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8일은 상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반원 일행이 상주박물관과 도남서원에 현지 학습을 다녀왔다.
도남서원에 들려 금중현 부원장 겸 강사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다음은 도남서원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고 참고자료는 다시 보충해 보았다.
문화원 향토문화연구반 도남서원 및 상주박물관
현장 체험학습
지난 2011년 6월 8일 상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반(강사 : 금중현 부원장)은 일일 현장체험학습으로 도남서원과 상주박물관으로 다녀왔다.
이날 오후 1시 40분에 문화원을 출발한 체험학습반은 2시경에 도남서원에 도착하였다.
금중현 부원장 겸 강사님은 도남서원 입구의 입덕문(入德門)부터 강의를 시작 하셨다.
1. 입덕문은 덕행을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덕행(德行)은 보통 여덟 가지의 덕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 여덟 가지 덕이란《대학》에서, 이상적인 정치를 하기 위한 첫 단계를 이르는 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순서로 발전한다. (격물 格物 이란 주자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끝까지 따지고 파고들어 궁극에 도달함을 이르는 말. 양명학에서, 사물에 의지가 있다고 보아 그에 의하여 마음을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 치지 致知 사물의 도리를 깨닫는 경지에 이름. 성의 誠意 정성스러운 뜻. 정심 正心은 마음을 올바르게 가짐. 또는 그 마음. 수신 修身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아서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함. 제가 齊家는 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잡음. 치국 治國은 나라를 다스림. 평천하 平天下는 천하를 평정함.)
2. 입덕문을 지날 때는 일반적으로 가운데는 신이 다니는 길(神道), 오른쪽은 들어가는 문(入口), 왼쪽은 나오는 문(出口)이라고 설명하셨다.
3. 서원은 크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과(道正祠와 공부를 하는 강학 공간(一貫堂, 東西齋), 그리고 정허루(靜虛樓)와 입덕문처럼 과정공간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4. 서원과 향교의 차이(참고 사항)
가 서원 :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것으로 안향을 봉사 대상으로 하고 학규는 주희가 세운 백녹동서원의 것을 본받았다. 그 후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여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초기의 서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액은 편액뿐만 아니라 서원의 유지 관리를 위한 토지와 노비, 다량의 서적이 부수되는 것이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사설 교육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공인 하에서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은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미 명종 때까지 거의 20개에 가까운 서원이 세워졌으나 선조 때에는 50여 개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 가운데 21개의 서원이 당대에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일향 사림들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는데 본 읍이나 인근 지방관이 서원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원의 인적 구성은 원임(院任)과 원생(院生)으로 나누어진다. 원임은 원생의 교육과 서원의 제반 대소사를 관장하는 책임자인 원장(院長)을 비롯하여 서원의 향사(享祀)·교육·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유사들로 구성되었다. 원생은 양반 자제들 가운데서 유교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생원·진사·초시 입격자·유학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원생들에 대한 교육과정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성리학의 교육과 연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었다.
서원의 경제기반은 토지와 노비를 바탕으로 했는데, 본래 각지의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학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보장책은 없었다. 단지 국가가 승인하는 형식인 사액의 경우 면세전 3결(結)과 노비 1구(口)의 사여가 따랐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 당초부터 그 지방의 사림으로부터 토지나 노비가 기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이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자 면세를 목적으로 납입되는 토지, 면역을 목적으로 투탁하는 양인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서원은 대체로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 향촌 자치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그후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의식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의 설립에 중앙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서원의 문란에 제동을 건 것이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였다. 그는 당시 679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서원들은 대한제국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47개소에 해당되는 것이다.
서원은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이라는 기능에 의해 공간구성·배치수법이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다. 즉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東齋)·서재(西齋)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러한 중심건물 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이를 보관하는 서고, 서원의 관리 및 유생들의 식사준비 등 생활전반을 뒷받침해주는 교직사(校直舍), 제사에 필요한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택지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에 따라 적당한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의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가 많다.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內三門)을 만들어 통행하도록 했다. 교직사는 강당 서쪽에 따로 담을 쌓아 배치하고, 제기고는 사당 앞 옆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당의 구조는 익공식(翼工式)의 단층팔작집이 일반적이며 동재와 서재는 민도리집 형식인 단층맞배집, 사당은 익공식 단층맞배집으로 건축되어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담장을 높지 않게 세우고 그 일부를 터서 내부에서 밖의 자연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조경식물도 적절히 심어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사적 제55호),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의 옥산서원(사적 제54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보물 제350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의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의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의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등이 있다.
나. 향교(鄕校)
향교(鄕校)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일명 교궁(校宮)·재궁(齋宮)이며,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을 때에는 향학이라 불렀다. 향교는 지방의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된다.
