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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낙동강 문학관 개관에 즈음한 논문

빛마당 2020. 9. 21. 11:16

낙강논단. 박찬선(낙동강문학관 개관에 즈음하여(9.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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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문학관 개관에 즈음하여

박찬선

(시인. 낙동강문학관개관준비위원장)

 

 

차 례

 

1. 낙동강은 아름답다

 

2. 낙동강은 나루문화의 현장이다

 

3. 낙동강은 문학의 현장이다

. 개암 김우굉의 개암십이곡

. 이재 조우인의 매호별곡

. 수암 류진의 수기문학 임진록

. 우담 채득기의 봉산곡

 

4. 낙강시회를 낙강시제로 재현하다

 

5. 낙동강문학관 개관 준비

. 명칭 문제

. 문학관 설립의 근거

. 낙동강문학관 개관준비위원회

. 낙동강문학관은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갱다불길 100에 있다

 

6. 낙동강문학관의 실내 구성

. 중앙 홀 낙동강의 3대 루정문학

1) 영호루

2) 관수루

3) 영남루

. 1전시실 낙동강과 상주문학(상주 선비 16소개)

. 2전시실 낙강시회

1) 낙강시회의 주요 내력

2) 시대별 주요 낙강시회 소개

. 다목적 기획실

1) 아동문학의 보고, ‘동시의 마을 상주

) 동시의 마을을 지원한 사람들

) 동시의 마을을 일군 사람들

) 1960~1990년대의 상주의 아동문학가

2) 상주의 현대문학 1

) 동학가사문학의 보고, 삼풍 김주희

) 시언지 정신의 위암 장지연

) 동양적 세계관과 구도적 자세 김구용

) 현실초월과 이상향 염원 이대희

3) 상주의 현대문학 2

)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 들문학회

) 숲문학회

) 느티나무시동인

) 문학웹진 문학마실

) 시노리

) 상주작가회

) 상주 현지 문인들

) 출향문인들

) 작고문인들

 

7. 낙동강문학관을 열고

 

 

 

 

 

 

 

 

 

 

 

 

 

 

 

 

 

1. 낙동강은 아름답다

 

강은 인류문명의 발상지였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강에서 이뤄졌다. 상주의 낙동강이 그랬다. 낙동면 성동리의 구석기시대와 낙동리의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강은 살기 좋은 환경을 가졌다. 생존에 필요한 물 공급이 쉬웠고 먹거리 조달이 용이했다. 강에서는 물고기를 얻고 강변의 기름진 평야에서는 양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으며, 수로를 이용한 이동의 수단이 되었다. 강은 인류가 최초로 터를 잡아 살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강은 삶의 젖줄이었다.

낙동강은 본류의 길이 525.15km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유역면적이 23860로 남한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상주의 낙동강은 자연경관이 낙강에서 제일 아름답다. 합강선유록合江船遊錄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수암 류진의 후손인 류후조, 류효조와 그의 아들 류주목을 비롯한 15명의 선비들이 사월 기망旣望에 경천대에서 관수루에 이르는 4~5십리 구간을 뱃놀이 한 그림과 시문을 담은 22.47m 길이의 낙유첩洛遊帖이 있다. 낙유첩의 앞부분에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곳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경천대, 도남서원, 청룡암. 퇴치암. 죽암진, 나각산, 봉황성. 관수루 하나하나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낙동강 칠백리가 비롯되는 퇴강에서 관수루에 이르는 구간은 풍경을 연출한 조화옹이 특단의 구상으로 자연미의 총화를 연출한 것이다.

낙동강의 본류와 영강이 합류하는 퇴강리. 서로 따로지만 똑같이 하나가 되는 융합과 조화의 미를 보여준다. 곧이어 매악산을 물그림자로 안고 흐르는 운성진나루의 넉넉한 모습이며, 있는 듯, 없는 듯, 자는 듯이 흐르는 사벌들과 어울리는 유장한 흐름이며, 하늘을 받드는 경천대 아래 뒤틀리고 꿈틀거리며 흐르는 강은 가슴을 열어 묵상에 들게 했으니 도남서원이 중용의 덕을 베풀게 했다. 바로 아래 비란진에서 휘돌아 강창에 이르면 숨을 돌리고 다시 새 경관을 보여줄 자세를 가다듬는다. 토진나루를 거쳐 넉넉한 흐름은 봉황성에 이르러 적벽의 미를 한껏 뽐낸다. 그 사이 팔공산에서 숨 가쁘게 북으로 달려온 위강을 만나 삼산이수三山二水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을 이룬다. 지맥이 맺히고 강물이 어울림으로써 빚어내는 기운이 낙동강을 이룬다. 바로 아래가 마음으로 강물을 보아야하는 관수루가 있는 낙동나루다. 바다로 갈 준비를 마친 강물은 동쪽으로 구비쳐 흘러 남해에 이른다.

상주의 낙동강은 아름답다.

 

2. 낙동강은 나루문화의 현장이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낙동강은 문화의 현장이다. 낙동강 칠백 리 이곳에서 비롯한다는 표지석이 세워진 퇴강리. 마치 물길이 물러나듯 휘돌아 흐르는 모습은 제방 신축으로 사라졌지만 퇴강리 마을의 모습은 예스럽다. 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로 지은 퇴강성당은 성스러운 믿음의 전당이라는 일반적 종교관을 넘어 강과 믿음이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강물을 내려다뵈는 산록에 있어서 물빛의 변화에 따른 마음결의 움직임도 달랐으리라. 해 뜨는 아침의 찬란함과 저녁 무렵의 노을빛이 동정動靜과 명암明暗, 시종始終과 거래去來의 이치를 터득케 한다. 하나 되고 함께 흐르는 마음은 물같이 자정自淨의 힘을 가지게 된다. 믿음은 소통이다. 하나님(천주님)과 인간의 소통이다. 강의 소통은 나루이다. 강의 이쪽과 저쪽의 소통은 나루에서 이뤄진다. 이제는 모두 사라진 나루의 옛 모습을 찾아본다.

문경의 영순면과 예천의 풍양면 상주의 사벌면 3개 시군사람들이 만나는 물미나루가 있다. 물미나리, 퇴강진, 광대정(강대정), 세밀나루, 삼탄나루의 많은 이름을 가진 나루는 배가 닿는 마을마다 이름을 따로 불렀다. 그중에서도 민초들은 주로 물미나리라고 불렀습니다. 모래톱에 부딪힌 물이 물러난다하여 물미라 하였다는데 오가는 길손들이 물미나리라는 이름에 고향의 정취를 느낀다고 합니다.” 물미나리는 본디 물미나루로 부르던 것이 부르기 좋게 변음된 것인데 반짝이는 물결을 연상케도 한다.

한편으로 광대정이라는 이름에도 많은 이야기가 따른다. 그리고 옛길을 나타낸 역로驛路에도 광대천이 나오는데 조선시대 영남로의 한 갈래였다. 육로와 연결된 물미나리는 조선시대 세곡선稅穀船이 드나들던 나루로서 나루촌, 주막촌이 형성되고 붐볐다. 여기에 광대들이 모여들자 부르게 된 광대는 넓고 큰 이름 그대로 큰 강이 되어 흐른다.

다음으로 운성나루(雲城津) 언시뱃가로 부르는데 사벌면 매호리와 예천군 풍양면 낙상동을 잇는 옛 나루터이다. 1792년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 앞 낙동강 가에 시사단(試士壇)을 세우고 과거를 볼 무렵 영호남 유생들이 안동을 가기 위해 이곳 주민과 합세하여 배를 만들어 건너다녔던 것이 나루터의 시작이라고 한다. 140여 년 전에는 남해 관선이 세곡을 받기 위해 오르내렸을 뿐 아니라 상선이 소금과 어물을 싣고 이곳에 오면 이를 구하기 위해 상주, 예천, 문경, 의성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뤘다. 1995년에 상풍교가 들어서고 그 앞 옛 뱃가에 조희열 선생이 운성진 옛터 유래를 쓴 시비가 있다. 2018년 언덕바지 위에 운성진정(雲城津亭)을 세우고 이곳 유래를 적어(황만섭) 길이 전하고 있다. 육로로 덕통역을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 가흥창으로 가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상주의 낙동강에는 나루에서 나루로 이어진다. 운성진 아래 사벌면 매협리 역골에서 중동면 회상리 매골과 갈밭마을로 이어지는 역곡나루(역골도선장. 매골나루, 매협나루)가 있고 바로 아래 경천대擎天臺가 있다. 경천대는 낙동강 일천 삼백 리 물길에서 경치가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국민관광지로 이름났다. 처음 이름은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여 자천대自天臺라 했으나 하늘을 받든다는 뜻으로 경천대擎天臺라고 했다. 경천대 아래 용소에는 임란의 맹호 정기룡 장군이 용마를 얻어 무예를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경천대에서 강변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회골나루(회상나루, 회공진, 회곡진, 회상뱃가)가 있고 연이어 도남서원이 자리 잡았다. 도남서원은 1606(선조 39)에 세워졌고 주자와 양시가 헤어지면서 장차 우리의 도가 남쪽에 이르리라(吾道南至)고 한데서 따온 이름이다. 영남의 으뜸 서원으로 포은 정몽주,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소재 노수신,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모셨다는 점에서 도남서원의 위상과 뿌리 깊은 상주유학의 맥을 확인케 한다. 낙강의 수려한 경관을 정면에 두고 세워진 도남서원은 인문과 자연의 조화 속에 수류화개水流花開의 원융한 자연의 이법을 감지케 한다.

경천대를 중심으로 상주의 정신문화와 생활문화가 펼쳐졌다. 상주박물관이 들어서고 그 앞에 국제승마장이 있으며, 아래로 내려오면 상주자전거박물관이 있다. 조금 거리를 두고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이 있다. 그리고 도남서원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 비봉산 능선이 강으로 내린 쪽에 비란진飛鸞津이 있다. 도남동과 중동면 오상리 큰비란으로 오갔는데 병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상산지의 기록(飛鸞津在中東面竹巖津上中東通路)으로 보아 낙동강 하구에서 올라온 장삿배가 짐을 풀고 중동면에서 문경으로 다니던 길손들이 건너던 나루였다.

휘돌아 펼쳐진 너른 죽암들 아래에 강창나루가 있다. 중동면 죽암리(2)와 낙동면 신상리 주막걸로 연결되는 나루다. 조선시대 낙동강 가에 큰 창고가 있었다는한국 땅이름 큰사전의 기록이나 낙동강 물이 넘치면 죽암리 일대가 큰 바다같이 변한다고 하여 강창(江滄)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열린 뱃길이나 상주와의 거리가 가까운 관계로 부산 쪽에서 올라온 생필품이 주로 이 나루를 통해 들어왔다. 신상리 주막걸은 영남대로변에 있는 주막의 하나로 길손들의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다. 낙동강 건너 진두리, 구잠리의 토지목(터진목), 상촌리의 백두점, 성동리 주막걸을 거쳐 덕통역에서 점촌 지나 새잿길로 연결된다. 길손이 가는 길에는 주막이 있고 주막에는 주모가 있어서 걸쭉한 삶의 현장에 이야기가 풍성하다. 머물렀다가 떠나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만남의 공간에서 주막문화가 피어난다. 길다란 목선도 사공이 살던 집도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江濸 나루터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강창나루는 외지에서 중동으로 들어오는 큰 관문의 역할을 하였으며, 면민에게 가장 많은 애환과 추억이 깃든 곳이다. 지역주민의 오랜 바람으로 19928월 강창 잠수교가 가설되어 숙원은 이루어졌으나 다양한 도로개설과 교통량 증가로 인하여 대교가설이 시급한 실정이며 지난날의 명성을 되새기고자 이 표지석을 세운다.” (20075 중동장학회)

강창나루 아래에 중동면 죽암리 원죽암 대바우 마을에서 낙동면 분황리 분황마을로 건너는 대바우나루(대바우나리, 대바우도선장)가 있다. 대바우는 마을 앞 낙동강 바위절벽 위에 대나무가 많아서 대바우라 불렀다. 분황마을에서는 백두점을 거쳐야 하는데 그곳에는 술을 파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으로 백두주점白頭酒店이 생겼다. 백두점에서 선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조선시대 선산읍치에서 죽계-대원-죽현원-죽현을 넘어 상주로 이어지는 길과 백두점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선산-상주로 이어지는 길은 관로官路였고 백두점 길은 일반 백성들의 통행로였다. "이 길은 민초들의 장삿길로서 선산의 비산나루, 강정나루, 강창나루, 이실나루를 통해 들어오는 소금과 건어물, 각종 제수용품, 생필품 등이 노새에 실려 운송되던 길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등짐장수나 봇짐장수들에 의해 생활용품이 여러 곳으로 흘러 들어가던 장삿길이었다." 길도 흥망이 있나보다. 상주와 선산길은 지방도로로 열려있으나 죽암진은 사라져 잊힌 나루가 되었다.

대바우를 지나 강을 따라 내려가면 토진兎津나루(토진나리, 토진선착장)에 이른다. 마을 뒷산이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동의 신암과 낙동의 물량을 잇는 나루로서 상주, 의성, 예천의 삼시군三市郡의 왕래가 빈번하여 일찍이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때의 강의 깊이와 포구가 적당하여 河上무역의 중심지로서 해산물과 田穀이 교환되는 시장이 번창하였던 곳이고 車馬를 운송하는 큰 渡船까지 있었으나 지역주민의 오랜 숙원이었던 중동교가 198211월 준공되어 今昔을 더하게 되니 지난날이 명성을 되새기고자 이 표석을 세웁니다.” (2007.5 중동장학회)

옛 나룻목에兎津 나루터기념비가 우뚝 서서 지난날의 사연을 일러주고 있다. 1982년 길이 450m, 6m의의 중동교가 놓여 지자 길손들로 붐비던 장터도 나룻배도 모두 떠나버렸다. 인근의 낙동면 물량리와 중동면 우천리 일대는 명당터로 알려져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토진나루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뒷디미나루가 나온다. 낙동면 뒷디미에서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밤실로 건너는 나루이다. 뒷 변두리에 있는 나루가 뒷디미나루이고 앞 변두리에 있는 나루가 낙동의 앞나루인 낙동나루(낙동도선장)이다. 밤실과 송실은 같은 생송리로 조선시대 남해에서 올라온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송실에 있어서 송실나루라고 불렀다. 송실에 있었던 물류창고는 낙동나루의 물류기지인 셈이다.

관수루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마을이 참나무배기(참나무징이)이다. 이곳은 봉조하奉朝賀인 류후조柳厚祚 대감이 우거한 곳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참나무배기 뒤쪽에 길손들이 머무는 원마(院地)가 있고, 그 옆에 뒷디미가 있다. 이로보아 예전에는 낙정으로 가는 뱃길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당시 낙동강 앞나루와 뒷나루에는 관아에서 3-5척의 도선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상주지1989)고 하니 큰나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뒷디미와 연결되는 안계장은 쇠장으로 이름난 장이었는데 씨받이 쇠장(義城種牡牛市場)으로 전라도 강계쇠장, 경남의 진주쇠장과 함께 3대 쇠장이었다. 인근 선산. 상주, 김천 등지에서 오는 채꾼들과 일반장꾼들은 낙동나루나 뒷디미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다. 이제 흥성했던 뱃길도 접었고 나루터의 위치조차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다음으로 일천삼백 리 낙동강 물길의 중간에 위치한 낙동나루(낙동도선장, 낙동앞나루, 낙동진, 낙정나루, 관수진)는 상주 낙동마을 진두리와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낙정마을로 통하는 나루다. 물길의 요충지로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동량이 많았던 큰 나루였다.경상도속찬지리지』『경상도읍지』『상산지』『대동지지』『여지도서』『영남지도』『해동지도』『대동여지도등에 올라있다.

이러한 여러 기록 외에도 낙정리에 낙동역을 두었으니 동래에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로의 성현도와 유곡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에 낙동역에 대해서 잘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설치하여 조선 후기까지 존속한 큰 역이었다. 또 낙동발참(洛東撥站)을 두어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낙동나루의 큰 기능은 세곡의 운송이다. 상주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관수물자의 집결지였다. 여러 문헌에는 세곡을 실은 배가 낙동강 물길을 이용하여 상주로 이송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관곡과 관수물자가 낙동강으로 올라온 뒤에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의 경원창과 가흥창으로 운송되었다. 특히 낙동나루는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로의 주요 위치에 있다. 뱃길이 안동까지 열려있으나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은 낙동나루였다. 택리지에서도 상주고을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낙동은 김해와 동래로 길이 통한다. 짐을 싣고 운반하는 말과 배들이 남북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 것은 장사하기에 편리한 때문이다.”라고 했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도 번창한 나루는 세곡을 실어 나르다가 공출로 거둬들인 곡식을 구포와 부산항으로 실어갔다. 그곳에서는 소금과 건어물 외에 옷감, 석유(등유), 설탕, , 연초 등 새로운 물품이 등장했다. 장삿배의 왕래는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차도 사람도 우마차도 건넜던 낙동나루(자동차 한 대 운송비 이천 원. 주민들은 한 해 두 차례 배삯으로 보리와 벼 한말씩 모곡을 하고, 외지인은 오백원) 낭만적 풍정도 급변하는 세태 속에 종언을 고했다. 1986년 길이 434m 10m가 되는 낙단교가 준공되면서 낙동나루는 역사적인 중임을 마치게 되었다.

간략하지만 상주 낙동강의 나루틀 짚어 보았다. 나루는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오가고 나드는 소통의 옛 물길이 시회를 연 문학의 길이었다. 교통의 발달과 함께 모두가 사라졌지만 낙동강문학관이 들어섬으로써 회상나루는 새 시대를 맞았다.

