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병인박해와 상주 옥터의 순교자들

빛마당 2014. 2. 27. 20:15

병인박해와 상주 옥터의 순교자들

천주교 안동교구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장 신 대 원

목 차

Ⅰ. 들어가는 말10

Ⅱ. 병인년 전(前) 교회 형편과 박해의 발단13

1. 병인년 전후의 교회 형편13

2. 교회와 병인박해의 발단 배경18

Ⅲ. 병인박해와 북부지방의 순교자들21

1. 병인박해와 교우 촌22

Ⅳ. 나오면서43

1. 병인박해 후의 신앙공동체(공소)들43

2. 순교신앙은 교구공동체의 원동력이다.45

병인박해와 상주 옥터의 순교자들

천주교 안동교구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장

신 대 원

Ⅰ. 들어가는 말

한국천주교회는 창설(1784)당시부터 세간에 집중적인 이목을 받았고, 급기야는 1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조정과 문중 등 정치와 사회로부터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천주교가 한국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배척을 받고 박해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신유학(정주학)적 사상으로 건국통치이념을 표방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지식인뿐 아니라 각각의 사회계층으로부터 신유학이 더 이상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자성의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 자성의 목소리는, 조정은 물론이고 사회체제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쇄신의 물결로 터져나가고 마침내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이념, 새로운 학문을 갈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물결의 한 복판에 서학(西學) 곧 천주학(天主學)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 천주학은 당시 유명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즉 사회지도계층의 인사들이라면 누구나 호감을 갖고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학문으로서 호감을 얻는 것과 정치적인 분위기는 사뭇 다른 것이 현실사회다. 따라서 천주학이 비록 사회를 쇄신할 수 있는 대안적 학문으로서 어느 정도 호감을 받기는 하였지만, 실제 사회생활에 적용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당시에도 국가와 사회가 새롭게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기득권층, 즉 수구세력의 반발 또한 격심하였다. 그리하여 몇 몇 뜻있는 지식인들(유학자)에 의해서 천주교는 학문연구와 동시에 생활신조(신앙)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마침내 이 땅에 천주교가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여곡절 끝에 창립된 조선천주교회는 중국의 북경교구에 소속된 신앙공동체로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출발점부터 교회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대적 상황들과 사사건건이 부딪힐 일들이 예견되어져 있었다. 200년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속에서 100여년이라는 박해시대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결국 길고 험난한 정치적, 사회적 박해(탄압)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천주교인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은혜롭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한국천주교의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박해는 수도 없이 많았고 또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는 1866년 한불조약이 성사될 때까지, 아니 1900년 초, 심지어는 6,25 한국전쟁 때까지 이 박해는 단 한 번도 쉴 날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특히 초대교회부터 구한말 때까지 100여년의 긴 박해시기만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박해가 있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1785),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경신박해(1860), 병인박해(1866) 등이 그것이다.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선생이 1775년 천주교를 신봉하기 위하여 소백산 자락 순흥고을로 이주하여 수덕생활(修德生活)을 한 것을 제외하면, 경상도 북부지방에 최초로 세례 받은 신자 가정이 들어 온 때는 1785년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에 이주한, 서광수(徐光洙)일가가 최초다. 그렇다면 북부지방은 사실상 박해의 조짐이 일기 시작하던 초기인 1785년부터 그 숱한 박해를 고스란히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해시기를 겪는 동안 이곳 북부지역은 어느 때는 너그러운 어머니로서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을 보듬어 안아주고, 어느 때는 그렇게 보듬어 안아주던 신자들을 박해의 칼날 속으로 내보내야 했던 못자리 역할까지 도맡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본 논고는 모든 박해를 모두 다루고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병인(1866)년 박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박해의 과정 속에서 영남의 북부지방에서 천주교신앙을 증언하다 순교한 이들(기록에 남아있는)의 면면을 소개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1866년 병인년(丙寅年)에 천주교 때문에 체포되어 상주관아로 끌려와 장렬하게 순교한 이들과 상주감옥에 갇혔다가 다른 관아로 이송되어 순교한 이들을 소개해 볼 작정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신념(信念) 혹은 신앙(信仰)이 오늘에 사는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주는 것인지를 깊이 사려해보고자 하는 데 주안점을 두면서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

Ⅱ. 병인년 전(前) 교회 형편과 박해의 발단

1. 병인년 전후의 교회 형편

1801년 신유 대박해가 끝난 후 조선교회는 수많은 신자들을 잃었고 더욱이 교회 지도자들을 잃어버려 완전히 폐허상태가 되었다. 다시는 이 땅에 천주교가 발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쑥대밭이 되어 그야말로 ‘비참’ 그 자체였다. 그러나 ‘비참성’ 속에서도 ‘위대성’을 발휘하는 것이 신앙의 힘일 수도 있겠다. 조선교회 제1세대 지도자들이 순교하자 신태보․정하상․이여진․권계인 등을 중심으로 한 제2세대 지도자들이 발군의 힘을 내어 무너진 조선교회를 다시 일으키려는 이른바 “교회재건운동”을 벌이는 한편 성직자 영입운동까지 전개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박해로 말미암아 실의에 빠진 신자들에게 사기를 북돋우는 의미에서 신앙공동체 마을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우 촌(敎友村)’의 효시다.

박해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제2세대 교회지도자들은 로마교황청에 성직자 영입에 관한 청원서를 거듭 올렸고, 로마교황청에서는 1827년 9월 1일자로 프랑스의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교장인 랑글로아(P. Langlois) 신부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어 조선교회에 성직자 파견에 관한 요청서를 하달하였다. 마침내 파리외방선교회는 2년 뒤인 1829년 6월 29일에 브뤼기에르(Bruguiere, Barthelemy) 신부를 태국의 방콕에서 주교서품을 수여함으로써 조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이라는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1830년 11월 30일 교황 비오 8세가 서거하자, 뒤를 이은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대리감목구로 승격시키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박해 상황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신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그에 따라 교우 촌의 형성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주교와 신부들이 조선교회를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하였다. 1794년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 온 성직자는 1834년 1월 3일에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삐꼬) 신부였으며, 초대교구장 주교는 안타깝게도 1835년 10월 20일에 조선이 가까운 중국변방에서 뇌일혈로 서거하였다.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는 교구장의 장례를 마친 다음 1836년 1월 말에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신부는 1836년 12월 28일 유방제 신부가 신학생 3명(김대건․최방제․최양업)을 데리고 출국을 전송한 신자들과 함께 입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구장이 서거하자 교황청에서는 당시 중국 사천성에서 포교하던 앵베르(Imbert)신부를 1837년 5월 14일에 조선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서품하였으며, 앵베르 주교는 1837년 12월 3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신유박해가 끝난 직후부터 경상도 북부지방에는 이미 박해를 피해 많은 신앙인들이 숨어들었고, 그에 따라 교우 촌 역시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이들 교우촌은 결국 조정에 의한 박해의 철퇴와 칼날을 비껴갈 수 없었다. 을해박해(1815년)때는 일월산의 우련전과 곧은 정, 왕피리의 갈전(수비면 신암리), 석보의 머루산, 안덕의 노래산 등의 교우 촌이 쑥대밭이 되었고 교우들은 경주와 안동감영으로 끌려갔다. 정해박해(1827년)때는 화령지방의 멍에목과 앵무당, 봉화의 곰직이, 안동의 명전(명동) 등의 교우 촌이 조정의 철퇴를 맞았다. 이 때 3도 도회장이었던 신태보(베드로)와 그 일가가 ‘삼도 괴수’로 지목되어 상주 모동의 잣골(신흥)에서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끌려가는 등 몇 차례의 박해를 겪었다.

