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상주지역 교회(敎會) 탄압(彈壓) 실태(實態)
상주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재수
Ⅰ. 들어가는 말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 온지 120년이 지나고 상주에 교회가 세워져 이미 100년이 훨씬 넘었다. 상주에 세워진 몇몇 교회가 일제강점기에 세워졌으므로 이 시대에 교회가 어떤 박해를 받았으며 어떻게 극복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미래 교회 발전을 위해 후학들이 꼭 알아야 할 일이다. 아울러 개 교회사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시점에 상주지역 교회들이 그 시대에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는지 정리해 둘 필요가 있어 이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상주지역교회의 탄압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교회의 탄압과 경북지역에 자행된 내용을 살펴보면 저절로 상주지역 교회들의 탄압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조직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경우 개(個)교회 조직을 당회(堂會)라 부른다. 그리고 상주지역 교회의 모임을 시찰회(視察會)라 부르고, 상주를 비롯한 문경, 김천, 구미 등 몇 개 지역의 모임을 노회(老會)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노회(老會)가 모인 전국 단위의 조직을 총회(總會)라 한다. 일제(日帝)는 교회의 탄압을 이러한 교회 조직을 통해 효과적이면서 집요하게 이용하였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조직상 시찰회는 물론 개 교회(個敎會)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직접적으로 미치게 됨으로 일제가 총회와 노회에 어떤 방법으로 탄압을 했는지 살펴보면 곧 상주지역 교회가 이 시대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제강점기의 교회 탄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는 일제의 극한적 탄압에 항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견해와 그러나 교회가 끝까지 항거하지 못하고 일제에 부역의 죄를 지었다는 견해가 있다. 김승태. cafe. daum.net/0691ktj/, cafe.daum.net/0691ktj/
1)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와 신도의식을 공인하고 실행한 죄. 2) 거룩한 예배의식에 세속국가의 ‘국민의례’를 도입하고 실시한 죄. 3) 찬송가를 삭제하거나 가사를 개사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인한 죄. 4) 신·구약 성서를 축소․ 배제하고 잘못 해석하고 선포한 죄. 5) 교회의 규범을 개악하고, 조직을 개편하여 교회의 전통을 문란 시키고, 일제의 강제 통폐합에 응한 죄. 6) 교회를 통폐합하거나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고, 교인들에게 ‘헌금’, ‘헌납’을 강요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 7) 강연·언론·좌담회 등을 통하여 일제의 그릇된 ‘교화운동’에 참여한 죄.
그러나 본고는 두 번째 경우는 생략하기로 하면서 먼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상주지역의 교회를 살펴보고 이 시기에 총회·경북노회·시찰회를 통해 개 교회를 어떻게 탄압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상주지방의 교회(설립 순)
문헌에는 상주에 교회가 설립되기는 19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기록은 선교사로부터 상회(上會 일명 老會)에 보고가 된 후부터 이다. 그러나 대부분 실제로 지역교회의 출발은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이는 선교사가 오기전이나 선교사가 와서 상회에 보고되기 이전부터 대부분의 교회가 가정교회로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1908년이 상주에 교회가 설립된 최초의 해로 기록된다.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가 세워진 해가 1896년이라고 보면 12년 후의 일이다. 1900년부터 이미 경북지역에 36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가까운 선산(善山)에도 1900년 이후 옥성면 죽원교회(竹院敎會, 현 大院敎會)를 시작으로 8개 교회, 김천(金泉)지역이 10개 교회가 설립된 이후이다. 아마 선교사들의 활약이 대구를 중심으로 북부지역으로 점차 확대되면서 경북 북부지역에 위치한 상주가 기독교의 접촉이 늦어 진 이유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구전을 근거로 1900년 5월에 정씨 부인이 상주읍 서성동 소재의 집 4칸을 구입하고, 성명 미상의 전도사가 가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주교회·시민교회 연혁 참조
이 시기는 경북지역 전반에 교회가 한창 세워 질 시기이다. 지금도 두 교회는 1893년 4월 28일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한국이름 배위량裵緯良) 선교사가 상주를 방문했음으로 이 시기에 상주에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에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교회는 그 설립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장로교회 정치 체제상 교회 초기부터 문서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어려웠다. 대부분의 교회가 당회(堂會)가 조직되어서야 당회록이 기록되는데 당회가 조직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 되어야 가능했다. 교회 초창기 당회의 조직은 쉽지 않았기에 교회 시작의 기록이 어려운 이유이다. 그리고 당회록이 기록되었다 해도 6·25와 같은 전쟁으로 기록이 소실된 경우가 많고, 또 하나 선교사들이 지역 교회를 관여하면서 본격적인 교회로 정착되자 대부분 자신의 선교 사역이 시작된 때로부터 설립연도를 잡은 점이다. 이런 이유로 공식적인 노회나 총회상 설립연도와 교회 자체기록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창식, 『경북기독교회사』, 코람데오, 2001, p. 120~121.
이제 『경북교회사』나 『예수교장로회사기』, 그리고 각 교회 연혁에 기록된 창립년도순으로 1945년 이전에 세워진 상주지역 교회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서정교회(西町敎會)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근거로 하여 1900년 5월이라 기록하고 있다. 상주교회·시민교회 연혁 참조
그러나 경북 교회사의 기록에는 1910년 상주군 상주면에 서정교회(현 상주교회․ 상주시민교회)가 세워졌다고 되어있다. 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선교사 부해리와 대구 남성정 교회 교인 서희원(徐熙媛) 여사가 각 50원을 기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부해리가 설립자로, 송병근(宋秉根)을 영수로, 최대익(崔大益)을 집사로 임명되었다. 김병희 편역, 『경북교회사』, 코람데오. 2004. p. 64.
라고 밝히고 있다.
2. 사산교회(沙山敎會)
사산교회는 1908년 상주 화서면 사산 2리에 세워진 교회로, 신자 여러 명이 특별한 규칙 없이 모여 예배하다가 부해리의 인도로 교인들의 헌금 54원으로 6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3. 금흔교회(衾欣敎會)
역시 1908년 사벌면에 세워진 교회로 신자 몇 명이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조사로 최군중(崔君仲이) 시무하였다. 김병희 편역, 『경북교회사』, 코람데오. 2004.
4. 화산교회(花山敎會)
역시 1908년 2월 낙동면 화산리에 세워졌다. 교인 중 박동언(朴同彦)이 16원으로 3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봉헌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화산교회 100년사』. p. 16 연혁부분
5. 오리원교회(五里院敎會)
역시 1908년 신자들이 출연한 헌금 16원으로 4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6. 오광교회(五廣敎會)
1908년 상주 공성면에 세워진 오광교회는 김성률(金聖律) 김병희 편역, 『경북교회사』, 코람데오. 2004. p.47
또는 김성택 박창식, 『경북기독교회사』, 코람데오, 2001, p.108.
이 땅 50평을 헌금하고 일반 신자는 30원을 헌금하여 3칸짜리 초가집을 건축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김병희 편역, 『경북교회사』, 코람데오. 2004. p.47
그러나 오광교회는 1904년 1월을 설립 연월일로 정하고 있다.
7. 석산교회(石山敎會)
1908년 상주 모서면에 석산교회가 세워졌다. 이전에 몇 명의 신자들이 인도자가 없어 모서면 소정리에 예배 처소를 정하고 회집하다가 그 때에 본리(本里)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 방혜법(Herbert E. Blair. 1879~1945 邦惠法)이 설립자로, 조사는 정재순(鄭在淳)이 사산교회와 겸임하였다. 위의 책. p. 46
8. 함창교회(咸昌敎會)
1909년 3월 15일 부루엔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주시 이안면 증촌리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7월에 함창읍 구향리에서 주일집회를 시작하였다가 1920년 3월에 함창읍 오사리에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9. 용담침례교회(龍潭浸禮敎會)
1911년 2월에 상주군 사벌면 용담 2리에 4명의 신자로 설립되었다.
10. 옥산교회(玉山敎會)
1919년 3월 7일 상주군 공성면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의 설립에 대한 경위는 밝혀진 자료가 없는 상태이다. 박창식, 『경북기독교회사』, 코람데오, 2001, p 108.
그러나 오광교회 연혁에는 1924년 1월 옥산교회가 분립하다로 되어있다.
11. 수상교회(水上敎會)
1919년 3월 3일 상주군 청리면 수상리 김문석 씨 댁에서 최초의 집회를 열었다.
1922년 일반 신자의 출연금 50원으로 3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설립자 김문석(金文錫) 씨는 영수로, 최칠복(崔七福) 씨는 집사로 서상룡 씨는 순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12. 구세군신흥영문(救世軍新興營門)
1923년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상주군 모동면에 위치한 지역인데 이 곳은 영동과 김천에 가까운 지역이어서 김천 영문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일제 때 일본인의 광산 사무소로 이용되어 폐쇄 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시작하였다.
13. 부원교회(釜院敎會)
1925년경 현 상주시 부원 2리에 부원교회가 설립되었다. 1925년 당시 상주읍 죽전리 김칠만 씨의 건너 방을 빌려 서상용 조사의 인도로 예배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부원교회의 시작이다. 부원교회 연혁, 2008
14.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상주교회(第七日安息日 예수再臨尙州敎會)
1928년 봄, 상주읍 성하동 227번지에 박겸서 전도사를 비롯하여 황사홍, 이춘식, 박반석, 김씨 노인, 황점분, 최현숙 형제, 이국희(우필원 목사 부인-부두열 목사 사경회 때 개종) 강옥자, 김정환씨 등이 셋방을 얻어 집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 상주교회 정승호 당회장 자료.
15. 상주성결교회(尙州聖潔敎會)
1929년 박동의를 설립자로 본부에서 지원하여 설립 하였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1920년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尙州誌』
16. 양촌교회(陽村敎會)
1930년 11월 현 상주군 상주읍 양촌리에 정재순 목사와 손주안 전도부인이 참석하고, 대구 제중원 전도부에 의해 설립이 되었다. 이재원, 『대구장노교회사 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p. 149.
17. 상주남문밖교회(尙州南門外敎會)
1931년 서정교회에 시무하던 이희봉 목사에 의해 개척되었다.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연혁
18. 함창성결교회(咸昌聖潔敎會)
1931년 함창성결교회가 세워지다.
19. 성공회 상주교회(聖公會 尙州敎會)
경북 서북부 지방 유일한 성공회 교회는 성공회 상주교회이다. 1934년 11월 1,500평의 넓은 교회 대지를 마련하고 전도를 시작한 성공회교회는 1935년 8월에 16칸 반의 성당을 신축하고 10월 2일 구세실 주교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경북기독교회사』. 박창식. 코람데오. 2001. p. 203
20. 화령교회(化寧敎會)
1935년 11월 상주군 화서면 신봉리에 화령교회가 설립되었다. 정재순 목사와 대구 동산 제중원 전도부에 의해 설립이 되었다.
21. 신봉교회(新鳳敎會)
1937년 3월 5일 서정교회에서 분립 신청을 하고 경북노회가 이를 승인하여 상주군 상주면 신봉리 289번지에 교회를 설립하다. 안봉희, 김상걸, 안유경, 안창경 씨가 설립자로 되어 있다. 초창기 교회는 주로 설립자들의 가족과 이 지역에서 서정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이 중심으로 안봉희 씨 소유 초가 앞마당에서 창립예배를 드리다가 1938년 8월 19일 150원을 들여서 12평 신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경북노회록』 제36회의록, p. 59
22. 공검 동막교회 설립
1938년 8월 19일 상주군 공검에 동막교회가 신설되어 전도인 1인 6개월간 파송 청원이란 기록이 나온다. 『경북노회』 제 36회 제2회 임시노회록, p. 27
Ⅲ. 구체적인 일제의 교회 탄압
1. 탄압을 위한 법령 규칙의 강화
일제는 을사조약을 맺은 다음해 1906년에 이미 통감부령 제45호로 포교 규칙을 제정 공포했다. 이 규칙은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간섭, 통제, 탄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1915년 8월 총령 제83호, 1920년 4월 총령 제59호를 각각 공포하면서 기존의 포교 규칙을 다음과 같이 강화하였다. 위의 책.