 

3. 낙동강은 문학의 현장이다

 

상주의 낙동강은 문학의 현장이다. 문학의 배경이자 산실이 된 아름다운 자연과 다채로운 인문은 문학의 제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상주에 전래된 우복동 이야기는 이상적인 삶의 현장을 그려낸 유토피아로서 정신세계에서 희구하는 대상이 되었다. 근심도 걱정도 없는 이상향이 막연히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주고을이 바로 그곳이라고 믿었다. 유토피아는 개인과 사회의 희원希願으로 승화되어 배움을 일깨운 서원문화로 발전했다. 대를 이은 가학家學과 인재 양성의 서당과 서원 교육을 통해 상주문화는 풍요로워졌다. 상주의 많은 서원들 중 함창읍 신흥리의 임호서원, 사벌면 묵상리의 지강서원, 상주시 도남동의 도남서원, 중동면 죽암리의 낙암서원, 낙동면 화산리의 화암서원, 낙동면 승곡리의 장천서원 이들은 모두 낙동강 주변에 있는 서원들이다. 흥학興學과 치도治道의 근본을 삼고 상주 문향文鄕의 기틀을 놓았다.

특히 상주에 부임하여 18개의 서당을 세운 신잠 목사에 대하여 창석은춘추향사문春秋享祀文에서

 

學成於己 학문을 스스로 이루어

化行於民 교화를 백성에게 행했도다

君子之澤 군자의 은택

久而惟新 영구히 새로우리

 

베풀어 준 은택에 대한 고을사람들의 뜻이 응축되어 나타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찬이 화답의 감동을 자아낸다.

유서 깊은 상산 고을은 전체가 문학공간으로 사랑을 받았다. 소백산맥이 뻗어 내린 북서쪽의 속리산과 백화산의 절경과 명승은 이를 것도 없고 이안천변과 갑장산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선비들이 좋아하는 최상의 창작공간이었다.

 

.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개암십이곡

 

문노라 버리바회야 엇디여 버런

萬頃蒼波水를 다마시랴 버런

우리도 인간 飜覆을 몬내 우서버런노라 개암십이곡 중 開巖

 

鰲臺邊 玉柱峯을 어니에 갓가센고

亭亭矗矗壁立萬仞엿고나

萬一天柱옷것거디면 녜바틸가 노라 개암십이곡 중 玉柱峯

 

개암 김우굉(1524 중종 19-1590 선조23)은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창응봉蒼鷹峰 아래에 터를 잡았다. 이곳 강변에 있는 가로로 터져 마치 입을 벌린 바위의 형상을 보고 자호를 開巖이라 하고 개암정開巖亭을 짓고 개암십이곡을 지었다. 자신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은유적 현실비판과 선비의 강호지락江湖之樂을 읊었다. 문학적 완성도가 높고 향촌문화로서의 시조 전승과정 및 창작시기와 그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연시조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중요한 의의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매호별곡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는 이재 조우인(曺友仁. 1561-1625) 선생이 자연귀의를 읊은 한글가사매호별곡(梅湖別曲)과 충신연주지사를 담은자도사를 지은 곳이다. 아름다운 경관과 조화를 이룬 임호정(臨湖亭)과 강바람에 세속의 티끌을 날려버리는 어풍대(御風臺), 삼간초옥三間草屋의 이적정二適亭이 창작의 밑그림이 된 셈이다. 불우헌 정극인, 면앙정 송 순, 송강 정 철을 잇는 가사문학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매호별곡은 8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 총 89귀글체 가사형식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바탕으로 하여 산수자연을 예찬한 서경가사이다. 매호별곡의 두 번째 단락에는 상주 매호의 위치와 경경을 묘사하고 있으며 대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경영코자 하느 모습이 담겨있다.

 

남산南山 동반東畔과 낙수洛水 서애西涯/연하煙霞를 헤치고 동천洞天드러/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처처處處의 도라보니/징담澄潭 깁흔 곳의 노프니절벽이오/ 여흘은 깁 편흘너잇다/그려니 정자亭子도 지으려니/지당池塘오며 간수澗水도 혜오려니/힘 밋l로 초옥삼간草屋三間 지어/제도 초창制度 草創경개그지업다

 

이재 조우인 선생의 문학비가 지난 200111월에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매호리 강변 언덕에 세워져 있다.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지 않은(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절의의 지사요 시, , (詩書畵)에 빼어난 문인이었다. 이재는 낙강의 한객閑客으로 만년을 보냈다.

 

.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수기문학 임진록

 

그날 밤의 아바님이 대궐노셔 나와 계서 한마님이 울며 절시고 하직신디 한마님이 일으시되 졍승이 셔나라히 몸을 허였거엇지 날을 돌보리오 날염녀치 말고 주샹을 뫼고 국를 힘써하시니 아바님이 두 번 절시고 목이 메어 말을 못시더라

 

이는 임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서애 류성룡이 그 어머님께 하직하는 장면의 일부이다. 이리하여 가족과는 이별하고 류성룡은 임금을 모시고 서쪽으로 떠났다. 이 일기는 수암 류 (1582-1635)이 열한 살 때 임진란을 당하여 그 해 사월부터 서울을 떠나서 11월 사이에 겪은 피란 기록이다. 류 진이 쓴 임진록은 한글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희귀한 일로서 주목을 끌고 있다. 임진록은 그가 왜란의 체험을 만년에 술회한 것으로 국문일기로서 자조적(自照的) 수기문학(手記文學)의 으뜸이라고 높이 평가될만한 귀중한 국문학의 유산이다.

수암은 37세 되던 해 봄에 안동 하회에서 상주 가사리로 이거하여 정착했다. 뒤이어 우천학맥愚川學脈으로 이어졌다.

 

.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봉산곡 

 

 가노라 옥주봉(玉柱峰)/ 있거라 경천대야/ 요양(遼陽) 만 리 길이/ 머다야 얼마 멀며/ 로 시작되는

 

봉산곡(鳳山曲)일명천대별곡82구는 우담 채득기(蔡得沂 1604-1646) 인조대왕의 부름을 받고 청나라 서울 심양으로 세 왕자(소현세자. 봉림, 인평대군)를 모시고 떠날 때에 남긴 한글가사작품으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경천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고 웅혼한 충절의 정신을 다져 넣었다. 8년이 지난 뒤 돌아와 무우정을 짓고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은둔하였다. 경천대 위에 大明天地 崇禎日月여덟 자를 새기고 명나라와의 우의를 표시해다.

우담은 절의가節義家 가풍과 구류九流(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에 박통한 학풍과 조야에서 인정한 문장가의 가문에서 태어나 천부적 자질과 후천적 영향으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병자호란의 충신이다.

무우정 곁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자천대우담십영의 명시를 남겼다.

 

문학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된다. 공간을 통해서 작품의 구체성이 확보되며 이 과정에서 작가의 창조적인 역량이 발휘된다. 곧 동일한 공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일지라도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나 생각, 역사의 인식에 따라 사뭇 다른 양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가까이 선인들이 남겨놓은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낙동강에서 펼쳐진 개인적인 창작활동 못지않게 낙동강은 7세기 가까이 이어온 낙강시회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낙동강은 문학의 강이다.

 

4. 낙강시회洛江詩會를 낙강시제洛江詩祭로 재현하다

 

강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강을 찾았다. 강의 흐름은 인생의 흐름이다. 우리는 강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만나기 위해서 강으로 간다. 강 위에 내가 있다. 낙강시회는 낙동강을 찾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낙강시회(낙강범월시회)의 공간은 상주 낙동강이다. 낙동강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가 된 신귀神龜가 출현한 낙수洛水와 연상되어서 유도儒道의 정통맥을 이어온 강으로 정립된다. 낙동강 무임포에 도남서원을 세워서 동국東國 유도의 맥이 상주에 닿았음을 천명했다. 상주를 상산商山(상주 별호)이라 하여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살만한 고을로 상산낙수향商山洛水鄕의 상징성을 지닌 강으로 인식했다. 상주의 낙동강은 자연과 인문이 조화를 이룬 강이다.

낙강시회는 상주의 낙동강에서 1196(고려 명종 26) 백운 이규보의 시회로부터 1862(조선 철종 13) 계당 류주목의 시회까지 666년 동안 51회의 시회가 있었다. 퇴강에서 경천대를 거쳐 죽암竹岩, 합강정合江亭(위강과 낙강이 만나는 곳) 지나 관수루에 이르는 약 50리 구간에서 이루어졌다. 국란과 자연재해 때는 쉬면서 띄엄띄엄 선유시회船遊詩會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한 회 한 회의 모임은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은 겉표지의 제자題字, 서문은 낙강범월시서洛江泛月詩序. 133면의 필사본으로 정미년 1607년 상목낙강시회尙牧洛江詩會에서 무술년1778년 낙강범주시회까지 171년 동안 개최된 8차의 시회, 150여 제의 시문이 들어있다. 한 강에서 대를 이어가며 뱃놀이를 겸한 시회의 작품을 한시첩漢詩帖에 누가 기록한 공동시집을 도남서원에 보관해온 것은 유일한 일이다. 1622년 임술년 716일 시회를 마치고낙강범월시서서문에서 창석 이준은 시가 이미 이루어짐에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책머리에 붙여 도남서원에 보관하여 이다음 이곳에서 놀이하는 사람들의 선구先驅가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 먼 훗날 누군가가 계승하리라는 기대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보여주었다. 400년이 흐른 뒤의 후학은 낙강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확장시켜나가는 일에 보이지 않는 문학적 교감과 영적 계시가 이뤄진듯하여 사뭇 경이롭기까지 하다.

낙강에 달 띄우고 시를 노래한 역대 51회의 낙강시회를 이어서 낙강시제洛江詩祭로 개칭하여 200282-3일 경천대에서 재현했다. 필자가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낙강시제 행사 계획서를 제출, 적정성과 필요성을 인정받고 지원을 받아 성사가 되었다. 따라서 계당낙강범주시회 이후 140년간 단절되었던 시회의 재현을 통해 선인들의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호방한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현창케 된 것이다.

역대 명칭을 보면 낙강범주유洛江泛舟遊, 낙강환영연洛江歡迎宴, 낙강관수루회洛江觀水樓會, 낙강범주시회洛江泛舟詩會,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 낙강선유시회洛江船遊詩會, 낙강도원회洛江道院會, 낙강도원문회洛江道院文會 등 시회 제목이 다양하다. 이러한 명칭 앞에 모임을 주동하는 개최자의 호를 붙임으로써 행사의 취지나 성격이 차이가 있겠으나 낙강는 공통적으로 들어 있으니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역대 이름을 본으로 하여 시회詩會를 시제詩祭로 한 것은 단순히 시를 위한 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인들의 고결한 시 정신을 기리고 시에 대한 고고성孤高性과 제의적(祭儀的)인 경건함에 뜻을 두었다. 경박한 시류에 휩쓸리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소란과 단견을 벗어나서 소리 없이 흐르는 낙강의 중후함을 새기고자 함이었다. 낙강이 보여주고 생각게 하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이치理致 아래 시가 천해지거나 천해져서도 안 됨을 경계한 것이다.

 

酒酣高歌酸且若 술 취해 큰 소리로 노래하니 슬프고 괴로워

四座聞之皆掩涕 함께 듣던 이 모두가 흐느껴 우네.

一自長蛇噴毒氣 한 번 큰 뱀이 독기를 품으니

妖祲迷空捻成彗 요망한 기운은 푸른 하늘을 가리네.

國用軍費困誅求 나라는 군비 탓에 가렴주구 괴로우니

哀此泥塗誰拯濟 도탄에 빠진 불쌍한 백성 누가 건지랴.

誰云天運偶遘迍 누구는 천운으로 재난을 만났다지만

亦由廟算多失計 역시 조정의 계획 실책이 많은 까닭일세.

書生心膽空菀紆 서생의 심담 공연히 답답해

擊揖幾憶臨江誓 노를 치며 몇 번이나 강에서 맹세했던가.

 

이렇게 이준은 장강에 배를 띄우고도 글러 가는 나라꼴을 통탄하였다. 문학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설령 가상의 세계를 그려낸다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진위에 대한 판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창석의 현실인식은 정의롭다. 그것은 문학인의 사명이다.

창석의 문학정신은 재현 첫 해부터 문학강연으로 나타났다. 강 문학을 주제로 하고 문학일반으로 그해의 문제점을 살피거나 자신의 문학관이나 창작과정을 피력하는 쪽이었다. 지역을 초월하여 지역이 중심이 되는 지역문학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참여 시인들의 시를 모아 낙동강 시화집을 발간함으로써 행사는 전국규모로 확대되었다. 경향 각지에서 참가한 시인들의 작품은 우리시의 경향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2007년에는 과거의 횟수를 합쳐서 제57회 낙강시제라 하여 유구한 문학의 전통을 낙강과 같이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면 현역은 사화집으로 가름하고 역대 낙강시회에 참여한 문인들을 보자

 

이규보李奎報(1168~1241안축安軸(1282~1348김종직金宗直(1431~1492유호인兪好仁(1445-1494)김일손金馹孫(1464~1498권오복權五福(1467~1498이황李滉(1501~1570강신姜紳(1543~1629)조찬한趙纘韓(1572~1631이전李㙉(1558~1648이준李埈(1560~1635조정趙靖(152~1636조익趙翊(1556~1613류진柳袗(1582~1636전식全湜(1562~1642전극항全克恒(1591~1637전극염全克(1597~1660조우인曺友仁(1561~1625강사상姜士尙(1519~1581홍여하洪汝河(1621~1678손만웅孫萬雄(1643-1712)채득기蔡得沂(1604~1647조정융曺挺融(1597~1677정도응鄭道應(1618~1667신석번申碩蕃(1596~1675이옥李沃(1641~1698이만부李萬敷(1664~1732권상일權相一(1679~1760조천경趙天經(1695~1776이승연李承延(1720~1806)정종로鄭宗魯(1738~1816이경유李敬儒(1750~1821류심춘柳尋春(1762~1834류주목柳疇睦(1813~1872등이다.

 

상주의 선비, 영남의 선비, 기라성 같은 조선의 선비들이 대거 참여하여 시회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5. 낙동강문학관 개관 준비

 

강은 흡인력을 지녔다. 끌어들여서 함께 사는 생명력을 지녔다. 아름다운 낙동강, 삶의 터전이 되고, 소통과 나눔의 나루가 있고, 시인묵객이 찾아와 예술세계를 펼치고, 도학자가 흐름의 진리를 터득하고, 선비들이 모여 시와 문화를 논했던 낙동강. 강의 문화는 새로운 창조력을 유발한다.

낙강시제를 2002년 경천대에서 개최하고 난 이후 회를 거듭하면서 안타까워한 것이 범주泛舟와 범월泛月의 시회였다. 달밤에 배를 띄워 선상에서 시를 짓는 멋과 낭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난 시절의 시회 때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 잘 살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하다니(야간에 한 번 한 적이 있음)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 과정에서 또 다른 꿈이 가슴을 달구었다. 역대에 있었던 시회를 정리하여 담을 공간이 떠오른 것이다. 문학관! 생각할수록 가슴이 설레고 부푸는 일이었다.

 

. 명칭 문제

 

뜻이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말이 헛되지 않다. 2009년 필자가 상주시정책자문위원(문화예술분과)으로 참가하여 낙동강문학관 건립을 제안 발표했다. 사리를 떠나 공익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달성된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었다. 그것이 빛을 본 것이다.

그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명칭의 문제였다. 이름은 존재의 천명이자 실체여야 한다. 이름과 관련하여 한 차례 신경전을 경험한 터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주박물관의 명칭을 선정할 때 외지 선정위원으로 참가한 두 교수는 상주역사민속박물관을 들고 나와 거의 굳혀져갈 상태였다. 그때 속으로는 이름이 우선 긴 것에 탐탁치 않았고, 하필이면 역사와 민속을 삽입하는 것에 의아심을 가졌다. ‘역사민속에 국한하겠다는 제한적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의아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최종 결정의 날이었다. 그냥 박물관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데 굳이 역사민속으로 국한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했다. 상주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상주박물관이라야 됨을 강조했다. 다행히 교수들이 뜻을 철회함으로써 상주박물관으로 결정을 보았다.

명칭의 중요성은 이를 것도 없다. 상주문학관, 삼백문학관, 낙동강문학관을 가지고 견주어보았다. 상주문학관은 상주문학에 국한되는 것으로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고, 삼백문학관은 삼백이 상주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녔지만 외적 인지도가 낮은 것이 흠이다. 낙동강문학관은 낙동강이 영남의 젖줄로서 포괄적 의미망이 넓고 크다는데 장점이 있다. 그만큼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다양하다는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문학관이 세워질 장소가 낙동강변이어서 입지조건과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같은 한옥 건물로 들어서는 객주촌과 나룻촌이 이웃에 있는 것도 좋은 점이며, 경천섬을 잇는 낙강교와 범월교를 건너면 바로 맞은편에 자리 잡은 것 또한 강점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면면히 이어왔던 낙동강문학의 총화와 결집 차원에서도 낙동강문학관으로 확정치 않을 수 없었다.

 

. 문학관 설립의 근거根據

 

상주의 낙동강은 민속, 역사, 유학, 문학, 자연, 관광 등의 개념이 혼융된 총체적 문화공간이다. 이것은 천혜의 축복받은 공간이요 귀중한 자산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낙동강문학의 현장에 낙동강문학관 건립은 아주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이에 낙동강문학관건립의 당위성을 살펴보자.

 

첫째. 상주의 옛 이름 상낙上洛의 동쪽을 흐르는 낙동강은 상주의 강이란 자부심이 대단하다. 낙동강의 제일의 승경勝景과 도맥道脈이 이어온 문학의 현장에 상주문학이자 영남문학을 통섭하는 문학관이 필요하다.

