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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회 상주시찰기념 순교지 탐방

빛마당 2022. 9. 11. 21:52

142회 상주시찰회 기념 순교지 탐방

주제: 순교의 영성과 치유(1:20~21)

일시: 202291()~2()

장소: 전남 영광, 신안, 광주지역

기록: 김재수 장로(신봉교회 은퇴장로)

시찰장: 강성식 목사(상주시민교회)

 

91일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순교지탐방을 위한 짐을 꾸렸다. 이번 순교지 탐방은 상주시찰 제142회를 기념으로 계획된 터이다.

교회를 출발하여 상주시민교회에 도착하니 650, 상주시민교회의 안내로 식당으로 모였다. 오늘 참가자는 목사, 장로, 권사 모두 76.

수련회 안내 유인물을 받고 710분에 참가자 모두 코로나19 진단키드로 양성여부 진단을 단체로 실시하였다. 다행이 양성 반응이 나온 분은 없었다. 미리 준비한 아침 식사 대용식을 챙겨 720분에 모두 지정된 차량에 승차하였다.주제: 순교의 영성과 치유(1:20~21)

일시: 202291()~2()

장소: 전남 영광, 신안, 광주지역

기록: 김재수 장로(신봉교회 은퇴장로)

시찰장: 강성식 목사(상주시민교회)

 

91일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순교지탐방을 위한 짐을 꾸렸다. 이번 순교지 탐방은 상주시찰 제142회를 기념으로 계획된 터이다.

교회를 출발하여 상주시민교회에 도착하니 650, 상주시민교회의 안내로 식당으로 모였다. 오늘 참가자는 목사, 장로, 권사 모두 76.

수련회 안내 유인물을 받고 710분에 참가자 모두 코로나19 진단키드로 양성여부 진단을 단체로 실시하였다. 다행이 양성 반응이 나온 분은 없었다. 미리 준비한 아침 식사 대용식을 챙겨 720분에 모두 지정된 차량에 승차하였다.

1호차: 인솔 강성식 목사, 김주용 목사, 탑승인원 39

탑승자 윤상훈, 김광현(상주), 강성식, 김정신, 김주용, 채영준, 오순희(상주시민, 곽용길, 김재수, 김성자, 안종환, 정미자, 최고식(신봉), 정종수, 강석주(양촌) 김종순, 최미영, 김동봉, 김정이(병성), 윤일국, 안명희, 장일규, 서정희(함창), 김재원, 정영애, 이재원, 김이식, 김정모(청리), 백동수, 위정화, 김영남, 김용섭, 강희숙, 위정수, 최돈숙, 황인주, 김송자, 엄창용, 박명주(오광)

1호차 차량번호 경북 75-6087 김경태 기사

 

2호차: 인솔 박연모 목사, 김동선 목사, 탑승인원 총 39

탑승자 김동선(상주시민) 강대식, 최연옥, 최진욱, 강연웅, 최명숙(옥산중앙)

조원희, 양순덕(소상), 최규철, 남상선(양범), 조상희, 이시우(성신) 박연모, 김정숙, 유준호, 오경희, 김경천, 권영자(화령), 임종근, 장경숙, 박병규, 이여임, 윤진상, 홍일선(봉촌) 정인식, 노영택, 서정태, 이상기(공검), 영덕용, 장순화(무릉) 조성칠(서곡), 김애금, 박영준(공검서부), 구정환, 전꽃분(화령샘물), 백영주, 이정희(지사)

2호차 차량번호 경북 756075, 권혁동 기사

 

730분 백동수 오광교회 목사님의 기도로 12일의 일정을 출발하였다.

모두 아침식사를 하지 않아 대용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준비하였다.

상주를 출발하여 성주휴게소를 지나면서 오광교회 엄창용 장로가 앞에 나와 찬송가 아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 교회 찬송가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이 찬송 가로 지정이 되어 불리고 있으며 아리랑에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이어 신봉교회 김재 수 장로가 윤석근 목사의 아리랑 민족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그 속에 담긴 아리랑의 의미와 또 상주아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주를 출발하여 1시간 30분을 경과한 9시에 벌곡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하여 1023분 백양사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차는 쉬지 않고 달려 12시에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에 도착하였다.

