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7호(2017년)

상주학. 상주의 마지막 전통서당(傳統書堂) 천곡정사(泉谷精舍)

빛마당 2018. 2. 11. 17:23

상주의 마지막 전통서당(傳統書堂) 천곡정사(泉谷精舍)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1. 들어가며 236
2. 전통시대 서당의 개관 237
3. 상주의 전통서당(傳統書堂) 241
4. 천곡정사(泉谷精舍)와 덕천정(德川亭) 243

   가. 설립자 일재(一齋) 남장섭(南燮) 244


   나. 서당의 운영과 학제(學制) 251
   다. 덕천정(德川亭) 시대 255
   라. 배출 후학(後學) 256
   마. 생존 후학들의 당시 실상 이야기 채록(採錄) 259
   바. 선양사업(宣揚事業) 261
5. 맺음말 264


상주의 마지막 전통서당(傳統書堂)
천곡정사(泉谷精舍)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들어가며
  조선시대의 사학(私學)으로는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을 들 수 있다. 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효시(嚆矢)이고, 1551년(명종 5년)에는 이 퇴계(李退溪)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국가에서 공인하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발전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었다. 상주의 경우는 백운동서원이 설립한 후 63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년)에 처음으로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설립된 이후 조선 말기에 까지 19개 서원이 설립되었다가 1871년(고종 8)에 조정의 령에 따라 옥동서원(玉洞書院)과 흥암서원(興巖書院)을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상주의 전통서당에 관하여 전하는 역사적 사실은 대개『상산지(商山誌)』창석본을 비릇하여 일제강점기에 간행된『증보 상산지(增補 商山誌)』에 이르기 까지 수록되었고, 현대에도 여러 부문의 향지(鄕誌)에 거론한 바 있다.
  전통서당은 마을의 집성촌에 가학(家學)을 기초로 하여 거점지역에 학문적 기반으로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다. 상주의 전통서당은 조선조 명종 년간에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상주목사 재임시에 설립하였다는 18서당을 주류로 하여 일제강점기에 신식교육제도가 실시되기 까지 이어 왔다.

  천곡정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초부터 1950년 6.25 전란을 겪고 1960년까지 장장 30여 년을 이어 오면서 이안면 대현리와 여물리에서 일재(一齋) 남장섭(南燮)이 열었던 상주의 마지막 전통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상주관내 뿐만아니라 인근의 문경과 예천 그리고 멀리 성주․의성 등 무려 7개 군에 이르는 지역의 학도들이 운집하여 수백 명에 이르는 후학을 배출하였다. 상주 권역의 후학들은 상주 한문학의 맥을 오늘에까지 이어 가히 일재학맥(一齋學脈)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서당이 없어진지 어언 70여 년에 권영태(權榮泰) 권영태 : 85세, 안동권씨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공검면 양정리 태생으로 호는 동산(東山)이다. 천곡정사 말기였던 1940년대에 일재 남장섭으로부터 글을 배운 한학자로 상주향교에서 운영하는 한문교실 강사로 수십 년간 활동하고 있다. 특별히 도산별시와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하는 과거에 장원을 하는 등 한시 창작 활동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옹을 비롯한 생존 후학들의 증언과 서당의 운영과 관련한 일부 남아있는 사료(史料)를 토대로 그 역사를 정리하여 후일에 참고가 되고자 한다.


2. 전통시대 서당의 개관 김태환,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전통서당에 관한 고찰」, “조선시대의 교육과 서당”, 춘천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2005, * 논문의 내용이 보편적이고 상세하여 그 중에 중요 부분을 발췌하여 전통시대의 서당에 관한 일반적 사실(史實)을 고찰하는 것으로 인용하였다.