 

둘째. 낙동강에서 51회의 시회를 통해 상산商山의 이미지와 도학적道學的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전국 어느 강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상산낙강시회만의 독특한 정서를 담아내었다. 7세기 가까이 이어온 낙강문학의 지속성과 풍부한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강 문학의 전범이 될 수 있다.

 

셋째. 공동시집임술범월록을 구심체로 한 임술시단壬戌詩壇과 공동시집홍판관운洪判官韻을 구심체로 삼은 목재시단木齋詩壇)은 대를 이어 시단을 형성하고 공동시집을 낸 것은 우리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최초의 일이다.

 

넷째. ‘60년대 전국에 알려진동시의 마을 상주를 홍보하고 아동문학의 보고인 상주의 위상을 유지, 발전시키며, 미래로 나아갈 기틀을 다지는 구심처가 필요하다.

 

다섯째 이 땅은 참으로 책 많고 현인이 많았던 고장이요, 신선이 살던 고을이라고 언급한 창석 선생의 말처럼 문향文鄕 상주의 긍지를 심고 한국문학에 기여하는 상징물이 있어야 한다.

 

여섯째. 자연과 인간을 노래한 낙동강문학의 결집체로서 치유와 구원의 문학으로 시대에 부응하는 창작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학관 설립의 근거와 당위성을 지닌 낙동강문학관은 특정 시대의 한 사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그때마다 뜨겁게 생애를 마친 이 땅의 선비들을 모시는 문학의 전당이 될 것이다. 나아가 낙동강문학을 정립하고 상주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요체가 될 것이다.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는 새로운 강 문학 창출의 계기가 될 것이며, 존귀한 생명의식을 고양하는 주제로 길이 남을 것이다.

 

. 낙동강문학관 개관준비위원회

 

2018210일 상주도서관 202호실에서 낙동강문학관개관준비위원회를 가졌다. 그때 마련한 기초안이다.

 

<낙동강 문학관 개관 준비위원회(T·F) 구성>

 

낙동강 문학관의 원만한 개관을 위하여 개관준비위원회, T·F(task force) 팀을 구성·운영코자 한다.

 

- 목적

문학관의 핵심인 내부 전시물의 내용과 구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역의 전문 문학인들로 T·F팀을 구성, 회의를 통해 문학관의 특색과 전시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있다.

 

- 구성

준비위원회의 구성은 아래와 같이 한다.

위원장 1, 부위원장 2, 간사 1, 위원 10

(한국문인협회상주지부장, 상주아동문학회장, 들문학회장, 숲문학회장, 느티나무문학회장, 시노리회장, 상주작가회장, 문학마실회장, 상주교육지원청교육지원과장 등)

 

- 회의, 기간, 장소

*회의는 전체회의와 임원회의(위원장, 부위원장, 간사)로 한다.

*회의는 수시로 가진다. 필요시 설계용역 담당자도 참가토록 한다.

*20181월부터 개관 까지

*장소는 상주시청 소회의실로 한다.

 

- 회의 내용

하나. 낙동강문학관에 담을 전시물의 내용, 범위, 구성에 따른 협의(최종안 확정)

하나. 자료 조사 수집 및 연구, 전시 문안 작성

하나. 문학관과 연계한 상주문학의 활성화 방안(낙강시제 개최, 상주출신 김구용 시인 기념사업회 구성 및 행사 일체, 상주문학상 제정 등)

하나. 문학관의 운영을 다각도로 연구, 검토, 건의(문학관으로서의 기능 수행에 이바지, 발전 방향)

 

- 기타

모든 회의는 시청 담당자와 사전 협의를 거친다.

 

위원 : 김재수, 박정우, 이창모, 이상훈, 김설희, 박순덕, 함창호, 임술랑. 이승진, 김종환, 김동수(사무국장) 박찬선(위원장)

 

. 낙동강문학관은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갱다불길 100에 있다

 

갱다불길 100은 낙동강문학관의 주소다. 갱다불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이럴 때마다 조금은 당황하게 된다. 한자로 표기된 것도 아니고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면 약간의 해석을 가할 수도 있다. 갱변이 강변이니 갱은 강으로, 다불의 다는 많을 다로 풀고, 불은 블-, -물로 보아 물을 불로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생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물을 불로 혼용 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갱다불길은 물이 많은 강변길인 셈이다.

문학관이 위치한 곳은 옛 회상나루와 비란진 나루터(상주보 위 오른쪽) 의 중간쯤 된다. 문학관 앞 표지석에 회상나루터라고 새겼지만 넓게 본 것이다.

회골나루는 경천대 아래 도남동에서 중동면 회상리(회골) 과 샘골 쪽으로 건너던 나루였다. 광해군 때 편찬된 상산지에는 회곡진回谷津으로 기록 회촌진回村津 회동진檜洞津으로도 표기 되었다. 또 다른 이름으로 회상나루, 회상뱃가라 부르기도 했다.영남지도(상주목)해동지도(상주목)에 회촌진回村津으로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상주도호부에서 의성의 다인과 예천, 안동으로 통하던 역로를 연결하던 중요한 나루였다.

경천대 주변과 이어진 청룡암 아래 강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고깃배들이 드나들었으며 상주장과 사벌장이 서는 장날에는 장꾼들로 붐비기도 한 나루였다. 뱃가에 주막이 있어서 이웃마을 사람들이 서로 만나 쌓인 이야기를 주고받던 정분이 넘치는 나루였다. 경천교는 옛 회상나루의 뱃길 방향으로 놓여져 있다.

한자의 돌 회로서 둥글게 움직이고 여기저기 걸어 다님을 뜻하고 돌아올 회로서 갔다가 돌아옴 돌아볼 회 뒤를 봄 돌릴 회 돌게 하고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꿈(回船) 마음을 돌림 머뭇거릴 회 둘레회 횟수회. 성 회. 멀 회 등 다양하게 한한대자전에는 나온다. 회갑回甲, 회고回顧, 회광반조回光返照(일몰 전의 햇빛이 반사, 등불이 꺼지려고 할 때 잠깐 환하게 밝아지는 일. 도가의 수련법) 회귀回歸, 회람回覽, 회로回路, 회문回文(한시체의 하나. 순역종횡順逆縱橫 어느 쪽으로 읽어도 체를 이루고 의미가 통하는 시. 나라 蘇伯玉의 아내가 지은 盤中詩가 그 효시. 回文詩), 회보回報, 회복回復, 회상回想. 회신回信, 회심回心 회춘回春. 회향回向(불사를 경영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빎.), 회양문回向文(법사의 맨 나중에 그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외는 기원문).

이처럼 자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오고 살아나는 의미를 지녔다. 가고 오도 없는 그 자리, 그러나 다시 가도 오는 그 자리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불가 선문답의 진리에 이른다. 흘러갔다가 흘러옴의 강, 흘러 왔다가 흘러 감의 강, 강은 그냥 그대로 강으로 있다. 만법일여萬法一如요 만법지모萬法之母.

강은 생명이다. 낙동강문학관의 표지판에는 이 땅 삶2의 젖줄이 되리라라고 표제어를 썼다.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삶에의 의지요, 생명의 의지이다. 권력은 생명으로부터 솟아나는 내적인 힘이다. 의지는 힘을 지향하는 성향이다. 긍정적 의지 곧 능동적인 힘을 대표하는 인간상이 자유정신을 가진 초인超人이다. 초인은 창조의 원동력인 삶의 원초적 충동과 격정과 의지가 솟구쳐서 끊임없이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 창조해 나아가는 인간상이다. 매미처럼 껍질을 벗는(脫殼) 자기극복의 노력을 한다. 계산적 합리적 사유를 넘어 감성적 예술적 실재적 삶으로의 전환이다. 바로 문학이 추구하는 창조적 삶이다.

그리고 천부경에는 , , 삼계가 생겨나기 이전의 우주본체인 하늘을 나타내는 숫자로 100을 썼다. 우리는 답답할 때는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게시揭示이자 계시啓示.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일러준다.

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닌 회상리에 갱다불길 100은 우연의 일치지만 묘한 조합을 이룬다. 조금은 독단적 판단이긴 하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에 낙동강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선험적先驗的 의미가 있다. 그것은 창작의 산실이자 짚어보고 내다보는 문학의 집이다.

 

6. 낙동강문하관의 실내 구성

 

낙동강문학관은 대지 에 건평 270㎡ ㄱ자 건물로 한옥으로 지었다. 2000년도에 착공하여 2000년에 준공했다.

실외는 공연장 겸 주차장과 정원, 정자가 있다. 도남서원 앞 광장에서 범월교泛月穚 건너 경천섬을 지나 현수교인 낙강교洛江穚를 건너면 바로 맞은 편 건물이 문학관이다. 입구 오른쪽에 낙동강문학관 표지석을 놓았고 담장 중간에는 이 땅 삶의 젖줄이 되리라는 시구 아래 낙동강문학관의 목재 간판을 세웠다. 그리고 문학관 출입문 위에는 洛東江文學舘 서각書刻 현판을 걸었다. 글씨는 상산 김준태 서예가가 쓰고 서각가 김봉기가 새겼다.

실내는 전시실과 사무실 창작실 도서실로 나뉘고 전시실은 중앙홀과 1,2,3전시실로 나눠져 있다.

전시실 구성을 위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전국에 산재한 문학관을 둘러보았다. 가까이는 문경의 문경문학관, 김천의 백수문학관, 왜관의 구상문학관, 안동의 육사문학관, 영양의 조지훈문학관, 청송 객주문학관,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 내려가서 함양의 지리산문학관, 하동 김병주 문학관, 해남 땅끝 순례문학관, 홍성의 만해기념관 등 참으로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우선 외형의 규모가 컸고 내부구성도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검토를 거듭하면서 주어진 공간을 잘 활용하여 알차게 꾸미는 것이 제일 큰 관심사였다. 애초 기획했던 것이 현장에 맞지 않아 일하면서 고치고 고치면서 다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됐다.

중앙홀의 정면과 오른쪽 벽에는 낙동강 3대루인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의성이 관수루觀水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의 소개와 영상 그리고 루마다 3사람의 시와 약력판을 벽면에 설치했다. 홀의 왼쪽에는 낙강시제의 흐름을 개괄한 설명(낙강에 달 띄우다. 백운 이규보의 남유시南遊詩를 통해 본 상주기행, 낙강에 배 띄우다, 임술범월록 속 여행 일정, 산수유람을 떠나다를 게시 했다. 모서리에는 합강선유록의 사실적 그림을 게재하여 현장감을 나타냈다.

 

1전시실은 낙동강과 상주문학실로서 역대 상주를 빛낸 16사람의 시와 약력을 소개하고 그에 따른 자료를 전시했다.

 

2전시실은 낙강시회실로서 낙강시회의 대표적인 7차례의 중심인물과 주요내용 및 작품일부를 게재했다. 22m가 넘는 낙유첩의 복사물과 시화와 연관된 자료 전시와 2002년부터 시작한 낙강시제의 행사물을 전시했다.

 

3전시실은 원래는 각종행사를 할 수 있는 다목적 강당이지만 양쪽 벽면과 바닥일부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 문 안 오른쪽에는 한국아동문학의 보고’ ‘동시의 마을 상주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동시의 마을을 후원한 네 분 선생님과 학교에서 직접 글짓기를 지도하신 두 분 선생님을 소개하고 그리고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상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신 시인들을 소개했다. 그 아래 전시상자에는 위와 연관된 저작물, 육필원고, 6,7십 년대 각 초등학교 글짓기 문집과 아동문학 회보 및 전국글짓기대회에서 입상한 상주어린이들의 당선 작품집 동시의 마을을 전시했다.

실내의 전면 왼쪽모서리 서가에는 아동문학의 주역들과 상주 문인들의 창작물을 전시 했다. 이어서 상주의 현대문학으로 김주희, 장지연, 이대희, 김구용 시인의 인물 소개와 가사와 시를 게시하고 그에 따른 자료를 상자 안에 담았다. 그 다음으로 상주의 현대문학 편으로 서클별로 창립연대와 성향, 회원소개를 하고 회지를 상자 안에 전시했다. 그리고 강당 중앙을 활용하는 특별전에 대비하여 이동전시대 5개를 제작해 두었다.

적은 인물들이지만 낙동강 3대 누정문학의 소개로 낙동강문학관의 명분을 세우고, 내력 깊은 상주문학의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 중앙 홀, 낙동강의 3대루정문학

 

자연과 인문이 조화를 이룬 강문화의 창출은 유장한 강의 흐름에 상징적 의미를 더해준다.

무한한 창작의 원천인 낙동강은 우리의 역사요, 노래이며, 생명이다. 어제와 오늘의 낙동강 문학을 조감하고 내일의 강 문학을 열어가는 염원을 담는다.

 

*낙동강 3대루

낙동강은 누정문학의 현장이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풍광이 좋은 곳에 누정을 지어 아름다운 자연을 즐겼다. 휴식과 풍류생활의 공간이자 시문창작의 산실이었으며, 만남을 통한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래된 누정에는 유구한 역사와 함께 주요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으며 누정제영(樓亭題詠)을 통해서 시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1) 영호루(映湖樓)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하여 여러 차례 홍수로 유실, 1970년 안동시 강남로 187-5(정하동)에 새로 지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몽진한 인연으로 친필 현판을 내렸다. 통판通判 신자전申子展이 누각의 제도를 더 크게 하고 편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 빛나고 있다.백문보白文寶 금방기金榜記외 다섯 편의 기문이 있고 김방경의 시외 50여 편의 시가 있다.

 

2) 관수루(觀水樓)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을 지닌 관수루는 고려 중엽 영남로의 길몫이자 낙동나루의 북쪽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강변에 세워졌으나 유실, 1653(효종 4)목사 이지무李枝茂가 중수하고, 1734(영조 10) 상주목사 김태연金泰衍이 중건했으나 1843(고종 11)홍수로 떠내려가 사라진 것을 1989년 양도학(梁道鶴)의 특지로 의성군 단밀면 낙정나루 위쪽에 복원하였다. 유호인,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주세붕, 이 황, 권상일 등 많은 선비들이 시와 명문을 남겼다.

 

3) 영남루(嶺南樓)

경남 밀양시 중앙로 435(내일동)에 있는 누각으로 밀양도호부 옛 객사의 부속건물이다. 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 세워진 영남사嶺南寺8세기 중반 폐사되고, 1365(공민왕 14) 당시 밀양군수 김 주가 신축하여 영남루라 했다. 보물 147. 1844년 중건,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걸린 시판(詩板)300여 개인데 시가 많은 시루(詩樓)로 알려져 있다.

 

<낙동강 3대 누문학 (9, 작품 인물 소개)>

 

* 영호루

映湖樓영호루

嶺南遊蕩閱年多 영남유탕열년다 영남에서 호탕하게 여러 해 놀았건만

最愛湖山景氣加 최애호산경기가 영호의 좋은 경치 가장 사랑하였네.

芳草渡頭分客路 방초도두분객로 방초 짙은 나루터엔 나그넷길 나뉘고

綠楊堤畔有農家 녹양제반유농가 푸른 버들 우거진 언덕 농가가 있네.

風恬鏡面橫煙黛 풍염경면횡연대 바람 잔 수면에 안개 비끼니

歲久牆頭長土花 세구장두장토화 해 묵은 담장머리 이끼도 무성해라.

雨歇四郊歌擊壤 우헐사교가격양 비 개인 들판에서 들리는 격양가

坐看林秒漲寒搓 좌간임초창한사 수풀 끝엔 차가운 삭정이가 자라네. -우탁

 

우탁禹倬(1263-1343)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천장天章. 호는 역동易東. 시호는 문희文僖. 본관 단양. 관직은 성균제주成均祭酒. 전하는 시조에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춘산에 눈 녹인 바람’ ‘한 손에 막대 잡고두 수가 있다. 호방한 성품을 바탕으로 영호루의 경치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映湖樓영호루

飛龍在天弄明珠 비룡재천롱명주 나는 용 하늘에서 회롱턴 구슬

遙落永嘉湖上樓 요락영가호상루 멀리 영가 고을 영호루에 떨어졌네

夜賞不須勤秉燭 야상불수근병촉 밤에 구경할 때 촛불 켤 일 없네

神光萬丈射汀洲 신광만장사정주 신기한 광채가 물가를 쏘니 -정도전

 

정도전鄭道傳(?-1398) 조선 초기의 학자. 개국공신.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峯. 시호 문헌文憲. 본관 봉화.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존오, 등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를 지냄. 문집에 삼봉집이 있다.

 

映湖樓영호루

十年前遊入夢淸 십년전유입몽청 꿈길 속에 흘러간 십년 세월

重來物色慰人情 중래물색위인정 당시 풍물 다시 보니 반가웁구나

壁間奉繼嚴君筆 벽간봉계엄군필 벽 위에 아로새긴 아버님 글월

堪陀愚我萬戶行 감타우아만호행 어린 몸 벼슬길이 죄송하여라 -김흔

 

김흔金忻(1251-1309) 고려 후기의 장군. 평장사 김방경의 아들. 관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아버지의 시를 차운한 아들 김흔과 고손자 김구용(1338-1384)이 지은 차운시가 걸려있다. 소년시절 놀았던 고향의 옛 모습과 풍류가 남아 있어서 위안 받은 심정이 드러나 있다.

 

* 관수루

洛水吾南國  낙수오남국 우리 남녘의 낙동강은

尊爲衆水君 존위중수군 여러 강에서는 으뜸일세.

樓名知妙悟 누명지묘오 누의 이름에서 오묘함을 알며

地勢見雄分 지세견웅분 지세에서 웅장히 나뉨을 보네.

野濶烟凝樹 야활연응수 들이 넓으니 연기가 숲에 맺혔고

江淸雨捲雲 강청우권운 강이 맑으니 비가 구름을 걷네.

