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창현 최초 임란창의 주창자 - 채유희·유종(蔡有喜·有終) 형제
곽 희 상
의병(義兵)이란, 국사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自衛軍)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결사감전(決死敢戰)으로 대항해 기어이 적(敵)을 물리치곤 하였다.
특히, 조선조에서 7년여 기간 동안 치룬 임진왜란은 국토가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나 결국에 우리의 선조들은 왜적(倭賊)을 물리치고 말았다.
선조 25년(1592년)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이 국경을 침범하고 4월 13일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상주에서의 침범 소식은 4월 14일자 관보를 통하여 4월 17일에야 알게 되었다. 부산을 함락시킨 왜군은 3길로 나누어 수도 한양을 향하여 북상하게 되었는데, 그 중 상주(尙州)가 속하는 중로(中路)에는 왜군 가운데서도 제일 강한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이 맡게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제1군은, 선봉으로 부산을 상륙하여 동래-양산-밀양-대구-선산-상주-죽령-충주-여주-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그것은 이 중로와 상주가 차지하는 전략적 비중이 컸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월 21일 대구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적은 4월 25일에는 급기야 상주성을 함락시켰다.
이곳 북천전투는 선조의 명을 받고 내려온 중앙군인 순변사 이일(李鎰)의 관병 60명과 민병 800여 명이 왜병의 주력부대 17,000여 명과의 공식적인 최초의 전쟁터였다.『상주시사』(제1권),「제6절 왜란⋅호란과 상주지방의 항거」, 438-439쪽
당시 순변사 이일(李逸) 이일(李鎰, 1538〜1601)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무과에 들고, 1583년 함경도 니탕개 난을 진압하였다. 당시 군관들로부터 평이 좋지 않아 부장이 되기를 꺼려하였으나 왕명으로 순변사가 되어 참전하였다가 상주전투에서 도망하였다.
과 상주목사 김해(金澥) 김해(金澥, 1534〜?) :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회(士晦), 호는 운송(雲松)이다. 1564년 문과에 들고 1591년에 상주목사(재임 1591∼1592)가 되고 임란이 일어나자 제승방략(制勝方略) 제도에 따라 감사의 지시로 1⋅2운군을 이끌고 칠곡 석전(石田)으로 갔다가 대패하고 돌아와, 중앙군인 순변사 이일을 맞이한다는 핑계로 성을 떠나 피신하였다. 후일 정기룡 장군에 의해 화북 용화동에서 구출된 후 갖은 못된 일을 자행하였다가 화령지방에서 왜적에 피살되었다. 선무원종공신록권에 1등으로 녹훈되었다.
는 후일을 도모코져 이 곳을 빠져 나갔으나 상주의 선조들은 판관 권길(權吉)을 비롯하여 중앙에서 함께 온 종사관(從事官) 홍문관 교리로 친구를 대신해서 이일의 종사관으로 내려온 윤섬(尹暹),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으로 형(兄)을 대신하여 내려 온 이경류(李慶流), 18세에 장원 급제를 하고 26세때 홍문관 부수찬으로 상주전투에서 실군망수(失軍亡帥)로 자결을 한 박호[朴箎, 혹은 박지(朴篪)라고도 함.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 등 3충신을 말함.
과 힘을 합쳐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였으나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후에도 상주 사람들은 왜적에게 투항하거나 부역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지역마다 창의 거병을 하고, 왜적에게 부화뇌동한 자가 없었기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복호(復戶)는, 조선시대 국가가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徭役) 부담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던 제도이다.
의 은전(恩典)을 받은 유일한 지역이다. 이는,『상산지』창석본(1617)「풍속」조에 수록된〈선조 교서〉및 명나라 조정의〈정문(呈文)〉참조.