야월교회는 당시 호남 지역을 선교 지로 담당하던 유진 벨 선교사가 야 월도에 도착하여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는 호남의 어느 지역보다 집단 순교의 아픈 역사를 깊이 담고 있는 교회이다. 당시 염전 즉 소금밭 근처 에 있던 야월교회는 공산군에 의한 피해가 특히 심했다.

1950723일 공산군이 영광으로 진입하여 군청과 경찰서를 포함한 관공서를 모두 접수하고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염산면에서는 야월리와 봉남리의 피해가 컸는데 야월교회는 영수 김선종의 집안 사람 33, 최판섭 집안 11, 김병환 집안 7, 정일성 집안 13명 등 65명 전원이 공산당에게 피살당했다. 온 교인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순교하였고, 교회당을 불태웠다. 1951년 성도들은 지속적인 교회 재건을 통해 야월교회를 다시 세웠고, 1990년에는 야월교회 뒤뜰에 65인 순교기념탑을, 2009년에는 야월교회기독교인순교기념관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교기념관에 들어서자 이 교회 원로 장로님이 그 때의 참상을 애절하게 증언해 주셨다.

야월교회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1220분이 되어서 인근에 있는 염산골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는 유명한 영광굴비 정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을 간편식으로 마친 모두 모처 럼의 영광굴비 정식으로 육신의 양 식을 푸짐하게 공급받았다.

식사 후 가까운 상점에 들려 유명 한 영광굴비와 젓갈을 구입하는 이 들도 많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회원들은 바로 식당 뒤편에 자리 잡은 연산교회로 향했다.

염산교회는 현 개혁교단 소속의 교회로 야월교회보다 약 40년 후인 1939년에 세워진 교회이다. 염산교회도 야월교회 만큼 희생을 당했는데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77명이 공산당에 의해 학살을 당했고, 당시 공산당은 교회당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제일 먼저 기삼도라는 청년이 1950108일 죽창에 찔려 죽었다. 이후 초대교역자인 허상 장로의 부인, 노병재 집사와 그의 식구 23명이 순교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김방호 목사를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는데 김방호 목사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살려주겠다고 위협했지만 모든 식구들은 찬송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김방호 목사와 아내 김화순 사모, 다섯 아들, 그리고 이제 겨우 8세와 5세된 손자가 차례로 순교를 당하였다.

살아남은 염산교회 성도들은 1951224일 다시 모였다. 그리고 땅 속과 마루 밑 항아리 속에 숨겨둔 성경과 찬송가를 꺼내들고 다시금 교회를 일구어 갔다. 1951년 부활절에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김익 전도사가 부임 예배를 드렸고 부모 형제와 교인들을 죽인 원수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염산교회는 1997년 순교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순교공원을 조성하고 순교자 77인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희생당한 32명의 유골이 이곳에 묻혀 있으며 염산교회에서 시무한 김방호 목사 부부묘와 허상 장로 부부 묘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식사 후 가까운 상점에 들려 유명 한 영광굴비와 젓갈을 구입하는 이 들도 많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회원들은 바로 식당 뒤편에 자리 잡은 연산교회로 향했다.

염산교회는 현 개혁교단 소속의 교회로 야월교회보다 약 40년 후인 1939년에 세워진 교회이다. 염산교회도 야월교회 만큼 희생을 당했는데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77명이 공산당에 의해 학살을 당했고, 당시 공산당은 교회당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제일 먼저 기삼도라는 청년이 1950108일 죽창에 찔려 죽었다. 이후 초대교역자인 허상 장로의 부인, 노병재 집사와 그의 식구 23명이 순교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김방호 목사를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는데 김방호 목사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살려주겠다고 위협했지만 모든 식구들은 찬송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김방호 목사와 아내 김화순 사모, 다섯 아들, 그리고 이제 겨우 8세와 5세된 손자가 차례로 순교를 당하였다.