1915년 10월 1일부터 시행할 것을 목표로 발표된 전문 19조의 포교 규칙은 교회당이나 설교소․강의소를 설치할 때나 교회의 유급 직원인 관리자를 둘 때에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총독부의 공식적인 태도로 세계의 이목을 의식한 형식적 행위에 불과함을 보여 준 것이다.
1915년 10월에 들어서는 포교 규칙에 의한 포교계(布敎屆)․포교원(布敎願) 포교자 명단, 포교 관리자 설치계, 포교소 설치원(布敎所 設置願), 신도수계의 여러 양식이 제정되었다. 포교 규칙의 제정과 관련하여 박은식은 이렇게 썼다.
“총독부는 포교 규칙을 제정하였다. ... 교회가 전도 사업이나 교회당 건축을 하려 고 청원하는 자가 있으면 고의로 미루어 해가 넘도록 허가하지 않는다. 전도회, 부 흥회, 기도회, 예배 및 선강회(宣講會)에는 반드시 순사를 파견하여 감시하고 혹 그 기도나 선강하는 언사에 신앙의 자유니 정신의 자유니 마귀의 권세를 꺾어 깨뜨린 다는 말이 있으면 경찰서로 불러 심문하기를 ”네가 원하는 자유와 자립은 한국의 자유 독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매를 치고 가두었다가 여러 날 후에 석방한 다. 교직자로서 조금이라도 명성이 드러난 자는 형사의 미행과 정탐을 받지 않는 날이 없다.” 朴殷植, <我國獨立運動有血史>, p.54. 인용; 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
임종국 선집 1. 『친일 그 과거와 현재』 p.96. 아세아문화사. 1994 서울. ;인용 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
포교 규칙이 발표된 후, 거기에 명시된 허가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려워 평북 의주에서는 교회 설립의 허가를 끝내 얻지 못해 교인들이 흩어져 버리기까지 하였다. 1917년부터 이 포교 규칙은 더욱 강화되어 한국의 기독교회는 교회의 설립에 더욱 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 3·1 운동으로 인한 탄압
일제의 강점 후, 초기의 기독교에 대한 회유 정책이 탄압 정책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 속에서도 기독교는 교단의 조직과 신자의 증가 면에서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1907년경 약 7만 명에 달하던 기독교인은 ‘105인 사건’ 등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1912년경에는 그 두 배를 훨씬 넘게 되었으며 3·1운동 직전에는 대략 25~3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발전은 기독교가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적극적 참여와 지대한 역할은 이미 준비 단계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3월 1일을 기해 발발한 독립 만세 운동은, 당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신선, 원산, 의주 등 12개 처에서 일어났는데 모두 예수교회 내지 예수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들 주요 도시 및 지역에의 독립 선언서의 배포는 이미 학생과 교회 청년들에 의해 이루어진 후였다.
종래까지 3·1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를 논할 때는 대개 민족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라는 것 정도만 언급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의 준비 단계, 민중화 단계, 정부조직 운동으로의 전환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매우 컸다. 특히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기독교인의 참여는 매우 광범위하고 적극적이었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박해도 매우 심하였다. 『한국기독교사 특강』. 이만열. 성경읽기사. 1985 p 80-82
3․1운동은 평화적 독립시위운동의 독립투쟁이었다.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일제의 황성(皇性)에 호소하고 자유 열강의 원조로 독립을 획득하고자 거족적 독립 염원을 집단적 시위로 나섰던 것이다. 전 민족이 맨주먹으로 강력한 일본 군사력의 탄압과 학살을 받으면서도 전국 곳곳에서 3개월간이나 계속 투쟁함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선포할 수 있었고 일제가 무단 일변도의 통치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 『상주문화』, 「상주의 3․1운동」, 상주문화원 제2호,1991, p199
특히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따라 세계의 약소국가들에게는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었고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어 1910년 3월 1일 마침내 3·1 운동이 일어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민족 대표만이 아니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가장 많았다. 이 때문에 일본의 기독교인과 교회의 탄압은 가혹했다. 3·1운동으로 제암리 교회의 학살은 대표적인 만행이었고, 교회 파괴 47동, 일부파괴 27동, 손해 41동이며 1919년 6월 30일까지 투옥된 교역자만 151명, 일본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6명, 기독교 계통의 학교 두 곳이 소실되었다. 李萬烈, 「한국기독교인의 역사의식」. 지식산업사, 1981. p 71의 내용을 『대구시사』 p 806에 인용한 것을 재인용
영남지방의 3·1운동은 경북지방 22개 부, 군과 경남지방 21개 부, 군으로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이 보편화 되었다. 3, 4월 두 달 동안 경북 116회 경남 121회 등 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이방응. 「경북지방의 3․1운동에 대한 연구」. 계명대학교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3. p 36, 『경북기독교회사』. 박창식. 코람데오. 2001. p 269 재인용
경북지역의 3·1운동은 대구에서는 3월 8일과 3월 10에 일어났고 경북 도내에서만 90여회의 만세 봉기가 일어났는데 27회는 미리 알아 막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구속되어 재판 받은 사람이 1,785명인데 기독교인이 481명이고 목사, 조사, 및 부속학교 교사가 30명이나 되었다. 이날 대구에서는 정오 대구의 목사, 장로를 중심한 기독교인들과 기독교계 학교인 계성, 신명 학교 학생들과 성서학원 학생들이 큰 시장(서문시장)에 모여 들었고 대구고보, 대구농림학생들도 합류를 하여 약 1,000명이 합세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2』. p 292, 경북기독교회사. 박창식. 코람데오. 2001. p 272 재인용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가 소달구지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려 했지만 미리 달려온 경찰에게 빼앗겨 공약 3장만 외친 후 만세를 선창했고 이 일로 인해 이만집 목사를 비롯한 김영서, 이재인, 김무생, 박재원, 신대근 등 141명이 경찰에 구속되고 재판 결과 이만집은 3년, 김태련 2년 6월, 김영서, 백남채, 김무생, 정재순은 2년, 박재원, 권희윤은 1년 6월을 이재인, 임봉선, 1년, 신태근, 이선애는 6월이 선고되어 형이 확정 되었다. 李萬烈, 『한국기독교인의 역사의식』. 지식산업사, 1981. p. 71의 내용을 『대구시사』. p. 806에 인용한 것을 재인용 및 『경북기독교회사』. 박창식. 코람데오. 2001. p 275 재인용
한편 제6회(1910.6.17. 동산성경학교) 『경북노회록』과 제7회(1920.1.21. 동산성경학교) 『경북노회록』에 기록된 3·1 만세사건과 관계된 내용을 각 지방 보고서에서 살펴보자.
먼저 서북지방 보고서(p.25~32)에 칠곡군 인동면 진평교회 목사 권영해 씨는 구속 중이며, 남성정 교회 목사 이만집 씨와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 씨 남산정교회 조사 김주현 씨는 구속되어 시무하지 못하며, 의성군 산운, 청로, 이동, 선동 4교회에 시무하던 이태학 조사는 금 번 만세 사건으로 수감 중이며, 금천지방 조사 김충한 씨, 성주지방 김재곤 씨는 금 번 만세사건으로 인해 구속되어 시무치 못하며, 구속 중에 있는 정재순 씨의 편지와 박영조 씨의 문안이 왔기에 광고 드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20년 1월 21일에 열린 제7회 『경북노회록』(p. 7~13) 중 동편시찰보고서에는 조선독립만세 사건으로 교역자와 교인 중에서 구금당하여 교회에 해가 있을 것 같았으나 오히려 큰 믿음이 생겨 각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이 1,070여원의 구제금을 내어 고생당하는 가족을 구조한 일도 있고, 만세사건으로 복역한 목사, 장로, 조사, 교사, 교인이 40여인 중 거의는 출감했지만 아직 5인이 수감 중에 있으며, 동북시찰보고서에는 의성군 대리교회 김근식, 김기상 양씨는 독립만세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출감 후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으며, 독립만세 사건으로 복역하던 14인 중 8인이 출감하고 6인이 아직 수감 중입니다. 서편지방보고서에는 만세사건으로 본 지방 중에서도 수십 명이 수감되었으나 태반이 출감하고 수감자 가족을 위해 500여원의 연보로 구제하였다. 서북지방 보고서에는 권영해 목사가 12월 16일 출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경북노회록』 경북노회 제6회. 1919. 6. 제7회. 1920. 1.
3. 교화단체연합회(敎化團體聯合會)의 친일 동원
종교인들이 친일의 제일선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11월 7~8일 경성부청(京城府廳) 회의실에서 열린 ‘전조선교화사업관련자대표간담회(全朝鮮敎化事業關聯者代表懇談會)부터였다. 이 간담회는 11월 8일 결의사항을 발표하였는데 요약하면 황도사상(皇道思想) 및 일본적 신앙심의 고취와 그것을 담당할 교화단체의 육성 강화 및 약간의 구체적 교화원칙의 채택이었다.
1932년 1월 10일 총독 우가끼(宇垣一成)는 정신작흥(精神作興), 자력갱생(自力更生)의 전국농산어촌진흥의 시작을 선언하면서 충군애국(忠君愛國), 공존공영(共存共榮) 정신에 입각한 일선인(日鮮人) 일치합동 등 6개조의 실천 강목(實踐綱目)을 發表했다. 이에 힘입어 경성부(京城府)는 1) 군국(君國)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던질 참다운 충혼 의담(忠魂義膽)을 발휘할 국민적 정신의 도야(陶冶) 2)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관념과 경로효제(敬老孝悌)의 도를 숭상하는 정신의 고취 등 이다. 이러한 정신작흥 민풍운동(精神作興民風運動)의 실천기관으로 탄생한 것이 1933년 2월 25일 경성교화단체연합회(京城敎化團體聯合會)이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p 164~166.
이 연합회는 조직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35년 10월 3일 상임중앙 조직인 조선교화단체 연합회(朝鮮敎化團體聯合會)를 출현시켰고 이어 대구부는 1935년 9월에 개신교를 비롯하여 천주교, 불교, 천리교 등 각종 종교단체를 하나로 묶어서 대구부교화단체연합회(大邱府敎化團體聯合會)라는 기구를 창설했다. 이 회는 회장을 대구부윤(大邱府尹)이 맡음으로 대구부윤이 대구부 내의 행정 기구처럼 모든 종교단체를 임의로 통제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구교화단체연합회가 조직된 이후 각 교회 앞으로 전달된 공문의 일부를 들어보면 이 단체가 무엇을 위해 조직 된 것인지 분명히 나타난다.
〇 시국간담회(時局懇談會) 개최의 건.
〇 출정군인(出征軍人) 출발의 건.
〇 종교보국(宗敎報國) 생활기준 강연회 개최의 건.
〇 경제전(經濟戰) 강조운동 실시에 관한 건.
〇 지나사변(支那事變) 4주년 기념 전조선 총후 일체화 운동 실시의 건.
〇 시국대책(時局對策) 강습회의 건.
〇 황도정신(皇道精神) 발양(發揚) 강습회의 건.
〇 건국제(建國祭) 거행에 관한 건.
〇 황군(皇軍)의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 거행에 관한 건.
〇 국민정신 작흥(國民精神作興)의 건.
