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尙州)지역 천주교 선교와 김문옥(金紋玉) 신부
영남교회사 연구소 부소장 안동 교회사 연구소 객원연구원 마 백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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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50
1. 박해 시대 상주지역의 천주교50
2. 김문옥 신부의 선교활동53 |
서언
상주 지방의 천주교 복음 전파 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천주교의 박해 시기이고, 다음 시기는 1886년 한불 수호조약 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천주교회가 적어도 법적인 자유만큼이라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시작한 때이다.
김문옥(金紋玉) 신부는 그 두 번째 시기인 병인박해(1866~ 1873)후 1900년부터 1937년까지 황해도 장연 지방과 경상도 김천, 문경, 상주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한 천주교 대구교구 소속 신부로 특히 상주에서는 포교 활동은 물론 교육사업과 일반 농정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사제였다.
1. 박해 시대 상주지역의 천주교
상주(尙州)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박해를 피해 여러 자녀들 중 서유도(徐有道)와 자부(子婦)의 친정(親庭)이 있는 상주(尙州)고을 배목리로 피난 와서 살다가 그 이듬해인 1786년에 세상을 떠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서라고 전하고 있다.
서광수는 당시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 집안으로 영조, 정조 임금 때 크게 문명을 떨친 서울의 명문가(名門家)의 후손이었다. 그가 처음 천주교를 알고 믿게 된 것은 정조임금이 규장각을 설립하여 초대 규장각의 제학(提學)을 지낸 서명응의 영향이었다. 당시 중국 북경에는 학문을 통해 선교를 하던 천주교 수도단체인 예수회 소속 천주교 신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발달된 서양의 학문을 한역(漢譯)하여 북경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에게 인기리에 읽히고 있었고, 그 책들 중에 천주교 관련 서적이 함께 읽히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인 1755년 서장관으로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간 서명응이 돌아오면서 가져온 서학(西學)서적을 서광수(徐光修)가 탐독(耽讀)하고 천주교를 믿었다고 후손들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서명응은 정조임금의 양위(讓位)를 반대하다가 1777년 큰 화를 당한 ‘정후겸의 난’이 일어나면서 정후겸의 처 외가댁인 그의 가문에까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자 그들이 택한 것은 ‘서지수’라는 이름을 ‘서광수’로 개명(改名)하게 되었고, 그 후 그는 근신(勤愼)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나고,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迫害)하기 시작하자, 그도 문중으로부터 파적을 당해 자녀들은 모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이 때 서광수는 그의 아들 들 중 서유도 가정과 함께 상주 배목이 로 피난 와서 살다가 그 이듬해인 1786년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유도(有道) 가정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경상도와 충청도의 접경지역인 백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한실로 가서 살았다. 그렇지만 1813년 충청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의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한실에서 치명을 하여 한실에 안장했다고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다.
거듭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 후 상주와 문경지방에는 천주교가 오히려 널리 전파 되었고, 이후 상주지방은 100여 년 계속 이어진 여러 박해 때마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할 만큼 험하고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교우 촌들이 천주교 박해로 파괴되면서, 그와 함께 많은 신자들이 치명 순교하였다.
그 예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자 김보록, 박사의 부자(父子)가 체포된 상주 고을 멍애목과 순교자 김사건 안드레아가 체포된 앵무동이 있고, 순교자 신태보(베드로)가 체포된 상주 잣골, 1860년 경신박해 전에 페롱 신부, 메스트로 신부, 최양업 신부가 선교 활동하던 시기에는 상주지방의 여러 교우촌들이 파괴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만해도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보면 상주진영에서 서태순(베드로)을 비롯한 18명이 치명 순교하였다.
이처럼 상주지방에서 체포 된 신자들은 상주진영으로 끌려와서 문초를 받고, 문초 후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가서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가 끝나고, 186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차츰 선교(宣敎)활동이 자유로워지자 1882년경부터 천주교회에서는 각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책임을 맡아서 선교활동을 하게 하였다. 이때 경상도 지역을 책임 맡은 로베르 김보록 신부는 1885년 말 칠곡 신나무골 교우 촌에 정착하여, 상주의 사실과 함창 지역 교우 촌을 순방하면서 전교활동을 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2. 김문옥 신부의 선교활동
김문옥 신부는 1873년 6월7일 경남 울주군 언양읍 구 교구촌 살티에서 김득준과 박 요안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험한 살티 천주교 교우촌에 살다가 호랑이에게 호식(虎食)을 당했으며, 그의 동생 김문익 안드레아는 후에 선필공소의 열심한 공소회장이 되었다.
김문옥 소년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83년 말레이 반도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여 수학하다가 풍토병으로 학생들이 많이 희생당하자, 한국교회 방침에 따라 1892년에 귀국하여 서울 용산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1900년 9월 22일 사제로 수품 되었다.
신부가 된 그는 황해도 송화 산골목 공소에서 1년 동안 체류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이때 관속(官屬)들과 보부상(褓負商)들이 천주교에 반감을 품고 충돌 해옴에 따라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1902년 장연성당 3대 신부로 전임되어 송화 “산골목”공소에 24칸 강당을 철거하고, 그 자재로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1911년 5월(또는 6월)경에 완공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 뿐 아니라 구한말 당시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교회 계몽을 위한 교육사업이 활발했는데, 그도 1907년 경애학교(敬愛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와 애국정신에 입각하여 위로는 천주를 공경하고, 아래로 동포를 사랑하는 대의로서 세상을 구하고 보국보민(報國保民)하는 것을 설립 취지로 하면서 국어, 한문, 지리, 체육 등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여학생 반(班)을 병설했고, 1910년 성당 옆에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이곳으로 옮겼는데 1911년 3월에는 학생 수가 남녀 각각 30명으로 증가되었다.
