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규방가사(4) 무오화전가(戊午花煎歌) 연구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고등학교 교사 권 택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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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318 1. 연구의 방향과 방법 318 Ⅱ. 무오화전가(戊午花煎歌) 가사 개관 320 1. 작품의 주제적 양상 320 2. 지역적 특징 322 3. 아들 인터뷰 323 Ⅲ. 내용 및 표현상의 특징 고찰 327 1. 서두 327 2. 본문 331 3. 결미 344 Ⅳ. 결론 350 부록 353 |
현대규방가사(4) 무오화전가(戊午花煎歌) 연구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고등학교 교사
권 택 룡
Ⅰ. 서론
1. 연구의 방향과 방법
가사(歌辭)는 여말 선초에 정립된 문학 장르로, 조선 초기와 중기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유교 이념과 자연 속에서의 풍류를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지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박인로의 ‘누항사’와 같이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작품으로 그 내용이 변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기행가사와 규방가사 등이 조선 후기 가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의 가사를 근대가사라고 한다.
근대가사는 형식적으로도 많이 변모하였다. 초기에는 비교적 짧고 마지막 행은 시조와 같은 3․5․4․3의 음수율을 지닌 정격가사(正格歌辭)가 지어졌으나, 후기에는 매우 길고 마지막 행도 정격가사와 같은 음수율을 더 이상 지키지 않게 되었다. 이를 변격가사(變格歌辭)라 한다.
필자가 분석한 작품은 지금부터 40년 전인 1978년에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우복 가문으로 시집 온 의성 김씨가 지은 ‘무오화전가(戊午花煎歌)’란 규방가사이다. ‘무오화전가’는 제목 그대로 ‘화전가(花煎歌)’이다. 출가한 (종)형제들과 그 가족들이 고향 마을에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헤어지는 것이 이 가사의 내용이다. 출가한 여성들 위주로 한바탕 신나게 놀음을 하는 면에서 넓은 의미의 화전가로 볼 수 있겠다. 또 “근친길이 제일이요 화전길이 버금이라.”(상주 지방 가사)라는 말이 있듯이 시집간 부녀에게 친정에 가는 것은 놀음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가사를 연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이 작품이 지어진 지역의 전반적인 특징을 조사하고, 가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계신, ‘戊午花煎歌’를 지으신 분의 아드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집안에 대한 이야기, 이 가사 내용에 대한 이야기, 향유 방식 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리고 내용과 형식상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 이들 작품이 지닌 문학적 의의를 진단해 보았다.
이외 규방가사와 규방가사 연구의 방향과 방법, 연구사 등은 필자의 졸고 ‘현대규방가사연구(1)’(상주문화 24호)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Ⅱ. 무오화전가(戊午花煎歌) 가사 개관
1. 작품의 주제적 양상
이 작품의 원본은 작가 의성 김씨의 5남매 중 막내의 아들인 정육씨가 보관하고 있다. 의성 김씨는 이 작품을 제외하고도 10여 편의 작품이 더 있다. 이 작품들의 滅失을 우려한 정육씨가 원본은 본인이 보관하고 상주문화원에 복사를 맡기게 되었고 그 복사본이 필자에게 전해져 현재는 필자가 보관하고 있다. 복사한 의성 김씨의 작품을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지만 무오화전가(戊午花煎歌)로 볼 때 수준 있는 작품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17~8세에 이곳 봉화 해저를 떠나 상주 우복 종가의 둘째 며느리로 출가하였다. 꿈 많은 명문가 부잣집 처녀가 또 다른 명문가의 며느리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러나 출가 전과 후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더구나 우복 종가의 종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작가의 부군은 5남매를 낳고 작가 나이 29세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에 작가 의성 김씨는 시부모 명으로 상주 외서 우산의 우복 종가로 가게 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젊은 시절을 종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에 고된 삶을 살았던 필자가 1년에 한 번 정도 친정에서 잔치를 하는 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무오년에 지었다. 의성 김씨가 1913년 생이니 무오년은 1978년으로 보아야 한다. 작가 나이 66세의 노년기라 할 수 있다. 작가가 90세까지 장수하신 분이라는 점을 볼 때 이때에는 매우 건강했을 것으로 보이며 인생을 회고하고 삶을 즐기기에도 알맞고 부끄럽지 않은 나이이다. 더구나 그 장소가 친정 마을인 봉화 해저이다. 함께 잔치를 즐긴 사람은 친 형제 10남매(2남 8녀)와 종형제들, 자녀, 조카 등 친정 가족이다. 정겨운 장소와 사람들이다. 가장 행복했을 어린 시절과 이후의 애환을 함께 했던, 조부모나 부모를 함께 둔 혈족들과는 이해(利害)를 떠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1970년대에는 이런 전통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두 부문은 작가 의성 김씨의 집인 상주 우산리와 딸과 친척들이 많이 사는 서울에서 봄을 맞이하여 근심이 쌓인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다. 봄을 맞아 아름다운 산과 들을 바라보며 청상과부로서의 삶을 한탄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근친 가는 본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고 있다.
본문 부문은 서울에서 고향 마을까지 가는 여정으로 시작하고 있다. 객지에 있는 원근 친족 모임의 우두머리 명에 따라 각지에서 고향 봉화 해저를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사랑하는 친족과 고향의 이웃들, 그리고 고향 산천을 만나는 설레는 길이었다. 고향에 도착해서 새마을운동으로 변모한 고향 마을에서 아쉬움을 느끼고 변치 않은 고향의 산천을 자랑하고 있다. 이어 고향 지명의 유래를 이야기하고 입향 선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놀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놀음의 준비와 3일 간의 놀음 한마당을 흥미 있게 묘사하고 있다.
결미는 행사를 치르고 남은 비용을 문중과 고향 친목회에 드리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지는 내용이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길게 드러내고 있다.
노년에 이른 작가가 오랜만에 고향에 가서 피붙이들과 인정을 나누는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을 티 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때가 되면 떠나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서 한 행동이나 생각한 것이 노래로 남아 그 사람을 추억하게 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 더 나아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2. 지역적 특징
규방 가사 ‘무오화전가’의 저자인 의성 김씨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 가사의 배경이 된 곳은 행정 구역 상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海底一里)’이다.
해저마을은 원래 의령 여씨(宜寧 余氏)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조선 말기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1641-1707)선생이 건넛마을 용담에서 1693년 전거해 팔오헌 종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마을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김성구의 증조부인 개암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의성 김씨들이 모인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파라미(波羅尾)라 칭하였다고 하며, 마을이 하상(河上)보다 낮아 바다 밑이라고 해서 해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의성 김씨와 타 성씨를 합하여 100여 가구가 살고 있으나 조선말기 전성기에는 의성 김씨만 100여 호가 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전체 배치는 봉화의 지세가 험하나 앞으로 넓은 경작지가 펼쳐진 곳에 입주하고 있다. 영주~울진 간을 연결하는 36번국도가 마을을 지나고 있으며 봉화군 소재지와는 약 2km 떨어진 비교적 근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전면에는 도로를 가로질러 넓게 펼쳐진 경작지가 있고 배면에는 해발 592m의 응방산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은 그 사이에 산을 따라 길게 남북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옥들은 동남향을 하고 있다. 해저마을은 중앙향으로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며 지나는 길을 중심으로 서쪽을 아랫마을(아랫마), 동쪽을 윗마을(웃마)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웃마는 타 성씨가 거주하고 있고 아랫마에는 종가를 비롯한 의성 김씨 대부분이 살고 있는 형태를 보인다. 다만, 웃마의 동쪽 끝부분에는 만회고택과 김종구 가옥, 김순덕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3. 아들 인터뷰
‘무오화전가’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이 가사를 상주문화원에 맡긴 분과 인터뷰를 하였다. ‘무오화전가’를 문화원에 맡긴 분은 이 가사를 지은 의성 김씨의 5남매 중 막내 아들 정육씨이다.
어머니 고향은 봉화 해저 의성 김씨 마을입니다. 어머니는 17~18세에 우리 우복 진주 정씨 종가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을 와서 처음에는 공검에 살았습니다. 우리 집안이 원래 공검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우복의 아버지 묘와 신도비가 공검에 있습니다. 선친(先親)의 휘(諱)는 봉자 진자인데 공무원을 하셨습니다. 공무원을 하시면서 정미소와 과수원도 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편이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29세에 혼자가 되셨습니다. 이때 큰집 우복 종가의 종부이신 큰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아 어머니가 우복 종가로 들어가셔서 거의 평생을 종부 역할을 하셨습니다. 저의 조부모님께서 큰며느리가 없으니 작은 며느리를 부르신 거지요.
