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나의 여행사진들

실로암 중국여행 1

빛마당 2010. 6. 17. 11:15

 

 

 


실로암 중국 여행기

















때 : 2003년 8월 18일(월) - 8월 23일(토) 5박 6일

곳 : 중국 상해, 소주, 항주, 계림 일원

주관 : 실로암회

기록 : 김재수 장로

여행사 : 한국관광


실로암 중국여행의 이모저모

기록 : 김 재수 장로

 

2003년 8월 18일 월요일

* 출발

아침 8시 40분. 한 사람 두 사람씩 한국관광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준비해온 실로암회 중국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여행단 22명과 상주의 일반여행단 14명이 함께 하도록 계획이 된 것 같다.

우리 일행이 이 번 여행을 원활하게 할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분은 성백진 단장을 비롯하여 김학용 회장 그리고 박의용 장로가 모든 일을 주선해 주셨다.

이 번 여행에 김종기 장로님이 모친상을 당하여 여권과 비자까지 발급 받았지만 부득이 참석을 하지 못하고 다음 회원들이 참가하였다.

단장 성백진(이영숙), 회장 김학용(박말분), 총무 박의용, 안창식, 성백일(이정자), 이기언, 김재수(김성자), 박종환, 김정모, 권상준(박혜향), 이상기, 강우석, 강병만(조정자), 정명순, 그리고 우리 회원은 아니지만 오광교회 엄창용(박명주) 장로 내외분이 함께 참여했다.

9시 정각 일행이 효성관광 버스에 몸을 싣자 상주교회에 시무 하시는  곽희주 목사님께서 우리들의 여행 일정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출발 기도를 해주셨다. 성백일 장로님은 간식으로 검정콩으로 가공한 두유를 제공해 주셨고, 박종환 장로님은 기드온 협회서 나온 성경책을 주셔서 혹 중국에서 전도할 일이 있을 때 이용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목사님의 기도 후 임진 한국관광 사장님의 간단한 주의사항과 중국여행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사항을 재담을 섞어가며 설명하는 가운

* 대구공항에서 기대에 부푼 일행들

데 버스는 대구 공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출발하면서부터 계속 보슬비가 내려 버스 안의 분위기는 다소 차분하였다.

10시40분쯤 대구 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속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삼삼오오 앉아서 여행에 대한 기대만큼 대화도 즐거웠다. 더디어 11시20분쯤 중국 출발을 위한 수속이 시작되고 우린 여행자 명단 순서대로 출국을 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동방항공소속의 동방항공. 모두들 내 좌석이 창가가 되기

출국하는 모습

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르고, 창 쪽이 아닌 사람들의 실망감과 서로 자리를 바꾸어주는 배려로 한동안 어수선했지만 대구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우리의 꿈만큼이나 부풀어올라 서해를 지나 중국 상해로 나르기 시작했다.

처음 먹는 중국식 기내식, 좀 싱겁고 느끼한 맛은 있었지만 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인 걸 어쩌랴.

눈을 감고 중국의 모습을 상하는 동안 어느 듯 비행기는 상해 상공을 날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상해의 첫 인상은 산이라곤 볼 수 없는 무한한 평지 위에 잘 정돈되어 보였다. 넓게 뚫린 도로와 고층 건물들...

             * 상해 포동공황 도착 기념 촬영


상해 포동공항은 김포공항에 비해 무척 넓었다. 모두들 중국 현지 시간으로 생활하기 위하여 시계를 한시간 앞으로 당겼다. 중국시간이 우리 시간 보다 한 시간 늦은 때문이었다.

상해가 습기가 많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내리자마자 정말 후덥지근했다.

공항에 내리자 우리를 안내하기 위한 상해 현지 가이드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러나 그 반가움도 잠시, 문제가 생겼다. 우리와 함께  온 여행자 일행 중 다른 팀의 두 노인 부부가 공항에서 나오질 않은 것이다. 임사장과 현지 가이드가 그 넓은 공항을 다시 오르내리고 찾아 헤매기를 20여분, 우린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서 우리 팀은 먼저 상해시를 향해 출발을 했다.

가이드인 채순화(蔡順花) 양은 조선족 출신으로 연변에서 어린이 집 교사를 하다가 보다 낳은 생활을 위해 가이드로 직업을 전환했단다. 그녀는 상해화형해외여유공사(上海華亨海外旅遊公司) 한국부소속의 가이드였고 우리를 태운 차는 금강(집단)유한공사(錦江集團有限公司) 소속의 관광버스였다. 유한공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주식회사라는 의미.

후동 공항에서 상해시로 들어오는 길은 4차선 고속도로로 도로 한가운데 중앙선 대신 너비 10M가 넘는 화단으로 조성되어 고속도로가 훨씬 시원함을 보여주었는데 한가지 반가운 것은 꽃길이 이어지는 중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가 잘 정돈되어 꽃이 핀 채로 약 1Km 이상 이어져 있어서 중국에 와서 본 무궁화가 새로운 감정으로 느껴졌다.


* 상해의 일반적인 현황

상해는 중국 양쯔강 어귀에 있는 상공업 도시. 정부 직할시이다.

상하이항은 강어귀의 외항과 그 상류 약 39km까지의 내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만 톤급의 외항선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세계적인 무역항이다.

중국 최대의 도시이자 손꼽히는 공업 도시로 방직, 기계, 조선, 전기 기기, 화학, 비료 공업 등이 활발하다.

그리고 철도, 항공, 해상 교통의 중계, 집중지로 국내외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예로부터 학술과 문화의 도시로 발달하여 대학, 도서관, 연구 기관 등이 많다.

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었던 곳으로 우리 독립 운동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이다.

경제의 중심지인 상해가 이전부터 이렇게 발전한 것은 아니고 중국이 서서히 개방화의 물결을 타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조그만 어촌에 불과하던 상해가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1842) 으로 아편전쟁 후 영국과 맺은 난징조약(영국과 청나라가 맺은 조약으로 중국의 문호개방을 합의함, 상하이[上海] 등 5항(港) 개항을 포함)에 의해 개방된 후 외국세력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상해의 모습은 중국의 변화와 성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현대적인 호텔과 사무실 빌딩들이 솟아올라 시가지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으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공업들이 발달될 수 있도록 견고한 기술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으며, 대외무역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과학기술과 문화가 매우 발달한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하이는 근대 이후 서양 열강의 영토 확장주의에 의해 동아시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일찍 개항된 도시이고 근세사의 중심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당송때만 하더라도 상하이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원나라 때 왕타오포라는 여인이 직조기술을 개발하면서 상하이는 면직물 중심도시로 변모했고, 17~18세기에 이르러 비단 생산이 증가해 무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는 서구 열강들에 의해 상업도시로 급성장하면서 베이징 다음의 중국 제2도시로 오늘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중국 대륙의 서쪽 쓰촨분지(西川盆地)로부터 5,800km의 긴 장정을 이루는 양쯔강(揚子江)이 끝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상하이,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일찍 개방되어 서구적인 감각과 세련미를 갖고 있는 도시, 그러나 그만큼 화려하게 서구적으로 살아 있는 도시 상하이. 중국 최대의 인구를 자랑이라도 하듯 상하이 시내에는 오래되어 낡은 아파트들이 우선 눈에 띈다. 그리고 사람의 자전거 행렬과 자동차 행렬에 놀라게 된다. 상하이의 번화가는 난징로(南京路)이다. 상하이의 쇼윈도라 불리는 이 거리는 동서 5km로 뻗어 있으며 길 양편으로는 350여 개의 상점이 늘어서 있어 상업도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전거 물결 속에서 동서양의 음식점 간판이 뒤섞여 있는 것이 눈에 띄고, 외국의 물품을 진열한 상가들이 중국답지 않게 눈에 띈다.

