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 대감의 삶과 생애 |
윤 재 수 전) 상주대학교 교수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청백리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 대감의 삶과 생애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윤 재 수
<目 次> | ||
Ⅰ. 머리글 Ⅱ. 김덕함의 생애 Ⅲ. 성옹 김덕함의 비명碑銘 Ⅳ. 김덕함 청백애민비金德諴 淸白愛民碑 Ⅴ. 효성과 청빈 생활 Ⅵ. 유배생활 Ⅶ. 복권 Ⅷ. 마무리글 |
Ⅰ. 머리글
우리나라는 5,0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작은 영토를 가진 국가이지만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때로는 인적 물적 자원을 조공으로 바쳐야했고 대로는 송두리째 국토를 내어주기도 했지만 면면히 그 맥을 이어왔습니다. 무궁화처럼 근면과 은근의 끈기로서 나라와 문화를 발전 시켜왔습니다.
선조로부터 이어온 강인한 정신과 탁월한 능력으로 한류의 열풍을 확산시켜 오늘에 와서는 스포츠, 예술, 산업적으로 세계열강들의 대열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인류역사에 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사의 주류를 이루어 온 탁월한 영도자들과 성실 근면한 청백리들에 의하여서 나라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조그마한 국토에서 빈약한 자원을 가지고 우리나라가 동양적 고유문화를 발전시키고 유지해온 가장 큰 원동력은 이조 500년 동안에 배출한 218명의 청백리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은 우연의 일이 아닙니다. 민족적 단합된 힘과 피, 눈물 그리고 땀의 대가입니다.
우리가 살고 생활하는 상주벌판의 상주 사람들은 낙동강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하는 역할을 줄기차게 발전시켜 국가발전에 일조를 하였습니다.
요즈음 들추어지고 있는 고급관료들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보면서 청백리정신을 가꾸어가는 일이 더욱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회부패를 초래한 공직자들과 사회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상산인 청백리 성옹醒翁 김덕함 대사헌을 돌아보는 일은 시기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청백리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부터 깨끗한 사람이 되고 국민을 위한 각자의 책임을 완수하는 국민의 한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개념의 실천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맑고(淸), 깨끗한(白) 관리가 많아 질 때 경제적 침체성을 벗어날 수 있고 남북의 통합, 동서의 화합, 세대 간의 융화 등등 현실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여 난관을 극복할 수 있으며 국민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상산인 청백리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 대사헌大司憲을 소개함으로 오늘의 시대상을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덕함 대사헌은 공과 사를 구별하고 사를 희생하고 공을 우선해 살았던 청백리였습니다. 그분의 생활상과 사상을 되돌아보는 일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벼슬이면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일단 수용한 벼슬자리는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생면을 초개 같이 버리는 일도 스스럼없이 수행하였던 청백리였습니다. 부정을 보면 직언하고 응징 했고 비리를 보면 목숨을 걸고 그 시정을 촉구한 청백리입니다. 임무를 수행할 때는 기뻐고 떳떳하게 수행했습니다. 국가기강의 확립과 사회정의의 구현에 솔선했던 청백리의 길은 정正이었고 의義였습니다. 그러한 길이 진리요 이도吏道라고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 주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공직이 필요합니다.
조선의 청백리가 될 수 있는 요건은 7가지였습니다.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奸猾息 등 7가지 였습니다. 청백리를 녹선하는 절차는 예조에서 녹선후보자를 초개抄啓한 다음, 그 초록을 놓고,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경조京兆의 당상관 이상의 고관들과 사간원, 사헌부의 수장들이 심사하고 왕의 재가를 얻어 청백리로 녹선錄選했다.
Ⅱ. 김덕함의 생애
청백리淸白吏 김덕함金德諴은 1562(명종 17)년에 출생하여 1636(인조 14)년에 75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광해, 인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이민利民의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습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시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증 통예通禮 형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左承旨 장수長琇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홍洪이다.
성옹醒翁 김덕함은 12세의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곤궁한 가정에서도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7(선조 2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8(선조 21)년 진사가 되었으며, 1589(선조 2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 해 행재소인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그 후 공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임시로 군공청軍功廳을 세워 전쟁의 공과를 실시할 때 비변사 낭청을 제수 받았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와 공조의 좌랑과 비변사 낭청· 호조 정랑· 직강· 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 청풍· 단천· 성천· 장단· 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597년 일본의 재침으로 분조分曹가 세워지자 호조정랑으로서 분호조정랑分戶曹正郞을 겸임해 군량 조달에 힘썼다. 1601년 10월 22일에 순창淳昌군수를 제수 받았다. 동년 11월 23일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다. 1605년 9월 30일에는 장단부사長湍府使 제수되었다. 그가 장단부사를 역임할 때 경기 암행어사 심집沈諿은 암행결과를 “장단부사 김덕함은 청고淸苦한 소신을 지켜 아전들은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존애尊愛하였다”라고 보고하였을 정도로 그는 청백한 관리였습니다. 1610년 5월 7일 안주목사에 제수 되었으나 이듬해 5월에 임기 만료가 된 김덕함의 유임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청원함을 알리는 평안감사의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어전회의에서 이조가 아뢰었다.
“평안 감사의 장계에 말한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덕함金德諴의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였습니다.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덕함의 치적은 온 도내에서 으뜸이며 또한 조사詔使가 왔을 때에 주참主站의 지위에 있으면서 잘 요량하여 처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을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이웃 고을의 수령과 본도의 감사까지도 모두들 신에게 그가 머물 수 있도록 청해줄 것을 바랐었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번거롭게 아뢰는 것은 일의 체모가 아닐 듯하여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장계를 올린 것은 본도의 사세상 그럴 수밖에 없어서 한 것인데, 오직 성명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심희수는 의논드리기를 ‘김덕함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었을 때에 모두들 잘 다스린다는 칭송이 있었습니다. 안주에서의 정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나, 백성들의 장계를 보면 그가 머물러 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지역 주민들의 소청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매우 구차한 일이라 하겠으나, 서도 지방의 기근은 다른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고 또 중국 사신의 행차가 있게 될 것이니,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조그마한 폐단이라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임시적인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1615년 1월 20일 수성찰방輸城察訪, 1617년 8월 18일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이르렀으나 1617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 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명천, 온성, 남예南裔 등지에 이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1623(인조 1)년 3월 16일에 집의로 제수 받은 이후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 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10월 24일 대사헌에 올랐다. 이 때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 6월 8일에는 청백리로 뽑혔다. 1636년 12월에 득병하여 세수를 다하였다.
문집으로 ≪성옹유고≫가 전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Ⅲ. 성옹 김덕함의 비명碑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 조선 중기의 문신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1562~1636)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1993년 10월 30일 경기도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묘제의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묘역으로, 묘는 부인 경주 이씨와의 합장묘이고, 봉분은 단분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상석 앞으로는 좌우로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 우측에는 구비舊碑와 신비新碑가 나란히 서 있다.
낮은 둔덕에 조성된 묘역 바로 아래쪽에 자리한 비각碑閣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1686년(숙종 12)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詩烈이 짓고, 글씨는 증손 김유金濡가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을 썼다. 비신碑身은 94×28×188cm, 비석을 받치는 기대基臺는 221.5×161×20cm, 하부구조인 대좌臺座는 147×92×60cm 규모이고, 비신 위에는 팔작지붕형 가첨석加檐石이 얹혀 있다. 이 묘역은 두 번의 이장을 거쳐 1660년 현 위치에 조성된 것이다. 상산김씨 충정공파 종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숭정 황제崇禎皇帝(명 의종明毅宗) 9년 병자년丙子年(1636년 인조 14년)에 고故 대사헌 김공金公 휘 덕함德諴, 자 경화景華가 나이 75세로 12월 초10일에 졸하였는데, 그 뒤 27년째인 해에 그의 아들 수찬修撰 김설金卨과 손자인 헌납獻納 김우석金宇錫이 묘비墓碑의 글을 부탁하였다. 아! 세도世道가 쇠퇴하고 미약해져서 정기正氣는 없어지는데, 공의 유열遺烈을 드러내 밝혀 이 큰 역사를 도움에 있어 생각해보면 두렵고 감히 할 수 없으나 또 어떻게 차마 사양하겠는가?