忽忽催馹騎 총총최일기 바쁘게 달리는 말 재촉함은

要爲趁公文 요위진공문 서둘러 공문을 나르기 위함일세. - 이황

 

이황李滉(1501-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시호 문순文純. 본관 진보眞寶. 1533년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 급제. 대제학 지냄. 동방의 주자로 불림. 1555년 사액서원인 도산서원을 지어 학문과 사색 생활을 계속함,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 대표적 학자. 이기이원론 주장. 영남학파 형성. 153535세 때의 어느 여름날 호송관護送官의 임무를 수행 중에 비를 피해 관수루에 올라 지은 시이다. 관수루라는 누 이름에 담긴 깊고 오묘한 뜻과 누가 세워진 곳의 경관이 빼어남을 나타냈다. 문집에성학십도』『주자서절요』『계몽절의』『퇴계집2도산십이곡

 

潢池遠脈斷山通 황지원맥단산통 황지의 먼 맥이 산을 끊고 통해

天理滔滔勢不窮 천리도도세불궁 천 리 길 도도한 물살 다함이 없네

深伏魚龍成窟宅 심복어룡성굴택 깊은 못엔 어룡이 숨어 굴집을 짓고

碁分郡邑限東西 기분군읍한동서 바둑판처럼 군읍을 동서로 나뉘었네

氷鹽來往千檣集 빙염내왕천장집 곡식 소금 나르느라 천의 돛배 모여 들고

川澗奔趨萬水洞 천간분추만수동 골짝 물 바삐 몰려와 만 가닥이 한 물일세

此去海門知幾許 차거해문지기허 여기서부터 바닷물까진 몇 리나 되랴

淡雲纖霧遠望中 담운섬무원망중 담섬한 운무 가운데 아득히 바라보네

-권상일

 

권상일權相一(1679-1760)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자 태중台仲. 호 청대淸臺. 시호 희정僖靖. 본관 안동. 1710년 문과 급제.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80세에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유고로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등이 있다. 유장한 낙동강의 흐름과 번화한 교통 등 풍성한 시정을 느끼게 한다.

 

 

樓下網船千萬緡 누하망선천만민 누각 아래 배에는 천만금을 실었으니

南民何以堪誅求 남민하이감주구 남쪽의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못 견디리.

甁罃己磬橡栗空 병영기경상율공 쌀독은 비고 도토리 밥도 없는데

江干歌吹椎肥牛 강간가취추비우 강가에는 노래 부르며 살찐 소를 잡는구나.

皇華使者如流星 황화사자여유성 나라의 사신들은 유성과 같건마는

道傍觸髏誰問名 도방촉루수문명 강가의 해골들은 누가 허물이나 묻겠는가? 洛東謠낙동요 일부 -김종직

김종직金宗直(1431-1492) 조선 성종 때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季昷, 효관孝盥. 호점필재佔畢齋. 시호 문간文簡. 본관은 선산. 1459년 문과 급제. 벼슬은 형조판서.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났다. 야은冶隱의 학통을 이어받아 김굉필, 정여창 등 많은 제자를 길렀고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 높다.낙동요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점필재의 진실된 시관이 돋보인다.

 

* 영남루

嶺南樓下大川橫

嶺南樓下大川橫 영남루하대천횡 영남루 아래 큰 물 비껴 흐르고

秋月春風屬太平 추월춘풍속태평 가을 달 봄바람이 태평이로세.

忽得銀魚森在眼 홀득은어삼재안 문득 눈앞에 삼삼한 은어

斯文笑語可聞聲 사문소어가문성 사문의 웃음소리 귀에 들리는 듯

-이색

 

이색李穡(1328-1396) 고려 말의 성리학자. 여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본관은 한산. 14세에 진사 성균시에 합격, 26세에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 이듬해 원나라 회시에 장원, 원나라 관직에 등용되었다가 귀국. 홍건적의 난을 치르고 성균대사성,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한산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조선 건국 후 여러 곳으로 유배 다니다가 졸하다. 목은시집이 있다. 영남루의 경관과 사문의 웃음소리가 조화를 이룬 시다.

 

嶺南樓영남루

聞說神仙有洞天 문설신선유동천 들려오는 이야기에 신선이 살고 있는 골짜기를

六鰲頭戴忽移前 육오두대홀이전 여섯 마리 자라가 머리에 이고 이 앞에 옮겼다지.

晴天芳草好風裏 청천방초호풍리 하늘은 맑고 냇가의 우거진 풀에는 산들바람 일고

孤鶩落霞斜日邊 고오낙하사일변 외로운 따오기 지는 노을은 석양 가에 있네.

廣野馬牛分客路 광야마우분잭로 넓은 들에 있는 말과 소는 나그네 길을 분간하고

遠村鷄犬接人煙 원촌계견접인연 먼 마을 닭과 개 짖는 소리 인가에 연기가 솟네.

別區光景言難竟 별구광경언난경 특별한 곳 풍경을 말로 다하기 어려워서

畵取吾將獻御筵 화취오장헌어정 나는 그림으로 그려다가 임금님께 바치려네. -문익점

 

문익점文益漸 (1329-1398) 고려 말의 문신, 학자. 자 일신日新, 호 삼우당三憂堂. 본관 진주, 강성현(지금 경남 산청)출생. 공민왕 때 문과 급제, 정언正言에 이름. 1363(공민왕 12)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올 때 목화씨를 가져와서 장인 정천익과 고향 산청에서 재배 보급했다. 신선이 산다는 동천과 그림으로 그려서 임금께 바치겠다는 의도와 함께 이에 따른 시적 구성과 미감이 잘 나타나 있다.

 

嶺南寺竹樓 영남사죽루

嶺南山水甲吳興 영남산수갑오흥 영남사의 산수는 오흥에서 제일인데

樓上春來偶一登 누상춘래우일등 봄이 와 누각 위에 한 번 올라갔다네.

橫皺愁眉孤岫遠 횡추수미고수원 근심 어린 눈썹을 찡그리니 외로운 산봉우리 아득하고

平鋪淨練碧波澄 평포쟁련벽파징 고요한 맑은 강에 푸른 물결이 깨끗하네.

雲飛畫棟歸湘浦 운비화동귀상포 날아가는 구름이 그려진 기둥은 상수포 물가와 같고

風送魚舟入武陵 풍송어주입무릉 고깃배 바람에 실려 무릉으로 돌아가네.

吟罷揮毫留粉壁 금파휘호유분벽 시를 읊은 뒤에 붓을 휘둘러 죽루 기둥에 쓰니

重遊聊欲記吾曾 중유료욕기오증 다시 와 놀 때 나의 자취를 기념하려는 것이라네. -임춘

 

임춘(林椿 1171-1197) 호 서하西河.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정중부의 난(1170)을 피하여 상주 영현인 개령 대곡(한골)에 우거함. 당대 이규보, 권오복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로 이름을 얻었으나 불운한 생애로 30세에 요절하였다. 이인노가 서하선생집서문에서 해동에서 포의로 웅세(雄世)한 분은 서하 한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고시 170여 수 가운데는 상주에서 제작한 시가 많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가 전한다. 아름다운 경관의 묘사와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무릉으로 돌아감을 나타냈다.

 

*전시 상자-난재 채수의 설공찬전薛公瓚傳

 

난재懶齋 채수蔡壽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상주 이안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지은 소설이다. 1997년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에 의해 발굴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설공찬이 죽어 저승에 가서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이 죽은 자의 이승행적에 따라 선악의 심판을 내린 사실을 이승 사람에게 알려주는 이야기로 공간적 배경은 호남의 순창이다.

 

. 1전시실. 낙동강과 상주문학(상주 선비 16소개)

 

상주는 구석기 시대부터 낙동강 가에 터를 잡아 풍요로운 농경문화를 이룩한 고을이다. 7백리 낙동강이 비롯하는 퇴강에서 낙단보(낙동나루) 까지의 상주 낙동강은 경천대를 비롯하여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상주는 이상향인 우복동의 전설이 내려오는 살기 좋은 곳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인문환경과 낙동강의 혜택을 입어 다채롭고 풍성한 상주문화를 창출하였다. “이 땅은 참으로 책 많고 현인이 많았던 고장이요, 신선이 살던 고을이라고 창석은낙강범월시서에서 일컬었으니 상주의 낙동강은 문학의 현장이다. 면면히 이어온 낙강시회와 가사문학, 격조 높은 시문학과 설화는 강 문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새롭게 전개될 낙동강 시대, 문화가 흐르는 낙동강의 중심에서 인문의 큰 바다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가리라.

 

1) 역대 상주 문학 소개(12)

 

자술自述

歸夢尋常洛水濱 귀몽심상낙수빈 꿈은 늘 낙동강 가로 돌아가나니

舊居魚鳥與爲隣 구거어조여위린 옛집은 고기와 새 이웃한 곳이라네

平生性懶悠悠者 평생성나유유자 평생에 게으런 성품 유유튼 사람인데

老境官閑得得身 노경관한득득자 늘그막엔 벼슬 한직이라 몸조차 한가하네

病不廢詩還是病 병불폐시환시병 아파도 시 못 버리니 이게 진짜 병이요

貧猶好酒自長貧 빈유호주자장빈 가난해도 술 좋아하니 늘 가난할 밖에

無聊世事都抛擲 무료세사도포척 지겨운 세상 일 다 던져 버리니

始信蒙莊我故人 시신몽장아고인 비로소 알겠구려 장주莊周가 내 벗임을

-허백정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1438-1054) 조선 초기 문인. 자 겸선兼善. 시호 문광文匡. 본관 부계. 상주 함창 양적리 출생. 1461년 문과 급제. 좌참찬 지냄. 문형으로 많은 인재 선발. 실천유학 신봉. 불의에 과감하여 연산군의 폭정에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갑자사화(1504)에 목숨을 잃음. 시문에 능하여 등루부登樓賦60황화집皇華集올라 인구에 회자됨. 동문선에도 30여 편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三灘泛月 삼탄지월

三灘烟浪夕陽天 삼탄연랑석양천 삼탄 연하 같은 물결엔 석양빛 내리는데     

共向梅湖泛酒船 공향매호범주선 함께 매호에다 술 실은 배 띄우네.        

兩岸丹楓和客醉 양안단풍화객취 강 언덕 단풍도 손과 더불어 취했는데      

滿江秋月下牛淵 만강추월하우연 낙강 가득 가을달빛 우연으로 내리네. 

-강신

 

- 동고東皐 강신姜紳(1543-1619) 자 면경勉卿, 호 애련재愛蓮齋. 부 강사상姜士尙. 1567 사마시에 장원. 1577 별시 문과 갑과에 장원. 벼슬 좌참찬, 진흥군에 봉해졌다. ‘낙동강을 읊은 시로서 널리 읽혀진 시이다. 자연과 합일된 물아일체의 호방한 경지를 보여 주었으며, 전구에서 절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상산지에 수록되어 있다.

 

遠行원행

三年草土命猶頑 삼년초토명유완 삼년 거상居喪에 목숨 오히려 끈질기고

嶺外間關道路難 영외간관도로난 남영南嶺의 관문에 길은 험난하였네.

夜徹曉河征鐸動 야철효하정택동 하수河水가에 밤 지새우니 진중의 바라 요란하였고

風饕虛館客衣寒 풍도허관객의한 빈집에 바람 몰아치니 손의 옷 차가웠네. 驛程春早梅含信 역정춘조매함신 역정 이른 봄에 매화 피려하는데

山間氷消水咽灘 산간빙소수인탄 시내에 얼음 녹으니 여울물 흐느끼네.

愁倚小窓懽意少 수의소창환의소 시름 겨워 들창 기대니 기쁜 마음 없는데

此間懷抱若爲寬 차간회포약위관 뉘라서 이 회포 위로해 주리.

-조정

 

- 검간黔澗 조정趙靖(1552-1636) 자 안중安仲.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사사. 1605 증광문과에 급제. 벼슬은 봉상시정奉常寺正. 임란에 창의하였고 임란일기(보물 1003)를 남겼다. 1622년 당시 도남서원 원장으로 낙강범주유를 주선하였다. 검간선생문집 있다.

 

得之字 자를 얻어서 (天啓壬戌秋七月旣望 洛江泛月詩帖)

 

往事都隨流水盡 왕사도수류수진 지난 일이 다 물길 따라 사라졌으나

惟有道者名不衰 유유도자명불쇠 오직 도는 있는 자의 이름은 쇠하지 않네.

要今澡雪此身累 요금조설차신누 깨끗한 눈으로 이 몸의 때 씻어

心德不媿淸連漪 심덕불괴청연의 심덕은 맑은 물결에 부끄럽지 않고 싶네.

-이 전

 

- 월간月澗 이전李㙉(1558~1648인조 때의 문신. 자는 숙재叔載본관 흥양. 서애의 제자로 주자학을 전공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감이 형재애가 출천하여 형제급란도 주인공

 

1622년의 낙강범洛社會次李叔平韻 낙사회차이숙평운

 

蕭蕭白髮映尊中 소소백발영존중 쓸쓸한 백발 술잔에 비치는데

人世唯應此道公 인세유응차도공 세상살이 이 공도公道 따라야 하리.

千里倦遊寒暑改 천리권유한서개 천 리에 고달픈 여행 해가 바뀌었는데

一筵佳興笑談同 일정가흥소담동 오늘은 한자리 모여 흥에 겨워 담소하네.

不慙九老香山會 불참구노향산회 구노九老의 향산회香山會에 부끄러울 게 없으니 無讓諸賢洛社風 무양제현낙사풍 제현의 낙사풍류 사양치 마시기를

要識吾鄕多上壽 요직오향다상수 우리고을 상수자 많음은

蓬壺近在彩霞東 봉호근재채하동 신선골이 이 고장 가까이에 있음일세.

-전식

 

- 사서沙西 전식全湜(1563-1642) 인조 때의 문관. 자 정원淨遠. 시호 충간忠簡. 본관 옥천. 류성룡과 장현광의 문하생. 1603년 식년문과에 급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지내고 대사헌에 보직 됨. 당대 향토사림의 모범을 보임. 조선사신으로 명나라에 마지막 다녀왔다.

 

梅花落春曉 매화낙춘효 매화 떨어지는 봄날 새벽

無數啼山鳥 무수제산조 무수히 산새가 우네.

半入主人簾 반입주인렴 반은 주인의 발 안으로 드니

餘香在枝少 여향재지소 남은 향기 가지에는 줄었네.

古人雖不見 고인수불견 옛 사람 비록 못 보아도

勝事眞相符 승사진상주 멋진 일은 진실로 한 가지일세.

是時宿雨收 시시숙우수 때마침 장마 걷으니

烟景如畵圖 연경여화도 안개 낀 경치 마치 그림 같네 .

-류진

 

- 수암修巖 류진柳袗(1582-1636) 계화季華서애의 셋째 아들로 37세에 안동에서 상주 중동면 가사리로 이주함. 진사 장원을 거쳐 학천으로 지평에 이름. 서애의 실천유학을 상주에 뿌리내리는데  공을 하였고, 한글본임진록임자록 남김. 임술년낙강범월에 자를 얻어 처음 5언시를 지었으나 마음에 차지 않아 다시 칠언시로 읊었다. 그러나 처음 작품도 감히 숨길 수 없어 나란히 밑에다 부록한다고 하다.

 

自天臺 자천대

奇巖斗起自成臺 기암두기자성대 기이한 바위 우뚝 솟아 절로 대를 이루고낙동강이름의 실체 확인과

翠壁東西碧水回 취벽동서벽수회 푸른 졀벽 동서에 푸른 물이 감도네.

矗矗豈容人力築 촉촉기용인력축 우뚝 솟은 자천대 어찌 사람의 힘으로 쌓았으랴

層層應是化工栽 층층응시화공재 층층이 포개진 게 조화옹의 공력일세.

雲收玉柱珠簾捲 운수옥주주렴권 옥주봉 구름 걷히면 주렴을 걷는 것 같고

日射丹崖畫障開 일사단애화장개 붉은 절벽 해 쏘이면 그림병풍 펼치는 듯

最愛高標千白尺 최애고표천백척 가장 사랑스러운 건 높다란 천백 척이

直擎天闕任無頹 직경천궐임무퇴 곧 바로 하늘을 받들어 무너짐 없게 함일세

-채득기

 

-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1604-1646) 인조 때의 학자. 본관 인천. 經史百家의 글을통독하여 역학에 정통하였고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음률, 병법에 밝은 선비로 병자호란 때 자천대自天臺(경천대擎天臺)에 터를 잡아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여덟 자를 새겨 숭명을 표방하여 은둔하였다.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세 왕자를 8년간 모시고 돌아온 충신. 고국을 떠나며 읊은 한글가사 봉산곡鳳山曲, 일명 천대별곡天臺別曲 82구는 충신연주지사로 널리 알려졌다. 우담십영雩潭十詠으로 자천대는 낙동강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天雲堂천운당

小塘多幾酌 소당다기작 작은 연못에서 몇 번이나 놀았던가

萬里天雲來 만리천운래 만 리 하늘에 구름이 오네.

不死源頭注 불사원두주 다함없는 근원의 물을 대니

惟虛半面開 유허반면개 오직 빈 반면이 열리네.

燕飛嫌蹴鑑 연비혐축감 제비 날아 거울 찰까 혐의하고

風過恐浮埃 풍과공부애 바람이 지나가니 티끌 뜰까 두렵네.

未放下詩什 미방하시십 시 짓기를 내치지 아니함은

爲光影轉催 빛과 그림자 급박히 재촉하길 위함일세

 

-이만부

 

-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이조 영조 때의 학자. 자 중서仲舒. 본관 연안. 신기가 초월하였고 문자에 능하였으며 글에 있어서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사학적洙泗學的 실천유학을 궁행한 성리학자, 실학사상 실심실학을 창도한 실학자. 조선정신을 문학의 도로 삼은 문학자. 서도가(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 종정鍾鼎의 체)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시문은 난형蘭馨 옥결玉潔 같은 문체로 빛났다. 역통易統, 대상편람大象便覽, 식산집息山集이 있다.