지역별로 창의(倡義)한 내용을 보면, 함창 지역에서 1592년 7월 30일에 창의군(昌義軍) 함창지역에서 임란 창의한 의병군은 창의군(昌義軍, 고유명사)으로 쓰고, 기타 일반적인 창의군은 倡義軍으로 쓴다.
이 조직되었고, 8월 16에는 보은 등 속리산에서 충보군(忠報軍)이, 그리고 9월 13일에 상주 지역을 중심으로 상의군(尙義軍)이 결성되었으니 상주 전역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함창 지역의 창의군은 상의군·충보군에 앞서 조직되었으므로 상주의병 활동의 선봉에 섰으며, 전 고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의군을 가장 먼저 조직하여 왜적에 대항하게 한 채유희·유종 형제의 행적은 바로 함창 선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기록물들이 소실되었고, 다만 채유희가 지은 2편의 창의문과 황령사에서 주상전하 위패 앞에서 거의함을 고하는 거의문(擧義文) 등 3편 뿐이다.
따라서, 함창지역 창의군의 활동상황 중에서 여기서는 채유희(蔡有喜, 1558~1593)⋅유종(有宗, 1561~1606) 형제의 활동상황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1) 채유희[蔡有喜, 1558(명종 13) ∼ 1593(선조 26)]
공(公)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자(字)는 중구(仲懼, 仲惧), 호(號)는 난헌(蘭軒)으로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낸 무태(無怠)의 3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평소 학문에 힘을 쓰고 성품이 강개하였다. 강릉참봉에 천거되었고, 판결사에 증직이 되었으며, 세칭 산양처사(山陽處士)라 불리었다.
가계는, 고려조에 증직으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를 받은 선무(先茂)를 시조(始祖)로 하여, 3世 보문(寶文)은 보문각태학사, 금성군(錦城君)의 시호를 받고 시(詩)가 동문선과 여지승람에 올랐다. 公의 7대조인 귀하(貴河)는 호(號)가 다의당(多義堂)이며, 가선대부로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고 두문동(杜門洞) 72현에 들었으며, 시호는 정의공(貞義公)이다.
公의 고조부인 신보(申保, 1430〜1460)는 자(字)가 자휴(子休), 호(號)는 만계(灣溪)로,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에서 1456년(세조 원)에 함창현의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1458년(세조 3)까지 3년간 재임하고 남양도호부사로 나아갔다. 상주시,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尙州咸昌牧民官』, 1997, 412쪽.
咸昌邑誌에는 함창 최초의 현감으로,『咸昌邑先生案』⋅『咸昌縣先生案』에는 4번째 현감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임 중 정사(政事)가 청백(淸白)하였으며, 중종 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소성군(邵城君)에 봉해졌다.
公의 증조부인 수(壽, 1449〜1515)는 자(字)가 기지(耆之), 호(號)는 난재(懶齋) 인천 채씨 문중에서 ‘게으를 나(懶)’자로 쓰고 ‘난’으로 읽는다. 한한사전에는 원음이 ‘난’이다.
이다. 예조참판을 역임했으며, 인천군(仁川君)에 봉해 졌다. 그는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이안의 쾌재정(快哉亭) 쾌재정(快哉亭) : 경상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581호(2011.1.3.)로 지정되었다.
에서《설공찬전(薛公瓚傳)》이란 소설을 1511년(중종 6)에 지었는데, 이 소설의 필사본이 승정원에서 승지를 지낸 묵재(黙齋)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지은『묵재일기』의 낱장 속면에 “셜공찬이”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있다. 지난 1996년 충북 괴산군 성주이씨 문중문고에서 일부분인 총 13쪽 3,472자가 발견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1618년 추정)”보다 무려 100여 년이나 앞서는 소설로 발표하였다. 이복규,『설공찬전』, 서경대학교, 1996.