삼가 상고해보건대, 공은 상산인商山人이니, 원조遠祖 김수金需는 재보宰輔로 고려高麗를 도와 이름이 있었고, 그 뒤에 김일金鎰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이었고 김녹金祿은 좌대언左代言이었다. 좌대언의 세 아들은 김득배金得培ㆍ김득제金得齊ㆍ김선치金先致이니, 모두 유학자로서 장수가 되어 세상에서 삼원수三元帥라 칭하였는데, 그 막내는 낙성군洛城君에 봉해졌고 묘소가 상주尙州의 개원동開元洞에 있다. 낙성군이 호군護軍 김승부金承富를 낳았는데, 그 배위 전주 유씨全州柳氏가 혼자 되자 외아들을 따라 상주에서 배천白川으로 이사하여, 유씨의 묘소는 지금도 배천의 화산花山에 있다. 집안이 연해 떨치지 못하다가 공의 형제가 귀히 되자 증조 휘 형衡을 통례通禮로, 조부 휘 장수長琇를 승지로, 고考 휘 홍洪을 이조 참판으로 각각 추증하였다. 참판공의 아우인 감찰 김택金澤은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명종 때의 을사사화乙巳士禍는 매우 혹심하여 일찍이 분육賁育으로 자부하던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하였으나, 감찰이 맨 먼저 포의布衣로서 홀로 신설伸雪을 청하는 글을 올리니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고, 그로부터는 사류들이 다소 입김을 토하게 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드러나게 쓰이지는 못하고 몰하였는데, 공과 공의 백씨 김덕겸金德謙은 그 분한테서 수학하였다.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뼈저리게 느껴 더욱 문학에 힘써 나이 26세에 초시初試 삼장三場에 합격하였는데, 더러는 상위上位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진사進士가 되고 또 그 이듬해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크게 고故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알아주는 바가 되었다. 임진년壬辰年(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倭賊의 침구가 대단하자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해서海西 땅에 피란하였고, 이내 이정암李廷馣공이 지키고 있는 연안성延安城으로 찾아가서 공은 주로 군향軍餉을 담당하며 종사하였는데, 뒤에 이공이 성 밖의 적을 크게 무찔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공은 그때에 모부인께서 병을 얻어 분주히 구완하느라 해주海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싸움에는 참전하지 못하였다. 이어 행재소行在所에 들어가 예조와 공조 좌랑에 제배除拜되고, 비변사의 낭청郞廳을 겸하였다. 이윽고 천거로써 사공청査功廳의 도청都廳이 되었는데, 공은 공정하게 하여 아부함이 없었고 절대로 안면을 두지 않았으므로, 당시에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이어 선천 군수宣川郡守가 되었다가 호조 정랑으로 들어갔고 대신의 진언進言으로 차출되어 분조分曹의 일을 맡았는데, 강화江華에서 명明나라 군사의 보급을 전담하여 일이 잘 처리되자, 직강直講에서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제수되고, 체직되어 제사諸司의 정正이 되었다가 또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으며,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어서는 조정에서 특별히 공을 위하여 파격적으로 모부인을 모시고 가 섬기게 하였으나 일이 있어 몇 달 만에 파직되었다. 이윽고 다시 제사의 정 또는 첨정僉正이 되었고 얼마 안되어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되었는데, 어사御史가 공의 청백淸白함을 포계褒啓하자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품계에 해당된 의복을 내렸다.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말하기를, “안주安州는 국가의 중지重地로서 지금 사무가 급박한데, 김모金某는 공렴公廉 근민勤敏하여 온 조정에서 견줄 만한 이가 없으니 비록 지금 청선淸選하려 한다 하더라도 우선은 김모를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그때에 겨우 직강直講에서 사예司藝로 옮긴 직후였으나, 마침내 사예에서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사는 또 치행治行이 제일이라고 계문啓聞하였다. 돌아오자 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자 수성 찰방輸城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사람들이 혹 병을 핑계 삼아 가지 말라고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부모가 계셔서는 연해 좋은 곳을 맡아 봉양이 극진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멀고 나쁜 곳에 제수되었는데, 모면할 것을 도모하여 일신만 편하려 하는 것은 의리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듬해인 1617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군자감軍資監에서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옮겼는데, 광해군이 모비母妃를 폐하려고 조정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 문충공과 정홍익鄭弘翼공이 그 불가함을 극언하면서 경전經傳에 근거하고 예경禮經에서 고증하여 대의大義가 명백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두 공公의 말은 바로 나의 뜻이니, 나는 구태여 되풀이할 것 없다.” 하고, 드디어 종이에 써서 올리기를, “신의 일편 단심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항복ㆍ정홍익과 일반입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두 공과 더불어 먼 변방에 안치安置되었다. 공은 처음에 남해南海로 정배되었으나 먼 변방이 아니라 하여 즉시 명천明川으로 옮겨졌고, 또 내지內地와 다소 가깝다 하여 온성穩城으로 옮겨졌는데, 이윽고 북변北邊에서 오랑캐의 사단事端이 일어나자 흉당兇黨들이, 죄인이 장차 오랑캐와 내통하게 될 것이라 핑계하여 마침내 온성에서 남쪽의 사천泗川으로 옮겼다. 5년이 지나 계해년癸亥年(1623년 인조 원년)은 인조 대왕의 원년이다. 모비母妃가 복위復位되어 이륜彛倫이 다시 밝아지자, 공은 마침내 새로운 명을 받아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친척이 한 관서에 있는 혐의를 회피하여 체직하자 임금께서 특명으로 도로 제수하였다. 이윽고 품계를 통정 대부로 뛰어올려 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참의와 승정원 승지를 지냈다.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쪽으로 가서 왕인王人을 접대한 다음 사명을 끝마치고 돌아왔는데, 이때에 임금이 대주大主에게 집 재목을 주어 그 집을 증축하게 하라고 명하고, 또 김공량金公諒에게 관작을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김공량은 선조宣祖 때부터 빈궁嬪宮을 의탁하여 위복威福을 한껏 누려온 자인데, 공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모두 저지하고 봉행하지 않았다. 또 경덕궁慶德宮의 지나치게 사치스러움을 말하고 광해조에서 패망한 원인이 여기에 있으니, 거기에서 안거安居하면서 즐기기만 하여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처음에는 가납하였으나 뒤에는 점점 감내하지 못하고 엄한 꾸지람을 내렸는데, 오랜 뒤에 정엽鄭曄공이 유소遺疏로써 공의 일을 임금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고충孤忠 직절直節이 있는 사람을 한번 비위를 거슬렀다 하여 4년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하여 그제야 비로소 이조 참의, 부제학,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공이 대사성이 되어서는 학문을 강론하고 닦기를 매우 근실히 하며,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향을 피우고 반드시 재계齋戒를 하니, 성균관의 제생諸生들도 공의 충직한 행동을 모르는 체할 수만도 없어 다소는 태도가 바뀌었다. 선비 양성용 재물을 지난날 간사한 자들이 모두 숨기고 감추어 두었는데, 공이 모두 거둬들여 정리하였다. 또 유자儒者로서 일찍이 폐모廢母의 논의에 가담한 자들이 다시 각각 정당하지 않은 길을 통하여 차차 선비의 대열에 끼어들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되면 숙특淑慝(선량하고 간특함)의 분별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장嘉獎하였다.
1627년에 오랑캐의 침공이 있자 공은 호소사號召使가 되었고 일이 진정되자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 그때에 오랑캐의 사신이 나오게 되었는데, 시론時論이 (명明나라) 조사詔使를 대접하는 예로 대접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이미 여주에 이르렀다가, 사직을 청하는 글 속에 ‘그렇게 할진대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는 말이 있더니, 마침내는 인수印綬를 던지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다시 서반직西班職을 거쳐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역시 그만두고 돌아왔다. 1635년에 혜릉惠陵, 과 목릉穆陵, 두 능이 무너졌는데, 마침 원종元宗의 부묘례祔廟禮와 맞서 있어 공이 상소하여 부묘례를 물려서 행하기를 청하였다. 1636년에 대신이 명을 받들어 조정 신하들 중 청백淸白한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공과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김상헌金尙憲) 등 몇 사람으로 응명應命하자, 특별히 공을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려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공이 힘써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권우眷遇는 더욱 융숭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공은 병이 들었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모부인母夫人의 나이가 이미 많게 되었을 때는 한 번도 옷을 벗고 자는 일이 없었고 하룻밤에 안후安候를 살핌이 8, 9번에 그치지 않았으며, 모든 봉양에 손수 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상喪을 당하자 예문禮文대로 반곡反哭하고 백씨伯氏와 더불어 번갈아 묘소를 지켰는데, 나이가 70세가 되었는데 애통해 하면서 묘소를 살피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자질子姪들이 생일을 하례하려 하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일찍 부모를 여읜 처지에 다만 슬픈 생각만 더할 뿐이다.” 하였다. 동기간에는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백씨가 늙으매 형을 섬기기를 마치 온공溫公(송宋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형 백강伯康(사마단司馬旦)에게 하였던 것처럼 하였고, 죽어서 장사하기 전에는 빈소殯所 곁을 떠나지 않자 자제들이 번갈아 간諫하였으나 모두 뿌리치고 듣지 않았다. 큰누이가 사망하였을 때도 소식素食으로 달수(月數)를 채웠고 홀로 된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르면서 은의恩義가 두루 지극하였으며, 국상國喪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근실하여 왕명이 있지 아니하면 육식肉食을 하지 않았는데, 나이 7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그러하였다. 일곱 고을을 두루 맡았는데, 고을 사람들이 모두 청백한 그 절조에 감복하였고 반드시 비를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그 이병利病(이득이 됨과 병폐)을 찬찬히 살펴서 그대로 두거나 고치거나 하였지 한 번도 갑작스레 고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요란스럽게 하지 않아도 폐단이 깨끗이 없어졌는데, 돌아올 때에는 물건 하나도 가지고 오는 일이 없었으며, 집안사람이 혹 말을 하면 성을 내어 호되게 꾸짖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에 입는 것이라고는 구구狗裘, 에 지나지 않았고 먹는 것이라고는 나물국에 지나지 않았다. 사는 집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티끌이 가득하였으나 역시 쓸어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몸과 마음 속에도 더러운 것은 많다.”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혈기血氣가 쇠하면 으레 본래의 지킨 바를 바꾸어 전후가 마치 두 사람같이 되는 일이 많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작은 일이라고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병통이 되는 것이므로 나는 만년에도 더욱 허술하게 넘기지 못한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궁실宮室을 성대하게 치장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부수적인 이익을 취하였는데, 공만은 그러려고 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이 일로 인하여 자신의 영리를 취하리요?” 하였다. 귀양 갔을 때에는 남으로 갔다 북으로 갔다 왕래가 빈번하여 세 차례에 이르렀는데, 이는 사실 흉당들이 공의 목숨을 시험해 본 것이었으나 공은 기개가 더욱 굳세고 매서워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배移配될 때에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사람들은 사사賜死의 명이 있는 것으로 알았고 노복들은 목놓아 울었으나 공은 태연하게 스스로 백씨에게 서찰을 써서 작별을 고하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밥을 들곤 하였다. 사천泗川에 있을 때에는 가족이 따라왔는데, 공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이르기를, “위리圍籬는 왕옥王獄과 같은 것인데, 어떻게 처자와 함께 거처하겠는가?” 하였다. 성조聖朝를 만남에 이르러서도 더욱 충절忠節을 가다듬었는데, 비록 여러 차례 임금의 뜻을 거스르기는 하였으나 임금께서도 공이 일찍이 혼조昏朝에서 절의를 세워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한 점을 인정하여 포장褒獎하였다.
