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한 조선의 선비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김 재 수
1565년(명종 20) 음력 8월 초이튿날,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아침부터 한양의 바람은 뙤약볕을 몰고 와 하늘이 온통 단 솥처럼 불비를 내리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닥칠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이 폭풍 전야처럼 무겁게 깔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대궐 앞에는 조선의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분주히 움직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앉아서 무언가를 결행하려는 듯 얼굴빛들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한나절이 지나자 이윽고 한 선비가 일어났다.
“여러분 이제 우리의 뜻을 이곳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 상소가 전하의 마음을 움직여 이 땅에 조선의 선비들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선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 결의에 찬 얼굴로 대궐 앞 땅바닥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들은 벌써 여러 날을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리고(伏閤上疏) 있었던 것이다.
“전하, 보우를 살려 두시면 아니 되옵니다. 보우의 잘못은 이 나라 조선의 뿌리를 흔들어 버릴 만큼 그 죄가 크고 중합니다. 그러하오니 보우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경상도 유생들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갔지만 명종의 대답은 늘 같았다.
“보우는 벌써 죄를 정했으니 다시는 다르게 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보우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은 조선 선비들의 한결같은 주장인데 이 주장을 좇지 않음은 바로 하늘의 도리가 사라지고 인심이 흩어지는 일입니다. 그러하오니 보우(普雨)에 대한 처벌은 유배(流配)로는 부족하니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해야 하옵니다. 지난 날 고려의 요승(妖僧) 묘청(妙淸)과 신돈(辛旽)의 일들을 보면 나라에 화를 부르는 근본은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사옵니다. 아울러 소신들의 상소는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공론을 대변하는 것임으로 이것이 바로 하늘의 순리를 회복하고 인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 되옵니다.”
이르기를 벌써 보름이 훨씬 지나고 스무날이 훌쩍 넘었다.
마침내 8월 25일. 여응구가 작성하고 이원백이 필사한 스물두 번 째 상소가 올라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비답을 기다리는 동안 승정원의 관원들이 찾아와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저녁 무렵이 훨씬 지나서야 임금으로부터 비답이 내렸다.
“상소의 내용은 비록 간절하지만 이미 정한 것은 고치기 어려우니 더는 상소하지 마라”
모여 있던 전국의 유생들은 허탈함과 아울러 서로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더 이상의 상소는 무리일 것 같다는 의견이 모이자 작별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하나 둘 흩어지는 선비들 틈에 물끄러미 대궐을 바라보던 한 선비는 경상도 유생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마음속에 가득 찬 울분을 삭이며 헤어짐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는 소두(疏頭)의 역할을 확실하게 하였다. 그래서 스물두 번의 상소를 함께 올렸고 그중에 다섯 차례나 자신이 상소를 작성하기도 했다.
김우굉(金宇宏).
본관은 의성(義城), 자(字)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이라 불렀다. 출생은 성주(星州) 사월리(沙月里)에서 태어났으나 그 후 상주 개암에서 거주하였고 묘지도 상주(尙州) 개암(開巖) 동잠(東岑)에 있다.
그는 갑신년(1544, 중종 39) 10월 4일에 태어났다. 29살에 진사시에 수석을 차지하였고, 42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곧바로 검열이 되었다. 과거급제자로서 꽃을 꽂고 형님이 있던 군의 관아에서 대부인에게 절을 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무인년(1578, 선조 11)에는 승지로 올라, 대사간, 대사성, 예조 참의, 병조참의, 형조 참의에 올랐고, 임오년(1582, 선조 15)에 충청도 관찰사, 계미년(1583, 선조 16)에 판결사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가, 가을에는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다. 청백리로서 서책과 표리(表裏) 를 하사받았으며, 그 후 다시 광주목사로 나갔다가 기축년(1589, 선조 22)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는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유성용과 더불어 기사관(記事官)으로도 활약을 한 선비였다.
그에게는 형제가 넷 있었다. 첫째는 통정대부로서 영흥부사를 지냈고, 둘째는 감찰을 지냈으며 막내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동강(東岡) 선생 삼형제라고 불렀다. 모두 문학에 재능이 있어 당대에 크게 이름을 날렸으니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고들 말했다.