. 전체가 발견되기까지는 후일을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소설의 발견으로 인하여 국문학계에서는 해방이후 최대의 문학적 사건으로 발표 졸고,「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 난재 채수〈설공찬전을 짓다〉」,『상주문화원』(제18호), 2008.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백성을 미혹케 한다고 금서(禁書)가 되어 그 원본이 모두 소각되는 불운과 함께 이로 인하여 저자 또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던 것이다.
公의 조부는 소권(紹權, 1480〜1547)으로, 자(字)는 효중(孝仲)이고, 호(號)는 졸재(拙齋)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대제학,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부친인 난재(懶齋)의 문학적 기질을 이어 받아 화왕계계(花王戒系)의 소설인《화왕전(花王傳)》을 지었다. 이 소설은 우언(寓言)으로서 왕의 실정(失政)을 경계한 산문으로 가전체소설(假傳體小說)이다. 이 또한 지금까지는 임제(林悌, 1549〜1587)가 지은《화사(花史)》가 우리나라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져 왔으나 졸재(拙齋)의 화왕전(花王傳)은 임제(林悌)의 출생전인 1536〜1547년 사이에 창작이 되었으니,《화왕계(花王戒)》계(系)의 가전소설로서는 현재 우리나라 최고본 權泰乙,『국어국문학연구』(제25집),「拙齋 蔡紹權의《花王傳》考」, 상주대학교, 1997.
이라 할 수 있다.
생부(生父)는 무태(無怠, 1513〜1552)이다. 자(字)는 사강(士强)이고, 호는 설성자(雪城子)이다. 1540년 생원이 되어 음보(蔭補)로 별제(別提)·익찬(翊贊)·지평(持平)·음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슬하에 3남(유부·유희·유종) 3녀를 두었는데 막내인 유종은 삼종숙(三從叔)인 무기(無己, 의금부 판사) 고조부인 신보(申保)의 3남 재(載)의 손자이다.
에게 양자하였다.
이로써 보면, 대(代)를 거듭한 전국의 문장가의 집안으로 발돋움하였고, 국문학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었으며, 문향(文鄕)의 고장 상주에 빛을 더 했다.
公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상주성이 함락된 후인 5월 10일 함창의 황령사(黃嶺寺) 황령사(黃嶺寺) : 은척면 황령리에 있는 조계종 산하의 전통사찰(1988.7.21. 지정)이다. 638년(선덕여왕 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889년(진성여왕 3) 대구화상이 중창하였다. 특히 1254년(고종 41) 10월에는 몽고군 차라대(車羅大)가 상주성(백화산성)을 침공할 때 황령사 승려 홍지(洪之)가 민관병을 이끌고 격퇴하였다는 기록(고려사)이 있다.
에서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거의(擧義)를 아우 유종(有終)과 함께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그리고는 함창지역의 선비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1592년 7월 25일 모일 것을 골자로 하는 창의문(倡義文)을 보면,
“⋯⋯ 우리 영남은 본래부터 추로와 같은 고장이라고 말을 해 왔다. 문헌을 서로 전하고 예법을 지켜 부형의 가르침과 사우(師友)의 강습이 모두 임금에게 충성하고 윗사람을 위하여 나라를 근심하고 어른을 섬기는 의리가 아님이 없으니 나라가 위급한 이 때를 당해서 어찌 나가 맡은 일이 없다고 무심할 수 있으리오! 이에 우리들은 비록 무민(無民)이지만 이미 의관을 갖춘 선비요, 사관(仕官)을 한 집안의 후예인 즉 200년 동안 대대로 국록을 받은 의리를 생각하더라도 어찌 나라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지 않으리요! 하물며 우리 중에는 일찍이 벼슬을 하여 임금을 가까이 모신 사람도 없지 않음이랴! ⋯ (중략) ⋯
나같은 사람은 한낱 용렬한 선비로 할 만한 일이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마다 가진 일단(一端)의 양심과 의리는 있어 통분히 격동하여 스스로의 능력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여러분과 함께 모여서 창의(倡義)를 도모코자 하오니 부디 문무의 조사(朝士)들과 부노(父老) 제생(諸生)들은 서로 서로 뜻있는 사람들을 권고하여 각기 자제와 노복들을 인솔하고 이달 25일에 황령사(黃嶺寺)로 모두 모여주면 천만번 다행이라 할 것이다.