 

道南書院 靜虛樓 도남서원 정허루

江涵秋影水烟空 강함추영수연공 강에 가을 그림자 잠기고 물에 연기는 비었는데  人在欄干十二中 인재난간십이중 사람은 정허루 열 두 난간 가운데 앉았네.       霜露蒼蒼迷極浦 상로창창미극포 세월은 창창하여 먼 갯가에 아득하고         

松衫歷歷響流風 송삼역역향류풍 도맥道脈은 역력히 옛 유풍을 울려주네.

斯文典則千年遠  사문전칙천년원 사문의 전칙은 천년이나 아득한데     

吾道東南一氣通 오도동남일기통 우리 유학의 도는 동남으로 와서 한 기운으로 통하네.     

多士祗今虔酹酒 다사지금건뢰주 많은 선비가 지금도 경건하게 술잔 드리니     

衣冠濟濟佩聲同 의관제제패성동 수많은 훌륭한 인재 패옥소리 한가질세. -강필공

 

- 과해寡諧 강필공姜必恭(1717-1783) 자는 희조希祖, 호은壺隱. 당대 문명을 얻은 선비. 임하 이경유가창해시안滄海詩眼에서 우리 향리의 과해자寡諧子는 국포菊圃 강박姜樸의 족자(族子). 궁벽진 곳에 은거하여 평생에 문예로서 세상에 알리지는 못하였으나 지은 시가 자못 아름다웠다고 평했다. 낙동강 무임포에 자리 잡은 도남서원의 정허루는 아름다운 시의 공간이다.

 

滄茫沙伐國 창망사벌국 창망한 사벌국이

羅代廢爲州  나대폐위주 신라 때에 폐하여 주가 되었네.

設官還牧守 설관환목수 관리는 목사를 두어 지켯지만

地大居民稠 지대거민조 땅은 크고 사는 백성은 조밀했네.

鄕多士君子 향다사군자 향리엔 사군자가 많아

文物壇上流 문물단상류 문물이 상류에선 으뜸일세

商山高歌謠八章六句 중 한 편 -이경유

 

-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1750~1821자는 덕무(德懋식산 이만부의 증손이며 강재剛齋 이승연의 아들이다. 가학으로 도학과 문학을 전수하였고, 학천으로 참봉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평생을 문학에 바친 시인이다. 문집임하유고林下遺稿시평집에창해시안滄海詩眼이 있다.

 

自天臺 자천대

自天臺下水如天 자천대하수여천 자천대 아래 강물은 하늘과 같이 푸르며     

臺上丹楓映水鮮 대상단풍영수선 대 위의 단풍은 물에 비치어 곱구나       

一曲平沙鷗鷺靜 일곡평사구로정 한 구비 평사에 갈매기들이 조용한데      

夕陽歸客上漁船 석양귀객상어선 석양에 돌아가는 길손이 고깃배로 오른다

-류주목

 

-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낙파 류후조의 장자. 학문에만 전심하여 유일遺逸로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많은 후진을 양성, 경학經學 중망重望이 일세에 사표가 됨. 321명에 이르는 문하생을 두어 영남학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함. 문집으로계당집溪堂集이 있다. 자천대의 가을 풍경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商山道中상산도중 상주 가는 길

金陵歸客滯尙州 금릉귀객체상주 김천으로 가는 손이 상주에서 체류하여

店飯聽鷄弘治樓 점반청계홍치루 닭소리 들으며 홍치루서 아침 먹다

販藥遠商候月語 판약원상후월어 먼데 가는 약장사 달빛으로 시간 재고

春梁少婦見星愁 춘량소부견성수 기장 찧는 젊은 아낙 별 보고 근심하네.

天寒一啄高尻鶴 천한일타고고학 추운 날 먹이 찾아 꽁지 쳐든 학

野曠三呼曲角牛 야광삼호곡각우 텅 빈 들판 너머 울어대는 뿔 굽은 소

世上莫歎無食食 세상막탄무식사 먹을 식량 없노라고 탄식하지 마세나

豐年百姓勝封侯 풍년백성승봉후 풍년 든 해 백성은 봉후보다 낫다오.

-황오

 

- 녹차綠此 황오黃五(1816-?) 상주가 낳은 조선말의 걸출한 시인. 자 사언四彦, 어릴 때 이름은 리노里老. 자호는 녹차거사綠此居士, 한안漢案, 천지天志, 해동초이海東樵夷. 방촌의 후예로 함양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상주 모동 수봉으로 이사하였다. 호 녹차는 압록강 이남에서는 제1이라는 자긍심에서 자호를 삼았으며 자신이 중국 황정견黃庭堅, 소식蘇軾의 후신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문집에녹차집綠此集이 있다.

 

2) 1 전시실 인물모형으로 소개 (4사람)

 

이안천이 동으로 달려가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산은 물에 닿아 마치 누에머리 같네. 날아갈듯 한 정자가 있으니 쾌재정이라네. 동으로 학가산을 바라보고 서쪽은 속리산이며, 남으로는 갑장산을 우러르고 북으로는 대승산일세. 강산이 구불구불 비단폭을 펼쳐 놓았는데 주인은 누구인가 채기지라네.

快哉亭記쾌재정기에서 -채 수

有川東走如垂虹也 有山臨流如蠶頭也 有亭翼然名快哉也 東望鶴駕西俗離也 南瞻甲長北大乘也 江山鬱紆羅脚底也 主人者何蔡耆之也

 

- 난재懶齋 채 수蔡 壽(1449-1515) 조선의 문장. 자 기지耆之. 본관 인천. 1469년 문과 장원 급제(삼장三場 연괴連槐) 벼슬길에 나아갔다. 인조반정에 인천군에 봉해졌으나 용퇴하였다.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贊傳을 지어 필화를 입었으나 진퇴가 분명한 직신으로 만년에 함창 이안에서 살았다. 1509년경에 세운 쾌재정快哉亭은 휴양처이자 창작처가 되었다. 시문독학부獨鶴賦」「칠률七律이수二首지락헌기至樂軒記」「유송도록遊松都錄등의 산문이동문선에 수록 되었다. 문집에 난재집懶齋集이 있다.

 

 

窮途任意寓尊疊 궁도임의우존첩 궁한 길 뜻에 맡겨 높은 누에 부치니

病客扶春幾眼界 병객부춘기안계 병든 손, 봄을 의지해 몇 번이나 눈을 열었던가.

東闊地形偏窈窈 동활지형편요요 동은 넓고 지형은 편벽되어 요요한데

北來山來遠崔崔 북래산래원최최 북에서 내린 산세 아득히 높고 크네.

風生細經寒搖竹 풍생세경한요죽 가느린 지름길에 바람 일어 차갑게 대를 흔들고

月轉深窓靜放梅 월전심창정방매 깊은 창에 달이 돌아 고요히 매화를 피우네.

空壁近樓高興發 공벽근루고흥발 창공이 누에 가까워 높은 흥 이니

中林一鳥好詩催 중림일조호시최 숲 가운데 새 한 마리 좋은 시를 재촉하네.

沙谷樓사곡루-노수신

 

-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 명종 선조 때의 명신. 자 과해寡海 호 이재伊齋, 여지노인茹芝老人. 시호 문의文懿. 본관 광주. 1543 식년문과에 장원, 영의정. 진도 19년 유배기간 학문 성취. 성리학과 양명학에도 일가 이룸. 소재는 당대 내로라하는 시인으로 선조 때에는 송시宋詩의 산문화 경향과 지나친 이성주의에 반발하여 섬약한 당시풍을 좋아하지 않았다. 힘이 있고 난해한 시를 창작하였는데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정사룡鄭士龍(1491-1570), 황정욱黃廷彧(1532-1607)과 함께 관각삼걸館閣三傑로 일컬었다,

 

 

明時명시예 린 몸이 物外물외예 누어더니

갑업 風月풍월과 임 江山강산을

造物조물이 許賜허사야 날을 맛겨 리시니

늬라 며 다토리 뉘 이시리

매호별곡梅湖別曲 서사-조우인

 

-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1561-1625) 선조 때의 문관. 자 여익(汝益), 호 매호梅湖. 본관 창녕. 160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급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름. 조선조 중기 영남이 낳은 명현의 한 사람. 노계 박인로와 나란히 국문학사상 가사문학으로 이름 남. 가사 작품으로자도사自悼詞」「출새곡出塞曲」「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매호별곡梅湖別曲이 있다. 매호별곡은 만년 작품으로 은서지隱棲地 상주 사벌면 매호리 상산 낙빈洛濱에서 매호십리강산을 보고 읊은 서경시적 품격이 짙은 서경가사다.

 

溪亭((계정)

溪水淸如鏡 계수청여경 시냇물은 맑기가 거울 같고

茅堂狹似船 모당협사선 띠집은 좁다란 게 배와 같네.

初回大槐夢 초회대괴몽 처음으로 대괴몽을 돌려

聊作小乘禪 료작소승선 애오라지 작은 절의 중같이 지내네.

投飯看魚食 투반간어식 밥을 던져 고기 먹는 걸 구경하고

停歌待鷺眠 정가대로면 노래 멈추어 해오라기 잠을 기다리네.

柴門終日掩 시문종일엄 가시삽짝 종일 닫고

孤坐意悠然 고좌의유연 홀로 앉았으나 뜻은 유연하네.

계정-정경세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인조 때 성리학자. 자 경임景任. 시호 문장文莊. 서애 문인.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 이조판서, 대제학. 퇴계의 수제자 서애西厓에 사사師事. 성리설에 독자적 견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궁중의례를 정비한 예학자. 노론老論의 거유巨儒 송준길宋浚吉을 사위로 맞음. 우산동천에 계정을 짓고 자연 완상, 독서하였으며 만년 대산루에서 흥학육영興學育英에 전심전력하였다. 우복선생별집』『사문록四問錄』『상례참고喪禮參考

 

. 2전시실 낙강시회

 

1) 낙강시회洛江詩會의 주요 내력

낙동강의 승경을 완상하며 밝은 달 아래 배 띄우고 시를 노래한 역대 51회의 낙강시회를 연 시기와 시회 제목 및 개최 장소, 주요 인물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회 병진년(1196)백운낙강범주유(白雲洛江泛舟遊)견탄(犬灘 문경의 진남교 밑이규보   「過洛東江詩61수를 남김

 

2회 계미년(1343) 근재낙강환영연(謹齋洛江歡迎宴). 낙강 위. 상주목사로 부임한 근재(謹齋)    안축(安軸)을 위한 전목사(前牧使)의 환영연(歡迎宴)

 

3회 신묘년(1471) 점필재낙강관수루회(佔畢齋洛江觀水樓會)관수루. 김종직:洛東津」「洛東謠 동문선에 수록됨

 

4회 신해년(1491) 뇌계낙강범주시회(溪洛江泛舟詩會)관수루. 상주목사 강구손(姜龜孫)  의성 군수였던 뇌계 유호인(兪好仁)의 초청에 대한 답례로 이뤄짐. 뇌계집에관수루십절

 

5회 병진년(1496) 탁영수헌낙강관수루회(濯纓睡軒洛江觀水樓會)관수루. 탁영 김일손과    수헌 권오복탁영의與嚮之登觀水樓

 

6회 을미년(1534) 퇴계낙강관수루회(退溪洛江觀水樓會)퇴계 이황이 호송관으로 임무 수행 중 낙강의 관수루에서 이뤄짐낙동관수루

 

7회 신미년(1571) 정정공낙강관수루회(貞靖公洛江觀水樓會) 관수루. 강사상(姜士尙)이 경상감사로 지방순회 때 상주의 남계(南溪) 강응철(姜應哲 당시 10의 시재(詩才)를 시험 하여 이뤄짐

 

8회 정미년(1607) 상목낙강범주시회(尙牧洛江泛舟詩會)낙강 위. 상주목사 김이경, 장령     조비중, 수찬 이숙평, 도사 김정원군수 조덕화, 판관 김해중, 진사 황공직 등 상주출신 관료

 

9회 신유년(1621) 현주낙강범주유(玄洲洛江泛舟遊)자천대, 반구정, 합강정. 상주목사      조찬한. 범주시회(泛舟詩會)

 

10 임술년(1622) 창석낙강범월시회(蒼石洛江泛月詩會). 상산선비의 주선에 의함. 이희성, 조정. 이전. 이준, 강응철, 김혜, 김지복, 김정헌, 류진, 조우신, 이대규, 한극례, 김기, 이원규, 이문규, 이신규, 우처공, 구산립, 손윤업, 전식, 전극항, 전극념, 조광벽과 김정견은 시, 목사 조찬한은 편지를 남겨서 25인이 참여했다. 낙강시회의 모범으로 후세 영향. 상주출신의 국사적(國士的) 선비는 총망라낙강시회의 역사성을 부여한 점.1도남서원  범주(泛舟)귀암풍호점암(簞巖).2도남서원용연(자천대)반구정

 

11회 임술년(1622) 창석속낙강범월시회(蒼石續洛江泛月詩會)죽암. 이 준, 손윤업, 이원규   참석

 

12회 정유년(1657) 호옹낙강범주시회(湖翁洛江泛舟詩會)호옹 조정융과 사우당 조능 등이  죽암진에서 가진 시회호옹의범주죽암진

 

13회 임술년(1682) 사우당낙강범주시회(四友堂洛江泛舟詩會)죽암. 사우당(四友堂) 조능(趙稜). 상산의 선비로서 임술년을 맞아 낙강선유를 갖는다는 것은 기이한 인연일 뿐     아니라 일생의 사업의 하나로 여길 만큼 그 비중이 컸음을 보여 

 

14회 무자년(1768) 정와낙강선유시회(靜窩洛江船遊詩會)낙강 위. 조석철, 김치룡, 이세     , 조민경, 조석명, 조석목 19

 

15 경인년(1770) 지옹낙강범월속유(芝翁洛江泛月續遊)합강정관수루조경직조천경 김광철김이상이승연이화국 등 당대 상주를 대변할 선비 57인이 참석

 

16회 무술년(1778) 강세로낙강범월유(姜世魯洛江泛月遊). 합강정, 김광철, 강세로, 강사흠, 송사지정태암김남엽 

 

17회 계미년(1623) 전후 이재낙강매호복거(頤齋洛江梅湖卜居)매호동이재 조우인 상주 낙강의 상류인 매호동에 복거함으로써 수시로 이뤄짐江舍偶吟

 

18회 연대미상(17세기초반?)동고낙강삼탄범월유(東皐洛江三灘泛月遊)삼탄매호동고     .三灘泛月

 

19회 병자년(1636) 우담낙강자천대복거(雩潭洛江自天臺卜居)자천대, 우담 채득기가 자천대  밑에 복거함으로써 비롯됨

 

20회 신묘년(1651) 호옹낙강매호범월시회(湖翁洛江梅湖泛月詩會)매호. 호옹 조정융과 무첨재  정도응 

 

21회 연대미상(1600년대 초반) 창주낙강매호방선(滄洲洛江梅湖放船)매호. 도남서원창주    전극염

 

22. 계묘년(1663)목재낙강도남서원회(木齋洛江道南書院會(原名:洪判官韻)도남서원      홍여하가 도남서원강당중수시에 서원을 방문한 시회

 

23회 병자년1696상목낙강자천대유(尙牧洛江自天臺遊). 상주목사 이항손만웅손경욱 10여인

 

24회 무인년(1698)야촌낙강도원회(野村洛江道院會)도남서원. 손만웅이선지. 상주목사 이식송번이성서 

 

25회 연대미상. . 이길보낙강도원회(李吉甫洛江道院會)도남서원. 자천대. 이성철. 성세황경승 

 

26회 연대미상 8월 부훤당낙강범주유(負暄堂洛江泛舟遊)도남서원자천대 성세     채명구 

 

27회 기묘년(1699) 전천서낙강도원회(全天敍洛江道院會)도남서원기묘년 동짓달 보름에  당시 도남서원 원장 및 제유(諸儒)가 가진 문회

 

28회 정해년(1707) 부훤당낙강자대유범주(負暄堂洛江自臺遊泛舟)도남서원, 자천대. 부훤당     이증록성세황이만유성기인강신경  

 

29회 연대미상 봄(1708-1716) 성주서낙강범주(成周瑞洛江泛舟)자천대성세황강세계. 

 

30. 연대미상 정월(1708-1716) 서강낙강도원회(西岡洛江道院會)도남서원김용재김주세 형제와 조성지김대임 

 

31회 정유년(1717) 우헌낙강도원수창(愚軒洛江道院酬唱)도남서원. 우헌 채헌징, 송광삼 이시화정태승조인경김걸김자창조자경조자신곽사현 

 

32회 연대미상 가을(1718-1725) 노은낙강도원차홍목재운(老隱洛江道院次洪木齋韻)도남서    노은 조경직(曺景稷). 

