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를 겸비한 충신 난계 김득배 |
김 종 호 전) 국립상주대학교 제4대 총장 전) 사벌국역사보존회 회장 현) 경대학교 교수 |
문무를 겸비한 충신 난계 김득배
경북대학교 교수 김 종 호
<目 次> | ||
Ⅰ. 난계 김득배의 가계와 생애 Ⅱ. 문헌으로 보는 김득배 1. 정몽주의 제문과 만사 2. 성호사설에 나타난 김득배 Ⅲ. 상산김씨와 김득배 Ⅳ. 참고자료 1. 난계 선생 유허비와 숭의전 2. 윤필암과 윤필암기 3. 하여가와 단심가 4. 포은선생 약력 5. 天道是非 6. 祭金得培文 |
Ⅰ. 난계 김득배의 가계와 생애
난계 김득배는 고려 충선왕 4년(1312년)에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에서 태어나 상주의 낙양에 살았다. 조부는 주리州吏였고 조모 또한 주리인 김조金祚의 딸이다.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뒤 문필기관의 대표격인 예문관의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외교와 교육 및 과거시험을 담당하는 전객사의 부령에 올랐다.
부친상을 치르면서 동생들과 함께 주자가례를 신봉하여 당시 사대부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는 단순한 문신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는데 지방의 호장층의 후예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난계의 부친인 김록金祿이 13세 때 돌아가시자 동생들과 함께 3년상을 치르고 시묘하였다.
난계는 성리학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어서 당시 최상류 계층이 담당하는 지공거에 임명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게 되었다. 2품인 중서문하성의 정당문학이란 고관으로 지공거 직책을 겸하여 과거를 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관제 가운데 중서문하성은 최고의 정책결정기관으로 1품인 문하시중이 있고 2품인 문하평장사와 정당문학 등의 재상들이 국정을 논하였다. 난계는 정단문학의 고위직을 맡았던 것이다. 그때 정몽주와 같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게 되었다. 지공거의 위치에서 정몽주를 비롯한 33인의 급제자를 뽑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특히 정몽주는 두드러진 성리학 실력을 바탕으로 사제간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충숙왕 연간에 문과에 급제,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있으면서 충선, 충숙, 충혜왕 등 부자간에 일어난 어지러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사회의 여러 말폐적末弊的현상을 체득하고 거듭나야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학술적으로는 성리학이 새봄의 기운을 받는 시기였으나 정치, 사회적으로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의 폐해로 뒤 덮인 황야와 같았다. 그들이 야기 시킨 혼란은 김득배 같은 선구적 문사文士들을 혁신적 인사로 거듭나게끔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의 분발을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절감하고 전객부령典客副令의 신분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을 따라 원나라로 들어가 10년 동안 숙위宿衛하다가 대군이 고려 31대 왕으로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사회는 입원入元 할 때나 귀국 할 때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이 골만 깊어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와 맞물려, 선생의 혁신적 성향이 공민왕의 반원정치개혁反元政治改革에 적임으로 인식되면서 고려사회를 개혁하는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곧 개혁에 부담을 느낀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시기를 받아 파출낙향罷出落鄕이라는 첫 시련을 삭여내야 했다.
하지만, 낙향 중 재차 부름을 받고 2차 정치개혁에 나섰다가 마침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의 존망이 경각에 이르자, 붓 대신 칼을 바꿔 잡고 제일먼저 전진戰塵으로 달려갔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의인義人이었다.
일찍이 공민왕 6년 홍건적의 전운이 고려에 드리우자 선생은 서북면홍두적 및 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賊及倭賊防御都指揮使로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한 바 있었으며, 마침내 왕 8년 4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서경西京과 함종咸從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고려사직을 구해낸 바 있다.
그 2년 후, 또 다시 10만의 홍건적이 재침하여 파죽지세로 수도를 함락시키고 국토는 초토화 되다시피 하였다. 왕이 황급히 남천南遷하는 등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자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출전하여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개경開京의 적을 궤멸시키고 국권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평소 선생의 개혁 작업을 반대하고 있던 평장사平章使 김용金鏞이 그 전공戰功을 시기하여 왕명을 사칭해 선생을 비롯해 안우와 이방실 등 세 주전원수主戰元帥들을 상주 피난행궁避難行宮으로 유인해 참살慘殺하는 비극을 빗게 되었다.