동양의 여유 자적한 음악과 서양의 최신 음악이 섞여져 흐르는 거리, 이 거리의 특유한 매력 앞에 서 있으면 상하이가 역사 깊은 도시임을 잊게 된다.

상하이는 베이징만큼이나 중국에서 손꼽을 만한 도시로 꽤 거대하지만, 베이징에 비길 만한 관광 명소는 없다. 주로 상업도시로 외국인 회사가 많이 들어와 있고, 인구가 조밀한 반면에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좁은 곳이 많다. 이런 도로 사정으로 인하여 출․퇴근 등의 러시아워에는 정체가 많은 편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남경로, 이국풍의 거리인 외탄과 그 옆의 황푸 공원,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인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유적지와 루쉰 공원 등이 있고, 그 외에 예원, 옥불사, 용화사가 있다. 대개는 여행의 경유지로 많이 들르는 상하이는 1~2일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혹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주변의 소도시를 돌아볼 계획이어도 5일 정도면 충분하다

상해 시내로 들어서자 고층빌딩이 눈에 많이 띄이기 시작했다. 외탄강을 사이에 두고 시가지 이쪽과 저쪽이 조금은 달랐지만 수많은 건물들이 재건축 되고 있음을 보고 상해가 지금 한창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 뚫린 고가도로. 대부분 고가도로가 형성되어 상해의 복잡한 교통을 원활하게 해주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교통질서는 그렇게 질서 있게 느끼지 못했고 다니는 차들은 비교적 깨끗한 차들로 중국이 자동차 생산량이 우리를 앞지르고 있다는 가이드의 말이 실감나게 했다.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 역시 중국 제품의 자동차로 비교적 안락하고 깨끗한 것을 보면 중국의 발전이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실감하게 했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중국산이었는데 우리나라의 기아의 캐피탈과 소나타 구형과 스타일이 비슷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들이었다.


* 상해임시정부 청사 방문

중국 속의 한국, 상해 임시정부청사(臨時政府舊址) 

오늘날 우리가 임시정부청사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3층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매우 낡고 도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1층에서 짧게 비디오 시청을 하고 나면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하게 된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건물 내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청사 유지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표,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전시실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 상해임시정부청사 앞에서

 먼저 상해에 도착한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했다. 이미 많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그들이 비디오 상영과 관람을 하는 사이 우린 기념촬영을 했다. 역시 이곳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건이 있는 곳이어서 인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주 비좁은 골목 여기저기 2층이나 3층 건물엔 한결 같이 대나무를 걸쳐 한길로 향하게 하고 수없이 많은 빨래를 널어 마치 우중충한 깃발처럼 습한 바람 속에 펄럭였다. 가이드의 말로는 상해의 습한 공기 때문에 늘 빨래는 이렇게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는 우리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다시 수리 보수했다지만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영화상영관에서 기록영화를 보았는데 모든 안내는 중국인들이 유창한 우리 말로하고 있었다. 영화 상영 후 3층의 작고 좁은 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봤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애쓰신 분들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서 이 분들이 겪었던 격동의 세월을 반추해 봤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었고 내가 다시 이곳을 방문하는 영광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죄송스럽기도 하다. 방명록에 방명을 하고 성금 10,000원을 냈더니 기념품으로 임시정부청사 모습이 기록된 병따개를 주었다. 중국에 와서 받은 첫 번 기념품인 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 에 대한 자료 

일제시대 3․1운동이 일어난 후 광복을 위해 임시로 중국 상하이에 선포한 정부가 활동하던 장소이다.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사건으로 일본의 탄압이 심해져 1932년 저장성(浙江省)의 항저우로 활동지를 옮기기 전까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다고 한다. 그 당시 쫓기며 활동하던 그들이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꾸며진 이곳이 그들이 활동한 바로 그 곳인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유적지로 조성된 곳은 1992년 노태우 전대통령이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삼성그룹의 노력으로 된 것이다. 각 층마다 당시 활동하던 때의 모습을 추적하여 꾸며 놓았으며,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 광객 외에는 찾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관광객이 없을 때에는 자물쇠를 채워 놓고 있다. 관람할 때는 비닐 덧신을 신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조잡하나마 기념 스카프와 배지도 준다. 

 * 황포강 이쪽의 위탄가에서 본모습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나와 상해의 중심이라고 하는 위탄강으로 갔다.

오른쪽엔 근대 외국의 조차 지역으로 있을 때의 지은 우람한 석조 건물들이 줄을

              * 상해탑과 88층의 건물이 보이는 위탄강을 등지고...


 있었다. 모두가 은행 건물로 건축연대들이 모두 150년을 훨씬 넘는 것들이었다. 서양식 석지어조 건축의 진수를 보는 것같고 또 이런 건물을 잘 보전해 놓은 중국정부의 관리가 눈에 띈다. 강을 가로질러 보이는 곳이 현대화된 상해의 모습이란다. 미국의 쌍둥이 빌딩 붕괴이후 세계 순위가 3위로 한 순위 올라선 88층(지하3층)의 건물과 아시아 최고의 동방방송국의 동방주명탑(468m)의 위용이 우릴 놀라게 한다. 상해의 발전을 한눈으로 보게 하는 곳이 이곳이란다. 상해의 모든 건물들은 대부분 아파트들이 30층 이상이라고 하는데 한결같이 같은 형태의 건물은 없었다. 이는 설계 시 같은 형태의 건물은 허가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 황포공원 黃浦公園(황푸궁위안) 

황포강(黃浦江)과 오송강(吳松江)이 만나는 곳에 면한 황푸공원은 1860년대에 영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공원 근처의 황푸강 왼쪽 일대의 외탄(外灘)은 밴드라고 불린 조계지구였다. 당시 공원 입구에 ?구여화인불진입내(狗與華人不進入內:개와 중국인은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지금 이곳은 중국인들이 언제나 무료로 사용하는 공원이 되었단다. 이곳은 상하이 시민이 애용하는 휴식 장소로, 이른 아침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이나 밤에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상해에서의 첫 식사는 한국식과 중국식의 중간이라고 할까. 느끼한 입맛을 돋우기 위해 고추장과 김을 미리 준비해서 별 어려움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위가 약한 회원들은 시원스럽게 식사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이나 잘 먹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 서커스 공연 후 출연자와 함께

 

저녁 식사 후 일행은 상해 서커스를 보러 떠났다. 상해의 야경은 산업화 된 도시로서는 그렇게 화려하고 밝진 않았다.