김우굉은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넓고 남다를 뿐만 아니라 문장이 크고 넉넉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시·예(詩·禮)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아울러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배우고, 또 어진 아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 함께 있어 형제가 서로 학문과 덕행을 닦음으로 문장이 한 시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1560년(명종 15) 김우굉이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처음 합격할 때 출제관(出題官)으로 앉아 그의 답글(策文)을 보던 이황은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진정 그 명성이 헛됨이 없다.”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그는 문장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불의에 과감히 맞설 뿐 아니라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42세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조선의 유교적 이념에 어긋나는 요승이라 할 만한 보우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 일이었다. 김우굉은 이 일을 앞장서서 경상도 내의 선비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한 달 동안 스물두 번의 상소를 올렸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곧은 이름을 세상에 떨쳐 사림들의 존중을 받았다.
그의 상소문 중에서 1565(8월 22일)에 올린 열아홉 번째 상소는 보우의 처단에 대한 임금의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 중 가장 논조가 격렬하였다.
“형벌과 상은 비록 임금의 권한이라 하더라도 국가는 한 사람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온 백성이 모두 보우의 주살을 원하는 것은 모두의 의견인데 임금 혼자 유배로 정하고 그 고집을 굽히지 않는 것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 것이니‚ 임금은 공(公)과 사(私)를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문정왕후 생전에 보우를 감싸고 보호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문정왕후가 돌아가신 후 온 나라의 여론에도 극구 보우를 감싸는 것을 보니 임금께서 보우를 받들고 모시는 일이 어쩌면 모후 보다 심하며 이를 모후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옵니다.”
가히 신하가 임금을 이토록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였으니....
이 뿐만 아니라 그가 형조 참의로 재직 중이던 60세 때 곽사원이라는 사람과 어느 집 종 사이에 저수지 근처에 있는 논밭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붙었다. 당시에 곽사원의 배경엔 조정의 권력자의 있었기 때문에 형조에서는 높은 벼슬자리에 앉은 이의 눈치를 보느라고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김우굉은 곽사원이 제출한 증거가 위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형조 정랑과 형조 판서는 권력에 빌붙어 곽사원을 두둔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형조 참의를 사직하고 말았다. 그 일 후 그가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게끔 하였다.
남명 조식 선생은 비록 자신보다 스물세 살의 연하였지만, 그의 강직한 성품과 서릿발 같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합천군 용주면 황계리에 있는 황계폭포에 올랐을 때 『유황계증김경부(遊黃溪贈金敬夫)』라는 시를 지었는데 김경부는 바로 김우굉의 자(字)이다.
늙은이 머리 이미 서리가 말랐는데 (老夫頭面已霜乾)··
나뭇잎 물들었을 때 산에 올랐네 (木葉黃時上得山)
두 그루 잣나무의 가지와 줄기 좋으니 (雙栢有枝柯幹好)
뜰에 지초와 난초 빼어났다고 말하지 말게나 (莫言庭際秀芝蘭)
가을 정경 조촐하다 한스러워하지 말게 (莫恨秋容淡更疏)
봄이 남긴 뜻 모두 가시지는 않았다네 (一春留意未全除)
하늘의 향기 땅에 가득 차 그 향기 코끝에 스미니 (天香滿地薰生鼻)
비단도 시월의 국화만은 못 할 거야 (十月黃花錦不如)
첫째 작품은 잣나무로, 둘째 작품은 국화로 정신의 영원성을 나타냈다.
스승은 때때로 변하는 인간의 심성과 변하지 않는 자연의 이치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연에서 인간의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발견하였다. 기개(氣槪)와 절개(節槪)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승은 황계폭포 주위의 잣나무와 산국화에서 김우굉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그의 강직한 선비 정신은 임금 앞에서도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경연(經筵)에서 강의 중 왕의 도량이 넓지 못함을 극언(極言)하기도 하였다.
그런 이유로 때로는 임금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것은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먼 외직에서 일하는 것을 오히려 달갑게 여기기까지 했다.