Ⅱ. 문헌으로 보는 김득배
1. 정몽주의 제문과 만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임진강 상류에 숭의전에는 홍건적을 멸망시킨 안우, 같은 시기 이방실, 문신 문충공 김득배金得培, 성리학자 동방의 시조인 정몽주,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헌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복지겸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득배 본관은 상산, 호는 난계이다. 문과에 급제 하여 예문 검열이 되고 강릉대군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이 되었으며 중서평장 정사 안우, 정당문학 김득배, 추밀원 부사 이방실 등은 홍건적 4만 명이 서경을 함락 하자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분연이 이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으며 공민왕 11년 1362년 명장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 삼원수가 이를 시기한 간신 김용에게 주살 되었다.
여주의 신록사 나옹 선사의 부도탑에 새겨져 있는데 비문 가운데 김득배의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김득배 부인이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신록사에서 남긴글 가운데 마음은 청산에 보내려 하나 남편의 죽음 시부모 조씨의 애절한 사연이 보인다. 김씨는 말없이 살려고 머리를 깎아 청산에 안겼고 티 없이 창공을 벗 삼으려고 윤필암에 들었던 것이다
여주 신록사에 안치된 나옹선사의 진영 뒤 배경은 나옹의 제자들로 왼쪽은 지공이고 오른쪽은 무학대사다. 서흥김씨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나옹선사의 진영 앞에 합장하고 말없이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2006년 11월 상흠, 상돈 형제가 여주 신록사를 탐방하여 나웅선사의 부도탑에서 김득배의 부인 서흥 김씨의 남편에 대한 애절한 사연을 찾아냈다.
개성 선죽교는 1392년(태조1)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정몽주의 제자 고려의 충신상산인 김후金後가 시신을 거두어 장례을 치렀다.
정몽주는 간신 김용에 의해 대낮에 김득배 스승의 목이 어처구니없이 잘리는 그 억울함을 개탄하면서 26세의 나이에 예문검열藝文檢閱이라는 청직淸職에 있으면서 학문 했다는 선비로서 깊은 번민 끝에 절의 정신의 구현이라는 외롭고 험난한 먼 길을 택하기로 결심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지내 주는 천도天道는 밝아야 한다는 신념에 변함없이 공민왕에게 대의大義를 논리 정연하게 조목조목 아뢰자, 공민왕은 그대가 바로 가는 것은 좋으나 만약 제문에 허물이 잡히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할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정몽주가 피 눈물로 제문을 짓고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니 아무도 그의 제문에서 흠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대개 들으니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淫한 이에게 화禍를 주는 것은 하늘이며,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니,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이치는 같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그 이치가 정해지면 사람한테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한테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옛날에 홍구紅寇가 짓밟고 들어올 때, 임금의 수레가 멀리 피난갔으니 국가의 명命이 위태함이 실끝 같았는데, 오직 공이 대의大義를 수창首唱하였으므로 원근이 메아리처럼 응하였다. 몸소 일만 번이나 죽을 꾀를 내어서 능히 삼한三韓의 업業을 회복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누구의 공인가. 비록 그 죄가 있다 하더라도 공功으로써 죄를 감하는 것이 옳고, 만일 죄가 공보다 무겁다면 반드시 돌아와 죄에 자복하게 한 연후에 죽이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지 아니하고 개가凱歌를 마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을 도로 칼날의 피로 만드는고. 이것을 내가 피맺히게 하늘에 묻는 바이다. 나는 안다. 그 충혼과 장백壯魄이 천추만대에 반드시 구천 아래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명이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장지를 나서는 정몽주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할 말이 마음 속에서 밀고 올라와 이내 그 심정을 달래보려고 머리를 돌리니 푸른 병성屛城 하늘에 한 점의 횐 구름이 무심이 흐르고 있었다.
祭金元帥得培 원수 김득배를 제사지내며
自是書生合討文 선생은 본시 서생으로 글이나 읽을 일이지
奈何摩羽將三軍 어찌하여 깃발을 들고 삼군을 거느렸는가
忠魂壯魄今安在 충혼장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回首靑山空白雲 머리 돌리니 푸른산 하늘에 흰구름 뿐이네
권간權奸들이 우굴 거리는 험악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예장禮葬하며 피 눈물로 단장斷腸의 제문祭文을 지어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 하늘에 묻고,' ‘스승의 순도殉道적 죽음을 자신의 사표師表로 삼을 것’ 임을 천명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김득배-정몽주-길재-사육신-생육신으로 이어지는 ‘정충대절정신精忠大節精神’을 조선조 500년 세세에 낳게 되었다.