* 상해 서커스 구경

 

우리는 상해에서 유명한 서커스 구경을 갔다. 가는 곳마다 보여 지는 풍경은 자전거의 행렬이 많다는 것과 날씨 때문인지 윗옷을 다 벗은 사람들의 통행도 주위의 분위기와 관계없다는 듯이 많았다. 그리고 가이드의 말을 따르면 횡단보도나 그밖에 길을 건널 때는 서둘면 다치니까 서둘지 말고 천천히 건너면 된다고 했다. 중국에서 길을 다니는 방법이라고 했다.

서커스 장에는 세계 각 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일본, 대만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외국인들인 것 같다.

서커스는 가히 뛰어난 실력이었고 그들의 공연이 참으로 볼만했다. 그 중에서도 볼만한    것은 오토바이 공연이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고도의 훈련과 극한사항에서 빚어내는 숨 가쁜 공연은 지금도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날 만큼 위험하고 극적이었다.


* 소주(수쩌우)로 향하다

 서커스 공연을 마친 일행은 다음 일정인 소주를 향해 야간 여행을 떠났다. 가이드 말로는 잠시 이웃집 나들이를 한다는 기분으로 가시면 된다고 했지만 상해에서 소주까지 고속도로를 통해해서도 약 3시간 넘는 거리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건물마다 휘황찬란한 조명을 하고 있고, 도로 가에 설치된 광고판도 300미터 간격마다 세워져 있는데 모두 조명이 되어 있었다. 많은 전기료가 들 것 같았는데 중국 정부는 의무적으로 조명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잘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소주에 들어갈 때 쯤 가이드는 상해가 신구 세기를 거치며 계속 성장해온 도시라면 소주(쑤저우)는 옛 도시의 향취를 간직하며 그것들을 잘 보존하고 성숙시킨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운하의 도시라고도 덧붙였다. 유명한 진시황의 경황운하가 이 소주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밤늦은 시간에야 비로소 천평대주점(天平大酒店)이란 호텔에 들 수 있었다. 중국에선 호텔을 주점이라고 표현한단다. 별이 네 개인 우리 식으로는 무궁화 4개의 호텔인 셈인데 시설은 비교적 우리 것만 못했다. 중국에서의 첫 날 밤은 오랜 여행이 어서 인지 모두 피곤해 했다. 호텔 로비에서 내일 아침 경건의 시간에 대한 의논이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피곤해도 경건의 시간만은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내일 아침 6시에 회장님 룸에서 모이기로 하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2003년 8월 19일 화요일

* 아침 경건의 시간

  아침 6시 중국에 와서 첫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다행이 회장님의 방이 우리 일행의 한가운데 정해져 있어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다른 투숙객들에겐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 사회 권상준 장로, 기도 김정모 장로 말씀에 안창식 장로가 담당해 주셨다. 지금까지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앞으로 남은 여행 일정에 대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모두 기원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8시부터 버스에 올랐다. 어제 야간에 도착해서 소주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정말 운하의 도시답게 수많은 다리(355개)가 거리를 이리저리 가로질러 있었다. 마로코 폴로가 동양의 비너스라고 이름을 붙일 만 했다. 수양제가 경황 대운하(1,748Km)의 대역사와 고구려 침략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나라가 망했다는 정도로 경황 대운하는 대단하다고 했다. 북경에서 항주로 이어지는 거리와 이 먼 거리를 모두 인력으로 만들었다니 가히 중국인의 의지라고 할 만 했다. 


* 한산사 寒山寺(한산스) 

* 한산사 5층탑

 한산사는 양나라 519년에 세워진 고찰로 당나라의 유명한 고승 한산이 머문 뒤부터 한산사라 불렀다. 역대 중국의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5차례나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가 청대 말에 재건되었다. 한산사는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으로 유명한데 장안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갔다가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풍교와 강촌교에 배가 머물 때 한산사의 종소리를 듣게되고 수심에 차 있던 장계는 한수의 시를 짓는데 우리 말로 풀면 “ 달이지고 까마귀 우니 서리만 하늘에 가득한데 강가의 단풍나무는 고기잡이 배의 불빛에  근심에 차 잠 못 이루네. 오랜 소주성 밖 한산사,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뱃전까지 이르네.”라고 자신의 낙담한 모습을 이 곳의 경치에 빗대어 표현했다고 한다. 당나라 때에는 일본에서 많이 유학을 오기도 하였다. 한산사 안의 종루에 있는 종은 원래 1,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청나라 때 일본인들이 약탈해갔다. 현재 종루에 있는 종은 1907년에 만든 것이다. 대웅보전 안에는 일본이 사과의 뜻으로 만들어 보내온 종이 있다. 한산사 앞에는 장계의 시에 등장하는 풍교(楓橋)가 있다.


* 호구 虎丘(후치어우) 관광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476년) 말기에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그의 아버지 합려(闔閭)의 묘역으로 조성한 곳이다. 그를 매장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서 무덤을 지켰다는 전설 때문에 호구(虎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호구공원의 운암사 탑을 배경으로


 20ha 정도의 광대한 면적 내에 여러 가지 명소가 자리하고 있는 호구의 첫째 볼거리는 호구산 정상의 운암사(雲岩寺) 탑이다. 높이 47.5m인 8각형 7층탑인데, 약 15도 기울어져 있는데, 눈으로 보기에도 기울어진 경사가 느껴진다. 말하자면 중국판 피사탑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벽돌탑으로 961년에 완성된 것. 호구산 입구 오른쪽에 있는 시검석(試劍石)은 오왕 합려(闔閭)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삼아 잘랐다는 전설이 있는 돌로, 실제로 가운데가 둘로 쪼개져 있다. 그곳에서 좀더 올라가면 넓게 펼쳐진 돌이 있는데, 이곳이 1,000명이 앉아서 승려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는 천인석(千人石)이다.

그 외에도 소동파가 즐겼다는 샘물인 제삼천(第三泉) 이나 오왕 합려의 유체와 함께 3,000여 개의 검이 묻혔다고 하는 검지(劍池) 등이 있다. 검지에서는 진시황이나 손권(孫權)도 명검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지만 단 1개의 검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 졸정원 拙政園(주오정위안)

면적이 4ha로 4대 명원 중에서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정원이 조성된 것은 명대의 왕헌신(王獻臣)이 관직에서 추방되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온 때인 1522년이다. 진대의 시 한 구절 ?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에서 본따 이 정원을 졸정원(拙政園)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지의 60% 정도가 연

못으로, 물 주변으로 누각이나 정자  등이 있다. 정원 안은 동, 중, 서원(西園) 3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변화가 풍부하다. 연꽃의 향기가 퍼져 있다는 것에서 이름이 붙은 원향당(遠香堂)에서 바라보는 졸정원의 풍취도 일품이다.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배경인 대관원의 모델이라고도

                                  * 졸정원에서

한다. 


        실크공장견학

  졸정원의 구경을 마치고 이곳이 중국 실크의 주요 생산지라는 것을 알고 견학을 갔다. 실크 공장에서는 누에에서 직접 실을 빼는 장면과 명주 풀심이로 만든 이불을 만드는 장면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젊은 여인들의 패션 쑈까지 관람을 했다. 상품 판매장에서는 넥타이와 티등 실크 제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특히 실크 이불에 대해 많은 선전을 하여 몇몇 회원들이 실크이불을 구입하기도 했다. 모두다 정찰제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늘 늦게 사는 사람들이 덕을 보는 풍경은 여전했다. 현장에서 보면 품질이나 디자인이 괜찮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지 우리 제품보단 세련되지 못하게 보이는 것은 내 자존심 때문인가 보다.