  서당의 형태는 촌락의 가정집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학방(學房)에서부터 촌락을 벗어나 지역의 권역별로 주체적 건물과 재정기반을 마련하여 학제(學制)를 운영하는 사학(私學)으로서 향교나 서원에 입교하기 위한 초학교육기관으로 활성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서당은 청소년들에게 한문의 독해력을 기르게 하고, 유교에 대한 지식의 함양과 올바른 예절생활 및 도덕심을 기르는 사립 초등교육기관으로서 필요에 따라서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지 경영할 수 있었다.
  서당의 설립 유형으로 문벌가나 유력한 지방의 유지가 그들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훈장(訓長)을 초빙하여 교육경비를 부담하는 사숙(私塾) 또는 독서당(讀書堂)의 유형과 일부 사대부 또는 유력 자산가의 문중에서 학계(學契)을 조직하고 학전(學田)을 모아 그 들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문중서당(門中書堂)이 있다. 그리고 훈장의 자영서당(自營書堂)으로 훈장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소일을 목적으로 개설하는 서당과 문중서당의 확대형으로서 가격(家格)이 비슷한 문중끼리 연합하여 학식과 덕망이 있는 훈장을 초빙하여 한 단계 높은 문중이 연립하여 운영하는 문중 연립서당(門中聯立書堂)이 있다.
  서당에는 획일적 규제와 성격 규정이 제정되지 않았고 향촌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서 그 용도와 성격이 변화되었다. 서당은 강학처로서 뿐만아니라 주민의 공회처(公會處)로서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촌의 유생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 의례의 하나로 주인과 손님 사이에 절도있게 술잔을 주고 받으며 연장자를 존중하고 유덕자(有德者)를 높이며 예법과 사양(辭讓)의 풍속을 일으키도록 교화하는 의식이다.
를 주관하거나 조상의 제례에 대한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강학기능 자체도 마을의 특수성에 맞추어 교육수준과 내용을 다르게 할 수 있어서 초학(初學)들의 문자학습에서부터 고급 성리서의 강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가 있다. 서원과 서당의 학규는 대개 이퇴계가 재정한「이산서원학규(伊山書院學規)」 이산서원은 영주에 있는 서원으로 1573년(선조 6)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지방의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서원은 1574년 도산서원과 함께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퇴계가 지은 이산서원 원규는 우리나라 서원 원규의 효시가 되었다. 
와 1582년(선조 15)에 이 율곡에게 왕명으로 학교사목(學校事目)을 짓게하여「학교모범(學校模範)」 학교모범 : 입지(立志) 검신(檢身) 독서(讀書) 신언(愼言) 존심(存心) 사친(事親) 사사(事師) 택우(擇友) 거가(居家) 등 16의 인간다운 도리와 법칙을 나열한 조목이다.
을 만들어 학령의 미비점을 보완하였다.
  서당의 입학 나이는 제도화된 규례가 없고 대체로 칠‧팔세 정도가 되면 부형이나 글방의 훈장에게 글을 배우고 졸업 또한 법규가 없었기 때문에 웬만큼 배우고 나면 물러나는 것이 상례였다. 입학하는 날은 음의 극(極)이자 양(陽)이 동하는 때로 동짓날을 택하였는데, 대개 존양사상(存養思想) 존양사상 :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 말로 본심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르는 사상
의 일단에서 나온 습속이다.
  서당은 학생들이 학습하고 기거하는 생활도장으로서 엄숙한 분위기와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경계(警戒)로 삼아 생활 속에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경계심을 게시하고 낭독하게 하여 문자교육 뿐만아니라 인격을 도야하는 구심체였다.
  서당의 훈장은 단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직업이라기 보다 후학을 가르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요 인정(人情)으로 여겼기 때문에 학세(學說)를 받는 것을 천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을 가진 훈장에게는 명분을 사명으로 삼아 가르치는 자체를 명예로 여긴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학동들이 물자로 급비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당의 인적구성은 훈장과 접장(接長) 그리고 학도로 구분 되었다. 학도는 대개 7‧8세로부터 15‧6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때로는 20여 세가 되는 관자(冠者) 또는 그 이상의 연령층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학도의 숫자도 3~4인의 소규모에서부터 기십인(幾十人)의 관동(冠童)이 혼성된 대규모도 있었다. 학력의 정도 역시 동일 서당안에서 천자문을 배우는 초학에서부터 경서(經書)에 이르기까지 십인십층(十人十層)이었다. 비교적 큰 서당에서는 훈장 1인이 다수의 학도를 일일이 가르칠 수가 없으므로 학도 가운데 나이가 들고 학력이 우수한 고학력의 대표자를 접장(接長)으로 세워서 그 보다 하급 과정에 있는 학도를 가르치게 하였다.
  서당에서는 대개『천자문(千字文)』을 처음으로 하여 단자(單子)에 대한 음훈을 깨우치고 단자를 붙여서 음독하는 법을 익히고 난 다음에 동몽선습(童蒙先習) 또는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비교적 짤막한 글귀로 엮어진 책을 배움으로서 초보적인 구독과 문의(文意)를 해득하게 하였다. 영남지방의 경우는『명심보감(明心寶鑑)』을 교본으로 하여 성현의 잠언(箴言)을 공부하게 하였다. 다음 십팔사략(十八史略)이나 통감(通鑑)과 소학(小學)을 배우고 이른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입문하였다.
  서당교육의 교육방법은 각자의 재기(才氣)와 역량에 맞는 범위를 정하여 공부하게 하고 교수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응답하는 ‘강(講)’을 위주로 하였다. 강은 날마다 학동의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그 날의 학습량을 숙독하여 서산(書算)을 놓고 읽은 횟수를 세어가면서 반복하였는데 보통 1회의 독서량은 100독 정도였다. 문제는 앞에서 배운 것을 모두 암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훈장 앞에서 교본을 덮고 암송을 하고 글자의 뜻과 글귀의 내용에 대한 질문에 완전히 대답할 수 있어야 나아갈 수 있었다.
  서당에서 습자(習字)는 필수과목으로 해서(楷書)를 기본으로 하여 초서에 이르기까지 책을 베끼는 것과 서찰체(書札體)를 연습하도록 하였다.
  서당의 교육과정 중에 몇가지 중요한 의례로 괘책례(掛冊禮) 괘책례는 한권의 교본이 끝나면 그 책을 걸어두어 축하식을 올린다는 뜻으로 ‘책걸이’ 또는 ‘책씻이’라는 작은 연회(宴會)를 열여 훈장에게 사은(謝恩)을 하는 례이다. 장원례는 서당의 학동 모두가 실시하는 ‘강(講)’에서 1등을 한 학생을 ‘장원’이라 하여 그의 부모가 사은의 뜻으로 마을의 유지를 초청하여 작은 연회를 가지는 것이다. 백일장은 고을의 수령이나 향교 주관으로 인근의 서당이 연합하여 시작(詩作)의 경연을 겸하여 ‘강’을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 장원례(壯元禮), 백일장(白日場)이 있다. 이 행사는 개별 서당의 명예와 위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행사로 서당마다 이를 대비하여 특별지도를 하기도 한다.
  서당에서는 학생들의 교양과 사회인으로서 상식을 기르기 위한 특별활동으로 일상 생활예절과 관혼상제의 예법 그리고 계약서․영수증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적문을 작성하는 법식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종경도(從卿圖)놀이 종경도 : 승경도(陞卿圖) 또는 종정도(從政圖)라고도 하는데 조정과 지방 관작의 품계를 표기한 윷말 판을 펴 놓고 5각형의 막대기에 하나에서부터 다섯에 이르는 표식으로 또, 개, 글, 윷, 모를 쳐 그 실적에 따라 관작에 승차하는 놀이를 위하여 작성한 도식을 말한다.
 고을 모둠놀이 고을모둠놀이 : 전국의 고을 이름과 명승지를 말판에 적어두고 돌아가면서 유람을 하여 지리와 지명을 익히는 놀이 문화이다.
 등 오락 놀이도 하였다.
  서당에서는 달초(撻楚) 달초 : 학부형이 자신의 자녀를 교육적 필요에 따라 훈장에게 부탁하여 체벌을 내리게 하므로서 바른 인성을 기르게 하는 교육방법
라고 하는 엄한 훈육으로 인성을 바르게 지도하였는데 이 때 학부형은 자기의 자녀를 훈장에게 보낸 이상 엄한 훈육을 허용하는 것을 당연시 한 것이다.
 

3. 상주의 전통서당(傳統書堂)
  상주의 전통서당에 관하여 전하는 사료는 1617년(광해 9)에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찬술한『상산지(商山誌)』창석본(蒼石本)에 처음으로 수록하여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상주와 함창의 행정구역이 통합한 이후에 편찬한『상산지』무진본(戊辰本)에 까지 계속 수록되었다.
 『상산지』창석본 학교조(學校條) 서당목(書堂目)에 이르기를,