 

33회 연대미상 봄(1719-1725) 권박낙강범주(權煿洛江泛舟)자천대정지모 권박

 

34회 병오년(1726) 성중진낙강송대유(成仲晋洛江松臺遊)송대(松臺)

 

35회 무오년(1738) 쌍백당낙강도원회(雙白堂洛江道院會). 도남서원. 쌍백당 성보한, 김세진윤상림 

 

36회 무오년(1738)쌍백당낙강도원차홍목재운(雙白堂洛江道院次洪木齋韻)도남서원쌍백      성보한김창달

 

37회 계사년(1773) 강세진낙강도원차홍목재운(姜世晋洛江道院次洪木齋韻). 도남서원. 정허루강위, 강세진, 김동익, 이최금, 

 

38회 기유년(1789) 강백흠낙강도원차홍목재운(姜伯欽洛江道院次洪木齋韻). 도남서원. 안동의 정경용영주의 박도중과 강백흠 

 

39회 무오년(1798) 남애낙강도원차홍목재운(南厓洛江道院次洪木齋韻). 도남서원남애 강봉흠

 

40회 연대미상(1664-1667 ) 무첨재낙강범월시회(無忝齋洛江泛月詩會)매호전강무첨재    정도응조정융박응형 

 

41회 연대미상(1664-1675 ) 백원유낙강(百源遊洛江)관수루죽암백원 신석번

 

42회 무인년(1698) 박천낙강범월시회(博泉洛江泛月詩會)자천대박천이옥. 상주목사 이만원전군수  류구숙이만성이만근이만부

 

43회 갑진년(1724) 식산낙강도원문회(息山洛江道院文會). 도남서원식산 이만부 상주목사 송인명권상일신정모오상원

 

44회 병인년(1746) 상목낙강무우정시회(尙牧洛江舞雩亭詩會)자천대무우정 중수한 병    인년에 중수연(重修宴)으로 시회와 유상(遊賞)으로서의 시회를 가짐상주목사  권상일

 

45회 무진년(1748) 청대낙강도원문회(淸臺洛江道院文會). 도남서원매호. 청대 권상일권한을 비롯한 장노와 유생 백여 명이 참석

 

46회 임술년(1802) 입재낙강범월유(立齋洛江泛月遊)낙강 입재 정종로

 

47회 신미년(1811) 임하낙강범주시회(林下洛江泛舟詩會).정허루자천대임하 이경유,강세륜임하는 詩社 秋水社 형성,  , 강세백, 강세륜 형제

 

48 병자년(1816) 입재낙강도원문회(立齋洛江道院文會)도남서원. 자천대. 입재 정종로가 도남서원에서 중용을 강론할 때의 문회. 강세백, 조정와, 이승연, 채기주. 

 

49회 연대미상(1817-1820) 곡구낙강자천대범월(谷口洛江自天臺泛月)자천대, 낙강 위. 곡구 정상관

 

50 무자년(1828) 강고낙강범주시회(江皐洛江泛舟詩會). 관수루, 낙강 위. 강고 류심춘이    강세륜, 강장흠, 황번노, 조혜 등과 퇴치암 봉황성을 거쳐 낙동진 관수루에 올라 시회를 가짐

51회 임술년(1862) 계당낙강범주시회(溪堂洛江泛舟詩會)낙강 계당 류주목

 

52 임오년(2002.8.2-3) 근곡槿谷 낙강시제洛江詩祭 근곡 박찬선이 2002년에 기존의 낙강시회를 낙강시제로 재현함.(경천대) 이후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에서 해마다 행사를 해오고 있는데 제70회 낙강시제를 2020912일 낙동강문학관에서 개최한다. 선인들의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호방한 문학정신을 잇고 강 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51회 까지의 순서는 권태을 역 낙강범월시 해제 8-11쪽에 따르고 편의상 일률적으로 순서를 매겼다.

 

2) 시대별 주요 낙강시회 소개(배경, 인물, 작품) 7

 

) 1196 병진년(명종 26) 백운낙강범주유白雲洛江泛舟遊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1168-1241)29세 때인 병진년 봄에 최충헌의 난을 피해 외가의 사위(모가후서母家後壻)가 목사로 있는 상주에서 3개월 남짓 머물렀다. 614일 상주에 들어와 한열병寒熱病에 걸려 화개사와 용담사에서 정양했다. 머무는 동안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유상遊賞하며 낙동강을 지나며(行過洛東江) 외 고시古詩 61수를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서기 최정분, 박문노가 주유舟遊에 참여했다.낙동강이름의 실체 확인과 그가 영남문학에 끼친 영향은 특기할만하다.

 

行過洛東江 행과낙동강

 

百轉靑山裡 백전청산리 푸른 산속을 수없이 돌고 돌아

閒行過洛東 한행과낙동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草深猶有露 초심유유로 수풀 깊어도 오히려 길은 났는데

松靜自無風 송정자무풍 소나무가 고요하니 절로 바람이 없네.

秋水鴨頭綠 추수압두록 가을 물은 오리머리처럼 푸르고 

曉霞猩血紅 효하성혈홍 새벽 놀은 성성이 피처럼 붉네. 

誰知倦遊客 수지권유객 누가 알랴, 게으르게 노니는 손이  

四海一詩翁 사해일시옹 사해에 시 짓는 한 늙은이인 줄을

-이규보

 

) 1622 임술년(광해군 14) 창석낙강범월시회蒼石洛江泛月詩會

 

낙강에서 가진 가장 뜻 깊은 시회로 상산 선비의 주선에 의하고, 상주 출신의 국사적國士的 선비는 모두 참여했으며, 낙강시회의 모범으로 후세에 영향을 주었고, 낙강시회의 역사성을 부여했다. 창석이 제안. 낙강의 영경靈景을 소동파의 적벽유赤壁遊처럼 촉경성취觸景成趣함에 목적이 있었다. 시회에는 이희성, 조정. 이전. 이준, 강응철, 김혜, 김지복, 김정헌, 류진, 조우신, 이대규, 한극례, 김기, 이원규, 이문규, 이신규, 우처공, 구산립, 손윤업, 전식, 전극항, 전극념, 조광벽과 김정견은 시, 목사 조찬한은 편지를 남겨서 25인이 참여했다. 임술범월록(낙강범월시)을 남겼다.

 

九華屛障連飛鳳 구화병장연비봉 아름다운 병풍은 비봉산에 이었고

千頃玻瓈接伴鷗 천경파려접반구 천이랑 맑은 물결은 반구정에 닿아 있네

占斷落霞來遠望 점단낙하내원망 저녁노을 독차지하여 와서 먼 곳 바라보니

分留晴景到冥搜 분유청경도명수 갠 하늘 나눠 두어 유원한 곳 이르렀네

득추자得秋字 자를 얻어서일부 - 이 준

 

) 1663 계묘년 목재낙강도남서원회木齋洛江道南書院會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1620-1674)가 도남서원 강당 중수 시에 서원을 방문한 시회다. 그의 제자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1717홍판관운洪判官韻을 정서하여 책으로 엮었다. 도남서원을 배경으로 한 홍판관운1663년에 비롯하여 1798년까지 135년 간 계속하여 누가기록 되었다. 낙강범월유와는 다르게 풍류위주가 아닌 창도倡道위주가 시회의 공통의식이다.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5세손으로 도학문장으로 추숭된 상주의 큰 선비이다. 휘찬려사彙纂麗史』『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등의 사서를 남겼다. 사우당四友堂 조능趙稜, 호옹湖翁 조정융曺挺融 등이 참가했다.

 

重修白鹿試來尋 중수백록시래심 도남서원중수 후 처음으로 찾았더니

輪奐驚懷聳嶽林 륜환경회용악림 웅장함에 놀란 가슴 악릴처럼 높네.

藏壁詩書隨燬燼 장벽시서수훼신 벽장의 시서책은 불길에 다 탔지만

滿堂賢俊集紳衿 만당현준집신금 강단에 어진 선비 가득 모였네.

중수시시重修時詩일부-홍여하

 

) 1770 경인년 지옹낙강범월속유芝翁洛江泛月續遊

 

임술낙강시회를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속유라 했는데 제2낙강범주시회라 할 만한 표본적 시회였다. 음력 716일부터 나흘간 개최. 참석자는 조경직, 조천경, 김광철, 김이상, 이승연, 이화국 등 57명이다. 18세기말엽 상주 선비가 모두 참여했다. 장소는 도남서원, 오산서당, 합강정, 홍백포주점, 관수루, 고봉서당, 검간별묘재서, 연악서원을 순회했다. 도문겸전道文兼全의 창작동기와 시회의 가치성을 부여하고 낙강문단을 이루었다.

 

얼굴에 불어오는 버들 숲 지난 바람과 마음속까지 비추는 명월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의미가 있고 맑은 소리와 빛이 쌍을 이루어 본디부터 끝이 없으니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面上吹之柳風 懷中照之明月 有一般之意味 爲雙淸之聲色 本自无邊 豈其有竭

차전적벽부次前赤壁賦-趙天經

 

) 1816 병자년 입재낙강도원문회立齋洛江道院文會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1738-1816자 사앙士仰. 우복의 세손. 유일遺逸 장령掌令 되었고 도학과 문장이 일대의 종사宗師이며 문집이 있고군서연어群書衍語수십 권을 저술하였으니 이는 모두 정자와 주자의 학을 따르고 정온精蘊 발휘하였으므로 학자들이 입재立齋선생이라 존칭하였다사앙은 경적이 배에 가득하여 문장이 전아하다. 그 시가 곧 그 사람이다.”(이경유 창해시안) 시를 짓는데 별난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상정常情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일도 소중하다고 보았다. 그가 도남서원에서 중용을 강론할 때의 문회이다. 동주洞主는 이경유李敬儒였는데 수백 인의 유생이 모였다. 강론 마친 뒤 도남서원에서 자천대 까지 선유, 참석자는 강천지, 조석철, 이승연, 채기주, 조술주. 낙동강의 유장함과 천 년 유도의 맥과 덕화德化를 찬양하였다.

 

肅肅臨江院 숙숙임강원 숙연히 낙강에 임한 도남서원에

蹌蹌講業群 창창강업군 정연히 학업 닦는 뭇 유생들

鳳翔思點瑟 봉상사점슬 봉황 날으니 증점의 풍류를 생각하고

虎暴唒由軍 호폭주유군 범 사나우니 중유의 용맹을 비웃네

至味徜如拳 지미상여권 직극한 도학의 맛은 곡식 맛이요

浮榮可視雲 부영가시운 뜬세상 영화는 구름보듯 하네

昔賢爲人切 석현위인절 옛 현인은 남에게 친절하여

惠我炳遺文 혜아병유문 우리에게 베푼 혜택 문학에 다 남겼네

기도보전운旣到步前韻일부 -정종로

 

) 1828 무자년 강고낙강범주시회江皐洛江泛舟詩會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1762-1834) 수암 류진의 증손. 무자년 716일 강고가 강세륜, 강장흠, 황반노, 조 혜 등과 낙암(죽암)에 배를 띄워 퇴치암 봉황성을 거쳐 낙동진 관수루에 올라 시회를 가졌다. 강고는 삼산이수의 승경으로 알려진 우천愚川에 살면서 낙강시회를 가장 많이 가졌다. 泊觀水樓作十三節을 남겼다. 선비의 우국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飜思民間事 번사민간사 새삼 민간의 일 생각하니

蟊賊將無秋 모적장무추 해충으로 거둘 가을이 없겠네

長吟杜子詩 장음두자시 길게 두자미의 우국시를 읊조리니

古人已先憂 고인이선우 옛 사람이 이미 세상 근심 먼저 했네

박관수루작십삼절泊觀水樓作十三絶 일부

 

) 2002 임오년 근곡낙강시제槿谷洛江詩祭

 

2002년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장 근곡 박찬선 시인이 역대 51회 낙강시회를 낙강시제로 재현하여 전국적인 문학행사로 해마다 경천대와 도남서원 일원에서 개최해오고 있다. 면면히 이어왔던 낙강시회의 역사성과 시의 제의적祭儀的 경건함을 담고자 낙동강시선집 발간과 문학 강연, 시화전, 백일장 등을 곁들이고 있다.

 

나는 당신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천의 말, 만의 말로도

빛나는 봄의 빛깔도도 그려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알의 밀알로

한 톨의 곡식으로도 옵니다.

잠시 불어 넘는 흔적 없는 바람

바람속의 잎으로도 옵니다.

1회 낙강시제 대회사 일부

 

. 다목적 기획실

 

1) 아동문학의 보고(寶庫)동시의 마을상주

 

1950년대 중반 이후 상주 어린이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동심을 읊은 동시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김종상(金鍾祥.1935~)선생이 1955년 외남초등학교에, 신현득(申鉉得. 1933~) 선생이 1956년 청동초등학교에 부임하여 글짓기 운동을 전개, 상주 어린이 글짓기 교육의 횃불을 올렸다.

 

청동, 외남, 상주초등 세 학교 어린이들의 글이 전국에 이름을 떨치자 대구일보문화부장 남 욱 기자가 상주글짓기교육 현장을 취재하여 195911일 신년특집 기사로 동시 꽃피는 마을을 소개했다. 19595,한국일보장정호 기자가 어린 문사의 고장이란 제목으로 연재했으며, 523-29일까지대구일보사강당에서 세 학교 어린이 시화전이 열렸고, 19591017-24일까지새싹회주관으로서울중앙공보관에서 어린이 문학촌시화전이 열렸다.

동시 꽃 피는 마을은 아동문학가 김성도 선생이 제일 먼저 붙여준 이름인데 이것을 윤석중 선생이 동시의 마을로 고쳐 부르고 1963년 상주 어린이 당선 작품집이 동시의 마을로 나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순박한 동심이 솟아나는 동시의 마을 상주는 한국 아동문학의 보고요, 보금자리로서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상주아동문학 동시의 마을 상주, 상주아동문학의 두 바퀴>

 

*상주글짓기회

어린이들의 꿈밭을 일구기 시작한 상주글짓기회는 상주아동문학의 뿌리이다. 1959년에 출범한 상주문예교육연구회는 글짓기 지도와 지도교사 연구를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1961년 말 상주글짓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달 창작수련과 작문 교실을 열어 어린이들의 글솜씨는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꾸준한 글짓기 활동의 성과가 인정되어 상주글짓기회(대표:김종상)1966622일 제2경향교육상을 수상하였다. 경북어린이글짓기대회, 어린이 시화전을 열고,동시의 마을2집 발간, 회지푸른 잔디창간하여 59호를 끝으로 2014상주아동문학회로 역할을 넘기고 긴 잠에 빠졌다.

현대 한국 아동문학의 발전에는 상주글짓기회의 영향이 컸다 .

고문 정국진, 김동극, 박노익, 이철하(회장), 신현득, 김종상, 강세준, 권태문, 최춘매, 이무일, 김광일, 김시익, 김창일, 뱍태현, 유원명, 이천규, 임순옥, 최경희, 하청호

 

*상주아동문학회

 

1970년 상주글짓기회 회원들이 자칫 창작활동에 소홀함을 걱정하여 뜻을 모은 권태문, 하청호, 이무일, 조영일, 김재수, 송명희, 황봉진, 윤용화 선생이 주축이 되어둥지동인을 만들었다. (197112둥지1집 출간) 그러나 동인들이 둥지를 떠나자 197712월 새로운 모임으로 상주아동문학회를 조직하였다.

최춘해(회장), 박두순(간사), 권태문, 김재수, 김이균, 박경숙, 박두희 등 7명이 매 월 16절 프린트판 4상주아동문학회보(78호로 종간)를 내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 회보는 전국적으로 회보의 시대를 여는 불씨가 되었으며 아동문학인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첫 동인지앞들(1981).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여름 세미나(1982731-81. 상주시 남장동 남장분교)감이 열리는 마을(1988) 감꽃 피는 마을(2001)감꽃목걸이(2003) 2002년 여름 시인교실(7.22-24)푸른 잔디 62호 발간(2016)해 오면서 빛나는동시의 마을명맥을 잇고 있다.

 

)동시의 마을을 지원한 사람들

 

정국진(鄭國鎭. 1905~1978)

 

상주 외서면 우산 출생. 수필가. 호 석남(昔南). 대구고보 졸업. 1925문예사(文藝社)현상모집에 소설 전명(傳命)이 당선, 이후길을 찾는 사람들(1954) 등 단편을 발표. 수필집 사모곡(思母曲(1972), 의 사이(1981) 상주교육구 교육감을 2(1952.1961) 상주군 교육장, 대구시 교육장,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장.상주글짓기회고문 역임. 특히 상주교육감 재임 시 상주 어린이들을 위해 꽃바구니라는 책을 발간하고, 글짓기교육을 위해 행·재정적 지원을 함.

 

박노익(朴魯益. 1922~2015)

상주 공성면 출생. 옥산심상소학교 졸업. 1949년 청동초등학교 제1대 교장으로 부임. 1961상주글짓기회회장, 고문, 지도위원으로 상주 글짓기 발전에 직접 헌신하며 행정적 지원을 함.

 

김동극(金東極. 1926~2014)

경북 영풍 출생. 1960년 상주장학사로 부임. 상주문예교육연구회를 조직. 글짓기 교육의 선구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교육에 관한 이론서로 동시 공부와 동시집 메아릿골 다람쥐등이 있음.

 

이철하(李徹河, 1927~1980)

상주 청리면 가천 출신. 만주사범학교를 졸업. 1955년 청동초등학교 제1대 교감으로 부임, 이후 장학사와 교장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상주글짓기회회장을 맡아 글짓기 교육에 헌신함.

 

)동시의 마을을 일군 사람들

 

신현득(申鉉得. 1933~ )

경북 의성 출생. 아명은 옥중(玉重), 고구려의 아이. 1956년 청동초등학교에 부임, 외남의 김종상 선생과 함께 글짓기 교육에 헌신. 상주가동시의 마을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도록 일선에서 활약한 주인공.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문구멍이 입선 1960년 동시이 당선. 1961년 첫 동시집아기 눈을 출판한 이후 많은 작품집을 출판하였고, 1971년 제4회 세종아동문학상 외 14회 수상하여 한국 동시단에 거목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주체의식이 뚜렷한 시세계를 보여준다.

 

문구멍

 

신현득

 

빠꼼 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김종상(金鍾祥. 1935~ )

경북 안동 출생, 1955년 외남국민학교에 부임. 청동의 신현득 선생과 함께 글짓기 교육에 헌신. 상주가동시의 마을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도록 일선에서 활약한 주인공. 1959새벗현상모집에 동시산골이 입선 1960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동시산위에서 보면당선. 1964년 첫 동시집 흙손 엄마를 출간한 이후 많은 작품집을 출간하고, 한정동문학상 외 25회 수상. 한국동시단의 종장으로 풍요로운 모성의 시세계를 펼치고 있다.

