳐 북두문(북문) 가까이 장목을 세웠다. 장목위에 햇불을 달게하고 남산향교봉 뒷산과 서북쪽 빙고지 부근에 병사를 시켜 섶을 쌓아 올리게 하였다. 이러한 준비를 자정이 넘도록 준비하고 군사 정개룡은 남문, 김세분은 서문, 이대세는 북문을 치게 하고 동문은 비워두고 동문앞 밤숲(현 상주여고 앞)에 병사 1백여명을 매복숨겨두었다. 정기룡 장군은 서정(서문 밖)진에 비치해둔 북과 징을 크게치게 하고 남산향교봉과 빙고지의 섶에 불이 밝혀졌고 1만여개의 햇불이 일제히 밝혀졌다. 함성을 지르며 공격으로 나아가고 북문이 부서지고 정기룡 장군의 기마병이 성안의 일본군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비워있는 동문으로 도망하여 밤숲에서 죽고 체포되어 상주성은 탈환되었다. 남산은 왜적을 물리치는 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남사정은 민족의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 상주시 남성청사가 있다.
(6). 상주시 남성청사 옆 남산아래 상주대설위 향교는 서기 1392년 7월 이성계는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4년 정도전의 조선경국대전을 편찬하고 (법전)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한양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시작하여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을 했다.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지음 제17 ~ 18쪽 참조) 경국대전 향교의 직제는 행정단위가 큰 관찰사가 있는 상주는 대설위 향교에 교수를 두었다. 그밑에 군이나 현에는 훈도를 두었다. 향교의 교생수는 행정단위가 큰 상주 대설위 향교는 90명 교생을 두었다. 성균관과 대등한 상주경상감영 관찰사는 상주대설위 향교에 각지역 초시 함격자 90명 교생을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매년 6월에 도회소를 열고 문관3명씩을 파견하여 강론과 저술로서 과거시험 북시를 실시하여 생원진사를 주었다. 이들은 서울 과거시험을 불수있는 자격을 아울러 주었다. 관찰사가 있는 상주 대설위향교는 경국대전의 법전에 따라 영남의 학자들은 상주 경상감영 관찰사가 있는 상주대설위 향교 복시에 합격하여 한양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수없이 많은 상주학교는 문인의 성지가 된다. 상주 남산은 영남학파의 학자들의 정신이 남아 숨쉬는 곳이다. 남산옆에 있는 상주시 남성청사는 역사문화 교육의 중심, 시민이 경제적 손실없이 아주 쉽게 접근할수는 경제적 시민의 이익이 되는 곳이다. 이러한 것은 상주시청이 남성청사를 떠날 수 없다.
3. 결론
상주는 약 2000년간 역사에서 현재 다른지역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웅대한 11개군 31개현을 다려스온 약 1600년 역사가 있다. 이것은 1914년까지 경상감영 상주목 행정, 군사 교육, 문화의 중심지가 명백하다.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의 모든 것을 파기된것을 복원하면서 현대사로 이어져 역사와 문화도시가 되이 찾아오는 세계인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발전계획을 세워야하고 대도시의 사람들이 역사와 자연환경 먹거리가 풍부한 곡창지역 상주에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찾게하는 국민의 미래를 연구 함께하는 농촌전원 도시가 되어야 한다. 현재의 상주시 남성청사의 성지는 모든것을 보완하고 상주 미래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적인 사람이 자연과 역사와 함께 미래에 앞장서는 상주시 남성청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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