이렇게 되자 교회는 자고 나면 강습회요, 일어나면 강습회였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이 겪은 괴로움은 다 측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4. 조선총독부의 기독교 지도 대책(基督敎指導對策)
-기독교 말살책(基督敎抹殺策)
1938년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지도대책이라는 말살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 총독부 학무국의 지도대책이 나온 배경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해(1937年) 7월 지나사변(支那事變;中日戰爭)이 발발하여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은 제국의 병참기지(兵站基地)로서 출정 장병의 수송, 군수물자의 공급 등 중대한 국가적 역할을 맡아 그 동안 출정황군(出征皇軍)의 환송, 국방헌금, 황 군의 무운장구 기원 및 전몰위령제 등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비상시국의 타개에 매진(邁進)하려는 기운이 횡일(橫溢)하여 미증유의 국민적 긴장을 나타내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조선 59만에 달하는 예수교도들은 시국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견지 (堅持)하고, 신사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誡命)에 어 긋난다고 하여 참여치 않으며 때로는 ‘만왕의 왕’이라고 설명하여 불경죄(不敬罪)로 문의 처단되는 사례와 잘못된 평화관(平和觀)을 가지고 반전적(反戰的)인 언사(言 辭)를 논(論)하는 경우 등 사건이 수소(隨所)에 발생하여 총후(銃後) 국민정신의 결 속을 문란(紊亂)케 하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다.” 이에 對한 지도를 등한히 하게 되 면 그것은 모름지기 시국 하(時局下) 국민의 정신적 총동원을 지배하는 것일 뿐 아 니라 시국을 인식하고 각종 국가적 행사에 협력하고 있는 민중과의 사이에 더욱 마 찰 상극(摩擦相剋)을 조성할 우려가 있기에 본년(1938年) 3월 이의 대책으로
1)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예수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해서 지도계몽(指導啓蒙)에 노력하고 이를 통해서 일반 교도의 계몽에 대처할 것.
2)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한 지도 및 시설
① 교회당에는 될 수 있는 한 국기 게양탑을 세울 것. 세우지 않을 경우에라도 축제일 또는 다른 경사 날에는 반드시 국기를 게양할 것.
② 예수교도의 국기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東方遙拜) 동방요배(東方遙拜): 궁성요배(宮城遥拝)라고도 한다. 일본 제국과 그 식민지들의 주민들이 궁성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던 예법.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운동의 하나로 일본 천황이 있는 도쿄의 황궁에 대한 요배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국민들의 전의를 드높일 목적으로 궁성요배 운동이 정점에 달했다. 또한 식민지의 주민들에게도 신사 참배 뿐만 아니라 궁성요배를 행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은 헌법이 시행되는 지금의 일본에서도 일부 우익 인사들은 궁성요배를 행하기도 한다.(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국가봉창,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글. 모든 조직에서는 집회가 열릴 때에도 빼놓을 수 없이 이를 낭송해야 했다. ①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②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③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를 선양하자"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기 민족말살통치의 일환으로 조선인의 얼과 뿌리를 모두 없애고 철저히 일본 신민으로 각성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제창을 실시함과 동시에 전승 축하회(戰勝祝賀會)에는 일반민중 과 같이 적극적인 참가를 종용(慫慂) 할 것.
③ 학교 생도의 신사참배(神社參拜)는 국민교육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나 일반 예수교도의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지방의 실정을 참작하여 먼저 교인들의 신사 에 대한 관념을 시정 이해하도록 하여 강제하지 않고 실효를 얻는 방법으로 지 도할 것.
④ 서력(西曆) 연호(年號)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
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하여는 이상 각항의 실시는 선교사의 자각(自覺)에 맡길 것.
4) 찬미가(讚美歌), 기도문, 설교 중에서 그 내용이 불온(不穩)한 것에 대하여는 출판물의 검열 및 임독(臨監: 現場에 가서 監督) 등에 의해서 엄중 취체(取締)할 것.
5) 당국에 지도를 실시할 때에 이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교도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계법령(行政執行令, 警察法 處罰規則, 其他)를 활용해서 합법으로 조처할 것.
6) 국체(國體)에 적합한 예수교의 신 건설 운동(新建設運動)에 관하여는 그 내용을 엄밀히 검토해 보아 목적이 순수하고 장래의 성과가 예견(豫見)되는 것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원조해 줄 것. 朝鮮總督府: 最近의 朝鮮 治安의 狀況. p.390.
‘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p 170~171.
이를 요약하면 첫째, 교역자에 대한 변절 강요. 둘째, 신사참배 강제 집행, 셋째, 성경과 교회의 개편 및 설교의 내용 사찰. 넷째, 기독교 신자 구속. 다섯째, 사이비 또는 어용기독교 단체의 활용 등이다. 이 규정은 광복이 될 때까지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얽어 맨 올가미로서 교회의 폐쇄와 수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다. 1943년에는 외국인 선교사 모두를 강제 추방하였고 고유한 각 교파(敎派)의 명칭을 버리고 교단(敎壇)이라는 일본 교파 명을 쓰게 하였다. 1943년에는 주일 밤과 수요일 밤의 예배를 금지 시켰다. 경북노회 100회사.1933. p 84-86, 상주지 p 1355
황거요배 전단 포스터와 황거요배의 모습
우선 동방요배에 대한 그들의 강요가 어떠했는지 예를 들어 보자.
가나안 농군 학교의 김용기 장로의 일화로, 이분이 일제강점기 때, 27살의 나이로 때 경기도 봉안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 장립식의 순서에 1분간 묵념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 묵념이 바 로 동방요배였다. 순서가 진행되는 중에 김용기 장로가 일어서서 책상을 탁 치면서‘내가 장로를 안 하면 안 했지 동방요배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겨우겨우 식이 끝난 다음에 양주 경찰서에서 끌려가서 일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어느 날 경찰서장이 정복을 입고 김용기 장로에게 나타나서 거수경례를 멋있게 하더니 ‘장로님 힘드시지요?“ 하면서 극진하게 경찰서장이 손을 붙들고 한 계단, 한 계단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따뜻한 지하실 방안에 두 분이 마주 앉았다.
‘장로님. 여기는 우리를 쳐다보는 교인도 없고 장로님 교회 목사님도 안 계십니다. 장로님하고 나하고 둘 뿐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동방요배만 한번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장로님 하는 일을 다 밀어 드리고 장로님을 잘 봐드리겠습니다. 그까짓 거 동쪽을 향해서 절 한 번 꾸벅하면 그야말로 팔자 고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출처: https://emoksanim.tistory.com/811 [이홍렬목사/루터교회이야기]
라고 했다.
이들은 모세의 5경(五經: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 또는 내세 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삭제하였으며, 찬송가도 여러 장을 삭제하였다. 이것도 일본말로 읽고 설교하도록 강요하고 찬송가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였다. 성직자가 강단에 올라 설 때는 가운이 아닌 일본식 전투복을 입도록 했고 앞서 말한 일본국기 배례, 궁성요배, 출정 장병을 위한 무운 기원,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은 반드시 시행해야 했다.
황국신민서사와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는 학생들
5. 신사참배(神社參拜) 결의를 통한 박해
가. 전국적인 박해
일본의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하면서 취한 것이 교회로 하여금 강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만든 일이다.
신사(神社)는 신도(神道)의 사당 또는 사원을 뜻한다. 신도는 본래 일본 건국 신화의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섬기던 민간 신앙이었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천황도 현인신(現人神)으로 받들면서 일본의 국가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여기 참배하는 것은 일본 천황에 마음으로 복속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기에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민족 말살 정책을 편 일제는 창씨개명, 한글 사용 금지와 더불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물론 이는 급작스레 이뤄지진 않았다.
우선 1915년 ‘신사사원규칙’을 공표해 길을 닦고, 1918년엔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을 착공해 1925년 완공했다. 이때만 해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진 않았으나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을 전후해 참배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1936년 8월 신사 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었다. 황민화 정책의 상징으로 내세우면서 ‘1읍면 1신사’를 목표로 전국에 수백 곳의 신사를 세우는 등 광복이 될 때까지 이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례란 명분이었으나 실제는 이른바 ‘내선일체’, ‘사상통일’을 위한 정신적 식민지화 정책이었다. 김성희.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cp명서해문집. 다음 백과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결의한 때는 제27회 총회가 열렸던 1938年 9月 10日 평양 서문외예배당(西門外禮拜堂)에서였다. 이때의 결의문(決議文)은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宗敎)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本義)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이행(率先勵行)하고 추(追)히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后)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써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朝鮮예수敎長老會 總會 第27回 會錄. P.9.
이라는 내용이었다.
1938년 9월 10일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총대 대의원 일동이 솔선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결의한 제27회 총회가 열렸던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외예배당(西門外禮拜堂)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원래 신의주에서 개최될 예정이 평안남도 경찰국의 농간으로 총회장소를 옮겨 살벌한 경계망 속에서 열렸다. 이미 평안남도 경찰국장은 적극정인 반대론자들을 예비 검색하였고, 의심쩍은 총대들은 왜경이 따라 올라왔었다. 이들은 다시 평남지역의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대표들을 불러 총회 각본을 시달하였다. 즉 평양 노회장 박응률은 제안을, 평서노회장 박임현은 동의를, 안주노회 총대 길인섭은 재청할 것을 강요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총회에서 침묵토록 부탁하고 서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시작되었을 때 교회당 내에는 수 백 명의 사법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상 아래 전면에는 평남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 경관 수 십 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자리 잡고 앉았었다. 그리고 총대들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 끼어 앉았고 교회당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백여 명이 도열하고 있었다.
저들의 압력에 끌려온 27노회(만주 4노회포함) 목사 대표 88명, 장로 대효 88명, 선교사 30명 합계 206명이었는데 10시 3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노회 연합대표의 제안과 동의, 재청에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 하시오” 라고 물었다. 이에 제안자 동의, 재청자의 10인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로 대답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일어선 일경의 행동에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간. 「한국교회와 순교」. p.p. 42~43.
이로 인해 장로교회마저 태양신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일제 총독부 당국은 이상과 같이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고 총회 대표들이 평양신사에 참배한 것을 보고 난 다음 비로소 “소화 10년(1935年)이래 세인(世人)의 주목을 끌어왔던 야소교도(耶蘇敎徒)의 신사참배 문제는 완전한 해결을 고했고 조선 기독교는 소위 일본적(日本的) 종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朝鮮總督府 : 最近의 朝鮮治安 狀況. p.394.
하고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한국 교회는 이 사건 이후 모든 집회와 예배 전 5분 동안 천황의 사진 또는 동방요배, 전몰장병에 대한 묵념, 출전병사의 무훈기원과 함께 황국신민서사를 체창 하였다.
신사참배 모습
나.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북노회(慶北老會)
경북노회는 총회가 이상과 같은 결정하기 전 이미 1938녀 8월 19일 제36회 제2회 임시노회에서 다음과 같이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제36회 제2회 임시노회록>
1938녀 8월 19일 오후 2시 대구성경학원 강당. 회장이 개회를 선언하고 국가의식을 거행하다.
1) 국기게양 2) 국가합창 3) 황거요배 4) 황국신민사사 제창
이어서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최경학 씨로 찬송 6장을 인도 합창한 후 박영조(朴永祚) 씨로 기도하고 이상업(李相業) 씨가 성경 사도행전 20장 17~35절까지 봉독하고 “밀레도에서 열린 신앙생화의 표준”이라는 문제로 설교하다. 서기가 회원을 점고(點考)하매 선교사 2인, 목사 18인, 장로 30인이 출석하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 의식임을 확인하고 국민의 의무로 신사참배하기로” 慶北老會 第36回 會錄. P.21.
결의하다.
회장 김봉도(金奉道) 회록서기 신후식(申厚植)
한편 당시 노회장 김봉도(金奉道) 목사는 총회에 보고를 하면서 경북노회의 특별형편 편에서 “시국인식 문제로 일부 교역자가 고통을 당한 일이오며” 總會 第27回 會錄. p.118.
라고 보고를 했다. 이 말은 노회원 중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다.
『경북노회록』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시작한 1938년 8월 19일 <제36회 제1회 임시노회>부터 노회 시작 전에 국기게양, 국가합창, 황거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의 순서를 먼저 하고 이어 회장이 개회를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화 15(1940)년 12월 10일 제39회 경북노회가 대구 남성정성경학교에서 개회 될 때 목사 31인, 장로 69인, 선교사 6명이 참석하였는데 이때 참석자 대표 중 목사 31명 중 10명, 장로 69인 중 38명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북노회록』. 「경북노회 제39회 회의록」. p.p. 2~3.