2. 성호사설에 나타난 김득배
1) 삼수원三帥寃
홍두紅頭의 난리에 세 장수(三帥)가 원통하게 죽은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억울하게 생각하나, 나는 그때 세 장수도 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세운鄭世雲의 큰 공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았었다. 김용金鏞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고 거짓말로 꾸며 대면서 이르기를 “세운은 본래 경卿의 무리를 꺼려하니, 나중에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는 간사한 뜻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세 사람은 그에게 의지하여 마음먹었던 일을 모두 행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죄는 컸던 것이다. 또 그때 국가에서는 집적대는 도적 때문에 마음놓고 자리에 앉았을 수 없었는데 공을 이룬 자로 어찌 죽음을 당할 수 있었겠는가? 안우安祐와 방실芳實은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득배得培에게 있어서 다만 정직한 말로 지극히 간하는 것만이 옳은 일인데, 어찌 함께 임금에게 득죄하여 그 무고한 자까지 형을 당하도록 해서야 차마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 일은 네 사람이 함께 했었는데 세운이 주동자로 되었던 것이다. 진실로 공이 있는 자를 꺼려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애매한 일로써 그 불의의 짓을 이다지 심하게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에 혹 하나는 동쪽에, 하나는 서쪽에 있어서 서로 아무 관련성이 없었다면, 공이 있고 죄가 없는 어진 신하를 찢어 죽이라는 임금의 명령이 직접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따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오직 그들의 마음에 이런 관계가 있었던 까닭에 물욕이 본심을 가려서 참다운 이치를 볼 수 없었다. 이러므로 이들 세 사람이 김용의 꾀에 빠지게 되고 제 자신도 또한 죽음을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연히 득배의 김해군시金海郡詩를 보았는데 거기에,
분성을 관장한 지 스무 해가 넘었으매 / 來管盆城二十春
그 당시 부로들 반은 티끌이 되었구나 / 當時父老半爲塵
서기에서 차츰 지나 원수까지 되었으니 / 自從書記爲元帥
세상에 나 같은 사람 얼마 되지 않으리 / 屈指如余有幾人
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명으로써 자랑스럽게 여기던 자이다.
2) 김득배金得培
우리나라의 유학儒學은 정포은鄭圃隱에서 시작되었는데, 포은은 고려 원수高麗元帥 김득배金得培의 문인이었다.
득배는 정세운鄭世雲ㆍ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홍두적紅頭賊을 평정시켰다.
그때 김용金墉이 세운을 죽이려고 교조矯詔를 세 사람에게 내려 주면서 세운을 죽이도록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은 득배와 동모하려 했으나 득배는 따르지 않았다.
결국 안우와 방실만이 세운을 죽였는데, 김용은 또 세운을 죽인 죄를 이 세 사람에게로 덮어씌워서 모조리 죽이자, 득배의 문인 정모鄭某(정포은鄭圃隱을 이름)가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득배는 비록 원수가 되었으나 문과 출신文科出身으로 안우와 이방실의 모의에 따르지 않았으니 몸가짐을 곧게 하여 그대로 실천한 것이고, 평생을 저버리지 않은 정포은 같은 문생을 두었으니 교수敎授 역시 제대로 한 사람이다. 문文은 능히 몸을 빛나게 했고 무武는 능히 공훈을 세웠으니, 그의 위인을 짐작할 수 있다.
나중에 포은의 훌륭한 수립樹立만 보아도 어찌 주고 받은 연원淵源이 아니겠는가? 포은은 안으로는 습명襲明의 유열遺烈이 있고 밖으로는 득배의 배양培養이 있었으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한 것도 또한 어찌 알맞지 않은가? 지금 사람은 문충만 높일 줄 알고 득배가 있었던 것은 모르므로 이를 밝혀 두는 바이다.