모진 박해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야 앵베르 주교를 대표로하는 성직자들이 조선에 입국하였는데, 입국한 뒤 경상도지방을 담당한 성직자가 바로 샤스탕 신부였다. 기해박해(1839년)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샤스탕 신부와 신태보(베드로)가 극적으로 전주감영에서 만나는 기쁨도 누렸다.

1836년 모방신부에 의해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길에 올랐던 최방제(프란치스꼬)․최양업(토마스)․김대건(안드레아) 신학생들 가운데 최방제 신학생은 병으로 사망하고, 김대건 안드레아가 1845년 8월 7일에 한국 최초로 중국 킨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해 8월 31일에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여 9월 28일에 제주도에 입항, 다시 10월 12일에 전라도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사목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병오박해(1846년)를 당하여 체포되어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최양업(토마스) 신학생은 1849년 4월 15일 중국 쟝난 교구장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2월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도와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였으며, 특히 경상도 남부지방을 주요 사목활동지로 삼았다. 그러나 경신박해(1860년)가 일어나자 언양의 간월 땅에 숨어 지내다가 1861년 6월 경 제4대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보고를 하러 가던 중 6월 15일에 병에 걸려 문경새재 주막집(진안리)에서 선종하였다.

한편, 당시 경상도 북부지방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업고 있는 한실을 비롯하여 여우목․마원․수봉․건학․부럭이(문경)․삼괴․공성․물량리(낙동)․동송리(예천)․용궁(청호리)․상주의 멍에목과 앵무동 등 수많은 기존 및 신생 교우촌들이 형성되어 경상도 복음전파에 속도를 내고 있었다. 당시 상주와 문경 등 경상도 서북부 지방을 담당하였던 사제는 최양업 신부와 절친한 친구였던 페롱 권(權) 신부였고, 사목중심지는 모동의 산막골(신흥)이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하자 1861년 10월에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성직자들에게 다시 각자의 구역을 정해주었다. 조선교구가 이미 성모마리아께 바쳐졌기 때문에 각 성직자들이 맡은 구역마다 성모축일 중 하나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 : 서울지역-성모무염시태

다블뤼(Daveluy) 보좌주교 : 충청도 홍주지방-성모성탄

페롱(Fe'ron)신부 : 경상도 서북부 지방-성모승천

푸르티에(Pourthie')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

: 배론 성요셉 신학교

리델(Ridel) 신부 : 충청도 동북부 지방-성모자헌

조안노(Joanno) 신부 : 공주와 그 인근지방-성모영보

랑드르(Landre) 신부 : 서부 충청도(내포지방)-성모통고

칼레(Calais) 신부 : 서부 경상도-성모 취결레(페롱 신부 후임,

1864년 이후 관장함)

이와 같이 성직자들은 각 지역을 맡아 관장함으로써 적어도 자기 관할구역에서의 포교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이에 세례를 받는 신자들의 수도 점차 증가 되어갔다. 이때는 1860년 경신년 박해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되고, 성직자들의 선교활동도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사회는 조정의 지겨운 당파싸움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곳곳에서 민란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경주에서 천주교․도교․불교․유교 등의 교리를 모방하여 ‘서학’에 반대하는 ‘동학’운동을 창시하였다. 이 때문에 천주교는 조정에서 민란과 동학교도들을 진압할 때 크고 작은 박해와 더불어 타격을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조선교구가 설정된 1831년 이후, 계속되던 크고 작은 박해는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哲宗, 1849-1863) 재위 시기인 14년 동안은 경신박해(1860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전국적인 대규모 박해가 없었으며 평온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오히려 철종 집안과 천주교 사이에는 깊은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남인에 속하였던 안동김씨의 세도가들도 천주교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기록에 의하면 1864년에 천주교 신자 수가 2만 3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863년 말(양력, 1864년) 철종 임금이 승하하자 제26대 임금으로 고종(高宗, 1864-1907)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따라서 실권은 자연히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인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당시 대비였던 풍양 조씨 집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풍양 조씨 집안은 안동김씨 집안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므로, 철종 연간에 천주교와 우호적이었던 안동김씨 일파가 물러나게 되자, 천주교는 자연히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면, 고종임금의 모친인 민(閔) 부대부인(府大夫人)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있었고, 또 고종의 유모인 박 마르타가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의 역할을 은근히 기대하던 형편에 놓여있었다.

2. 교회와 병인박해의 발단 배경

병인박해란, 조선후기인 1866년(병인, 고종3년)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잃어버릴 때까지의 천주교 박해를 일컫는다. 주지하듯이 한국천주교회는 창립 초부터 박해의 칼날 위를 걷기 시작하여 피 흘림, 피난, 추위와 굶주림의 연속적인 수난으로 점철되어져 왔다. 그 가운데서도 병인박해는 박해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과 피로 얼룩진 대(大) 박해였다.

병인박해의 발단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南下政策)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1년) 러시아는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교섭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은 놀라고 당황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비책 또한 없었다. 1865년 음력 9월 또 다시 러시아인들이 통섭교섭을 요구하여 오자 마침내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와 교섭을 통하여 일시적이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당시에 이미 천주교인이 된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박 마르타에게 부탁하여 홍봉주(토마스)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베르뇌 주교를 불러들였고, 홍봉주는 승지(承旨)였던 남종삼(요한)에게 청원서의 작성을 간청하여 동의를 얻었다.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청원서를 작성할 것을 간청하였는데 청원서의 내용은,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요지였다. 물론 대원군도 이러한 청원서 작성에 대하여 만족하였으며, 뒤이어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남종삼에게 전하였는데 이때가 1865년 12월경이었다.

1866년 1월 30일(양) 베르뇌 주교는 남종삼(요한) 등의 요청으로 러시아의 침공을 방지하는 문제를 놓고 대원군과의 면담을 위하여 사목순시를 중단하고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블뤼 보좌주교도 베르뇌 주교보다 앞서 1월 25일경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월 31일 남종삼이 대원군을 찾아갔을 때, 대원군은 돌연 그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며, 결국 베르뇌 주교는 2월 5일경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돌아왔다. 베르뇌 주교는 불안한 마음으로 대원군이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2월 14일 포졸들이 두 차례나 경복궁 중건에 관한 추렴문제로 찾아 왔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이 상황이 천주교를 탄압하려는 사전계획이라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그 자리를 피하여 은신처에 숨었다. 그러나 2월 22-23일 밤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 닥쳤고, 결국 베르뇌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결국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신부와 도리(Dori) 신부․볼리외(Beaulieu) 신부 등과 함께 모진 고문과 심문을 당하였는데, 심문 당할 때 대원군도 장남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와 그 광경을 참관하고 있었다. 그 후 4월 8일 새남터에서 3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베르뇌 주교는 52세에 참수 치명하였다. 이날 남종삼(요한)과 홍봉주(토마스)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고, 3월 11일에는 푸르티에(Pourthie)․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가 새남터에서, 3월 30일에는 다블뤼 주교․위앵(Huin), 오메트르(Aumaitre)신부와 장주기․황석두 등이 보령 갈매 못에서 참수 되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병인박해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 박해의 소식은 경상도 전역으로도 전해졌다. 이때 대구지방에 판공성사를 주러 왔던 리델 신부는 급히 충청도 진천지방으로 피신하였고, 다른 많은 신자들도 박해를 피해 문경의 한실과 칠곡의 한티 등으로 피난을 갔다.