書堂依家塾之制各面皆有之而過半申侯靈川所刱也 學制 學田
서당은 문중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가숙(家塾)의 제도에 따라서 각면(各面) 모두에 있으나 그 중에 과반(過半)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신잠(1491~1554, 성종 22~명종 9) : 고령신씨 종호(從護)의 아들로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이다. 중종 14년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파방되고 20여 년간 아차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서화에 몰두하다가 인종때 복직되어 태인현감과 간성목사를 거쳐 상주목사에 재임 중 순직하였다. 문장과 서화에 능하여 삼절이라고 하였다.
 목사가 창건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각면(各面)이라고 하였음은 당시 상주목 관하에 ‘면’이라는 행정조직이 지역 곳곳에 있었음을 의미하나 구체적으로 몇 개면 인지를 밝힌 바 없으므로 상주 관내 전 지역에 서당이 몇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특기할 사실은 비록 구체적인 내용은 없으나 학제(學制)와 학전(學田) 항목을 두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서당의 일반적 학사제도(學事制度)가 확립되었고 서당의 운영을 위한 재정기반으로 위토(位土)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리할 수 있어 당시에 교육기관으로서 서당의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엿 볼 수 있다.
  1749년(영조 25)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찬술한『상산지(商山誌)』「청대본」에는 모두 24개소가 등재되어 서당별로 위치와 창건년대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그 중에 17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중에 창설하였다고 한다. 청대본에 수록한 서당은, 하곡(霞谷) ‧ 노동(魯東) ‧ 도곡(道谷) ‧ 석문(石門) ‧ 수양(首陽) ‧ 수선(修善) ‧ 용문(龍門) ‧ 영빈(潁濱) ‧ 매악(梅嶽) ‧ 오산(梧山) ‧ 고봉(孤峰) ‧ 봉성(鳳城) ‧ 백화(白華) ‧ 봉암(鳳巖) ‧ 송암(松巖) ‧ 지천(智川) ‧ 죽림(竹林) 등 16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 중에 설립하였다고 하고, 뒤이어 벽익(闢翼) ‧ 반계(磻溪) ‧ 지산(芝山) ‧ 수계소(修稧所) ‧ 존애원(存愛院) ‧ 향약사(鄕約社) ‧ 향약당(鄕約堂)을 수록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조목수(趙沐洙)가 간행한『상산지』「구당본 초책(草冊)」과 1832년(순조 32)에 간행한『상주목읍지(尙州牧邑誌)』에는 서당에 관한 기록이 없다.
 『상주목읍지』가 간행되고 39년이 지난 1928년 일제강점기에 간행한『상산지』증보판의「3.학교조 서당목(三.學校條書堂目)」에는 청대본 그대로를 수록하고 8개 서당을 증보하였다.『상산지 증보판』에 추가 수록된 서당은, 운수(雲樹) ‧ 삼봉(三峰) ‧ 미산(薇山) ‧ 동강(東岡) ‧ 기산(箕山) ‧ 청림(靑林) ‧ 반암(盤巖) ‧ 무봉(舞鳳) 등 8개 서당이다.
 상산지에 수록되지 않은 전통서당으로 현재에 까지 남아있는 서당으로 외서면 이천리에 이천서당(伊川書堂)이 있다. 금중현 논문,「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사실」, 2016,『경상북도 상주시 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 보고서』, 2016.12.15. pp27~60. 에 의하면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당시 상주의 국채보상소가 이 마을에 설치되었고 이 마을의 이호서당(伊湖書堂)에서 의연금을 출연한 바 있다. 두 서당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호서당은 오늘의 이천서당의 전신으로 본다.
 


4. 천곡정사(泉谷精舍)와 덕천정(德川亭)
  천곡정사는 이안면 대현리 사실촌(沙室村) 넘덕골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300여 m에 속칭 산자골이라는 좁은 골짜기인데 현재는 일재(一齋) 남장섭(南章燮)의 모친 청풍 김씨(淸風金氏)의 묘지 천곡서당 터에 일재의 어머니 묘를 써게 된 연유는 생시에 일재가 열었던 서당에 어머니로써 정과 애환을 쏟았던 곳이었기에 유언에 따라 묘를 써게 되었다고 함 -일재의 재종질 남종환씨의 증언-. 공부상으로는 이안면 대현리 전(田) 431번지이고 소유권자는 일재의 맏손자 남재욱(南在旭)이다.
로 조성되었다. 필자는 본고를 작성하기 전에 일재의 제자인 권영태(權榮泰 84세)옹을 대동하고 옛 천곡정사와 덕천정 현장을 답사하였다. 답사중에 천곡정사 터와 일재의 묘소가 있는 이안면 대현리 사실마을에서 일재의 재종손자인 남종환(62세)씨를 만나 현장답사를 함께 하였다.
 덕천정은 6.25 사변후 일재의 아우되는 남장소(南章昭)가 먼저 터잡아 살고 있던 이안면 여물리 속칭 임바우 마을로 그 위치는 이 마을 서쪽 외진 곳에 북향으로 지금은 마을 주민이 집을 새로 지어 살고 있다.

가. 설립자 일재(一齋) 남장섭(南章燮)
1) 가계(家系)와 인품
  남장섭의 자는 찬부(燦夫)요 일재(一齋)는 그의 호이다. 한말 국운이 기울어지던 융희 원년(1907년, 정미) 11월 10일 상주시 이안면 대현리 사실촌 옛집에서 태어났다. 일재의 상계(上系)는 신라 경덕왕 때에 영의공(英毅公) 휘(諱), 민(敏)이 시조이고 중시조는 고려조에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직부사(直副使)를 역임한 휘는 군보(君甫)요 호가 배천(柏川)이다. 배천의 손자인 휘 비(備)는 문과에 올라 금자광록대부 판중서문하시중 상호군이었고 5대를 내려와 중랑장을 역임한 휘 강(剛)이 처음으로 안동 예안에 터잡아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일재의 17대 파조이다. 휘 강의 아들 휘 화완(和緩)은 무과에 올라 연기현감을 지냈고 화완공의 아들 휘 맹운(孟雲)은 문과에 올라 풍기현감을 역임하였으며, 맹운의 아들 휘 희적(希績)은 세조 년간에 진사(進士)로 안동에서 영주 갈산동(葛山洞)으로 이거하였다.
  세대를 지나 명종 년간에 휘 임(任)은 호를 서계(西溪)라 하는데 진사로서 학문과 덕행이 있었고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를 지냈다. 일재의 12대조가 되는 서계공의 손자 휘 국유(國維)는 호를 고송(孤松)이라 하고 벼슬이 한성좌윤을 역임하였는데 이분이 영주에서 상주땅 은척면 봉림동(鳳林洞)으로 이거한 상주 입향조이다.
  고송공의 아들인 휘 명익(溟翼)이 오늘의 이안면 대현리 사실(沙室) 마을로 이거하여 영양남씨 사실문호(沙室門戶)를 열었으며, 명익공의 아들인 휘 초명(楚鳴)은 호가 죽헌(竹軒)으로 학문과 덕행으로 문명을 얻은 인물로 일재의 7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준동(俊東)이요 증조의 휘는 병천(炳天)인데 호는 현은(峴隱)이니 함창의 선비 조천(潮泉) 남한보(南漢普)의 문인이다. 조부는 휘 정순(正淳)이며 아버지의 휘는 용우(龍佑)로 대대 은덕으로 300여 년을 이어온 문벌이다. 어머니 청풍 김씨는 청성부원군의 후손인 김철성(金喆性)의 따님이고 배위(配位)는 여주이씨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후손인 이필충(李弼忠)의 딸이다.
  일재의 평소에 생활은 전형적인 전통 유학자(儒學者)로서 상투를 튼 머리에 의관을 정제하는 것을 생활화 하였고 학도들에게는 늘 자상한 선비의 상이었으며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일재는 평소 생활의 신조를 두 편의 시로 표현하였다.