 

흙손 엄마

 

김종상

 

메밀꽃도 지고

벼이삭 머리 숙이면

 

엄마는

밭머리에서

아침 해를 맞고

저녁 해를 보낸다.

 

언제나

흙손을 털고

지친 허릴 펼 때면

 

주름진 골짝마다

산그늘이 내리고

어느 산골에서

부엉이 운다.

 

산비둘기 날아 넘은

고개 저 멀린

큰 마을 넓은 길도

있다더란데

 

배고파 기다릴

아기 생각에

부풀은 젖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면서

 

엄마가 달려 넘는

돌너덜 꼬불길.

 

) 1960~1990년대 상주의 아동문학가

 

<1960년대 상주의 아동문학가>

이오덕(李五德. 1925~2003)

경북 청송 출생. 1957년 상주군 청리면 청하리 778번지로 이사한 후. 공검초등학교 부임. 상주초등. 청리초등, 이안서부초등에 근무하면서 학교문집 발간.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한국일보에 수필 포풀러당선.1966년 첫 동시집 별들의 합창출판 이후 동시집, 동화집을 여러 권 냄. 2회 한국아동문학상, 3회 단재상 받음.

 

꽃밭과 순이

 

이오덕

 

분이는 다알리아가 제일 곱다고 한다.

식이는 칸나가 제일이라고 한다.

복수는 백일홍이 맘에 든단다.

그러나 순이는 아무 말이 없다.

 

순아, 넌 무슨 꽃이 제일 예쁘니?

채송화가 좋지?

그래도 순이는 말이 없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순이.

 

순이는 목발로 발밑을 가리켰다.

꽃밭을 빙 둘러 새끼줄에 매여 있는 말뚝,

그 말뚝이 살아나 잎을 피우고 있었다.

거꾸로 박혀 생매장되었던 포플러 막대기가!

 

최춘해(崔春海. 1932~ )

상주 사벌 출생. 아호 혜암(兮巖). 1951~1998년까지 군내 초등학교 근무. 특히 사벌초등, 상주초등, 황령초등, 회상초등 등에서 문예지도. 1967년 매일 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한글문학에 추천 완료. 1967년 첫 동시집 시계가 셈을 세면(한글문학사) 펴낸 이후 동시집 12, 산문집 동시와 동화를 보는 눈을 펴냄.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장 역임. 1968한글문학신인상 외 5회 수상.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본향에 대한 그리움의 시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시계가 셈을 세면

 

최춘해

 

아이들이 잠든 밤에도

셈을 셉니다.

 

똑딱 똑딱

똑딱이는 수만큼

키가 자라고

꿈이 자라납니다.

 

지구가 돌지 않곤

배겨나질 못합니다.

별도

달도 돌아야 합니다.

 

씨앗도 땅 속에서

꿈을 꾸어야 합니다.

 

매운 추위에 떠는 나무도

잎 피고 꽃 필, 그리고 열매 맺을

꿈을 꾸어야 합니다.

 

시계가 셈을 세면

구름도

냇물도 흘러갑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바위도

자리를 뜰 꿈을 꿉니다.

 

시계가 셈을 세면

모두 모두

움직이고

자라납니다

 

권태문(權泰文. 1938~2014)

경북 안동 출생. 아호는 다월(茶月).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수료. 상주 관내 사벌, 청동, 상주 등 초등학교와 상주공업고등학교 교사로 봉직, 어린이들에게 글짓기 지도. 1965년 동화 꽃모종대구 매일신문, 1968년 동화 이른 봄에 운 매미가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1966년 첫 동화집 달 따는 아이출간 후 창작동화집만 20여권 펴냄. 한국아동문학상 외 5회 수상.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장 역임. 넘치는 인정만큼이나 인간애에 뿌리박힌 따뜻한 동화를 많이 남겼다.

 

두 개씩을 따 먹는다?”

아이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뭔가 수수께끼가 풀릴 것 같기도 하다.

참으로 오래도록 바라보던 아이의 눈망울엔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동화 아픔이란 열매중에서

 

이천규(李千珪. 1937~ )

경북 안동 출생. 안동사범학교 졸업. 1965년부터상주글짓기회회원 및 회장 활동. 1967년 새한신문에 동시별들이 당선. 1968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산으로 오른 잉어당선. 한국아동문학상 외 1회 수상, 동시집 씨앗이 눈을 뜰 때1권이 있음.

 

어디선가 누군가

나직나직 소근 대는 소리

 

벌레 알을 닮은

까만 씨앗도

고물고물 땅속에서

귀가 열리겠다.

 

동시 씨앗이 눈 뜰 때중에서

 

이무일(李茂一. 1941~1992)

상주 외남 출생. 안동사범학교를 졸업. 1962년 외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상주초등, 청리초등에서 어린이 글짓기 지도 및 교지, 학급문집 발간. 1966한국글짓기회주최 제1회 전국사제 글짓기대회 '아동문학부'에 동시 특선. 1968소년에 동시 3회 추천. 1970년 첫 시집 참새네 칠판2권 동시집 출간. 1985년 제17회 한정동문학상을 수상. 19923455세를 일기로 타계.

 

조약돌

 

이무일

 

수천 년을

갈고 닦고도

조약돌은 아칙도

물속에 있다

 

아직도

조약돌은

스스로가 부족해서

 

물속에서

몸을 씻고 있다.

스스로를 닦고 있다.

 

강준영(姜俊英. 1944~1983)

함경도 원산 출생. 196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아침당선. 1973년 대구매일신문에 창작동화 」『소년에 동화 논임자의 재판을 발표하면서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섬. 상주에 전근.상주아동문학회회원으로 활동. 1975년 첫 창작동화집 그리움 나무출간.그리움 나무로 제8회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198339세로 타계.

 

아빠 나무는 흘러가는 한 자락 바람을 붙잡았습니다.

아빠 나무의 그리움을 바람에 띄우기 위해서입니다.

나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아이가 있었다면 그냥 마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꽃가루의 물결도 보았을 것입니다.

 

동화 그리움 나무중에서

 

이종기(李鍾基. 1944~ )

상주 출생. 1968년 성경동화 무너진 바벨탑,통곡하는 총리대신,뱀이 된 지팡이,바위 얼굴,아기 천사출판. 1960년대부터 기독학생회를 조직 활동, 상주군내 초··고 학생들의 백일장 및 문예 작품 발표회 개최. 김종상, 신현득, 이철하 선생과 글짓기 지도에 앞장. 경북신문, 문학신문 발행.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 발포.

 

낮잠

 

이종기

 

향이는

인형을 등에 업고

스르르 낮잠이 듭니다

 

등에 업힌 인형도

쎄근쎄근 잠이 듭니다

 

향이가

잠을 깨면

등에 업힌

인형도

또록또록

눈을 뜹니다.

 

<1970년대의 상주아동문학가>

 

하청호(河淸鎬. 1943~ )

경북 영천 출생. 아호는 공산(公山). 1963년 대구사범학교 본과 졸업. 상주 남부초등학교에 부임 후 함창중앙, 상영초 등에 근무하면서상주글짓기회활동. 197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소년지에 동시 3회 추천 완료. 1974년 첫 동시집둥지 속 아기새를 펴낸 후 동시집, 동화집, 산문집 등 다수 펴냄. 대한민국문학상 외 6회에 걸쳐 수상.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작품.

 

둥지 속 아기새

 

하청호

 

하나-

먼 곳의 얘기들이

어미 부리에게서 몰려와

층층이 쌓은

둥지 속

아기 새.

 

이슬은 목이 마를까 봐

밤새 내려 주고

햇살은

쉬임없이 깃에 파닥이지만

 

아직은 멀었다.

네 날개로 하늘을 나를 때는

귓전을 돌아드는

바람의 얘기

풀벌레의 얘기.

 

하루

또 하루

달이 지고 해가 뜨면

그만큼

하늘은 사뿐히 내려앉고

힘이 맺히는 깃.

 

도도록한 눈망울에

하늘을 담은 채

둥지 속

가득이 넘쳐 나는

아기 새의 작은 맥박.

 

김재수(金在洙. 1947~ )

상주 출생. 1968년 안동교육대학 졸업. 청리초, 남산중학교에 근무하며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원 및 회장.상주문인협회 지회장 역임. 1973년 동시제비집으로 제1회 창주아동문학상 받음. 1974소년지 동시 추천으로 문단활동. 1974년 동시집 낙서가 있는 골목4권의 동시집과 2권의 동화집을 펴냄. 1974년 창주아동문학상 외 4회의 문학상을 수상. 순수 자연과 교감하는 사랑의 메시지 같은 시.

 

가로수

 

김재수

 

어깨를 두드린다 아는 체하며

돌아보니 살며시 등을 기대는 가로수

'쉬었다 가렴'

푸른 물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렇구나

숱하게 이 길을 오갈 때마다

나무는 나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구나

등으로 내게 눈길을 주고 있었구나

등으로 전해지는 푸른 물소리

하늘엔 땡볕이 타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무는

그렇게 그늘을 만들며.

 

조영일(趙榮一. 1943~ )

경북 안동 출생. 1970년 상주 백원초등학교 근무를 시작 우서초등에서 근무. 상주글짓기회회원,둥지동인.상주아동문학회회원으로 활동. 1975월간문학신인상 및시조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바람 길4, 경북문학상 외 5회 수상. 육사문학관 관장 역임. 시적 이미지의 전개로 시조의 현대화에 공헌.

 

달밤

 

조영일

 

눈 위에 내리는 달빛

밟으면

소리가 난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손을 호호 불며

 

그림자 나를 놓칠까

따라오는 소리다.

 

 

윤용화(尹龍華. 1949~2002)

경북 상주 출생. 아호는 상운(尙雲). 한국방송통신대학 초등교육과 졸업. 이후 상주에서 초등학교 근무하면서 글짓기지도.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원으로 활동, 문학세계로 등단. 1987파랑새를 위한 노래 외 4권의 시집 출간.

 

이웃

 

윤용화

 

감나무 새 잎은

장다리꽃과 닮았다.

 

미루나무 새 잎도

장다리꽃과 닮았다.

 

서로들

이웃해 사는 게

그래 마냥 즐겁다

 

김상삼(金相三. 1944~ )

경북 상주 출생. 1964년 함창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어린이 글짓기 지도에 힘씀. 상주의둥지동인,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원으로 활동. 1977년 동화철이와 살구나무로 창주문학상 당선. 1979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83년 첫 동화집 흔들리는 뿌리를 낸 이후 30여권의 동화집 출판. 한국동화문학상 외 3회 수상. 자기극복 의지와 인간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다.

 

오누이는 철이가 그렇게 되도록

마음 모아 빌었다.

그런 간절한 바람 탓일까?

모래성을 보는 철이의 머릿속에

희미한 생각이 떠오른다.

모래성은 짙은 안개로 덮여 간다.

 

동화 꽃피는 모래성중에서

 

박두순(朴斗淳. 1949~ )

경북 봉화 출생. 1970년부터 화령초, 옥산초, 상영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문예지도에 힘씀. 1977아동문예,아동문학평론동시 추천으로 문단활동. 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원. 1980년 첫 동시집 풀잎과 이슬의 노래를 펴낸 후 9권의 동시집과 기타 여러 책을 펴냄. 한국아동문학상을 비롯하여 5회의 수상을 함. 중앙 일간지에 장기간 가슴으로 읽는 동시를 연재하여 시의 위상을 격상시킴.

 

들꽃

 

박두순

 

밤하늘이

별들도 하여

잠들지 않듯이

 

들에는 더러

들꽃이 피어

허전하지 않네.

 

너의 조용한 숨결로

들이 잔잔하다.

 

바람이

너의 옷깃을 흔들면

 

들도

조용히 흔 들린다.

 

꺾은 사람의 손에도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의 발길에도

향기를 남긴다.

 

<1980년대 상주의 아동문학가>

 

이계명(李啓明. 1924~1995)

대구 출생. 본명 이창형(李昌炯). 1961년 상주로 이사, 이후 줄곧 상주에 거주. 1970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계명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함. 1982소년지에 동시 추천 받음. 상주아동문학회회원으로 활동.

 

창가에서

 

이계명

 

내 창은 수정 망 같이

별빛으로 아롱지고

만남으로 한껏 설렌다.

 

하지만

내 작은 손님도

정작 수줍어

 

밤새껏 창가에 안긴 채

떨기만 하다 간다.

 

이칠우(李七雨. 1951~ )

안동 출생. 1971년 상주의 내서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양정, 우서, 회상, 상영, 황령, 화달, 상주중앙 등에서 근무하면서 문예지도. 1983아동문예6월호에 동시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장, 상주문협 지부장역임.

 

돌탑

 

이칠우

 

고갯길 쉼터에 쌓인 돌탑

머리를 갸우뚱 생각하는 돌탑

 

무슨 생각하느냐?

솔바람이 맴돌다 물어보고

산새도 꽁지 까불며 궁금해 한다.

 

조심조심 돌 얹는 언니도

고개를 살래살래

언니 따라 쌓아 보는

동생도 고개를 흔든다.

 

무슨 소원이 그렇게도 많을까?

지나는 길손마다 하나씩 얹어

머리가 기울어진 돌탑

 

무너질라 무너질라

눈으로만 쌓는다.

 

홍 기(洪 淇. 1955~ )

문경 출생. 1977년 안동교육대학 졸업. 1978~1987년 상주의 숭인초등, 아산초등, 함창중앙초등학교 근무, 어린이 문예지도. 198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엄마는당선, 1990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학춤당선으로 문단활동. 상주아동문학회회원. 1990년 동시집 하늘 꽃발간, 다수의 동시집과 동화집 출판. 대교 올해의 작가상과 물뿌리개 아동문학상 받음.

 

땅거미 깔리는 언덕길을

뒤돌아보며 보며 가던

그 아이

 

뒷모습 곱게 적시던

비가 내리면

내가 젖는다

내 마음이 젖는다.

 

- 동시 비가 내리면중에서

 

권형하(權亨河. 1953~ )

상주 사벌 출생. 198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8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1990년 시집 새는 날면서도 노래한다출판 이후 여러 권의 시집을 냄. 경북문학상 받음.

 

노루길

 

권형하

 

시사 지내려 갈 적에

만난 노루 눈빛

풀 먹고 하늘 뱉은 것

바람소리로 귀 열린 것

물마시고 구름 만든 것

 

눈망울 커다랗게

하늘 한 자락 찢어 낸 것

내 가슴을 철렁 찢어 낸 것

 

솔잎 파랗게 질리도록

그도 놀랐을까

 

내 가슴 가을로 옮겨가는 길.

 

이창모(李昌模. 1950~ )

경북 상주 출생. 19753월부터 초등학교 교원(교사, 교감, 교장)으로 41년간 근무하면서 어린이 문예지도. 198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봄 잔치당선. 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한국문협상주지부회원, 회장 역임. 동시집 자작나무 이쑤시개가 있음.

 

잠자리

 

이창모

 

늦잠 깬 준이의

자전거에 앉을까?

 

아니지,

요까짓 쬐그만 데 앉아서야

 

마당가를 사알살

맴돌아 볼까?

 

아니지,

요까짓 쬐그만 데 살아서야

 

마을을 비잉빙

휘돌아 볼까?

 

아니지,

요까짓 쬐그만 데 살아서야

 

하늘 위로 훠얼훨

날아 올라가

해님의 어깨 위에

앉아 봐야지.

 

<1990년대 상주의 아동문학가>

 

박정구(朴正九. 1948~2012)

경북 상주 출생. 1968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1992년 상주글짓기회장 역임.19954-20042, 9년간 한국문협상주지부 사무국장 역임. 20045, 179아동문예문학상으로 등단.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장 역임. 2012121일 작고. 2013년 유고시집 이슬, 샘물, 햇살 같은 아이들출판.

 

책 읽는 바람

 

박정구

 

바람의 취미는

책 읽기인가 봐

언니가 책 읽다가

졸고 있는 사이

 

문틈으로 살짝

들어 온 바람

차례를 살폈다

그림을 살폈다

 

책갈피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언니가 잠 깨기 전

다 읽고 가려고

팔랑팔랑 서둘러

책장을 넘긴다.    

 

박정우(朴晸雨. 1953~ )

경북 영주 출생. 아호 난곡(蘭谷). 1975~2001년 상주시 함창초, 평온초, 우서초, 외서초, 무릉초, 상주중앙초, 낙동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어린이 문예지도. 1993아동문예문학상으로 등단.상주문인협회」「상주글짓기회」「상주아동문학회회원 및 회장 역임, 2015 동시집사계절의 합창펴냄. 2015 세계동시문학상 수상.

 

고추꼭지 따는 할머니

 

박정우

 

-

찬바람이 썰매를 타고 온다.

 

한평생 애써 키운 자식들

고향 등져 떠나가도

나만은 지킨다며

온종일 싹둑싹둑

바알간 햇살을 자른다.

 

손주 녀석들 세뱃돈 주고

큰아들, 작은아들 한 포대씩 싸준다며

흰목도리 질끈 감고

한없는 세월을 딴다.

 

한겨울 고추 냄새

눈꽃으로 피어난다.

 

이상달(李相達. 1960~2013)

경북 상주 출생, 1999아동문예9월호 동시 달맞이 꽃2편으로 제125아동문예문학상을 수상.3세대 문학으로 문학 활동 시작.상주아동문학회,상주문인협회회원. 2013년 작고. 유고시집 시장의 노래

 

나팔꽃

 

이상달

 

나팔꽃은 밤마다

먼 길을 떠난다.