일에 당해서는 반드시 경전經傳의 대의大義에 근거하였고 말에는 반드시 증험證驗에 바탕을 두었는데 혜릉惠陵과 목릉穆陵이 붕괴하는 변을 당해서는 거의 모두가 숨기고 미루어 혹시나 부묘祔廟에 방애됨이 있을까 저어하여, 전일에 이른바 명공名公이라 하던 분들도 오히려 같은 말로 주관없이 찬동하여 따랐으나 공은 개연히 말하기를, “방묘防墓가 비에 무너지니 공자孔子는 줄줄 눈물을 흘렸고, 신궁新宮 이 불에 타자 아들 성공成公이 3일을 곡하니, ≪춘추春秋≫에 그 도리를 얻었음을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지금 이 두 능이 무너진 것은 비로 인하여 그랬다 하더라도 마땅히 곡읍哭泣하여 딴 일을 돌볼 겨를이 없어야 마땅하거늘, 선왕先王의 체백을 모신 능소는 미처 수복修復하지도 않은 채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면 효성을 표하는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처음에 오랑캐들이 참람하게 연호年號를 지어 와서 우리에게 사용할 것을 협박하기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은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천자天子께서 명명命名하지 않은 호를 이웃 나라에서 칭하면 ≪춘추≫에서는 당악黨惡 이라 성토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서國書에 저들의 국호를 쓰는 것부터가 ≪춘추≫의 대의大義를 범한 것입니다.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한 저 탐욕스럽고 잔인한 것들이 우리의 황토皇土를 좀먹고 있으니, 황옥黃屋과 천자가 있는 한,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받들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끊는다면 중하中夏가 되고 끊지 않는다면 이적夷狄이 되는데, 이하夷夏의 갈림이 이 한 번의 처사에 달렸습니다. 선조 대왕께서는 천명을 두려워하고 큰 나라를 섬기어 뜻을 안정시키고 기운을 길러 그 기운이 천지에 가득 참에 이르러서는 중국을 한 집처럼, 사경四境을 한 몸처럼 여기시더니 마침내 명나라 병사가 와서 병에 담긴 물을 엎지르듯 아주 수월하게 우리나라를 회복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표본을 세워 백관百官과 만민萬民의 선도자가 되신다면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사리에 다 옳아 아무리 천만인이 버티고 있다 해도 당당하게 나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아! 공의 정기正氣는 하늘에 맞닿아서 가시지 않을 만하다. 대체로 혼조昏朝에서도 충직忠直을 세워 자신을 지키는 자가 많은 법이며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르러서도 비색否塞한 처지를 바꾸지 않는 자가 있는 법이다. 강대한 적이 곁에서 으르렁거리어 패망이 조석에 닥쳐왔다면 모두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져 전일에 했던 말을 망각해버릴 수가 있지만, 공은 종시가 여일하여 죽음에 이르렀을 때까지 더욱 가다듬었으니, 아성亞聖이 이른바 ‘빈천貧賤으로도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없고 부귀富貴로도 음란하게 할 수 없고 위무威武로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에 공은 거의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존양存養하는 공정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공은 매양 고인古人이 학문을 하는 요령을 논하면서 반드시 주경主敬으로 근본을 삼았기 때문에 속이지 않는 실상과 굳게 정해진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일찍이 혼자 있을 때에 노 남자魯男子의 일을 당했어도 능히 자신을 지켰고 창졸간에 배가 뒤집히는 듯한 위태로움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속으로 지키는 바가 이와 같았으니, 사위事爲에 나타난바 광명 정대하여 도저히 미칠 수 없음이 괴이할 것이 없겠다.
공은 병이 더치자 여자들을 물리치고 동쪽으로 머리를 돌리어 혼자 말하기를, “국사가 바람직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면서 유소遺疏를 초하려다가 하지 못하고 다만 자제들에게 마음을 다스리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으로써 경계하는 말만 남겼다. 작고한 지 4일 만에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이미 도성 서쪽 근교近郊에 육박해 들이닥쳤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들것에 얹어 서강西江가에 고장藁葬(가매장)하였다. 이때에 오랑캐들이 몇 달을 개미떼처럼 둔치고 있으면서 새 묘나 묵은 묘를 모조리 파헤쳤으나 유독 공의 널만은 무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충의忠義의 보답이라고 말하였다. 경자년庚子年(1660년 현종 원년)에 재차 무덤을 옮겨 적성積城의 관아 서쪽 군방곡群芳谷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임금께서 공의 부음訃音을 듣자 매우 슬퍼하였고 추후하여 부제賻祭의 예를 내렸다. 아들이 훈신勳臣이 됨으로써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효종 대왕 때에 연신筵臣이 건의하기를, “김모金某가 아직까지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니, 앞으로 충성을 장려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충정忠貞이라 시호를 내렸다.
부인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별제別提 이원성李元誠의 따님인데, 공이 집에 있을 때나 벼슬길에 있을 때 부인은 공이 염직廉直하고 매우 효도하도록 도우며 덕德 있는 이를 짝한 지 50년 동안에 종시토록 어김이 없었다. 장남은 바로 수찬修撰(김설)이니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딸에게 장가들어 헌납獻納(김우석)과 딸 셋을 두었는데, 사인士人 안두극安斗極, 직장直長 이증현李曾賢, 사인士人 심사홍沈思泓이 그 사위이다. 차남 김향金嚮은 현령縣令이니 판관判官 유사경柳思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규석金圭錫ㆍ김명석金命錫과 두 딸을 낳았는데, 사인士人 정낙鄭洛과 성중오成重五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약간인이다. 공은 평소에 송조宋朝 제현諸賢의 사실史實을 즐겨 읽었기 때문에 공의 행한 바가 많이 그 속에서 나왔다. 거칠은 음식을 먹고 짧은 베옷을 입은 것은 범 충선范忠宣(송宋나라 때의 범순인范純仁)을 본받았고, 만마萬馬가 나란히 달리다가 능히 발을 멈춘 것은 왕 좌승王左丞을 본받았으며, 사우師友와 즐겨 사생死生을 함께 한 것은 윤 사인尹舍人(송나라 때 윤수尹洙)을 사모함이고, 7년을 남북으로 끌려다니면서도 지기志氣가 위축되지 않고 사사賜死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여일하게 밥을 먹은 것은 유 충정劉忠定(송나라 때의 유안세劉安世)과 부합하였는데, 이는 모두 공이 스스로 행한 것이나 묘소가 침구한 오랑캐들의 떼거리 속에서 무사한 것까지도 범 당감范唐鑑의 일과 다름이 없으니, 어쩌면 공은 천의天意에까지 능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세상에서 송宋나라 사람의 언행言行에 대하여 읽은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저 읽기만 하고 행하지 못하거나 혹 행해도 정성을 들여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분지일도 그들과 방불하지 못하였는데, 공과 같은 이는 능히 읽고 능히 행하였다고 말할 만하니, 성조聖朝의 명신名臣이 됨이 마땅하다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상산商山의 김씨는 중간에 침체沈滯하였다가, 공의 숙부 때부터 다시 높이 날기 시작하였으나, 한껏 날지 못하였음은 천운이 안정되지 못하였음일세. 공은 그분에게 수학하였으니 글도 배우고 행실도 배웠다네. 이에 문과에 적을 올려 내외직을 고루 잘 수행했는데, 가고 아니 가고를 위태로움과 편안함에 의하지 않았다네. 혼란한 때를 당하여 어머니(大妃)를 원수로 여겼는데, 나와 뜻을 같이한 분 있어 나도 모유謀猷를 고했는데, 기왕 죄를 같이 지었다면 벌이 어찌 다를 수 있을까? 선악善惡이 모두 입을 다물고 하졸들도 줄줄 눈물을 흘렸다네. 사나운 눈보라 자욱한 안개속을 남으로 갔다가 북으로 돌았지만, 철석鐵石 같은 간장肝膓에 수발鬚髮은 변함이 없었다네. 급기야 좋은 때를 만나니 빨리도 정초旌招하여, 공이 남쪽에서 오는데 난만하기 봉황의 의용儀容 같았고, 말 한필 천천히 걸어오는데 일만 사람 에워싸았도다. 혼조昏朝에서도 감히 했거늘 더구나 우리 성군聖君 시대에서랴? 일신 돌보지 않고 충성 다하니 치우침 없이 평탄히 지내며, 깊은 정성 거의 다하니 임금과 신하 모두 영화로웠으나, 임금이 성인이 아니었겠나만 일은 평탄치 않음이 있었다네. 두 선릉先陵 무너졌는데 종묘에는 풍악이 울리려 했지. 공은 한탄하며 말하기를 ‘어찌 옛날을 상고치 않는고? 방묘防墓가 무너지니 공자는 울었고, 선궁宣宮에 불이 나니 사흘 동안 노나라에서 곡했도다.’ 공이 이로써 말을 하니 정신廷臣들 모두 부끄러워했었지. 얼마 후엔 큰 적이 있어 따를 수 없는 일을 요구하니, 상하가 넋이 나가고 사세는 쑥대밭처럼 되었는데, 공은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를 들어줄 수 있겠는가? 천지의 상도常道와 의리가 있는 바에 그 누가 감히 망설일 것인가? 형초荊楚가 참람히 왕이라 일컫자 노魯나라에서 그들과 맹약한 것을, 성인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숨기고 ≪춘추春秋≫에 싣지 않았는데, 공이 이 대의를 설명하니 대법大法이 능히 밝혀졌다네. 공은 그 말을 하고서 바로 생을 마쳤는데, 정강靖康은 위태롭고 욕되었으나 원성元城은 더럽혀지지 않았다네. 처음부터 끝까지의 명절名節 갈수록 더욱 정결했는데, 어쩌면 공의 정직함을 신이 보증하고 이를 따름이었겠지. 내가 그 시대를 살펴보니 어진 이가 많기도 했는데, 비록 많기는 했다 해도 공과 견줄 이 아무도 없었나니, 공이 더불어 함께 할 이는 송나라의 선량善良들 뿐이라네. 나는 이 묘비에 새겨서 무궁토록 전해지게 하리로다.
Ⅳ. 김덕함 청백애민비金德諴 淸白愛民碑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리上里에 있다.
1629년(인조 7)에 여주목사를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김덕함을 기리기 위해 1630년(인조 8) 세웠다. 영월루 근린공원에 있으며 크기는 총높이 약 132㎝이고 비신은 높이 86㎝, 너비 60㎝, 두께 16㎝, 운수는 높이 46㎝, 너비 67㎝, 두께 23㎝이다. 방부운수方趺雲首 양식의 비석으로, 비신 앞면 중앙에 '목사牧使 김공덕함金公德諴 청백애민비淸白愛民碑', 왼쪽에 '숭정崇禎 삼년三年 사월四月 일립日立'이라 새겼다. 운수雲首는 구름무늬가 거칠게 새겨졌고 비문은 심하게 마모되었다.