경상도 서북부 지방을 담당하던 페롱신부는 1866년 10월 29일자 서한에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경상도 북부지방을 담당하던 깔레 신부도 1866년 6월 10일 서한에서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데 무엇보다도 박상근(마티아)와의 눈물겨운 우정 소식은 현재까지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신앙인들 가슴 속에 남아있다.

1767년 박해는 약간 주춤하여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이 더욱 심해진 것은 1868년 4월 프랑스 해군도독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南延君)묘 도굴사건과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였다. 이러한 병인양요, 도굴사건․신미양요 등으로 대원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마침내 전국적으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박해는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갔지만, 결국 병인박해는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말미암아 종식되었다.

1866년부터 1873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일어났던 박해는 결국 순교자만도 8,000-2만 여명이나 나왔고《치명일기》, 수록된 숫자만도 877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24위가 1968년에 복자 위(位)에, 그리고 1984년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일반적으로 교회 사학자들은 1866년 초 천주교에 가해진 병인박해에 대해 대원군이 자신의 정치력을 만회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던 남종삼 등과 함께 베르뇌 주교를 통해 프랑스와의 공조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통상압력이 주춤했고, 중국에서 보내 온 조선 사신의 편지를 통하여 중국에서의 서양인 학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반대하는 자들의 정치적 음모도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공연연하게 대원군과 천주교의 우호관계를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운현궁에까지 천주교인들이 출입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며, 풍양 조씨 조 대비까지 가세하여 천주교인들에 대한 책동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종의 정치적 만회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박해는, 과거의 박해들이 유교적 윤리강상(倫理綱常)에 위배됨, 즉 무부무군(無父無君), 패륜지교(悖倫之敎)로 지목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과는 반대로, 흉도비류(凶徒匪類)인 서양 오랑캐와 작당하였다고 몰아 부침으로써 철저하게 정권의 정치적 음모가 주요한 원인 가운데 작용하였음을 반증해주는 것이었다.

Ⅲ. 병인박해와 북부지방의 순교자들

주지하듯이 경상도 북부지방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순교자의 못자리’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선조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탄압을 받고 체포되어 순교의 길로 걸어가도록 한 역사의 땅이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교구 관할지역 안에서 치명하기도 하였고, 또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대구, 서울, 전주, 충주, 공주 등지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치명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교구 내 지역이든 타 지역이든 간에 안동교구에 살다가 치명한 순교자들에 대하여 기록에 나타난 명단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병인박해와 교우 촌

[1] 교우촌 사람들의 삶과 영성

영남 북부지방에서 그리스도 복음의 씨앗이 전래 된 때는 거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시기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히려 창립시기보다 10년 정도 앞선다고도 말할 수 있다. 1775년부터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선생이 소백산 자락인 순흥 고을 구구리<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이주해 와서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철저한 수덕생활(修德生活)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뒤인 1784년에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안동교구는 그로부터 1년 뒤에 한양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서광수 일가가 을사추조적발사건에 연루되어 문중박해를 받고 함창의 배모기<상주시 이안면 양범리>로 피신하면서 복음의 씨앗을 받아 싹틔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출발된 안동교구의 전사(前史)는 1801년 신유박해를 필두로 하여 확산되어 나갔고,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안동교구 관할구역은 전역에 걸쳐 수많은 교우 촌들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상주와 문경을 시작으로 하여 예천, 의성, 안동, 풍기, 봉화, 청송, 영양, 영덕, 울진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 신앙심을 더욱 확고히 다져나갔다. 박해를 피해 교우 촌을 이루면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간 신자들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면 순교의 길로 나아갔고, 체포되지 않으면 곧장 복음 선포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지상최대 명령으로 알고 수행해 나아갔다. 박해시대 당시 교우들의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순교자적인 삶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포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경의 한실․마원․여우목․부럭이(동로)․건학이(명전), 그리고 점촌의 모전과 문경읍내 등 1차적으로 교우들이 많이 살았던 문경지방의 교우 촌들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하여 체포된 신자들은 대부분 문경 관아를 통하여 상주진영으로 압송되었다.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이윤일(요한)도 이때 체포되어 상주로 압송되었다가 후에 대구로 이송되어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신자들은 상주감옥에서 참수치명하거나 혹은 박해를 견디지 못해 옥사하였다. 박상근 마티아와 그의 숙모 홍 마리아, 서유형 바오로와 그의 형수 박 루시아, 김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한 13명의 한실 교우촌 교우들이 그들이다. 뿐만 아니라 김 스테파노는 영주 순흥이 고향이면서 안동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안동진영으로 잡혀가서 서울로 압송되어 1867년 3월 15일에 순교하였는가 하면, 1866년 11월 29일에는 문경현에서 체포된 이재현, 김예기, 김인기 등도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또 풍기의 다리골에서 살았던 신(申)생원도 풍기의 김 스테파노와 함께 서울에서 순교하였고, 외교인(外敎人)이었던 문경의 아전 문정택은 용감하게 신자들을 옹호하다가 체포되어 1868년 8월 3일에 진주감영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이 밖에도 1895년 뮈텔 주교가 직접 작성한《치명일기(致命日記)》나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가 증언한 병인사적(丙寅事跡)에 관한《박순집증언록(朴順集證言錄)》, 마백락 회장의《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안동교구사 자료 제4집《교구전사(敎區前史)》등과 관변사료인《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일성록(日省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에서는 안동교구 내에 살다가 체포되어 다른 지역으로 압송되고 거기에서 순교하였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사실 안동교구에 자리하고 있었던 교우 촌들은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상주를 포함한 경상도 북부지역은 박해시대 교우 촌들의 온상지(溫床趾)었고, 동시에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순교자들의 못자리’였다고 해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특히 현재에도 북부지방에는 100년이나 적어도 50년 이상 된 많은 공소(公所)들이 존재하고 있는데〈물론 이미 소멸된 공소도 많지만〉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박해시대 교우촌의 후신(後身)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까지도 박해시대 교우들의 후손들이 공소를 지키고 있는 곳도 상당수가 남아있다.

이렇게 많은 교우 촌을 형성하고 순교자들을 배출한 북부지역은 곧 순교자들의 후예 또는 후손으로 이루어진 교구라고 직설화법(直說話法)으로 고백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이 지금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은 ‘순교자적 영성’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증언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교리서는 “순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언이다. 순교란 죽음에까지 이르는 증언을 가리킨다. 순교자는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2473항)고 선포하고 있다. 사실 순교는 인간의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결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의 행위로서, 이 지고(至高)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 순종하여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최상의 사랑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순교는 죽음에 직면하여 신앙의 의미와 진리를 효과적으로 증거 하는 구체적인 행위이며,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육신을 죽이는 자를 초월하는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고, 의인(義人)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순교 란 무엇인가?

