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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회, 학생들의 교육의 장으로

빛마당 2021. 8. 4. 13:42

  포항시 송라면 대전교회(성희경 목사 시무)를 다녀왔다. 대전교회는 1913년 3월 2일에 세워진 교회로 지금 108주년을 기념하는 교회다.

  이 교회는 무엇보다 대전 3.1의거 운동이 일어난 교회로 유명하다.

  1919년(기미년) 3.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무섭게 퍼져가며 불길처럼 전개되자 송라면 대전리 주민들은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궐기하기로 맹세하였다. 대전1리를 흔히 만세촌이라고도 하는데, 1919년 이 마을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사건에 연유한다. 19193,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질 즈음, 이 마을의 대전교회 신자인 윤영복(尹永福) 오용간(吳用干) 윤영만(尹永滿) 등은 교회에서 거사를 의논하고 많은 동지를 규합, 322일 청하 장날에 거사하기고 하였다. 이들은 전날 대형 태극기 1개와 소형 태극기 20개를 만들기까지 했다.

  거사 당일, 윤영만은 청하시장으로 향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지만, 윤영복, 오용간 등은 태극기를 감추어 시장에 모인 후, 오후 1시에 태극기를 펼쳐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규합된 동지와 시장에 모인 많은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 만세의 함성은 순식간에 청하장터를 진동시켰다. 그러자 일경이 몰려와 총검으로 위협, 군중들을 해산시키면서 주동인물 대부분이 검거되었다. 주동인물 23명이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되자, 대전리 주민들은 3월 27일에 다시 이 마을 입구의 두곡숲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청하의 만세시위는 2회, 참가인원 500명, 부상자 50명, 피검자 40명으로 기록되어 당시의 상황을 일러 주고 있다. 이후 포악한 일제가 이 마을을 압박하니. 80호가 넘든 가구수가 50호로 줄어들고 말았다. 주동자에 대한 재판 결과 윤영복과 오용간은 각각 징역 1년 6월, 윤영만과 이준석은 각각 징역 1년, 그 외는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마친 의사들은 이후 국내에서 청년회 등을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녛는 활동을 계속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윤영복은 출옥 후 만주로 망명, 한국국민당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벌였고, 오용간은 1921년 청하청년회 회장을 역임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교회를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김만수는 이 마을에서 야학을 설립하고, 3.1동지회를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여 사망하였다. 또 김종만은 이 마을에서 야학을 설립하여 민족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그 밖의 사람들도 3.1동지회, 농우회, 청년회 활동, 또는 야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일본상품 불매운동, 신사참배 반대 운동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현재 이 교회와 마을은 의사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3.1동지회가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는데, 2001년 포항시에서 3.1의거 당시 태극기를 제작하였던 이 곳에 ‘대전리 3.1의거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2005년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이준석 의사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이 숭고한 자취를 돌아보면서 포항시는 이 교회와 기념관 일대를 '나라 사랑 교육'의 산 교육장으로 조성하여 포항시내 초.중.고등학생은 물론 전국의 학생들이 이곳을 찾는 기회를 제공하고 또한 포항노회와 대전교회는 이 교회를 총회 사적지로 지정하도록 노력하며 포항시는 이곳을 경상북도 사적지로 지정하여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후세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 되도록 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송라면에 있는 대전교회

 

3.1의거 기념비

                                                          3.1운동 만세 기념비 앞에서 기념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