 

모두가 잠든

캄캄한 한밤

 

고사리 손 살금살금 펼쳐

새벽이면

안테나처럼 높은 곳에서

쫑긋 귀를 세운다.

 

먼 곳 에서 찾아오는

새날을 마중하며

 

지난밤

홍건이 으로 기다린 아침

 

말갛고 마알간

보랏빛 웃음으로

새날을 시작하는

나팔을 분다.

 

이승진(李昇珍. 1960~ )

경북 상주 사벌 출생. 대구교육대학을 졸업, 상주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글짓기 지도. 1980난등(蘭燈)동인으로 활동. 2001문예사조신인상 등단. 상주문인협회,상주아동문학회,경북문인협회,경북펜클럽회원. 2004년 시집 사랑 박물관3권 출간. 경북문학 작가상 수상.

 

상주행 완행버스

 

이승진

 

손님이 없다

혼자 끌고 가다가

문득 만나는 할머니

차비도 없을 것인데

할머니를 태우고

뒤따라오는 한적한 가을도 태운다.

 

태연이 차비가 없는 할머니

무임승차하는 가을

셋이서 저 큰 버스를 데리고

901번 지방도의 물결을 따라

~~~

종이배 한 척으로 흘러가고 있다.

 

2) 상주의 현대문학 1

 

상주의 현대문학은 민족의식과 근대적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독립과 번영에 대한 일체의 도전에 저항과 예술적 창조의 두 국면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활동한 인물이 1915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동학교를 세워 방대한 경전과 동학가사를 편찬한 김주희와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위암 장지연, 1950년대 시작활동을 펼친 김구용과 이대희가 있다.  

 

) 동학 가사문학의 보고(寶庫) 삼풍 김주희

 

 상주 은척의 동학교는 삼풍(三豊) 김주희(金周熙 1860-1944) 선생이 1915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동학교당을 건립하고 체천사상(體天思想), 선천회복(先天回復), 교정분리(敎政分離) 주장했다.

동경대전을 비롯하여궁을경』『통운역대』『도원경』『도화경』『도성경 같은 경전과용담유사에 이어 총 40책에 이르는 가사집을 간행하여 역대 동학가사를 집대성했다

 

어화세상 덜아 

만경창파 ㅣㅅ더시니 어부사를 드러보소 

어부사를 말도 어부사도 두가지니 

자세보고 혀셔라 

위수상에 강태공을 

세상사부르기를 어부라 닐너시되 

주린고기 밥을주어 질너 

양어하어부른가

           「어부사」1춘강어부사 시작 부분

 

) 시언지(詩言志) 정신의 장지연

 

위암(韋庵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상주 출신으로 1899만민공동회의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898 황성신문주필, 사장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1120일자 황성신문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을 놓아 통곡 하노라 유명한 논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위암은 언론인, 개화론자로서 민족구국의 선봉에서 활약하였고, 사학자로서조선유교연원』『대한최근세사』『대한강역고문필가로서위암문고』『대동문수등과 애국계몽소설애국부인전을 남긴 한말의 지식인이었다. 나라의 글은 그 나라의 독립을 완전히 할 수 있는 것(國文者均一其國之獨立者也에 따른 그의 시는 시언지(詩言志)의 정신을 살려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홀로 높은 정자에 오르니 만고에 근심뿐이로다 

속세에선 춘추(春秋)를 읽을 곳이 없으니 

누가 석 자나 되는 용천검을 가지고 

아첨하는 신하의 한 머리를 벨 것인고 

한 손으로 기강을 붙들어 나라를 되살리려 했으니 

은나라 백이(伯夷진나라 도연명의 의()는 서로 같더라 

이 세상이 긴 밤처럼 어두우니 

누가 어둠을 밝혀 광명을 되찾을꼬 

등용천정전문

 

) 동양적 세계관과 구도적(求道的) 자세의 김구용

 

김구용(金丘庸 1922-2001)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아버지 김창석(金昌錫)과 어머니 이병(李炳)61녀 중 4남으로 출생했다.

19499월 김동리 추천으로신천지10월호에산중야(山中夜)를 발표, 등단하였으며, 1956년 제1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 성균관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2001년 제36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유불선(儒佛仙)의 원융한 동양적 세계관을 천착, ··화에 능했다. 시집시집Ⅰ』『장시구곡』『송 백팔』『뇌염』『풍미』『김구용문학전집번역서로채근담』『열국지』『삼국지등 다수의 중국 고전이 있다.

 

조선 자기(磁器)를 눈()으로 쓰다듬으면

어머님의 검버섯 핀 손이었네

추억은 선반에

여러 가지 달덩이로 놓인다.

청이 한 가지 있네

조그만 신라 불상을 나 주게나

친구가 가져간 자리는 비었으나

나는 창에 남아 있다.

도움도 빌릴 수 없는 곳

자아는 나와 함께 있다 -11

 

) 현실 초월, 이상향을 염원한 이대희

 

 1950년대 상주문학을 장식하는 시인으로 상몽(尙夢이대희(李大熙 19251990)가 있다.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출생. 일제강점기의 특수한 상황과 해방에 이은 6.25 동란의 격동기에 상주문학의 공백기를 메워준 시인이다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한 상몽 선생의 유고시집너랑 가고 싶어라 2000 5 10일 제자인 채의진 편저김주태 머릿말로 외문사에서 출간 되었다

 표제시는 암울한 현실을 초월하여 꿈에 그리던 어딘지 모르는 곳의 이상향을 찾아 너랑 가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가고 싶어라/가고 싶어라/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너랑 가고 싶어라//인간이 그리운데 인간을 저버리고/하늘이 푸르른데 하늘이 답답하여/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너랑 가고 싶어라//산으로 가다가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바다로 가다가 인어를 만나면 인어와 놀고//그리움을 안고 아쉬움을 안고/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너랑 가고 싶어라//가다가 저물면 별들과 같이 자고/가다가 저물면 바람과 같이 자고/가다가 가다가 날이 새면은/샛별과 더불어 숨어서 살자/가다가 가다가 목숨이 다하면/미소를 띄우며 고요히 잠자자//가고 싶어라/가고 싶어라/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너랑 가고 싶어라 

                         「너랑 가고 싶어라전문

 

3) 상주의 현대문학 2

 

상주의 현대문학은 1950년대 후반 황토부락동인회(黃土部落同人會)1960년대 중반 열하문학동인회(熱河文學同人會), 그리고 1970년대 삼백문학회(三白文學會)로 그 맥을 이어왔다.

 

)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문향 상주문학의 전통을 잇고 창작을 통한 이상세계의 구현에 이바지 한다.

결성: 198525일 상주문화원(서성동 왕산 뒤). 이날 백수(白水정완영(鄭椀 永선생의 특강이 있었다.

198564일 한국문인협회 등록, 인준 받다.(이사장 김동리)

활동: 1987. 7. 18.상주문학창간호 발간. 2019상주문학31집 발간

문학의 밤. 문학 강연, 백일장. 시화전, 청소년문예작품공모,낙강시제洛江詩 祭개최

회원: : 김동수, 김선희, 김숙자, 김영숙, 김다솜, 김정순, 김한식, 박기용, 박찬선, 박창수, 박미자, 신재섭, 안영이, 오세춘, 윤종운, 이미령, 이승진, 이옥금, 이중 호, 이창한, 정재훈, 조재학, 함창호, 허연옥, 시조: 권형하, 민주목. 신동한, 동 시:김미양, 김재수, 박두순, 박정우, 이창모, 허창열. 영시: 김연복, 수필: 권태 을, 김철희, 박순혜, 오정석, 최종고, 황화숙, 소설: 정복태,

 

) 들문학회

문학의 들을 경작하는 푸른 의식으로 문학의 풍년을 기약하고 있다. 

결성: 199367 

활동:199412월에 들문학 창간호들 그 가운데 출판. 2019년 들문학 26집 간행.

문인초청강연회, 1996년부터 상주지역 초··고등학생 문학작품을 공모하여 들문학상을 제정 시상. 시화작품전시회. 달빛시쓰기대회.

회원: 고경연, 김명성, 김미연, 김옥임, 곽경미, 박경숙, 박승도, 송영미, 신대원, 신순말, 유재호, 윤현순, 이광우, 이상훈, 조병준, 조정숙, 최성익, 황정철

 

) 숲문학회

향기로운 문학의 숲을 가꾸려는 의지와 열기로 신선한 생동감을 준다.

결성: 1998 1128

활동: 200012숲문학창간호 발간. 2019년 숲문학 20집 간행.

2002 20 중국 연변민족문학원(연변작가협회)과 자매결연을 맺고, 문학의 상호교류를 통해 조선동포문학의 정황과 이해증진을 꾀함. 숲문학 3 호부터 특집으로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의 작품을 실어오고 있다

회원: -강영숙, 김기옥, 김국래, 김대호, 김선이, 김설희, 김옥화, 김용원, 김차순, 김희수, 송찬호, 서숙자, 윤순열, 윤진숙, 임성호, 장운기, 조남성, 조영숙, 최진 자, 수필-정경해, 황정인, 소설-권홍열

 

) 느티나무시 동인

느티나무처럼 개성이 뚜렷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 우주적 모태성을 지녔다

창립: 1998월 느티나무시 동인 결성. 김정순, 이미령, 황구하, 전정희

활동: 20043월 느티나무시 동인지 바다에서 정월대보름 달을 보다창간

201916고요가 엎드린 플랫폼간행

회원: 권현옥, 김춘자, 김이숙, 김현이, 박순덕, 이미령, 이순영, 이은경

 

) 문학웹진 문학마실

디지털 시대 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매체 개척으로 전국문학인의 소통의 공간이다.

개설: 2010329

활동: 201912114호를 올렸다.

동학농민혁명기념 문집 발간

편집자: 고창근. 김재순.

 

) 시노리 

시노리는 시놀이(詩遊)로 시를 모시는 일을 바탕으로 문학의 터를 다져나가다.  

창립: 20141223.

활동: 2015115일 시노리 창간호 발행. 2019년 시노리 5집 간행

회원: 김철호, 김선희, 김애경, 박서윤, 박정숙, 오세춘, 함창호, 허창열. 최은주

 

) 상주작가회

문학인으로서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고 돌아보며 문학의 길을 걷다.

창립: 2017

활동: 2017년 상주작가 창간호. 2019년 상주작가 3집 발간

회원: 김재순, 김정순, 남수현, 봉종기, 이상욱, 임술랑, 전봉희

 

) 상주 현지 문인들

황구하, 김남식, 박두필, 박두화, 장미향, 성윤숙, 김주애,

 

) 출향 문인들

한국문단에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라성같이 쟁쟁한 분들이 많다. 여기서는 이름만 밝히도록 한다.

 

: 성춘복, 강현국, 강석진, 김현숙, 이성복, 이상호, 최재목, 박희선정 훈, 최낙준, 윤희수, 채충석, 정유화, 고상환, 김준태, 배원룡, 정완진, 성전중, 고영섭, 고명수

동시: 최춘해, 김진구

동화: 김상삼.

시조: 정재호, 이기라, 최동호, 박규해, 고지연, 장용복

소설: 성석제, 신덕수, 채종인, 김장동

수필: 최종고, 문명래, 이재호, 차명홍, 오병훈, 이종기, 고석근, 안장수, 백문현

평론: 김병익, 김영수, 홍흥구

 

) 작고 문인들

이창화, 이계명, 정위진, 김경자, 이무일, 권태문, 장원달, 윤용화, 박정구, 이상달, 김 완, 이숙자

 

7. 낙동강문학관을 열고

 

낙동강문학관 설립 제안을 하고 건물이 세워지기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먼저 문학관 건설의 제안을 수용해주신 상주시장과 이를 주관해온 상주시청 관광진흥과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한옥의 건물은 옛 정취를 살리는 낙동강 나룻촌의 건축과 맞물려 조화의 멋을 살린 것이다. 처음 건물을 보았을 때 이 좁은 공간에 무엇을 얼마나 담을 것인가 조금은 회의가 생겼다. 그러나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요체만을 전시하는 선별작업을 택했다. 공간 구성이 구체화 되면서 실내 디자인도 시작되었는데 시행착오로 인하여 몇 차례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개관에 이르기 까지 전시상의 숫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첫째. 낙동강문학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내용물을 마련해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낙동강문화권이 전국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어서 기준을 잡기가 어려웠다. 낙동강문학은 영남문학으로 오랜 역사와 함께 너무나 넓고 많아서 초점을 잡기가 난감했다. 다각도로 궁리 끝에 생각한 것이 낙동강의 3대루를 중심으로 축소하여 누정문학을 다루게 되었다. 그마저도 줄여서 소개하는데 그쳤다.

이점은 앞으로 개선해 나가야할 일이다. 이름과 실제가 어울리는 내용이 갖춰져야 하겠기에 더욱 그러하다.

 

둘째. 낙동강과 상주문학에서는 인물 선정이 어려웠다. 대상 인물은 많고 게시할 공간은 좁아서 16사람만 모시게 되었다. 시각적 효과를 무시한 채 이중으로 빼곡하게 채웠다. 전문가의 고견을 듣고 관련 서적을 참작했지만 제한된 공간이 걸림돌이 되었다. 많은 사람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후 문학관이 확장되면 두루 모시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셋째. 자료수집이 어려웠다. 처음 낙동강문학관이라고 하니 생소한 점도 있지만 문학관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다. 자료 수집을 요청하는 안내문을 발송하고, 전화로 거듭거듭 부탁을 하며, 직접방문을 하기도 했다. 선조의 명예를 선창하는 일임을 알고 적극 협조해주신 후손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창작집을 알뜰히 챙겨서 목록까지 작성하여 보내주신 시인들께 다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넷째. 하나에서 열까지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전문가의 자문은 필수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상주박물관 김진연, 조연남 학예사의 조언은 큰 보탬이 되었다. 특히 게시물과 연관된 상주박물관의 자료 제공은 큰 힘이 되었다.

 

다섯째. 문학관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성향을 지녀야한다. 이것은 문학관의 운영과 직결된 것으로서 단순히 보여주는 일에서 벗어나 함께 생각하고 만들어가는 참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강문학의 중심으로서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서 안고 가는 문학관이 되어야하겠다.

 

여섯째. 문학관의 개관으로 문향文鄕 상주는 또 한 차례의 문예부흥기를 맞았다. 코로나시대 비대면非對面의 생활 속에서 먹고 부르는 대중문화가 휩쓸고 있는 때에 삼백정신운동을 바탕으로 성숙한 낙강문화의 창출과 동화나라 상주의 동심이 살아있는 고을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일곱째. 낙동강문학관은 상주 지역에 있다. 따라서 지역문학이라는 변방邊方 의식에서 벗어나서 지역에서 문학 활동이 곧 중심의 문학, 주인의 문학, 본연本然의 문학임을 인지하고 낙강문학의 새로운 장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낙동강문학관! 이름만 불러도 뭉클하게 다가온다. 상주에서 태어나 상주에서 살면서 시를 써온 사람으로서 창석 선생의 유언을 받들게 되어 가슴이 젖어온다. 훗날 또 누군가에 의해 지구촌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문학관으로 다듬기를 바란다.

 

문학관개관준비위원회 구성에서부터 매듭을 짓기까지 개관준비위원들의 사랑과 특히 사무국장직을 맡아서 굽이치는 길 오가며 관련된 제반 일에 열과 성을 다해 주신 김동수 선생께 고마움을 드린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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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東江李正勳 매일신문사 1969  

낙동강을 품은 상주문화상주박물관 엮음 민속원 2012

낙동강문화 그 源流를 찾아서裵勝源 청하 1984 

문학관과 문화사업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엮음 단국대출판부 2007 

전국 문학관 찾아가기한국문학관협회2004 

尙州漢文學權泰乙 상주문화원. 2001

洛江詩會 硏究권태을,尙州文化硏究2, 尙州文化硏九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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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시제 자료집, 상주문인협회, 2004-2008 

愚川四百年류시찬 편저 풍산류씨우천문중 2010

商山誌김자상역.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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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경제론김문환, 서울대학교 출판부1998 

황녹차집이숙희 2007. 충남대학교 출판부

洛東江-흩어진 시간, 물길에 담은 하나의 길.-상주박물관. 2010년 하반기 기획전

문화가 흐르는 낙동강낙동강문화생태탐사단 경북대학교KNU낙동강연구원2009

상주범패명상체험센터 설립을 위한 세미나자료 상주시지역혁신협의회 2007

지방의 재발견』 한국사회과학연구소편 민음사 1985 

映湖樓안동문화원.1997

설공찬전(이복규 편저)

설공찬전의 소설세계이복규

국역 난재집채수-열정적 위정자 유쾌한 외계인 안수정역 이화

양대문형과 직신의 가문문경 허백정 홍귀달종가(경상북도경북대영남문화 연구원 2012

청대 권상일의 생애와 사상문경시·근암서원운영위원회 2016

활재 이구와 식산 이만부의 생애와 사상문경시·근암서원운영위원회 20

開巖 金宇宏 낙동강을 노래하다개암선생 숭모추진위원회 2016

 

文簡公 蒼石 李埈 선생 학술대회상주문화원, 도남서원 2018

남계 표연말 이재 조우인 사서 전식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학술대회상주문 화원. 도남서원 2014

난재 채수의 시문학 연구안수정(충남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난재 채수선생과 설공찬전(10회 역사인물학술대회. 상주문화원. 2017)

난재 채수선생의 삶과 문학난재 채수선생기념사업회 인천 채씨 양정공보존회) 시와반시 2019

문광공 홍귀달 선생의 사상과 문학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 제19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 표. 2018

우암 홍언충 선생과 목재 홍여하 선생의 생애와 사상(문경시. 근암서원운영위원회)

허백정 홍귀달 난재 채수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학술대회상주문화원. 도남서원.

 

낙동강문학관에 기증된 자료는 별도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