* 민물진주전시관

민물진주전시관에는 어린 조개에 20여개 정도의 다른 조갯살을 떼다 붙여 7-8년 키우면 진주가 된다고 한다. 시제 3년 정도 자란 조개를 열어 보여주기도 했다 이곳은 이 진주를 가공하여 목걸이 팔찌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으로 중국정부가 권장하는 곳이라 했다. 조개를 열어 진주를 꺼내는데 꺼낸 진주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정찰제라고 말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내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첨엔 관망하던 사람들도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구매하는 걸 보면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 소주에서 항주로 가는 길

소주에서 항주까지는 약 5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소주에서 항주까지 가는 길의 풍경은 우리네 농촌 풍경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곳곳에 운하로 이어진 물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농사짓는 모습은 우리네 60-70년대의 풍경이었다. 대부분 농가의 집들은 2층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엔 년중 1/3이 비가 내려 습기가 많기 때문에 1층엔 대부분 창고로 쓰고 2층이나 3층에서 거주한다고 하였다. 항주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 들려 몇가지 음식과 과일을 사먹었는데 가격이 우리보다 많이 비싼 편이었고 특히 중국의 대추는 맛이라고는 참으로 없어서 실망했다. 각 집마다 옥상에 이상하게 작은 돔형의 건축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설명인즉 조상의 묘당 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모택동 이후 장묘 문화가 모두 화장하도록 법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농가의 밤 풍경이었다.

이상하게 전기 불이 켜 있는 곳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밤풍경이 마치 폐허처럼 보였는데 중국인들의 절전 습관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빈집이라고 하는데 잘 지어진 건물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 가이드도 놀란 버스 안에서의 신앙 간증과 친목행사

참 대단했다. 이상기 장로님, 이기언 장로님의 입담은 늘 들어도 우리를 즐겁게 했고 나 역시 뒤질세라 차안의 모두를 위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가이드 최양이 지금까지 여행안내를 했지만 우리들과 같은 팀은 첨 본다고 혀를 내둘렀을 지경이었으니까. 여기에 다 말할 수 없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신앙이 성장되고 회원

상호간의 친목이 더 돈독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늦기 전에 이런 프로그램을 자주 갖자고 의논을 했다.

ㅎㅎㅎㅎㅎ 몇 시간의 이동도 지루한 줄 몰랐으니 우리 실로암 회원들은 정말 대단함을 느꼈고 이 기회에 가이드인 최양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 내가 가진 성경책을 주기도 했다.

웃고 떠들고 그러다가 지루하면 졸기도 하면서 긴 항주에로의 여행을 하고 더디어 항주 00 호텔에 도착했다. 여행이란 참 힘들지만 즐거웠다.

이 날 저녁 생일을 맞이한 회원들이 있어서 이 분들을 위한 축하 잔치를 벌렸다. 이기언 장로, 정명순 권사, 이정자 권사, 이영숙 권사님이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케익을 자르고 생일 축하 노래도 불렀다。

       

2003년 8월 20일 수요일

날씨가 비교적 맑지는 않았지만 다행이 비는 오지 않았다.

오늘은 7시에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이 국땅 호텔에서 갖는 경건의 시간은 참으로 더 은혜로웠다. 사회 김정모 장로 기도 강병만 장로 설교에 성백일 장로가 맡았다. 아침 식사 후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항주 관광을 시작했다.


* 항주 일반

항주는 절강성(浙江省)의 성도로 산과 호수, 샘, 정원으로 둘러싸인 옛 도시다.

옛말에 '하늘에는 천당, 땅위에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진秦나라 때(기원전 221-206)전당현이 설립된 이후 2천년의 역사를 갖는 도시로 한나라 때에 항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항주는 화하(華夏)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했으며, 수나라 양제에 의해 대운하가 개설되고 남북을 잇는 교통과 무역의 주요거점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견문록에서 이곳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라고 했다. 또한 당나라 때에 백낙천이 송나라 때에는 소동파가 각각 관리로 일한 곳이기도 하여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딴 백제와 소제가 유명한 서호에 남아있다.

* 서호(西湖) 관광

* 서호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월나라 왕인 구천(勾踐)이* 보석산에서 바라본 항주시내와 서호

  오나라의 부차에게 바친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인공섬이 떠있다.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 둘레는 15km인 타원형호수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평균수심은 1.8m, 깊은곳은 2.8m 정도이다. 서호는 계절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몇번을 보아도 아름답다. 아침과 저녁의 느낌이 다르며, 비오는 날과 개인날, 안개낀 날과 맑은날의 느낌이 다르다. 이러한 서호의 풍경은 서호에서 볼 수 있는 주의의 10가지 절경인 서호 10경에 의하여 더욱 아름답다. 서호의 다른이름은 서자호(서자호)라고도 하는데 이는 송(宋)나라때의 시인 소동파 가 서호를 서시에 비유한 데서 나온 이름이다.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가 항주의 미인이라는데서 서호를 가리켜 서시(西施)에 비긴 것이 다. 서호는 백락천(백락천)이 쌓은 제방 백제와 소동파가 쌓은 제방 소제에 의해 외호(外湖),북리호(北里湖), 서리호(西里湖),악호(岳湖),소남호(소남호) 등 다섯 개 의 호수로 나누어진다.그가운데 외호(外湖)는 시내에서 가깝고 볼거리가 많이 집중되어 있으며, 통기타 까페등도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다. 서호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안개가 끼었을 때와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로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풍경지구는 하나의 산(고산:孤山), 두 개의 언덕(소제-蘇堤, 백제-白堤), 세 개의 섬(원공돈- 公墩, 호심정-湖心亭, 소영주-小瀛洲), 다섯 개의

                                              ※보석산위의 보숙탑 전경

 호수 (외서호-外西湖, 북리호-北里湖, 서리호-西里湖, 악호와 남호-岳湖와 南湖), 십경(곡원풍하-曲院風荷, 평호추월-平湖秋月, 단교잔설-斷橋殘雪, 유랑문앵-柳浪聞鶯, 뇌봉석조-雷峰夕照,남병만종-南屛晩鐘, 화항관어-花港觀魚, 소제춘효-蘇堤春曉, 쌍봉삽운-雙峰揷雲, 삼담인월-三潭印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호의 사방에는 명승고적이 많은데 유명한 것으로는 황룡동(黃龍洞), 영은사(靈 隱寺), 악묘(岳廟), 악분(岳墳), 호포천(虎胞泉) 등이 있다. 그 중 호포천(虎胞泉)과 용정(龍井)은 옥천(玉 泉)과 함께 서호의 3대 명천으로 불린다."용정차에 호포물"은 "서호쌍절(西湖雙絶)"로 불린다.

우리 일행은 서호에 도착하자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서호 초입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과히 서호의 절경을 보여주는 듯 했다. 삼삼 오오 배에 올라 서호의 절경을 감상하는데 항주 당국은 서호를 보호하기 위하여 굉장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을 한다. 먼저 호수 오염 방지를 위해 모든 유람선은 전기 충전으로 운행한단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씩 강물을 유입하여 호수의 물을 물갈이하며, 고기잡이 수영금지, 화장실 없음, 호수 주변엔 식당이나 유흥을 즐겨 오염을 할 수 있는 근본을 제거했다고 하며 서호 주변 500미터 이내에는 높은 빌딩의 건축을 제한한다고 한다. 배울 만한 내용이다.