첫째, 순교는 실제로 죽어야 한다. 이때 실제로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참수(斬首)나 사사(賜死) 뿐만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문 등에 의해 옥사(獄死)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할 수 있다. 또한 그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진리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은 것이 되어야 하며, 순교자가 그 죽음을 그리스도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순교의 증거를 제시할 때 목격자(증언자)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어떤 순교자를 시복(諡福)하거나 시성(諡聖)할 때 반드시 목격자, 증언자, 사료(史料)들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교회는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의 증언이나 기록물에 의거하여, 그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순교 하였는가 아닌가를 순교사실을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4복음서(福音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순교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이후 교회는 역사와 세기를 통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일구어져 왔다. 그렇다면 교회는 시작부터 ‘순교의 영성’으로 출발 하였고, 바로 그 ‘순교의 영성’으로 지탱하고 발전해왔다고 고백해야 한다. 북부지역 또한 그러한 ‘순교자의 영성’으로 자라왔고, 지금도 ‘순교의 영성’을 통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현재 천주교안동교구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는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안동교구 안팎의 순교자들

병인박해(1866-1873)는 흥선 대원군이 위기에 처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되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일으킨 박해이다. 즉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관한 대원군의 정책실패에 따른 비판적 세력의 대원군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당시 조 대비를 비롯한 비판적 세력들은 대원군의 정책실패의 원인을 천주교와의 공조에 돌렸고, 대원군은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천주교와 공조를 끊어버리는 과정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박해를 겪고 잠시 시간적 여유를 가지던 신자들은 또다시 영문도 모르는 채 박해의 칼날 아래 맥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2]-1 상주 옥 터의 순교자들

1) 뮈텔(閔德孝,)의《치명일기(致命日記)》

가. 제(諸) 순교자(殉敎者) 목록 정리

번호

성·본명

살던 곳

순교지

순교일 및 연령

묘지

참고문헌

1

김호연 바오로

안동

안동

자택

1831(신묘)년

9월/36세

A, Daveluy 주교의《조선 주요 순교자약전》/CH. DALLET의《韓國天主敎會史》/안동교구의《교구전사(敎區前史)》

2

서태순 베드로

한실

상주

감옥

1866, 12,

18-19/44세

대구

(한티)

뮈텔(閔德孝,)의《치명일기(致命日記)》798-816번/《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번호43.

3

김 아우구스티노

1866,12,

18-19/62세

4

김 토마스

5

김 아우구스티노

6

김 베네딕토

7

김 빈첸시오

8

김 프란치스꼬

9

김 서방

10

장 서방

11

장 서방의 아내

번호

성·본명

살던 곳

순교지

순교일

및 연령

묘지

참고문헌

12

김 수산나

여우목

상주

감옥

1866,

12,15/49세

뮈텔(閔德孝,)의《치명일기(致命日記)》798-816번/《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번호43.

13

김 요셉

한실

1866년

14

김 베드로

15

모 막달레나

16

홍 마리아

마원

17

박 막달레나

1866년/45세

18

서유형 바오로

모전

1866년

상주시 이안면 나한리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번호47/마백락의《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서문동성당50년사》

19

박 루시아

20

박 사도요한

여우목

서울

1870, 7,

11./53세

뮈텔(閔德孝,)의《치명일기(致命日記)》183호/ 박순집의《박순집증언록》176-392쪽.

나.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

- 798. 서 (태순) 베드로(1822~1866) : 본디 충주(忠州) 장원 사람으로 대구에서 살고, 또 문경 한실로 이사 하였더니, 병인년에 잡혀 문경으로 들어갔다가 후에 상주 진영(鎭營)으로 가 교(絞)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44세요, 때는 병인 12월 18·9일 이러라.

- 799. 김 아우구스띠노(1804~1866) : 본디 청주(淸州) 갈매골 사람으로서 문경(聞慶) 한실로 이사하였더니, 병인년에 집안 소솔(所率)과 함께 잡혀 상주로 가 한가지로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62세요, 때는 병인년 12월 18·9일이러라.

- 800. 김 토마(?-1866) : 김 아우구스띠노의 아들이니, 그의 부친과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01. 김 아우구스띠노(?~1866) :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從孫)이니, 그의 종조(從祖)와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02. 김 안또니오(?~1866) : 이 위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이니, 그 종조와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03. 김 베네딕도(?~1866) : 이 위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이니, 그 종조와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04. 김 빈첸시오(?~1866) : 이 위 김 아우구스띠노의 종손이니, 그 종조와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05. 김 프란치스코(?~1866) : 이 위 아우구스띠노의 형이라, 저가 잡히기는 그 아우보다 대개 10일 후에 하였으나, 치명은 한가지로 하니라.

- 806. 김서방(金書房, ?~1866) : 이 위 김 프란치스코의 조카, 프란치스코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 하니라.

- 807. 김서방(金書房, ?~1866) : 이 위 김 프란치스코의 둘째 조카이니, 프란치스코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 하니라.

- 808. 장서방(張書房, ?~1866) : 내외 함께 잡혀 이 위 김 프란치스코와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09. 장 서방 아내(?~1866) : 그 장부와 한가지로 치명 하니라.

- 810. 김 수산나(1817~1866) : 공주 김 안드레아의 딸이요, 박 야고보의 아내라. 문경 호랑리에서 살제, 본 읍 포교에게 잡혀 상주로 이수(移囚)한지라. 잡힌 교우가 많아 12월 12일부터 매일 셋씩 죽일 새, 수산나는 15일에 치명하니, 나이는 49세요, 때는 병인 12월 15일 이러라.

- 811. 김 요셉(?~1866) : 본디 충청도 사람으로서 문경 한실로 이사하여 살더니, 동정(童貞)을 지키기로 뜻을 세우며 묵주(黙珠) 걸기로 생애(生涯)하다가 상주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 하니라.

- 812. 김 베드로(?~1866) : 김 요셉의 사촌이라. 문경 한실에 살며 동정(童貞)을 지키기로 뜻을 세웠더니, 병인년에 잡혀 상주로 가 치명 하니라.

- 813. 모 막달레나(?~1866) : 김 베드로의 모친이니, 그 아들과 한가지로 잡혀 치명 하니라.

- 814. 박 마티아(1836~1866) : 문경 아전이라. 그 숙모 홍 마리아와 한가지로 잡혀 교하여 치명 하니라. 나이는 30세요, 병인 12월 이러라.

- 815. 홍 마리아(?~1866) : 박 마티아의 숙모라.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61세 이러라.

- 816. 박 막달레나(1821~1866) : 박 마티아의 겨레라. 한가지로 잡혀서 치명하니, 나이는 45세 이러라.

[2-2] 그 밖의 순교자들

(위《치명일기(致命日記)》에 기록된 순교자 명단 이외에서 발췌한 기록이다.)

1) 서유형(바오로) : 문경 모전에 살던 그는 형수 박 루시아와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하였다.

2) 박 루시아 :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의 형수로서 문경 모전에 살다가 함께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했다.