지금도 경기도 여주에 가면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덕함의 청렴함을 기리는 비문이 있다. 당시 군청의 정문이었던 영월루 인근에 역대 여주목사들의 공덕비들이 있는데 이 중 유독 김덕함의 것만은 ‘청백애민비’라고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고을 수령으로서의 김덕함의 면모가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Ⅴ. 효성과 청빈 생활
김덕함은 형인 김덕겸과 더불어 검소하고 청빈한 삶으로 유명하다(이 1993). 형인 김덕겸은 먼저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담장도 없는 집에 살았다고 한다. 김덕함은 그보다 더 검소하게 살아 일곱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도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일곱 고을의 원님이라면 최소한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지만 그런 것을 포기했다.
당시에는 반드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아도 지방수령이 충분히 재물을 축적할 수단이 있었으니 바로 ‘존문存問’이었다. 한 고을의 원님이 부임하여 지방 세도가와 토호세력들에게 부임인사 편지를 보낸 것이 ‘존문’이었는데 이 존문을 받은 사람은 으레 선물을 들고 찾아가 답례를 했다고 한다.
김덕함은 남들 다 쓰는 존문도 한 장 쓰질 않아 지방 수령 생활을 하면서도 끼니를 굶는 날이 많았다. 주위에서 양식이 떨어진 것을 걱정하면 오히려 ‘만약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면 반드시 살 도리가 있게 마련이다’라며 태연자약하였다고 한다. 대신 그는 지방 세도가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고 당당하게 백성들을 보살필 수 있었으니 어딜 가나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김덕함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기도 했다.
사흘이 멀다하고 끼니를 걸러야 했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구 이유긴李惟侃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의 종을 빌려 줄 테니 그를 궁궐공사에 보내 일을 시키고 그 품삯으로 양식을 사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김덕함의 성품을 잘 아는 오랜 친구로서 최대한 배려를 한 셈인데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친구의 종을 빌려다 나라에 바치고 그 품삯으로 내 양식을 얻어먹는 일은 차마 못하겠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공과 사는 철저히 구별하고 자신이 직접 수고해 얻은 댓가가 아니면 절친한 친구의 것도 거저 받지 않으려는 무서운 원칙이다.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공직자로서의 청렴결백함의 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덕함을 진정으로 총애하고 아꼈던 이항복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어떤 나라일이건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김덕함과 장만, 그리고 이시발 이 셋 밖에 없다. 이 셋은 청렴할 뿐 아니라 옳은 일이 아니면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굽히지 않을 참된 선비들이다.”
1606년 3월 1일에 경기 암행어사 심집이 암행결과를 보고하다.
“장단부사 김덕함은 청고淸苦한 소신을 지켰으므로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랑하였습니다.”
Ⅵ. 유배생활
패비 문제가 제기 되자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항복 정홍익과 함께 義를 주장한 성옹은 혹독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 과정을 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성옹 김덕함은 1617년 12월 10일에 위리안치를 청하다. 합사하여 연계하기를,
“기자헌은 가장 먼저 흉측한 차자를 올려 그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는데, 성상께서는 부처付處하는 것으로 다스려 가벼운 법을 약간 적용하고 말았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는데 가벼운 법을 약간 적용하고 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기자헌의 죄는 저렇게 무거운데 성상께서 기자헌을 죄주는 정도는 이렇듯 가볍게 하셔서 매번 위리 안치시키는 것은 지나치다고 전교하시니, 신들은 실로 성상의 의도한 바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국시가 정해지지 않고 인심이 의구에 차 있는 날을 당하여 비록 우레와 같은 위엄으로 철퇴를 가하더라도 오히려 간사한 논의가 들고 일어남에 따라 대의大義가 밝혀지지 못할까 우려되는데, 더구나 가벼운 법을 흉악한 역적의 괴수에게 그릇 적용하고 계시니 그러고도 대의를 밝히고 큰일을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기자헌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채 역적의 괴수를 옹호하였으니 신들이 주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헌 자신이 스스로 주벌을 받는 것이며, 종묘사직에 죄를 지어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고 있으니 성상께서 주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명과 사람들이 주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에 해당하는 법으로 논한다면 주벌을 가하고 육형을 가하더라도 오히려 그 죄에 해당하는 처벌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이 위리 안치시키는 정도의 말감末減을 성상께서는 무슨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오래 끌고 계십니까. 청컨대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신들이 삼가 이항복과 정홍익 등의 수의收議한 내용을 보건대, 우순虞舜이 변란에 대처한 도리를 인용하여 말하였습니다. 우순의 경우는 인륜상의 극치이므로 진실로 법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오늘날의 일과 비교한다면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의 우순은 일개 개인이었으므로 비록 사나운 어미에게 침해를 당했더라도 이는 재앙이 한 몸에 그칠 뿐이었으며 우순이 자식된 직분을 다한 것도 우순이 우순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왕帝王은 종묘 사직과 신민의 부탁을 받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화변을 만나게 되면 종묘 사직과 신민에게 그 화변이 미치게 되기 때문에 제왕이 변란에 대처하는 도리는 일개 개인이 하는 것처럼 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설령 순이 이미 왕위에 있는 상황에서 사나운 어미가 순에게 이와 같이 침해하였다면 순이야 비록 어미로 대한다 하더라도 순의 신하들의 처지에서 순이 침해당하는 것을 뻔히 바라만 보고 사나운 어미의 죄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살인은 미미한 죄인데도 고요皐陶는 오히려 고수瞽瞍를 잡아 가둘 것이며 그러는 고요를 순은 말리지 못하고 단지 몰래 엎고서 도망칠 계획만 세울 것이라고 하였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로 처리하고 어미와 자식 사이에는 은혜로 대처하는 도리가 어찌 크게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고와 저주를 자행한 변고가 발각되었고 역모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만일 흉악한 음모가 그 당시에 이루어졌더라면 성상께서는 어떠한 처지에 있게 되었겠으며 종묘 사직과 신민들의 화는 어떠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서궁을 몰래 엎고 도망갈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상의 신하 된 자들이 유독 고요가 집행한 것처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묘당에서 수의한 것은 단지 신하들이 대처해야 할 도리를 가지고 서로 의논해서 절충할 논의를 물으려는 것뿐으로 성상은 그 사이에 조금도 간여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항복과 정홍익 등은 묘당의 물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감히 위협하는 말로 마치 성상에게 헌의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속셈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의리는 밝지 못하고 정론은 오랫동안 막혀 있었는데 어쩌다 다행스럽게도 재야에서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고 모든 백성들이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이는 신하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대의를 밝히고 큰일을 결정해서 종묘 사직을 안정시켜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항복과 정홍익은 뜻을 얻지 못하여 임금을 원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회를 틈타 손뼉을 치면서 감히 역적을 편들 계획을 하면서 장황하게 비유를 끌어대고 참여한 바 없는 전하까지 언급하여서 기어이 대악大惡의 이름에 빠져들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역적을 비호하고 복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원수를 잊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기자헌보다 심합니다. 이항복이 수의한 내용 중에 이른바 ‘급伋의 처는 백白의 어미이다.’라는 말에 있어서는 더욱 통분함을 느낍니다. 어찌 신하된 자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임금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가 대신 죽는다는 옛사람의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이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차마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덕함金德諴은 이항복·정홍익과 한 뜻이라고 말해 그 마음이 같았고 보면 그 죄를 다르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니, 이항복·정홍익·김덕함 등을 아울러 절도絶島에다 위리 안치시켜서 신민들의 분한 마음을 씻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이항복은 관작만 삭탈하고 정홍익과 김덕함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617년 12월 10일에는 공홍도 진사 최상질崔尙質 등이 상소하였는데(조 1617), 그 대개는 서궁에 실시하는 분조分朝·조알朝謁·공헌貢獻 등의 일을 철거하고, 속히 기자헌·이항복·정홍익·김덕함 등을 참형에 처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라는 것이었다.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또 1617년 12월 10일에는 옥당이 차자를 올렸다(조 1617). 그 대개에 이르기를,
“기자헌·이항복·정홍익·김덕함은 모두 그 죄가 같습니다. 그런데 위리 안치하는 벌을 단지 소원疎遠하고 미천微賤한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귀근貴近한 신하에게는 집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난신적자를 징계시키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론을 흔쾌히 따라서 분개하는 여론을 씻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죄를 정하였으니,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1617 12월 11일에는 유학 박몽준朴夢俊이 상소(조 1617)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서궁은 국가의 화근입니다. 속히 그를 처치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패망하게 될 염려가 곧 닥쳐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은 지난 가을 사이에 대략 중국에 정청呈請하는 일을 가지고 전하에게 진달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서 지레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남도 지방에 있으면서 본도의 인심을 살펴보니 모두 들뜬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정온鄭蘊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정구鄭逑와 정경세鄭經世 등의 무리들이 유생의 상소가 올려졌다는 말을 얼핏 듣고서 모두 말하기를 ‘인륜상의 변고는 극력 논쟁해서 그 논의를 막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습니다. 열읍의 유생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인심을 들뜨게 만들고 있으니, 그 형세가 마지막에는 변란을 불러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좌상 정인홍이 비록 도내에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진압해 내지 못할 것 같아 신은 삼가 민망한 생각만 들 뿐입니다.