이는 일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교회와 교계 인물에 대해 협박과 강요를 한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경북노회장 김봉도(金奉道) 목사는 1938년 9월 20일자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도내 각 교회 앞으로 발송했다.
“신우 중(神佑中) 귀 교회 크게 평안하심을 앙축하나이다. 아뢰올 말씀은 수년간 문제되어 오던 신사참배에 관하여 오인(吾人)은 이것이 단지 국가의식(國家儀式)일 뿐임을 이해하고 금번 평양에서 개최된 우리 장로회 총회 제27회 회의에서 결의하고 성명서를 보내드리오니 교회 앞에 통고하여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고 금후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모 이의가 없도록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소화 13년(1938년) 9월 20일
경북노회장 김봉도(金奉道)
신사참배는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성명서
전국적이고 노회적으로 강요된 신사참배는 각 교회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이루어 졌다. 상주는 경상감영이 위치했던 왕산(王山)에 신사를 마련하고 상주지역 교회 교인들이 주일 예배 후에는 꼭 참배하도록 강요를 했다.
1939년 1월에 일제는 종교단체법(宗敎團體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법은 신도(神道)는 절대의 도로서 국민 모두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은 것이었다. 이 법은 기독교를 명실공히 일본 종교화 또는 신도화하기 위한 법적 조치였다. 신사참배 결의와 그 후의 종교단체법은 한국 기독교를 파괴하며 수 백명의 순교자를 내게 한 무서운 흉기로서 악용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고, 백 여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고, 50여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p.350. 서울. 1978.
교파의 해체 명령은 침례교는 재림사상 때문에 1942년 6월과 10월 사이에 전치규· 김용해 목사를 비롯하여 32인의 목사가 체포되었고, 1944년 5월 10일 교회 해산 명령을 받았다. 성결교는 그 이전인 1943년 5월에 재림사상 강조와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이 있었다 하여 200여명의 교역자가 구금되고 12월 29일에 완전히 해체되었다. 『한국민족기독교 100년사』, 제4편 제3장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컴퓨터 선교회 http://kcm.kr
6. 기독교 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 결성
- 대구 기독교 침략(侵掠)의 첨병(尖兵)들
1938년 5월 31일 오후 8시 대구공회당에서 “기독교 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라는 이름의 기구가 결성되었다. 이 기구가 결성되기 전 경찰은 대구에 살고 있는 일본인 기독교인들과 조선 기독교인들의 친목단체 만든다고 선전하였다. “내선연합 기독교인 간담회(內鮮聯合基督敎人懇親會)”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대부분의 목사 장로들은 큰 저항감을 갖지 않고 대부분 모임에 입회 참석했다. 그러나 공회당(公會堂)에서 발회식(發會式)을 하는 순간 이 기구가 단순한 친목단체(親睦團體)가 아니고 관청이 적극 지원하는 모종의 정치적 복선이 숨겨진 어용단체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기독교 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의 임원은 위원자에 일본기독교 동성정교회(日本基督敎東城町敎會) 담임 목사인 사또 신고로(佐藤新五郞), 부위원장에에 대구일본조합교회(大邱日本組合敎會)의 담임 목사인 다까하시 노부이찌(高橋信一), 서무위원(庶務委員)에 일본 메도디스트대구교회(日本 메도디스트大邱敎會)의 바바마사오(馬場雅夫), 재무위원에 동성정교회(東城町敎會)의 장로인 후지이주지로(藤井忠治郞)였다. 基督敎 大邱聯合會 創立日에 配付한 文書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 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는 이상 세 사람의 일본인 목사와와 한 명의 일본인 장로가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조직된 기구였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 교회 지도자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미 별 실권이 없는 부위원장, 서무위원, 재무위원 등 세 자리에는 들러리로 세웠다. 그런데 일본인 목사들이 소속한 일본기독교(日本基督敎), 일본조합교회(日本組合敎會), 일본메도디스트교회는 다같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교파들로서 한국 기독교를 침략하기 위한 일본 기독교의 첨병(尖兵)들로 알려져 있다. 한석희 지음. 김승태 옮김. 일제의 종교침략사 p.75. 서울. 기독교문사. 1990.
이렇게 침입해 들어온 일본 종교의 사명은 일본식 신앙심에 기초를 둔 사회교화와 종교활동을 통한 조일(朝日) 양 민족의 친선을 제휴(提携)하였다. 즉 정치지배를 측면 지원하는 선무부대(宣撫部隊)로서 조선 민족의 정신적 일본화 및 통치 전략인 일선융화(日鮮融化)를 광범위하게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책략에는 1) 조선 내 각종 교파의 일본적 체질화 2) 내부분열의 조장에 의한 세력 약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종국 선집1. 친일 그 과거와 현재 p.93. 아세아문화사. 1994.
기독교 대구연합회 발회식의 선언문은 “현하(現下) 아시국(我時局)의 중대성에 임하여 국시(國是)를 공고히 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모함은 이것이 가장 긴급한 일임을 인(認)하고 자(玆)에 조선에 있는 기독자 단결 협력하여 이로써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이룩하기를 우(右) 선언(宣言)함. 基督敎 大邱聯合會 發會式 宣言文
기독교 대구연합회가 조직된 후 의도적로 착수한 사업은 조선인 교회에서 조선인 교인들이 일본 사람들의 사대명절(四大名節)인 신년(1월 1일),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 천장절(天長節 4월29일), 명치절(明治節 11월3일) 을 지키게 하는 일이었다. 기독교 대구연합회가 주최가 되어 각 교회를 다니며 일본 명절을 지켰는데 예를 들면 기원절 연합예배 봉축식(紀元節聯合禮拜奉祝式)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해마다 각 명절은 지켰을 것이고 그것은 일본이 폐망한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순서 내용을 제목부터 검토하면 “연합예배 봉축식(聯合禮拜奉祝式)”이란 말 가운데 “봉축식”이란 말은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말이다. 예배 봉축식이라 하면 비중이 당연히 봉축식에 실리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예배의 뜻은 희석(稀釋)된다. 황거요배(皇居遙拜)는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큰 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는 우리 모든 교인은 천황의 신하이고, 그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서약이 주된 내용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바쳐야 할 기독교인들이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변절을 스스로 선언하게 만든 것이다. 기독교 대구연합회가 주최한 애국상회(愛國常會)라는 행사가 매월 한번 씩 있었다. 이 애국상회는 매월 8일 밤 대소봉재일기념 애국상회(大詔奉戴日記念) 애국상회(愛國常會)라는 이름으로 바뀐 때도 있었다. 이 애국상회에 강사로 오는 사람은 대구경찰서장, 대구 복심법원장(大邱覆審法院長) 覆審法院 : 일제 강점기에, 지방 법원의 재판에 대한 공소 및 항고에 대하여 재판을 행하던 곳. 고등 법원보다는 아래이고 지방 법원보다는 위에 해당하는 재판소로 서울, 평양, 대구에 있었다.
, 일본인 목사, 대구부윤, 경찰부 고등과장 등 철저한 조선총독부 관리들이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 대구연합회는 애국상회 또는 대소봉재 기념일이라하여여 행사를 매월 치르면서 대구시내 각 교회를 다니며 주로 사상적 세뇌(洗腦)를 겨냥한 강연을 하게 했다. 교회가 경찰서 운동장이나 강당처럼 이용된 것이다. 이 같은 행위는 기독교 대구연합회의 침략성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7.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조직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이 제정된 이후 총후보국(銃後報國) 강조주간이 실시되면서 민간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소위 자발적 총후 봉사활동을 협의한데서 태동 결성 되기에 이르렀다. 임혜봉, 친일불교론 상 p.241. 민족상 1993. 서울.
이 단체의 총재는 조선 총독이 앉고, 부총재는 정무총감이 앉았다. 이 단체의 조직은 중앙의 행정기관에서부터 시골 마을과 직장에 이르는 하부조직을 구성했다.
위와 같은 전쟁 분위기 속에서 1939年 9月 11日 신의주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8회 총회가 열리고 이 총회에서 이제 당국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聯盟)을 결성하도록 강요했다.
이 모임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정신을 세계에 선양함은 황국 부동(皇國不動)의 국시(國是)이다. 아등(我等)은 이에 더욱 더 단결을 공고(鞏固)히 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능력을 발휘해서 국귀수행(國責遂行)에 협 력하고 또 복음 선전사업을 통하여 장기 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期)함. 總會 第28回 會議錄 p.16-17.
이 연맹의 규약 제2조에는 “본 연맹은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 총동원을 목적으로 각 노회에 지부를 설치하고”, 제3조에는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연회, 전도회, 사경회, 부흥회, 좌담회 등을 개최하며 인쇄물의 작성, 송포 및 영화 상영을 한다. 規約文 參考
이것은 총회나 노회의 모든 활동이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 것과 뜻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 기구의 이사장은 총회장이 앉고 이사 자리에는 전국 노회장이 앉아서 기존의 총회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각 노회는 지맹으로 편입되어 노회장이 지맹장이 되고 노회 총대는 지맹 이사가 되었다. 따라서 기존 노회 또한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노회연맹과 각 교회 애국반 결성에는 총회에서 이미 회순과 규약 및 선언문이 인쇄되어 내려왔다. 각 교회에서는 당회장이 애국반 반장이 되고, 당회원은 애국반 위원이 되고 집사는 평위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노회지맹(老會支盟)과 각 교회 애국반 조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경북노회는 1939年 12月 13日 午前 11時 대구성경학원에서 제38회가 열렸을 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예수敎長老會慶北老會聯盟)이라는 긴 이름의 결성식을 가졌다. 第38回 慶北老會錄 p.19.
아울러 각 교회 앞으로 송달된 애국반 결성식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야소교장로회 OO노회 OO교회 애국반 결성식 순서
시일 :
장소 :
국가봉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송(齊誦)
찬송가, 기도, 성경낭독, 취지 설명, 규약, 선언
묵도(황군장병을 위해/동양평화를 위해)
찬송가, 축도
대구시내 각 교회는 이상과 같은 순서와 내용으로 애국반을 조직하고 그 결과를 경북노회 지맹장과 인근 경찰서나 파출소에 신고해야 했다. 그러므로 대구의 모든 교회는 1940년 1월 18일자로 애국반 조직을 완료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면 이 연맹은 무슨 일을 하였을까?
1941년 12월 10일 제40회 경북노회가 신정교회(新町敎會)에서 열렸을 때 총력연맨 이사장 유재기(劉載奇) 목사는 그 간의 활동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 과거 1년간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노회 총회연맹과 사무연락을 친밀히 했으며
2) 금년 4월 29일 경성에서 개최된 총력연맨 여자부 결성식에 본 노회 연맹에서 파송 참가케 한 일
3) 6월 24일 신정교회에서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했으며
4) 7월 8일부로 관내 수 백개 교회는 매월 1차 주일을 애국주일로 예배할 것과 기타 비상시국 하에서 실생활 10개 항목을 지시하였음.
5) 8월 13일부로 관내 각 교회에서各敎會에서 유기헌납(鍮器獻納)을 강조한바 예상 이상의 호성적(好成績)이었으며
6) 11월 29일에 유재기(劉載奇), 김봉도(金奉道) 양씨를 파유하여 부여(扶餘) 신궁조영(神宮造營)에 봉사케 하였으며
7) 11월 중에는 애국기 헌납 기금조달(愛國機 獻納 基金調達)과 시국인식 철저를 위해 각처에 강사를 파유(派遣)하였으며
8) 12월 8에에 관내 교역자 종교보국(宗敎報國) 간담회를 개최하였습니다. 「慶北老會」 第40回 老會錄
이는 곧 경북노회 산하 모든 교회들이 이러한 일에 매달려 각종 헌금과 노력 봉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8. 예배당 정면에 써 붙인 시국표어(時局標語)
- 황도실천(皇道實踐), 전도보국(傳道報國)-
1940년 3월 8일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國民總力慶北老會聯盟) 이사장 이사장 천성허심(天城虛心: 유재기(劉載奇 목사의 창시개명), 동(同) 여자부장 김성매(金聖妹), 총무 옥천춘도(玉川春道: 김봉도(金奉道 목사의 창시개명)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지시가 각 교회에 하달되었다.