어머니께서는 팔자에 없는 종부 노릇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집안인 봉화 해저의 의성 김씨 마을은 오랜 역사를 지닌 반촌입니다. 어머니의 언니 되시는 이모는 안동의 퇴계 종가에 시집을 갔습니다. 또 어머니 친정집은 천석꾼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부유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릴 때에 한문 선생이 있어 명심보감 등의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또 한글로 된 여러 이야기책 중 읽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만큼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또 시집을 와서도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가사를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작년에 쓰신 중동 우천 수암 종부 ‘부림 홍씨’는 어머니의 친구이셨습니다. 성격도 맞으셨겠지만 두 분께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시면서 연배가 비슷하고 명문대가의 종부 입장이란 것이 맞아서 친하게 지내신 것으로 압니다. 또 두 분이 가사도 잘 지으셔서 서로 바꾸어서 읽어보고 하셨겠지요. 또 친구 분들이나 선후배 분들과 교류를 하실 때 가사를 서로 읽고 듣고 하셨겠지요.
또 어머니 집안은 형제 간에 우애가 아주 깊었습니다. 어머니 친정 형제가 10남매인데 2남 8녀입니다. 8녀 중에 어머니는 셋째입니다. 시집 간 딸을 포함하여 멀리 있는 아들과 사촌들, 조카들, 마을 사람까지 이백 명이 넘는 가족과 친지들이 1년에 한 번 정도 잔치를 하였는데 대단했습니다. 잔치는 3일간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해저에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명신인 상주 우복 집안에 시집을 온, 이 가사를 지은 의성 김씨는 봉화 해저의 개암 집안 딸이었다. 의성 김씨의 언니가 안동의 퇴계 종가로 시집을 가고 필자가 연구한 바 있는 ‘자녀교훈가’를 지은 상주 중동의 수암 종부 부림 홍씨는 군위 한밤마을이 친정이다. 이렇듯 상주, 안동, 군위 등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班家들이 婚班이라 하여 서로 지리적 거리가 있음에도 사돈을 맺었다.
작가의 친정 봉화 해저의 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 김씨 집안은 수많은 名賢과 獨立運動家를 배출한 봉화의 대표적인 班村이다. 또한 그 집안 중 작가 의성 김씨의 집은 한 해 수입이 천석을 넘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의성 김씨는 집안의 崇文主義적 전통과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당시 여성으로서는 글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의성 김씨는 혼인한 지 10여 년이 흘러, 작가 나이 29세 때인 1940년대 초반에 부군을 여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남편 없이 5남매를 키우기에는 손도 부족하고 외풍을 막기에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복 종손인 시부모는 맏며느리가 세상을 일찍 떠났기에 종부 노릇을 대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의성 김씨는 봉제사 접빈객의 종부 소임은 물론 시부모 봉양, 자식 기르기에 일생을 바쳤을 것이다.
작가가 혼인을 한 1930년대 초반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시집 간 여성이 근친을 오는 일은 시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할 만큼 쉽지 않았다. 낯설고 물 선 먼 지역에 시집을 온 의성 김씨 역시 당시 다른 여성 같이 친정을 무척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이후에 의성 김씨는 세월이 흘러 여유가 생기자 친정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를 글로 남기게 된 것이 ‘무오화전가’이다.
의성 김씨의 가사는 ‘무오화전가’를 비롯하여 열편이 넘는다. 많다고 할 수 없지만 결코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인문적 풍토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많은 량의 독서를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규방가사를 쓸 수 있었다.
의성 김씨의 막내 아들 부부 필자는 의성 김씨의 가사 ‘무오화전가’를 차례대로 읽어가며 두어 시간 동안 상세하게 그 뜻에 대하여 묻거나 답하고, 토의하고, 토론하여, 정확한 의미를 구하고자 노력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또 내용과 연관된 배경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여쭈어보고 서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무오화전가’의 내용이 분명해질수록 막내 아드님이신 정육씨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글을 읽고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과 삶을 노래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가족에겐 그리움을, 필자 같은 사람에겐 역사와 문화와 문학을 알게 한다.
Ⅲ. 내용 및 표현상의 특징 고찰
1. 서두
戊午花煎歌
동자야 문 열어라 창 밖에 뉘 왔느냐
초당에 깊은 꿈을 봄소식이 깨우노나
금강춘색내천지라 무오삼월 초춘일새
처마 끝에 우는 제비 강남 갔다 돌아왔나
반갑다 저 제비야 구만장천 머나먼 길
옛 주인이 그리워서 또다시 찾아왔나
十里장제 푸른 언덕 능수버들 여기던가
황금 같은 꾀꼬리는 오며가며 꾀꼴꾀꼴 환우성이 요란하다
무오화전가
어린 아이야 문 열어라 창 밖에 누가 왔느냐. 초가집 깊은 꿈을 봄소식이 깨우는구나. 금강의 봄빛은 온천지에 가득한데, 무오년 삼월 이른 봄일세. 처마 끝에 우는 제비 강남 갔다 돌아왔나. 반갑다 저 제비야. 아득히 높고 먼 하늘 머나먼 길을 옛 주인이 그리워서 또다시 찾아왔나. 긴 둑 십 리에 있는 능수버들이 여기던가. 황금색의 꾀꼬리는 오며 가며 꾀꼴꾀꼴 벗을 부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화자가 있는 초가의 깊은 겨울 꿈을 봄소식이 깨우고 있다. 화자는 기꺼이 봄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 봄소식을 두보와 허난설헌의 시와 ‘춘향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드러내고 있다. 봄은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푸른 잎과 나무를 비추는 물빛이며, 먼 길을 날아 다시 화자의 집을 찾은 반가운 제비의 모습이며, 긴 강둑에 늘어진 실버들가지이며, 황금 같이 고귀한 빛깔을 지닌 꾀꼬리가 그리운 사람을 부르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의성 김씨가 우리와 중국의 한시, 춘향전에 나오는 구절을 문맥에 맞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양의 독서와 생각의 깊이, 글을 써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봄소식을 ‘뉘’란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사람에 비유하는 의인법을 구사하고 있다. 봄소식을 알리는 물빛이나 꾀꼬리 등을 친근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또 봄소식을 의미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열거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 열거된 봄소식은 시각적이며 청각적이서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또 강물과 하늘의 제비, 능수버들과 꾀꼬리는 수직적 대비가 있으며 ‘푸른 언덕’과 ‘황금 같은 꾀고리’ 색채 대비가 뚜렷하여 입체적이고 선명한 느낌으로 봄을 맞이하는 반가움을 드러내고 있다.
무오년 봄을 맞이하여 친정에서 대대적 모임을 하고자 하는 화자의 설레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동원도리편시춘에 청령포낙화암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무슨 한이 그리 깊어 귀촉도 울부짖고
춘삼월자규루에 부디부디 올나 마오
여보소 벗님네야 봄 좋다 말을 마오
어떤 사람 풍정 있고 어떤 사람 한 많으나
화조월석 좋을시고 술 마시고 노래 하니 재자가인 풍류로다
춘풍도리화개야와 추우오동엽낙시에
독숙공방 누워 우는 수루 정부 한이로다
계명산 추야월에 장자방의 퉁소소리
팔천 정병 흩어지니 회향심이 절로난다
봄 동산의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잠시 피었다가 지는 것과 청령포 단종의 한과 낙화암 망국의 한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무슨 한이 그리 깊어 촉나라 망제의 죽은 넋이 되어 울부짖고 자규새 울부짖는 춘삼월 자규루에 부디부디 오르지 마오. 여보시오 벗님네야, 봄 좋다 말을 마시오. 어떤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한이 많으나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이 좋을시고. 술 마시고 노래 하니 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풍류로다. 봄바람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피는 날과 가을비에 오동잎이 지는 날에 남편 없이 홀로 지내는 슬기롭고 절개 굳은 아내가 눈물 흘리는 한이로다. 계명산 달이 뜬 가을밤에 장량의 퉁소 소리에 팔천 명의 가려 뽑은 우수하고 강한 병사가 흩어지니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마음이 저절로 나온다.
인생은 유한하고 아름다움도 잠시 한 때이다. 그 슬픔은 어린 나이에 숙부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과 망국의 비애 속에 백마강에 몸을 던진 백제의 꽃다운 궁녀들의 한, 황제의 자리를 빼앗긴 촉나라 망제의 억울한 혼과 같은 것이라 하고 있다. 또 이런 한을 두견새의 울음소리란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두견새는 봄에 우는 새이다. 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꽃이 피는 아침과 달이 밝은 저녁이 있는 아름다운 봄과 가을에 술 마시고 노래하는 풍류가 있어야 하건만 그 아름다운 계절에 혼자 눈물 흘리는 한을 지닌 남편 없이 홀로 된 정숙한 여자가 화자이다. 계명산 가을밤에 궁지에 몰린 초패왕 항우의 팔천 병사를 힘들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 한고조 유방의 꾀주머니인 장량이 자신의 부하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자 초나라 군사가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서 흩어졌다고 노래한다. 화자의 뿌리 깊은 한은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화자인 의성 김씨는 부군이 세상을 일찍 떠난, 1940년대 초인 의성 김씨 나이 29세에 혼자가 되어 나 어린 5남매를 홀로 키웠다. 시부모와 시아주버니 등 시댁 식구가 있었지만 친정 식구 같이 살갑지는 않았으리라.