살아남은 염산교회 성도들은 1951224일 다시 모였다. 그리고 땅 속과 마루 밑 항아리 속에 숨겨둔 성경과 찬송가를 꺼내들고 다시금 교회를 일구어 갔다. 1951년 부활절에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김익 전도사가 부임 예배를 드렸고 부모 형제와 교인들을 죽인 원수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염산교회는 1997년 순교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순교공원을 조성하고 순교자 77인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희생당한 32명의 유골이 이곳에 묻혀 있으며 염산교회에서 시무한 김방호 목사 부부묘와 허상 장로 부부 묘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염산교회와 순교자의 발자취를 살펴 본 일행은 오후 2시에 다시 신안지역 순교 현장을 방문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이 지역은 원래 섬이었지만 지금은 대형 다리가 놓여 육지와 같이 통행을 하고 있다. 섬과 섬을 잇는 칠산대교를 지나고 254분쯤 증도대교를 지났다. 우리가 가는 다음 코스는 신안군에 있는 증도이다. 이곳에 전남 신안지역 기독교 전파를 위해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의 유적과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330분에 도착하였다.

전남 신안은 전국에서 최고의 복 음화율을 자랑하는 곳이다. 거기 에는 1930년대 홀로 돛단배를 타 고 섬마을 곳곳에 복음을 전한 문 준경 전도사(1891~1951)의 공이 크다. 신안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1953년 교회를 세우기 시작 일 년에 아홉 켤레의 고무신이 닳을 정도로 신안의 섬들을 다니며 복 음을 전했고 그 결과 중동리교회, 대촌리교회 등 10개의 교회를 설 립했다. 그러나 그는 195010 5일 중동리 백사장 앞에서 공 산군에 의해 총을 맞고 순교한다.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한국 CCC의 선구자 김준곤 목사, 이만선 목사, 장태기 교수 등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2013년 성결교단에서 세웠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에서 나와 우리들이 쉴 공간인 엘 드라도 리조트로 갔다. 리조트로 가는 길 해변에 문준경 전도사의 묘지가 잘 단장되어 있었다. 리조트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고, 화령교회에서 준비한 모시풀 송편을 한 박스씩 받은 후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550분에 저녁식사를 위해 이확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낙지비빔밥과 이곳 명물인 짱뚱어탕이 준비되어 있었다. 각자 희망대로 사전에 예약하여 식사를 하였다. 저녁 식사 후 시찰회에서 준비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기 전 밀물로 인해 차오른 바닷물을 보며 이곳의 명물인 짱뚱어 다리를 걸으면서 증도의 일몰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겼다.

숙소에 돌아 온 후 745분 리조트 광장에 모여 상주시찰회 밤을 열었다. 강성식 상주시찰장의 사회로 열린 이날 상주시찰회 밤은 공검교회 이상기 장로의 솔로 독창 가을이라 가을바람동요를 시작으로 막을 열었다. 각 교회 목사님 권사님 그리고 장로님들이 나와 간증과 찬양과 노래로 시찰회의 밤은 깊어 갔다. 9시가 훨씬 지난 후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찰회의 밤을 마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 내일을 위한 휴식에 들어갔다.

 

92일 금요일

 

일찍 일어 난 회원들은 삼삼오오 해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아침 식사는 730엘드 시즌식당에서에 설렁탕으로 아침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회원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모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9시에 광주로 출발하여 호남신학대학에서 선교사 묘역탐방과 역사문화 마을을 돌아 볼 계획이다. 각자 버스에 탑승하고 인원을 점검한 후 방 키를 반납했다. 이어 9시 정각에 광주로 출발하였다. 증도에서 광주까지는 거리가 퍽 멀었다. 1021분에 함평나비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달려 1131분에 호남신학대학교에 도착하였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잠시 등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고 이어 1150분쯤 김동원 목사의 안내로 양림동산 선교사 묘역 탐방과 양림동 일대의 역사문화마을을 탐방하였다.

호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는 유진벨(배유지, 1868~1925) 선교사와 클레멘트 오웬(오기원, 1867~1909) 선교사이다. 1898년 목포지역을 선교하던 두 선교사는 그 이후 1904년 광주 지역으로 파송된다. 190412월 광주제일교회를 시작으로 광주양림교회를 중심으로 광주 복음화 사역에 중심적이 역할을 한다.

유진벨 선교사의 광주 양림동에서 처음 예배를 기념하는 선교기념비가 있고, 광주선교부 설립에 기여한 오웬 선교사 기념각이 있다.