* 호심정(湖心亭) 

서호 중앙부의 작은 인공섬에 만들어진 정자로 서호 전체를 사방으로 둘러볼 수 있다. 이 섬은 버드나무 등이 심어져 있어 운치가 있다. 

 * 호빈공원(湖濱公園) 

서호의 동북쪽 물가에 호반을 따라 약 1㎞ 정도 조성된 공원이다. 저녁 무렵이 되면 서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는 바오시산을 배경으로 주위가 모두 붉은색으로 물들어 경치가 아름답다.  

 * 보석산 寶石山(바오스산) 

서호 북쪽에 솟아 있는 200m 높이의 산으로, 바위 안에 숨어 있는 벽옥(璧玉)이 태양빛에 빛나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산꼭대기에는 송대 986년에 창건하여 1933년에 재건된 높이 45.3m, 6각형 7층 연와로 만든 보숙탑(保淑塔)이 있다. 이곳에서 보면 눈 아래에 서호의 전경이 넓게 펼쳐진다. 초양대(初陽臺), 황룡동(黃龍洞), 서하령(栖霞嶺)으로 가는 서쪽의 보운산(寶雲山)으로의 능선 하이킹은 서호를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코스이다.  

서호 관광을 마치고 전단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도로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비를 흠뻑 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단강은 항주의 강으로 강물이 역류하는 현상을 보인다고 했다.

전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육화탑이 나왔다.


* 쳰탕강 錢塘江(전당강) 

길이 410m의 절강성 최대의 하천으로 항저우시의 남쪽을 가로로 흐른다. 상류 부분은 신안강(新安江), 부춘강(富春江)으로 불리고, 흐름이 갈 지(之) 자와 비슷하게 생긴 곳에 와서는 지강(之江)이라고도 불린다. 구부러지면서 흐르는 강이 있다는 의미에서 절강성(浙江省)이라는 이름도 붙게 되었다고 한다.

              * 육화탑 앞에서와 노지심 상 앞에서 함께 기념

 여름이 되면 강가의 보트장에서 몇몇의 건장한 구리 빛의 기사가 운전하는 보트를 탈 수도 있다. 넓은 쳰탕강의 폭을 보트로 통통 튕기면서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가는 보트도 한번쯤 타볼 만하다. 보트를 타며 강에서 바라보는 육화탑의 모습도 꽤 인상적이다.

 *육화탑 六和塔(리어우훠타) 

항저우시의 서남쪽 쳰탕강의 북쪽 연안에 서 있는 높이 59.9m의 탑이다. 970년에 나무와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8각형 13층(내부는 7층)구조이다. 청대 1900년에 개축하여 1991년에 다시 재 보수를 한 전망탑 겸 등대이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쳰탕강과 그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길이 1,453m의 쳰탕강 대교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망이 좋다. 현재 육화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 보수와 유지에 신경을 쓰는 문화재이다.

육화탑을 지나서 사찰 내에는 노지심 상이 있어서 이곳에서 우린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버스에 오르자 비는 계속 내렸다. 비를 맞으며 우린 용정으로 향했다.

* 용정차(龍井茶) 공장

 이곳 항주는 차(茶)의 고장으로 용정차는 중국 차 중에서 으뜸이라고 했다. 룽징(용정)에 있는 샘에 용이 살았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샘의 물은 표면 장력이 커서 동전이 뜰 정도이며, 약간 초록빛을 띠며 향기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중국의 명차인 룽징차는 수출도 되고 있다.

용정에 가는 길에는 온통 차밭이었다. 우리나라 보성에 가면 보이는 것이 차밭인 것처럼...

* 용정차 판매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도착하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용정차를 홍보하는 홍보관으로 갔다. 역시 상품의 선전은 우리 조선족이 맡거나 아니면 한국어에 능통한 중국 현지인이다. 중국인의 상술이 놀랍다. 지금까지 모든 상품을 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선물용으로는 차가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으로 녹차를 샀다. 녹차를 우려내는 방법 등을 설명듣고 매장으로 내려왔다. 거기서 기침과 기관지에 좋다는 국화차를 선물용으로 몇 개 더 구입한 후 다음 목적지인 영은사로 향했다.


* 영은사 靈隱寺(링인스) 

서호의 서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북고봉(北高峰) 남쪽 기슭에 있는 고찰이다. 영은사는 동진(東晉) 때인 326년에 인도의 승려 혜리(慧理)가 창시했다는 중국 선종 10대 고찰의 하나이다. 오(吳)나라 때에는 9루, 18각, 72전에 3,000명의 승려를 가진 대규모 사원이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19세기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당희제가 쓴 운림선사(雲林禪寺)의 액자가 걸린 천왕전 안에 있는 위태천보살상(韋馬太天菩薩像)은 송대의 것이고, 경내의 8각 9층 석탑은 오대의 유물이다. 대웅보전 안에는 높이 19.6m의 금색 석가모니상도 있다. 절 앞의 강을 막은 비래봉(飛來峰)에는 10~14세기 경의 석각 불상들 330여 개가 다양하게 조각되어 있다.


 영은사 관광을 마친 우리는 다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도중 거지닭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 점심엔 거지닭이 나올 거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거지닭이란 임금이 행차하는 중 거지들이 남의 닭을 훔쳐먹다가 들키자 흙구덩이에 감추었는데 이를 구어서 임금이 나누어 먹은 후 그 맛이 천하 일미여서 임금이 즐겨 먹게 되었단다.

식당에 들려 점심을 먹는데 전부 느끼한 중국음식이 식욕을 자극하지 못하였다. 총무가 준비해온 김이랑 고추장을 차에서 내려오지 않아서 준비한 반찬들이 실제에 쓸모가 없다고 조금씩 불만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어쩌랴. 이 맛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말로만 듣던 거지닭도 우리가 먹는 삼계탕이나 닭백숙과는 그 맛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없었지만 별미라고 하니 먹어 볼 수 밖에.

이런 탓에 음식 잘 먹기로 랭킹 2위에 올랐다. 1위는 박의용 총무.


* 다시 상해로

    *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경치


항주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육로로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상해에서 일박을 한 뒤 계림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함이었다.

상해로 가는 몇 시간 동안 우린 게임도 하고 또 신앙간증, 찬양을 부르며 즐거운 여행을 하였다. 특히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차를 늦게 타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렸는데 맨 나중에 탄 사람은 1,000원씩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벌금을 내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벌금을 내는 그들을 보면서 실로암 회원들의 단합된 모습과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맛보았다.

 상해엔 우리가 첨 도착했을 때 주문한 참깨를 가이드가 가져 왔다. 1Kg에 10,000원 우린 4Kg을 주문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가이드가 상인들로부터 이문을 챙기는 것을 보았다. 가이드가 이런 소개로 얻는 이익이 굉장 한가보다.

  다음에는 이런 일들을 참고하여 쇼핑이나 물건을 소개받는 게 현명할 것 같다.