2. 본문
우리내들 출가여로 서울 온 지 몇 해던고 오년 십년 되었구나
고향 회포 없을소냐 그나마 태생 고향 우리 해저 가고파라
너도 간다 나도 간다 노소동락 더욱 좋다
선봉장이 등단하며 일 호령에 깃발 치니
오십 병졸 모여들어 일대대가 동원한다
기치 창금 없다 해도 위의가 제법일세
대구에 연락하니 일 소대가 출동한다
안동 봉화 영주에도 응원오라 명령하니
동맹국인 검제 내 앞 각기 후원 오셨구나 우호 년방 감사하오
우리들 시집을 간 여자로서 서울 온지 몇 해던고. 오년 십년 되었구나. 고향에 대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이 없을쏘냐. 그나마 태어난 고향 우리 해저 가고파라. 너도 간다 나도 간다. 늙은이와 젊은이가 함께 즐거운 것이 더욱 좋다. 선봉장이 단상에 올라 한번 호령에 깃발을 치니 오십 명의 병사들이 모여들어 한 대대가 동원된다. 깃발과 창과 검이 없다 해도 위엄이 제법일세. 대구에 연락하니 일 소대가 출동한다. 안동, 봉화, 영주에도 응원오라 명령하니 동맹국인 안동 검제 냇가 앞 각각 후원 오셨구나. 계속해서 자꾸 사이가 좋은 것이 감사하오.
의성 김씨가 진주 정씨 집안에 시집을 온 해는 1930년 전후이고 이 가사가 지어진 시기는 1978년이다. 시집온 지가 48년 정도가 흘렀으며 나이는 66세였다. 5남매는 모두 출가를 하고 우복 종가의 일은 장조카에게 넘어간 비교적 홀가분한 시기였다. 이 시기 의성 김씨는 딸집에 비롯한 친정 식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에 주로 있었다고 한다. 거의 해마다 연초회라고 하는 고향을 떠난 친정 계모임이 의성 김씨의 고향인 봉화 해저에서 있었다고 한다.
1978년 무오년 봄에도 봉화 해저 출신 의성 김씨 집안 모임인 연초회장의 발의에 따라 서울에서 50여명이 모였고 대구도 수 십 여명 모였다. 안동, 봉화, 영주, 그리고 안동 서후의 검제에서도 모였다. 해마다 우의를 쌓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새벽이슬 찬바람에 청량리를 출발하여 망우 덕소 얼른 지나
팔당댐을 내다보니 현대 기술 장할시고
양평 지나 원주로다 시가지도 화려컨만
치악산이 만천하다 따비굴이 여기로다
제천역에 당도하니 의림지가 장관일세
함백선 가나라면 장릉 구경 좋을시고
충북선 가다보면 수안보 온천일세
도담역 당도하니 석회공장 우렁차고 도담삼봉 기이하다
단양역 다다르니 고수동굴 여기로다
열차관광 없을소냐 길고 긴 죽령터널
영남 영동 한계로서 중앙선에 제일 길다
희방폭포 여기로다 관광지로 이름났네
풍기 인삼 소백 산채 우리나라 명물이오
부석사며 소수서원 이곳에서 삼십 리지
이다음이 영주로다 우리 고향 멀지 않네
봉화역에 하차하니 때는 오후 세 시로다
반갑고 감사할 손 환영 나온 여러분들 그동안 안녕했소
새벽이슬 찬바람 속에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망우역과 덕소역을 빨리 지나 팔당댐을 내다보니 현대 기술이 장하구나. 양평 지나 원주로다. 원주 시가지도 화려하건만 치악산이 온 하늘에 가득하다. 똬리굴이 여기로다. 제천역에 당도하니 의림지가 장관일세. 함백선 가노라면 장릉 구경이 좋을시고. 충북선 가노라면 수안보 온천일세. 도담역 당도하니 석회공장 우렁차고 도담삼봉이 기이하다. 단양역에 다다르니 고수동굴이 여기로다. 열차 관광 없을쏘냐. 길고 긴 죽령터널 영남과 영동의 분기점으로서 중앙선 터널 중 가장 길다. 희방폭포가 여기로다 관광지로 이름이 났네. 풍기의 인삼과 소백산 산나물이 우리나의 명물이오, 부석사며 소수서원은 이곳 풍기역에서 삼십 리지. 이다음이 영주로다 우리 고향 멀지 않네. 봉화역에서 하차하니 때는 오후 세 시로다. 반갑고 감사하게도 환영 나온 여러분들 그동안 안녕했소.
봄이지만 새벽 기운은 차다. 서울에 있는 의성 김씨를 비롯한 봉화 해저 출신 형제들 50여명이 청량리역 모여 고향길에 오르고 있다. 그들은 중앙선의 망우역과 덕소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 도담역, 풍기역, 영주역 그리고 영주역에서 영동선으로 갈아타고 종착지인 봉화역에 이르고 있다. 봉화 가는 길 철로 주변 지역에 대한 유명한 곳이나 특산물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평의 팔당댐, 원주의 치악산과 똬리굴, 제천의 의림지, 함백선을 타면 갈 수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 충북선을 타면 갈 수 있는 수안보 온천, 도담역의 우렁찬 소리가 아는 석회공장과 도담삼봉, 단양역의 고수동굴, 단양과 영주 사이의 죽령터널, 계속해서 희방폭포와 풍기의 인삼, 소백산 산나물, 부석사, 소수서원 등이 그것이다.
타지로 간 이후에 많이 들렀을 고향이건만 어릴 적 추억이 있기에 그곳에 가는 기찻길은 언제나 의성 김씨에게 그리움의 길일 것이다.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은 즐겁고 때론 그 설렘의 여정이 하나하나 지워지는 것이 아쉽기도 할 것이다. 새벽에 출발한 의성 김씨 일행은 긴 시간의 기차 여행 끝에 오후 세 시에 고향역인 봉화역에 도착한다. 환영 나온 고향의 친지들과 반갑게 재회하고 있다. 혈육의 정이다.
참봉댁 넓은 청에 연대본부 설치하니
대소장정 이백여 명 계급 따라 행동한다
연대장님 하신 말씀 문중 어른 찾아뵙고 동내 구경하사이다
듣자하니 우리 마을 새마을이 야단일세
문화주택 이십여 동 회관마저 짓는구나
제방마다 석축이요 팔간도로 신설하여
가로수로 단장하니 외관에는 그러할사 마을 모양 환판일세
삼백 여년 우리 고장 전통문화 어디 갔나 헌 마을이 아쉽구나
넓은 대청이 있는 참봉댁에 봉화 해저 의성 김씨 집안 모임인 연초회의 본부를 설치하고 크고 작은 장정 이백여 명이 항렬과 나이에 따라 행동한다. 연초회장님 하신 말씀, 문중 어른 찾아뵙고 동내 구경을 합시다. 듣자하니 우리 마을 새마을이 야단일세. 서양식 주택 이십여 동에 마을 회관마저 새로 짓는구나. 제방마다 석축을 쌓았고 팔간도로(약 14.5m)를 새로 만들고 가로수로 단장하니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구나. 마을 모양이 완전히 바뀌었구나. 삼백 여년 우리 고장 전통문화 어디 갔나. 옛 마을의 모습이 아쉽구나.
긴 여정에 이어 고향 마을에 도착한 의성 김씨를 비롯한 연초회 회원들과 고향의 친지들 이백 여명이 넓은 대청이 있는 참봉댁에 본부를 설치하고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니다. 고향을 떠난 해저리 출신 의성 김씨 계모임인 연초회 회장님의 말씀대로 문장 어른을 필두로 마을의 문중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고 있다.
이후에 고향 마을을 둘러보는 연초회 회원들은 새마을이 된 해저리를 보고 듣는다. 이십여 동이나 되는 서양식 주택과 회관, 새롭게 정비한 하천 둑과 넓은 신작로와 가로수들을 보고 현대식의 정연하고 편리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의성 김씨를 비롯한 연초회 회원들은 삼백 년이나 된 추억이 있는 옛 고향이 고향마을의 모습이 한순간에 변하니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좌우산천 돌아보니 옛 모습이 의히하다
송교 밖 학정봉과 울강 건너 년수봉이
동래 수구 짜였으니 용호동천 여기로다
호골산 건너편에 자래 바우 솟아있내
이 바위 전설 보면 옛날에 진시황이
만리장성 쌓을 적에 마고할미 이고가다
성 다 쌓다 소문 듣고 이곳에 버렸다오
좌우산천 돌아보니 옛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솔거리 밖 학정봉과 을강 건너 연수봉이 동네에 물이 흘러오고 나가는 것이 짜였으니 용호동천이 여기로다. 호골산 건너편이 자라 모양의 바위 솟아 있네. 이 바위 전설을 보면 옛날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적에 마고할미가 이 바위를 이고 가다가 만리장성을 다 쌓았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버렸다오.