1955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호남지역의 교역자 양성을 위해 호남성경학교를 개설, 이후 1963년 호남신학교로, 1992년에는 대학교 인증을 받았다. 호남신학대학교 안에는 우일선 선교사 유수만 선교사 원요한 선교사, 피터슨 선교사, 허철선 선교사 사택들이 있고, 양림동 동산에는 양림동 선교사 묘역이 있다.

양림동 선교사 묘지에는 호남선교를 위해 헌신한 26명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잠들어있는 호남 기독교의 성지이다. 초창기에는 12개의 무덤이 있었는데, 1979년 전국적으로 선교구역이 정리되어 순천에서 10, 목포에서 4구가 이장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1909년 의료션교사 오웬을 시작으로 광주지역 고아와 과부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선교사 등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지금은 많은 간호사가 매년 5월 쉐핑의 무덤 앞에서 간호사 선서를 하곤 한다. 선교사 묘지 옆에는 한국전쟁 중 순교한 신자들의 이름이 지역별로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진벨 선교사의 광주 양림동에서 처음 예배를 기념하는 선교기념비가 있고, 광주선교부 설립에 기여한 오웬 선교사 기념각이 있다.

1955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호남지역의 교역자 양성을 위해 호남성경학교를 개설, 이후 1963년 호남신학교로, 1992년에는 대학교 인증을 받았다. 호남신학대학교 안에는 우일선 선교사 유수만 선교사 원요한 선교사, 피터슨 선교사, 허철선 선교사 사택들이 있고, 양림동 동산에는 양림동 선교사 묘역이 있다.

양림동 선교사 묘지에는 호남선교를 위해 헌신한 26명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잠들어있는 호남 기독교의 성지이다. 초창기에는 12개의 무덤이 있었는데, 1979년 전국적으로 선교구역이 정리되어 순천에서 10, 목포에서 4구가 이장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1909년 의료션교사 오웬을 시작으로 광주지역 고아와 과부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선교사 등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지금은 많은 간호사가 매년 5월 쉐핑의 무덤 앞에서 간호사 선서를 하곤 한다. 선교사 묘지 옆에는 한국전쟁 중 순교한 신자들의 이름이 지역별로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오웬 선교사는 의사이자 목사였다. 1898년 목포에서 진료소를 개설하는 한편 벨 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에 공을 세웠고, 19041225일 벨 선교사는 광주로 이주 광주제일교회를 설립했다. 불행하게도 190943일 급성 폐렴으로 사망, 선교사 최초로 광주 양림선교사묘역에 안장하였다.

벨 선교사 가족은 1868년 미국 출생 1894년 선교사로 입국, 1897년 목포교회와 선교부를 세웠고 1904년 광주선교회와 광주교회를 세웠다.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여중고를 설립 1901년 아내가 죽자 서울양화진에 안장했다. 셀 선교사는 1925년 광주에서 사망하여 양림동산에 안장되었다.

쉐핑 간호 선교사는 1880년 독일 태생으로 미국으로이민 1912년 제중병원(광주기독병원) 간호사로 내한하여 군산, 서울, 광주지여에서 불우한 여성을 모아 성경말씀을 교육하고, 기술교육을 통하여 여성자립과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1923년 쉐핑은 최초로 한국여성간호사들을 모아 조선간호부회를 창립했다. 광주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를 설립해 여성문맴퇴치 계몽에 힘썼으며 호남의 버려진 여성들과 나병환자들을 위해 평생 일하다가 영양실조와 과로로 1934년 세상을 떠났다.

선교사묘역과 양림동 역사마을 탐방을 마치고 오후 140분에 호남신학교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차림도 차림이려니와 푸짐한 음식으로 모든 회원들의 식성을 충족하기에 남음이 있었다.

이어 2시부터 호남신학대학교 식당에서 제142회 상주시찰회가 진행되었는데 이번 시찰회에서 화령교회 박연모 목사가 새 시찰장으로 당선되었다.

330분 호남신학대학교를 출발한 일행은 513분 거창휴게소에 들려 휴식을 취한 뒤 630분 강성식 시찰장의 모든 순교지 탐방 행사를 마치는 마침기도로 12일의 여정의 막을 내렸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