  

 自警     스스로 깨우쳐 마음에 새김
人爲萬物靈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曰有一心靈  가로되 일관된 마음 가짐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一放不存靈  한결같이 존령이 아닌 마음을 쫒아내지 않으면
豈云萬物靈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 하겠는가.
修是吾身修  수신은 바로 내 몸을 닦는 것이요
身修最大修  내 몸의 수신은 가장 으뜸의 수신이다.
百修身不修  모든 수신할 것 중에 한가지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修是摠虛修  닦은 수신을 다 모아도 헛되이 닥은 것이 된다.

  이 시에서 일재의 한결같은 선비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직 선비로서의 첫째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수신(修身)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가장 새겨야 할 덕목이라는 것을 연거퍼 강조하면서 시의 종장(終章)에 “많고 많은 수신의 덕목 중에서도 한가지라도 모자라면 이미 닦은 수신을 다 모아도 헛되고 만다” 고, 하였으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대 명제(命題)와 궁불실의(窮不失義)하고 달불이도(達不離道)하는 선비의 길을 한결같이 마음에 품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自題
人爲人道可爲人  사람이 사람된 도리를 하여야 사람이라 할 수 있고
形體非人道理人  몸둥이 만으로는 사람의 도리가 없는 사람일 뿐이다.
道理由何由孝悌  도리는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부터이니
人爲道悌乃爲人  사람으로서 효제하는 길이 곧 사람됨이다.

  이 시 또한 위의 자경시와 같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을 적은 것으로 사람된 도리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형제간에 서로 보살펴 주는 효제(孝悌)가 사람됨의 중요한 요체라는 것이 평소의 마음 가짐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재의 이와 같은 마음가짐은 선비로서 일관되게 어굿나지 않은 생활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집안에서 많은 어린 학동들을 수발하면서 때로는 철없이 말썽을 부린 경우가 있었을 것임에도 가족들로 하여금 불편한 기색없이 항상 화평한 가정 환경을 유지한 것이 바로 일재의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대한 철학적 함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서당을 운영한다는 것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이로써 재산을 윤산(潤産)한다는 것은 일재 자신의 선비적 소신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봉사하는 그 자체를 명예로 삼았던 것이다. 후학 권영태 옹의 증언

  가산으로는 논밭 15두락이 전부이니 그 당시의 농촌 촌락에서 대가족을 겨우 방변(防邊)하는 정도였으나 가족들은 일재가 서당을 운영하는 것에 전 가족이 뒷 바라지를 할 정도로 가장의 하는 일에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앞의 각주 17)과 같음


2) 학통과 행적(行蹟)
  일재는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 7‧8세 때부터 권독(勸督)함을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서책을 보았으며, 일찍이 척숙(戚叔)이 되는 권승태(權承台, 호 敬齋) 공 공검면 양정리 지역에서 선망받는 선비로 일재학맥을 이었던 수제자 권우집의 양부(養父)이다.
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하는 방도를 들었다. 13세에는 예천군 용궁 월오에 사는 한학자 사암(思菴) 안재극(安在極)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고, 19세에는 안동 하회(河回)의 시산(時山) 류동준(柳東濬) 문하에서 성리학문에 깊은 지도를 받고 귀향하였다.
  이후 항상 학문에 마음을 두고 수습(修習) 정진(精進)을 계속하므로 그 덕행이 감화되어 마을과 이웃 마을 일대를 넘어서 외향(外鄕)에 까지 널리 퍼져 상주와 함창 그리고 용궁과 예천과 멀리 성주에 까지 알려져 수 많은 학도들이 운집하였다. 일재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사명감으로 부득이 1930년 초에 살고 있는 집에서 학도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 것이 천곡정사 태동의 시초이었다.
  부득이 1932년 살고있는 집 남쪽에 선대로부터 내려온 전지 곁에 터를 잡아 두칸의 서재(書齋)를 지어 “천곡정사(泉谷精舍)”라 이름하고 학도들이 숙식하는 집을 따로 마련하여 수년동안 지내오다가, 해를 그듭할수록 학도들이 모여들어 서당이 협소하여 수년후 피치 못해 다시 또 삼칸집을 증축하였다.
  천곡정사의 처음 건물은 방 두칸의 한옥 기와집이었고 뒤에 증축한 건물은 방 3칸의 초가 한옥이었다. 학도들에게 한푼의 학자금을 거출하지 않으면서 물자가 귀하고 재원이 어려운 형편에서 두 체의 건물을 새로 건축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용단이었고 이에 대한 가족의 협조는 봉사로 결집된 가족정신이었다고 본다. 다만 건축과정에 학도들이 간간히 인력을 보태기는 하였지만 전적으로 이에 의존하지 않고 어려운 가산으로 출혈하여 담당한 것이었다고 한다. 2017년 문도들의 취회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함
 