사람 사는 마을은 변했지만 마을 주위의 자연은 그대로였다. 솔거리 밖의 학정봉과 을자강 건너 연수봉에서 물이 흘러 용과 호랑이가 사는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 우리 고향이라 자랑하고 있다. 멀리 호골산 건너편의 자라 바위는 마고할미의 전설이 깃들어 있을 만큼 神異하다 하고 있다.
우리 마을 해저촌명 해저유래 들어보소
십리 허에 창해 있고 오리 허에 황해 있어
그 밑에 자리 잡은 바다 밑이 해저로서
바다 및이 와전하여 바라미라 하지 않소
우리 마을 해저 이름 해저 유래 들어보소. 십 리 쯤에 넓고 큰 바다가 있고 오 리 쯤에 황해가 있어 그 바다 밑에 자리 잡은 海底로서 바다 밑이 와전하여 바라미라 하지 않소.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바다 보다 낮은 지역에 위치한다 하여 ‘바다 밑’, ‘바라미’, ‘海底’라 불린다는 설명이다.
누대정각 어디런고 우리 마을에 명월루와
아랫마을 영규헌과 학록서당 단사정이 우리 마을 자랑이오
삼백년 전 이 마을에 여씨 구씨 살았다오
우리 김씨 여기 온 것 그 내력을 볼작시면
성주 땅 사도실에 칠봉 선조 살으시고
상주 땅 매골에는 개암 선조 사셨다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천유당 선조께서 은혜로 피난했지
그 후에 학정공이 호평으로 이거하사
해저에 입촌한 건 팔오헌이 처음이오
지금 종택 그 자리가 일야각 구기라오
큰 종가 개암정은 백여 년 전 선부로가 상주에서 모셔 왔고
학정정사 중 종가를 노곡에서 데려왔오
그나마 세세한건 다 열거 못하겠오
누각과 정자는 어디인가. 우리 마을의 명월루와 아랫마을 영규헌과 학록서당 단사정이 우리 마을 자랑이오. 삼백년 전 이 마을에 여씨와 구씨가 살았다오. 우리 김씨 여기에 온 것, 그 내력을 보자면 성주 땅 사도실에 칠봉 先祖가 사셨고 상주 땅 매골에는 개암 先祖가 사셨다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천유당 先祖께서 은혜로 피난했지. 그 후에 학정공이 호평으로 이사하여 사시고 해저 마을에 들어온 것은 팔오헌 先祖가 처음이오. 지금 종택 그 자리리가 일야각 옛 터라오. 큰 종가 개암정은 백여 년 전 선부로가 상주에서 모셔 왔고 학정정사 중 종가는 노곡에서 데려왔오. 그나마 세세한 건 다 열거 못하겠소.
마을의 자랑인 봉화 해저 마을의 누각과 정자를 열거하고 있다. 그곳은 명월루와 영규헌, 학록서당, 단사정이다. 의성 김씨의 고향 마을에 대한 학문적 자부심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는 마을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칠봉, 개암, 천유당, 학정 선조의 후손인 팔오헌 선생이 入鄕祖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개암정과 학정정사 같은 큰 종가와 중 종가의 대표적인 건물을 원래 있던 곳에서 모셔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은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어와 좋다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악양루도 식후경은 옛말에 있지 않소
조석 식사 판공비는 해저부대 부탁이오
집집마다 전곡 모아 진합태산 되었구나 황공하오 감사하오
백미 두 섬 더욱 빛나 어분에 과망하오
그 밖의 부대원들 다 각기 찬조하니
천원 만원 모은 돈이 풍족한 액수로다
무엇 하나 그립겠오
어와 좋다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악양루도 식후경이란 옛말이 있지 않소. 아침 저녁 식사비는 해저에 계신 분들게 부탁하오. 집집마다 돈과 곡식을 모아 작은 물건이 많이 모여 큰 것이 되었구나. 황공하오. 감사하오. 백미 두 섬 더욱 빛나. 분수에 넘치게 바란 것이오. 그 밖의 연초회 회원들이 다 각기 찬조하니 천원 만원 모은 돈이 풍족한 액수로다. 무엇 하나 그립겠오.
문중 어른께 인사하고 마을을 둘러 본 연초회 회원들과 해저 마을 가족과 친지들이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아침 저녁 식사 준비는 해저 마을 가족과 친지들이 하고 연초회 계원들은 찬조금을 내서 그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다. 놀음에서 먹는 것이 절반이란 말이 있다. 가족끼리 맛있게 먹는 것은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일 것이다. 보고 싶은 가족이 있고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으니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
개닭이며 육개장에 해륙진미 진진하다
백설 같은 하얀 이밥 배 터질 줄 모르고나
감로주와 신선주는 일일수경삼백배지
두견화전을 꾸어 적구충장 포식하니 복중 춘색 전해준다
화전 놀음이 아니냐
여씨댁 처고모 부조 감사하기 그지없고
청량음료 보내주신 여러분께 사례하오
개와 닭, 육개장에 온갖 음식이 맛이 좋다. 흰 눈 같이 하얀 쌀밥 배 터질 줄 모르는구나. 감로주와 신선주는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씩 기울여야지. 진달래전을 꾸어 배를 채워 실컷 먹으니 뱃속에 봄빛을 전해준다. 화전놀음이 아니냐. 여씨댁 처고모 부조 감사하기 그지없고 청량음료 보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오.
본격적인 잔치가 시작되고 있다. 개와 닭을 잡고 소고기로 육개장을 끓인다. 그밖에 온갖 산과 바다에서 난,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다. 이에 맞춰 하얀 쌀밥을 모두들 한껏 먹고 있다. 또 온갖 좋은 술도 많이 마셔 흥취를 더하고 있다. 한쪽에선 진달래전을 꾸어 봄을 맞이한 기쁨을 전하고 있다. 이 노래의 제목인 ‘무오화전가’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他姓인 여씨 댁의 친지 분들께 특별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사람의 삶을 존재하게 하고 정을 나누고 나아가 문화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먹고 마시는 일은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귀한 이 놀음에 마음끗 놀아보세
서울에서 배운 기술 뻔때 한번 보여줄까
춤 잘 추는 호랑이팀과 노래 잘하는 토끼부대
노소가 어디 있나 붕어놀음 이개로다
좋고 좋아 벗님네야 어허 둥실 좋을시고
아줌마야 아우님아 권서방댁 이서방댁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뛰고 먹고 먹고 뛰고
서로 안고 잘도 논다
제멋대로 부른 노래 뻐국새 노래런가 엉머구리 소리런가
박자조차 맞지 않네
춤추는 거동보소
팔다리는 떨어지자 엉덩이는 삐딱삐딱 노루뜀을 하는구나
마루장판 깨지겠다 여의도 방송국에 월급 주고 배웠다오
이러저러 노는 흥취
해가 지고 달이 뜨며 달이 지고 해가 뜬다
오늘 가고 내일 오고 내일 가고 모래로서
연삼일이 되었구나
희귀한 이 놀음에 마음껏 놀아보세. 서울에서 배운 기술 본새 한번 보여줄까. 춤 잘 추는 호랑이팀과 노래 잘하는 토끼부대, 늙음과 젊음이 어디 있나. 친구들 간의 놀음 이것이로다. 좋고 좋아 벗님네야. 어허 둥실 좋을시고. 아줌마야 아우님아 권서방댁, 이서방댁,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뛰고 먹고 먹고 뛰고 서로 안고 잘도 논다. 제멋대로 부른 노래 뻐꾸기 노래인가, 엉마구리 소리인가. 박자조차 맞지 않네. 춤추는 거동 보소. 팔다리는 떨어지자, 엉덩이는 삐딱삐딱, 노루처럼 겅중겅중 뛰는구나. 마루장판 깨지겠다. 여의도 방송국에서 월급 주고 배웠다오. 이러저러 노는 흥취 해가 지고 달이 뜨며 달이 지고 해가 뜬다. 오늘 가고 내일 오고 내일 가고 모래로서 연삼일이 되었구나.
잔치에서 실컷 먹어 배가 부르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당연하다.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재치 있고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의성 김씨가 서울에서 배운(?) 춤추고 노래하는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고 익살을 부리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행사 무대인 넓은 대청의 참봉댁이 떠들썩하고 마루는 깨질 듯 삐걱거리고 있다. 이렇듯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놀음을 3일간 원 없이 하고 있다.