슬프다! 북쪽 행관(行官)에 애통한 교서(敎書)는 백성들에게 피눈물 나는 말씀이다.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각오로 우리들이 힘을 모을 때가 바로 지금이다. 생각컨대 반드시 기꺼이 들어줄 것으로 알고 삼가 이에 통보(通報)하는 바이다.” 김자상,『상주문화』(제5호),「상의군·창의군 연구」, 상주문화원, 1994. 49~50쪽.
라고, 지었다.
그러나 황령사에 모이기로 한 7월 25에는 모임이 저조하였다. 이에 公은 또 다시 창의 격문을 지어 배포하였다. 그리고 당시 초유사(招諭使)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보는 임시 벼슬을 이르던 말
김 학봉(金鶴奉) 김 학봉(金鶴奉) : 학봉(鶴奉)은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서 귀국하여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반대의견을 피력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초유사로 활약하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에게 상주 지역의 창의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격문(檄文)을 보냈다. 그리고는 창의진(昌義陳)을 구성하였다. 창의진의 구성을 보면,
전(前) 정자(正子, 정9품) 정경세(鄭經世)가 상주 소모관을, 전(前) 찰방(察訪, 종6품) 권경호가 함창 소모관을, 진사 강주가 용궁소모관을, 유학 신담이 문경소모관으로 명하였다. 생원 곽수인을 중군(中軍)에, 유학 김각을 별장(別將)으로, 전 참봉 송량과 유학 채유희를 도청(都廳)에, 진사 강응철·홍약창·유학 조광벽·이홍도·조극신이 군기유사가 되고, 진사 전식·유학 조정·홍수약·정발·생원 곽수지가 군량유사가 되었으며, 진사 조우인·유학 김광두·정윤해·김혜가 문서유사가 되었다. 진사 최정호·유학 정벌이 기과유사를, 채유종이 기고관을, 김광복이 행수군관을, 사복(司僕) 김사종이 변방봉사를, 윤식이 전봉장(前鋒將)을, 무사(武士) 이축(李軸)이 돌격장(突擊將)을, 신응윤이 척사(尺使)로 임명되었다.
1차 모임이 실패로 돌아가자, 또 다시 창의문을 지어 보냈는데, 거듭 보낸 창의문을 보면,
“지난날 창의문을 통고한 뒤에 서로 모이기를 고대하였더니 뜻밖에 들려오는 소문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논의가 혹은 왜적과 우리와의 세력이 강약(强弱)이 현저하고 또 용맹과 혼겁이 같지 아니하여 비록 힘을 모은다 하더라도 꼭 성공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니, 이 말이 그럴듯 하기는 하나 심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예로부터 충열의 선비는 사생(死生)으로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성패(成敗)로서 사기를 꺽이지 않았다. 오직 의기(義氣)를 가지고 원수는 반드시 갚았는 즉, 비록 백번을 싸워 백번 패하더라도 오히려 화살 없는 활이라도 당기며 칼날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만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늘 ⋯ (중략) ⋯ 지금 적병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사방으로 나아가 쳐 죽이고 노략질을 하므로 백성들이 달아나고 피하는 사람들이 모두 창칼과 화살에 걸려 부모가 해(害)를 당하기도 하고 처자가 화(禍)를 입기도 하여 어떤 사람은 전 가족이 다 죽고 어떤 사람은 형제가 모두 죽었는 즉, 위로는 부모의 원수이니 하늘을 같이 할 수 없고, 아래로는 형제 처자의 원수이니 이 또한 갚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부모의 원수를 잊고 형제의 은정(恩情)을 없던 것으로 하여 피를 흘려 보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살기 위하여 머리를 싸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 다닌다면 이 어찌 사람의 도리겠는가? ⋯ (중략) ⋯ 원하건데 이해(利害)를 비교하지 말고 모여 와 주어서 창의하는 큰 일을 함께 이루어 주면 천만 다행이리라.” 김자상, 위의 책, 51~53쪽.