대체로 영남 지방의 인심이 변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것은 신이 눈으로 본 바이고 서울 사람들이 의구에 차 있다는 것은 신이 귀로 들은 바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주상의 위급함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침묵만 지키고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계십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신하들의 마음이 각각 다릅니다. 소북小北은 서궁이 결국에 가서는 화근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여 대북大北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인南人들은 모두 교활한 무리들로서 누가 성공하고 실패하는가를 앉아서 바라보면서 은밀히 서인西人과 한 패가 되고 있으며, 서인들은 줄곧 서궁에게 마음을 돌려 기어코 그를 보호함으로써 후일의 부귀를 누릴 터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시험삼아 오늘 수의收議한 내용을 가지고 보건대, 이항복은 김제남 무리의 괴수로서 임금을 모욕하는 말을 가장 먼저 하였고, 정홍익은 남인으로 서인에게 붙은 자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괴이한 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김권·오윤겸·김덕함 등의 무리들은 모두 서인으로서 그 논의에 부화뇌동한 정상이 이미 드러나고 반역을 꾀한 정상이 분명한데 이런 자들을 엄한 벌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 인심을 감복시켜 국시國是를 결정하겠으며, 화변의 불씨를 막아 임금의 위엄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기자헌이 가장 먼저 흉측한 차자를 올린 것은 서인들이 부추겨줄 것을 믿고 감히 임금을 저버릴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가장 알맞은 계책으로는 이항복과 기자헌 등을 참형에 처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왕법을 바로잡고 속히 대신을 불러들여 조정 신하들의 의견을 수합한 것을 보여 준 다음 즉시 서궁의 지위를 폄삭시킨다면, 정구와 정경세의 무리가 비록 변란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더라도 화근이 이미 제거되면 흉계도 제거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감히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신에게는 드릴 말씀이 또 있습니다. 서궁의 일을 단지 폄삭만 가한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막된 무리들이 감히 부추기고 옹호할 계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대의로 결단하여 화근을 영원히 근절시킨다면 누가 감히 이론을 제기하여 여기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호씨胡氏는 무후武后를 논의하면서 말하기를 ‘대신이 역적의 우두머리를 태묘에서 수죄하고 참형에 처하되 중종中宗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이 말을 특별히 《강목綱目》에다 실었습니다. 지금 서궁의 악에 대해 성균관 유생이 수죄한 열 가지 죄는 무씨의 아홉 가지 죄악보다 더 심합니다. 만약 이에 근거하여 거행한다면 의리에 부합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상소를 묘당에 내려서 변란을 대처하게 함으로써 화변의 불씨를 방지하소서.”
하니,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더디어 1617년 12월 11일에 남해南海에 위리 안치하였다. 그리고 5일 뒤 12월 16일에 “죄인 정홍익과 김덕함을 북도로 고쳐 정배하라.”하였으며 1617 12월 16일에 김덕함을 명천明川으로 다시 바꾸어 유배시켰다. 12월 18일에는 양사가 합계하기를,
“기자헌·이항복·정홍익·김덕함은 모두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배반한 사람들로 하늘에 사무친 죄는 극형에 처하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북도에 귀양보내는 것도 오히려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므로 의금부에서 귀양지를 정할 때에 응당 절도에 정배해야 할 것인데, 감히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 국법을 무시하고 모두 내지內地의 편리한 곳을 골라 정하였으므로 물정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이번 논의에 참여한 당상관과 낭청을 모두 파직하고 네 역적을 먼곳으로 귀양보내서 역적을 토벌하는 법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금부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12월 21일에 김덕함을 온성穩城으로 바꾸어 정배하였다. 1618년 8월에는 후금이 명나라를 침범하면서 변방요새에 우려할만한 사태가 많이 발생하여 김덕함을 사천으로 이배시켰다.
그 당시에는 適所로 가는 流配者는 누구나 가족을 동반할수 있게 되어있지만 公께서는 먼 곳으로 좇겨가는 죄인으로써 가족과 동거하거나 동반하는것은 수치스러은 일이니 圍籬罪人은 옥중에서 가족과 같이 살거나 가족을 데리고 갈수없다 라고 홀로 配所로 떠났다그 다음 해 1619년 부인이 가족을 데리고 도착하자 다른집에 별거 하도록 하고 어언 5년이 흘러 1623년 3월21일 유배가 풀린 후에야 비로소 부인을 만나니 그동안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 절개는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이배의 심정을 시 한수로 남겼다.
이사천시증인移泗川時贈人
시양사우밀계탁이의여로교통時兩司又密啓託以疑與虜交通
이위신졸 귀유원爾爲信卒 歸柔遠
아작의신 부작천我作疑臣 赴泗川
독서성현 하소사書讀聖賢 何所事
당년한불 습과연當年恨不 習戈鋋
Ⅶ. 복권
인조반정이 이러난 후 1623년 3월 16일에 김덕함金德諴을 집의로 삼았다. 덕함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청렴 결백하였는데, 미천한 가문에서 입신하여 명류들의 추중을 받았다. 무오년 국모의 폐위를 수의收議 할 때 “임금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이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과 동일하다.”고 대답하여 흉도들이 몹시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북변北邊에 유배되고 이어 남황南荒으로 이배되었다. 이에 이르러 맨 먼저 헌직憲職으로 불러들였다.
1623년 4월 19일에는 집의 김덕함金德諴이 이조 참판 이귀李貴와 상피해야 되는 관계에 있는데도 제수되었다는 이유로 본직을 인피하였다. 대사헌 오윤겸吳允謙, 장령 이명준李命俊 등이 아뢰기를,
“상피하는 법은 본디 금석과 같은 상규입니다. 그러나 시대 상황이 다급한 나머지 인재를 거두어쓰기에도 급급한 형편인데, 어느 겨를에 상피하는 혐의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겠습니까. 김덕함을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피하는 법은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도 폐할 수 없다. 다시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윤겸 등이 처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신천익愼天翊이 아뢰기를,
“김덕함은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당시에 우뚝하게 절개를 지켰으니, 참으로 세상에서 얻기 힘든 인재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상규에 구애된 나머지 방치해 두고 쓰지 않는다면 어찌 맑은 조정의 일대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상피하는 법이 나라의 법전에 엄연히 실려 있고 게다가 이 대관臺官이라는 직책은 실로 보통 관직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형세상 그대로 있기는 어렵습니다. 당초에 출사를 청했던 의도가 인재를 아끼려는 데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법이 한 번 흔들리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처치를 잘못한 실수가 없지 않으니, 오윤겸·김덕함·이명준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다음날 특명으로 오윤겸을 대사헌으로, 김덕함을 집의로, 이명준을 장령으로 다시 삼았다. 1623년 10월 29일에는 김덕함을 예조 참으로 삼았다. 그리고 1624년 4월 16일에는 김덕함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1624년 6월 6일에는 상이 인경궁仁慶宮의 재목과 기와를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집에 하사하라고 호조에 하교하자, 우부승지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호조의 계사에 따라 영건營建에 쓰고 남은 재목과 기와 중에서 2백 칸을 짓는 데에 드는 물량을 공주의 집에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재목과 기와는 다 민력民力과 민원民怨에서 나왔으니, 성상께서 이 재목 하나를 보면 이 백성의 고혈膏血이라 생각하시고 이 기와 하나를 보면 침학侵虐하는 불꽃이 구운 것이라 생각하시어 써야 할 데에 쓰고 쓰지 말아야 할 데에는 쓰지 않아야 하실 것입니다.
자전께서 여러 해 동안 유폐幽閉되신 나머지 집안이 다 없어지고 하나 있는 대군大君마저 피를 흘리게 되어 복위復位하신 처음에 공주만 남아 있을 뿐이니 자전께서 공주를 위해 주려는 심정이 지극하실 것이고, 성상께서도 자전을 위로하시려는 마음에 무엇이든 못하실 일이 없으실 것입니다. 공주에게 집이 없다면 이 재목과 기와를 덜어서 집 한 채를 지어 공주를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도 혹 한 방도이겠으나, 지금은 국가에서 공주의 집을 지어 주고 이미 길례吉禮를 치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제도가 넓고 크다고 식자들이 말하고 있는 형편인데, 2백 칸의 집을 지어 어디에 쓸 것이기에 이 재목과 기와를 마치 대수롭지 않은 물건처럼 내리십니까.
창덕昌德·창경昌慶 두 대궐은 열성列聖께서 계시던 곳인데 무너진 데가 있어도 수리하지 못하였으므로 성상께서 지금 계시지 않아야 할 궁궐에 계시니, 이 재목과 기와를 저축하였다가 두 대궐에 쓰고 이어移御하신다면, 중수重修할 때에 민력이 들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호조가 이에 의거하여 막지 못하였으니, 너무도 살피지 못했다 하겠는데, 신이 해방 승지該房承旨로서 흐릿하게 입계入啓하였습니다.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공주의 집이 좁고 누추하니 집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대의 말이 지나치다. 그대는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김덕함이 정원에 있으면서 비하批下에 대하여 봉환封還한 것이 많았다.
1624년 6월 24일에 우부승지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성교聖敎를 보건대 신의 어리석은 말은 지나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양사의 상소는 경직되었다 하여 윤허하지 않으셨으며 해조가 아뢴 말도 빈말로 돌아갔습니다. 임금을 도리로 섬긴 옛사람은 사리에 온당하지 못하면 혹 글을 봉환封還하고 혹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옳지 않다고 아뢰었는데 도로 성교를 받는다면, 이는 간사한 것입니다. 소신을 물리친 뒤에 다시 제급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목과 기와를 제급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닌 듯한데 이처럼 번거롭게 하니, 매우 그르다. 그대는 우선 이 문제를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1624년 7월 3일에는 충청 감사 이명준李命俊이 치계하기를,
“은진恩津·임천林川의 이생지泥生地에 폐 동궁廢東宮이 입안立案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훈부勳府에 소속시켰고, 목천木川·서산瑞山 등에 있던 역적의 집 전장田庄도 떼어 받은 것이 있습니다. 갖가지로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이 과거와 다를 것이 없으니, 아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10년 동안만 우선 멈추소서.”