‘너도 한 잔 ~ 먹고 뛰고’에서는 같이 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을 대구적으로 표현하여 한결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또 ‘해가 지고 ~ 해가 뜬다’에서는 ‘해→달→달→해’의 낮과 밤을 대표하는 해와 달을 연쇄적이고 순환적으로 표현하여 시간의 흐름을 리듬 있게 노래하고 있다. 그 뒤 구절인 ‘오늘 가고 ~ 모래로서’에서는 ‘오늘→내일→내일→모래’의 연쇄적인 표현으로 3일간의 연회를 리듬 있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초회 계원아 남은 돈 얼마인고
십 만원 약소하나 문중에 드리고서
나머지 삼 만원은 친목회에 기증하세
성대한 이번 놀음 이만하면 족할소냐
제각기 살림살이 상치된 일 많겠지요
아해들 기다린다 영감님 꾸중할가 내일에는 가사이다
연초회 계원아. 남은 돈이 얼마인가. 십 만원이 적고 변변하지 못하나 문중에 드리고서 나머지 삼 만원은 친목회에 기증하세. 행사의 규모가 풍성하고 큰 이번 놀음 이만하면 족할쏘냐. 제각기 살림살이 서로 어긋난 일 많겠지요. 아이들 기다린다. 영감님 꾸중할사. 내일에는 갑시다.
행사의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 이번 행사를 주도한 연초회 계원들은 남은 돈 십삼만 원을 해저 의성 김씨 문중에 십만 원, 해저 마을 친목회에 삼 만원을 각각 부조하고 있다. 이 가사의 작가인 의성 김씨를 비롯한 봉화 해저 출신 딸들은 연삼일을 즐겼으니 이제 아이들과 부군들이 있는 시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친정집의 모임으로 잠시 잊었던, 자신이 현재 머물고 있는 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3. 결미
올 때에는 즐겁지만 갈 때 설움 어이할고
만단정회 다 못하고 각분동서 하단 말가
학정교상 큰 길 가에 로로정정 얘기로다
가는 소매 다시 잡고 뒷기약을 묻는구나
천중가절 단옷날에 옛날 놀던 솔거리에 그네 한 번 뛰어볼까
중추가절 추석날에 햇밤과 햇실과나
구월구일용산음에 주유화 손에 잡고 국화주 마셔보세
작별 인사 다 못하여 자동차가 앞에 닿네
급급히 뛰어올라 잘 가라 잘 있거라 손 흔들며 떠나노라
차홉다 붕우님네 인지 가면 언제 오나
올 때에는 즐겁지만 갈 때 서러움 어이할고. 온갖 정과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각자 헤어진다는 말인가. 학정교 위 큰 길 가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얘기로구나. 가는 사람의 소매를 다시 잡고 뒷기약을 묻는구나. 좋은 명절 단옷날에 옛날 놀던 솔거리에서 그네 한 번 뛰어볼까. 음력 팔월 보름의 좋은 날인 추석날에 햇밤과 햇과일이나 구월 구일 중양절에 용산에서 술을 마시며 붉은 꽃을 잡고 국화주를 마셔보세. 작별 인사를 다 못하여 자동차(버스)가 앞에 닿네. 매우 급하게 뛰어올라 잘 가라 잘 있거라, 손 흔들며 떠나노라 매우 슬프구나, 친구님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봉화 해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 할머니가 된 출가 여성들이 주축을 이룬 연초회 모임이 끝나고 이별을 하고 있다. 오랜 만에 언니도 보고, 남동생도 봤을 것이다. 또 조카도 보고 새언니도 만났을 것이다. 이때 60대 후반에 이른 의성 김씨의 나이로 보아 형제들도 점점 늙어갈 것이다. 올 때가 직전 같은데 벌써 이별이라니 서러울 것이다. 온갖 정과 회포를 풀기에는 삼일이 무척 짧았을 것이다. 마을 앞을 모두 걸어간다. 학정교 다리 위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해저를 떠나는 사람과 해저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삶은 사물을 접하고 느끼고 아는 것을 혼자 생각하고 다른 이와 나누는 과정이다. 이 중에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다. 인간에게 고향은 근원의 문제이다. 이를 알아야 정신적, 육체적인 자신의 기원을 알 수 있다. 기원을 알아야 자신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고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유지와 발전, 그리고 자손을 통한 영속성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된다고 할 수 있다.
헤어지는 사람들이 훗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어릴 적 했던 마을 팔 솔거리에서 단옷날 그네 타기, 추석 날 햇밤과 햇과일로 제사 지내기, 중양절에 산에 올라 국화주 마시기 등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이르고 순식간이다. 매우 슬프구나. 친구들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
송군남포누여사에 함정각수 어여쁘다
낙화적적 산새 울고 양유 청청 배 떠난다
초수오산도로난에 천리 행정 조심하소
양관에 이별주도 백배라도 맛이 없소
한산사 쇠북소리 손의 배에 외들어라
심양강 비파소리 외기러기 울고 간다
위북에 춘천수와 강동에 일모운은
두자미와 이태백이 상사불견 그리워라
사가보월청소입과 억제간운백일면은
고향생각 애절하다 금인고인 일반이지
고원이 장제숙에 혼이 간들 어떠하니
오주에 달 뜨거든 그 달보고 상사하세
녹수청산 고이 지나 병주고향 다다랐네
가소롭다 우리 인생 백년 광음 얼마런고
조여청사무여설에 인간공도 어이하리
부평 같은 우리 종적 합이부분 한탄마오
춘거추래 어느 날엔 분이부합 없을소냐
이 마음 굳게 지켜 그날 오길 기다리리
동자야 먹 갈아라 다음 날을 기약하고
오늘 놀음 기념하세 가사 일곡 부르노라.
끝.
남포에서 그대를 보내니 눈물이 실처럼 흐르는데 함정각수 불쌍하구나. 꽃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산에는 불여귀가 울고 버드나무 가지는 푸른데 손님은 강물을 건너고 있다. 초나라 물길, 오나라 산길 가기가 어려운데 천리 멀리 가는 길 조심하소. 서쪽 양관을 나서는 이별주도 백 잔이라도 맛이 없소. 한산사의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들려오네. 심양강의 비파소리 외기러기 울고 간다. 위수 북쪽에는 봄 하늘 나무요, 강동에는 황혼의 구름이 나니 두보와 이태백이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여 그리워한다. 가족 생각에 달빛 안래 거닐며 온밤을 서서 보내고 아우 그리움에 구름 쳐다보다 대낮에 졸음을 이루는 것은 애절한 고향 생각이다. 지금 사람이나 옛 사람 모두 같지. 고원이 장제숙에 혼이 간들 어떠하리. 오주에서 만약 달이 뜨거든 그 달보고 서로 그리워하세. 초록빛 물과 푸른 산 고이 지나 정든 타향 다다랐네.
가소롭다, 우리 인생 백년 세월이 얼마던고. 아침에 검푸른 머리 저녁에 눈같이 희어지는 인간사 도리를 어이하리. 부평 같은 우리 자취 헤어짐을 한탄 마오. 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어느 날에 만남이 없을쏘냐. 이 마음 굳게 지켜 그날 오길 기다리리. 동자야 먹 갈아라. 다음 날을 기약하고 오늘 놀음 기념하세. 가사 일곡 부르노라. 끝.
이별의 장면이다. 이별에 관한 여러 한시의 퍼레이드를 보는 듯하다. 왕유, 가지, 장계, 백거이, 두보, 이백의 이별시가 의성 김씨의 이별의 아쉬움을 대신하고 있다. 조심히 가시오. 다시 또 만나지요. 그런 말과 함께 친족들과 이별을 하고 병주고향인, 자신의 시댁 상주 외서 우복종가에 다다르고 있다.
그리고 이 가사를 지으며 소회를 마지막으로 밝히고 있다. 인생 백년 세월이 가소롭다. 검푸른 머리가 눈같이 희어지는 것은 한바탕의 꿈같을 것이다. 늙는 것은 도리가 없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오늘 놀음을 기약하기 위해 가사 한곡을 부른다.
Ⅳ. 결론
본 논문은 1978년에 영남 상주 지역의 ‘우산리’에서 지어지고 향유된 규방가사 ‘戊午花煎歌’을 바탕으로 하였다. 가사의 배경이 된 작가 의성 김씨의 고향인 봉화 해저 마을의 특징과 가사를 지은 의성 김씨의 막내 아드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가사의 내용과 享有 방식 및 저자에 대해 알아보았다.
기존 규방가사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부터 개화기 시기까지 지어진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규방가사 작품을 대상으로 그 문학적 성과를 검토하는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규방가사의 맥이 최근의 작품에서는 내용과 표현 등의 부분에서 무엇이 과거의 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변모해 가는지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또 기존의 연구가 匿名의 가사작품이나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갖춘 여성들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본고는 實名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였다. 평범한 일반인들의 생활과 의식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앞선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면 “Ⅱ. ‘戊午花煎歌’ 가사 개관”에서는 먼저 작품의 주제적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 가사의 작가 의성 김씨는 10대 후반에 고향인 봉화 해저를 떠난 작가가 상주의 우복 종가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시집 온 지 10여년 후인 작가 나이 29세 때에 부군이 돌아가시자 의성 김씨는 종부가 돌아가신 우복 종가의 종부 노릇을 하게 되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젊을 때에는 일이 많아 갈 수 없었던 의성 김씨는 노년기에 이르러 고향에 가게 되었다. 고향에서의 친정계 모임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쓰인 1978년 무오년은 작가 나이 66세이 지은 작품이다. 의성 김씨는 2남 8녀 10남매 형제가 있었다. 의성 김씨는 8녀 중 셋째이다. 여자 형제들이 주도하는 다복한 친정 집안 모임이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다.