라고 다시 지어, 아우 유종(有終)과 함께 고을마다 창의문을 돌렸다.
1592년 7월 26일에는 이홍도(李弘道)와 아우 유종(有終)과 함께 그의 외숙부인 청주사람 이봉(李逢) 이봉(李逢, ?∼?) :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운(子雲)이다.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정경세(鄭經世) 등과 의병을 규합, 험준한 요지에 진을 치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물리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관군과 의병을 각 요충지에 배치하여 왜군의 진격을 막은 공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을 대장으로 모셔 왔다. 이때 이봉은 산척(山尺) 20여 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그리고 7월 30일 날이 밝았다.
급기야 저마다 왜적을 무찌르자는 일념으로 황령사에 모여 들었다. 모두가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고 겁을 먹었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서로가 얼굴을 붉혔다.
이는, 거듭 창의문을 고을마다 보낸 결과라 하겠다. 나라가 풍전등화이고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음은 모두가 다 아는 일, 저마다 노복을 데리고 황령사로 모였으니 상주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창의군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주장(主將) 이봉과 함께 제 장좌(諸將佐)와 더불어 주상전하 위패 앞에서 거의(擧義)함을 고하면서 7월 30일에는 상주 지역에서 최초로 창의군을 조직, 출범하였다.
주상전하 위패 앞에서 거의함을 고하는 글
“⋯ (중략) ⋯ 신들의 직분이 비록 감히 장세걸과 육수부의 어짐에 버금가지 못하오나 왕계(王系)의 파(派)가 이어진 사람과 후비(后妃)와 적(籍)이 통하는 사람도 있어 국은(國恩)이 바다에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실컷 받들고 있으며, 나머지 사민들도 모두 200년 동안 세록을 받아 편히 잘살고 있는 무리이온데 임금을 섬김에 충성이 부족하고 사직을 보어(保御)하는데 재주가 모자라 이미 적로를 막지 못하옵고 또, 행궁에 달려가 문안드리지도 못하였사오니 생각컨대 이곳에 비록 어탑(御塔) 어탑(御塔) : 임금의 상탑(牀榻). 상탑이란 깔고 앉거나 눕거나 하는 제반 기구를 말함.
은 없사오나 전패(殿牌) 전패(殿牌) : 조선시대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봉안한, ‘殿(전)’자를 새긴 나무 패.
에 고유하옴도 또한 전례가 있었기 삼가 강심사에서 회곡한 고사(故事)에 의하여 모여서 토적하고져 거의를 하옵니다. ⋯ (중략) ⋯
신들은 통곡을 억누르지 못하옵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멀리 흠모(欽慕)하는 간절한 정성으로 고하나이다.” 김자상, 앞의 책, 54~55쪽.
라고, 회곡거의(會哭擧義)하고 4가지 실천 규약인 군약(軍約) 4군약(四軍約) : 임적선퇴자참(臨賊先退者斬), 약후모퇴자참(約後謀退者斬), 위령실기자참(違令失期者斬), 와언혹중자병이군율론(訛言惑衆者幷以軍律論).