1) 매월 초 1일에 신사참배 할 것.
2) 매월 첫 주일은 애국예배로 지킬 것.
3) 국가적 행사의 여행(勵行).
4) 특별집회에는 반드시 국가의식을 거행할 것.
5) 매일 가정에서 궁성요배 할 것.
6) 정오(正午)에 묵도(黙禱)할 것.
7) 시국표어를 예배당 정면에 붙일 것.
- 皇道實踐, 傳道報國-
8) 방첩(防諜)에 유의할 것.
9) 물자를 절약할 것.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p 164~166.
9. 장로교회 애국기(愛國機) 헌납기금 조달 및 기타 현금 수탈
1941년 11월 경북노회 상임위원장 천성허심(天城虛心,劉載奇)은 “장로교회 애국기 헌납기금 조달에 관한 건 이라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각 교회에 발송했다.
소화 16년(1941년) 11월 OO일
경북노회 상무위원장 天城虛心
OO교회 어중(御中)
<장로교회 애국기 헌납기금(愛國機獻納基金) 조달에 관한 건>
조선야소교장로회가 오방가(吾邦家) 국방사업을 위하야 애국기를 헌납하기로 하고 해기금(該基金)은 신도 매인 배례 금 일원씩으로 한 바 귀 교회 신도 수는 OOO명임으로 배정금 000원임을 자(玆)에 통지하오니 12월 15일 내로 양출(釀出)하야 진체구좌(振替口座) 부산 4549번 대구부 남산정 156번지 이문주 목사에게로 송금하시되 헌금 보고는 좌기양식에 준하야 인찰지(印札紙)로 정밀히 2통을 작성하야 대구부 제일교회 구내 경북노회 사무소 玉川春道(金奉道) 목사의게 보내 주시기를 요망함.
기(記)
(식양을 시(示)함)
애국기금 보고(愛國獻納金 報告)
소속노회 명칭: 경북노회
교회주소 명칭:
보고책임자 주소 씨명(氏名)
헌납자 씨명
주 소
금 액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의 애국기 헌금으로 만든 비행기
교회를 통한 현금 수탈은 애국기 기금조달이라는 형식뿐만 아니었다. 매월 한 주일을 애국주일(愛國主日)로 정하고 이 주일에는 주일헌금과 별도로 애국헌금(愛國獻金)을 바치도록 했다. 이런 방법 외에도 군부대에서 직접 교회를 찾아와 국방헌금(國防獻金)이니 또는 방공기제 구입비(防共機製 購入費)니 하면서 돈을 뜯어갔다. 이 외에도 물건을 강매하여 돈을 빼앗아 가는 방법도 있었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10. 히노마루 부채(丸扇子) 강매(强賣)
경북노회는 각 교회에 공문을 보내어 한 개에 28전(錢) 하는 부채를 사게 하고 그 돈을 경찰 당국이나 매일신문 지국을 통하여 수금해 갔다.
국민총력 경북노회연맹 이사장 은지원(恩地圓)
소화 17(1942)년 7월 일
각 교회 애국반장 전(殿)
근계(謹啓) 금반 좌기(左記) 각항을 실시고져 본 노회 관내 각 교회에 통지하오니 책임자 각위는 분려실시(奮勵實施)하야 주심을 요망함.
기(記)
1. 일 히노마루 부채(丸扇子) 헌납에 관한 건
귀 교회 애국반원(愛國班員) 적성(赤誠)을 통하야 수합되난 금액 다소를 불구하고 귀지(貴地) 경찰당국이나 혹은 매일신문 지국에 의뢰헌납 할 사.(선자(扇子) 代價는 매본 금 28전(錢) 위의 책.
14. 교회를 통한 놋 제품(鍮器) 헌납(獻納)
-유기헌납(鍮器獻納)은 애국심(愛國心)의 척도(尺度)-
조선인 가정에서 품질 좋은 놋 제품을 장만 하고 사는 것은 생활이 유족함을 뜻함과 동시 에 그 집안의 내력(來歷)을 말해주는 뜻도 담 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의 놋 제품에 대한 애 정은 지금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큰 것이었다. 이런 습관을 잘 알고 있는 일제 당 국은 유기헌납(鍮器獻納)을 요구하는 공문에서 조선 사람들의 애유기지심(愛鍮器之心)을 애국 심으로 바꾸어 바치도록 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마을에서도 바치고 교회에서도 바쳐야 했다. 놋 제품을 바치지 않으면 당장 애국심이 없는 교회로 지목될 수 있었다. 헌납하는 놋 제품의 양이 애국심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었다. 대구시내 남산교회(南山敎會)의 놋그릇에 관한 주일 광고를 차례로 살펴보자.
1941년 8월 10일(主日)
국가를 위하여 각 교회가 유리를 헌납하기로 되었는데 우리 교회는 저녁에 오실 때나 내일이나 한 개 이상 가져오시기 바랍니다.(단순 광고)
1941년 8월 17일(主日)
전 주일 유기헌납하기로 광고한 것 빠지지 말고 다 하시기 바랍니다. 호소 광고)
1941년 8월 24일(主日)
오늘은 유기헌납하는 날이오니 아무쪼록 한 가정이 1점 이상으로 가져 오셔야 합니다. 만일 아니 가지고 오시면 권찰(勸察)이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하겠습니다. 꼭 실시하십시요.(위협 광고)
이상 세 주일 동안의 광고 내용을 읽어보면 놋그릇 헌납이 얼마나 목회자들에게도 큰 압력이 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책
15. 육군 기념일(陸軍記念日)과 1전(錢) 獻金
-수탈(收奪)의 가혹성(苛酷性)-
일제는 러일전쟁(露日戰爭) 당시 일본 육군이 봉천전투(奉川戰鬪)에서 러시아 육군과 싸워 이긴 3월 10일을 육군 기념일(陸軍 記念日)로 정했다. 이 날을 기념한다는 구실로 전국 모든 교인들에게 1전(錢)짜리 구리 동전을 헌금할 것을 강요했다. 1전짜리 한 푼까지도 철저히 빼앗아 간 식민지 수탈의 가혹성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때 경북노회 소속 각 교회 앞으로 발송된 공문을 여기서 옮겨보자.
“오는 3월 10일은 동양평화의 기초를 건설한 대일(大日)입니다. 이 날에 봉천(奉川) 에서 일본 육군이 세계에서 자랑하고 있던 로시아 육군을 대격파하고 대승리를 득하야 세계에서 소위 강국이라는 나라들을 냉담(冷膽 가슴이 서늘하게)케 하였고 동양에 광명과 서광(曙光)을 발휘(發揮)한 날이며 동양천지에 행복을 도입한 날인데 즉, 우리 육군의 기념일입니다.”
이 날에 우리 연맹 내 각 교회 교인들은 이 기념일을 기회하야 황군의 분투를 감사하며 고도(高度) 국방국가(國防國家)를 건설함에 지성을 진(盡)하난 의미로 1전 헌금(가급적 赤銅貨) 실행하겠으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수입(收入 닦아서)하야 본 노회 연맹 사무실로 솟속 납부하야 주심을 앙망하나이다.
소화 16(1941)년 3월 5일
대구남성정 경북노회 총무 김봉도(金奉道)
OO교회 어중(御中) 앞의 책
16. 교회의 종(鐘)과 종각(鐘閣)의 헌납(獻納)
시계가 일반화 되지 않고 있던 시절에 교회의 종소리는 예배시간을 알리는 시계구실을 했다. 때문에 교회가 크던 작던,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모든 교회는 종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조선 땅에 있는 모든 철제품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전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과 그 종을 지탱하고 있었던 종각까지 그 외 교회에 붙어있는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1942년 5월 7일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 이사장 송창근(宋昌根)은 철물헌납(鐵物獻納)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각 교회에 발송했다.
소화 17(1942)년 5월 7일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 이사장 송창근(宋昌根)
OOO전
철물 회수는 현하(現下) 긴급한 정세이라 오노회(吾老會)에서는 관내 수백 여개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과 철제 종각 기타 철물을 일제히 헌납하기로 결의하였기로자에 통지하오니 귀지(貴地) 관계관청(警察署, 警察官 駐在所)에 의뢰하여 속속 헌납하고 좌기 양식에 의거 보고해 주심을 요망함함.
-------------------절 취 선----------------------------
보 고 서
소화 17(1942)년 월 일
부 읍 정
군 면 동
교회 대표자 OOO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 귀중
기(記)
1. 총개수 : 중량 : 종시가 :
1. 기타 철물개수 : 철물중량 :
1. 헌납일시 : 년 월 일
1. 헌납의뢰소 :
이상과 같이 교회의 종을 노회와 경찰이 합작하여 빼앗아 갔다.會와 警察이 合作하여 빼앗아 갔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17. 교회 폐지(敎會廢止)와 병합(倂合)의 진상(眞相)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교회의 교인수는 날로 줄어들어 드디어 일부 지방에서는 교회가 텅 비는 사태가 발생했다. 1942년 5월 7일 경북노회 상무위원장 송창근(宋昌根) 목사는 교회 폐지 및 병합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공문을 각 교회 및 교역자 앞으로 발송했다.
"금번 본 노회에서는 신체제(新體制)에 즉응하야 관내 이백 수십 여 교회(포교소) 중에서 교회병합(敎會倂合)을 단행하난바 귀교회를 폐지하고 군 면 동 교회에 병합하기로 되엿음으로 좌기와 여히 통지하오니 지체됨이 무(無)히 실시하기를 요망 함."
소화17(1942)년 5월 7일
경북노회 상무위원장 송창근(宋昌根)
교회 및 교역자 전(殿)
기(記)
1. 소화 17년(1942) 5월 말 주일(日曜日)까지만 예배회로 모일 것.(동시에 본 노회에서는 포교소(布敎所) 폐지계(廢止屆)를 관계 관청에 제출함)
2. 교회비품 일절은 가급적 지정한 병합교회(倂合敎會)에 양도할 것.
3. 교회 소유 부당산, 동산의 일절 처분은 양 교회 대표자와 노회 대표자가 협의 결정하고 방매할 시에는 필히 본 노회 재단법인 대표자 석촌문주(岩村文主 이문주李文主 牧師), 옥천춘도(玉川春道 김봉도金奉道 牧師) 양씨의 승인에 의하야 행할 것.
4. 금년도에 부담(負擔)한 교역자(牧師, 傳道師, 男女傳道人) 생활비 잔액은 양 교회가 협의하야 지불방법을 정할 것.
5. 기타 문의할 사항은 대구부 남성정 경북노회 사무실로 문의할 것.
이해(1942年) 12월 소집된 제41회 경북노회에서 각 지방 시찰장(視察長)이 보고한 교회 병합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구시찰: 감천교회(甘三敎會)는 낙현교회(梨峴敎會)로 병합함.
2) 경산시찰: 가야교회(佳野敎會)는 의송교회(儀松敎會)로.
3) 칠곡시찰: 낙산교회(樂山敎會)는 금호교회(錦湖敎會)로.
죽전교회(竹田敎會)는 왜관교회(倭館敎會)로.
오평(吾坪) 및 봉산교회(鳳山敎會)는 약수교회(若木敎會)로.
4) 상주시찰: 공성면 오광교회(五廣敎會)는 옥산교회(玉山敎會)로.
상주읍 신봉교회(新鳳敎會)는 서정교회(西町敎會)로.
화령면 금산교회(錦山敎會)는 사산교회(沙山敎會)로.
5) 성주시찰: 인촌교회(仁村敎會)는 동포교회(東浦敎會)로.