3) 전대 군신사前代君臣祠
마전군麻田郡 숭의전崇義殿에는 고려의 태조太祖ㆍ혜종惠宗ㆍ현종顯宗ㆍ문종文宗ㆍ원종元宗ㆍ충렬왕忠烈王ㆍ공민왕恭愍王 여덟 임금을 제사하였었는데, 그 뒤에 종묘宗廟의 오실五室 제도를 넘었다 해서 혜종ㆍ성종ㆍ충렬왕ㆍ공민왕을 제외하고 다시 사세四世만을 제사하고 열 여섯 명의 신하를 배향(從祀)시켰으니, 복지겸卜智謙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유검필庾黔弼ㆍ배현경裵玄慶ㆍ서희徐熙ㆍ강감찬姜邯贊ㆍ윤관尹瓘ㆍ김부식金富軾ㆍ김취려金就礪ㆍ조충趙冲ㆍ김방경金方慶ㆍ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ㆍ정몽주鄭夢周 등이었다.
나는 이 여러 임금들의 우열優劣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그 대수(世數)를 따지는 설에 있어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러 임금의 향사享祀는 공功으로써 하는 것이요, 작爵으로서가 아니며 종묘의 제도는 조祖는 공功이요, 종宗은 덕德으로 되므로 단지 오묘五廟나 칠묘七廟의 제도에만 그치지 않는 것인데 무엇이 서로 구애될 바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혜종 이하는 그 특이한 공과 현저한 덕이 후세에 표시될 만한 것이 있음을 나는 보지 못했으나, 오직 인종仁宗이 진심으로 대국을 섬겨 백성이 안보되었으니 이는 제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종신從臣 가운데도 조충ㆍ김부식ㆍ안우같은 자들은 다 출향黜享해도 마땅하다. 또한 이들은 다 전공戰功으로써 배향되었고 오직 포은圃隱에게만 그 빛난 절의를 취했을 뿐이니, 그 문교文敎에 있어서는 대개 무시해 버린 모양이다.
승국勝國(고려高麗를 말함)의 풍속과 교화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나 열 두 사람 가운데 으뜸이 되었으며,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좨주祭酒 우탁禹倬이 다 의론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다.
최문헌의 홍경비弘慶碑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지만, 이는 한때 대동大同의 습속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니 어찌 굳이 흠잡을 수 있겠는가? 퇴계退溪가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사우祠宇에 대해 반의하였지만 그 유상遺像의 손에 염주念珠를 가졌다 해서 그것으로 허물을 삼지 아니하였으며, 최고운崔孤雲 같은 이는 부처에 아첨한 문자를 이루다 헤일 수 없을 정도인데도 문묘文廟에 배향된 것은 무엇인가?
김득배金得培 같은 이는 단지 무공武功 뿐만 아니라 포은이 수업한 스승이니, 그는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매양, 전대 창업創業한 임금에 대하여 다 향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하생략)
Ⅲ. 상산김씨와 김득배
포은이 김득배의 영전에 바쳤던 제문과 만시는 지금도 포은문집 속에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김득배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렸다. 동생님 김득제는 홍건적의 침입 때 대장군으로 공민왕의 피난길을 호종하고 서경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도, 김선치도 이 때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올랐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삼원수’라고 불렀다.
또 원종 때의 중랑장 김충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는 등 상산김씨는 고려 말엽에 문인과 무인의 가문을 일으켰다. 이후 상산김씨는 고려-조선-현재에 이르면서 수많은 문무장상과 명현달사들을 세상에 냈다. 시중으로 ‘정정貞靖’의 시호를 받은 김식 역시 시중으로 ‘청평’의 시호를 받은 김희일, 찬성사와 벽상공신으로 상산부원군이 된 김비궁, 3해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고 몽고의 침입을 막아낸 김충, 김일, 김록 등이 모두 고려조에 상산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충암 김정은 충암집에서 김일, 김록, 김득배, 김득제, 김치선 등의 3세 5군을 <국중망족國中望族>이라고 극찬했다. 김운보와 김신보 형제는 1335년의 왜구의 침입, 1363년의 홍건적의 침입 때 각각 공을 세워, 운보는 판전의시사에, 신보는 봉순대부에 올랐다.