  무릇『맹자』에 이르기를 ‘군자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켰다’고, 하듯이 일재가 고장의 인재를 모아 영재를 길러 내는 흥학육영(興學育英) 사업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시대는 5백 년 종묘사직이 쓸쓸한 빈터가 되었고, 숭고한 백의(白衣)의 전통 미풍을 말살하는 일제(日帝)의 광기(狂氣)가 극에 달하였던 시기였지만 평상시 옛 모습 그대로 상투에 높다란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냈다고 한다. 출타시에는 행의(行衣)를 갖추고 띠를 매는 모습으로 은연 중 저들의 강제와 제압에 굴종하지 않는 모습을 견지하였음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민족정신이었다 할 수 있다. 일재의 흥학교육 정신은 마침내 고장을 벗어나 멀리 알려져 1945년 해방이 되고부터 찾아오는 학도들이 더 많아졌다. 이 당시에는 이미 제도권 학교 교육이 도입되었으나 천곡정사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을 이어 인간 본성에 따른 유학(儒學)의 전통적 학문을 그 재질에 따라 더 철저하게 실시하여 성취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1950년 6.25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도처에 인적 물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천곡정사 또한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장에 병역 징집으로 군에 입대를 하는 관계로 학도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정사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하는 학도는 겨우 4~5명이고 인근 마을에서 통학하는 학도들 몇 사람 정도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천곡정사는 날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구학문에 대한 풍속과 세태는 날로 황폐해지고 사람들의 문명에 대한 습성이 개화되어 교통이 불편한 깊은 산중마을에 학도들의 접근성이 열악한 것도 쇠퇴의 한 원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재는 이를 항상 안타깝게 여겨 서당으로 적합한 길지(吉地) 인리(仁里)를 찾아 이사를 생각하고 있는 차제에 1955년 병란 직후 아우되는 남장소(南章昭)가 이미 자리를 잡아 살고 있던 이안면 여물2리 속칭 임바우 마을을 택하여 두 칸의 작은 집을 지어 “덕천정(德川亭)”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새로운 덕천서당 시대를 열게 되었다.
  덕천정이 위치한 마을은 함창 소재지로부터 약 10리 정도에 비교적 교통이 편리하고 목전에 광활한 이안평야가 전개되는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고, 속리산 물길이 여기에서 이안천(利安川)으로 내다운 내로 발전한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덕천정은 새로 지은 삼칸 기와집 한옥으로 마을에서 서쪽으로 백여 미터 되는 언덕에 외딴집으로서 이안천과 광활한 이안들을 향하여 학도들로 하여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적소(適所)라고 할 수 있었다.
  일재는 덕천정에서 가족과 떨어져 몇 해를 지체하면서 사실마을 본가의 가족을 솔권(率眷)하여 이사할 계획이었지만 1960년 (경자년) 겨울에 우연히 병을 얻어 부득이 사실 본가로 환가(還家)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61년(신축년)에 덕천정 시대의 포부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55세 요수(夭壽)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애석하기 이를데 없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향중 각처에서 모두 한탄하는 소리가 가득하였다. 7일장으로 장례를 치루는 날에는 문도(門徒)와 사우(士友)들 모두가 상여줄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운상을 할 때는 대개 정해진 가락의 상여소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날에는 문도와 사우들이 지은 만사(輓詞)를 번갈아 낭독하면서 슬픔을 토(吐)하였다고 하니 그 광경이야 말로 참으로 진지하고 애잔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일재와 교유한 인물들은 당대에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영남의 명망가(名望家)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상주의 인물로 왕사(枉史) 김만원(金萬源) 왕사 김만원(1857~1932) : 상산 김씨. 자는 복경(復慶) 호는 왕사(枉史)이다. 가학으로 독학정려한 유학자로 학문과 덕행은 본향 상주뿐만아니라 의성과 용궁 등지에까지 알려져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1907년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들어가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2010년 정부에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생과는 선배의 예를 갖추고 찾아가 안후(安候)를 묻고 서찰(書札)로 질의(質疑)를 하는 돈독한 관계였다. 성주(星州)의 명문가 후예로 한문학에 명성을 떨쳤던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공산 송준필(1869~1943) : 야성 송씨로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 성주 출신으로 사미헌 장복추의 문인으로서 한학자이요, 1919년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에 곽종석, 장석영 등과 활동한 애국지사이다.
과 달성 출신으로 상주 낙동에서 일재와 동류의 서당을 열어 의성 서부지역 일원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던 구산(九山) 박노선(朴魯善)과는 사돈지간으로 더욱 깊은 관계를 가졌다. 이 밖에 예천 삼강(三江) 고을의 우당(愚堂) 정재선(鄭在璿), 문경의 춘원(春園) 변종헌(卞鍾憲) 등 당대에 최고의 이름난 한학자 들이었다.

나. 서당의 운영과 학제(學制)
  천곡정사의 운영과 학제는 조선시대 전통서당과 다를 바 없다 하겠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으로 남긴 문부(文簿)가 없으므로 생존한 후학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실태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제는 자율적인 관계로 일정한 년한이 없어 년령층이 다양하고 초기에부터 서당이 존속할 때까지 계속하여 글을 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당에 들어왔다가 곧바로 나간 학도도 있었다고 하나 평균적으로 2~3년정도였다고 한다. 교재는『천자문(千字文)』부터『명심보감(明心寶鑑)』‧『소학(小學)』‧『통감(統監)』에 이어 사서삼경으로 하였으나 일부 소수의 어린 학동들을 제외하고는 거개의 학도들은 청년층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상당히 수준높은 교과목을 이수하였고, 곁들여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반적 상식과 서예 습자를 가르쳤다.
  인성교육은 한문교재 자체가 교본이라고 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일재가 마음속에 품었던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덕목을 몸소 실천하는 그 자체였다고 한다.
  교육방법은 성독(聲讀)을 반복하여 암기하는 것을 요건으로 하여 뜻을 터득하는 전통방법으로서 물리적으로 강압을 하지 않고 학도들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익혀 나가도록 하였으나, 학내에 앞서가는 학동들의 열성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경쟁심이 유발하는 분위기였다.
  천곡정사에는 접장(接長)이라는 제도가 명정한 바는 없었으나 학도들 중에 오래된 선임자가 은연중 접장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 정사의 원체 건물에는 권우집(權羽集)이고 새로 지은 아래체 건물에는 채한명(蔡漢明) 학도였다. 이들 두 사람은 전통시대 접장과 같이 새로 들어온 학도들에게 기초를 가르치거나 학도들을 선도하는 오늘의 학반에 반장의 역할을 하였다.
  천곡정사에는 매 15일 내지 20여 일마다 모두 28회에 이르는 강생록(講生錄)이 남아있어 그 수록 내용을 먼저 표로 정리하기로 한다.


강생 일자별 강생인원 및 강(講) 내용

일 자

강 생(講 生)

학도별 강() 내용

인 원()

나 이()

1932.12. 1

11

7 ~ 22

1932.12.25

8

1933. 4. 1

20

8 ~ 22

1933.11.15.

11

15 ~ 18

1934. 3. 1.

12

14 ~ 19

1934.11.15.

13

9 ~ 20

1935.12. 1.

15

1935.12.15.

8

 

1937.12.15.

11

13 ~ 19

1937.12.15.

7

1936.11.15.

11

 

1939.11.15.

18

1940.12. 1.

12

 

1946.11.15.

22

5 ~ 20

1946.12. 1.

21

 

1946.12.27.

23

 

1947. 2.15.

35

 

1947.11.15.

21

 

1947.12. 1.

17

 

1947.12.26

17

 

1948. 9. 1.

27

 

1948.11.15

26

 

1948.12.26.

22

 

1949. 2.15.

30

 

1949.11.15

26

 

1949.12. 1.

29

 

1949.12.15.

29

 

1949.12.26.

29

 