이 학교는 1928년 1월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황해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자 경애학교는 황해도 각 본당 출신의 예비 신학생들을 발굴하여 가르치는 성소(聖召)개발의 예비 신학교의 기능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김 신부는 장연성당 관할의 각 공소에도 학교 설립을 적극 권유하고 후원하였고, 그 결과 장방골 공소에 장흥(長興)학교, 두섭공소에 정심(貞心)학교, 문화 공소에 월산(月山)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서울교구에서 분할하여 대구 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김 신부는 1911년 6월 경북 김천(황금동)성당으로 전임 되었다.
당시 김천 성당에서도 1901년부터 성의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김 신부는 김천, 문경, 상주, 예천, 선산 지방의 넓은 지방의 사목 책임을 맡아서 애쓰는 한편 김천 성의학교와 함창의 작은 학교도 맡아서 많은 수고를 하였다.
1912년 대구대목구의 드망드 주교는 보고서에서 “본인은 부산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김 요셉(紋玉)신부가 있는 김천으로 갔습니다. 그는 공소들이 멀리 떨어져있어 여러 공소들이 많은 본당(本堂)을 실제적인 정신으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위안을 주는 그 이상으로 그의 지갑을 비우게 하는 두 학교는 그를 매우 기쁘게 했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김 신부는 넓은 지방의 선교를 맡아서 애쓴 보람으로 1922년에 그의 관할구역에서 공평공소와 퇴강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그는 공평본당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김문옥 신부는 선교활동 뿐 아니라 지역 개발을 위한 토목 사업과 광산 발견을 위한 노력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자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제들은 신자들의 생계까지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수준으로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예로 1929년 문경군 농암면 소재 “무너미” 수로(水路) 공사에도 관여한 것이 그것이다. 김 신부는 쌍용공소의 방(方)회장에게 수로 공사 감독을 맡겼는데 그는 전혀 공사에 경험이 없었으므로 결국 처음부터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이 일로 김 신부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고, 보속하는 뜻으로 1937년 상주 본당을 떠나기 전 까지 생쌀을 먹는 생식(生食)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김 신부는 석탄 광산을 찾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즉, 김 신부가 농암에서 수로 공사를 시작 하면서 자연히 가은 공소 출입이 잦았고, 가은에 체재하는 시간도 가끔 길어질 때도 있었다. 어느 가을 판공성사(辦功聖事) 때였다. 신자들이 판공 찰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놓았다. 한 참의 시간이 지나고 성탄 판공성사가 끝난 후 마당에 피워둔 불을 꺼려고 했지만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신자들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뜻밖에도 땅속에서 노두탄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광산이 발견되고 광산 업자 박남득이 광업권을 따냈음으로(1929년 6월) 은성 광산이 되었다고 한다. 상주 문경 일대에는 거의 모두가 흑연이 나오는 광산이었는데 가은읍 은성 광업소만은 7000kc의 최고급 무연탄이 나는 광산이었다.
이렇게 김 신부가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1936년에 상주(尙州)성당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 하였다. 이때 나라는 안 밖으로 매우 불안하고 어수선한 때였다.
1929년부터 조선일보(朝鮮日報)에서 추진한 문명 퇴치 사업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중단되었고,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로 들어와 입상할 때 가슴에 단 일장기(日章旗)를 가리고,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일장기를 없앤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 총독부로부터 크게 수난을 당하였다. 삼남(三南)지방에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사상자 5,500여명, 실종자 1,300여명을 내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김문옥 신부는 초대 상주 성당 신부로 부임하게 되어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김 신부는 처음에 상주읍 계산리 교우촌의 복숭아밭을 사들여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장차 성당 건축을 계획 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서문동 성당 자리로 다시 계획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천주교 박해 시대 신자들이 순교한 치명 터 일지 모른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와 퇴강 성당 정수길 신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 신부는 서문외리 49-2번지의 밭 398평을 718원20전에, 서문외리 50-2번지의 밭 400평을 744원에 매입하여 이전 등기 하고 성당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건물 1층은 나무와 시멘트로, 2층은 나무와 흙으로 쌓고, 종각은 좌우 쌍탑(雙塔)을 세우는 등 로마 베드로 대성당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였다.
건축용 목재는 문경 가은읍에서 벌채한 것을 물에 띄워 진남교까지 나르고, 다시 목탄 자동차에 실어서 상주 성당 까지 날랐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성당 신축을 하던 중에 종각 공사를 하던 외교인(外敎人) 목수가 땅에 떨어 졌으나 한 곳의 상처도 없이 툴툴 털고 일어나 모두 기적이라고들 했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경사스러웠던 것은 김문옥 신부가 추천하여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 보낸 이명호 부제가 1935년 6월15일에 상주 지방 첫 사제로 서품을 받은 것이었다.
이 밖에도 그의 선교활동을 크게 도와준 신자들로는 최종선(카밀로) 전교회장을 비롯한 초대 본당회장 최창열(시몬), 김 수산나, 이성득(바오로), 이승한(요한) 형제 등 많은 신자들이 김 신부를 도왔다.
이렇게 지칠 줄 모르고 일하던 김문옥 신부는 건강악화로 이듬해인 1937년 대구 샤르트르바오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성직자 요양소에 들어가서 투병 생활을 시작하여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41년 9월 1일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불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가진 이후 김문옥 신부가 상주 지역에서 한 사목 활동을 요약하면 왕성한 선교 활동과 5개 성당 건립에 관여, 그리고 교육을 통한 선교와 애국 계몽 활동 이었다.
특별히 성직자로서 늘 가슴에 품고 다녔던 독립사상(獨立思想)은 최종성 회장 등 뜻있는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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