상해에서 묵은 호텔은 동방항공소속의 동방대주점. 여정을 풀고 하루의 일정을 되돌아보았다. 내일은 다시 계림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 같은 나라에서 비행기를 타야 이동이 수월하다니... 대구에서 상해까지 비행시간이 1시간 10분 정도인데 상해에서 계림까진 2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고 하니 중국 국토의 넓기가 넓긴 넓은가 보다.


2003년 8월 21일 목요일

* 아침 경건의 시간을 7시에 김학용 회장 방에서 열렸다. 사회 박의용 장로 기도 김재수 장로 설교에 성백진 장로

이 아침에 드리는 경건의 예배가 참으로 은혜롭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 30분에 계림을 가기 위해 공항으로 나갔다.

비행기 수속으로 시간을 보내고 역시 동방항공기 편으로 계림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첨 대구공항에서 출발할 때에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관광객이었지만 상해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에는 중국인, 대만인, 외국인들도 많았다.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받았는데 음식 맛이 별로이고 간식도 별로였다. 수속을 마치고 공황으로 나오자 계림에서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가 새롭게 나왔다. 그리고 우리를 태우고 다닐 관광차도 다시 왔고......

가이드의 안내로 우선 계림 시내로 들어갔다. 가는 길의 풍경이 우리네 이웃 동네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내로 갈수록 가로수의 모습이 다르다. 가로수가 바로 계수나무라고 한다. 계수나무는 10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없지만 꽃의 향기가 좋단다.


* 계림(구이린)

 계림이란 계수나무 숲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란다.

우선 식사부터 했다. 우리나라 음식과 중국 음식의 중간이라고 할까. 자리를 잘못 잡은 탓에 굉장히 무더운 곳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래도 억지로지만 많이 먹어야지. 랭킹 2위를 유지 하려면...

   * 계림에서 우리 안내한 청년

   * 계림공항에서 기념으로

 계림에서 파는 참깨는 값도 싼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참깨를 사는 것을 보면. 점심을 먹고 곧 바로 이강 유람을 위해 떠났다. 어제 비가 왔었다고 하는데 가는 길에 간간이 차창으로 비가 뿌린다. 계림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 포장공사를 새로 하고 있는데 엄청 버스가 흔들린다. 도로공사도 인민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중장비는 거의 안 쓰고 인력으로만 하다보니 아주 오래 걸린다고 한다. 그래도 가다보면 100일 어쩌고 저쩌고 써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100일만에 완공시키자는 뜻인 것 같은데...  가는 길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암절벽으로 된 산들의 모습.

계림에는 석회석 산으로 360개의 동굴이 있고 36,000개의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계림에는 4개의 특징이 있단다.

1. 산청(山淸) 2. 수수(水秀) 3. 석미(石美) 4.동굴이 많음

* 이강 유람

* 모노레일 타기 위해

이강 초입에서 모노레일을 탔다. 모노레일은 두 사람이 타는 것으로 전기의 힘으로 가는데 조정은 레바로 한다. 운전은 레버를 앞으로 밀면 속도가 붙고 뒤로 당기면 속도가 줄어든다. 뒤뚱 뒤뚱 거리는 커브 길도 있고 좀 위험스런 탈 것이지만 재미있다. 앞차를 들이박지 않도록 속도를 잘 조절하여야 했다.桂林山水 甲天下"계림 산수가 천하제일이다"라는

이강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계림의 산수를 감상하면서 유람선을 탔다. 얼마를 가니까 사공인 듯한 노인의 배에서 가마우지를 만났다. 자신이 잡은 고기를 목을 졸라놓은 끈 때문에 먹지 못하고 주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새. 

마치 까마귀처럼 생겼는데 까마귀보단 조금 컸다. 아쉽게도 가마우지가 고기를 잡는 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정말 이강의 물은 아름답고 깨끗했고 주변의 경치는 한 폭의 산수화였다. 중국인들이 상상으로 그린 산수화라고 했는데 계림에 와서 보곤  그런 느낌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계림의 산수는 비가 오는 날이나 안개가 낀 날의 풍경이 더 아름다운 것은 풍경과 안개가 어울려 그리는 한 폭의 산수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란다.

* 계림 이강의 산수를 배경으로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꾸이린(桂林)을 찾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하니 그럴만 하다.

배위로 올라가 열심히 사진기를 눌러댄다. 배에서 꾸이린(桂林) 사진첩을 내가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사진첩에 찍힌 사진만큼 찍을 수 없으니 사진첩을 사는 것이 계림산수를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길 수 있지 않겠는가?

 *관암동굴 관광

 

이강의 산수를 본 우리는 관암동굴을 향해 수많은 계단을 올랐다. 정 권사님은 숨이 차지만 이곳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다면서 열심히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한참 서있다. * 이강과 안개낀 계림의 절경

굴속에 들어서니 시원한 느낌. 종유석의 생긴 모습에 따라 갖가지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그럴싸하다. 하긴 이름을 붙여놓고 그렇게 연상하면 다 그래 보인다. 글재주가 없으니 글로 표현하는 건 포기하자. 이 굴은 어느 농부가 뱀을 잡으려다 뱀이 갑자기 뚝 떨어져 그곳을 파보니 밑에 동굴이 있었다나. 그래서 발견한 그곳에 대가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줘서 운영하도록 하여 돈을 잘 벌고 있다고 한다. 대만의 자본가가 투자해서 동굴을 개발중인데 동굴 내부를 아직 3 Km 밖에 개발 못했다 하니 다 개발되면 어마어마한 규모일 것 같다.

 사진 한 장 찍으려 해도 아가씨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사진도 마음대로 못 찍는다. 우리 돈 1,000원을 받겠다는 것이다.

배도 타면서 밖을 나오는 출구로 오니 또 무언가 타고 나가도록 해놓았는데 기막힌 상술이다. 다시 관암동굴을 나와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가는 도중에 들린 곳이 계림정보당국이 운영하는 옥가공 제품을 선전하는 곳이다. 가이드 말로는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상품을 사는 건 자유란다. 아마 정부에서 관광객을 위한 상술인 것 같았다. 역시 사람들은 물건을 보면 견물생심인 것 같다. 사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역시 물건을 보면 사지 않고선 안 되는 걸 보면... 그래서 관광코스로 의무화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나와 다시 계림지역에서 나는 수정 및 광산을 홍보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가이드가 의무적으로 안내하는 곳이란다. 각종 수정 제품들이 진열되었는데 조금 의논이 길어졌지만 참가한 모두 기념으로 수정으로 만든 선그라스를 한 개씩 우리 돈으로 12,000에 흥정해서 샀다. 재미있는 관광상품. 역시 값은 무지무지 깎아야 하니, 많이 배운다. 저녁 식사 역시 점심 식사한 곳에서 하고 저녁에는 소수민족이 연출하는 쇼를 관람했다.

* 소수민족 쇼 관람

저녁 후 7시부터 8시30분까지 소수 민족 쇼를 관람했다.

11개 부족인가가 고유 민족의상을 입고 풍습을 재현하는 쇼다.

특이한 것은 극장 맨 앞줄에 조명, 음악 등 연출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기기를 놓고 조정하는 것이었다. 따로 조정실이 없는 듯...

나름대로 조명과 음악, 의상 등이 우리와는 낯 설은 새로운 것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을 했다.