하였는데, 충훈부忠勳府에 계하啓下하였다. 충훈부가 회계하기를,
“조종 때부터 훈신勳臣을 우대하여 파시평波市坪의 어세魚稅를 내려 주는 특별한 은수恩數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번에 죄인의 전장을 본부에 내렸으면 호조가 법에 따라 그 요부徭賦를 줄이기만 하면 될 것인데, 무슨 폐단을 끼칠 일이 있겠습니까.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이어 이생지에는 둔屯을 설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승지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과거 백성을 괴롭히는 정사가 본디 한 가지가 아니었으나 둔을 설치하는 폐단보다 심한 것이 없었으므로 성명이 임어하시고 나서는 일체 금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제도 옛 버릇이 남아 있으므로 이명준이 이 폐단을 환히 알고 이렇게 아뢰었는데도, 훈부는 도리어 쓸데없는 말을 하며 막았습니다. 죄인의 전지田地는 본디 속공屬公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또 죄다 권간權奸의 물건도 아닙니다. 혹 교활한 종이 멋대로 침해하며 빼앗아 둔을 설치하거나 간사한 백성이 부세賦稅를 피하고는 성적成籍하였다고 핑계합니다. 이제 백성은 실망하고 간활奸猾한 자는 기염을 토하니 반드시 과거처럼 되고야 말 것입니다. 장차 국가는 백성에게 원망을 받고 하인들은 마침내 침탈하여 욕심을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니, 국가가 훈신을 우대하는 도리가 어찌 여기에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죄인의 전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죄다 빼앗은 물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명백히 주인이 있는 곳은 훈부가 이미 떼어 받았더라도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공정하게 살펴내어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1624년 7월 23일에 김덕함을 병조참의로 그리고 1624년 9월 16일에는 김덕함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1624년 10월 13일에는 흥정당興政堂에서 야대夜對하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참찬관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맹자》의 이 장章의 말은 ‘오직 이 마음을 확충하여 천하에 적용한다.’는 것인데, 후대 주자朱子의 주소注疏도 이런 뜻을 부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효종孝宗이 촛불을 들고 읽기까지 하였지만 끝내는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진덕수眞德秀 또한 송 이종宋理宗이 잘 다스려 보려고 하던 날 이 장을 진언하면서 말구末句에 이르러 말하기를 ‘성명께서 여기에 흥미를 느껴 깊이 완미玩味하면 천하의 더없는 다행이다.’ 하였는데, 이 역시 헛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린 효과가 구차하게 현상 유지에 그쳐 버리고 끝내 확충해 나가는 궁극의 공효를 보지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 세 가지의 말을 합하여 청명한 시간에 완미해 가신다면 정치를 잘 해 나가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대개 사단四端이란 말이 맹자에게서 나오기는 했지만, 규모가 모두 갖춰지고 절목節目이 분명하게 된 것은 주자 때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이 장의 요점은 본심本心을 올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 만일 확충하는 공력을 쏟기만 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존하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형세라는 뜻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덕함이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밤 천안天顔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으니 상께서 마땅히 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하문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하문하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침묵을 지키고 있겠습니까.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賈誼를 보고도 백성의 일을 묻지 않았고, 송 신종宋神宗이 소식蘇軾을 대하고서도 신법新法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을 두고 후세에서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새로 외방에서 왔으니 민간의 병폐를 반드시 듣고 보았을 것이다. 모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덕함이 아뢰기를,
“신이 서쪽에 갔을 적에 듣건대, 앞서 이시발李時發이 찬획사贊畫使로 있을 때 장정은 변방에 방수防戍시키고 노약자에게는 베를 거두었는데, 추수 뒤에 다시 베를 거두는 짓을 하여 1년에 세 번이나 거두는 폐해를 일으켰습니다. 도원수는 이런 폐단을 알면서 또한 처치한 일이 없었다고 하니, 변통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올해의 우박 피해는 예전에 없던 것으로서 곡식이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조수와 초목까지도 모두 결딴이 났습니다. 위에서는 하늘이 경고를 내리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애달프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교리 이윤우李潤雨가 아뢰기를,
“광해군光海君이 10여 년 동안 혹독하게 침탈할 적에 궁중宮中의 차인差人들이 각 고을에 횡행했던 것이 곧 첫째 가는 고질적인 폐단이었는데, 오늘날 다시 이런 일이 있으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듣건대 충훈부의 위임을 받은 차인들이 역마를 타고 횡행하며 기름진 전토田土를 탈취하고 부역에서 빠져나온 완악한 백성들을 모아 놓고는 충훈부의 둔전屯田이라고 이름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과거 국정을 어지럽혔던 대부大夫들의 전장田庄을 모두 여러 공신들에게 소속시키고 당시 약탈당한 물품들도 그대로 차지한 채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잘못된 폐습을 여전히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금단하라는 뜻으로 방백에게 유시하여 횡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본도에서 제대로 금단하지 못한 소치이다.”
하자, 김덕함이 아뢰기를,
“경아문京衙門의 차인差人들이 필시 기승을 부리는 까닭에 수령이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일테니 본도가 금단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이 뒤로는 차관差官을 보내지도 말고 소모召募하는 진鎭도 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윤우가 아뢰기를,
“정구鄭逑는 곧 신의 스승입니다. 학문상의 공부로 보면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무신년에 소장을 올려 인륜을 붙잡아 세우려 하다가 불행히도 죽어 오늘날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림이 모두 숭질崇秩에 추증되기를 기대했는데, 참판이었다고 하여 이번에 단지 판서로만 추증하였으므로 섭섭하게 여기는 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추증하였으니, 지금 다시 의논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1624년 11월 4일에는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패법號牌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호패법을 시행한다면 호적戶籍을 다시 만드는 일은 조금 지체해야 할 듯하다.”
하니, 특진관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호패에 대한 일은 전일에 이미 진달드렸습니다마는 반드시 이 법을 시행한 다음에야 나라 일을 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을 염려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사대부와 관직이 있는 사람이 차고 외방에서는 수령과 전 조관朝官이 차고 나서 그 다음에 역役이 있는 자들이 차는 식으로 점차 차게끔 하여 역이 없는 자는 자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니, 소란스럽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꺼번에 차게 하는 것과 점차로 차게 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군역軍役을 기피하기 때문에 폐조 때부터 시행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니, 김상용이 아뢰기를,
“잘 해 나가면 백성에게 편리하고 국가에도 이롭게 되겠지만, 못할 경우에는 백성에게도 해롭고 국가에도 병폐가 될 것이니, 일을 맡은 사람들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참찬관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지난 번 김공량金公諒을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신이 전식全湜과 본원本院에서 진달해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곧장 선왕조의 일을 지척指斥하지는 못하고 간단한 말로 조금 계사 가운데에 언급했던 것인데, 상께서 준엄한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으므로 신이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마음 속에 있는 뜻을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뿐이니, 어찌 편당하여 발언한 것이겠습니까. 스스로 생각건대 이 뒤로는 다시 조정에 설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저 나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어찌 준엄하게 분부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앞서 모 도독毛都督의 차관差官이 왔을 적에 전하께서 빈주賓主의 예로 좌석을 동서로 배치하였는데, 도독에게 있어선들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덕함이 아뢰기를,
“지난 번에 김상용과 함께 의논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강정講定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면 도독은 북쪽에 앉고 고관은 동쪽에 앉는데, 모자帽子를 쓴 차관이 왔을 때마저 빈주의 예로 대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 합니다. 선왕조에서는 이러한 사람은 접견하지도 않았으니, 이런 것들에 관한 예를 강정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안 감사나 접반사로 하여금 도독에게 말을 하게 하여 미리 강정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뒤에 예조가 아뢰기를,
“도독의 차관이 관직이 낮고 미미한 사람이라면 재신宰臣에게 접대하도록 해야겠습니다만, 일단 허락하여 접견한 것은 본디 선왕조에서 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람을 보내 예절을 강정하여 그전부터의 사례를 변경한다면 따로 다투게 되는 문제가 생길 듯 싶은데, 대신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626년 10월 26일에는 대사성 김덕함金德諴이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 많고 병이 심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 상장上章하여 충심으로 해직되기를 빌었는데도 성명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즉시 체척하지 않으시고 지극한 은지恩旨를 내리시어 ‘이처럼 사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성상의 은지를 읽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어도 감히 아까울 것이 없으니 신이 어찌 말을 꾸며서 하겠습니까. 다만 신은 이 직무에 있어서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니, 위로는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뭇사람의 비웃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공사간에 도움됨이 없고 염치廉恥가 제자리를 잃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삼가 숨김없이 말하여 성상의 윤허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 선비들이 금수禽獸가 되어서 공묘孔廟에 있는 처지로 국모國母의 죄목을 무함하여 따져서 팔도의 향교에다 통문通文을 했었으니, 그때 본관本館은 수선首善이 아닌 수악首惡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반정의 초기에 각기 자신이 범한 죄의 경중에 의거하여 벌을 정하였었으나, 몇 년도 채 안 되어 친분있는 사람들을 끌어대어 다투어 죄적罪籍에서 풀려났고, 지난해에는 60여 인을 한꺼번에 입계入啓해서 그들의 악을 씻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가 폐모廢母를 찬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신은 생도들에게 ‘다른 아문은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본관만은 인륜을 밝히는 곳이다. 지금의 선비는 비록 추급해서 그 자신을 주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명교名敎로써 주벌함이 지극히 엄정해야 하는데 거의가 풀려났으니, 너무나도 명륜당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고 하여 한 해가 다가도록 언급하였지만 선비들의 생각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부자 유친父子有親’이 어떠한 일인데 신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인륜을 침식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관館에는 장의掌議라는 직임이 있는데, 반드시 몸가짐이 엄정하고 말이 조리가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는 것으로, 춘추春秋의 석전釋奠 이후에 개차改差하는 것은 본래 유래가 있는 일입니다. 