상산김씨 시조는 김수金需이다. 고려 때 보윤을 지내고 상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본래 신라종성인 김알지의 후예다. 그러나 계대가 요원하여 분명한 소목을 밝힐 수 없다.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상산에 세거하였을 뿐 아니라 5세 김비궁이 고려조에 문하찬성사 벽상공신이 되었고 상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또 9세 김일이 상락군, 10세 김록이 보정공신 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에 올라 상성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상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상산김씨는 시조 이래 상계가 경북 상주에 터를 잡은 후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고 있다. 그중 상주시 신봉동 구월산 기슭에는 시조 상산군 김수의 제단과 봉의재가 우뚝 서 있다.
Ⅳ. 참고자료
1. 난계 선생 유허비와 숭의전
난계선생 유허비
2. 윤필암과 윤필암기
윤필암 사불암
윤필암기潤筆菴記 이색
사불산四佛山은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하는데, 서천西天(인도印度)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이 붙인 이름이다. 승려 각관覺寬과 김 찬성金贊成 휘諱 득배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윤필암潤筆菴을 짓고는 급히 글을 보내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산속에 묘적암妙寂菴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 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懶翁이 출가出家했던 곳입니다. 지금 나옹이 입적入寂한 뒤에, 그의 사리舍利가 온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음은 물론 진영眞影을 걸어 놓고서 공양供養하고 있는 곳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곳들은 모두 나옹이 생전에 유력遊歷한 곳이긴 하지만, 나옹이 이 모두에 대해서 평소에 꼭 유의留意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계속 묵지 않는다는 본연의 자세(불법을 닦는 승려가 세속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두타행頭陀行을 말한다)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가령 맨 처음에 출가했던 이 묘적암으로 말하면, 머리를 깎아 번뇌를 제거하고 계戒를 지키기 위하여 비니毘尼(율律)를 받았던 곳이니, 이른바 ‘천성이 전하지 못한 향상의 한 가닥 길(千聖不傳 向上一路)’을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여기로부터 진입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사檜巖寺에서 도를 깨닫고 평산平山에게서 인가를 받게 된 것도 모두 여기에서 나왔고, 대도大都(연경燕京)에서 법문을 설파하고 선왕先王(공민왕)의 스승이 된 것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니, 공덕산이야말로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옹이 일단 입적하고 나자, 그의 사리를 소장하고 그의 진영을 내걸어 공양하는 것이 지금 공덕功德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일이 되었고 보면, 이를 통해서 우리는 또 이른바 참공덕을 나옹이 얼마나 끼쳐 주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덕산 역시 나옹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알려져서, 세상에서 나옹을 부러워하며 공덕을 닦으려 하는 자들이 또 이처럼 많이 나오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과연 공덕이라는 것이 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분주히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니, 선생께서 한 말씀을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공덕산이 대원사大院寺 동쪽에 하나의 봉우리로 우뚝 솟아 있는데, 그곳의 큰 바위에 모두 넉 자 남짓한 크기의 여래상如來像 네 개를 사방에다 새겨 놓았기 때문에, 복을 구하려는 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 산의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성지聖智는 묘원妙圓한 것이고 체성體性은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묘적妙寂이라는 이 암자의 이름도 어찌 그냥 붙여진 것이라고 하겠는가. 모두 나옹이 했던 것처럼 이 묘적을 통해서 공덕을 구한다면 충분할 것 같기에, 이 점도 아울러 밝혀 두는 바이다.경신년(1380, 우왕6) 가을 8월 초하룻날에 짓다.
2. 하여가와 단심가
何如歌 이방원
如此亦如何(여차역여하) - 이런들 또 어떠하며,
如彼亦如何(여피역여하) - 저런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苑(성황당후원) - 성황당의 뒷담이
頹圮亦何如(퇴비역하여) -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吾輩若此爲(오배약차위) - 우리들도 이 같이 하여
不死亦何如(불사역하여) - 죽지 않은들 어떠할까.