중리교회(中里敎會)는 후평교회(厚平敎會)로.
해평교회(海平敎會)는 성주읍교회(星州邑敎會)로. 법전교회(法田敎會)는 창천교회(倉泉敎會)로.
6) 고령시찰: 평지교회(平地敎會)는 안림교회(安林敎會)로.
월산교회(月山敎會)는 화암교회(花岩敎會)로.
팔산교회(八山敎會)는 유동교회(柳洞敎會)로.
사도교회(沙島敎會)는 삼대교회(三大敎會)로.
모두 17개 교회가 병합되었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18. 노회(老會) 해산(解散을 결의한 마지막 경북노회(慶北老會)
-해산권을 위임받은 8명의 중앙상무위원-
1943년 4월 30일 오전 10시 대구제일교회에서 경북노회 제41회 제1회 임시노회가 였렸다. 주요안건은 "노회 해산 결의의 건"이었다.
노회장 동원후식(東原厚植 申厚植 목사의 창씨개명) 목사의 사회로 열린 이날 국민의례(국가, 동방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찬송, 기도, 성경, 설교, 찬미가로 간단히 예배를 마쳤다.
곧이어 출석 회원수는 목사 28명, 장로 35명 모두 63명이었다. 이날 임시노회에서 결의한 중요사항은
1) 동산병원(東山病院) 및 애락원(愛樂院) 이사회가 재단법인 보험협회(財團法人保險協會)에 경영권 일체를 무조건 양도한다는 청원은 허락함.
2) 노회 해소(解消=解散) 및 잔무처리는 중앙상무위원에게 일임한다.
이상 두 가지였다.
그런데 노회의 해소(解散)와 잔무처리를 위임받은 중앙상무위원이란 노회의 정·부의장, 서기, 회ㅖ, 시찰장을 말하며 이들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여 노회가 폐회 중에 노회의 모든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 그런데 경북노회는 제40회(1941년 12월 10일) 노회 기간 중에 경북노회 상무위원장 유재기(劉載奇) 목사가 상무위원 강화안을 제출하여 가결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상무위원회는 노회 정·부회장, 서기, 회계, 각 시찰장 외 별선(別選) 4명으로 조직하고 그 중 각 시찰장을 제외한 8명으로 중앙상무위원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강화안의 저의(底意)는 중앙상무위원회를 경찰에 협조적인 친일인사 일색으로 구성하자는데 있었다고 믿어진다. 노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 등은 이미 경찰에 협조적인 사람들로 뽑힐 것이니 별 문제가 없고 만일 그 성분을 확신할 수 없는 시찰장들 대신에 성분이 확실한 친일적인 인사 4명을 별도로 선임하면 8名 전원이 친일인사 일색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당연직 상무위원 4명, 별선 상무위원 4명名, 합계 8명이 노회의 해산권을 위임받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16년 12월 27일 제일교회에서 창립된 경북노회는 같은 장소에서 1943년 4월 30일자로 최후를 마감했다. 형식은 자진해산이나 실제는 경찰의 공작과 그 공작에 협조한 친일 교회 지도자들의 합작품이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이외에도 일제는 구약 성경은 히브리민족의 역사라는 이유로 읽지 못하게 했고 장로교 기본교리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적대국의 산물이며 신약성경도 4복음서만 읽도록 했다. 또한 찬송가도 고처 부르게 하며 예배의식까지 손을 대어 예배 때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게하고 매월 첫 주일은 애국주일로 정해 국방헌금을 바치도록 했다.
1940년 제29회 총회 보고에 따르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전승축하회 654회, 무운장구 기도회 8,953회, 강연수 1,355회, 위문수 181회, 국방헌금 1,580,324원, 위문대 1,580개를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구제일교회 90년사』, p. 33. 『대구시사』, p. 811
이러한 탄압이 극에 달한 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미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 1945년 8월 18일 목사, 장로, 기독교 지도자를 대량으로 학살하기로 하고 그 명단을 작성까지 했으나 그들이 집행일로 정한 날 사흘 전에 무조건 항복함으로 대량 학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전쟁이 끝나기 전 당시 종로경찰서 형사주임이던 崔雲露가 밝힌 것이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 451, 『대구시사』. p. 812
19. 일제강점기 대구 지방교회의 일지(日誌)와 주보(週報)
-교회의 수난(受難)과 변질(變質)의 실상(實狀)-
조선총독부의 종교말살정책이 일선 교회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또는 교회의 친일언론(親日言論)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려고 할 때, 어느 한 교회의 일지(日誌)나 주보(週報)를 읽어보는 것 이상으로 정확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내용의 기본 자료는 제일교회(第一敎會)와 서문교회(西門敎會), 남사교회(南山敎會) 일지와 주보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1938년 4월 24일
이 달 26일부터 1주일간(5월 2일까지) 국민정신총동원 총후보국 강조주간(國民精神總動員銃後報國强調週間)인데 총회장과 노회으로써 공문이 오기를 각 교회에서 성의껏 이 집회에 진력(盡力)하라고 합니다. 대구 도당회에서 결의되기는 그 주일 동안에 오전 5시 30분에 종을 치거든 각 가정에서 기도회를 열고 국가와 동양평화를 위하야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5월 1일 주일은 국민정신 보국주일(國民精神報國主日)로 정하고 그 날 낮 예배는는 전국이 같은 순서로 진행하도록 하였나이다. 그 때에 더욱 많이 참석하시기 바라나이다.
▶1938年 5月 1日 예배 순서는 생략함 국민의례라 해서 황거요배, 다음과 같은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이 있었음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그 2>
1.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한다.
2.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공고히 한다.
3.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신앙한다.
<참고> 이 주일부터 황거요배와 황국신민 재송 순서가 예배 순서에 들어간다.
<주보에 실린 광고>
“지난 26일부터 내일까지 한 주일동안 국민정신 총동원 날임으로 장로회 총회로써 지난 29일 오전 10시에 각 교회가 천장절(天長節) 봉축예배(奉祝禮拜)를 보기로 한 바 대구시내 연합하야 그 시간에 성대하게 봉축식 예배를 희도학교(喜道學校) 뜰에서 보았으며 오늘 예배는 각 교회에서 보기로 하였나이다.
▶1938년 5월 22일
대구시내 장로교 각 교회 연합으로 작일(昨日)에 황군전승(皇軍戰勝)을 축하하는 전보를 조선총독 미나미(南次) 대장에게와 북지파유(北地派遣) 최고 지휘관 데라우찌(寺內)에게 발송하였으며 근일(近日)에 시내 각 교회 연합으로 간담회를 조직케 되였다더라.
▶1938년 7월 17일
시대에 적합하지 아니한 창가(唱歌)나 서적(書籍)이 있거든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상통일에 무익하고 또는 정통교회 외 다른 서적을 보아서 신앙에 방해될 것이 없으며 관공서에 의아(依阿)를 끼칠 필요가 없습니다.
1938년 8월 4일에는 대구기독교연합회 주최 시국에 대한 새벽 기도회(佐藤 牧師)가 열립니다.
▶1938년 9월 1일
시내 각 교회 당회원이 오전 5시 신사참배(神社參拜)
▶1938년 9월 18일
신사참배 광고 및 설명, 음향관제 타종 금지
▶1938년 9월 25일
애국적 국가의식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하기 위하야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함이 가함으로 신사에 황조(皇祖), 황현(皇賢)에 숭경지례(崇敬之禮)를 표함이 기독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금년 총회장으로써 성명서가 각 교회에 전달되었나이다.
▶1939년 2월 5일
대구 연합회 주최로 기원절(紀元節) 연합 봉축식을 여좌(如左)히 거행키로 통지 왔사오니 많이 왕참(往參)하시기 바라나이다.
▶1939년 4월 23일
금년 25일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에 대하여 일반국민이 묵도하는 시일인 바 부윤으로써 본 교회에 공문이 오기로 그날 오전 10시 15분에는 천황폐하께서 어친배(御親拜)하시는 시간이므로 싸이렌과 각 교회 종을 1분간 울리게 됩니다. 그 시간 각기 있는 장소에서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한 장병과 국가 공신을 위하야 1분간 묵도로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1939년 11월 26일
오늘부터 앞으로 10일간 방공연습(防空演習)을 시행케 되어 낮에는 음향관제에 의하여 종을 치지 못하게 되고 저녁에는 전등을 관제하게 됨으로 모든 집회에 종을 치지 못하며 밤 집회는 30분 일찍 모이게 되오니 특별히 유의하시와 많이 내참(來參)하시옵기를 바랍니다.
▶1940년 1월 8일
본 교회에서 지난 수요일 저녁 8시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경북노회 대구 신정교회 애국반 결성식을 총회에서 제정한 순서로 약 3백 여 명이 회집하여 성대히 거행하고 역원(役員)을 선정한 바 규칙에 따라 반장은 당회장, 위원은 당회원, 평위원은 남자 집사 24인으로 선정하고 지방경찰 파출소에 계출하였나이다. 앞으로 우리는 전도보국(傳道報國)에 더 일층 전력키로 선언문을 낭독하였나이다.
▶1940년 6월 9일
부청공문(府廳公文)에 6월 10일은 오전 6시, 12시, 오후 6시, 3회로 본 교회 종을 1분간 치게 됩니다. 싸이렌과 각 교회, 각 사원도 이와 같이 치게 됩니다. 또 6월 10은 천황폐하께서 이세신궁(伊勢神宮) 어친배일(御親拜日)인데 그 친배(親拜) 시간에 일반 국민은 멀리 천황폐하가 친배(親拜)하는 곳으로 향하여 최경례(最敬禮) 요배(遙拜)를 하게 됩니다. 그 시간은 싸이렌으로 울리게 되오니 각기 있는 곳에서 동으로 향하야 요배(遙拜)키 바랍니다.
▶1940년 8월 11일
씨(氏) 창설(創設)은 금일로써 기일이 된 바 본 교회 당회원의 창씨는 여좌(如左)함.
정OO 목사는 팔천(八川), 박OO 목사는 박원(朴元)
권OO 장로는 안전(安田), 李OO 장로는 국본(菊本)
이OO 장로는 가곡(佳谷), 白OO 장로는 대원(大原)
두 김OO 장로는 김본(金本), 중산(中山)
▶1940년 10월 6일
10월 7일부터 5일간 전국 일제히 총후 봉공강화 운동실시일(銃後奉公强化運動實施日)인데 10월 7일 정오부터 1분간 전몰군인 영령의 추도 상이군인(傷痍軍人)의 평료(平癒)와 출정 군인의 무운장구 기원을 위하여 묵도하게 되어 교회 종을 치라는 대구부윤의 지시로 종을 치게 되오니 국민 된 입장으로 실행하시옵기 바라나이다.
▶1940년 10월 20일
- 장로교회 총회장 곽진근(郭塡根) 목사의 특고서(特告書)
지난번 평양서 개최된 제29회 총회가 황기(皇紀) 2600 기념 봉축행사로 총후국민(銃後國民)의 의무와 종교보국(宗敎報國)의 정신을 철저히 인식 발휘하기 위하여 11월 20일을 애국주일(愛國主日)로 지키는 동시에 일반교우는 적성(赤誠)을 다하야 국방헌금(國防獻金)을 드리기로 결정이 온바 위에 기록한 예배 순서를 제정하오니 각 교회가 빠짐없이 애국주일을 정성시리 지키며 헌금을 총회 사무소로 보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소화 15년(1940) 10월 9일
총회장 백
▶1940년 11월 3일
금년은 건국 2600년이 됨으로 11월 10일 오전 11시에 칙어(勅語)하시는 시간임으로 대구기독교연합회 주최로 각 교회에서 그 시간에 칙어 봉배식(勅語奉拜式)을 하기로 하였나이다. 남 장년부에서는 공부 마치고 나갔다가 10시 50ㄹ분에 예배당에 모여 주시고, 부인 장년부는 공부를 조금 일찍 마치고 윗 층에 모여 주시고 유년주일학교는 10분 일찍 와서 11시 정각에 예배당 앞에 모여서 식에 참석하심 바랍니다.