이 직임은 온 관내의 전체 유론儒論을 총괄하여 붕우간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조昏朝에 들어와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교체하고 하루나 한달 만에 개변하였으니 전도되고 경박스러워 선비의 기상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신은 전의 습속을 통렬히 징치하고, 금년 가을 석전 때에는 지난날 장의를 지낸 사람들에게 널리 묻고, 또 관의 옛 전례를 물어서 이후로는 석전제를 지낸 뒤에야 개차하여 사론士論의 체모를 소중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선비들이 신의 말을 썩은 흙을 버리듯이 팽개쳤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조聖朝가 임진년 이후로는 선비들을 고무 진작시키는 방도에도 마음쓸 겨를이 없었으니, 선비들이 과거를 보려는 의도가 없이 와서 성사聖師를 시위侍衛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원점圓點을 3백 점을 채워야 하는 것은 선비들이 좋아하지 않는데도 비중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견디면서 관에는 기거하지만 그 이외에 현관賢關을 보기를 여관 보듯이 하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원점의 수를 반만 채워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서 선비들을 성균관에 유치할 수 있는 방도로 삼았으니, 선성先聖을 시위하는 도리가 그토록 쇠퇴하였었습니다. 그런데 폐조廢朝 때에 와서는 선비들이 허위를 숭상하여, 과거 때가 되면 원점을 반을 채웠다는 공문公文을 아무런 부끄러운 빛도 없이 얻고자 도모하였고, 그렇게 하고는 진실한 선비처럼 행세하면서 떳떳이 고개를 들고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선비들의 기강이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신은 처음 본직에 제수되자 즉시 예조에 첩정하여 법번法典을 분명히 밝혀 널리 고유告諭하게 하고,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그리고 과장科場이나 시소試所에도 방을 붙여 알리고, 과장에 임해서는 원점을 계산하여 절반의 수효를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허위의 공문을 하나도 성첩成貼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생원·진사들이 응시하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인재人材가 팔리지 않고 물색物色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크게는 폐모론을 성균관에서 물리치지 못하였고, 작게는 장의掌議와 원점圓點에 관한 것을 아직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부끄러운 면목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마 차지하고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내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2백 년 이래로 열조列祖와 열종列宗이 선비를 배양하는 규범은 모두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도 구차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법이 오래 전해오면서 무너져서 선비를 배양하는 의리가 전혀 어두워져서 전결田結과 노비奴婢·어소魚蔬 등의 항목이 모두 아래 것들에게로 들어가 천례賤隷들은 현능賢能한 이들을 기르는 것으로 생활을 누리고, 선비들은 시정市井에서 구차히 마련한 것으로 식사를 합니다. 그간의 실정과 작태는 너무 비루하여 다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닭의 소리나 내고 개구멍으로 도둑질이나 하는 선비를 기르던 맹상군孟嘗君도 읍에서 받아들인 정세正稅를 가지고 먹였지 부정한 짓으로 마련한 것으로는 대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의의 나라에서 태학太學에다 국자國子를 모아놓고 주공周公·공자孔子의 경서를 읽고 주자朱子·정자程子를 본받도록 하면서 강포한 종들이 시정에서 이리저리 빼앗아온 것으로 먹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은 그 근본을 추궁하고 간 곳을 조사해서 긴중緊重한 4∼5건으로 억지로 등록謄錄을 만들어서 선비를 기르는 것으로 길러서 조종조의 아름다운 뜻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음흉하고 완악한 전복典僕들이 조신朝臣을 선동하고 항간에 소문을 퍼뜨려 참소하여 신을 내쫓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이 관문館門을 나올 때를 이용하여 비복婢僕들을 모아다가 곡哭을 하여 전송하도록 하여 상여를 보내듯이 하였으니, 이는 신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수법입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학궁學宮의 노복이 옛날에는 이러하지 않았는데, 이괄의 변란 때에는 대사성大司成 집을 때려 부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하니 신에게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이러한 처지에 이르렀으니 생각을 바꾸어 남을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병까지 위중합니다. 죽기 전에 이 직에서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감고 싶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이러한 실정을 살피시고, 신의 이러한 실제의 병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속히 신의 직을 갈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그대가 직무를 잘 보았음을 충분히 알겠다. 본래 관원이 되는 것은 원망을 맡는 것이다. 그대는 굳이 사직하지 말고 더욱 교훈을 더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사성 김덕함의 상소를 보니 본관本館의 하인들 소행이 매우 경악스럽다. 그중 주동자를 유사로 하여금 색출하여 가두고 다스리게 하여 악습을 엄히 개혁하도록 하라.”
하였다(조 1626).
1626년 10월 27일에는 상이 관유館儒들에게 하교하기를,
“선비에게는 임금과 스승과 아비를 목숨을 바쳐 섬겨야 하는 도리가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분의가 중한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서 사표師表로 정한 경우이겠는가. 대사성 김덕함은 혼조昏朝 때에 절조를 세워 강상綱常을 부식시켰고 경전經典에 밝아 고금을 잘 아니, 당세에 그만한 이가 드물어 나는 훌륭한 사유師儒를 얻었다고 여겼다. 여러 유생은 모두 성인의 경전을 배운 사람인데, 옛 규범을 본받지 않고 스승의 교훈을 따르지 않았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 이제 근신近臣을 보내 어온御醞으로 벌주를 내리니 너희는 받들도록 하라. 각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김덕함의 소장을 보니 관유들의 과실이 없지 않다. 승지를 보내서 나의 뜻을 전유傳諭하고 큰 잔으로 각기 한 잔씩 벌주를 마시게 하라.”
하였다(조 1626).
1627년 5월 27일에 이조 참의 김덕함金德諴이 상소하기를,
“신은 졸렬하기 짝이 없으므로 출세出世의 길에도 용맹스럽게 뛰쳐 나서지 못하였는데 이는 결코 신이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라 타고 난 자질이 그러합니다. 우리 나라의 붕당은 신이 태어난지 10년이 되던 해부터 시작되었는데, 신이 본조本朝에 선지 39년 동안 일찍이 한 번도 요직에 주의注擬된 적이 없었고 이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단지 자신의 본색本色만을 고수하여 그런 것이지 자연히 헐뜯거나 칭송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조정에 훌륭한 인재가 모이고 어진 신하들이 보필하는 때를 만났는데 쓸모없는 신을 버리지 않고 천조天曹 에서 청선淸選에 비의備擬 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한번 죄를 입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서입니다. 그러나 벼슬이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구차히 무릅쓰고 있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신하로서 스스로 헤아려야 할 일이고, 감당하지 못할 인물을 억지로 부리지 않는 것은 임금이 관리를 제대로 등용하는 것입니다. 신을 체직하시어 공사公私간에 다행스럽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본색本色이란 두 글자를 정원에 하문하고 나서 조사措辭가 설만하다 하여 상소문을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조 1626).
또 1627년 7월 7일에 대사간 김덕함이 아뢰기를,
“곡식을 바치고 관직에 제수되는 것은 진秦나라 때 비롯되어 한漢나라에 와서 극에 달했는데 최열崔烈이 사도司徒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돈 냄새(銅臭)가 난다” 고 혐오했습니다. “임진년 이후로 곡식을 바치고서 관직에 제수된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전혀 이들만으로 제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사에는 곡식을 모으고 곡식을 바치고 군사를 모집한 무리들을 모두 파격적으로 제수하였기 때문에 신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므로 단지 정사의 체모가 구차함을 논했던 것뿐입니다. 만약 일을 말한 자로 하여금 다시 알아내어 제거하게 한다면 사체를 손상함이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망령되이 한 말로 인하여 이런 뜻밖의 전교를 내리시게 하였으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여이징呂爾徵도 이로써 피혐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전후 승전을 받든 자들이 나의 친한 사람이 아닌데 지금 본원이 그들의 현부賢否도 모르면서 승전을 사용한 것만을 탓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뜻인가. 승전을 폐하고 오로지 분경하는 자들만 등용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1627년 7월 8일에는 헌부가 아뢰기를,
“대사간 김덕함, 헌납 여이징이 모두 피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납속·모병한 사람들이 모두 적임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처음 입사한 자들의 대다수가 성명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간원이 제거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는 곧 사로仕路를 깨끗이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일 뿐, 전하의 친한 사람이라 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누구 누구가 합당하지 않은 것을 알고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명께서 제거할 만한 자를 지명하게 하신 것도 단지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모든 사람이 오명을 쓰는 염려가 없게 하시려는 것뿐이고 애당초 몰아붙이려는 의사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629년 3월 3일에는 호조가, 수원 부사 이시백李時白, 여주 목사 김덕함金德諴, 남양 부사 이명한李明漢 등이 삼별수미三別收米를 수납하지 않은 데 대하여 치죄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나랏일은 생각지 않고 도리를 어겨가며 명예만 구하는 수령들이 빈번히 있으니, 내 실로 미워하는 바이다. 계사에 의하여 파출罷黜해야겠으나, 이러한 농사철에 모두 갈아 버리면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니, 우선 자급을 강등시키라.”
하였다.
1634년 윤8월 16일에는 부제학 김덕함金德諴이, 당하관이 권점圈點한 홍문록弘文錄에 끼지 못하였으므로 갑자기 수석首席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상소하니, 답하였다. “번거롭게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며 일을 살피라.”하였다.
1635년 3월 24일에는 대사헌 김덕함金德諴, 헌납 김경여金慶餘, 정언 심지한沈之漢, 집의 유성증兪省曾, 장령 송시길宋時吉, 지평 김원립金元立, 송희진宋希進 등이, 나만갑의 상소 중에 ‘양사가 발론하여 참봉을 파직시켰다.’느니, ‘재변을 숨겼다.’느니 하는 등의 말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옥당【옥당은 부제학 이식李植, 응교 심지원沈之源, 교리 조석윤趙錫胤, 수찬 강대수姜大遂였다.】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두 능의 재변이 아무리 빗물이 새어든 때문이라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 지경으로 무너졌다는 것은 역시 전에 없었던 재변입니다. 참봉의 보고가 비록 분명치 않은 듯하다 해도 이는 문서상의 작은 잘못에 지나지 않는데, 양사가 일제히 발론하여 파직을 논하기까지 하여 마치 잘못을 전적으로 그에게 돌리는 듯이 한 것은, 재변을 숨기려는 뜻은 없었다 해도, 너무 지나친 잘못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선왕의 능에 벼락이 떨어졌다면 이것이 바로 망극한 일이다. 신하된 자로서는 변고의 소식을 듣고 나서는 경황없이 울부짖어야 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의당 서로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나만갑은 혼자만이 언짢아 하며 대신의 봉심하고 와서 보고한 말을 놓고 대신들이 서로 덮어주며 재변을 숨기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그리고 본능 참봉의 첩보가 자세하지 않은데도 그 참혹한 재변의 가설을 선왕의 능침에다 함부로 끌어다 붙인 것은 그 죄가 매우 무겁다. 그럼에도 옥당은 그것은 하찮은 실수라고 말하는가 하면, 양사兩司가 참봉을 논핵한 것은 재변을 참봉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뜻이 조금도 없었음에도 잘못을 전부 참봉에게 돌리려 한다고 말하니, 그 뜻은 만갑의 말을 믿고 대신의 견해를 의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옥당의 처지는 너무도 어이없으니, 부제학 이식李植 이하를 모두 추고하여 한편으로는 부화뇌동하는 작태를 끊고 한편으로는 대신을 동요시키는 버릇을 막으라.”