봉화 해저는 의성 김씨의 선조인 팔오헌 김성구 선생과 개암 김우굉 선생의 후손들이 자리 잡으면서 의성 김씨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마을이 하천 보다 낮아 바다 밑이란 뜻의 해저리가 되었다. 현재도 이 마을은 의성 김씨와 타 성씨를 합해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저자인 의성 김씨의 막내 아들인 정육씨와 인터뷰를 하였다. 원래 살았던 곳은 공검이며 봉화 해저 천석꾼 집에서 시집 온 어머니 의성 김씨가 홀로 5남매를 키우고 종부 노릇하느라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봉화 해저의 어머니 의성 김씨의 친정 잔치는 1년에 한 번 정도 열렸고 3일 간이나 이어질 정도로 큰 규모였다고 하였다.
‘Ⅲ. 내용 및 표현상의 특징’에서는 ‘서두’, ‘본문’, ‘결미’의 세 부분으로 살펴보았다.
서두에서는 봄을 맞아 친정집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홀로 어머니와 종부의 소임을 다하던 의성 김씨외 외로움이 드러난다.
본문은 친정 마을에 가는 여정으로 시작한다. 서울과 대구, 안동, 봉화, 영주 일대의 친척들이 서로 연락하여 봉화 해저로 모이고 있다. 딸이 있던 서울을 출발한 의성 김씨도 친척 50여명과 봉화까지 이어진 중앙선과 영동선을 따라 봉화역에 도착하고 있다. 봉화 해저에 도착한 일행은 인사를 하고 새마을운동으로 많이 변한 고향 마을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산천은 의구하여 그곳의 이야기도 여전하다. 마을 이름의 유래와 이 마을에 들어온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봉화 해저 마을에 대한 유래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본격적인 놀음 준비와 음식을 먹고 노는 것이 이어진다. 삼일 간 이어진 놀음 후에 남은 경비를 문중에 드리는 것으로 이 놀음을 마무리 짓고 있다. 결미에서는 온갖 한시를 동원하여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짧은 인생의 만남과 이별이 이어져 시름이 깊지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이 놀음을 기념하기 위해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하며 끝을 맺고 있다.
지금까지 가사 ‘戊午花煎歌’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가사는 20세기 중반 우산리에서 살아간 규방의 여성인 의성 김씨의 삶의 기록이다. 하나의 사회 문화적 유산이면서 규방가사의 맥을 잇는 데서 이 가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부 록 ]
「戊午花煎歌」
동자야 문 열어라 창 밖에 뉘 왔느냐
초당에 깊은 꿈을 봄소식이 깨우노나
금강춘색내천지라 무오삼월 초춘일새
처마 끝에 우는 제비 강남 갔다 돌아왔나
반갑다 저 제비야 구만장천 머나먼 길
옛 주인이 그리워서 또다시 찾아왔나
十里장제 푸른 언덕 능수버들 여기던가
황금 같은 꾀꼬리는 오며가며 꾀꼴꾀꼴 환우성이 요란하다
동원도리편시춘에 청령포낙화암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무슨 한이 그리 깊어 귀촉도 울부짖고
춘삼월자규루에 부디부디 올나 마오
여보소 벗님네야 봄 좋다 말을 마오
어떤 사람 풍정 있고 어떤 사람 한 많으나
화조월석 좋을시고 술 마시고 노래 하니 재자가인 풍류로다
춘풍도리화개야와 추우오동엽낙시에
독숙공방 누워 우는 수루 정부 한이로다
계명산 추야월에 장자방의 퉁소소리
팔천 정병 흩어지니 회향심이 절로난다
우리내들 출가여로 서울 온 지 몇 해던고 오년 십년 되었구나
고향 회포 없을소냐 그나마 태생 고향 우리 해저 가고파라
너도 간다 나도 간다 노소동락 더욱 좋다
선봉장이 등단하며 일 호령에 깃발 치니
오십 병졸 모여들어 일대대가 동원한다
기치 창금 없다 해도 위의가 제법일세
대구에 연락하니 일 소대가 출동한다
안동 봉화 영주에도 응원오라 명령하니
동맹국인 검제 내 앞 각기 후원 오셨구나 우호 년방 감사하오
새벽이슬 찬바람에 청량리를 출발하여 망우 덕소 얼른 지나
팔당댐을 내다보니 현대 기술 장할시고
양평 지나 원주로다 시가지도 화려컨만
치악산이 만천하다 따비굴이 여기로다
제천역에 당도하니 의림지가 장관일세
함백선 가나라면 장릉 구경 좋을시고
충북선 가다보면 수안보 온천일세
도담역 당도하니 석회공장 우렁차고 도담삼봉 기이하다
단양역 다다르니 고수동굴 여기로다
열차관광 없을소냐 길고 긴 죽령터널
영남 영동 한계로서 중앙선에 제일 길다
희방폭포 여기로다 관광지로 이름났네
풍기 인삼 소백 산채 우리나라 명물이오
부석사며 소수서원 이곳에서 삼십 리지
이다음이 영주로다 우리 고향 멀지 않네
봉화역에 하차하니 때는 오후 세 시로다
반갑고 감사할 손 환영 나온 여러분들 그동안 안녕했소
참봉댁 넓은 청에 연대본부 설치하니
대소장정 이백여 명 계급 따라 행동한다
연대장님 하신 말씀 문중 어른 찾아뵙고 동내 구경하사이다
듣자하니 우리 마을 새마을이 야단일세
문화주택 이십여 동 회관마저 짓는구나
제방마다 석축이요 팔간도로 신설하여
가로수로 단장하니 외관에는 그러할사 마을 모양 환판일세
삼백 여년 우리 고장 전통문화 어디 갔나 헌 마을이 아쉽구나
좌우산천 돌아보니 옛 모습이 의히하다
송교 밖 학정봉과 울강 건너 년수봉이
동래수구 짜였으니 용호동천 여기로다
호골산 건너편에 자래 바우 솟아있내
이 바위 전설 보면 옛날에 진시황이
만리장성 쌓을 적에 마고할미 이고가다
성 다 쌓다 소문 듣고 이곳에 버렸다오
우리 마을 해저촌명 해저유래 들어보소
십리 허에 창해 있고 오리 허에 황해 있어
그 밑에 자리 잡은 바다 밑이 해저로서
바다 및이 와전하여 바라미라 하지 않소
누대정각 어디런고 우리 마을에 명월루와
아랫마을 영규헌과 학록서당 단사정이 우리 마을 자랑이오
삼백년 전 이 마을에 여씨 구씨 살았다오
우리 김씨 여기 온 것 그 내력을 볼작시면
성주 땅 사도실에 칠봉 선조 살으시고
상주 땅 매골에는 개암 선조 사셨다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천유당 선조께서 은혜로 피난했지
그 후에 학정공이 호평으로 이거하사
해저에 입촌한 건 팔오헌이 처음이오
지금 종택 그 자리가 일야각 구기라오
큰 종가 개암정은 백여 년 전 선부로가 상주에서 모셔 왔고
학정정사 중 종가를 노곡에서 데려왔오
그나마 세세한건 다 열거 못하겠오
어와 좋다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악양루도 식후경은 옛말에 있지 않소
조석 식사 판공비는 해저부대 부탁이오
집집마다 전곡 모아 진합태산 되었구나 황공하오 감사하오
백미 두 섬 더욱 빛나 어분에 과망하오
그 밖의 부대원들 다 각기 찬조하니
천원 만원 모은 돈이 풍족한 액수로다
무엇 하나 그립겠오
개닭이며 육개장에 해륙진미 진진하다
백설 같은 하얀 이밥 배 터질 줄 모르고나