조선의 향교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道)와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목·군·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에는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한국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서양무(東西兩廡)·동서양재(東西兩齋)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兩舍)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훈도(訓導) 각 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었으며, 또 교예(校隸)가 속하고 있었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그 공수(公需)를 위하여 정부에서 학전(學田) 7결 5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으나,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매수 등에 의한 많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高級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 장이 되고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이후 교육제도의 확립에 따라 각종 교육기관은 정비되었으며, 향교는 1911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문묘직원(文廟直員)을 명예직으로 두어 부윤 혹은 군수의 감독하에 두고 문묘를 지키고 서무(庶務)에 종사케 하였다. 학전, 지방 유림의 구림(鳩林) 등 향교재산은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의 소관으로 1900년(융희 4) 4월에 향교 재산관리규정을 정하고 부윤·군수로 하여금 정리케 하고 그 수입은 부·군내의 공립학교 또는 지정하는 학교의 경비 또는 문묘의 수리·향사비로 충당케 하였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향교의 총수 335, 소관 토지 48만 평이었다. 그 후 재산 관리규정은 폐기되어 공립학교의 경비에 사용되지 않고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 사업의 시설에만 충당케 하였다.
5. 정료대 : 정료대문화원형 백과사전 횃불을 피워놓는 뜰에 세운 기둥모양의 대(臺)
6. 손학재(孫學齋)와 민구재(敏求齋) : 학생들의 기숙공간
7. 일관당(一貫堂) : 도는 하나로 꿰뚫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 현판은 도남서원(도남서원)현판이 달린 일관당의 안쪽에 걸려 있다. 그런데 이 현판을 쓰신 분은 매호별곡을 지으신 조우인의 손자 조시호(曺時虎)께서 쓰셨는데 한 일 자의 획의 힘이 얼마나 힘찼는지 서원 앞 낙동강에 노닐던 고기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는 일화도 있었단다. 허허.
* 조우인
작가 조우인(曺友仁) 분류 고전문학 > 고전시가 > 가사 창작시기 1625〜1628년 경
「매호별곡」은 조선 중기의 문인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 1561〜1628)이 말년(末年)에 매호에서 은거하며 지은 가사 작품이다. 조우인은 61세 때 당쟁으로 인해 시화(詩禍)를 입어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다시 여러 벼슬을 제수 받게 되지만 조우인은 이를 사양하고, 경북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 은거하다가 65세(인조3년, 1628)에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의 창작연대는 그가 매호에서 은거한 시기인 1625〜1628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우인의 가사 작품은 총 4편이 전해지는데,「매호별곡」 이외에도「출새곡(出塞曲)」ㆍ「속관동곡(續關東曲)」ㆍ「자도사(自悼詞)」가 전하며,『이재영언(頤齋詠言)』과『간례(簡禮)』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8. 전사청(典祀廳) 제사 준비 공간
9. 도정사(道正祠)에는 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전면 좌로부터 포은 정몽주, 한원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희재 이언적, 퇴계 이황 그리고 좌측 앞쪽에 서애 류성용, 창석 이준, 오른쪽 위쪽에 소재 노수신, 우복 정경세의 순으로 모셔져 있다.
위패는 시호 그리고 아호 그리고 성, 다음 선생이란 8자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팔자(八字) 고치다’란 의미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문장공 우복 정선생’
10. 도남서원과 건물의 배치
도남서원이 중건되면서 건물의 배치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금중현 부원장은 일명 ‘스카이라인’이라 하여 가장 위쪽에 위치한 제향공간인 사당에서 내려다 보거나 입덕문 아래에서 올려보면 모든 건물의 위치가 한눈에 나란히 보여야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그렇지 못한 배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 정허루 아래 칸이 입덕문 이었는데 건물의 위용을 갖추고자 입덕문을 따로 새우면서 정허루와 입덕문의 간격이 좁아지고 입덕문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 정허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비봉산의 경관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가지 참고할 사항은 서원을 건축함에 있어 주춧돌이나 계단석 등이 사찰에서 가져온 탑재나 기타 사찰 건축용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배불숭유정책의 일환으로 사찰을 헐고 여기에서 나온 석재가 공공연하게 서원을 건립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도남서원 건립당시 재료는 사벌면 화달리에 있는 사찰에서 가져 왔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 참고 사항
1.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유래
1605년(선조 38년) 4월 22일 우복 정경세, 우곡 송량,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석천 김각, 검간 조정의 제현이 국조유현 5선생의 묘(廟)를 세우기위해 향회(鄕會)를 열자고 통문 한 것이 설립의 최초의 발의였다.
2. 설립의 목적은 학문 연구와 선현제향 이었다(우복 정경세가 1605년에 쓴 통문의 내용)
3. 도남서원의 특징
도남서원의 이름의 유래
‘우리의 儒道(도학.이학)가 남에 있다(吾道南)’는 북송의 정호(程顥)가 그의 제자 양시(楊時)를 남송의 고향으로 보내며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을 조선유학사상이 이 말의 의미를 극대화시켜 유도(儒道)의 영남학파 의식을 대대로 고취한 것은 상주의 선비들이었다. 결국 도남서원은 海東의 吾道南이란 의미가 깊다. 특히 오도남이란 말이 조선에서 언제 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극대화한 것은 1606년 이후부터 상주 선비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도남서원의 사적과 도학정신에서)
도남서원 현판
도남서원 강당 안에 걸린 일관당 현판
2011년 춘향때 담당자들의 역할 분담표
돌계단으로 사용된 근처 사찰의 탑재들
주춧돌로 사용된 탑재들
정허루
사행당은 조선 유가의 가옥을 옮겨놓았다고 했다.
상주박물관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는 우복 정경세 선생의 종부에 관한 전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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