3) 안창규 : 문경 호항리(여우목)에 살다가 체포되어 상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에 화형(火刑)되었다.

4) 안 아오구스티노 : 1966년에 순교했다. 문경 여우목 사람인 듯하다.

5) 안 요한 : 문경 여우목에 살다가 체포되어 상주진영으로 이송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에 치명했다.

6) 이상서(시몬) : 상주 사람으로 상주읍내에서 체포되어, 1866년에 교수형을 받았다. 나이 50세.

7) 전 사베리오 부인 : 1866년 1월 공주에서 순교한 순교자 전 사베리오의 부인으로 문경 동로면 부럭이에 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로 이송되어 와서 교수형을 받았다.

8) 안 세시리아 : 예천 사람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66년에 순교했다. 나이 15세.

[2]-3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와 서유형 바오로 약전(略傳)

1)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 (1837-1867)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현에서 아전(하급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세례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Calais, 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마티아는 3월 중순경 좁쌀을 사기 위해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로 갔다. 그런 다음 칼래 신부와 함께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서 신부를 숨겨 주었다.

3일 후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만 하였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 촌이 보이는 산에 오른 뒤 마티아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인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 죽겠습니다.”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와 있던 박상근 마티아는, 얼마 후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간 후에는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 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 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그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2)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1866)와 박 루시아(?-1866)

2)-1《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47> :

증언대상자

종류

관계

나이

순교지

순교일

기타

徐 바오로

목격 및 전문

미상

미상

상주

미상

.

*증언자 : 미상 * 목격자 : 成막달레나(서유형 바오로의 부인)

<높은 사랑 : 충북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叩馬里)에 사는 성재추 막달레나의 증언> : 서 바오로는 문경 모전 살더니, 그 형수 루시아와 함께 잡혀 상주 가서 치명하였다.(함께 잡혀가다가 놓인 成막달레나가 증언함)

2)-2《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과《서문동성당50년사》

이웃의 건학〈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에서 일어난 박해로 전 사베리오와 이 요한이 포졸들에게 체포될 무렵에 상주의 산남면 평지리〈문경시 산양면 평지리〉에 살고 있던 서유형 일가족도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진영으로 끌려가서 순교하였다.

서유형(바오로)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친척으로 당시 평지리에서 큰 부자로 살았다. 1865년 10월경 가을농사를 짓고 난 후, 가옥의 지붕을 이으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 닥쳐 서유형(바오로)과 부인 성 막달레나, 7세 된 그의 딸, 아들 순보(3세)와 하인들까지 체포하였으며, 또한 서유형의 형집도 덮쳐서 그의 형수 박 루치아를 체포하여 상주진영으로 압송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근에 함께 살고 있던 방(사선?) 회장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유형의 하인들은 그날로 풀려났고, 이들 일가족들과 방 회장은 감옥에 갇혔다.

얼마 후에 이들의 재산을 다 몰수 한 후, 부인 성재추(막달레나)와 그 자녀는 풀어 주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갇혀 있었다. 그의 부인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즉시 등짐장수를 시켜서 장부에게 먹을 것과 옷을 지어서 보냈다.

그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방 회장이 서유형(바오로)에게 함께 탈옥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순교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천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끝가지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형수와 함께 순교하였다. 한편 그가 순교를 한 것도 모르고 있던 부인은 큰마음을 먹고 명주 바지저고리를 해서 감옥을 찾아갔더니, 벌써 장부는 순교 한 후였다. 할 수 없이 시체나마 찾으려고 하였지만, 그 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시체를 어디 버렸는지 찾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부가 순교를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정이 폐가하게 되자, 마을사람들이 그 집에서 빌려갔던 가위와 인두 등을 돌려주었다. 그 후 남은 가족들은 삯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꾸려갔으며, 부인은 고생스러워 어린 남매를 데리고 친정에도 찾아가고, 때로는 다른 곳으로 가서 살기도 하였다.

서유형(바오로)의 가족들이 포졸들에게 체포 될 때에, 그의 5촌 조카인 서만보는 그의 사랑채에 살고 있다가 포졸들이 들이 닥치자 피신한 것 같다.

〔이상의 증언은 순교자 서유형(바오로)의 증손녀인 서 안또니오〈서울교구〉수녀와 서상우〈전 왜관본당 주임〉 신부가 하였고, 작성은 마백락(끌레멘스, 신동본당)이 하였다.〕

2)-3. 안동교구사 자료 제4집《교구전사》

서유형(바오로)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친척으로 당시 모전에서 큰 부자로 살았다. 1866년 10월경 가을농사를 짓고 난 후, 가옥의 지붕을 이으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 닥쳐 서유형(바오로)와 부인 성 막달레나, 7세 된 그의 딸, 아들 순보(3세)와 하인들까지 체포하였으며, 또한 서유형의 형집도 덮쳐서 그의 형수 박 루치아를 체포하여 상주진영으로 압송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근에 함께 살고 있던 방(사선) 회장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유형의 하인들은 그날로 풀려났고, 이들 일가족들과 방 회장은 감옥에 갇혔다.

얼마 후에 이들의 재산을 다 몰수 한 후, 부인 성재추(막달레나)와 그 자녀는 풀어 주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갇혀 있었다. 그의 부인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즉시 등짐장수를 시켜 먹을 것과 옷을 지어서 보냈다. 그때 감옥에 갇혀 있던 방 회장은 감옥의 두터운 벽을 주머니칼로 뚫고 탈출하였다.

이때 방 회장이 서유형에게 함께 탈옥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순교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끝가지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형수와 함께 순교하였다.

한편 그가 순교를 한 것도 모르고 있던 부인은 큰 마음을 먹고 명주 바지저고리를 해서 감옥을 찾아갔더니, 벌써 장부는 순교 한 후였다. 할 수 없이 시체나마 찾으려고 하였지만, 그 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시체를 어디 버렸는지 찾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부가 순교를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정이 폐가하게 되자, 부락사람들이 그 집에서 빌려갔던 가위와 인두 등을 돌려주었다. 그 후 남은 가족들은 삯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꾸려갔으며, 부인은 고생스러워 어린 남매를 데리고 친정에도 찾아가고, 때로는 다른 곳으로 가서 살기도 하였다. 서유형(바오로)의 가족들이 포졸들에게 체포 될 때에, 그의 5촌 조카인 서만보는 그의 사랑채에 살고 있다가 포졸들이 들이 닥치자 피신한 것 같다.

2)-4. 후손들의 증언 (기록자 : 서병찬 미카엘)

서유형(徐有亨) 바오로는 문경 모전에서 부인 성(成)막달레나, 딸 하나, 아들(徐淳輔) 하나, 과부가 된 박(朴) 루시아와 함께 큰 부자로 살았다. 그 집안의 천주교 봉행은 그의 형수 박 루시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박 루시아는 처마 밑에 책을 숨겨놓고 보다가 식구들에게 들키면 얼른 이불 갈피에 감추곤 하여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르쳐주지 않다가 자꾸 물으니, “천주교 책인데 친정에서 갖다 배운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온 집안이 천주교를 봉행하며 잘 살던 중 병인년(1866) 가을, 농사를 다 지어 놓고 지붕을 해 이고 있는데, 지붕 위에서 보니 저 멀리 동구 밖에 한 떼의 포졸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서유형 바오로는 자기를 잡으러 오는 줄 미리 알고 급히 지붕에서 내려 왔다. 이윽고 포졸들이 집안으로 들이 닥쳐 하인들을 포함해 모든 식구들을 다 잡아 갔다. 이들은 포졸들에게 끌려가 상주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함께 잡혀갔던 하인들은 그날로 풀려났고, 얼마 후에는 아들과 아이 딸린 여자는 나가라고 하여 그의 부인 성막달레나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감옥을 나왔다. 그리하여 감옥에는 서유형 바오로와 그의 형수 박 루시아만 남게 되었다.