감로주와 신선주는 일일수경삼백배지
두견화전을 꾸어 적구충장 포식하니 복중 춘색 전해준다
화전 놀음이 아니냐
여씨댁 처고모 부조 감사하기 그지없고
청량음료 보내주신 여러분께 사례하오
희귀한 이 놀음에 마음끗 놀아보세
서울에서 배운 기술 뻔때 한번 보여줄까
춤 잘 추는 호랑이팀과 노래 잘하는 토끼부대
노소가 어디 있나 붕어놀음 이개로다
좋고 좋아 벗님네야 어허 둥실 좋을시고
아줌마야 아우님아 권서방댁 이서방댁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뛰고 먹고 먹고 뛰고
서로 안고 잘도 논다
제멋대로 부른 노래 뻐국새 노래런가 엉머구리 소리런가
박자조차 맞지 않네
춤추는 거동보소
팔다리는 떨어지자 엉덩이는 삐딱삐딱 노루뜀을 하는구나
마루장판 깨지겠다 여의도 방송국에 월급 주고 배웠다오
이러저러 노는 흥취
해가 지고 달이 뜨며 달이 지고 해가 뜬다
오늘 가고 내일 오고 내일 가고 모래로서
연삼일이 되었구나
연초회 계원아 남은 돈 얼마인고
십 만원 약소하나 문중에 드리고서
나머지 삼 만원은 친목회에 기증하세
성대한 이번 놀음 이만하면 족할소냐
제각기 살림살이 상치된 일 많겠지요
아해들 기다린다 영감님 꾸중할가 내일에는 가사이다
올 때에는 즐겁지만 갈 때 설움 어이할고
만단정회 다 못하고 각분동서 하단 말가
학정교상 큰 길 가에 로로정정 얘기로다
가는 소매 다시 잡고 뒷기약을 묻는구나
천중가절 단옷날에 옛날 놀던 솔거리에 그네 한 번 뛰어볼까
중추가절 추석날에 햇밤과 햇실과나
구월구일용산음에 주유화 손에 잡고 국화주 마셔보세
작별 인사 다 못하여 자동차가 앞에 닿네
급급히 뛰어올라 잘 가라 잘 있거라 손 흔들며 떠나노라
차홉다 붕우님네 인지 가면 언제 오나
송군남포누여사에 함정각수 어여쁘다
낙화적적 산새 울고 양유 청청 배 떠난다
초수오산도로난에 천리 행정 조심하소
양관에 이별주도 백배라도 맛이 없소
한산사 쇠북소리 손의 배에 외들어라
심양강 비파소리 외기러기 울고 간다
위북에 춘천수와 강동에 일모운은 ㅡ
두자미와 이태백이 상사불견 그리워라
사가보월청소입과 억제간운백일면은
고향생각 애절하다 금인고인 일반이지
고원이 장제숙에 혼이 간들 어떠하니
오주에 달 뜨거든 그 달보고 상사하세
녹수청산 고이 지나 병주고향 다다랐네
가소롭다 우리 인생 백년 광음 얼마런고
조여청사무여설에 인간공도 어이하리
부평 같은 우리 종적 합이부분 한탄마오
춘거추래 어느 날엔 분이부합 없을소냐
이 마음 굳게 지켜 그날 오길 기다리리
동자야 먹 갈아라 다음 날을 기약하고
오늘 놀음 기념하세 가사 일곡 부르노라.
현대규방가사(3) 원문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고등학교 교사
권 택 룡
「자녀 교훈」
유수 같은 세월이요 변함없는 사절기후
춘화일난 어느 때인가 만화방창 이때구나
가는 광음 뉘 잡으며 오는 백발 뉘 막으랴
헛부다 차일신이 점일시로 주는 기운 헛부기 짝이 없다
화타 편작 진시황도 죽음 길은 못 면거든
하물며 네 부모야 여일을 기필할가
오늘날 너의 어른 진갑을 다다르니
십 사세 매진 인연 오십 년이 다가오니 몽과 청산이 아닌가
대연을 경영하고 너희들이 모인다니
보고 싶은 안면들을 수이 볼일 반가워라
환갑 진갑 다 지난 일 한심코 헛부도다
일변은 생각하니 자고시로 다병하여 부모 가장 심려 돕고
대를 물려 너희들께 물물이 애쓰이며 반생반사 지낸 세월
오늘이 있을 줄은 기대치 않았더니 부처님 덕택으로 너희들 효성으로
몇 안 되는 자식 자손 앞에 놓고 즐길 일이 꿈인가 생시인가
그러나 이 시간도 새벽종 깬 소리에
잠이 깨서 일어 앉아 문방사우 찾아놓고
그리운 내 자식을 면면이 불러보자
사남매 너희들은 내 소회 들어보고 내 훈계 잊지 마라
군위 부계 대율촌에 경재 선조 자손으로 임자년에 내가 나서
수암 선생 종부되어 무진 사월 결혼하니
등용문 귀한 몸이 더 바랄 것 없지만은
태기가 천연하여 노심초사 내 간장이 다 썩고 놀랜여지
경진사월 너를 얻어 천상에 선동인가 지상에 금동인가
내 과거를 생각하면 몇 차례를 죽은 목숨
죽어 볼가 살아 볼가 천사망염 망설어셔
이를 물고 살았더니 니가 나의 생명되어
내 품안에 잠을 자니 나도 자식 나았든가
참이겠나 꿈이겠나 눈을 닦고 다시 보고
만져보다 꺼질세라 누가 와서 빼앗서 갈가
바람 불어 날아갈가 석산에 인삼 같이
중난코 유관함이 어대다 비할어요
한자식도 과망한대 삼년 지나 차아 나고
갈수록 기이하고 생각사록 공생할사
연생생여 사남매가 금상첨화 되었구나
죽을 어미 살린 효자 금옥 같이 고이 길러
차례로 입학시켜 학기마다 우등상과
장학금 도움 되니 남에 하례 아쳐롭고
어미 재미 가득한 중 광음이 여류하여
광구갈망 택부택서 천정연분 지중하여
군자호구 요조숙녀 세 쌍 내외 짝을 지어
바라잖케 생남생여 어미 설분 쾌히 하니 효자 효녀 아니리요
그러나 너희들은 한번 효성 더하여라
모자는 천륜이요 부부는 인륜이라
부부라 하는 것은 서로 믿고 서로 돕고
남남이 이은 정은 정 없이는 못사는 법
부창하고 부수하고 중대하고 사랑해서 변함없는 부부이라
불만이 있을 때는 안색을 순히 하고 음성을 조용하여
옳은 말로 대화하면 소명요조 나의 현부
반기고 깨우치리라 그것이 부창이라
주엄아 너희 둘이 서로 불만 없을 거다
경박한 이 세상에 세속에 물들잖고
저의 분수 다 지키니 내 보기에 만족하고 남이 보고 칭찬하니
욕심 없는 천품으로 청렴하신 부훈 받아 가사에 소홀하나
자고이래 이 댁 내력 청빈적덕 본분이라
상대여빈 경군자와 가빈에 사현쳐라
십 사대 종부로서 책임이 중하오니
잦은 제사 많은 손님 궁핍 절약 하여가며
설장보다 규모 있게 정성껏 받들어라
제사 불가부성하니 동동 촉촉 전전 긍긍 일동일정 삼가고
교만이라 하는 것은 만 가지의 화근이라
부귀를 자랑 말고 빈천을 멸시 마라
의복 음식 검소하게 유가 본색 잃지 마라
석일 같은 네 부모가 육신은 예 있으나
마음은 주주 야야 너의 신변 안 떠난다
동기 우애 명심하고 수소한 지손분들
면면이 화목하여 종부자격 상실마라
중책이 허다하니 무심한 시어미가 걸리고 못 잊힌다
네 가장 허약하니 의약 조석 보살펴라
아이에게 맡겨 아니 된다 건강을 유의해라
이 모든 부탁들을 남을 위해 하는 것가 지 몸 위해 할 일이지
너희 내외 작인됨이 후덕인후 천성이요
요조현철 지극효우 내가 다 아는 바라
금사수석이라 못 잊힐 바 없지만은
가는 말에 채직기로 부모 사렴 끝이 없어 간단히 부탁한다
한철아비 내외 보라 노망한 이 어미가
한슈회 일이 없어 병석에 누웠으니
산지 각지 헛친 자식 차별 없이 보고 싶다
동분서주 너의 직장 전국의 고속도로
국민은 편리하나 불피풍설 중한 노력
정착지도 없는 모양 괴로울 일 걸리지만
피치 못할 직장이라 무익히 애만 된다
허박한 네 아내가 네 몸 위해 따라다녀
고생이 오죽하랴 부인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중대하게 생각하고 분별없어 아니 된다
부부가 화합하면 백복이 절로 온다
가장이라 하옵시고 아내를 낮게 여겨
강압 고성 남용하면 군자가 못 되는 이
네 부친 아직까지 높은 소리 못 들었다 부디 부디 명심해라
편소 동방 우리나라 남북이 갈라 앉아
골육상쟁 업을 삼고 오륜이 무너지니 삼강이 어데 있고
도덕이 무엇인지 무례 행동 몰염치로
사리사욕 업을 삼고 남 속임과 사치 교만
주주야야 공포 속에 민심이 소요하니