을 제정, 공포하였다.『가악재실기』
상주의 사민(士民)은 이렇게 하여 한마음으로 뭉쳤다. 오직 왜적을 물리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8월 2일에는 창의군의 오해를 염려하여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에게 공문을 보내어 알리고는 본격적인 매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公은 충북 괴산(槐山)으로 옮기고는 장곡유사(掌穀有司)를 맡으면서 군량을 많이 모아 명군(明軍)을 맞을 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충청도소모사(忠淸道召募使) 김시헌(金時獻) 김시헌(金時獻, 1560∼1613)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158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동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11년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daum백과)
이 이를 알고 탈취하려 하자 公은 다투지 않고 도리어 애원을 하였으나 김시헌은 이 사실이 소문이 날까 두려워 公을 장살하였다. 졸고,「임란창의 주창자 - 채유희 유종 형제」,『상주』(제10호), 2001, 29-30쪽.
그리고는, 충청감사 시의 일로 물의를 빚자 언관직 사퇴를 주청하였다. 대사간 김시헌(金時獻)이 아뢰기를,
?...... 신이 전에 충청도 소모사(忠淸道召募使)가 되었을 적에 복수군(復讐軍)의 군량 20여 석을 괴산(槐山)에 비치하였고, 또 청안현(淸安縣)의 복수군 군량과 상환(相換)한 곡식 1백여 석도 괴산에 비치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사를 초발하여 추격할 적에 이 곡식을 지출하려고 하니, 군수(郡守) 이봉(李逢)과 장곡유사(掌穀有司) 채유희(蔡有喜)가 완강히 거절하고 내주지 않았습니다. ...(중략)... 더구나 군량의 지출은 일이 군율에 관계되므로 버려 둔채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군관(軍官)⋅아병(牙兵)을 시켜 끝까지 찾아내어 장(杖) 50을 쳤습니다. 그 뒤 유희가 죽었는데, 신이 죄를 가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죄를 가하여 목숨을 잃게까지 하였다고 물의(物議)가 일어났습니다. 신이 복수군을 거느리라는 명을 받고 한 명의 적이라도 죽여 공사(公私)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준 것이 없는데다 또 처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으니, 신의 죄가 매우 큽니다. ⋯ 이하 생략 ⋯?『선조실록』, 선조 30(1597)년 12월 2일 무오 1번째 기사.
라고, 아뢰었다. 公은 이렇게 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수인(囚人) 채덕일(蔡德一)『인천채씨 족보』를 상고하였으나 확인하지 못하였음.
은 그의 아비 채유희(蔡有喜)가 지난 정유년에 소모사(召募使) 김시헌(金時獻)에게 장사(杖死) 당하였습니다. 덕일은 나이가 겨우 15∼16세인데 그 아비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복수하려고 의장(儀仗)에 뛰어들어 대가(大駕) 앞에서 정소(呈訴)하였습니다. 유희가 장사 당한 사연은 그 당시 감사(監司) 이 때의 경상감사는 김륵(金玏, 재임 1593.5∼1594. 8월)임.
의 장계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므로 이번에 정소한 것이 실로 허위가 아니니, 천위(天威)를 범한 죄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또 율문(律文)으로 보더라도 정소한 것이 사실인 자는 죄를 면제한다고 하였습니다.?『선조실록』, 선조 32(1599)년 2월 15일 을축 3번째 기사.
,
라고 아뢰니,
이에 주상(선조)은,
“방면하라”
고, 전교하였다. 선조 임금도 公이 김시헌에게 장사(杖死)를 당한 것이 적법한 처사가 아니라고 한 대목이다.
이에 대하여 사신(史臣)이 논 하기를,
“김시헌은 소모(召募)하는 임무를 받았으나 주살(誅殺)은 그가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닌데 감히 사사로운 유감으로 유희(有喜)를 죽였으니 왕법(王法)으로 말하면 시헌은 사형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춘추좌전(春秋左傳)》에 ‘아비가 죄 없이 주살을 당하면 자식이 복수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유희는 이미 죄 없이 주륙을 당하였으니 가령 덕일이 원수와 한 하늘 밑에 사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원수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하더라도 옳을 것이다. 유사(有司)는 이미 시헌의 죄를 바루지 못하고 또 유희의 억울함도 다스리지 못하여 끝내 덕일이 효성을 바쳐 원수를 갚은 의리가 천하 후세에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방자하게 함부로 사람을 죽인 자도 요행히 죄를 면하게 하였으니, 어찌 형전(刑典)의 시행이 대단히 잘못되었다 하지 않겠는가.”『선조실록』, 선조 32(1599)년 2월 15일 을축 3번째 기사.