정조 23년(1799), 당시 부수찬 김희주(金熙周)의 상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옛날 신의 선조(先祖)인 부제학 신 김우굉(金宇宏)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어떤 일을 아뢰다가 상의 도량이 넓지 못하다는 말씀을 드리게 되자 상께서 힐책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하나의 증거입니다.’ 하자, 마침내 위엄을 거두시면서 화평스럽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으니, 군신 사이에 성의(誠意)가 서로 돈독했던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과연 성조(聖祖)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계신다면 직언(直言)이 들리지 않을 걱정을 하실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의 언행은 「진군덕차(陳君德箚)」라는 차자(箚子)에도 나타나 있다. 선조 11년(1578) 그가 홍문관 응교직(應敎職)라는 벼슬에 있을 때 올린 상소로 ‘임금의 도리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을 전개하여 요순시대를 실현하려는 그의 포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제왕의 덕은 겸허함(謙恭)을 으뜸으로 꼽고 교만함(自聖)을 가장 경계해야 하옵니다. 겸허함이란 결국 충신(忠臣)이 임금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이니 임금의 가장 중요한 덕목 삼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선대 임금의 실책까지 솔직하게 아뢰었다.
“선조는 총명한 자질에 높은 학문을 갖추었지만 스스로 ‘어질다’라는 병통으로 인해 겸손의 덕이 부족하고 간언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사옵니다. 하오니 선정(善政)과 백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공의(公議)와 간언(諫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옵니다.”
임금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이렇듯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아뢰는 선비는 그 시대에도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강직하고 기개가 높은 선비였지만 그의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그와 동생 김우옹과는 17살의 나이 차이에도 형제 우의가 남달랐다. 김우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떠날 때 김우굉이 자신은 병으로 앓고 있음에도 상주에서 영주까지 걸어와 통곡하며 애틋한 정을 나누기도 했는데, 그 후 형제는 서로 만나지를 못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김우옹은 귀양지에서 제문(祭文)을 지어 ‘형제가 외로운 자취로 갈 곳을 모르고 서로 의지하였다’라고 회고하며, 자신의 성품이 우둔하고 어리석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해 항상 형의 근심거리가 되었을 뿐이라며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형을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김우굉은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과 넓게 사귀며 왕래를 했다. 이 가운데 노관(盧祼), 정복현(鄭復顯), 강익(姜翼), 류성룡(柳成龍), 노수신(盧守愼), 강사상(姜士尙),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이었는데 모두들 당대 경상도의 명사들이었다.
김우굉이 63세(1586년)에는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쉬고 있다가 안동 하회에서 배를 타고 그가 살고 있던 낙동강변의 개암까지 와서 며칠씩 묵으며, 학문의 핵심과 세상을 구제할 원대한 포부를 서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1569)에는 김우굉이 이황에게 편지로 제사에 관한 예절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묻고 답하였고 ‘상퇴계선생서(上退溪先生書)’(1570)에도 퇴계의 안부를 묻고 상제(祥祭)의 예의(禮儀), 축문(祝文)에 대한 구절과 ‘단장이무번쇠(斷杖而無焚衰)’라는 예문(禮文)에 대한 해석 문제를 토론하였다.
‘문노소재(問盧蘇齋)’(1570)는 소재 노수신과 예법에 관한 진지한 의견을 나눈 것으로 그는 학문을 닦고 바른 예절을 지키는 일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집 가운데 『서행일기(西行日記)』는 배불상소(排佛上疏)를 계속 올려 보우(普雨)의 참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선비들과 함께 개경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양주지방과 연락을 취하여 활동한 내용 모두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인데 이 문집은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의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김우굉은 67세(1590년) 되던 1월 11일, 그가 살고 있던 상주(尙州)에서 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난 후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이해 4월 2일 상주 중동면 회상리 뫼골 난동(尙州中東鸞洞) 오향(午向: 정남)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금 그의 무덤 앞에는 1644년(인조22) 그의 막역했던 친구이자 상주 선비 창석 이준(李埈)이 글을 지은 비석이 세웠으며, 1730년(영조6)에 상주 속수 서원(速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개암집開巖集》 4권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