망국지 근원이라 한심키 짝이 없다
내 자식 너의 형제 조상님네 유훈으로
후덕청렴 명심하고 충효를 잊지 마라
자욕양이친부대여라 살았을 때 효성해라
효성이라 하는 것이 의복 어육 잘 받들어 효성이 아니더라
만 리 밖에 있더라도 너희 둘 편케 있고
사람다운 사람 되어 중인이 앙시하면 그것이 효성이라
자식이 불효하면 남이 나를 천캐 보고
내 스스로 천해지니 그 아니 무서우랴
나의 현부 한철어미 빈한한 시집살이
불편한 점 많지만은 너 동서 주어미는
너보다도 심한 고생 감수하고 견디며
부모된 내 마음이 애처로워 걸려하면
제가 먼저 위로하여 내 마음을 편케하니 그 아니 기특하랴
너도 부대 본을 받아 매사가 형만 하면 더 바랄 바 무엇인고
속담에 이른 말이 첫술에 배부르랴
근검하고 절약해서 적수성가 힘을 쓰고
후덕을 본을 삼고 겸손을 으뜸 삼아
부녀에 산모됨이 그것이 원이로다
내외 간 화순해라 남편이 화낼 때는 답 안하면 불화 없다
유순한 네 성질을 내 짐작할 것이다
감사하신 두 곳 사돈 금지옥엽 기른 애녀
내 보물로 주신 은혜 무엇으로 갑자올지
기화요초 너희들게 금 구슬 옥 열매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생각사록 공생해라
너희 둘은 기차로서 책임이 가벼우니
너 힘이 닿는 대로 형에게 힘을 도와주고
매사를 상의하고 형제의 실경하여
동기 불목하는 사람 차 세상에 허다하니
금수에 가까우리 부디부디 주의해라
나의 효녀 영용어미 아졸한 이 어미가
자에시로 다병하니 오래 살기 기필할가
멀지 않은 내 인세에 너희들 보고져추
노약 심회 살우드니 말일에 온다하니 반갑기야 하다만은
인간 칠십 고래희라 얼마나 살겠는가 자주 와서 반겨다오
그리고 부탁 말은 잊지 말고 새겨두라
천지간 만물 중에 음양이 배합하여
천정 배필 짝을 가려 남혼여가 하는 예절
자고 고금하였으니 넌들 어이 면하리요
모우미성 이십 세에 예절 없이 출가시켜
백양 우귀 입문지후 너 몸이 무겁도록
융은 혜택 사돈 자애 대인군자 사위 맺고
너에 방신 잊었드니 쟁그라운 생남생여 비단에 꽃이구나
너 시어른 병첩하사 네 책임이 무겁건만 딴 살림을 시키시니
우리 사돈 세정 밝아 직장 따라 보내신 듯
황공키사 하지만은 네 도리는 아니리라
봉제사 접빈객과 미약싀탕 너 일인데
물러 앉아 어찌하며 내왕이야 하겠지만 뫼셔 있기 같으리요
혼정신성 못하나마 축일문후 잊지마라
그러나 너의 몸도 약한 어미 여질이라 마음대로 쉽겠는가
사환이야 있지만은 자식과 같겠는가
너는 아직 모르리라 양자방지부모은을 옛말로만 들었더니
내 지금 노병하니 병이 나도 자식 생각 시장해도 자식 생각
멀리 있는 너희들을 생각해도 무익하지만 조운모우로 보고 싶다
부모 마음 이러니라 불효 부모 사후회를 이제사 생각한다
어른이 즐긴 음식 자주 자주 해 드리고
사람마다 늙어지면 궁굼한 일 많으니라
대소사를 품해하고 궁금잖게 여쭈어라 노인이라 필요 없다
구석구석 밀담하면 어룬 마음 섭섭하니 그것도 불효리라
나의 효부 동서들은 매사를 알려주니 이 더욱 기특하다
수소한 너의 동기 우애 없이 아니 된다
우리 시부모 타별 우애 네가 항상 자랑하더니
낱낱이 본은 보아 상부상조 하여가며
동기는 우애라 우애 없어 아니 된다
동기간에 불칙하면 복 받는 이 없느니라
부부유별 엄수해라 남존여비 없는 세상 건곤이 뒤바뀌어
가정이 어디 있고 나라가 무엇되노
부부가 중하다 해도 정만 중해 되겠는가
가장이라 하는 것은 미덥고 어려우니 방자히 구지마라
가장은 소천이라
아끼고 공경해서 가정을 이룰 때는 내조가 중하니라
성인 같은 군자라도 한 번 실수 없겠는가
바가지를 긁지 말고 환한 음성 순한 말로 깨닫도록 대화하면 어느 누가 불응하리
그것이 부순이라
천지간 만물 중에 유인이 최귀한데
오륜을 모르는 사람 금수가 아니든가
나는 비록 무식해서 불효불우 못 면해도
할매 거역한 일 없고 부부언쟁 없었던 것을
너희들도 알거시라 부디부디 조심해서
효부 현처 현모 되어 욕급부모 하지 마라
외할버님 하신 말씀 비지지란이요 행지유간이라
자애하신 그 교훈을 봉행하지는 못 했으나
아직껏 역역하고 성덕존안 뵈옵는 듯 감구지회 절로 난다
자식 몇 안 되는 것이 욕심대로 안 되더라
청빈한 내 생활에 근근이 사노라니
수말로 삼남매는 최고 학벌 맡았건만
넷 중에 너 하나만 향학 열성 남다른데
대학 삼년 중퇴시켜 그 시에 걸리든 일 오늘 것 죄가 된다
소명영리 네 소견에 부모 원망 너무 말고
너에 시댁 요부하니 아시 설분 쾌이하라
나의 필녀 들어봐라 너는 아직 미성이니 무슨 걱정 있겠는고
금년만 넘어가면 졸업 맞고 집에 와서 그립지 않고 단취하자
늦게야 너를 얻어 내 품 밖을 벗어나서
학창에 몸이 매어 우리 모녀 갈라 앉아
수하무인 내 소처에 화용월태 너의 음용
물물이 보고 싶어 취심인 듯 광심인 듯
너 연치를 헤아리니 얼마 있어 출가하노
옛 법이 고이할사 남하인 여하인과
금옥같이 기른 형을 사양 없이 남을 주고
너마저 남을 줄일 미리 앉아 생각해도
명가명문 좋은 곳에 대인군자 네 배필이
너 데리러 올 것이니 아까워 어찌 줄꼬
딸 나은 나의 죄로 수원수구 할 수 없고
부디부디 너 장래가 오복이 창흥하기 불전에 축원한다
백모미거 너를 불러 이를 말이 허다하나
여자 직분 한가지니 형들께 부탁한 말 같이 보고 새겨두라
세 형들 본을 보아 이대로 행케되면 바히사 허무할이
불효한 이 어미는 우리 부모님의 일여로서
고아복아 기르시는 생아 고아 교육으로
태산 같이 높은 은택 만분 일도 못 갚고
천지상 다 당하고 춘거추래 칠십지연
허리 굽고 머리 희어 육십 오세 꿈이로다
허무한 내 일생이 기사근생 오늘이라
떠나 잖는 나의 병에 너희들 애쓰는 일
걸리고 애처롭고 연유약창 네 효심을
순순히 상히난 일 잔상코 애둘하다
부탁이사 많지만은 묘항한 정신으로
붓을 드니 지루해서 대강대강 기록한다
숙독상미하면 불무일조하리라
아이들아 지금부터 너희들 효성으로
백병을 소멸하고 건강이 회복되면
너 어른 교장직에 정년퇴직 하시거든
너나 성취시킨 뒤에 금의환향하여 고택을 중수하고
연당에 양어하며 과원에 실과 따서
육간대청 너른 마루 범절 차려 봉사하고
봉황성에 터를 잡아 합강 정자 지어 놓고
고담준론 의논하며 서책을 소일하고
네 어른 즐긴 바둑 상산사호 낙을 삼고
네 어미 좋은 하루 원근 친척 다정 붕우
주야로 모여 앉아 취미대로 소일하고
불로장생 술을 빚어 금준 옥배 채워 놓고
은인옥척 회를 쳐서 강풍으로 땀을 돌려
서로 권해 마신 뒤에 낙강에 배를 띄워 위강에 하선하니
백구야 날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한가한 산림처사 벗 찾아 예 왔으니 네 아니 내 벗이랴
신익 노심 익노에 백년 불변 할 일이 쾌심락사 내 혼자라
보고 싶은 너희들이 전체로 왕래하여 효도하고
인아봉추 친외손이 자주 자주 찾아올 일 인세지락 이것이라
세월이 가고 흘러 노옹노구 두 늙은이 백수동주 하온 후에
동일 동시 택일하여 자식 자손 다 모으고 영혼은 몸을 떠나
서방 극락선경으로 우화등선하거들랑
남은 육신 편히 뫼셔 동혈 안장하여 다오 너 어미 소원이다
수일이 가까우니 허무한 인간 일생
헛분 생각 지향 없어 위로 겸해 적엇노라.
상주 우천 수암 종부 홍노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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