丹心歌 정몽주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3. 포은선생 약력
왕 력 | 서기 | 간지 | 연 호 | 연령 | 기 사 | ||
충숙왕 복위 | 6 | 1337 | 정축 | 至元 | 3 | 1 | 12월 22일, 永川郡 愚巷里에서 태어나다. 初名은 夢蘭. |
충목왕 | 1 | 1345 | 을유 | 至正 | 5 | 9 | 夢龍으로 改名하다. |
~ | ~ | ~ | ~ | ~ | ~ | ~ | 冠禮를 치르고 夢周로 改名하다. |
공민왕 | 4 | 1355 | 을미 | 至正 | 15 | 19 | 1월, 부친상을 당하다. |
공민왕 | 6 | 1357 | 정유 | 至正 | 17 | 21 | 여름, 申君平이 주관한 監試에 3등으로 합격하다. |
공민왕 | 9 | 1360 | 경자 | 至正 | 20 | 24 | 지공거 金得培의 考試에서 장원으로 뽑히다. |
공민왕 | 11 | 1362 | 임인 | 至正 | 22 | 26 | 3월, 藝文檢閱이 되다. 이때 金鏞의 謀害로 尙州에서 효수된 金得培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다. ○ 10월, 修撰이 되다. |
공민왕 | 12 | 1363 | 계묘 | 至正 | 23 | 27 | 5월, 郎將 兼閤門祗候가 되다. ○ 7월, 衛尉寺丞이 되다. ○ 8월, 從事官으로서 東北面都指揮使 韓邦信을 따라 和州(永興)에서 女眞을 정벌하다. |
공민왕 | 13 | 1364 | 갑진 | 至正 | 24 | 28 | 2월, 돌아와 典寶都監判官에 제수되고 紫金魚帒를 하사받다. ○ 典農寺丞으로 옮기다. |
공민왕 | 14 | 1365 | 을사 | 至正 | 25 | 29 | 1월, 모친상을 당하다. |
공민왕 | 15 | 1366 | 병오 | 至正 | 26 | 30 | 이때 喪制가 문란하였음에도 廬墓하여 哀禮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門閭에 旌表를 받다. |
공민왕 | 17 | 1368 | 무신 | 洪武 | 1 | 32 | 成均司藝 知製敎에 제수되다. 이때부터 모든 제수에 知製敎와 館閣의 벼슬을 겸대하다. |
공민왕 | 20 | 1371 | 신해 | 洪武 | 4 | 35 | 太常少卿 寶文閣應敎 兼成均直講이 되다. ○ 12월, 成均司成이 되다. |
공민왕 | 21 | 1372 | 임자 | 洪武 | 5 | 36 | 3월, 서장관으로 知密直司事 洪師範을 따라 중국에 가다. ○ 귀로에 태풍을 만나 홍사범은 익사하고 선생은 가까스로 살아나다. |
공민왕 | 22 | 1373 | 계축 | 洪武 | 6 | 37 | 7월, 귀국하여 황제의 명을 선포하다. |
공민왕 | 23 | 1374 | 갑인 | 洪武 | 7 | 38 | 2월, 경상도 안렴사가 되다. |
우왕 | 1 | 1375 | 을묘 | 洪武 | 8 | 39 | 藝文館直提學 充春秋館修撰이 되다. 이어 성균관대사성이 되다. ○ 朴尙衷ㆍ金九容 등 10여 인과 함께 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 것을 상소하여 彥陽에 유배되다. |
우왕 | 3 | 1377 | 정사 | 洪武 | 10 | 41 | 3월, 개경으로 돌아오다. ○ 9월,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 |
우왕 | 4 | 1378 | 무오 | 洪武 | 11 | 42 | 7월, 포로로 잡혀갔던 尹明ㆍ安遇世 등 수백 인을 데리고 귀국하다. ○ 右散騎常侍 寶文閣提學이 되다. |
우왕 | 6 | 1380 | 경신 | 洪武 | 13 | 44 | 3월, 版圖判書가 되다. ○ 가을, 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雲峯에 가서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오다. ○ 11월, 密直提學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上護軍이 되다. |
우왕 | 7 | 1381 | 신유 | 洪武 | 14 | 45 | 2월, 誠勤翊贊功臣 奉翊大夫 密直副使가 되다. ○ 9월, 簽書密直司事가 되다. |
우왕 | 9 | 1383 | 계해 | 洪武 | 16 | 47 | 1월, 요동에 이르러 入境이 불허되어 禮物만 進獻하고 돌아오다. ○ 8월, 東北面助戰元帥로 다시 이성계를 따라 정벌에 나가다. |
우왕 | 10 | 1384 | 갑자 | 洪武 | 17 | 48 | 政堂文學이 되고 賀聖節使로 중국에 가다. |
우왕 | 11 | 1385 | 을축 | 洪武 | 18 | 49 | 4월, 귀국하다. ○ 同知貢擧로 洪禹命 등 33인을 뽑다. |
우왕 | 12 | 1386 | 병인 | 洪武 | 19 | 50 | 2월, 중국에 가서 임금의 便服과 陪臣의 朝服ㆍ편복을 청하고, 이어 歲貢의 감면을 청하다. |
우왕 | 13 | 1387 | 정묘 | 洪武 | 20 | 51 | 청하여 해직되고 永原君에 봉해지다. ○ 6월, 河崙ㆍ李崇仁 등과 건의하여 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제도에 따라 冠服을 정하다. ○ 12월, 중국에 가서 朝聘을 통하기를 청하다. |