부인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에 있던 장롱이며 장판 등 재물을 포졸들이 며칠을 두고 다 해먹고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웃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겨우 먹고 살았다. 바느질품으로 연명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 잘 아는 등짐장수를 시켜 감옥에 있는 분들께 전해주었다. 등짐장수는 돌아와 그분들을 보고 왔다고 말했다. 여러 번을 그렇게 하다가 큰 맘 먹고 그해 겨울눈이 많이 온 어느 날 친히 명주 바지저고리를 해 갖고 감옥을 찾아 갔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두 분 다 치명하고 난 뒤였다.

서유형 바오로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천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나?”라고 하면서 감옥을 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당시 회장하던 분에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박해로 식구와 재산을 모두 잃은 그의 부인 성 막달레나는 두 남매를 데리고 근방의 친정에도 가 살아보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그 후 딸은 잘 키워서 시집을 보냈으나 일찍 죽었고, 문경 산양 평지리에 살 때 아들 서순보와 며느리 이렇게 셋은 충북 괴산군 고마리 높은 사랑으로 이사했다. 이때가 1894-5년경이다. 이곳에서《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번호47》에 나와 있는 치명사실을 증언 하였다.

성막달레나는 1905년 67세로 사망하였으며, 그 유해는 현재 고마리 배름발이라는 산에 안장되어 있다. 아들 서순보는 그보다 앞서 그의 나이 40세인 1902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외아들 ‘서창순(요왕)’이 3세 때였다.

[3] 타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

[3]-1 박 사도 요한 : 영남 도회장

1) 뮈텔 주교의《치명일기(致命日記)》

<정리번호 : 183> 영남회장(嶺南會長) : 홍주(洪州) 사람으로서 문경(聞慶) 호랑리(여우목)에 와 살다가 황간(黃澗) 상촌에 이사하였더니, 무진(1868) 7월 11일에 충주(忠州) 포교에게 잡혀 그 생질 이 다테오와 장 안또니오는 충주에서 치명하고, 저는 서울 와 치명하였다 하니, 나이는 53세요, 때는 경오(1870)년 이러라. 혹 무진(1868) 치명인가 하노라.

2) 박순집(朴順集)의《박순집증언록(朴順集證言錄)》

박 요왕은 충청도 홍주 구교(舊敎)의 자손(子孫)이라. 성교(聖敎)하기를 위하여,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다니다가 경상도에 와 살더니, 그 부친 안드레아가 대구 감영에 갇히어 13년을 옥중(獄中)에 있다가 치명(致命)하고, 요왕은 나이 어리나, 모친과 세 누이와 한가지로 여러 번 풍파를 겪으매,

신 장사를 하여 생명을 보존하며, 비록 학문은 없으나 사주구령(事主救靈)하기로 마음에 전일(專一)하여 성서(聖書)를 많이 보아 도리(道理)를 밝히고, 수계(守誡)를 착실히 하여 소시(少時)부터 동신(童身)을 지키기로 마음을 정하고, 누이도 착실히 가르치매, 요왕이 시세(時勢) 불편함을 인하여 혼배(婚配)하기를 권하매, 종래 듣지 아니하고 동정(童貞)을 지켜 오라비를 의지(依支)하여 살며, 또 부모 없는 어린 생질과 의지 없는 노유(老幼)를 다 거두어 머물더니 다솔(多率)의 주장(主張) 이 된지라. 평생에 책보고 강론(講論)하고 가르치기로 일삼으며, 육신(肉身)으로는 여름에 부지런히 농사(農事)짓고, 겨울에는 신을 삼아, 여러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또 신형간(神形間) 애긍(哀矜)도 많이 하더라. 때에 감목(監牧)과 신부(神父)가 영남도회장으로 차정하시니, 원근에 전교(傳敎)도 많이 하며, 교중(敎中) 모든 일을 타당(妥當)하게 안배(按配)하고, 또 겸손(謙遜), 결정(潔淨), 인내(忍耐)와 고신극기(苦身克己)함으로 좋은 표양(表樣)을 많이 세우며, 또 전일(前日) 부친(父親) 치명(致命) 할 때에 자기가 관가에서 둘러말한 것이 있다하여 평생 보속(補贖)하기를 위하여 소금으로만 반찬을 하며, 행위 단정(端正)함으로 덕망(德望)이 원근(遠近)에 소문이 자자하더라.

문경 호랑리에 살더니, 병인(1866)년에 본관이 착하여 교우를 덮어 보호함으로 여러 교우가 산 굴에서 피신하고 황간 산촌에 가 새로 집을 짓고 있을 때 일가(一家)는 문경에서 다 잡히고, 무진(戊辰, 1868)년 7월 11일에 유다스가 충주 포교를 데리고 와서, 요왕을 잡고 자(字)와 본명(本名)을 물은 후에 이르되, ‘너 잡기를 일곱 달 공부를 하여 만났다.’고 하고 일촌(一村) 교우를 모두 잡고 저녁 후에, 형벌을 시작(始作)하여, 교우를 대라 하며, 주뢰(周牢)와 학춤을 무수히 하매, 팔과 다리뼈 다 늘어져 죽은 사람과 같은지라. 형벌을 그치니 이윽고 정신이 나매 포교가 다시 묻되, ‘이제도 대지 아니하겠느냐?’ 요왕이 좋은 얼굴로 대답하되, ‘무령(無靈)한 짐승도 각각 동무가 있거든 하물며 천주성교(天主聖敎)하는 사람의 동류(同類)야 많음을 가히 알지라. 가령 남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세세히 말하려니와 곧 죽는 지경에야 어찌 말 하리요.’ 포교가 가로되, ‘가까이 있는 사람은 네가 온당 가르쳤을 것이니, 밝게 말하라.’ 답왈, ‘이 사람들은 사귄지가 오래지 아니하기로 미쳐 못 가르쳤노라.’ 문왈, ‘ 생질(甥姪) 둘은 가르쳤느냐?’ 답왈, ‘저에게 물어라.’ 하니, 포교가 두 생질에 물으니, 하나는 이 타대오요 하나는 장 안토니오라. 다 가로되, ‘우리는 외삼촌에게 배웠노라.’ 다시 묻지 아니하고 이웃 사람은 다 놓으니라. 이튿날 여인들도 다 놓고 요왕과 두 생질만 충주 진영에 이르러 추열(推閱)할 때, 요왕은 괴수(魁首)라 하여 무수히 문목(問目)하며 형벌하여, 두 다리가 헤어지되, 입을 다물고 묵묵하더라. 요왕은 서울로 올리고 두 생질은 충주에서 치명 하니라.