쇼의 규모나 하는 것이 보통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계림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숫자가 많지 않아서 소수민족에 속하기엔 아직 부족하단다.

쇼 구경을 마친 후 모두 기대에 찬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 발맛사지 유감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발은 신체의 오장육부가 다 있어 곳곳의 혈을 풀어주므로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넓은 홀에 누울 수 있는 쇼파가 주욱 놓여있고 더운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하나씩 달린 발을 담글 수 있는 조그만 욕조(?)가 있다.

남녀의 음양설에 의해 남자 손님은 여자가 여자 손님은 남자가 발맛사지를 하도록 담당이 정해진다. 모두 20대 초반 전후의 맛사지를 하는 사람들인데 꾸이린(桂林)에 맛사지 전문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야 된다고 한다.

따뜻한 물에 누런 가루를 타니 약초 풀어 놓은 듯 냄새가 난다. 물에 발을 씻고 나면 발맛사지를 시작하는데 발맛사지가 끝나면  어깨 팔 다리 머리까지 시원하게 안마를 해줘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거다. 발맛사지는 이미 우리가 여행 올 때 옵션으로 들어 있는 것인데 가이드 말이 팁을 5000원은 줘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과 지난 번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말로 3,000원만해도 충분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우린 모두 3,000원을 주기로 했다. 문제는 다른 팀은 5,000원을 줬는데 우리만 3,000원을 준 까닭으로 생각했던 서비스를 받지 못한데 있었다. 회원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급기야 단장님이 속이 상하게 만든 일까지 되고 말았다.

속이 시원해야할 맛사지가 시원하지 못한 채 호텔로 향했다. 이곳은 별 5개의 호텔이란다.


2003년 8월 22일 금요일

아침 일찍 경건의 시간을 보냈다.  사회 강우석 장로 기도 이상기 장로 설교에 이기언 장로가 맡았다.

 

                   *복파산과 공원에서 기체조 하는 사람들


 오늘은 일정이 바쁘단다. 식사 후 곧바로 시내 관광 및 웅호산장을 견학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계림 시내에 있는 복파산 공원을 들렸다. 상주의 앙산 광장과 같은 곳인데 중국무예체조를 하는 사람들. 그 외 체력단련을 위해 애쓰는 시민들이 많았다. 복파산을 힘겹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복파산은 93미터 높이에 340계단으로 이루어 졌다. 복파장군에 대한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냥 강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그래서 계단이 가파르다. 하여간 기막힌 상술이다. 관광 자원으로 내세울 만 한 것이 별로 없는데도 그냥 꾸이린(桂林) 시내와 이강을 전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입장료를 받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복파산을 내려와서 다시 민물양식이 아닌 진주가공공장을 갔다. 민물진주와 바다진주와는 다르단다. 이제 물건 사는 일엔 사람들이 좀 이력이 난 것 같아 다행스럽다. 진주가게를 나와 다시 웅호 산장으로 향했다.

*웅호산장

이곳은 곰과 호랑이를 키우는 일종의 동물원인 셈이다. 이곳에 사육되는 곰의 수효는

              *호랑이와 소와의 싸움


 300마리가 넘고, 호랑이도 약 370마리가 넘는다는 가이드의 말이다. 먼저 동물 쇼를 관람했다. 동물들이 벌리는 갖가지 재주를 보면서 야성을 잃어버린 곰과 호랑이들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동물들의 쇼가 끝난 후 야외에 펼쳐진 동물들의 모습을 보는데 우리마다 엄청나게 많은 호랑이와 곰들을 봤는데 특히 백호의 모습도 5마리 이상 구경할 수 있었다. 다시 광장에 나가서 사람과 짐승들이 펼치는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말을 타고 달리며 재주를 부리는 기마소년 소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쏘기 등 갖가지 재주를 부렸다. 그 외 동물들의 자전거 타기, 공굴리기 등...

마지막 재주는 약 30미터가 넘을 정도의 높이에 매달린 외줄에서 곰이 오토바이를 타고 약 200미터가 넘는 거리를 횡단하는 것이었다. 동물들의 훈련도 훈련이려니와 이를 이용한 관광자원화를 꾀한 것도 사둘만하다. 특히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소와 호랑이와의 싸움. 어차피 호랑이의 밥으로 사용될 황소를 호랑이와 싸우게 해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실제의 모습을 관광 상품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소의 모습만 보고 그곳을 떠났다.

계림에서 이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상해로 가는 날이다.

다시 상해를 가면서 우린 저녁 식사 이야길 했다. 이와 이곳 까지 온 김에 괜찮은 해물 요리를 먹어 보자는 뜻으로....

그러나 문제는 돈이 문제였다. 가이드와 함께 상의하자는 논의를 하고 상해로 왔다. 저녁은 상해에 도착한 후 바로 첫날 관광하지 못한 홍구공원을 가기로 했다.

*홍구공원

윤봉길의사의 의거 현장인 홍구공원(虹口公園 : 홍코우꽁위엔)

               * 홍구공원의 윤봉길 기념비


1932년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을 폭살한 사건. 1932년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훙커우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기념 및 천장절 기념식을 가졌다. 김구의 명령을 받은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은 그해 4월 29일 폭탄장치를 한 물통과 도시락을 들고 일본인으로 가장, 식장에 들어가 오전 11시 40분경 참석자 전원이 묵도하는 시간에 폭탄을 던졌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즉사하고,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한쪽 눈을 실명(失明),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신분을 안 밝히고 자결하려 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어 체포된 후, 일본의 오사카로 이송되어 위수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이 거사는 일제를 크게 자극하였고, 일본 관헌은 한국 교포들의 근거지에 난입하여 사건과 무관한 안창호 등 11명을 검거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만보산 사건으로 한때 악화되었던 중국 거류 한국인과 중국 관민과의 감정이 호전되고, 교포에 대한 중국인의 환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후대를 받게 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하였다.

노신공원(魯迅公園 )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원 안에는 노신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기념관은 노신의 고향인 소흥성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기념관 안에는 작가의 필체가 담긴 원고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에는 모택동이 직접 쓴 '魯迅先生之墓(노

신선생의 묘)'라는 글자가 있다.

우리에게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으로, 최근에 윤의사의 항거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매정(梅亭 : 메이팅)이란 이름의 정자가 세워져 있지만, 주위에 '윤봉길 의거현장'이라고 세겨 진 비석만이 홀로 서 있어서 단지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관광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상하이시 북쪽에 위치한 이 공원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루쉰을 기념한 곳으로, 일명 홍구공원(虹口公園)이라고도 한다. 원내에는 루쉰의 묘와 루쉰기념관이 있고, 공원 옆에는 루쉰이 말년을 보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원 안 루쉰 묘 바로 옆에 있는 루쉰 기념관에는 루쉰의 친필 원고와 애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술로 유명한 루쉰의 고향인 사오싱(紹興)의 민간주택을 모방한 건물로, 지붕의 검은 기와와 흰 벽의 대조가 아름답다. 그리고 루쉰 묘의 묘비명은 마오쩌둥의 필체이다.

그 외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의미 깊게 기억되는 곳이다. 한국인이라면 상하이에서 찾아가 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로, 현재 루쉰 공원 내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2층 누각 매헌(梅軒)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내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눈에 띄지는 않는다.