우왕 | 14 | 1388 | 무진 | 洪武 | 21 | 52 | 1월, 요동에 이르러 받아들이지 않아 돌아오다. ○ 三司左使가 되다. ○ 私田의 혁파를 청하여 시행되다. ○ 7월, 門下贊成事 知書筵事가 되다. |
공양왕 | 1 | 1389 | 기사 | 洪武 | 22 | 53 | 6월, 예문관 대제학이 되다. |
공양왕 | 3 | 1391 | 신미 | 洪武 | 24 | 55 | 11월, 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다. ○ 12월, 安社功臣의 호를 더 받다. |
공양왕 | 4 | 1392 | 임신 | 洪武 | 25 | 56 | 2월, 「新定律」을 지어 바치자 임금이 李詹에게 進講하도록 명하다. ○ 4월 4일, 節義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하다. |
태종 | 1 | 1401 | 신사 | 建文 | 3 | - | 왕명으로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에 추증되고, ‘文忠’의 시호를 받다. |
태종 | 6 | 1406 | 병술 | 永樂 | 4 | - | 3월, 海豐郡에서 龍仁縣 曬布村으로 移葬하고 부인 李氏를 合葬하다. |
태종 | 10 | 1410 | 경인 | 永樂 | 8 | - | 門人 咸傅霖이 行狀을 짓다. |
세종 | 14 | 1432 | 임자 | 宣德 | 7 | - | 「三綱行實」 忠臣傳에 실리다. |
세종 | 21 | 1439 | 기미 | 正統 | 4 | - | 아들 鄭宗誠이 詩集을 간행하다.(初刊本) |
문종 | 2 | 1452 | 임신 | 景泰 | 3 | - | 왕명으로 崇義殿에 배향되다. |
중종 | 12 | 1517 | 정축 | 正德 | 12 | - | 9월, 文廟에 從祀되다. |
중종 | 28 | 1533 | 계사 | 嘉靖 | 12 | - | 현손 鄭世臣이 新溪倅로 재임 중 詩藁를 간행하다.(新溪本) |
명종 | 10 | 1555 | 을묘 | 嘉靖 | 34 | - | 永川士人 盧遂 등이 선생의 舊居인 浮來山 아래에 書院을 세워, 臨皐書院으로 賜額되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 | 開城士人들이 선생의 舊居인 花園 북쪽에 서원을 세우다. |
선조 | 8 | 1575 | 을해 | 萬曆 | 3 | - | 崧陽書院으로 賜額되다. ○ 都事 李敞이 선생의 遺像을 奉安하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萬曆 | 12 | - | 왕명으로 柳成龍이 문집을 校正하고 跋文을 짓다.(芸閣本) |
선조 | 36 | 1603 | 계묘 | 萬曆 | 31 | - | 왕명으로 柳希春이 선생의 言行을 撰次하여 「儒先錄」을 만들다. |
선조 | 40 | 1607 | 정미 | 萬曆 | 35 | - | 臨皐書院에서 다시 문집을 간행하다.(永川重刊本) |
선조 | 41 | 1608 | 무신 | 萬曆 | 36 | - | 7대손 鄭應聖이 황해도 兵馬水軍節度使로 재임 중 黃州兵營에서 문집을 간행하다.(黃州兵營本) |
효종 | 10 | 1659 | 기해 | 永曆 | 13 | - | 후손 鄭雲翼이 鳳城(奉化)현감으로 부임하여 苞山(玄風)현감 鄭維城과 함께 奉化에서 문집을 간행하다.(奉化本) |
숙종 | 1 | 1675 | 을묘 | 康熙 | 14 | - | 宋時烈이 神道碑銘을 짓다. |
숙종 | 3 | 1677 | 정사 | 康熙 | 17 | - | 永川舊刻本에 奉化本의 補續을 取入하고, 新增附錄을 添附하여 문집을 간행하다.(丁巳重刊本) |
숙종 | 45 | 1719 | 기해 | 康熙 | 58 | - | 후손 鄭纘輝가 續錄(續集)을 만들다. |
영조 | 16 | 1740 | 경신 | 乾隆 | 5 | - | 상이 松都에 거둥하여 숭양서원에 賜祭하고, 善竹橋에 碑를 세우도록 명하다. |
영조 | 45 | 1769 | 기축 | 乾隆 | 34 | - | 후손 鄭觀濟가 開城留守 元仁孫과 함께 정찬휘가 만든 續錄을 다시 讎校하고 약간의 글을 보태어 숭양서원에서 문집을 간행하다.(崧陽本) |
고종 | 37 | 1900 | 경자 | 光武 | 4 | - | 후손 鄭煥翼이 鄭世基ㆍ鄭然徽와 함께 續集을 重刊하다.(開城新本) |
고종 | 40 | 1903 | 계묘 | 光武 | 7 | - | 士林이 후손과 함께 晉州 玉山齋에서 문집을 간행하다.(玉山齋本) |
- | - | 1914 | 갑인 | - | - | - | 숭양서원에서 鉛活字로 문집을 간행하다.(崧陽重刊本) |