 강생록은 임신년(1932) 12월 1일부터 기축년(1949) 12월 26일까지 17년 동안에 실시한 것을 간간히 작성하였는데 서당을 개소한 연대는 이보다 수년전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강생록이 작성되었다는 것은 서당의 고정된 학도들이 확보되고 운영이 어느 정도 정착하고 난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일재 문도인 권영창 씨는 적어도 강생록 기록 이전 4~5년 전일 것이라고 함
 1949년 이후 1955년 까지 6.25병난에도 적은 인원이지만 서당은 계속 운영한 기록과 임바우로 이사를 한 이후 덕천정 당시에 전하는 강생기록은 없다. 따라서 일재 남장섭이 천곡정사와 덕천정에서 배출한 후학은 강생록에 전하는 원수보다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해도 무리가 아닐 것으로 본다. 강생록에는 일자별로 생도들이 그 날에 강(講)한 과목을 기록하여 생도들의 교육적 성장과정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강생록의 성격은 일정 기간 공부한 내용을 선생님 앞에서 암송하여 학도의 교육성적을 고과(考課) 하는 일종의 시험을 치르는 과정으로 보인다. 대개 한 과정을 15일 내지 20여 일 정도 배우고 강(講) 이 때 강(講)이라고 함은 사전에 명정한바 외운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선생님 앞에서 배운 내용을 외워서 성독(聲讀)하여 그 성적을 시험한다는 뜻으로도 통함
을 하였는데, 전체 학도들이 보는 앞에서 책을 선생님 앞에 놓고 뒤로 돌아 앉아서 선생님이 묻는 것을 대답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학도들은 이때 선생님이 어느 절목을 물을지 가슴을 조이고 그 기간 동안에 배운 전 과정을 완전히 정복하고자 정열을 쏟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을 통과하기 위하여 때로는 중요한 내용을 손바닥에 적어서 대답을 하는 꾀를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강생록에 기록한 연인원은 모두 558명이고 실제 인원은 169명인데 이 기록이 일종의 학적부라고도 할 수 있어서 여기에 수록한 인원이 천곡정사에서 배출한 문도들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생록을 작성하기 이전과 강생록 작성기간 동안 단기간에 수학을 한 인원도 있고, 일부 공부는 하였지만 강에 불참한 경우도 있을 것인 만큼 사실상 인원은 이보다 훨신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생록의 기록순서는 학도들의 연치 순서이고 학도의 생년(生年)과 자호(字號) 그리고 관향(貫鄕)을 적은 것은 새로 입학(入學)한 학도로 보인다. 학도들의 나이는 9세 이하의 어린 학동들도 있으나 자(字)를 부여 받을 정도로 20여세 이상되는 청년들이 대부분 이었다고 한다. 남자가 자를 부여 받았다는 것은 관례(冠禮)를 치룬 성인을 뜻한다. 후학 권영창씨의 증언
 강의 과목은 기초한문으로서 천자문(千字文) 또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 있기는 하나 소수에 불과하고 거의가 소학(小學) 내지 사서(四書) 경전(經典)으로 그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도들 중에 기초학문을 하는 자는 서당과 마을이 연접한 마을의 일부 학동들로 추정하고 정사에서 숙식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리(文理)를 얻고자 하는 유학도(留學徒)는 가학(家學)으로 이미 기초를 완수한 학도들이었다고 한다. 문도 권영창씨의 증언
 무엇보다도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하여 강생의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였다는 것은 바로 일재 남장섭의 후학 교육의 실적이기도 하거니와 천곡정사의 소중한 역사라는 점은 특기할만 한 일이다.

다. 덕천정(德川亭) 시대
  임바우 마을의 덕천정에는 주변의 마을과 함창‧공검면 일대의 학동들과 멀리 점촌, 영순면에 거주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7~20여 세 전후의 학도들이었지만 일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서당에 한문 공부를 하는 학동들도 있었다.
  당시의 교육환경은 이미 제도권 학교가 정착하여 한문을 탐구하는 구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열정은 상당히 줄었다고 하지만, 뜻있는 학부형들의 이른바 보학(寶學)이라는 관념이 많이 남아 있었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수십 년간 함창고을 일대에서 명성을 얻은 천곡정사가 덕천정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여 새로이 서당이 열린다는 명성이 알려지자 학업을 청하는 학도들이 점점 많아졌다고 한다. 이때의 학도들은 학교에 미취학 연령의 아이들과 비록 학교에 다니지만 부모의 의지로 모여든 학동들이었다.
  덕천정에서는 강생록이 비치되지 않아서 확실한 학도의 수를 알지 못하나 일재의 문도들이 결성한 회보계(會輔稧) 좌목(座目 : 명단) 중에 1960년도 이후에 작성된 회보계 좌목 중에 끝부분인 경자년(庚子年, 1960) 4월 이후에 연이어 4차례 기록하였는데 글씨체가 각각 다르다.
 91명이 덕천정에서 배출한 학도들로 보인다. 덕천정의 학도들은 사실마을의 천곡정사와 달리 모두 통학을 하였다고 하고 일재의 아들 남기환씨의 증언
 날마다 학도들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학도들은 새벽에 오는 경우도 있었고, 학교에 다니는 학동들은 방과후에 서당에 오는 등 공부하는 시간이 다양하였다고 한다.

라. 배출 후학(後學)
  이 서당 출신 후학에 대한 문부가 비치되지 않아 정확한 인원을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도에 서당이 개설된 후 4년이 지난 1936년(丙子)에 작성하여 1960년대 초반에 까지 후학들이 결성한 회보계(會輔稧) 계원 좌목(座目 * 명부와 같은 뜻)에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계원의 좌목이 한 사람의 글씨체로 처음 작성 된 이 후 뒤이어 수차례 가록(加錄)을 하였는데, 글씨체에 따른 시기별 인원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작성일자

인원수

지역별 인원수

작성당시년령대

최고

최저

1936.11.15

85

이안 본면 25, 함창 8, 외서 6, 은척 16, 공검 13, 사벌 매호 1, 용궁 1, 가은 3, 영순 4, 문경 3, 내서 1, 예천 3, 성주 1

26

6

미상일

55

외서 6, 함창 6, 은척 6, 문경 6, 공검 12, 이안 9, 사벌 2,공성 1, 산양 2, 예천 3, 풍양 2

 

 

미상일

13

은척 4, 공검 3, 가은 1, 이안 1, 함창 2, 농암 2

 

 

미상일

19

공검 1, 농암 1, 함창 2, 이안 8, 은척 1, 의성단북 1, 안동예안 1, 용궁 2, 산양 1,영순 1

 

 

1960. 4.

32

사벌 2, 문경 2, 이안 19, 공검 9

24

20

미상일

59

함창 4, 은척 2, 군위 의흥 1, 문경 동로 1, 풍양 1, 상주 복룡 1, 이안 49

 

 

260

이안 111, 함창 22, 외서 12,

은척 29, 공검 38, 사벌 3, 용궁 3, 가은 4, 문경 11, 영순 5, 예천 6, 상주 2, 산양 3, 성주 1, 풍양 3, 농암 3, 의성 단북 1, 문경 동로 1, 군위 의흥 1, 안동예안 1

- 7개 군 20개 면 -

 



지역별 회보계 계원 인원집계표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록된 계원은 7개군 20개 면에 260명이다. 1936년 11월 15일에 처음 작성한 회보계 계원 은 85명이고 지역별로는 서당이 위치한 이안면이 111명으로 제일 많다. 인근지역인 함창과 공검 그리고 은척, 외서면 등 상주 함창 관내 뿐만아니라 멀리 문경‧ 예천․성주․의성․군위․안동에 이르기 까지 외처에서 유학(遊學)을 온 생도가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계원 좌목 말미의 경자년(1960) 이후 수록분 91명은 임바우 덕천정 시대에 수학한 문도들의 명단이라고 한다. 일재의 아들 남기환씨의 증언