라고, 논하였다.
사신(史臣)은 사건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지적하였다. 덕일(德一)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역사속으로 묻혀버릴 사건이라 하겠다.
왜적이 조국의 강산을 짓밟은 지 4개월이 되도록 모두가 피난하고 도망하기에 급급했던 당시 무록(無祿)의 선비로서 왜적을 무찌르고자 가장 먼저 선봉에 서서 창의를 주창한 公이 있기에 조국이 있다함은 과장된 표현일는지?
결국 公은 1593년(선조 26, 癸巳)에 억울한 생을 마감하였다. 증직으로 장예원(掌隷院) 장예원(掌隷院) : 조선시대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정3품 관청. (사헌부(司憲府)·한성부(漢城府)와 더불어 사법삼사(司法三司)라 하였다.
판결사(判決事, 종2품)에 봉해졌다. 묘소는 문경시 호계면 오정산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 상산김씨 참봉 석복(錫福)의 딸이며, 슬하에 득연(得淵) 채득연(蔡得淵, 1580∼1631) : 자는 경심(景深). 음직으로 절충장군 사과(司果, 오위의 정6품)에 오름.
, 득원(得源) 채득원(蔡得源, 1592∼1621) : 자는 원조(元祚).
형제를 두었다.
2) 채유종[蔡有終, 1561(명종 16)∼1606(선조 39)]
公의 자(字)는 계겸(季謙)이요, 호(號)는 학정(鶴汀)이다.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낸 무태(無怠)의 3남으로 태어나 삼종숙부인 무기(無己) 채무기(蔡無己) : 난재(懶齋) 수(壽)의 아우인 재(載)의 손자이다.
에게 양자되었다.
公도 왜적이 상주성을 함락시킨 다음 달인 5월 10일, 함창에서 형(兄) 유희(有喜)를 도와 의병활동을 위한 창의 격문을 여러 고을마다 돌리고는 다 함께 힘을 합쳐 왜적을 물리치자고 주창하였다.
1592년 7월 25일 황령사에 모여서 창의진을 조직하여 저 잔악무도한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兄)이 다시 지은 창의 격문을 마을마다 돌렸다. 그리고는 형 유희, 이종도와 함께 청주에 사는 외숙부인 이봉(李逢)을 모셔 왔는데 이때 외숙부께서 산척(山尺) 20여 명을 함께 데리고 오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급기야 스스로 황령사에 모여 들었다.
1592년 7월 30일, 드디어 황령사에서 창의 깃발을 꽂고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公은 이 때 기고관(旗鼓官)으로 참전하였다.
함창, 은척, 외서, 농암 등지에 매복을 하면서 야간 기습 작전을 감행하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악재 이축(李軸) 이축(李軸, 1556∼1647) : 본은 성주(星州), 자는 덕재(德載), 호는 가악재(佳岳齋)이다. 임진왜란시 함창의 창의진에 의병장(처음에는 선봉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록권 1등에 녹훈되었으며, 옥천군수·훈련원 정(정3품, 당하관)을 지냈다. 이안면 흑암리 경충사에 제향되었다.
은 선봉장이 되어『가악재실기』「연보」
많은 왜적을 물리치면서부터 고을은 평온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첫 전투로 8월 3일, 가은리 전야(田野)에서 복병하여 적병 5명과 우마(牛馬), 환도(還刀), 화통(火筒)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일에는 송원현(松院縣)의 매복전으로 왜적 6명을 사살하였으며, 11월 8일과 15일에는 함창의 당교(뗏다리)에서 가악재 이축(李軸)이 창의군 50여 명으로 야간기습 공격으로 왜적을 도합 12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사) 상주얼찾기회,『상주호국충의록』, 1999, 69-71쪽.