요왕이 서울 포청에 오래 갇히었더니, 경오(庚午, 1870)년에 경상도 교우가 많이 잡히는 지라. 요왕을 앞세우고 포교가 내려와 언양관에 가두고 교우를 잡아 요왕과 대면(對面)하여 피차(彼此)가 모르노라 하면 놓고,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이 한 일이 있으니, 교우 소문(所聞)에 잡히는 이는 다 요왕의 댄 바라 하였더니, 그때 함께 수금(囚擒)하였던 최 바오로의 말을 들으니, 자기가 포청에 들어가니 요왕이 대면(對面)시키며 요왕에게, ‘이 사람을 아느냐?’ 물으니 요왕이, ‘모르노라.’하거늘, 다른 말없이 하옥하고, 요왕은 군사 있는 자리에 두었더니, 날마다 짚신을 삼아 먹을 것을 장만하여 자기와 옥중 교우를 고루고루 먹이고 기회를 타 강론하여 교우를 진절(眞切)이 제성(提醒)하고, 달포 후에 요왕을 내여 가더니, 종적(蹤迹)이 없거늘 치명 하였나 보다 하였더니, 하루는 포졸과 요왕과 교우 삼십여 명이 들어오거늘 갇히었던 교우가 다시 의심(疑心)하다가, 마침 틈이 있어 최 바오로가 요왕에게 묻되, ‘이 어찌 된 일이냐?’ 요왕이 웃어 가로되, ‘나를 의심치 말라. 나는 아는 이 많다 하여 억지로 끌고 다니다가 들어왔고, 저 사람들이 잡힌 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니라.’ 하고 후에 최 바오로가 방송(放送)되어 본향(本鄕)에 돌아와서 설명하여 모든 교우를 파혹(破惑)하고, 그 후에 치명할 때 증참(證參)하는 이는 없고, 참수(斬首)하다 하니, 나이는 오십삼 세요, 때는 경오(庚午, 1870)년이더라. 그 당질(堂姪) 경산 모래골 사는 박주현이가 기록하옵니다.

3) 한국교회사 연구소의《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박 사도요한 : 정리번호 43> :《치명일기》183의 박 사도요한, 영남회장(嶺南會長)은 무진 7월 11일에 충주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가서 경오년 2월에 치명하였으니, 증인 경상도 대구 살던 최 바오로가 서울로 잡혀가서 함께 수개월 갇혀 있다가 바오로는 놓이고, 사도 요한은 치명하였으니, 바오로에게 자세히 들었으니 의심 없나이다.〔증언자 : 박 프란치스꼬, 목격자 : 최 바오로· 황 유록〕

[3]-2 그 밖의 순교자들

1) <한실>의 김 회장 형제 : 이 두 형제는 병인박해 당시 문경 한실 교우 촌에서 회장직을 맡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많은 신자들과 함께 상주감옥에 갇혔다가 이윤일(요한)과 함께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867년 1월 21일(음, 1866년 12월 16일) 이윤일 등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2) <봉화> 이성천(베드로), 이성욱 형제 : 이 두 형제는 원래 황해도 사람으로 경기도 양지에서 이사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박해를 피해 경상도 봉화로 피난 와서 살다가 다시 충청도 제천 배론 웃 마을로 이사하였다. 동생 이성욱은 공소회장의 소임을 맡았다. 위로 두 형제는 이미 순교하였고, 아래로 두 형제(성천, 성욱)도 순교하였다.

5형제 중 넷째인 이성욱 회장은 본성이 양순한 사람으로 신자들과 화목하게 살았다. 병인박해를 만나 1866년 11월 20일 제천 현으로 잡혀갔으나, 현감은 “양인(洋人)을 잡으라.”, “백성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가서 농사나 잘 하라.”하면서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석방되어 1년 동안 농사를 지었으나, 그 이듬해인 1867년 10월 초순에 다시 포졸들이 와서 그를 체포하였다. 당시 그의 대자(代子)인 탁 서방(성명, 본명 미상)이 “이곳에 포졸이 오니 피합시다.”라고 하자, 그는 “나는 피하지 않고 주명(主命)만 기다리겠으니 자네나 피하게.”라고 하였다. 그러자 탁 서방은 “피하시지 않으면 저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여 모두 청주로 잡혀간 지 7일 만에 순교하였다. 그때 이성욱의 나이 30세였다.

이성욱 회장의 형인 이성천도 당시 배론의 아랫마을에 살다가 1866년 1차 병인박해 때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와 농사를 짓다가 영춘 지방 중재 밑으로 이사와 살았다. 그 이듬해인 1867년 5월(1868년 5월?) 제천 포졸에게 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본래 직업이 목수이므로 그를 아는 아전들이 연장을 주어서 집도 짓고 혹 널도 짜게 하였다. 그러다 아전들이 “생원님은 나가시더라도 우리가 모른 채 할 것이니 나가시오.”라고 하였으나, 이 성천은 “나는 나라의 죄인이다. 나라 영(令)이 없이는 못나가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전들은 “이런 양반은 천하에 둘도 없다.”고 하였다. 그때 그의 아내가 가끔 밥과 돈을 가지고 감옥에 들어가면 그는 말하기를, “나는 염려 마시오. 생명이 위중하니 아이들이나 갖다 먹이시오.”라고 하고는 받지 않았다. 다시 그의 아내가 “아전들이 나가라 하거든 나오시오.”라고 하자, 그는 “그러하지 않아도 살 듯하니 염려 말고 나가시오.”라고 하였다. 그 후 그는 청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50세였다.

3) <안동> 김 스테파노 : 김 스테파노는 본래 순흥 고을에서 자랐으나 안동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박해를 만났다. 1867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으며, 1867년 3월 15일에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4) <풍기> 신 생원(본명 미상) : 풍기의 다리골 신자인 신 생원은 안동의 김 스테파노, 충북 단양의 우백이, 이 생원과 함께 서울로 잡혀갔다. 그는 김 스테파노와 함께 1867년 3월 15일에 순교하였다.

5) <문경> 임정택(외교인) : 임정택은 문경 현의 아전으로 외교인이다. 병인박해 때 잡혀 온 신자들이 부당하고 가혹하게 문초당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들어가 용감하게 신자들을 옹호하다가 체포되어 진주에서 1868년 8월 3일에 참수 당하였다.