▶1940년 11월 10일
오늘은 천황기원(皇國紀元) 2600년 축하일 이므로 본 교회 애국반 주최로 축하식을 OOO 장로의 사회로 이하 순서에 의하여 거행한 바 참석원이 7~8백 명이 다달하였나이다.
1. 궁성요배. 1. 국가봉창. 1. 조서봉독. 1. 황국신민서사 제창
1. 천황폐하 만세 봉창. 1. 폐회
<참고> 교회 안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른 것이 이때가 처음인 것 같다.
▶1941년 6월 29일
국민총력 경북노회 연맹 여자부 결성식(國民總力慶北老會聯盟女子部結成式)은 지난 화요일 본 교회에서 회집케 된 바 회집수효가 2천 여 명으로 성대하게 진행되었으며 당일 헌금이 50여원이 되었나이다. 결성식이 있은 후에는 총후 종교계에서 더욱이 적성(赤誠)을 다하야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1941년 8월 10일
방공훈련 중에 저녁 집회 시간은 일기가 심히 더운 때이므로 폐문(閉門)키 극난(極難)하므로 저녁 예배를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하야 7시 30분에 폐하고 돌아가서 석반(夕飯)하고 각기 방공연습에 협조키로 되었사오니 일찍 많이 나오시기를 바라나이다.
▶1941년 8월 17일
경북노회 상무위원회 결의로 각 교회 가정에서 진유기(鎭鍮器 놋그릇) 1점 이상을 오는 24일 주일에 집합헌납(集合獻納 國防用)키로 하였사오니 각기 주소 씨명 기입하야 그때 지참하시기 바라나이다.
▶1941년 8월 24일
오날 주일은 유기헌납(鍮器獻納) 애국주일인 바 각 가정에서는 1점 이상 가져오신 줄 아옵니다. 당회실에 벌써 많이 모인 그릇이 있습니다. 【참고】 예배도중에 설교가 끝난 다음 유기헌납의 순서가 들어있었다.
남사교회에서는 광고에 “오늘은 유기헌납하는 날이오니 아무쪼록 한 가정에서 1점 이상으로 가져오셔야 합니다. 만일 아니가지고 오시면 권찰(勸察)이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하겠습니다. 꼭 실시하십시요.”
▶1941년 12월 7일
이 주일에는 애국기 연보(愛國機捐補)하겠으며 우리 교회는 100원입니다. 각 가정에서 힘써 연보하여야 되겠습니다. 만일 정액에 달하지 못하면 각 집을 방문하고라도 그 연보만은 달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1942년 2월 8일
내일부터 애국주일 예배는 매월 제2차 주일로 변경함.
▶1942년 3월 8일
여전도인과 여평신도 종교보국 간담회(女傳道人·女平信徒宗敎保國懇談會)를 3월 19일~20일 양일간 제일교회에서 모이게 됩니다.
▶1942년 5월 17일
조선징병제도실시(朝鮮徵兵制度實施) 감사 신도대회 경북노회 연맹 주최로 수요일(20日) 오전 9시 신정교회(新町敎會)에서 모이겠사오니 많이 참석하시기 바라나이다. 당일 병사부장(兵事部長), 경찰부장(警察部長), 부윤(府尹)께서 내참(來參) 축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1942년 7월 19일
근간(近間)은 방첩 강화주간(防諜强化週間)입니다. 언행일절을 삼가 하고 불평과 불만이 잇더라도 극복을 할지언정 원망치는 마옵세다. 각각 자기에게 당해오는 의무와 직책은 사양말고 담당하야 총후 국민의 만전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국가에 대하여는 훌륭한 신민(臣民)이 되고, 교회로써는 진실된 교인이 되어 하나님께와 사람에게 고임을 받는 생활이 되시기 바라나이다.
▶1942년 8월 2일
본 교회에서는 남양(南洋) 각 지방 위문품인 히노마루 부채를 100개 헌납하였나이다.
▶1942년 9월 20일
국가에 헌납하는 종(鐘)과 공출(供出)하는 철물(鐵物)은 철회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1942년 12월 25일
12월 25일은 대정 천황제((大正天皇祭)임으로 봉탁(奉悼)의 뜻을 올리고 저녁은 총제식 간담회(總諸職懇談會)를 모이고 27일 주일에 성탄 축하예배(聖誕祝賀禮拜)를 모이려고 합니다. 본 교회 면려회(勉勵會), 청년회 주최로 금월 12일 토요일 저녁 7시에 대동아전쟁 1주년 대승 축하회(大勝祝賀會)를 본 교회에서 모이려고 하오니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소화 21년(1946年)부터 반도(半島)에도 의무교육(義務敎育)이 실시하게 되었으니 기쁜 소식입니다. 감사한 생각으로 국가에 충의를 다하고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응력(應力)하십세다.
▶1943년 2월 21일
당국의 지도에 의하여 주일학교(主日學校)란 이름을 없이하고 아무교회 장년수련회(長年修練會), 유년수련회(幼年修練會)라고 하게 되나이다. 부흥회는 연성회(練成會)로 하게 되나이다.
▶1943년 4월 18일
조선기독교(朝鮮基督敎) 각파 합동(合同)은 그간 모든 준비가 되어 5월 5은 합동총회(合同總會)가 서울에서 열리게 되고, 5월 4일은 장로회 총회가 열리고, 5월 30에 경북노회 임시노회가 최후로 열리게 되나이다.
▶1943년 7월 18일
오래 동안 본 교회에서 청년들 영력향상(靈力向上) 운동에 큰 지도기관인 면려회( 勉勵會)는 교단 규칙과 상회(上會) 연합기관에 관계지장으로 지난 주일 저녁에 면려회 임시총회를 열고 해산키로 결정하고 앞으로난 주일 수련회, 유년부 사업에 더욱 전력키로 하였나이다.
▶1943년 7월 25일
오늘은 오전 9시에 총력경북연맹대구부연맹(總力慶北聯盟大邱府聯盟) 주최로 “결전 필승 단결식”을 공회당에서 열게 되어 본 교회 애국반 대표로 김정오(金正悟) 장로가 왕참(往參)하였나이다.
▶1943년 8월 1일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아래에 금일(8월 1일)이야말로 반도 동포(半島同胞)가 황공하옵게도 대원수 폐하(大元帥陛下)의 수족으로서 부르심을 받자오는 의의(意義) 깊은 광영의 날입니다.
1주일간 각 애국반 통하여 감사와 성의를 다합세다.
수요일 저녁에 경북교구회 통문으로 감사기원 기도회로 모이며 헌금하겠습니다.
▶1943년 8월 29일: 예배 시간 축소
장로교단 본부의 지령으로 경북교구장의 통지에 의하여 금년 9월부터 기독교회에서 결전체제 확립(決戰體制確立)키 위하여 집회 시간은 주일 오전에만 모이고 저녁과 수요일 집회는 당분간 정지하기로 하고(결전시기(決戰時期 마칠 때까지) 열심으로 본 교회에서는 이 결의를 완수하기 위하야 매 토요일에 모이는 사범공부(師範工夫)는 당분간 쉬고 주일에 모이는 일요연성회(日曜練成會 日曜學校) 유년부는 오전 9시부터 모이고. 남녀 장년부는 오전 9시 30분에 윗층에서 연합하야 9시 30분부터 합동 공부로써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일주일간 공석(公席)으로 한 번 모이게 되는 이 귀한 집회시간을 보배인 줄 알고 성의껏 모여서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마치면 들에서나 도중에서 사람이나 일체 지체치 마시고 속히 각 처소로 돌아가기 바라나이다.
▶1943년 9월 19일
- 성전완수(聖戰完遂), 필승기원(必勝祈願), 종교보국(宗敎報國)
대동아전쟁은 반다시 이겨야만 되겠나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기도록 굳센 신념과 견인지구(堅引持久)의 힘으로 착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우리들이 신봉하는 하나님께 간절한 정성으로 기원하여야 되겠나이다.
- 대일본 부인회(大日本婦人會) 총궐기(總蹶起) 실천선서(實踐宣誓) 요령
1) 훌륭한 병사를 길러서 하늘과 바다에 뛰어난 전사(戰士)를 바친다.
2) 한 사람도 남김없이 결전 생산(決戰生産)의 완수에 참가한다.
3) 일본 옷은 긴 소매를 자르고 조선 옷은 ‘치마’를 간편한 모양으로 고쳐 결전생 활(決戰生活)의 실천에 궐기(蹶起)한다.
위를 宣言한다.
▶1943년 11월 14일
경북교구장의 공문으로 금월 17일 오후 7시 제일교회당에서 특별 지원병 격려 대강연회가 있습니다.
▶1944년 5월 21일
기독교 경북보국회(基督敎慶北報國會) 주최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동촌지방(東村地方) 출장.
▶1944년 6월 4일
교역자 여러분의 근로보국장에는 교회 부인회, 유지들이 약간의 위문품을 가지고 오심을 감사합니다. 주일날 오전에 모일 수 있는 이 기회는 전시 하에 있는 국민으로서 종교보국하는 종교인으로서 무한한 행복이요 특전입니다.
주일 저녁과 수요일 저녁에 모이지 못하는 그 모임을 3일 오전예배, 공부시간에 특히 많이 나오시고 더욱이 새벽 기도는 더 한층 소중한 기회이오니 각기 아침잠을 떼어서 그 전 주일 저녁 집회만치 모여 봅세다.
▶1944년 6월 29일
종교단체 경북보국회(宗敎團體慶北報國會)가 작일(昨日) 창립된 바 좌등(佐藤) 목사가 부위원장이 되고 본 교회 박목사께서 위원이 되었십니다.
▶1944년 7월 2일
오늘 저녁은 기독교 경북보국회(基督敎慶北報國會) 주최로 출정군인(出征軍人) 유가족 위문 음악 간담회를 공회당에서 모입니다. 입장료는 50전입니다. 강사는 황재경 목사입니다.
▶1944년 7월 9일
총후 국민(銃後國民)으로서 비상 사변에 대처하기 위하야 예배시간에 참석할 때에는 가급적 국민복(國民服)에 경쾌한 단장을 하고 부인들도 방공복(防空服)을 입으시고 참석하시며 귀한 시간 늦지 않게 참석하여 소중하게 예배하옵세다.
▶1944년 7월 23일
오늘 1시 종교보국회 주최 사이판 영령추도예배(사이판英靈追悼禮拜)
추도사(追悼辭): 팔천(八川) 목사결심사(牧師決心辭): 박원(朴元)
▶1944년 7워 23일
금월 20일 본 교회 주최 적국항복 기원집회(敵國降伏 祈願集會)는 천 여 명이 성황 중에 진행 하였나이다. 본 교회에서도 150여원의 국방헌금(國防獻金)을 하였나이다.
▶1944년 12월 24일
경북교구회(慶北敎區會) 임원 개선
교구장: 이문주(李文主) 목사(남산교회)
부교구장: 송창근(宋昌根) 목사(김천 황금정교회)
재무: 박래성(朴來承) 목사(대구 신정교회)
【참고】 1945년도 대구 신정교회 세입세출 중 국방헌금은 전년도 200원에 비해 4배가 되는 800원으로 증액되었다.
▶1945년 4월 22일
24일 저녁 전의앙양(戰意昻揚) 신도대회가 신정교회(新町敎會)에서 모이오니 많이 내참(來參)하옵세다. 주일 교회 집회 시 아모쪼록 국민복에 각반화(脚絆靴) 몸빼이(女子들이 입는 통바지) 의복으로 출입하옵세다.
▶1945년 4월 29일
-천장절(天長節) 봉축예배(奉祝禮拜) 순서
1. 국민의례: ① 궁성요배 ② 필승 묵도 ③ 국가봉창 ④ 황국신민의 서사
⑤ 우미 유까바 봉창 『다음 사전』 '우미 유까바(海 ゆかば)'라는 노래는.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사지에 출전하여 깨끗이 죽으라는 각오를 절규함으로 서로 결속된 전의를 끝까지 지켜서 죽으라는 비장(悲壯)한 노래이다.