하였는데, 양사가 관직에 나온 뒤, 이미 옥당으로부터 양사를 체직시키라는 계청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출사하라는 명을 받았다 해도 관직에는 있을 수 없다며,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고, 옥당 역시 처치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글발을 올려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635년 12월 8일에 정언 이해창이 아뢰기를,
“박동량朴東亮의 죄는 신이 낱낱이 들고 싶지도 않습니다마는 대체로 큰 죄인입니다. 반정反正의 초기에 선후先后(인목대비)가 살아 있고 여러 재상들이 살아 있었으니 어찌하여 죄를 논의하여 유배하던 그때 일제히 나서서 사실을 변명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선후가 돌아가시고 죄인이 이미 죽은 뒤에 와서야 그 아들의 상언으로 인하여 사실을 밝혀 주자는 뭇 의논이 있게 된 것입니까.
병조 판서 이홍주는 젊어서부터 노년까지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켜 오다가 기혈氣血이 쇠퇴한 뒤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안방安邦이 아비의 총명을 가리고 사사롭게 정권을 농락하여 인재 의망과 출세의 지속遲速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직접 본 것으로 말하면, 신의 일가一家에 서족 2인이 있었는데, 그들이 항상 관직을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다가 안방과 사귀어 결국 변방의 장수 자리를 얻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보면, 안방에게 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은 자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홍주는 작위爵位가 높지마는 무너져 가는 집 몇 칸뿐인데, 안방은 창기娼妓를 끼고 첩을 두었으며, 또 그 옆에 큰 집을 지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언관의 직책에 있어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곧 동량과 홍주의 일을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여 함께 그들의 죄목을 들추어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가부를 표시하지 않다가 간통의 내용을 동량과 혼인한 집에 급히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신이 못나서 이와 같은 일을 초래했으니, 빨리 체면해 주소서. ”
하였다. 사간 임광任絖, 헌납 윤구는 모두 배척을 받았다고 하여 피혐하고, 정언 김중일金重鎰은 간통에다 이미 ‘삼가 잘 알았다(謹悉)’고 썼으나 결국 의논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피혐하였다. 대사간 김덕함金德諴이 처치하기를,
“동량은 선조宣祖 때의 충신입니다. 그가 살았을 때 이미 사면의 은전을 받아 서울로 돌아옴을 허락받았으니, 그가 죽어서 사실을 밝혀 주는 것도 물론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묘당에서 의논을 드린 것이 현재 결정이 나지 않았고 보면 더구나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홍주는 조정에 나온 지 40년 동안에 마음은 물과 같고 몸은 하자가 없습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에도 그가 이기적이고 사랑에 빠졌다고 감히 지목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오늘에 있어서야 어찌 서자를 사랑하여 성명聖明을 저버리려고 했겠습니까.
해창이 젊은 나이로 과감히 말한 것은 가상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경솔하게 발언한 것은 신중히 하는 뜻이 없으며, 김중일 역시 그 의론에 삼가 잘 알았다는 말을 썼으니, 해창과 중일은 모두 체차시키고 임광·윤구는 모두 출사하라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636년 1월 10일에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한 언관이 신이 임금의 뜻을 미리 헤아려서 받들어 따르기만 한다고 완석完席에서 발론하였다고 하니, 신은 놀랍고 의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번에 이기발李起浡·송몽석宋夢錫이 대간이 되어 일을 논의함에 있어 마땅함을 잃었으므로 과연 대간직에 의망하지 않은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옛말에 ‘죄를 더 주고 싶으면 어찌 핑계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는데, 이 다음에는 장차 무엇으로써 죄를 더하려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빨리 신의 관직을 깎아 내어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실정 밖의 말을 서로 따질 필요가 없다.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정언 박종부朴宗阜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성구가 정사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상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을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만 취하려는 것입니다. 이성구는 계해년 이후부터 임금의 총애와 대우를 가장 많이 받고 있으나 아직 한 마디 말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한 가지 일도 볼 만한 것이 없었기에 신은 진실로 그 사람이 바른 도로 전하를 섬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음에 미쳐서는 또한 그 사람이 성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이 완석에서 발론하여 규핵을 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이 우선 논핵을 정지하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게 하려 하기에, 신이 감히 스스로의 의견만을 옳다고 여기지 않고 그들의 뜻에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성구가 상소한 말을 보니, 전혀 잘못한 바가 없는데도 신이 허위로 꾸며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만약 실지로 그런 말이었다면 신이 논핵한 바는 망령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허다한 과격한 말을 하여 대관과 서로 견주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또 실지로 그런 말이 있다면 비록 소진蘇秦·장의張儀 같은 변설의 재주가 있더라도 어찌 임금의 뜻을 미리 헤아려 순종하기만 한 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즉시 논계하지 않았으니 이미 나약하게 한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또 성구의 논척을 입었습니다. 빨리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김덕함金德諴, 사간 임광任絖, 헌납 윤구尹坵, 정언 권령權坽이 아뢰기를,
“일을 논하는 법은, 자세하고 신중함을 싫어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총재冢宰의 직책은 서관庶官과 동일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다시 알아보자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게 하자고 하기도 하자, 박종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논핵을 정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약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나약하게 한 잘못은 신들에게 해당됩니다.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박종부가 말을 듣자마자 규정하고자 한 것은 매우 간관의 체통을 얻은 것이며, 동료들의 의논을 듣고서 우선 논계를 하지 않은 것을 어찌 나약하였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김덕함 등이 다시 알아보고자 한 것은 신중하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뒤에 덕함 등이 서로 잇따라 사직하여 체직되자, 종부가 다시 이 일을 가지고 인피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체차시켰다.
1636년 10월 20일에는 상이 대신과 육경六卿, 삼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고 간난하고 불안하기가 날로 심하니, 밤낮으로 걱정되어 두려워하고 있으나 구제할 방법을 모르겠다. 대신들은 요즈음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겨울의 천둥과 성상星象의 경고는 실로 신처럼 불초한 사람이 태위台位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대부분 지난번 절개를 지킨 사람들인데 현인을 등용한 효험이 전혀 없으니, 이는 신하들의 죄가 아니라 내가 임금답지 못한 소치이다. 오늘은 나의 잘못을 듣기를 원한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때때로 희노喜怒가 과격하신 단점이 계시므로 간관諫官이 매번 성냄을 다스리는 공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옛사람도 ‘분한 생각을 막는 데 경각심 가지기를 산을 무너뜨리듯이 하라.’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의 총명은 하늘에서 타고나셨으나 간혹 조그만 일을 너무 자세히 살피시는 병이 있으시니, 정치에 해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정신을 지나치게 쓰시면 어찌 성체聖體에 손상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나의 병통을 바로 맞추었다. 더욱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민구가 아뢰기를,
“요즈음 연소한 사람들이, 오랑캐에게 사람을 보내는 일로써 과격한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전혀 없어서는 아니되는데 홍처후 등이 함께 준엄한 견책을 입었으니 몹시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사신을 보내는 것을 중지하도록 요청한 것 때문에 죄를 준 것이 아니다. 최명길은 원훈 중신인데 어떻게 크게 간특한 사람이라고 지척할 수 있는가. 조정에서는 예의를 지키고 사양하는 것으로 귀함을 삼는 것이다. 만약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반정 초에는 사람들이 모두 조정에 서기를 원했으나 지금은 식자識者들이 모두 벼슬에 뜻이 없으니, 한가하실 때 그렇게 된 까닭을 생각해 보소서.”
하였다.
1636년 12월 10일에 전 대사헌 김덕함金德諴이 죽었다. 덕함은 배천白川 사람으로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지조가 있었다. 광해조에 적신賊臣이 대비大妃를 폐할 음모를 꾸며 백관을 협박하여 헌의獻議하게 했을 때에 덕함은 홀로 항언抗言하며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과 동시에 귀양을 갔는데, 처음엔 북도北道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남예南裔로 옮겨졌으며, 반정 초에 집의로 소환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정이 청백리淸白吏를 뽑았는데, 덕함이 거기에 들어서 예例대로 일자一資를 받고 대사헌이 되었다가 죽었다. 그리고 왕조실록의 졸기에 수록되었다.
Ⅷ. 마무리글
우리의 삶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된다. 고달픈 삶도 있고 행복을 감지하면서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 속에서 생을 이어 가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면서 사회를 형성 발전 시켜 간다. 사회상을 어떠한 형식으로 체관諦觀하고 인생을 어떠한 형식으로 조형하던 간에 역사는 만들어 지게 되어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시간과 공간을 거치게 된다. 만남의 인연이 닿아 400여 년전 이 땅에 살다 가신 청백리 김덕함 대사헌을 알게 되고 소개 할 수 있어 참삶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환희의 열정이 솟구치는 감회를 가지게 되었다. 가진 것 없어도 바르게 산 조선시대의 청백리 성옹 김덕함 대사헌은 남이 따를 수 없는 정성의 도학자 였다. 誠을 다한 훌륭한 목민관이었다. 참다운 충성으로 임금을 받들고 항상 청백의 정신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실현하였다. 가정에서는 효행을 실천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인간성을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이 1993) 요즈음 주요 관직의 고관들의 부정과 비리가 들추어 져 세상이 혼탁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때에 옛 선현의 청백하고 겸허했던 삶의 이야기를 할수 있어 시의적절 했다고 생각한다.
청백리의 존귀한 가치를 인식하고 청백리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긍지를 가질만 하다. 역사를 형성해 온 한국의 정기는 청백리의 정신이 골수를 이루었다. 수분자족守分自足 할 줄 알고 겸손과 덕성 지켜온 사람이다. 또한 공인公人으로서 가질바 도리와 자기철학을 실천한 사람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어질게한 사람이 청백리이다.
<인용 및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42, 143, 191, 197권
조선왕조실록 광해일기 29, 86, 112, 118, 122권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 3, 5, 6, 7, 8, 14, 16, 17, 31, 33권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21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45권
청백리열전(상) 이용선 매일경제신문사 1993, 170 - 177
청백리열전 임용순 문학창조사 1993, 423 - 424
족보편람 한국민족사연구회 도서출판 청화 1989, 청백리록 163-166
보학편람 학국성씨사료연구원 1999, 441 -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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