창의군은 계속해서 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상의군(尙義軍)·충보군(忠報軍) 및 정기룡 장군과 협력하여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公은 침술(鍼術)에도 능통하였다. 내의원에서 어의로 선조의 병환에 침술로 다스린 내용 중 주상이 침혈(鍼穴) 뜸을 뜨거나 침을 놓기에 적당한 자리. 14경맥(經脈)의 혈을 이르는 말로, 경락(經絡)의 기혈이 신체 표면에 모여 통과하는 부위이다.
을 감하자는 말을 듣고 그 진위를 가렸다. 그 내용을 보면,
‘침혈(鍼穴)을 감하는 것은 채유종(蔡有終)의 말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의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자세히 알고자 한다.’『선조실록』216권, 선조 40년(1607) 9월 5일 을미 5번째 기사.
라고, 선조가 침혈을 감하자는 것은 누구의 의견인지 보고하라 하명을 하니 약방(藥房) 약방(藥房)은, 조선 시대, 궁중의 의약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이 아뢰기를,
“채유종이 ‘언제나 심수(心腧)와 폐수(肺腧)는 서너 번 밖에 침을 놓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어제 침혈을 의논할 때 수부(手部) 중에 심폐에 속한 3, 4혈은 마련한 대로 하고 심수와 폐수 양혈(兩穴)은 감하고자 한 것입니다.” 위의 책, 9월 5일 을미 6번째 기사.
라고 하니, 선조는,
‘알았다’
고, 답하였다.
公은 고성이씨 목사 구수(龜壽)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우담(雩潭) 득기(得沂) 채득기(蔡得沂,1604∼1646) :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이다. 유일(遺逸)로 빙고별제(氷庫別提, 정6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심양에 가서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모셨다. 1645년에 세자 일행을 모시고 환국한 후 경천대(擎天臺)에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은둔하였다. 경사(經史)·역학(易學)·천문지리(天文地理)·의약복서(醫藥卜筮)·음율병진(音律兵陣)⋅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1798년(정조 22) 집의(執義, 종3품)에 추증되었다. 사위가 한산군수를 지낸 성여춘(成汝櫄)이니 존애원의 초대 주치의인 청죽(廳竹) 성람(成灠, 1556〜1620)과는 사돈지간이다.
로 아버지로부터 침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필자 주) 우담은 병자호란 후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주치의로서 조선 후기의 학자요, 선비였다. 관직으로는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 종7품)을 지냈으며, 함창승람(咸昌勝覽)에 기재되었다.
나라가 외침을 받아 의연하게 일어난 의병활동은 동서고금을 통해서라도 값진 일이라 하겠다. 임진왜란이 아니라도 그 이전부터 혹은 그 이후에도 우리 지역의 선조들은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다. 이로써 상주는 충절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난헌과 학정은 무엇보다 우리 지역에서 임란 의병활동에 목숨을 걸어 놓고 가장 먼저 창의조직을 위해 선구적으로 활동해 왔다. 가장 먼저 시작함은 그만큼 위험이 뒤따를 것이다. 누군가가 불을 지펴야 성사되듯이 함창 지역에서 처음으로 격문을 지어 각 고을로 돌린 유희·유종 형제는 더 나아가 상주 전역에 창의활동을 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런지?
公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참고문헌】
1.『宣祖實錄』
2.『商山誌』
3.『상주시사』
4.『咸昌縣誌⋅咸昌邑誌』
5.『佳岳齋實記』
6. (사) 尙州얼찾기會,『尙州護國忠義錄』, 1999.
7.『仁川蔡氏大同譜』
8.『多義堂先生實記附 仁川世德錄』
9. 상주문화연구소,『상주』(제10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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