  배출된 후학들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자기 고향에서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학방(學房)을 열어서 봉사한 경우도 있고 이 시기는 이미 현대적 학교 교육 학제가 완전히 정착 되었으나 일부 촌락에서는 전통 서당교육을 실시하였다.
 일부는 한약종상(韓藥種商)등 전문직으로 종사하는 등 초창기에 한약종상은 본초강목 등 한문서적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고, 이에 따라 전문적 교양을 쌓아 국가의 제도권 시험을 거쳐 약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분야에 활동을 하였는데 대표적 사실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상주향교에서 10여 년간 한문 경서를 가르치는 권영태씨의 증언에 의함


천곡정사 출신자 사회활동 사실


구분

출신자

활동년대

활 동 지역과 내용

마을 학방

권우집

1959~10년여간

공검면 관내 학동들 평균 10여 명이 공부를 하였다. 2000년대 초반에 사)상주 담수회에서 운영하는 한문교실에서 논어 등 경전을 강의하였고 이후 이 과정을 상주향교로 옮겨 2005년까지 전임으로 강의함

남병덕

1958~5년여간

예천군 개포면 관내에서 서당을 열었음

한약 종상

조규진

195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까지

예천 풍양

김영기

위와 같음

상주 함항

김기태

위와 같음

상주 내서

조명환

위와 같음

안동 풍산

박종면

위와 같음

문경 가은

임윤석

1960년대부터 2014년 까지

상주 서문

전임 강사

권영태

2005~ 현재

상주향교에서 운영하는 사회교육원 한문 경전반 전임강사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

학문 연구

권영창

1988~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학연구원 한문번역 전문위원으로 재직

문경 영강문화원 경전반 전임 강사 재직

 


  1950~60년대 초반에 마을의 한문 학방은 조선시대 전통서당의 최 말기로 이 후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소멸되었다. 당시에도 제도권의 신교육이 있었지만 한문 소양을 요구하는 몇몇 뜻있는 학부형들의 소망에 따라 면 관내에서 유일하게 학방이 운영되었고 여기 과정을 거친 후학들은 초등학교 신학문의 문리 터득과 수신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에 한약 종상을 경영한다는 것은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한약에 관한 의서(醫書) 자체가 한문이기 때문에 일재의 후학들 중에 여기에 뜻을 두고 일평생 약업(藥業)을 생업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 와서 과학과 물질이 인성(人性)을 압도하여 마침내 인륜과 도덕의 퇴락이 날로 더해가는 기막힌 현실을 개탄하고, 사회 일각에서 인륜 도덕을 회복(恢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향교(鄕校)를 비릇한 사회교육기관에서 옛 한문경전을 교과로 체택하여 한문에 소양을 갖춘 강사의 수요가 새로이 일어나게 되었다. 권영태 옹의 경우 일재의 적전 제자로서 상주향교 여러 과정에 전임 한문 강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오늘의 상주 한문학 분야에 일재학맥의 주류 인사라고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영창(權榮昶, 82세)씨는 6.25 병란 직후 2년 동안 일재 댁에서 무료로 기숙을 하면서 수학을 하고 계속 정진하여 우리나라 한문학계에서 중후한 기관으로 자부하는 서울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학 연구원에서 고전번역(古典飜譯)을 할 만큼 실력을 쌓은 한문학자로 일재의 후학들로서는 자랑이라 할만하다. 아울러 이름이 알려진 만큼 지방으로 하여금 한문 강의와 한시 작법 등에 초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재의 후학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비교적 활동이 뒤처지고 있는 지방의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유림활동(儒林活動을 하거나 최근에 전국적으로 붐을 타고 있는 한시(漢詩)분야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 생존 후학들의 당시 실상 이야기 채록(採錄)
 • 간혹 학도들과 식사를 할 때 반찬이 다만 보리밥과 무 김치뿐일 경우가 다반사이니 일재가 말하기를 “무하저처(無下箸處 : 밥상에 젓가락질 할 곳이 없을 만큼 반찬이 없다는 뜻)” 라고 말하여, 그말을 들었을 때 대단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 일재 역연 가정을 이끌어 가는 가장으로서 농사일 등 경제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학방의 일에 더 비중을 두었다. 학도들이 일재 댁에 모심기와 벼베기에 봉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학도들에게 농사일을 요구하거나 추호도 기대는 일이 없었다.  - 일재 추모계 취회시 문도들의 말.
 • 서당에 수십 명의 학도들이 상주(常駐) 기거하므로 이들의 분뇨 처리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때때로 일재 자신이 화장실에 분뇨를 직접 채취하고 처분하는 것을 의무로 알고 학도들에게 시키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 일재의 제자인 고 임윤석씨로부터 필자가 들은 이야기.
 • 일재가 공검면 양정마을에 후학 권우집씨 집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묵었을 때 이 마을에 살았던 다른 학도들 집에서 서로 초대를 하고, 별식으로 떡을 빚어 선물로 드리거나 혹은 명태를 선물로 드리는 것을 보고 비록 경제적으로 급료가 없는 학방 선생님이지만 그 위상은 과연 높다는 것을 알았다.  - 문도 권우집씨 동생 권만집(75세)씨의 증언
 • 1948년 건국을 하던 해에는 학도들 전원이 걸어서 상주 경천대로 소풍을 가서 낙동강과 무우정(舞雩亭) 무정 : 조선 효종년간에 충신이었던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1604~1647)가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 공부하던 곳
을 비로소 구경하고 한시 짓는 놀이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 문도 권영태 옹의 증언
 • 문도 권영창씨는 6.25 병란 전 해인 14세에 입학하여 병란이 일어나자 서당의 학도들이 급격히 줄어 외딴 서당에서 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일재댁에서 무료 급식을 받으면서 2년여 동안 시전(詩傳)과 서전(書傳)을 공부하였다. 그때도 서당은 운영되어 본 마을과 인근에서 통학하는 학도들이 계속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바. 선양사업(宣揚事業)
  병자년(1936)에 결성된 회보계(會輔稧)는 서당을 운영하면서 통상적으로 운영되었고, 덕천정 시대 이후 일재가 세상을 떠나고도 수년 동안 운영되다가 중단되었다. 이 후 수십 년이 지나고 생존한 일재 문도들이 옛 회보계의 뜻을 이어 “일재선생추모계”를 새로 조직하여 유적비를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선양사업을 전개하였다. 특별히 작고한 문도의 자녀들 몇 분이 자기 부형의 뜻을 이어 동참을 한 경우도 있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었다. 앞의 각주 17)과 같음
 

1) 추모 유적비(遺蹟碑) 건립
   가) 추모 유적비 건립위원회 구성

구성일자

회원수

임 원

적 요

직 임

성 명

20028

17

회 장

곽윤석(郭潤奭)

 

 

 

총 무

임윤석(林允錫), 권영태(權榮泰)

 