2. 찬송 3. 기도 4. 성서봉독 : 벧전 2:13-17 5. 헌금기도 6. 헌금주악
7. 감사묵도 8. 광고 9. 찬양 10. 강도(講道): 팔천(八川) 목사(천장절 봉축)
11. 애국헌금 12. 기도 13. 찬송 14. 축도 15. 폐회
▶1945년 8월 26일
조선독립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선물이오니 우리들은 믿음의 반석위에서 감사히 받아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영광을 돌립세다.
【참고】이 날 주일 예배시간 봉독한 성경은 시편(詩篇) 136편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날 예배 시에 부른 찬송가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Ⅳ. 상주지역 교회의 박해
한 편 상주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의 기록을 살펴보면 상주의 독립만세는 총 회집 수가 4회에 참가자는 2,300여명에 이르고 이 일로 인해 사망자 수 17명, 실종자수 22명, 부상자 수 396명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독립동지회 간 1983. p195
구체적으로 각 지역에서 일어난 상주지역의 독립만세 운동은 다음과 같다.
1. 상주의 3·1 운동
가. 상주 시내의 만세운동
상주의 만세운동은 애국학생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姜龍錫), 성필환(成必煥), 서울중동학교 한암회(韓岩回), 보통학교 학생 조월연(趙月衍), 경성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石盛基) 등이 3월 중순부터 상주의거를 위해 준비해 왔다. 이들은 3월 23일(음력) 상주 장날을 거사로 정하였다. 3월 23일 오후 5시경 한암회를 비롯한 애국청년들이 시장 중앙에서 줌겨 갖고 있던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니 많은 장꾼들이 목이 터져라 고 만세를 불렀다. 이 소식은 내서면까지 퍼져 상주군 내서면 성해식(成海植)은 부친상을 당한 지 두 달이 안 된 상복을 입은 채 달려 나와 만세를 불러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상주의 독립만세 시위로 재판에 해부된 사람은 강용석 1년 2개월, 한암회 1년 6개월, 성해식 1년, 석성기 10월, 성필환, 조월연 6월, 그 밖에 장재관, 김성덕, 박인옥, 송인수가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나. 화북면 장암리의 함성
화북면 장암리 이장 이성범(李聖範)과 동지 김재갑(金在甲), 홍종흠(洪鐘欽), 이용회(李容晦) 등과 함께 4월 8일을 정하여 권고문을 보내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했다. 이들은 4월 8일 미리 약속한 문장산에 100여명이 모이자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주동자들은 모두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편 화북면 소재지에서 북서쪽 15리에 위치한 운흥리(雲興里)에서도 운흥리 유지 김성희(金聲熙), 정양수(鄭良洙이)도 이 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이 늦게야 알려져 1985년 10월 상주군이 중심이 되어 화북면 장암리에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
다. 이안면 소암리의 함성
상주군 이안면 소암리에서도 채순만(蔡淳滿), 채세현(蔡世鉉)을 비롯한 마을 청년 20여명과 함께 3월 29일을 거사일로 정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곳에서도 100여명의 동민들이 소암리 제방에 모여 만세를 불렀는데 채순만(蔡淳滿), 채세현(蔡世鉉) 등 마을 청년들이 체포되고 갖은 고문을 다 받았다. 상주문화 제2호, 상주의 3․1운동, 상주문화원, 1991, p199~203
2. 상주지역 교회의 박해 상황
가. 3·1 독립만세로 인한 박해
독립만세 운동이 의성, 선산, 김천, 영덕지역에서 교회와 기독교 지도를 중심으로 극렬하게 일어난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둔 사항이 있지만 상주지역 교회의 3·1 독립만세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각 교회별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주재소에 불려 갔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1919년 이전에 이곳에 세워진 교회가 몇 몇 있음을 보면 상주에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교회와 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 운동에 주도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기록된 자료가 나타나지 않아 정리하지 못함을 안타까울 뿐이다. 겨우 서정교회 정우경 집사는 독립운동 광고지를 살포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만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상주지 p 1355. 상주시민교회 연혁,2008
는 기록이 전부이다.
나. 신사참배로 인한 박해
신사참배 강요는 전국적 현상이면서 이곳 상주도 경상감영이 자리하던 상주성 내 왕산(王山)에 신사를 만들고 이 지역 교회와 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매 주일은 물론 기타 주요 국가 행사시에는 목회자들이 전 교인을 인솔하여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필자는 조부(김상걸 金尙傑, 신봉교회 설립자)로부터 이때의 상황을 자주 들었다.
신사참배 시에는 일본인 순경이 큰 칼을 차고 감독을 했다. 일본 순사들은 각 교회별로 교인들을 줄을 지어 서게 하고는 일제히 구령에 맞추어 신사를 향해 절을 하게 했는데 이 때 절은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혀야 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일부 교인들은 신사에 결코 절을 할 수가 없어 그냥 꼿꼿이 서있자 일본 순사가 달려와 ‘빠가야로’라는 욕설을 하면서 구둣발로 뒤에서 정강이를 걷어차면 대부분 그 자리에 넘어진다 했다. 그리고는 다시 일으켜 세워 절을 하게하고, 그래도 절을 하지 않으면 경찰서로 연행해서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다.
다. 창씨개명을 통한 박해
신사참배가 그들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기 위해 창씨 개명(創氏改名)을 서둘렀다. 이에 1940년 8월에 접어들자 각 교회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어 많은 교회 교인들이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우선 교역자와 장로, 집사들 순서로 창씨개명을 했는데 예를 들면 정OO 목사는 팔천(八川), 박OO 목사는 박원(朴元), 권OO 장로는 안전(安田), 李OO 장로는 국본(菊本), 이OO 장로는 가곡(佳谷), 白OO 장로는 대원(大原), 두 김OO 장로는 김본(金本), 중산(中山) 등으로 바뀌게 했다.
라. 각종 조직과 각종 운동을 통한 박해
앞서 경북노회의 자료에서 밝힌바와 같이 일제는 각종 법령과 명칭조차 길어서 다 외우지 못할 친일단체를 동원하여 수없이 많은 운동과 간담회, 기도회 등을 강요하였다. 교회는 개 교회 중심의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가 속한 교단의 지시와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조직으로 이루어 있다. 장로교의 경우 총회가 있고 총회 아래 노회, 그리고 각 지방교회들로 조직된 시찰회, 그리고 각 교회의 정치기구인 당회로 구성되어 개 교회 중심이다가도 때로는 총회와 노회, 그리고 시찰회의 지시를 받는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이다.
그러기에 전승축하회, 무운장구 기도회, 강연회, 위문단 조직, 위문대 제작, 국방헌금, 애국주일 헌금, 전쟁 말기에 놋그릇 헌납 운동, 교회 종 헌납운동 등을 강요당했다. 이때 대부분 교회의 종과 종각은 헌납 대상이 되었으나 신봉교회는 다행이 종각을 철치 하지 않은 관계로 종을 숨겨 보관하다가 광복 후 교회를 신축하면서 그 때 그 종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한 예로 1940년 ‘國民總力慶北老會聯盟’ 결성식을 한 후 애국주일을 지키고 황군위문대를 만드는 일이 논의되고 이 일로 인해 보고된 상주지역 교회들이 경북노회에 헌금한 내용을 보면 오광교회, 석산교회, 옥산교회, 낙서교회, 양촌교회, 신봉교회, 수상교회, 상곡교회가 각각 2원씩 납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북노회 제39회 노회록 p 216-217
마. 교회 합병으로 인한 탄압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교회의 교인 수는 날로 줄어들어 드디어 일부 지방에서는 교회가 텅 비는 사태가 발생했다. 1942년 5월 7일 경북노회 상무위원장 송창근(宋昌根) 목사는 교회 폐지 및 병합에 관한 공문을 각 교회 및 교역자 앞으로 발송했다.
이해(1942年) 12월 소집된 제41회 경북노회에서 각 지방 시찰장(視察長)이 보고한 교회 병합 내용 중 상주시찰은 다음과 같다.
상주시찰: 공성면 오광교회(五廣敎會)는 옥산교회(玉山敎會)로.
상주읍 신봉교회(新鳳敎會)는 서정교회(西町敎會)로.
화령면 금산교회(錦山敎會)는 사산교회(沙山敎會)로.
경북의 경우 모두 17개 교회가 병합되었는데 상주는 세 교회가 병합되었다. 위 노회록
바. 예배시간 축소
대동아 전쟁이 한창인 1943년 8월에 접어들자 일제는 장로교단 본부에 지령을 내려 9월부터 주일예배, 주일저녁예배, 수요예배 중 주일예배만 남기고 모두 폐지하게 했다. 이유는 9월부터 기독교회에서 결전체제 확립(決戰體制確立)키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기간은 결전시기(決戰時期)를 마칠 때까지였다. 아울러 교인들에게 예배를 마치면 들에서나 도중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이 속히 돌아가라는 지시까지 하였다.
사. 교회 내 조직체의 명칭 변경과 면려회(勉勵會) 해산(解散)
1943년 2월에는 당국의 지도라는 명목으로 각 교회에서 사용하던 주일학교(主日學校)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주일(主日)이란 이름이 ‘주의 날’ 곧 하나님의 날이라는 이름이 그들에게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일학교(主日學校)란 이름 대신에 수련회(修練會)라는 이름으로 부흥회(復興會)는 연성회(練成會)로 바꾸었다. 한편 면려회(勉勵會)는 청년, 남성, 여성들의 조직이었는데 이들의 조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면려회를 해산하기도 했다.
아. 예배시간 참석자의 복장 규제
1944년 7월이 되자 일제는 총후 국민(銃後國民)으로서 비상 사변에 대처하기 위하야 예배시간에 참석할 때에는 남자들은 가급적 국민복(國民服)을 입게 하고 여성들 특히 부인들은 방공복(防空服)을 입으라고 했다가 남자는 국민복에 각반화(脚絆靴), 여성은 몸빼이(女子들이 입는 통바지) 차림을 강요했다. 이재원. 「대구장로교회사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참조.
이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은 히브리민족의 역사라는 이유로 읽지 못하게 했고 장로교 기본교리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적대국의 산물이며 신약성경도 4복음서만 읽도록 했다. 또한 찬송가도 고처 부르게 하며 예배의식까지 손을 대어 예배 때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게하고 매월 첫 주일은 애국주일로 정해 국방헌금을 바치도록 했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 451, 『대구시사』 p. 812.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서정교회 박병훈 목사는 황후에 대한 불경죄로 고등계 형사에게 연행되고 장로들도 경찰에 연행되어 부득이 일시적으로 교회의 문을 닫게 되었고 박병훈 목사는 만주로 망명을 갔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고 다시 시무하였다. 상주교회, 시민교회 연혁 p. 10.
Ⅴ. 나가는 말
역사는 미래를 향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며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지표이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은 과거를 살피며 현재를 더욱 충실히 하고 미래의 발전을 모색함에 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지향해야 할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고자 해도 기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필자가 이 원고를 쓰면서 가장 뼈아프게 느낀 것이 바로 자료의 빈궁함이었다. 분명히 그 시대에 이 지역에서 일어났고 겪었을 일이지만 기록이 없고, 언젠가 이를 증언해 줄 세대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면 기억된 자료마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한 번 사라지면 다시 찾아내기 어렵고 그래서 잊어버린 역사는 역사가 될 수가 없다. 다행이 총회와 경북노회의 기록들 행간에 조금씩이나마 숨어있는 기록이 있고, 이재원 님의 『대구교회사 연구』와 같은 자료가 있었기에 이를 미루어 우리지역 교회들의 아팠던 과거를 조금이나마 되살릴 수 있었다.
바라기는 어딘가에 숨어있을 이 지역 교회의 아픈 역사들이 뜻있는 이의 연구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아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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