4. 天道是非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곧 천도라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뜻.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마천司馬遷은 태사령太史令이었다. 당시, 이릉李陵이 5천의 군사로 흉노와 대적하다 포로가 되었다. 이를 두고 무제와 조정의 백관들이 이릉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사마천 혼자 이릉을 비호하였다. 이것이 무제의 비위를 건드려 억울하게 궁형宮刑을 당하였다. 정당한 일을 정당하게 주장하다 형을 받은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사마천은《사기史記》〈열전편列傳篇〉'백이숙제열전伯夷叔齊列傳'에서 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 그렇다면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공자는 칠십 제자 중에 오직 안회顔回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상推賞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끔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夭折하였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보답한다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한편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치는 등, 포악 방자하여 수천 사람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가 도대체 어떤 덕행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가장 현저한 예라 하겠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이 도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는데 종신토록 일락逸樂하고 부귀가 자손대대로 끊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길을 걸으며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이유가 없으면 발분發憤하지 않고, 시종 근직謹直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화를 당하는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 천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非耶? 積仁潔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5. 祭金得培文
嗚呼皇天。此何人哉。盖聞福善禍淫者天也。賞善罰惡者人也。天人雖殊。其理則一。古人有言曰。天定勝人。人衆勝天。亦何理也。往者紅冦闌入。乘輿播越。國家之命。危如懸綫。惟公首倡大義。遠近響應。身出萬死之計。克復三韓之業。凡今之人。食於斯寢於斯。伊誰之功歟。雖有其罪。以功掩之可也。罪重於功。必使歸服其罪。然後討之可也。奈何汗馬未乾。凱歌未罷。遂使泰山之功。轉爲鋒刃之血歟。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吾知其忠魂壯魄。千秋萬歲。必飮血於九泉之下。嗚呼命也。如之何如之何。
아, 슬프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대개 들으니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淫한 이에게 화禍를 주는 것은 하늘이며,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니,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이치는 같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그 이치가 정해지면 사람한테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한테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옛날에 홍구紅寇가 짓밟고 들어올 때, 임금의 수레가 멀리 피난갔으니 국가의 명命이 위태함이 실끝 같았는데, 오직 공이 대의大義를 수창首唱하였으므로 원근이 메아리처럼 응하였다. 몸소 일만 번이나 죽을 꾀를 내어서 능히 삼한三韓의 업業을 회복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누구의 공인가. 비록 그 죄가 있다 하더라도 공功으로써 죄를 감하는 것이 옳고, 만일 죄가 공보다 무겁다면 반드시 돌아와 죄에 자복하게 한 연후에 죽이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지 아니하고 개가凱歌를 마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을 도로 칼날의 피로 만드는고. 이것을 내가 피맺히게 하늘에 묻는 바이다. 나는 안다. 그 충혼과 장백壯魄이 천추만대에 반드시 구천 아래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명이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