   나) 건립일자 ; 2003(癸未). 4. 18.
   다) 건립장소 ; 상주시 공검면 역곡리 86번지(톱파이 고개)
   라) 비석의 제원(諸元) ; 비신(碑身)은 오석으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는 화강암이고 석조(石造) 울타리에 바닥에는 마석한 돌을 깔았으며 별도로 안내비를 세웠다.
   마) 비문(碑文)
      • 표서(表書) “一齋南先生遺蹟碑” (일재남선생유적비)
      • 비명(碑銘) : 후학 권영창(權榮昶) 짓고, 임윤석(林允錫)이 글씨를 씀
   바) 건립주체 : 문하생 일동
   사) 비석 제막행사(除幕行事)

  유적비 고유 행사에는 일재의 자손들과 문도 및 작고한 문도들의 자녀와 상주시 관내 기관단체장을 비롯한 유지 그리고 인근의 유림 제현(諸賢) 등 200여 명이 성황을 이루었다. 비석 제막 행사는 1, 2부로 나누어 먼저 유교 의례(儀禮)에 따른 고유제(告由祭)를 봉행(奉行)한 후 신식 의식 행사를 거행하였다.
  고유제 집사분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유제(告由祭) 집사분정(執事分定)

직임(職任)

성 명

관 향

적 요

초헌관

류영하(柳寧夏)

풍산(豊山)

서애 류성룡선생 종손

아헌관

권영기(權榮基)

예천(醴泉)

초간 권문해선생 종손

종헌관

남병택(南炳澤)

영양(英陽)

일재 선생가문의 문장

상례(相禮)

권칠용(權七勇)

안동(安東)

청대 권상일선생 종손

찬자(贊者)

김원기(金元基)

의성(義城)

상주 유림

독고유(讀告由)

정성진(鄭聲鎭)

청주(淸州)

예천 유림

시도(時到)

우희원(禹熙元)

안정희(安正熙)

단양(丹陽)

순흥(順興)

상주 유림

고유문찬자(撰者)

권우집(權羽集)

안동(安東)

일재선생 후학

제반 주선(周旋)

권영태(權榮泰)

안동(安東)

일재선생 후학



   사) 재원(財源) : 후학 임윤석 등 45명의 성금(誠金) 19,660,000원으로 비석 수갈(竪碣) 비용에 충당하고 잔여금 1,615,660원은 추모유계(追慕儒稧) 결성에 기본자산으로 하였음. 자료제공 : 후학 권영태 옹


 2) 추모 한시 백일장(白日場) 개최 
  추모비 건립과 함께 비석 현장에서 강호제현(江湖諸賢)이 참여하는 “추모일재남선생(追慕一齋南先生)” 제하(題下)의 한시(漢詩)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참여한 시객이 100여 명으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작품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3) 추모유계(追慕儒稧) 운영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일재의 후학들을 중심으로 선생을 추모하는 유계(儒稧)를 결성하였다.
  결성 당시에 계원으로 참여한 인원은 00원이었고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 결성일자 ; 2003년  4월 18일
     • 임원

직 임

결성당시

현 재

역대 원임(原任)임원

계 장

곽윤석(郭潤奭)

김종현(金鍾鉉)

이영희, 임윤석, 권영태

총 무

임윤속(林允錫)

남종환(南宗煥)

임윤석, 권영태, 우희원

계 원

17

30

 




  추모계는 선생의 유적비 현장에서 매년 봄에 택일하여 거행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을 추입하여 영속(永續)하도록 하였다.
  2017. 3. 23일 추모계에는 필자 역연 일재 선생의 문도인 동산 권영태 옹으로 하여금 수년 동안 경서(經書)를 배우는 까닭으로 일응 일재 학맥 일원의 자격으로 이  유계에 참석하였다.


5. 맺음말
  이상 우리 상주에서 마지막 전통서당으로 활발한 교육을 실시하였던 일재(一齋) 남장섭(南章燮)의 천곡정사(泉谷精舍)에 대한 사실의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천곡서당과 덕천정의 교육과정 또는 교적부 등 자료의 미비로 좀 더 정확한 사실을 찾지 못한 점 아쉽게 생각한다.
  교육은 인간 세상에서 영원한 과제이다. 이 과제야 말로 바람직한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양식(良識)을 길러 사람 간에 서로 조화로운 삶이 되도록 하는 길이다. 그 가운데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으로 봉사정신을 가진 교육자야 말로 존경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비록 요수(夭壽)로 생을 마쳤으나 일생동안 재화(財貨)에 연년하지 않고 오로지 후학 양성에 신명을 바친 일재 남장섭 선생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 상주지역의 마지막 전통 서당 교육의 역사적 사실을 뒷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부족한 사람의 무사(蕪辭)한 글에 질정(叱正)을 기다리면서 뒷날에 누구인가 더 상세하고 알찬 내용의 글이 남겨지기를 바랄뿐이다.
  끝으로 이 원고와 관련한 여러 가지 문헌(文獻)을 지면관계로 여기에 수록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며 그 목록을 첨부한다.



《제 문헌(諸 文獻) 목록》
 1. 천곡정사기(泉谷精舍記) : 풍산(豊山) 유동준(柳東濬) 기(記)
 2. 덕천정기(德川亭記) : 순천(順天) 박노선(朴魯善) 기(記)
 3. 유적비 고유문(告由文) : 후학(後學) 권우집(權羽集) 근찬(謹撰)
 4. 일재 남선생 유적비명(銘) : 후학(後學) 안동(安東) 권영창(權榮昶) 근찬(謹撰)
 5. 일재 남선생 추모 시집서(詩集序) : 문하생 안동 권영태(權榮泰) 경서(敬書)
 6. 추모 한시대회 대표작품 : 장원 이수필(李壽必), 차상 정상호(鄭相鎬)
 7. 회보계(會輔稧), 丙子至月十五日 : 일재의 아들 남기환 소장
 8. 천곡정사 강생록(講生錄) 壬申十二月初一日 : 남기환 소장


《 참고문헌 》
 1.『商山誌』「蒼石本」등
 2. 김태환 교육학석사학위 논문,「전통서당에 관한 고찰」, 2005, 춘천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3. 상주박물관 소장,『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
 4. 강응철(康應哲) 저,『남계집(南溪集)』
 5. 금영택(琴英澤) 저,『만우재집(晩寓齋集)』
 6. 조희열(曺喜烈) 저,『상주지명총람(尙州地名總攬)』
 7.『화동면지(化東面誌)』, 2015, 화동면지간행원원회
 8. 금중현 논문,「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사실」,『경상북도 상주시 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보고서』, 2016.12.15.,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9. 금중현 논문,「舊堂 趙沐洙의 商山誌 草冊 故」,『尙州文化 제23호』, 2013, 상주문화원
10. 남기환(일재의 아들)씨 소장,「會輔稧, 丙子 至月」및「泉谷精舍 講生錄, 壬子 十二月」初一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