 홍구 공원을 나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여기서도 가이드가 차질을 빚어 우리가 주문하지 않은 식사를 주문해 버렸다. 할 수 없이 상해에서 해물요리를 가미한 저녁 식사를 했다. 입맛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입맛엔 최고의 요리라고 하는데 별로 인 걸 어쩌랴.

한 가지 음식이 무척 맛있다고 느껴 잘 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자라탕이었다. 모르고 먹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자라 모가지를 보니 입맛이 싹 가셨다. 허허허... 내 입맛도 빼앗길 때가 있다니.

단장님과 회장님 그리고 여행사 임 사장의 절충으로 저녁문제는 해결했다.

오랜 여행의 여독 탓인가 동방항공호텔의 잠은 쉽게 빠져들었다.



2003년 8월 23일 토요일

오늘 아침 경건의 시간은 사회 박종환 장로, 기도 김학용 장로, 김재수 장로가 말씀을 맡았다. 김종기 장로의 순서인데 오지 못해서 대신 맡은 셈이다. 오늘은 마지막 상해 관광과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가이드의 안내로 먼저 옥불사를 들렸다.

 * 옥불사 관광

옥불사 玉佛寺(위푸스) 

옥불사는 상하이에서도 가장 방문하는 사람이 많은 선종의 명찰이다. 평일에는 외국인과 가이드만 입장이 가능하다.

옥불사는 옥불루(玉佛樓) 안의 석가모니좌상(釋迦牟尼坐像)과 그 왼쪽의 와불당에 모셔져 있는 석가열반상(釋迦涅槃像)이 유명하다. 모두 백옥으로 만들어진 석가상으로, 특히 옥불루의 좌상은 높이 19m, 폭 134cm로 크다. 백옥 특유의 반들반들한 피부, 선명한 입술과 눈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주전인 대웅보전 앞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계속 피우는 향 때문에 근처는 연기로 자욱하다. 기도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지면에 문지를 정도로 열심히 기도를 올리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다.

옥불사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옥불 이외에도 화려하게 채색된 사천왕상, 금색의 삼존대불이라든지 미륵보살, 명나라 시대의 관음보살목상 등이 있다. 또한, 4세기에서 17세기 경에 이르기까지, 당(唐)이나 송(松), 명(明)나라 등이 각 시대의 경전은 7,000권에 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2층에 모셔져 있는 명나라 때의 목판불경은 잘 알려져 있다. 경내의 서쪽에는 정진요리를 먹을 수 있는 가게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겐 절의 모습은 별로였지만 거대한 옥불은 볼만 했다.

그리고 중국엔 우리와 달라 유명한 고승들을 부처로 모신 곳이 많음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으로 불리는 성황요예원을 들렀다.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2시간이나 주었는데 여기는 우리 돈이 통용되지 않아서 회원들이 불편을 겪었다. 이상하게도 가이드는 우리와 기념촬영을 마친 후 보이지 않아 안타까움은 더 했다. 아마 자유롭게 여기서 상품을 구매하면 가이드에겐 아무런 이익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친절한 가이드였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좀 서운하기도 하다.  이 곳은 중국 고 건축을 그대로 잘 살려 관광할 수 있는 거리로 잘 보존되었다.          

                                       * 성황요예원(구시장)에서

아마도 서양인들이 여길 오면 매우 인상 깊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2시간의 여유시간은 구경하는데 좀 지루하고 지치기도 했다. 곧 이어 상해에서의 마지막 점심시간을 가졌다.

* 자금성 식당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

이제 중국 음식에 좀 길들여진다고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이 곳 식당엔 매장까지 설치하여 상품을 팔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우린 남경로를 관광했다. 여기는 우리나라의 명동거리와 비슷하다고 할까?

백화점 거리였다. 한 자동차 매장엔 우리의 현대차인 소나타가 북경소나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자동차와 경쟁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퍽 자랑스럽기만 하다.

무더위에 우리 돈을 쓸 수 없는 형편에 계속 아이쇼핑만 하자니 두 시간이란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에어콘이 잘 나오는 매장에서 쉬기도 하고 시원한 계단에 주저앉아 쉬기도 하다가 모이는 시간이 다 되어 함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네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이상기, 성백일, 권상준, 안창식 장로. 이기언 장로의 말로는 아마도 발맛사지 받으러 갔을 꺼라고 추측을 했다. 15분 이상이 경과 한 후에야 이들이* 중국의 명동이라는 남경 거리의 모습

 헐레벌떡 뛰어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뒤에 중국인 여인이 따라왔다. 이유인즉 발맛사지를 하러 갔는데 우리 돈은 통용이 안 되고 카드는 된다고 해서 느긋하게 시간을 기다렸는데 막상 나올려고 하니 카드가 안 된다고 기어이 우리 일행이 있는 곳까지 돈을 받으려고 중국 여인이 딸아 온 것이다. 그 이유로 모두 벌금을 물게 했다.

* 다시 포동공항으로

* 후동공항바닥에 앉아서

 차는 이제 상해를 떠나기 위한 포동공항으로 이동했다. 가이드와의 이별도 다가왔다. 그동안 정이 들었노라고 눈시울을 붉힌다.

후동 공항 발 인천공항 행 비행기가 정시보다 늦어 져 우린 모두 공항 바닥에 편하게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니 우리가 현장에서 산 모든 것들이 모두 비싸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실크 이불은 현장보다 10,000원 이상 비쌌다. 결국 모든 쇼핑은 제일 마지막에 해야 한다는 진리를 여행막바지에 깨달은 셈이다. 허허

우리를 태운 비행이가 후동 공항을 떠나고 한 시간 10분의 비행을 끝으로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닿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인천공항의 날씨가 악천후여서 많은 비행기들이 회항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하늘에서 본 천둥번개가 아름답고 무섭게 느꼈는데 인천공항에는 소나기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천공항에 무사히 착륙을 했으니 감사할 수밖에....

  우리 일행이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일의 시작으로 5박 6일의 실로암 중국 기행은 대단원의 마무리를 지었다.

          * 식사시간은 언제나 즐거워라!         1등 박의용, 2등 김재수

그동안 여행을 위해 무사히 귀국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우리 일행을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인쳔공항에서 출발하기 전

 채순화(蔡順花) 양은 조선족 출신으로 연변에서 어린이 집 교사를 하다가 보다 낳은 생활을 위해 가이드로 직업을 전환했단다. 그녀는 상해화형해외여유공사(上海華亨海外旅遊公司) 한국부소속의 가이드였고 우리를 태운 차는 금강(집단)유한공사(錦江集團有限公司) 소속의 관광버스였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둘러 보며

 멀리 황포강을 건너 동방명주탑이 보인다.

 식사시간은 즐거워

  

 

호구탑 앞에서 권상준 장로 부부  

호구탑 앞에서 성백일 장로와 함께  

성백일 장로 형님 내외 

이영숙 권사 형수님 

실크 이불 공장에 앉아서 사지는 않고 뭘 하고 있는지 

마음은 꿀떡인데 .... 

8월 19일 이정자 형수님 권사 생일이었다. 

  

이기언 장로, 정명순 권사, 이정자 권사, 이영숙 권사님이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케익을 자르고 생일 축하 노래. 생일 축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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