6) 진 안드레아 : 풍기 출신으로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7) 김 토마스 : 순흥 출신으로 진 안드레와 함께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8) 전(田)바오로 : 예천 출신으로 공주에서 1865년에 순교한 전 사베리오의 동생으로 대구에서 살다가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9) 김원본(요한) : 상주 출신으로 1868년 11월 경포에게 잡혀 25세로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10) 이상서(세례명 미상) : 상주 출신으로 공주에서 살다가 공주 포졸에게 잡혔다. 처음에는 신덕이 그리 깊지 않았으나, 공주 순교자들 중 유명한 강덕중의 권면으로 용기를 얻어 52세로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11) 손 베드로 : 안동 구마동 출신으로 영춘 돌문 안에 살다가 1867년 충주 포졸에게 잡혀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12) 이 요셉 : 봉화 출신으로 순흥 고을 북면에 살다가 1867년 10월 충주 포졸에게 잡혀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13) 이 요한 : 이 요셉의 동생으로 1868년 2월 충주 포졸에게 잡혀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14) 김순문(세자요한) : 봉화 북면 사람으로 풍기에 살다가 충주 포졸에게 잡혀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15) 장 안토니오 : 상주 출신으로 부산 동래에서 순교한 이 세례자 요한 동서의 아들이다. 이 요한의 둘째 아들 이 마태오와 그의 외삼촌 박 요한(별명, 경상도 회장)과 함께 황간 상촌에서 잡혔는데, 이 세례자 요한은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고, 이들 두 사람은 충주에서 1868년 7월 12일에 20세로 순교하였다.

Ⅳ. 나오면서

1. 병인박해 후의 신앙공동체(공소)들

병인박해는 전국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던 수많은 교우 촌들을 철저하게 파괴시켰으며, 동시에 수많은 신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뜨거운 신앙심마저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가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의 중심이 된 모든 지도층들을 와해시켰다면, 병인박해는 성직자를 포함한 지도층 뿐 아니라 일반 신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몰면서 자칫 복음의 씨앗까지도 이 땅에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 사건이었다.

모진 박해기간 동안 용케 목숨을 부지한 신자들은 삶의 의욕마저 상실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생활을 지탱할 용기조차 갖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은 물론이고 기록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오랜 유랑생활 속에서 분실하였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몇몇 소수 기록물들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회는 6~7년의 길고도 모진 박해를 견디어 내어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다시금 새로운 교우 촌을 형성하여 꺼져가는 신앙의 불꽃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안동교구 관할구역 내의 교우 촌들도 마찬가지이다. 1873년에 병인박해는 끝이 나고 1876년 일본과의 조약을 맺고 쇄국(鎖國)에서 문호개방이 시작될 즈음 조선 천주교회 또한 문호 개방의 여파를 받게 되었다. 특히 1882년부터는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도 허용 되었으며 186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써 적어도 겉보기에는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신자들은 이제 더 이상 산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기나긴 은둔생활을 청산하여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저자거리, 번화가인 양지(陽地)로 나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말하자면 교우촌(敎友村)에서 공소공동체(公所共同體)에로 한 단계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북부지역에 형성된 공소들을 기록상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멍에목(화령), 부럭이(예천), 건학(문경), 마원(문경), 여우목(문경), 한실(가은), 모전(모전), 삼괴정(옥산), 안동(목성동), 장자동(화령), 갈골(화령), 갈동(가은), 오도재(화령), 문산(퇴강), 먹뱅이(가은), 쌍용(가은), 쌍호(안계), 읍내(함창), 새터(함창), 도경(예천), 허리티(예천), 한두리(문경), 신당(예천?), 말걸(서문동?), 놋티기(예천), 표석골(점촌), 구읍(구담?), 야목(풍기), 화상골(계림동), 신당(예천), 기앗골(서문동?), 삼괴정(옥산), 공성(옥산), 동송리(예천), 삼골(옥산), 널배미(함창), 모파리(옥산), 모금(사벌), 무량이(계림동), 청개이(화령), 작골(함창), 은골(문경), 오수골(문경), 소정리(함창), 밤바우(함창), 도탄리(가은), 오소리골(가은), 돛마름(가은), 탑골(?), 목감(사벌), 물미(퇴강), 너무(함창), 봉오재(함창), 감바우(함창), 염동(함창), 사실(함창), 모전(모전), 가무내(모동), 널기(모동). 상괴(가은), 수산(풍양), 풍덕(풍양), 길마을(중동) 등등

이 밖에도 교우촌 사람들은 ‘공소(公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음지에서 양지로 자신들의 신앙생활 형태를 바꾸어 나갔다. 이렇게 순교자들의 후손들인 교우촌 사람들은 공소라는 독특한 불교적 용어를 가지고 허물어져가는 신앙공동체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고, 일본에 합방당한 1910년 이후에는 이들 공소 신자들이 ‘본당’이라는 더 큰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사실들을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역사적 문헌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이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예’ 혹은 ‘구(舊)교우’라는 이름을 신자로서의 명예와 자부심과 긍지로 삼고 살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으로 남아 있다.

2. 순교신앙은 교구공동체의 원동력이다.

‘순교(殉敎, martyrium)’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는 일이다. 순교는 죽음에 직면하여 신앙의 의미와 진리를 효과적으로 증거 하는 행위이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육신을 죽이는 자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순교의 목표는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으며, 그 가치는 최고의 존재자(하느님)를 긍정하는 일이다.

또 한 인간이 다른 인격을 긍정하는 것은 사랑이므로 순교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는 신앙의 조문(계명)을 증거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그 분을 증거 하는 행위이다. 순교를 높이 평가하는 그리스도교적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삶의 실재를 증거 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순교를 통한 죽음이 성부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순교자의 생명을 일치시킨다는 진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부터 순교를 혈세(血洗)라 하였다.

따라서 순교는 최상의 은혜요 사랑의 최고 증명일 뿐 아니라 성세성사의 상징을 실재로 구현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히며 함께 부활하기 때문에(로마6, 3-11)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가 언제나 당하고 있는 박해 중에서도 십자가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갈 준비는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교회헌장, 42항)

사실상 이러한 순교의 역사를 가진 북부지역 천주교는 드디어 1969년 5월에 “안동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안동교구가 설정되기 이전의 역사, 곧 모든 교구의 전사(前史)들은 박해시대와 맞물려 있고,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시대를 겪었다. 그러한 과정 안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또 살아남은 신자들이 기꺼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교구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천주교안동교구는 순교자들의 후예들이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다가 떠난 신앙선조들의 순교영성, 순교정신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안동교구 공동체가 형성되어 발전해 나아가는 모든 과정들의 원동력은 결국 순교영성을 살다가 떠난 순교자들의 고귀하고 성스러운 ‘피’였다고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신앙적 삶의 모범을 보여준 신앙 선조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현양하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적 귀감으로 삼아야 하리라 본다. 지금의 안동교구는 지난 2009년에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이하였다.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천주교안동교구 교구장(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이 땅에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온 몸으로 구현해야 한다.”라고 권고한 바 있다.

사실상 순교자 현양운동은 곧 순교자들의 헌신적인 신앙을 널리 현양함으로써 본인들에게는 영광이 되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참 신앙운동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동시에 순교자 현양운동은 순교자들의 시신 장례 및 묘소발굴, 사료(史料)수집 등의 실질적인 작업을 통한 고증학적인 역사운동이다.

따라서 순교자 현양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신앙운동이며, 그들이 목숨을 걸고 살았던 교우촌공동체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공동체의 본보기인 동시에 참 삶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운동의 표본이며, 그들의 순교정신은 곧 후손들에게 있어서 삶의 쇄신을 불러일으켜 준다. 1866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의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수많은 “뜨거운 순교의 피”로 물들여진 옛 상주 옥터<상주시 성동동 636-1>는 천주교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거룩한 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선조 천주교인들이 그곳에서 천주교를 수호하고 증언하다가 장렬하게 귀천(歸天)한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